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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16:45:34

하워드 휴즈

United States Congressional Gold Medal
미합중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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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1777년 1779년 1781년
조지 워싱턴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 앤서니 웨인 사령관 헨리 리 3세 준장 대니얼 모건
1781년 1787년 1800년 1805년 1813년
소장 너새니얼 그린 존 폴 존스 대령 토머스 트럭스턴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1813년 1814년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스 2세
대위 에드워드 매콜
대령 제임스 로렌스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1814년 1814년, 1848년 1814년
대령 루이스 워링턴 대령 존스턴 블레이클리 소장 제이콥 브라운 소장 윈필드 스콧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1814년 1815년 1816년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스 소장 알렉산더 마콤 소장 앤드루 잭슨 대령 찰스 스튜어트 대령 제임스 비들
1818년 1835년 1846년, 1847년, 1848년 1847년 1854년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대령 조지 크로간 소장 재커리 테일러 소머스 호
장교 및 승무원 구출
중령 덩컨 잉그함
1858년 1863년 1864년 1866년 1867년
프레더릭 로즈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
조지 C. 스투퍼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1867년 1871년 1873년 1874년, 1904년 1883년
조지 피바디 조지 F. 로빈슨 대령 재러드 크랜달 그 외 존 혼 주니어 존 폭스 슬레이터
1888년 1890년 1900년 1902년 1909년
조셉 프랜시스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중위 프랭크 H. 뉴컴 중위 데이비드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새뮤얼 J. 콜 박사
라이트 형제
1912년 1914년 1915년 1928년
선장 아서 로스트론 폴 H. 크라이봄 그 외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스 무히카
찰스 린드버그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1928년 1929년 1930년 1936년
토머스 에디슨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 소령 월터 리드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링컨 엘즈워스
1936년 1938년 1939년 1940년
조지 코한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하워드 휴즈 목사 프랜시스 퀸 윌리엄 시넛
1942년 1945년 1946년
롤런드 바우처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준장 빌리 미첼
1949년 1954년 1955년 1956년 1958년
앨번 W. 바클리 어빙 벌린 조너스 소크 박사 남북 전쟁의 참전 용사 준장 하이먼 리코버
1959년 1960년 1961년 1962년
로버트 고다드 로버트 프로스트 토머스 앤서니 둘리 3세 밥 호프 샘 레이번
1962년 1968년 1969년 1973년 1977년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월트 디즈니 윈스턴 처칠 로베르토 클레멘테 매리언 앤더슨
1978년 1979년
중장 아이라 이커 로버트 F. 케네디 존 웨인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휴버트 험프리
1979년 1980년 1982년
미국 적십자 케네스 테일러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팀 베아트릭스 여왕 대장 하이먼 리코버
1982년 1983년
프레드 워링 조 루이스 루이스 라머 레오 라이언 대니 토머스
1984년 1985년
해리 S. 트루먼 레이디 버드 존슨 엘리 비젤 로이 윌킨스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1986년 1987년 1988년
네이선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해리 차핀 에런 코플런드 메리 래스커 제시 오언스
1988년 1990년 1991년
앤드루 와이어스 로런스 록펠러 대장 매튜 B. 리지웨이 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 콜린 파월
1994년 1996년 1997년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 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프랭크 시나트라 마더 테레사 바르톨로메오스 1세
1998년 1999년
넬슨 만델라 리틀록 9인 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로자 파크스 시어도어 헤스버그
2000년
존 오코너 찰스 M. 슐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나바호족 코드 토커
2002년 2003년
대장 휴 셸턴 토니 블레어 재키 로빈슨 도러시 하이트 박사 조지프 디레인
해리 & 일라이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2004년 2006년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터스키기 에어맨 달라이 라마 14세 바이런 넬슨 노먼 볼로그 박사
2007년 2008년
마이클 데바키 박사 아웅 산 수 치 콘스탄티노 브루미디 에드워드 윌리엄 브룩 3세 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2009년 2010년
여성 공군 군무원 조종사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아널드 파머 무함마드 유누스 제100 보병대대
제442 보병연대 전투단
군사정보국
2011년 2012년 2013년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전우회 9.11 테러 참사 사망자 라울 발렌베리 애디 메이 콜린스
데니스 맥네어
캐럴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제1 특수임무단
2014년
둘리틀 특공대 멤버 미국의 공군 에이스 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
시몬 페레스 모뉴먼츠 맨
2014년 2015년 2016년
제65 보병연대 잭 니클라우스 셀마 몽고메리 행진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 OSS
2017년 2018년
밥 돌 래리 도비 제2차 세계 대전
중국계 미국인 참전 용사
USS 인디애나폴리스 승무원 안와르 사다트
2019년
스티브 글리슨 캐서린 존슨 크리스틴 다든 도로시 본 메리 잭슨
2019년 2020년 2021년
무명의 수여자들 그렉 르몬드 미국 국회의사당 경찰
컬럼비아구 경찰청 소속 경찰관
제369 보병연대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전사한 13명의 장병
2022년 2023년
미 육군 제23부대 본부 특수부대
제3133 신호 복무 중대
제6888 중앙우편대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상선 선원
에밋 틸
메이미 틸모블리
}}}}}}}}}

