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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01:10:57

피휘


전근대 동아시아 호칭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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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유형4. 사례
4.1. 중국
4.1.1. 문자의 옥
4.2. 한국
4.2.1. 신라4.2.2. 고려4.2.3. 조선4.2.4. 대한민국4.2.5. 북한
4.3. 일본4.4. 베트남4.5. 번외: 기록 말살 차원의 피휘4.6. 종교적인 이유의 피휘
5. 역설적 도움6. 창작물

1. 개요

피휘()는 과거 동아시아에서 사람을 부를 때 본명을 직접 부르지 않고 돌려 부르는 관습을 말한다. 휘(: 이름)를 피한다()하여 '피휘'라고 부른다. 반대로 피휘를 하지 않는 것, 즉 윗사람의 이름을 그냥 부르거나 이름의 한자를 그냥 적거나 읽는 행위는 휘를 범한다(해선 안 될 짓을 하다) 하여 범휘()라 하였다. 범휘는 매우 무례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2. 역사

기휘()라고도 한다. 피, 기 모두 본래 꺼리다라는 뜻으로 언령과 관련된 옛 관습에서 함부로 부르기를 꺼리는 군주 등의 이름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피휘는 '휘( 이름)를 피하다'로 옮길 수 있다. 문장에서 임금이나 높은 이의 이름자가 나타나면 삼가는 뜻을 표하기 위해 뜻이 통하는 다른 글자로 대체하거나 획의 일부를 생략하는 것이다. 굳이 적어야 하는 곳에는 姓諱(성휘, 성과 이름)라고만 적는다.

이런 관습이 생겨난 것은 자신보다 높은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예에 어긋난다고 여겼던 한자문화권의 인식 때문이다. 자나 호와 같이 별명을 붙여 부르던 풍습(실명경피속, 實名敬避俗)이나 부모 조상의 이름을 언급할 때 '홍길동'이라 하지 않고 '홍, 길 자, 동 자'라고 조심해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풍습은 가톨릭의 한국 전래 초기에 세례명처럼 여겨져 가톨릭의 전래를 돕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독립운동가 안중근을 주로 도마 안중근이라 부르는데 도마(多默)는 세례명 토마스의 음차이다.

동아시아인들은 이 관습 때문에 일반적으로 군주나 자기 조상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초기에는 글자만 피하고 음은 같거나 비슷한 한자를 골랐으나 후대에 가면서 음이 같은 한자도 기휘에 걸려 사용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로 인해서 백성들이 불편해 했는데 그래서 조선 시대 왕자들은 일반적으로 흔하게 사용하지 않는 희귀 한자(벽자, 僻字)를 이름으로 썼다.[1] 실제로 '세()'나 '민()' 같은 흔한 글자가 피휘의 대상이 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는지는 하단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관습은 중국 주위의 유교(한자)문화권에 전파되었고[2] 오랫동안 기본상식 수준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현대에도 한국 중국에서는 보통 자식과 부모나 조상과 후손은 이름에 같은 한자를 넣지 않는다.[3]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이름을 피휘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조선 시대에는 처가 어른 중 자기 이름에 들어간 한자를 쓰는 사람이 있다면 사위가 장가를 들자마자 개명하기도 했다. 물론 요즘에는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는다.

유교문화권이라고 반드시 지켰던 것도 아니다. 중국에서도 이런 관습이 생기기 전, 주나라가 세워지기 이전 시대의 군주는 이름을 그대로 불렀다. 예를 들어 상(은)나라의 왕들이 그렇다. 춘추시대 중엽까지만 하더라도 같은 시기에 재위한 천자 주양왕과 제후 위성공의 이름이 정(鄭)으로 똑같았다.

한국에서도 유교문화가 정착되기 이전에는 부여온조 온조왕, 김내물 내물 마립간같이 시호조차 없이 이름 + 왕 형태로 기록된 임금이 꽤 많다. 피휘 문화는 통일신라~ 고려 왕조에서 처음 도입되었다. 이미 피휘의 관습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조선시대에도 태종이 이름인 이방원(李芳遠)에 들어가는 한자가 실생활에서 매우 자주 쓰이는 글자인데도 태종 스스로가 이름을 개명하지 않았고 민간에서도 이 글자들을 피휘하지 않았다. 다만 이런 사례는 일반화하기 어려운 특이한 경우이다.

일본에는 통자(通字)라고 해서 특정 글자를 한 집안의 이름자에 대대로 넣는 관습이 있어 피휘가 완전히 정착하지 못했다.[4] 정착하지는 못했지만 외국에는 피휘라는 관습이 있음은 당연히 알았다. 조선에서 일본의 국서에 중종의 휘인 역(懌)이 있다고 항의하자 크로스 카운터로 조선의 국서가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휘인 미츠()를 사용했다고 따지기도 했다. 베트남에서도 응우옌 왕조 역대 임금들이 '응우옌푹X(阮福X)'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듯[5] 피휘는 지켜지지 않았다.

중국과 거리가 가까운 몽골에서도 피휘는 낯선 관습이었다. 예를 들어 칭기즈 칸의 이름 테무진은 원래 아버지 예수게이가 쓰러트린 적장의 이름인데, 그걸 새로 태어난 아들에게 붙인 것이다. 그리고 칭기즈 칸 본인도 자기를 특별히 높이지 말라고 해서, 부하와 형제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몽골의 왕중왕인 자기한테 그냥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다. 황제의 이름을 면전에서 직접 불렀다간 불경죄로 삼족이 멸해지는 한국이나 중국과 대비되는 상당히 이질적인 부분이다.

이는 정주민들의 을 정복하고 그 관습을 받아들인 게 아닌 이상, 몽골 같은 유목민 국가들이 기본적으로 혈통 상으로나 귀족, 평민, 왕족을 구분했을 뿐, 복식이나, 거주하는 환경 면에서 그렇게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역시 유목 생활을 주로 했던 여진족[6], 금나라 건국 직후에도 한동안 황제와 귀족들이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며, 황제가 변변한 황궁도 없이 (정주민들 시각에서) 허름한 텐트에 살면서 집무를 본다든가, 황제가 국고에 함부로 손댔다는 이유로 곤장까지 맞는 등, 옛날부터 유교 문화권에 속하여 살아왔던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에게는 경악할 만한 일이 꽤 벌어졌다. 금세종 때에나, 점차적으로 피휘와 같은 유교적인 요소들이 자리잡았다.

피휘 문화와 정반대로 유럽 지역에서는 오히려 부모나 조상의 이름을 자손이 물려받는 것을 선호한다.[7] 신약성경에서도 세례자 요한의 이름을 짓는 데 (어머니가 하느님의 지시대로[8]) '요한'이라 하라니까 '족보에 그런 이름 쓴 사람이 없는데 왜 그래?' 하는 친척들이 묘사될 정도[9]이고, 남미 스페인어권을 배경으로 한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 <영혼의 집> 에도 아들에게 '하이메' 라는 이름을 붙이겠다는 아내에게 "우리 집안 족보를 다 뒤져봐도 그런 이름을 쓴 선조는 하나도 없다!" 하고 기겁하는 남편이 등장할 정도로, 조상의 이름을 자식이 물려받음을 당연시했다.

이 때문에 유럽의 뼈대 있는 귀족 집안 가계도에서 특히 장남의 이름을 죽 거슬러 올라가보면, 수 대~ 심하면 십수 대가 계속 같은 이름이거나[10] 이름 두 개가 번갈아 나타나는 경우[11]를 드물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군주의 이름을 백성이 그대로 쓰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워낙 동명이인 군주가 많다보니 구분을 위해서 '아무개 몇 ' 등으로 표기한다. 미들네임이란 방식이 생겨난 이유도 마찬가지. 왕비나 왕자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레이스 켈리 메건 마클같은 결혼 전 본명에 크게 민감해하지 않는다.[12]

스페인에는 Jesús라는 이름도 흔하며[13]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이슬람교- 유대교의 유명인 이름에서 따온 유수프, 이사, 무함마드 같은 이름도 흔하게 쓴다.[14] 예수의 이름은 그 신이 인간이 거리낌 없이 다가갈 수 있게 인간이 되어 그 이름도 거리낌 없이 부르는 거고, 무함마드라는 이름은 유일신의 대리자의 이름이어서 허용되는 것.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런 대리자들의 이름을 쓸 때도 조심해야 하며 이름 가지고 말장난을 한다든지 하면 안 된다. 이게 논란을 일으킨 게 개그콘서트의 단명 코너인 억수르였다.[15] 심지어 자신들을 학살했던 정복자의 이름도 인명으로 쓴다. 한니발이나 아틸라[16], 혹은 티무르 등이 대표적인 예다.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한 중동 등지에서는 알렉산드로스를 알-에스칸다르로 받아들여 이스칸다르라는 이름도 자주 쓰인다.

