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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2:08:21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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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논어의 성립과 주석3. 내용과 특징4. 편제5. 여담6. 관련 고사성어7. 외부 링크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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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논어 모습.jpg
[ruby(子曰,ruby=자왈)]: [ruby(學而時,ruby=학이시)][1][ruby(習之,ruby=습지)][2], [ruby(不亦,ruby=불역)][3][ruby(說,ruby=열)][4][ruby(乎,ruby=호)]。[ruby(有朋自遠方來,ruby=유붕자원방래)], [ruby(不亦樂乎,ruby=불역락호)]。[ruby(人不知而不慍,ruby=인부지이불온)][5], [ruby(不亦君子乎,ruby=불역군자호)]。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우고 때에 맞춰 실천하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부터 오고 있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6]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쌓아두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논어 학이(學而)편 1장
논어()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어록을 엮은 경전이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7]이 그의 언행을 모아 책으로 펴낸 것.

논어의 최종 버전은 공자 학파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한 증삼의 제자들이 완성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전 20편, 482장, 600여 문장으로 내려온다. 본래 버전은 제논어, 노논어, 고문논어 세 종류였지만 현재 전해지는 것은 노논어의 교정본이다.

2. 논어의 성립과 주석

2천 년 이상 된 고전들이 대개 그렇듯 오랜 세월에 걸친 수많은 짜깁기로 완성되었다. 논어라는 책은 수백 년에 걸쳐 최소 세 차례 증보되고 편집된 듯하다. 1세대 편집자는 중궁, 자유, 자하 등의 직계 제자, 2세대는 유자, 민자 등의 직계 제자, 3세대는 전국시대 맹자나 동시대, 혹은 맹자 사후의 제자들이다. 대표적인 예로 당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던 관이오를 두고 상론의 <팔일>과 하론의 <헌문>에서 다르게 평한다는 점에서 추측할 수 있다. 이는 노나라와 제나라의 평가가 서로 나뉘었던 것이 통합되었다는 점에서 노논어와 제논어가 합쳐졌다는 뜻이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 당연히 논어가 소실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논어의 원본이 뭔지는 알기가 힘들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분서갱유의 진짜 모습을 고려하면 그 때문에 원본을 알 수 없다는 말은 근거가 희박하다.[8] 어찌되었든 전한대에 이르러 논어 같은 고전이 말하고자 하는 원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연구하는 학풍이 훈고학이란 형태로 나타났다.

이미 한나라 대에 논어의 세 가지 판본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분서갱유 설은 설득력이 적다. 먼저 공자가 일생의 시작과 끝을 보낸 고국 노나라 옛 땅에 전해지던 텍스트(노논어)와 제나라 땅에서 별도로 전해지던 텍스트(제논어), 그리고 한경제 곡부의 공자 생가를 허물다 벽에서 나온 텍스트(고논어)이다. 현재 전해져 우리가 보는 논어는 전한의 장우(張禹)가 노논어를 중심으로 하여 장구(章句)를 나누고, 제논어의 내용을 첨가한 통합본이다.[9]

하안은 "제논어는 문왕(問王), 지도(知道)편이 있으니 노논어보다 2편이 많다."라고 했는데 2010년대에 해혼후묘에서 지도(知道)편으로 추정되는 죽간이 발견되었다. # '논어'라는 명칭이 붙은 때는 기원전 2세기 한나라 경제, 무제 연간이고, 후한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한국에는 삼국시대에 전해진 듯한데, 3-4세기 한성 백제시대 목간에 5편인 공야장(公冶長) 편의 주요 내용이 있다.

논어에 주석을 다는 작업도 이때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져 공안국, 마융, 정현 등이 주석을 달았으나 지금 전해지지는 않고 위나라(魏)의 하안이 이를 바탕으로 《논어집해》(論語集解)를 펴냈다. 이 《논어집해》를 저본으로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황간이 《논어의소》(論語義疏)를, 송나라 때에는 형병이 《논어정의》(論語正義)를 저술하였는데 모두 《논어집해》의 재해석이다.

