United States Congressional Gold Medal 미합중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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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1776년 | 1777년 | 1779년 | 1781년 | |
조지 워싱턴 |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 소장 앤서니 웨인 | 사령관 헨리 리 3세 | 준장 대니얼 모건 | |
1781년 | 1787년 | 1800년 | 1805년 | 1813년 | |
소장 너새니얼 그린 | 존 폴 존스 | 대령 토머스 트럭스턴 |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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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년 | 1814년 | ||||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스 2세 대위 에드워드 매콜 |
대령 제임스 로렌스 |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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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 | 1814년, 1848년 | 1814년 | |||
대령 루이스 워링턴 | 대령 존스턴 블레이클리 | 소장 제이콥 브라운 | 소장 윈필드 스콧 |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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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 | 1815년 | 1816년 | |||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스 | 소장 알렉산더 마콤 | 소장 앤드루 잭슨 | 대령 찰스 스튜어트 | 대령 제임스 비들 | |
1818년 | 1835년 | 1846년, 1847년, 1848년 | 1847년 | 1854년 | |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
대령 조지 크로간 | 소장 재커리 테일러 |
소머스 호 장교 및 승무원 구출 |
중령 덩컨 잉그함 | |
1858년 | 1863년 | 1864년 | 1866년 | 1867년 | |
프레더릭 로즈 |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
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 조지 C. 스투퍼 |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 |
1867년 | 1871년 | 1873년 | 1874년, 1904년 | 1883년 | |
조지 피바디 | 조지 F. 로빈슨 | 대령 재러드 크랜달 그 외 | 존 혼 주니어 | 존 폭스 슬레이터 | |
1888년 | 1890년 | 1900년 | 1902년 | 1909년 | |
조셉 프랜시스 |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 중위 프랭크 H. 뉴컴 |
중위 데이비드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새뮤얼 J. 콜 박사 |
라이트 형제 | |
1912년 | 1914년 | 1915년 | 1928년 | ||
선장 아서 로스트론 | 폴 H. 크라이봄 그 외 |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스 무히카 |
찰스 린드버그 |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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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 1929년 | 1930년 | 1936년 | ||
토머스 에디슨 |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 | 소령 월터 리드 |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 링컨 엘즈워스 | |
1936년 | 1938년 | 1939년 | 1940년 | ||
조지 M. 코핸 |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
하워드 휴즈 | 목사 프랜시스 퀸 | 윌리엄 시넛 | |
1942년 | 1945년 | 1946년 | |||
롤런드 바우처 |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 준장 빌리 미첼 | |
1949년 | 1954년 | 1955년 | 1956년 | 1958년 | |
앨번 W. 바클리 | 어빙 벌린 | 조너스 소크 박사 | 남북 전쟁의 참전 용사 | 준장 하이먼 리코버 | |
1959년 | 1960년 | 1961년 | 1962년 | ||
로버트 고다드 | 로버트 프로스트 | 토머스 앤서니 둘리 3세 | 밥 호프 | 샘 레이번 | |
1962년 | 1968년 | 1969년 | 1973년 | 1977년 | |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 월트 디즈니 | 윈스턴 처칠 | 로베르토 클레멘테 | 매리언 앤더슨 | |
1978년 | 1979년 | ||||
중장 아이라 이커 | 로버트 F. 케네디 | 존 웨인 |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
휴버트 험프리 | |
1979년 | 1980년 | 1982년 | |||
미국 적십자사 | 케네스 테일러 |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팀 | 베아트릭스 여왕 | 대장 하이먼 리코버 | |
1982년 | 1983년 | ||||
프레드 워링 | 조 루이스 | 루이스 라머 | 레오 라이언 | 대니 토머스 | |
1984년 | 1985년 | ||||
해리 S. 트루먼 | 레이디 버드 존슨 | 엘리 비젤 | 로이 윌킨스 |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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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 1987년 | 1988년 | |||
네이선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
해리 차핀 | 에런 코플런드 | 메리 래스커 | 제시 오언스 | |
1988년 | 1990년 | 1991년 | |||
앤드루 와이어스 | 로런스 록펠러 | 대장 매튜 B. 리지웨이 | 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 대장 콜린 파월 | |
1994년 | 1996년 | 1997년 | |||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 |
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
프랭크 시나트라 | 마더 테레사 | 바르톨로메오스 1세 | |
1998년 | 1999년 | ||||
넬슨 만델라 | 리틀록 9인 |
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
로자 파크스 | 시어도어 헤스버그 | |
2000년 | |||||
존 오코너 | 찰스 M. 슐츠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
나바호족 코드 토커 | |
2002년 | 2003년 | ||||
대장 휴 셸턴 | 토니 블레어 | 재키 로빈슨 | 도러시 하이트 박사 |
조셉 디레인 해리 & 일라이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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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 2006년 | ||||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
터스키기 에어맨 | 달라이 라마 14세 | 바이런 넬슨 | 노먼 볼로그 박사 | |
2007년 | 2008년 | ||||
마이클 데바키 박사 | 아웅 산 수 치 | 콘스탄티노 브루미디 | 에드워드 윌리엄 브룩 3세 | 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 |
