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숭유억불( 崇 儒 抑 佛)은 불교 교단의 세력을 강제로 축소시키고 약하게 유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의 주요 국가시책이다. 숭유( 유교를 숭상함)라는 단어가 있지만, 포인트는 억불에 있음에 주의. 억불정책( 抑 佛 政 策) 또는 배불정책( 排 佛 政 策)이라고도 한다.조선을 건국한 창업군주 태조는 개인적으로는 불교에 매우 호의적인 사람이었다. 일단 불교가 국교이던 고려 사람임을 차치하고서라도, 무인 출신이라서 별다른 공부 없이도 열심히만 살면 누구든지 부처가 되어 복을 누릴 수 있다는 선종불교의 교리가 좋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건국 과정에서 급진적 개혁을 위해 기존 세력인 불교의 억제를 주장하는 신진사대부 세력과 손을 잡았기에, 건국과 거의 동시에 억불 정책들이 하나하나 시행되었다. 2대 정종은 유교나 불교 같은 것에 큰 관심 없고 재위기간이 짧아 뭘 할 수가 없었다. 본격적인 억불 정책은 태종 때부터 시작되었다.
2. 배경
삼국시대 때 불교가 들어온 이후 조선이 건국될 때까지, 불교는 약 1천 년간 국교의 위치에 서서 정교유착 관계가 깊었다. 지배계층이 불교의 교리에 자신을 끼워 맞추어서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를 호국불교라고 한다. 호국불교의 예시로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9개의 절을 만들었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 석굴암, 불국사 건립, 법흥왕에서 진덕여왕, 발해 문왕과 백제 성왕이 전륜성왕을 표방한 것이 그 예이다.태봉의 궁예나 후백제의 견훤은 본인을 미륵과 동일시했고, 고려의 태조 왕건은 유언으로 남긴 훈요 10조에서 불교의 입지를 공고히 하도록 적어 놓았다.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팔관회와 연등회 같은 불교행사를 국가적으로 치렀고, 수도에 궁궐보다 더 크고 높은 황룡사, 흥왕사 같은 거찰을 지었다. 이는 신라 진흥왕 시절이랑 비슷하다.
이런 경향은 위진남북조의 국가들과 수나라ㆍ 당나라 그리고 백제로부터 불교를 전래받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북위 때 만들어서 수·당 때 완공된 윈강석굴, 룽먼석굴, 그리고 남조의 양나라 무제의 전륜성왕 표방, 일본 야마토 왕권 때 고구려의 혜자로부터 불교를 배운 쇼토쿠 태자가 만든 시텐노지, 호류지, 그리고 나라 시대 쇼무 천황이 만들어서 주변 아시아 국가들의 승려들과 함께 대불 개안법회를 거행한 도다이지가 그 예다.
일반인의 생활에도 불교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영향력이 강했다. 예를 들어 조선 이전 장례에서는 화장(火葬)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고,[1] 제사 음식도 절에서 차렸다. 명절에 지내는 제사를 차례(茶禮)라고도 말하는 것도 제사상에 술과 차를 함께 올리던 불교문화의 흔적이다. 조선시대부터 불교색을 빼기 위해 술만 남긴 것이지만 옛 이름은 남은 것이다.
조선 이전에도 태종 무열왕[2]나 고려의 성종처럼 불교세를 누르고 유교적 정치를 추구한 군주들도 있었지만, 이들의 '억불'은 조선의 억불과 비교하면 강도나 목적이 완전히 달랐다. 중국에서든 한국의 삼국 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는 유불도 삼교가 융합된 유ㆍ불ㆍ선 삼교 합일 사상이 주류였지, 이 중 어떤 것을 강압적으로 배제하려는 태도는 시대별로 강경한 일부 외에는 대세가 아니었다.
고려 때는 국교가 불교라고 할 만큼 신라 때처럼 불교가 성행하고 불교의 권력도 강했는데, 이를 숭불호법(崇佛護法)이라고 한다. 그래서 고려 때는 초기부터 지눌 등 많은 승려가 불교의 너무 큰 권력과 폐단을 막는 개혁을 계속 일으켰다. 고려 말기( 원 간섭기) 불교는 원나라의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고려 왕에게 시집온 원나라 공주들이 건축한 석탑 등, 소수의 불탑에 티베트 불교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수선사 천태종 등 토착 불교의 세력이 강해서 티베트 불교가 전파되지 않았다.
고려 초기부터 불교는 귀족이나 지배층과 연계되어 막강한 교세를 누렸다. 고려 말기에는 "사찰이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소작민들을 부렸다"는 기록이 있고[3] 승려들이 권력을 부리거나 재산을 축적하여 고리대금업을 일삼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고려 초기 때부터 불교의 폐단을 막으려던 지눌, 의천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세력이 강해졌다. 그래서 신진사대부는 성리학을 주장하고 불교를 억제하며, 불교계가 소유한 재산을 축소하려고 했다. 정도전이 '청렴해야 할 승려가 재산을 축내는 일이 많아졌다.'고 비판한 기록이 있다.
실제로 고려 말에는 절 전국에 약 1만 3천 곳 남짓 있었고, 그 사찰에 토지 20만여 결(結)과 노비 10만여 명, 승려 15만여 명이 속했다고 추산한다. 고려 말 인구를 총 400만 정도, 경작토지 면적을 총 60만 결 정도로 추산하므로 당시 불교계의 재산은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
이 때문에 조선의 신진사대부는 불교의 세력을 억제하여 불교가 가진 토지 등을 개혁하였다. 불교세력을 청산하는 것이 필수적 절차인 것이었다. 무신정권의 최후의 승리자로 인정받는 최충헌이 왕이 아닌 권신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기존의 '고려'라는 틀을 깰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의 왕조 교체가 분열된 나라들의 통합을 이룬 것[4]이었던 것과 달리 여말선초의 역성혁명은 영토ㆍ인구ㆍ관제 등 모든 큰 틀이 그대로 유지된 채 그저 지배계층 내의 쿠데타로 국가승계가 된 것뿐인지라 기존의 틀인 고려와는 확실히 달라야 함을 드러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구왕조와 결별할 목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강하게 펼치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후 조선 후기 유림세력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서원이 자기들이 그토록 비판한 고려 말 불교의 모습과 똑같은 형태로 부패했다는 점이다. 결국 흥선대원군이 서원 47곳을 제외하고 죄다 쓸어버린 것도[5], 태종이 몇몇 사찰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찰을 뜯어낸 것과 흡사하다.
3. 숭유억불의 사례
아래는 여러 가지 사례를 언급한 것이다. 어떤 것은 여러 임금에 걸쳐 꾸준히 지속되었고, 어떤 것은 한 임금 때에만 시행하였다.-
산지로 사찰 강제 이전/도시 내 사찰 폐쇄
조선 이전에 절은 산기슭만이 아니라, 지금의 성당이나 교회와 같이 도시의 길거리에 흔히 있는 시설이었다. 경주시에 있는 황룡사니 분황사니 사천왕사니 하는 큰 절 유적은 대부분 평지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절들을 산중턱으로 보내면 접근성이 떨어져 자연히 신도가 줄고, 시주도 줄어들어 규모가 쪼그라들고 세력확장이나 정치세력과 야합하기가 어려워진다. 한국의 절들이 대체로 산에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6] 이렇게 남은 산사들은 중국이나 일본 등 다른 나라의 불교와 다른 형태로 자리잡았고,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되었다. 유네스코도 한국 특유의 산사가 형성된 과정을 설명하며 조선왕조가 도시사찰을 없애는 일 등 숭유억불 정책을 언급했다. # 도심지역 사찰 건물과 부지는 대개 향교로 재사용되었다. 고령향교나 부여향교의 건물에는 불교 특유의 연꽃 무늬가 새겨진 삼국시대 주춧돌이 쓰였다. 한편 승려의 신분이 낮아졌고 산에 산다는 이유로, 선비들이 행차할 때 산에서 잡일 일꾼이 필요하면 승려를 강제로 차출했다. 조선시대 문인들이 금강산 등 명산을 유람하면 그 산에 있는 승려들을 가마중으로 차출해서 선비들이 앉은 가마를 어깨에 지고 산을 올랐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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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종파의 강제 통폐합
태종은 불교 종파를 11종단에서 7종단으로 줄였고, 세종은 더 나아가 2종파로 줄였다. 종단 통합 시도는 앞서 고려 광종, 숙종 시절에도 있었으나 목적이 달랐고 시도에 그쳤으며 축소 규모도 조선 초의 통폐합이 아주 컸다.
- 사찰의 숫자와 승려의 숫자를 강제로 줄이기. 태종은 전국에 242개 사원을 제외한 나머지 사찰을 폐지했다. 이는 고려 성종 시절 성종과 최승로가 첫 삽을 떴다. 단, 성종은 고려 왕 중 특별히 유교적인 케이스에 가까웠고, 팔관회 폐지 등은 2대를 못 가 현종이 되돌렸다.
- 도성 내 절은 불태우거나 가정집 등으로 전환. 세종 대에는 조선 전국에 선종 18개소, 교종 18개소를 합쳐 총 36개 절만 인정하였다.