형병의 《논어정의》는 북송대에 《논어집해》와 함께 십삼경주소에 포함되었다.[10] 성리학이 집대성되기 전까지 가장 많이 읽혔던 것이 바로 이 《논어주소》(論語注疏)이다. 《논어의소》는 현학적 경향이 있음이 특이하다.[11] 형병이 단 주석은 훈고를 중심으로 하는 주석학의 경향에서 의리를 밝히려는 경향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향이 있다. 여기까지를 일반적으로 고주(古註)라고 한다.[12]

이후 남송의 주자가 그동안 축적된 연구성과를 집약해 《논어집주》(論語集註)를 편찬하였는데, 이것을 신주(新註)라고 한다. 여기에는 《논어주소》의 설은 물론, 정호(程顥), 정이(程頤), 사량좌(謝良佐), 장식(張栻), 범조우(范祖禹) 등 송대 유학자의 설이 다양하게 망라된 데다가 원대 이후 성리학이 관학의 지위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논어집주》는 가장 보편적으로 읽히는 논어 주석서로 자리매김하였다.[13]

이후 청대에는 고증학이 발달하였고, 이러한 고증학적 성과들이 경전 독해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유보남의 《논어정의》(論語正義)가 그러한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주석이다. 청나라가 멸망하고 20세기에 들어서는 정수덕의 《논어집석》(論語集釋), 양수달의 《논어소증》(論語疏證), 양백준의 《논어역주》(論語譯注) 역시 중요한 주석으로 꼽힌다.

한국의 경우 퇴계 이황이 현존 최초 논어 주석인 논어석의(論語釋義)를 편찬했다. 이는 논어의 해석에 대해 주자의 견해에 기반해 정확성을 더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한국 성리학의 중요한 작업 중 하나이다.

17세기 이후에는 지속적으로 여러 학자들의 주석이 출간되었다. 이이의 학통인 김장생이 71세 나이로 당대 및 이전의 견해를 모두 정리해 저술한 논어변의(論語辨疑), 정여립의 옥사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아 실각한 권득기의 논어참의(論語僭疑), 윤근수의 제자인 조익의 논어천설(論語淺說), 김장생과 김집의 제자인 이유태가 논어에 대해 난해하거나 의혹이 있는 부분을 정리해 편찬한 논어답문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도 돋보이는 것은 당연히 송시열의 주석이다. 송시열은 일찍이 박세채와 함께 퇴계학파의 사서 해석을 비판하는 퇴계사서질의의의(退溪論語質疑疑義)를 저술하였는데, 이 중 논어질의(論語質疑) 편에서 논어의 58편을 주석하였다. 이후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주희의 주석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생각해 1689년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논어와 맹자의 집주서인 논맹혹문과 기타 송대 주자학자들의 주석을 모은 논맹정의를 합쳐 정리한 논맹혹문정의통고(論孟或問精義通攷)를 편찬했다.

그의 이러한 학문적 경향은 노론 낙론의 대표자 김창협에게 계승되어 다양한 논어 주석서를 찾아본 끝에 논어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고 보아 서술한 논어설(論語說)이 나오게 된다. 또 송시열 이단상의 제자이며 역시 노론 낙론인 임영은 논어차설(論語箚錄)을 통해 수양론의 관점에서 논어를 바라보아 또 한단계의 독자적인 경전 해석을 이루어냈다. 송시열의 수제자이자 호론의 대표자 권상하 역시 논어에서 의문나는 부분을 정리해 풀어 논어집의(論語輯疑)라는 주석서를 펴냈다. 한편 당대의 학문적 이단아였던 박세당은 논어사변록(論語思辨錄朴)에서 탈주자학적, 독자적 경전 해석을 시도했다.