2009년 | 2010년 | ||||
여성 공군 군무원 조종사 |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
아널드 파머 | 무함마드 유누스 |
제100 보병대대 제442 보병연대 전투단 군사정보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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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 2012년 | 2013년 | |||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전우회 | 9.11 테러 참사 사망자 | 라울 발렌베리 |
애디 메이 콜린스 데니스 맥네어 캐럴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
제1 특수임무단 | |
2014년 | |||||
둘리틀 특공대 멤버 | 미국의 공군 에이스 |
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 |
시몬 페레스 | 모뉴먼츠 맨 | |
2014년 | 2015년 | 2016년 | |||
제65 보병연대 | 잭 니클라우스 | 셀마 몽고메리 행진 |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 | OSS | |
2017년 | 2018년 | ||||
밥 돌 | 래리 도비 |
제2차 세계 대전 중국계 미국인 참전 용사 |
USS 인디애나폴리스 승무원 | 안와르 사다트 | |
2019년 | |||||
스티브 글리슨 | 캐서린 존슨 | 크리스틴 다든 | 도로시 본 | 메리 잭슨 | |
2019년 | 2020년 | 2021년 | |||
무명의 수여자들 | 그렉 르몬드 |
미국 국회의사당 경찰 워싱턴 광역 경찰국 소속 경찰관 |
제369 보병연대 |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전사한 13명의 장병 | |
2022년 | 2023년 | ||||
미 육군 제23부대 본부 특수부대 제3133 신호 복무 중대 |
제6888 중앙우편대대 |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상선 선원 |
에밋 틸 메이미 틸모블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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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 로빈슨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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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전 구단 영구결번 | |
No.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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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양키스 모뉴먼트 파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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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 헌액자 | |
재키 로빈슨 | |
헌액 연도 | 1962년 |
헌액 방식 | 기자단(BBWAA) 투표 |
투표 결과 | 77.50% (1회) |
재키 로빈슨의 주요 수훈 /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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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익명의 알코올중독자들의 설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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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D700> 메이저 리그 올센추리 팀 일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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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D700> 이름 |
<colcolor=#FFD700> 재키 로빈슨 Jackie Robins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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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2루수 | |||||||||||||||||||||||||||||||||||||||||||||||||||||||||||||||||||||||||||||||||||||||||||||||||||||||||||||||||||||||||||||||||||||||||||||||||||||||||||||||||||||||||||||||||||||||
득표수 | 788,116 | }}} |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
1955 |
1949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MVP | ||||
스탠 뮤지얼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 |
재키 로빈슨 ( 브루클린 다저스) |
→ |
짐 콘스탄티 ( 필라델피아 필리스) |
1947년 첫 수상 | → |
재키 로빈슨 ( 브루클린 다저스) |
→ |
앨빈 다크 ( 보스턴 브레이브스) |
브루클린 다저스 등번호 42번 | ||||
조지 제프코트 (1939) |
→ |
재키 로빈슨 (1947~1956) |
→ |
레이 램 (1969) |
레이 램 (1969) |
→ | 재키 로빈슨 | → | 영구결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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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No.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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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루스벨트 "재키" 로빈슨 Jack Roosevelt "Jackie" Robins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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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a9c><colcolor=#ffffff> 출생 | 1919년 1월 31일 |
조지아 주 카이로 | |
사망 | 1972년 10월 24일 (향년 53세) |
코네티컷 주 스탬퍼드 | |
학력 | 뮤어 테크니컬 - 파사데나 시티 대학교 - UCLA |
병역 | 미합중국 육군 중위 전역[2] |
1942년 ~ 1944년 | |
신체 | 180.3cm, 92.5kg |
포지션 | 1루수[3] → 2루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45년 자유계약 ( BRO) |
소속팀 |
캔자스시티 모나크스 (1945 / 니그로리그) 몬트리올 로열스 (1946 / 인터내셔널리그)[4] 브루클린 다저스 (1947~1956 / MLB) |
종교 | 개신교( 감리회)[5] |
정당 |
(~19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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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늘날, 모든 미국인들은 재키 로빈슨에게 특별한 감사를 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Today, I think Every American should say a special word of thanks to Jackie Robinson.
