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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17 21:09:03

남이의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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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건의 전말3. 옥의 시작4. 남이의 옥 이후

1. 개요

南怡─獄
1468년(예종 즉위년)에 남이· 강순 등이 역모의 죄로 처형당한 사건.

2. 사건의 전말

오늘(10월 24일) 저녁에 남이가 저에게 찾아와 "오늘 혜성이 나타나서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너는 보았느냐"라고 하길래 보지 못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남이가 "이제 은하수 한가운데에 밝은 빛의 혜성이 있어서 주위의 별이 안보인다."라고 했고 제가《강목(綱目)》이란 책을 펼쳐 혜성이 나타난 때를 찾아보니 그 책에 달린 주석에 "혜성이 희면 장군이 반역을 하고, 2년안에 큰 반란이 있다."라고 적혀있어 이를 남이에게 말하니 남이가 탄식하며 "그 일은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ㅡ 《조선 왕조 실록》예종 즉위년 10월 24일
"강순(康純)과 남이(南怡)가 죽은 지 3백 년이 넘도록 이름이 죄인의 명부에 남아 있고 자손들이 쇠잔하고 또 오래되도록 아직까지 신설(伸雪)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강순과 남이는 모두 유자광(柳子光)의 무고로 인하여 죄도 없이 화를 당하였습니다. 더욱이 남이는 효용(驍勇)이 여느 사람보다 뛰어나서 여러 번 기공(奇功)을 세웠으나 유자광이 심히 시기를 하고 시어(詩語)로 죄를 꾸며 법망에 끌어 넣어 죽였는데, 야사(野史)에 그 사실이 대부분 기재되어 있습니다. 전에 선조 때에 연신(筵臣)이 그의 억울함을 말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이런 일은 후일을 기다려서 적선(積善)하는 호사(好事)로 삼으면 매우 좋겠다.’ 하였습니다. 성명(聖明)께서 임금의 자리에 계시면 억울한 자로서 신설(伸雪)되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아직까지 못하고 있는 조처가 오늘을 기다린 것 같습니다. 청컨대 고(故) 영의정인 강순과 병조 판서 남이에 대해 모두 그 억울함을 신설(伸雪)하고 그 관작을 회복시켜 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1]
- 조선왕조실록 순조 18년 3월 10일

이러한 상황에 1468년 10월 24일 병조참지였던 유자광(柳子光)이 예종 즉위 전인 1468년 9월 2일에 남이가 궁궐에서 숙직하고 있다가 출현한 혜성[2]을 보고 남이가 자신에게 한 말인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를 왕에게 전하며 역모를 고변했다. 남이는 즉시 체포되었으며[3] 그는 처음에는 모반의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지만 혹독한 국문을 받으면서 결국 시인했고 4일 뒤인 1468년 10월 27일 강순[4], 조경치, 변영수, 변자의, 문효량, 고복로, 오치권, 박자하 등과 함께 저자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또한 남이를 변호한 조숙도 사형에 처해졌고 남이와 친했던 조영달과 이지정도 "비록 남이가 이들과 모반을 의논하지는 않았지만 모반에 임하면 알렸을 것이니 이들 또한 한 패다"는 논리로 처형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를 면밀히 살펴볼 때 남이가 일정한 정치적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과연 국왕을 겨냥한 역모로까지 발전했는지는 분명치 않다고 판단된다. 그런 측면 때문에 조선 후기의 여러 야사[5]는 남이가 유자광의 음모로 죽었다고 보았다.[6] 그런 억울한 사연 때문에 무속에서는 그를 신령으로 모시고 있다. #

