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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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태종의 왕자
경녕군 | 敬寧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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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녕군묘 전경 | |||
출생 | 1395년 1월 15일[1][2] | ||
조선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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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58년 10월 15일[3] (향년 64세) | ||
조선
충청도 충주군 (現 충청북도 충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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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 ||
재위기간 | 조선 정윤 | ||
1414년 2월 3일 ~ 1414년 2월 18일 | |||
조선 원윤 | |||
1414년 2월 18일 ~ 1417년 10월 21일 | |||
조선 경녕군 | |||
1417년 10월 21일 ~ 1458년 10월 1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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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비(𰨅 示+非)[4] | ||
부모 |
부왕
태종 모친 효빈 김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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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부왕 기준 12남 17녀 중 4남 모친 기준 외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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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
자녀 | 10남 2녀 | ||
자 | 정숙(正淑) | ||
군호 |
정윤(正尹) → 원윤(元尹) → 경녕군(敬寧君) |
||
시호 | 제간공(齊簡公) | ||
품계 |
대광보국숭록대부 (大匡輔國崇祿大夫) |
[clearfix]
1. 생애
조선 전기의 왕족. 태종 이방원과 효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서장자이다.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까지 5대에 걸쳐 국정에 충성하며 협조하였다. 1417년(태종 17년)에 정 2품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으며, 세종 원년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서 영락제로부터 황금, 백금, 말, 비단, 양 등의 많은 답례품을 받아왔으며, 1425년(세종 7년)에 종 1품 숭록대부에, 1430년(세종 12년)에 정 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에 봉해졌다.
세조가 즉위한 뒤에는 충주로 이거하여 여생을 보내다, 어머니 효빈 김씨가 죽고 4년 만인 1458년에 생을 마쳤다. 묘역은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에 있으며 묘역 앞에는 위패를 모신 사당 명덕사가 있고 전주 이씨 경녕군파의 파시조이다.
2. 가족관계
- 정부인 : 청원부부인 청풍 김씨(淸原府夫人 淸風 金氏) - 참의(參議) 증찬성(贈 贊成) 김관(金灌)의 딸
- 적장남 : 고양군 이질(高陽君 李秩, ? ~ 1449)
- 며느리 : 미상
- 적차남 : 은천군 이찬(銀川君 李穳, 1421 ~ 1481)
- 며느리 : 현부인 운봉 박씨(縣夫人 雲峰 朴氏) - 절도사(節度使) 증 찬성(贈 贊成) 박종지(朴從智)의 딸
- 며느리 : 숙부인(淑夫人) 충주최씨(忠州崔氏)
- 서손자 : 기산부수 이저(起算副守 李櫧)
- 서손자 : 장산부수 이주(璋山副守 李椆)
- 서손자 : 계성부수 이방(桂城副守 李枋)
- 적3남 : 오성군 이치(梧城君 李禾+致)
- 며느리 : 현부인 초계 정씨(縣夫人 八溪 鄭氏)
- 손자 : 풍성군 이강(豊城君 李江)
- 손녀 : 감역(監役) 신치(申錙)의 처
- 적4남 : 영선도정 이리(永善都正 李利)
- 며느리 : 무송 윤씨(茂松 尹氏) - 부사(府使) 윤경원(尹景源)의 딸
- 1계부인 : 군부인 개성부 마씨(郡夫人 開城府 馬氏)
- 적5남 : 모양군 이직(牟陽君 李稷, 1438 ~ 1511)
- 며느리 : 현부인 평산 신씨(縣夫人 平山 申氏)
- 손자 : 연풍부수 이장손(延豊副守 李長孫)
- 손자 : 청산부수 이말손(淸山副守 李未孫)
- 손녀 : 군수(郡守) 증 참판(贈 參判) 조계하(曺繼夏)의 처
- 손녀 : 사간(司諫) 윤경(尹耕)의 처
- 며느리 : 현부인 곡산 강씨(縣夫人 谷山 康氏)
- 손자 : 선사군 이승손(仙槎君 李承孫, 1474 ~ ?)
- 손자 : 서흥군 이게손(瑞興郡 李季孫, 1494 ~ ?)
- 2계부인 : 군부인 전주 최씨(郡夫人 全州 崔氏)
- 적6남 : 단산도정 이수(丹山都正 李穗, 1444 ~ ?)
- 며느리 : 신부인 양천 허씨(愼夫人 陽川 許氏) - 건공장군(建功將軍) 허아(許雅)의 딸
- 손자 : 은산도정 이권(恩山都正 李權, 1457 ~ ?)
- 손자 : 소래정 이환(蘇萊正 李桓, 1470 ~ ?)
- 손자 : 안성부수 이벌(安城副守 李橃, 1480 ~ ?)
- 손자 : 용궁부수 이제(龍宮副守 李梯)
- 손녀 : 김봉선(金奉先)의 처
- 손녀 : 정랑(正郞) 구수복(具壽福)의 처(1491 ~ ?)
