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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08:16:56

이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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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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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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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통적 운율·정서를 계승한 시인. [2] 조국 광복 염원·의지 및 부정적 현실 극복을 다룬 시인. [3] 정치적 이념을 배제한 순수 서정시를 추구한 유파. 특정 사상이나 계급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반발하며 등장했으며, 시 동인지 《시 문학》을 중심으로 순수 서정시 운동을 주도했다.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신석정 등의 시인이 활동했다. [4] 부정적 현실을 지식인의 관점에서 비판한 소설이 많았다. 특히 의식의 흐름 기법이 많이 쓰였다. 대표적으로 이상 날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있다. [5] 장편소설 중에서도 일제 강점기에 부정적 인물이 득세하던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 이때 주목받았다. 대표적으로 채만식 태평천하, 염상섭 삼대가 있다. [6] 계몽주의에 기반한 농촌 계몽 소설, 향토적 삶을 다룬 향토적 농촌 소설, 식민지 지배와 통치 제도의 억압성과 부조리로 인한 농촌의 현실을 다룬 현실 비판적 농촌 소설이 있다. [7] 만주 사변 이후 더욱 극심해진 일제의 사상 통제와 검열을 피해, 역사적 사건을 다루어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8] 당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어 아예 한국어 사용 자체를 금지할 지경에 이른 관계로 주제 의식이 모호하고 불분명한 몇몇 단편들만 간신히 명맥을 이었다. 대표적으로 순수 소설인 황순원 '별'이 1941년에 발표되었다. 이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낸 전후세대(1920년대생) 작가들은 체계적인 한글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다른 세대와 비교도 안되는 굴곡진 인생 경험을 했음에도 이를 풀어내는데 한계가 있었고 이전 세대와 60년대 부상한 한글세대(김승옥 등) 사이에 끼어버렸다.
고전문학 · 장르 문학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이상
李箱 | Ri Sang
[1]
파일:Ri_Sang.jpg
본명 김해경 (金海卿)
출생 1910년 9월 23일
한성부 서서 인달방 사직동계 사직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7길 18)[2]
사망 1937년 4월 17일 (향년 26세)
도쿄부 도쿄시 혼고구 도쿄제국대학 부속병원
(現 도쿄도 분쿄구 도쿄대학 부속병원)
직업 시인, 소설가, 수필가, 건축가,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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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필명 이상 (李箱)[3]
비구 (比久)[4]
보산 (甫山)[5]
하융 (河戎)[6]
본관 강릉 김씨[7]
가족 아버지 김연창[8]
어머니 박세창
남동생 김운경
여동생 김옥희
배우자 변동림 (1936년 결혼)[A]
학력 신명학교 (졸업)[10]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11]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 / 졸업)[12]
장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미아리 산69 미아리공동묘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반포리[13]
→ 미상[14]
신체 168cm, 51kg[15]
등단 『12월 12일』
(十二月 十二日 1930,《조선》)
대표작 오감도
(烏瞰圖, 1934,《조선중앙일보》)
날개
( 1936,《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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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성장기2.2. 문학가로서의 데뷔 이후2.3. 일본에서의 사망
3. 평가4. 매체5. 여담
5.1. 필명에 대해5.2. 연인 관계
6. 작품 목록7.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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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 소설 < 날개>
일제강점기 작가.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문학을 주력으로 했으며, 1930년부터 약 7년 동안 다수의 시, 소설, 수필 등을 집필하며 인간 사회의 도구적 합리성을 극복하고 미적 자율성을 정립하고자 했다.[16] 그는 주로 자동기술법으로 자의식 문학을 창작했는데, 이러한 작품활동은 한국 근대 문학이 국제적·선진적 사조에 합류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2. 생애

2.1. 성장기

1910년 아버지 김연창(金演昌)과 어머니 박세창(朴世昌)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나고 3년 후인 1913년부터는 몰락한 양반인 백부 김연필의 집으로 입양되어 유교와 한문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921년 신명학교를 거쳐, 1926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17]했다. 졸업 이후엔 곧바로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복무한다.

2.2. 문학가로서의 데뷔 이후

1930년부터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하던 잡지 조선에서 필명 이상(李箱)으로 장편소설 12월 12일을 9회 동안 연재한 것을 시작으로 문학계에 데뷔한다. 퇴사하기 전까지 그는 이상(李箱)을 포함해 다른 필명인 비구(比久)와 보산(甫山) 등으로 저작들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하는 잡지에 투고했다.

