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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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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정승
문정공(文正公)
송시열
宋時烈|Song Si-yeol
<nopad> 파일:국보 송시열 초상 문화재대관(국보).jpg
출생 1607년 12월 30일
(음력 선조 40년 11월 12일)
충청도 옥천군 이내면 구룡촌
(現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구룡리)
사망 1689년 7월 19일 (향년 81세)
(음력 숙종 15년 6월 3일)
전라도 태인현
(現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사사형
묘소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89-3
서명
파일:송시열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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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시호 문정(文正)
본관 은진 송씨 (恩津 宋氏)[1]
영보(英甫)
우암(尤庵)
아명 성뢰(聖賚)
별칭 송자(宋子)
학력 생원시 장원 ( 음력 1633년)
신장 190cm 이상[2]
붕당 서인
노론
부모 부친 - 송갑조(宋甲祚, 1573 ~ 1628)
모친 - 곽숙선(郭淑善)[3], ? ~ 1655)
부인 이응(李應)(1606 ~ 1677)[4]
자녀 3남 2녀
장남 - 송순(宋純)
차남 - 송회(宋懷)
3남 - 송석(宋惜)
장녀 - 안동 권씨 권유(權愈)의 처
차녀 - 파평 윤씨 윤단(尹摶)의 처[5]
양자 - 송기태(宋基泰, 1629 ~ 1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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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의 이조판서 임명장

1. 개요2. 생애3. 특징4. 사상5. 평가6. 붕당7. 여담8. 대중매체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바탕으로 삼고, 사업은 효종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 북벌론)을 주로 삼으라.
죽기 전 수제자인 권상하에게 남긴 말.
조선 후기의 정치가, 유학자, 저술가, 중신(重臣)이자 권신이다.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았던 서인의 영수이자 노론의 종사로서 인조부터 숙종까지 4대조를 섬긴 원로대신으로, 그의 후학들에게 공자, 주자에 버금간다며 송자(宋子)라 불렸다.

사후에도 노론이 세도 정치 직전까지 계속 집권하면서[7] 해동성인(海東聖人),[8] 송자(宋子)라고 높여졌다.[9] 율곡 이이, 김장생도 듣지 못한 칭호였다. 특히 훗날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양현전심록>이라 하여 주자의 일생과 송시열의 일생을 비교한 글을 쓰기도 했고 즉위 이후에는 내탕금과 국비를 지원하면서까지 <송자대전> 등의 문집과 저서들을 간행했다. 송시열을 빼놓고는 조선 후기의 정치와 사상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당대는 물론 이후의 조선 정치와 사상에도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조선왕조실록에 3천번 이상 언급되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상당히 엇갈리는 해석과 평가를 받는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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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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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상

큰 인물은 하늘이 낸다 하였다. 대성 공자를 하늘이 내리시었고
그 뒤를 이을 주자도 하늘이 내셨다는 것이요 주자의 학문을 송자가 이었으니
또한 송자가 아니면 주자의 도가 이 땅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 그렇다면 공부자와 주부자와 송부자의 도는 천지사이에 날과 씨와 같고
우주의 기둥과 대들보처럼 우뚝하니 이 세 어른 중에서 한분만 안 계셔도 아니 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홍수가 범람하여 산허리를 싸돌고 언덕에 오르는 급박하고 질서 없는 시대에 처했으니
어찌 분주히 노력하여 세 부자의 도학을 취하지 않겠는가?
<정조대왕(正祖大王)의 어제시(御製詩) 宋夫子[10]

경전에 대한 독자적이고 참신한 해석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성리학 원리주의자로서 철저하게 주자를 존숭하는 주자 중심의 학문을 추구하고 주자의 학문을 더 심화하는 것이 그와 그의 학파의 연구 경향이었다. 예를 들어 주희와 제자들의 문답을 모아 놓은 방대한 분량의 "주자어류"라는 어록집이 있는데 이를 강독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후학들에게 좀더 정리된 내용으로 전하기 위해 순서와 배열을 바꾸고 재편집한 "주자어류소분"이라는 책도 만들었다. 송시열 말년에 작업에 착수해서 후손들과 제자들까지 대대로 작업에 참여하여 결국 완성했다.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은 송시열이 주자어류를 교감하고 항목을 재분류하여 편집한 책이다. 주자어류는 사서오경(四書五經), 성리설, 역사, 정치, 문학 등에 관한 주자의 학설을 담고 있다.