1997년 4월 15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당시 영상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동했던 최초의
미국 흑인 야구선수.Today, I think Every American should say a special word of thanks to Jackie Robinson.
1997년 4월 15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당시 영상
1947년의 그의 데뷔는 미국이 민권법을 제정하기 16년 전이고, 선거 관련 법안을 제정하기 18년 전이었다.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20세기 미국에서 유색인종으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야구선수로 활약하며 스포츠계에서 흑인 인권 운동의 상징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야구선수를 은퇴하고 나서는 흑인 저소득층에게 집을 지어주기 위한 사업을 하는 등 흑인 인권 운동을 위해 헌신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메이저 리그 역사상 유일한 전 구단 영구결번 선수로 지정되었고 2003년 야구 선수로서는 두 번째로 의회 명예 황금 훈장을 수여받았다.[6]
2. 생애
2.1. 초기 생애
재키의 형 매튜 매킨지 '맥' 로빈슨도 1936 베를린 올림픽 육상 200m 은메달리스트 출신[7]일 정도로 체육인 유전자를 타고난 집안에서 태어났다. UCLA에 진학해 미식축구, 농구, 수영, 테니스, 육상 4개 종목에서 활약하며 모든 종류의 운동에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은근 저평가받는 부분인데 로빈슨은 역대 NCAA 최고의 운동선수로 꼽을 만한 대학 시절을 보냈다. 미식축구 선수로서는 1940년 팀에서 패싱, 러싱 야드와 득점 부문 선두를 기록하는 팀의 에이스였고, 멀리뛰기도 1940년 NCAA 대회를 우승하며 (올림픽이 취소되지만 않았더라도) 국대에 뽑힐만한 성적을 거두었다. 농구에서도 1940, 42년 컨퍼런스 득점왕에 오르는 등 그야말로 만능 스포츠맨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빈슨은 1940년 야구 시즌에 .097의 타율을 기록하는 등[8] 학창 시절에는 오히려 야구를 못 하는 축에 속했다. 타격은 형편없지만 스피드와 수비 능력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대학을 떠난 뒤에는 뉴 딜 시대 청년조직인 NYA(National Youth Administration)에서 체육진흥 업무를 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자 징집되었다. 흑인들로만 구성된 전차부대인 761 전차대대에 장교로 임관했지만, 역시 인종차별과 맞서다가[9] 전선에는 서지 못하고 758 전차대대로 전출된후 1941년 11월에 명예제대하였다. 군대를 나온 뒤 흑인대학 운동부 직원 등의 일을 하다 니그로리그 팀 캔자스시티 모나크스와 계약하며 본격적으로 야구계로 뛰어들게 되었다.[kakaotv(397538417)]
2.2. 메이저리그 활약
흑인 선수를 데뷔시키고자 했던 당시 브루클린 다저스 단장 브랜치 리키[10]에 의해 발탁되어 1947년 드디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데뷔하게 되었다.[11] 초기에는 빈볼의 위협에 타석에서 1루에 갈때마다 상대팀 1루수의 발길질에 시달려야했고, 수비할때도 1루로 달려오는 타자가 로빈슨의 발목을 공격하는 일도 수차례 있었으며,[12] 심판도 은근슬쩍 로빈슨에게 불리한 판정을 내리고,[13] 언론들도 로빈슨에게 호의적이지 않아 "검은 파괴자", "검은 타이 콥"이라는 식으로[14] 기사를 내보내고, 동료들로부터도 따돌림 당했지만, 피 위 리즈의 어깨동무 사건 이후[15] [16] 선수들은 물론 팬들도 그를 진심으로 포용하게 되었고, 마침내 메이저리그에 유색 인종들이 활약하는 역사적인 계기를 열었다는 것이 보통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단, 이후 공개된 인터뷰 등에서 피 위 리즈와의 어깨동무 일화가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으며, 관련 근거들도 꽤 신빙성이 있어 이 미담들에는 어느 정도의 각색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17] 또한 단순히 흑인이라고 비난만 받았던 것이 아니라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박수갈채를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고 하니, 어느 정도 감안해서 볼 여지가 있다.[18]
아무튼 이런 일화들과는 상관없이, 그는 흑인 인권 운동가로도 유명했으며, 여러모로 미국의 흑인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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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밴 채프먼과의 화해 장면[19] |
2.3. 은퇴와 생애 후반
브루클린 다저스 마지막 시즌에 로빈슨은 1형 당뇨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경기력도 전성기에 비하면 떨어져[20] 선수생활에 더이상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다만 말년에 후배 선수의 잠재력을 발굴했는데, 바로 샌디 코팩스 옹 되시겠다. 그는 코팩스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팀이 그를 중용하길 원했지만, 이 시기의 코팩스는 아직 재능이 개화하지 않은 선수였던지라 로빈슨은 당시 감독이었던 월터 앨스턴과 마찰을 자주 일으켰다고 한다. 아무튼 다저스는 경기력이 떨어진 로빈슨을 라이벌인 뉴욕 자이언츠로 트레이드 했지만 본인이 거부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후일 밝힌 내용에 따르면 이미 은퇴 2년 전에 1957년 시즌 후에 은퇴를 하고 커피 체인인 Chock full o'Nuts의 이사 자리에 취임하기로 해당 회사의 사장과 약속이 돼 있었다고 한다.은퇴 이후에는 사업을 하면서 흑인직원 고용, 직업 훈련 교육 지원 등 흑인 일자리 창출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특히 그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젊은 날 당했던 차별 때문에 흑인 인권 향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와도 교분이 있었다고 한다.
또 공화당원으로서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1957년 민권법 통과를 주도한 리처드 닉슨을 지지했고,[21] 린든 B. 존슨의 베트남 전쟁 정책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넬슨 록펠러 경선 캠프에서 일하기도 했으나 민권법을 반대한 배리 골드워터가 공화당 대선후보가 되자, 자신의 처지를 히틀러 치하 독일의 유대인에 비유하기도 했다. # 본선에서는 당연히 존슨을 지지했다.
그러나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이 남부 진출을 위해 스트롬 서먼드같은 인종차별주의 성향 남부 정치인과 정치적으로 연대하자, 로빈슨은 닉슨 지지를 거부하고 # 민주당 휴버트 험프리를 지지한다. 다만 닉슨 행정부 중에도 로빈슨은 인종 통합을 호소하는 편지를 대통령에게 보냈다. # 베트남 전쟁은 다른 미국 보수주의자들처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
말년에는 지병인 당뇨병으로 인해 망막에 이상이 생겨 눈이 거의 안 보이게 되었고, 비교적 이른 나이인 53세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재키 로빈슨이 생을 마감한 곳은 코네티컷의 스탬포드이다.
3. 플레이 스타일
도루 센스를 제외한 모든 툴이 상위권~최상위권인 5툴 플레이어로,[22] 2루수이면서 뛰어난 컨택과 압도적 선구안, 준수한 파워를 보여주는 등 상당한 타격 생산성을 기록했으며 수비와 주루 역시 매해 양수의 생산성을 보인 뛰어난 2루수이다.타격 성적은 통산 1382경기 5804타석에 나와 1518안타 137홈런 734타점 197도루를 기록했으며 비율스탯은 0.311/.409/.474 OPS .883,OPS+132 wRC+135 wOBA 406이다.
