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틀:대한민국의 국보 1~30호, version=27, uuid=b16ef97f-b363-494a-ab2a-e95ccd5f503f,
title2=틀:대한민국의 국보 31~60호, version2=23, uuid2=979147df-3a26-481f-b049-2bed6c206bdc,
title3=틀:대한민국의 국보 61~90호, version3=18, uuid3=a651288c-6ac5-4be6-aabd-d4ff8ce28b2d,
title4=틀:대한민국의 국보 91~120호, version4=16, uuid4=47b78863-c197-4fb3-8fa6-911be58d2f63,
title5=틀:대한민국의 국보 121~150호, version5=18, uuid5=38233d15-3cf9-4c93-833c-94c06a6fbf8b,
title6=틀:대한민국의 국보 151~180호, version6=15, uuid6=edf3cf60-9adb-4a8f-8ee0-0b7fbc07c52f,
title7=틀:대한민국의 국보 181~210호, version7=13, uuid7=dc5f6abf-c5c1-4679-b79e-a752e027eb8b,
title8=틀:대한민국의 국보 211~240호, version8=15, uuid8=0da4ae8e-4b56-4578-9135-01ed7dddf02a,
title9=틀:대한민국의 국보 241~270호, version9=13, uuid9=98999a90-809a-452b-9fd0-6721c558ff35,
title10=틀:대한민국의 국보 271~300호, version10=12, uuid10=d3cf8eb4-7dea-45c4-8db8-f764102672c0,
title11=틀:대한민국의 국보 301~330호, version11=21, uuid11=654db38a-ea8b-426b-a33e-245918ddd995,
title12=틀:대한민국의 국보 331~360호, version12=14, uuid12=6bc2ec27-8f76-40cf-9ef0-c2d80032b65e)]
대한민국 국보 제150호 | |
송조표전총류 권7 宋朝表牋總類 卷七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 (신림동, 서울대학교) |
분류 | 기록유산 / 전적류 / 활자본 / 금속활자본 |
수량/면적 | 1책 |
지정연도 | 1973년 7월 10일 |
제작시기 | 조선 태종 연간 |
[clearfix]
1. 개요
宋朝表牋總類 卷七. 송조표전총류 권7은 조선 태종 대인 1403년~1418년 사이에 간행된 책으로, 태종 3년인 1403년에 주자소(鑄字所)에서[1] 제작된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로 인쇄한 책이다.책의 제목인 송조표전총류(宋朝表牋總類)의 뜻을 풀이하자면, 중국 송나라 왕조때의 표(表)와 전(牋)을 총합했다는 것이다.[2] 물론 송나라때의 모든 표와 전을 수록한 것은 아니며, 모범이 될 만한 뛰어난 것들을 골라 담은 것이다. 조선 초기에 이런 책을 만든 이유로는, 건국된지 얼마 안된 조선에서 각종 의전이 행해질때 국왕에게 올릴 표전의 작성에 참고하기 위함과 함께,[3] 중국에 외교 문서를 보낼때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일종의 샘플로 쓸 수 있을 모범본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관료들의 표문 및 전문 작성 시 참조자료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4]
송조표전총류 권7은 본래 국문학자이자 시인이던 이병기가 소장하고 있었던 책이라고 하며,[5] 현재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송조표전총류 권7은 1973년에 국보 제150호로 지정됐다.
2. 내용
송조표전총류 권7은 가로 19㎝, 세로 29㎝인 1책이며, 송조표전총류의 전체 내용 중에서 일부분인 7권 부분만 남은 영본(零本)으로 본래의 전체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6][7] 유감스럽게도 보존 상태는 그다지 좋지는 않은데, 본래 있었던 책 표지는 사라졌고 지금있는 표지는 새로 종이를 덧대어 만든 것이며 본문 가운데 후반부는 일부가 손상되어[8] 내용 파악이 어렵다. 게다가 책에 자세한 서지 사항이 남아 있지 않아서 책의 편찬자와 정확한 간행연도도 알 수 없다. 다만 간행연도는, 이 책이 계미자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태종 때에 만들어졌다고 본다.
