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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 전투 | 독성산성 전투 | 행주대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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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수(都元帥)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충장공(忠莊公) 권율 權慄 | Gwon Yu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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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언신(彦愼) |
호 | 만취당(晩翠堂), 모악(暮嶽) |
본관 | 안동 권씨[2] |
출생 | 1537년 12월 28일 |
경기도
강화도호부
선원면 연동 (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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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99년 7월 6일 (향년 61세) |
고양군 (現 경기도 고양시), 묘소 | |
품계 |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
직위 |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ㆍ홍문관 ㆍ예문관ㆍ춘추관ㆍ관상감사 세자사 |
시호 | 충장공(忠壯公) |
봉호 |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
공신호 |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
부모 |
부친 -
권철 모친 - 창녕 조씨 조승현(曺承晛)의 딸 |
형제자매 | 형 - 권항(權恒), 권개(權愷), 권순(權恂) |
부인 |
정부인
창녕 조씨 - 조광원(曺輝遠)의 딸[3] 계부인 죽산 박씨(竹山 朴氏) - 박세형(朴世炯)의 딸(1546 ~ 1608) |
자녀 |
장녀 -
이항복(李恒福)의 처 조씨 소생 양자 - 권익경(權益慶)[4] |
학력 | 1582년 문과 식년시 병과 급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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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아(男兒)는 감의기(感意氣)요, 공명(功名)을 수복론(誰復論)이겠는가![5]
증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ㆍ홍문관ㆍ예문관ㆍ춘추관ㆍ관상감사 세자사 영가부원군
조선 중기의 문관[6]이자 장군. 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莊).
2. 생애
2.1. 젊은 시절
1537년 경기도 강화도호부 선원면 연동(현재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연리)에서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 권철(權轍)과 어머니 창녕 조씨 조승현(曺承晛)의 딸 사이의 넷째 아들, 막내로 태어났다. 여말선초의 유학자이며 조선 개국공신인 권근이 6대조로 뼈대있는 집안 출신인 것이다.소싯적 일화를 보면 왠지 대인군자의 풍모가 느껴지는 에피소드가 많은데 6세 때 한번은 어머니가 하얀 비단옷을 새로 지어주며 입으라고 하자 입기 싫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묻자 "의복은 몸만 가리면 그만이지 뭐 하러 남의 시선을 생각합니까?"라고 대답했는데 아버지 권철은 이 얘기를 듣고 비범한 인물이 되리라 생각했다고 한다.[7]
가문도 좋고 나름대로 똑똑했던 모양이지만 특이하게도 40살이 되도록 관직을 얻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권율에게 " 과거를 보든지 집안 이름을 써서 관직이라도 얻든지 해야지, 자네는 언제까지 그렇게 살 텐가?"라고 묻자 권율 왈, "옛날 태공망은 나이 80에 현달해도 오히려 천하를 경영하여 백성을 구제했는데 아직 내 나이가 태공망의 반밖에 안 되는데다 능력까지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출세가 늦을 걸 걱정하겠는가?"며 반박했다고 한다. 지인들과 어울려 전국을 여행하거나 지리를 연구하는 등 한량처럼 지냈다고.[8]
벼슬길에 뜻을 두게 된 이유는 아버지 권철 때문이라고 전한다. 아버지 권철은 죽기 직전에 막내아들 권율을 빤히 쳐다보다가 "널 내가 낳았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는데 이 말에 깨달은 바가 있어 아버지의 상을 치르고 금강산에 들어가 과거 급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벼슬길에 늦게 올라 1582년( 선조 15)에 식년시 문과에 병과[9] 15위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정9품)에 제수되었으니 이 때 나이가 46세였다.[10] 그 후 죽은 영의정의 아들이자, 현직 관료들의 친동생이라서인지 승진은 빠른 편이라 전라도 도사(종5품), 예조 정랑, 호조 정랑(정5품), 경성 판관 등을 거쳤다.[11]
2.2. 임진왜란 초기
1591년 류성룡과 윤두수의 추천을 받은 권율은 호조 정랑에서 의주 목사로 전격 발탁되었다. 이 무렵에는 늦게 출세한데다가 문관 출신이다 보니까 부하들 중에는 권율을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던 모양. 1592년 봄에 베이징에 간 역관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려 요동 지역을 어수선하게 했다는 말이 나와서 국문하는 일이 있었는데 권율도 사건의 불똥을 맞아 파직되고 만다. 그러나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권율이 능력이 있다는 신하들의 간언을 듣고 다시 기용해 전라도 광주 목사에 임명되면서 임지로 내려가 부임했다.[12] 목사는 지금으로 치면 큰 시의 시장인데, 광역자치단체장 개념(이건 조선시대의 부사)은 아니다. 수원시장 정도가 목사 느낌이다. 즉 광주 목사는 지금의 광주광역시장은 아니고, 대략 해방 후 전남도청 소재지 시절의 광주 시장 정도였다.이때 일본군이 북상하자 전라도 순찰사 이광, 방어사 곽영 등을 필두로 3도[13] 근왕군 5~8만여 명을 모집하여 한양으로 북상했다. 이 때 권율은 방어사 곽영의 중위장 자격으로 함께 북상했다. 근왕군이 수원쯤 이르러 이곳에 진을 친 소규모 일본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자 "적의 대군이 코앞에 있는 상황에서 굳이 소수 적과의 싸움에서 병력을 소모하지 말고 조강(祖江)을 건너 임진강을 막아서 서쪽 길을 튼튼히 하여 군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도로를 보장한 다음에 적의 틈을 살피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립시다"라며 신중론을 들고 나왔으나 이광과 곽영은 듣지 않았다. 결과는 바로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 최대의 굴욕으로 유명한 용인 전투. 도주하는 조선군 속에서도 권율은 통솔력을 발휘해 자기 부대를 온전히 수습하여 임지로 무사히 돌아와 후일을 기약하기로 했고 다시 남원에서 1천여 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북진 계획을 재차 수립했다.
2.3. 이치 전투
이 무렵 일본은 한양을 점거하고 한반도 전체를 장악해 나갔으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반격으로 인해 보급로에 차질이 생겼다. 이에 일본군 수뇌부는 곡창 지대인 전라도로 군대를 보내 점거해 병참 기지화할 계획을 세웠는데 부대의 총사령관은 전국시대의 지장 모리 모토나리의 셋째 아들로 유명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소식을 들은 호남 지역의 조선군이 대응하여 금산의 이치 고개와 진안 웅치 고개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는데 권율은 동복 현감 황진과 함께 이치를 맡아 쳐들어오는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전투 중 황진이 총에 맞으며 대난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이 이 틈을 노려 조선군이 설치한 목책을 부수고 쳐들어오는 사태가 발생했지만 권율은 병사들을 격려하며 저항해 격퇴했고 결국 일본군은 물러갔다.[14] 이 전투로 전라도가 보전되어 반격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그해 12월 도성 수복을 꾀하여 1만의 병사를 이끌고 직산까지 북상했는데 당시 체찰사였던 정철이 군량 문제 때문에 관내에 있으라고 하자 잠시 주저하다가 행재소에서 북상하라는 명령을 받고 계속 북진했다. 이 때 선조는 권율에게 검을 보내며 말하기를 "명령에 불복하는 이가 있으면 이 칼로 베어버려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권율 본인은 자신의 최대 업적을 이 이치 전투라고 자평했다. 전쟁의 큰 판도를 볼 줄 아는 총사령관의 면모가 드러나는 부분. 괜히 조선의 도원수가 된 게 아니다.
