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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5 22:07:16

세도정치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의 역대 집권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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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도정치
勢道政治
기간 1800년 ~ 1873년
정치 체제 과두제, 집단지도체제
권력 기구 비변사
주요 인물 ( 홍국영)[1]
김조순[2]
김좌근[3]
주요 사건 (1776년 정조 즉위)
1800년 순조 즉위
1811년 홍경래의 난
1839년 기해박해
1845년 미국 함대, 통상 요구
1860년 최제우 동학 창시
1862년 임술농민봉기 발발
1864년 고종 즉위
성립 이전 붕당정치
붕괴 이후 흥선대원군 집권, 민씨 일가 세도
1. 개요2. 배경
2.1. 세도정치의 징조2.2. 정조 전후의 세도 정치
3. 원인
3.1. 계급적 분석: 권력의 수도권 집중화3.2. 제도적 분석: 권력 견제 장치의 실종3.3. 역사적 이유: 왕들의 문제
4. 시대별 특성
4.1. 순조 시대(1800년 ~ 1834년)4.2. 헌종 시대(1834년 ~ 1849년)4.3. 철종 시대(1849년 ~ 1863년)4.4. 흥선대원군 시대(1864년 ~ 1873년)4.5. 고종 친정 시대(1873년 이후)
5. 세도 정치기의 모습들
5.1. 정치5.2. 경제와 사회의 혼란5.3. 외교와 국방5.4. 문화와 실학
6. 평가
6.1. 조선 후기 세도정치가 조선의 멸망을 부르게 된 이유6.2. 세도 가문들이 똑똑한 왕족들을 마구 죽였다?6.3. 이전 왕조들과의 비교6.4. 외국의 사례와의 비교
6.4.1. 일본
7. 세도 가문 일람8. 주요 인물 일람9. 창작물
9.1. 소설9.2. 드라마9.3. 영화
10. 관련 문서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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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도정치([4])는 국왕에게 위임을 받은 특정인과 그 추종 세력, 즉 소수의 외척 가문들의 개입에 의해 이루어진 독과점적 정치 형태를 말한다. 이것의 문제는 단순히 백성들이 못살겠다고 하는 것을 넘어서서 왕조나 국가를 지탱하는 사회 지도층 내에서 균열이 생기고, 따라서 소외된 다수의 사회 지도층들이 기존 체제를 대체하는 것만이 자신들이 살 길이라고 판단하게 된다는 점이다.

'정치란 널리 사회를 교화시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를 말한다'라는 사림의 통치 이념에서 나온 이상적인 정치 도의를 의미하는 것이 '세도(世道)정치'였지만, 국사 시간에는 조선 말기에 벌어진 한양의 명문 벌열가문인 신 안동 김씨(장동 김씨[5]), 풍양 조씨[6], 반남 박씨[7]와 그 외의 일부 가문들[8]이 주도한 세도정치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대부분 혈연관계로 이어진 이들 19개 가문을 제외하고는 웬만큼 조선 후기까지 잘 나가던 집안들마저 중앙에서 모두 멀어진다.[9]

물론 조선이 제대로 막장으로 치닫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급격한 사회적 변화가 나타나는 격동의 시대이기도 한데 비교적 대중적으로는 인지도가 소외된 시기이다. 그저 "그냥 막장인 시대" 정도로만 알고 끝나기 때문인 듯. 이 시대 앞에는 영조 정조, 뒤에는 흥선대원군이라는 대형 떡밥이 있는 탓일지도 모른다.

결국 세도정치는 정조 시대 사극에서 "명군 정조가 승하하고 조선은 쇠락하기 시작했다"는 식의 에필로그 정도로 다뤄지거나, 고종 시대 사극에서 "(신) 안동 김씨의 세도 아래서 흥선대원군은 그들에게 '상갓집 개'라 불리는 수모를 참으며 야망을 불태웠다" 이런 프롤로그 식으로 묘사되기 마련.

조선사를 공부하며 훈구파 붕당정치의 폐단에 치를 떨던 학생들은 이 시대를 배울 때쯤 되면 그나마 훈구파나 붕당이 세도보다는 나았구나 하고 치를 떨게 된다. 특히 중기 이후 조선이 빈 껍데기만 남았다는 대중적인 편견과 달리 조선의 행정력, 혹은 그것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위정자들의 무능과는 별개로 전근대 국가치곤 훌륭한 편이었다.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꼬집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부정부패 문제는 조선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초기 관료제 사회, 사실 현대까지도 어디든지 피해갈 수 없는 병폐였다. 하지만 이것도 세도정치 시기부터는 옛말이 되었고, 이후 조선이 정말 처참히 무너지는 걸 보면 나라 말아먹기가 얼마나 쉬운지를 알 수 있다.[10] 또한 세도정치는 고종 재위기와 함께 조선 왕조의 한계점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동시에 문제점이 부각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마치 대원군하면 흥선대원군만 의미하는 것처럼 쓰이듯이, 세도정치의 대명사는 신 안동 김씨다. 왜냐하면 세도정치가 여러 세도 가문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그중에서도 신 안동 김씨는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 순조, 헌종, 철종의 3대에 걸쳐서 순원왕후, 효현왕후, 철인왕후를 배출한 왕실의 외척 가문이었으며 신 안동 김씨였던 김조순이 세도정치의 문을 열었고, 철종조의 마지막 세도정치 시기도 신 안동 김씨의 세상이었다. 세도정치의 시작과 끝이 신 안동 김씨의 천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가문들은 어디까지나 경쟁자나 협력자의 위치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 다음 가는 가문이라면 풍양 조씨라 할 수 있다. 대리청정을 했던 효명세자의 비인 신정왕후 조씨가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로 신 안동 김씨와 경쟁했다. 신정왕후 조씨는 고종을 왕위에 올린 인물이기도 하다. 3위 정도 되는 가문이라면 반남 박씨가 있다. 순조의 친모인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가 반남 박씨 박준원의 딸이었다. 세도정치기의 시작이었던 순조의 처가가 신 안동 김씨라면 외가는 반남 박씨가 되는 막강한 가문이었다. 그래서 가문의 여러 인물이 순조와 헌종 시기 요직을 차지했다. 그 외의 가문은 대구 서씨, 연안 이씨, 풍산 홍씨 등이 있다. 또 여흥 민씨( 명성황후가 속한 성씨)도 이 범주에 넣는 경우도 있다.

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끝난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갑오개혁 이후까지도 척신들이 조정 곳곳에 내린 뿌리는 없어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대원군 집권 후인 1872년에도 영의정은 김병학이었고, 1884년 갑신정변 당시 호조판서 김병시는 1896년 아관파천 때 총리대신까지 역임했다.

2. 배경

2.1. 세도정치의 징조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나서 집권한 서인 세력은 관직을 독점하기 위하여 반정 이후 급격한 변괴가 자주 생겨서 불안하고 의심이 된다는 이유로 가문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 즉 벌열을 기준으로 관리를 선발하면서 벌열의 정치적 독점을 가속화했다. 여기에다 왕실과의 혼인은 벌열들의 세력을 확고하게 만들어줬다. 벌열이 관직을 독점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후기에 들어와 문과 시험이 벌열에 유리하도록 실시됐기 때문이다. 지방 거주자들이 참여하는 정기시험인 식년과보다 부정기적으로 한양에서만 실시되는 특별시험인 증광시, 정시, 별시, 알성시, 춘당대시 등이 조선 후기에 크게 늘어나 전체 문과시험의 81.9%를 차지했다. 부정기시험은 급작스럽게 실시되었기 때문에 한양과 멀리 떨어진 지방 유생들은 거의 응시하지 못했으며 문과 급제자들의 거주지는 대부분 서울이었다. 여기에다 문과에 급제하면 벌열 출신들은 이른바 엘리트 코스인 사관 등의 국가 요직을 독점하면서 당상관으로 쉽게 진출할 수 있었다.[11]

숙종은 3차례의 환국을 거친 뒤에 1694년부터 1716년까지 노론 소론에게 관직을 골고루 제수하면서 서로를 견제시켰다. 이는 옥사로 통하여 한쪽 당파가 다른 당파를 제거하여 일당 독주로 가는 길을 막고, 옥사를 통한 리스크로 사회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계책이었다. 그러나 숙종은 세자( 경종)와 친하지 않았고, 연잉군( 영조), 연령군과 친했다. 그러다가 1716년에 병신처분으로 권력 균형이 깨지고 노론에게 우위를 주면서 숙종은 후계자 교체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노론과 같이 1717년, 정유독대를 통해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행한 다음에 그 구실이 생기면 바로 폐세자시킬 계획이었다. 노론이 이 계획에 동참하면서 노론이 연잉군의 줄에 섰고, 소론은 어쩔 수 없이 세자에 줄에 서서 세자를 지켰다. 그러나 세자는 대리청정 기간에 사고를 치지 않아 노론에게 폐세자를 시킬 책모를 막았고, 여기에 숙종이 1720년에 승하하면서 노론의 폐세자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희빈 장씨의 아들인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 강경파는 세를 더욱 굳혀서 연잉군을 세제로 두고 무리수까지 두면서 대리청정까지 하려고 시도했으나 경종은 연잉군에게 세제 자리를 두면서 대리청정을 시행하는 것까지를 막았다. 그러자 소론은 1721~1722년에 신임옥사로 통해 노론 강경파를 멸망 상태에 빠지게 했다. 하지만 경종이 1724년에 승하하고 연잉군이 등극하게 되면서 왕이 된 영조는 소론 강경파을 처음엔 어쩌지 못했지만 이의연의 상소 등을 기회로 1725년에 을사처분을 통해 소론 강경파을 털어낸다.

이에 노론이 정권을 장악하나 노론 강경파가 소론 온건파까지 제거하려고 하자, 영조는 1727년에 정미환국을 통해 노론 강경파를 몰아내고 노론 온건파와 소론 온건파를 집권하게 했다. 한편 소론 강경파인 이인좌 경종 독살설 을 기반으로 삼아 남인들과 손을 잡고 밀풍군 이탄을 옹립해 1728년에 난을 일으키지만 오명항 등에 패해 진압되면서 소론 강경파와 남인의 입지가 무너지고 멸망했다. 이후 영조 집권기에 소론은 박문수, 조현명, 송인명, 조재호[12] 등의 온건파만이 살아남는다.

한편 집권한 영조의 등극에 공이 컸던 노론은 옥사와 같은 정치 보복을 통해 세를 과시하려 하나, 탕평책이라는 영조의 왕권 강화책 때문에 소론 온건파를 제거할 책모를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노론 강경파는 관직을 사직하고 자신들의 기반인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재야 사림 세력으로 남게 되었으며, 조정 영향력을 스스로 소멸시키면서 조정 일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편 소론과 노론이 온건파만 남게 되자, 탕평책을 통한 영조의 비호 아래 노론과 소론 온건파는 점차 정권을 독점하기 시작했으며, 탕평당이라는 문벌 집단을 구축하고 장기 집권한다. 이제 조선 조정은 탕평당 출신 관리들이 관직을 독점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는 홍봉한, 김한구, 김귀주, 정후겸 등 척신들에게 권력을 몰아주게 되었다. 더군다나 노론과 소론 온건파는 당파의 의리와 시비를 형성하지 못해 결국에는 당파 자체가 의미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영조의 완론 탕평은 당파 간의 권력 투쟁을 막으면서 국가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는 측면이 있지만 붕당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인 의리와 시비를 줄이면서 결국에는 당파만의 고유한 색채를 약화시켜 세도정치의 기반을 만들어 버린 셈이다.

2.2. 정조 전후의 세도 정치



정조가 1776년에 즉위하고 이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홍국영이었다. 홍국영은 역적 아버지를 죽인 외척 세력에게 위협을 받던 정조의 심복으로, 사서에 "오른 날개"라는 표현이 직접적으로 등장할 정도로 정조의 큰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정조의 즉위 후 외척을 숙청하면서 사실상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다. 심지어 홍국영은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그의 동생인 원빈 홍씨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였는데, 원빈 홍씨는 그 가례를 치를 때 중국 귀비의 예를 참조하고, 생전에 조정과 약방의 문안을 받고, 사후 시호와 원호를 받는 등 여러 면에서 후궁의 격에 맞지 않는 이례적인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홍국영의 권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정조의 지시에 의해 물러났으며 직후 탄핵 당해 강릉에 있다가 34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로 인해 세도정치란 말이 나타났으나 그 폐단은 비교적 짧았다 하겠다.

