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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09:01:47

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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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론
少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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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인
숙종
(1674 ~ 1720)
윤증 박세당 남구만 박세채 류상운
나양좌 오도일 최석정 정제두 최규서
박태보 서문중
경종
(1720 ~ 1724)
급소 준소 완소
김일경 최석항 류봉휘 이광좌 조문명
목호룡 조태구 조태억 조현명
영조
(1724 ~ 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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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경 박필몽 오명항 이광좌 조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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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 순조
(1776 ~ 1834)
벽파 (청명당) 시파 ( 탕평당)
서명응 서명선 김상철 이병모 이시수
세도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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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론
少論
형성 전 서인
형성 1680년[1]
해체 1800년~ 1804년[2]
종주 우계 성혼[3]
명재 윤증
남계 박세채
수장 남구만[4]
최석정
소론 오대신
( 최석항[5], 류봉휘, 조태구, 이광좌, 조태억[6])
조문명
송인명
서명선
이시수
주요 인물 최규서
김일경[7]
오명항
박필몽
박문수
이종성
서명응
이병모
분당 준소(준론 소론)[8], 완소(완론 소론)
총 집권 기간 21년[9], 85년[10]

1. 개요2. 역사
2.1. 소론의 집권 기간2.2. 서인의 분열
2.2.1. 회니시비(懷尼是非)
2.3. 경종 시기2.4. 영조 ~ 정조 시기
3. 인물 일람
3.1. 역대 영수3.2. 초기 소론3.3. 준론3.4. 완론3.5. 후기 소론
4. 파벌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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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론()은 경신환국 이후 재집권한 서인 중에서 남인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반대한 온건파이다. 역설적으로 수장을 제외한 당파원들이 모두 나이 많은 대신들이다.

2. 역사

2.1. 소론의 집권 기간

2.2. 서인의 분열

숙종 시기에 있었던 잦은 환국으로 인해 서인 남인의 처지는 자주 바뀌었다. 일단 예송논쟁 때 숙종이 남인의 손을 들어주면서 서인들은 밀려났고, 숙종 초까지는 조선 시대에 단 한 번 있었던 남인천하였다. 그러나 1680년, 남인의 이환이 서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한성부에서 괘서 사건을 벌였다가 실패했고, 밀려난 후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서인에서 남인들을 몰아낼 기회를 포착한다.

바로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이자 당시 서인의 거두였던 김석주가 '남인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한 것. 남인 측에서는 북벌을 주장하는 이들( 윤휴, 허적 등등)의 힘이 강했고, 이들은 북벌을 명분으로 18,000명을 무과로 뽑아두고 군사 훈련을 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남인과 숙종이 물밑으로 북벌과 군사 부분에서 협력하는 관계였다면 오히려 서인들이 역풍을 맞고 박살날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이었으나, 남인들에 대해 현기증을 느끼고 있던 숙종에게도 절호의 기회였다.

이에 뒤이어 일어난 삼복의 변 등으로 인해 최초의 환국인 경신환국이 발생하며 남인 정권은 10년도 채우지 못하고 붕괴되고 다시 서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헌데 정권을 잡은 후 남인들의 처리 문제를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졌다. 강경파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고, 온건파는 윤증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남인들의 처리 문제뿐만 아니라 강경파는 민생과 명분을 중시하고, 온건파는 북방 개척과 실용을 중시하는 등 관심을 가진 분야도 달랐다.

2.2.1. 회니시비(懷尼是非)

이러한 분열 경향을 정치적 분야까지 확대시킨 게 회니시비 사건이었다. 윤증의 아버지는 병자호란 강화도 수비의 총책임자였던 윤선거였다. 그가 1669년에 사망하자 윤증은 스승인 송시열을 찾아가 아버지의 묘에 쓸 묘갈명을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윤증이 아버지가 남긴 편지들을 송시열에게 주면서 문제가 터졌다.

이때 짚고 넘어가야할 점이 원래 윤선거는 병자호란이 터졌을 당시에 강화도에 있었는데, 그의 친구 김익겸 등과 함께 강화도가 함락되면 장렬하게 자결하기로 약속했고 아내에게도 같은 약속을 했다. 강화도 함락이 초읽기에 들어가자 김상헌의 형인 김상용이 문루에서 화약 더미에 불을 붙여 자폭했고 김상용의 종과 손자, 윤선거의 친구들도 모두 불길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했으며 윤선거의 아내도 목을 매었다. 하지만 윤선거는 노부(老父)를 생각하여 목숨을 끊지 못했고 후에 스스로를 죄인이라 일컬으며 재가도 들지 않고 벼슬도 사양하면서 학문만을 닦다가 죽었다.