18세기에는 노론 학맥 이외에 다양한 주석서가 편찬되었다. 강화학파의 시조 정제두 양명학적 입장의 주석서 논어설(論語說)을 편찬하였고, 송시열의 죽음을 주장하다 유배된 강경 남인 이문부가 논어강목(論語講目)을 펴내 기호학파 쪽에 치중된 논어 연구를 비판했다. 그의 주석 작업은 한동안 위축되었던 영남학파의 논어 연구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었다. 한편 그는 학문적으로 주자와 이황을 따르기는 했으나 주희의 논어집주는 비판하였고, 이는 제자 성호 이익에게로 이어졌다.

성호 이익은 이러한 스승의 견해를 이어받고 본인의 학문적 업적을 더해 논어질서(論語疾書)를 편찬했다. 다만 통념과는 달리 주자학을 부정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않았고, 단지 몇몇 구절에서 고증학적 견해를 더한 것에 주희의 수양론을 합친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후대의 근기남인들과 소위 '실학'이라 불리는 성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한편 노론, 특히 낙론을 중심으로도 주석서가 계속 편찬되었다. 노론이자 실학자인 위백규는 이이-송시열-김창협의 도통을 이어받아 당대 동아시아에서 인기를 끈 수사적 분석법을 적용해 논어차의(論語箚義)를 저술하였다. 이는 당대 조선의 학문이 타국과의 교류도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정약용이 일본 에도 막부의 이토 진사이(伊藤仁斎),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같은 인물까지 참고하여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14]를 썼다. 다만 조선시대 인물들의 사고를 추적하는 경우에는 주희의 《논어집주》(論語集註)를 주로 읽는다. 조선 지식인들은 기본적으로 주희의 성리학에 입각해 사고했기 때문이다. [15]

이상의 인물 및 저작들은 서로 살았던 시기가 심하면 1500년은 훌쩍 차이나며 학문관도 그만큼 상이하므로, 같은 논어임에도 결코 비슷한 종류의 저작이라고 할 수 없다.

3. 내용과 특징

난해하다. 내용 자체가 어렵다기보다도 맥락이 희박하고 공자와 그 제자들의 간단한 대화만 덩그러니 남아 있으니 깊이 있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공자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16]라고 한마디 했는데,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어떤 식으로 그 말을 했는지는 없고 그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라는 한 마디만 남아있다. 말 그대로 상황은 하나도 없고 말씀만 남아 있으니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 물론 이 경우는 이미 널리 알려진 말이지만, 역시 정확한 맥락이 어땠는지는 영영 알 길이 없다.

게다가 인, 예, 충 등의 의미가 후대 유교에서 변화, 각색된 경우가 있다. 공자가 말하는 인, 예, 충 등의 의미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인, 예, 충의 의미가 상충되기도 하므로 현대인들이 읽기에는 명확하게 와닿지를 않는다. 하기사 2천 년도 더 전의 책을 글자만 보고 바로 이해가 간다면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화가 아무 것도 없다는 소리니 말이 될 리가 없다. 더구나 한문 특유의 중의적인 의미까지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예를 들어 학이편에 나오는 증자의 말 중 '전불습호(傳不習乎)'라는 문장은 크게 아래와 같은 4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전해 받은 것을 익히지 못했는가?
  2. 남에게 전하고도 스스로 익히지 못했는가?
  3. 고전(古傳)을 익히지 못했는가?
  4. 스스로 익히지 못한 것을 남에게 전하고 있는가?

또 위정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 중 '색난(色難)'이라는 말도 나온다. 그대로 해석하면 '안색이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2가지 해석이 있다.
  1. 자식이 늘 부드러운 얼굴빛으로 부모를 섬기기는 어렵다.
  2. 자식이 부모의 얼굴빛을 살피고 그에 맞게 대처하기 어렵다.