1931년에 갑작스럽게 폐결핵을 진단받는다. 병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1933년부터는 각혈 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했고, 더이상 건축기사 일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상은 조선총독부에서 퇴사하고 황해도에 있는 배천 온천으로 요양을 간다.

요양 후 서울로 돌아온 이상은 종로1가에 다방 제비를 차리고 온천에서 알게 된 기생 금홍을 다방의 마담 자리에 앉혀 동거하기 시작했다. 이상은 이때부터 박태원, 정지용, 김기림, 이태준 등의 문학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중 정지용의 주선을 통해 가톨릭청년에서 꽃나무, 이런시를 발표했고, 이듬해인 1934년에는 순수 문학 단체 구인회에 가입했다. 또한 이태준의 도움으로 조선중앙일보에서 오감도를 연재하지만, 독자들의 거센 반발로 인해 연재를 중지하였다.

1935년 경영난으로 인해 다방 제비를 폐업하고 금홍과 결별하게 된 이상은 인사동에 쓰루(つる, 학), 종로1가에 69와 같은 다방을 차례로 운영했지만 모두 제비와 같은 이유로 남에게 양도했고, 그러고도 다시 명동에 무기(むぎ, 보리)라는 다방을 열었으나 이것 또한 망했다. 1936년에는 친구 구본웅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출판사인 창문사에 취직하였으나 얼마 안 가 퇴사했다.[18] 동년 6월에는 수필가 변동림과 결혼하여 경성 황금정에서 신혼생활을 하는데, 이때 지주회시 날개를 발표하여 평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2.3. 일본에서의 사망

점차 죽음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 이상은 지인들에게 인사를 남기고는 1936년 9월, 공부를 위해 평소 동경했던 일본의 도쿄로 떠난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도쿄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저러나 동경 오기는 왔는데 나는 지금 누워 있소그려. 매일 오후면 똑 기동 못 할 정도로 열이 나서 성가셔서 죽겠소그려.

동경이란 참 치사스러운 도십디다. 예다 대면 경성이란 얼마나 인심 좋고 살기 좋은 '한적한 농촌'인지 모르겠습디다.

어디를 가도 구미가 당기는 것이 없소그려! 꼴사납게도 표피적인 서구적 악습의 말하자면 그나마도 그저 분자식(分子式)이 겨우 여기 수입이 되어서 진짜 행세를 하는 꼴이란 참 구역질이 날 일이오.

나는 참 동경이 이따위 비속(卑俗) 그것과 같은 물건인 줄은 그래도 몰랐소. 그래도 뭣이 있겠거니 했더니 과연 속 빈 강정 그것이오.

한화휴제(閑話休題)[19]―나도 보아서 내달 중에 서울로 도로 갈까 하오. 여기 있댔자 몸이나 자꾸 축이 가고 겸하여 머리가 혼란하여 불시에 발광할 것 같소. 첫째 이 가솔린 냄새 미만(彌蔓) 넘쳐흐르는 것 같은 거리가 참 싫소.
— 이상, 김기림에게 쓴 편지 중 일부, 1936년 11월 29일자
이상은 몇달 안에 서울로 돌아가려 했으나, 1937년 2월의 어느날에 공원을 배회하다가 불령선인(사상불온혐의)으로 체포되어 도쿄 니시칸다(西神田) 경시청 경찰서[20]에 갇히고 만다.[21] 그러나 앓고 있던 폐결핵이 악화되자 병보석으로 34일 만에 석방되고 동경제국대학 부속 병원에서 4월 17일 새벽 4시에 2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사망 전 급히 도쿄로 온 아내 변동림에게 그는 "센비키야의 메론이 먹고싶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나는 열두 시간 기차를 타고 여덟 시간 연락선을 타고 또 스물네 시간 기차를 타고 동경에 닿았다. 동대 병원 입원실로 직행하다. 이상의 입원실, 다다미가 깔린 방들, 그중의 한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상이 거기 누워 있었다. 인기척에 눈을 크게 뜨다. 반가운 표정이 움직인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 옆에 앉아 손을 잡다. 안심하는 듯 눈을 다시 감는다. 나는 긴장해서 슬프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나, 죽어간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상은 눈을 떠보다 다시 감는다. 떴다 감았다. 귀에 가까이 대고 "무엇이 먹고 싶어?", "셈비끼야[22]의 메론." 이라고 하는 그 가느다란 목소리를 믿고 나는 철없이 천필옥[23]에 메론을 사러 나갔다. 안 나갔으면 상은 몇 마디 더 낱말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르는데. 멜론을 들고 와 깎아서 대접했지만 상은 받아넘기지 못했다. 향취가 좋다고 미소 짓는 듯 표정이 한 번 더 움직였을 뿐 눈은 감겨진 채로. 나는 다시 손을 잡고 가끔 눈을 크게 뜨는 것을 지켜보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 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 397쪽 중
사후 이상의 시신은 조선으로 옮겨져 18일 전에 폐결핵으로 숨진 절친 김유정과 합동 영결식으로 화장되었다.