- 승려들은 환속을 강요받았다. 초반기엔 도첩이 없는 승려에 한해 강제되었는데, 얼마 가지 않아서 다시 승려가 된 사람들이 속출한 것을 보면 가끔씩 한번 휘몰아치고 잊어버리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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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시험에서 승과를 폐지
승과는 중기 문정왕후가 다시 시행했다가 그가 죽자 다시 폐지되었다.
- 사찰이 가진 모든 토지와 노비 등을 국유화. 승려들 보고 스스로 먹고 살라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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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
다른 억불정책은 오래 가지 않아 엎어지거나 완화된 것도 있지만 이 정책만은 철저히 지켜지다 구한말에야 해제되었다. 오랜 억불정책 청산의 상징으로 불교계는 지금의 조계사를 조선시대 이래 처음으로 사대문 안에 창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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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사찰 출입 금지
고려 말에는 1361년 어사대에서 '몇몇 승려 무리들이 과부나 외로운 여자를 꾀어 비구니로 만들고 음욕을 행하며 불사를 행한다.'고 주장하며 교정에 나섰다. 이후 정도전이 불씨잡변을 써서 불교를 비판한다. 고려시대에 승려가 음욕을 행하려고 했다는 기록은 이것뿐이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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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첩제
나중에 금승법으로 대체되나 오래 가지는 않았다. - 경국대전의 도승조(度僧條)폐지
- 국사(國師), 왕사(王師)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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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 조상
제사 대행 금지.
고려 시대에는 조상의 위패를 절에 맡겨서 제사를 대행시킨 경우가 많았다. 조선이 들어서면서 백성들의 효심을 약화시키고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이러한 행태가 금지되었다. 조선이 망한 후 현대에 들어 다시 절에 제사를 맡기는 경우도 늘었는데, 5만 원만 내면 대신 지내 준다. 대표적인 제사가 바로 49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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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 불교 행사 폐지
팔관회는 건국되자마자 폐지되었고 연등회는 규모가 줄어들었다. 신라 때부터 열렸던 팔관회와 연등회는 고려 성종이 일시적으로 폐지한 적이 있었으나 이후 현종 시절 다시 부활해 고려시대 내내 번창했다. 두 행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소홀히 하지 말라고 훈요 10조를 통해 당부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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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세 혜택 금지
지금으로 치면 종교인 과세와 비슷한 것인데, 조선 초에는 승려들이 조세는 물론 공물도 제공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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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재산 몰수
절을 부숴서 승려는 군인으로 바꾸고 남은 땅은 향교에 붙이기도 했으며 #, 절에 걸린 범종은 떼어내 녹여서 승자총통 등으로 만들었다. # 심지어 에밀레종도 없애자는 여론이 있었지만, 이는 세종이 따로 지시해서 막았다. #
국립경주박물관 경내에 소장 중인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불상들. 몇몇 예외를 제외하곤 모조리 모가지를 쳤다.
오래된 불상들 중에는 머리가 없거나 훼손된 것들이 있다. 그렇게 훼손된 불상 대부분은 조선 유학자들이 부순 듯하다. 지금까지 파괴된 채로 유물로 남은 사례로 남산 삼릉골 소재 불상군, 용장계 탑상골 용장사지 미륵장육상, 미륵골 보리사 석조여래좌상, 용장계 절골 약사여래좌상, 금강산 굴불사지 불상군, 분황사 경내 우물 속에서 발견된 목이 잘린 불상 20여 좌 등이 있다. 불상뿐 아니라 고승의 행적을 비석에 새겨 기록한 고승비와 그 고승비를 받치고 있던 거북 모양의 귀부 등 불교와 관련 있는 다른 문화재들도, 조선 전기에 다수가 파괴되었다.
그 예시로 절은 유학자에게 파괴당하고 간신히 불상만 살아남아 문화재로 지정된 울주 간월사지 석조여래좌상 문서에서, 조선 후기에 유학자들이 어떻게 사찰과 불교 문화재를 반달했는지 자세하게 읽어볼 수 있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억불 정책은 현대 대한민국의 문화재 연구방법론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존하는 고·중세 문화재의 대부분은 결국 종교 관련 작품들이다. 근대 이전의 인류는 일상생활부터 정치·경제·사회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서 종교문화가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은 삼국시대 초부터 고려말, 조선 초까지 약 1500여 년간 사회의 근간을 이루었던 불교 관련 문화재들이 숭유억불 정책으로 큰 타격을 받으면서 이를 연구하는 데 큰 문제가 생겼다.
예를 들어 한국을 대표하는 불교 문화재로 손꼽히는 반가사유상 같은 작품들은 조선시대에 사찰들이 대거 폐사되면서 땅 속에 파묻혔던 걸 후대에 다시 발굴했거나, 또는 민간 또는 해외로 팔려 돌아다니다가 현대에 연구자들이 재발견한 것들이라 이 작품들이 본디 어디의 어느 사찰에서 어떻게 만들어 사용했던 것인지를 전혀 모른다. 반면에 한국과 같이 반가사유상의 대종주국으로 알려진 일본에는 고류지(廣隆寺), 교토 묘덴사, 효고 게이운사, 대마도 정림사, 나가노 관송원, 고노사, 조린사, 주구사, 샤쿠젠사 등 각 불상들이 최초 제작한 사찰에 그대로 남았기 때문에 해당 불상의 문헌기록, 내력, 의식법구로서 사용방법 등을 상세히 연구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는 한국에선 불가능하기 때문에, 주로 그 불상의 양식 및 제작기법을 조사하는 쪽으로만 학계가 연구한다.
국보 반가사유상 외에도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 공주 의당 금동보살입상, 금동보살입상(국보 제129호), 금동관음보살입상, 경주 월지 금동 불상, 경주 황복사지 금동 불상,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국보 제183호),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국보 제184호),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미국 환수 금동불입상, 금동보살입상(국보 제200호), 금동보살입상(보물 제285호), 김천 양천동 금동반가사유상, 안동 옥동 금동반가사유상, 양산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하버드 미술관 소장 신라 금동반가사유상,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 등 다양한 국보, 보물급 불상들 대부분이 원 사찰명이나 제작지역 등이 모두 추정이거나 아예 알 수 없는 상태에 있으며, 그 유물이 정확히 몇년도에 만들어졌는지 상세 연대를 알 수만 있어도 바로 국보급으로 승격 지정된다. 구 조계사종 같은 국보급 유물조차 온갖 논란이 발생하는 것이 한국의 현 문화재 현실이다. 근데 오히려 이 덕분에 여러 문화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아이러니한 평가도 받는데, 땅속에 묻힌 동안 한국사의 격동의 시기와 도굴을 피해 현재 우리에게 발굴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뜬금없게도 숭유억불로 사찰들이 몰락함은, 한국의 고중세 토지제도 및 사회상 연구에도 방해요소가 되었다. 의외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당시 토지제도, 경작기술을 가장 자세히 기록을 남긴 곳이 종교시설들이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최초에는 근세 학자들이 중세의 편견에 사로잡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각국의 토지 제도가 몰락하고 농업생산력이 크게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세 수도원이 남긴 다양한 경작기록들을 찾아서 당대 서유럽 지역 토지제도를 자세히 연구한 결과, 지금은 고대 로마 때에 비하여 오히려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을 완전히 증명하였다. 일본 또한 국가에서 만든 역사서 기록에는 토지제도 및 경작 방식에 관한 내용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대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된 도지햐쿠고몬조(東寺百合文書)[9] 등 다양한 사찰 기록물을 가지고 당시 사찰 소유 농지에서 생계를 꾸린 농민들의 생활상과 경작기술, 장원 운영방법 등을 자세히 연구한다.
이는 근대 이전 인류가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종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생활했고, 종교시설이 민간생활사에 깊숙히 파고들었기 때문이다.[10] 한국 역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고려말까진 사찰이 이러한 역할을 했고, 서양 수도원이나 일본 사찰들처럼 당대 토지제도 및 경작에 있어서도 다양한 기록을 남겼던 듯하다. 하지만 억불정책 이후로는 도시나 민가 가까운 곳에 있던 사찰들은 죄 사라지고 산사(山寺)들만 남아서 수많은 민간사 기록이 완전히 리셋되어 버렸다. 과거부터 동서양의 여러 정부기관에서는 공식 역사서를 통해 그 나라의 정치, 경제 등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종교 시설에서는 각 지역의 민간 생활사 및 미시사 기록을 남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국 사찰은 조선 이후로 몰락에 몰락을 거듭하면서 민간 기록이고 뭐고 살아남기도 힘든 상황이라, 기존에 있던 기록물까지 다 날려버렸다.
조선이 책의 보관을 중요시하긴 했지만, 사찰의 규모가 작아지면서 돈도 부족한 스님들이 이걸 다 보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이러한 사례는 각국에서 나타나긴 했다. 일본도 메이지유신 시기 파불훼석을 진행해 여러 사찰이 사라졌고 [11] 모스크와 교회도 전란과 역사의 흐름 속에 상당수 기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들의 주류종교는 결코 바뀌지 않았고 땅넓이가 조선보다 훨씬 넓었기에 여러 기록이 남을 수 있었다. 비슷하게 유목민과의 전쟁과 주류체제의 변화를 많이 겪은 중국은 사찰 기록이 부족한 상태이지만 대륙의 기록이 워낙 남긴 게 많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조선 말기에 가면 사실상 한국의 불교 문화는 거의 고사했다. 유네스코에서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을 등재하면서 인증했듯이 산속 깊은 곳으로 숨어든 사찰 외에는 완전히 몰락했고, 이 과정에서 한국 불교에서는 기본적인 의식례조차 모두 뿌리 뽑혔다.