저 긴 문장을 두 글자로 확 줄여버리니 해석하기 어려울 수밖에. 다만 조선시대로 한정하면 사실상 주자의 주석이 절대기준이었기 때문에 주자의 주석을 보면서 공부한다면 크게 혼란스러운 점은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중의성은 고전 한문의 특징에서 비롯된 것으로,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성과 함께 글의 해석하기에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고대에는 책을 만들기가 지극히 어려웠다. 간독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책을 만드는 일은 굉장히 많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때문에 길이를 줄여, '꼭 필요한 공자 어록'만 요점 노트 비슷하게 만들고 이를 모조리 암송한 후, 구체적인 맥락과 해석은 스승에게 구두로 전수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자는 남아도 말은 흩어져 사람마다 경전의 풀이가 달라졌다. 후대에 주석으로 남은 부분을 제외하면 해석 부분이 사라진 것이다.

물론 해석을 구전의 영역에 둔 것이 정확성을 훼손하는 것만은 아니다. 일정한 체계와 연속성이 있다면 오히려 문자 기록만 남아있을 때보다 구전이 더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그 유명한 사해문서이다. 사해문서는 구전으로 이어져온 경전이 오류투성이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천여 년이 지나도록 거의 비슷하게 보존한 사례이다.

각설하고, 그 외에도 《논어》는 여러 단문의 모음집이라 앞 내용과 뒷내용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공자의 말을 제자들이 기록한 논어의 몇몇 구절은, 배경지식이 없을 시 곡해하거나 아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이와 비슷한 예로 《맹자》 양혜왕 편을 들 수 있다."'처음으로 나무 인형을 만들어 순장에 사용한 사람은 틀림없이 자손이 끊어져 후대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신 적이 있으니"[17]라는 문구는 순장에 대한 공자의 적개심을 알지 못한다면 이해가 힘든 부분이다.

그런 만큼, 하나의 일관된 사상하에 전개된 노자 장자, 중용, 맹자보다 훨씬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들은 원전 하나만 파도 이해가 되지만, 《논어》는 획일화된 사상이 직접 드러나지 않는 명언 모음집을 읽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문 해석 면에서는 일부 난해한 비유들을 제외하면 맹자가 더 쉽고 주제의식도 명확하다. 논어는 책 전체를 꿰뚫는 주제의식을 찾기가 대단히 어려운 경전이다.

이것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논어를 읽으면 "그냥 착하게 살라는 말 아니야?"로 오해하기가 매우 쉽다. 사실 이건 유교에 대한 흔한 오해이기도 하다. 물론 논어는 책 전체를 꿰뚫는 일정한 사상하에 쓰여진 책이지만,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완독 후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게 된다.

이는 서양에 소크라테스처럼 동아시아의 철학자인 공자가 시대와 시대의 문제를 고찰하며 사색한 관념을 제자들이 대화 형식으로 옮겨 적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살기에도 버겁지만 시대를 앞서간 철학자 들은 개인뿐만 아니라 인류의 인생 자체를 사는 것과 같은 고민을 했었기 때문이랄 수 있다. 이로 인해 읽는 사람은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진리만 말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답답함과 너무 추상적이라서 이해가 쉽지 않은 어려움을 느끼기가 쉽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주는 교훈이 분명히 있는데 '항상 밝은 얼굴로 부모를 대하는 것', '말 한 것은 당연히 행동으로 옮겨야 하기 때문에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등등이 있다. 일부 키보드워리어에게는 더욱 그렇다할 수 있다.나부터 조심하자

4. 편제

논어의 편제는 모두 20편이다. 편들의 제목은 각 편의 맨 첫 단락 중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기를(子曰)'을 제외한 구절을 따서 붙인 것이다. 상론 10편과 하론 10편은 문체와 호칭 및 술어 면에서 분명히 차이가 난다. 상론은 문장이 간략하고 글자 수가 적은 반면, 하론은 문장이 길고 글자수가 많다. 또한 상론의 마지막 10편 향당은 공자의 일상생활을 담아 결말을 내는 셈이어서, 하론 10편의 사실성을 두고 의문이 있다. 여하간 상론이 먼저 쓰였음은 거의 확실하다고.

5. 여담

논어는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영어로는 아서 웨일리와 찰스 뮬러, 그리고 윌리엄 에드워드 수틸(1861~1935)이 번역한 것이 가장 유명하다. 일찍이 16세기 후반에 논어의 일부는 예수회 중국 선교사들이 라틴어로 번역했다.