홍국영이 몰락한 이후에 벽파와 시파로 나뉘는데 흔히 벽파 시파의 분류를 사도세자와 연관지으려는 말이 많다. 우선 벽파와 시파의 구분 자체가 정조 때의 일이며 벽파는 척신 홍봉한에 맞서려는 청명당 즉 김종수, 심환지, 윤시동 등의 젊은 선비들로 구성된 무리가 시초였고 그 반대쪽이 홍봉한에 영합하여 권력을 얻으려던 탕평당의 무리였다. 벽파는 사도세자가 살아있던 시절에는 존재한 적조차 없고 그들의 전신인 청명당이나 노론 또한 사도 세자의 죽음에는 별 책임이 없다. 본격적으로 벽파, 시파가 대두되었는데 이때 벽파는 의리를 내세워 역적의 무리인 남인, 소론과는 한 조정에서 있을 수 없으며 사도세자 추숭 또한 의리를 내세워 집행한 일로 추숭을 거행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조정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추숭을 한다는 말은 사도세자의 죽음 자체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고 당시 조정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이 국본을 해친 역이라는 주장으로도 이어질 수 있으며 이는 노론의 일망 타진을 불러올 수 있었다. 그러니 벽파는 추숭에 찬성할래야 찬성하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러나 역으로 찍혀 입지가 취약한 소론과 채제공을 위시로 한 남인이 시파의 입장에 서고 정조의 뛰어난 자질과 능력에 규장각을 통해 성장한 소장파 들과 공신 정민시 등이 시파에 합류하는 등 시파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정조는 벽파에게 고난당한 것이 아니라 벽파를 같은 정국 파트너로 생각했으며[13] 이는 심환지에게 '우리 벽패는...'이라며 어찰을 보내 동지 의식을 드러낸 것에서도 나타난다. 1800년에 정조가 죽으면서 수렴청정한 정순왕후 김씨의 김관주, 김용주, 김일주 등 정순왕후 김씨의 친정 가문으로 이루어진 벽파가 5년간 정권을 장악했다. 정순왕후와 벽파는 1801년 신유박해를 통해 천주교( 가톨릭)와 친했던 남인을 제거하거나 유배해서 몰락시켰다. 그리고 1805년에 정순왕후가 사망하고 벽파의 세력이 위축되며 시파의 세력이 키워지자 1806년에 정조와의 의리를 저버렸다는 명분( 병인갱화)으로 벽파는 제거당하거나 유배로 쫓겨났다. 결과적으로 남인은 신유박해로, 벽파는 병인갱화로 몰락하자, 시파만 남게 되었고, 시파는 김조순을 중심으로 해서 세도정치가 등장하게 되었다.

실제로 정조는 개인의 역량을 기반으로 정치 세력의 개편을 꾀했으나[14], 그가 갑작스레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은 후계자는 아직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구축점을 잃었다. 초창기 순조는 벽파 숙청 및 열심히 정사에 임하는 등 좋은 역량을 보였으나 홍경래의 난을 계기로 그야말로 국정에 질려버려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는 등 정치에서 손을 떼게 되어버렸다. 순조의 이러한 선택은 결과적으로 안동 김씨 세력이 권력을 잡게 되어버렸으며 결국에는 일련의 '개편'이 기존 정치 질서의 파괴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3. 원인

3.1. 계급적 분석: 권력의 수도권 집중화

덧붙여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조선 중기 사림들의 집권 이후 권력의 수도권 집중화에 따른 예견된 흐름으로도 볼 수 있다.

중종 시기의 빈번한 대옥사와 불안정했던 정치로 인해 조정 출사를 거부하거나 관직에 있어도 사직해서 지방으로 낙향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그래서 어지러운 조정을 피해 지방에서 학문적 소양을 닦거나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을 확립시켜 제자를 양성했는데 그중에서 발달된 지역이 영남 지역이었고, 이러한 영남 사림을 기반으로 해서 선조 시기에 집권하며 북인 남인이라는 붕당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광해군 시기에 이어진 대옥사와 북인의 분열, 인조반정 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영남 사림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이후로 서인 세력을 위시한 기호 사림[15]이 쇠퇴한 영남 사림을 대체했으며, 남인도 예외없이 인조반정 이후에는 기호 사림으로 채우게 되었다.

인조 시절부터 서인, 남인을 가리지 않고 기호 사림들이 조정을 장악한 이후로 환국이 남인 아웃으로 일단락된 숙종 후기인 18세기 들어서면서 사림이 한양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사족과 충청도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 사족으로 나뉘어졌다. 수도권, 그나마도 명문 출신이 아니면 과거 급제는 물론, 과거에 합격해도 관직을 얻지 못하는 경화 사족의 비대 현상이 심화되었고, 17세기 중반 이후로 권력의 핵심에 멀어진 영남 사족들은 1728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으로 그 권세를 잃었고 결국에 경상도는 이후 영남만인소로 정조가 공식적으로 차별을 폐지할 때까지 60년간 반역지로 몰리게 된다.

한양과 기호 출신의 중앙 관직 독주로 권력에서 멀어진 지방 사족들은 그들 나름대로 서원을 통해 향촌 사회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는데 필사적이 된다.[16]

영조 후반기, 즉 170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 사색 당파 가운데 남은 붕당은 노론과 소론뿐이었으나 당파색을 갖추고 있었던 노론 강경파는 신임옥사로, 소론 강경파는 영조 31년에 벌어진 나주 괘서 사건으로 몰락했으며, 노론과 소론 모두 서로 다르게 된 정치적 의리를 갖추지 못하고 왕의 영합에 맞추는 탕평파들이 집권한 상태로 된다. 한편 허목의 생존으로 살아남은 남인들이 청남의 채제공 중심으로 최후의 재기를 노리지만 채제공을 마지막으로 정승을 배출하지 못했고, 정조 사후 신유박해로 벽파에 의해 몰살당한다. 한양 명문가 출신이 아니면 관직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였으며, 거기다 탕평파의 집권으로 풍산 홍씨, 경주 김씨 같은 가문이 주도하게 되면서 노론 일당 내에서 북당, 남당으로 계파를 만들고 당을 주도하는 흐름을 보였으니, 이미 영조 후반기부터 세도정치의 조짐이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영조 이후 정조는 등극과 함께 척신 정치를 척결하고, 벽파를 한 축에 두며, 몰락한 남인·소론 등에게 힘을 실어주어 영조 전반기 이전의 붕당정치의 복원을 꾀했다.[17] 하지만 정조 사후에 발생한 신유박해 남인, 병인갱화 벽파가 소멸되면서 붕당다운 붕당은 모두 사라지고, 남은 현실주의 세력인 시파 가운데서 권세를 가진 가문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세도정치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탕평파와 시파는 결국 근왕 세력이므로 의미있는 당파라고 볼 수도 없다. 바로크 뒤에 로코코가 출몰했듯, 세도정치란 근본적으로 영조, 정조의 절대왕정으로 인해 생겨난 결과물이었다.

이 문제를 간파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섭정 당시 중앙정계에 배제되어 있던 종친, 남인, 소론은 물론, 북인과 반역향이라고 소외된 영남 유림, 서북인, 함경도인, 고려 왕씨를 끌어들이고, 서얼 향리의 차별을 철폐하는 등 배제되어 있던 세력들을 대거 끌어들임으로써 고종의 친정 전까지 일시적으로나마 세도가의 전횡을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3.2. 제도적 분석: 권력 견제 장치의 실종

우선 조선 왕조 정치의 대표적인 특징은 공론을 중시하는 정치이다. 사헌부의 대관과 사간원의 간관[18]을 대간, 혹은 청요직이라 해서 왕권 및 의정부와 6조를 감찰하고 탄핵하게 해서 권력의 견제 장치를 만들어놨다. 한마디로 왕권이 대신들에게 견제받고, 이들을 동시에 대간이 견제하는 체제였다. 동시에 대간이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사극에서 "전하 아니되옵니다." 라고 하는 역할을 대신도 맡지만 실제론 대간이 더 많이 맡았다. 왜냐면 대신은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 맡았지만 대간은 왕권과 대신을 견제하는 역할 맡았기 때문이다. 즉 견제가 대간의 존재사유이자 의무였던 것.

그런데 이 대간들이 붕당정치를 거치면서 하라는 비리에 대한 폭로나 정책 비판은 하지 않고, 증거 없이 정적을 공격하는 정치 공세, 즉 '풍문 탄핵'을 일삼게 된 것이다. 사실 이게 가능했던 까닭이 당시에는 풍문만으로 탄핵해도 처벌을 안 받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대간이 원래 직무를 하지 않고 각 당의 이익만 대변하는 당론의 공격수가 되어 상대파를 공격하고 탄핵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개혁할 필요성은 이미 빠르게는 성종, 적어도 선조 대부터 지적받아오던 사항이었다. 물론 이러한 것을 옥사로 해결하면 되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내서 정치를 혼란스럽게 만들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인 중종이나 광해군은 이를 잦은 옥사로 잘 써먹으며 왕권을 강화해왔으나, 결국에는 옥사 자체가 피를 부르기 때문에 유혈 충돌로 번지게 되었고 후대에는 왕권마저 위협받게 되면서 정치 혼란만 가져왔다.

한편 숙종 환국 경종 시절에 당파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까지 경험하게 된 영조와 정조는 붕당의 폐단이 대간 그 자체에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영조 대에 청요직을 혁파하고, 정조 대에는 영조의 이러한 정책을 계승하면서 말년에는 아예 탄핵을 제한하는 금령을 설치해버렸다. 이 때문에 정조 말기로 갈수록 탄핵의 총 횟수는 계속 줄어들고 그나마 한 탄핵조차 70%가 불허당하는 상황이었다. 대간들이 정조에게 빡세게 "교육"을 받는 상황이었으니 무슨 비판이 가능하겠는가? 특히나 정조는 조선 왕조 역대 국왕들 중에서도 가장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며 입 더럽기 짝이 없는 임금이라서,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그 더러운 성질머리만 자극하고 극딜당할 우려 100%인 임금이다.

덤으로 기존 권력 구조 역시 비상 체제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바로 임시 기구인 비변사이다. 세도가들은 기존의 의정부와 6조를 무력화하고 국가의 최고 정치 기구가 된 비변사의 요직을 차지하고 권력의 핵심이 됐다. 이때 김조순의 처신이 대단히 기가 막혔다. 의정부와 6조 등의 정식 직함은 절대 맡지 않고, 정승들이 겸직하는 비변사 도제조도 맡지 않았지만, 상시직인 제조를 계속 맡았다. 사실 이 비변사의 폐단은 이미 인조 시기에 최명길이 지적할 정도였다. 당시 세도정치기도 아닌 붕당이 나름 건전하게 돌아가던 시기에서조차 비변사의 폐단이 심했던 것. 임시직인 비변사는 이미 주요 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비롯하여 행정·경제·사회 정책 등 국정의 거의 모든 부문을 장악한 상태였다.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부터, 비변사로의 권력 집중으로 인해 의정부와 삼군부, 민정 6조(호조, 예조 등)가 집행기구로 전락하면서 계속 폐지 요구가 쏟아졌다. 현종 때부터 비변사 폐지 논의가 본격화되었으나 문제는 그 폐지 논의한 인간들이 환국으로 자기들이 정권 잡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비변사로 상대 당파를 숙청하는 ''' 내로남불 짓거리를 200년 간이나 지속한다.

물론 비변사가 대신들의 기관인 만큼 언론 활동은 장악할 수 없었지만, 상술했다시피 이 시기에는 공론과 언론 활동이 극도로 약화되어 있었다. 과거 급제자들이 대간이 되기 위해서는 세도가 집에 기웃거려야 하고, 대간 가운데는 세도가의 자제들도 많았는데 누가 언론 활동을 한단 말인가? 그리고 한다고 한들, 군주가 세도가문을 박살낼 의지가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최근 학설에는 세도정치에 대해서 정조의 지나친 왕권 비대화로 인해 이후의 왕이 가져야 할 견제 장치가 완전히 박살이 났고 그 결과 왕은 미필적 고의로 이 세도정치를 내버려두었다고 나오기도 한다.

3.3. 역사적 이유: 왕들의 문제

중국 후한 제국의 몰락과 같다.[19] 정조[20] 이후 조선의 국왕과 세자들이 정치를 멀리하거나 요절하거나 건강에 문제를 겪어서 문제가 심각해진다.

군약신강 문서에도 적혀 있지만, 조선시대에 왕이 자기 자리를 잡고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각각 10~15년 정도의 재위 기간이 필요했다. 이 기간을 줄이기 위해서는 왕이 천재거나, 특별한 계기가 있거나[21] 둘 중 하나는 있어야 하는데, 이 시기의 왕들에게는 양쪽 모두 해당사항이 없던 것이다.[22]
순조는 그나마 오래 산 사례인데, 10세에 즉위해서 5년간의 수렴청정을 거쳤다. 이때 수렴청정을 한 대비가 바로 정순왕후 김씨 경주 김씨다. 게다가 순조는 친정 초기에는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홍경래의 난때 건강상 문제가 생기면서 정치에 의욕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순조가 나름 대책을 세운 것이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한지 4년도 안 되어서 20세의 나이로 요절해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문제가 본격적으로 심각해진다. 건강의 악화와 세자의 죽음으로 이미 의욕을 상실한 순조는 정치 복귀를 해서도 큰 의지를 나타내지 않다가 역시 건강이 악화되어 4년 후에 죽었다.

이제 왕위는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이 이어받게 되었다. 이때, 헌종의 나이가 8세. 조선 역사상 최연소 즉위다. 당연히 다시 수렴청정이 시작되는데, 이때 헌종의 대비는 신정왕후 조씨로 풍양 조씨이다. 하지만 순조의 비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대왕대비의 위치로 수렴청정을 하게 되는데, 이 사람이 신 안동 김씨인 순원왕후이다. 헌종도 장성하면서부터 스스로 정치를 하려고 했으나, 22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재위기간이 14년인데, 이중 절반은 수렴청정 기간이다.

