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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평대군


조선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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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 태조 조준, 의안대군, 이지란,
조인옥, 남재, 이제, 남은
정종 익안대군
태종 하륜, 조영무, 정탁, 이천우, 이래
세종 황희, 최윤덕, 허조, 신개,
이수, 양녕대군, 효령대군
문종 하연
세조 권람, 한확, 한명회
예종 박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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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박원종, 성희안, 류순정, 정광필
인종 홍언필, 김안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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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이원익, 신흠, 김류, 이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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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김상헌, ■김집, ■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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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이유, 민진후
영조 김창집, 최규서, 민진원, 조문명, 김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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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조 남공철, 김로, 조병구
헌종 이상황, 조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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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송근수, 이완용, 서정순
: 문묘 종사 동국 18현을 겸하는 6인(동무종향)
: 문묘 종사 동국 18현을 겸하는 6인(서무종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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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궁 제2대 궁주
<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인조의 왕자
인평대군 | 麟坪大君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D%8C%8C%EC%9D%BC-%E6%9D%8E%E3%B4%AD%E5%A2%93.jpg.jpg
인평대군묘 전경
출생 1623년 1월 10일
한성부 경행방 향교동 어의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부근)[1]
사망 1658년 6월 13일 (향년 35세)
묘소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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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요(㴭)
부모 부왕 인조
모후 인열왕후
형제자매 6남 1녀 중 3남
배우자 복천부부인 동복 오씨
(福川府夫人 同福 吳氏)
자녀
슬하 6남 4녀(+1명) [ 펼치기 · 접기 ]
장남 - 복녕군 이욱(福寧君 李栯)
차남 - 요절
3남 - 복창군 이정(福昌君 李楨)
4남 - 요절
5남 - 복선군 이남(福善君 李柟)
6남 - 복평군 이연(福平君 李㮒)
장녀 - 이금온(李金溫)
차녀 - 정중만(鄭重萬)의 처
3녀 - 요절
4녀 - 요절
11번째 - (복중 사망)
용함(用涵)
송계(松溪)
군호 인평대군(麟坪大君)[2]
시호 충민공(忠敏公)
→ 충경공(忠敬公)
}}}}}}}}} ||
파일:14474391555651.jpg
인평대군의 유묵.
1. 개요2. 생애3. 사망4. 가옥5. 영정6. 여담7. 예술적 기질8. 가족 관계9. 인평대군이 등장한 작품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왕족이자 예술인. 조선 16대 임금 인조 인열왕후 한씨의 셋째 아들이자 소현세자, 효종의 동복 동생이며 용성대군의 동복 형이다.

또한 인조의 막내 남동생이자 원종(정원군)의 막내아들인 능창대군 양자이다. 따라서 후술할 그의 친후손 남연군 이구와 그의 자손들 호적에 남연군이 은신군에게 입적 되기 전 뿌리가 인조의 후손이 아닌 능창대군의 후손으로 적혔다.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대군이다. 동생 용성대군이 6살에 죽었고[3], 이후 조선에서는 대군이 없었기 때문.[4]

2. 생애

한성부 경행방 잠궁에서 선조의 5남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綾陽君)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3개월 뒤 아버지가 인조반정을 일으켜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자가 되었고, 1630년 2월 7일[5]에 인평대군(麟坪大君)으로 책봉받았다. 이후 고산 윤선도를 스승으로 두어 효경과 소학 등을 배웠다.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 인조를 모시고 수행한 공로로 원종 공신 1등에 올랐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 형 봉림대군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간다. 당시 두 형제가 겪었던 일들은 그 들을 수행한 문신 어한명이 쓴 《 강도일기(江都日記)》에 자세히 적혀 있다. 그리고 삼전도의 굴욕 이후, 두 형인 소현세자,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그나마 다행히도 7년을 만주에서 고생한 형들과 달리 심양에 끌려간 지 1년만인 1638년에 돌아왔고 1646년에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6] 1등으로 책봉받았다.