3. 옥의 시작

임금이 창덕궁(昌德宮)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갔다. 밀성군 이침(李琛)·영순군 이부(李溥)·영의정 이준(李浚)·하성군 정현조(鄭顯祖)·고령군 신숙주(申叔舟)·상당군 한명회(韓明澮)·중추부 영사 심회(沈澮)·좌의정 박원형(朴元亨)·창녕군 조석문(曹錫文) 등과 도총관(都摠管)·승지(承旨)·대간(臺諫)·사관(史官) 등이 입시하였다. 교위(校尉)로 하여금 남이를 뜰에 나치하게 하고, 도총관 홍응(洪應)·도승지 권감(權瑊)에게 명하여 묻게 하니, 남이가 대답하기를,
"신이 어려서부터 궁마(弓馬)를 업(業)으로 삼아, 만일 변경에 일이 있으면 먼저 공을 세워 국가를 돕는 것이 신의 뜻입니다. 신은 본래 충의지사(忠義之士)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충의지사’라고 일컬으면서 어찌하여 성복(成服) 전에 고기를 먹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병이 들었기 때문에 먹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반역(反逆)한 이유를 묻게 하니, 남이가 사실대로 대답하지 아니하므로, 이에 곤장을 때렸더니 남이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
"원컨대 우선 천천히 하소서. 신의 꾀한 일을 말하자면 깁니다. 원컨대 한 잔 술을 주시고 또 묶은 끈을 늦추어 주면 하나하나 진달하겠습니다."
하므로, 명하여 술을 내려 주고 묶은 끈을 늦추게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신이 과연 반역을 꾀하고자 하였습니다. 유자광(柳子光)과 더불어 이야기한 말이 모두 옳습니다."
하고, 강순(康純)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저 이는 바로 신의 당류입니다. 지난해 9월에 세조께서 승하한 뒤에 마침 성변(星變)이 있었고 강순이 밀성군(密城君)과 더불어 도총부(都摠府)에 입직하였는데, 신이 가서 보았더니 곧 밀성군은 안으로 들어가고 강순이 신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바야흐로 이제 어린 임금이 왕위를 이었는데 성변이 이와 같으니 간신이 반드시 때를 타서 난을 일으킬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들은 세조의 은혜를 받아 장군이라 이름하였으므로 반드시 먼저 화(禍)를 입을 것이니,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하기에, 신이 응답하기를, ‘약한 자가 선수(先手)함이 가하겠는가?’ 하니, 강순이 옳게 여겼습니다. 다른 날에 강순과 더불어 같은 날 입직(入直)하였는데, 강순이 신의 숙직하는 곳에 이르러 서로 더불어 《고려사(高麗史)》를 열람(閱覽)하다가 인하여 강조(康兆)162) 가 그 임금 송(誦)163) 을 시해(弑害)하고 순(詢)164) 을 세운 것을 논하기를, ‘그때는 잘못이라고 하였으나 후세에서는 잘했다고 하니, 지금으로 보면 형세는 달라도 일은 같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계책이 이제 이미 정하여졌다. 장차 우리가 임금으로 삼을 이는 누구일까?’ 하고, 인하여 영순군(永順君)을 들자, 강순이 말하기를, ‘영순군과 귀성군(龜城君)은 한 몸뿐이고 그 후사(後嗣)가 미소(微少)하다. 내가 일찍이 보성군(寶城君)과 더불어 국가의 일을 말하였는데 보성군이 탄식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그 아들 춘양군(春陽君)이 세 번 우리 집에 왔다가 갔으므로 이도 또한 마음에 없는 것이 아니니, 우리들의 계책으로는 이만한 것이 없다. 그 뒤에 우리들이 공을 이루고 물러가 쉬면 사람들 가운데 누가 옳지 못하다고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다른 날에 강순이 다시 말하기를, ‘성상께서 일찍이 여러 재상을 인견하고 산릉(山陵)의 길흉(吉凶)을 물었는데, 내가 천어(天語)165) 의 정녕(丁寧)함을 들으니 참으로 명철(明哲)한 임금이다. 어떤 간신이 있어 그 사이에 틈을 내겠는가? 우리 무리는 마땅히 마음을 달리하지 말고 힘써 도울 뿐이다.’ 하였습니다. 또 먼젓날 성상께서 풍양(豊壤)에 거둥하여 산릉 터를 보고 종친·재추들과 더불어 길흉을 논할 때에 강순이 신에게 눈짓하여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말하지 아니하던가? 너도 천어(天語)를 들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장차 또 말을 하려는 듯하더니 유자광이 뒤에 있는 것을 보고 마침내 다시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강순에게 물으니, 강순이 숨기므로, 곤장을 때렸더니 강순이 말하기를,