파일:E8379242-641F-4E16-9EC4-4DDE7A61F63B.png 스미스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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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국립 교육재단 스미스소니언 재단의 잡지,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고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colbgcolor=#000047><colcolor=#FFC224> 개척자들 <colbgcolor=#FFF,#000>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헨리 허드슨 | 아메리고 베스푸치 | 존 스미스 | 조반니 다 베라차노 | 존 뮤어 | 메리웨더 루이스 | 사카자위아 | 키트 카슨 | 존 웨슬리 파월 | 닐 암스트롱
혁명가 & 저항가들 마틴 루터 킹 | 로버트 E. 리 | 토머스 페인 | 존 브라운 | 프레드릭 더글러스 | 수전 B. 앤서니 | W. E. B. 듀보이스 | 테쿰세 | 타탕카 이요탕카 |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 말콤 엑스
대통령들 조지 워싱턴 | 토머스 제퍼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우드로 윌슨 | 에이브러햄 링컨 | 제임스 매디슨 | 앤드루 잭슨 | 시어도어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로널드 레이건 | 조지 W. 부시
첫 여성들 포카혼타스 | 엘리너 루스벨트 | 힐러리 클린턴 | 마사 워싱턴 | 오프라 윈프리 | 헬렌 켈러 | 소저너 트루스 | 제인 애덤스 | 이디스 워튼 | 베티 데이비스 | 세라 페일린
범법자들 베네딕트 아놀드 | 제시 제임스 | 존 윌크스 부스 | 알 카포네 | 빌리 더 키드 | 윌리엄 M. 트위드 | 찰스 맨슨 | 와일드 빌 히콕 | 리 하비 오즈월드 | 러키 루치아노 | 존 딜린저
예술가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앤디 워홀 |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 |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 잭슨 폴록 | 존 제임스 오듀본 | 조지아 오키프 | 토머스 에이킨스 | 토머스 내스트 |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 앤설 애덤스
종교인들 조셉 스미스 | 윌리엄 펜 | 브리검 영 | 로저 윌리엄스 | 앤 허치슨 | 조너선 에드워즈 | 라파예트 로널드 허버드 | 엘런 화이트 | 코튼 매더 | 매리 베이커 에디 | 빌리 그레이엄
팝 아이콘들 마크 트웨인 | 엘비스 프레슬리 | 마돈나 | 밥 딜런 | 마이클 잭슨 | 찰리 채플린 | 지미 헨드릭스 | 마릴린 먼로 | 프랭크 시나트라 | 루이 암스트롱 | 메리 픽포드
제국-건설자들 앤드루 카네기 | 헨리 포드 | 존 D. 록펠러 | J. P. 모건 | 월트 디즈니 | 토머스 에디슨 |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 하워드 휴즈 | 빌 게이츠 |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 스티브 잡스
운동선수들 베이브 루스 | 무하마드 알리 | 재키 로빈슨 | 제임스 네이스미스 | 아널드 슈워제네거 | 타이 콥 | 마이클 조던 | 헐크 호건 | 짐 도프 | 세크리테리엇 | 빌리 진 킹
출처 }}}}}}}}}

<colbgcolor=#000><colcolor=#fff> 하워드 휴즈
Howard Hughes
파일:Howard_Hughes.jpg
본명 하워드 로바드 휴즈 주니어
Howard Robard Hughes Jr.
출생 1905년 12월 24일
텍사스주 엄블
사망 1976년 4월 5일 (향년 70세)
텍사스 휴스턴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사업가, 비행사, 공학자, 영화 제작자, 감독, 자선가
학력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수학,항공공학/중퇴)
라이스 대학교 (중퇴 / 1924)
수상 하몬 트로피 (1936, 1938)
콜리어 트로피 (1938)
의회 명예 황금 훈장 (1939)
옥타브 샤누트 상 (1940)
NAHF 입성 (1973)
활동 1926년 ~ 1976년
신장 193cm
부모 아버지 하워드 로바드 휴즈 시니어
어머니 앨린 스톤 게이노
배우자 엘러 바츠 라이스(1925년 - 1929년, 이혼)
진 피터스(1957년 - 1971년, 이혼)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영화 제작자로서2.3. 파일럿으로서2.4. 항공기 제작자로서2.5. 쓸쓸한 노년
3. 모르몬 유언장 스캔들4. 대중매체에서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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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사업가(휴즈 공구회사, 휴즈 항공, TWA 등)이자 비행사이자 공학자, 그리고 영화 제작자.

