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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8 12:22:30

윙드 후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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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형성 배경3. 활약상4. 특징5. 대중매체에서
5.1. 영화 및 드라마5.2. 만화 및 애니메이션5.3. 소설5.4. 게임5.5. 기타
6. 기타

파일:external/4.bp.blogspot.com/Polish%2BHussars_Battle%2Bof%2BKircholm.jpg
파일:VZUEcZD.jpg
전투 중인 윙드 후사르를 묘사한 그림 윙드 후사르의 모형

1. 개요

폴란드어: Towarzysz husarski[1] / Husaria

윙드 후사르 1503년 ~ 1775년에 존속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정예 기병 부대로, 중세 기사대의 압도적 무용을 근세에 재현했던 유럽 최후의 중장 창기병이다.

파이크 방진을 무너뜨리기 위해 5 m짜리 대형 차징 랜스와 윙드 후사르의 상징으로 굳어진 날개 장식을 달고 있는데, 서유럽 동유럽의 특징이 혼합된 독특한 기병이었다.[2]

폴란드어 명칭은 skrzydlata husaria이며 영어권에서는 skrzydlata를 Winged로 번역하여 Winged Hussars라고 부르고, 한국에서는 영어 명칭을 곧이곧대로 음역한 '윙드 후사르'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된다. 하지만 곰곰히 따져보면 영어권 국가 입장에서야 후사르라는 고유명사에 날개가 달렸다는 의미의 skrzydlata만 의미 그대로 winged로 번역한, 충분히 성립 가능한 표현이지만, 비영어권 국가인 한국에서 사용하기에는 비영어권인 폴란드산 병종에 굳이 필요없는 영어를 덧붙이는 셈이니 어감만 그럴듯할 뿐 어색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어 위키피디아에서는 '폴란드 후사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같은 동아시아 국가인 일본과 중국에서 사용되는 표현을 살펴보면, 위키피디아를 기준으로 일본은 フサリア(후사리아)라는 폴란드어 원문의 음역과 有翼重騎兵(유익중기병)이라는 의역이 제시되어 있고, 중국은 波蘭翼騎兵(파란익기병, 폴란드 날개 기병), 翼驃騎兵(익표기병, 날개 후사르), 波蘭羽翼騎兵(파란우익기병, 폴란드 날개 기병) 등의 표현이 제시되어 있다.

2. 형성 배경

후사르의 본고장 발칸 반도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되자, 패망한 세르비아 공국, 불가리아 제국의 후사르들은 국가를 잃고 용병으로 떠돌았는데, 이들 중 일부가 폴란드 왕국에 고용되었다. 이때 3개 부대를 폴란드의 입법부인 ' 세임'이 고용, 고용 & 신설하여 폴란드식 후사르가 생겼다.

이후 신분에 따른 차별 없이 귀족, 평민 모두 받아들이면서 체계화되고 급속도로 성장하여 윙드 후사르가 나타났다. 이들은 고도로 체계적이고 엄격한 훈련을 통해 근세에 활약한 주요 병종으로 손꼽힌다.

3. 활약상

파일:external/wordwarriorsandiego.files.wordpress.com/husaria.jpg

역사상 최강의 기병 중 하나답게 전적도 굉장히 화려하다. 주로 나열되는 전적들만 해도 다음과 같다.

위 전적들을 자세히 설명해보면 보통 윙드 후사르는 스웨덴, 오스만 제국과 그 봉신국들[3], 모스크바 대공국- 루스 차르국과의 전쟁에서 대활약했다. 1514년 9월 8일 폴란드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연합군과 모스크바 대공국이 겨룬 오르샤 전투에서는 1만 2천 ~ 3만여 명으로 모스크바 대공국의 병력 중 4만 5천 ~ 8만 명 중 1만 ~ 3만여 명을 전사시키고 3천 ~ 5천여 명을 포로로 사로잡은 적도 있다.