모든 툴이 골고루 우수하지만, 최고의 장점은 역시나 볼삼비. 선구안이 역대 손에 꼽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수준이라 통산 BB/K는 무려 2.54에 연평균 삼진이 30개도 되지 않는다. 이처럼 뛰어난 넘사벽급의 선구안과 컨택트를 과시했고, 커리어 초기에는 2번타자로 뛰었으며 후반에는 4번타자로도 뛰면서 도루왕 2회, 1949년 수위타자를 차지했다. 2루수로 맹활약하면서 신인상(1947)과 시즌 MVP(1949)도 수상했고, 팀의 내셔널리그 우승 및 월드시리즈 우승(1955)에도 기여하며 다저스의 뉴욕 시절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런 활약 덕분에 메이저리그 10년 간 fWAR 57.3, bWAR 61.8을 기록했다. 10년 동안 60 내외의 WAR를 기록했다는 것은 매 해 MVP 컨텐더급 활약을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로빈슨은 역대 센터 내야수의 단기 임팩트를 논할 때 반드시 언급되며, 세이버메트릭스가 퍼지고 나서 그 임팩트는 더욱 고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나 그가 1형 당뇨병을 앓았던 인물임을 생각하면 인종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거대한 장벽을 두 개나 넘고 최고의 선수로 올라선 인간승리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것이 당연할 정도이다.
조금 앞 세대 선수이자 임팩트 하면 유명한 선수인 뉴욕 라이벌 구단 레전드 조 디마지오가 13년간 WAR 83.1을 기록한 것으로 엄청난 칭송을 받는데, 로빈슨 역시 짧은 기간 선수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임팩트로는 디마지오에 절대 밀리지 않는다. 실제로 높은 타율에 비해 삼진이 적고 볼삼비가 극도로 우수했다는 유사성이 있으며,[23] 연평균 WAR에서 디마지오와 로빈슨은 차이가 거의 없다.[24] 거기다 현대의 마이크 트라웃과도 연평균 WAR이 거의 같다. 로이 캄파넬라, 피 위 리즈 등과 함께 브루클린 다저스를 상징하는 인물이자, 샌디 코팩스 이전 다저스의 임팩트형 레전드로 가장 먼저 꼽히는 선수.
역사상 가장 위대한 2루수를 꼽을 때 로빈슨은 부족한 누적에도 불구하고 5위 안에 무난히 들어간다. 그만큼 짧은 커리어 동안 보여준 퍼포먼스가 대단했다는 의미다. 훨씬 좋은 누적 성적을 기록한 명예의 전당 2루수들인 크레이그 비지오, 로베르토 알로마, 라인 샌드버그 보다도 높은 평가를 받고,[25] 로드 커류와 유사하다고 평가받는다. ESPN은 그를 조 모건보다도 위인 2위로 평가했다. 그 인종차별을 뚫고 메이저리그에 데뷔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훌륭한 실력이었다.
4. 연도별 성적
재키 로빈슨의 역대 MLB 기록[26] | ||||||||||||||||||
<rowcolor=#FFFFFF> 연도 | 팀 | G | PA | H | 2B | 3B | HR | R | RBI | SB | BB | SO | AVG | OBP | SLG | OPS | fWAR | bWAR |
1945 | KCM[27] | 34 | 137 | 45 | 13 | 1 | 4 | 25 | 27 | 3 | 16 | [-] | .375 | .449 | .600 | 1.049 | 2.6 | 2.1 |
<rowcolor=#FFFFFF> 연도 | 팀 | G | PA | H | 2B | 3B | HR | R | RBI | SB | BB | SO | AVG | OBP | SLG | OPS | fWAR | bWAR |
1947 | BRO | 151 | 701 | 175 | 31 | 5 | 12 | 125 | 48 | 29 | 74 | 36 | .297 | .383 | .427 | .810 | 3.5 | 4.1 |
1948 | 147 | 648 | 170 | 38 | 8 | 12 | 108 | 85 | 22 | 57 | 37 | .296 | .367 | .453 | .820 | 4.8 | 5.3 | |
1949 | 156 | 704 | 203 | 38 | 12 | 16 | 122 | 124 | 37 | 86 | 27 | .342 | .432 | .528 | .960 | 9.6 | 9.3 | |
1950 | 144 | 613 | 170 | 39 | 4 | 14 | 99 | 81 | 12 | 80 | 24 | .328 | .423 | .500 | .923 | 6.8 | 7.4 | |
1951 | 153 | 642 | 185 | 33 | 7 | 19 | 106 | 88 | 25 | 79 | 27 | .338 | .429 | .527 | .957 | 9.0 | 9.7 | |
1952 | 149 | 636 | 157 | 17 | 3 | 19 | 104 | 75 | 24 | 106 | 40 | .308 | .440 | .465 | .904 | 7.8 | 8.4 | |
1953 | 136 | 574 | 159 | 34 | 7 | 12 | 109 | 95 | 17 | 74 | 30 | .329 | .425 | .502 | .927 | 6.0 | 6.9 | |
1954 | 124 | 465 | 120 | 22 | 4 | 15 | 62 | 59 | 7 | 63 | 20 | .311 | .413 | .505 | .918 | 3.6 | 3.6 | |
1955 | 105 | 390 | 81 | 6 | 2 | 8 | 51 | 36 | 12 | 61 | 18 | .256 | .378 | .363 | .740 | 1.8 | 2.6 | |
1956 | 117 | 431 | 98 | 15 | 2 | 10 | 61 | 43 | 12 | 60 | 32 | .275 | .382 | .412 | .793 | 4.2 | 4.5 | |
<rowcolor=#000>
BRO 통산 (10시즌) |
1382 | 5804 | 1518 | 273 | 54 | 137 | 947 | 734 | 197 | 740 | 291 | .311 | .409 | .474 | .883 | 57.3 | 61.8 | |
<rowcolor=#000>
MLB 통산 (11시즌) |
1416 | 5941 | 1563 | 286 | 55 | 141 | 972 | 761 | 200 | 756 | 291 | .313 | .410 | .477 | .887 | 59.9 | 63.9 |
- 니그로리그 기록이 메이저리그의 역사로 인정되었으므로 니그로리그 기록이 포함되지만, 남아 있는 니그로리그 경기 기록이 부실하기 때문에 니그로리그 기록은 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기록만 반영되어 있다.
