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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12:31:07

바르샤바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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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1제국 괴뢰국
파일:바르샤바 공국 국기.svg 파일:바르샤바 공국 국장.svg
국기 국장
파일:바르샤바 공국.svg
바르샤바 공국의 영토
1807 ~ 1815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폴란드 입헌왕국|
폴란드 입헌왕국
]]
프로이센 왕국
[[포젠|
포젠 대공국
]]
갈리치아-로도메리아 크라쿠프 자유시
위치 동유럽
수도 바르샤바
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국가 원수 공작
주요 공작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1]
언어 폴란드어, 리투아니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종교 로마 가톨릭
통화 즈워티
주요 사건 1807년 설립
1815년 멸망
현재 국가
[[폴란드|]][[틀:국기|]][[틀:국기|]]

1. 개요2. 역사3. 정치4. 군사5. 경제6.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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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폴란드 지역에 만든 괴뢰국가이다. 1807년에서 1815년까지 존속했다.

사실상 나폴레옹이 폴란드인에게서 자원과 병력을 착취하기 위해 만든 전진 기지에 가까운 공국이였다

2. 역사

2.1. 배경

1795년 3차 폴란드 분할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멸망한 이후, 구 폴란드 영역은 분할된 상태로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1806년 프로이센은 영국, 러시아 등과 함께 대 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프랑스군에 연패하게 된다. 폴란드인에게는 독립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이미 많은 폴란드인들과 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주권을 되찾아 줄 사람은 나폴레옹밖에 없다고 믿고 프랑스로 탈출한 상태였고, 현지에 남아 있던 공화주의자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2.2. 건국

프로이센의 대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된 1806년( 독일·폴란드 원정), 폴란드 지역에서는 징병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이 폭동이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확대되어, 바르샤바 공국이 되는 지역은 프로이센의 지배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새롭게 구성된 정부는 동프로이센에서 프로이센을 지원하러 온 러시아군과 싸우고 있는 프랑스군에 식량과 물자를 공급했다.

1807년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러시아와 틸지트 조약을 맺고 강화하였다. 이 조약의 일부로서 바르샤바 공국의 건국이 승인되었다. 바르샤바 공국은 위성국으로서 건국되었지만, 많은 폴란드인들은 언젠가 나라의 영토와 주권은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기대하고, 믿고 있었다.

바르샤바 공국은 형식적으로는 독립 공국으로서, 하원(세임)이 존재하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였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형식적으로는 작센 왕국 동군연합이 되어 있었다. 작센 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폴란드 왕 아우구스트 3세의 손자에 해당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현재도 작센 왕국의 왕위 요구자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바르샤바 공국의 왕위 요구자를 겸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는 바르샤바 공국을 그 이상으로 발전시키는 데는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공국에서 사실상 가장 중요한 인물은 수도 바르샤바에 본부를 두고 있는 프랑스 대사였으며, 공국은 해외 외교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2.3.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

1809년, 오스트리아와 영국이 동맹(제5차 대불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공격하면서, 프랑스와 동맹인 바르샤바 공국 역시 오스트리아와 전쟁에 돌입했다.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 이탈리아, 폴란드 3면으로 공격을 시작했고, 폴란드 방면의 오스트리아군은 페르디난트 대공이 이끌었다.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이끄는 폴란드군은 바르샤바 근교의 라신 전투(Battle of Raszyn)에서 선전하였으나 대도시인 바르샤바가 방어에 적합하지 않았던지라 협상 끝에 철수하여 오스트리아군에게 수도를 내준다.[2] 하지만 폴란드군은 적의 주력이 바르샤바에 있는 동안 오스트리아에 병합되었던 남부 지역을 탈환했다. 결국 이 전쟁의 결말로 맺어진 쇤브룬 조약에서 남쪽으로 영토를 확대하여 과거 폴란드령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2.4. 러시아 원정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을 결정하면서 폴란드인들에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부활과 완전한 독립을 약속하였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인들 역시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그리고 무려 10만 명 군대를 편성하여 60만에 이르는 나폴레옹의 대육군의 일익을 담당했다. 당대 공국의 인구가 300만에 불과했음을 감안하면 전체 인구의 3%가 원정에 동원된 것이다.[3]