예를 들어 차 문화를 보자. 동아시아에서 차 문화는 불교와 관계가 밀접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억불정책이 5백여 년간 이어지면서 져 내려오면서 조선에서 다도 문화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19세기 사람 초의선사가 "이젠 승려들이 차 우리는 방법조차 모른다." 하고 한탄하며 다신전, 동다기, 동다송 등 한국 고유 다도문화를 설명하는 책을 저술했지만, 이 내용조차 매우 소략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까지 천 년 넘게 이어지던 한민족의 고유한 다례문화는 맥이 끊겼다.[12]
조선 말기에 이르면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이 "한국은 주변국과는 달리 불교의 역사나 교의에 대해서, 불교의식의 취지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로 대부분 승려들이 그저 '몇 마디 음절들'[13]만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평가할 지경이었다. 구한말 가톨릭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에서도 '종교적 토론을 해보고자 승려들에게 접근해도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때문에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 일본 불교계가 조선 불교계를 사실상 장악했다.
이 당시는 종교들조차 뿌리 깊게 왜곡된 자연 선택설이 침투하면서[14] 서양을 시작으로 각 국가의 종교가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소프트파워 경쟁을 하던 시기였는데, 오랜 억불로 승려의 질이 너무 낮아져 염불조차 제대로 못 외우게 된 한국 불교가 일본 불교계를 이길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분명 삼국시대 때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승려들이 일본에서 귀빈 대접을 받으며 벽화 하나만 그려줘도 난리가 났었고, 조선 초까지만 하더라도 대장경 인쇄본(인경판) 하나만 달라고 국가적으로 사정하던 때가 있었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시기에 억불로 인해 갑을 위치가 완전히 역전되어버린 것이다. 사실상 이로 인해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하고 한국 불교가 일본 불교계에 흡수되다시피 하고, 당시 불교와 함께 한국 종교를 이등분하던 천주교 또한 조선 정부가 가한 수많은 박해 사건 때문에 뮈텔 주교가 105인 사건 때 눈밭을 맨발로 걸어가 독립운동을 신고할 정도가 되면서 사실상 한 국가의 종교 자체가 파탄이 났다.
그러나 이런 정책의 목표는 교단의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 세력을 억압하고 교세를 강제로 축소하는 것이지, 부처의 가르침 자체를 금지하고 불교 신앙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뿌리 뽑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진짜로 그럴 목적으로 시행된 것이라면 금승법 정도. 내세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유교만으로는 대중들의 종교적 욕구를 모두 충족하기가 어려웠으므로, 불교를 찾는 대중의 수요는 사라지지 않았다.
난잡해서 규율이고 뭐고 없는 토속신앙이였다면 모를까, 불교는 엄연히 체계와 규모를 갖춘 종교인 데다가, 조선 개국 시점에서도 민중에게 뿌리 내린 지 천 년에 가까웠기 때문에 완전히 없애기란 불가능했다. 불씨잡변을 쓴 정도전처럼 불교 혐오 성향이 짙은 강경파 사대부들도 그런 현실을 무시할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았다. 이런 강경파 사대부들의 집에서조차도 어머니나 아내가 절에 다닐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15] 그래서 태조가 무학대사를 왕사로 임명하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 감히 반대를 표할수 없었다. 따라서 민간신앙으로서 불교는 접근성을 낮추는 간접적인 조치만 취하고 놓아두되, 교단에서 현실정치에 영향을 부릴 만한 힘은 빼앗은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무엇보다도 불교와 지배층의 야합이 가장 경계되었고, 결국 사대부들과 관료들 사이에서는 불교를 멀리하고 불교를 맹렬히 공격할수록 개념인이라는 풍조가 정착했다. 경연이나 국가시책 회의에서 역대 왕조를 평가하면서 '이게 다 불교 때문'이란 식으로 책임을 돌리는 사례도 많았다. 특히 고려 왕조가 멸망한 이유가 하나도 둘도 불교였다는 건 거의 고정된 레퍼토리 수준. 이 외에 중국 군주나 왕조가 오래가지 못한 것은 불교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이는 여러 역사적 요소들이 결합된 결과를 무시하고 부정적인 결과들의 원인을 단순히 불교라고만 치부한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비록 불교신앙이 금지된 것은 아니었으나, 혹세무민이나 기복신앙과는 담쌓고 부처의 가르침 자체를 가까이하는 사대부조차도 사대부답지 못하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율곡 이이 같은 당대의 거물 유학자도, 생전은 물론 사후 100년 가까이 지난 현종 시절에 이르기까지 한때 절간에 들어가서 불경 좀 외우고 다녔다고 비난을 받았다.
정부 차원에서 억불을 행하기는 했어도, 그나마 한양이 지방보다는 덜 심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대체로 왕은 불교를 그나마 옹호하려고 하고 성리학자 대신들이 주로 비판했다. 태조 이성계조차 잠저 시절부터 독실한 불자였고, 효령대군 같이 불교에 우호적이었던 왕족도 있었으며, 이후로 간간히 왕이나 왕실인사가 불교를 보호하는 경우가 잦았다. 정부에서도 두부 제조나 공사 등에 승려들을 동원했고, 동서활인원에서 일하는 이들도 노비와 승려였고, '매골승'이라고 해서 한양과 성저십리에서 버려진 시체를 매장하는 것도 승려가 맡았다. 또한 유생들이 너무 승려들을 핍박하면 유생들을 처벌하기도 했고, 유생들이 절에 올라가서 행패를 부림을 알고는 절에 가는 것을 금하는 상서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런 풍조 속에서 지방 유생들이 개별적으로 회암사나 분황사 등 절에 직접 테러를 가한 정황도 있다. 회암사 사례는 아래에 따로 서술했다. 분황사에선 근처 우물[16] 안에서 목이 잘린 불상 수십 좌가 나왔다. 불상은 비록 넘어지면 목이 쉽게 부러지는 구조이지만, 목 잘린 불상이 우물에 가득 쳐박혔음을 반 불교적인 사람들이 작정하고 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불상들은 건져서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관에 줄 세워 놓았다. 경주 남산에서도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의도적으로 파불(破佛)됐던 불상과 조각의 안면과 목을 다시 몸체에 붙여놓은 모습을 허다하게 볼 수 있다. 1509년에는 유생들이 청계사의 경첩을 훔치고, 1510년 3월에는 흥천사 5층 사리각을 방화했다.
이런 극단적인 사례들은 일부 유교 극단주의자들이 주도한 듯하다. 조선 조정의 공식입장은 이 정도로 강경하지는 않았다. 또한 사찰에 이 짓을 하려다가 오히려 처벌받은 사례도 있다. 특히 아래에 나온 것처럼 왕실과 직접 연관된 사찰, 실록 보관 등 조정이 맡긴 일을 하는 사찰을 테러하면, 억불의 문제가 아니라 조정과 왕실에 도전한다는 의미가 되므로 엄히 처벌했다.
임진왜란에서 불교계가 활약하면서 약간 억압이 완화되었던 적도 있었다. 그 예로 승려의 묘비라고 할 수 있는 고승비는 삼국, 고려 시대에는 활발하게 제작되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막 건국된 이성계 대에 세워진 것을 제외하고 15, 16세기 200년 동안에는 억불정책 때문에 단 한 기도 세우지 못했다. 그런데 임진왜란에서 활약해 광해군에게 배려를 받은 유정대사를 기점으로 우후죽순처럼 세워져 19세기까지 170여 개가 세워졌다. 이는 인조대를 지나면서 왕실 후손 특히 아들의 숫자가 급속도로 적어진 것과도 연관이 있는데, 어떻게든 후사를 보아야겠기에 왕실 여성들이 불교를 신봉했고, 왕들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임진왜란 이후에 승려들이 승병이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예비군 조직으로 편성되면서 예전처럼 마냥 억압되지 않았다. 추사 김정희는 아예 만년에 봉은사에서 머리 깎고 불교 수행을 하기도 했을 정도. 봉은사에는 오늘날에도 추사가 쓴 현판이 남아 전한다. 또한 불교계도 살 길을 모색해 이런저런 편법을 쓰기도 했다.[17]
물론 억불이라고 해도 조선 후기에 들어온 천주교처럼 대놓고 박해한 건 아니다.[18][19]
조선시대 동안 불교는 그럭저럭 명맥은 이었으나, 숭유억불이 약 500년간 계속되면서 조선 말엽에는 한국 불교가 고사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불국사와 같이 조선 중기에는 전라도에서도 신도가 찾아가던 대찰이 다 무너져가는 상태로 사진이 찍혔다. 이때쯤이면 제대로 구족계를 이어받은 승려도 나오기 힘들어졌다. 밀교를 이은 소수 법맥은 종파는 조선 중기까지 어찌어찌 명맥을 잇다가 끝내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갑오개혁을 전후해 억불정책이 끝나고, 천민 대우를 받았던 승려들이 서울을 출입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억불정책은 일제강점기에도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 불교가 식민지 체제에 협조적이었던도 이 억불 정책의 잔재라는 해석이 있다. 오랫동안 한국 불교가 억압당했음을 알고 일제가 불교에 회유책을 폈고[20], 불교계도 여기에 넘어가서 식민 체제에 협조했다는 것.[21] 그 외에도 승려나 불교단체를 천시하는 풍습이 유교계에서 여전히 남아 있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설립된 뒤로는 숭유억불의 잔재를 완전히 폐기하고, 절을 문화재로 지정하거나, 사찰에 있는 문화재를 복원하거나 절을 복원하는 등 문화 보호 정책을 시행하고 나서야 조금씩 사찰이 회복되고 있다.