동복형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후 165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事恩士)로 청나라를 방문했다. 그러나 엄연히 조선의 왕자(대군)이자 사신이었지만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노숙을 밥 먹듯 하며 상당한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진하사(進賀士), 동지사(動指士)까지 합쳐서 총 13번, 매년 1~2회 꼴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자그만치 13번이나 청나라와 조선을 오고 가는 것도 고역인데, 청나라에서 오는 사신들을 접대하는 막중한 책무도 덤으로 도맡았다. 이렇다보니 인평대군은 청나라의 사신으로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었고 이로 인해 몸까지 쇠약해졌다.
청나라는 순치 연간에 남명과 싸우면서 조선에게 굉장히 히스테릭하게 굴어서, 당시 조선은 거의 청나라의 빵셔틀 신세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효종도 청나라에 잘 보여야 하니 정기 및 비정기 사행을 모조리 형제한테 맡기려 했는데, 하필 청나라와 구면인 유일한 형제가 인평대군이었으니 그가 사신으로 간 것이다. 이로 인해 인평대군은 청나라가 효종과 조선에게 자행하는 온갖 갑질과 모욕을 황제와, 만주 대신들 앞에서 굽신거리며 견뎌내야 했으니 몸과 마음이 성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세간에서는 인평대군은 맨날 청나라에 접대받으러 간다(!)고 쑥덕거리기만 했다. 이렇게 사신을 보낼 때마다 등판하는 인평대군이 안쓰러웠던 송시열이 보다못해 효종에게 " 선왕께서 동생 잘 챙기라 신신당부를 하셨는데 형이 되어가지고 어찌 그리도 뻑하면 호랑이굴에 보내면서 쉴 새 없이 혹사를 시키십니까"라며 상소를 올렸을 정도. (《효종실록》 기사)

그래도 효종의 유일한 친동생(한배에서 나온 동복동생)으로 효종 재위시절 내내 상당한 대우를 받으며 지냈다.[7] 인평대군이 서인들로부터 몇 차례 모함을 받았을 때도 효종이 감싸주어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청탁을 했다던지, 접대를 했다던지. 그리고 인평대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에는 마치 자식처럼 아주 반기며 맛있는 음식도 주고 희귀한 물건을 두고 승부를 벌이기도 하였다.

3. 사망

1658년(효종 9년) 6월 13일(음력 5월 13일) 인평대군의 병세가 위독하자 효종이 직접 집을 찾아갔으나 임종을 보기 전에 죽었다. 효종은 동생의 죽음을 너무나 크게 슬퍼하여 한동안 인평대군의 집을 떠나지 않아 신하들의 반대로 마지못해 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제사를 직접 돌았다.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에 있으며 후일 종묘에 있는 효종의 묘정에 공신으로 배향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D%8C%8C%EC%9D%BC-%E6%9D%8E%E3%B4%AD%E5%A2%93.jpg.jpg 파일:인평대군 묘.jpg
인평대군의 묘 인평대군 치제문비
묘 자리는 원래 선조의 첫 왕비 의인왕후 박씨의 능 자리로 고른 곳이었다. 그러나 능 조성이 다 끝나갈 무렵, 능참봉 출신인 박자우 등이 그 자리는 '흉지'라는 상소를 올리고 찜찜해 하던 선조는 이곳을 포기하고 다른 곳을 찾게하여 현재 건원릉 내 목릉(穆陵)에 자리를 정했다. #

경기도에서는 1992년에 그의 묘를 경기도 기념물 제130호로 지정했다. 2016년 2월 11일 오후 2시 30분께 그의 묘가 있던 야산에 화재가 나 묘가 불타는 사고가 있었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그나마 다행히 옆에 있던 인평대군 치제문비(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75호)로 화재가 확산하는 것은 막았다고. 당시 기사.

4. 가옥

파일:ewgefdgfdg.jpg
<colbgcolor=#94153E> 17세기에 인평대군의 집을 그린 《인평대군방전도》
그가 살았던 집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이화마을, 낙산 이화장 근처에 있었다. 근처에 살던 문인들의 모임인 '낙동계'에도 참여하였다. 함께 참여한 이일상을 정조부사로 데리고 1654년 청에 다녀오기도 했다.

중종 대에는 신숙주의 손자 신광한의 집이 있던 곳으로 신광한은 이 곳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신대명승(申臺名勝)'이라 불렀고 이 때문에 '신대동' 또는 '신대골'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이 저택은 저녁볕을 잘 받는 위치에 있어서 '석양루(夕陽樓)'로도 불렸다.