헌종이 후사도 못 남기고 사망했기 때문에, 이때 즉위하게 되는 왕이 강화도령 철종이다. 당시 철종은 그나마 가까운 혈족이라는 이유로 19세에 평민처럼 살다가 갑자기 불려가서 왕이 된다. 철종은 민담처럼 글도 모르는 수준은 아니었다. 즉위한 날 대신들이 "그동안 무엇을 배우셨습니까?" 라고 묻자 《소학》과 《통감》 1, 2권을 읽었으나 근년에는 배운 게 없고 그나마 배운 것도 잊어먹었다고 대답했다. 이 정도만 해도 문맹이 많았던 왕족 중에서는 배운 편이었던 셈. 사실 왕족들은 굳이 열심히 공부를 할 이유가 없었다. 종친들은 벼슬길에 오를 수 없으며 그저 취미로 학문을 탐구한다고 해도 오히려 학문을 빌미로 왕위를 탐내는 것이 아니냐는 꼬투리를 잡힐 수도 있었다. 대부분의 종친들은 재산이 넉넉해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어 굳이 공부할 필요가 없었으며, 철종처럼 가세가 몰락한 경우에는 상민처럼 생업에 종사해야 했기에 공부에 투자할 시간이 없었다.[23]

정치적인 세력이 없기에 19세의 성인이었음에도 철종을 양자로 입양하는 형태로 왕위에 올린 순원왕후 김씨가 자신의 두 번째 수렴청정을 시작한다. 이때 신 안동 김씨는 철종 비로 다시 신 안동 김씨 왕비를 밀어넣는데, 이 사람이 바로 철인왕후 김씨이다. 철종은 사회현실의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었으며 적극적으로 개혁하려고 했지만, 기본적으로 세도가에 의해 옹립된 임금이고 정통성이 취약해 국왕의 뜻을 충실히 받들어줄 세력마저 부족해 개혁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의욕을 잃고 여색과 술로 시간을 때우기 시작했으며 재위 말기에는 잔병치레로 골골하다가 3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고종이 26대 왕으로 즉위하는데, 이때 대비가 된 인물이 원래라면 24대 왕으로 즉위했어야 했을 효명세자의 부인 신정왕후 조씨, 일명 '조대비'이다. 그래서 고종이 효명세자의 양자라는 형태로 국왕이 되는 것이다. 요약하면 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왕들의 잇따른 요절로 인해서 대비를 꾸준히 배출하며, 왕이 그들을 미처 견제를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성립했고, 역으로 왕들이 너무 빨리 죽어서 후사도 잇지 못하는 상황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왕권과 신권의 균형이 붕괴된 것이다.

4. 시대별 특성

4.1. 순조 시대(1800년 ~ 1834년)

19세기 순조 시대의 세도정치는 왕의 장인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왕의 처가인 ' 신 안동 김씨' 가문을 주축으로 왕인 순조의 외가인 ' 반남 박씨' 가문이 우대를 받는 형태로 전개됐다.[24][25] 세도정치를 확립한 김조순이 얼핏 보면 간신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론 겸양의 처세와 지방 인재 추천 등으로 당시엔 ' 군자'로 불렸던 인물이다. 오히려 김조순이 유명한 간신들과 비슷한 오명이 있었더라면 세도정치의 방향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김조순이 굳건하던 순조 시대에는 홍경래의 난을 제외하면 조선의 중앙 정치가 안정화됐다는 건 아이러니다. 그러나 오래 유지된 조선 정치 사회 체제의 부조리( 삼정의 문란)는 계속 심화되어 갔고, 김조순이 효명세자, 순조와 비슷한 시기에 함께 죽으면서 그의 자식들, 조카들 그리고 친족들이 김조순이 쌓아 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점차 막장 행보를 달리면서 헌종, 철종 대에 세도정치가 가진 문제들이 심각하게 표출된다.

시파였던 신 안동 김씨[26] 천주교에 제법 온건하였다. 신 안동 김씨의 봉사손이 천주교 혐의로 신유박해 때 처형되기도 했을 정도. 또 고증학에 관심을 가지는 등 '성리학 유일 사회' 조선 치고는 상당히 특이한 모습을 보인다.[27] 문제는 이들이 천주교에 관대했을 뿐이며, 현실 개혁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때 효명세자의 장인이 된 조만영은 조득영의 아우로, 조득영은 벽파의 김달순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려 순조 초 벽파, 시파 간 싸움에서 벽파를 아작내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이 점이 마음이 든 순조는 특별히 그의 동생인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는데 이것이 풍양 조씨를 세도 가문의 반열에 올려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사실 풍양 조씨는 이전에 서인-소론-시파에 속하긴 했지만 당파의 전면에 나서는 인물은 그다지 없었다. 그런데 외척이 된 일로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흔히 세도정치를 설명할 때 순조 34년, 헌종 15년, 철종 14년을 합쳐 63년간, 반올림해서 60년을 세도 정치 시기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엄밀히 말해서 틀린 것이다. 순조가 즉위한 후 4년간은 세도정치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벽파가 집권하고 있었고, 정순왕후 김씨가 죽은 뒤 2년간은 시파, 벽파 대립 시기였으며 그리고 한동안은 소론 대신 이시수, 이병모 등과 시파계 대신들이 조정을 주도해나가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홍경래의 난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순조는 열심히 정사를 보았다. 하지만 선왕 정조와는 달리 국정 장악에는 별 관심이 없고 민생에만 주로 관심을 보여서 성과가 미미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 홍경래의 난이 터진 이후로 본격적으로 순조는 정사를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면서 대신들에게 일을 맡겼다. 순조의 건강이 악화된 것도 있었는데, 이때 순조의 건강 상태는 굉장히 나빴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도 비슷한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각설하고 순조 시대는 어디서부터 세도정치로 설명해야할지 애매하긴 한데 김조순은 조금 전에 설명했듯이 막후 정치를 즐겨 신 안동 김씨가 전면에 나서는 것을 삼갔고 그가 죽은 후인 순조 32년이 되어서야 신 안동 김씨가 전권을 장악하여 우리가 흔히 아는 세도정치를 이루게 된다. 게다가 헌종 시기에는 헌종이 20세가 되면서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함에 따라 신 안동 김씨가 박살나기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따지자면 순조의 마지막 2년, 헌종 즉위부터 13년까지, 철종 14년 정도가 진짜로 세도 가문이 조선을 지배한 시대였다.[28]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1832년에 영국 동인도 회사의 상선 암허스트호가 조선으로 와서 통상을 요구한 역사가 있다. 이는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통상을 요구한 서양 상선인데, 일본에서 미국의 페리가 함포 외교로 강제로 개항한 사례와 달리, 암허스트호는 아무런 무력적 압박 없이 평화로운 요구였던 데다, 머무르는 동안 감자를 재배하는 신농법을 알려주거나 의료 봉사를 해주는 등 우리가 그간 조선 말기에 당해온 걸로 무작정 나쁜 이미지만 가지고 있던 당시 서양 세력들과는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832년은 순조의 마지막 2년으로, 바로 앞 문단에서 읽었겠지만 하필이면 참 절묘하게 세도정치의 본격적인 시작 시기와 겹친다. 특히 성리학 교조주의의 고착화와 세도정치의 성행으로 치닫던 조선의 당시 상황과 겹쳐 이러한 평화적인 요구조차 조선은 매몰차게 거부한다. 참고로 암허스트 호의 방한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원인이 된 쿠로후네 사건(1853년)보다 무려 21년이나 빠른 접촉이었다. 구석에 있던 류큐국(오키나와)이나 한참 전쟁을 했던 일본과도 통상 및 외교 관계를 맺을 정도로 어느 정도 정상적인 외교를 했던 조선이 메리트가 있음에도 매몰차게 거부한 것만 봐도 세도정치가 조선에 얼마나 심각한 병폐를 가져왔는지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단, 이는 세도정치기의 정치가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조선 건국 초기부터 시작되어 수백년간에 걸친 병폐들이 쌓이고 쌓인 끝에 터져나온 결과물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세도 정치기 정치인들의 잘못도 컸지만. 사실 일본도 쿠로후네 사건 이전까지는 서양과의 교류를 금지했고, 조선처럼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면 개신교 국가였던 네덜란드에 한해서는 제한적으로 교역을 허용한 것 정도. 하지만 이마저도 이미 센코쿠 시대부터 스페인 및 포르투갈과의 교역을 시작으로 서양과 교류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 거기다 저런 시선은 역사를 만약이자 결과론적으로 보는 것이다. 애초에 저건 암허스트 호가 특수한 거였고, 이후 조선에 온 이양선들은 평화롭게 나오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약탈을 하는 등의 짓거리를 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먼저 서구권과 접촉하고 교류하던 일본과 중국 등도 결국 이후 서구 열강들의 강압과 위협에 시달려야 했으며 베트남, 인도, 중동 등은 아예 식민지로 전락하기까지 했다.

4.2. 헌종 시대(1834년 ~ 1849년)

이후 효명세자의 의문스러운 이른 죽음이 따르긴 했지만, 효명세자의 아들이자 순조의 손자인 헌종 집권기에 이르자 풍양 조씨는 신 안동 김씨에 못지않은 세도를 부린다. 이들은 그간 관대했던 천주교에 탄압을 가했으니, 효명세자가 장수했다고 할지라도 조선의 근본적인 면이 개혁되었을지는 의문이다.

헌종 시대에는 풍양 조씨가 신 안동 김씨를 능가하는 세도까지 부리지 않았을까라는 견해가 있다. 흔히 세도정치를 설명할 때, 순조 - 신 안동 김씨 우세, 헌종 - 풍양 조씨 우세, 철종 - 신 안동 김씨 우세로 설명하는 서적들이 꽤 있다. 헌종기에 풍양 조씨가 우세했다고 보는 근거는 첫째, 기해박해의 주도 세력이 풍양 조씨라서 기해박해가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신 안동 김씨를 제어하기 위한 정치적인 사건이라는 것. 둘째, 야사에서 헌종이 조병구에게 했다는 "외숙의 목에는 칼이 안 들어갑니까?"라고 압박을 줬다는 기록. 셋째,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와 관련해서 당시 풍양 조씨의 조병헌이 헌종의 계비인 효정왕후를 배출한 남양 홍씨에게 권세가 넘어갈 것을 우려해 광산 김씨 김재청의 딸을 경빈으로 삼게 했다는 야사 등이 거론된다. 또한 당시, 신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유근이 중풍으로 상태이상에 걸려 있기도 했다.

하지만 애초에 풍양 조씨가 우세했다고 제기되는 근거들은 결정적이 되지 못한다. 야사가 섞인 것은 둘째치고 일단 기해박해의 주도 세력은 풍양 조씨가 아니라 풍양 조씨의 겹사돈인 이지연 형제였는데 결국은 그들이 주도한 박해에서 신 안동 김씨는 김건순을 비롯한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고, 특히 김조순 일가는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 게다가 이지연은 결국 신 안동 김씨의 눈 밖에 나서 숙청된다. 게다가 조병헌은 풍양 조씨 일문들 중에서도 헌종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완전히 따로 놀던 사람으로 그의 행보는 풍양 조씨 전체와는 별 관계가 없다. 그리고 헌종 시대에도 왕실 최고의 어른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고, 김유근이 상태 이상에 빠져있어도 김좌근이나 김흥근 같은 김조순의 아들이나 조카들이 그 자문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보면 헌종 시대에도 신 안동 김씨의 세력이 풍양 조씨보다 좀 더 컸다는 견해가 비교적 설득력이 있다. 더욱이 기해박해를 주도한 우의정 이지연은 풍양 조씨와 겹사돈 관계였는데 기해박해 이듬해에 탄핵을 받고 유배 크리를 먹는다.

게다가 순조 32년 이후로 명실상부하게 최고 권력자로 떠오른 신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풍양 조씨가 권좌를 차지했다면 그것은 과거의 1인자인 신 안동 김씨에 대한 도전이 있었다는 소린데 정작 신 안동 김씨가 최고 세력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는 철종 시대에 신 안동 김씨가 풍양 조씨들을 압박한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헌종의 신 안동 김씨 견제책에 앞장 선 조병헌이 예외적으로 사사된 일이 있긴 하지만[29] 그 외에 조인영 - 조만영 형제, 그 사촌인 조득영, 그들의 조카 조병구를 비롯한 풍양 조씨 실세들은 철종 시대에서도 잘 먹고 잘 살았으며, 신 안동 김씨가 편찬한 《헌종실록》, 《철종실록》에서도 매우 우호적인 기록을 해놨다. 심지어 조인영 등은 신 안동 김씨 정권 하에서 정승까지 해먹었다.

만약에 풍양 조씨가 신 안동 김씨를 능가하는 세도를 구축했다면 신 안동 김씨가 뿌린 철종조의 피바람에서 무사할 리가 없다. 헌종에게 충성하며 신 안동 김씨를 압박한 수많은 관료들이 유배가는 판국에 풍양 조씨 대부분은 무사했고 오히려 승진했다. 이를 볼 때 신 안동 김씨가 오히려 풍양 조씨들을 제어 가능한 밑의 세력으로 보고 있었다는 추론도 가능할 것이다.

더군다나 김좌근 등의 신 안동 김씨 실세들이 늙어서 물러날 즈음이 되어도 신 안동 김씨는 철저한 가문 관리로 김병국, 김병기, 김병학을 비롯한 신진 엘리트들이 많았던 반면에 풍양 조씨는 조득영, 조만영, 조인영, 조병구, 조병헌 등이 죽은 이후에는 조성하, 조영하 정도를 제외하곤 내세울 인물도 없었다. 그나마 조성하, 조영하도 김병국, 김병기, 김병학 등이 흥선대원군 및 고종에 의해 크게 쓰인 것과 대조적으로 별로 한 일도 없던 것으로 보아 실력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간 헌종은 성년이 된 뒤 수령의 가렴주구를 규탄하고 나름대로 세도정치를 벗어나려는 여러 시도를 했으나 일찍 요절함으로서 꿈을 이루지 못했다. 헌종의 딸도 모두 요절하거나 자식이 없어, 왕통은 단절되었고, 이제 왕위는 방계인 철종에게로 넘어간다.

여담으로 유홍준은 딱히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은 듯하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보면 헌종이 외조부 조만영이 사망한 것 때문에 개혁의 의지를 잃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 외 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반대하는 왕족 이하전 등이 풍양 조씨의 비호를 받기도 했다. 유홍준 뿐만이 아니라 사학계의 다수설이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를 신 안동 김씨에 비해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는 것 같다.