가장 미국적이었던 부자이고, 평생 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은 다 해보거나 시도해본 사람이었다. 이런 모습이 진취적이고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미국인들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억만장자의 삶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워드 휴즈가 사망한 후 그가 실제로는 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여러 신체질환과 정신질환을 앓았으며 이상적인 억만장자의 삶과는 한참 먼 삶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도리어 그의 뚜렷한 캐릭터 때문에 더 유명해졌다.[1]

2. 생애

2.1. 유년기

1905년 텍사스주의 휴스턴에서 성공한 사업가인 하워드 로바드 휴즈와 유복한 영국의 귀족혈통인 앨린 스톤 게이노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하워드 휴즈 시니어는 하버드 출신 변호사였다가 석유를 채굴할 때 쓰는 거대한 드릴을 발명해서 엄청난 부자가 되었으며[2], 어린 하워드 휴즈도 이런것 저런것을 스스로 만들어보며 기계공학에 상당한 소질을 보인다.

12살 때 아버지의 회사에 있던 기계 부품들을 조립해서 모터가 달린 전동 자전거를 만들었으며 Caltech[3]에서 수학과 항공공학 수업을 청강했고 텍사스주의 명문 라이스 대학교에 기부입학으로 진학해 공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1922년 16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2년 뒤인 1924년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하워드 휴즈는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휴즈 공구사(Hughes Tool Company)를 물려받았다. 18살의 어린 하워드는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하다 자퇴한 뒤에 엘러 라이스라는 여인과 결혼하고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영화제작을 위해 할리우드로 떠난다.

2.2. 영화 제작자로서

어리고 야심 많은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는 할리우드에서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한다. 처음에는 코미디 영화를 찍었으며 흥행에도 성공하고 아카데미상 후보로 오르며 승승장구했다.

하워드 휴즈는 내심 아무도 범접하지 못할 대작을 만들어내겠다는 욕망으로 1927년부터 제작이 시작된 1930년작 영화 < 지옥의 천사들>에 착수하기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투기 조종사들에 대한 이 영화는 3년이 넘는 제작기간이 소요된다. 제작 첫 1년엔 비행기 모형을 이용해 촬영하려고 했으나 조잡함에 실망해 진짜 비행기를 이용해 촬영하게 되었다. 촬영기간 동안 비행기 조종사들 3명이 죽었으며 휴즈도 비행기 추락사고를 당해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머리를 다치고 만다.

250만불의 극장수익을 얻으며 흥행에 대성공했는데, 제작비만 280만불이 들어 흑자는 보지 못했다. 휴즈는 이후에도 < 스카페이스> 그리고 <무법자>를 통해 영화 제작자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이어나갔다.

이때 할리우드에서 영화 제작사들 및 소위 큰손들은 하워드 휴즈를 매우 기피했다. 하워드 휴즈가 너무 무리하고 허황된 의뢰를 하거나 부탁을 했기 때문. 오죽하면 당시 워너 브라더스사의 사장이 "휴즈 씨, 우리는 당신처럼 취미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돈을 벌려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라고 했을 정도로[4] 도저히 그 당시 기술력으로 감당할 수 없거나, 철저히 본인의 취향으로 점철된 프로젝트를 의뢰했다.

이 기간동안 하워드는 많은 여배우들과 데이트를 했는데, 하워드 휴즈의 첫 번째 부인인 엘러 라이스는 이런 휴즈의 태도에 염증을 느껴 1929년 그와 이혼한다. 이혼하고도 24살의 젊고 키 크고 잘생긴 데다 돈도 많았던 휴즈는 집중적으로 여배우들과 교제를 시작한다. 이때 탑스타였던 여배우들은 다 하워드 휴즈와 데이트를 해보았다고 할 정도다. 공식적으로 언급된 여배우만 해도 캐서린 헵번, 베티 데이비스, 에바 가드너, 진저 라저스, 리타 헤이워스, 진 티어니였을 정도. 하워드 휴즈는 열정적으로 여배우들과 교제를 했으며, 심지어 몇 명의 아름다운 여성들을 자신의 영화사와 계약시켜서 스타로 키워냈다. 1930년대 섹시 스타였던 진 할로우가 대표적인데 당연하게도 염문설이 돌았다.

이렇듯 RKO 라디오 픽쳐스를 인수하면서 영화 제작에 몰두했으나, 1957년 존 웨인이 등장하는 〈제트 파일럿〉 프로듀서를 맡은 것을 끝으로 영화 제작은 완전히 손을 떼게 된다.