후일 고종 대인 1865년 왕실에서 사용하는 을 제작, 보관하는 장생전(長生殿)이 되었다. 뒷날 이 일대에 이화장이 들어선 이후 이승만이 이 곳에서 내각을 구성할 당시에도 건물의 일부가 그 앞에 남아 있었다.

5. 영정

인평대군의 영정이 있었으며 일제강점기까지 그의 종가에서 영정을 보관했다.

그런데 후술할 인평대군의 8대 종손이자 조선귀족이었던 이재극이 1923년에 잃어버렸다. 그해 12월 2일 자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이재극은 평소에 인평대군 영정 두 폭을 자신의 집 한 켠에 걸어두고 문을 잠가 보관했다. 인평대군의 기일에만 문을 열어 한 번씩 봤는데, 1923년 기일에 열어보니 영정이 감쪽같이 사라졌던 것. 이에 이재극 일가 사람들이 어찌된 건지 철저히 조사했는데 누가 훔쳐갔다고 하기에는 그런 흔적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재극은 경찰에 사건을 의뢰하려 했으나, 조상님의 영정을 잃어버렸다는 소문이 돌면 집안 망신이 된다는 이유로(...) 몇 달 간 계속 속앓이만 하다가 동대문경찰서에서 이를 탐지하여 조사에 들어갔다. 혹시라도 오늘날까지 전해진다면 정원군 시절의 모습이 전해지는 원종과 더불어 인조, 소현세자 효종의 얼굴을 추측할 수 있는 귀한 사료가 될 것이나 이후의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6. 여담

7. 예술적 기질

파일:14474391555651.jpg
인평대군의 유묵.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소장.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평대군(安平大君)과 헷갈리는 경우가 있다. 봉호도 비슷한 데다[10] 같은 적3남이었으니. 사망한 나이도 비슷하다. 단, 최후는 다르다. 안평대군은 세조에게 사사당했으나 인평대군은 병사다.

하지만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점도 닮았으니 바로 예술적 기질이다. 안평대군이야 워낙 유명하지만, 인평대군도 그에 못지 않았다. 시, 서, 화 모두에 실력이 있었고 제자백가[11]에도 정통했다.
파일:IE002066532_STD.jpg
<colbgcolor=#94153E> 구천은폭. 폭포의 중허리를 가로질러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보허각(步虛閣)을 지었으며 다리 한쪽에는 영휴당(永休堂)을 세워
자신의 별서로 삼았다.
또한 북한산 조계동(漕溪洞)에 별서(別墅)를 마련했다. 별서는 별장 비슷한 개념인데 별서는 농사도 겸할 수 있다는 게 별장과의 차이이다. 인평대군은 그 일대의 구천은폭(九天銀瀑) 등을 자신만의 문화공간으로 만들어 그 곳에서 풍류를 누리며 많은 예술 작품들을 남겼다.
파일:꾸미기_1.jpg
<colbgcolor=#94153E> 인평대군이 그린 《일편어주도》.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하지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그의 미술 작품은 매우 드물다. 그 중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일편어주도(一片漁舟圖)》, 전 국립박물관 홍성하 소장이 소유하고 있는 《노승하관도(老僧遐觀圖》, 정무묵 소장의 《고백도(古栢圖)》 등이 알려져 있다. 《고백도》는 섬세하고 꼼꼼한 필치로 다루어져 있어 맹영광(孟永光)의 공필법(工筆法)과 상통하는 바 크다. 공필법이란 남종화(수묵화)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북종화 계열에 속하는 화법이다. 외면적 형사에 중점을 두어 그린 기교적이고 장식적인 그림을 지칭한다. 쉽게 말해 아주 세밀하고 정교하게 그리기. 맹영광은 1645년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에 왔다가 3년 뒤에 돌아갔는데 이 기간동안 인평대군과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인평대군이 그의 화법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보이는 대목이다. 그리고 《산수》란 그림을 보면 다소 거칠고 호방한 필치를 느낄 수 있는데 이런 화풍을 절파풍(浙派風)이라 한다. 이 역시 중국의 화풍인데 명나라 시절부터 중국에서는 화원이나 직업 화가들이 그렸지만 조선에서는 사인 화가나 신분 상관없이 쓰던 화법이었다. 조선의 풍토를 비추어 볼 때 일반 양반을 넘어 왕족인 인평대군이 절파풍의 화법으로 그림을 그린 것은 컬쳐쇼크에 준하는 일이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인평대군이 당대 퍼졌던 다양한 화법을 자유자재로 작품에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미술 작품 이외에 글도 잘 지었다. 《송계집(松溪集)》 · 《연행록(燕行錄)》 · 《산행록(山行錄)》의 저서를 남겼으며 이 중 2013년 5월 《송계집》의 초고본인 《송계기고(松溪紀稿)》가 발굴 공개되었다. #