그런데 윤선거가 아직 생존 중이던 시절에 윤휴를 가지고 송시열과 논쟁을 벌이다가, 송시열이 격분하자 송시열의 친구인 송준길, 유계, 이유태 등도 모두 윤휴와 절교했고 윤선거도 송시열이 입장을 분명히 하라고 압박하는 통에 윤휴와 절교하여 일단락된 사건이 있었다. 그 이후로 송시열은 윤선거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정작 남긴 편지글을 보니 윤휴를 여전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묘갈명을 성의없이 써서 내줬다. 어떻게 써줬는가 하면 "박세채가 이미 잘 써줬던데 내가 또 써줄 거나 있는가? 그의 말을 인용할 뿐 딱히 더 쓰진 않노라." 즉 박세채의 글을 복붙하고 치웠다는 소리다.

윤증이 묘갈명을 받아보고는 '스승님이 무언가 잘못 알고 쓰신 것이다.'고 생각해 여러 차례 부탁했으나 송시열은 요지부동이었고 오히려 송시열의 측근들이 윤선거가 강화도에서 죽기로 해놓고 죽지 않은 비겁한 양반이라고 비난하는 소리가 터져나왔고 그걸 들은 윤증은 격분하여 송시열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후 1681년에 윤증은 신유의서(辛酉擬書)를 통해 '송시열은 주자를 높이 받들고 평생 따랐지만, 정작 자신의 행동은 주자를 따르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송시열의 학문을 통렬하게 까버리면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는 큰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15]

2.3. 경종 시기

이렇게 형성된 소론은 숙종 말기에 희빈 장씨의 아들이었던 경종의 계승을 지지하며, 연잉군을 지지했던 노론과 대립각을 세웠다. 한때는 소론이 숫적으로는 열세여도 정치적으로는 우세였으나 점차 노론이 정승, 판서를 차지하며 점차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더니 숙종의 병신 처분 이후에 죄다 갈려나가게 된다. 그 이후로 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를 비롯한 노론 4대신이 정국을 주도하게 됨에 따라 노론 천하가 열리게 되나 소론이 지지한 경종이 즉위함으로써 상황이 바뀐다.

노론은 경종을 길들이겠답시고 여러 차례에 모욕에 가까운 압박을 주었고 노론이 지지하는 대통을 만들기 위해 또 다시 왕을 압박하여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했다. 심지어 반역으로 간주될수 있는 대리청정까지 추진했다가 경종의 돌변으로 뒤통수를 제대로 처맞고 신축 환국으로 조정에서 죄다 쫓겨났고 이어 목호룡의 고변으로 삼수의 옥 사건이 밝혀짐에 따라 노론 수뇌부와 그 자제, 친지 수십 명이 처형당하는 초대형 사건이 터진다. 이때 수뇌부인 노론의 4대신들은 전부 사약 크리를 맞았다.

그리고 조태구, 류봉휘, 이광좌, 조태억 등을 필두로 하는 소론 완론이 들어서서 추진력에 제동이 걸렸고 경종이 승하하면서 영조가 즉위하고 노론이 득세한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완론정권이라 보기 어려운게 정미환국 이후 이광좌 등은 을사처분 때 민진원 등 노론이 노론사대신 신원한 것을 백지화하고 모두 역적으로 재규정했다. 보통 김일경을 위시한 급소와 조태구 이광좌를 위시한 준론, 그리고 경종 때 세제보호론을 강변한 조현명과 조문명 형제, 박문수, 송인명 등을 완론로 보고 이광좌 등 소론 주류는 준소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조는 탕평책을 펼치며 소론이라도 유화파였던 완론 소론은 중용하였고 오히려 완론 소론이 정권을 접는다. 그러나 완론과 친하지도 않았던 준론은 반란을 추진하니 이게 영조 4년에 일어났던 이인좌의 난이다. 영조의 정미환국이 참으로 절묘했다고 하는 말이 여기서 나오는데 만약 정미환국이 없었더라면 완론들도 준론과 합세했을 테니 반란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해졌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편, 김일경, 박필몽을 비롯한 소론 준론이 조정을 차지하는데 경종은 전투적인 급론에게 더 신뢰를 보였다고 한다.[16]

