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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8 17:28:31

성녕대군

조선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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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태종의 왕자
성녕대군 | 誠寧大君
파일:성녕대군묘.jpg
성녕대군묘 전경
출생 1405년 8월 12일[1]
사망 1418년 3월 20일[2] (향년 12세)
묘소 성녕대군 묘 및 신도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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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종(示+重)
부왕 태종
모친 원경왕후
형제자매 12남 17녀 중 6남
배우자 삼한국대부인 창녕 성씨
(三韓國大夫人 昌寧 成氏)
자녀 양자 2명(친자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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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 안평대군(安平大君)[3]
양자 - 원천군(原川君)[4]
작호 성녕대군(誠寧大君)
시호 변한소경(卞韓昭頃)
품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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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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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대군. 휘는 종이다.[5] 원래는 태종의 적7남이지만 위의 세 아들은 모두 일찍 죽어 < 조선왕조실록> 속 태종의 회상으로나 등장하는지라 실질적으로는 4남이다. 원경왕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생존한 4명의 아들 가운데 막내로서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의 친동생이다.

쇠고기 닭고기를 좋아했다 하며, 제사지낼 때 쓰라고 언급했다는 기록도 있다. 다만 실제로는 소가 워낙 중요한 동물이다 보니 닭고기만 썼다고 한다.

2. 생애

성녕대군 이종의 동복형들은 모두 아버지가 왕이 되기 전 잠저에서 태어났으나 이종은 아버지가 왕이 된 후에 태어났는데 태종과 원경왕후가 40세 가까운 나이에 낳은 막내아들이었다. 당시에는 이 나이면 손주를 보아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였고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이 40세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한 늦둥이였던 셈이다. 어렸으나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용모가 단정하고 깨끗하였고 행동거지가 공손했으므로 태종과 원경왕후가 매우 총애하여 항상 궁중에 두고 옆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

8세이던 1414년(태종 14년) 1월 13일 성녕대군(誠寧大君)으로 봉해졌으며 # 그해 12월 창녕 성씨 좌찬성 성억의 딸과 결혼했다. # 이때 부인 성씨는 경녕옹주(敬寧翁主)에 봉해졌다. 왕자녀들은 결혼하면 궁 밖으로 나가서 사는 법도를 깨고 결혼한 뒤에도 궁 안에서 지냈는데, 원래 몸이 약했던 것도 있고, 후술하듯 태종 내외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막내아들이라 궁궐 밖에 살 저택을 마련해 두었음에도 일부러 출궁시키지 않고 곁에 둔 듯하다.

1418년(태종 18년) 1월 26일 성녕대군이 완두창( 홍역)에 걸려서 위독하게 되자[6] 태종은 국사를 며칠간 돌보지 않으며 옷을 벗고 잠을 들지 않고 수라를 들지 못할 정도로 걱정하며 흥덕사에 기도를 올렸다. 이때 충녕대군은 의원 원학(元鶴)과 함께 의서를 보며 친히 약을 썼기 때문에 그 지성에 모두 감복하였다. 하지만 양녕대군은 이 무렵에 활쏘기를 하고 놀았던 것 같다. 나중에 애첩 어리의 일이 들통나서 양녕대군이 크게 혼날 때 태종이 "성녕이 죽었을 때에 궁중에서 활쏘는 놀이를 하였다니 동복동생[同母弟]의 죽음을 당하여 부모가 애통하는 때에 하는 짓이 이와 같다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언급한다. 대놓고 "네 동생이 죽어서 엄마 아빠가 가슴 아파 죽겠는데 넌 활쏘기나 하러 다녀?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라고 한 격이다.