5. 명예의 전당 입성
명예의 전당에는 MLB의 모든 유색인종 선수의 시작점이라는 상징성과 그가 선수 생활 동안 보여준 실력으로 인해 명예의 전당 후보에 오른 첫 해에 77.5%의 득표로 입성했다.[29]5.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 그레이잉크 | HOF 모니터 | HOF 스탠다드 | |
재키 로빈슨 | 8 | 121 | 98 | 38 |
HOF 입성자 평균 | 27 | 144 | 100 | 50 |
- JAWS - Second Base (12th)
career WAR | 7yr-peak WAR | JAWS | |
재키 로빈슨 | 61.5 | 52.1 | 56.8 |
2루수 HOF 입성자 평균 | 69.4 | 44.5 | 56.9 |
6. 영구결번
후술된 재키 로빈슨 데이를 상징하는 앰블럼 |
단, 1997년 시즌 당시에 이미 42번을 달고 있던 선수는 예외적으로 42번을 계속해서 달 수 있도록 허용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 선수들 중 마지막까지 현역이었던 마리아노 리베라가 은퇴한 2013년 시즌 종료 후에야 전구단 영구결번이 완성되었다.
1997 시즌 MLB 전체 구단은 유니폼 소매에 재키 로빈슨 데뷔 50주년 기념 패치를 붙이고 시즌에 임했다. 상술됐듯, 로빈슨은 다저스의 연고지 이전을 강력히 반대했던지라 결국은 로스앤젤레스가 아닌 뉴욕 메츠의 셰이 스타디움에서 행사를 가졌다. 또한 미망인 레이첼 여사는 LA로 가버린 다저스보다는 '브루클린 다저스'의 역사를 잇고 있는 뉴욕 메츠에 더 마음이 간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실제로도 뉴욕 메츠는 '재키 로빈슨 재단'을 후원하고 있다고 한다.
모든 구단에서 영구결번된 선수로는 재키 로빈슨 외에 NHL의 웨인 그레츠키의 99번과 NBA의 빌 러셀의 6번이 있다.[32]
이외에도 로베르토 클레멘테를 전 구단 영구결번으로 올리자는 이야기가 2000년대 중반 논의되었으나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거부했다.
비슷하게, 아메리칸리그의 최초 흑인 선수였던 래리 도비[33]의 14번도 전구단 영구결번으로 올리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이것도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다. 대신 인디언스는 래리 도비의 날 행사를 매년 한다.
한편, 몬트리올 엑스포스는 재키 로빈슨의 등번호 42번이 전구단 영구결번 되기 전부터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는데, 로빈슨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기 전 마이너리그 팀인 몬트리얼 로열스에서 활약했기 때문이다.[34] 이 때문에 스타드 올랭피크 드 몽레알에 그의 동상이 있기도 하고,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옛 구장이 있던 파르크 자리(Parc Jarry) 근처에 그의 얼굴을 그린 그래피티가 있을 정도로 몬트리올 야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7. 재키 로빈슨 데이
원래 모든 선수들이 42번 저지를 입고 나오는 재키 로빈슨 데이의 아이디어가 나올 당시, 분위기는 굉장히 살벌했었다. 당시 한참 인종차별 협박에 시달리면서 경기에 나오던 재키 로빈슨이 "다음 경기에도 나오면 42번, 너 총으로 쏴버린다."는 정체불명의 살해협박을 받고 고통받을 때, 동료였던 외야수 진 허만스키(Gene Hermanski, 1920~2010)[35]가 우리가 모두 42번을 입으면 누군지 모르겠지? 라는 말로 농담을 하며 로빈슨을 격려해준 일화가 시작이었다.이후 수십년이 지난 2007년 켄 그리피 주니어가 4월 15일에 재키 로빈슨을 기리기 위해 42번 저지를 입는 것을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건의하여 실행했던 것부터 시작, 이후 각 팀의 흑인 선수 한 명에게 4월 15일 경기에 42번을 입고 뛰게 하도록 하다가 현재는 '재키 로빈슨 데이'로 지정, 이 날만은 모든 선수와 코칭 스탭, 그리고 심판까지 등번호 42번 저지를 입고 경기에 임한다.[36] 이 부분은 2015년 6월 28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참고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재키 로빈슨 데이 경기는 무조건 홈 경기로 배정된다.[37]
2020년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때문에 당초 재키 로빈슨 데이로 예정된 4월 15일에 리그 개막조차 하지 못하게 됐고 결국 8월 28일로 이 행사가 연기됐다. 공교롭게도 위스콘신 흑인 총격 사건으로 미국 내 인종차별에 대한 반발 감정이 극에 달하던 시점에[38] 재키 로빈슨 데이 행사가 열렸다.
8. 미디어 믹스
8.1. 영화
자세한 내용은 42(영화) 문서 참고하십시오.재키 로빈슨 역을 채드윅 보즈먼이 맡았다. 그래서 유튜브에서는 로빈슨의 손자가 블랙 팬서라는 농담이 나돌기도 한다.