하지만 서양 중앙아시아에서도 피하는 이름들이 있다.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 신에게는 피휘가 적용되었다. 야훼를 직접 발음하거나 글로 씀은 불경하다 생각해서 모음을 생략하고 적었는데, 당시 히브리어는 모음을 생략해도 무슨 의미인지 파악이 가능하여 별 문제가 없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아예 야훼의 실제 발음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아브라함 계통 종교의 신의 원래 이름은 사라지고 기독교 이슬람교 세계로 퍼지면서 신을 의미하는 고유명사를 야훼의 번역어로 쓰게 되었다.[17] 마찬가지로 고대 중동의 신앙 바알은 주인이라는 뜻으로, 신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기 위해 부르던 말이었다. 또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도 포트니아 테론같은 위대한 여신 및 남신들은 풍요를 내리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자연 그 자체를 운용하는 존재로서 재앙도 관장하기에 일부러 다른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가장 유명한 예시로는 에리니에스가 있다.

서양에서도 현직 국왕의 공식 칭호에서 이름을 직접 일컫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생전의 엘리자베스 2세는 공식 경칭이 Her Majesty The Queen이지 Her Majesty Queen Elizabeth II가 아니었다. 사망 후 Her Majesty Queen Elizabeth II로 바뀌었다. 반대로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재위 중엔 His Majesty The King (Su majestad el Rey)으로 불리다가 퇴위하자마자 His Majesty King Juan Carlos (of Spain)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His Majesty The King (of Spain)은 후임인 아들 펠리페 6세가 계승했다.

사실 동아시아에서만 피휘가 발전한 것은 어쩌면 한자라는 문자의 성격일지도 모른다. 한자 그 자체에 하나의 뜻이 있다 보니 이름에 들어가는 글자와 일상 생활에 사용하는 글자가 겹치기 일쑤고 그러다 보니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일이 발생하기 쉬우니 이런 걸 피하기 위해 피휘가 발생했을 수 있지만[18] 그 외의 문화권에서는 글자 자체에는 뜻이 없고 그러다 보니 각각의 이름에는 어원은 있을지언정[19][20] 이름 그 자체는 명사로서의 의미 외에는 없다 보니 쓰는 데 거부감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현재에는 영구 결번이 피휘의 위상을 갖고 있다.

3. 유형


이래서 동등한 나라 사이의 외교 문서나 집안 사이의 서신 등에서는 서로 피휘를 지켜 주었고, 군주의 이름에 쉬운 글자가 들어 있으면 나라 전체에 불편이 생기고 외교상의 문제도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군주와 그 일족의 이름은 잘 쓰지 않는 글자를 택했으며 주로 한 글자로 지었다.

피휘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로 나뉜다. 피휘한 글자는 대개 어느 한자든 음을 그대로 읽지 않았다.

피휘를 하는 것도 단순히 글자를 피하는 것에서부터 심지어 모양이 비슷한 글자를 피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말로 안 되면 음만이라도 바꿔 읽었다.

4. 사례

4.1. 중국

4.1.1. 문자의 옥

중국에서는 추가로 피휘를 정치적으로 이용, 불용문자를 사용한 정적을 제거하는 사례도 빈번히 있었다. 이것을 필화, 혹은 문자의 옥이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사례가 명나라 태조 홍무제 청나라 고종 건륭제가 일으킨 피바람. 정말 글자 하나 잘못 써서 목이 날아간 예라고 보면 된다.

4.2. 한국

삼국시대엔 피휘란 먼 서쪽 중국에서 전래된 생소한 예법이었다. 고조선, 부여는 자료가 부족하나 남아있는 기록들은 왕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고 있으며, 삼국시대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초기 군주를 대부분 그냥 이름으로 불렀다. 추모왕, 온조왕, 혁거세 거서간, 수로왕, 사마왕, 창왕 등이 있다. 발해 역시 내부에서 피휘를 사용했다는 자료가 없다.

4.2.1. 신라

한국사에서 자국 군주[54]에 대한 피휘의 관습이 드러나는 건 신라 때부터로, 삼국사기를 보면 제32대 효소왕의 이름 김이홍(理洪)에 이(理) 자가 들어간다는 이유로 효소왕이 즉위한 692년에 좌리방부(左理方府, 형법 및 법률 담당, 651년 설치)와 우리방부(右理方府, 형법 및 법률 담당, 667년 설치)를 각기 좌의방부(左議方府)와 우의방부(右議方府)로 개칭한 기록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다른 사례를 보면 피휘제도의 원조인 중국 본토나 훗날 고려시대 등과 비교하면 아직 적응이 덜 됐는지, 필요성을 덜 느꼈는지 몰라도 피휘를 철저하게 적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은 존호가 그냥 자신의 이름이었다. 먼 후손 원성왕도 존호를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썼다.

사실 중국과 교류를 시작하기 전에 세운 고대국가가 그대로 쭉 이어진 신라는 피휘를 철저히 적용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신라 초중기 수십 명의 왕들의 이름은 한자가 한반도에 제대로 정착하지 않았던 시절부터 부르던 것으로, 이후 시대처럼 한자의 뜻을 감안해서 지은 게 아니라 단지 신라의 고대 한국어 고유어 이름을 비슷한 음의 한자로 옮겨 쓴 것뿐이었고, 한국어가 들리는 대로 해당 음의 한자를 가져다 쓰는데다가 현대 한국어와 달리 향찰처럼 훈독도 그때그때 섞어 썼기 때문에 이름의 한자 표기가 당시에도 고정되어있지도 않았다.

예를 들어 지증왕의 이름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포항 냉수리 신라비 등에 지대로(智大路) / 지도로(智度路) / 지철로(智哲老) 등 여러 방식으로 남아있다. 이 사례처럼 로(路 혹은 老), 지(智, 고대 신라에서 음차표기에 자주 사용한 한자다) 같은 한자가 들어간 말들을 일일이 다 안 쓰면 실생활에 쓸 수 있는 글자가 너무 없어지기 때문이다. 조선처럼 실생활에 잘 안 쓰는 한자로 개명할 수도 없는 것이 피휘라는 개념을 의식하기 시작한 건 통일신라 이후인데, 이미 전대 수백년 왕들의 이름글자를 전부 고치는 것은 설령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자국 왕 이름에 대해서는 좀 느슨하게 적용하더라도 당나라에서는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제도였기에 당나라에서 시행하는 피휘는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나당동맹 때문에 진덕여왕 대부터 당나라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간 이후로는 더했다. 예를 들어 간지의 하나인 병(丙)은 문무왕릉비에 경(景)으로 적혀있다. 이에 대해서는 중국의 사례 단락에 설명되어있다. 다만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중국의 피휘를 챙기지 않아서 신라 국내 제작 문화재임을 알 수 있었듯, 중국인이 읽어볼 가능성이 낮은 국내용 문서에서는 신경쓰지 않은 듯 하다.

신라 성덕왕의 본래 이름은 김융기였으나, 당 현종의 이름인 '융기'와 같아서 김흥광으로 개명했다.

4.2.2. 고려

국가적 차원에서 군주의 이름을 일일이 다 피휘하는 관례는 고려 때부터 시행되었다. 국왕 이름을 국가적으로 피휘하는 관례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고려 시대에는 자비심이 없었는지 륭(隆)[55]ㆍ건(建)[56]ㆍ무(武)[57]ㆍ요(堯)[58]ㆍ치(治)[59] 등 자주 쓰이는 한자가 고려조 멸망까지 봉인당했다. 따라서 륭(隆)은 풍(豊), 건(建)은 립(立), 무(武)는 호(虎)[60], 요(堯)는 고(高), 치(治)는 리(理), 창(昌)은 녕(寧)으로[61] 바꿔 써야 했다. 그래서 고려시대 문헌에는 무(武)자를 모두 범 호(虎)로 바꾸어 무반(武班)이 호반(虎班)으로, 무장(武將)이 호장(虎將)으로 표기되었다.[62] 이것은 현대에도 영향을 미쳐서 지금까지도 武의 훈음이 '호반(虎班) 무'라고 한다.[63] 태조, 성종의 경우는 같은 뜻을 가진 다른 한자로 대체한 것이고, 혜종의 경우는 용맹한 동물이라는 의미에서 연계하여 '호' 자를 '무' 자의 대체자로 사용했던 것이다.