억불정책의 영향은 속담이나 관용구에도 남아, 승려나 절이 등장하는 속담은 땡중이나 파계승을 뜻하는 굉장히 부정적인 내용이다. '스님'이나 '승려' 대신 '중놈'으로 표기된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예시를 들면
- 중놈 장에 가서 성내기
- 비 맞은 중놈 중얼거리듯
- 산골 중놈 같다
- 의뭉한 중놈
- 미친 중놈 집 헐기다
- 중놈 돝고깃값 치른다
- 불알 차인 중놈 달아나듯
- 미운 중놈이 고깔 모로 쓰고 이래도 밉소 한다
- 중놈을 붙어먹었더라
- 자식 셋은 지리산 어느 중놈이 맨들었나
등이 있다. 속담 속의 중은 보기 싫은 짓만 하고 고기를 사먹으며 남몰래 정까지 통하는 막장 땡추로만 보인다.
4. 조선 후기의 불교 부흥
다카하시 도루의 <이조불교>같이 전반적인 통설은 조선시대에 불교세가 위축되었다고 보나 조선시대에도 불교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
4.1. 배경
- 임진왜란을 거치며 불교계 인사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전쟁을 거치면서 불교계가 임금과 나라에 충성하는 모습이 돋보였다. 이 덕분에 국가 차원에서 불교를 호의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이른바 호국불교로 불리는 현상이다.
- 절과 승려가 철저히 피지배층으로 재구성되며, 불교를 억압해야 할 필요성이 사라졌다. 고려시대 불교의 타락을 받쳐주던 요소들은 확실하게 절단났다. 역성혁명 이후 종교계의 존속 기반은 철저히 국가의 통제 하에 있었고, 불교는 국가 입장에서 부담없이 나랏님의 은혜를 배풀 수 있는 신민일 뿐이었다.
- 왕실과 사대부들 상당수가, 특히 여성들이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다. 이 덕분에 절에는 경제적인 지원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절에서 법당이라도 짓는다고 하면 사대부와 평민을 아우르는 수많은 집에서 시주를 했다. 고을 사또 같은 높으신 분들이 유람할 때마다 접대를 해야했던게 조선시대 사찰이었지만, 오히려 이 덕에 유원과 사유의 장으로써 보존될 수 있었다. 특히 유명한 절일수록 빠짐없이 왕실이나 유력 가문의 원당이 자리잡았으므로, 사회적 뒷배를 든든히 할 수 있었다.
4.2. 불교 용인의 사례
조선 중기 이후 이뤄진 불교에 대한 호의적인 환경은 한국의 문화재가 다채로워지는데 일조했다. 특히 한국의 불교는 중국과 일본에서 볼 수 없는 연등회, 10m를 넘는 궤불, 야단법석처럼 독특하고 화려할 뿐만 아니라 스케일도 어마어마한 규모의 유산이 남게되었다.한국 건축에도 유의미한 족적을 남겼는데, 17세기부터 건축 의장이 화려해지는 경향을 사찰에서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런 장식화 경향은 점점 심화되어 19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는데 시대별 사찰 건물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차 문화는 유학자와 사대부들이 불자들과 교류하면서 19세기들어서 오늘날 한국 다례의 형태를 확립했다. # 김정희, 정약용 등의 사대부들은 초의선사 등과 교류하면서 차문화를 향유했다.
조선시대 차 문화는 억불로 불교적인 특성이 빠지고 왕실, 관청, 사대부가 중심이 되었다. 고려시대보다 훨씬 격식회되었다고 평가받는 다례는, 왕실이 주관하는 연회, 주다례·별다례 등의 제례, 중국 사신단의 접견의례, 그리고 왕실 가족들의 사적인 모임들에서 차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조선왕실의 중요한 음료문화였다.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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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다수의 전통사찰이 조선대에 중창, 복원됨
현존하는 사찰 대부분이 조선 후기에 중창·중수되었고[23] 불서가 빈번히 간행되었으며, 수행 체계와 법통이 정립되고 강학이 성행하고 교학이 전수되는가 하면 사원 경제의 기반이 확대되고 염불정토 신앙이 성행했다는 것이다.
폐허가 된 조선 후기 불국사처럼 또 많은 사찰이 망해서 없어진 것도 사실이나, 쇠퇴했다는 말은 인터넷 내의 괴장섞인 망상에 가깝다. 그 이후 중창/초창된 절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일단 불국사는 삼국시대 이후로는 기록이 거의 없어 고려시대에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논란이 많은데, 일단 불국사는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방화로 한 번 크게 불타 사라진 것이 확인되는 기록 중 첫 번째 소실이다. 지금도 대웅전의 장대석 등을 살펴보면 당시 화재의 흔적이 남아있다.[24] 폐허가 된 사찰만큼 다시 중창된 사찰 역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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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개수의 증가
정조 시대의 기록인 ‘범우고’에는 1760여 개 절이 기록되었는데, 이는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숫자보다 많다. 따라서 조선 후기 기간 동안 절의 숫자는 늘어났다고 추측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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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의 신분
또한 한국 불교사에 관련하여 가장 학식이 깊은 손성필 교수도 2013년 <보조사상> 제40집에 게재한 "조선시대 승려 천인신분설의 재검토"에서 '조선시대 승려는 천인 신분이 아니었다. 승려 천인 신분설은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현대에 팔천 운운하는 엉터리 서적들 때문에 호도되는 부분인데 승려는 직업일 뿐 양천제 국가 조선에서 천민은 노비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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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의 숭불
정치적으로 보자면 이전 삼국, 고려 때에 비해서 그 화려하고 창대했던 귀족적 세력과 지배층적 성격이 크게 줄어든 것은 부정할 수 없겠다. 특히나 돈줄이 되어 줄 수 있는 당대의 사대부 권력층이 워낙에 불교를 멀리하는 바람에.[25] 당장 조선왕조실록에서 불교나 승려 같은 단어를 검색하면, 불교를 공격하는 기사들이 한 트럭 쏟아진다. 그러나 지배층은 여전히 불교를 믿었다. 사대부들 역시 유교가 맡을 수 없던 일상과 가정의 기복, 내세에 대해서는 불교에 의지했다. 49재가 대표적이다. 조선 후기와 말기로 갈수록 불교 신앙은 계층을 불문하게 되었다. 따라서 천인은 물론이고 세도 가문인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가문도 불사에 같이하고 불공을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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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차원으로 사찰에 특혜 제공
왕실과 사대부는 절에서 복을 자주 빌었는데, 정말로 복이 생기면 기뻐하며 사찰에 토지나 불화, 종(鐘), 돈 등을 시주했다. 정조의 경우 순조의 탄생에 고마워하며 사찰에 토지를 내린 기록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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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의 불교 신앙
중앙 정치에서 지배층은 입으로는 불교를 꾸준히 배제했으나 마음은 불교를 버리지 못했다. 신앙과 기복의 영역에서 불교의 몫은 도저히 대체할 수 없는 요소였기 때문이다. 팔관회는 그 사치스러움으로 폐지되고 말았으나 연등회는 민간영역에서 여전히 진행되어 지배층들도 즐겼고, 수륙제는 왕실에서 계속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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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와 승려 사이 활발한 교류
유학자들의 불교에 대한 비판은 정도전이 제기한 부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조선시대 유생은 공부를 위해 산 속 절에 숙박하며 공부하는 문화가 있었다.[26]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불교와 유교의 교류가 일어났다.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거나 고승들과 시문을 교류하던 유학자들은 대표적으로 퇴계 이황, 율곡 이이, 허균, 정약용, 추사 김정희, 안동 김씨 세도가문의 김조순 등이 있다. 이들은 불교를 믿지않지만 그렇다고 배척하지는 않는 사고를 가졌다. 오히려 유학자들 중에는 불교에 애착을 가진 이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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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에 대한 특혜
조선 후기부터 국역을 돈으로 대신하는 추세에 따라 승려의 징발도 점차 줄었다. 백성에 부담되는 역을 완화하려는 움직임도 절과 승려에 적용되었다. 이후 세도정치기에는 세도 가문들이 직접 금강산 거찰이 부담하던 공납의 폐단을 혁파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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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숭불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대체로 왕은 불교를 나름대로 변호하려고 하고, 성리학자 대신들이 비판하는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 즉 왕실은 불교계가 정치에 연관되지 않는한 온정적, 우호적이었던 편이다. 특히 어린 자녀를 잃은 왕은 대신들의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자녀의 명복을 비는 불사를 일으키려는 시도도 종종 했다. 아무래도 임금이나 왕비보다 현실 정치에 거리를 둔 대비나 후궁, 공주, 옹주 등의 왕실 여성들은 대놓고 불교를 믿었다. 국왕도 이런 왕실 인사들의 불교 행사 참여를 비판하는 중신들을 씹고 불교를 후원했다. 양란을 겪고 조선 후기로 넘어올 때도 왕실은 아예 '숭불'을, 숭불이 아니더라도 불교를 용인하는 모습을 쭉 보여준다. 이는 전쟁으로 왕실의 권위가 위험에 처해지자 백성들이 많이 믿던 불교에 더욱 의존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실의 구성원들은 1910년 망할 때까지 아이의 탄생, 망자 애도, 복을 비는 것 등에서 불교에 크게 의지했다.