결국 성녕대군은 만 12세 7개월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태종은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였으며 훗날 태종은 성녕대군 사후에 성녕대군의 사가를 그의 원혼을 위로할 원찰(願刹,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한 법당)로 개조하려고 했으므로 신하들이 대경실색하여 태종을 말리기도 했다. 사후에 ' 변한 소경공(卞韓 昭頃公)'으로 추증되었는데 '변한(卞韓)'은 봉국(封國), '소경(昭頃)'은 시호, '공(公)'은 공작위를 뜻한다. 성녕대군의 묘 부근에 암자 대자암(大慈菴)을 지어서 불사(佛事)를 거행하였는데 태종과 세종 시대에 매우 불사가 성대하게 벌어졌다고 한다. 태종은 훗날 원경왕후 사후 아들인 세종이 원경왕후의 묘지에 절을 세우려고 하자 내가 죽어서 들어갈 곳에 절을 세울 수는 없다고 막을 정도로 불교를 배척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그런 태종이 자식을 위로하겠다고 불사를 거하게 벌인 것이다. 경기도 고양시에 묘가 있는데 향토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참척의 아픔이 얼마나 컸는지 성녕대군이 죽은지 사흘 째가 되는 2월 7일에 성석린 등이 이제는 수라 좀 드시라고 청하고, 이틀 뒤에 올라온 상소에는 성녕대군이 위독할 때부터 수라를 들지 않았었다는 말까지 나온다. 수라를 다시 들기 시작한 뒤에도 태종과 원경왕후가 함께 한달 넘게 고기 반찬을 거를 정도로 슬퍼했다. 성녕대군이 죽고 나서 한 달 뒤인 3월 4일 태종은 예문관 대제학 변계량을 부르고 두 대군으로 하여금 귀신의 이치를 묻게 했다. 변계량은 "귀신은 본래 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 제사지내면 와서 흠향하는 것입니다. 그 정성이 있으면 그 귀신이 있고, 그 정성이 없으면 그 귀신이 없는 것이니, 내가 정성과 공경을 다하면 귀신은 나의 정성과 공경에서 이루어져 와서 감응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고 태종은 그 설이 불교와 비슷하다고 말했다.[7] 사관이 이는 성녕대군의 죽음에 비통하여 이런 물음을 한 것이라고 기록해 두었다.죽은 아들을 귀신으로라도 만나고 싶었나보다. 그 후에도 태종이 성녕대군을 종종 언급한다.
죽은 자식 성녕은 우리 가문에서 얼굴을 바꾼[8] 아이였다. 매양 중국의 사신에게 술을 청할 때에는 중국 사신 황엄 등은 주선하는 사이에 주의하여 보고 심히 그를 사랑하였었다. 장차 성취시켜서 노경을 위로하려 생각하였는데, 불행하게 단명하였으니 무엇으로써 마음을 잡겠느냐?
태종실록 태종 18년 3월 6일 병진 2번째 기사

조말생을 불러서 이야기하면서 나온 말인데 바로 앞에 세자가 불의하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며 울고 나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언급되고 있다.
내가 인덕궁(仁德宮)에 가려는데, 성녕(誠寧)의 집이 길가에 있으니, 이를 보면 반드시 애훼(哀毁)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나는 진실로 너희들이 나를 조소할 줄 알지만, 그러나 차마 볼 수가 없다.
태종실록 태종 18년 8월 1일 무인 2번째 기사
대언 성엄이 술을 올리니, 상왕이 말하기를,
“너를 보니 성녕(誠寧)이 생각나는구나.”
하며,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성씨 일문은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견줄 만하다.”
하니, 성엄은 성녕대군(誠寧大君) 부인 성씨의 백부이다.
세종실록 세종 즉위년 10월 28일 갑진 1번째 기사
상왕 임금과 더불어 연침(燕寢)에 나아가서 (중략) 말하기를,
“내가 세 아들을 잇달아 잃고 성녕(誠寧)이 또 죽었으니, 슬픔이 어찌 그치겠는가.”
세종실록 세종 즉위년 11월 13일 기미 4번째 기사
성억의 딸이 성녕대군(誠寧大君)의 부인이 되었는데, 태종(太宗)이 성녕(誠寧)의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여 일찍이 세종(世宗)에게 부탁하기를,
“성씨(成氏) 일족은 공신의 예로 대접하라.”
하였다. 이 때문에 대우가 특별히 달랐고 은총과 권애가 우악(優渥)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30년 5월 3일 정해 1번째기사

병세를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 해서 의원 양홍달(楊弘達)이 파직되는 처벌을 받았다.

이 때 궁내에서 병을 고친다며 음식을 차려놓고 굿을 한 보문(寶文)이라는 무녀가 있었는데, 성녕대군이 죽게 되자 창질의 병에 술과 음식으로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서는 안되고 굿을 잘못 했기 때문에 이런 변이 있었다는 말이 나돌게 되었다. 두창을 쫓아내는 굿을 마마배송굿 또는 마누라배송굿이라 하는데, 원혼을 위로하는 상에는 시루떡만 올리고, 대접하던 팥죽은 대문 밖으로 내보내고 맛좋은 떡과 과일은 원혼을 태워 내보내는 마차에 옮겨 실어서 원혼을 곱게 대접하되 집에서는 나가게 유도하는 형식이다. 조상님을 모시는 일반 제삿상처럼 술과 음식을 차리기만 하면 원혼이 오래 머무르게 되어 환자에게 해롭다는 것. 이 때문에 보문은 장형을 받아야 했는데 형조의 관리가 이를 적당히 넘어가려 했고, 이 사실을 성녕대군의 하인들이 알고 찔러서 형조의 관리들이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단체 파직 후 유배되고, 보문은 법대로 장형을 받은 다음 지방에 유배시키려 했으나 외방에서 사술을 써 사람들을 홀릴 수 있다는 논의가 있어 울산의 관노비로 보내기로 했는데, 빡이 칠대로 친 성녕대군의 하인들이 쫓아와 보문이 압송되기도 전에 때려죽이는 사건이 벌어졌으나 태종이 그냥 덮고 넘어가면서 실록의 기록이 끝난다.