4.3. 철종 시대(1849년 ~ 1863년)

헌종 사후, 권력욕에 혈안이 된 신 안동 김씨가 약간의 무리수를 두어 철종을 옹립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철종의 혈통상 그의 옹립을 무리수라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워낙 왕실 후손이 귀해지는 바람에 당시 가장 가까운 혈통이 철종밖에 없었다.[30] 효종 이후 몇 대에 걸쳐 사실상 독자로 대를 잇는 과정에서 그나마 사도세자가 숨통을 틔워주지만, 그 아들들도 걸핏하면 역모에 연루되어 죽었다. 결국 남아있는 혈통이라고는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손자밖에 없었다.

철종 즉위가 무리수라고 보는 의견 중에는 '강화도령'으로 농사나 짓던 무지렁이를 왕위에 올렸다고 보는 경우도 있는데, 철종은 강화도에서 그리 오래 머물지도 않았으며, 어지간한 종친들이 읽는 경서 정도는 읽고 있었다. 다만 철종의 비를 또 신 안동 김씨로 맞아들인 건 분명히 무리수였고, 심지어 순원왕후 김씨까지 반대할 정도였다.

신 안동 김씨의 세도는 여하간 절정에 올라, 각지의 수령과 주요 관직을 모두 신 안동 김씨가 독차지하게 된다. 더 이상의 다른 가문들에 대한 고려도 필요없었던 것이다.

철종의 치세에 이르면 지구적인 기후 변화로 가뭄과 홍수, 기근이 조선에서도 발생했는데, 조선은 허약해진 재정과 심부전에 빠진 행정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행정의 부패와 민중에 대한 수탈이 극심해졌다. 그래서 철종이 죽는 해에 임술농민봉기라 불리는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난다. 동학이 창시된 시기도 바로 이 때다. 조선만의 일은 아니어서 청나라 도쿠가와 막부에서도 같은 사건들이 일어났고, 청나라는 이때 아편전쟁으로 문까지 따였다. 일본도 쿠로후네 사건으로 마찬가지였다.

철종이 자식들의 요절로 후손없이 죽자 왕통은 다시 한번 끊겼고, 풍양 조씨의 조 대비에 의해 정조의 동생 은신군의 양자의 손자가 되는 방계 쪽 인물인 고종 효명세자의 양자로 삼아 왕으로 삼게 된다. 혈통적으로는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의 후손이다.

4.4. 흥선대원군 시대(1864년 ~ 1873년)

이 사이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가 죽으면서 효명세자의 아내인 신정왕후 조씨가 왕실의 웃어른이 되었고, 흥선군과 이해가 일치한 풍양 조씨는 철종 사후 일종의 연립 정권을 구상한다. 그 결과가 고종이었다. 그의 재위 초반부는 흥선대원군과 전주 이씨가 주도했고, 약간의 풍양 조씨, 김병학, 김병국, 김병기를 포함한 병자 돌림의 신 안동 김씨 엘리트들, 권력에 소외된 남인이 중심이 된 영남 유림, 소론, 북인 인사들의 연합체로 보면 된다. 거기에 서북인, 함경도인, 고려 왕족인 개성 왕씨들까지도 중용되었다. 대원군 실각 이후에는 이최응, 흥친왕을 비롯해서 대원군에게 불만이 있었던 종친들, 신 안동 김씨, 여흥 민씨, 박규수를 비롯한 일부 대원군 일파의 연립 정권이 들어선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이후 왕권 강화를 추진하면서 풍양 조씨들은 사실상 토사구팽되었고[31] 신 안동 김씨 역시 대원군 섭정기에 세력이 크게 꺾이긴 했으나 김병학이나 김병국처럼 대원군과 관계가 좋았던 인물들이 요직에 중용되기도 했고, 대원군조차도 신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을 나쁘지 않게 대접해 주었다. 이렇게 되니 어제의 세도정치의 주범들이 오늘의 개혁 동지자가 되는 아이러니가 되긴 했지만 이들의 능력도 좋고, 대원군이 이들을 휘어잡을 정치력이 있어서 아무 문제가 없었다.

각설하고, 고종이 왕이 되고 흥선대원군이 실세가 되면서 조선에는 대격변이 일어나게 된다. 경복궁 증건에, 만동묘, 서원 철폐와 호포제, 사창제 실시에 당백전 발행까지... 이전 같았으면 이야기만 나오고 바로 휴지통에 버려졌을 일들이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은 몇 년 동안에 전부 시행되었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서원 문제와 호포제의 경우 수백년 전부터 논의는 되었지만 흐지부지 되어오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삼정의 문란이라 불리던 세도정치 시기의 부정부패들도 흥선군 집권기에 와서 대부분 개혁이 되었다.

쇄국정책을 고집한 흥선대원군이 까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공적으로 치하받는 요소들 대부분이 조선 말 혼란의 상황을 일시적으로 수습한 정치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고종 친정과 여흥 민씨 집권 이후 다시 조선은 멸망 테크를 타게 되지만... 아무튼 세도정치로 유림이고 붕당이고 다 무력화된 상황에서 가문만 억누르면 왕권을 견제할 수단이 사라져버렸고, 흥선대원군은 그 환경을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력이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4.5. 고종 친정 시대(1873년 이후)

그러나 대원군이 세도정치를 극복하려고 뽑아 놓은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가 오히려 뒤통수를 친다. 특히 명성황후는 최익현 등을 포섭하여 상소를 올리게 하여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키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토록 한 후, 세도정치 시즌 2여흥 민씨 척족 정치를 이룬다.

1880년대 민씨 척족세력들로서 중앙과 지방의 관직에 진출한 인물은 무려 260명 가량으로 파악되고 있다. 특히 민겸호, 민승호, 민규호, 민태호, 민영익, 민영환, 민영위, 민치상, 민응식, 민영준, 민영목, 민영원, 민병석, 민영상, 민영휘(민영준), 민영우, 민영소, 민종묵, 민영달, 민치서 등 20여 명의 인물이 병조, 이조, 예조 판서 및 참판직, 통리기무아문의 관직, 한성부 판윤 등의 고위 요직을 독점하여 조정은 여흥 민씨 종친회나 다름없었고 이들 여흥 민씨 일족이 정권의 핵심적 요직을 장악하여 실권을 행사했다. 민씨 일족들은 백성들을 수탈하는 데 열을 올렸고, 이로 인해 국고는 텅텅 비어 군인들 월급이 1년이 넘게 밀릴 정도로 나라가 막장으로 굴러가게 되었다.

이처럼 단일 성씨가 조정의 요직을 독점한 것은 한국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신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시절에도 신 안동 김씨가 관직을 독점한 것이 아니라 16개 세도 가문이 나눠서 관직을 차지했다.

명성황후와 민영환의 죽음으로 마치 여흥 민씨가 반일에 앞장선 것처럼 잘못 인식되기도 하지만, <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민영준, 민영기, 민영은, 민원식, 민규식 등 무려 38명의 여흥 민씨들이 올라와 있다. 개혁과 민권 신장에 힘쓰기도 했고, 최후에는 망국의 책임을 지고 자결했기 때문에 그나마 제대로 된 민씨로 인식되고 있는 민영환조차도 그의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보면 민중들을 수탈하던 탐관오리였던 기간이 개화파 우국지사였던 기간보다 더 긴 사람이었다. 물론 뒤늦게나마 정신차리고 달라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막장이었던 다른 여흥 민씨들보다는 당대에나 지금에나 평가가 훨씬 나은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 매천야록》에서는 민영환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백성들이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황현이 민영환을 까내리면 까내렸지 굳이 미화할 이유가 없음을 생각했을 때[32] 말년의 민영환은 당대에도 이미 다른 여흥 민씨들보다는 나은 인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와 다른 점이라면, 고종의 왕권이 헌종, 철종처럼 위해를 받은 건 아니라 오히려 고종이 여흥 민씨들과 결탁하여 그들을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적어도 여흥 민씨가 고종의 지지세력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흥선대원군의 세도정치 타파의 영향도 있었고, 명성황후가 여흥 민씨들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특이한 결탁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흥 민씨들의 횡포는 이전 신 안동 김씨 못지 않았고 백성들에게만 부정부패, 가렴주구했던 것이 아니라 외세를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이용하며 나라의 이권까지 팔아먹으며 결국 망국의 길을 재촉했다는 점에서 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보다 폐해가 컸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민씨 척족은 신 안동 김씨와는 다르게 민심을 헤아리는 시늉조차 모자랐다. 예시를 들어보자면 신 안동 김씨 집권기인 철종 시기에 벌어진 임술농민봉기의 경우 그래도 봉기한 세력들은 서로 연계해서 국가를 전복할 생각도 없었고 그렇다고 수령을 죽이는 식으로 과격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으며 신 안동 김씨 역시도 이전대로 주동자만 죽이고 나머지는 용서해주며 삼정이정청을 설치해 문제 해결을 시도하려는 시늉 정도는 냈다. 그러나 민씨 척족의 경우 동학 농민 운동의 사례에서 보듯 고부 지역에서의 단순한 농민운동 정도로 끝날 수 있었던 문제를 안핵사 이용태가 마구잡이로 날뛰는 바람에 어그로를 잔뜩 끌어 무려 전주성이 함락될 정도로 일을 키웠으며(그나마 나중에 이용태에게 책임을 물어 잠시 유배하긴 했다.) 임오군란 역시도 마찬가지로 세도정치 시기에조차 군인에게까지 월급으로 나오는 쌀에 불량품 섞어 어그로를 끄는 짓은 안 했다. 즉 민씨 척족이나 신 안동 김씨나 부패한 권력자라는 점은 같지만 그래도 신 안동 김씨는 최소한의 눈치를 보는 척이라도 하고 권력을 다루는 요령이라도 조금 있었다면 민씨 척족은 눈치도 없고 권력을 다루는 요령도 없었다.

다만 표면적으로 보면 여흥 민씨 척족들이 단순히 명성황후의 가문이라 득세한 듯 보이나, 실상은 좀 다르다. 고종의 어머니인 흥선대원군 부인과 흥선대원군의 어머니(남연군의 부인)부터가 여흥 민씨였다. 명성황후가 왕비로 선택된 것도 흥선대원군의 외가이자 처가였기 때문. 참고로 여흥 민씨는 조선 역사를 통틀어 왕비를 6명이나 배출한 노론 내 손꼽히는 명문 가문이었다. 인현왕후 민씨가 대표적이고, 순종의 첫 왕비조차도 민씨였다. 한마디로 흥선대원군 집안은 여흥 민씨와 3대, 4대에 걸쳐 혼인을 한 셈이다.

여기서 명성황후는 고아이기에 그 일가가 없으니 척신 정치는 행할 리 없을 거라는 흥선대원군의 고려가 있었던 것이다. 근데 고종이 아버지를 쫓아내고, 외가 쪽 친족들과 그 외 여흥 민씨 성을 가진 이들을 중용하면서, 흥선대원군의 고려는 말짱 도루묵이 된다.

애초에 흥선대원군도 신 안동 김씨를 대체하기 위해서 전주 이씨 종친[33]을 대거 등용했으니 김씨 세도정치를 왕족 세도정치로 대처했을 뿐이었으며, 여흥 민씨의 세도정치도 이런 맥락에서 계승성(...)이 있다고 민씨의 세도정치를 옹호하려는 평가도 있으나, 전주 이씨는 외척 세력이 아닌 말 그대로 왕실 종친이었고, 흥선대원군이 이들을 통제했기에 부정부패가 난무했던 세도 정치의 비교하는 것은 넌센스다.[34]

대원군의 인사 정책은 당시 조선 정계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소론, 남인, 북인, 서북인, 영남 유림, 함경도인, 고려 왕족인 개성 왕씨까지 모조리 망라한 진정한 의미의 탕평이었고, 전주 이씨 우대는 왕권 강화와 왕실 위상 증진의 맥락에서 벌어진 것이니 전주 이씨 선파만을 강조하는 건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긴 하다. 대원군 집권기의 인재 상당수는 고종 초반기에 고종이 유용하게 잘 써먹었을 정도였으나 그 이후의 인물들을 보면 상당수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다.

5. 세도 정치기의 모습들

5.1. 정치

살펴보면 세도정치 시기에 일어난 사건들은 정도의 차이일 뿐 영조, 정조 때도 이미 일어난 수준의 문제들이었다. 양란 이후의 모든 시기에도 민란은 꾸준히 일어났고, 《 정감록》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정조 시기에 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붕당정치가 사실상 붕괴되고 지방 세력이 시궁창이 된 것도 이 시기였다.

무엇보다 이 시기는 과거에 진출하는 중앙 사족과 지방에서 세력을 유지하는 지방 사족의 구분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영조 시기부터 노론의 일당 독재는 오히려 강화되었으며, 정조 또한 서울 지방의 소론과 남인들을 등용하는 선에서 탕평책을 마쳐야 했다. 이 때문에 조선의 고질적인 문제인 지방 차별은 해결되지 못했고, 이인좌의 난 당시 경상도는 반역향으로 찍히기도 했으며, 순조 시기 홍경래의 난 또한 사전의 준비 작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작 이 두 왕 시기에 탕평책을 시행하면서 붕당정치의 마지막 체계조차 무너졌다는 비판을 받는다.

다만 영조와 정조는 시대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았기에 최소한 이를 진단하고 폐단을 고치려는 노력을 꾸준히, 그것도 조선사에 꼽힐 정도로 열심히 했다. 오히려 격동의 시기에 별 대책도 없이 조선을 쇠퇴와 멸망의 길로 몰아넣은 것이 세도정치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세도정치 시기의 조선 조정은 점증되는 외세의 위협에 대해서는 그저 수신하소서라는 말 외엔 어떤 대책도 세우지 않았으며, 제2차 아편 전쟁으로 인한 북경 함락 소식을 듣고도 동요하는 민심을 다독거리는커녕 천주교를 족칩시다라는 말 외에는 하지도 않았다. 이양선이 들어왔다는 장계가 올라올 때마다 무슨 녹음한 것 같이 이 두 이야기만 반복했다. 한마디로 아무 대책이 없었던 거다. 그러면서 동시에 세도 가문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고 공적을 부풀리기 위해 《실록》을 축소하고 은폐하며 부풀리고 과장하는 왜곡을 했다.