그러다가 최근 현존하는 유일한 필사본이 송시열의 9대손인 독립운동가 송병선(宋秉璿) 선생의 문충사(文忠祠)에서 발견되었다. [11]

사단칠정을 이(理)라고 주장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런데 사단이 이에서 나왔긴 한데 이도 선악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래서 해석에 따라 이황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쪽도 있고 이이를 주자학의 정통에 세우려 하였다는 쪽도 있다.

원리주의적 성향의 학자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결과적으로는 정적이 많은 편이었는데 송시열은 주로 반격을 하는 패턴이었지 먼저 누구에게 시비를 건 적은 비교적 적었다. 송시열은 처음에는 남인 집안과 통혼을 할 정도로 남인에 대해서 원만하게 잘지냈으며 악감정이 전혀 없었으나 예송논쟁 당시 난데 없이 무방비 상태에서 선빵 극딜을 당한 이후로는 다른 성향을 보이게 되었다. 물론 송시열의 예송 논쟁의 주장은 논리적으로나 당시 유교적 관점으로서나 공격 당할 요소가 많았다는 점은 고려해야 할 것이다.

송시열을 보수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하는데 남송으로 쫓겨 내려갔지만 도통만은 지켰다는 주자의 상징성에 당시 오랑캐한테 얻어터졌던 조선을 은근히 동질화하는 정신승리. 성리학의 교조화 문제는 오랑캐라고 한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명분을 중시하는 것이 유학(주자학)이었기에 발생한 필연적 귀결이었다.

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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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붕당

소속 기간 비고


1607년 - 1680년 입문


1680년 - 1689년

7. 여담

8. 대중매체

이상하게도 조선사에 있어서의 존재감이 엄청나는데도 사극에서 다뤄진 적은 별로 없다. 숙종 시기 장희빈을 다루는 사극들이 많지만 다뤄진 적이 별로 없는건 마찬가지. 사실 송시열 초상에 드러나는 이미지와는 달리 왜소하고 깡마른 인상의 배우들이 연기한 것이 특징.

9. 관련 문서

10. 둘러보기

<colbgcolor=#c00d45> 조선 문묘 종사 동국 18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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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왕파 친일반민족행위자
고명대신: 김종서, 황보인 }}}}}}}}}