5. 예외 : 불교에 유화적이었던 군주
아래 예외를 제외하면 조선 왕들은 모두 유교신자였다. 또한 예시의 왕들 전부가 불교 신자라고 단정할 수 없음에 유의. 확실히 불교 신자라고 볼 수 있는 조선 왕은 태조와 세조였다. 세종은 초반에는 태종처럼 불교를 안 좋아했으나, 아들 평원대군의 장례 이후로 불교를 믿게 되었다.5.1. 태조
태조 이성계는 왕이 되기 전부터 원래 불교를 독실히 믿는 전형적인 고려인이었다. 특히 무학대사를 왕사(王師)로 임명한 것이나[27] 그와 교류를 나눈 것을 보면 조선 최초(最初)이자 최고(最高)의 친불(親佛) 군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유교 국가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불교를 혐오한 정도전조차도, 이성계에게 '왕위에 오르려면 불교를 포기하라.'고 요구할 순 없었다. 그러나 신앙심과는 별개로 불교를 억눌러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상왕(上王)으로 물러났을 때에도 아들인 태종 이방원의 억불 정책에 반대하여 단식투쟁까지 하였을 만큼 불교에 매우 친화적이었고, 실제로 철선[28]을 하자 태조의 건강을 염려한 태종이 철선을 그만둘 것을 청함에도 '주상이 불교를 탄압하지 않으면 고기를 먹겠다.'라고 말해 태종의 탄압을 막았다. #
사실 이는 특이한 일이 아닌데, 이성계는 불교를 숭상한 고려인으로 대부분의 삶을 보낸만큼 불교에 우호적인 성향을 가지기도 했고, 조선 건국 후에는 태종 이방원과의 갈등과 삶에 대한 회의감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많지 않아 자연스럽게 더욱 불교에 의지할 수밖에 없기도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이 종교에 귀의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5.2. 세종
초기에는 태종의 억불정책을 계승하여 세종 6년(1424)에 불교 종단을 통폐합하여 선교 양종만 남겼고, 태종의 폐불정책 이후 전국에 남아 있던 사찰들을 다시 무너뜨려 오직 36개만 남겼다. 그리고 승려들의 도성 내 출입을 금지했다.그러나 비록 무산되기는 했지만 모후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 근처에 사찰을 지으려고 했으며[29], 차후 내불당을 설치하고 승려 신미대사를 총애하고 승과를 실시하는 등 상당한 친불 정책을 행하였다.
심지어 소헌왕후 심씨가 와병중일 때 소헌왕후의 쾌차를 위해 불사를 벌일 때는 반대하는 신료들에게 '너희들은 똑똑한 신하들이고 나는 도리를 모르는 임금이라 너네들이랑 잘못 논의한거 같으니 집현전 관원들 불러와!' # 라고 하거나, '너희들만 훌륭한 선비고 나는 무지한 임금이라 나 하고 싶은대로 할테니 잘난 니들은 무지한 임금이랑 말섞지 마라 #'며 짜증냈다.
그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을 보급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친숙한 부처님의 이야기를 석보상절로 낸 것을 보면 당시 백성들의 불교 신앙도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정치가로서의 이유 뿐만 아니라 세종 개인으로서도 재위 초 정소공주가 일찍 죽고, 아들인 광평대군과 평원대군마저 재위 후반기에 연이어 일찍 죽은 데다 아내 소헌왕후까지 연이어 세상을 떠나면서 심적으로 의지할 곳을 찾다보니 불교쪽으로 점점 마음이 기울어지기 시작한 연유도 있을 것이다.[30] 석보상절은 아예 소헌왕후가 사망한 뒤에 편찬된 것이고, 위에 언급한 소헌왕후의 쾌차 관련 불경 간행과 불사를 신하들이 뜯어말리던 시점에서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이 외에도 재위 말기에 들어서 불교 관련으로 신하들과 충돌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불당 설치 명령을 내리자 이에 신하들이 반대하며 충돌한 기록 편집기사#에서도 여지없이 신하들에 대해서 너희들이 무슨 물건인데 날 친견하고자 하느냐? 라며 짜증과 불만을 표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세종실록, 세종실록
세종의 둘째 형이자 태종에게 농땡이로 찍힌 양녕대군의 동생인 효령대군과 차녀 정의공주도 독실한 불자로 유명했다.
5.3. 세조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세종 대)에 이미 왕명을 따라 부처의 이야기를 《 석보상절》이라는 책으로 냈다.[31]불교를 옹호하는 발언을 많이 남겼는데, 몇 가지만 꼽아 보면 다음과 같다.
-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가 병상에 있을 때, "궁궐에 법당을 지어 어머니의 심신을 달래야 한다."
-
"불교의 도를 알지도 못하고 배척하는 망령된 자이니, 나는 절대로 그런 놈을 쓰지 않겠다!"
왕자 시절의 발언인데, 이게 왕이 된 것마냥 한 발언이라서 문제가 되었다. - "공자보다 석가모니가 낫다."
- "나는 호불(好佛)의 군주다!"
또한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 문종 시절 사헌부에서 도첩[32]이 없는 승려를 잡아가자 멋대로 풀어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권력에 대한 야심 표출이라는 해석이 있으며, 본인도 월권행위라는 걸 인식해 바로 다음날 해명서를 제출했다.
- 원각사, 간경도감( 불경을 간행하는 국가기관)[33]도 지었다. 원각사를 짓기 위해서 집이 200채나 철거되고 많은 재물이 쓰였는데 그런데도 신하들은 "원각사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났습니다."라고 해야 했다. 그러나 간경도감은 그의 손자이자 완전한 유교의 화신이었던 성종이 폐지해 버린다.
- 친필로 부처에게 봉안할 문서도 썼다.
5.4. 예종
성종 때 도첩제 폐지 안이 나왔을 때 신하들이 "예종대왕께서도 불교를 좋아하셨지만 단명하셨습니다."[34]라고 했는 걸로 보아, 불교를 신봉한 듯.5.5. 중종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어머니 자순대비( 정현왕후) 윤씨의 숭불정책에 대한 눈치를 많이 봤다. 사찰의 추가 건립 허가를 막기 위한 정책에서 자순대비의 승낙부터 먼저 받았고, 유생들이 사찰 훼손을 진행하는 사건 때문에 조정에서 논란이 많았다.5.6. 명종
중종의 중전이자 명종의 모친으로, 아들의 즉위 당시에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가 불교 보호에 힘썼다.본인도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이를 금지했다.[35]
하지만 본인이 불교를 신봉했다기보다는, 어머니 문정왕후의 눈치를 보느라 입을 다물었던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문정왕후도 유서에 '왕이 친불 정책에 반대하더라도 대신들은 나의 뜻에 따르라.'고 당부했다.
5.7. 광해군
광해군의 경우 부휴 선수에게 불법을 물었으며, 봉은사의 법회를 주관하도록 지원한다. 광해군은 부휴의 제자인 각성을 ‘팔도 도총섭’의 자리에 앉혔다. 이후 각성에게 보은천교원 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호와 의발을 하사하기도 한다. 임진왜란으로 타격을 받은 호서와 호남의 사찰을 중건하는 것을 전폭 지원하기도 했다. # #5.8. 현종
현종은 초기 억불 군주의 모습을 보였으나 두 공주를 잃고 난 뒤 공주들의 원찰로 봉국사를 지어 원찰로 삼았다.5.9. 숙종
숙종의 경우 초기 억불의 면모를 보였지만 안변의 석왕사에 친히 어필을 내리고, 화엄사의 장륙전을 다시 세울 때 친히 ‘각황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당대 궁중에서는 궁녀들이 불경을 암송하는 것이 흔했다.5.10. 정조
정조는 생부인 사도세자를 위해 용문사를 세웠다. 각 궁방과 경기 감사를 비롯한 지방관이 기부한 금액만 8만 냥이 넘을 정도의 큰 공역이었다. 여기에는 호조와 병조의 지원도 있었다. 보경 사일은 용주사의 총수로 임명되어 국왕의 행차 때 법회를 주관했다. 정조는 여러 절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면서 원자의 탄생을 빌었는데, 순조가 태어나자 기원을 성취한 것을 고마워하며 금강산 석왕사에 글과 토지를 내려주기도 했다.5.11. 흥선대원군
아이러니하게 흥선대원군도 고종이 임금이 되길 기원하며 서울 주변의 여러 절에 불사를 많이 벌였다. 그는 집권하기 전부터 용궁사를 중창해 원찰로 삼았고, 고종이 집권하자 보덕사를 크게 세우고 쇠퇴했던 흥천사, 화계사, 보광사를 중창했다.흥선대원군의 일상 소지 물품이 그려져 있는 2점의 초상화에는 모두 염주가 그려져 있다. 또 그가 사용했던 인장 가운데는 “불교를 즐겨 좇았다.”거나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우리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대원군은 일상에서 항상 불교를 가까이 했던 것이다.
