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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7-04 17:28:08

문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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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제5대 국왕
문종 | 文宗
파일:excellent_unesco9_1.jpg
현릉 전경
출생 1414년 11월 15일
한성부 충녕대군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즉위 1450년 4월 8일
한성부 영응대군 사저 동별궁 휘덕전[1]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사망 1452년 6월 10일 (향년 37세)
한성부 경복궁 강녕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2]
능묘 현릉(顯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421년 12월 1일 ~ 1450년 4월 8일
조선 왕세자 | 조선 국왕 대리청정
1442년 8월 1일 ~ 1450년 4월 8일
제5대 국왕
1450년 4월 13일 ~ 1452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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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향(珦)[3]
부모 부왕 세종
모후 소헌왕후
형제자매 18남 4녀 중 장남
배우자 정실 휘빈 김씨, 순빈 봉씨, 현덕왕후
후궁 숙빈 홍씨[4]
자녀 1남 2녀
종교 유교 ( 성리학)
신체 1자(30cm)[5]
휘지(輝之)[6]
전호 경희전(景禧殿)
묘호 문종(文宗)
시호 조선: 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
(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
: 공순(恭順)
}}}}}}}}} ||
파일:조선 문종 어필.jpg
문종의 친필 글씨 ( 열성어필)

1. 개요2. 생애3. 평가4. 가계5. 기타6. 대중매체에서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제5대 국왕. 묘호는 문종(文宗), 시호공순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恭順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 는 향(珦), 자는 휘지(輝之).

조선 최초의 적장자 출신 국왕으로,[7] 세종 소헌왕후 심씨 사이의 8남 2녀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나[8] 1421년에 세자로 책봉된 뒤 세종 말년에 부왕을 대신하여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다가 세종이 사망한 뒤 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소헌왕후와 세종의 3년상을 연달아 치르면서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어 2년만에 어린 아들 단종을 남겨두고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9] 재위 기간이 2년 정도로 매우 짧았기 때문에 탈상도 못 하고 붕어했다. 하지만 세종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세종 말기 7년 반은 문종의 대리청정 기간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통치 기간은 9년 반 정도였다.[10]

2. 생애

세종 3년(1421년), 문종의 나이 7세때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지금으로치면 초등학생 나이에 세종을 대신해 명나라 사신들에게 하마연을 베풀었는데 사신들이 문종의 외모를 보고는 립서비스를 담아 "이 나라는 산수(山水)가 기절(奇絶)하므로 이런 아름다운 인물이 난다."고 찬미하기도 했다. 문종은 체격이 크고 수염이 풍성하여 관우와 같은 풍모를 보였다고 한다. 당대의 미의 기준으로 친다면 비슷한 시기 명나라의 홍희제와 비슷한 외모일수도 있다. 홍희제 역시 잔병치레가 많았지만 어진을 보면 관우와 같이 큰 풍채와 풍성한 수염있는 외모였기 때문 그밖에도 학문에도 능해 세자 책봉 3년만인 10살때 논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다음해에는 바로 맹자를 배우는 등 경서들을 빠르게 익혀나가 세종과 사대부들의 기대를 한껏 높여나갔다.[11]

스물이 넘어서는 아버지 세종을 직접 호종하며 실무를 도왔다. 이때부터 이미 유교적 지식 뿐만 아니라 역산과 천문에 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대표적으로 세종 시기 과학분야 업적 중 하나인 측우기가 다름 아니라 세자 시절 문종이 세종의 명을 받아 설계한 작품이다.

여담으로 이때 당시 아버지인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에도 깊게 관여했다는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데, 대표적으로 최만리의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에서도 주된 이유 중 하나로 당시 대리청정 중이던 동궁(東宮, 문종)이 여러가지 할일이 많음에도 언문에 지나치게 크게 관심을 쏟고 있다고 우려하는 내용이 있으며, 이에 대해 세종은 "세자가 국가의 서무에 있어서 세미한일도 첨예하게 관여하는 것이 마땅하며 언문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반박한다. 또한 성삼문이 저술한 직해동자습[12]서문에서 훈민정음은 세종과 문종의 작품이라고 한 것을 보면 창제 과정에서 깊게 관여를 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13]
"전자에 내가 세자에게 선위(禪位)하고 한가롭게 있으면서 병을 수양하고자 하였더니, 경들이 울면서 청하기를 마지 아니하기로 억지로 그대로 따랐으나, 되풀이해 생각하니, 번쇄(煩碎)한 여러 일을 일체 친히 처결하면 반드시 다른 병이 날 것이니, 내가 심히 염려한다. 이제 군국(軍國)의 중한 일 외의 일체 서무(庶務)를 세자로 대신 다스리게 하고자 한다."
ㅡ 《조선왕조실록》 세종 27년(1445년) 5월 1일 기사. #
세종 치세 말기에 세종의 건강이 빠르게 악화되자, 세종 24년인 1442년부터 세자로서 약 7년 반 동안 대리청정을 하며 정무의 대부분을 직접 처리했다. 때문에 세종 치세 말기는 사실상 문종의 치세라고 봐도 된다.

실제로 세종은 이보다 5년은 더 빠른 세종 19년(1437년)부터 반복하여 대리청정을 제안하였으나 당연한 신하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세종은 점점 강무(군사훈련 겸 사냥)를 세자에게 대행하게 하고, 종묘 제사를 대신하게 하는 등 이미 대리에 준하게 업무를 순차적으로 인계하고 있었다.