[1] 우암문정공파 시조. [2] 출처 윤여진 문화관광해설사가 송시열이 입었던 초구의 크기로 추정한 키. [3] 선산 곽씨(善山 郭氏) [4] 한산 이씨 이색의 후손. [5] 송시열의 차녀와 윤단 사이의 10대손이 윤석열이다. [6] 사촌 형인 송시형(宋時瑩)의 아들. [7] 홍국영 일파나 경주 김씨 김귀주 가문, 안동 김씨 김조순 가문, 풍양 조씨 조만영 가문도 모두 당색으로는 노론이었다. 다만 그때쯤 되면 다른 노론들마저 밟아버리고 족벌 체제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8] 조선 한정. 같은 유교 문화권이라 해도 타국에서는 성인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퇴계 이황의 경우는 중국의 사상가 량치차오에게서도 성인 대접을 받았다. [9] 비슷하게 퇴계 이황도 추종자들로부터 이자(李子) 또는 이부자(李夫子)라 불리기도 한다. [10] 국보 제239호인 송시열의 영정에 직접 정조대왕이 친필로 남긴 어제시다. 대로사(大老祠)의 비문 또한 정조대왕의 친필이다. 송시열을 송자(宋子)또는 송부자(宋夫子)라 하여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하고 송시열의 문집과 자료를 모아 송자대전을 간행하였다. [11] 주자어류소분의 어류소분 권수목록(卷數目錄)에 의하면, 전30책은 원본(原本/元本)의 두 종류로 구성되어 있는데, 부첨지가 원본에만 붙어있는 걸로 보아 원본은 우암과 직전제자들의 작품인 반면, “보본은 원계(遠溪)에서 완성된 것이라는 목록의 기록으로 보아 보본은 고종 22(1885)년 3월에 원계로 이사해서 살았던 송병선이 제자들과 함께 산실된 자료를 수집하여 필사하고 교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현존 필사본 주자어류소분은 우암과 직전제자들이 기초작업을 했던 17세기 후반부터 송병선과 제자들이 보완작업을 했던 20세기 말엽까지 우암학파의 주자어류 연구가 결집된 학문적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12] 사실 이퇴계의 예를 보아도 성인군자, 아니 유학자라면 감히 이러한 칭호(子, 스승 자)는 과분해서라도 스스로 나서서 사양했어야 시대정신에 맞다. [13] 이름 가지고 놀리는 게 뭐 그리 대수냐고 할 수 있겠지만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이름이란 함부로 마구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니 호니 관직이니 존칭이니 하면서 인칭 표현이 극도로 발달한 것도 이 때문이며 이름을 대놓고 부르는 경우는 집안 어른이 연소자도 아니고 아주 어린아이를 대할 때 정도가 고작이었다. 때문에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엄청난 모욕에 해당했다. 영조 초기에 노론들이 소론 영의정 이광좌를 두고 "광자"니 "광"이니 하면서 어린아이까지 찧고 까불었던 것이고 이게 영조의 격노를 샀던 것이다. [14] 영조는 숙종과 천한 무수리 최씨 사이에서 나온 얼자로 조선 시대 통념상 별볼일 없는 출신으로 왕이 되기 위하여서는 여러 사람들을 잡아야 했다.(노론들로서는 희빈 장씨의 소생인 경종이 왕이 되는 꼴을 보는 것은 죽기보다 더한 치욕으로 여겼기 때문에 영조를 지지한 것이지 영조의 능력과 성품에 감동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송시열은 이이에게서 학통을 이어받았다는 사계 김장생의 노년에 제자로 들어가서 아들인 신독재 김집에게까지 제자로서 배움을 받은 학문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학문이 조선 성리학의 가장 정통성이 있는 것인데 다른 이상한 논쟁을 받을 이유는 전혀 없다. 초년에 송시열은 비교적 포용력을 보였으나 자신의 학문적인 권위에 도전하려는 것에 점차 독선적으로 가게 되었다. [15] 김익훈은 송시열의 스승인 사계 김장생의 손자로 숙종의 1번째 장인인 김만기의 숙부였으며 김석주는 숙종의 외숙이였다. 김석주와 김익훈이 벌인 남인을 공격하기 위한 조작은 숙종의 의중이 들어간 일이였다.(처음 이 사건을 들었을 때에 송시열은 이것을 비판하였지만 이후 서인의 중진들이 와서 설명하자 이후 말을 바꾸었다. 이로 인하여서 소장파들에게서 송시열에 대한 권위가 추락했는데 송시열로서는 스승의 손자를 처벌하기에도 그렇고 경신대출척 때에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들을 실질적으로 몰아낸 김석주를 비판하는 것도 어려웠으며 이러한 조작의 배후 자체가 왕인 상태에서 비판을 해봤자 아무 소용없음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에 그가 왕과도 싸웠던 것을 생각하면 좀 그렇다.) [16] 정말로 역모를 저질렀을지는 알 수가 없다. 