그가 지은 시조 3수가 《청구영언(靑丘永言)》 《해동가요(海東歌謠)》에 각각 한 수씩 전하는데 아래에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시조 2수를 소개한다.
바람에 휘었노라 굽은 솔 웃지 마라.
춘풍에 피온 꽃이 매양(每樣)에 고왔으랴.
풍표표(風飄飄) 설분분(雪紛紛)할 제
네야 나를 불으리라.

(현대어 풀이) :
바람이 몰아치기에 할 수 없이 휘었지만, 굽은 소나무야 웃지 말아라!
봄 바람에 피어난 꽃이 언제든지 고왔을 것이랴,
모진 바람 불어치고 눈이 흩날리면
나를, 너만은 부러워 할 것이다.
《바람에 휘었노라》(평시조, 서정시, 단시조다.)
소원(小園) 백화총(白花蔥)에 나니는 나비들아.
향내를 좋이 여겨 가지마다 앉지 마라.
석양에 숨궂은 거미는 그물 걸고 엿는다.

(현대어 풀이) :
작은 동산에 핀 많은 꽃떨기에 나는 나비들아 /
향내를 좋이 여겨서 가지마다 앉지 말아라 /
해질 무렵 음흉(淫凶)한 거미는 그물을 매어놓고 엿보고 있다.[12]
《소원 백화총에》
또한 한시(漢詩)에도 능했다. 대표작으로는 《봉화낙선재구호》 등이 있다. '형 효종의 시에 낙선재에서 즉석에서 답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낙선재(樂善齋)는 지금 창덕궁에 있는 건물이 아닌 창덕궁 돈화문 바깥 동쪽에 있던 집으로 효종의 잠저이다.
一天霜雁送寒聲(일천상안송한성)
서리가 가득하여 기러기 소리 싸늘한 하늘에

河漢迢迢夜氣晶(하한초초야기정)
까마득한 은하수 아래 밤기운은 수정같다.

臥病胡床仍不寐(와병호상잉불매)
청나라에 와 병들어 누웠으니 잠 못 자는데

透簾明月照深情(투렴명월조심정)
내 마음 깊은 곳에 스며드는 주렴 밖 밝은 달.
《봉화낙선재구호》
이러한 인평대군의 뛰어난 예술적인 면모는 그가 살아왔던 삶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약소국(조선)의 왕자로서 인질(볼모)로 끌려갔었고 사신으로 자주 청나라에 드나들면서 그가 느꼈던 모멸감과 고통을 시서화 등 예술로 풀어낸 것으로 보인다.

8. 가족 관계

8.1. 후손

오단(呉端)의 딸 복천부부인 오씨와 혼인해 슬하에 6남 4녀를 얻었다. 2남, 4남과 3녀, 4녀는 요절했고 성인이 되어서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총 4남 2녀이다. 큰아들이 복녕군 이욱/유(福寧君 李栯)[A], 3남이 복창군 이정(福昌君 李楨), 그리고 5남이 복선군 이남(福善君 李柟)이며 6남이 복평군 이연(福平君 李㮒)이다. 초명은 '棩' 인데 사촌 형 현종의 이름 역시 '棩' 이라 이를 피하기 위해 개명하였다. 복평군은 일찍 죽은 인조의 4남이자 인평대군의 동생 용성대군의 양자로 출계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은 실제 후손이기도 한 고종 대에 가서야 용성대군의 봉사손을 정하면서 사후 입적 된 것일 뿐, 생존 당시와 사후 200여 년 간은 법적으로 인평대군의 아들이었다. 큰딸은 향주 이금온(李金溫)으로 조기수(趙祺壽)와 혼인했고 둘째딸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향주로 정중만(鄭重萬)과 결혼했다.