2.4. 독성산성 전투
1592년 10월 북진하던 권율은 성급하게 북상했다가 피해를 본 용인 전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우선 수원[15]의 독성산성(독왕산성)에 주둔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군 대장 우키타 히데이에는 배후를 염려하여 한양에 주둔하던 군대를 독성산성으로 보내어 3군데 진을 세우고 성의 농성하던 조선군을 포위했다. 대체로 12월로 기록되었지만 난중잡록은 10월 18일에서 11월 이전에 전투를 치렀다고 서술했다. 공성이 여의치 않자 일본군은 독성산으로 들어가는 물을 끊어 지구전을 펼쳤으나 권율은 야밤에 기병대를 운용해 물을 막은 제방을 끊고 일본군 진영을 불태우는 등 유격전을 펼치며 지속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후 전라도사 최철견이 병력을 이끌고 북상하자 일본군은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적이 물러나자 권율은 정예 기병 1천여 명을 풀어 적의 퇴로를 기습해 큰 전과를 올렸다.8군 소속 다이묘인 나카가와 히데마사는 일본 측 기록에 1592년 11월 수원 부근에서 매 사냥을 하다 조선군에게 공격받아 사망했다고 나온다. 조선군이 독성산성 안팎에서 유격전을 펼치던 이 무렵에 공격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나카가와 히데마사를 포로로 잡아 전쟁이 끝난 후 명나라로 압송시켰고 1599년 만력제에게 사형을 언도받았다고 나온다.
야사에는 일본군이 농성하는 조선군의 저항이 거세자 독성산성에 물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당시 독성산성에는 물이 귀했으나 권율은 이를 감추기 위해 쌀로 말을 씻는 시늉을 했고 이 광경을 멀리서 지켜본 왜장은 독성산성에 물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물러났다고 한다. 지금의 수도권 전철 1호선 역 중 하나인 세마역의 이름은 이 전설에서 유래했으며 현재도 해당 지역은 세마대라고 불린다. 세마(洗馬)라는 말 자체가 '말을 씻는다'는 뜻으로 독성산성은 세마역 근처에 있다.[16]
이후 명나라의 원군과 합세하여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조방장 조경을 보내 마땅한 곳을 탐색하다가 행주산성을 택하였고 조경에게 명하여 목책을 세운 후 병사를 행주산성으로 옮기는 작업을 실행했다. 그러면서 독산성에 소수의 병사를 남긴 채 대군이 남은 것처럼 위장하고 불시에 행주산성으로 이동했다. 행군 도중 4천 명을 뽑아 전라병사 선거이에게 맡겨 시흥[17]으로 보내 적군을 견제하게 했다.
2.5. 행주대첩
행주산성으로 병력을 옮기고 기다리고 있는데, 오는 줄 알았던 명나라군은 벽제관에서 참패하고 그대로 평양부로 후퇴했다. 이에 행주산성이 신경쓰였던 일본군은 승기를 몰아 3만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했는데, 권율의 뛰어난 통솔력과 3천명에 불과한 병사들의 선전 끝에 이를 물리쳤다. 이것이 그 유명한 행주대첩이다.권율은 행주산성이 입구가 좁은 배수진이라는 점을 감안하였으며 이에 따라 각종 화약무기와 병력들을 오밀조밀하게 잘 배치하고 그 앞에 목책을 설치해서 이 목책을 방패삼아 전투 전에 이미 기가 막힌 포진을 준비해뒀다.
권율은 화차와 신기전 등 강력한 화약무기를 미리 잘 준비해놨다가 일본군이 몰려오자 무자비한 화력으로 신나게 쓸어버렸다. 여기에 적장인 우키타 히데이에와 이시다 미츠나리의 통솔력이 막장 수준[18]이라 일본군은 변변찮은 전략 한번 못 써보고 병력만 무한정 들이부었는데, 권율이 적절히 대처하고 보급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도착하면서 엄청난 대승을 거둔다.
행주대첩에서 승리한 후 권율은 적의 재침을 경계하여 행주산성은 오래 견디기 어려운 곳으로 판단해 파주산성으로 옮겨가서 도원수 김명원, 부원수 이빈 등과 성을 지켰다. 이후 명나라와 일본 간에 강화 협상이 진행되어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휴전 상태로 들어가자 군사를 이끌고 임지로 복귀했다. 그리고 이 공으로 1593년 6월 권율은 도원수에 임명되어 경상도로 내려간다.
사실 선조는 행주대첩 후 빠르게 도원수 김명원을 교체하고자 했는데, 벽제관 전투 이후 명나라의 강화 교섭 시도에 대하여 조선 조정의 반대 입장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류성룡과 김명원에 대한 불만 및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권율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거기에 김명원이 사실관계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섣불리 장계를 올려 장수 신각을 잘못 죽게 만든 경력도 있었기 때문에 선조는 무슨 트집을 잡든 김명원만은 자르고 싶어했다. 김명원은 군정 사무에는 능했지만 지휘 능력은 낙제였고 유순한 성품 탓에 장수들 통제에도 애를 먹었기에 교체할 필요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비변사에서는 "권율이 경기 지역의 지형지물과 군사 정세를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그 결과 도원수의 교체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신 의병의 절제권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1593년 3월 이후부터 한동안 군사 지휘권은 종전대로 유지되었지만 권율이 전라도 관군을 이끌고 의병까지 관장하게 됨으로써 실질적인 지휘권은 권율에게 있었다.[19]
2.6. 정유재란과 말년
도원수로서 한동안 조선군의 군무를 총괄하다가 1596년 도망병을 즉결 처분한 죄를 받아 해직되었다가 곧 다시 재임용되어 한성부판윤, 충청도 관찰사 등을 거쳐 재차 도원수가 되었다. 도원수가 된 권율이었지만 그 활동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임진왜란 때부터 강화 교섭 기간 중에 명군이 일본군 공격을 금지하는 바람에 권율은 마음대로 일본군을 공격할 수 없었고, 장수들 간에도 사이가 좋지 않아 이를 해결하는 데에도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또한 강화 회담 때문에 조선군의 군기가 해이해져 병력이 와해되는 사태까지 벌어지는 바람에 이것도 신경쓸 문제였다. 그래서 안팎에서 '권율은 도원수로서 무능하다'는 비판까지 나오게 되었다.[20]그래서 오늘날에도 권율도 별로 한 게 없다는 식의 비판이 나오기도 하는데,[21] 사실 이 부분은 권율의 무능함이라고 보기 어렵다. 임진왜란과 다르게 정유재란은 경상도 지역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국지전 성향이 강했으므로, 괴멸된 수군과 다르게 육지에서는 딱히 공격적으로 나올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17만[22] 정도나 모였으나, 1593년 ~ 1594년에 걸쳐 기근이 발생한 상황에서 병농 일치제의 조선군이 그 규모를 계속 유지할 순 없었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명군 9만 ~ 11만이 파병되어 육전의 주력이 되었고 권율 휘하에 있는 군사들은 2만 ~ 3만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명량해전 이후로는 일본군이 다시 방어전 위주로 들어갔는데 얼마 되지도 않는 조선군만으로 요새에 틀어박힌 왜군을 공격할 순 없었다. 울산성 전투에서 태화강 하구로 들어오는 일본 지원군을 연파한 것만 보더라도, 권율이 무능하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이순신의 전투처럼 다이나믹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상대적으로 한 게 없어 보일 뿐.
그러나 권율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명군이 참전하지 않은 전투에서는 일본군을 계속 격파해서 전공을 올리기도 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일본의 북상을 차단하기 위해 명나라 장군 마귀와 함께 울산에 주둔, 울산성 전투에서도 활약하였다. 그러나 장군 양호의 갑작스런 퇴각 명령 때문에 퇴각하고 말았고, 순천 왜교성 전투에도 참전하여 이순신과 함께 수륙 협공으로 고니시 유키나가를 공격하고자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육군 제독 유정의 비협조로 실패했다.
왜란이 끝나자 권율은 전란 중에 기력을 소진한 탓인지 곧 사퇴하여 자리에 눕게 되었고, 이듬해인 1599년 7월 6일, 자택에서 향년 63살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사후 선무 1등 공신이 된 뒤에는 도원수 때 전과가 크게 돋보이지 않아 이에 따른 여러 비판이 있었지만, 결국 이순신과 함께 임진왜란을 대표하는 명장(名將)으로 남았고, 조선 시대 내내 '명장'의 대명사가 되었다.