4.2.3. 조선

조선 시대에는 왕족의 이름을 지을 때 일부러 백성들의 언어체계를 흐트리지 않기 위해 잘 안 쓰는 글자, 혹은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지었기에 웬만해서는 자동으로 피휘가 되었고, 쿠데타를 통해 왕이 되거나 직계가 끊겨 방계로 왕위를 얻은 왕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다.[69] 하지만 이렇게 조심한다고 하더라도 사람 일이라는 게 그리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만은 아니어서 과거 시험 등에서 혹시라도 왕의 이름을 사용했다간 당장 낙방에 곤장까지 덤으로 안겨주었다. 참고로 당대의 운서나 자전, 경서들은 성인의 말씀이기에 문장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피휘 글자들에 따로 테두리를 쳐서 주의토록 되어있았다.
선조조(宣祖朝)에 역대 선왕의 어휘(御諱)를 대용하는 글자를 제정하였다. 도조(度祖)의 휘는 ‘춘(椿)’인데 ‘충(冲)’ 자로 대용하였고, 태종의 휘는 두 자 이름이라 어느 한 자만을 휘피하지 않기 때문에, 대신 쓰는 글자는 없었으며, 세종의 휘는 ‘도(裪)’인데 ‘휼(𥛯)’ 자로 대용하였으며, 문종의 휘는 ‘향(珦)’인데 ‘임(琳)[70]’ 자로 대용하였으며, 세조의 휘는 ‘유(瑈)’인데 ‘이(理)’ 자로 대신하였으며, 덕종의 휘는 ‘장(璋)’인데 ‘명(明)’ 자로 대신하였으며, 예종의 휘는 ‘황(晄)’인데 ‘광(光)’ 자로 대신하였으며, 성종의 휘는 ‘혈(娎)’인데 ‘흔(欣)’ 자로 대신하였으며, 중종의 휘는 ‘역(懌)’인데 ‘예(豫)’ 자로 대신하였으며, 인종ㆍ명종의 휘는 드물고 괴벽한 글자이므로 대신 쓰는 글자가 없었다.
연려실기술
한자를 어쩔 수 없이 써야 했거나 그 뜻을 써야할 경우가 부득이 하게 있었다면 위 연려실기술에서 언급한 것처럼 뜻이 같은 다른 한자를 쓰거나 아예 그 한자의 발음으로 대체했다. 경전에 부득이하게 피휘해야하는 한자가 적혀 있을 때는 이렇게 대체 한자로 치환해서 읽거나 '모(某)'로 바꿔 읽곤 했다. 예를 들어 경서에 태조 이성계의 개명한 휘인 '단(旦)'이란 글자가 나오면, 뜻이 같은 다른 문자 朝를 따라 됴[조]로 읽었다.

4.2.4. 대한민국

당연히 현대 대한민국에선 공식적으로 피휘를 강제하는 문화는 없어졌지만, 오랫동안 존재했던 관습이므로 그 흔적은 남아있다. 예를 들면 본인과 동격이거나 아랫사람을 상대로는 이름을 그대로 부르지만, 더 높은 어른이나 직장 상사일수록 단순 이름이 아닌 호칭, 혹은 성씨+호칭으로 부르는 것이 있다. 정 이름을 부르고 싶다면 성씨+이름+호칭으로 부른다. 혹은 아랫사람이라도 직장이나 공식석상 등 좀 더 격을 차려야 하는 상황에서 이름보다는 호칭으로 불러주는 것이 있다.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은 상대를 좀 격이 낮게 대한다는 은연중의 인식이 남아있는 셈이다.

대한민국에서도 제5공화국 시절에는 TV에서 ' 순자'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비천한 역을 하거나 악역으로 묘사하는 것이 내부규칙으로 금지되었다. 피휘도 피휘지만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고다 이순신의 사례처럼 본래 TV 같은 대중매체는 원래 유명인의 이름을 차용할 때 조심스럽지만 순자라는 이름은 1980년대 당시 기준으로는 40대 정도의 중년층에게[80] 너무 흔해서 이러한 규칙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수였다. 물론 현재 40대인 1975~1984년생에게는 촌스러운 이름이라 잘 보이지 않는다.

피휘 관습으로 인해 전근대 왕정이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도 한동안 시설물이나 단체에 사람 이름을 붙일 때 본명을 그대로 붙이는 것을 피했다. 따라서 이병철의 호암미술관처럼 본명 대신 를 사용하거나 정수장학회( 박정희, 육영수)처럼 이름의 일부만 사용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의 유명 시설물인 세종로, 충무로, 세종특별자치시 같은 예도 본명이 아니다. 21세기가 되어서야 이런 관습이 깨지고 김대중컨벤션센터, 박정희체육관처럼 본명을 붙인 시설물이 등장했다. 김대중은 후광(後廣), 박정희는 중수(中樹)라는 호가 있음에도 본명을 사용한 시설물이 생긴 것으로 보아 공식적인 자리에서 본명을 꺼리는 한국의 관습은 점차 약해져가는 추세라고 볼 수 있다.
파일:문재인취임연설.png
파일:윤석열군통수권인수.png
대한민국 언론은 현직 대통령의 발언 인용에 대해서는 이름과 직책명을 표기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방송계에서 일종의 불문율이라서 모든 방송사에서 똑같이 적용되며, 임기 시작 시부터 임기 종료 시까지 계속된다.[81] 예를 들어 문재인 전 대통령의 경우 2017년 5월 9일까지는 '문재인 /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라고 표기했고, 5월 10일 아침 8시 9분까지는 '문재인 / 대통령 당선인'이라고 표기했지만 8시 9분 공식적으로 당선이 확정되고 임기가 시작된 이후부터 퇴임 전까지는 이름, 직함 없이 발언만 자막으로 보여줬다. ( 당선 확정 전 당선 확정 취임 이후) 반면 박근혜, 이명박 등 전직 대통령이 된 인물은 각자의 이름과 함께 '전 대통령'이라는 직함이 자막으로 표기된다.[MBC]다만 해당 발언을 대통령이 직접 입으로 말하는 장면에서 자막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아닌, 단순 대통령의 발언이 인용되는 경우에는 보통 이름과 직함을 표기한다. 왜냐하면 발언만 인용하는 경우에도 생략해버리면 누구의 발언인지 알기가 힘들기 때문.

엄밀히 말하자면 피휘라고는 할 수 없으나, 연예계에서도 종종 이름이 같거나 비슷할 경우 예명을 만들어서 활동하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자리잡은 유명인(선배 연예인이나 정치인 등)의 동명이인이 나중에 예명을 만들어 데뷔한다. 이는 피휘의 의미라기보단 자신의 이미지가 이미 활동 중인 유명인에 의해 묻히게 될 것을 우려하는 의미가 더 강할 것이다.

4.2.5. 북한

전제군주제를 넘어 나라 전체가 하나의 사이비 종교화된 북한에서는 주민들이 ' 일성'과 ' 정일' 및 ' 정은'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다.[84] 만약 김씨가 아니라 다른 성이라고 해도 저 이름들은 일반인의 사용이 아예 금기시되고 있다. 1970년대부터 '정일', 2012년부터 '정은' 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들은 강제로 개명하도록 했고, 새로 태어나는 아기에게도 지어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김정은 집권 후 2010년 초에는 전국적으로 성이 김씨인지의 여부를 불문하고 ' 정은'이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개명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한자가 다른 동명이인이라도 얄짤없다. #

발음이 비슷한 이름에 대해서도 최대한 '개명'이나 다른 이름으로 출생신고를 하는 것이 권장된다. 위 '정은' 이름 개명 지시가 하달된 이후 정은과 발음이 비슷한 '정훈', '정운' 같은 유사한 이름은 출생신고를 받아주지 않았다는 북한 소식통의 언급이 있다. # 단, 아예 이름 자체가 금기시된 '정은'과 달리 유사한 이름에 대해서는 가급적 권장만 할 뿐, 아예 완전히 금지한 것까진 아니다. 위 지시 이후에도 '김정운'이라는 이름의 영화배우가 활동한 바 있고, '김정훈', '윤정운' 등의 이름이 북한 언론에 나오고 있다. 사실 위 언론 기사도 잘 보면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유사한 이름을 지어주지 말란 내용이지 유사한 이름까지 개명하라고 명령이 내려온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이미 그 이름으로 살아온 사람은 계속 써도 크게 터지하지 않는듯 하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 설주'라는 이름도 사용 불가능하다고 언급되었으나 2017년 기사에서 상업성체육단 소속 교예선수 가운데 '리설주'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김정은의 부인 이름까지 금지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뿐만 아니라 북한 주민들은 자식의 생일이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이나 기일과 같으면 안 된다. 그래서 당일 혹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면 이를 피하기 위해 출생신고를 하며 원래보다 더 늦게 태어났다고 하고[85] 비슷한 시기에 사망하면 원래보다 더 늦게 사망했다고 신고한다. 길면 한 달 가량이고. 이 작자들은 피휘를 넘어서 독재자의 생일까지 가리는 동서고금에도 없었던 전대미문의 풍습을 창조했다.