《수역별단》(수석 역관의 보고서), 《 일성록》에는 아편전쟁, 태평천국운동에 대해 당시 조선 국왕들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주는데, 《실록》에선 누락되었다. 《철종실록》의 경우 철종 12년 3월 ~ 5월까지의 기록이 다 합쳐 3페이지가 채 안 된다. 당시 조선의 민중들 사이에 청나라가 곧 멸망한다는 소문이 퍼져 도성에서 도망치는 일이 속출하고 있다고 일본 쓰시마 번주가 에도 막부 로쥬에게 문서를 보냈을 정도인데 《실록》만 보면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온한 시대로 되어 있다. 까놓고 말해서 일제가 편찬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보다도 부실하다.

게다가 조선 조정에는 당시 성리학 교조화의 병폐로 인해 내정 개혁과 부국 강병을 실천으로 옮길 인물도, 그럴 의지도, 그럴 이유도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일본의 경우 16세기 이전부터 서양과 교류하며 신 문물과 학문을 익혔으며 17세기 하세쿠라 츠네나가란 인물은 갤리선을 타고 로마 교황청을 방문해 에도 막부의 친서를 전달하고 교황청의 친서를 교환할 정도였다.[35]

다만 조선이 중국, 일본과 비교하면 상업이 덜 발달하고 폐쇄적인 건 맞지만 외부 세력에 완전히 무관심한 건 아니었다. 시헌력이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은 중국을 통해서 서양 문명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지속하면서 시헌력의 지구설 중력 개념의 창안 등 많은 노력을 했다. <열린연단 문중양편> 참조. 일본과 비교하면 일본은 서양 언어를 배워 《해체신서》 를 만들었다. 하지만 에도 막부도 실용적인 부분에만 관심있었고, 에도 막부가 세워지자마자 조총을 버리고 쇄국정책을 시행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도 서양의 자명종을 이용해 혼천 시계를 만들기도 했는데 이처럼 서양에 완전히 관심이 없지는 않았다.[36]

5.2. 경제와 사회의 혼란

아이러니하게도 18세기에 비해 19세기는 조선의 무역에 좀 더 숨통이 트인 시기였다. 면화, 고추, 담배 등의 재배가 성숙한 상태였으며, 18세기 인삼 종자의 일본 유출과 미국 백삼의 수입 등으로 쇠퇴했던 인삼 무역이 홍삼 가공업의 흥성과 재배삼의 확산 등으로 인해 호조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드라마 상도의 주인공 임상옥이 활동한 것도 이 시기. 이로 인해 의 가격은 안정되었다.

한편 조선에서 공노비의 폐지( 정순 왕후 김씨 수렴청정 시대)[37] 등으로 노비가 10% 이하로 줄어들고 양반이 70%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38] 일반민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한 시기 또한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시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성리학이 민중 사이에 보편화된 시기도 같은 시기에 걸친다.

그러나 조선 국내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반 농민들에 대한 수취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 농민의 불만이 폭발할 지경까지 왔던 것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악랄하게 수취한 조세가 똑바로 쓰였냐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관료와 수령과 향리들의 탐학과 횡령으로 무의미하게 낭비되었으며, 당연한 소리지만 이로 인해 국가 재정도 파탄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이었다. 말 그대로 밑 빠진 독에 물 붓느라 양민들만 죽어나가는 상황. 이로 인해 수탈을 못 견디고 도주하는 유랑민도 증가했기에 세금을 낼 수 있는 양민 수도 크게 감소했다. 사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공노비 해방이나 연좌제의 완화[39]도 이 과정에서 양민 수를 늘리려는 필사적인 시도였다.

이것은 조선이 양란 이후 200년 넘게 평화기를 누리면서 인구가 크게 증가한 데 반해 18세기 중엽 이후 경작지가 확장되어도 수확량의 증가는 고사하고 오히려 정체 혹은 쇠퇴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전의 3분의 1 정도로 수확량이 감소했다. 왜냐면 인구의 증가와 경작자의 확산으로 벌목과 화전을 무절제하게 하면서 전국의 산이 민둥산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대규모 홍수가 일어나면서 생산량이 줄어들었던 것.

19세기 초의 실학자인 서유구는 이를 지적하여 상소를 올렸고 이를 받아들인 조정에서 소나무의 벌채를 금하기도 하였으나 당시의 행정력으로는 체계적인 산림 관리를 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농업이 생업의 중심이었던 양민들로선 벌목과 화전이 생계가 달린 일인지라 반발이 컸고 정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계속했다. 한마디로 생계 대책도 해주지 않고 금지하니 잘될 리가 없다. 한국에서도 나무 벌채 금지가 될 수 있는 것이 나무 벌채 외에 할 수 있는 산업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삼림재건사업이 성공한 이유는 연료를 석탄과 석유로 교체하고 건물을 시멘트로 짓게 되면서 목재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구 증가와 토지 생산성의 하락은 농민들의 생활을 악화시켰고, 이와 함께 유랑민의 증가와 양민의 감소로 인해 걷어들일 세금이 줄어들면서 국가 재정 또한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국가 재정이 악화됨으로 인해 종전까지 농민들의 생활을 보호해주던 환곡 제도는 농민을 수탈하는 제도로 변질되었고, 이로 인해 농민층의 불만은 크게 고조되었다. 사실 19세기에 인구 증가와 토지 생산성의 한계에 따른 사회 불안은 조선 뿐만이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대다수의 동아시아 국가들도 겪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기존의 생산력으로는 더 이상의 인구 부양이 불가능해진 것.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이 당시 유럽과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인도에서도 기근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사회 불안이 심해졌다.
또한 양반 계층의 폭증으로 인해 세제의 구조는 군역의 면세 계층이 납세 계층보다 훨씬 많아지는 기형적인 역피라미드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세입도 줄어들었고, 이런 상황에서 환곡 제도는 재정의 곤란으로 붕괴하거나 아예 수취의 도구로 변질되었다. 사실 이런 상황은 중국에서도 역시 비슷하게 진행되어 청나라 때의 세율은 일종의 인두세로 변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런 토지세 ↔ 인두세로의 사이클은 한나라 당나라 등 중국사에서 매우 흔한 일이다. 이후 고종 시대 제법 전매를 통한 재정 충당이 보이긴 하지만 순조 ~ 철종기의 조선에서 이러한 변화가 없었다.

이러한 경제적인 압력과 빈곤으로 인해 자연히 농민들의 불만이 쌓이고 쌓인 끝에 폭발하여 봉기를 부르게 된다. 다만 이때의 농민 봉기가 흔히 알려진 것처럼 '못 살겠다 갈아보자' 식의 대규모 봉기였다고 볼 수는 없다. 농민 봉기의 문제를 떠나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임금의 덕을 척신 가문과 탐학한 수령들이 가리고 있다' 는 인식이었다. 근왕 의식은 후의 동학농민운동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 때문에 농민 봉기도 수령과 향리들을 사살하여 중앙에 항의하면,[40] 새로 도착한 수령이나 안핵사 등이 주동자 일부를 처벌하고 나머지 농민들은 대개 훈방한 뒤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수준에 그쳤다. 왜냐면 죄다 처벌하다간 진짜로 반란을 일으켜 사태가 악화되니까. 동학농민운동 때 이용태가 이렇게 하다가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사태를 악화시켰다.

홍경래의 난은 주동자가 뚜렷하고 목표가 중앙 조정을 겨냥한 굉장히 특이한 사례지만 이러한 구도와 해결책의 실패는 후의 동학농민운동 임오군란에서 폭발하여 국가를 뒤흔드는 수준에 이르렀으니, 사회 구조가 틀어진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특히 후술하겠지만 반란 지도부 대부분은 양반이었다. 이런 양반들을 원국지사, 즉 '나라를 원망하는 선비들'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서 배운 지식은 있는데 중앙 관직에 등용이 안 되니 출세를 못한 현실에 불만을 품고 자주 반란을 일으켰던 것.

게다가 이 시기의 봉기는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던 것이, 봉기를 지휘하는 지도부가 몰략 양반이건 토착 사회 지도층이건 '기득권층' 에 속했기 때문이다. 보통 민생고로 나라가 위기에 빠지더라도 기존의 기득권층은 국가를 지탱하기에 어지간한 경제난에도 정부가 바로 망하지는 않는데, 이 기득권층 내에서 균열이 생긴다면 정권 자체의 기반이 뿌리뽑히게 된다. 세도정치가 임술 농민 봉기 이후 몰락한 것도 진짜 이유는 바로 기득권층인 양반 사회 내에서도 세도정치 세력을 적대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사회 지도층 내에서도 이제는 저들에게 권력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나름의 공통 분모가 형성된 것이다. 여기까지 왔으면 조선은 이미 미래는 없다고 봐도 된다. 실제 역대 왕조나 국가의 멸망 원인을 보면 하나같이 주요 사회 지도층의 이탈 혹은 이반이 발견된다.

사실 동학 농민 운동 이전에도 진주에서 시작된 봉기가 전라, 경상, 충청의 3남에 퍼지자 세도정치가들도 대책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이들이 세운 대책이란 게 고작 철종더러 수신에 힘쓰라는 거 정도다. 신 안동 김씨의 수장 김좌근도 풍양 조씨의 조두순도 이때는 가문을 뛰어넘어 한목소리로 말하는 기적을 보였다. 구체적인 방안을 요구하자 각지의 선비들에게 의견을 묻자는 등... 결국 철종의 주도로 삼정의 기본 틀은 유지하되 문제점은 개혁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지만 농민 봉기가 잠시 수그러들자 바로 이정청을 날려버렸고, 해결된 게 없다 보니 이로 인해 농민 봉기가 다시 급증하였으며 몇 년 뒤에는 문제 해결에 나서긴 했지만 그것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고 압박을 가하는 바람에 마지못해서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들 세도 정치가들이 삼정의 문란과 농민 봉기에 자발적으로 내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대책을 낼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다.

5.3. 외교와 국방

이 당시엔 별 쓸모없어 보이는 종계변무가 이루어졌다. 원래 종계변무란 명나라 사서 《대명회전》에 태조 이성계가 고려 말의 간신 이인임의 자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고친 것을 말한다. 선조 때 이것이 해결되고 이후 영조 때 다시 청나라의 공식 사서 《대청회전》에 《대명회전》의 고친 것을 다시 기록하게 했다. 이는 당시 국가 권력의 정통성을 위해서 중요한 일로 취급받았지만, 철종 대에는 청나라의 이름없는 학자가 쓴 《이십일략사》의 오류를 당시 청나라에 사행사로 파견된 윤치수가 발견하여 청나라 관리에게 고쳐달라고 요구했다. 문제는 청나라 관리들조차 이런 듣보잡 역사서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는 것. 그런데 윤치수는 베이징에서 이걸 30권이나 찾아내 기어이 고치게 했다. 이렇게 유능한 인재들이 어째서 국내의 현실 개혁에는 그리도 무능했을까? 어쨌든 이 공로로 철종은 엄청나게 길고 아름다운 시호를 획득하게 된다.

조선 국외의 가장 큰 위기인 태평천국과 혹시 모를 서양의 침입에 대해서도 뒷북을 치는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태평천국이 가장 왕성할 때는 '광서적비', '장발적'으로 부르며 곧 진압될 것이라고 말했고, 10년이 넘도록 진압되지 않자 그제서야 위기감을 가지기 시작했으나 정작 이때 태평천국은 내전인 남경사변으로 자멸의 길을 걷고 있었다. 물론 조선은 태평천국의 정보를 전적으로 청나라로 파견되는 사행사에게 의존하고 있었으며 이들 사행사가 공간적, 시간적 제한으로 정보 수집이 힘든 건 사실이었다. 비슷한 케이스가 조선통신사에서도 종종 일어났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 정보조차도 세도정치 세력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되어 꾸며졌던 것이다. 특히 2차 아편 전쟁으로 북경이 함락되고 함풍제 열하로 도망치는 미증유의 사태가 일어나자 조선은 열하에 문안사를 파견했다. 그리고 문안사로 파견된 사신이 돌아와서 말하길 청나라는 땅이 넓고 변란이 없던 때가 없다며 별일 아니다고 말했다. 함풍제가 열하로 도망친 것도 그냥 사냥하러 갔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서양의 침입에 대해서는 서양이 원하는 건 교역인데 우리 조선은 찢어지게 가난하니 걔들이 올 일 없음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왕은 수신해야 한다고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한다.

물론 전부 다 헛소리였다. 실제 함풍제는 연합군의 공격에 청군이 개발살나자 진짜 겁을 먹어서 열하로 도망쳤다가 거기서 나오지도 못하고 병으로 죽었고, 청나라가 변란이 잦았던 건 맞지만 19세기에는 외부에서 직접적으로 대륙을 식민지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점이 전혀 다르며, 서양도 내세운 것이 말이 좋아야 교역이지 실제 목표는 척화 세력이 말한 것처럼 식민지화였다. 물론 식민지가 되는 걸 막으면서 교역을 통해 근대화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게 정답이지만 이들은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난하기 때문에 점령이 어렵기는커녕 오히려 식민지로 만들기는 더 쉬웠고, 지정학적인 가치가 과시가 목적이라면 쓸데가 없어도 식민지를 만드는 게 당시 제국주의와 인종주의에 경도된 강대국들의 유행이기도 했다. 그나마 미국 정도가 식민지 개척에 관심이 덜했는데 이것도 미국의 영토가 넓고 풍요로운 땅에다 라틴 아메리카 장악이 우선이라 그냥 내버려둔 것일 뿐. 필리핀의 경우도 스페인 때려잡고 나서 얻어먹은 쪽에 가깝다. 물론 받아낸 다음에는 철저하게 수탈했다. 반항하는 필리핀도 아작내버렸고. 이게 조선이 일본이 아니라 해도 러시아나 영국, 프랑스에 의해 멸망하여 식민지가 될 가능성이 높았던 이유다.