2.4. 영조 ~ 정조 시기

그러나 소론의 짧았던 집권 시기는 금방 끝났다.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죽고 영조가 즉위한 후 잠깐은 이광좌가 영의정, 류봉휘가 좌의정으로 임명되면서 소론 정권이 유지되었다. 하지만 소론이라는 당은 영조에 대척했던 당이었기 때문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고 정권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론을 완전히 박멸하고자 삼수의 옥을 확대할 것을 영조에게 청했다. 이에 영조는 경종의 지시를(김성 궁인이 너무 많아 찾을 수 없다) 인용하면서 이를 거부한다.

이때 노론계 유생 이의연이 노론 4대신이 모함당해 억울하게 죽었단 주장을 했고 분노한 완론 소론이 반박하며 강하게 벌줄 것을 청했지만 영조는 의견을 낸 것을 어찌 벌할 수 있냐고 거부한다. 보다 못한 이광좌 등의 완론 소론 대신들까지 청하고 나서야 겨우 절도 정배를 명했다. 이건 노론 편을 들겠다고 왕이 선포한 거나 다름없었다.

사학 유생 이봉명이 김일경이 역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벌줄 것을 청하자 영조는 이의연도 처벌했으니 얘도 처벌해야 겠네라며 일개 유생과 재상을 동급으로 취급하는 어마어마한 편파적인 태도를 보이며 즉각 받아들여 삭출함으로 본색을 드러냈다. 그리고 영상 이광좌가 이의연의 국문을 청하자 잘됐다면서 김일경도 국문할 것을 지시하며 사실상 삼수의 옥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를 명했다. 이는 당시의 고변자 목호룡이 끌려오면서 확실해졌다.

김일경과 목호룡 모두 자신의 무죄를 강변했고 김일경은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쳐들며 영조의 추궁에 조목조목 항의했으나 영조는 더 이상 말을 듣지 않고 고문을 더 가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목호룡은 맞아죽고 김일경은 저잣거리에서 참해졌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노론의 총공격이 시작되었고 영조는 다 끝난 걸 뭘 그래~라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완론 소론 대신들을 죄다 내쫓고 정호, 민진원, 홍치중, 김재로 등의 노론 대신들로 삼정승을 비롯하여 조정 수뇌부를 채워넣는다.[17]

4대신 이후 노론의 수장이 된 초강경파 민진원과 정호가 소론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고 영조는 즉각 호응하여 4대신을 신원하고 삼수의 옥 당시에 죽은 사람들을 모조리 신원하는 한편 당시 정권을 이끈 소론 대신들을 벌주었다. 완전히 신이 난 노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미 죽은 조태구, 류봉휘는 물론이고 살아있던 이광좌, 조태억, 최석항 등을 모두 죽일 것을 청한다. 하지만 영조는 거부했고 노론을 설득하여 더 이상의 보복을 막으려 했지만 노론은 막무가내였다. 탕평의 길을 걸을 계획이었던 영조는 결심을 굳혔고 노론 탕평파 홍치중을 제외한 101명의 노론 신하들을 내쫓고 62명의 소론 신하들을 불러들였으며 조태채를 제외한 4대신의 신원을 철회함으로 삼수의 옥 사건을 사실상 원위치 시켰고 다시 소론 정권을 내세웠다. 이것이 바로 정미환국이다.

한편 정권에서 밀려난 소론(주로 급소, 준소)들과 남인들은 경종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는 식으로 영조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경종 독살설까지 나오면서 그들은 난을 일으킬 준비에 착수했다. 이때 정미환국이 터지고 이광좌를 중심으로 한 소론 완론 정권이 세워졌음에도 같은 당파임에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도 않던 소론 준론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 반란은 삼남과 평안도, 서울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초대규모였으나 호응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서울과 평안도 지역 반란군은 봉기 전에 수뇌부가 체포됨으로 제압되었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방면의 반란군도 각개 격파당한다.

