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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왕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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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정종의 왕비
정안왕후 | 定安王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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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조 왕태비
순덕왕태비 | 順德王太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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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릉 능침 | |||
출생 | 1355년 1월 30일( 음력 1월 9일) | ||
고려
개경 김천서 사저 (現 개성시 판문구역 영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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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12년
8월 11일(
음력
6월 25일) (향년 57세) |
||
조선
한성부
인덕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
|||
능묘 | 후릉(厚陵)[1] | ||
재위기간 | 조선 왕세자빈 | ||
1398년 10월 14일 ~ 1398년 10월 22일 | |||
조선 왕비 | |||
1398년 10월 22일 ~ 1400년 12월 7일 | |||
조선 왕태비 | |||
1400년 12월 7일 ~ 1412년 8월 1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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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 경주 김씨 | |
부모 |
부친 증 문하좌시중 김천서 (贈 門下左侍中 金天瑞)[2] 모친 삼한국대부인 담양 이씨 (三韓國大夫人 潭陽 李氏) |
||
형제자매 | 3남 4녀 중 차녀[3] | ||
배우자 | 정종 | ||
자녀 | 없음 (양자 15남 8녀) | ||
종교 | 불교 | ||
봉작 |
덕빈(德嬪) → 덕비(德妃) → 순덕왕태비(順德王太妃) |
||
전호 | 인덕전(仁德殿) | ||
존호 | 순덕(順德) | ||
휘호 | 온명장의(溫明莊懿) | ||
시호 | 정안왕후(定安王后) |
[clearfix]
1. 개요
조선 제2대 국왕 정종의 왕비이자 조선의 첫번째 대비. 태조 이성계의 둘째 며느리이며, 김천서의 큰딸이다.2. 생애
1398년(태조 7년) 남편인 영안군(永安君)[4] 이방과가 왕세자가 되면서 왕세자빈이 되어 덕빈(德嬪)으로 봉해졌으며, 이어 국왕으로 양위받아 즉위를 하자 '덕비(德妃)'로 봉해졌다. 이후 1400년(정종 2년), 정종이 동생인 방원에게 양위하자 '순덕왕대비(順德王大妃)'의 존호를 받았다. 야사에 따르면 정종에게 양위를 권한 사람이 누구도 아닌 바로 아내인 정안왕후라고 한다. 남편 정종과의 사이에 자녀는 없었으며, 58세의 나이에 천식으로 승하하였다.[5]태종이 후궁을 들이는 일로 인해 원경왕후와 부부싸움을 하자 애처가인 상왕 정종이 크게 못마땅해하며 말하기를 “나는 아들이 없지만 젊은 날의 정(情)으로 사는데 주상(主上)은 아들이 이미 많지 않소, 왜 또 장가를 들려 하오?”라고[6] 동생인 태종에게 따끔한 한 마디 하기도 했는데, 태종에게 한 소리를 한 실록에 기록된 유일한 사례였다.[7] 사실 상왕 뿐만 아니라 주변 여론 모두 의식해서 태종도 여러 의례를 파하고, 후궁만 조촐히 부르는, 가히 그 태종답지않은 위엄 서리지 못한 모습으로 후궁을 들였다. 더군다나 태종의 충신중 가장 예의 관련해서 파문이 많은 그 이숙번이 직접 주청해서 가례색을 파해달라고 했다.
정안왕후는 당대 부드러운 성격에 검소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록에도 유한(幽閑)한 덕이 있고 투기하는 마음이 없어 내조가 대단히 많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친척들과도 무난하게 지냈는데, 여기에 남편인 정종 역시 곧으며 정직하고 바른 성격의 인물이라 이들 부부는 궁합이 잘 맞았던 것 같다. 그러나 정안왕후는 아이를 낳지 못했는데, 정종이 7명의 후궁에게서 난 15명의 왕자와 8명의 옹주에게도 자기 자식들인 마냥 후하게 잘 대해준 것으로 보인다.
후일 순덕대비가 먼저 사망하자 정종의 동생인 태종이 정종을 애도, 위로하는 잔치를 열었는데, 잔치가 한창 무르익던 도중 정종이 갑자기 먼저 간 아내가 떠올라 혼자 즐기지 못하겠다고 잔치를 파하고 돌아간 일화에서 정종과 순덕대비의 애틋하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8]
능은 개성시 인근 황해북도 개풍군 영정리 백마산 동쪽 기슭에 있는 후릉(厚陵)이며, 남편 정종과 쌍릉으로 함께 나란히 묻혀 있다. 시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과 함께 북한 내에 있어 민간인의 방문은 아예 불가하다.
3. 가계
3.1. 본가( 경주 김씨)
- 조부 : 밀직사승지(密直司承旨) 김문중(金文仲)
- 조모 : 정부인 윤씨(貞夫人 尹氏)
- 아버지 : 김천서(金天瑞)
- 어머니 : 삼한국대부인 담양 이씨(三韓國大夫人 李氏)
3.2. 외가( 담양 이씨)
- 외조부 : 판에빈시사 산원 증 문하좌시중(判禮賓寺事 散員 贈 門下左侍中) 이예(李藝)
- 외조모 : 정부인 류씨(貞夫人 柳氏)
- 외삼촌 : 목사(牧使) 이광신(李光臣)
- 외삼촌 : 내원당 겸 판조계종사도대선사(內願堂兼判曹溪宗師都大禪師) 구곡각운(龜谷覺雲)
3.3. 시가( 전주 이씨)
- 시아버지 :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이성계/이단(李成桂/李旦)
- 시어머니 : 신의고황후 한씨(神懿高皇后 韓氏)
3.4. 배우자 / 자식
- 남편 : 정종대왕(定宗大王) 이방과/이경(李芳果/李曔)
- 자식 : 슬하에 자식 없음.