그런데 상기한 것처럼 피휘를 하는 문화권은 원래는 부모자식간에도 피휘를 하는데, 김정일은 아들들에게 자신과 같은 正을 넣어 이름을 지어 자신들은 피휘의 관습을 안 지키면서 주민들에게는 지키라고 강요하였다. 김정일의 이런 작명법은 오히려 일본식 통자(通字) 개념에 가까운데, 김정은에게 정통성을 실어주려는 의도가 있다고 추측하긴 하지만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86]

김일성의 아들들인 김정일과 김평일, 김영일, 김만일 역시 이와 같은 사례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김일성이 日을 쓰는 데 반해 그의 아들들은 一을 쓴다.[87] 김정일 역시 본래는 一을 썼지만 '김일성의 정통 후계자'임을 내세우기 위해 日로 개명했다. #[88]

피휘와는 다른 개념이지만, 북한에서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통치자의 이름은 다른 글자들보다 굵고 큰 글씨로 쓰도록 되어 있다.[89] 컴퓨터 스마트폰 등에서는 글씨 크기는 다르게 조절하기 힘드니 이건 포기하더라도 굵기라도 다르게 처리하기 위해 특별한 기술적 조치를 취한다. 북한에서 만들어진 많은 폰트들은 유니코드 PUA 영역에 보통 글씨보다 굵게 처리된 '김ㆍ일ㆍ성ㆍ김ㆍ정ㆍ일ㆍ김ㆍ정ㆍ은'을 할당해 넣었다.[90] 북한의 IME도 김씨 3대의 이름이 입력되는 걸 감지해서 자동으로 굵게 처리된 글리프로 치환한다.

이외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칭호가 한동안 장군이었던 탓에(내각 수상 김일성장군 식으로) 정작 북한군 내의 장군들을 장군이라 칭하지 않고 '장령'이라 칭하기도 한다. 칭호에 대한 피휘인 셈.[91]

한편 이들 북한 김씨 일가의 이름은 남한에서도 아이들에게 잘 붙여주지 않는데, 당연히 북한과는 정반대의 이유로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들은 흉악범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건국과 동시에 전국민의 원수가 되어버린 김일성의 동명이인은 죄다 해방 이전 인물들이며, 김정일의 동명이인 문서를 보면 김정일이 김일성의 확고한 후계자로 등극한 1970년대 이전 출생자가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김정은 또한 김정일의 후계자로 선포된 후 배우 김정은을 포함한 남한의 동명이인들이 상당히 불쾌해했으며 개명을 한 사람들도 있다.

현재 북한 주민들은 강제적으로 그들과 같은 이름을 못 쓰고 있지만 북한 정권이 붕괴한다 한들 김일성 일가의 악명이 완전히 잊힐 정도로 긴 시간이 흐르기 전까지는 구 북한 출신들도 그들의 이름을 더러워서 안 쓸 가능성이 높다.

4.3. 일본

일본에는 조상의 특정 글자를 자손의 이름에 사용하는 통자(通字)라는 관례가 있고, 아예 높으신 분이나 주군의 휘를 하사받는 편휘(偏諱)라는 관습도 있어서[92] 중국이나 한국 같은 엄격한 피휘는 도입되지 않았다. 현 천황 나루히토(仁), 상황 아키히토(仁)만 봐도 이름자가 통자인 어질 인 자는 물론 다른 글자도 기초수준 한자인 걸 알 수 있고, 천황을 국가적으로 숭배했던 메이지(睦仁), 다이쇼(嘉仁), 쇼와(裕仁) 시절에도 睦, 嘉, 裕 글자는 민간에서 잘만 쓰였다. 그러나 공식석상에서 천황(과 상황)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행위는 금기[93]라 천황과 상황을 일컬을 때에는 "금상 폐하(今上陛下)", "상황 폐하(上皇陛下)"로만 부른다. 아키히토와 나루히토도 황태자 시절에는 이름을 넣어 "황태자 아키히토/나루히토 친왕 전하(皇太子明仁/徳仁親王殿下)"로 불렸다.

민간에서도 가업을 잇는 경우 선대 조상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는, 피휘와 완전히 반대되는 관습도 존재한다. '호시 젠고로(善五郞)'라는 이름을 46대째 물려주고 있는 호시 료칸의 사례 가업을 물려받을 때 아예 법원에서 개명 신청을 하는 경우도 있고, 또는 본명과 세습명을 별도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현대 일본인 중 '~에몬(右衛門)', '~베에(兵衛)' 같은 아주 옛날 이름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거의 이 케이스이다.

하지만 피휘란 개념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천황이나 권신의 이름에서 통자가 아닌 글자를 바꾸게 하여 지명이 변경되거나 성씨가 바뀌는 예가 있기는 했다고 한다.

보면 알겠지만 일본의 피휘 사례는 대부분 막부 체제가 성립[95]되기 이전에 집중되어 있으며, 막부 체제 이후에도 주로 천황과 그 주변 귀족등 조정 관계자들에 한정되었다. 이는 일본이라는 국가 성립초기에 앞선 문물을 가지고 있었던 한반도나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천황과 조정 관계자들이라 한반도, 중국의 관습을 많이 이어받았으나,[96] 헤이안 시대 들어 견당사와 견신라사가 끊기고, 이후 자신의 힘으로 조정을 무력화시키고 실권을 잡은 막부 관계자들은 그러한 풍습을 이어받을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에는 유식자 읽기(有職読み)라고 해서 '훈독으로 읽어야 할 인물의 이름을 음독함[97]으로써 경의를 나타내는 습관이 있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근거 없는 낭설이다.(관련 내용 : ja.wikipedia.org/wiki/有職読み) 실제로 옛 일본에서 원래 훈독인 인명을 음독한 케이스가 일부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일반적이지 않은 몇몇 특수한 사례에 불과했으며, 이것이 반드시 존경의 의미를 나타낸다고도 단언할 수 없다. 예를 들어 徳川慶喜는 훈독으로 도쿠가와 요시노부로 읽지만 정적들이 경멸의 의미를 담아 음독인 도쿠가와 '케이키'로 읽은 예가 있다. 원래 일본에는 지명도 무츠(陸奥)를 오슈(奥州)라고 부르기도 하는 등, 훈독 고유명사를 음독한 별칭이 널리 쓰였고 긍정/부정 한 쪽으로 쏠린 의미는 아니다.

에도 시대에는 ○○우지(氏)라고 해서 무가에서는 상대방의 성씨 뒤에 붙여서 존경을 나타내는 표시로 피휘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노지(○の字)라고 해서 이름 시작 글자에 붙여서 이름 전체는 부르지 않되 상대를 친근하게 혹은 정중하게 부르는 방법도 사용했다. 예를 들면 망나니 장군의 주인공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잠행 시에 토쿠다 신노스케라는 가명을 썼는데, 극중 등장인물 중에서 요시무네와 평소 친하지만 그의 정체를 모르는 하층민들이 '신노지'라는 형태로 친근하게 부르는 모습이 묘사된다.

요비스테 풍습도 이 피휘랑 어느 정도 비슷하다. 정확히는 타 명칭 없이 이름만 부르는 것은 낮춰 부르게 되는 것이 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4.4.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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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 왕조 때의 피휘 사례.

베트남 역시 베트남 황제의 이름에 대해 피휘를 했다. 위 그림에서 綿 → 白의 가운데 가로선을 삭제한 綿, 宗 → 示 맨 위의 가로선을 삭제한 宗은 획 하나를 삭제한 예이고(결획), 任 → 壬은 부수를 제외한 나머지를 쓴 예(결획의 일종, 대자로도 볼 수 있다), 時 → 辰은 비슷한 뜻을 가진 글자로 대자(代字)한 예[98], 明 → 朙(+月)은 옛 글자로 고친 것[99], 昭 → (昭에서 日이 들어갈 부분만 삭제한 글자)[100]는 부수 부분을 공백으로 비워놓은 예(결획의 일종)이다.

베트남에서는 피휘를 위해 해당 글자의 발음을 비슷한 다른 것으로 바꾸어 읽도록 조처하기도 했는데, 아예 그게 굳어져서 현재까지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베트남어에서 利는 lợi라고 읽는데 본래 발음대로 읽으면 lì라고 읽어야 했던 모양이다. 이것은 후 레 왕조(後黎) 태조 黎利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지 않기 위해 利의 발음을 바꿔 lợi로 읽게 한 것이다. 그러다가 이제는 利 자체의 발음이 완전히 바뀐 채로 정착되어 오늘날 黎利 본인의 이름을 부를 때도 바뀐 발음으로 읽는다고 한다. 즉, 본래 발음에 가까운 '레리'가 아니라 ' 레러이'로 읽는다는 뜻이다.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처럼 이름자를 피휘한 사례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베트남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실록인 응우옌 왕조의 『대남식록(大南寔錄)』[101]이 당시 황제였던 민 망(明命, Minh Mang)황제의 황후의 이름이었던 호씨실(胡氏實)의 '실(實)' 자를 피휘하여 '실록'이 아닌 '식록'이라는 제목으로 편찬된 일을 들 수 있다. 또 소치제가 즉위하면서 완복선(阮福暶)으로 개명하였음에도, 즉위 전 이름인 완복면종(阮福綿)의 이름자를 피해 종인부(宗人府)를 '존인부(尊人府)'로 바꿨다.

