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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206호 | |
화성 융릉과 건릉 華城 隆陵과 健陵 Yungneung and Geolleung Royal Tombs, Hwase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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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colcolor=#fff>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 안녕동)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
면적 | 842,662㎡ |
지정연도 | 1970년 5월 26일 |
건축시기 | 조선 시대, 1789년 |
관리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조선왕릉서부지구관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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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건릉 안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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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조선 시대 왕릉군(群)으로,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장조 의황제로 추존)와 혜경궁 홍씨(헌경의황후로 추존)가 함께 묻힌 융릉(隆陵), 그의 아들인 조선 제22대 왕 정조(정조 선황제로 추존)와 효의왕후(효의선황후로 추존)가 함께 묻힌 건릉(健陵)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수원 고을의 진산이었던 화산(華山) 아래에 조성된 능이라 하여 '화산릉(華山陵)'이라고도 불린다.정조의 효성을 엿볼 수 있는 왕릉으로, 정조가 재위하던 때에 융릉으로 능행을 자주 나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어 있다.
홈페이지
2. 상세
선정릉과 같이 융건릉의 능침사찰이 있는데, 바로 화성시 송산동의 용주사이다. 융건릉에서 머지 않은 위치에 있는데, 차로는 2.0km(4분), 도보로는 36분 정도가 걸린다. 산책 겸 둘을 하나의 코스로 짜서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2015년 10월 7일 기준 24세 이하는 무료로 입장이 가능하고, 2020년 7월 9일 기준 나이대별로 0~1000원까지 입장이 가능하다.
3. 역사
융건릉은 1789년부터 1900년까지 조성이 이루어졌다. 특히 융릉은 조선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조선왕릉의 3대 분류인 묘(墓), 원(園), 능(陵)을 모두 겪은 왕릉이다. 무덤의 주인만큼 무덤도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사도세자가 승하하고 정조를 비롯한 그의 후손들이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그 역사는 대략 아래와 같다.- 1762년(영조 38년) 윤 5월 21일 사도세자 사망.
- 1762년(영조 38년) 7월 23일 현재 동대문구 휘경동 일대인 양주 배봉산 아래에 장사(예장)지내고 수은묘(垂恩墓)라 함. 조선왕조실록 기사, "이해 윤 5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궁묘(宮墓)의 호칭을 ‘수은(垂恩)’이라고 내려주었다. 7월 23일에 양주(楊州)의 배봉산(拜峰山)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20일,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마자[1]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무덤의 격을 묘(墓)에서 원(園)으로 올려 영우원(永祐園)으로 고쳐 부르게 하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시호도 사도에서 장헌으로 새로 개칭한다.
- 1789년(정조 13년) 10월 16일, 영우원의 위치를 현재 화성의 위치로 옮겨서 현륭원(顯隆園)이라 부르게 하였다.
- 1800년(순조 즉위년) 6월 27일에 정조가 승하하자, 동년 11월 6일 현륭원의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하였다. 같은 년도 7월 6일에 묘호 등을 정하면서 능호는 건릉(健陵)으로 정하였다. 이후 그의 유언대로 같은 년도 11월 6일 현륭원(지금의 융릉)의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하였다.[2] 조선왕조실록 기사, "11월 갑신일 자시(子時)를 기해 현륭원 동쪽 두 번째 산등성이에다 해좌(亥坐)로 장례를 모셨는데 거기가 바로 건릉(健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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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순조 16년) 3월 3일,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가 1815년 12월 15일에 승하한 후, 이 날에 현륭원에 합장되었다.
조선왕조실록 기사, "이듬해 병자년 3월 3일에 장헌(莊獻)의 현륭원(顯隆園)에 합봉하였는데"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작업은 대한제국이 세워진 이후에도, 호적상 사도세자의 현손자가 되는 고종에 의해서 계속된다. - 1821년 3월 9일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건릉 부근(즉, 최초의 건릉의 장소인 융릉 동쪽)에 안장하려고 하였으나 영돈령부사 김조순이 건릉이 풍수지리에 좋지 않다고 하자 건릉을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바꿔서 1821년 9월 13일에 효의왕후를 합장하여 매장하게 되었고, 능호를 건릉으로 합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기사
- 1899년(광무 3년) 9월 1일, 사도세자가 왕으로 추존되어서 장종(莊宗)이란 묘호를 올리고 현륭원도 왕의 예에 따라 융릉(隆陵)으로 격상되었다. 또한 정조와 효의왕후를 각각 정조선황제와 효의선황후로 높였다.