권율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있으며 경기도기념물 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름은 '권율장군묘'라고 해 놓았지만 사실은 권율 집안의 가족 묘역인데, 권율의 묘를 가운데에 두고 양쪽에 전부인 창녕 조씨와 후부인 죽산 박씨가 함께 안장되어 있고 권율 내외의 묘 뒤편으로는 형 권순과 아버지 권철 내외의 묘가 있다.
3. 조선시대 평가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실록에서 자주 언급되는데 비록 이순신의 기록만큼 극찬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순신과 세트로 묶여 조선시대 명장의 대명사로 여겨졌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인재가 없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송고종(宋高宗)의 중흥은 오로지 인재에 힘입은 것이었다.[23] 감사와 병사(兵使)를 모름지기 적합한 사람을 얻어 맡긴 뒤에라야 큰일을 할 수가 있는데, 항상 사람이 없어서 걱정이다. 일찍이 선조조(宣祖朝)에는 상신 노수신(盧守愼)이 권율(權慄)·이순신(李舜臣)을 천거하여 장수로 삼았는데, 이 또한 사람을 알아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큰 인재는 반드시 정규 관원 가운데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니 한신(韓信)에게서 또한 볼 수 있다. 만일 재지와 용모가 영리한 것으로 취할 뿐이라면 반드시 저처럼 큰일을 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인조실록 인조 17년(1639) 7월 23일자 4번째 기사
"인재가 없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송고종(宋高宗)의 중흥은 오로지 인재에 힘입은 것이었다.[23] 감사와 병사(兵使)를 모름지기 적합한 사람을 얻어 맡긴 뒤에라야 큰일을 할 수가 있는데, 항상 사람이 없어서 걱정이다. 일찍이 선조조(宣祖朝)에는 상신 노수신(盧守愼)이 권율(權慄)·이순신(李舜臣)을 천거하여 장수로 삼았는데, 이 또한 사람을 알아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큰 인재는 반드시 정규 관원 가운데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니 한신(韓信)에게서 또한 볼 수 있다. 만일 재지와 용모가 영리한 것으로 취할 뿐이라면 반드시 저처럼 큰일을 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인조실록 인조 17년(1639) 7월 23일자 4번째 기사
이순신(李舜臣)의 경우는 본디 미관 말직이었고 권율(權慄)은 명망이 없었으니, 혹시 때를 만나지 못하고 하급 관직에서 늙어 죽었더라면 사람들은 그들이 뛰어난 재주를 지닌 줄을 몰라 오늘날 그 이름이 소멸된 지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 또 얼마나 많은 권율과 이순신 같은 인재가 늙어 죽어가고 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비록 그 재주를 지녔더라도 관직으로 시험해 보지 않으면 또한 그런 사람을 얻을 수 없다고 봅니다.
효종실록 효종 2년(1651) 6월 6일자 3번째 기사
효종실록 효종 2년(1651) 6월 6일자 3번째 기사
이순신(李舜臣)이 한산(閑山)에서 이기고 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이긴 그 공로는 중흥(中興)을 연 것이었는데도 그때의 논공(論功)은 한 자급을 올렸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번 군기(軍器)를 장만하거나 한번 도둑을 잡은 공도 다 금옥으로 자급을 곧바로 올려주면서도 망설이지 않고, 선치한 수령은 첫째라 일컬어져도 의복만을 줄 뿐이니, 그 경중을 잃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효종실록 효종 4년(1653) 7월 2일자 2번째 기사
선조 때는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권율의
행주 대첩 같은 큰 공을 세워도 겨우 한 급직 올려주었을 뿐이니 신하들 승진을 너무 남발하지 말라는 뜻.효종실록 효종 4년(1653) 7월 2일자 2번째 기사
신들이 일찍이 듣건대, 국조의 열성께서는 상전을 가장 중하게 여겨서 이순신(李舜臣)의 한산 대첩(閑山大捷)과 권율(權慄)의 행주 대첩(幸州大捷)에 대해서도 단지 1급만을 더해주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여러 신하들은 단지 한 때에 수행했을 뿐입니다. 유직(留直)과 약방(藥房)도 서울에 남아 있는 여러 신하들과 일반인데 어찌 그 사이에 구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현종개수실록 현종 6년(1665) 10월 10일자 2번째 기사
위와 마찬가지로 상을 남발하지 말라는 의미.현종개수실록 현종 6년(1665) 10월 10일자 2번째 기사
또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오로지 문치(文治)만 숭상하고 무력(武力)은 좇지 않으므로, 중간에 남구(南寇)·북환(北患)을 겪었는데, 임금을 위해 적대하여 원한을 풀어서 큰 공을 올린 자는 거의 없습니다. 오직 고(故)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이긴 것이 가장 큰 것인데, 은장(恩奬)이 황조(皇朝)에서도 나왔고, 공렬(功烈)이 국사(國史)에 분명히 실려 있으나, 제사하는 것은 오히려 한 군데도 없습니다.
헌종실록 헌종 7년(1841) 8월 20일자 1번째 기사
이외에도 여러 기록이 남아있다."우리 나라는 오로지 문치(文治)만 숭상하고 무력(武力)은 좇지 않으므로, 중간에 남구(南寇)·북환(北患)을 겪었는데, 임금을 위해 적대하여 원한을 풀어서 큰 공을 올린 자는 거의 없습니다. 오직 고(故)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이긴 것이 가장 큰 것인데, 은장(恩奬)이 황조(皇朝)에서도 나왔고, 공렬(功烈)이 국사(國史)에 분명히 실려 있으나, 제사하는 것은 오히려 한 군데도 없습니다.
헌종실록 헌종 7년(1841) 8월 20일자 1번째 기사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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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류성룡에 의해
선조에게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천거되었다. 비록 권율은 조선 육군, 이순신은
조선 수군으로 배치되어 같이 군 복무를 하지는 않았지만 류성룡 덕분에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이후에도 서로 서신을 주고 받았다. 이순신이
한산도 대첩 등으로 한참 물이 오르고 있을 때 권율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가 갖고 있는 함포 중 몇 개를 떼어다 권율에게 한 번 써보라고 주었고, 권율은 이렇게 이순신에게 받은 여러 가지 무기들을 갖고 다니다가
행주산성에 주둔하게 되었다.
벽제관에서 우키타 히데이에, 이시다 미츠나리, 킷카와 히로이에가 이끄는 왜군이 쳐들어오자 이순신이 준 포를 이용해 털어버렸는데 그것이 바로 행주 대첩이다. 이순신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계략으로 조선 조정에 파견된 간첩 요시라가 주장한 것에다가 원균이 정치적 욕망으로 사기 치는 주장을 밀어붙이는 김응서와 윤근수, 윤두수 형제 때문에 삼도수군통제사 관직을 빼앗기고 참수당할 위기에 몰렸을 때도 권율은 정탁, 이원익 등과 힘을 합쳐 백의종군으로 풀려나도록 일조했다. 또한 이순신에게 자기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어명이 떨어지자 무밭을 가꾸게 하는 등 여러 면에서 이순신의 편의를 봐주었다.[24]
다만 마냥 권율과 사이가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는데, 전라도 일대에서 수군 병력의 유지를 위해 육군에 병력이 차출되는 것을 반대해 마찰을 빚은 적이 있다.[25] 그리고 2008년 새롭게 발견된 난중일기의 내용에 따르면 권율을 살짝 까는 구절이 있는데, 을미년 32일 차 일기에는 권율에 대해 "근거 없이 망령되게 고한 일이 많았다. (중략) 그런데도 원수의 지위에 둘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 등의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는 원균처럼 그냥 엄청 싫어한 것[26]이 아니다. 수군과 육군의 인원 차출 등 공무에 관한 견해 차이 때문이지 마냥 악감정만 있다고 보긴 곤란하다.