2.3. 파일럿으로서

하워드 휴즈의 비행기, 그리고 하늘에 대한 동경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타 보았던 수상기의 경험으로부터 시작한다. 하워드 휴즈는 항공면허를 취득, 이 와중에 찰스 린드버그와 비슷한 면허번호를 가지고 싶어 담당부서에 끈질기게 요청하여 결국 훨씬 앞선 번호로 면허를 재취득하면서 곧바로 더글라스 항공사[5] 등을 통해 개인 비행기를 발주하면서 광범위한 개조를 실시하여 자신만의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워드 휴즈는 곧 기존의 항공사들이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작업을 하기가 어려움을 깨닫고[6] 글렌 오데커크(Glenn Odekirk) 등 항공 엔지니어들을 영입, 휴즈 공구 주식회사 내에 항공기 사업부[7]를 세우고 자신의 구미에 맞도록 기존의 항공기를 개조하기 시작했지만 하워드 휴즈는 성미에 차지 않아 결국 새로운 항공기 설계에 돌입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H-1 레이서. 속도경주용으로 제작된 레이서를 탄 하워드 휴즈는 곧바로 1935년 9월 13일 시속 352마일(563km/h)를 돌파, 세계신기록을 수립한다. 이어 하워드 휴즈는 북미 대륙횡단기록에 도전, H-1 레이서에 더 큰 주익과 익내연료탱크를 탑재하여 항속거리를 늘려 북미 대륙횡단기록을 갱신한다.

그리고 1938년 7월 1일, 휴즈는 휴즈 항공기 회사에서 개조한 록히드 L-14 슈퍼 엘렉트라를 이용, 세계일주 비행기록 수립에 도전하여 91시간만에 세계일주를 완수, 파일럿으로서 영광의 자리에 다다른다.

2.4. 항공기 제작자로서

파일:external/img.photobucket.com/95b76532.jpg

항공기에 대한 휴즈의 열정은 결국 '휴즈 항공기 회사'의 설립으로 이어진다. 2차 대전 기간 중 휴즈는 XF-11이라는 고고도 고속 정찰기의 개발을 의뢰받는다.

XF-11은 사실 휴즈가 이전에 고고도 고속 전폭기로 제작한 D-2의 후계기종에 가까운 성격을 갖는다. 휴즈가 개발한 D-2는 금속외피 대신 나무를 사용하여 외피를 제작했는데, 이 때문에 휴즈의 D-2 군납 제안은 방어력 부족을 이유로 거절당했으나 D-2의 우아한 외관과 카탈로그 스펙을 본 미 육군은 이 설계를 그대로 사장시키기는 아까웠는지 금속제 외피를 갖춘 고고도 사진촬영 정찰기의 개발을 휴즈에게 의뢰한다.

2차 대전 중 설계가 완성되자 미 육군은 곧바로 XF-11을 100대 발주했으나 이중반전 프로펠러 등 기술적 난제가 산적한 XF-11은 2차대전 종전 시까지 실기가 완성되지 못했다. 1945년 2차 대전 종전 후 고고도에서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RB-50이 미 육군에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XF-11의 100기 납입계약은 파기, 기술시험을 위한 시제기 2기의 발주만 남겨졌다.

1946년 7월 7일, XF-11 시제 1호기(등록번호 44-70155)가 하워드 휴즈의 조종으로 이륙했다. 당초 20분 정도의 짧은 시험비행 후 착륙 예정이었으나 휴즈의 변덕으로 로스엔젤레스 상공을 돌아보는 비행을 실시했고, 캘버시티의 휴즈 항공기 회사 활주로로 돌아오기 위해 기수를 돌리는 순간 좌측 프로펠러축 감속기어 오일 누출로 이중반전 프로펠러 중 전방 프로펠러 정지, 후방 프로펠러는 역회전을 시작하여 조종불능 상태에 빠진다. 휴즈는 XF-11을 달래가며 근처의 골프장에 비상착륙을 시도했으나 실패, 비벌리힐스 주택단지에 추락한다. 영상

XF-11 시제 1호기는 이 추락사고로 완파되고 휴즈 역시 심각한 부상을 입는데, 이때 얼굴에 생긴 흉터를 가리기 위해 후에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콧수염을 기르게 되고, 진통제로 사용한 모르핀 중독에 빠지게 된다.

남겨진 XF-11 시제 2호기는 사고의 원인인 이중반전 프로펠러를 일반 프로펠러로 교체하여 비행시험에 성공, 육군에 인도되었으나 시대는 이미 제트엔진 시대로 접어들어 별다른 활약 없이 폐기 처분된다.