- 첩부인 : 미상 - 노비 출신
- 서장자 : 월성수 이거(月城守 李秬)
- 며느리 : 이천 서씨(利川 徐氏) - 직장(直長) 서우(徐遇)의 딸
- 손녀 : 최순(崔侚)의 처
- 손녀 : 현감(縣監) 정수인(丁守仁)[6]의 처
- 서차남 : 가흥수 이적(嘉興守 李積)
- 며느리 : 영산 신씨(靈山 辛氏) - 군수(郡守) 신신(辛信)의 딸
- 서3남 : 복성군 이진[7](福城君 李稹, 1435 ~ 1487)
- 며느리 : 신부인 이천 서씨(愼夫人 利川 徐氏) - 직장(直長) 서우(徐遇)의 딸
- 손자 : 송양부수 이은산(松陽副守 李銀山)
- 손자 : 안양부수 이옥산(安養副守 李玉山)
- 손자 : 금릉군 이금산(金陵君 李錦山)
- 서4남 : 가림군 이추(嘉林君 李秋, 1441 ~ ?)
- 며느리 : 미상
- 손자 : 하회정 이정(河迴正 李禎)
- 손자 : 낙소부수 이현손(樂素副守 李玄孫)
- 손자 : 공산군 이우(公山君 李祐)
- 서장녀 : 참봉(參奉) 정석균(鄭石均)의 처
- 외손자 : 주부(主簿) 정종영(鄭宗英)
- 서차녀 : 현감(縣監) 송계흥(宋繼興)의 처
- 외손녀 : 정세준(鄭世俊)의 처
며느리(첩) : 미상 - 양민 출신
2.1. 후손
경녕군의 후손으로 유명한 이로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지봉유설의 저자인 이수광이 있으며, 현대의 인물로는 정치인 이노근, 연예인 이미자가 있다.3. 창작물에서
각종 격변이 일어난 조선 전기의 왕족인데다 그 어머니인 효빈 김씨는 드라마틱한 과정을 거쳐 태종의 후궁으로 들어온 인물이라서 이름 자체는 종종 언급되지만, 중대한 사건을 주도했다거나 하는 등 큼직한 활약을 한 적은 없어서 비중은 거의 없는 편이다.-
용의 눈물
역사적 인물이니까 일단 출연은 시킨다는 수준인데, 어린 아기 때의 모습으로 나오며 대사는 없다. 이방원의 잠저 시절, 어머니 효빈 김씨와 함께 본처의 노여움을 사 몇번이고 죽을 위기를 겪는다.[8] 그 후 김씨와 민씨의 사이가 풀어지고 인정받게 될 무렵 민씨의 친정에 맡겨져 이복형제들과 교육을 받게 된다.[9] 태종이 처남 민무휼과 민무회를 제거할 때 어느 정도 성장한 모습으로 잠시 등장하는데, 이 때도 대사가 없으며 어딘가로 걸어가는 장면이 전부. 이 작품에서 특정인이 어디론가 걸어가는 장면은 주로 그 사람이 죽은 뒤 내레이션으로 평가를 하는 장면 또는 새로 등장하는 인물을 보여주는 장면 정도이기 때문에 엑스트라로 보아도 좋다. 경녕군 본인은 물론이고 효빈 김씨도 한양 천도 이후 사실상 극에서 퇴장했기 때문에 '하도 오래 된 이야기지만 사실 이런 인물이 있었습니다'라고 보여주는 정도.
-
대왕 세종 -
윤영준
비중있게 등장한 사례. 여기에선 효빈 김씨가 경녕군이 서장자라는 위치와 자신이 태종의 총애를 받는다는 점[10]을 이용, 세자인 양녕대군을 꺾고 자신의 아들 경녕군을 세자 자리로 올리려 한다. 경녕군 본인도 야심이 있었고 세자가 온갖 사고를 저질러 일말의 희망이 보였으나 충녕대군이 급부상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포기한다. 다만 서출이란 태생과 충녕대군의 그릇에 미치지 못한 것일 뿐, 정치적 안목 등 능력은 어느 정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북방에 중앙군을 보내려는 세자가 여진족과 일부러 충돌하여 기어이 전쟁을 벌이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마침 충녕대군을 위문한다는 명목으로 북방에 다녀왔던 경녕군은 아예 충녕대군의 역모가 의심된다고 태종에게 일부러 모함하여 경성에 조사관을 파견하게 만든다. 처음에 이를 오해한 윤회와 심온 등이 경녕군을 찾아가 항의하려다가 '역모가 의심된다고 할 정도의 핑계가 아니면 조사관을 파견할 이유가 없지요.'라는 해명을 듣고 감탄할 정도. 사족으로 충녕대군(세종)은 1397년생, 경녕군은 1402년생으로 세종이 5년 먼저 태어났지만 어찌된 일인지 극중에서는 충녕대군이 경녕군을 형님이라고 부른다. 경녕군의 생몰기간에 이에 대한 내용을 참조.[11]
세종조에는 중립적인 위치에서 때로는 세종을 지원하다가도 그의 정적인 조말생과 접촉하는 등의 활동을 펼치며 정치적 야망 자체는 남아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하지만 태종 때는 아들을 세자로 만들려고 절치부심하던 어머니 효빈이 이제 더이상 옥좌에 뜻을 두지 말라고 설득[12]한 이후 66회에서 조말생이 세종 앞에 잡혀 들어올 때 '허수아비 노릇 더 이상 하기 싫다'라면서 선을 그어 버린다. 이후 효령대군의 조언을 듣고 왕실 종친으로써의 모습에 충실하기로 한다.
