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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18f><colcolor=#fff>
미합중국 제3대 국방장관 조지 C. 마셜 George C. Marsha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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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지 캐틀렛 마셜 2세 George Catlett Marshall J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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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0년 12월 31일 | ||
펜실베이니아 유니언타운 | |||
사망 | 1959년 10월 16일 (향년 78세) | ||
워싱턴 D.C. 월터 리드 육군병원 | |||
묘소 | 알링턴 국립묘지 | ||
재임기간 | 제15대 육군참모총장 | ||
1939년 9월 1일 ~ 1945년 11월 15일 | |||
제50대 국무장관 | |||
1947년 1월 21일 ~ 1949년 1월 20일 | |||
제3대 국방장관 | |||
1950년 9월 21일 ~ 1951년 9월 12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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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18f><colcolor=#fff> 신장 | 183cm | |
부모 |
아버지 조지 캐틀렛 마셜 시니어 어머니 로라 에밀리 마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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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릴리 카터 콜스 (사별) 캐서린 보이스 터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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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버지니아 군사대학 (VMI)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
1902년 ~ 1959년 | |||
최종 계급 | 정규군 원수 (미합중국 육군) |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국공내전 6.25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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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정한 승리의 설계자(True architect of Victory)
윈스턴 처칠
윈스턴 처칠
전쟁 영웅들의 멘토, 천재 전략가
한국국방안보포럼
한국국방안보포럼
미국의 제50대 국무장관과 제3대 국방장관을 지낸 정치인이자 2차대전 당시 제15대 육군참모총장으로서 보급 계획 수립과 실행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 군인. 2차대전 후 미국의 서유럽 재건 계획인 마셜 플랜도 바로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2. 평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의 육군참모총장으로 재직하였으며 이후 미국의 국무장관, 국방장관을 지냈으며[1] 그가 구상한 전략들과 고안, 입안시킨 여러 시스템과 정책들은 냉전을 거쳐 지금까지 미국의 군사, 정치, 외교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현대 미국의 군사체제는 마셜이 2차 대전 당시 구축한 합동참모본부[2]와 그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통합전투사령부 체제를 기본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1947년 국무장관 재직시절 마셜 플랜을 통해 현대 미국의 개입주의 외교의 시작을 알렸다. 이 공로로 마셜 플랜의 수혜자였던 서유럽은 마셜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했다.2차 대전을 빛낸 명장들 중 한 명이지만, 야전에서 직접 지휘를 맡는 역할이 아니어서 업적에 비해서는 명성이 높지 못한 인물이다. 심지어 마셜 플랜의 영향으로 군인이 아니라 정치가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야전 지휘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조지 S. 패튼, 오마 브래들리 등과 달리 철저하게 참모로서 활동했고 마셜의 개인적인 성격 역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인물이었기에 그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잘 논의되지는 않는 인물이다.[3][4] 한국의 경우 다른 지휘관들에 비해 번역된 출판물이 상당히 적고 연구도 잘 이뤄지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패튼과 같이 개성이 강하지도 않았고 군인으로서 패착도 없었고[5] 심지어 사생활마저 흠결이 없고 인품마저 훌륭했다. 그나마 브래들리 원수는 M2/M3 브래들리에 이름이 붙어서 알려지기라도 했지만 마셜 원수는 그런 것도 없다.[6]
그러나 그의 업적은 일선 지휘관들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고 그는 그와 비슷한 일을 수행한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업적을 남겼다. 미군은 물론이고 20세기 이후 현대 전쟁사에서 가장 위대한 장군이자 가장 위대한 행정군인으로 꼽히며 독일에서 발전된 근대적 개념의 일반참모와 그 정점에 있는 참모총장으로서 첫손으로 꼽힐 만한 가장 모범적이고 위대한 예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의 전쟁은 그전의 전쟁들과 매우 달라져있었다. 근대적 관료조직, 통신수단의 발달, 철도와 내연기관 등 교통수단의 발달로 전쟁은 점차 거대해졌고 그전의 여러 전쟁과 비교도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펼쳐지며 전선은 전지구적으로 확장되었다. 군의 지휘체계는 지휘관 한 사람의 결정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군대를 통제할 정부, 군대에 물자를 제공할 기업, 군대의 중요 의사결정에 국민적 동의를 받아낼 의회[7]와 같이 토의와 합의에 의해서 이뤄지게 되었다. 그 속에서 마셜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일선에서의 무용이 아니라 전쟁 밖에서 전쟁의 수행을 결정할 국민들을 대변하는 정치인들, 특히 글로벌 파워로 등극하면서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할 각 국가의 원수들과 씨름하며 태평양과 유럽에 걸친 전선들을 관리하는 육군 최고 책임자로서의 역할이었고 그는 그것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그는 1차대전 참전기에도 참모 업무만을 수행했기에 야전지휘관으로 활동했던 적이 없었고 퇴역할 때까지 야전지휘관으로 활동하지 않았다. 다만 훈련 시에 지휘관 등으로 여러번 선임되었고 항상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보병학교 부교장으로 근무할 당시 베닝 혁명이라 불리는 군사적 혁신을 주도하였고[8] 그의 밑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던 인물들은 2차 대전기에 핵심 지휘관으로 근무했다. 대표적 인물이 오마 브래들리. 마셜의 군사적 능력은 위기에 빠지고 그것을 타개하는 측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위기에 빠지지 않는 능력에 가까웠는데, 이는 손자병법에서 손무가 가장 고평가한 유형의 장군이라고 할 수 있다.
2차대전 동안 수없이 많은 뛰어난 장군들이 있었지만, 합동참모회의의 일원으로 대전략을 담당한 윌리엄 리히, 어니스트 킹, 헨리 아놀드와 마셜 넷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야전지휘관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야전지휘관의 역할은 하급 장교진과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으로는 눈 앞에 놓인 적을 격멸하는 것이었고 국가도 이들에게 그 이상의 역할을 요구하지 않았다.[9] 마셜은 처칠의 The Architect of Victory라는 평가와 같이 '승리'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전선 규모를 넘어서는 거대한 국가 대전략부터 육군 최말단 제대의 교육훈련까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하고 만들어낸 인물이다. 심지어 미국조차도 이후 베트남전,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전[10]에서 마셜과 같이 정치지도자를 도와 전략적 성공을 달성할 리더의 발굴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마셜에 대한 평가에서 잘 드러난다.