또한 휴즈는 XF-11의 개발과 병행하여 유럽 전선으로의 군수물자 수송을 원활히 하기 위해 휴스 H-4 허큘리스라는 초거대 수송 비행정을 제작한다. 이 항공기가 가진 세계에서 가장 날개폭이 긴 항공기라는 타이틀은 2019년 스트라토런치 시스템이 등장하기 전까지 깨지지 않았다.[8]가장하지만 이런 거대한 비행기를 굴리는 데에 필요한 조종계통의 반응에 관한 문제를 당시로서는 도저히 고칠 수 없어서 시험비행 1회만 한 후 실제 운용은 되지 않았고, 이 비행기에는 '스프루스 구스'라는 멸칭이 붙었다. 이 수상기 역시 종전 시까지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고, 결국 종전 후에 시험비행 후 현재는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그 후 휴즈 항공기 회사는 고정익기보다는 당시의 최신 항공기인 헬리콥터의 개발과 생산에 몰두했고, 유명한 군용 헬기 500MD이나 AH-64도 휴즈 항공기 회사의 작품이다. 그러나 냉전 종식 후 맥도널 더글라스사에 합병되었다가 현재는 보잉사의 산하에 있다. 그 외에도 F-14에 탑재된 AIM-54 피닉스 미사일과 AIM-120 AMRAAM 공대공 미사일도 휴즈 항공기 회사에서 처음 개발한 것이다.

2.5. 쓸쓸한 노년

파일:노년의 하워드 휴즈.jpg
그의 노년기[9]로 추정[10]되는 사진.[11]

1966년, 하워드 휴즈는 수차례의 비행기 추락 사고로 인한 후유증과 정신병이 더욱 심해져 이미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계에 다다랐다. 대인기피증이 심해져 결국 캘리포니아를 떠나기로 마음먹었으며 네바다 라스베가스로 향한다. 1966년 추수감사절에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한 그는 1970년 추수감사절까지 정확히 딱 4년 그곳에 머물렀다. 그는 그곳의 한 호텔( Desert Inn)의 펜트하우스를 임대한 뒤에 그곳에서 기업을 운영한다. 휴즈는 이 4년 동안 Desert Inn 펜트하우스에서 단 한 번도 밖으로 나온 적 없고, 모든 사업 지시를 직원들에게 시켰는데, 직원들은 반드시 모르몬교도 여야만 한다는 특이한 조건을 붙였다고.

휴즈는 호텔에서 업무를 보던 도중에 자신이 머물던 호텔에 자신 외에 다른 사람도 묵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1967년 3월 27일 그 호텔을 사버린다. 하워드 휴즈가 처음 라스베이거스로 갔던 이유는 네바다주의 세금 혜택 때문이었지만, 사업의 귀재였던 하워드 휴즈는 곧 라스베이거스가 노다지라는 것을 파악, Desert Inn[12]을 시작으로 1967년 한 해에만 Sands[13], Castaways, New Frontier Hotel and Casino[14] 순으로 카지노를 무려 4개나 사버리며 # 1967년 한 해에만 라스베이거스 스트립 구역의 전체 수익 중 3분의 1을 가져가버렸다(...). 영상

타고난 사업가인 하워드 휴즈는 측근에게 라스베가스를 더 '글래머러스'하게 바꾸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그때만 해도 라스베가스는 어중이떠중이 노름꾼이 와서 싸구려 카지노나 해대던 저급한 유흥도시였다. 하워드 휴즈는 자신이 머무르는 도시이니 자신만큼 고급스러워야 한다는 그만의 원칙을 내세우며... 잘 차려입은 신사숙녀가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멋지게 놀 수 있는 고급 유흥도시를 원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시키기 위해 라스베가스의 중심지라 불리는 스트립에 있는 대형호텔을 5개나 구입했다. 그중에 실버 슬리퍼라는 작은 호텔도 하나 구입했는데 이유는 잠을 좀 자기 위해서이다. 실버 슬리퍼 호텔은 하워드 휴즈가 머물던 호텔 펜트하우스의 바로 건너편에 위치했는데 실버 슬리퍼 호텔의 간판에서 나오는 불빛이 하워드의 수면을 방해했던 것이다. 하워드 휴즈는 라스베가스의 고급화를 꾀했으며, 그와 동시에 본인이 원하는 영화를 원하는 시간에 텔레비전에 나오게 하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라스베가스의 텔레비전 방송국도 사버린다.

당시 라스베가스를 이미 주름잡고 있던 마피아들은 하워드의 이런 행동이 당연히 아니꼬웠겠지만 제아무리 수십개 조직과 수백수천의 조직원을 거느린 마피아들인들 당시 미국의 최고의 부자이자 군수산업을 통해 높으신 분들과도 친분이 두텁던 하워드 휴즈에게는 찍소리도 못하고 도리어 휴즈에게 밉보이지 않게 알아서 바짓가랑이 밑을 기었다. 다만 채찍만 휘두른 것은 아니었고 그가 인수한 호텔의 전 주인들처럼 마피아들에게 그대로 경영을 맡겼다. 그리고 마피아들은 하워드 휴즈가 필요한 것들을 조달해줬다.