남인들과 소론 준론들이 영조를 왕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영조는 자신의 정통성을 확고하게 잡지 못하였다.(경종 시기 노론4대신이 처벌받았을 때와 경종 사망시에 돌던 독살설 등은 영조에게 있어서 큰 약점이였다. 무엇보다 노론4대신이 처벌받은 것은 그들의 주장이 지나쳤지만 영조가 세제로서 다음 후계가 되도록 하였는데 소론 완론을 포용한다고 그들을 무죄 방면하지 못하였다. 경종의 죄인인 영조는 왕이 아니라는 생각이 사라질 수가 없었다. 이에 결국 노론4대신에 대한 무죄 방면을 하면서 영조의 포용은 실패가 되고 말았다.) [17] 영조의 탕평은 노론, 소론, 남인이 아니라 자신이 중심이 되는 탕평파라는 세력을 만드는데에 있었다. 학문적 권위가 없이 부평초 같이 변신하는 어중이 떠중이들이 모여들면서 이해타산만 따지는 집단이였기에 다음 왕인 정조는 정반대가 되는 집단을 구성하고자 하였다. [18] 한명회, 윤원형, 박원종은 자신들이 모으기도 했지만,사실은 권세를 쫓아서 모여 든 것이고, 송시열과 허목은 학문적인 권위를 가지고 주변에 영향력을 끼쳤으며, 홍국영 흥선대원군은 대세를 장악한 적들에 대항하고자 세력을 모았다는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19] 송시열은 좌의정을 지냈으며 그의 인척인 송준길은 좌참찬을, 그의 애제자인 김수항은 영의정을 지냈고, 김수항의 형인 김수흥도 영의정을 지냈고 그의 또다른 제자인 민유중도 병조판서를 지냈다. 또 그의 형인 민정중도 좌의정을 지냈는데 역시 송시열의 제자였다. 또 숙종의 첫번째 장인인 김만기도 병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는데 역시 송시열의 제자였고 김만기의 동생인 김만중도 송시열의 제자로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다. 또 숙종 때 서인의 영수인 이상진도 우의정을 지냈는데 역시 송시열과 가깝게 지냈고 조복양도 예조판서를 하면서 송시열과 가깝게 지냈다. [20] <앉은굿 무경> 안상경 저, 민속원 P.145 참고 [21] 흥선대원군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내려오며 이 쪽은 상대가 진짜 이하응인걸 알고도 모른 척한 게 아니라 왕족의 체통을 지키라고 싸다귀를 날렸다고 하며 그 역시 나중에 대범하게 넘어갔다고 한다. 뒷날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이 그 사람을 다시 불러서 내가 또 그러면 또 뺨을 치겠냐고 하니까 왕족으로서 체면을 안 지킨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22] 원인은 평소에 건강 관리를 한답시고 민간요법으로 아이의 소변을 마시는 일이 잦았는데 그 때문에 체내에 노폐물이 쌓였던 것이라고 한다. [23] 비상이 항상 독한 것은 아니다. 흔히 사약의 재료로 알려져 있지만 독이 아니다. 양 조절에 실패하면 부작용이 큰 약재 중 하나일 뿐이며 체질에 따라서는 아무리 마셔도 안 죽는다. [24] 혹은 아들이 비상을 빼고 지어온 약을 먹었을 때는 낫는 듯 하다가 다시 병이 도졌는데 송시열의 아들이 허목에게 가서 사죄하고 다시 1번 처방을 받아와 그대로 만들어 먹이자 나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25] 이는 영조의 식습관과 같다. 송시열과 영조가 사망할 때 80대가 넘은 것(특히 송시열은 자연사한 게 아니라 사약을 먹어 죽었음에도 사망할 때의 나이가 영조와 비슷했다.)과 영조의 장수가 소식한 것으로 꼽히는걸 보면 송시열도 소식한 것이 장수에 도움이 된 듯. [26] 자 송기태(宋基泰), 손 송주석(宋疇錫), 증손 송유원(宋有源), 현손 송이상(宋理相), 5세손 송환실(宋煥實), 6세손 송직규(宋直圭), 7세손 송흠학(宋欽學), 8세손 송면수(宋勉洙), 9세손 송병선(宋秉璿), 10세손 송재철(宋在哲), 11세손 송재성(宋在晟), 12세손 송충호(宋忠鎬), 13세손 송영무(宋永武) 순으로 이어진다. [27] 다만, 임금도 아니고 유학자의, 그것도 본명 아닌 자/호를 피휘한 것은 유가에서 어떠한 근거도 없는 사사로운 행위이다. [28] 배우 키가 180이 넘고 덩치가 커서 이미지는 초상화랑 가장 닮았는데 자기보다 5살 위에다가 영의정이었던 정태화를 제치고 상석에 앉아서 서인을 좌지우지하는 송시열이 나온다. 심지어 정태화가 꺼낸 '관례 강조'도 송시열이 시킨걸로 나온다. [29] 사실 외모를 보면 주현이 가장 송시열에 어울리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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