이 원정에 참가한 대부분의 나라들이 나폴레옹에게 멱살잡혀서 울며 겨자먹기로 군대를 보냈던 것과 달리, 폴란드에겐 조국의 재건이라는 확실한 명분이 있었다. 대육군의 좌익을 담당하게 된 폴란드 군대는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싸웠다. 모스크바에 가장 먼저 입성한 병력도 뮈라 휘하의 폴란드 창기병들이었으며 프랑스로 후퇴하는 과정에서는 최후미에서 러시아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눈보라와 추위, 카자크 기병들의 습격등이 겹치면서 폴란드군의 피해는 제일 심했고 10만의 병력 중 살아 돌아온 인원은 단 26,000명뿐이었다.[4]

결국 1813년 1월 바르샤바 공국은 대부분 러시아에, 나머지 부분은 프로이센에 재점령되었다. 폴란드인들은 나폴레옹이 다시 돌아올 거라 믿으며 저항했고, 몇몇 요새는 1년 이상 버티기도 했지만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공국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전사함으로써 사실상 공국은 이름만 남기고 멸망하였다.[5]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바르샤바 임시최고위원회를 창설하고 장군들을 통하여 영토를 통치했다.

2.5. 멸망

1815년 빈 회의에서 폴란드는 재분할되어 바르샤바 공국은 완전히 소멸하였다.[6]

바르샤바 인근은 잠시 알렉산드르 1세에 의해 동군연합 폴란드 입헌왕국이 되었으며,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이 총독인 상황 하에서 잠시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대공의 사망 후 1831년 봉기로 잠시 명목상의 자치권을 주었다가 1848년 2차 봉기로 다시 자치권을 회수, 러시아의 직할령으로 회수, 폴란드는 완전히 멸망했다.

한편 프로이센의 영토로 남은 포즈난 인근은[7]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 의해 프로이센의 종속국인 포젠 대공국이 되었으나 1831년 봉기를 계기로 통제를 강화해나가다가 1846년의 봉기를 계기로 1848년 자치권을 완전 박탈, 프로이센의 포젠 주로 격하되었다.

3. 정치

헌법은 자유주의적이었다. 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 내각책임제를 채택했다. 농노는 폐지되었고 모든 계급은 법 앞에 평등했다. 가톨릭 교회가 국교였지만, 종교적 관용은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4. 군사

바르샤바 공국의 군사 분야에서는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주목을 받는다. 그는 바르샤바 공국의 전쟁장관 겸 바르샤바 주 방위 사령관이었으며, 동시에 프랑스군에 임관하여 나폴레옹 휘하의 원수이기도 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그를 동맹국의 군주로서 대접할 것을 나머지 원수들에게 지시하기까지 했다.[8] 폴란드의 전략적 가치를 염두에 둔 제스처일 수 있지만 포니아토프스키는 나폴레옹을 위해 전선에서 죽기살기로 싸워 그 용맹이 조아킴 뮈라와 맞먹는다고 평가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전쟁장관이자 사령관인 포니아토프스키가 프랑스의 원수였을 정도로 위성국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공국군은 완전히 프랑스의 지휘 하에 있었다.

초기에는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정규군 45,00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1810년에는 그 수가 10만으로 증가, 1812년에는 20만이었다. 공국 인구 300만명에 비하면 상비군은 상당한 규모였다.

공국은 고도로 군사화되어 있었고, 이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대한 방어선이 되었으며, 나폴레옹에게는 상당한 전력이 되어 주었다.

다만 바르샤바 공국은 프랑스와 깊은 관계를 맺은 만큼 프랑스가 참여한 전선 곳곳에 폴란드군을 투입시킬 수 밖에 없었다. 폴란드군은 러시아 원정과 나폴레옹이 친정한 스페인, 심지어 대서양 건너 아이티에도 프랑스군의 전력을 충당했다. 초기 공국에서 양성된 35,000명의 폴란드군 중에서, 나폴레옹이 2만 명을 국외로 빼내 스페인, 프로이센, 그리고 기타 곳곳으로 투입시켰다. 따라서 2차 오스트리아 전쟁 초기 라쉰 전투에서 포니아토프스키 대공은 소규모 작센 분견대로 지원을 받은 소규모의 폴란드 신병으로 방어전을 펴야했다. 물론 포니이토프스키의 놀라운 분전으로 폴란드군은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낼 수 있었지만 말이다.