이순신은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 사람들이 보기에도 지나쳐 보일 정도로 사람에 대한 평가에 엄격해서, 난중일기를 보면 칭찬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는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라 이순신은 남들을 평가하는 잣대보다 더욱 엄격하게 자신을 바라보았고, 이러한 성격 때문에 오늘날 이순신에 대한 자료 중 이순신에 대해 제일 비판적인 자료가 다름아닌 이순신이 직접 쓴 난중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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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과의 관계는 앙숙 중의 앙숙. 특히 많은 대립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순신의 경우 이순신이 원균에 대한 직간접적인 응징을 시도한 적은 없는 데 반해[27] 권율의 경우 비록 명령 체계와 적법한 권한을 이용해서 한 일이지만 원균을 잡아다가 면전에서 욕을 하며 곤장을 쳤을 정도. 하지만 애초에 원균이 자신의 평가가 깎일 원인을 제공했다. 간첩
요시라와 내응한 김응서, 그와 한패인
윤두수, 윤근수 형제는 이순신이 부산포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를 뒤집어 씌우는 데에 혈안이 되었다.
정작 이순신은 출진을 했고 김응서와 협의 후 회군하던 중 아군 병력이 납치되자 가덕도로 진군해 구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윤근수, 윤두수 형제는 이런 점은 무시한 채 무조건 이순신이 왜군을 무찌르지 않으려고 나서지 않았다고 우겼다. 선조는 이를 이순신을 내칠 좋은 기회라 여기고 받아들였으며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 자리가 탐이 나서 윤두수, 윤근수 형제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결국 이순신은 삭탈 관직당하고 원균이 후임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했는데, 막상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이순신과 똑같은 논리로 출진을 거부했다. 원균도 부산 점령이 무리인 줄을 잘 알았다. 그래도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 때문에 공격을 조금이라도 감행했던 반면, 원균은 부산포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부산 공격이 사실상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이순신을 떨어트리기 위해 선조에게 "내가 부산을 치겠다" 허언을 한 것.
권율로서는 처벌을 할 근거가 충분했다. 권율이 원균에게 곤장을 쳤던 죄목도 명령 불복종이 아니라 조정을 기망한 죄였다. 원균이 내세운 논리는 적이 매복해 있으니 육군이 안골포[28]와 가덕도를 점령해 주어야 한다는 헛소리를 늘어놓으며[29] 부산으로 갈 수 없다고 우겼는데 이에 조정은 도원수 권율에게 진주성 인근의 제석산성에 주둔하던 육군 정병 5천 명을 수군에 배속시키라고 명했다. 전쟁 기간 내내 수군 병력이 육군으로 보직이 변경되는 등 병력 부족에 시달렸음에도 이순신에게는 아무 지원도 안 해 주었던 것과 크게 다른 부분. 권율 입장에서는 통제사 자리를 도적질한 자가 이제는 자신의 휘하 장병 5천까지 빼앗아가는 셈이니 곱게 보일 수가 없는데 5천 병력을 줘도 여전히 부산은 못 친다고 뻗대니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이 병력은 칠천량 해전에서 다 날려먹었다.
현대에는 차라리 원균을 사형시켜야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리 조정을 기만했다곤 해도 원균은 엄연히 임금인 선조가 직접 통제사 자리에 임명한 인물이었다. 조선 시대에 사형이란 평시에는 일개 병졸과 천민이라도 왕명이 있어야만 처할 수 있는 중대사인데 권율이 아무리 상급자인 도원수이고 전시라고 해도 당상관을 멋대로 죽이지는 못한다. 만약 권율이 원균을 독단적으로 처형했다면 정말로 심각한 월권행위라 권율 본인도 무사치 못했을 터였다. 선조가 명령을 내려야만 가능한데, 선조가 원균에게 거는 기대를 보면 처벌하라는 명이 내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30]
게다가 선조는 원균을 감싸고 돌던 왕이니 권율이 원균을 두들겨 팬 것은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선 내에서 최대한 원균을 응징한 셈. 물론 선조가 원균을 감싸고 돌지 않았다면 조정 기망죄이기에 권율이 바로 원균을 구속해서 장계를 올리고 허가받아 선조가 있는 곳으로 압송하거나 했을 수도 있다. 실제 칠천량 해전의 역사도 그렇지만 계속 그 자리를 유지하면 군을 망칠게 뻔하기 때문. 권율도 너무 화가 나서 진짜 죽이고 싶은데도 선조 눈치를 봐서 모욕을 주는 걸로 끝낸 것. 상당히 침착하면서도 대범한 성격인 권율이 감정적 분노를 강하게 표출한 몇 안 되는 사건이라 꽤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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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가
이항복이다.[32] 오성과 한음 일화 중 이항복의 옆집 권 대감 이야기가 다 권율의 부친인 권철을 말하는 것이며 결혼하기 전 어릴 때부터 이항복은 큰할아버지뻘 나이인 미래의 장조(장인의 아버지) 어르신인 권철과 절친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이항복과 권씨 부인의 혼인 자체에서도 결정권자는 장인 권율이 아니라 장조 권철이었던 것으로 해석되어 전해지는데 당시 백수인 막내아들 권율이 권철의 골칫거리였기 때문에 집에서 발언권이 별로 없었을 것이기 때문.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평가가 높았던 이항복에 비해서 권율은 그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권율에 대해서 '사위 덕 본다'는 평도 존재했다.
권율이 도원수이자 개국공신 집안의 명문가이고 전란 중에 여러 전공을 세운 야전 장수에 대한 대접이 평시보다 좋은 것은 맞으나 정식적인 군율 체계는 엄연히 사위인 병조판서 이항복이 우선이다. 오성X한음에서 동네 아이들을 괴롭히던 일진 시절의 이항복이 권율에게 참교육을 당한 이후에, 사위와 장인 관계가 되었을 때도 어떻게 해서든 장인을 이겨보겠다고 아득바득 기를 쓰고 공부를 해서, 장인보다 먼저 관직에 나갔다고 묘사되기도 한다. 이항복의 전반적인 야사는 신뢰할만한게 적고, 등장하는 어휘나 분위기상 먼 훗날에 추가된 걸로 추정되는 이야기[33]도 지나치게 많아서 팩트인 일들은 극히 드물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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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여름날 이항복의 장난에 넘어가서 장인 권율이
선조 앞에서 혼자 웃통 다 벗고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어떻게 된 이야기인고 하니 본래
한복을 정석대로 입으려면 이런저런 속옷도 많이 갖춰 입어야 하고 이것은 당시의 조정
신하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느 더운 여름날 입궁하려고 속옷을 갖춰 입는 권율에게 이항복이 "장인 어른, 날도 더운데 그걸 어떻게 다 입고 가십니까. 속옷 안 입고 그 위에 관복만 걸쳐도 아무도 모를 텐데 그냥 가시죠"라고 말했고 듣자 하니 귀가 솔깃해진 권율은 이를 따라했다.
그런데 어전 회의 도중 이항복이 선조에게 "전하, 날씨가 이렇게 더우니 나이 많은 대감들은 힘드실 텐데 관복 좀 벗고 회의하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말했고 선조가 선뜻 그러자고 해서 다른 대신들은 관복을 벗고 속옷 차림이 되었는데 권율만 혼자 웃통 벗은 꼴이 된 것.[34] "경은 왜 혼자 속옷을 안 입었냐"는 선조의 질문에 권율이 당황하던 찰나 끼어든 이항복은 "저희 장인은 백성들이 헐벗고 있는데 비싸고 좋은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며 그렇게 입고 온 것"이라 말했다. 한마디로 이항복은 장인을 제물로 각종 옷으로 사치를 부리는 권신들을 비꼬려 했던 것.