다만 조선을 둘러싼 외국 열강들 중에서 조선을 직접적으로 식민지로 삼으려 했던 나라는 일본 정도였고, 다른 서구 열강들은 거리가 너무 먼 데다 조선에 별다른 자원이 없어서 조선의 식민지화에 관심이 없었다. 실제로 조선에 직접 군대를 보내 쳐들어온 프랑스와 미국도 조선을 무력으로 굴복시켜 통상 개항을 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지, 조선을 완전히 점령해서 식민지로 삼으려 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나마 서구 열강들 중에서 조선과 국경을 직접 마주한 러시아만 해도 조선을 일본과의 세력 완충지로 두려 한 정도에서 그쳤고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도 조선을 식민지로 삼길 원치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국방은 그야말로 막장이었다. 문제가 많아서 졸전을 면치 못해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치욕을 당한 중기보다 더 심해졌는데 문제를 개선할 생각은커녕 아예 무관심하여[41] 할 생각조차 없었다. 이러니 말기엔 조선이 2,000만명에 가까운 인구에도 불구하고 군대는 중기와 다를 게 없이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영조와 정조 때도 국방력이 워낙 엉망이라서 박제가와 이익이 조선의 국방은 너무나 개판이라고 한탄할 정도. 당시 조선에 숨어서 선교하던 프랑스 신부가 조선군을 평가하길 무기고에는 무기는커녕 썩고 녹슨 나무 토막 쇠 토막만 있을 뿐이니 군함 한 대만 끌고와서 대포 몇 방만 갈기면 알아서 무너질 거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결국 신미양요 병인양요 때 탈탈 털리지만 그래도 알아서 무너질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인증하는 것을 끝으로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1873년에, 그 말은 현실이 됐다. 특히 홍경래의 난 때 발생한 반란군과 동학 농민 봉기의 동학 농민군도 진압 못하고 쩔쩔맬 정도로 조선의 국방은 형편없었다. 동학 농민 운동 때는 경우가 심했는데 서양식 신식 무기와 훈련을 하고서도 농민군에게 패배하며 왕실의 근원지인 전주성을 빼앗기는 추태를 보여주었다. 이 상황은 제대로 된 군인인 일본군 지휘관이 조선군을 지휘하고 일본군이 지원하면서 순식간에 농민군을 학살하는 군대로 바뀌게 되지만 문제는 스스로 하지 못하고 외국군의 도움으로 진압한 것 자체가 군사력이 형편없음을 제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이미 조선군은 재정자체가 열악해서 중앙군조차도 월급을 1년이 넘도록 받지 못해서 임오군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중앙군보다 재정상황이 더 열악한 지방군의 상태는 안봐도 비디오다. 또한 임오군란으로 인해 조선군은 사실상 해체수준으로 붕괴되어버리고 새로운 신식부대는 청나라하고 일본의 지원을 받는 바람에 그들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된다.

다만 이건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었는데 동시기 청나라의 정예군이었던 팔기군도 원래의 임무를 잊어버리고 향락에 빠져들었다. 이후 백련교도의 난 진압 당시에 만주 및 몽골 팔기군의 무능과 나태가 어찌나 극심하였던지, 사천총독인 포이모 러보오(費莫 勒保)는 그 스스로도 만주족이었음에도 만몽의 팔기군에 대해 "만주족과 몽골인 군대는 규율을 우습게 여기고, 교만하고 나태하며 또한 고생에 익숙지 않으니, 한족 군대인 녹영(綠營)에게 경시당할 뿐입니다."라고 악평할 정도였다.

5.4. 문화와 실학

문화적으로는 향유하는 이들이 기득권층이니만큼 정치나 경제의 어려움만큼 쇠락을 겪지는 않았다. 김삿갓(본명 김병연), 정수동(본명 정지윤)[42] 등 시대에 비판적인 문학가들이 등장한 것은 정치, 경제의 혼란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으나, 서양 사상이 쏟아들어오고 이규경, 최한기, 정약용 등 기존 사상의 한계를 지적한 신사상가들의 등장이 절정에 다다랐으며, 한치윤, 김정호 등 기존의 국학 문화를 집대성한 인물들이 출현하기도 한 시기이다.

소위 북학파의 계승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중국과의 교역과 함께 김정희 등의 인사들도 활발히 활동한 시기가 이때다.[43] 그리고 세도정치기의 마지막 시기에 장승업이 나타났다. 도자기, 가구, 민화 등 또한 원숙한 모습을 보였으며 현재 남아있는 수량도 이 시기의 것이 제법 많다. 단 이러한 문화 또한 대외 무역이 침체하고 경제가 전반적으로 악화되면서 서서히 쇠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6. 평가

고려 무신정권 시기와 더불어 한국 역사의 대표적인 암흑기 중 하나이자 지배세력이 극도로 부패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무신정권은 고려의 국운을 쇠퇴시켜 원나라의 속령 겸 부마국으로 전락하는 계기를 제공했고, 세도정치는 병자호란, 성리학 교조화를 기점으로 발전이 정체 상태에 놓인 조선의 국운 쇠퇴를 가속화시켜 훗날 일본 제국 식민지배를 겪게 되고 그 시기의 악영향은 일본 군국주의를 사회적 룰모델로 삼은 군사정권에 의해 조성된 병폐와 함께 현대까지 고착화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리고 세도정치와 무신정권 모두 꼭두각시 왕을 세워놓고 우봉 최씨나 신 안동 김씨 같은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했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민생은 바닥을 쳐 유랑민, 도적, 농민봉기가 폭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콜레라(1820년 대유행) 같은 새로운 질병까지 유행했다. 천주교가 민중 속으로 퍼져간 점, 갖가지 도참론이 유행한 점, 동학이 창시된 점 등은 당대의 조선 민중이 새로운 세계를 절실히 바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다 기득권층 내에서조차 기존 질서로부터 이탈하려는 자들이 발생했는데, 적잖은 양반 사회의 구성원들이 저렇게 답이 없는 자들에게 권력을 맡길 수 없다는 이유로 반체제로 돌아서기 시작한 것이다.[44] 세도정치기에 벌어진 반란들은 이전의 반란들과 달리 대개 양반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고,[45] 지역사회로부터 적극적인 후원도 받았다.

6.1. 조선 후기 세도정치가 조선의 멸망을 부르게 된 이유

세도정치 시기에는 그야말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일상화되어 있었다. 세도정치의 서막을 연 김조순이 자신이 추천하는 신하들을 관직에 앉힌 이래, 권세 가문과의 인맥을 만들어 벼슬길에 오르는 행태가 지배적이게 되었다. 당연히 뇌물과 매관매직이 성행했다. 그런 식으로 자리를 얻은 자들 중 지방의 수령직으로 내려간 이들은 권세가에게 재물을 바치느라 생긴 막대한 빚을 갚고 자신의 재산도 축적하기 위해 수많은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짰다.

풍작과 흉작을 가리지 않고 이루어지는 수령들의 가혹한 수탈[46] 농민들은 굶주려야 했고, 도주해 유랑하거나[47] 도적이 됐다.

나라에게 밥줄을 빼앗기고 떠돌아다녀야 했던 사람들이 자국 혐오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에 따라 국가의 기반부터가 무너져 갔다. 정작 조선의 왕실과 조정은 백성들이 바친 세금의 상당 부분이 국고로 오지 않고 수령과 권세가들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정부의 예산이 부족해지니 군대를 키우거나 국력을 다지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나마 백성들만 쥐어짜였다면 기득권층 내에서라도 시스템이 잘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도가와 그에 빌붙은 수령들은 양반, 중인, 평민 출신의 상인 및 부농들까지도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다. 대표적으로, 동학농민운동의 원인을 제공한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5,000냥을 뜯어냈고 지역 토호들에게도 20,000냥을 뜯어냈다. 과거에 지역 토호들은 중앙정부가 일반 백성들을 통제하는 데 충실히 따르면서 일정 정도의 권력을 부여받았는데, 이제는 자신들마저 수탈의 대상이 됨에 따라 반발하거나 아예 백성들의 편에 서서 기득권층과 맞섰다.

사실 조선 역사를 보면 척신 세력이 날뛴 시기는 이전에도 한번 있었다. 바로 명종 재위기에 문정왕후 윤원형 세력이 득세한 때다. 그때도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민생은 파탄지경이었다. 하지만 사림파가 사회 개혁론을 내놓으면서 정치 개편에 힘썼고, 되려 오늘날에 와서 해당 시기는 서경덕, 이황, 기대승, 조식 같은 유학자들의 전성기로 기억된다. 또한, 민생이 나쁘기는 했어도 벼랑 끝까지 내몰리는 수준은 아니어서 기득권층 내의 결속력은 상당했다. 임꺽정 같은 도적은 많이 나왔어도 제대로 된 지도부의 지휘를 받는 반란군은 없었다는 점이 그 증거다.

반면 세도정치 시기에는 실학자들이 활동한다 한들 관직을 장악한 세도가들이 개혁적인 인재들의 중앙 진출을 철저하게 막았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상황은 답이 없다, 총체적 난국, 개판오분전으로 귀결됐다. 당시 정치인들이 남긴 게 있다면 나라 망치고 열강들에게 이권을 침탈당하게 만들며 일본 제국에 의해 주권을 잃게 만들고 식민지배로 인한 악영향이 생겨나는 원인을 제공한 것뿐이었다.

세도정치는 조선을 근대화는 커녕, 전통체체 기준으로도 조선이 정상적인 국가 기능을 할 수 없는 나라로 몰락시켰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당시부터 있었던 성리학의 교조화로 인한 경직된 사회 풍토 및 정체된 국가 발전과 맞물려 자국의 내정 문제조차 자력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최빈국으로 추락시킨 관계로 현재 조선시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세도정치 시대의 혼란상[48]에서 비롯되었다.

6.2. 세도 가문들이 똑똑한 왕족들을 마구 죽였다?

권력에 눈이 먼 세도 가문들이 왕손들에게 닥치는 대로 역모 혐의를 뒤집어씌어 마구 죽였다는 말들이 많이 퍼져 있고 나무위키에도 그런 식으로 설명된 적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세도 가문 집권 기간 동안 해를 입은 왕손이라 해봐야 두 셋에 지나지 않는다. 경평군 이호(이세보) 경원군 이하전, 은언군의 서손자이자 전계군의 아들인 회평군 이원경인데 이 중 이원경, 이하전은 모두 역모에 휘말려 죽은 것이라 본인들은 억울해도 세도가문의 음모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왕족이 역모 세력으로부터 이름을 언급당하면 바로 처형당하는 것은 건국 초부터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하전은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후손으로 왕위 서열에서 안드로메다급으로 까마득하고 경평군은 아예 죽지도 않고 유배됐다. 그것도 작호만 박탈하자는 왕의 주장을 신 안동 김씨가 무시하고! 사실 경원군은 죽을 죄를 저지른 건 아닌데 저지른 죄라 봐야 신 안동 김씨의 세도가 마음에 안들어서 "이게 이씨의 나라냐 아니면 김씨의 나라냐?" 라고 한 거 그게 전부였다(...)

우선 이쯤 돼서 조선 왕실의 왕위 서열 1순위들은 소위 삼종의 혈맥이라 불리는 효종 - 현종 - 숙종조로 이어지는 라인의 후손들이었다. 이 라인의 계승자였던 사도세자의 아들들로 정조,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이 있었다.

이 중에 은신군은 영조 47년, 경주 김씨의 김귀주가 풍산 홍씨의 홍봉한을 탄핵하는 과정에서 '추종을 외람되이 거느리고 방자하게 굴었다'는 이유로 은언군과 함께 유배를 갔다가 일찍 죽었고[49] 은전군은 정조 시기에 홍계능의 역모에 휘말려 죽었으며, 은언군 역시 유배되어 있었다. 은언군의 경우, 그의 아들 상계군이 완풍군으로 호를 고치고 정조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일찍 죽었고[50] 아들을 잃은 은언군은 정조의 표현에 따르면 '사람의 형상만 겨우 갖추어' 유배된 처지였다. 그러다가 '문양해의 옥사'가 터지자 은언군을 죽이라는 청이 들어왔는데 정조는 끝까지 지켜냈으나 정조 사후 벽파가 집권하면서 홍봉한의 아들 홍낙임과 함께 사사되었다.

은언군에게는 상계군과 풍계군, 두 아들이 있었는데 상계군은 앞서 언급했듯이 정조 10년에 갑작스레 죽었고, 풍계군은 은전군의 양자가 되었다가 후사없이 죽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서자 전계군 이광뿐이었다. 살아생전엔 봉군되지 않았고 그의 3남 철종이 왕이 되면서 봉군되었다. 이광은 아비가 사사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운 좋게 살아남았고, 순조의 비호로 결혼도 했다. 그의 아들론 이원경, 이경응, 이원범이 있었는에 이중 이원경은 '민진용 역모 사건' 때 죽었고, 헌종이 승하할 때 돼서는 '3종의 혈맥'의 후손이라곤 이경응, 이원범 두 사람밖에 없었다. 실제로는 한 명 더 있었다. 익평군 이희로 풍계군의 친자이자 상계군의 양자였다. 단, 이희는 양아버지 상계군의 역모와 관련이 있었고, 풍계군 또한 은언군의 친자이나 역시 반역죄로 처형된 은전군의 양자로 갔기에 문제가 있었다. 또 애초에 상계군의 양자가 된 게 은언군가의 봉사손으로 대를 잇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리보나 저리보나 절대 왕이 될 수 없었다.

