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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조선)/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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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소설3. 드라마4. 영화5. 게임6. 뮤지컬7. 웹툰8. 기타

1. 개요

파일:external/www.greatopen.net/200703_12002.jpg

일상 생활에서 가장 자주 접할 수 있는 세종대왕. 그래서 만 원짜리 화폐를 달리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존경하는 역사적인 인물로 설문조사를 하면 대부분의 경우 이순신 장군 아니면 세종대왕이 1위를 하며 한국사의 군주들 중에서도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더불어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또한, 이순신 장군과 함께 한국에서 제일 많이 동상이 세워진 사람이다. 서울에만 해도 덕수궁, 여의도, 그리고 윗 사진의 광화문광장까지 3개의 큰 동상이 있으며 하다못해 전국 각지의 초등학교에 세워진 동상 삼대장 중 하나가 세종대왕의 동상이다. 나머지 둘은 이순신 장군 동상, 그리고 단군 동상.

한국 역사에 대표적인 성군이여서도 그런게 있지만, 언어(및 글)라고 하는 민족의 정체성에 매우 핵심적인 인물이다보니 더더욱 추앙받는다. 때문에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한국 국민들 입장에서 한국사의 국왕들을 나름대로 존중하더라도 굳이 높임 표현을 쓰지 않는 일이 많지만, 유독 세종만큼은 세종대왕으로 칭하는 것처럼 높임법을 쓰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세종께서"라고 검색하면 현대인이 현대인에게 쓴 글도 많이 보이지만 저 자리에 다른 왕을 집어넣으면 왕조 실록 풍으로 쓰는 글이 대다수인 편이다.

광화문광장의 동상의 밑에는 세종대왕 관련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여기에는 세종대왕의 개인 프로필도 적혀 있는데 여기에 세종의 취미가 공부라고 적혀 있다. 사실이다. 경연에서 신하들이 빌빌거리는 장면이 나올 정도 이같은 모습은 세종대왕 외에 태종, 정조 등 아주 적다.

그만큼 한국인들에게 지금까지도 먼치킨급으로 존경받고 있고, ' 세종대로', ' 세종대왕급 구축함' 등 세종대왕이 들어간 명칭도 많다. 10,000원권 지폐에 실린 인물도 세종대왕이니 거의 매일 이분의 얼굴을 보고 살고 있는 셈. 인천국제공항의 원래 이름도 '세종국제공항'으로 계획되었으나 인천광역시는 자신들의 지명이 아니였기에 극렬한 반발로 무산되었다. 그리고 이분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자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이지스함에도 명명되었다. 함명은 세종대왕함. 이지스함이나 항공모함 정도의 함정에 이분 아니면 충무공 이순신 밖에 어울릴 만한 이름이 또 없기도 하고. 심지어 세종특별자치시의 이름으로 세종대왕의 시호가 들어가기도 했다.[1] 심지어 영릉의 소재지인 여주시 능서면의 경우 2021년 연말 이후 세종대왕면으로 개칭했을 정도다.

유네스코가 제정한 '세계 각국의 문맹 퇴치에 공로가 있는 개인이나 단체에 주는 상'이 바로 '세종대왕상'. 폴란드에는 '세종대왕 고등학교'가 있었다. 세종대왕상은 한국 정부가 출연한 기금[2]으로 운영되는 상이고, 2014년 현재, 세종대왕 고등학교는 재정 문제로 폐교되었다고 한다.

스승의 날인 5월 15일은 바로 세종대왕의 탄신일이다. '한민족의 큰 스승'이라는 의미로 이날로 정한 것. 대만도 비슷하게 공자 탄신일을 스승의 날로 하고 있다.

2010년대 이후로는 한국 인터넷상에서 "신하들을 엄청 부려먹는 악덕 상사" 이미지가 유머 컨셉으로 퍼지고 있다. 세종대왕 밑에 있던 신하들 입장에서야 죽을 노릇이지만[3] 세종 시절은 태평성대의 대명사니, " 윗사람이 고생해야 아랫사람들이 편하다."라는 말의 실례인 셈이다. 또한 세종이 육식을 즐겼고 비만한 체형이었을 것이라는 유력한 설이 널리 알려짐에 따라 이전의 창작물에 비해 고증을 위해 세종의 외모를 더 통통하고 후덕하게 묘사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어린이 위인전 '생각쟁이 뚱보 세종'에서 고기를 좋아하는 뚱뚱한 체형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아예 고기를 씹다가 한글창제의 원리를 깨달았다는 내용이다(...)

성군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정치 암투나 전쟁이 좋은 소재가 되곤 하는 사극에서 중심 인물로 등장한 적은 많지 않다. 그나마 아버지 태종이나 할아버지 태조가 사극으로 만들기 좋은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보니 조연으로나마 자주 나왔던 편. 그러나 21세기 이후 대왕세종처럼 세종을 다루는 사극들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주연으로도 나오기 시작했다. 보통은 15세기 조선 군주가 아니라 백성을 우주로 여기는 고금에 없는 초월적인 군주상으로 그려지는 게 특징이며 완벽초인에 백성과 나라 걱정에 여념이 없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실록의 완역이 이루어지며 실록의 기록도 반영된 최근 사극에서는 왕위에 대한 욕심없이 학문을 좋아한 평범한 왕자였으나 큰 형이던 양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를 당하던 것으로 묘사되던 예전과는 달리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면서도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양녕대군과의 대립을 통해 세자 자리 및 왕위에 대한 야심까지 가진 유능한 젊은 야심가로 묘사되기도 한다.