물론 권율 입장에서는 사위가 임금 앞에서 장인을 엿 먹여 놓고 천연덕스럽게 입바른 소리까지 하는 상황이다. 전승에 따라서는 이게 권율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이항복에게는 처조부, 장조 어르신)인 권철에게 친 장난이었다는 버전[35]도 있고 권율이 속으로 '집에 가면 단단히 혼내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항복의 입바른 소리에 감동한 선조가 권율에게 상을 내려 권율도 사위를 크게 야단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는 결말인 버전도 있다.
- 권율이 오줌을 눌 때마다 이항복이 장난삼아 그 모습을 훔쳐봤다고 한다. 권율은 자신의 그곳을 가리키며 "이보게 사위. 이건 자네 장인일세. 그런데 어찌 업신여기시는가?"라고 묻자 이항복은 잠자코 있었다. 며칠 후 권율이 소변을 다 보자 대뜸 이항복이 권율의 뺨을 후려쳤다. 어안이 벙벙해진 권율에게 이항복은 "어르신께서 오줌을 눈 후에 감히 제 장인어른의 목을 잡고 흔드시니[36] 사위인 제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권율은 "니놈은 X의 사위라고 해도 성내지 않을 놈이구나!"라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17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야기책(利野耆冊)이라는 <패설집>이다.
- 이항복이 아직 어린 시절 권율이 사위감을 찾으면서 이항복의 품행이 어떠한지 알아보기 위해 이항복이 공부하던 서당을 방문했다. 그러자 이항복은 옷차림을 가다듬기는 커녕 편한 차림으로 글을 건성으로 읽고 있었다. 권율이 이항복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평생의 소원이 뭐냐"고 묻자 이항복은 "다른 소원은 없고 쇠짚신이나 하나 있었으면 합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유를 묻자 "그걸 대감 입에 집어넣어서 입 좀 다물게 하려구요." 남의 소원을 안다는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안다고 한들 소원을 채워줄리도 없으니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짓이라는 뜻.[37] 조선 정조 대의 관리이자 이항복 못지 않은 장난꾸러기였던 이문원[38]에게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친척 어른인 이천보가 양자를 삼기 위해 이문원 형제에게 저 질문을 하자 이문원은 "변소에서 뒷처리할 때 쓰는 밑씻개를 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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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권율의
가족들이 모두 외출을 가고 혼자 남게 된 권율은 집안의 여종 중 예쁜 여종 하나와
관계를 가졌다. 그런데 한창 일을 치르던 중 마침 돌아온 권율의 아내가 남편이 하는 짓을 알아내고 권율을 집안 창고 안으로 불러낸 후 그대로 창고에 가둬 놓고 문을 잠가 버렸다.[39] 이 이야기를 들은 이항복은 권율이 갇힌 창고 문 밖에서 "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무엇보다 색을 경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라고 외쳤다. 문 밖에 사위가 있다는 것을 안 권율은 이항복에게 "제발 좀 꺼내달라"고 사정을 했는데 이항복은 듣지 않았다. 권율이 "여기는 제 아무리
제갈량이라도 못 빠져 나갈 곳일세. 제발 꺼내 주게"라고 사정을 하자 이항복은 "제갈량이라면 거기 들어가지도 않았을 겁니다."라고 면박을 줬다.[40]
그러나 권율도 당하지만은 않았다. 한 번은 이항복이 권율에게 "조용히 공부할 수 있는 공부방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청하자 권율은 이를 들어주었다. 그런데 이항복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권율 집에서 일하는 여종과 정을 통했다. 이 낌새를 눈치챈 권율은 손님들을 잔뜩 초대해서 사위 자랑을 한답시고 이항복의 방을 급습했다. 이항복은 당황해서 그 여종을 이불로 싸고 숨겨두었는데 권율은 이불을 보더니 "방이 좁으니까 이 이불을 좀 치워야겠네"라고 말하며 이불을 들어올리자 이불 속에 있던 여종이 떨어졌다. 이항복은 멋적게 웃으면서 "벌거벗은 여종을 숨기기란 어렵도다! (赤身他婢 果難匿也)"라고 너스레를 떨었고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이 여종이 이전에 권율과 정을 통한 그 여종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 <국조인물고>에 의하면 권율은 평소에 "내가 죽으면 이 의정(이항복)이 내 묘지명을 써 줄 것이니 이것으로 족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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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제 강점기시기 그의 가문의 집이 있던
행촌동 터에는 2층 짜리 서양식 가옥이 들어서게 되는데
기미독립선언서를 해외에 알린 앨버트 테일러의
딜쿠샤가 그것이다. 딜쿠샤 바로 옆에는 권율장군 집터 표지석과 수령이 약 460년된 은행나무가 같이있다.
안타깝게도 감나무는 없다.
- 상당히 대범한 성품으로 위에서도 언급했던 일화도 있지만 전투 중에 "이런 지휘봉이 떨어졌군." 하며 떨어뜨린 지휘봉을 찾으려고 일본군 진영에 태연히 돌입해서 그걸 도로 주워왔다는 야사도 남아 있다. 그래서 병사들도 이런 대담한 면모를 보고 "어떻게 유자( 선비)가 저럴 수가 있냐"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권율은 엄연한 문과 급제자 출신이자 아버지가 영의정을 지낸 데다가 권근의 후예라는 명문가의 사람인데도 이런 대담한 행동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을 보고 휘하 부관들이나 병사들이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모양. 또한 행보를 보면 화차나 화포 등 신 무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이치 전투나 행주 대첩 때를 보면 화차나 화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전과를 올렸다. 문관이었으나 무관으로서의 능력도 매우 뛰어났다.
- 신흠(1566년~1628년)[41]이 지은 권율의 비명에 따르면 권율은 키가 8척에 풍만한 용모와 엄중한 안색의 소유자였으며,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해서 집안에 남는 물건이 없었고, 일을 처리할 때 신중해서 항상 만전을 기하는 성품이었다고 한다. 신흠은 임진왜란 중 권율의 막하에서 종군한 적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권율의 인물됨을 제법 상세히 파악해 볼 수 있는 기록이다.
- 행주대첩 이후에 죽은 왜군들을 둘러보다가 문득 이 놈들이 쳐들어와 조국이 엉망이 된 걸 생각하니 열이 뻗쳐서인지 한 왜군 배를 가르더니 간을 끄집어내 씹으면서 "왜놈들의 간을 씹어도 속이 풀리지 않는구나."라며 뱉어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있다.[42] 어디까지나 야사이며 전쟁 시에는 별별 일이 터지는 걸 생각하면 식인이니 뭐니 비웃을 이야기도 아니다.[43] 다만 권율이 행주 대첩이 끝난 후 죽은 왜병들의 시체를 찢어서 나뭇가지에 걸어놓도록 했다는 것은 사실인데 이게 야사로 전해지면서 과장된 것으로 보면 될 듯하다.[44]
- 권율 본인은 행주대첩을 자신의 최고 전공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항복의 <백사집>에 의하면 권율은 이항복에게 "원래 웅치와 이치의 싸움이 더 어려운 여건이었는데 내가 여기서 싸워 이겨 호남이 보존될 수 있었네. 그러나 행주 전투는 이미 적의 기세가 쇠한 상태였고 내가 공이 있던 상태에서 이뤄진 전투니 이것이 내가 쉽게 이길 수 있었던 이유이지. 하지만 나는 행주 싸움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니 사람 일은 참 모를 일이구만."이라는 식으로 심경을 토로했다고 한다. 의례적인 겸양의 말로도 보이지만 권율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긴 자신의 싸움은 웅치 - 이치 전투였다는 소리다.[45] 물론 그렇다고 행주 전투의 공적을 폄하할 수는 없는데 권율은 3천의 조선군으로 3만이 넘는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다. 그 상태에서 10배에 달하는 적 병력을 상대로 거의 전멸 일보 직전까지 때려잡는 압승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권율의 발언은 어떻게 보면 수적으로 불리했지만 압승한 전투보다 전쟁에 큰 영향을 준 전투를 더 중요히 여겼다는 점에서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 전략적으로 굉장히 대범한 기동이나 수를 잘 활용했던 장수다. 웅치-이치 전투도 명확한 요새 없이 사소한 지리적 이점에 의지해 대군을 막아냈고 독성산성 전투는 아예 적 점령지 한복판에 알박기를 하는 정신나간 작전이었다. 군대가 이런걸 시도했다가는 병사들부터 반발해서 망하거나 흐지부지될 텐데 병사들이 군말 없이 따른 것을 보면 소속된 병사들도 어지간히 강 심장이었거나 권율이 그 정도로 신망이 있었던 모양. 이치 전투에서 상대의 총지휘관도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군 중에서 가장 뛰어난 명장이었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였다. 그럼에도 행주대첩에서도 승리하여 그에게 2패를 안겨주었다.