"마셜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커져갔다. 그가 지휘관들 뿐만 아니라 정치인과 타국의 국가 원수들과 일하는데 달인이자 최고 권위자였기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마셜을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였고 마셜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도록 간절히 지휘관으로 복무하기를 원함에도 그를 야전지휘관으로 보내지 않았다.사실 루스벨트는 마셜이 누구보다도 유럽전선의 지휘관이 되길 바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의 위대함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및 유럽전선의 지휘관을 마셜로 임명하겠다고 아이젠하워와 얘기하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당신과 나 정도라면 남북전쟁의 마지막 해에 육군참모총장이 누구였는지 알고 있지만,[11]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소.
그랜트와
리 같은 유명한 장군은 알지만, 누가 최고 책임자였는지는 모르는 게 당연하지. 나는 50년 후에 조지 마셜이 누구인지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갈 걸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소. 내가 이러한 이유에서 마셜을 큰 직책(연합군 총사령관)에 임명하려 하오. 나는 마셜 장군이 위대한 군인의 한 사람으로서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자리 매김할 만한 자격을 갖췄다고 생각하오.”
마셜의 첫 참모총장 임기는 43년 9월 1일에 끝이 났고 아이젠하워와 자리를 바꿔 유럽전선 지휘관이 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윌리엄 리히 제독을 중심으로
어니스트 킹 제독,
헨리 아놀드 원수까지 최고사령부 인원들이 다 루스벨트를 뜯어말렸고 루스벨트도 고민 끝에 마셜을 참모총장으로 유임시키게 된다. 루스벨트는 마셜이 유럽전선의 지휘관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마셜의 유임 후에도 마셜을 지휘관으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참모총장으로 앉히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루스벨트는 아이젠하워가 마셜을 대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테헤란 회담을 마치고 12월 4일 카이로로 돌아온 루스벨트와 마셜은 점심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루스벨트는 마셜이 자신에게 사령관직을 요구하기를 바라면서도 그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기를 바랬고 그는 자신의 의도를 완곡해서 얘기하였다. 그 의도를 파악한 마셜은 정중하면서도 분명하게 얘기한다."이 문제와 관련하여 각하께서 고민하셔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저의 입장이나 의사가 아니라 국가의 이익입니다."
루스벨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마셜에게 이렇게 얘기한다."당신이 워싱턴 밖으로 나간다면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소."
(I didn't feel I could sleep at ease if you were out of Washington.)
- Buell, Thomas B.; John H. Bradley. The Second World War: Europe and the Mediterranean. p. 258
(I didn't feel I could sleep at ease if you were out of Washington.)
- Buell, Thomas B.; John H. Bradley. The Second World War: Europe and the Mediterranean. p. 258
이후 루스벨트는 아이젠하워를 지휘관으로 확정한다. 그리고 결국 마셜은 (지휘관으로 나서지는 못했지만) 위대한 군인 중 한 사람으로 100년 가까운 미래에도 이름을 남겼으니, 루스벨트가 원했던 바도 조금 다른 방향이지만 이루어진 셈이다.
3. 생애
3.1. 초기 이력
펜실베이니아주 유니언타운에서 태어났다. 1901년에 버지니아 군사대학을 졸업하고 임관했으며 필리핀을 거쳐서[12] 1917년에는 소령이 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제1보병사단 작전참모부 교육훈련장교로 프랑스에 파견되었고 1918년에는 유럽 파견군 최고사령부 작전참모처 작전계획장교로 근무했다. 이후 1919년에는 대령[13]으로 승진, 주유럽미군사령부 부관실 부관장교를 역임했다. 존 퍼싱 대장[14]의 부관이 된 것이다.마셜의 유능함은 복무 초기부터 인정 받았는데, 주필리핀미군에서 중위로 복무하던 시절, 그의 상관이었던 윌리엄스 대위는 장교 평가의 정례 질문 중 하나인, "해당 부하 장교를 다시 휘하에 둘 의향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마셜이 군의 필요에 부응하여 장성으로 진급한다면 마셜의 휘하에서 기꺼이 복무하겠다"[15]고 답했다. 또한 당시 필리핀에서 중위 복무 시절 연대장 부관 참모로 모의 대항군(일본 역할) 훈련을 진행하였는데 연대장이 훈련을 등한시하여 실질적으로 지휘권을 대신 행사해 상대 대항군 연대를 완벽하게 제압하였다. 이때 같이 훈련을 참가했던 장교가 초대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 사령관이자 초대 미합중국 공군 원수가 되는 헨리 아놀드였는데 훈련이 끝나고 귀가한 헨리 아놀드는 자신의 부인에게 훈련에서의 마셜에 놀라운 활약을 이렇게 평가했다. "내가 이번 훈련에서 장차 육군참모총장이 될 사나이를 만난거 같소."
1916년에는 상관인 존슨 해군 중령이 마셜에 대한 평가서에서 마셜을 군사의 천재로 평가했고, 이후 역시 같은 질문에 마찬가지로 "그렇다. 하지만 그보다는 마셜의 휘하에서 일하고 싶다"[16]고 답했으며 심지어 마셜을 자신보다 더 빨리, 당장 준장으로 승진시켜야 한다고 추천했다. 윌리엄스 대위도 그렇고, 일반적으로 군인이 계급과 보직, 기수에 민감한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후배를 상관으로 모시고 싶어할 정도라면 그의 능력과 인품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1917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존 조지프 퍼싱 장군 휘하의 참모로 복무했다. 1917년 말 프랑스에서 퍼싱이 프랑스에서 제1보병사단을 시찰할 때 사단의 훈련 및 전투 준비 태세가 부실하다고 생각하며 사단장을 질타하자, 마셜은 전투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원인은 윗선으로부터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므로 퍼싱의 발언이 부당하다고 직언하였고, 이에 퍼싱은 자리를 박차고 천막을 나갔고 주변의 참모들은 마셜의 커리어가 끝났다며 기겁했다. 하지만 퍼싱은 이후 까마득한 계급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직언을 한 용기를 발휘한 마셜을 높이 사고 제1사단의 현황 분석을 마셜에게 전적으로 위임했다.
1918년 5월 캉티니 전투에서 마셜은 작전 계획을 담당했고, 해당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미군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에 공헌했다.