이렇듯 문종의 대리청정 덕분에 세종이 건강 문제가 악화된 말년에도 학술분야 업적을 이뤄가는 데 문제 없이 주력할 수 있었으며 문종 역시 왕이 되기 전 짧지 않은 기간 공식적으로 정무 경험을 쌓아나가면서도 실수 없이 업무를 소화해 차질없는 왕권 승계를 준비 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세종-문종 간 대리청정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모범적인 대리청정 사례로 꼽힌다.[14] 그리고 세종이 1450년 결국 훙서하면서 29년간의 세자 생활, 7년 반의 대리청정을 마무리하고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 송나라가 문치를 택한 이래 오랑캐의 기병이 황성(皇城)을 횡행하고 다녔다. 문(文) 역시 중요하지만 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하루에 무(武)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혹자는 임금이 직접 무기를 조련하고 손질하는 것에 임금의 도리가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직접 무기를 정비하는 이유는 하루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환란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조선왕조실록 문종실록 성상께서 부국 강병 등에 대해 논의하다
" 송(宋)나라의 무비가 한(漢)나라· 당(唐)나라에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매양 이적(夷狄) 우환이 있었으니, 국가의 무비는 진실로 닦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오로지 숭상할 수도 없다. 문(文)을 숭상하되 무비를 닦지 아니하면 경계할 만한 송(宋)나라의 예(例)가 있고, 문덕(文德)을 닦지 아니하면 또 진(秦)나라· 수(隋)나라의 예(例)가 있다. 내가 근일 자주 관사(觀射)[15]를 하니, 글 읽는 사람들도 따라서 사모하여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 이가 많은데, 이는 비록 주지(主志)가 없는 선비이겠으나, 또한 무(武)를 숭상하는 징조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군병(軍兵)을 훈련하고 한편으로 학문을 흥작(興作)하는 것이 또한 옳은 일이니, 후일에 친히 성균관(成均館)에 나가서 학생들을 권려(勸勵)하겠다."
조선왕조실록 문종실록 사헌 집의[16] 신숙주가 궐내에 있는 공장[17]을 파할 것을 청하다 #

세자 시절부터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문종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가장 발달시킨 게 바로 군사 부문이다. 경연 때 병서를 강연하자고 했을 정도로 조선 왕조에 유례가 없는 밀덕후 군주. 스스로 자부심이 있었는지 실록에 자신의 병법이 제갈량보다 조금 모자랄 것이라고 자화자찬하는 부분이 있다. 짧게 보는 문종과 수양대군의 일화[18]

무기 제작에 지나치게 열중하고 있다며 이를 비판하던 신숙주"주상이 숭상하는 것을 만인이 숭상하는 바이니 주상께서 무(武)만 숭상하시니 세상 사람들이 다 무(武)에만 관심을 가집니다."라고 문종에게 말한 적도 있다. 이에 대해 문종은 "군사를 준비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인데?"라며 일축했다. (신숙주와 문종의 대화)[19]

개국 이후부터 병사들이 패용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멋대로 환도의 칼을 분질러서 짧게 만들고 다니거나 심한 경우 칼 자루만 남겨두고 칼날을 없애는 막장스러운 짓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법적으로 기병 보병의 환도 길이를 규정했다.[20]

문종은 신진법이라고 짓은 다음 수양대군 김종서 정인지에게 내용을 교정하라고 명하였다. 이로써 5행사상에 기초한 5위 진법(병서) [21] 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세자 시절 대리청정과 재위 기간을 통해 부왕의 사업을 이어받아 4군 6진의 북방 정비를 완료했으며, 군제를 개편하여 5위 진법(병서) 이론에 따라 군사 조직도 기존의 3군의 12사를 5사로 개편되었다.[22]하고 병력을 증강했다.[23] 세종 기에 이뤄진 화포의 규격화 및 국가적인 법제화, 부대 운영과 인원수의 결정 등에도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세종 문서로.

또한 문종이 고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전쟁사를 정리한 《 동국병감》을 편찬하라 명하였다. 현존본은 선조 41년에 간행되었다고 한다. 즉, 책 자체는 문종의 명으로 편찬되었지만 현존하는 책이 선조 41년에 간행된 책이고, 문종조에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어서 '문종의 명으로 편찬되었고 선조 41년에 간행되었다'고 한다.

나아가 문종은 직접 화차( 신기전)를 개발해 그 운영법을 스스로 정하고 새로 정하기도 하였다. 화차( 신기전)을 100발로 추가시켰으며 평지에서는 2명, 오르막 길에서는 4명이 운영하게 하였으며 장전에서 발사 과정 그리고 불발탄 처리 방법까지 완벽하게 구현했다. 이 화차를 '문종화차'라고 하는데, 이 화차는 후기에 성종 조에 "나라에서 화차를 만들 때는 다 이유가 있으니 잘 쓰도록 하라."는 말이 나올만큼 큰 활약을 한다. 기사를 찾아서 읽어보면 적의 위치를 확인하고 사격을 해서 타격을 줄 경우에는 그야말로 당시로써는 핵폭탄 급이었고, 설령 맞추지 못한다고 해도 그 소리와 빛 때문에 여진족들이 혼비백산해 도망가는데 급급했다.

논의만 하고 끝나기는 했지만 북한산성 축성도 고려했던 인물이다. 만약 북한산성이 이때 축성되었으면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상당히 골치아픈 존재가 되었을 것이며 병자호란 때는 여기로 인조가 피난했다면 남한산성 임시 행궁에 홍이포를 발사했던 일 등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24]
절일사(節日使) 정척(鄭陟)이 요동에서 치보(馳報)하기를,

" 황제 달달(達達)을 친히 정벌하다가 잘못하여 오랑캐의 나라에 잡혀갔으므로, 황태후(皇太后)가 정통(正統)의 서자(庶子) 견심(見深)을 봉하여 황태자(皇太子)를 삼고, 황제의 아우 성왕(郕王) 기옥(祈鈺)이 즉위하여 원년(元年)을 경태(景泰)라 고치고, 멀리 정통(正統)을 태상황제(太上皇帝)라 존칭하였나이다."

하니, 임금( 세종)이 듣고 깜짝 놀래어, 의정부와 육조(六曹)를 불러 이르기를,

"황제가 잘못 오랑캐에게 잡혀 가고 새 황제가 즉위하여 이같은 큰 변이 있으니, 진하(進賀)와 진위(陳慰)를 속히 해야 할 것이며, 또 양계(兩界)의 방어하는 것을 더욱 경계하고 엄하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세종실록 125권, 세종 31년 9월 29일 병오 2번째기사

문종의 이러한 군사력의 대한 관심은 단순히 개인적 기호뿐만이 아닌 절박하게 필요한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종 말엽에 조선은 토목의 변 소식을 전해듣고 말 그대로 비상이 걸린다. 오이라트의 대대적 침공은 결국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당시 상황은 상당히 급박했다. 세종은 이 위험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북방의 방어체제를 일신하려는 노력을 사망 직전까지 기울인다. 이 당시 국가행정에 깊이 관여했던 문종이 이를 몰랐을 리가 없다. 고려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전방위적인 외침이었기 때문에 조선 전기의 위정자들은 안정적인 군제 정비와 군대 양성에 대단히 신경을 많이 썼다.