대왕대비 조씨와 왕대비 홍씨 또한 불교를 깊게 믿었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이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아들 고종이 즉위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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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흥선대원군은 불심과는 별개로, "가야사 금탑 자리에 부친( 남연군) 묘를 만들면 2대의 황제를 배출할 것이다."라는 예언을 듣고 가야사 승려들을 강제로 추방하고 절과 금탑을 없앤 뒤 그 자리에 부친의 묘를 이장한 적이 있다. 가야사를 없애기 전날 이하응 4형제(이들 중 이하응이 막내)의 꿈에 금탑의 신이 나타나 "너희가 내 자리를 건드리면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경고를 했고 형들은 "우리 4형제가 다 같은 꿈을 꾼 건 예삿일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그만두자."라고 만류했으나 이하응은 "나는 아직 자식도 없고 죽음도 두렵지 않으니 형님들이 못 한다면 내가 하겠소. 나라고 왜 황제의 아비가 못 된다는 말이오."라며 그것을 강행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아들이 고종황제, 손자가 순종황제가 되어 예언이 실현되긴 했으나 금탑의 신의 노여움 때문이었는지 순종을 끝으로 대한제국은 진짜 멸망하고 만다.
6. 평가
6.1. 옹호론
숭유억불의 실상이 무조건 정치적 보복 및 숙청 행위였다고 보기에는, 진짜로 불교가 저지른 폐단이 꽤 많았다. 고려 시절에는 불교와 유교가 상호 보완적으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데도 조선에 와서 억불 정책이 생긴 것은 단순히 성리학의 교조화로만 볼 수는 없다. 정말 그렇다면 숭유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내내 불교에 대한 비판이 사대부들의 입에서 나온 것은, 고려 말의 폐단이 그만큼 심각했다는 반증이다.고려시대 이전처럼 매년 국가 예산을 펑펑 들여서 팔관회를 열고 고래등 같은 절간에 화려한 가사 장삼을 두른 귀족 승려들이 활개치며 소작민을 부리고 사병을 키우며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불교 본연의 시각에서 불교의 발전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본에서 센고쿠 시대까지의 오랜 폐단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싹쓸이를 시전했던 승병단이 바로 이들이다. 그런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왕세자의 자리를 버리고 중생들 속으로 뛰어들어간 석가모니의 가르침 자체가 필요가 없고 불교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려 말에는 사찰 총 1만 3천여 곳에 승려 15만여 명이 있었고, 사찰들은 토지 20만여 결(結)과 노비 10만여 명을 소유했다고 추산한다. 고려 말 인구는 총 400만 정도, 경작 토지는 총 60만 결 남짓인 듯하므로 이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 당연하지만 이러한 사찰의 비대화는 그에 따른 커다란 부작용들을 초래하여 국가재정에 분명 큰 악영향을 끼쳤다.
특히 불교가 말하는 윤회론은 불교 내에서도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실제로 부처가 이것을 말했는지 논란의 여지는 있다. 그뿐만 아니라 불자들끼리도 상좌부 불교와 대승 불교간, 그리고 대승 불교 내에서도 선종과 교종간 논란은 불자들 사이에서 숱한 알력과 불신과 상처를 남길 정도였다. 선교 통합론이냐 아니냐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불교를 싫어하거나 안 믿는 사람들 입장에선 밥그릇 싸움 그 자체이다.
후대의 입장에서는 유럽의 성당이나 일본의 사찰처럼 외국에 자랑할 수 있는 크고 화려한 문화재를 남겨주지 않아 비난하기도 하지만[36], 불교의 진정한 발전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얼마나 잘 파고들며 가련한 중생들의 번뇌를 얼마나 잘 달래주느냐에 있을 것이다. 이는 불교가 한반도에 도입되어 번역에 문제가 생겼고, 계율에 의거하여 자질 없는 승려들을 쫓아내는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삼국시대나 발해와 신라, 고려는 이 부분에서 게을렀다.
무엇보다도 동시기 일본의 경우에는 불교의 영향력이 너무 강하여 죄인이 절에 들어가 3일이 지나면 설령 살인을 저지른 자라도 사면하는 경우도 있었고 조선이 숭유억불을 하지 않았으면 한반도 역시 이렇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37][38]
6.2. 비판론
불교 측에선 "유학자들도 실은 불교를 믿었고, 도교를 남몰래 믿고 좋아했다"면서, 불교에 대해 폄하한 유학자들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비판하기도 한다.불교도 사실 고려 성종이나 최승로에 대해서 높은 평을 하기도 했는데, 그들도 본시 불교 신자였고 최승로도 실은 절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주장했다. 김부식도 불교를 믿었고 정도전 역시도 승려와 접촉해 불교 지식이 꽤 높았다는 점에서 높은 평을 했다. 다시 말해서 숭유억불은 불교 자체에서 불교의 업보라 인정했고, 그리고 동책정수에선 이런 점을 참작해서 "불교를 미워하는 것은 좋으나, 정치를 하는 유학자들이 유학자 노릇을 하지 못하면 백성들이 불교를 믿는다"면서 비판했다. 우리가 흔히 알던 유교는 이미 쇠락하여 그 유교의 장점들을 불교, 개신교, 천주교 3대 종교가 대부분 흡수한 상황이라는 점에서 보면, 숭유억불 자체도 초기면 모를까 중기나 후기에 이걸 적용하기란 무리수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미 삼국시대부터 불교와 유교는 함께해왔고, 조선왕조에서도 여러 민중들이 믿었기 때문에 일일이 다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마도 조선의 억불정책과 비슷한 것을 찾자면, 프랑스 혁명 당시의 라이시테로 대표되는 가톨릭 박해, 그리고 소련이 국가 무신론을 내세워 기존 러시아 제국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던 러시아 정교회를 박살낸 사례를 들 수 있다. 기존 종교의 도덕적 해이를 이유로 신흥세력이 박해를 정당화했다는 점에서는 3가지 사례가 겹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종교 박해에 대해서 '박해는 나쁜 것이 맞지만, 정황상 쉴드는 가능하다.'는 투의 상황론적 변호는 있어도, 정말 막 나가자는 것이 아닌 이상 정의로운 일이었다고 합리화하지는 않는다.