복천부부인 오씨는 인평대군과 동갑으로 임신 중에 남편이 사망하자 그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아이를 못 낳고[14] 세상을 떠났다. 이 때 장남과 삼남인 복녕군 복창군은 이미 봉군되었고 결혼까지 한 어엿한 성인이었으나 나머지 2남 2녀는 아직 어린이들이었기에 이를 딱하게 여긴 현종이 고아가 된 사촌 형제들을 궁궐에 들여서 키웠다. 그러면서 이들과 친형제처럼 가까이 지내며 조정 일에 참여시켰고, 외아들로 태어나 가까운 종친이 없었던 숙종 또한 오촌 당숙인 인평대군의 아들들을 깍듯이 잘 대접하였다. 현종과 숙종 모두 외아들이었기에 현종에게 가장 가까운 부계친척은 사촌들이었고 숙종에게는 오촌이 가장 가까웠다.

숙종 시기에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을 일컬어 봉호에 다 '복(福)'이 들어간다고 해서 '삼복(三福)' 이게 아니다이라 불렀다. 여기서 '복(福)'자는 인평대군 부인 복천부부인의 본관지인 전라도 동현(同縣. 현재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에서 유래했다. 복천부부인의 작호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술했듯 인평대군이 서인들에게 모함을 받은 일 때문인지[15] 이들은 훗날 남인 편에 섰고, 오촌 조카 숙종이 즉위한 후 경신환국에서 삼복의 변이라 일컬어지는 일련의 숙청 작업에 탈탈 털렸다. 자세한 것은 삼복의 변(三福의 變) 참조. 장남 복녕군은 이미 현종 시절인 1670년(현종 11년)에 35세로 단명하여 숙청에 엮이진 않았다.

주목할 것은 장남 복녕군의 가계이다. 바로 고종의 실제 혈맥이기 때문이다. 고종은 혈통상으로 복녕군의 7대손이다. 여기에 양자 입적을 통해 가계가 더 복잡해지게 된다. 복녕군의 5대손이자 고종의 친할아버지인 남연군이 족보 상으로 13촌 아저씨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간다. 은신군은 영조의 이복동생인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왕위계승권과는 먼 방계혈족이지만, 은신군은 원래 사도세자의 서차남으로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이러한 이유로 남연군은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자연스레 왕실과 가까운 종친이 되었다. 그래서 고종이 가까운 왕족 자격으로 왕위 계승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조선 최후의 왕통은 인평대군의 후손으로 이어졌다.[16]

한편 덕흥대원군의 후손들끼리 서로 입양하는 횟수가 잦는 등 가까이 지내자 1868년(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이 종친 항렬자 통일령을 내려 덕흥대원군의 자손들은 11대손(12세손) 이하로 전부 항렬자를 같게 했는데, 이 때 인평대군파의 항렬자로 통일시켰다.[17]

인평대군가의 8대 종손(宗孫)이 이재극인데 대거물급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조선 왕실에서 효종으로부터 이어진 왕통이 끝끝내 단절된 것을 따라하듯, 인평대군파 종가 역시 후대로 올수록 자손이 귀해졌는데, 이재극의 아들이자 9대 종손인 이인용의 막장드라마급 방탕한 생활로 가문은 몰락했고, 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5남인 이수길이 양자로서 10대 종손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인평대군파 종가는 혈맥 상 대한제국 황실의 직계손이다.

용성대군의 양자가 된 6남 복평군의 9대 종손이자 장남 완계군 이찬의 8대손으로 신소설의 창시자로 불리며 소설 《자유종》으로 유명한 문학가이자 언론인인 이해조가 있다. 이해조의 손녀는 기독교 여성운동과 한국 여성노동운동의 대모 이우정 전 국회의원이다.