9. 여담
-"내가 재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상대팀 1루수였어. 그날 내가 안타를 치고 달리면서 일부러 그의 발목을 피가 나도록 밟아버렸지. 당시 그가 아무런 보복행위를 할 수 없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걸 악용한 셈이야.[39] 쓰러져 있는 그를 거만한 표정으로 내려다 보며 실실 웃었어. 2년 뒤 에베츠 필드에서[40] 2루까지 달렸는데, 거기에 있던 로빈슨이 공을 잡아 내 입에 냅다 내려 꽂더군. 그때 이빨이 4개나 부러져서 사방천지에 피를 토하고 있는데 놈이 내 눈을 쳐다보며, "난 절대로 잊지 않아"라고 하더군. 난 그때부터 평생 그 대단한 개X끼를 존경했고.[41]
- 에노스 슬로터, 前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우익수, 명예의 전당 헌액자
- 에노스 슬로터, 前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우익수, 명예의 전당 헌액자
- 한 성깔 했던 모양이다.
[kakaotv(397504968)]
- 포스트시즌에 약했다. 정규리그 통산 타율은 .311에 달하지만 포스트시즌 통산 타율은 .234에 그쳤다.
- 2024년 1월 27일 동상이 도둑맞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발목이 절단된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31일에 불에 탄 상태로 발견되었다. 결국 범인들 중 한 명이 잡혔는데, 수사 결과 금전적 이득을 보기 위해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10. 둘러보기 틀
Major League Baseball No.42 | |||||||||||||||||||||||||||||||||||||||||||||||||||||||||||||||||||||||||||||||||||||||||||||||||||||||||||||||||||||||||||||||||||||||||||||||||||||||||||||||||||||||||||||||||||||||||||||||||||||||||||||||||||||||||||||||||||||||||||||||||||||||||||||||||||||||||||||||||||||||||||||||||||||||||||||||||||||||||||||||||||||||||||||||||||||||||||||||||||||||||||||||||||||||||||||||||||||||||||||||||||||||||||||||||||||||||||||||||||||||||||||||||||||||||||||||||||||||||||||||||||||||||||||||||||||||||||||||||||||||||||||||||||||||||||||||||||||||||||||||||||||||||||||||||||||||||||||||||||||||||||||||||||||||||||||||||||||||||||||||||||||||||||||||||||||||||||||||||||||||||||||||||||||||||||||||||||||
|
MLB 구단별 첫 흑인 선수 | |||||||
재키 로빈슨 (1947.4.15) |
래리 도비 (1947.7.5) |
행크 톰슨 (1947.7.17) |
행크 톰슨 몬테 어빈 (1949.7.8) |
샘 제스로 (1950.4.18) |
미니 미뇨소 (1951.5.1) |
밥 트라이스 (1953.9.13) |
어니 뱅크스 (1953.9.17) |
커트 로버츠 (1954.4.13) |
톰 앨스턴 (1954.4.13) |
니노 에스칼레라 척 하몬 (1954.4.17) |
카를로스 파울라 (1954.9.6) |
엘스턴 하워드 (1955.4.14) |
존 케네디 (1957.4.22) |
아지 버질 시니어 (1958.6.6) |
펌프시 그린 (1959.7.21) |
[1]
단,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양해를 구한 후 2006년
명예의 전당에 13수만에 입성한
브루스 수터의 등번호 42번을 재키 로빈슨과 함께 공동 영구결번 처리를 하였다. 이후
뉴욕 양키스 역시 2013년 은퇴를 선언한
마리아노 리베라의 등번호 42번을 공동 영구결번 처리를 하였다. 이로써 메이저리그 역사상 42번 영구결번의 주인공은 단 세 명뿐이다.
[2]
제761전차대대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1942년 육군 장교로 지원했으나, 흑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복싱 헤비급 챔피언인
조 루이스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루이스의 도움으로 입대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입대를 하였으나, 군복무 중 버스에서 흑인 좌석으로 가는 걸 거부해서 군법회의에 소환되기도 하였으며, 상습적으로 인종차별을 했던 동료 백인 장교와 싸우다 불명예제대를 당할 뻔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은 군생활을 보냈다. 그래도 군복무 기간동안 장교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고 한다.
#
[3]
루키 시절
[4]
메이저리그로 본격 데뷔하기 전 브랜치 리키 다저스 단장이 인종차별이 덜한 몬트리올 로열스로 보냈다. 이런 인연으로
몬트리올 엑스포스는 1997년 이전에 이미 42번을 구단
영구결번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5]
#
[6]
재키 로빈슨은 1972년 타계하여 유가족들이 대신 훈장 수여식에 참석하였다. 첫 번째는 1973년 수여 받은
로베르토 클레멘테이고, 로빈슨 다음으로 수여 받은 인물은 2017년의
래리 도비이다.
[7]
금메달을 딴 사람이 그 유명한
제시 오언스이다.
[8]
팀에서 함께 뛰었던 동료들 중에는
린 콤튼도 있었다.
밴드오브브라더스의 그 사람이다.
[9]
대학 시절 다친 발목의 검사를 위해 병원으로 가다가 흑인은 버스 뒷자리로 이동하라는 버스기사와 시비가 붙어
헌병이 출동했고, 군사법원까지 가야 했다. 참고로 로빈슨이 탄 군 버스는 인종분리가 철폐된 노선이었으며 이 점이 참작되어 로빈슨의 혐의는 심문 과정에서의 불복종 정도로 축소되었다.
[10]
미국 프로야구의 역사에서는 거의 신화적인 인물이다. 팜 시스템부터 시작해서 최초의 흑인 재키 로빈슨 외에, 최초의
중남미 선수 등을 메이저리그에 데뷔시켰다. 그야말로 트인 사고를 가진 만능의 천재로 야구 외에도 능해서 수많은 자격증의 보유자였다. 야구 쪽으로는 거의
토마스 제퍼슨이나
에이브러햄 링컨급의 위치에 있는 인물.