- 1899년(광무 3년) 12월 7일, 사도세자의 묘호가 다시 장조(莊祖)로 바뀌면서, 융릉은 황제의 릉이 되었다.
- 1900년(광무 4년) 황제의 격에 맞춰서 비각의 표석을 세움.
능역이 들어서기 전에는 수원시, 화성시와 오산시의 전신인 수원도호부의 읍치(邑治, 관아 소재지)가 있었다. 즉, 수원 시가지를 밀어버리고 지은 것. 그래서 성과 시가지를 이전해 새로 조성한 것이 바로 수원화성이다.
1970년 5월 26일에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4. 융릉(隆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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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릉 | 융릉의 인석 |
조선의 추존왕이자, 22대 왕 정조의 생부인 장조의황제[3]]와 그의 부인 헌경의황후[4]]의 합장릉이다.
봉분에는 모양을 잘 잡기 위해서 인석(引石)을 봉분 중간중간에 박아 두었는데, 그 인석 끝부분에는 연꽃 봉오리를 화려하게 새겨 놓았다.
융릉의 특징으로는 일반적으로 왕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봉분은 일직선으로 배치되기 마련인데, 융릉은 정자각과 봉분의 축이 약간 틀어져서 배치되어 있다. 이는 지금 봉분 자리가 좀더 명당이라서 방향을 틀어놓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또한, 건릉과 같이 정자각 앞쪽을 굉장히 넓게 조성하였는데, 이는 1900년 이후 사도세자와 정조를 황제로 추숭하고 융릉과 건릉을 황제의 릉으로 조성하면서 그 격식에 맞게 꾸민 거라고 한다.
비각에는 1개가 아니라 2개의 표석이 세워져있는데, 하나는 융릉이 능이 아니라 현륭원이었을 때의 표석이고, 하나는 융릉으로 격상된 후의 표석이다. 현륭원의 비석에는 "조선국 사도장헌세자 현륭원(朝鮮國 思悼莊獻世子 顯隆園)"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리고, 융릉 비석에는 "대한 장조의황제 융릉 헌경의황후 부좌(大韓 莊祖懿皇帝 隆陵 獻敬懿皇后 附左)"라고 새겨져 있으며, 제작년도는 광무4년(1900년을 의미)이라고 되어 있다.
한국 전쟁 막바지이던 1953년 초에 미군 장교가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 #
5. 건릉(健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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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릉 | 건릉의 정자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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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적도보에 실린 1920년대 건릉(健陵)의 모습 |
조선 제22대 왕 정조선황제[5]와 그 부인 효의선황후[6]의 합장릉이다. 본래 융릉의 서쪽 언덕에 매장했다가, 효의왕후가 승하한 뒤 정조의 능을 융릉 동쪽 언덕으로 옮겨 합장하였다.
전반적으로 조선왕릉의 표준을 따르고 있으며,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융릉과 비교해보았을 때, 융릉이 봉분에 화려한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른데 반해서, 건릉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두르고 있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다만, 19세기 조선 후기의 왕릉 형식 답게 석물들이 화려함을 갖추고 있고, 문인석도 금관조복(문무백관들이 국가행사 때 입는 대례복)을 입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또한, 융릉과 같이 정자각 앞쪽을 굉장히 넓게 조성하였는데, 이는 1900년 이후 사도세자와 정조를 황제로 추숭하고 융릉과 건릉을 황제의 릉으로 조성하면서 그 격식에 맞게 꾸민 거라고 한다.
비각에는 1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는데, "대한 정조선황제 건릉, 효의선황후 부좌(大韓 正祖宣皇帝 健陵 孝懿宣皇后 附左)"라고 되어 있다.
2011년 11월 29일에 정조의 초장지로 추정되는 곳이 발굴 되었다. 출처 발굴지에서는 다수의 유물이 출토 되었는데, 백자명기, 백자호류, 칠기함과 궁중제례악에서만 사용하던 편경과 편종이 출토되었다. 이 중 뚜껑이 있는 단지는 18세기 백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형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