이 결과 소론 준론들은 박살이 나면서 세력이 크게 축소되었다. 잔당들이 계속해서 난을 일으키려 했다가 그때마다 족족 발각되면서 소론 준론들은 그야말로 씨가 말라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1755년 윤지의 나주 괘서 사건을 비롯해 심정연, 신치운, 류봉성 등의 역모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영조에 대해 적극적으로 도전한 것이 결정적이였다. 심정연은 영조가 친히 행차한 과거 시험장에서 윤지 등을 옹호하고 영조를 가멸차게 비난하는 글을 올리는 등 정면으로 영조를 들이받았고, 신치운은 심지어 국문장에서 영조의 역린인 게장까지 언급하며 경종 독살설로 물고 늘었어졌다. 이에 영조는 이성을 잃고 입에 거품을 물며 울기까지 했다.[18]

사건 직후 영조의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천의소감을 편찬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나마 온건파인 완론이 소수 남인과 함께 정계에 머물렀지만 노론의 세력이 훨씬 더 커서 힘을 쓰진 못했다. 사실 영조 재위 중반기까지는 소론의 영향력이 컸지만, 가면 갈수록 노론의 영향력만 강화가 되었고, 결국 영조 재위 후반기에는 사실상 노론이 장악하는 세상이 되었다.[19]

한편 정조가 즉위한 후에는 엄격하게 붕당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준론 탕평책[20]을 실시함으로서 노론과 소론 그리고 남인 계열이 함께 등용되면서 잠깐 빛을 보기도 했으나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고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붕당이 아예 소멸하게 된다.

3. 인물 일람

3.1. 역대 영수


위에도 서술했듯이 이시수, 이병모를 끝으로 '정치 세력' 소론은 끝이 난다. 소위 병신년의 의리라고 소론이 영조 시절의 역당으로 낙인 찍히면서 소론이 내세울 공통의 의리가 없어졌기 때문에 잔류한 소론 인사들도 정치 세력이 아닌 파편화된 개인으로 그쳤기 때문이다.

3.2. 초기 소론

3.3. 준론

3.4. 완론

3.5. 후기 소론


그외에도 한태동, 오도일, 이유원 등의 인물들이 있다.