결국 조선의 숭유억불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분명히 박해는 박해이다. 더군다나 그 지향점이 불교쇄신이 아니라 성리학적 반불교주의에 있었다. 또한 여말선초 불교가 곧 지배층은 아니었다. 불교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을[39] 막론하고 퍼졌던 종교인데, 여기서 억불 정책을 마치 (피지배층과는 충돌하지 않으면서) 지배층만 쓸어버리는 개혁운동처럼 묘사할 이유가 없다. 구족계를 끊어버릴 정도의 억불은 종교 박해이지, 기득권 대상의 개혁운동이 아니다. 조선이 성리학적 건국 이념을 따랐다는 점에서 상황론적 쉴드는 가능하지만, 정의롭다고 합리화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대부들의 불교에 대한 몰이해도 의문인 지점이다. 중국의 한유와 주희 같은 유자(儒者)들을 필두로, 조선의 성리학자들 사이에서는 불교를 현실세상에 무관심하게 만들고 허무주의에 젖게 하며 인의예지를 모르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공감대가 널리 퍼져 있었다.[40] 하지만 과연 이런 도식적 틀에 넣어 맞춘 불교가 불교라면 그들이 불교를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게다가 정도전의 배불정책에 이념적, 기초적 역할을 했던 불씨잡변 같은 논서들을 보아도 불교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로 일관하고 있다는 강한 인상을 불자 입장에서는 받게 된다. 고려 말 불교의 폐단이 아무리 심했더라도, 조선의 사대부들로 하여금 불교를 그토록 극력 배척하게 만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정도전이 불씨잡변에서 지적했듯, 변하지 않는 이치(理)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에 따른 질서 정연한 통치를 확립하고자 했던 사대부들은, 무상(無常, anitya)을 강조하는 불교의 교의를 도저히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으로는 중앙집권적이고 안정적인 위계질서를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부 사대부는 심신 수양의 수단으로써 불교의 수행법을 많이 참고했고 즐겨 하기까지 했음이 기록으로 확인되지만, 그들 중 아무도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자'고 주장한 사람은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외에 숭유억불은 훗날의 불교-유교 관계에도 악영향을 줬다. 특히 현각 스님이 한국 불교를 비판할 때 "유교적 상명하복"이라고 비판한 것을 봐도, 불교계에서는 反유교 감정이 상당히 강하다.[41]
7. 숭유억불로 훼손 또는 폐사된 문화재
-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 감은사지 출토 청동풍탁 등( 감은사 :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려말까지 존재했으나 이후 조선시대에 폐사)
- 거창 양평리 석조여래입상(조선 후기 사찰 폐사)
-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감산사 : 조선 후기 폐사 후 전답화)
-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감산사 : 조선 후기 폐사 후 전답화)
-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고선사 : 조선 후기 폐사 후 1970년대 덕동호 댐 건설로 수몰)
-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조선 후기 사찰 폐사)
-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굴불사 : 조선 전기 때 굴석사(掘石寺)로 사찰명 변경 후 조선 후기 폐사)
-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보리사 : 조선 후기 사찰 폐사)
-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조선 후기 사찰 폐사)
-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조선 후기 사찰 폐사)
-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불상 파손)
- 경주 남산 용장계 석조약사여래좌상(불상 파손)
- 경주 남산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불상 파손)
-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조선 후기 사찰 폐사)
-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전실 파손)
-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조선 후기 사찰 폐사)
-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조선 후기 사찰 폐사)
-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불상 파손)
-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조선 후기부터 관리 방임) : 분황사 모전석탑 출토 수정화주 등
- 경주 사천왕사지 출토 녹유사천왕상전(사천왕사 :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려말까지 존재했으나 조선이 들어선 후 폐사)
- 경주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협시불 파손)
- 경주 송화산 석조반가사유상(불상 파손)
- 경주 월지(조선 이후 몰락) : 목제 주령구 등
- 경주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조선 후기 사찰 폐사)
- 경주 장항리 서 오층석탑(조선시대 사찰 폐사)
- 경주 장항리 석조여래입상(조선시대 사찰 폐사)
- 경주 황복사지 금동 불상(조선시대 사찰 폐사)
-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조선시대 사찰 폐사) :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 등
-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조선 후기 사찰 폐사)
- 광주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조선 후기 사찰 폐사)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라 석조비로자나불좌상(조선시대 사찰 폐사 후 일제강점기 때 덕수궁미술관으로 이동)
- 김천 갈항사지 석조여래좌상(조선 후기 사찰 폐사, 불상 파손)
-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실상사 : 조선시대 사찰 폐사)
-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불상 파손)
- 미륵사지 석탑( 미륵사 : 조선 후기 사찰 폐사)
- 보원사지 출토 철제여래좌상(불상 파손)
-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지림사 : 조선 후기 사찰 폐사)
- 봉화 북지리 석조반가상(불상 파손, 사찰 폐사)
- 봉화 서동리 동탑 사리장엄구(조선시대 사찰 폐사)
- 불국사(조선 후기 사찰 폐사) :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경주 불국사 다보탑 등
- 석굴암(조선 후기 몰락)
-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335호)(조선시대 사찰 폐사 후 일본인 소장)
- 성덕대왕신종(조선 후기 사찰 폐사)
-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조선시대 사찰 폐사)
- 양산 용화사 석조여래좌상(감로사 : 조선시대 사찰 폐사)
-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조선시대 사찰 폐사)
- 여주 고달사지 승탑(조선시대 사찰 폐사)
- 영덕 유금사 금동 주악천인상(유금사 : 조선 후기 사찰 폐사 후 현대에 재창)
-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불상 파손)
-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조선시대 사찰 폐사)
-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조선시대 사찰 폐사)
- 영주 영주동 석조여래입상(불상 파손)
- 예천 한천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불상 파손)
- 울산 태화사지 십이지상 사리탑( 태화사 : 조선시대 사찰 폐사)
- 울주 간월사지 석조여래좌상(조선시대 사찰 폐사)
-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조선시대 사찰 폐사) :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등
-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조선시대 사찰 폐사)
-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조선시대 사찰 폐사)
-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조선시대 사찰 폐사)
- 청양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 및 석조대좌(불상 파손)
-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조선시대 사찰 폐사)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조선시대 사찰 폐사)
- 황룡사 장륙삼존불상(동경잡기에 따르면 조선 후기, 17세기까지 현존하였으나 이후 소실)
- 회암사(조선시대 사찰 폐사)
[1]
21세기에도 화장 비율이 늘긴 했지만, 조선시대부터 20세기까지는 매장이 대부분이었다. 고대부터 매장을 일삼았다면 지금 전국에 남는 땅이 없었을 것이다.
[2]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하기 직전인
진덕여왕 재위기에도 사실상 실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이 시기도 포함된다.
[3]
승려가 재산을 축내고 패악질이 심했다는 것은 고려 초기부터 기록이 있다. 그래서
지눌 등이 수선사를 통해서 개혁하려고 했던 것.
[4]
신라는
고구려,
백제를 통합해
삼한일통을 이루었으며,
고려는 국체 자체는
태봉에서 국가승계를 하여 건국된 나라였고 나중에
후백제와
통일신라,
발해를 통합하였다. 그리고
조선은 다른 나라들을 통합한게 아닌 오로지 고려 하나에서 국가승계를 하여 건국된 나라였다.
[5]
기막힌 사실은 흥선대원군도 불교 신자였다는 것이다.
[6]
대신
승려들의 수행에는 도시보다 산 속이 오히려 도움이 되므로, 조용히 수행하고 싶은 승려들은 오히려 환영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좋은 것도 아닌 게, 산 속에 남자들 여럿이 사는 특성 때문에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산성의 유지보수를 맡겼다.호국불교니까 써먹어야지
[7]
정선의 회화 백천교에서도 이런 가마중이 나온다. 조선 조정에서는 선비들이 절에 올라가 행패를 부림을 좋지 않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산사동원금지령을 내렸으나 실효는 없었다.
[8]
네이버지식백과
[9]
일본
교토에 있는 사찰
도지에서 700년대부터 시작하여 약 천여 년간 기록한 장원 경영 기록물 2만 4147건.
[10]
그래서 유럽의 경우 종교시설이 국가 행정기관을 대신해 인구조사 같은 역할을 대행하기도 했다. 그 때에는 국가체계에 안 잡히는 인구는 있어도 종교시설에 잡히지 않는 인구는 사생아 같은 경우가 아니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11]
이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 체계를 위해
신토를 중시하고자 준 충격요법으로, 오래 진행되지는 않았다.
[12]
물을 끓여 차로 달여먹는 문화가 사라지면서 이후 조선인들은 중국, 일본과는 달리 우물물이나 계곡물 등을 별다른 처리 없이 그대로 마셨는데, 이 때문에
기생충에 크게 노출되었다는 연구도 있다. (서양은 전통적으로 물에 술을 섞거나
맥주,
포도주 등을 대용했고, 중동과 동아시아 지역은 종교와 결합하여 커피, 차 등을 끓여 마셨다.)
한민족의 식사량에 나오는 조선인들의 대식 문화를 이 기생충 감염과 연관해서 조사하는 연구자들도 있다.(조선후기
한양도성 내 토양매개성 기생충 감염 원인에 대한 역사 문헌학적 고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교실, 대한의사학회, 2013.) (조선시대 무덤의
미라와 분변석에서 발견된 기생충알에 관한 연구,
전북대학교, 2009.)
[13]
다라니,
만트라, 또는
화두 등으로 추정된다.
[14]
근데 종교 자체가 원래 이렇다. 많이 믿는 종교는 성행하고 믿지않는 종교는 맥이 끊기는데 이는 구조상 자연선택설과 다른게 없다.
[15]
심지어 수륙재를 비판했던 유정현은, 정작 자기가 죽을 때는 수륙재를 행하도록 했다.
[16]
경내에 있는 돌우물이 아니라,
분황사 북쪽 담에서 약 33 m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신라 우물이다.
[17]
가장 많이 쓴 수법은 태조 이성계의 위패를 모시는 것. 무려 태조를 모시는 것이다 보니 유생들이 함부로 깽판을 쳤다가는 경을 치기 일쑤다 보니 많이 써먹었다. 물론 나라에서도 이를 모르는건 아니었지만 창업군주를 알아서 모셔주는 것이다 보니 대놓고 탄압할 수도 없어서 작은 절 몇 곳을 보여주기식으로 처벌한 것 외엔 별로 손을 안 댔다고 한다.
[18]
가톨릭은 예의 그 전례 문제, 즉 '
제사 허용' 여부를 놓고 유교 문화가 뿌리내린 조선에서 용납이 되기 어려웠고,
황사영 백서 사건 이후로는 아주 나라를 외세에 팔아먹으려는 역적으로 판이 박혀버렸다.
교황
비오 12세가
1939년 동아시아의 제사를 '동아시아 고유의 조상공경 의식의 한 발로일 뿐 기독교 신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선언한 뒤의 일이다. (다만 오늘날에도 신주와 기타 미신적인 요소들은 금한다.