4.5. 번외: 기록 말살 차원의 피휘

군주나 웃어른, 성현의 이름을 피한다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매국노 범죄자 등 악인의 이름을 기피하느라 피휘 아닌 피휘가 되는 일도 있다.[102] 현대에는 거의 영향력이 없는 군주의 피휘와 달리 흉악 범죄자 한 명이 매스컴이라도 탔다가는 동명이인들의 개명 신청이 법원에 몰리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런 관습은 유교문화권뿐만 아니라 구미권에도 존재한다.

4.6. 종교적인 이유의 피휘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일반적으로 피휘가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맏아들의 이름은 닥치고 무함마드로 지어버리는 관례가 있는 지역들도 있지만 튀르키예와 그 영향을 받은 알바니아, 보스니아 한정으로 독특한 피휘문화가 있는데, 바로 무함마드의 튀르키예어 명칭인 무함메트(Muhammet, Muhammed)를 메흐메트(Mehmet)로 바꿔부른다는 점이다. 이미 오스만 제국시절부터 나타났던 풍습이고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중에는 총 6명의 파디샤가 무함마드의 이름을 따온 휘를 쓰고 있었지만 일괄적으로 메흐메트의 형태로 썼다. 하지만 선지자 무함마드를 가리킬때는 본명을 사용하며, 그나마도 본명대신 예언자를 뜻하는 Peygamber(페이감베르)라고 부르거나, Peygamber efendi(페이감베르 에펜디)라고 하여 존경을 표시하는 관례가 있다. 본명을 부를때도 Peygamber Muhammet sallallâhu aleyhi vesellem(페이감베르 무함메트 살랄랴후 알레이히 웨셀렘)이라는 호칭을 붙인다.

5. 역설적 도움

피휘는 서지학적 측면에서 상당한 유용성을 제공한다. 한자문화권 내 고문헌의 출간연대가 불분명할 때 이전시대 판본과 비교해 다른 글자로 대체되었거나 완전히 칸을 비워둔 글자를 분석, 출간연대를 알아내는 근거로 쓰인다. 때문에, 고문서의 위서(僞書) 여부를 적발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또한 이런저런 범죄 수사에서 이뤄지는 필적대조에 있어서도 주요 글자들에 대한 피휘 여부는 나름대로의 근거로 유용하게 쓰였다. 특히 부모의 이름을 피하는 가휘 같은 경우 전근대 사회에서는 사람에 따라 친가와 외가, 그리고 입양을 거친 경우 양가에 대해서도 모두 꿰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고, 가휘의 한계상 글자를 완전히 바꾸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획을 조금이나마 변형해서 쓰는 식으로라도 자체 피휘를 적용하는 것이 예의였다. 그 덕에 타인의 필적을 흉내내는 사기꾼이 나타나더라도 필적을 따라하는 것도 힘든 판에 개개인마다 다른 친, 외, 시, 처, 양가, 심지어 혈통과 무관하더라도 스승이나 노비들이 모시는 상전의 이름까지 다 알고 똑같이 피휘하는 건 극히 힘들기 때문에, 당사자는 피휘되었어야 할 글자들을 근거로 본인의 결백을 주장할 수 있었다.