현재 한국의 맞춤양복점 중 가장 오래된 종로양복점의 창업주 이두용은 인평대군의 9대손이다. 1916년 개업 이래 대를 이어 지금까지 100년 넘게 운영 중이다. 현재 사장인 이경주는 이두용의 손자이다. #

8.2. 역대 종주(宗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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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인평대군이 등장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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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실제 혈통 기준 · 세로선(│): 부자 관계 · 가로선(─): 형제 관계 }}}}}}}}}}}}


[1] 인조와 효종의 잠저인 어의궁은 2개가 있는데, 인조가 즉위 전에 살던 '상어의궁(上於義宮)'과 왕자(대군) 시절 효종이 살던 '하어의궁(下於義宮)'이다. 효종이 태어난 곳은 상어의궁. 하어의궁 터는 오늘날 혜화동 쪽에 표석이 남아 있다. [2] 봉호는 강원도 인제(麟蹄)에서 유래했다. [3] 장성했더라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갈 가능성이 높았다. [4] 인조 이후 적자(왕비에게서 낳은 아들)가 있었던 왕은 효종, 현종, 순조, 고종 넷뿐이었다(철종은 일찍 죽어서 제외). 그러나 네 명 모두 적자가 세자가 될 1명만 있었기 때문에 대군이 없었다(순조의 둘째 아들은 일찍 죽었다). [5] 음력 기사년 12월 26일. [6] 이전 문서나 '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는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으로 책봉받았다.'라고 적었지만, 실제 영국공신 1등에 책봉된 이는 구인후(具仁垕, 1578~1658)[18] 김류 단 2명 뿐이다. 그리고 이 영국공신은 인조 말 심기원이란 인물(이 사람도 인조반정에 동참해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을 받았던 인물이었다.)이 일으킨 역모를 다스리는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주는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7] 효종의 또다른 동복형제들인 소현세자 용성대군은 일찍 죽었고, 숭선군 낙선군 이복동생들이었다. 심지어 숭선군과 낙선군의 친모는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김자점과 결탁해 반역을 저지르려다 사사된 소용 조씨였다. 물론 사사된 모친과 다르게 숭선군과 낙선군 역시 효종의 배려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8] 왕의 서녀인 옹주는 무품, 대군의 부인은 정1품이다. [9] 추안급국안에 기록되길 79세 여자 거사 설명(雪明)의 진술에서 "조 귀인(소용 조씨가 귀인이었던 때다)이 자신에게 베개를 하나 줬는데, 보니 꽤나 좋은 베개라 이런 물건은 자신한테 필요없다고 하니, 조 귀인이 인평대군 방에서 보낸 베개라고 하면서 직접 베개를 뜯어서 검은 비단으로 된 주머니를 보여줬는데 그 안에는 노루의 발굽과 같이 생겼다"고 했다. [10] 단, 인평대군의 경우 원음은 '린평대군'이다. '기린 린(麟)' 자. [11] 춘추전국시대에 각각의 사상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고자 도움이 되려 했던 사상가들을 일컫는 말. [12] 눈 앞에 보이는 것에만 홀리지 말고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위험을 경계하라는 의미. [A] [14] 아마도 충격으로 유산하거나 사산한 듯. [15] 스승인 윤선도가 남인이고 처가인 동복 오씨가 남인가문이었던 때문이다. [16] 단, 양자 관계로 인해 법적으로는 효종 고종의 8대조이다. [17] 그 전까지는 덕흥대원군의 후손이어도 선조 후손이 아닌 덕흥대원군파와, 선조, 인조의 왕자군에서 갈라진 파마다 항렬이 제각각이었다. 예를 들어 덕흥대원군 11대손을 기준으로 할 때, 능원대군파에서는 '세O(世)', 경창군파에서는 '신(愼)O' 등으로 썼다. 인평대군파의 항렬은 인평대군의 아들 대부터 '木', '火', '土' 를 각각 외자의 부수로 사용했고 '土' 변 항렬 이후 '진(鎭)O', '병(秉)O', 'O중(重)'으로 이어나갔다. 그 다음이 'O응(應)'인데 'O응(應)' 부터는 모든 덕흥대원군 후손들의 항렬이 같다. 이후 '재(載)O', 'O용(鎔)', '해(海)O', 'O주(柱)', '우(愚)O', 'O기(基)', '의(義)O', 'O운(雲)', '종(種)O', 'O희(熙)' 순으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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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인조의 외조부인 구사맹의 손자. 즉, 인헌왕후 구씨의 조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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