- 양자 : 15남 8녀(모두 후궁 소생)
4. 대중 매체에서
- 1996년 KBS 드라마 《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박윤선[9]이 연기했다. 그저 정종과 함께 불안정한 정국과 그로 인해 자신들에게 해가 닥치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묘사가 대부분. 아무래도 시동생의 위용이 워낙 막강하다 보니 왕비임에도 시동생은 물론 아랫동서에게도 찍소리 못하고 눌려지내며 산다.[10] 오히려 정종이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자 그나마 안정을 찾고 평안하게 살다가 병이 깊어져 눕더니만 결국 일어서지 못하며 임종을 맞는다. 나중에 원경왕후는 남편에게 친정이 박살나고 왕비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깨닫게 된 뒤 정안왕후가 병으로 사망하자 그녀의 인품을 칭찬하면서 자신이 정안왕후에게 너무 심하게 행동했음을 뒤늦게 후회하기도 했다. 사료에서처럼 태종은 정안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상심한 정종을 위로하는 잔치를 여나 정종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을 견디지 못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인다.
- 한국의 사극 로맨스 웹소설인 《 연못에 핀 목화 - 송경별곡》에서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으로 남편인 이방과에게 한없이 사랑받았다는 원역사속 모습들과는 다르게 방과에게 조강지처로서 존중은 받지만 사랑받지 못하면서 결국 마지막에 폭발하며 품고 있던 한을 드러내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참고로 소설에서도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선천적인 불임으로서 방과와의 사이에서 자식은 전혀 가지지 못한 것으로 나온다.
5. 참고 문서
[1]
정안왕후와 남편
정종의 능인 후릉이 현재
북한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에
2009년 6월, 시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무덤이 있는
동구릉을 포함하여
남한 내의 모든
조선왕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지만, 후릉은 북한에 있어 시어머니인
신의왕후가 있는 제릉과 더불어 아쉽게도 등재가 안되었다. 그래서 기신일(돌아가신 날을 기리고 제사지내는 일)이 되면 시아버지가 있는
구리
동구릉 내
건원릉의 정자각에서 남편
정종과 함께 모시고서 제향한다.
링크.
[2]
김천서가
김경손 장군의 아들 김신(金信)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고
경주 김씨 족보에도 그렇게 올라가 있는데, 따져보면 생몰연대부터 맞지 않는다. 정안왕후가
1355년생이고 오빠 김수가
1338년생이니 김천서의 생년은 대략
1310년~
1320년 사이로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런데
김경손의 손녀이자 김신의 막내딸인
수령옹주가
1281년생이다. 김천서가 김신의 아들이라면 친누나, 그것도 막내누나와 30~40살 차이가 나는 것이 된다. 아마도 수백 년 뒤 후대에 족보를 기록하면서 동명이인인 김신(金信)을 혼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외자인 데다가 信이 흔하게 쓰이는 글자이기도 하니 동명이인이 있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3]
『
씨족원류』에 따르면, 오빠가 한 명 있고, 남동생 두 명, 여동생 세 명이 있어서 정안왕후는 장녀가 된다. 그러나 정안왕후의 첫째 남동생으로 기록된 월성군(月城君) 김수(金需)는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338년생으로, 정안왕후보다 무려 17년이나 빠르다. 시동생
태종의 외척숙청 때 유일하게 숙청당하지 않았고,
1409년(태종 9년) 72세의 나이로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
[4]
대군은 태종 즉위 이후 정착한 작호로 정종은 왕자 시절 영안대군의 봉작을 받은 적이 없었다.
[5]
태종의 왕비인 동서
원경왕후 민씨가 무려 47세의 나이로 늦둥이 막내를 낳은 지 이틀 후에 순덕대비가
승하했다.
[6]
여기서 아들이 없다는 건 정실 소생의
적자가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정종은 정비 정안왕후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지만,
후궁들 사이에서 많은 서자와 서녀를 낳았다. 오늘날 정종의 후손들은
성빈 지씨가 낳은 두 아들 중 한명인 덕천군의 후손이 주 기반을 이루고 있다.
[7]
상왕의 충고에 따라 가례색을 파하다. 《
태종실록》 3권, 태종 2년(
1402년, 명 건문(建文) 4년) 2월 11일 (갑자) 3번째기사.
[8]
《
태종실록》 24권, 태종 12년(
1412년, 명 영락(永樂) 10년) 8월 15일 (정묘) 2번째기사.
상왕을 받들고 본궁 수각에서 술자리를 마련하다.
[9]
박윤선은 1973년생으로 아랫동서를 맡은
최명길보다 10살 이상 아래였다. 실제 정안왕후가
원경왕후보다 10살 연상이었음을 고려하면 반대로 캐스팅이 된 셈. 2000년
KBS 드라마 <
태조 왕건>에서는
아자개의 딸
대주도금 역을 맡는데 본작과는 달리 강인한
여걸 역인지라
이미지의 갭이 엄청나다.
[10]
원경왕후는 대놓고 눈치를 주지만 이방원은 형 정종과 사이가 좋고 정종과 정안왕후 부부가 알아서 욕심없는 모습을 보인지라 심하게 갈군다거나 하는 모습이 안 나온다.
[11]
인스타그램 : lovelife.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