이후에도 다방면으로 활약하여 폴란드 국왕 스테판 바토리 사후, 막시밀리안 대공 휘하의 황실군이 침공해 오자 이 군대를 비치나(Byczyna)에서 패배시켜 막시밀리안 대공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1600년에 스웨덴과 전쟁이 발발하자 역시 활약을 펼쳐, 벤덴(Wenden)[4], 코켄하우젠(Kokenhauzen)[5], 라크베레(Rakvere), 비아위 카미엔(Bialy Kamien)[6] 등에서 대승을 이끌었다.

특히 1605년 스웨덴과의 키르홀름(Kircholm) 전투에서는 스웨덴군 1만 2천 명을 윙드 후사르 2500명이 돌격해 스웨덴군의 전열을 패배시킨 적도 있다. 이 전투에서 스웨덴군은 대략 60% ~ 80%가 전사했다. 말 그대로 학살.[7] 그밖에 수많은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이 때문에 스웨덴은 윙드 후사르와 평지에서의 전투는 최대한 피했다. 이때의 안 좋은 기억을 바탕으로 스웨덴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군제 개혁을 거쳐 강군이 되어 그니에프 전투에서 지그문트 3세 바사가 친정한 윙드 후사르 부대를 대파했고 30년 전쟁에서 맹활약했다.

파일:external/ncache.ilbe.com/6f134b4a41b9469e33180246ae19eb1f.jpg

그래서 클루쉬노 전투에서 루스 차르국 - 스웨덴 연합군[8] 랜스에 대한 방책을 준비했지만, 이번엔 휠락 머스킷을 들고서 카라콜을 구사한 데다가, 루스 차르국 군대가 뻘짓[9]을 하는 바람에 클루쉬노 전투는 폴란드의 대승으로 끝났다.

파일:external/weaponsandwarfare.files.wordpress.com/3d0113e3112139e5435993ddf9fc49e9.jpg

1620년 체초라 전투에서는 비록 전투 자체는 패배[10][11]하기는 했으나, 윙드 후사르 300명이 오스만 제국군 1만 5천 명에게 돌격하여 피해 1천여 명을 입히고 격퇴시키기도 했고, 1621년 코침 전투에서도 몰려드는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길이를 늘리기 위해 속을 파낸 가벼운 랜스 탓에 스웨덴의 중보병을 상대로 고전하기도 했다. 1620년대 폴란드 후사르와 스웨덴 보병대가 맞부딛친 전투에 대한 한 기록을 보면 후사르의 랜스가 스웨덴 보병의 판금 갑옷을 관통하지 못해 후사르들이 고전했다.[12]

또한 후사르들 자체도 갑옷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한 시기가 있어 '경무장한 폴란드 군인과 중무장한 스웨덴 군인'이라는 비교가 나오기도 하였다. 이 문제는 후대의 얀 3세 소비에스키 재위시기에 가면 많이 해결되었다.

물론 무장이 가벼운 병력들을 상대할 때에는 언제나 탁월한 전과를 보였다. 1660년 루스 차르국과 치른 한 전투에 대한 기록을 보면 후사르가 랜스로 루스 차르국 보병 6명을 일격에 꿰뚫었다고 하고 코침 전투에서도 오스만 제국의 기병인 시파히 6명을 한번에 꿰뚫었다.[13]

그렇게 윙드 후사르는 동유럽 평원의 쑥밭 재배자로 유럽 전역에 그 이름을 널리 알렸으며, 카자크 헤트만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이끈 코사크 대봉기 당시 있었던 1651년의 베레스테츠코 전투에서는 카자크 - 타타르 연합군 14만이 괴멸당했다. 이 때 카자크 - 타타르 연합군의 피해는 전사 3만 ~ 7만. 그런데 폴란드 측의 피해는 700명이다.

1673년 오스만 제국의 폴란드 침공 당시에는 코침 전투에서 오스만군 3만 5천을 상대로 승리하는 등 활약했다.

17세기 말 당시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심장 을 공성 중인 오스만 제국의 군대를 기습 돌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제2차 빈 공방전 문서 참조.