3.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는 정규 소령으로 복귀했다.[17] 전간기[18]에는 육군부 작전처 교육훈련국에서 근무했으며, 주로 훈련계획장교로 근무했다.[19] 1919년에는 대전쟁 당시 자신을 눈여겨본 퍼싱의 전속부관으로 임명되었고 1924년까지 미 육군의 훈련 관련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또한 1924년 9월부터 1927년 5월까지 톈진의 영국 조계[20]에 주둔한 제15보병연대의 연대장 대리를 맡았다. 군벌 내전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투를 경험할 일이 거의 없었으나 1925년 12월 북방 군벌인 리징린과 펑위샹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펑위샹의 군대가 톈진으로 진입하면서 한때 미군과 중국군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질 뻔하기도 했다. 당시 마셜 휘하에서 복무했던 사람이 훗날 장제스의 참모장을 맡게 되는 조지프 스틸웰(당시 소령, 15연대 작전과장)이었다. 마셜은 중국에서의 복무를 마치고 귀국 후 미 육군대학의 교관을 맡았다. 이때가 중국이 혼란스러운 시기였는데 안타깝게도 마셜은 이후로도 중국에 대한 시각이 이때의 부정적인 경험에서 일신되지 못했고, 그로 인해 마셜은 훗날 중일전쟁 시기에 중국에 대해 비슷한 시각을 가진 조지프 스틸웰을 참모장으로 추천해서 보냈는데, 그 결과는 참담했다. 1923년에는 중령, 1933년에는 대령이 되었고 참모총장 후보에까지 올랐으나, 라이벌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가 먼저 임명된다. 이후 1935년 맥아더가 물러나기가 무섭게 1936년에 준장으로 승진하면서 30여 년 만에 별을 달았다.
3.3.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1939년에는 소장이 되었고, 9월 1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제15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지명됐다. 참모총장이 되며 임시 대장으로 승진[21], 유럽 반격계획(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입안, 지도했고, 이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며 연합군이 전쟁에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22] 1943년에는,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에도 선정되어 명성의 절정을 달렸으며, 1944년 12월 드디어 원수가 되었다. 2차 대전 시기 육군 원수 중에서 웨스트포인트 출신이 아닌 인물은 마셜이 유일하다.태평양 전쟁 중에는 태평양 방면 총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나 태평양 함대 사령관인 체스터 니미츠 원수와는 달리, 소련이 일본을 치게 해야한다는 주장을 펴서 결국 1945년 8월 9일부로 소련군을 대일 전선에 끌어들였다.[23] 전쟁이 끝난 후, 육군참모총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3.4. 전후
1945년 12월에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중국 전권특사로 임명되어 국공내전에 개입하였으나 국공 양당의 갈등으로 성과를 크게 거두지 못하고 귀국한다. 본인이 원하는 일이 아니었음에도 트루먼의 요청으로 중재에 나섰으나 근본적으로 트루먼 대통령이 요청한 국공 연합정부의 설립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성과를 보기 어려웠고 결국 몇 년간 지지부진한 협상을 이어나가다 별 성과 없이 귀국한다.[24]마셜은 귀국하자마자 1947년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국무장관으로 취임한다. 1946년 선거에서 공화당이 양원을 모두 장악하였고 상원은 만장일치로 마셜을 국무장관으로 추대했다. 1947년의 상황은 심각했다. 유럽에서는 소련의 위협이 가시화되고 있었다. 중국의 일이 완전히 일단락 된 것은 아니었으나 마셜의 관심은 유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첫 방아쇠는 그리스와 터키였다.
그리스와 터키는 소련이 지중해로 진출하는 관문이었다. 특히 영국에게 동지중해는 키프로스와 수에즈 운하 등 상당히 중요한 지역이었고 그 동안 공산화를 막기 위해 그리스에 군사적 지원을 포함한 여러 지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후 상황이 좋지 못했던 영국은 이러한 지원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리스가 공산화된다면 그 영향으로 터키도 공산화 될 것이었고 그렇게 된다면 동지중해는 소련의 손아귀에 들 것 이었다. 미국으로서는 이를 막아야하는 상황이었다.
1947년 2월 27일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미국의 원조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회의가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열렸고 마셜은 이 위기를 연속적 위협 중 첫 번째 위기[25]라고 표현했다. 본래 마셜은 소련의 영역 확장에 대해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여왔고[26] 이번에도 마찬가지 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3월 21일에 의회에서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미국의 재정지원을 제안한다. 바로 트루먼 독트린의 시작이었다.
마셜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유럽에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가졌다. 전후 개최된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독일의 전후처리에 대해 논의된 내용은 재무장관이었던 헨리 모겐소에 의해 주장된 모겐소 플랜으로 이 계획은 독일을 자급자족 농업국가로 만드는 계획이었다. 트루먼과 마셜은 모겐소 플랜이 베르사유 조약의 실패를 되풀이 하는 것일 뿐이며 유럽에서의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강화시킬 것이라 믿었다. 마셜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공산주의를 전파를 봉쇄해야 한다는 조지.F.케넌의 전략, 이른바 봉쇄정책의 입안을 주도했다. 마셜은 유럽이 공산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경제적 복구가 필수적이라 여겼고 이를 위해서는 독일의 강력한 산업, 경제적 영향력을 활용해야 한다고 여겼다. 독일이 주저앉아 있는 한 유럽은 회복되기 어려울 것이었다. 마셜은 다른 나라들의 독일에 대한 복수심을 이해하면서도 유럽이 공산주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독일을 다시 일으켜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유럽국가들의 협력을 이끌어낼 방안이 필요했다.
1947년 4월 10일~ 4월 24일, 마셜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외무장관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는 표면상으로는 유럽의 재건과 부흥을 위한 회의였으나 마셜은 스탈린의 의도를 명확히 알아챌 수 있었다. 소련은 유럽의 부흥을 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재건을 악화시키고 지연시키길 원했다. 스탈린은 유럽의 상황을 더 악화시킨 후 한꺼번에 소련으로 흡수할 계획이었다. 마셜은 유럽부흥 계획을 서둘렀다. 이 유럽 부흥계획은 초기 트루먼 계획이라 제안되었으나 공화당의 반발을 우려한 트루먼은 마셜 플랜이라는 이름을 붙일 것을 지시했다. 마셜 플랜은 1948년 3월 31일 미국 하원을 통과하였다.
마셜 플랜의 발표 이후 소련과의 대립은 첨예해졌다. 소련은 베를린 봉쇄를 감행했다. 마셜은 평화적 해법을 원하면서도 현실주의자답게 마셜은 군사적 수단을 포함한 모든 수단의 사용을 검토했다. 군사적 해법은 3차 대전을 의미했다. 일단 마셜은 종전 후 급속도로 이뤄지던 동원해제를 중단시켰다. 그럼에도 미군은 재래식 병력의 격감이 심각하였기에 핵무기의 사용을 준비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트루먼은 대규모 공수를 통해 베를린에 생필품을 공급하자는 의견을 제안했고 마셜이 이에 동의한다. 그렇게 이뤄진 베를린 공수는 당시 새롭게 설립된 미국 공군의 역량을 극한까지 보여주었다.