제사/종교별 입장 참조.) 그런 점에서 불교가 가톨릭에게 동질감을 느꼈던 것인지, 가톨릭 신자들이 불교 사찰이나 암자를 모임 장소로 쓰는 경우도 많았다.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이나
여주시 주어사 같은 곳이 대표적인데, 오늘날 가톨릭에서는 이곳을 가톨릭 성지로 기념하고 성지화 사업을 벌이지만, 가톨릭과 연이 깊다고는 해도 엄연히 불교 사찰이 있던 곳인지라 불교계에서는 이를 다소 껄끄러워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
[19]
이후 천주교는 조선 말기의 피를 뿌리는 박해에 이를 갈아 일제에게 적극 협력했다.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는 눈길을 걸어가 독립운동을 밀고해
105인 사건의 원인을 제공할 정도였다. 다만 불교와는 달리 천주교의 주교들은 대부분 외국인, 특히 유럽인들이라 조선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고, 제국주의 시대라 같은 열강인 일본에게 우호적인 것도 있었다.
[20]
물론 이는 불교를 아직 깊게 신봉하던
일본의 문화적인 이유 또한 있었지만, 식민지 체제에 대한 동조자를 늘리려는 정치적인 이유 또한 있었다.
[21]
물론
백용성이나
한용운처럼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서거나
만공처럼 조선불교의 일본화를 비판하며 조선 고유의 불교를 지키려 한 승려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22]
기괴하게도, 한국 인터넷 상에는 조선시대에 차문화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는 설이 퍼져있는데, 차문화 쇠퇴론의 시작은 1940년에 펴낸 『朝鮮の茶と禪』에 당시 조선총독을 지낸 바 있는 우가키(宇垣一成)가 쓴 서문과 당시 상공대신(商工大臣)이었던 후지하라(藤原銀次 郞)가 쓴 글로 확인된다. 이 글들이 우리나라 근현대에 나온 다서들이 그대로 다시 인용하면서 우리의 차문화는 쇠퇴하였다고 전해졌다.[42]
[23]
예를 들면
팔만대장경은 적절한 보관 장소도 없어서 여러 곳을 떠돌다가 세조 대에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 최종적으로 보관되었다.
[24]
불국사 가이드 투어의 설명에 따르면,
가토 기요마사의 방화는 처음부터 절을 파괴할 목적으로 방화한 것이 아니라, 당시 경주 일대를 점령한
일본군 병사들이 굉장한 절이 있다고 구경왔다가
의병이나
승병을 무장시키기 위해 절에 보관중이던 대량의 무기를 발견하고 본대에 연락해서 공격한 것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꽃일수록 맹독을 감추고 있다." 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가토는 불교 신자였다.
[25]
특히 조선 후기의 지배층이 된 사림파가 더더욱 멀리했다. 더군다나 호불군주인 세조에 의해 형성된 훈구파 또한 불교에 관대한 것과 별개로 기본적으로는 유교를 숭상했다.
[26]
현대에도 그 문화가 남아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경우
해남
대흥사에서 고시 공부를 햤다.
[27]
이로써 무학은 조선 시대에 왕사 칭호를 받은 유일한 사례가 된다.
[28]
왕이 수라상에서 고기를 빼는 것을 뜻한다. 수라상 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것은 감선이라고 한다. 왕이 투쟁을 하거나, 혹은 기근, 경제난 등으로 나라 사정이 안 좋을 때 주로 행했다.
[29]
숭유억불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태종이 '나도 언젠가 네 어미랑 나란히 묻힐 텐데 왜 사찰을 지으려 드느냐.'라며 격렬히 반대하면서 무산되었다.
[30]
실록에서도 아예 두 대군(광평, 평원)과 왕후가 죽은 후 심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어서 불교에 가까워졌다고 나올 정도.
[31]
흔히 세조의 불교 애호를 조카에 대한 죄책감으로 해석하는데, 석보상절에서 보다시피 세조는
계유정난 이전부터 불교에 관심이 많았다. 왕명에 따른 것이라고 하나, 세종이 굳이 당대의 명신들을 놔두고 수양에게 편찬을 맡겠겠는가?
[32]
조정에서
승려들에게 발부한 면허증. 현대로 치면
자격증으로, '도첩이 없는 승려는 야매'라는 뜻이므로 국가가 불교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다. 도첩제는 고려 말기의 부패한 절들을 목격한
태조 때 도입하였으나, 성리학의 화신군주였던
성종 때에는 아예 도첩제를 폐지해버렸다. 즉 승려를 아예 하지 말라거나 환속하라는 것이었고, 이후 절들은 산속으로 들어간다. 오느날 대부분의 절들이 산 속에 있는 것도 이 때 쯤이다.
[33]
물론
불경 간행은 여러 일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래서인지 간경도감은 실질적으로 10년도 안 되는 존속기간 동안 정말 무지막지하게 책을 찍어냈는데, 얼마나 많은지 양란을 거치고도 살아남은 책들이 40권 넘게 있다.
[34]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유교를 신봉한 왕들과 불교를 신봉한 왕들의 수명을 비교해서 불교가 유교만 못하다고 어필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과 비슷하게 중국에서도 불교 들어오기 전의 군주들은 다들 오래 사는데 불교 들어온 후는 어떻게 되었냐는 식으로 공격한 경우도 있다. 물론 알고보면 전부 자기가 편하는대로 짜집기 하는 것이지만. 이런 논리대로라면 불교를 좋아한 태조 이성계는 장수하고(70대) 유교를 매우 신봉한 성종은 단명했으니(30대) 불교가 유교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있다.
[35]
그런데 이 일을 기록한 사관은 '왜 밖에서 그런 소문이 왕한테까지 들어가서 일을 못하게 되었냐?'는 식으로 소감을 남겼다. 임금님 모르게 불태워야 했다는 말. 얼마 가지 않아 실제로 불타고 말았다.
[36]
조선은
유교적 가르침에 따라 정부가 나라를 비교적 검소하게 운영했다. 사실 이러한 문화재들은 대부분 중간에 자연재해로 박살나고 다시 중건한 것들도 꽤 많다. 예를 들어
일본의
오사카성
천수각은 19세기에 한 번 벼락으로 박살났다가 1931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복구되었고, 이전에도 몇 번 박살난 적이 있다.
중국에서도
만리장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번 훼손되었다.
자금성도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박살이 날 뻔 했으나
저우언라이 총리가 군대를 보내 보존되었고,
베이징 성은 혁명의 여파로 아예 사라졌다. 또한 황룡사 같은 웅장한 불교 문화재 대부분은 도굴과 전란 혹은 관리부족으로 사라졌고 남은 절들도 일부는 불타긴 했지만 그래도 조정에서 이를 막고 중건하기도 했으며 폐사한 건물들도 재활용 해서 사용했던 경우가 많아 이걸 홍위병과 비교하며 비판하는건 옳지 않다. 애초에 조선시대 건물들도 후기의 혼란으로 인한 관리부족으로 쓰러진 경우도 많고 목조 건물 자체가 내구성이 약해 남아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 대신 석탑들은 잘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이런 문화재 파괴는
일본과
그리스에서도 있었던 만큼 조선만의 특이점이 아니다. 그리고 애당초 크고 화려한 문화재는 당시의 기술로는 인력으로 지을 수밖에 없고, 동원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대가는 없다. 그러면서도 자재를 마련하는 등의 일에 막대한 금전적, 시간적, 인적 손실이 발생하니 후손인 우리 입장에서야 '왜 그런 걸 안 지었냐.'고 아쉬워하겠지만 조상들이 들으면 기가 막히고 어이를 상실할 일이다. 유럽에 있는 종교 문화재들도 알고보면
교황령의
십일조 강제 헌금의 결과물이었고, 이것으로 터진 것이 바로
종교개혁.
[37]
출처:
https://youtu.be/kbtoS34J9Cc?feature=shared
[38]
다만 일본과의 비교는 힘들 수 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중앙정부나 군주의 힘이 약했다.반면 고려는 일본과 비교하면 그나마 통제가 되긴 했다. 예시로 고려와 일본 모두 승병이 존재했고 둘 다 승병이 크게 위세를 떨치긴 했지만 고려에서의 승병은 무신정권 시기에 간간이 권력자와 결탁해서 권력투쟁에 가담하는 정도에 그쳤다면 일본은 큰 절을 중심으로 토지와 함께 승병이 기반이 되어 일종의 군벌화까지 되었다.
[39]
애초에 기존 종교를 기득권과 동일시하고, 피지배층을 수동적으로만 바라봐서도 안 된다.
잉글랜드를 예로 들면, 많은 사료가 중세 말 잉글랜드의 평신도 주민들이 수동적이기는커녕 적극적으로 종교행사에 참여하고 스스로의 종교적 환경을 만들어나갔음을 보여준다. 한국사에 적용하자면, 여말선초 불교를 기득권과 동일시하고, 억불을 기득권 공격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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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소식 같은 문인은 삼교가 결국은 같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유자들 사이에서도 불교에 대한 입장이 서로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사림들은 양명학이든 선학이든 주자학 이외에는 전부 배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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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유교계에서도 여전히 反불교, 反기독교 성향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유교는 조선 멸망과 함께 교단 역할을 할 구심점이 사라지고 영향력이 급감해서 지금은 그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지키는 잔존 문화로 남아있을 뿐 불교나 기독교의 교세에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조직적 영향력은 낮아졌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