3. 평가

이상(李箱)에도 그 생전에 조금만 생각을 달리 먹었어도 보다 더 많은 독자를 얻었을 것이고 좀더 요란한 박수를 받았을 것이다. 그는 사실상 문학상의 상식이 가지고 있는 감수 능력의 범위를 적지 않이 벗어났던 것이다. 이 상식적인 감응(感應)에 적당히 타협하는 것―그것이 문학적으로 이른바 성공을 손쉽게 거두는 유력한 길이었다. 이런 의미에서는 이상의 문학은 상식의 손아귀를 좀 넘어선, 말하자면 지나친 데가 있었다. 그것을 우리는 일종의 동(東)에 드문 철저성이라고 말하여도 무방하겠다.
김기림, < 이상의 문학의 한 모> 중
친구인 문학 평론가 김기림 등과 함께 일제강점기 조선 문학, 더 나아가 한국 문학의 모더니즘과 전위성을 개척한 작가들 중 한 명으로 손꼽히며, 더 나아가 한국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천재라고 평가받는다. 그는 저작에 당대에 흔치 않았던 외국어와 숫자 그리고 기호의 남발과, 문법적으로 어딘가 이상한 문장과 서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독보적인 행보를 보였으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그가 사망한 지 10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혁신적' 혹은 '난해'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오감도 등 이상의 난해시들은 기존의 문법 틀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련의 시도들로, 주로 시에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 다다 기법을 사용했다. 다만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와 달리 음절 단위의 문장으로 구성된 한국어와 애초부터 띄어쓰기가 없는 일본어로는 다다이즘 기법을 사용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고, 독자들 또한 이상의 시와 문법에 대해 납득하지 못했다.[24] 하지만 이러한 시도들은 문학가들 사이에서 커다란 이슈로 떠올랐다. 이상의 동료와 친구들은 그의 천재성에 주목해 그가 작품을 연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며, 심지어 그의 문체를 따라하는 삼사문학[25]이라는 동인까지 생겼다.

시가 이상의 전위성을 상징한다면, 산문은 이상의 천재성과 사상이 드러나는 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필 산촌여정과 권태에서는 현대화되고 서구화된 일상에 익숙해진 도시인이 외부와 단절되어 전통적인 옛 모습을 간직한 시골에서의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권태에 빠진 모습을 뛰어나게 묘사하였고, 간결한 문체를 바탕으로 쓰여진 조춘점묘에서는 쉴 틈 없이 꽉 막혀 답답한 현대인의 일상을 콘크리트로 사방이 둘러싸여 어디로 가든 같은 풍경을 한 빌딩에 비유하면서 그 빌딩의 소유자는 보험회사라는 거대한 집단이라는 점을 들어 개인으로서 존재하지 못하는 부조리한 현대인의 삶을 비판하였다. 이런 시대를 뛰어넘는 주제와 문체는 훗날의 독자들이 작품들을 1970년대나 1980년대 산업화 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이상 본인도 자신의 재능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그는 스스로를 다방면에서 재능있는 천재라고 표현했다. 실제로 이상은 당시 경쟁률이 치열하고 엘리트 학교로 평가받는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학업이 뛰어났고, 주요 공부 분야였던 건축과 문학뿐만이 아닌 미술과 외국어[26]에도 어느 정도 조예가 있었다.