이 중에서 세도 가문들이 똑똑한 왕족은 곤란하다고 마구 모함해서 죽인 흔적은 없다. 피로 이어진 왕족 자체가 거의 없는데 흔적이 있을 리가... 애초에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조선 왕실은 자손이 귀해진다. 이런 마당에 마구 죽일 수가 없었다. 왕족들이란 예부터 역모에 거론되면 억울하게 죽어야 할 처지였고[51] 이원경의 경우만 해도 민진용에 의해 추대되려 했다는 이유로 죽었지, 모함을 당해 죽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와 연계해서 철종도 무리수를 둬서 옹립했다고들 하지만 그럼 누굴 추대한단 말인가? 예외라 해봐야 그의 형인 이경응밖에 없지만 형이 아니라 동생을 세웠다는 것을 트집잡을 건덕지는 없다. 어차피 철종의 승계로 생기는 문제는 이경응이 승계해도 마찬가지였다. 이경응이 왕위 승계에서 탈락한 이유는 병이 있었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첩의 아들이었으며, 큰 형 이원경이 죽은 뒤라 이광의 집안을 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철종의 어머니는 이광의 정실이 죽고 다시 맞아들인 계실이었으며 영의정으로 추증된 염성화의 딸이었다. 그래봤자 파주 출신 외가는 몰락한지 오래였다.

6.3. 이전 왕조들과의 비교

고려 왕조의 경우는 무신정권이 이러한 형태를 가지게 되는데, 문제는 조선 왕조처럼 400년이 지난 이후가 아니라 그것도 중엽부터 이걸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많이 죽인 숫자로 따지면 고려의 무신정권이 훨씬 더 많았다. 무엇보다 여몽전쟁에 대한 기록이 축소된 것도 최씨 무신 정권의 어용 문신들이 《실록》이나 《전쟁록》을 통한 일기를 남기지 않았던 것이 문제다. 항간에 무신정권을 무신정권이라고 하지 않고 세도정권이라고 규정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박서 김경손을 비롯한 무장과 김방경 같은 무장의 활약으로 무신정권이 아닌 세도정권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애초에 《 고려사》, 《 고려사절요》, 《 동국통감》 등에선 권신들이 연이어 집권했다고 했지 무신으로 취급을 하질 않았다는 점에서 고려는 조선과 달리 일찍이 세도정권과 비슷한 시스템을 구축해놓은 상태였고 이후 원 간섭기 이후 무신정권이 없어진 틈을 타서 권문세가들이 그 바통을 이어나갔다. 한마디로 고려의 경우는 조선의 몇 배나 되는 기간인 200년이 넘는 세도정치를 한 셈이고 조선보다 2배의 기간을 그렇게 보냈다. 특히 고려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음서와 추천이 허용되는 사회였고, 과거제의 경우도 지공거 체제였기에 추천의 형태가 꽤 많았다. 그래서 말이 좋아 무신정권이지 무신정권도 따지고 보면 권문세도가들과 비슷한 형태의 정치를 이룩했다. 즉 무신정권이나 권문세가 역시 세도정치로 규정을 하곤 한다.

그래서 위화도 회군 이후 권문세가들이 몰락하자 이젠 당여가 말썽이었고 조선 초까지 당여가 말썽이 되니 지공거를 혁파시켰다. 이는 신라, 고구려, 백제도 마찬가지였다. 신라의 경우 혜공왕의 진골 왕족에 대한 홀대가 이전부터 일어나자 이후 혜공왕이 피살되고 전권이 왕족에게 돌아가는 기형적인 구조로 흘러갔으며, 백제의 경우는 해구•연신의 난 이후 대성 8족들에게, 고구려의 경우 간주리의 난 이후 5부 귀족들에게 실권이 돌아갔다는 점에서 보면 이미 조선뿐만 아니라 그전의 왕조들도 이와 유사한 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발해의 경우도 800년대를 기점으로 왕들의 재위 기간이 급격히 짧아졌다는 점에서 발해의 호족과 귀족들에게 전권이 넘어갔다는 점에서 조선 말고도 이미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중앙의 왕권이 약해지면,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부 권신에 권력 대부분을 양도하고 왕실과 국체나마 보존하려는 기형적인 비상체제는 동서고금 어디에서나 늘상 일어나는 일이다. 결국 힘은 신성불가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무력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52]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처럼 조선도 결국 이와 유사한 형태의 정권을 구축하게 되었다.

물론 조선의 경우, 이전 왕조들과 다르게 나가기 위해 사병과 사전을 폐지하고, 절간 노비들을 면천시키며 절간 토지를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왕족들의 권한을 낮추기 위해 종친과조차 폐지하며 그에 따라 온갖 법률을 짰다.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역효과로 작용해 나중에는 심각한 부정부패와 빈약한 경제력 및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고, 세도정치라는 기이한 형태로 나갔던 것이다. 한마디로 이전 왕조들에 있었던 온갖 구습들을 없애려다가 또 다른 구습들이 생긴 것이었다. 조선왕조 입장에선 이 노력이 가상하긴 했지만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결국 전 왕조들의 실정을 없애려다가 조선이 자체적으로 실정을 만들어 멸망할 계기를 만들어낸 셈이었다.

6.4. 외국의 사례와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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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 일본

한편 오래 전 일본 헤이안 시대에도 이런 식의 세도정치가 이루어졌다. 일명 섭관 정치. 그리고 이 동네도 귀족 세력이 커지다가 사무라이가 날뛰고 천황은 시궁창이 되는 막부 정치가 열렸다. 그렇게 시작된 가마쿠라 막부 역시 외척인 호조씨 가문에 의한 싯켄 정치가 벌어져 결국 망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척신 정치의 예시는 많으나, 동양 역사서에서 매일같이 까이는 게 척신 정치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일제강점기 식민사관을 주장하던 측에서 '정체성론'의 한 근거로 세도정치를 제시하기도 했다. 즉, 조선의 세도정치 시기는 일본의 헤이안 시대와 비슷하고, 흥선대원군의 정치는 일본 상황(上皇)의 원정( 인세이)과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조선 말 상황은 일본의 사무라이나 유럽의 기사 계급이 생겨나지 않은 정체된 사회이니[53] 일본의 도움(을 빙자한 침략)이 없었더라면 조선은 항상 그 자리에 머물렀을 것이라는 것이다. 거기다 이들은 농업 생산량이라든가 상업같은 것까지 비교하여 조선 후기를 수백년전 가마쿠라 시대의 초기 상황으로 보았다.

물론 통치 구조 면에서 민주주의적인 발전이 부진했던 것은 사실이나, 애초에 동아시아 전근대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찾는 것부터가 말이 안되며 그런 평가를 내린 일본조차도 민주주의 의식 성숙에 따른 시민혁명으로 민권을 획득한 사회가 아니다. 단순히 통치 구조의 형태가 비슷하다고 해서 이를 정체의 흔적이라고 볼 수는 없으며[54] 농업 생산량이나 상업 발달도 문화적, 환경적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이걸 고려하지 않을 시 조선은 물론이고 에도 막부나 청나라조차 고대 오리엔트 단계에도 도달하지 못한 정체된 사회라는 황당한 결론이 나온다.

또한 15세기 후반 이후 거의 완성된 계층인 양반만 하더라도 이전의 지배 계층보다 충분히 지방으로 확산되어 농업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으므로, 충분히 통치 계층의 저변이 확대된 사례로 꼽을 수 있다. 특히 문과가 평민에게 어려워서 그랬지 잡과나 무과는 중산층에게 열려 있었고, 이런 것을 발판으로 문신으로 나아가는 경우도 상당했다. 게다가 18세기~19세기는 앞서 말했듯 일반민의 사회적 지위가 상향평준화된 시기였으며, 생활 농서의 편찬과 장시의 전국화 등으로 충분히 성숙한 서민경제구조가 이루어졌다고 평가받고 있다. 서민경제의 단계를 이루었다고 볼 수는 없는 가마쿠라 막부에 비교하는 것은 곤란한 이론적 비약. 자세한 내용은 조선, 조선/평가, 자본주의 맹아론 항목 참조.

7. 세도 가문 일람

8. 주요 인물 일람

세도정치 관련 가문 및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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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창작물

조선시대 부정적인 이미지는 주로 세도정치 당시 배경이 모티브다.