농업과 과학 등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흔히 장영실의 작품으로 알고 있는 측우기의 제작 아이디어도 사실 세자 시절의 문종에게서 나왔다. 가뭄이 들자 땅을 파 젖은 깊이를 쟀는데 부정확하자 구리통을 만들어 비 온 양을 쟀다는 기록이 실록에 나온다.

구휼 제도( 환곡제도)에도 관심이 있어서 태조 때 설치한 의창의 원곡이 부족해지자, 세종 때 대구에서 시범적으로 시행한 사창제를 1451년(문종1년) 제도화하였다.[25]

뿐만 아니라, 전염병이 돌자 당시 전염병의 원인이라 생각되던 귀신들을 달래고자 제사를 지내게 되는데 직접 제사의 제문을 쓴다. 그 문장이 명문일 뿐더러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고, 무엇보다 왕 스스로 자신의 부덕함을 탓하는 글이라 더욱 진정성이 드러난다. 놀랍게도 이 제사 이후로 서서히 전염병이 잦아들었다고 한다. #

이 정도까지 보면 명군 축에 속할 만하다. 그러나 여러 고정 관념 때문에 후세 사람들에게 오해를 많이 사는 왕. 어떤 의미에서는 조선 역대 국왕 중 가장 과소평가되는 조선의 임금 중 하나다. 대리청정과 관련하여 실록에 따르면 세종 24년 7월부터 추진하여 세종 말기 7년 반은 문종의 대리청정이 지속되었다.

수양대군이 국법을 어겼을 때도 몇 번이고 상소를 올려 지적을 해도 그 때마다 "수양대군은 충직하여 다른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라며 끝까지 보호했다. 수양대군의 행위를 미리 예방하지 못했다고 하나 문종은 나름대로 할 수 있는데까지는 했다. 신권을 강화시켜 왕족을 견제시키고 믿을 수 있는 신하들( 김종서, 황보인, 정분 등 고명대신들)에게 단종의 보좌를 부탁한다. 문제는 엄연히 전제군주제인 나라에서 신하들을 보좌역으로 내세우다 보니 명분에 하자가 많았다는 것.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킬 때 쓴 사유가 바로 신하들이 단종을 농락한다는 주장이었는데 이게 먹혀 들어가 수양대군의 행동이 일부 왕족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비(妃)를 들여서 사후 단종에게 든든한 후원 세력을 만들어주었다면 더 나았을거라는 말도 있지만 친어머니가 아닌 양어머니가 어디까지 보좌를 해줄지도 미지수이며 결정적으로 문종 본인이 이렇게 일찍 사망할 것이라고는 본인도 생각치 못했을 것이다. 유교 문화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던 조선인 만큼 부모의 3년상 도중에 혼례같은 경사를 치루는 것은 불가능했는데 문종은 즉위 2년만에 죽었다.[26] 결국 혈연으로 맺어진 후계자가 다 일찍 죽은게 문제이며 이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거기다 단종은 아버지인 문종보다 훨씬 강력한 정통성을 지닌 왕이었다. 후대의 숙종이 강력한 왕권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가 그의 완벽한 정통성에서 나왔는데 왕의 아들로 태어난 숙종보다 의 손자인 원손에서 세손, 세자, 왕으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갔던 단종의 정통성이 훨씬 강력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인 현덕왕후는 문종의 정실 세자빈이었으니[27] 단종은 적장손이기까지 했다. 이처럼 태어날 때부터 누구도 넘볼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완벽한 왕위 계승자였으니 그의 왕위를 그것도 아버지의 동생이 빼앗기란 명분상으로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애시당초 이런 주장이 나온 배경은 < 왕과 비>부터 < 인수대비>까지 방송사 불문하고 사극들이 죄다 문종을 병약하고 힘없는 임금으로 그리고 문종 때부터 수양대군이 설치고 다녔다고 왜곡한 탓이 크다. 수양대군의 세력은 문종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단종 때도 경쟁세력들 중 가장 약한 축이었다.[28] 만약 문종이 5년 내지 10년만 더 오래살아 단종이 완전히 성인이 되었던 상태였거나 왕실에 수렴청정할 어른 한 명[29]만 있었다면 수양대군은 기껏해야 태종 시기 의안대군 이화 정도의 위상에 만족해야 했을 것이다. 단종 역시 완벽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고, 견제세력으로 김종서 등 대신들이 있었고 종친 중에도 안평대군, 금성대군같은 견제세력이 있었기에 수양대군이 그렇게 막나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하다.

문종은 기록 면에서도 불운했다. 조선의 27명 임금 가운데 유일하게 재위 기록이 일부 소실된 임금이다. 문종실록 열세권 가운데 11권(음력 1451년 12월 ~ 1452년 1월)이 사라졌는데 '전주사고'의 문종실록 11권이 표지는 11권이였지만 내용은 9권으로 잘못 들어가 있었다.(책을 필사하고 표지를 붙이던 와중에 9권과 11권의 표지가 바뀐 것으로 추정) 그러던 중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의 실록을 제외한 나머지 사고와 실록들이 죄다 불타면서 9권 표지를 단 11권을 포함한 나머지 문종실록 11권이 모두 사라졌고, 임진왜란 이후 전주사고 실록을 복사하는 과정에서 문종실록 일부가 사라진 것을 알았지만 다른 사본이 모두 사라져서 복원할 수는 없었다. 조선 후기였다면 내용을 짐작할 승정원일기라도 남아있었겠지만 전기 승정원일기는 전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추측밖에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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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한 이후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들 단종이 '문종'이라는 묘호를 올렸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안에 있는 현릉(顯陵)이다.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와 안장되어 있는데 동원이강릉 형식의 능묘이다. 본래 현덕왕후 권씨는 1441년에 승하해서 경기도 안산시의 소릉(昭陵)에 묻혀 있었고 중종 때인 1513년 왕후로 복위되었을 때 합장되었다. 여담으로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현릉의 비석 제작을 감독하던 민신과 다섯 아들들을 죽였는데 이들을 참살한 장소 역시 형의 무덤이었던 현릉이었다.