이때 재미있는 일화들이 많다. 그중 하나로 아이스크림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하워드 휴즈는 한때 배스킨라빈스의 바나나 리플맛 아이스크림에 필이 꽂혀 몇 달 동안 식사 때마다 이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그 맛이 단종되었다. 죽어도 하워드 휴즈에게 밉보이면 안 되었던 마피아들이 바나나 리플맛 아이스크림을 구하기 위해 배스킨라빈스 본사에 연락해 애걸복걸해서 결국 단종된 맛을 특별주문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단종된 맛의 아이스크림을 특별주문하는데 필요한 최소 주문단위가 200갤런(약 760 리터)[15]이었다. 마피아들은 이런 고생 끝에 간신히 하워드 휴즈만을 위한 바나나 리플맛 아이스크림을 배스킨라빈스 공장이 있던 로스 엔젤레스에서 공수해왔고 보관할 장소를 물색하느라 애를 먹었다.하지만 하워드 휴즈는 바로 다음날 "맛있기는 한데, 이제 물렸다"라면서 이제부터는 "프렌치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준비하라고 지시한다. 결국 고스란히 남은 이 아이스크림을 처리하기 위해 하워드 휴즈가 머물던 호텔의 카지노에서 고객들에게 공짜 아이스크림을 1년간 대접했다고 한다.

라스베가스에 엄청난 숫자의 호텔과 시설, 그리고 부동산을 소유한 하워드 휴즈는 자연스럽게 라스베가스를 넘어 네바다주에까지 영향력이 커졌으며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하워드 휴즈에게 Baron Las Vegas, 한국말로 하면 라스베가스 남작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또한 그는 당시 미국 정부가 네바다 주에서 하고 있는 핵실험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각계에 로비를 통해 핵실험을 막아보려고 했으며 심지어 그의 측근들을 시켜 대통령에게 백만불의 뇌물까지 제공하겠다는 제의를 했으나 맨해튼 프로젝트에 들어간 20억 달러의 예산에 비하면 휴즈의 뇌물은 정말 작은 것에 불과했다.[16] 결국 핵실험은 강행되었고, 핵폭발로 인한 충격 때문에 그가 머물고 있던 호텔에서 진동이 느껴지자 하워드 휴즈는 대노했다고 한다. 휴즈의 분노와는 별개로, 라스베가스 지자체와 상인들은 이 핵실험으로 피어오르는 버섯구름 등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 덕에 짭짤한 수익을 올려, 이를 환영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라스베가스도 질렸는지, 해외에서 은둔생활을 한다. 주로 있었던 곳은 니카라과였으며, 바하마나 멕시코에도 꽤 오래 머물렀다. 미국에서는 주로 플로리다, 텍사스, 네바다주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텍사스에 온 이유는 의료 목적이라고 한다. 매우 그럴듯한 루머에 따르면 자신의 입김이 세게 닿는 병원이 문을 닫은 시간인 매우 늦은 밤이나 매우 이른 새벽에 진찰을 받으러 갔다고 한다.

1970년에 이혼소송이 있었고, 1972년에는 클리포드 어빙이라는 작자가 자신이 휴즈의 허가를 받은 자서전을 집필했다고 발표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로 인한 헛소문은 휴즈의 극단적인 대인기피로 인한 소극적 대처 때문에 상당히 큰 타격을 입고 이후 이를 무마하는 방식으로 해결됐다. 이 사건은 오슨 웰즈의 거짓의 F(F for Fake)에서 다뤄졌다.

나이가 들면서 기행이 점점 더 심해졌고 외부와 단절된 채로 살다시피해서 사진이 찍힌 것도 얼마 없고, 그중에서 공개된 것은 더 적다.[17] 대인기피증이 심해질 때면 자신의 생활공간뿐 아니라 아예 자신의 방이 있는 층으로 사람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외부에 그의 방 창문 앞에 도르래와 바구니를 설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긴 막대기로 창문에 노크를 하고 창문이 살짝 열리면 바구니에 필요한 결재서류나 사업현황 보고서 등을 넣은 뒤에 올려 보내는 방식이었다.

세균이 무서워서 물건을 맨손으로 만지는 것을 극도로 꺼릴 때가 많았기 때문에 엄청난 양의 곽 휴지와 소독한 손수건을 썼다.[18] 그 외에도 곽 휴지 상자를 신발로 신었다는 등의 이야기도 있지만 이건 그냥 사람들이 지어낸 말일 가능성이 높다.

1976년 4월 5일 멕시코에 있는 그의 펜트하우스에서 몸 상태가 악화되자 급히 비행기로 텍사스 휴스턴에 있는 병원으로 가던 도중에 사망했다. 그의 사체는 알아보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머리카락, 수염, 손톱, 발톱은 관리를 안해서 매우 길었고, 185cm[19]의 큰 키에 몸무게는 불과 42kg였고 노년의 그를 만난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얼굴 알아보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결국 FBI에서 지문 조회를 통해서 하워드 휴즈라고 확인했고, 부검을 통해 신부전증으로 사망했다고 결론내린다. 진통제를 주사하다 팔 근육에 박힌 바늘도 5개나 발견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실제로는 멕시코에서 죽었는데, 부패한 멕시코 관료들이 괜히 시신인도를 거부하며 돈을 뜯어낼까봐 미국 상공에 도착하자마자 사망선고를 내렸다는 말도 있다.