6. 창작물


[1] 그뿐만 아니라 세종-이도 정조-이산 등 피휘의 대상이 되는 글자 수를 줄이기 위해 이름이 외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2] 아래 일본과 베트남의 사례에도 나오듯 유교문화권이라고 반드시 지키게 된 것은 아니었다. [3] 항렬자를 정할 때 오행, 천간, 숫자 등 법칙에 따라 대표한자/부수를 순환시키는 이유에 피휘도 있다. 가까운 선조의 이름과 글자가 겹치는 것을 자연스럽게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휘 문제로 인해 한 대에 항렬자를 여러 개 정하는 경우도 있는데 많을 경우 한 대에 항렬자만 5개 이상이 되기도 한다. [4] 예를 들어 일본 황실 남자의 히토(仁)부터 시작해서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들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름에서 '이에()'자를 대대로 이름에 사용하곤 했다. 초창기에만 쓰이다 점점 사라진 듯하다. [5] 부자손 간인 가륭제의 휘는 응우옌푹아인(阮福映), 명명제는 응우옌푹끼에우(阮福晈), 소치제의 휘는 응우옌푹뚜웬(阮福暶)으로 아예 부수()까지 공유한다. [6] 다만 금나라를 건국하기 훨씬 이전부터 여진족은 순수한 유목민이 아닌 반농반목을 하는 농경민이 된 상태였고, 청나라 건국 직전에는 아예 완전한 농경민이 되었다. [7] 영미권 이름에 종종 붙는 Jr.( 주니어)는 대부분 아버지의 이름을 아들이 그대로 물려받았을 때 부자를 구분하려는 것이다. 2세와 같은 의미이다. 1세는 Sr.( 시니어), 3세 이하는 3rd, 4th 식으로 그냥 기수를 붙인다. 대표적인 사례가 윌리엄 헨리 게이츠 3세. [8] 하느님이 요한의 아버지인 즈카르야에게 아들이 태어나면 요한으로 지으라고 지시한 상태였다. [9] 결국 '(말을 못 하는 상태였던) 즈카르야에게 물어보면 알 것'이라 하니, 그는 (당연히 지시받은 대로) 요한이라고 써서 그대로 결정되었다. [10] 자신의 이름을 계속 계승자가 될 장남에게 물려준 경우 [11] 아버지의 이름을 계승자가 될 장남에게 물려주고, 그 장남도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자식에게 물려주기를 거듭한 경우 [12] 물론 서양에서도 공식 행사에서는 생전의 그레이스 켈리보고 Princess consort of Monaco라고 했지 본명을 대놓고 쓰면 무례하다는 취급을 받았다. 비석도 마찬가지. 다만 이는 공식적인 자리 등에서 경칭이나 작위명이 아닌 본명(퍼스트 네임)으로 부름을 무례하다고 여기는 것이므로, 특정한 이름을 붙이고 호칭함 자체를 무례하다고 여기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한국으로 치면 <'김철수' 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무례하다고 여겨지느냐 아니냐>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김철수 님", "김철수 씨"가 아니라 "철수야!" 하고 부르는 것이 무례라고 여겨지느냐>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 특히 군주정 국가에서 예민한데 군주정 국가에서 군주를 경칭이나 작위명을 부르는 게 아니라 이름으로 부를 경우는 9할 이상이 공화주의자들이다. 왕으로 인정 안 하겠단 소리. [13] 읽는 방법은 '예수'가 아니라 현지화되어 헤수스 정도로 읽는다. 두 번째 음절에 강세가 있다. [14] 다만 아브라함교 계통의 종교에서도 그들이 믿는 유일신의 이름을 직접 일컫는 것은 금기된다. 당장 정교회와 가톨릭에서는 YHWH라고 성경에 표기된 것을 말할 때 '주(님)'라고 피휘해서 부른다. '주님'은 나의 목자, '주' 예수 그리스도 등. 자세한 내용은 야훼 문서로. [15] 억수르( 송준근)의 아들(정해철)의 이름을 무함마드를 변형한 무엄하다드라고 했는데 식겁한 중동 전문가들이 이런 장난을 치면 매우 위험하다라고 지적해서 그냥 '아들'로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억수르 자체가 아랍에미리트의 유력 정치인이자 기업인인 셰이크 만수르 빈 자예드 알 나얀을 희화화한 거라 논란이 많았고 결국 위험 부담이 컸기 때문인지 인기에도 불구하고 단명 코너가 되고 말았다. [16] 헝가리 튀르키예(특히 헝가리)에서 비교적 흔하게 쓰이는 남자 이름이다. [17] 지금도 이러한 문화의 영향으로 서양의 독실한 가톨릭 및 개신교 신자들 앞에서 OMG라고 감탄사를 내뱉는 것은 상당한 실례이다. 실제로 이러한 표현을 그들 앞에서 썼다가는 정색하는 표정을 짓거나 지적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며, 서양 영상매체에서도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OMG 대신에 "oh my gosh."나 "oh my goodness."라는 감탄사를 쓰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는 종교가 없거나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한 차원에서 신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도 있다. [18] 물론 이것은 이름 물려받기를 하지 않는 것에는 적용되기 힘들다. [19] 아랍에서 많이 쓰는 이름인 압둘라는 '알라의 시종' 이라는 의미가 있다. [20] 비슷하게 실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예로 광해군 시기의 대신인 박승종은 박흥구, 유희분을 좋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래서 하루는 아랫사람들에게 박홍구의 구(耉)는 개 구(狗)자, 유희분의 분(奮)은 똥 분(糞)자라고 비난한 바 있다. 글자를 비틀어서 박흥구는 개자식이고 유희분은 똥 같은 놈이라고 비난한 것인데 대놓고 한 건 아니고 혼자서 아랫사람에게 한 말이기 망정이지 이것보다는 세련되게(?) 그 대상에게 직접 할 수도 있는 일인 만큼 이럴 바에 그냥 피휘가 낫다. 당장에 피휘가 있는데도 김삿갓은 사람 이름 하나 언급 안하고 書堂乃早知(서당내 조지) 房中皆尊物(방중 존물) 生徒諸未十(생도 제미) 先生來不謁(선생내 불알)이라는 시를 남겼다. [21] 일단 항렬에 따라 금수목화토 (오행상생법),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천간법),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지지법), 일이삼사오륙칠팔구십 (수교법)으로 돌아가는 항렬자는 당연히 못 쓰는 것이고 (외자 이름인 경우는 부수를 항렬로 취급), 남는 한 글자만 피하면 되는 것이므로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22] 김정일의 한자 이름은 원래 金正一 이었지만 아버지 김일성을 잇는다는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1980년 10월의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 직후 이름을 형제간에 공유하는 돌림자 일(一) 자에서 아버지 이름의 한자를 따 金正日로 고쳤다. 동아시아 유교사상의 관점으로 봤을 때 이 집안은 그냥 무식한 콩가루 집안인 것이다. [23] 대부분은 아침 조(朝)로 바꿔 썼고(밑에 나올 대자代字의 방법), 대자가 곤란할 때만 이런 식으로 결획을 했다. [24] 이성계가 바꾼 이름이 하필 이단인 것은 旦이 '조선'의 朝와 의미가 통하기 때문이다. 조선을 세운 사람이니 조선과 관련 있는 글자로 이름을 바꾼 것. [25] 당 고조의 휘인 연(淵)을 피휘 [26] 고려 혜종의 휘인 무(武)를 피휘 [27] 당 태종의 휘인 세민(世民)의 세(世)를 피휘 [28] 恆은 이체자인 恒으로 쓰기도 한다. [29] 고전 한문 문법에서 자신의 이름을 자기 자신을 낮추는 1인칭 대명사로 쓰기도 했다. 한문에서 자기 이름을 주어로 사용하는 것은 현대 한국어에서 자기 자신을 낮추는 1인칭 대명사 '저'를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뉘앙스가 된다. 그래서 유교 경전에서 공자의 이름자인 丘(구)가 등장하는 구절은 대개 공자가 신분이 높은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지칭한 대사를 경전 내에 직접 인용해놓은 것이다. [30] 우리나라 라는 의미이고 我が国라는 표현도 있지만, 주로 공문서나 정부기관에서 많이 쓰인다. 여기서 が는 주격조사가 아니라 の에 상응하는 관형격조사다. 君が代도 이런 용법이다. [31] 나라 고유의 음악이란 뜻도 있지만 음악계에선 일본 음악을 의미한다. [32] 카메라로 유명한 일본의 캐논 사의 이름도 '관음'의 일본식 발음에서 유래한 것이다. 해당 문서로. [33] 그는 이전에도 성명을 고친 바 있다. 본래 성명은 서세적이었는데 당나라 건국의 공로를 인정 받아서 황제의 성씨를 하사 받았기 때문에 이세적으로 개명됐다. 이후 이 이름을 다시 이적으로 고친 것. [34] 둘은 같은 글자이며 đời로 읽힌다. [35] 연개소문의 성씨가 연씨라는 설은 18세기에 이르러 국학자 안정복이 저서인 동사강목에서 처음 주장한 것으로, 안정복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고구려의 대신인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했다'는 기록과 '통고(通攷)와 신당서에 정토는 소문(개소문)의 아우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사실 연개소문의 성은 연씨였으나 그 이름이 당고조 이연(李淵)의 이름과 글씨가 겹치므로 당나라 사람들이 피휘해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오늘날 한국사학계에선 거의 정설로 인정받아 지금은 개소문의 성을 연씨로 표기한다. [36] 삼국사기가 신라가 편찬한 구 삼국사를 참조했는데도 천개소문이라 칭한 것을 보면 아마도 신라에서도 본이름을 몰랐던 것이거나 김부식이 <구당서>, <신당서>를 참조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37] 추존황제로 세조. [38] 추존황제로 태조. [39] 고려에서는 반대로 무(武)를 호(虎)로 바꿔야 했다. 본 문서의 '한국의 피휘' 단락으로. [40] 후대인 고려에서도 똑같이 피휘해야 했다. 성종의 이름이 왕치(王治)였기 때문이다. [41] 당나라는 어쩔수가 없는 게, 고조, 태종, 고종 모두 당나라 초기의 인물로, 황족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었고, 그러다 왕조를 건설하고 황제가 되었기 때문. 