3. 평가

요절하지만 않았다면 세종대왕에 필적하는 성군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재위 2년 만에 여러 골치아픈 문제들을 어린 단종에게 떠넘기고 과로와 여러 요인으로 작용된 병으로 세상을 뜬다.[30] 그렇다고 해서 문종이 아주 단명한 왕은 아닌데, 문종은 성종보다 오래 살았다.[31] 세종임기 마지막 8년기간에는 강무나 종묘 제례같은 국가 중대사까지 대신하는 등 사실상의 국왕 업무를 권한대행했지만 실제 재위기간이 짧았던 탓에 몸이 약하고 요절했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오랜기간 세자로 있었고, 차기 국왕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최초의 적장자 출신 임금이라는 정통성도 완벽했기 때문에 그 위세도 대단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문종이 몇 년만 더 오래 재위했다면 단종의 보위는 안정화에 접어 들었을것이고, 계유정난과 같은 끔찍한 살육전이 없었을 것이다.[32] 그럼 적어도 단종은 세자 시절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한 사건은 없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위 단락의 이유로 단종을 늦은 나이에 얻었고, 후계자인 단종이 자신의 사후에도 별 탈 없이 자리를 지킬 수 있을 만한 확고한 권력 기반을 마련해주지 못한 상황에서 사망하는 바람에 권력 공백을 초래했다. 물론 문종의 뒤를 이를 세자 자체의 정통성이야 최강이었지만 문제는 그의 나이(문종이 승하할 당시 단종의 나이는 겨우 11~12살)가 너무 어렸고 그를 뒷받침할 왕실의 내명부 어른(대비, 왕대비, 대왕대비는 단종 재위 시절에는 모두 죽고 없음)이 부족했다는 점. 문종 정도로 뛰어났던 군주가 동생 수양대군의 강력한 야심을 몰랐을 리는 없었을텐데 이렇다 할 확실한 대비책을 세워놓지 않았다.[33] 게다가 문종에게는 수양대군이 딴 마음을 먹을 경우를 대비할 만한 방법이 여럿 있었다. 일단 왕비를 다시 한 번 들이기만 해도 최소한 단종을 대신해 수렴청정할 대비 1명을 만들어 둘 수 있으며[34][35], 극단적으로는 장래의 화근에게 적당한 죄를 물어 숙청해버린다는,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고 효과도 확실한 방법도 있었다.[36] 다만 문종 당시에는 수양의 세력이 워낙 약했고 계유정난 당시에도 수양의 세력은 대신들, 종친들 가운데서도 강하지 않았다. 어쩌면 문종도 그것을 고려해 수양이 방해물 정도의 가치도 없다고 판단하고 놔둔 것일 수도 있다.[37]

설령 수양을 위협적으로 생각했다 하더라도 실제로 숙청하기에는 여러모로 부담이 있었다. 당장 조선왕조가 개창 이래 아버지 세종의 즉위까지 2명의 왕자를 살해하고 1명의 왕자가 귀양가고 1명의 세자가 폐위되는 등 바람 잘 날 없었기 때문에 기껏 탄생한 왕조 최초의 적장자 출신 국왕이[38] 또 동복동생을 숙청하는 것은 왕권의 강화는 고사하고 오히려 왕권의 취약함을 광고하는 꼴이 될 수 있었다. 여기에 저렇게 왕실 내부 숙청이 반복되다보니 종친의 숫자 자체도 많지 않은 마당에 - 특히 문종 본인도 자녀를 많이 두지 않은 상황에서 - 다시 멀쩡한(?) 적자 하나를 날려버려 안그래도 적은 종친의 수를 더 줄이는 것도 선뜻 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39] 하지만 이런 모든 염려가 결국 문종 본인의 급서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 그저 안타까운 일.

4. 가계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

전체적인 경향을 보면 30대 후반에 사망한 임금이지만, '문약'하다는 기존의 이미지 때문에 40대 이상의 중장년 배우가 맡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계유정난이 낀 작품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한 경향이 짙은 듯 하다. 물론 한명회의 송승환은 제외하고... 예를 들자면, 왕과 비에서의 전무송이나 공주의 남자에서의 정동환은 문종을 연기할 당시 2명 모두 예순 전후에 30대 후반에 죽은 문종을 연기한 것이다. 다만 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는데, 바로 세조 역의 배우가 대부분 중장년이다 보니[73] 그 형인 문종 역시 젊은 배우를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대중매체에서는 흔히 계유정난의 프롤로그에서 다뤄져 병약하거나 잠깐 재위하는 모습으로만 그려지지만 실상은 선왕의 적장자, 29년간의 정통성에 흔들림이 전혀 없었고 능력도 있었기에 동생들은 알아서 길 수 밖에 없었다. 문종으로 인해 동생들이 감히 대들지 못하니 그들이 충직한 줄로만 알고 충분히 견제하지 않아 문종 사후 나이 어린 왕인 단종이 즉위하자 그 때까지 조용히 숨죽여 살았던 동생들이 딴 생각을 품을 수 있었기 때문.