-
태종 이방원
여기서는 직접 출연은 없으나 대왕 세종때의 세종보다 일찍 태어났다는 설 보다 1402년 생 설을 채택 한 것으로 나온다. 원경왕후가 왕비로 책봉되기 이전 사저에서 대기 하던 중에 송씨 부인이 좋아하는 요리를 해줄 아이라고 사가에서 데려간 사노비 중 하나였다. 이후 아버지인 태종과 원경왕후의 기싸움 중인 상황에서 원경왕후와의 잠자리를 거부하고 궁녀들을 잠자리에 들였는데 그 중 이 궁녀가 포함 되었고 승은을 입은 궁녀였지만 사노비 출신이라 사가로 내쫓겨 송씨 부인에게 핍박을 받다가 다시 입궁되는 형식으로 묘사되었다.[13][14] 김씨가 갇혀있다가 혼자 출산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태종은 당연히 분노하고, 마찬가지로 뒤늦게 안 원경왕후와 민제도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결국 태종은 처가에 방문하기로 했던 예정을 취소한 뒤 하륜에게 민씨 가문은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으니 숙청해야한다는 뜻을 밝힌다. 분량은 많지 않으나 모자가 받은 핍박이 외척 숙청을 고민하던 태종에게 확고한 결심을 제공해줬고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어머니가 단독으로 벌인 일이었지만 민무휼과 민무회도 동참 한것으로 포장되어 민씨 일가 네 형제 모두 사사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1]
음력
태조 3년
12월 13일
[2]
경녕군은 아버지인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낳은 아들임.형제들 출생년도는 원경왕후의 첫째 아들인 양녕대군이 1394년, 효빈김씨의 아들 경녕군이 1395년, 원경왕후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이 1396년으로 출생함. 조선왕조실록에 임오년으로 잘못 오기되어 1403년생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이는 잘못된 오기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3]
음력
세조 4년
9월 9일
[4]
태종의 아들들은 모두 보일 시(示) 부수를 돌림 이름으로 쓰는 외자 이름이기에 경녕군의 이름도 부수가 의(衣)의 변형인 衤가 아니라 礻다. 그러나 이 글씨는
유니코드 U+30A05로 글씨가 안 뜬다.
[5]
#
[6]
창원 정씨
[7]
또는 이영(李穎)
[8]
민씨의 노여움이 누그러지기 전까진 못 해도 3번은 죽을 뻔했다. 처음엔 낙태를 강요했고, 김씨의 저항으로 낙태가 무산되자 여종을 시켜 만삭인 김씨의 식사에 독을 탔다. 그럼에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자 감기에 걸린 경녕군의 열을 식혀주겠다며(...) 추운 겨울 바깥에 버려두듯 방치하도록 했다. 마지막의 경우 타이밍 좋게 이방원이 나타나 목숨을 건졌지만, 이 일은 훗날 민씨의 남동생들을 숙청할 구실 중 하나가 된다.
[9]
이때 김씨는 물론 김씨를 모시던 하인인 금녀 또한 달갑지않게 받아들이는데, 그도 그럴게 아이에 대한 모정도 모정이지만, 보내는 곳이 하필 민씨의 친정인지라 아이를 적진에 홀로 보내는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 김씨 역시 이 점을 인지하고 있어 민씨가 보낸 여종에게서 아이를 민씨의 친정으로 보낸다는 말을 듣고 아이한테 무슨 짓을 할지 알고 보내냐며 극렬히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10]
활 솜씨가 뛰어나 태종이 사가 시절부터 아끼던 활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태종의 의도는 충녕대군에게 거문고를 준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에 뜻을 두지 말고 활이나 쏘면서 세월을 보내라는 것.
[11]
다만
대왕세종이 방영할 때만 하더라고 경녕군의 출생년도가 1395년이라고 알려진게 정설로 받아들여졌던 시기라 극 중에서 이복형으로 설정되었던 듯 하다.
[12]
집안이 풍비박산나버린 원경왕후의 불우한 말년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
[13]
원경왕후는 비오는 날 밖에 서 있게 하며 화풀이를 했고, 어머니와 아우들은 김씨를 아예 가둬두었으나 김씨가 혼자서 어떻게든 경녕군을 출산했다.
[14]
정확히 설명하자면 이 드라마에서 원경왕후는 권력욕은 강했지만 그리 매몰찬 사람은 아니었다. 비오는날 원경왕후가 내쫓은 것이 아니라 김씨가 상황을 설명했으나 원경왕후는 태종 + 김씨에 대한 배신감으로 냉정하게 그냥 아무말없이 떠나버렸고, 어찌할줄 몰랐던 김씨는 아예 움직이지도 않고 그 자리에 서있었는데, 비가 내림에 따라 비를 맞게된 것이다. 실제로 이 드라마 내에서 원경왕후는 김씨에 딱히 해코지 한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