이와 같이 송조표전총류 권7은 보존 상태도 썩 좋지는 않은데다가 내용도 일부분이 결실된 책인데 어째서 국보로 지정됐는지 의아할 수도 있을텐데,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로 인쇄한 책이라 높은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계미자는 태종 3년인 1403년에 만들어진 금속활자로 구리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계미자는 사용했던 기간이 상당히 짧아,[9] 계미자로 만든 판본 중에 지금까지 전해지는 책 자체가 희귀하다.[10] 여기서 보이는 계미자의 필체는 경연에서 쓰던 시경, 서경, 춘추좌씨전에 수록된 글씨를 토대로 한 것인데, 구양순체를 바탕으로 하였다.[11]
다만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로 한 인쇄는 다소 한계가 있었다. 우선 기술적 한계로 인해 각 활자들의 규격이 온전히 통일되어 있지 않아서 활자들의 크기가 들쭉날쭉하여 가지런하지 못했다. 또한 활자에 새겨진 자획도 일정하지 않았다. 규격이 통일되지 못한데서 파생된 문제가 각 활자들의 크기 차이로 인해 인쇄를 위해서 활자들을 활자판에 정렬했을 때 그 사이에 공간이 생겨 인쇄 과정에서 계속 흔들리는 바람에 인쇄 결과물이 영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쨌든 활자판이 고정되어야 인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활자 배열에 맞춘 판을 만들어 활자를 다소 무리하게 위아래로 꽉 고정시켜서 인쇄를 하긴 했는데, 이로 인해 옆줄이 맞지 않게 됐고 윗 활자와 아랫 활자가 겹치게 된 부분도 많다고 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밀랍을 이용해서 활자를 고정시키려고 했지만, 밀랍의 접착성이 높지 않아 큰 효과는 없었다고 한다.[12]
하지만 송조표전총류 권7은 이와 같은 한계점들과 안 좋은 보존 상태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조선 초기의 활자주조술과 조판술 및 인쇄술을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이며, 계미자로 인쇄된 책 자체가 남아 있는 것이 극히 드문 상황인데 현재까지 전해진 아주 희귀한 판본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13] 송조표전총류 권7은 이와 같은 가치를 인정 받아 1973년 7월 10일에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3. 7권 외의 다른 권책의 소유 현황 및 국립중앙박물관에 대한 비판
|
<colbgcolor=#315288> [추적60분 RE:] "세계 최초 금속활자 따로 있다" 부처님 사리 훔쳤던 문화재 대도의 고백 |
소유권이 분산된 후에 개인소장자 김씨는 소장품중 권8~9 1책을 2015년에 8억원으로 2016년에 9억원에 국립중앙박물관에 매도 신청하였고, 권3을 보유했던 고서경매장 운영자인 고서방 서점 주인도 2006년 6월에 2억 6천만원에 국립중앙박물관에 매도신청하였으나, 국립중앙박물관은 모두 매입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권 8~10을 소장한 개인소장자는 KBS 추적60분 방영 당시인 2006년경 국가문화재 지정신청을 하였으나, 국보급 문화재라고 평가받던 인쇄물이 어찌된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가 2017년 경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87호로 지정된 것으로 보인다
2006년 방송 당시나 2023년 현재도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구입예산은 그야말로 모기 핏방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23년 현재는 젊은박물관후원자 모임과 게임사가 설립한 문화재단이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구입 및 문화재 환수비용을 일부 충당해주고 있으나, 국가 총예산이 3백조원이 넘어가고 있는 상황에도 국립중앙박물관 자체 유물매입예산이 매년 30억원을 넘지 못해 간송미술관 금동보살상 경매에 선뜻 나서지 못했던 적도 있을 정도다. 세간의 높은 문화재 관심도에 비해 예산은 티스푼 수준으로 배정하는 이율배반적인 정책을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시행하고 있다는 점은 K-컬쳐를 내세워 문화강국임을 열띠게 홍보하고 있는 것과 배치되는 행동이라서 매우 비판받고 부끄러워해야 할 지점이다.