7. 관련 문서



[1] 세종의 빈전이 설치된 동별궁에서 상을 치르다가 세종 사망 5일 후 상복 차림으로 빈전 밖에서 즉위했는데, 즉위식 도중에 눈물을 흘리느라 상복 옷소매가 다 젖었다는 기록이 있다. [2] 문종실록에서는 유시에 강녕전에서 훙서했다고 하나, 단종실록 총서에서는 또 문종이 천추전에서 훙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확실하진 않으나, 천추전은 임금의 집무실이니 이미 병환이 위중했던 문종이 천추전에서 거처하다가 사망했을 리는 없고, 침전인 강녕전에 있다가 사망했을 것이다. [3] 성리학을 들여와서 숭앙받은 안향과 휘가 같다. 아마 세종대왕이 즉위하기 4년 전에 태어나서 왕세자가 될 걸 예상 못 했기에 벽자를 써야 할 거란 생각을 미처 못 한 듯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성리학을 들여와서 성리학을 국시로 삼는 왕조에서 숭앙받는 사람인데 그의 이름을 따서 짓거나 또는 지으면서 이름이 겹치는 걸 생각하지 못 한 것은 이상하다. [4] 현덕왕후 사후에 사실상의 왕후 역할을 하였고 명나라의 공인도 받았다. [5] 조선왕조실록에 종기의 크기가 길이 1자(30cm) 너비 5, 6치(15~18cm)라고 나온다. 출처 [6] 를 이름과 말미가 있게 짓는 예를 보면 알겠지만 세종대왕의 아들은 모두 구슬 옥 부수가 든 외자 이름을 썼는데 자의 뜻을 가만히 살펴보면 의 속성을 뜻하는 글씨를 썼다. 당장 문종의 자만 해도 옥의 속성인 빛남이 자에 든 뜻이다. 또 세종대왕의 아들이 쓴 자는 한남군을 빼고 모두 끝이 로 끝난다. [7] 개국군주인 태조를 제외하고 그 이후를 보면 정종은 태조의 2남, 태종은 태조의 5남, 세종은 태종의 3남이었다. [8] 위로 누나 정소공주, 아래로 여동생 정의공주가 있다. [9] 근데 의외로 조선시대 행정 체제를 완성한 군주인 성종보다는 오래 살았으며, 양력 기준으로 봐도 같은 나이에 사망했다. 문종과는 달리 성종의 재위 기간이 20년이 넘고, 성종은 문종과는 달리 어느 정도 장성한 후계자가 있었던 것도 있다. [10] 이 대리청정은 세종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이루어진 대리청정이기 때문에 세종 치세 말기는 사실상 문종의 치세라고 봐도 무방하다. [11] 특히나 세종은 자신이 갑작스럽게 왕이 되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아쉬움을 항상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세자 교육에 더욱 만전을 기했다. [12] 훈민정음으로 설명되는 한문 학습서로 정확한 완성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세종때 편찬을 시작 한것으로 보이며 서문의 내용으로 보아 단종 시기에 완성된 것이 확실시된다. [13] 세종의 다른 자녀인 수양대군도 훈민정음 창제 초창기부터 불경 언해서인 석보상절을 편찬하고, 안평대군도 형인 수양대군과 동궁(문종)과 함께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는 작업을 같이 관장했던 것을 보면 #, 한글 창제에 세종을 도와 관여했다고 추측할 수 있으나, 문종만큼 직접적으로 창제에 관여했다고 볼 기록은 없다. 이외에도 세종의 차녀인 정의공주가 죽산 안씨 대동보에 따르면 변음과 토착을 풀어 한글 창제에 기여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사실 여부가 의심스럽다. 자세한 내용은 정의공주 문서로. [14] 반대로 조선 역사에서 가장 모범적이지 못하다고 꼽히는 대리청정 사례는 영조- 사도세자 간 대리청정이다. [15] 관사(觀射) : 임금이 활 쏘는 것을 구경함. [16] '사헌 집의' : 고려 말기ㆍ조선 전기에, 사헌부에 속한 정삼품 벼슬.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중승(中丞)을 고친 것으로, 이후 다시 중승으로 고쳤다가 조선 태종 원년(1401)에 다시 이 이름으로 바꾸었다. [17] 무기 공장을 의미한다. [18] 더 재미있는 건 옆에서 '어디 제갈량을 형님한테 비교하겠냐?' 하는 수양대군(세조)의 아부성 멘트. [19] 그런데 문종이 나중에 한 말을 보면, 궁 안에서 실험을 할 때 환관들에게 일을 맡기는 것을 본 신숙주가 국왕에게 신하의 능력을 못 믿냐고 돌려 말하는데, 핵심은 말하지 않아서 진짜 주제를 말하지 못하고 끝난 것에 가깝다. 이때 문종이 한 말을 보면 신하들에게 맡기면 너무 느려터져서 답답했기에 환관들에게 맡겼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도 말엽에 여러가지 사업을 소수의 측근들과 자녀들을 이용하여서 진행하였다. [20]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데 문종 당시의 척법을 적용하면 여전히 짧다. 기병도의 날 길이가 기껏 해야 30~45cm 정도로 계산된다. 후대의 영조척을 적용하면 어느 정도 검의 길이가 나온다. 일부에서는 영조척을 적용해서 칼 길이를 계산하는 경우가 있으나 문종 역시 화력적인 측면을 강조하면 면을 볼 때 주무기로써의 검이 아니라 호신용 내지는 최소한의 방어를 위한 보조 무기로써의 길이를 규정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아니면 당시까지는 기병 활용이 많이 있어서 그러할 수도 있다. 말 위에서는 검이 너무 길면 사용하기가 어렵다. [21] 병력 편제, 전투훈련을 저술하였음 [22] 의흥(義興), 충좌(忠佐), 충무(忠武), 용양(龍驤), 호분(虎賁) [23] 이것이 세조를 거쳐 조선 전기 중앙군 제도인 5위가 된다. [24]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시기 청군의 빠른 기동에 남쪽으로 도망가야 하는 상황에서 북쪽, 그것도 청군에게 포위되기 좋은 북한산성으로 가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였다. 조선 후기 방어 전략에서 북한산성은 탕춘대성과 연계되어 서북변을 방위하는 목적에서 축조되었다. 그렇다고 왕이 도망가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서북방의 청군의 침입에 만약 도망가야 한다면 반대편으로 가는 것이 정석이다. [25] 관영 주도의 의창을 향촌에서 자치적으로 운영한 제도이다. 이후 성종 때 폐지되었다가 흥선대원군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고자 다시 부활시켰다. [26] 하지만 이를 감안해도 문종은 분명 혼례를 치를수 있었다. 