3. 모르몬 유언장 스캔들

그의 사망 3주 뒤에 웬 솔트레이크 시티 모르몬 교회 총본부에서 1968년 작성된 하워드 휴즈의 유언장이 발견되었다. 일단 서명은 휴즈의 것이었으며, 글씨도 대충 비슷했으며 휴즈 측의 측근들을 꽤나 잘 알고 있었다. 그 내용에는 여러 자선 단체에게 돈을 기부할 것과, 가족 및 자신의 주윗사람에게 돈을 남기고, 모르몬 교회에도 1/16[20]이나 남기고 네바다의 멜빈 던마르(1944.8.28-2018.12.9)라는 사람에게도 1/16이나 되는 큰 돈을 남겼다.

즉시 멜빈 던마르라는 사람을 네바다에서 찾아보니 라스 베가스 인근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던 젊은이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1967년 주유소 밖에 웬 노인이 지쳐 쓰러져 가길래 그 노인에게 집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 노인은 라스 베가스의 어느 호텔에 내려달라고 했으며, 도착하고 나서 그 노인은 자신이 하워드 휴즈이며 고맙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1년 뒤에 웬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그의 주유소에 밀봉된 서류봉투를 두고 갔고 거기에 모르몬 교회 본부에 보내달라고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워드 휴즈의 사촌이자 최우선 후계자인 윌리엄 러미스 및 휴즈 측 사람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결국 소송이 걸린다. 법정에서 내린 판결은 위조된 문서라는 것이다.

첫번째, 멜빈 던마르의 아내는 미국의 여러 부호들이 많이 보는 잡지를 발행하는 회사에서 일했고 그 곳에서 여러 부호들의 필체 및 서명과 그들의 신상정보를 입수하기가 쉽다는 점을 들었다.

두번째, 유언집행자로 노우어 디트릭(Noah Dietrich)을 임명했는데, 디트릭은 하워드 휴즈의 양친이 다 사망하고 회사를 물려받은지 얼마 안된 시점부터, 휴즈 밑에서 30년 넘게 일하고 상당한 신뢰관계를 구축한 사이였지만 1950년대에 사이가 틀어져서 이미 갈라진 뒤였다. 즉 하워드 휴즈 입장에서는 디트릭을 굳이 총책임자로 임명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었다.

세번째, 휴즈의 측근으로 일해서 유명했던 사촌형제인 윌리엄 러미스를 제외하고 다른 여러명의 사촌 형제들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다. 하워드 휴즈는 친척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고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물론 서로 자주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죽을 때 설마 한 푼도 남겨주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21]

결국 소위 말하는 모르몬 유언장 스캔들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하워드 휴즈의 유산은 하워드 휴즈의 22명의 사촌 형제들과 그의 전처와 딸이 균등하게 나눠가졌다. 그리고 사촌 형제인 윌리엄 러미스는 계속 소송을 걸어 자신이 물려받은 하워드 휴즈 메디컬 인스티튜트가 최상위 지주회사로 올려지게 했다.

참고로 지금도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25센트의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위 멜빈의 주장이 훈훈한 미담(?)처럼 포장되어 떠돌고 있다.(...) 그러나 실제의 멜빈 던마르는 2018년 사망할 때까지 휴즈 재단으로부터 단 한 푼도 못 받았다.

2017년 07월 02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일화가 소개되었다.

4. 대중매체에서

아무래도 억만장자들 중에 가장 캐릭터가 확실한 억만장자라 그런지 여러 매체에 그를 오마쥬하거나 패러디한 캐릭터들이 많다.