한국어 번역은 워낙 다종다양하며 동아시아철학 전공자들은 '괜찮은 논어 번역본 추천해 달라.'는 질문을 받으면 난감해한다. 번역본 종류가 워낙 많거니와 동아시아철학 전공자 수준이라면 번역본이 아닌 원문으로 논어를 읽기 때문. 따라서 동아시아철학 전공자에게 추천을 부탁해 봤자 '서점에서 죽 훑어 봐서 자신에게 적당하다고 느껴지는 것을 고르라.' 하는 판에 박힌 답변만 듣게 될 것이다.

한문 초심자들이 논어로 공부를 시작하기도 한다. 논어와 맹자 어느 쪽을 먼저 읽는 것이 좋은지는 일단 맹자가 문장이 매끄럽다는 이유로 선호도가 조금 높기는 하지만 개인에 따라 의견이 다르다. 어차피 초심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고 그러면 단문 위주로 구성되고 중의적 해석이 많아 한문 읽는 맛이 있는 논어를 먼저 읽어도 된다는 쪽도 있다. 이이의 《 격몽요결》은 맹자보다 논어를 먼저 읽는 쪽을 추천했다.

또한 내용을 보면 딱딱한 유교 경전의 이미지에 비해 생각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제법 있다. 공자가 제자들을 평가하면서 솔직하게 심정을 나타내는 모습이나, 제자들이 공자에게 이러저러하게 질문하고 따지자 공자도 이러저러하게 반박하고 설명하는 모습 등, 공자와 그 제자들 역시 평범한 스승과 제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자로에 대한 애정 어린 갈굼(...)은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공자가 혹독하게 평가하는 제자 중에서도 유독 비난당하는 제자가 있다. 그는 바로 재여(宰予). 3년상을 하지 않아도 제 맘은 편안한뎁쇼? 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책 안 보고 자다가 욕을 먹기도 하고(...)[22] 자로의 경우처럼 부족한 제자라도 나름의 장점을 인정하고 꾸짖으면서 이끌어주려는 공자가 유독 독한(...) 모습을 보이는 제자. 자로 문서에서도 확인 가능하지만, 자로를 꾸짖는 건 어디까지나 교육이 목적이다. 그런데 재여는 인(仁)하지 않다거나, 조각도 못 하는 썩은 나무토막이라며 화를 낸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재여가 사상적으로 공자와는 다른 견해를 가진 것이 아닌가라는 말도 있고, 훗날 재여가 제나라에서 반역 사건에 참가했다가 삼족이 몰살당한 뒤, 공문십철이라고까지 불린 그와의 연관성을 최대한 부정하고자 유가 계열에서 재여를 깎아내리는 말을 많이 퍼뜨렸다는 말도 있다. 이래저래 흥미로운 인물.

공자가 사람을 구타한 기록도 있다. 《예기》〈단궁 하〉를 보면, 공자의 어린 시절 같은 마을 사람인 원양(原壤)은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슬퍼하지 않고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등[23] 얽매이지 않고 사는 사람이었기에 도교 사상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으나 공자의 입장에서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논어》〈헌문〉에 이르기를, 어느 날 원양이 공자를 찾아갔을 때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거만하게 굴자 공자가 "어려서는 공손하지 않았고, 나이들어서는 일컬을 바도 없으면서 늙어서는 죽지도 않으니 네놈이 바로 도적놈이다!" 라면서 원양의 정강이를 지팡이로 때렸다는 기록이 있다늙으면 죽어야 돼 하면서 사람을 팼다