바로 현덕왕후가 죽은지 3년이 지난 1444~1445년 즈음과 소헌왕후가 죽은지 3년이 지난 1449년에 말이다. 즉, 새로 세자빈을 맞으면 됐던 것이다. 물론 이것도 납득이 안가는건 아닌게 당시 기준으론 분명 왕조 초기이다보니 자신이 일찍 죽을때의 문제+왕실어른의 부재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를 미처 못 생각했다면 세자빈을 새로 들이지 않을수도 있긴하다. 이해는 가도 매우 안타까운 실책이 아닐수 없다. [27] 현덕왕후는 세자빈 당시 단종을 낳다 죽었으며 문종이 즉위한 후 추존되었다. [28] 그래서 설마 쿠데타를 일으킬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고 수양 세력 내에도 주저하는 이들이 있어 수양이 직접 앞장섰다. 계유정난이 성공한 건 이런 인식 때문에 다들 방심하고 있었던 탓이 컸다. 단, 수양대군의 위치를 생각하면 세력이 가장 약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 단종 즉위 이후 왕의 숙부 중에서 가장 연장자이자, 세종의 적자였다. 즉, 신하들이 가장 위협시하였던 왕족이 바로 수양대군이였다. 이에 견제 차원에서 동생인 안평대군을 밀어준 측면이 있었다. [29] 어머니인 현덕왕후나 할머니인 소헌왕후. 아무래도 소헌왕후가 살아 있었다면 어머니에게 대단한 효자였다는 수양대군이 조카를 밀어낼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30] 단, 아버지 세종이 몸이 안 좋은 관계로 세종 말기 때부터 사실상의 통치를 맡겼기 때문에 실질적인 치세는 약 10년 정도 된다. [31] 1414년 출생~1452년 사망으로 사망 시 39세. 성종은 1457년 출생~1494년 사망으로 사망 시 38세였다. 단, 양력으로 따지면 문종이랑 같이 39살에 승하했다.(성종의 사망 날짜: 음력 1494년 12월 24일, 양력 1495년 1월 20일) [32] 7년만 더 재위했다면 단종은 나이 19세(만 18세)에 즉위하는데, 후대 세조의 뒤를 바로 이어 신하들을 쥐고 흔들었던 예종의 즉위 나이와 같다. [33] 수양대군이 문종에 대해 호의적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볼만한 증거는 여럿 있다. 수양대군은 형수를 폐서인하고 형의 무덤을 파헤칠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수양이 세종과 세자 앞에서 일부러 자신의 재주를 자랑했다는 일화까지 있는 마당에 문종이 수양의 야심을 아예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종이 형제들을 전반적으로 잘 대해줬던 것을 봤을 때 그냥 성품 자체가 너그럽고, 본인이 왕세자로서 당당하게 명분을 휘두르며 살았던 터라 수양의 정치적이고 교활한 인성을 간과하거나 야심을 다소 과소평가하여 설마 왕위까지 노리겠냐고 생각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수양대군은 문종이 자신의 재주를 제갈량에 비하자 제갈량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폭풍아부를 하기도 했다. 수양대군의 야심과 별개로 생전의 둘의 모습을 보면 동생은 형에게 온갖 칭찬을 하고 형은 동생이 이상한 소리를 해도 용서해주는 등 오히려 생전엔 겉으로 봐서 우애가 좋은 것처럼 보이는 묘사가 많다. 즉 문종 생존에 수양대군은 '가끔 이상한 짓을 하긴 하지만 그래도 말은 잘 듣는 동생'으로 여겨졌을 것이며, 나이가 그렇게 많지도 않고 정통성도 능력도 확실한 자신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데 위협적으로 느껴졌을 리가 만무하다. [34] 후일의 조선 임금들은 국모의 자리가 비면 어떻게든 왕후를 다시 세웠다. 예를 하나 들어 보면 영조가 60세가 넘은 나이에도 굳이 15세의 정순왕후를 들이고 이로부터 불과 3년 후 놔둬봐야 왕실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사도세자를 처분했던 것( 임오화변)을 생각해보자. 영조가 그 나이에 굳이 적손을 얻기 위해 그녀를 중전으로 들였을까? 이미 영조는 영특한 세손을 후계자로 마음에 두고 있었고 세자를 배제하고 세손을 후계자로 세울 작정을 하고 있었다. 정조는 임오화변 당시 불과 11세의 나이였는데 설령 영조 본인이 세손이 장성하기 전에 승하하더라도 정순왕후라는 왕실의 어른이 정조의 뒤를 이어 수렴청정을 할 수 있도록 장치를 해두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기대대로 정순왕후는 세손과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의 뒤를 봐주었다. 물론 문종의 계비가 반드시 좋은 계비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단적으로 선조가 아들 광해군을 견제하기 위해 인목왕후를 들이고 적자인 영창대군을 얻으면서 광해군이 폐모살제를 저지르는 계기를 만들었고 특히 문정왕후의 경우 인종 독살설의 중심에 놓여 있는 인물이며 이전에도 자신의 아들 경원대군(명종)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움직였다. 다만 문정왕후가 인종을 홀대한 것은 결국 중종의 또다른 아들인 명종을 자기가 직접 낳았기 때문이다. 명종을 낳기 전의 문정왕후는 의외로 나쁘지 않은 새어머니였으며, 만약 명종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중종이 승하하면 인종을 등에 업어야 하니까) 그대로 괜찮은 새어머니로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인종이든 명종이든 어쨌든 둘 다 중종의 적자니까 누가 왕이 되더라도 중종의 가계가 이어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를 문종의 사례에 대입해본다면, 문종이 계비를 들이고 나서 승하했을 경우 문종 다음의 왕이 단종이냐 단종의 동생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문종의 아들이 즉위하고 문종의 왕비가 수렴청정한다'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고, 이는 명백히 실제 역사에서 일어난 결과(=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가계가 단절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결말이다. 