1949년 1월 20일 마셜은 트루먼의 첫 번째 임기 종료 후 딘 애치슨에게 국무장관 직을 인계한 뒤 은퇴하였다. 건강 상태가 심각하여 48년 말에 오른쪽 신장을 제거하였고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령(69세)이었던 탓에[27] 은퇴하고 아내와 버지니아주에 정착했다. 공직에서는 은퇴하였으나 체력적으로 부담이 없는 팬암의 이사, 전쟁기념회 위원으로 재직하였다. 1949년 4월에는 나토 협정식에 참석하였고 트루먼의 제안으로 1949년 9월부터 미국 적십자 총재로 근무하였다
1950년 9월 트루먼 대통령의 요청으로 국방장관으로 공직에 복귀하였다. 문민통제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으나 마셜은 특례로서 인정되었다. 특례에서 알 수 있듯이 국방부의 상황은 은퇴한 노인을 불러와야 할 정도로 심각하였다.
미 국방부는 마셜의 제안으로 1947년 창설되었는데 일원화된 체계로 전쟁을 수행해야한다는 2차 대전의 전훈 아래 각각 독립되어 있던 해군과 육군을 통합하고 공군을 신설하여 산하에 두었다. 전후 극심한 군비감축 속에서 각군들의 대립은 첨예했고 특히 해군은 존폐 위기에 몰려 제독들의 반란이라는 사태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결국 초대 국방부 장관이었던 포레스털은 자살까지 하고 만다. 포레스털의 뒤를 이은 2대 국방부장관이었던 루이스 존슨은 해군과의 갈등을 제대로 봉합하지 못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 전쟁이 발발한다.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연합군의 지휘권을 맡기고 한국을 방어하라 지시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계속해서 확전을 요구하며 트루먼을 비난했다. 그 와중에 국방부장관이었던 루이스 존슨은 맥아더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맥아더와 트루먼이 단절되는 사태까지 이어졌다. 결국 존슨 장관은 트루먼의 요구로 사임했고 마셜이 불려왔다.
마셜의 인준은 순탄치 만은 않았다. 마셜은 중국에서의 실패 때문에 공화당으로 부터 비판을 듣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조지프 매카시가 활개치던 매카시즘의 시대였다. 매카시는 마셜이 공화당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한 것이라 비난했다. 당연히 마셜은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을 국방부장관 후보자로 지명함에 따라 트루먼이 지게 될 비난을 걱정했다. 트루먼에게 마셜은 이렇게 얘기한다.
"대통령님이 무엇을 원하는지만 저에게 말씀하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것을 수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를 임명하는 것이 대통령님과 행정부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트루먼은 이러한 마셜의 성품에 압도되어 아내인 베스 트루먼에게 보내는 편지에 "당신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있나요? 나는 못해요. 마셜은 위대한 사람들 중 한명입니다."[28] 라 적었다. 또한 트루먼은 은퇴 후 TV 인터뷰에서 최근 30년간 가장 큰 공헌을 한 미국인이 누구냐는 질문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마셜을 가리키며, "내가 살아온 이 시대에, 마셜 장군보다 뛰어난 행정가이자 군사 지식이 많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답했다.트루먼이 마셜을 국방부장관 후보로 지명하자 마셜이 우려한대로 공화당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매카시는 마셜의 중국에서의 실패를 물고 늘어지며 '살아있는 거짓말쟁이', '배반자를 위한 대표자'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공화당 내부에서도 레버렛 솔톤스톨과 같은 상원의원들이 마셜을 지지했으며 인준 투표에서 57대 11로 인준되었다. 마셜은 국무장관과 국방장관[29]을 역임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고 이는 2022년 현재까지 유일한 기록이다.
마셜은 1950년 9월 21일 국방장관으로 취임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던 트루먼과 지속적인 확전을 원하는 맥아더의 갈등은 점점 심해져갔고 맥아더는 트루먼을 비난하는 편지를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 조셉 마틴에게 보냈고 이 의견은 급속히 여론화되었다. 트루먼은 지속적으로 중공과의 휴전협상을 시도하였으나 맥아더는 독자적으로 중공군에게 최후통첩을 보내는 등 트루먼의 노력들을 망가뜨렸고 이에 화가 난 트루먼은 51년 4월 6일, 맥아더의 처리를 놓고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는 마셜[30], W. 에이버럴 해리먼[31], 딘 애치슨[32], 오마 브래들리[33]가 참석했다. 이틀에 걸친 회의 끝에 맥아더의 해임이 결정되었고 트루먼은 최종적으로 합동참모본부의 장군들의 의견을 확인하라 지시했다. 4월 8일 브래들리, 콜린스, 반덴버그 장군을 비롯한 합참의 구성원들과 마셜은 맥아더가 항명을 했다는 것에 만장일치로 동의했고 군사적 관점에서 맥아더를 교체한다는 것에 대해 동의했다. 4월 9일, 맥아더는 교체되었다. 맥아더는 귀국하여 장황하고 드라마틱한 연설을 쏟아냈고 이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트루먼과 마셜은 전쟁영웅을 해임했다는 비난에 휩싸이게 된다.
1951년 6월 14일, 매카시는 상원에서 169쪽에 달하는 연설문을 발표했다. 그 연설문에는 마셜이 소련에 호의적 정책을 폈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중국을 빼앗기도록 획책했다고 말했다. 매카시는 마셜을 '세계정세에서 미국을 약화시키는' 음모의 우두머리라고 매도하며 마셜을 맥베스에 비유했다. 마셜은 어마어마한 정치적 공격을 받았지만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 마셜은 자신의 복무 경력이 그의 정당성을 증명해준다 생각했기에 자신의 변호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그대로 적중하여 뭣도 모르고 미군의 살아있는 전설을 찔러본 일개 아마추어는 온갖 역공을 맞아 그동안 쌓아온 지지도가 박살나는 건 물론, 본인의 목숨까지 잃는 자충수로 이어졌다[34][35]. 매카시의 비난과는 별개로 이미 오랜 업무에 지쳐 있던 마셜은 사임을 고려하고 있었고, 결국 1951년 9월 21일 마셜은 국방장관직을 사임한다. 당연히 다른 장성들을 비롯하여 트루먼은 마셜을 적십자 총재로 재임명할 뜻을 비췄지만 마셜은 사양하였고, 전쟁기념위원회의 의원직만을 수락하고 버지니아에서 아내와 생활하였다.