그러다가 폴란드 분할과 창기병의 쇠퇴. 거기에다가 대북방전쟁 당시 칼 12세가 이끄는 스웨덴군과의 전투에서 한계가 드러나게 되자, 1775년 윙드 후사르는 정식으로 해체되고, 얼마 안 가 폴란드도 찢어진지 얼마 안 가서 그들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프랑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사실상 후손인 울란을 만들었다. 물론 중기병급 무장인 윙드 후사르와 달리 울란은 기동성을 살린 경기병이었다.

4. 특징

파일:CZKkxE7.jpg

이들의 특징인 에 달린 날개 장식은 몽골 제국 유럽을 침공할 때, 몽골 제국군이 후사르한테 그물을 던져 낙마시키자 뒤에 철조각들을 날개처럼 붙인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14] 혹은 날개들이 돌진할 때 깃털이 진동하면서 위압적인 소리를 낸다고 하는 설도 있다. 그 뒤로도 저 날개 장식이 그냥 장식인지, 아니면 실용성이 있었는지 여러 가지 의견이 많다. 군사 서적 전문 출판사 오스프리에서 펴낸 폴란드 후사르 관련 서적에서는 실험을 수 차례 했어도 올가미에 낚이는 것을 방지하는 데에도 소용이 없고, 전속력으로 돌격해도 소리가 전혀 나지 않았다고 한다.[15]

그 외에도 적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해서 붙였다는 추정도 있다. 사람보다 덩치가 큰 물체가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려오는 데다가 뒤에 덩치를 더 크게 보이게 만드는 날개 장식까지 붙였으니 그 위압감은 실로 충분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어깨 표범이나 호랑이 모피[16] 망토처럼 걸치기도 했다. 이것 역시 날개 장식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장신구 역할과 동시에 혼란을 주기 위한 용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실용적인 측면에서의 추측 외에도 상징적인 면에서 이 날개 장식의 용도를 추측하는 설도 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윙드 후사르가 착용하는 날개 장식은 '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상징에 대입된다. 본래 우리가 폴란드라고 부르는 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별개의 국가로 존재하던 폴란드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연합해 생겨난 국가인데, 본래 폴란드의 상징은 날개를 활짝 펼친 독수리,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상징은 말을 달려나가는 기사[17]였다. 즉, 이 '날개 장식+ 기병'이란 조합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결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함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다.

사실 저렇게 완전무장하고 두터운 모습이지만 원래 후사르기병이었고 윙드 후사르도 원래 경기병에서 출발했다.

이들이 무장한 장비로는 앞서 사진에 나온 갑옷과 투구, 앞서 언급한 속이 빈 5 m짜리 랜스와 기병도 '샤블라', 에스터크 등으로 무장했고, 지휘관이나 귀족병사들은 샤블라 대신 철퇴나 도끼로 무장하기도 했다. 그 외에 일부는 권총이나 아퀘부스 같은 화기도 종종 갖추었다. 또한 초기에는 방패를 사용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쓰지 않게 되었다.

다만 윙드 후사르의 전과가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파이크병을 상대로 몇번 승리를 거둔 적은 있으나(키르홀름 전투와 클루시노 전투) 제대로 된 파이크 방진을 격파한 적은 별로 없다. 스웨덴의 파이크 병은 1601년 군제 개혁하려고 데려온 요한 반 나사우에게 파이크 쓸 줄도 모르는 양민 수준이란 평가를 들었을 정도로 형편없는 군대였다. 요한 반 나사우는 군제개혁 하겠다고 스웨덴군 좀 만지작 거리다가 돌아가버렸고, 이 파이크 방진은 고작 4년 후에 키르홀름에 투입되었다가 윙드 후사르의 기동에 반응도 못해보고 박살나버렸다. 또한 키르홀름 전투처럼 기병만으로 파이크 방진을 돌파하는 사례는 폴란드 내에서도 이례적인 경우인 것 같고, 후사르들 피해가 적지 않았다.