그러나 이상에게 긍정적인 면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상은 어릴 적 백부로부터 유학과 한문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당시 선진 문물로 여겨지던 계산적이고 자연 파괴적인 서양의 가치관들을 동경하면서도 반감을 가지는 모순을 겪었다. 또한 사회에서 스스로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경제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여러 차례 무너졌으며, 당시 불치병이었던 폐결핵을 앓는 등 수많은 고통에 시달렸다.[27]

하지만 이상은 현실에 좌절하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고통을 파헤쳐보고자 노력하였고, 글을 쓰며 삶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했다. 그리고 사후, 그가 남겨왔던 작품들은 후대에 전해져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4. 매체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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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수능 언어영역 출제 2009 교육청 모의고사 출제[36]
2003년 수능 언어영역[37] 문제의 경우 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시의 내용과는 전혀 관계없는 문제로 출제되어 난이도가 높지 않았다. 본 시는 오감도의 제 4호다. 문제에서 말하는 '윗글'은 '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내용이다.

위 문제의 답은 1번이다. 사실 보기로 제시된 이상의 시는 볼 필요도 없다.[38] 1~5번 보기에서 적절하지 않은 것을 고르라고 했으니 그 중 가장 튀는 것(다른 지문과 비교하였을 때 오류가 있는 것)을 찾는 편법으로 풀 수 있다. 특히 3번 보기에선 독자들이 시인을 '미쳤다'고 표현했다 하였고 5번 보기에선 편집진의 압력으로 연재가 중단되었다고 했으며 2번 보기에선 기존의 언어체계를 불신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아주 상식선에서 생각했을 때 이 보기 중 적어도 2개가 맞다면 이 시가 1번 보기에서 주장하는 당시 현대시의 주류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굳이 헷갈린다면 3번 보기와 헷갈릴 수도 있는데 그때 이 시를 보면 된다.[39] 이런 내용도 없어보이는 이상한 시가 나왔을 때 일반 독자들에게 '미쳤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만약 1번 보기가 적절했고 정말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시였다면 적어도 독자들에게 호불호는 갈릴지언정 미쳤다는 소리까지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2009년 7월 교육청 모의고사에서 시가 다시 한 번 등장했다. 다만 듣기평가 문항이었기 때문에 해설을 들려줄 수 있었고 그 해설을 토대로 문제를 냈다고 한다. 2006년 수능에 수필 '조춘점묘'가 등장했고 2014년 수능 국어영역에서 A, B형 공통문항으로 수필 '권태'가 마지막 지문으로 출제되었다. 소설인 날개도 한 번 나왔다.

5.1. 필명에 대해

그의 필명인 이상의 유래에 대해서는 많은 추측이 있다. 첫째로는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일했을 당시 인부가 그의 성을 착각해 그를 이상이라고 부른 것에서 따왔다는 설로, 친구 김기림 등의 주장이다.

두번째로는 친구 구본웅이 선물한 미술도구 상자에서 따왔다는 설로, 경성고등공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선물받은 오얏나무(李)로 만들어진 상자(箱)를 받고 이에 감동해 필명을 이상(李箱)으로 지었다는 설이다. 그가 디자인한 졸업 앨범에서도 이상이라고 서명했기에 첫번째 설보다 설득력이 있다.

이외 다른 필명인 비구(比久), 보산(甫山), 하융(河戎)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 중 하융(河戎)의 경우 뜻[40]을 보면 그의 본명인 김해경의 뜻[41]을 비튼 것으로 추정된다.

5.2. 연인 관계

알려진 이상의 첫번째 연인은 그가 운영했던 다방 제비의 마담인 금홍이었다. 금홍은 이상이 요양을 위해 갔던 배천 온천에서 만난 기생으로, 이상은 그녀를 사랑해서 다방 제비를 차려 그녀를 데려와 함께 운영했다. 그러나 다방은 인기가 없어 경영난에 시달렸고 이 때문에 이상과 금홍은 자주 다퉜다. 결국 1935년에 둘은 결별하고 다방 제비 또한 폐업하게 된다.

이후 이상은 부모의 집을 담보삼아 인사동에 위치한 카페 쓰루(つる, 학)를 인수하여 운영했는데, 이때 카페 엔젤에서 근무하던 권순옥을 여급으로 데려온다. 권순옥은 이상이 4년 전에 만났던 여성으로, 이상에게 ' D. H. 로렌스의 모조품'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이상은 그녀가 붙여준 별명을 마음에 들어하며 친구들에게 자랑하였기도 하고, 서로 사랑하여 연인 관계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의 친구인 소설가 정인택 또한 권순옥을 사랑했는데, 그는 어느날 권순옥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자신을 비관하며 자살기도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상은 그런 정인택을 위해 권순옥과 헤어져 둘이 결혼할 수 있게 도와줬다.[42][43]