- 야사를 보면 괴짜 같은 면모도 있었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젊은 시절 벼슬살이를 하지 않으려 한 일화도 있고 30대 후반에는 갑자기 지리에 빠져서 지리 서적을 잔뜩 구해서 거기에 빠져 있었던 적도 있었으며 40이 넘어서는 뜬금없이 금강산에 들어가서는 얼마 동안 틀어박혀 있다가 돌아왔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대범한 성품과 연계해 보면 이런 야인 생활에서 얻은 경험으로 인해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진 것으로 보인다.
- 사실 권율은 유명세에 비해서 알려진 일화나 기록이 적은 편이다. 이렇게 된 것은 자식들이 아버지에 대한 기록인 행장을 작성하는 풍습이 있었던 조선 사회에서 아들이 없었다는 점이 매우 결정적인 원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권율의 자식은 첫째 부인인 창녕 조씨가 낳아서 이항복과 결혼한 딸 1명 뿐이다.) 그래서 권율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겨준 사람은 다름아닌 사위 이항복이며 권율의 묘지명도 이항복이 썼다. 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집>을 보면 장인어른 권율에 대한 기록도 자주 볼 수 있다. 다만 둘째 형 권순의 아들인 권익경을 양자로 들여서 후사를 이었고 조선 말엽인 1885년에 9세손 권창섭에 의해 <만취당유적(晩翠堂遺蹟)>이라는 권율의 시문집이 간행되었다.
- 노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도 등장한다.
- 일본어 위키가 임진왜란과 관련된 항목은 죄다 편향적이기는 하지만 권율에 대한 설명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일본어 위키에서 그의 행적은 패전을 거듭하다가 행주대첩에서 운 좋게 일본군을 막았고, 결국 행주산성을 떠났으니 조선군의 승리라기보다는 일본군의 승리였다고 서술되었다. 이치 전투와 독산산성은 아예 항목이 빠져 있고 행주대첩은 권율의 패배로 그려져 있다 보니 도원수의 자리에 있음에도 정유재란 때의 행보와 겹쳐 '한 것이 없는 것처럼' 기술되었다. 그래서 내려진 총평이 '전쟁에서 이기는 능력은 없었으나 버티는 건 잘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실제로는 전라도 연합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경기도 일대를 수복한 중요한 인물이지만 일본어 위키는 다른 언어 위키에 비해 반달이 심한 편이다.
- 대한민국 해군의 세종대왕급 구축함( DDG-I)의 함명으로도 고려된 적이 있는데 조선 수군 폐지와 관련된 권율에 대한 대한민국 해군의 부정적 시선으로 권율은 탈락하고 대신 충무공 이순신 제독을 천거하고 전란 조정을 이끈 서애 류성룡이 채택되어 3번함이 서애 류성룡함(DDG-993)으로 명명되었다. [46]
5. 대중매체
5.1. 소설
- 근육조선에선 원래역사에서 40넘도록 백수였던 것과 달리 젊을때부터 관직에 나아간다.
5.2. 드라마
- 1985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에서는 배우 홍계일이 연기했다. 문관 출신임을 반영해서인지 느긋한 성격으로 나오며 절대적인 병력 열세로 시작한 행주 대첩 직전에도 여유있는 모습으로 전투에 임한다. 행주대첩에서는 자신이 몸소 바가지를 떠다가 국을 담아 국밥을 만들어다 병졸에게 먹이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이항복과의 장인-사위 관계는 극 중에 전혀 언급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덕형과 더 많이 마주쳐 정유재란시에는 완전 콤비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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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KBS 드라마 <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배우 김영기[47]가 연기했다. 성깔 있지만 역사대로 노련한 장수로 나타나는데 동인들과 함께 개념파에 속해 있지만 정유재란 이후에는 사위인 이항복이 임진왜란 때 그랬던 것처럼 공황장애 직전인 모습을 보인다.[48] 칠천량 해전 직전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을 불러다가 대책을 묻다가 이순신이 아무 말도 없자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지 마시오"하고 부르짖는게 백미.[49] 이는 권율이 정말로 이순신에게 분노했던 것이 아니라 권율 스스로 심각한 자괴감을 가지고 있는 것에서 비롯하였다. 권율 본인 또한 부산 공격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이미 이순신이 파직된 마당에 자기까지 이순신처럼 관직을 버리고 죄인이 되면 왜군을 육지에서 막는 장수를 찾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정의 명에 따라야 하는 자신에 대한 분노를 나타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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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영화
- 1962년 개봉한 영화 < 성웅 이순신>에서는 배우 이창식이 연기했다.
- 1978년 개봉한 영화 < 난중일기>에서는 배우 정민이 연기했다.
- 2014년 개봉한 영화 < 명량>과 2023년에 개봉한 <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는 뮤지컬 배우계의 대부라 불리는 남경읍이 연기했다. 짧은 등장이지만 위엄있는 열연으로 대중들로 하여금 '권율이 환생했다'라는 평을 들었다.[50]
- 2022년 개봉한 < 한산: 용의 출현>에는 전작인 명량, 본작, 그리고 후속작으로 개봉예정인 노량: 죽음의 바다의 감독인 김한민이 연기한다. 한산에서는 최종적으로 편집되었는지 등장 비중은 아예 없고 확장판인 리덕스에서 출연한다. 당시 광주목사였다가 전라도 순찰사 이광의 임명으로 도원수에 부임했는데 직책이 전라도 순찰사로 소개되는 고증오류가 있다.
5.4. 게임
- 게임 < 임진록 시리즈>에서는 검을 들고 공격하고 주변 유닛들의 공격력을 조금 올려준다. 하지만 적진으로 성급히 돌입하다가 죽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조선의 반격>에서는 김덕령이 나온데다 시나리오상 존재감도 김덕령이 차지했고, 자체 성능도 김덕령이 유리한 터라 권율에겐 그야말로 대굴욕이었다.
- 온라인 게임 < 천하제일상 거상>에서도 용병 칼잡이가 전직하는 방식으로 등장하며, 선무공신으로 전직 가능하다. 실제로도 권율이 받은 시호 또한 선무공신. 성능을 얘기하자면 조선 2차 장수 최강. 사명대사와 1위~2위를 다투지만 선무공신의 경우에는 사냥뿐만 아니라 몸빵을 할 수 있으므로 초반에 조선을 시작하면 무조건 뽑게 된다. 1차 때는 폭뢰격 덕분에 빠른 렙업을 해 2차도 빨리 찍을 수 있다. 선무공신이 되면 철벽과 침묵을 쓰게 되는데 철벽은 일정 시간 동안 무적(레벨에 따라 시간 증가)+데미지를 받을 때 반격 폭뢰(범위는 더 작다.)라는 사기스러운 스펙을 자랑하며 침묵은 적의 기술을 못쓰게 만드는 기술. 문제라면 데미지를 입을시 폭뢰격이 발동되는 형식이라 잡몹들한테는 맞아도 반폭뢰가 발동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 또한 선조의 영혼석이 필요한 2차 장수를 뺀 기존 2차 장수 중 유일하게 3차 전직을 할 수 없었으나, 각성 선무공신(火)이 패치됨에 따라서 3차 전직이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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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바일 게임 <황제라 칭하라>에서는 무쌍 레벨의 엄청난 미남 신하로 미화 되어 등장한다.[51]
5.5. 만화
- 좀비딸의 브랜드 웹툰인 <경기딸>에서는 우키타 히데이에와 주먹을 맞대고 미안하다 이거 보여주려고 어그로끌었다의 장면을 패러디한다.