클루쉬노 전투는 그래도 좋은 성과를 냈는데, 루스 차르국 3만군과 스웨덴 5천군(이 연합군은 파이크병, 머스킷티어, 화승총병-아쿼버시어로 구성 됨)을 5천여 기병으로 돌격해서 대승을 거두었다. 물론 전투 초반에 윙드 후사르가 보병 방진에 돌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돌진 횟수는 알 수 없고 사견에 따라 다름) 전열을 제대로 무너뜨리지 못해서 초반에 고전한 건 사실이다. 또 러시아군이 무너진 이유로 반격에 나선 러시아 기병들이 대삽질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후사르 기병이 클루시노 전투에서 주력군으로 활약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근거는 당시 폴란드군 6500 ~ 6800명 중 후사르 비율이 최소 80%, 대략 5500명이었고, 기병이 아닌 타 병과는 규모가 매우 작고 지원도 애매했기 때문이다. 또 이 전투에서 제대로 싸웠다고 나오는 보병은 왼쪽에 배치된 보병 400여 명, 나중에 지원 온 보병 200여 명 정도였고 대포는 2문 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 대포 2문도 나중에 온 보병 200명과 함께 늦게 왔던 터라 초반 전투에는 아예 쓰이질 못했다. 여기에 전황을 다 나열할 순 없겠지만, 결론적으로 이 전투는 후사르 기병을 앞세워 파이크병을 포함한 적군을 제대로 격파한 몇 안 되는 사례이다.[18]

어찌되었던 후사르가 먼치킨이라고 평가받는 한 가지 이유인, 제대로 된 파이크 방진을 상대해서 격파했다는 기록은 생각보다 적고 어느 정도 과장이 들어간 것이 맞다. 중무장 갑옷을 뚫는 총기가 보편화 되기 전까진 기병 돌격을 그나마 저지 해볼만한 수단은 보병의 장창 방진 뿐이었고, 그래서 테르시오라는 전술이 이름을 떨친 것인데 정작 후사르는 파이크 방진을 정면돌격으로 깨부순 사례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기 때문. 애초에 동유럽은 서유럽과 달리 평원과 스텝 지대가 널리 펼쳐져 있어 보병보다는 기병에 투자하는 성향이 강했기에, 그 기병 중 가장 중무장한 윙드 후사르가 활약할 여지가 많았다고 볼 수 있다. 보병들의 질은 서유럽에 비해 극히 떨어졌고, 그나마 서유럽을 따라하던 스웨덴도 초창기에는 그 수준이 확연히 떨어졌다. 반면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개혁으로 이전까지 서유럽을 모방하기 급급했던 후발주자에서 아예 서유럽을 포함한 유럽식 군제의 원조로 떠오른 전성기의 스웨덴군에게는 확연히 고전했다. 즉, 윙드 후사르 역시 제대로 된 근대식 군대에게는 큰 전과를 내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윙드 후사르에 대한 군사적 평가가 과장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또 다른 점은, 윙드 후사르의 직계 후손이라 할 수 있는 폴란드 창기병 울란이 그 전투력을 높이 평가받아 동시대 전 유럽에 보급된 반면, 윙드 후사르가 활약하던 시대에 윙드 후사르와 같은 랜스를 차용하여 이를 모방하려는 노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돌격기병이 다시 대두되기 시작한 기점인 스웨덴의 하카펠리타트도 검과 총을 썼지 랜스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윙드 후사르는 강력했지만, 시대의 흐름과 그다지 맞아떨어지는 병과는 아니었던 셈.

이후 한참이 지난 후에야 다시 기병돌격의 장점이 재평가되면서 창기병이 부활하게 된다. 또한 이후의 기병들이 랜스를 사용하지 않은것은 기병 자체의 패러다임이 바뀐 점이 크다. 당시 재정비된 기병돌격은 이제 막 생겨나는 전열보병 앞에서 정면돌격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었고, 이는 기병이 전장의 주력이 아닌 부가적인 역할을 하는 보조병과로 전환되도록 만들었다. 이후의 기병 돌격 또한 기병도를 사용해 측면이나 후면에서 공격해 방진을 흐트려 놓는것으로 바뀌었고, 기동성을 저지하는 지나치게 긴 랜스는 불필요해졌기 때문.