카페 쓰루의 폐업 이후 다시 카페 69를 차린 이상은 이번엔 카페의 손님이자 친구 구본웅의 이모[44]인 수필가 변동림에게 빠지게 되었고, 어느날 고백한 것을 계기로 1936년 6월에 결혼한다.[A] 그러나 이상은 결혼 4개월 만에 새출발을 하겠다며 도쿄로 떠났고, 죽기 전에서야 다시 만나게 된다. 이후 변동림은 7년 후인 1944년에 화가 김환기와 재혼했고 남편 김환기의 이전 호를 따서 김향안(金鄕岸)으로 이름을 바꾸어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교와 에콜 드 루브르 등에서 미술을 공부해 미술평론을 쓰기도 했다. 그녀는 수필을 쓰며 이상의 자취를 정리하는 데 큰 공헌을 했으며, 2004년에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를 다룬 창작물로는 소설 천재들의 초상, 라흐헤스트가 있다.

6. 작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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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7. 가계도[A]


[1] 본인이 직접 사용한 로마자 표기. 현대에 들어서는 Yi Sang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다. [2] 지번: 통인동 154-10 [3] 주로 사용한 필명. 동료 소설가이자 친구였던 박태원의 결혼식에서는 '以上’이라는 표기를 사용했다. [4]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발표할 때 사용한 필명. [5] 단편소설 '휴업과 사정'을 발표할 때 사용한 필명. [6] 소설 등의 삽화를 그릴 때 사용한 필명.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삽화 또한 해당 필명을 쓰고 그려주었다. [7] 36세손 ○卿 항렬. [8] 호적명 김영창(金永昌) [A]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혼 비슷한 관계였기 때문에 족보에는 변동림의 이름이 없다. [10] 순헌황귀비의 남동생이자 진명여학교 설립자 엄준원이 설립한 학교로, 현재의 누상동에 위치해있다. [11] 본래는 동광학교에 입학했으나 보성고보와 통폐합되었다. [12]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의 전신이지만 당시 대학인 구제대학은 아니었다. 다만 구제전문학교인 고등실업학교( 고등상업학교, 고등농림학교, 고등공업학교 등)였기에 정식 학사를 수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조선인으로선 웬만한 수재가 아니면 입학하기 힘든 엘리트 학교였다. [13] 미아리공동묘지가 도시개발이 진행되면서 광주군 언주면의 공동묘지(현 국립중앙도서관 일대)로 이장되었다. [14] 1963년 언주면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고 도시개발이 이루어지며 다시 이장되었는데,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다. [15] 경성고등공업학교 재학 당시인 16세(1926년) 기준이다. [16] 저자 '이상' 주요작품 및 작품세계, 예술지식백과, 문화체육관광부 문화포털 참조. [17] 그 해 건축과 졸업생 12명 중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관련 기사 [18] 창문사에서 근무하던 중엔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을 편집 및 발간했다. [19]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함. 어떤 내용을 써 나갈 때 한동안 다른 내용을 쓰다가 다시 본래의 내용으로 돌아갈 때 쓰는 말이다. [20] 지금의 치요다 일대. 이상 외에도 2·8 독립선언식의 11명 대표인 윤창석과 김철수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구금되었던 경찰서로도 알려져 있다. [21] 별다른 혐의가 있던 것은 아니고, 그냥 꾀죄죄한 모습이 수상쩍어서 체포당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중일전쟁 직전으로 군국주의가 절정에 이르러던 때여서 거동수상자라면 전부 체포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22] 센비키야(千疋屋). 고급 과일과 과일 디저트를 판매하는 도쿄 긴자에 위치한 명품 상점으로, 1834년에 오픈해서 현재까지도 영업하는 노포이다. 또한 멜론은 가게의 대표 상품이자 당시 고급 과일의 대명사로 한 통에 최소 2만 엔(20만 원)이 넘는다. 스튜디오 지브리 추억은 방울방울에서 주인공의 아버지가 파인애플을 사 왔다는 가게인 "긴자의 센비키야"가 바로 이 가게를 가리키는 것이다. [23] '센비키야'의 한자인 千疋屋을 발음 그대로 읽은 것이다. [24]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일화가 오감도가 처음 신문에 게재되었을 때였다. 