"신이 어려서부터 곤장을 맞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남이의 말과 같습니다."
하였다. 취초(取招)하도록 명하니, 강순이 붓을 당겨 즉시 이름을 쓰지 아니하고 남이를 돌아보며 꾸짖기를,
"내가 어찌 너와 더불어 모의하였느냐?"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말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는가? 나와 같이 죽는 것이 옳다. 또 영공은 이미 정승이 되었고 나이도 늙었으니 죽어도 후회가 없을 것이나, 나 같은 것은 나이가 겨우 스물 여섯인데 진실로 애석하다." 하고, 한탄하기를, "영웅의 재주를 잘못 썼구나!"
하였다. 강순이 곧 복초(服招)하였고, 또 당여(黨與)를 물으니 강순이 없다고 말하였다. 장신(杖訊)하기를 명하자 강순이 말하기를,
"신이 어찌 매질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좌우의 신하를 다 들어서 당여라고 하여도 믿겠습니까?"
하므로, 남이에게 강순의 당여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강순이 일찍이 말하기를, ‘홍윤성(洪允成)은 기개(氣槪)가 활달하여 더불어 일을 의논할 만한 자라.’ 하고는 말을 하려고 하다가 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강순이 또 말하기를, ‘본향(本鄕) 보령(保寧)의 군사 가운데 당번(當番)으로 서울에 있는 자가 1백여 인(人)인데, 만약 때에 임하여 말하면 반드시 따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남이에게 난을 일으킬 계획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창덕궁·수강궁 두 궁은 얕아서 겉으로 드러나 거사(擧事)할 때에 바깥 사람이 알기가 쉽기 때문에 산릉에 나아갈 때에 사람을 시켜 두 궁을 불지르게 하고 성상이 경복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12월 사이에 신이 강순과 더불어 일시에 입직(入直)하기를 약속하여, 신은 입직하는 겸사복(兼司僕)을 거느리고, 강순은 입직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거사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당여를 물으니, 남이가 민서(閔敍)·변영수(卞永壽)·변자의(卞自義)·문효량(文孝良)·고복로(高福老)·오치권(吳致權)·박자하(朴自河)·조경치(曹敬治) 등을 하나하나 들어서 헤아리고, 모의에 참여시키려고 하다가 미처 말하지 못한 자가 20여 인이라고 하였다. 조경치를 나치(拿致)하도록 명하여 곤장 30여 대를 내려 고신(栲訊)하여도 불복하였다. 다시 남이에게 물으니, 남이가 말하기를,
"신이 만약 말을 하고 조경치가 다만 ‘저 말이 옳다.’고 하면 믿을 것이 못되고, 조경치가 스스로 말하여 신의 말과 같은 뒤에야 믿을 수가 있습니다."
하므로, 다시 조경치를 매질하니, 그 말하는 바가 과연 남이의 말과 같았다. 남이가 말하기를,
"주상께서 성명(聖明)하신데 신이 복(福)이 적어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또 신과 강순은 모두 일등 공신(一等功臣)이니, 원컨대 원방(遠方)에 유배(流配)하든지 아니면 죽음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이와 같을 것을 알지 못하고 모반(謀反)하였느냐?"
하고, 곧 백관을 모으도록 명하여, 강순·남이·조경치·변영수·변자의·문효량·고복로·오치권·박자하를 저자에서 환열(轘裂) 하고 7일 동안 효수(梟首)하게 하였다.[7]
-조선왕조실록 예종즉위년 (1468년) 10월 27일
"남이의 어미는 국상 성복(成服) 전에 고기를 먹었고 그 아들이 대역(大逆)을 범하였으며, 또 천지간(天地間)에 용납할 수 없는 죄가 있으니, 청컨대 극형에 처하소서."
하니, 명하여 저자에서 환열(轘裂)하게 하고, 3일 동안 효수(梟首)하게 하였으니, 남이가 증() 한 때문이다.
- 조선왕조실록 예종즉위년 (1468년) 10월 28일