이후 유럽을 방문하여 안치오에서 전사한 그의 의붓아들의 묘소에 다녀오거나 처칠과 만나기도 하였다. 마셜이 유럽에서 돌아왔을 때 미국은 한창 대선 중이었다. 공화당과 민주당 양 측 후보 모두 마셜과 절친한 인물로 공화당 후보는 아이젠하워, 민주당 후보는 애들라이 스티븐슨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던 매카시즘적 분위기 때문에 아이젠하워는 선거운동 중 매카시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없었고 이에 트루먼은 아이젠하워가 전우를 저버렸다며 혹평할 정도였다. 마셜은 어떠한 공개적 발언도 하지 않았고 자신의 대녀인 로즈에게 사적인 자리에서 '아이젠하워는 타협을 강요받았을 것이다'라 얘기했다.
1953년 당선된 아이젠하워는 마셜을 백악관으로 초대해 자신의 행동을 사과했다. 이어 1953년 4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에 미국 특별 사절단으로 임명했다. 마셜은 영국을 방문해 2차대전의 동료들과 재회했고 처칠과는 하루 종일 승마경주를 하기도 했다.
1953년 12월 마셜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 경제재건을 위해 공헌한 것과 세계평화와 이해의 증진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노르웨이 오슬로로 갔다.[36] 마셜은 2019년 현재까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유일한 군인으로 남아있다. 이때 처칠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 사실 처칠은 노벨문학상보다 평화상을 원했고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자 실망하여 담배를 피러갔다는 일화가 있다. 그래서인지 처칠과 절친했던 마셜은 시상식 때 처칠을 언급하기도 했다. #
오슬로에 가기 전부터 쇠약하던 그는 1956년과 1957년에 걸쳐 회고록을 집필하였는데 이 회고록들은 마셜 연구의 시작점이 되고 있다. 1959년 1월 24일 뇌졸중으로 쓰러진 그는 동년 2월 18일 다시 한번 쓰러졌고 월터 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했다. 아이젠하워는 마셜을 세 번이나 방문했고 한 번은 처칠도 함께였다. 처칠은 눈물을 머금고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마셜을 지켜보다 돌아갔다. 1959년 10월 16일 저녁 6시에 세상을 떠났다. 마셜은 워싱턴 국립 대성당의 베들레헴 예배당에 안치되었고 다음 날 영결 예배를 위해 버지니아 포트마이어 기지의 예배당으로 옮겨졌다. 영결식은 초대받은 소수만 참석했으며 개인장례식은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거행되었다. 장례식을 간소하게 치르라는 유언에 따라 그의 보좌관들과 비서들, 월터 비들 스미스와 해롤드 스타크 제독, 오마 브래들리를 비롯한 전우들이 그의 관을 따랐다. 마셜은 사별한 그의 첫 아내 옆에 안장되었다. 2번째 아내였던 캐서린 마셜은 1979년에 세상을 떠났다.
3.5. 군인으로서 업적
1차대전기에는 퍼싱 장군의 부관으로 복무하며 행정력을 십분 발휘해 1선 부대에게 보급을 해줬다. 애석하게도 지나치게 잘해서 윗선들에게 '데스크워크 군인'으로 찍히며 전투부대 지휘관이 될 길이 막혀버리는 결과를 낳았다.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불과 17만 5000명의 규모에도 소총이 부족해 목총으로 훈련하던 군대를 단 6년 만에 무려 830만의 잘 훈련된 병력과 12만 9천여 대의 항공기, 4천여 척의 함정, 2천 5백만여 대의 차량, 1억 2천만여 정의 소총,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핵무기 2발, 그리고 전 세계 6만 마일(약 10만km) 에 걸쳐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병참 밎 보급 시스템[37]을 갖춘 강력한 군대로 탈바꿈시킨 주역. 괜히 처칠로부터 '승리의 설계자'라는 찬사를 들은 것이 아니다.
이러한 성과는 미 의회의 엄청난 반대를 이겨가며 그가 만들어낸 결과들이다. 물론 미국의 인적 자원과 공업 생산력 등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이미 전쟁 전 부터 뛰어났다. 하지만, 그 수행 능력을 통해 만들어낸 병력과 물자를 종류와 양에 맞게 적재 적소에 배치하는 능력이 있어야 제대로 효율성을 낼 수 있다.
그리고 마셜은 이를 해냈다. 구체적으로는 수백만 명을 징집하고, 그 병력들을 훈련, 편제하고, 기동훈련을 돌리고, 무능한 지휘관을 자르고 유능한 지휘관을 승진시키고, 수많은 무기들을 생산, 배치하고, 이 계획에 들어가는 막대한 지출에 경악하는 의회의 반발을 무마하는 등의 막대한 업무들을 해낸 것이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더글러스 맥아더, 조지 S. 패튼, 오마 브래들리, 버나드 로 몽고메리 등 연합군 명장들이 거두는 승리에는 마셜이 구축한 전략과 병참/보급 시스템이 뒷받침이 되었으며[38] 그가 쌓아온 시스템은 현대의 미군에게 아직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또한 아이젠하워, 브래들리를 발굴, 패튼이 사고쳐도 계속 돌격대장을 할 수 있게 한 인물이다. 지휘 체계 일원화하는 등 수없이 많은 업적을 쌓은 인물임에도 직접 전장에서 싸운 이력이 없어 정작 졸병대장이라 불린 브래들리한테도 밀리는 겸손함을 보였다. 비슷한 포지션으로 해군의 윌리엄 리히, 어니스트 킹, 육군항공대[39]의 헨리 아놀드가 있는데 마셜을 포함한 이 4인방은 2차 대전기 합동참모회의를 주관하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보좌하며 실질적으로 전쟁을 주도했다. 직접적인 작전 지휘를 담당했던 킹 제독과 아놀드 장군, 최고 사령부 참모총장[40]으로 각 군대의 조율과 중재를 맡았던 리히 제독과 함께 병참, 군비 증강, 인사를 맡았다.
군 행정조직적 측면에서 마셜의 업적은 공군의 독립, 국방부의 설립[41], 합동참모본부와 산하의 통합군 사령부 체제의 도입, 동원체계의 개편이 있으며 군사교리적으로는 기동전, 합동전 교리 연구 및 개발, 대독과 대일 전선의 기본적인 작전 체제의 재구축 등이 있고 2차대전기의 서부와 태평양 전선[42] 전반의 작전을 감독하고 지휘했다.