또한 위에서 비교된 스웨덴의 하카펠리타트가, 다시금 기병돌격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례긴 했지만, 정작 하카펠리타트는 검기병이었다. 랜스를 사용하던 윙드 후사르와 검과 피스톨을 사용하던 하카펠리타트를 동일시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많다. 하카펠이 돌격전을 벌였다고 하지만, 랜스는 장비하지 않았고 검만 들고 싸웠다.

또 다른 근세의 상징인 테르시오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레 쇠퇴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5. 대중매체에서

5.1. 영화 및 드라마

5.2. 만화 및 애니메이션

5.3. 소설

5.4. 게임

5.5. 기타

6. 기타

파일:Cromwell_tank_in_the_Bovington_Tank_Museum_02.jpg
자유 폴란드군 제 1 기갑사단 소속의 크롬웰 전차
자유 폴란드군 소속의 제 1기갑사단과 현대 폴란드군 제11 기갑기병사단은 윙드 후사르의 날개와 투구를 부대마크로 사용하고 있다. 기갑 기병의 직계 후손이란 점을 생각해 보면 아주 적절하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national shrine of our lady of czestochowa'에는 카틴 학살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거대한 후사르 동상이 있다.


[1] 토바즈시 후사르스키라고 발음한다. 참고로 토바즈시는 폴란드어로 "동료", "동지"를 뜻한다. [2] 검기병이라고도 하는 후사르 랜스를 쓰는 게 특이할 수 있지만, 서유럽으로 유입된 후사르들과 달리 동유럽 원조 후사르들은 때로는 랜스를 사용하기도 했다. [3] 크림 칸국,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 트란실바니아 공국. [4] 현재 라트비아 체시스. [5] 현재 라트비아 코크네제. [6] 현재 에스토니아 파이데. [7] 이 날 전투에서 스웨덴 제국 원수였던 레나르트손이 전사했고, 같이 참전했었던 스웨덴 국왕 칼 9세는 목숨만 간신히 건져 탈출했다. 그리고 포위당한 스웨덴군은 폴란드군에 의해 무참히 도륙당했다. 스웨덴군은 6천 ~ 9천여 명이 전사한 데 비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은 고작 100명 전사하는 경이적인 교환비를 보였다. [8] 당시 스웨덴은 프랑스계 귀족인 야코브 드 라 가르디가 이끄는 외국인 용병대가 주력이었다. 가르디의 용병대는 루스 차르국 군대가 병크짓을 저지른 것과 다르게 침착하게 윙드 후사르의 돌격을 막아냈으나 포병대와 보병 부대를 지원받은 폴란드군에게 뚫려 결국 용병대의 대부분이 항복하고 드 라 가르디는 겨우 목숨을 건져 탈출했다. [9] 당시 드 라 가르디가 했던 것 처럼 목책 방진을 세워 윙드 후사르의 돌격을 나름 막아내면서 버텼지만 러시아 측 지휘관인 드미트리 슈이스키가 반격을 가한답시고 라이터 기병대를 윙드 후사르의 정면에 꼴아박았다. 그 덕에 윙드 후사르는 이 라이터 기병대들에게 돌진을 시전하여 개박살을 내줬고, 기병대가 무참하게 쳐발리는 광경을 본 러시아 보병대는 겁을 지레 먹고는 모두 잽싸게 튀었다. 지휘관인 드미트리 슈이스키는 물론이다! [10] 당시 동맹이었던 몰다비아 공국이 오스만 제국에 붙으면서 배신을 때렸고(다만 더 따지고 들어가면 몰다비아 공국은 150년 가까이 오스만의 봉신국이었다가 폴란드의 회유로 잠시 등을 돌렸던 것이기 때문에, 마냥 배신이라고 하기도 무엇하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의회에서 전쟁 예산을 일체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자가 딸렸었다. [11] 이 전투에서 지휘관인 스타니스와프 주키에브스키가 전사했고, 스타니스와프 코니에츠폴스키, 미코와이 포토츠키 등 폴란드의 걸출한 무장들 대부분이 오스만 제국의 포로로 끌려갔다. 