[11]
재키 로빈슨보다 더 실력은 뛰어난 선수가 많았다고 브랜치 리키도 공인했지만, 재키 로빈슨의 최대 장점은 붙임성과 스스럼 없는 성격이었다. 위대한 타자이자
스즈키 이치로 이전 단일시즌 안타 신기록을 갖고 있었고 은퇴 후 스카우터로 활동하던
조지 시슬러에게 브랜치 리키는 무엇보다 정신력이 강한 선수를 찾아달라고 부탁했고 시슬러가 데려온게 재키 로빈슨이었다. 아메리칸 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
래리 도비가 속으로 냉가슴만 앓는 성격이라 더더욱 고생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무엇보다 중요한 장점이었을 것이다.
[12]
영화
42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에노스 슬로터가 로빈슨의 발목 뒷부분을 스파이크로 찢어내는 장면으로 재현되었다. 참고로 이 에노스 슬러터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악질적인 인종차별주의자였고 카디널스 선수들을 선동해서 다저스와 경기를 보이콧하기도 했다.
[13]
리그 데뷔 첫타석 2루땅볼아웃이 오심 의혹이 있다. 영화
42에선 1루 베이스를 밟고 한참 지나서 공이 왔으나 아웃을 선언한다. 고깝게 쳐다보는건 덤.
[14]
시간이 한세기 가까이 흘러 조금씩 재평가가 내려지고 있는 현대에 비해 이 시기 타이 콥에 대한 엄청난 악평을 받았다.
[15]
자세한 내용은
피 위 리즈 항목 참조바람.
[16]
또한 브루클린 다저스의 명감독이자 '사람 좋으면 꼴찌'라는 명언을 남긴 레오 듀로셔 감독이 로빈슨을 거부한 팀원들을 향해 "난 저 친구가 검둥이든 외계인이든 상관 안해. 중요한 건 저 녀석이 잘해야 니들
연봉도 오른다는 거야,
바보들아."라며 일갈한 것도 큰 힘이 됐다. 사실 여러 일화를 통해 추리해 보자면 듀로셔 감독은 흑인에 대해 뭔가 다른 생각을 가진 게 아니라 진짜로 재키 로빈슨이 흑인이든 피부가 파란색 외계인이든 무지갯빛 반짝이 피부를 가졌던 간에 경기장에서 활약해서 경기만 이기면 장땡이었을 사람이었다. 훗날 레오 듀로셔는 이후 역대 최고의 흑인 야구선수라는
윌리 메이스의 선수시절 감독이 되며 윌리 메이스를 가장 아끼는 걸로 유명했다. 본인이 진정으로 정말 인종 차별에 열려있고 깨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행보로 미루어 봤을 때 듀로셔 감독은 인종 차별에 관해서는 까일 게 없는 수준의 야구 감독이었다. 그는 야구만 잘하면 출신, 피부색, 습관 등에 구애받지 않고 중용했다. 시대상을 감안하면 이는 선구자적 마인드며 그 자체로도 높게 평가받을 만 한 것이다. 그 대신 듀로셔는 야구를 못하면 피부색을 떠나 연봉이 얼마건 자신과 얼마나 오랫동안 지냇건 얼마나 그간 명성이 빛났건 상관없이 가차없게 갈구고 마이너로 내려버리는 공정하고 진정한 야구인이었다.
[17]
피 위 리즈 본인이 훗날 인터뷰에서 "필드에서 재키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지. 사람들이 그걸 보면 우리가 친구라는 것을 알테고, 그러면 재키한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어."라는 발언을 한 바 있으며, 로빈슨의 입단 소식을 듣고 보인 반응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부터 인종차별적인 가치관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는 점, 백인이면서 흑인을 실드 쳐줬다는 이유로 그의 고향인
켄터키 주
루이빌에서 욕먹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점, 그가 평생 자신의 집 서재에 재키 로빈슨과 어깨동무한 사진을 걸어놓았다는 사실 등을 통해 추정해보면 어쨌든 1947년 5월 14일에 피 위 리즈가 어쨌든 관중들의 인종차별적인 분위기에 대항하여 뭔가 행동을 했던 것 자체는 사실이다. 아마도 당시 경기에서 피 위 리즈가 관중들의 인종차별적인 분위기에 대놓고 반발하는 모종의 제스쳐를 취했다는 사실과 재키 로빈슨과 피 위 리즈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실제 사진이 결합해서 현재의 어깨동무 일화라는 형태로 구전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18]
저 시대의 백인들 중 인종차별주의자도 있었지만 반대로 인종차별을 비도덕적, 혹은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로빈슨은 역대 2루수 랭킹에서 한손에 꼽히는 대선수였으니까 그의 피부색을 신경쓰지 않는 관중들에게는 당연히 환영받는 존재였을 것이다.