3.6. 정치가
1947년, 국무장관으로 취임. 이 해 6월 5일 하버드 대학교에서 열린 강연에서 나중에 「마셜 플랜」으로 알려지는 유럽 부흥계획을 발표했으며(11월 실행), 대 중국정책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1949년에는 국무장관에서 물러나서 미국 적십자사 총재로 취임했으나 이듬해에는 트루먼의 요청으로 다시 국방장관이 되었다. 문민통제를 중요하게 여기는 미국에서는 군인 출신의 경우는 예비역으로 10년 이상 되어야 국방장관으로 임명이 가능하지만, 이러한 사례에서 非 문민 출신(특히 장성급 장교를 기준으로 보면)은 2017년에 제임스 매티스가 국방장관으로 임명되기 전까지는 오직 마셜이 유일한 특례로 임명되었다. 다만 원수 계급이 종신직이라는 점과 당시 해군과 공군이 예산과 항공전력, 핵무기 등의 문제로 으르렁대던 시기[43]라 이들을 통솔할 리더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특례가 인정된 것이었다. 이때 국무장관이 바로 애치슨 라인을 선포한 딘 애치슨이었다. 당연히 6.25 전쟁이 발발하자 트루먼 행정부는 국내외에서 호된 비판을 받았고, 트루먼 대통령은 마셜을 국방장관에 기용하는 것으로 이에 대응했다. 그러나 다음 해 건강상의 이유로 국무장관직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4. 개인사
군인으로서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성격도 강직해서 다른 각료들에게도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다. 본래 미국을 비롯한 서양 문화권에서 상대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사적인 친분을 의미한다. 즉 철저하게 자신을 공적으로 대하라는 뜻이다. 오죽하면 "조지라고 불러도 되겠소?"라고 묻는 트루먼 대통령한테 "아닙니다, 각하. 마셜 장군으로 불러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전해져 올 정도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난 첫자리에서는 대놓고 '저는 각하의 말에 한 마디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쏘아붙이거나 대민업무를 수행하던 부하가 사무실에서 불만을 토하자 즉석에서 전역시켜버리기도 했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 때문에 투표도 하지 않았고 백악관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사적인 초대도 일절 받지 않았으며 심지어 대통령의 농담에도 웃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한다. 다만 어니스트 킹 제독처럼 사적으로도 성격이 극성맞은 것은 아니고 오히려 온후한 편이었다고 한다. 다만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하는[44] 원칙주의자였을 뿐.이런 면모 때문인지 동갑(1880년생)이면서 참전 동기, 최종 계급, 심지어 키(둘 다 183cm)까지 같은 더글러스 맥아더와 비교 대상으로 오르곤 하는데 성격은 정반대. 맥아더와 비슷한 성격에 짬은 딸리던 조지 S. 패튼은 '마셜 장군과 대화하느니 독일군 기갑사단을 상대하는 게 쉽겠다'라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패튼의 능력을 높이 산 마셜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패튼 해임 건의를 반려했다. 패튼의 사례와는 반대로 맥아더가 트루먼에게 반기를 들자 맥아더를 해임, 전역시키는 등 철저할 정도로 원리원칙을 지키면서 능력주의적 모습을 보였다. 마셜의 부하들이었던 아이젠하워, 오마 브래들리 등은 마셜에게 절대적인 존경을 보냈다.
개인적인 인품이 매우 훌륭하여 부하들은 물론이고 각국의 정상들, 그중에서 악명 높은 스탈린마저도 극찬을 할 정도였다. 심지어 오슨 웰스[45]는 몇 번 만난 적도 없음에도 그를 자신이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꼽았다. 영상
사적으로 개인 관리가 철저하여, 육군참모총장 시절 매일 아침 6시 반에 일어나고, 7시 반부터 오후 5시까지 근무하며 정오에 1시간 동안 점심을 먹고, 하루 2시간을 운동한 후 밤 9시에 자는 스케줄을 유지했다. 육군참모총장으로서의 하루 업무를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근무 시간 8시간 반 이내에 모두 규칙적으로 처리했다. #
그러나 독설가로도 악명 높았다. 다만 조지 S. 패튼처럼 쌍욕을 하는 게 아니라 돌려서 깠는데, 이게 또 무시무시했다. 진주만 공습 이후, 유럽작전전구 초대 사령관 제임스 E. 채니 장군의 임무 수행능력을 아이젠하워를 통해 확인한 결과 조지 마셜 참모총장은 채니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를 "느린 배에 태워서, 호위함 한 척 없이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 마디로 U보트의 표적이 되란 뜻이다.
살면서 결혼을 총 2번 했다. 첫 번째 아내는 릴리 카터 콜스(Lily Carter Coles)[46]로 1902년 마셜과 결혼했다. 콜스는 1927년 갑상선 수술의 후유증으로 인한 심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마셜과의 사이에서 자식은 없었다. 두 번째 부인은 캐서린 보이스 터퍼(Katherine Boyce Tupper)로 1930년에 결혼했다. 터퍼 역시 전 남편과 사별한 사람이었으며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2남 1녀의 자녀가 있었다. 터퍼의 아들들 중 차남인 앨런은 의붓아버지인 마셜을 따라 육군 장교(기갑 병과)로 복무했으며 북아프리카 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에 복무하다가 저격을 당해 전사[47]했다. 재혼할 당시 캐서린의 나이가 많아서(1882년생) 마셜과의 친자녀는 없으며, 현대 마셜의 후손은 모두 앞서 말한 의붓자녀들의 후손이다. 즉 조지 마셜의 생물학적 혈연은 끊어져 있다.
5. 진급 이력
6. 기타
- 앨라배마주 헌츠빌에 소재한 NASA의 조지 C. 마셜 우주센터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이곳은 관제센터인 휴스턴 존슨 우주 센터와 발사장인 케이프 커내버럴 케네디 우주센터만큼은 아니지만 로켓 제작과 테스트를 실시하는 곳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굉장한 인지도를 갖고 있으며 지역의 쏠쏠한 관광자원으로도 기능하고 있다.
- 마셜의 복무 중 최종 계급은 원수였다. 미 육군에서는 원수를 ‘General of the Army’로 지칭하는데, 이는 다른 나라들에서 마셜(Marshall, 원수)이라 부르는 계급에 해당한다.[48] 다시 말해 조지 마셜이 유럽 국가의 군인이었다면 마셜 마셜(마셜 원수)이라 불렸을 것이다. 실제로 마셜은 마셜 마셜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우스개 소리를 했다고 한다.[49]
- 몇 안되는 실책으로 2차대전/한국전쟁의 명장인 제임스 밴 플리트를 물먹인 일이 있다. 당시 미군에는 주정뱅이로 악명높은 장교가 있었는데, 하필 이 사람과 밴 플리트의 이름이 비슷했다. 마셜은 이 두 사람의 이름을 착각해서 밴 플리트를 번번히 진급을 막아버린 것. 한참 뒤에야 밴 플리트의 동기인 아이젠하워가 이 오해를 풀어줘서 부랴부랴 진급을 해 줬단다.