- 네이버 웹툰 오성X한음에선 어린 시절 말썽부리던 이항복에게 덕행이 군자를 만든다를 시전한다.
[1]
권오창 화백이 안동권씨 100여명의 얼굴을 관찰해 영정을 그린 후 문화재청 심의위원회의 심의 과정을 거쳐 제작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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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추밀공파, 22세손
[3]
24세에 사망했다고 하는데 생몰년을 알 수 없다.
[4]
형 권순(權恂)의 아들.
[5]
"사나이는 의기만을 생각할 뿐이지, 어찌 부귀와 명예를 따지겠는가"라는 뜻이다. 1593년 2월, 행주산성에서 병사들을 격려하며 한 말.
[6]
행주대첩 등
무관의 이미지로 익숙하지만 엄연히 무과가 아닌 문과에 급제한 문관 출신. 조선과 고려 통틀어서
김종서,
강감찬,
윤관,
김부식,
서희 등도 원래는 문관 출신인 것도 같은 맥락.
임진왜란 당시 참전한 장수 중 권율만 문관 출신이었던 게 아니라
동래성 전투의
송상현도 문관 출신으로 송상현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도 있다. 반면 이순신은 명백히 관직 시작부터 무관출신이었다.
[7]
아버지 권철도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이항복의 그 유명한 감나무와 "이 손은 누구 손입니까?" 일화에 나오는 이웃집 대감님이 바로 권철이다. 또한 다른
야사에 따르면 이항복이 19세 되던 해 권철이 중매쟁이를 데리고 이항복의 집을 찾았는데 이항복은 대뜸 권철에게 "어르신은 사람의 겉과 속을 보십니까? 아니면 겉만을 보십니까?"라고 묻자 권철은 "속까지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어찌 볼 수 있느냐?"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이항복은 바지를 내리고
성기를 권철에게 보여주면서 "속이 이 정도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고 권철은 크게 웃으며 이항복을 손녀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어린이용 이야기책 등에서는 웃통을 벗어서 몸을 보여줬다는 정도로 순화해서 나오기도 한다. 장인이 아닌 장조 권철이 혼사를 결정한 이유는 당시 백수였던 권철의 막내아들 권율은 가문의 골칫거리였기에 가문 내에서 발언권이 약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8]
권율 위로 세형인 권항과 권개, 권순은 권율과 달리 이미 조정에 출사해 관직생활을 했는데, 기록을 보면 집안 덕에 음서로 진출한 듯하다. 그나마 권율을 제하면 바로 위의 형 권순이 좀 유명하며 동생과 함께 전장에서 고생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업무를 맡아서 늘그막에 그 공으로 벼슬도 좀 올랐다. 권순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권익경이 아들이 없는 권율 집안에 입양되었다. 권익경은 훗날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는 와중에 전사했다.
[9]
과거에서 하위 성적이며 장원 급제와는 최대 3품 반(종6품~종9품)의 차이가 났다. 33명 중에 25등을 한 것. 관직 임명에서도 당연히 격차가 컸기 때문에 병과 성적을 받을 경우 상위 성적을 위해 과거를 다시 보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물론 권율은 다시 보지는 않았다. 사실 과거 급제자가 총 33명 중 23명이 병과인데, 과거를 보는 인원과 당시 권율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 정도도 대단했다. 당시 조선은 인사 적체가 심각해 과거에 급제하고도 자리가 안 나서 늙어 죽는 일이 흔했다. 그런데 갑과 합격자 3명과 조상 4대조 중 관리가 있는 사람은 우선적으로 임용되었다. 명문가 태생이 아니었다면 임용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10]
1580년 문과에 급제한
사위 이항복보다 2년이나 늦었다.
[11]
조선시대에 9품으로 시작해서 장기간이면 몰라도 몇년안에 5품까지 가는 케이스 자체가 흔치 않았다. 20대나 30대에 시작해도 힘든 판에, 권율처럼 40대 중후반에 벼슬을 시작한 경우는 권율의 부친과 친형들이 모두 고위공무원이었던 집안의 권력 배경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12]
1년만에 정5품에서 정3품으로 뛴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 이전 선조가 임명한 것 중에서 충무공
이순신에 비견되는 발탁이다. 선조가 종4품 발포만호 조산만호를 하다가 종6품
정읍 현감(군사 요충지는 무관으로 목민관을 임명하기도 함)을 하던 충무공 이순신을 특별히 거론하며 종3품 고사리첨사와 종3품 만포첨사를 제수했으나 대간의 논핵으로 무산된 후 종4품 진도군수, 종3품 가리포첨사, 정3품 전라좌수사로 연달아 임명했고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철시켰다.
[13]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14]
사실 전투의 단순 규모는 조선군이 불리했다. 이 때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대가 일본군의 기지 금산을 공격했기 때문에 기지가 털릴 것을 염려한 고바야카와군이 후퇴한 것. 그러나 여기서 물러나 버리는 바람에 일본
육군은 결국 전라도 점령에 실패했다. 일본 쪽 연구자들은 일본군이 전쟁에서 밀리게 된 가장 큰 원인으로 이치 전투를 들고는 한다.
[15]
현재는
오산시 내부에 위치해 있다. 이 시절은 아직 정조의 수원화성이 건설되기 이전이라 화성시 안녕동 일대가 수원이였다.
[16]
울산성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일생일대의 위기에 빠졌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식수와 식량 부족이었던 걸 생각하면 권율의 임기응변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다.
[17]
지금의 시흥이 아니다. 지금의 경기도 시흥은 이름만 계승한 것으로 원래의 시흥은 서울
금천구,
영등포구,
관악구 일대였다.
[18]
좁은 지형에 무리하게 많은 병력을 투입했는데, 이 때문에 왜군은 전진도 후퇴도 힘든 수준의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행주대첩에서의 일본군 총지휘관은 이시다 미츠나리였지만 이는 이름뿐인 직책으로 일본군은 사실상 여러 영주들의 군대를
연합한 조직이었다보니 지휘 체계가
통일되지 못했다.
[19]
조선 8도가 전부 전쟁터가 된 상황에서 전라도만 무사했으니 조선 조정에서 전략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군단급 병력은 전라도의 것뿐이었다.
[20]
냉정하게 평가할 때, 단연 원탑인 이순신을 제외하고 임진 정유 양란에서 가장 공이 높은 장수를 꼽으라면 단연 권율이다.(물론 육군이던 권율의 활약 시기에 겹쳐 그 근처 의병장과 승병장들이 결정적인 도움을 준 적이 많은 것은 맞다. 어차피 조선 무신들 다수가 엉망이었던 임진왜란은 의병과 승병 없었으면, 육군에서 아무리 특출난 권율이 있었어도 혼자서는 절대 안 되는 전쟁이었다.) 정복당할 뻔한 전라도를
이치 전투에서의 전설적인 대활약으로 지켜냈고, 행주 대첩으로 한양 탈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 이 기간 동안 권율이 한 일이 없는 건 당연하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은 공식적으로는 7년간 이어졌지만 1593년의
제2차 진주성 전투 이후 1597년 칠천량 해전 전까지 제대로 된 전투가 없었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 역시도 이 기간 동안 2번 출전하여 3번 전투를 치르고 얻은 성과가 적선 23척 격침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도 다 이순신 조선 수군의 실적이니 결론적으로 권율은 전투가 없어서 공을 세울 기회가 없었다. 정탁의 신구차 역시도 이 점을 들어 이순신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유능한 명장이라도 전투를 치를 기회가 없는데 무슨 공을 세우고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하겠는가?