[19]
필라델피아의 감독 겸 선수였던 밴 채프먼이 브루클린 다저스와의 경기중에 재키 로빈슨에게 온갖 모욕을 줬고, 이것에 대해 여론의 반발이 일어나자 재키 로빈슨에게 사과를 하는 모습이다...라고 할수 있지만 실제로는 사진기자 및 여론에 "이거 봐봐. 난 재키 로빈슨과 화해했음. 이제 그만 좀 X랄들 하세요."라는 뜻의 보여주기 식 행사였다. 사진을 봐도 알겠지만 채프먼은 흑인과 손을 맞대기 싫어해서 재키 로빈슨은 채프먼의 손 대신 그가 들고 있는 방망이를 붙잡고 있다. 전기영화 42에서 이 장면이 상세하게 묘사되니 참고 바람. 여담으로 전기영화 42의 후일담에 의하면 밴 채프먼은 1948년 감독직에서 짤린 이후, 재키 로빈슨 모욕 사건당시 유태인을 언급하며 항변했는데 하필 당시 재계에 영향력이 강한 유태인을 건드려서 다시는 감독이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단지 영화 42 내용대로면 방망이로 악수를 대신하자고 제안한건 재키 로빈슨 본인으로 농담 겸 배려였던걸로 보인다. 그래도 밴 채프먼은 노년때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자기가 인종차별을 저질렀다고 인정을 하였고, 그 당시 자신이 부끄러웠다면서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자기 아들이 흑인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자랑스러웠다고도 밝혔다. 실제로 이 사건이 일어난 날 재키 로빈슨은 안타로 출루, 도루 후 상대 실책으로 3루까지 진루한 이후 적시타 때 홈을 밟았고, 팀은 0:1 승리를 거둔다.
이 날의 경기 박스스코어이다.
[20]
아래의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그 떨어졌다는 경기력이 WAR 4 정도다. 선수 생활을 못 이어갈 만큼 못 했던 것은 절대로 아니다. WAR 4 정도면 어느 팀에서건 상위권 주전선수를 할 정도의 실력이다.
[21]
당시 대부분의 흑인은
존 F. 케네디를 지지했다.
[22]
사실 도루성공률은 197성공 76실패 61.5%로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하지만 당대 백인 야구계에서 보기 힘들었던 공격적인 주루플레이와 허슬은 많은 야구인들과 팬들에게 인상깊게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주루 부문 승리기여도가 양수를 꾸준히 기록한 것에서 나쁜 도루 성공률을 만회하고도 남을 정도의 주루 센스가 있었다는 점을 유추해볼 수 있다.
[23]
둘다 커리어 연평균 삼진이 30개도 되지 않는다.
[24]
다만 디마지오는 거의 모든 승리기여도를 타격에서 벌어들였으나 로빈슨은 수비와 주루로 벌어들인 몫이 크다. 통산 출루율은 로빈슨이 조금 더 좋으나 장타력 면에서 디마지오가 압도하기 때문. 물론 로빈슨이 다소 투고타저 리그에서 뛰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25]
사실 이는 당연한 것이, 눈에 보이는 누적 스탯은 최소 2000안타, 200홈런씩을 때려낸 이 셋에 비해 1500안타, 130홈런의 재키 로빈슨의 기록은 다소 부족해 보이나 이는 투고타저와 볼넷을 많이 골라낸 특유의 플레이스타일 때문이었고 실제 승리 기여도는 전부 60대 초중반으로 유사하다. 게다가 이 선수가 만 28세에 데뷔를 한 것을 감안하면...
[26]
니그로리그 기록이 메이저리그의 역사로 인정되었으므로 니그로리그 기록이 포함된다.
[27]
캔자스시티 모나크스(니그로리그 팀)
[-]
기록 없음
[29]
밥 펠러와 함께 헌액되었다.
[30]
1800년대에 빌 화이트를 비롯한 흑인 선수들이 내셔널리그 등에서 뛰었다.
[31]
로이 캄파넬라,
샌디 코팩스 역시 이날 함께 영구결번을 받았다.
관련기사
[32]
재키나 빌의 영구결번은 인종차별을 깬 공로도 있는데 반해, 웨인은 순수 기록만으로 영구결번을 받았다. 정규시즌 공격 포인트만 놓고봐고 2857점으로 2위
야로미르 야그르는 1891점, 즉 966점으로 차이가 매우 크다. 물론 웨인의 영향으로 약 6개의 NHL팀을 추가로 창단하게 만드는 영향을 준 공헌도 있다.
[33]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재키로빈슨보다 고작 3개월 뒤에 데뷔
[34]
사실 이 두팀은 같은 도시가 연고지였다는거 외에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몬트리얼 로열스는 1961년에 뉴욕주로 이사를 해서 이름을 시라큐스 치프스 (Syracuse Chiefs)로 개명했고, 몬트리올 엑스포스는 1969년에 창단되었고 2004년에 워싱턴 D.C로 이사를 한 뒤 워싱턴 내셔날스로 개명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각자 연고지를 옮기고 개명을 한 후인 2009~2018년에는 치프스가 내셔널스의 산하 팀이었다. 2019년 시즌부터 치프스는
뉴욕 메츠 산하로 바뀌며 구단명도 시라큐스 메츠(Syracuse Mets)로 재개명했다. 비슷한 경우로,
밀워키 브루어스는 팀 역사에 상관없는
행크 애런을 밀워키 팬들에게 선사했던 활약에 대한 답례로 영구결번을 지정했다.
[35]
성씨에서 짐작하다시피
폴란드계 미국인이다. 같은
백인임에도 폴란드계는 특히 미국에서 더 차별을 당했던 비주류 민족이었던지라, 허만스키로서는 일종의
동병상련을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
[36]
다만 게임데이나 전광판에는 투수도 42번, 타자도 42번이라 헷갈리기 좋은 날이다.
[37]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로베르토 클레멘테 데이도 홈 경기로 배정된다.
[38]
8월 27일 MLB 다수 구단은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경기를 보이콧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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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42에서 보여줬듯이 성질이라도 내면 "것봐라, 검둥이놈들은 역시 폭력적이고 미개해"이라는 여론과 언론 플레이로 분위기 조장성 기사들과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비꼼이 나오는 것은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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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다저스의 홈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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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래리 킹의 Why I Love Baseb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