공자가 대노했다는 해석도 있으나 실제로 대노했다는 기록은 없이 위의 언행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때문에 김용옥은 이를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여, 사실 이것은 공자의 소탈한 면모를 보여주는 자료들 중 하나로, 못난 친구를 농담조로 힐난하며 투닥대는 흐뭇한 모습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기사가 고전 한문으로 기록되고, 공자가 이제껏 기계적인 성인으로만 해석되어서 다만 준엄한 꾸짖음으로 여겨져 왔지만, 실제로는 "짜식, 왜 사냐?"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 사실 원양은 단순한 공자의 동향인이 아니라 정말로 공자의 죽마고우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노래를 불렀다는 기사를 좀 더 자세히 살펴 보면 이렇다: 원양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공자가 그 겉 널 짜는 일을 도왔다. 헌데 원양이 목재위로 올라가 말하기를 "내 어머니의 상을 당한지도 오래되었고, 감정을 음률에 맡기지 못한 지도 오래되었다" 하며 노래하기를 "너구리 머리 털 반드러움이여, 여인 손 잡은 듯 보드랍네!(나뭇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 하였다. 공자가 그냥 못 들은 체 하였는데, 제자들이 "선생님께서는 저 사람과 사귀기를 그만두지 않으시려는지요?" 하였다. 이에 공자가 답하기를 " 구(丘: 공자의 이름)는 들었노라, 친우(親友), 그 친(親)을 잃지 말 것이며, 고우(故友), 그 고(故)를 잃지 말 것이라!" 하였다. 이 기사를 감안할 때 김용옥의 주장은 나름 설득력이 있다.

논어를 공자의 저작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정작 공자 본인은 단 한 권의 저술도 쓴 적이 없다. 잘 알려진 춘추나 시경 등도 술이부작(述而不作), '그대로 서술하되 창작하지는 않는다' 의 원칙하에 편집하기만 했을 뿐이다. 혹자는 공자가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편집, 즉 술이는 술이인데 완전히 부작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공자 본인의 편집 철학은 술이부작이라고 한다.[24][25]

성균관대학교의 졸업 필수 과목이다.

역대 중국, 한국의 왕조들과 일본의 천황가, 쇼군가, 다이묘들도 배우는 학문 중 하나였다. 근대 일본의 기업가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논어와 논어의 가르침을 살면서 굉장히 중요시 여겼다.