이후에는 흔한 글자가 휘가되는 현상은 어느 정도는 줄긴했지만, 그래도 상용한자들을 휘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42] 현무를 더욱 신격화한 것이다. [43] 송나라는 중국 역사상 북방민족들에게 가장 시달린 나라였다. [44] 사실 이 둘은 피휘를 적용하면 상당한 문제가 되는 게, 누르하치의 한자 음차명인 努爾哈赤(노이합적)에서 哈(합)자는 하하라는 웃음소리를 표현하는 의성어라서 웃는 것만으로도 피휘에 걸릴 판이고, 훙타이지의 한자 음차명인 皇太極(황태극)을 피휘할 경우 황제라는 호칭까지 갈아엎어야 한다. 또한 유교의 영향이 아직 미약할 시절이라 이름도 이때는 한족식이 아닌 만주족 전통 작명법으로 지어진 때였다. 한족식 작명이 시작된 것도 3대 순치제부터였다. [45] 다섯 복이 찾아옴. [46] 조선에서는 대구(大丘)라는 지명이 오랫동안 그냥 쓰이다가 한참 뒤에 대구(大邱)로 변경됐다. 자세한 건 '한국의 피휘' 단락으로. [47] 현행 외래어표기법대로는 '추'로 적어야 하나 여기서는 그냥 원음에 더 가깝게 치우로 적었다. [48] 현대 표준중국어 발음대로라면 七과 똑같아지지만 당대에는 달랐을 것이다(q 발음이 아니라 c 발음이었음). 과거의 중국어에서는 丘가 '쿄우(kiou)' 정도로 소리 났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운미를 떼면 '쿄'가 되고 이를 구개음화시키면 qio(19세기 중국어에는 jio, qio, xio, yo라는 음절도 존재했는데 이는 웨이드식 표기법을 사용한 당시 문헌에서 확인되며 현대 한어에서는 이 음절의 운모가 üe로 변함.)가 된다. [49] 광동어로 丘는 jau1(야우)라고 읽어서 중고음 溪母에 속하는 다른 글자의 성모와 거리가 있는데, 泣(울 읍)도 jap1(얍)이라고 읽어서 꼭 피휘 때문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애초에 溪母는 광동어로 /k-/, /h-/, /f-/로 혼란이 있었는데, /j-/라는 반모음 성모로 귀결되어서 꼭 피휘처럼 느껴진다. [50] 그 밖에 외국 지명에 들어가는 邱도 그대로 邱로 쓰는 듯하다. 가령 대구는 한국에서 쓰이는 표기 그대로 大邱라고 쓰고 Dàqiū로 읽는다. [51] 물론 그런 결획조차 없이 글을 쓰다가 황제한테 들켜서 목이 날아가는 불상사는 흔했지만, 불상사라 해봤자 붓과 혀를 잘못 놀린 신하들의 목이 날아가지 형제들의 목이 날아가는건 아니었다. 사촌형제와 삼촌들에 대해서도 폐태자 윤잉의 큰아들 홍석처럼 역모 혐의나 심각한 부정부패 논란에 휘말리는 경우가 아니면 건드리지 않고 냅뒀다. [52] 그런데 이 기사에 나오는 미아동 사는 김모씨는 대법원 덕분에 딸의 이름을 잘못 짓는 실수를 막을 수 있었다. 는 네이버 옥편에 '사랑할 아'로 잘못 나온 적이 있는데(현재는 교정돼 '어조사 아'로 풀이) 이걸 믿고 사랑스러운 딸 이름에 넣어주려던 의도였겠지만 啊에는 '사랑하다'라는 뜻이 없다. 신음소리 같은 감탄사에 쓰이는 글자다. (표준중국어에서도 어기조사와 감탄사로만 쓰인다!) 옛 문헌에도 '좋아하거나 싫을 때 내는 소리'(愛惡聲)이라고 했는데 뒤 두 글자를 떼먹고 愛만 보고 '사랑할 아'라고 잘못 수록되는 바람에 오해를 부른 것이다. 전문적이지 못한 온라인 옥편 하나에 의지하다가는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 되도록이면 중국어 사전을 같이 찾아보자. 실제로 네이버 지식iN에 '啊 이름'이나 '啊 사랑할' 등으로 검색해 보면 네이버 옥편의 '사랑할 아'에 낚여서 신생아 이름에 啊를 넣으려는 사람들을 제법 볼 수 있다. 다만 啊는 2013년에 인명용 한자에 추가되기는 했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대법원에서도 네이버 옥편의 '사랑할 아'에 낚인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만약 실제로 대법원조차 낚인 거라면, 전문적이지 못한 온라인 옥편 하나가 어디까지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3] 서유기 저팔계(猪八戒)는 원래 주팔계(朱八戒)였다. 하필 팔계의 성씨를 주(朱)로 했던 이유는 돼지를 뜻하는 저(猪)와 발음이 유사하면서 흔히 쓰는 성씨였기 때문이다. 일종의 말장난인 셈. 그런데 명나라가 들어서고 국성이 주씨가 되니까 감히 돼지를 주씨라고 하기가 꺼려졌다. 돼지에다 국성을 붙이는 것은 황제를 능멸하는 불경한 행위로 여겨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 자 대신에 원래 의미에 맞는 돼지 저 자로 바꿔 저팔계가 되었다. 성씨는 여러 사람이 쓰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피휘의 대상이 아닌데도 성씨를 피휘한 특이사례다. 그래도 이 경우는 글자만 따졌지 발음까지는 안 따졌다. 만약 당시 주(朱)와 발음이 비슷한 글자도 회피했다면 발음이 유사한 돼지 저(猪)가 아니라 돼지 돈(豚) 같은 발음이 다른 글자로 썼을 텐데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유기에 등장하는 돼지의 성명이 저팔계로 확정되었다. 이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게 된 후에도 본래의 이름인 주팔계로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다. 한족들을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엄청난 저항과 군사력 소모가 있었고 완전히 복속시킨 후에도 강압책과 회유책으로 한족들을 다스리는 데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청나라의 만주족이 신경을 못 썼을뿐더러, 살기 위해 청의 지배에 순응하는 척 연기하는 반청 성향 한족들이 명나라 때의 피휘를 묵시적으로 계속 유지하던 게 한족 문화를 받아들인 만주족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54] 중국은 고대부터 피휘를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으므로 삼국시대 한반도 왕조들은 중국과 교류할 때는 중국의 피휘를 신경써주었다. [55] 고려 세조 왕륭.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이자 추존왕. [56] 고려 태조 왕건. [57] 고려 혜종 왕무. [58] 고려 정종 왕요. [59] 고려 성종 왕치. [60] 별무반(別班)의 사례에 미뤄보면 후대로 갈수록 해당 글자에 대한 규정이 느슨해 졌다고 볼 요지도 충분하다. [61] 창왕의 짧은 재위기간에 한해서. 아래에 설명. [62] 위에서 언급한 이호의 경우와 반대다. [63] 무반(武班)이 입는 관복에 호랑이가 수놓여 있었기 때문에 무반을 호반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다만 무반은 호반이라고 부르는데 문반은 학반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이 호반이라는 표현이 고려 때 피휘가 지금까지 남은 것임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64] 건(建)은 태조의 본명이고, 륭(隆)은 태조의 아버지인 세조의 본명이다. [65] '중국의 피휘' 단락에서도 설명했듯이 당나라도 治(당 고종의 이름)를 피휘해 理로 바꿨다. 자치통감이 편찬된 북송에서는 이미 왕조가 바뀌어 오래 전에 사라진 治 → 理 교체를 고려에서는 뒤늦게 시행한 셈. 그래서 본국에서는 문제가 없던 자치통감이 바다 건너 고려에서는 강제로 개명당해야 했다. [66] 가짜 (왕씨)를 폐하고 진짜 (왕씨)를 세운다는 뜻. [67] 그래서 고려사에도 반역열전에 수록되는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68] 창왕이 국왕이었을 때는 그의 이름을 피휘하지 않는 것이 역적질이었겠지만, 창왕이 왕위를 찬탈한 역적으로 규정된 이후에는 창왕의 이름을 계속 피휘하는 게 반대로 역적질이 됐을 것이다. 아버지 우왕도 마찬가지고. [69] 예외적인 사례로 인조. 선조가 아껴서 처음부터 외자로 지었다. [70] 여담으로 문종의 친동생인 평원대군의 이름이다. [71] 참고로 이 이단(李旦)이라는 이름은 당예종의 이름과 완전히 겹친다. 때문에 , 신당서를 간행할 때 곤란을 초래했을 가능성이 충분한데, 구, 신당서를 조선에서 간행하면서 당예종의 이름을 피휘해 표기한 예가 있는지는 확인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72] 게다가 정종의 형제들(나아가 정종과 같은 항렬의 대부분의 전주 이씨 남자들)이 모두 이름에 '방(芳)'이 들어가있으니 정종이 개명하지 않았으면 형제들도 개명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문제가 불거졌을 것이다. 송나라 태조 조광윤(趙匡胤)이 황제가 되자 동생인 태종 조광의(趙匡義)는 이름을 광의(光義)로 바꾸었다. (태종은 즉위 후에 다시 경(炅)으로 개명했다.) [73] 태조실록과 정종실록을 제외하고 나머지 실록에서 꽃다울 방 자는 총 1156회, 멀 원 자는 총 23896회 등장한다. 특히 '원' 자는 태종실록에만 약 200건, 세종실록에는 1200건이 넘게 나온다. [74] 피휘 문제는 아니긴 했지만 문자의 옥 중 가장 혹독했던 건륭제 시기에는 회명시집이라는 이름의 시집을 펴낸 사람이 회의 명이 명나라의 명과 음이 같다며 사형당한 일도 벌어졌다. 단 이건 건륭제가 워낙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댄 거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75] 앞서 말한 태종의 예처럼 두 글자 휘면 따로 한 글자는 피휘하지 않아도 되고 또 앞서 설명했듯이 왕의 휘는 통상적으로 5대까지만 피휘하면 되기 때문이다. 황제의 경우는 7대까지. 물론 이 원칙을 무시하고 왕조가 망할 때까지 피휘를 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두 글자 휘라도 한 글자를 피휘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물론 태종 이방원은 예외다) 단종의 휘는 무시되었다고 보면 된다. [76] 晃과 晄은 이체자 관계이다. 다만 조선 후기로 가면 晃을 인명에 쓴 예가 다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시간이 흐르면서 피휘가 풀린 것으로 보인다. [77] 반면 현대 한국어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78] 이는 祘과 동자관계에다 대단히 많이 쓰이는 편인 算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정조 당대에 산학산사의 이름이 주학계사로 바뀌었다. [79] 다만 건륭제 재위 기간에 재위했던 정조의 호가 홍재(弘齋)인 사실을 고려하면, 중국의 피휘를 따르는 경우는 외교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경우로 한정되었다고 볼 여지도 충분하다. 아무래도 청나라는 병자호란으로 대표되는 조선과의 역사적 악연 탓에 조선인들이 청나라 황제의 이름을 피휘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강했을 테니 말이다. [80] 1940년생을 전후한 세대로 현재 80대 노인들에 해당된다. 