조선 초 왕실의 치료법은 천연두나 홍역을 성난 악령의 임재로 보고 큰 손님, 작은 손님, 혹은 마마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는 민간전통에 따라 무당이 굿을 하여 물리치는 퇴마와 서책대로 의원이 병을 치료하는 의학이 공존하는 형태였는데, 태종의 자식들인 성녕대군과 경안공주가 이러한 치료법으로 효과를 보지 못하고 병으로 연달아 세상을 떠남에 따라 의료에서 무속을 배척하게 되었다. 출산율과 사망률이 모두 높던 전통 사회에서 인구(=국력) 불리기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태어나는 건 놔둬도 많이 태어나니까) 죽을 사람을 안 죽게 하는 것임은 당연한 것이고, 의학적으로는 한나라 대부터 시작해서 한반도, 일본, 베트남에서 굵직한 왕조가 자리잡으면 꼭 수행하는 사업 중 하나가 국가적으로 의서를 편찬하는 것이었다. 조선 역시 우리 환경에 맞는 동의보감을 비롯한 향약의 체계화를 이루어내기 전인 초기에는 당시 선진의학이었던 중국의 의학을 들여와서라도 의학지식을 보급하는 데 애를 썼고, 무속적인 차원에서는 국가적으로 초지종에 대한 지원을 하는 등 양쪽의 방법론을 모두 채택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 시기 이후 초지종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끊기고 병의 징후를 과학적으로 따지고 치료하는 의술을 도입한 명의 편작의 의술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조선 초기 의학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어려서 사망한 탓에 후사가 없어 친형인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 양자로 들어가 후사를 이었다. 그러나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이 죄인으로 몰려 사망하자 안평대군의 양어머니인 성녕대군의 처 성씨도 연루되어[9] 경주로 유배되었다. 이 때문에 세조의 패륜 행위가 1가지 더 추가되는데 성씨가 아무리 세조의 정적인 안평대군의 양어머니라지만 세조에게도 엄연히 친숙모이다. 그것도 사적으로는 할아버지 태종과 아버지 세종이 가장 아꼈던 아들의 부인인데 그런 사람을 거리낌없이 폐서인시켜 버린 것이다.[10] 세조 2년에 방면되었다고 하지만 생몰년을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결국 신원(伸冤) 및 복권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성녕대군의 후사가 끊겼기 때문에 세조 6년에 효령대군의 6남 원천군이 양자로 들어간다.[11]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볼 수 있다.

3. 가족 관계

4. 대중매체에서

태종의 다른 적자 3명이 모두 이름이 알려진데 비해 유독 인지도가 낮은데 요절하는 바람에 남긴 일화도 별로 없기 때문. 위인전이나 드라마 등에서도 잘 나오지 않으며 기껏 나와 봐야 비중이 낮다.


[1] 음력 1405년 7월 9일 [2] 음력 1418년 2월 4일 [3] 세종의 3남. [4] 효령대군의 6남. [5] 공교롭게도 조선의 제 16대 왕 인조와 혐명( 嫌名)이다. [6] 태종실록에서는 이때에 이르러 창진(瘡胗)에 걸려서(至是患瘡胗). 즉 창진(瘡疹)이라고 표기하는데, 이는 천연두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창진은 부스럼을 동반하는 발진을 의미하며, 그 증상으로 인해 천연두(두창)를 지시하기도 한다. [7] 원래 유교에서 귀신은 괴력난신이라고 하며 잘 언급하지 않는 존재였지만, 제사라는 게 기본적으로 조상님의 넋에게 봉헌하는 의식이므로 귀신이 있어야 성립되는 것이다보니 그래서 조선시대에서 귀신의 존재유무에 대해서 설왕설래가 많았다. 조선 중기의 율곡 이이 역시 귀신이 있다고 믿으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믿으면 없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그런데 이쪽은 소싯적에 승려 생활도 해서 그 영향이라 변계량과 비슷한 주장을 했을지도? [8] 외모가 형들과는 달랐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9] 이 때 연루된 이유가 사사된 안평대군과 거기에 연좌되어 죽은 그의 아들(성씨의 양손자)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해서였다. [10] 심지어 성녕대군부인 성씨와 세조 왕비 정희왕후 윤씨와는 사돈이다. 정희왕후의 언니 남편(형부)이 성봉조이고 성봉조의 사촌이 다름아닌 성녕대군부인이다. [11] 이런 연유로 성녕대군파 일부 문중에서 효령대군파 항렬을 같이 쓰기도 한다. [12] <용의 눈물>에서 태종은 자기 아버지에게 "권력에 눈이 멀어 형제들을 죽인 살인마, 왕 자리를 훔친 도적놈"이라는 욕을 먹어도 "이게 다 왕실을 위한 길이었다"며 어떻게든 변명을 할 정도로 성격이 불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 태종이 자기 아내에게 원망과 한이 섞인 욕을 그저 울면서 듣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