- 반대로 졸장들을 뽑아버린 실수도 있다. 아프리카 전역에 로이드 프레덴달을 지휘관으로 보냈더니 전투를 거하게 말아먹은 적이 있다. 결국 다른 장군을 뽑게 되었는데 이게 신의 한수가 되었다. 그나마 이건 양반인데 조지프 스틸웰을 중일전쟁으로 보내버린 적도 있다.
7. 대중매체에서
-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4형제 중 홀로 살아남은(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제임스 라이언 일병을 구하는 미션을 최종 승인하는 육군참모총장으로 나온다. 구출 작전에 회의를 표하는 부하를 설득하기 위해 빅스비 서신(Bixby Letter)[50]을 암송하여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배우는 하브 프레스넬.
- Hearts of Iron IV에서는 미국 육군참모총장으로 등장하며 능력은 육군 훈련 (전문가)로 육군 경험치 획득량 +0.09 매일, 사단 훈련 시간 -10.0의 효과를 가진다.
- 한국 대체역사소설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 주인공 유진 킴의 조력자이자 상관으로 등장한다. 뛰어난 능력 덕분에 마셜에몽이나 마법의 마셜고둥, 마셜 농장 농장주 등으로 불리며 독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주인공을 조지는 역할로 나온다. 조지 C. 마셜(검은머리 미군 대원수) 참고.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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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위 | 명단 |
부통령 | <colbgcolor=#fff,#1f2024> 앨번 W. 바클리 | |
국무장관 |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 주니어→ 제임스 F. 번스 → 조지 C. 마셜 → 딘 애치슨 | |
재무장관 | 헨리 모겐소 주니어 → 프레드 M. 빈슨 → 존 웨슬리 스나이더 | |
국방장관 | 제임스 포레스탈 → 루이스 A. 존슨 → 조지 C. 마셜 → 로버트 A. 로벳 | |
법무장관 | 프랜시스 비들 → 톰 C. 클라크 → J. 하워드 맥그래스 → 제임스 P. 맥그레너리 | |
체신장관 | 프랭크 C. 워커 → 로버트 E. 해네건 → 제시 M. 도널드슨 | |
내무장관 | 해럴드 L. 아이크스 → 줄리어스 알버트 크루그 → 오스카 L. 채프먼 | |
농무장관 | 클로드 R. 위커드 → 클린턴 앤더슨 → 찰스 F. 브래넌 | |
상무장관 | 헨리 A. 월리스 → W. 에이버럴 해리먼 → 찰스 W. 소여 | |
노동장관 | 프랜시스 퍼킨스 → 루이스 B. 슈웰렌바흐 → 모리스 J. 토빈 |
}}} }}}}}}}}} |
[1]
장성급 장교 출신으로 국방장관과 국무장관을 각각 역임한 인물은 몇몇 존재하나 두 직책을 모두 역임한 인물은 미국의 역사상 그가 유일하다.
[2]
2차 대전기 미국 최고사령부
[3]
미해군이나 공군도 마찬가지인데 해군참모총장으로서 해군을 총지휘했던
어니스트 킹도
체스터 니미츠나
레이먼드 스프루언스와 같은 휘하 일선 지휘관들에 묻혀버렸고 전후 공군으로 재편되는 육군항공대 사령관인 '헵'
헨리 아놀드 원수의 경우에는 단명한 데다 일선 지휘관
커티스 르메이에 묻혀 버렸다.
[4]
사실 이 사람들보다도 더 묻힌 인물이 있으니 바로 2차대전 당시의 합참의장 격이었던 윌리엄 리히 장군이다. 당대 제복군인의 정점이었지만 참모총장 세 명과 마찬가지로 야전 사령관은 아니었기 때문이며 그나마 마셜 플랜 등으로 이름이 알려진 조지 마셜이나 더러운 성격으로 유명했던 어니스트 킹, 공군의 아버지이자 사실상의 초대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헨리 아놀드에 비해서도 지명도가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물론 합참의장 자리까지 올랐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었던 만큼 유능함이라는 면에서는 부족하지 않았다.
[5]
아예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실패했던 일들은 진주만, 중국과 같이 불가항력이었던 것들이 제일 컸다. 또 육군의 인선을 책임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인사상의 실수도 몇 번 있었다. 가령 마셜이 다른 술꾼과 착각해서 계속 진급이 막혔던
제임스 밴 플리트가 있다. 물론 마셜도 본인의 실수를 깨닫고 나서 기회가 될 때마다 진급시켜주기는 했다.
[6]
그나마
마셜 플랜 덕분에 이름이 알려져있어서 정치인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다. 정작 마셜이 자신의 신념때문에 투표도 안할 정도로 정치판에 끼기 싫어했던걸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7]
몇 가지를 살펴보면, 전시 체제 속에서 군대가 필요로 하는 온갖 전쟁 무기, 물자의 생산 독려 및 그에 따른 기업들에 대한 적절한 이윤 보장과 이 것을 위시하여 전쟁의 승리를 위해 필요하다 판단되는 온갖 국방 예산을 의회에 요청하고 승인을 위한 각종 설득과 전쟁 수행과 지속의 당위성 설파 및 그외 관련된 온갖 기관들에 대한 협조 요청등이 그렇다.
[8]
베닝 혁명은 단순한 교리의 혁신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미군의 교육훈련 그 자체를 까뒤집어 엎었다. 모든 비실전적인 교육훈련을 폐지했고 철저하게 실용적이고 실전적인 교육훈련으로만 채워졌다. 그의 저서인 '마셜보병전투'는 현대에도 지휘관이 범할 수 있는 오류들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으며 지금도 이뤄지는 비실전적인 교육의 문제점을 대차게 까고 있다.
[9]
역할 이상을 무모하게 시도하려 하다가는 한국 전쟁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의 사례처럼 국가의 방침에 반하는 월권 행위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
걸프전만은 예외인데 바로
콜린 파월이라는 걸출한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11]
남북전쟁 후기인 1864년부터 1865년 종전까지 미국의 육군참모총장(Chief of Staff of the Army)은
헨리 할렉이었는데, 그는 육군 최선임 직위인 육군총사령관
율리시스 그랜트 아래에 있었으니 사실 최고 책임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한편, 대통령을 보좌하는 최선임 참모의 역할을 수행한 것은 지금의
육군부 장관에 해당하는 전쟁장관 에드윈 스탠튼이었다. 대남 강경파였던 그를 링컨의 후임 앤드루 존슨 대통령이 무리하게 잘랐다가 탄핵소추의 위기에 몰린다. 단, 스탠튼의 행보 자체도 대통령의 행정부 인사권을 무시하는 등 논란의 여지가 크기는 했다.