이순자 외에도 윤순자도 있다. [81] 현직 대통령이 대통령 신분이 아닐 때의 발언이 인용될 때에는 'OOO / 당시 OO당 대통령 후보\' 같은 식으로 표기한다. [MBC] MBC는 언제부터인가 피휘를 버렸다. 문재인 대통령(2022.5.9.) 윤석열 대통령(2022.5.13.) 현직 대통령에 대해서도 '윤석열 대통령' 같은 식으로 이름과 직책명을 함께 표기된다. 하지만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발언을 인용할 경우에는 'OOO / 직함'으로 표기하지만, 대통령의 경우에는 'OOO 대통령'으로 이름과 직함을 통째로 표기함으로써 대통령과 타 직함의 자막 표기법에 차이를 두기 때문이다. 만약 MBC가 완전히 대통령에 대한 피휘 표현을 포기했다면 'OOO / 대통령' 등으로 표기했을 것이다. [83] 2013년 안타깝게 요절한 가수 로티플스카이의 본명도 김하늘이었다. [84] 다만 김일성의 본명인 '성주'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85] 김일성 사망 3주기(1997년 7월 8일) 다음날(1997년 7월 9일) 태어난 탈북 유튜버 강나라는 김일성 사망일 주변 3일(7월 7, 8, 9일)은 출생신고를 하면 안 되기 때문에 북한에서의 법적 출생신고일이 1997년 7월 11일이었다. [86] 북한의 수령 우상화는 같은 공산권보다는 일본 제국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는 것이 정설이기에 일본식 통자 개념도 모방했을 수도 있다. [87]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이고 김일성은 나중에 바꾼 이름이다. 동생인 김영주의 이름으로 미루어 볼 때 '주'가 돌림자인 것으로 보인다. [88] 재미있게도 이런 모습은 중세 일본이나 근세 이전 혹은 현대 일부 입헌군주제 유럽 국가와 비슷하다. 목적까지 비슷한 것만은 아니지만 형식은 대강 비슷한 면이 있다. [89] 이것은 이름을 강조하는 것이니 이름을 피하는 피휘와는 반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오히려 로제타 석 같은 고전 이집트어 문헌에서 신이나 왕의 이름을 나타내는 상형문자 주위에 테두리를 쳐서 강조했던 관행에 비견할 만하다. 즉 북한에서는 방법은 좀 다르지만 고대에나 하던 짓을 하고 있는 셈이다. [90] PUA는 해당 문서의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유니코드에 공식 수록되지 않은 문자를 처리하고자 할 때 이용하는 영역이다. 북한이 굳이 PUA 영역에 해당 글리프들을 수록한 이유는 해당 글리프들을 유니코드 정식 문자로 추가하려다가 유니코드 컨소시엄으로부터 퇴짜를 맞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91] 북에서는 주석, 수령, 원수, 장군이라는 칭호 모두 김일성 김정일만의 것으로 만들어서 영구결번화, 다른 누구에게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실제로 주석 역할인 김정은의 호칭은 국무위원장이다. 그런데 김정은을 직접 영접한 아이들이 김정은을 '아바이 수령님'이라고 일컬었다는 북한 뉴스를 보아 김정은은 아이들이 이렇게 자기 할아버지 아버지의 칭호를 써서 높여 불러주는 것을 좋아하는 듯도 하다. [92] 에도 막부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요시(吉)'는 5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가 자신의 이름에서 따서 내려준 글자다. [93] 법적으로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규정된 것은 아니기에 본명으로 칭하는 사례를 아주 드물게 볼 수 있기는 하다. 천황이나 천황제 자체를 부정하는 극좌 세력에서 볼 수 있다. [94] 이렇다 보니 거주지나 관위가 바뀌면 부르는 명칭도 달라진다. [95] 한국에는 주로 도쿠가와 가문이 통치하던 에도 막부가 알려져 있지만 막부를 만들어 무신들이 정권을 잡기 시작한 것은 사실 1192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세운 가마쿠라 막부가 시초다. [96] 한국사에서도 피휘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게 통일신라 말~ 나말여초 때니까 일본에서 피휘 사례가 집중된 이 때와 시기적으로 맞물린다. [97] 훈독은 한자가 전래되어 보급되기 전부터 일본에 존재하던 말에 비슷한 의미의 한자를 갖다붙인 것으로 발음 자체는 일본 고유어이다. 음독은 해당 한자의 중국 발음과 (당시의 일본인들이 듣기에) 최대한 비슷한 발음을 나타낸 것이다. [98] 辰에 '때'라는 뜻이 있어서 통용하는 것이다. 요즘에는 잘 안 쓰지만 예전에는 시간이나 시각을 '시진(時辰)'이라고 많이 불렀다. 의미가 비슷한 時와 辰을 유사병렬의 형태로 결합해 만든 단어다. [99] 明과 朙은 이체자 관계에 놓여있는 글자들이라 피휘를 엄하게 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당나라 때 昞이 피휘 대상이 되면서 음과 자형이 통하는 丙도 금지시켰던 것처럼 엄격한 규칙을 적용했던 것과 비교된다. [100] 통상적인 부를 소(召) 자와 다른 점은 왼쪽에 日이 들어갈 만한 공간을 비워놓고 오른쪽에 찌그러진 召를 쓴다는 점이다. 여기서 응용해서 昭가 들어간 照(비출 조) 자도 日 부분만 비워놓은 기묘한 형태로 표기했다. 이 문헌은 한자의 뜻을 쯔놈으로 풀이해 놓은 책인데 본문에 照 자에서 日이 들어갈 자리를 비워놓은 글자가 보인다. [101] 응우옌 왕조 시절 베트남의 대내 국호가 대남(다이남)이었다. 대외 국호는 현재와 같은 월남(越南·비엣남). [102] 앞에서 말했듯이 (諱)는 본래 '꺼릴 휘'인데, 옛 관습에서 군주 등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꺼려져서 그 이름을 뜻하기도 한 것이다. [103] 친일파 중 이하영은 나쁜 이름으로 전락하진 않았지만 '하영' 이라는 이름은 여성 이름으로 써서 남자에겐 드물어졌다. 게다가 제주도의 경우 다른 지역보다 ‘하영’으로 짓는 사례가 적은 편이다. [104] 심지어 생로병사의 비밀에서 여자가 쓰는 경우도 있었다. [105] 애초에 -dolf, -dolph로 끝나는 이름이 매우 낡은 이름이라 2020년대 현재 기준 최소 40대 중년층 이상이다. [106] 그래서 래퍼 카녜 웨스트의 딸(노스)이라든지 배우 기네스 팰트로의 딸(애플) 같이 셀레브리티들이 자식 이름을 특이하게 지었다는 뉴스가 뜰 때마다 인터넷에서 저게 학대냐 아니냐로 키배가 벌어진다. [107] 그리고 인종주의 사상 그 하나만으로 양육권이 박탈된 것은 아니다. 웰페어에 의존하는 가장이 여러 차례 동거와 재혼을 했는데 가정폭력건이 적발된 경우다. 물론 위험분자인 관계로 미리 찍혀 감시받은 것은 사실이다. [108] 그러나 베네딕트라는 이름 자체가 낡은 이름으로 여겨지는 편이라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에서도 많이 쓰이는 이름은 아니다. 단지 미국에서 베네딕트 아놀드 트라우마 때문에 유독 베네딕트라는 이름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일 뿐이다. 극히 예외라면 베네딕트 컴버배치 정도. [109] 조선에서는 내시가 부인을 얻을 수 있었으니 삼족에 처가도 들어간다. 자식은 당연히 양자를 얻어야 했다. 양자는 주로 본가에서 들였지만 여의치 않으면 처가에서 데려올 수도 있었다. 내시의 양자도 내시가 되어야 했다. 연산군은 김처선의 양자 이공신을 처형함으로써 죄인의 아들 죽이기를 대신했다. [110] 다행히 권절은 3년 후인 정묘년에 재수해서 합격했다. 과거시험은 3년에 한 번씩 친다. 다만 나라의 중대한 경사가 있을 때 수시로 여는 과거시험도 있었다. [111] 자코바이트 문서로. 제임스 2세의 손자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일명 Bonnie Prince Charlie)가 찰스 3세를 자칭했다. 국왕을 자칭한 자코바이트 왕위 요구자들이 한두 명도 아닌데 왜 이 사람을 특별히 취급하냐면 이 사람은 말로만 떠든 게 아니라 실제로 왕위를 되찾으려고 망명지 프랑스를 떠나 스코틀랜드에 가서 반란을 일으켰었기 때문이다. 물론 영국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후폭풍이 상당했다. 킬트 등 스코틀랜드 전통 복장이 한 동안 금지되고 God Save the King에 '반란군 스코틀랜드인들' 같은 표현이 들어간 절이 추가되기도 했을 정도(현재는 해당 절을 부르지 않는다). [112] 찰스 왕세자는 성씨를 제외한 풀네임이 찰스 필립 아서 조지이므로 '조지'를 고를 수 있다. [113] 예를 들어 전임 국왕인 조지 6세도 왕자 시절에는 앨버트 왕자로 불렸지만 즉위한 뒤 조지 6세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영국이 나치 독일과 전쟁 일보직전일 정도로 사이가 험악(결국 얼마 안 있어 진짜 터진다.)해 총리가 독일식 이름인 앨버트를 안 쓰면 좋겠다고 제안해서였다. 그는 성씨를 제외한 풀네임이 앨버트 프레더릭 아서 조지였기 때문에 '조지'를 고를 수 있었다. [114]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로마노프 문서로. [115] 하필 徹을 通으로 바꾼 건 뜻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116] 이십등작 위에 따로 존재했던 제후왕은 제외. 제후왕은 한나라 초기를 제외하고는 유(劉)씨 황족에게만 내리는 게 관례화되었기 때문에 이십등작과 별도로 취급한다. [117] 列이 徹과 운이 같아 대체하는 글자로 선택되었다. [118] 따라서 후한이 멸망할 때까지 상산으로 불린 까닭에 조운이 그 유명한 상산 조자룡이 된 것이다. [119] 이런 경우는 전세계적으로 매우 흔하다. 예를 들어 중국의 경우 공산주의 국부천대 이전 중화민국에서는 반중이었지만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는 친중이었으며, 일본의 경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조선을 침략하여 수많은 조선인들을 죽인 극악무도한 침략자라고 비판하는 것이 도요토미 정권 시절에는 반일이었지만 에도 시대에는 친일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경우 러시아 제국을 좋아하는 것이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친러였지만 소련 시절에는 반러(반소)였다. [120] 쿄코의 부모가 자식의 본명을 숨기고 대외적으로는 일종의 자(子)를 사용하도록 했는데, 미키가 본명을 적은 쪽지를 발견했다. [121] 7권에서는 이러한 점을 역으로 이용해서 볼드모트의 이름을 부른 자는 강력한 추적 마법에 걸리도록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