4. 외부 링크
5. 국보 제150호
송나라의 명신(名臣)들이 황제에게 올린, 시정(施政)에 관한 각종 표문(表文)과 전문(牋文) 중에서 뛰어난 것을 뽑아 편찬한 책으로, 편찬자는 미상이다.
규장각 소장본은 1403년(태종 3) 주조된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로 간행한 것으로, 권7 부분만 남아 있는 영본(零本)이다. 본서의 크기는 가로 19㎝, 세로 29㎝이며, 모두 12장으로 구성되었다. 본문의 제10~12장은 일부가 손상되었고, 책의 뒤표지도 결락되었다. 책의 앞뒤에 종이를 1장씩 첨가한 후 진한 황색포 표지를 새로 입히고 붉은 면으로 보강하였다.
계미자는 사용한 기간이 짧기 때문에 현재까지 전해지는 계미자 판본은 희귀하다. 따라서 본서는 고려와 조선초기의 활자주조술, 인쇄조판술사 및 활자체 연구에서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규장각 소장본은 1403년(태종 3) 주조된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로 간행한 것으로, 권7 부분만 남아 있는 영본(零本)이다. 본서의 크기는 가로 19㎝, 세로 29㎝이며, 모두 12장으로 구성되었다. 본문의 제10~12장은 일부가 손상되었고, 책의 뒤표지도 결락되었다. 책의 앞뒤에 종이를 1장씩 첨가한 후 진한 황색포 표지를 새로 입히고 붉은 면으로 보강하였다.
계미자는 사용한 기간이 짧기 때문에 현재까지 전해지는 계미자 판본은 희귀하다. 따라서 본서는 고려와 조선초기의 활자주조술, 인쇄조판술사 및 활자체 연구에서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1]
주자소는 활자를 제작하고 서적을 인쇄하기 위해 설치된 관청이다.
[2]
표는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며, 전은 제후국의 왕에게 올리는 글을 뜻한다. 제갈량의 저 유명한
출사표에서 표가 이를 뜻한다. 표문(表文), 전문(箋文)이라고도 부르며, 합쳐서 표전이라고도 한다.
[3]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송조표전총류 권7
[4]
출처:
두산백과 - 송조표전총류 권6~11
[5]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 송조표전총류 권7
[6]
영본은 책의 전체 내용이 남지 못하고 일부분만 잔존하는 판본을 뜻한다. 잔본이라고도 한다.
[7]
권과 책의 개념이 헷갈릴 수도 있는데, 현대에 사용되는
권과
책의 의미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고서(古書)의 경우에 권은 내용에 따른 분류 단위로 현재의 장(章)이나 챕터(chapter)와 비슷하고, 묶어 놓은 제본을 세는 단위는 책(冊)이다. 예를 들어 2권1책은 제본은 한 개인데 내용상 2개로 나뉜 것이고, 1권2책은 내용상은 이어진 하나인데 2개의 제본으로 나뉜 것이다.
[8]
권7에 실린 전체 12장 중에 10~12장 부분
[9]
1403년~1420년까지 총 18년간 사용됐다. 1420년부터는
경자자로 인쇄했다.
[10]
'송조표전총류' 외에 '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십칠사찬고금통요' 등이 있다. 참조:
두산백과 - 계미자로 간행된 서적
[11]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 송조표전총류 권7
[12]
출처:
청주고인쇄박물관 - 조선시대 금속활자,
한국어 위키백과 - 송조표전총류 권7
[13]
다만
유일본은 아니다. 보물 제1989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인 '송조표전총류 권6∼11'이 있고,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87호로 지정됐으며 개인 소장 중인 '송조표전총류 권8~10'이 있으며, 이 외에도 청주고인쇄박물관에도 권1~2이 소장되어 있다. 보물 제1989호인 '송조표전총류 권6 ~ 11'은 본래 삼성 이건희 전 회장의 수집품으로
리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2021년에 있던 '이건희 컬랙션' 기증으로 인해 소유주가 국가로 변경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송조표전총류 권8~10, 참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고 이건희 회장 기증품 목록집, 제2집 전적1'의 15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