아버지 태종을 대하는 면에서도 꽤나 입장이 달라지는데 1990년대와 2000년대는 태종에게 꼼짝못하는 착한 아들로 그려지는 모습이 강했지만 2010년대 이후로는 아버지를 공경하면서도 일부 정책과 관련해서는 아버지와 대립하는 모습이 많다. 특히나 심온의 사사와 관련해서 아무래도 자신의 아내인 소헌왕후가 연관된 문제이다보니 아버지와 꽤나 대립한다. 하지만 이 부분은 실제 역사와는 많이 다른 부분인데 창작물에서 두 사람의 대립 구도를 허구로 만들어서 극적 긴장감을 만들기 위한 시도이다. 왕자 시절은 물론이고 세종이 왕위에 즉위한 뒤에도 세종과 태종은 사적으로는 물론이고 정책적으로도 대립한 적이 전혀 없었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을 진심으로 따랐으며 태종 역시 세종을 입이 닳도록 칭찬하며 크게 아꼈다. 심온 숙청에 대해서도 후대의 연구에 따르면 세종 본인 역시 외척의 입김이 강해지기 전에 숙청의 필요성 자체는 공감했다는게 정설이다.

2. 소설

3. 드라마

4. 영화

5.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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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뮤지컬

7. 웹툰

8. 기타



[1] 세종의 묘호를 따서 명명한 도시인 세종특별자치시의 캐릭터로 젊은세종 충녕이 제작되었고 세종 버스 B0 현대 일렉시티에 충녕 도색이 적용되었다. [2] 대부분의 유네스코상은 국가나 기업의 지원으로 운영된다. [3]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황희 조말생. 특히 조말생은 정말 비참한 예시인데, 그나마 세종이 죽기 직전에 겨우 은퇴하고 자연사한 황희와 달리 조말생은 자신이 죽기 직전까지 은퇴를 거부당하고 과로로 죽었다(...) [4] 저자가 한글의 우수성에 감탄해 조사하던 와중에 왕이 창제했다는 사실에 감명받아 쓰게 된 것이라고 한다. 사실 한 언어의 문자를, 그것도 왕이 만들었다는 사례는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거의 없는 편이다. [5] 2011년 SBS 드라마 〈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세종의 장인 심온 역. [6] 최만리 역은 〈 용의 눈물〉의 정도전으로 유명한 김흥기였다. [7] 1994년 KBS 드라마 〈 한명회〉에서는 수양대군 역. [8] 후속작인 〈 왕과 비〉에서는 연산군 역, 2014년작 〈 정도전〉에서는 이방원 역. [9] 전작 〈 용의 눈물〉에서는 세종의 외조부 민제 역. [10] 아역은 이현우. [11] 프리퀄 작품인 〈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남다름 태종의 아역도 맡은 어린 세종의 모습도 연기했다. [12] 1998년 KBS 드라마 〈 왕과 비〉에서는 문종 역. [13] 태종 역을 맡은 사람도 두 드라마 다 배우 김영철이다. [14] 용의 눈물에서는 방간의 아들이자 세종의 사촌형이며, 2차 왕자의 난에 참여했으며 실제 역사에서는 태종 이방원 사후 세종에게 사사를 명받아 죽은 이맹종을 연기했다. [15] 물론 연주 장면은 손싱크 처리되기는 했다. [16] 참고로 작중 이것보다 능력치 총합이 높은 지도자는 앙리 4세 루이 14세 악바르 대제 프리드리히 대왕 표트르 대제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조지 워싱턴 제르지 카스트리오티(스칸데르베그)밖에 없다. 이 중 모든 능력치가 최대인 6.6.6을 찍은 인물은 악바르 대제, 구스타브 2세 아돌프, 표트르 대제, 프리드리히 대왕까지 4명뿐이다. 다시 말하면 너프 전의 능력치는 전 세계 군주들을 통틀어 공동 5위에 달하는 대단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17] 참고로 함께 언급된 인물 중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오더 오브 리즌의 마스터 로널드 호프만 등이 있다. 출처:The Artisans Handbook p69. [18] 물론 세종 때에도 불교 종단을 통폐합하여 선교 양종만 남기고 태종의 폐불 정책 이후 전국에 남아있던 사찰들을 다시 무너뜨려 오직 36개만 남긴 다음 승려들의 도성 내 출입을 금지한 것처럼 억불 정책은 유지되었으나 내불당을 설치하고 승려 신미를 총애하고 승과를 실시하는 등 상당한 친불 정책을 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을 보급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친숙한 부처의 이야기를 책으로 낸 것을 보면 당시 백성들의 불교 신앙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세종은 태종과 달리 불교에 그렇게까지 부정적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19] 연기자나 인플루언서가 분장한 것이 아니라, 편집할 때 세종대왕 영정의 누끼컷을 가져와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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