[12]
헌터 리게트의 부관이였다.
[13]
직위 진급
[14]
M26 중전차에 이름이 붙은 그 사람 맞다.
조지 S. 패튼 장군의 은사이기도 하다.
[15]
"Should the exigencies of active service place him in exalted command I would be glad to serve under him." 마셜을 일찌감치 장군감으로 인정한 진심어린 칭찬이다.
[16]
"Yes, but I would prefer to serve under his command."
[17]
전쟁 시기에는 전시 임관도 많았고 장교의 수도 부족했기에 승진이 빨랐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방대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없기에 군축을 단행하게 되는데 많은 장교들을 예편시키거나 전쟁 이전의 계급으로 강등시켜서 수요를 맞추는 것이 보통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계급 특진 참고.
[18]
프랑스의 포슈 장군이 말한 20년간의 평화. 1차 세계 대전 종전일부터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날까지(
1918년~
1939년)를 가리킨다. 또 다른 말로는 해군 휴일.
[19]
이 때의 경험이 제2차 세계 대전에 미군을 빠른 시간 안에 재무장시키고 훈련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20]
구 미국 조계. 1901년 영국으로 넘어갔다.
[21]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맥아더 역시 소장에서 임시 대장으로 진급해 육군참모총장이 된 바가 있다.
[22]
아이젠하워는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연합군 전체를 지휘하는 자리에 있었다. 스포츠로 바꿔보면
감독(아이젠하워)과 단장(마셜) 같은 사이.
[23]
이때 일본군에서는 "소련한테 전쟁 물자 좀 얻어봅시다. 이왕이면 내분도 일으켜보고. 안 되면 소련한테 평화 회담을 주선해달라고 합시다"라고 제안했다. 물론 외교 담당자들의 반응은 "나치하고 편먹었던 우리가 소련한테 물자를 받는다고요? 거기에다 미국하고 소련을 이간질 시키겠다고요? 정신 나갔어요?"
[24]
최근엔 국민당의 초반 공세를 중재로 중단시킨 것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에 일정부분 기여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이에 대해선
중일전쟁 당시 추천하여 임명된 참모장인
조지프 스틸웰에 대해서도 참고하면 좋다. 다만 마셜은 1924년~1927년까지 중국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상황에 대해 해박했기에(다만 혼란기에 있었던 만큼 스틸웰처럼 부정적인 이미지만 쌓여 색안경을 꼈단 주장도 공존한다.) 장제스에 대하여 상당히 날선 비판을 많이 남겼다. 때문에 마셜은
장제스가 공산당을 이길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영구적 휴전이 최선의 방식이라 생각했다.
[25]
"우리는 소련이 유럽과 중동, 그리고 아시아까지 자신들의 지배 영역을 확장하려는 연속적인 위협 중 첫 번째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6]
원자폭탄의 사용을 건의한 핵심적인 이유가 바로 빠른 종전을 통해 소련의 개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27]
45년에 죽은 루스벨트보다도 2살 많았다. 그나마 젊었을 적부터 테니스, 승마 등을 즐겨하는 등 꽤나 관리를 잘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과로와 업무량에도 불구하고 꽤 장수한 편이다.
[28]
Cray, Ed. General of the army: George C. Marshall, Soldier and Stateman. New York: W. W. Norton, 1990, p.685.
[29]
국방부의 전신인 육군성, 해군성을 포함하여
[30]
국방장관
[31]
전 주소, 주영대사
[32]
국무장관
[33]
합참의장
[34]
마셜에 대한 군부의 지지는 확고하다 못해 절대적이었고 2차 대전기 동안 육군의 최고책임자였던 마셜에 대한 비난은 마셜의 명령을 이행한 육군의 고위장성들, 대표적으로
아이젠하워에 대한 비난으로도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 매카시는 1954년에는 공화당 내부에서도 찍혀서 박살나고 만다. 소속당에게마저 버림받은 매카시는 이후 실의에 빠져 과음을 일삼다가 그로 인한 급성 간염으로 48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35]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공화당이 민주당 20년 정권(프랭클린 루즈벨트 ~ 트루먼)을 탈환하기 위해 데려온 비장의 카드였으므로 상원의원이라지만
일개 술주정뱅이 따위의
헛소리로 그에게 흠집이 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36]
이때 소련이 수상에 반대했는데 오히려 이 때문에 매카시와 같이 마셜을 비난하던 반공주의자들이 한마디도 못했다고 한다.
[37]
나치독일이 독소전쟁기간 내내 광활한 러시아 영토로 인해 병참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것과는 극명하게 비교된다. 미국은 우월한 병참능력을 바탕으로 유럽의 독일과 태평양의 일본을 상대로 동시에 전 세계의 곳곳에서 양면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히틀러가 꺼렸던 양면전쟁을 미국은 거뜬히 해냈다.
[38]
그는 직접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지휘 하려했으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태평양 전쟁이 난 상황에서 이 모든 상황을 조율 할 수 있는 전략적 안목을 가진 장군은 마셜밖에 없다며 지휘를 말리기도 했다.
[39]
당시 이미 육군에서 반독립하여 실질적인 공군이었다.
[40]
최고 사령부는 합참의 전신. 리히 제독은 지금으로 치면 합참의장.
[41]
47년 국방부 설립 전까지 미국은 육군성(전쟁성)과 해군성이 독립되어 있었다.
[42]
해군이 태평양 전선을 맡은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실제로는 육군과 해군이 절반씩 지휘권을 행사했다. 대독일 전선이 어느 정도 안정화 된 후 부터는 상당수의 육군이 태평양 전선으로 배속되었다.
[43]
해군 측의 인물이었던
제임스 포레스탈 초대 국방장관이 자살을 했고, 해군청장과 해군참모총장 휘하 수많은 제독들이 사표를 내거나 좌천, 불명예 제대를 각오하며 국방부에 항명하였다. 후세는 이를
제독들의 반란이라 기록하고 있다.
[44]
사실 공사 구분이 명확하다기보다는, 그냥 공밖에 없었다는 쪽이 정확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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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루스벨트의 선거운동에 참가했다.
[46]
본명은 엘리자베스 카터 콜스(Elizabeth Carter Coles).
[47]
Anzio
[48]
미군은 마셜이란 호칭이 유럽풍이라며 일부러 다른 호칭을 선택했다. 때문에 미국 영어로 마셜은 군인이 아니라
연방보안관을 지칭한다.
[49]
물론 마셜의 성격 상 매우 드라이한 농담이었을 것이다.
[50]
남북전쟁 당시 다섯 형제를 잃은 어머니에게
에이브러햄 링컨이 보낸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