남이의 모친은 남이와 근친상간 혐의가 씌워져서 처형당했는데 조선시대 당시에는 이처럼 역적이나 그에 준하는 미움을 받았던 인물들에게 강상을 범하는 혐의를 씌워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전례가 몇몇 보인다. 연산군과 그의 큰어머니 승평대부인 박씨[8]도 그렇고 만고의 매국노 이완용과 그의 큰며느리 임건구를 불륜으로 엮어 장남이 자살했다는 < 매천야록>[9]의 기록 등이 그렇다. 승평대부인 박씨는 1등 정공신 박중선의 딸이며 월산대군의 처로서 높은 신분이었지만 불심이 강해서 남편의 요절을 짓는 등 당시 유생들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히는 바람에 50 가까운 나이에 조카와 함께 가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됐고 이완용의 장남 이승구는 병약해 미국 유학을 다녀오고 몇 년 안돼 자연사한 게 팩트다. 강상의 법도를 주장하며 고결함을 뽐냈던 유생들에게도 불륜이란 소재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이었던 모양이다.

4. 남이의 옥 이후

"강순(康純)과 남이(南怡)가 죽은 지 3백 년이 넘도록 이름이 죄인의 명부에 남아 있고 자손들이 쇠잔하고 또 오래되도록 아직까지 신설(伸雪)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강순과 남이는 모두 유자광(柳子光)의 무고로 인하여 죄도 없이 화를 당하였습니다. 더욱이 남이는 효용(驍勇)이 여느 사람보다 뛰어나서 여러 번 기공(奇功)을 세웠으나 유자광이 심히 시기를 하고 시어(詩語)로 죄를 꾸며 법망에 끌어 넣어 죽였는데, 야사(野史)에 그 사실이 대부분 기재되어 있습니다. 전에 선조 때에 연신(筵臣)이 그의 억울함을 말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이런 일은 후일을 기다려서 적선(積善)하는 호사(好事)로 삼으면 매우 좋겠다.’ 하였습니다. 성명(聖明)께서 임금의 자리에 계시면 억울한 자로서 신설(伸雪)되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아직까지 못하고 있는 조처가 오늘을 기다린 것 같습니다. 청컨대 고 영의정인 강순과 병조 판서 남이에 대해 모두 그 억울함을 신설(伸雪)하고 그 관작을 회복시켜 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선왕조실록 순조18년 (1818년) 3월 10일

사후 350년인 순조 때(1818년) 방계 후손[10] 우의정 남공철의 상소로 자신이 끌어들여서 같이 죽도록 만들었던 강순과 함께 신원됐다.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9일 전인 융희 4년(1910년) 8월 20일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 남이는 충경공 남재의 손자 남휘의 손자(충경공 소간공파)이며 남공철은 충경공 남재의 장손 남지의 후손이다.(충경공 충간공파) [2] 이 혜성이 묘한게 혜성 6일 이후인 9월 7일에 예종이 즉위했고 9월 8일에 세조가 사망한다. [3] 남이를 잡으러 간 병사들이 집을 포위하고 불러내자 남이는 자기가 집에 없다고 속인 뒤 무장을 하고 담을 넘어 도주하였고, 추격하던 병사들이 머리카락을 붙잡자 칼까지 빼들려다가 결국 생포되었다. 이러한 체포 과정 또한 남이에게 불리한 정황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4] 1390년생으로 당시 78세, 무려 조선 건국 이전인 고려시대에 태어난 인물로 공양왕을 제외하고 봐도 태조부터 예종까지 8명의 시대에 살았다. 만약 그가 이 당시 딱 2년만 일찍 태어나 80세를 넘겼다면 조선 예법상 적어도 사형은 면했을 것이다. 80세가 넘어서도 사형당한 정인홍 같은 예외도 있지만. [5] 조선 후기 < 연려실기술>에서는 남이가 혜성을 보고 "묵은 것이 가고 새 것이 온다"고 한 혼잣말을 유자광이 일러바쳤다고 나온다. [6] 조선 후기에는 유자광에 의한 참소로 해석을 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남이의 북정가 중 '미평국'을 '미득국'으로 고쳐 유자광이 고변함으로써 예종의 분노를 샀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7]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선 민서도 효수되었다고 되어있지만 민서는 효수되지 않고 풀려났다. [8] 월산대군의 처이자 박원종의 누나 [9] 야사 모음집 [10] 남이, 남공철 모두 충경공 남재의 후손으로 손자 대에서 충간공, 직제학공, 소간공파로 나뉘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