군사적으로는 상전이던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징병제를 시행,국민개병제를 실현했었으나 폴란드의 전통적인 귀족 기병 문화의 영향력도 존재했다. 프랑스식 징병제를 시행함에 따라 공국 내에 전체 성인 남성 인구 대비 군사훈련을 받은 사람의 비율은 거의 러시아 제국에 근접할 만큼 올라갔다.[9] 폴란드의 정국을 주도해왔던 귀족들과 지주들은 출신이 귀족이 아니면 장교로 승진시키는걸 꺼렸지만 프랑스의 영향 덕분에 평민이라도 능력만 있다면 장교로 진급할 수 있는건 보장된 펀이었다.

5. 경제

대부분의 산업이 밀농사 같은 1차 산업에 머물러 있었다. 대외수출 또한 대부분 곡물이 담당했는데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이마저 감소했다.

나폴레옹은 '남는 밀 우리가 다 사줄게' 하며 인심을 쓰는 척 하면서 이 곡물들을 헐값에 사갔고 폴란드인들은 곡물을 울며 겨자먹기로 팔아야만 했다. 그리고 공국의 국력에 비해서 지나치게 많이 늘어난 군사력은 노동력 부족을 야기했고 공국의 경제에 큰 압박을 주었다. 그 외에도 폴란드 영내에 주둔한 프랑스군의 주둔비용도 대야 했기 때문에 국고가 남아나지 않았다.

1808년에 프랑스 바욘(Bayonne)에서 공국과 프랑스 제국이 회의를 하여, 프랑스로부터 프로이센이 차입해 간 채권을 공국이 프랑스에서 매입하게 되었다. 4,300만 프랑 이상의 채권액을 2100만에 매입하였고 공국은 4년 분할로 금액을 지불하였다. 그러나 프로이센이 공국에 채무를 상환하지 못해서 이 손실은 공국에 심각한 부담이 되었다.

문제가 겹친 결과 과도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세금은 늘어나서 압박이 심했다.

6. 외교

사실상 프랑스 제1제국의 괴뢰국 신세였지만 프랑스와는 의외로 사이가 좋았다. 나폴레옹도 바르샤바 공국의 독립을 약속했었고, 바르샤바도 나폴레옹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했을 정도. 다만 그렇다고 프랑스가 바르샤바 공국의 독립에 완전히 우호적이었는지도 애매하나, 나폴레옹이 바르샤바를 토사구팽할 생각을 하기도 전에 먼저 몰락해서 추측에 불과하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나폴레옹과는 끝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반대로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과는 당연히 철천지원수였다.


[1] 작센 왕국과 동군 연합 [2] 오스트리아군은 폴란드군이 다 철수하고 나서야 입성했고, 역사가들은 폴란드군의 승리로 평가하고 있다. [3] 참고로 현재 북한의 인구 대비 군인의 비율이 5% 정도. 이 10만 대군이 러시아로 떠난 후, 바르샤바는 허허벌판만이 남았다고 이야기될 정도로 공국 내 거의 모든 인력을 다 끌어다 썼다. [4]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폴란드군은 러시아 침공에 동원된 대육군 소속 병력중 제일 많이 생환한 나라라는 것이었다. 폴란드와 러시아는 바로 지척인데다 척박한 환경이란 것도 똑같아서 폴란드 병사들에게는 조금 더 힘들 뿐이었으나 따뜻한 남유럽과 서유럽 등지에서 징병된 다른나라 군대는 생환율이 10%를 밑돌았다. [5] 이 당시 나폴레옹은 배신할 가능성이 높은 동맹국들에 대해서는 물자와 무기를 강제로 압수하여 사실상 군사력을 해체시켜 자신 휘하의 프랑스군에게 지급하였다. 하지만 바르샤바 공국에게서만은 압수하지 않았는데, 그만큼 나폴레옹도 폴란드인들이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6] 폴란드 분할 항목 참조. [7] 당초 프로이센과 러시아 제국은 프로이센이 작센 왕국을 합병하는 대신 바르샤바 공국의 영역 전체를 러시아가 갖기로 협의하였으나, 타 국가들의 반발로 프로이센이 작센 왕국의 완전 합병을 포기하면서 이루어진 재합의에 의해 포즈난 일대는 프로이센의 영토로 결정되었다. [8]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마지막 군주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의 조카이자 사실상 바르샤바 공국의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9] 원래는 프랑스나 오스트리아보다 이 비율이 낮을 정도였다. 그러나 징병제 도입 이후에도 유럽 최고 수준 군인 비율을 자랑하던 프로이센보다는 비율이 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