[21]
원균 옹호론에서도 많이 나오는 주장이다. 선조나 원균의 실책을 권율에게 뒤집어씌우는 식. 하지만 이치 전투 하나의 기록만 봐도 권율은 원균 따위가 나대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22]
수군을 제외한 숫자다!
[23]
송고종 시기의 평가는 좀 갈리는데, 특히
진회를 총애해
악비를 처형한 것이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영토의 절반을 잃고, 금나라에 끌려간 아버지
송휘종 시절과 비교하면 그래도 송고종 시기에는 금나라의 침입을 물리친 뒤 화친도 했고
남송을 재건했다고 할 수는 있다.
[24]
권율은 한산도에 있던 군관 몇 명을 빼서 이순신의 수발을 들게 해주려고 했으나 수군의 전력을 조금이라도 깎을 수 있다고 하여 이순신은 거절하였다.
[25]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둘의 충돌이 한번 조명되었다. 칠천량 이래 괴멸된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으로 편입시키자는 명령이 내려오자 이순신이 이를 반대하였는데, 권율이 무모하다며 비난한다.
[26]
원균을 두고는 그냥 인간 자체를 혐오하였다. 장군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인생으로 만났다 해도 혐오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원균이 당시 탐욕적이고 앞뒤가 다르며 이기적인 데다가 무능하기만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27]
원균의 경우 이순신에 대한 간접적인 응징을 시도한 바 있다.
[28]
안골포는 이순신이 한산도 대첩 이후 새벽에 야습을 감행해 승리했음에도 조선 수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은 곳이다.
[29]
육군 30만이 해안 따라서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병력 피해가 거의 없던 임란 초기 조선의 군 동원력은 17만이었다. 원균은 조선 총 병력의 숫자조차 파악하지 못했거나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출정을 기피하려 한 것.
[30]
이는 이순신이 처음 과거에 급제해
녹둔도에 배치되었을 때
이경록과 둘이서 여진족을 무찔렀음에도 되려
이일이 이순신과 이경록을 즉결처분하지 못하고 선조에게 이순신을 모함하는 선에서 끝난 것과 같은 이치다. 일개 초임 관리도 함부로 즉결처분을 할 수 없어서 임금에게 처벌 요구를 할 정도인데, 당시 원균은 무려 삼도수군통제사였다. 이놈이 전쟁을 망쳐서 나라에 피해를 입혔으니 사형을 내려달라고 도원수로서 조정에 상소를 올릴 수는 있겠지만 도저히 직접 죽일 방법은 없었다. 사실 원균이 무능력에 개판인 인간만 아니었다면 곤장을 친 일도 선조에게 권율이 문책당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선조도 원균이 무능하다고 조정에 소문났음을 알았고, 권율이 이치전투에서 큰 활약을 하여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기에 따지지 않고 넘어갔을 뿐, 전쟁 중이라도 장군이 장군을 처벌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명나라의
원숭환이 직권으로
모문룡을 처형했다가 꼬투리가 잡혀 본인 역시 처형을 당했다.
[31]
소문 나기 딱 좋은 사건이다. 아직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니고, 왜적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총사령관이 음주가무를 벌였다니 안 좋은 의미로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32]
신립도 권율의 사위라는 소리가 있지만 야사의 오류이다. 신립은 권율과 9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아무리 조선시대가 혼기가 빠르고 애도 빨리 본다고 하지만 장인과 사위가 9살 차이나는 경우는 특수한 극소수 재혼 케이스를 제외하고 찾기 힘들다.
[33]
과거 급제 이전의 어린 이항복이 은퇴하고 늙은 율곡 이이에게 성리학 해석 내용을 가지고 깐족거렸다는 야사도 있을 정도인데 사실이 아니다. 율곡 이이는 이항복이 관직에 오른 뒤 한참 지나서 은퇴했고 두 사람은 부모자식뻘 정도 나이차이고 할아버지와 손자뻘 나이차가 아니며, 대신이었던 율곡이 이항복과 직접 교류했다는 공식 기록도 있기에 스승과 제자로 깐족거리는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당대에 생긴 이야기라면 나올 수 없는 내용들이다.
[34]
다 벗은 것까진 아니고 여름 잠옷 차림이었다고 나오는 책도 있으나 어쨌든 왕과 다른 신하들 앞에서 체통이 영 말이 아니게 되었다는 전개는 동일하다.
[35]
물론 이건 사실이 아니며 불가능한게 이항복이 왕과 대면할 수 있게 되기 전에 권철은 이미 70대의 나이로 죽었다.
[36]
이해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남자가 소변을 본 후에
생식기를 터는 행위를 의미한다. 권율이 자신의 생식기를 가리켜 "이건 자네 장인이다"라고 했던 것을 상기할 것.
[37]
출처는
이희승의 수필 <별을 그리던 시절>이다.
[38]
이문원의 말썽 이야기가 이항복의 이야기로 알려지거나 거꾸로 이항복 이야기가 이문원 이야기로 알려진 사례도 적지 않다.
[39]
당시에는 안주인이라고 해서 부인이 집안 살림을 책임지다 보니 각종 창고 열쇠도 아내에게 있었다.
[40]
실제로 제갈량은
첩은 존재하기는 했는지도 의문이고 자식도 본처에게서 늦게 본
제갈첨 하나뿐이다. 다만 제갈첨이 늦둥이로 태어나 형
제갈근의 차남
제갈교를 양자로 들였다.
[41]
임진왜란 이후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한문 4대가로 꼽히는 명문장가였다.
충주 탄금대 전투의 생존자이기도 하다.
[42]
다른
버전도 있는데 왜군을 사로잡아 산 채로 배를 갈라 간을 씹어 먹었다고도 한다.
[43]
<대지>로 유명한 펄 벅이 지은 대지 2부 <아들들>에서도
군벌이 된 왕싼(
왕룽의 막내 아들)이 다른 군벌
장군을 베어버리자 그 부하가 죽은 장군의 간을 끄집어내 바치면서 "이걸 먹으면 그 용맹을 얻게 됩니다."라고 하지만 왕싼이 쓴웃음을 지으며 거절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걸 두고
중국인을 폄하했다고 할 수도 없는게 <
수호전>을 비롯하여 중국
문학과
역사에서도 이런게 종종 나온다.
[44]
사실 임진왜란 시기 여러 명장들이 왜군의 간을 씹어먹었다는 이야기는 흔한
레퍼토리이다. 100여 년 전
삼포왜란 시기
소기파라는 인물의 경우 실제로 왜군 시체의 쓸개를 꺼내먹어 조선왕조실록에도 실렸다. 지휘관 입장에서는 상대의 사기를 꺾고 아군의 사기를 고무할 수 있는 방법인데다, 권율 같은 원래 문관 출신 지휘관에게는 휘하 무관들에게 이미지를 재고시킬 수 있는 방법이니 비위만 좋다면 시도해볼 만한 방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45]
임진왜란 항목에도 나와 있듯
일본 학계에서는 웅치 - 이치 전투를 더 높게 평가한다.
[46]
대한민국 해군은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임을 자처한다. 이는
해군의 다짐에서도 알 수 있다.
[47]
2002년
SBS 드라마 <
야인시대>에서는
김기홍 역.
[48]
수군 폐지론을 먼저 주장한 사람으로 나온다.
[49]
이 때 권율에 자괴감과 분노 그리고 허망함이 함축되어 있다. 어차피 미쳐버린 세상에서 마지막에 자신의 목숨까지 내던지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건 결사 항전이 아니라 마치 산제물로 바쳐진다는 말을 한다. 권율의 자괴감 그리고 구역질나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50]
여담으로 영화 명량에는 배우
권율이 이순신의 아들
이회 역으로 출연해 역사 인물 권율과 배우 권율이 같이 나오는 영화가 되었다.
[51]
공식 카페에 검색해보면 얼굴만 보고 혹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걸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