이 경우 단종은 왕위에 오르든 못 오르든, 왕위에 오른 후 오래 살든 요절하든 간에 적어도 실제 역사만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위의 사례들처럼 왕위를 두고 형제끼리 견제하는 일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건 차치할 일이다. 따라서 문종이 계비를 들이지 않은 건 확실한 실책이라고 할 수 있다. [35] 게다가 인목왕후와 광해군의 사례는 오히려 계비를 들임으로써 단종이 보호를 받을수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례이다. 광해군이 쫓겨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웃어른인 대비이자 적모인 인목왕후를 폐모살제 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예시를 들면 만일 문종이 계비를 들이고나서 승하하여 계비가 단종을 수렴청정하는 가운데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켰다면 필연코 계비와 대립하였을 것이고, 그러면 더욱 세조에게 불리했거나 혹은 광해군처럼 계비를 폐모살제하고 내몰았다면 원 역사의 단종복위운동이나 인조반정과는 비교도 할수 없을만큼 엄청난 반정이 휘몰아쳤을 것이다. 거기다 세조 정도의 머리라면 이런 가능성도 생각하였을 것이므로 더욱 계비가 있었다면 난을 일으킬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36] 수양대군을 굳이 죽일 필요까지도 없다. 할아버지 회안대군에게 했던 것처럼 심복 부하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숙청해서 수양대군의 세력을 완전히 와해시킨 후 수양대군을 적당한 곳에 귀양보내버리는 정도만 되었어도 계유정난은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설령 수양대군이 어찌어찌 정난을 도모할 만한 세력을 다시금 모으는데 성공했다 쳐도, 그 시간이면 이미 단종이 장성하여 왕권을 제대로 휘어잡고도 남았을 것이다. [37] 당장 당시 재상들이 누구인가? 면도날 황보인과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이다! 아직 저자거리 깡패 십여 명 모아서 활쏘기나 가끔 시키던 수양대군과의 세력과는 비교불가이다. 또한 이때는 오히려 안평대군의 위세와 인망이 수양대군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 세력을 비교하자면 이 시기의 수양대군의 세력은 변변찮았다. 그러나 모인 인물들이 별볼일 없는 무뢰배 수준이었다고 하더라도, 이들 대다수가 무관들에 중앙군 각 부서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을 무시하면서 방심한 탓이 크다. 이건 문종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황보인과 김종서가 이러한 위험성을 무시한 측면이 컸는데, 수양대군의 양면전술에 놀아난 탓이였다.(겉보기에는 수양대군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듯하게 보여줬지만, 실제로는 자기 세력들을 중요 부대에 배치하면서 계유정난 당시 단종을 손쉽게 확보하였다.) [38] 정종은 어쨌든 차자였고 취급도 정통이라기엔 좀 애매했다. [39] 세조가 공신세력의 대항마로 종친들을 기용한 바와 같이 종친 세력은 대체로 왕권을 뒷받침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고, 국초에는 전왕조의 복국운동을 두려워해 왕씨 몰살 같은 짓까지 벌였으니 더더욱 왕실 종친의 숫자를 확보하는 데 고심할수밖에 없었다. 물론 조선왕실도 정종, 태종, 세종, 양녕대군, 효령대군 등이 아들들을 제법 낳긴 했지만, 무려 25남(!)을 거느린 고려 태조에 비추어보면 좀 초라했고 정종 가계는 아예 적자가 없었다. 실제로 1세기 후 조선왕실은 심각한 적통부재에 시달렸고 이는 왕권의 약화에도 기여했다. [40] 《세종실록》 세종 15년 3월 3일 [41] 요절한 다른 왕녀들은 사망 당시 나이가 정확히 적혀있어 생년을 알 수 있는 반면, 권씨의 큰딸은 적혀있지 않았다. 하지만 만 한 살이 되지 못했다는 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1432년 3월 이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42] 《세종실록》 세종 26년 12월 4일 [43] 정창손의 조카 [44] 성종의 후궁인 귀인 권씨의 고모다. [A] 《세종실록》세종 28년 6월 6일 [A] 《세종실록》세종 28년 6월 6일 [47] 이 요절한 왕자의 생모를 소용 정씨로 추측하기도 하는데, 왕·왕비의 묘지명에 자손들의 이름을 쓸 때는 보통 그 생모의 신분 순으로 쓴다. 만약 이 왕자가 소용 정씨의 아들이었다면 사칙 양씨의 딸보다 먼저 언급되었어야 맞다. 또 당시 정씨는 승휘라는 정식 작위가 있었는데 '승휘 정씨'도 아니고 그냥 '정씨'라고만 썼을 리 없다. 즉, 이 왕자의 생모 정씨는 정식 후궁 첩지를 받지 못한 일개 궁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48] 문종의 요절한 왕녀들은 전부 죽었을 때의 기록이 있는 반면, 요절한 왕자들은 생몰년 기록 자체가 없다. [49] 《문종실록》 문종 1년 8월 12일 [50] 만기(萬機) : 임금이 보살피는 정무 [51] 단종 또한 조선 왕조 개국 초기의 전성기를 구가한 임금이 될 가능성이 높았으나 계유정난으로 실권을 잃고 세조에게 왕좌를 빼앗긴다. 이후 세조 대를 시작으로 조선의 색채는 이전 명군들이 추구하던 이상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변질된다. 세조 치세에 형성된 폐단은 장기적으로 조선의 국운이 내리막길을 걷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52] 물론 조선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위기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세조 이후에도 성종,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 등 명군이 여럿 나와서 정조 시기까지는 국력을 유지했다. 본격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순조 시기부터 시작된 세도정치 시기부터이다. [53] 문종이 출생하였을 당시의 왕세자는 큰아버지 양녕대군이었고, 양녕대군에겐 순성군이란 적장자가 있어서 원손이 아니었다. [54] 적장손 출신 임금. 