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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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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환지
沈煥之
<nopad> 파일:Sim_Hwan-ji.jpg 심환지 초상, 대한민국 보물 제1480호
출생 1730년( 영조 6)
사망 1802년( 순조 2)
묘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유방동 808-2
재임기간 제214대 영의정
1800년 8월 23일 ~ 1802년 11월 13일
(음력 순조 즉위년 7월 4일 ~ 순조 2년 10월 18일)
시호 문충(文忠)
본관 청송 심씨
휘원(輝元)
만포(晩圃)
붕당 노론 (청명당, 벽파)
부모 부친 - 심진(沈鎭)
모친 - 거창 신씨 신무일(愼無逸)의 딸
부인 안동 김씨 김이복(金履福)의 딸
자녀 장녀 - 전주 이씨 이의헌의 처
차녀 - 청풍 김씨 김원선의 처
(양자) - 심능종(沈能種)[1]
파일:심환지(沈煥之).jpg
반신상 초상화(1793년)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조선 영조 정조 시대의 문신. 노론 벽파의 지도자로 도승지와 영의정 등을 지냈다. 심의겸의 형 심인겸의 8대손으로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심진(沈鎭)의 아들, 교리를 지낸 심태현(沈泰賢)의 손자이다. 청송 심씨 안효공파(安孝公派)로 잘 알려져 있다.[2]

2. 생애

의외로 벼슬길이 매우 늦었다. 1762년(영조 38) 식년시 소과 진사시에 3등 60위로 입격하고 # 정7품 세자익위사 부수(世子翊衛司副率)를 지냈다가[3] 1771년(영조 47)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丙科) 4위로 급제하였는데 # 이때 나이가 42세. 항상 노신으로 등장하는 심환지는 "청년 관료" 시절이 없었다.[4] 하지만 이후로 빠르게 승진하기 시작한다. 당시 노론 벽파의 수장은 김종수였는데 심환지는 50대에 이르러서야 정치적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5]

이후 정언, 교리, 대사성 등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언관직을 맡았으며 의리와 공의를 강조하는 격렬한 언론을 펼쳤다. 1779년 부수찬, 부교리를 거쳤고 1784년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이후 사간원대사간,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이조참의를 거쳐 형조참판으로 승진하였으나 평택안핵어사(平澤按覈御史)로 있던 김희채(金熙采)의 탄핵으로 금갑도(金甲島)에 위리안치되었다. 1793년 풀려나 복직되었고 이조참판, 도승지, 규장각제학, 비변사제조를 역임했다. 1795년 병조판서로 승진되었으며 대사헌, 예조판서, 형조판서,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지내고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남인의 영수 채제공, 이가환(李家煥), 소론 서명선 등을 탄핵했다. 1795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1799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경모궁도제조(景慕宮都提調)를 겸하였고 곧이어 좌의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순조 즉위년 정순왕후 김씨 수렴청정으로 인해서 벽파가 집권하게 되자 영의정이 되었다.

순조 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를 주관하기도 했는데 시파와 남인들의 숙청으로 이어졌으며 장용영 또한 혁파하였다. 김관주(金觀柱), 정일환(鄭日煥) 등 노론 강경파를 등용하여 반대파를 공격하게 했으며 권유(權裕)를 대사헌에 임명하면서 김조순[6]을 공격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나 정순왕후 김씨 사후 김조순이 집권하면서 관직을 추탈당하였다. 이후 고종 1년(1864년)에 관직이 복구되었다.

3. 기타

4. 대중매체


[1] 동생 심찬지(沈燦之)의 아들 [2] 안효공파는 정치적으로 서인 노론에 속했다. 한때 서인의 거두였던 심의겸, 김효원의 반대로 이조정랑에 등용되지 못한 심충겸, 노론 벽파의 영수였던 심환지 등이 안효공파 벌족이었다. [3] 그런데 막상 그 자리에 오르고 보니 임오화변이 터졌다. [4] 물론 조선시대에는 관료가 되는 것이 반드시 과거 급제만 있는 것은 아니였다. 대체로 고려시대에 비하여서 음서의 영향이 약해졌지만 하급 관리로 먼저 시작하고 이후에 과거 급제하여 청요직을 비롯한 중요 직책으로 나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조선의 관리 생활이였다. 하지만 세도정치기 안동김씨들조차 임금의 특은을 통해 관직에 나아가고, 과거 합격 후에야 초고속 승진이 가능했다는 것은 이전에 비하면 음서의 영향력이 매우 낮았다는 증거다. 심환지는 심지어 급제를 기다리며 하급직에서 소일하는 케이스도 아니었다. [5] 흥미로운 것이 사실 김종수도 과거 급제는 40세인 1768년에야 했다. 청명당의 주력은 이러한 경력급 신인들이었던 셈. [6] 김조순의 장인이 되는 심건지는 심환지의 재종형이다. 그리고 그 심건지의 직계 6대손이 배우 심영이다. [7] 정조는 심환지뿐만 아니라 남인의 영수 채제공에게도 어찰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8]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에서 정조 어찰첩이라는 이름으로 탈초해 번역하여 출판되었다. 1796년 8월 20일부터 1800년 6월 15일까지 보낸 어찰로서 총 6첩 297건에 달하는 분량이다. 심지어 이마저도 나머지 흩어져 있는 첩들의 합으로 따졌을 때 약 350첩이 넘는 양으로 추정된다. [9] 신유박해 때의 일인데 이여절의 사례로 수령들이 천주교 박해에 소홀해진다면(!) 조정의 입장이 곤란하다라는 정무적 판단이 개입된 것이다. [10] 최종원이 심환지 초상과 닮은 곳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