5. 여담



[1] 오히려 그의 생전 이미지에 정말 부합되는 기업가는 영국인인 리처드 브랜슨이었다. [2] 드릴을 파는 것보다는 임대형식으로 영업을 해서 경쟁자들보다 더 싼 가격에 드릴을 제공하고, 회수까지 할 수 있었다. [3] 당시 캘텍은 생긴 지 별로 안 돼서 지금과는 위상이 좀 달랐다. [4] 이 이야기는 영화 < 에비에이터>에서도 지나가는 식으로 나오는데 카메라를 수십 대 빌려달라는 하워드 휴즈에게 영화사 사장이 비웃듯이 가진 돈 다 날리기 싫으면 그냥 영화 적당히 만들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하며 거만하고 시니컬한 모습으로 각색되어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는 당시 워너사 사장은 정중하게 하워드 휴즈에게 충고해준 것이고, 결국 약속한 숫자는 아니지만 상당한 숫자의 카메라를 빌려줬다. [5] 후에 맥도넬 에어크래프트와 합병하여 맥도넬 더글라스가 되는 그 더글라스 사이다. [6] 더글라스 항공사에서 비행기를 구입 및 개조를 하며 납입일과 작업비는 천정부지로 뛰기 시작했고, 휴즈는 개조로 추가된 비용에 대해 지불을 거부하며 더글라스사와 오랜 싸움에 들어간다. 결국 빡친 더글라스사의 오너 도널드 W. 더글라스는 "기체 가격은 니 맘대로 지불하시고 앞으로 우리한테 항공기 발주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시오"라고 질러버렸고, 하워드 휴즈는 룰루랄라하며 더글라스에 개조비용을 뺀 순수 항공기값만 지불하는것에 더불어 후일 TWA의 오너가 되었을 때 TWA에서 보유한 맥도널 더글라스 기체를 죄다 팔아제끼고 보잉의 항공기를 구매하는 것으로 엿을 먹였다. 여담이지만, 맥도널 더글라스사는 훗날 보잉에 합병당하고 만다. [7] 후일의 휴즈 항공기 회사이다. [8] 여담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송량을 가지고, 가장 무겁고, 가장 긴 항공기라는 타이틀을 모두 가진 항공기는 An-225였으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파괴되면서 An-124, 보잉 747-8 등이 기록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9] 대략 1973년 정도쯤으로 66~67세 정도일 때이다. [10] 왜 추정이냐면 하워드 휴즈는 카게무샤처럼 자신과 꼭 닮은 대역을 보통 3~4명, 많을 땐 5~6명씩 고용해 자신의 말투, 걸음걸이, 필체 등등을 모조리 따라 하게 했기 때문이다. 일단 해당 사진은 하워드 휴즈의 비서 Nadine Henley(1906/1907(?)-1990.7.13)가 하워드 휴즈가 맞다고 확인해 주었다. 후술할 모르몬 유언장 스캔들 역시 이 하워드 휴즈 대역 중 한 명의 소행이란 추측이 있다. [11] 젊은 시절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많이 망가졌다는걸 잘 알 수 있다. [12] 프랭크 시나트라의 라스베이거스 데뷔 공연 호텔로 유명했다. [13] 프랭크 시나트라 디너쇼 전속계약 호텔로 유명했다. [14] 엘비스 프레슬리의 라스베이거스 데뷔 공연 호텔로 유명했다. [15] 350갤런(약 1330리터)이었다고 적은 책도 있다. [16] 위의 마피아들이 하워드 휴즈에게 꼼짝 못했던 것과 비교하면 흥미로운 부분이다. 아무리 마피아로서 거대한 세력을 가졌더라도 세계적인 거부인 휴즈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것처럼, 휴즈가 아무리 거부여도 미국이라는 국가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17] 1961년에 공개적으로 마지막 사진이 찍혔고, 1973년에 찍힌 사진이 한장 더 있을 뿐이다. [18] 영화 "애비에이터"에서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렇게 된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증거는 없다. 다만 어머니가 그 당시 사람들치곤 청결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19] 젊은 시절엔 193cm였다. 나이가 들어서 키가 많이 줄어든 편이다. [20] 1976년 당시에 1억 5천 6백만불이나 되는 큰 금액이었다. [21] 여담이지만 그 친척들도 다 잘 사는 상류층 사람들이었다. 이유는 하워드 휴즈의 아버지도 그 당시에 아들들을 다 명문 대학에 보내줄 수 있을 만큼 잘 사는 집안 출신이고, 사망할 때 그의 형제, 즉 하워드 휴즈의 삼촌들에게도 상당한 양의 유산이 돌아가서 다 잘 살고 있었다. [22] 정확히는 형 앤서니 하우스와 동생 로버트 하우스 모두 하워드 휴즈의 여러 특징적인 부분에서 따왔다. [23] 국내에도 2015년 중순경에 정식발매된 일론 머스크의 공식전기에도 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토니가 직접 엘론을 찾아가 공장등을 둘러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특히 '자신의 아이디어에 사로잡혀 온몸을 불사르고, 한순간도 낭비하지 않는 인물'이란 느낌을 엘론에게서 받았고 이게 토니 스타크란 캐릭터와 잘 맞는거 같다는 언급을 한다. 이때문인지 로다주의 요청을 받고 엘론이 아이언맨2에 까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 [24] 실제로는 H-1레이서 보다는 동시기에 만들어진 영국제 전투기 Gloster F.5/34가 더 비슷했다. 상세는 제로센 항목 참고. [25] 지옥의 천사들 촬영에 쓸 거라고 한다. 그래서 이 세계의 지옥의 천사들은 200만 달러짜리 영화가 됐다. [26] 2022년 가치로 100억원이 넘는다 [27] Terry Moore. 1929년생. [28] 2022년 가치로 한화 25억원 정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