4. 파벌

남구만, 윤증, 박세당 계열의 세 파벌이 있었다. 가장 큰 파벌은 수장인 남구만계. 남구만을 중심으로 윤지완, 윤지선 형제, 서문중, 서문유 형제, 류상운, 최석정, 최석항 형제, 신익상, 조태구, 류봉휘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그리고 윤지인, 박태상 등 소론의 중진들도 대부분 남구만 계열 인사였다. 한편 박세당 계열로는 우참찬 이덕수(李德壽), 함경감사 이탄(李坦), 소론 4대신 중 하나인 좌의정 조태억 등이 있다. 윤증 계열로는 나양좌, 박세채, 최규서 등을 들 수 있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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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화파)
흥선대원군 여흥 민씨
(+ 온건 개화파)
고종 순종
급진 개화파 여흥 민씨 김홍집
(+ 친일파, 친미파, 친러파)
근왕파 친일반민족행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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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사대신: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소론 오대신: 최석항, 류봉휘, 조태구, 이광좌, 조태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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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
西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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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림파 [[틀:훈구파|{{{#000,#ddd ▲ 훈구파}}}]]
선조
(1575 ~ 1608)
박순 윤두수 고경명 성혼 심의겸
이이 정철 황윤길 조헌 송상현
광해군 - 인조
(1608 ~ 1649)
오윤겸 신흠 심지원 이경석 정태화
청서 공서
노서 소서
김장생 김상헌 김류 신경진 이귀
김집 이식 김자점 이시백 최명길
효종 - 현종
(1649 ~ 1674)
청서 소서 노서
산당 한당 낙당 원당
송준길 송시열 김육 김자점 원두표
숙종
(1674 ~ 1720)
강경파 온건파
송시열 민유중 김수항 윤증 남구만
김만기 김석주 김만중 박세채 최석정
노론 소론
조선의 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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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신환국. [2] 벽파의 집권 기간으로, 벽파는 소론과 남인을 조정에서 쓸어버렸다. [3] 이이 성혼을 종주로 삼은 건 노소 둘 다였지만, 소론은 이이와 성혼간 학문적 견해 차이에서 성혼의 학문을 지지하며 소론의 시조로 모셨다. 윤증이 성혼의 외증손자인 것도 한몫했다. [4] 조정 영수. [5] 최석정의 동생 [6] 최석정의 제자 [7] 준소의 영수. [8] 원래는 완론이 온건, 준소가 중도, 급소(급론 소론)이 강경이였으나 김일경 등 급소가 완전히 사리지며 준소가 강경파 취급받았고, 둘을 동일시시키기도 한다. [9] 단독 집권 기간. [10] 탕평 및 공동 집권 기간 합산. [11] 남구만이 귀양을 떠나고 남구만과 친분이 깊은 류상운, 최석정도 귀양을 떠나면서 남구만을 중심으로 한 소론 내각은 몰락했다고 볼 수 있다. [12] 그래도 1710년 최석정이 영의정에서 물러나기 이전까지는 소론이 약간 정치적으로 우세했으나 1710년 최석정이 영의정에서 물러나고 노론의 이여가 새롭게 영의정이 되면서 노론이 점차 정치적으로 우세해지기 시작한다. [13] 혹은 이시수가 죽는 1821년? [14] 정조 사후에 벽파를 몰아내고 집권한 시파는 안동 김씨를 위시로 한 노론계 시파가 중심이 되었으므로 소론은 의미가 없다. [15] 이 편지는 박세채가 윤증을 말려서 송시열에게 부치진 않았으나, 송시열의 손자이자 박새체의 사위였던 송순석이 몰래 필사해서 송시열에게 전해지게 된다. [16] 전투적인 게 그 전투적인 게 아니긴 하다만... [17] 을사처분이라고도 한다. [18] 본래 영조가 자주 울긴 하지만, 영조는 정치적으로 매우 냉정한 사람이였다. 그래서 이런 류의 상소를 보거나 말을 들으면 사관들에게 쓰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이 건에 대해서는 이렇게 명령하지도 못했다. 정말 충격 받은 것. [19] 노론 7 : 소론 2 : 남인 1에서 노론 8 : 소론 1.5 : 남인 0.5 정도. [20] 영조 시대엔 완론 탕평으로, 각 당파에서 탕평에 찬성하는 인물들 위주로 등용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탕평당이란 이름이 생기고, 척신들이 판을 치자 정조는 각 당파의 의리를 중요시하며 그 의리를 정치에 보여주라는 준론 탕평을 실현했다. [21] 대응으로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의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이 있다. [22] 조태억까지 합쳐서 소론오대신(少論五大臣)이라 칭하기도 한다. [23]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성부원군 이항복의 현손으로 좌의정을 지냈다. 이광좌의 재종형이고, 영조 후반기 영의정을 지낸 이종성의 아버지이다. [24] 좌의정 이복원의 사촌. 이복원과 마찬가지로 좌의정을 지냈다. [25] 좌의정을 지냈으며 영의정 이시수의 아버지이다. [26] 그의 집에 텃밭을 만들어 놓고 직접 농사 일을 하자 그의 아들이 만류하며 하는 말에 답한 말 [27] 그런데 둘은 가족관계이기도 하다. [28] 사실 말이 운동이지 반란 모의질 한 거라 이게 맞다. 남구만 본인은 "왕후 복위는 전하가 결단한 거고 얘들은 (반란의) 실체가 있다"고 표현. [29] 이쪽도 한중혁의 모의를 포착하고 고발하다가 마음 바뀐 숙종한테 꼬투리 잡힌 거라(…) [30] 심지어는 신축년(1721년, 경종 1)과 임인년(1722년, 경종 2)의 삼흉(三兇)들은 선대왕에게 만세의 원수가 되는 자들인데, 속이는 말로 덮으며 주선하여 관작이 복구되게 하였다. # [31] 탁남 출신. [32] 생몰년: 1660년~1739년. [33] 이때 서로 당색이 달라 같은 방에서도 병풍을 사이에 치고 혼잣말하듯 대화를 했다고 하니 당쟁의 골이 굉장히 심하게 파인 것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시기의 인물 심노숭의 <자저실기>에도 민진원과 이광좌가 빈청에 동석할 때 사이에 병풍을 쳤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34] 나머지 셋은 홍국영(척신파), 김종수(벽파), 정민시(시파)다. [35] 대왕 대비가 하교한 날이 서명선이 상소를 올린 12월 3일이다. [36] 김종수 시파에 의해서 역적으로 찍히기도 했고 정민시 벽파에 의해 역적 찍히고 홍국영은 정조 4년에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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