물론 단종도 세자 신분으로 왕위에 올랐다. [55] 왕릉에 가면 울타리 넘어가서 능침 앞까지 올라가는 사람이 있는데 이러지 말자. [56] 옛 문헌에는 흔히 등창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한다. 지금에야 종기는 단순한 질병이지만 항생제가 없었던 옛날에는 종기가 심각한 질병이었다. [57] 조선 왕가 유전병이 있었는데 종기와 피부병. 몸에 종기가 났을 때 치료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무식한 방법은 환부를 제거하는 것인데 왕의 몸에 쇠토막을 함부로 댈 수 없었던 때였으니 사망률은 더했을 듯. 현대 의학으로도 초기에는 항생제를 통해 스스로 가라앉기를 유도하지만 약으로 안된다 싶으면 외과적 수술을 통해 제거한다. 항생제야 제쳐두더라도 한의학 자체가 외과에 대한 내용은 전무한데다 당대 유럽이나 중동 등지의 외과술도 파상풍을 막지 못했으니 종기는 고질병이었다. [58] 이전 문서까지는 온실에 대한 기록이 《식료찬요》에 나오는 것처럼 기술했지만 실제로는 《산가요록》(山家要錄)에 나온다. 저자는 동일하다. [59]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종기의 크기가 길이 1자(30cm) 너비 5, 6치(15~18cm)라고 나온다. 출처 [60] 다만 전순의가 책봉된 공신은 원종공신으로 급이 크게 떨어지며 1등만 무려 79명이다. 정작 이보다 윗등급인 좌익공신에서도 성삼문, 이휘가 단종복위운동을 일으켰고 원종공신 중에도 단종복위운동으로 이름이 떨어진 사람이 많다. 원종공신까지 합하면 세조 때 공신이 된 인물은 2,000명. [61] 진주 대첩 때 조선군을 이끈 김시민의 사촌동생이다. '하담'은 김시양의 호. [62] 신익성은 조선 중기의 명문장가 신흠의 아들로 선조의 딸 정숙옹주와 혼인해 동양위라는 작호를 받고 부마가 됐다. 정숙옹주는 인빈 김씨의 딸로서 정원군의 동복여동생이므로 당대 임금 인조의 고모부가 된다. [63] 현재 남아있는 문종의 어진은 하나도 존재 하지 않으며 인물화 조차 현대 상상화이다. [64] 단순히 시간적으로는 단종에서 성종까지가 40여 년 정도이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65] 아무래도 중종 때 책에 문종 얘기가 있는건 신빙성도 적고 주장하다 보니 머리 속에서 자체 보정이 된 듯하다. 단 <용재총화> 자체는 중종 때 발행됐지만 저자 성현 세종 말기 때 태어나 세조 때부터 관직에 종사했다. 또한 지체높은 명문가라 부친과 형들이 먼저 조정에 나가 출사했기에 그들을 통해 젊었을 적 문종을 보았거나 그와 관련된 소문을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66] 1번째 휘빈 김씨는 세자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 주술을 쓰다 들켜서였고 2번째 순빈 봉씨 동성애 스캔들이라는 대형 사고를 쳐서였다. 다만 순빈 봉씨의 경우 <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그 외에도 성격적 결함이 많았다고 하며 문제의 동성애 스캔들도 그녀가 실제 레즈비언이었는지 위계로 아랫사람을 압박한 것인지는 의견이 좀 분분하다. [67] 사실 좀 그런게 상복을 입으면 담양군의 부인임을 의미하게 되는데, 그러면 평생 과부로 살게 된다. 약혼녀의 나이가 얼마인지는 몰라도 십대에 결혼도 한번 안하고 과부가 되는 것. 조선 시대에는 반역죄로 누가 걸렸을 때 그 일가 중 결혼한 사람은 피해를 입지만 약혼한 상태는 아무 관계도 아니라며 연좌하지 않고 약혼한 상태에서 상대가 죽어도 상복을 입지 않는다. [68] 예조에서는 상복입히라고 상소까지 올렸다. 당시 대신들마저도 '거 뭐 임금말씀이 옳지요' 하고는 별 말도 없어서 생짜 과부를 하나 만들 뻔 했다. 그런데 다들 '가합니다'라고 합창한 후였는데, 공자말씀 및 고사를 인용해 딴지를 거하게 건 사람은 정인지 하나였다. # 생각도 안해보고 남씨 여인 생과부 만들려던 조정 대신들이 아뜨거 하고 물러난 경우. 문종도 군말없이 없던 일로 했다. [69] 엄밀히 말하면 현덕왕후의 사망과 소헌왕후가 사망하기 이전 5년이라는 나름 긴 틈이 있었고 소헌왕후의 3년상 이후이자 세종 사망 전인 1449년 즈음도 잠깐의 틈이 있었다. 즉, 문종이 세자빈을 더 맞이할 생각이 없었던게 컸다. [70] 물론 30대에 할아버지가 되는 일이 부지기수인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꽤 늦게 본 아들이다. 오죽하면 3살 아래인 동생 수양대군이 3년이나 먼저 아들을 보았을 정도. 같은 나이에 첫 아들을 본 숙종은 돌도 안 지난 경종을 원자에 책봉하면서 "내가 너무 늦게 아버지가 되었어"라고 한 일이 있고 정조는 31세에 첫 아이 문효세자를 얻고 "비로소 아비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고 하였으며 3개월만에 원자, 만 22개월에 세자로 책봉하였다. [71] 현대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가회동 일대. 조선시대에 이 곳은 한성 제일의 부촌이었다. [72] 임영대군의 처남이다. [73] 계유정난과 등극 후까지 긴 시간을 다루기도 하고 대부분 작품의 주역이다 보니 세조 역은 젊은 배우를 쓰기 힘들다. [74] 1957년생으로, 드라마 방영 당시인 1994년 기준으로 만 37세. [75] 단, 아우들인 수양대군 역의 서인석이 1949년생(만 45세), 안평대군 역의 노영국이 1948년생(만 46세)이었다는 게 함정. 지금이야 세 분 다 60대 ~ 70대 초반이라 외모에서 오는 위화감이 그리 크지 않지만, 당시에는 아무리 봐도 형과 아우로 보기 힘들었다. 더구나 송승환은 하이틴 스타 출신에 그때까지도 자주 총각 역할로 나오곤 했으니... [76] 재미있게도 같은 작가가 집필한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아버지인 세종으로 출연했다. [77] 어머니 소헌왕후로 나온 이윤지보다 1살 위다. [78] 특히 측우기를 발명하는 순간 [79] 본인의 학구열로 빈궁이 애정결핍에 빠지는 것은 덤이다. [80] 이후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더욱 슬픔이 배가 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81] 빙의자가 하필 헬스 트레이너라서, 운동을 통해 문종뿐만 아니라 아버지 되는 세종까지 운동을 빡세게(...) 시켜 건강하게 만들어 놓았다. [82] 대리청정 기간에 대해 제대로 정보를 수집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