주키에브스키는 이전의 클루쉬노 전투에서 루스 차르국 - 스웨덴 연합군 3만 5천 명을 박살냈었던 명장이었다. [12] 현존 유물을 보면 윙드 후사르의 랜스는 길이가 5m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드문데, 이 중에 3kg를 넘어가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한다. 본래 돌격용 랜스는 적을 맞춰서 부러지는 것이 일반적이긴 하나, 후사르가 쓴 랜스는 기존의 랜스 들보다도 내구도가 떨어졌다. [13] 다만 당시 시파히들은 일반적으로는 경무장을 했다. [14] 혹은 오스만 제국의 경기병 아큰즈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큰즈는 독수리 깃털을 단 장식을 차고 다닌다고 한다. [15] 오스프리의 서적에 따르면 축제나, 예식용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왜냐면 문에 들어갈 때나 나무 사이로 지나갈 때 저 날개 때문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었기 때문. [16]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카프카스 혹은 중동산을 수입한 것이라고 추정 하고 있다. [17] 이 기사를 비티스(Vytis)라고 부르는데 현대 리투아니아 문장에도 등장한다. 벨라루스 독립 초창기 벨라루스에서도 사용했으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가 집권하면서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 [18] 당시 전황은 이 링크에 전부 나오기에 생략함. 참고로 적군 대포는 훨씬 많은 11문. 물론 적군이 대포 활용을 거의 못해서 큰 의미는 없었지만, 요점은 클루시노 전투는 대포로 제압한 전투도 아니었고. 기병 전력을 앞세워 승리한 전투가 명백하다는 것. [19] 이 챕터에서 개그는 말들이 대부분 한다 [20] 실제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 기병들은 전부 윙드 후사르의 후손이라고도 하는 울란이였다. [21] 로한의 컨셉도 '만일 영국이 대륙국가였다면'이었다고 한다. [22] 몸에 호랑이나 표범가죽을 두르고 전장에 나섰기 때문. 실제 윙드 후사르들도 했던 장식이기도 하다. [23] 이들뿐 아니라 장다르메도 이항복이 데려와 편입되었지만 윙드 후사르는 (본질이 경기병이라 갑옷이 없어도 양성할 수 있으므로) 창만 후사르용 랜스로 바꾸면 큰 문제 없이 바로 투입할 수 있었지만, 장다르메는 당장의 갑옷 공급과 중무장한 기사에 강철 마갑까지 버티며 적진으로 돌격이 가능한 군마 공급이 힘들어 당장 일본 원정까지 부대가 완편하기가 무리라 처음 온 20기 그대로 실전 투입된다. [24] 정확하겐 방어무시로 딜을 꽂아버려 실제 윙드 후사르마냥 보병을 도륙내버릴 수 있다. 다만 레이티스는 '방어 무시'라는 효과 특성상 되려 중갑병에 효과가 있고 물량 경보병들에게 약한지라 현실의 윙드 후사르와는 활용처가 정 반대인 유닛이다. [25] 기존의 특수 업그레이드 유닛들은 최종 테크에서 추가로 업그레이드를 하는 형식이었는데, 윙드 후사르는 최초로 기존 테크의 유닛을 대체하는 유닛이 되었다. 이후 추가된 DLC인 '로마의 귀환'에서 추가된 '로마인'이 양손검병-챔피언 업그레이드를 '군단병 업그레이드'로 대체하면서 유일한 대체 특수병 자리에선 내려왔다. [26] 실제 고증상 윙드 후사르도 경갑 병사들은 미쳐돌아가는 교환비로 갈아마셨으나 중갑 병사류에겐 취약했는데, 폴란드의 윙드 후사르도 방어력이 낮은 병종은 미친듯이 잘 갈아버리지만 방어력이 높은 병력들에겐 개박살나기 십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