6. 관련 고사성어


그리고 이단(異端), 숙맥도 원래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7. 외부 링크

8. 관련 문서


[1] 여기서 時를 '때때로'가 아니라 '때에 맞추어 적절하게'로 번역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習은 실천의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사실 습의 구성이 새가 날개짓을 하는 모양에서 따왔다. 새는 날개짓을 실천으로 배우므로 결론적으로 배웠으면 적절한 시기에 실천하란 뜻으로 해석이 된다. 덧붙여 한대에는 "때에 맞추어"의 해석이 대세였고, 주희의 논어집주에서는 "때때로"라는 해석이 대세였다. 여기서 "때때로"는 수시로, 시간 날 때마다라는 뜻이다. [2] 일각에선 중국어의 '下去'와 비슷한 뉘앙스를 가지는 조동사의 之로 보고 '익혀 나간다면'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3] 대체로 한문에서 부정의문문의 형태로 많이 쓰이는 '不亦~乎'로 보고 亦을 허사로 간주하고 해석을 안하는 경우도 있다. [4] 말씀 설이 아니다. 기쁠 열()로 해석하고 읽는다. [5] 慍: 성낼 온. 속으로 쌓아두고, 원망하며 화내는 것을 말한다. [6] 이 두번째 구절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을 때 처음으로 한 말로 유명하다. 최인훈 소설 회색인 첫마디로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않은가"로 나오기도 했다. [7] 논어는 공자의 제자에서부터 그 제자 대에 이르기까지 2대에 걸쳐서, 혹은 그 이상의 시간 동안 수 차례에 걸쳐서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개중에서도 유자를 거쳐 증자의 계열에서 현재의 논어가 완성되었다고 추정되는데, 논어에서 공자를 제외하고 子가 붙는 이가 바로 유자와 증자이기 때문. 한편으로 공자 생전의 생생한 이야기들이 많고 안회나 자공 등에게는 子를 안 붙이므로, 초기 버전은 공자의 제자 대에 만들어졌고, 개정본을 유자와 증자 계열에서 완성했다고 여긴다. 한편으로는 자왈파편(공자 생전의 말)을 달리 모아둔, 공자 제자대에 이미 완성된 논어의 원형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올 김용옥은 자공이 6년상을 할 때 논어의 초기버전을 만들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8] ≪논어≫의 성립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은 대부분 ≪ 춘추좌씨전(좌전)≫에서 근거를 찾는데,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논어≫가 ≪좌전≫보다 앞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9] 《논어장구》(論語章句), 혹은 《장후론》(張侯論)이라고도 한다. [10] '경문(대문)-집해(대주)-정의(세주)'의 형식으로 편집되었다. [11] 이런 이유로 이미 《논어정의》 단계에서도 《논어의소》의 설은 많이 까인다. [12] 혹은 《논어주소》와 같이 십삼경주소에 포함된 것만을 특정해서 고주라고 하기도 한다. [13] 현대에 논어 번역서를 내는 경우에도 이를 저본으로 삼는다. [14] 일상어를 잘 살린 명번역으로 꼽히는 이을호의 한글 논어가 이를 저본으로 삼았다. [15] 논어 자체를 공부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한문학과등 관련 학과에서도 주희의 주석을 주로 한다. 예컨대 한국고전번역원의 부설기관인 교육원의 입학시험에서, 시험범위가 '논어'일지라도 문제는 논어 원문과 주희의 주석을 포함한다. [16]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참고로 부정의문문을 표현할 때 관습적으로 不亦~乎의 형태로 나타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亦(또한)의 의미를 굳이 해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 역시 있다. [17] 맹자 원전 《맹자》 우재호 옮김, 을유문화사, 2007, 권1 양혜왕장구 상 [18] 학이시습지의 "학이"다. [19] 제후는 6일무, 대부는 4일무까지만 할 수 있다. [20] 예를 들면, 똑바로 썰지 않았거나 너무 익혔거나 덜 익힌 음식은 손도 대지 않는 공자의 성향이라든가, 반드시 겉옷과 색이 똑같은 가죽옷을 골라서 입고 나가는 습관 등등. 깔맞춤 [21] 원래 안회인데 안회의 자가 자연이라 이렇게 된 것. 안자연이라 불러야겠지만, 공자는 안회든 다른 제자들이든 종종 뒷글자만 부르곤 했다. "연아"라고 하는 식. 그래서 안연이 되었다. [22] 다만 이 부분은 낮에 공부를 안하고 딴 짓을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23] 어머니가 돌아가신 걸 좋아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것이다. [24] 여담이지만 웬만한 사상가나 종교의 교조는 스스로 책을 쓰는 일이 없다. 꾸란 무함마드가 한 말을 후세에 정리한 것이고,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담은 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석가모니 불경도 그렇다. 하다못해 공자와 비견될 만한 소크라테스도 < 변명> 등에서 플라톤에 의해 그 사상이 쓰였다. 거꾸로 말하면, 그렇기에 후세의 제자들에 의해 스승의 주장이 재단당할 확률도 없지 않게 있고, 그래서 욕도 먹는 게 사실이다. 초대형 규모의 사상집단의 교조급이 직접 자료를 남기는 경우는 기껏해야 도가의 노자가 남긴 노자( 도덕경) 정도. 그마저도 사후에 도가가 다른 형태로 흘러가면서 종교화된 것이라 이마저도 얘기가 조금 다르긴 하다.(노자 당대의 죽간본과 현대에 전해진 도덕경을 비교해보면 그 사상의 차이가 적지 않게 난다. 자세한 것은 노자 항목 참조.) [25] 메이저 급은 아니나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종교 가운데에 원불교 창시자가 살아있을 때에 교리와 경전을 확립한 바 있으나, 이 또한 박중빈이 직접 저술한 것은 아니고, 송규 등 핵심 제자가 글을 써오면 감수하는 형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