당시 조선중앙일보에는 시를 읽은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쳤으며, "이런 개소리를 내뱉은 이상을 죽여야한다"는 과격한 내용의 투고까지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생애 문단에서 전술했듯이 시를 다 발표하지 못하고 중간에 연재를 중지했다. [25] 1934년 9월 1일 창간된 순문예 동인지. 회원 중에 황순원도 있었다. 창간멤버(신백수·이시우·정현웅·조풍연) 중 조풍연, 정현웅을 제외하면 모더니즘과 초현실주의를 추구했다고 한다. 이상은 이들과 만나 문학에 대한 토론을 하기도 했다. [26] 이상은 프랑스어로 쓴 시들도 남겼다. 이상은 조선어나 일본어뿐만 아니라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하여 읽고 쓸 줄 알았고 자기가 운영하던 다방에도 프랑스 신문이나 잡지 등을 두어 그것을 읽곤 했다. [27] 소설 날개 중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라는 표현은 이런 배경에서 유래된다는 해석이 있다. [28] 날개 거울이 주요 모티브가 되었으며, 그 외에도 오감도, 위독, 건축무한육면각체, 파편의 경치, ▽의 유희, BOITEUX BOITEUSE, 꽃나무, 산촌여정, 최저낙원, 슬픈 이야기, 절벽, 기와가전 등의 구절이 게임 내에서 인용되었다. [29] 실제로 이상은 일문 작품을 많이 남겼다. [30] 정작 이상은 건축과를 졸업해 건축가가 되었는데, 이는 백부의 "시대가 변해도 기술자는 배를 곯지 않는다, 가난한 화가가 되어선 안된다"라는 반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31] ' CROSS에는 기름이 묻어 있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32] 시에서는 '기독'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33] 33은 남녀가 성교하는 모습을 은유한 것이며 18은 그 18이 맞다고 한다. [34] 다만 이 때문에 고은의 이상 평전에서는 그의 문학에는 거의 섹드립 밖에 없다는 왜곡된 평가가 나오기도 하였다. [35] 정확히는 생가의 일부 위에 지어진 집이다. 실제 생가는 300평 정도의 넓은 집이었으나 이상 사후 10개의 필지로 분할, 판매되어 그 위에 다른 여러 집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후에 연구를 통해 생가가 아닌 이상의 백부인 김연필의 집이었음이 밝혀지기도 하였고 이에 대한 논란이 확대되어 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되기도 했다. 따라서 생가라는 표현은 엄밀히 따지자면 틀린 말이다. [36] 숫자가 좌우 반전이라서 이미지로 인용할 수밖에 없다. [37] 현 국어영역 [38] 수능이나 SAT 등의 시험에서 볼 수 있는 법칙으로, 주어진 글의 난이도와 문제의 난이도는 서로 반비례한다. 여기서는 지문이 어려우니 문제는 거꾸로 쉬운 것이었다. 비슷한 맥락으로 한자가 다수 포함된 고전문학의 단어 설명이 부실할 경우 100% 확률로 문학작품을 전혀 안 읽어도 풀 수 있다. 수능에서 한자 독해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상의 시는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전형적인 시를 해제하는 관점에서 풀 수 있는 게 아니라 국어국문학과의 오랜 연구로 그나마 대부분 풀린 거고 그마저도 오감도는 미해결이다. 그런데 진짜 이상 시로 문제를 내면 출제 위원들도 오락가락할 것이다. [39] 배배 꼬고 의미불명의 표현법을 사용한 작품이 보통 당대에 인기가 있고 주류가 되었던 경우는 파블로 피카소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없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서 [40] 강(河)의 오랑캐(戎) [41] 바다(海)의 벼슬(卿) [42] 놀랍게도 이상은 이들의 결혼식 사회를 봐주었다. 관련 글 [43] 권순옥은 한국전쟁 때 정인택과 사별한 후 이상의 또다른 친구인 박태원과 결혼하고 이름을 권영희로 개명한다. [44] 변동림의 아버지인 변국선(卞國璿)이 늦은 나이에 첩을 통해 낳은 딸인지라 족보상 이모인 변동림( 1916년생)이 조카인 구본웅( 1906년생)보다 나이가 더 적다. [A] [A] [47]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졸업.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교 작곡 전공 석·박사. 스탠퍼드 대학교 컴퓨터음악 및 공학연구소(CCRMA) 연구원 역임. 현재 재독(在獨). 문도희 박사가 작곡한 i21이 예술의 전당에서 아이패드와 현악4중주단과의 협연으로 세계 초연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