9.1. 소설

9.2. 드라마

9.3. 영화

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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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들이 그를 흔히 세도정치의 원류로 보곤 하는데, 사람들이 그를 세도재상이라 한 데 기인한다. 하지만 세도정치시대와 홍국영이 대세했을 땐 차이점이 명확하다. [2] 신 안동 김씨 [3] 김조순의 3남, 세도정치의 마지막 집권자 [4] 특정한 시기에만 세도정치라고 한다. 그래서 영어로 'Politics by/in powers' 즉, 힘에 의한 정치이다. [5] '장동 김씨'라고도 불리는 건 세도 정치를 이끈 신 안동 김씨 가문이 조선 중기 한양 내 장의동에 자리를 잡았던 일파(척화파의 거두 김상헌이 대표격이다.)이기 때문이다. [6] 풍양은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진접읍, 오남읍 일대의 옛 이름이다. [7] 반남은 현재 전라남도 나주시의 반남면이다. [8] 연안이씨, 대구서씨, 풍산홍씨, 남양홍씨, 경주김씨, 은진송씨, 청주한씨, 경주이씨, 덕수이씨, 동래정씨, 의령남씨, 청송심씨, 청풍김씨, 안동권씨 시중공파(舊 강릉 권씨), 연안김씨, 전주이씨 효령대군파의 16개 가문 [9] 안동김씨 서윤공계 - 문정공파(파조는 평양서윤 김번의 증손자이자 좌의정을 지낸 문정공 김상헌 ←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 철종 때 영의정을 2번 지낸 김좌근 父子의 직계조상), 연안이씨 소부감판사공계 - 월사공파(파조는 소부감판사 이현려의 후손이자 좌의정을 지낸 월사 이정구 ← 순조 초반에 영의정을 지낸 이시수의 직계조상), 대구서씨 충숙공계 - 전첨공파(파조는 병조판서 충숙공 서성의 차남이자 종친부전첨을 지낸 서경수 ←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 순조 중반기에 영의정을 지낸 서용보의 직계조상), 풍양조씨 회양공계 - 한평군파(파조는 회양부사 조신의 증손자이자 이조참판, 대사헌을 지낸 한평군 조익정 ← 효명세자의 세자빈인 신정왕후 조씨, 헌종 중반과 철종 초반에 2번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조인영의 직계조상), 풍산홍씨 문경공계 - 추만공파(파조는 대사헌 문경공 홍이상의 4남이자 예조참판,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추만 홍영 ← 사도세자의 세자빈인 혜경궁 홍씨, 정조 때 도승지로써 권력을 휘두른 홍국영의 직계조상), 반남박씨 감정공계 - 참봉공파(파조는 사재감정 박응천의 5남이자 참봉을 지낸 박동민 ←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직계조상), 남양홍씨 당홍계 - 남양군파(파조는 남양군 홍주 ← 헌종의 계비인 효정왕후 홍씨의 직계조상), 경주김씨 태사공계 - 상촌공파(파조는 검교태자태사 김인관의 9세손이자 형조판서를 지낸 상촌 김자수 ←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 순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의 직계조상), 은진송씨 정랑공계 - 우암문정공파(파조는 예조정랑 송순년의 6대손이자 좌의정을 지낸 문정공 우암 송시열 ← 홍국영 일파로써 정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송덕상의 직계조상), 청주한씨 양절공계 - 공안공파(파조는 의경세자의 장인인 서원부원군 한확의 장남이자 호조참판, 판돈녕부사를 지낸 공안공 한치인 ← 순조 중반기에 영의정을 지낸 한용구의 직계조상), 경주이씨 상서공계 - 백사문충공파(파조는 상서 이과의 후손이자 영의정을 지낸 문충공 백사 이항복 ← 순조 때 좌의정을 지낸 이경일의 직계조상), 덕수이씨 연헌공계 - 문정공파(파조는 호조참판 연헌 이의무의 5대손이자 이조판서, 대제학을 지낸 문정공 이식 ← 정조 후반, 순조 초반에 3번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이병모의 직계조상), 동래정씨 첨사공계 - 문익공파(파조는 지세자첨사부사 정필의 9대손이자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 정광필 ← 헌종 후반, 철종 후반에 2번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의 직계조상), 의령남씨 충경공계 - 감찰공파(파조는 영의정 충경공 남재의 증손자이자 사헌부감찰을 지낸 남준 ← 순조 중~후반에 10년간 영의정을 지낸 남공철의 직계조상), 청송심씨 안효공계 - 여주공파(파조는 세종의 장인인 청천부원군 심온의 6대손이자 여주목사를 지낸 심우정 ← 순조 후반에 영의정을 지낸 심상규의 직계조상), 청풍김씨 청로상장군계 - 문의공파(파조는 청로상장군 김중원의 5세손이자 성균관대사성을 지낸 문의공 김식 ← 정조의 왕비인 효의왕후 김씨의 직계조상), 안동권씨 시중공계(舊 강릉 권씨) - 화천군파(파조는 좌시중을 지낸 권인가의 10대손이자 좌참찬을 지낸 화천군 권감 ← 풍양조씨의 일파로써 헌종, 철종 때 2번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권돈인의 직계조상), 연안김씨 내자시윤공파(파조는 내자시윤을 지낸 김해 ← 순조 때 2번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김재찬의 직계조상), 전주이씨 효령대군계 - 장제부정파(파조는 효령대군의 증손자인 장제부정 이원손 ← 순조 후반, 헌종 초반에 2번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이상황의 직계조상)가 각 가문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10] 세도정치 이전까지 흔치 않았던 대규모 민란이 세도정치 시기 이후 급증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민란이건 반란이건 지도부는 결국 엘리트들인데 이들이 왕조 혹은 체제로부터 반감을 가져 등을 돌린 것이다. [11] 인조에서 고종까지의 당상관 2,758명 가운데 70.2%인 1,936명이 조선후기에 번성한 57개의 벌열가문 출신이었다, 특히 세도정치 시대인 순조에서부터 고종까지의 시기는 신 안동김씨 생해계, 반남 박씨 소계 등 노론계가 중심이 된 10대 가문이 전체 당상관 853명중 51%에 해당하는 434명을 배출했다, 조선 후기 지배집단은 대단히 폐쇄적이었던 것. # [12] 사도세자 사후 홍봉한 등의 주장으로 사사되었다. [13] 벽파는 어디까지나 사도세자의 추숭을 반대한 거지 정조와 대립한 건 아니었기 때문. 애시당초 왕과 대립한다는 것 자체가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것이 정조의 왕권 약화로 이어질 위험도 있긴 했다. 어쨌거나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도록 명한 것이 영조이며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것 자체가 선왕 영조에 반하는 것으로 비춰질 염려가 있어서 그렇다. 또, 그렇게 사도세자가 죽은 이상 굳이 사도세자를 들추지 않는 편이 정조에게 더 나을 수도 있기 때문. 즉, 벽파는 '우리는 죄인 사도세자의 아들내미인 정조를 반대한다'가 아니라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것은 선왕의 뜻에 반하는 일이니 거두어 주시옵소서.'가 이들의 스탠스였다. [14] 여기에서 정조가 사실상 "편지 정치"를 통해 당파 간의 갈등을 인위적으로 짜여진 각본 내에서 오고가게 하여 정조가 아니면 통제할 수 없는 체제를 만들어냈다. [15] 경기도와 충청도를 일컫는 말이다 [16] 1800년대 순조 초 서북 지방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의 가장 큰 원인 역시 경제적으로 성장한 서북 지방이 경화 사족에게 권력의 부스러기조차 얻지 못하는 상황 때문이었다. 서북 지방의 차별은 과거부터 있었으니 그렇다쳐도, 그 부스러기라도 얻어먹던 지방마저도 가관이었다. 광해군 시기만 해도 세력이 컸던 영남 사림의 경우에는 인조반정으로 경상우도의 북인도 붕괴되었으며, 남은 영남 남인들도 이인좌의 난으로 배제가 완료된다. 이미 송시열 윤증 회니시비가 회덕(지금의 대전)과 니성(지금의 논산)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은 서인의 (지방) 산림이란 1700년대 초반에 이미 충청도만 남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17] 하지만 여전히 노론 천하였다, 인조~경종 연간 당색별 당상관 배출 인원 비율은 서인 76%, 남인 13%, 북인 11%였지만 영조~정조기의 연간 당상관 배출 인원 비율은 노론 81%, 소론 14%, 북인 4%, 남인 1%로 노론의 권력 독점이 더 심해졌던 것. # [18] 여기에 더해서 홍문관의 관원까지를 '삼사'라고 한다. [19] 후한이 몰락한 가장 큰 이유는 기존 황제들의 잇따른 건강 악화와 요절 그리고 정치적 능력이 부족한 어린 황제의 등극이 이루어지고 환관과 외척의 발호로 황제가 허수아비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20] 정조는 48세까지 살고 재위 기간도 24년으로 꽤 길다. 그래서 정조가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단명한 왕은 아니다. [21] 양쪽 모두에 속한 인물이 세종이다. 자기도 천재고, 집권에 걸리적거릴 수 있는 모든 방해요소를 세종의 아버지 태종이 다 치워버렸다. [22] 조선에서 강대한 왕권을 누린 군주들을 보면, 태종은 2회에 걸친 왕자의 난을 통해 왕이 되기 전에 이미 정적들을 몰살에 가까운 수준으로 쓸어버렸고, 세종은 태종의 유산을 매우 능수능란하게 흡수했으며, 세조는 태종과 비슷한 입장이다. 연산군은 독재 수준의 왕권을 가지는 데 10년이 걸렸고, 숙종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정통성과 함께 태종을 능가하는 정치적 식견으로 어린 시절에 자리잡았다. 영조는 15년 따위(...)는 감수할 수 있었던 입장이었고. 그나마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한 건 크게 터뜨리기는 했다. [23] 소학은 현대로 치면 초등학생 저학년이 배우는 교과서와 비슷한 급이었다. [24] '친'을 강조한 이유는 일반적으로 왕의 외가라고 한다면 선왕의 왕비. 즉, 왕대비의 친정이자 외척을 의미하는데 순조의 법적 어머니이자 왕대비는 효의왕후이다. 즉, 국왕 순조의 (법적)외가 가문은 엄연히 청풍 김씨이다. 그런 청풍 김씨를 제치고 엄연히 후궁에 불과한 친어머니 수빈 박씨의 친정인 반남 박씨가 사실상의 외척으로 군림한 것이다. [25] 물론 왕손을 낳은 명문가 후궁의 위세와 권력은 분명 동서고금 무시할수 없지만 똑같은 명문가 출신이면서 적모이자 왕대비의 친정가문도 누를수 있을 정도이면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엄청난 위세를 떨치는 것이다. [26] 모든 안동 김씨가 시파였던 건 아니었고, 김조순을 주축으로 한 세력들이 시파였다. 벽파에 서서 김달순처럼 아작난 안동 김씨들도 있었다. [27] 눈을 바깥으로 돌려 보면 권력의 최상층부를 장악한 집단의 내부에서 시야가 넓은 사람이 나오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지배층이기에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8] 다르게 얘기하면 생각보다 짧다면 짧은 잠깐동안의 시기에 나라를 파탄 지경에 이르게 한것이다. [29] 이마자도 철종 4년에 복권된다. [30] 철종 사후 흥선군 쪽 가계도를 보면 양자로 들어왔기에 망정이지 그냥 남이나 마찬가지인 수준이다. [31] 그렇다고 한고조 유방이 공신죽이듯 하는 것을 연상하면 심히 곤란하다. 애당초 조 대비와 조영하, 조성하 형제를 빼고 대원군과 커넥션이 있었던 풍양 조씨도 없었고, 그들을 마구 죽인 것이 아니라 신 안동 김씨들과 마찬가지로 풍양 조씨들에게 이전과 같은 세도 권력을 주지 않은 정도였다. 조 대비가 정치에서 물러나면서 권력을 대원군에게 준 것도 있고. [32] 황현은 명성황후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33] 이른바 '선파'(璿派) [34] 무엇보다 흥선대원군은 그래도 종친들을 어느정도 꽉잡고 있었다. 반면 고종의 경우 민씨 척족이 고삐 풀린듯이 부정부패를 저질러도 제대로 처벌하지도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임오군란을 유발한 민겸호의 만행에도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35] 심지어 조선통신사가 대서양을 나라 이름 아니냐고 아는 척하자 아라이 하쿠세키라는 일본 학자는 조선에 만국전도(세계지도)도 없냐고 한 소리 하기도 했다. # [36] 사실 일본에 서양 문물이 더 잘 들어온 것도 어느 정도 일본에 대해 서양에 알려져 있었고 서양의 상인이나 전도사들이 드나들었고 또, 그러기도 쉬운 지형이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조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고 가본 사람도 없었거니와 일본에서도 서양이 조선에 관심을 갖는 것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37] 홍경래의 난 당시에 가담자 대부분을 참수한 것도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과거에는 주동자와 핵심 간부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노비로 전락시켰는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으니 그냥 다 처형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일부 반란군의 처형은 16세 미만 청소년 범죄자의 사형을 금한 당대 기준으로도 명백한 불법이었다. [38] 물론 대구의 통계 한정이지만 아마 다른 지역도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39] 이전에는 반역자 등 중범죄자의 가족들을 처형하거나 노비로 전락시켰지만 19세기 이후에는 당사자만 처형하고 가족들은 노비 전락 없이 지방으로 추방하거나 유배하는 등 탄압이 좀 완화됐다. [40] 그렇지만 동학농민운동 이전까지만 해도 꼴랑 향리들을 죽이는 정도이고 수령은 온갖 욕보이거나 폭행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죽이지는 않았다. [41] 정조 때의 국방 정책과 비교하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어떻게 하면 60년만에 나름대로 굳건했던 방비 체계가 허물어졌는지 기가 찰 지경... [42] 정만서와는 다른 인물이다! [43] 물론 김정희는 벽파인 경주 김씨라 시파인 신 안동 김씨의 잦은 탄압을 받았는데도 이 정도. [44] 물론 이 시기의 탐관오리들이 백성들 뿐만 아니라 지역 양반들에게도 가혹하게 군 것도 한 몫을 한다. [45] 심지어 임술농민봉기 당시 장흥에서는 무려 전 군수가 민란의 주동자가 되기도 했다. 무려 전 군수씩아나 되는 사람이 현 군수가 하는 짓이 엉망이라며 들고 일어난 것. [46] 원래 흉작이면 농민의 세금을 감면해주거나 걷지 않는 게 원칙인데 부패한 관리들은 변함없이 세금을 거두었고 외려 원래 정해진 세금보다 더 많이 거두기도 했다. [47] 유랑민이 된 조선인 농민들 중 청나라의 만주 지역(현 중국 둥베이 지역)에 이주한 부류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 의해 토지를 빼앗겨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 농민들과 더불어 중국 조선족의 조상이 된다. [48] 세도정치기 당시 폐해가 일제강점기, 군사정권 시기의 병폐와 함께 21세기에 더 크게 체감되기 때문에 한국의 대중들 사이에서 고려를 비롯한 조선시대 이전 한민족 국가들보다 박한 평가를 받고 있는 편으로 심지어 신라보다 더 박한 평가를 받는 경우도 있다. [49] 이 와중에 홍봉한, 김시묵 등 탕평파들이 대거 삭출되었으나 이내 복귀했다. [50] 홍국영의 야망에 너무 노골적으로 개입되어 있었던 처지라 스스로도 언제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했고, 이에 아비 은언군이 자신이 죽을까봐 미리 선수를 쳐서 독살해버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51] 왕의 비호로 목숨을 건지는 경우도 없지는 않으나 그건 극히 운빨이 따라줘야 가능했다. [52] 로마 제국의 군인 황제 시대, 오스만 제국 몰락기의 타락한 예니체리 [53] 다시 말하지만 일본 사학계에서는 조선의 양반 계급을 일본의 후지와라 가문 같은 봉건 귀족이나 고대 로마의 봉건 귀족으로 보았다. 한마디로 자기들이 19세기 후반까지 봉건제에 머물러 관료제 정립못했다고 다른 나라도 관료제가 안 되었다고 착각한 것이다. [54] 그런 식으로 끼워 맞추면 바쿠후 쇼군은 이슬람권의 아미르인가? 천황 칼리파인가? 반대로 조선이 들어서며 중앙집권 관료제가 발달한 한반도와 달리 일본 열도는 에도시대까지 봉건제에 머무르며 관료제가 안 되었으니 고려 시대(10~14세기)에 머무른 사회라는 이야기도 가능하다. [55] 다만 사전적이고 법적인 의미로 보면 진짜 외척 가문은 아니다. 외척은 어디까지나 정실 왕비의 세력을 의미하는데 수빈 박씨는 엄연한 후궁이었다. 즉, 법적으로는 왕대비이자 순조의 적모인 효의왕후의 가문인 청풍 김씨가 외척이다. [56] 반남 박씨가 진짜 외척 가문이던 시대는 인종~선조 시기로, 세도정치 시절보다 한참 전이다. [57] 당시의 반남 박씨 왕비는 인종의 왕비 인성왕후와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이다. 그러나 둘 다 딸조차 낳지 못했고, 인성왕후는 문정왕후 생전부터 본인보다 항렬이 아래인 인순왕후보다 권세가 일찍이 밀렸으며 의인왕후는 선조의 홀대를 받는 한편 임진왜란을 겪은데다 이후 선조보다 8년 일찍 사망했다. 그래서 당시의 반남 박씨는 진짜 외척임에도 의인왕후와 인성왕후 생전부터 권세와 거리가 매우 멀었다. 오히려 훗날 세도정치 시대에 왕비가 아니라 후궁인 수빈 박씨 생전에 법적인 외척이 아님에도 큰 권세를 누렸다는게 아이러니. [58] 홍봉한의 동생이다. [59] 홍봉한의 친척 [60] 정확히는 200여 년전에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를 배출한 가문이긴 하다. 다만 장렬왕후는 세도정치가 시작하기 100년도 더 전인 1688년에 사망하였으므로 장렬왕후의 후광으로 권력을 얻은건 아니다. 장렬왈후 생전에 잘나갔던 관료는 형조판서를 역임한 조계원이나 우의정을 지낸 조사석 정도이다. [61] 효정왕후의 부친 [62] 효현왕후의 부친 [63] 김좌근의 6촌. 김유근 사후 권력자가 되었으나 2년만에 죽었다 [64] 김좌근의 동생. [65] 김문근의 형 [66] 김좌근의 양자.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좋아 흥선대원군 집권 이후에도 잘나갔다 [67] 조득영의 아들 [68] 조만영의 아들 [69] 수빈 박씨의 생부 [70] 박준원의 차남 [71] 초반부만 세도정치 기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