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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8:23:59

영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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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자(목조 ~ 연산군) / (중종 ~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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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왕공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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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이왕 척(순종) 창덕궁 이왕 은(의민황태자 영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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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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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b22222> 제4대 제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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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순종조 황태자
의민황태자 | 懿愍皇太子
제2대 창덕궁 이왕
파일:영친왕.png
예복을 착용한 영친왕의 모습 (1920년대)
출생 1897년 10월 20일
한성부 경운궁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책봉 1907년 8월 7일
한성부 덕수궁 중명전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사망 1970년 5월 1일 (향년 72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낙선재
능묘 영원(英園)
재위기간 대한제국 황태자
1907년 8월 7일 ~ 1910년 8월 29일
이왕세자
1910년 8월 29일 ~ 1926년 4월 25일
창덕궁 이왕
1926년 4월 27일 ~ 1947년 5월 3일
재임기간 대한제국 황실 수장 (명목상)
1926년 4월 27일 ~ 1970년 5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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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은(垠)[1]
부모 부황 고종 태황제
모친 순헌황귀비
형제자매 4남[2] 1녀 중 4남
배우자 이방자
자녀
슬하 2남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이진 (李晋, 1921 ~ 1922)
차남 - 이구 (李玖, 1931 ~ 2005)
종교 유교 ( 성리학) 가톨릭 ( 세례명: 요셉, Joseph)
신장 158cm
작호 영친왕(英親王)
사시 문인무장지효명휘의민황태자
(文仁武莊至孝明暉懿愍皇太子)[3]
절일 천추경절(千秋慶節)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복무 일본 제국 육군
1913년 ~ 1945년
최종 계급 중장 }}}}}}}}}
1. 개요2. 호칭 관련3. 생애
3.1. 황태자 책봉과 결혼3.2. 고통 어린 망국의 황태자3.3. 조선 이왕(李王)직 승계와 일제시대의 행적3.4. 광복 이후
3.4.1. 제정복고 시도 연루3.4.2. 환국과 사망3.4.3. 사후
4. 가족5. 여담6. 대중매체에서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colbgcolor=#bf1400> 시대의 경계인,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KBS 〈역사스페셜〉, 2011. 5. 12.)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최후의 황태자이며 식민지 조선의 마지막 이왕(李王)이며 또한 일본 제국의 마지막 비주권군주다.[4] 종묘에 배향된 마지막 조선-대한제국의 황족이다. 종묘 영녕전에는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이란 명칭으로 위패를 봉안하였다.

고종황제의 7남으로 순종황제 의친왕의 이복동생, 덕혜옹주의 이복오빠이다.[5]

2. 호칭 관련

대한민국에서 그의 통칭은 고종 황제가 된 후에 내린 친왕 號(친왕 작호)인 '영친왕(英親王)'이다.

간혹 ' 친왕(親王)'이 일본식 칭호이기 때문에 '친왕'에서 '친'을 뺀 '영왕'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 부인인 이방자 여사도 생전에 '영친왕'은 잘못된 호칭이니 '영왕'으로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6]

하지만 사실 친왕 제도는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제도이고, 대한제국도 이에 준하여 제도를 정했기 때문에, '~친왕'을 가리켜 틀린 호칭이라고 하는 주장이 도리어 잘못이다. 고종실록》 등에 '영왕'으로 적힌 예가 있긴 하나[7] '영친왕' 칭호가 틀려서가 아니라 단순히 '영친왕'을 줄여 썼을 뿐이다. 중국의 예를 들면, 청태조 누르하치의 아들인 예친왕(睿親王) 도르곤을 줄여서 예왕(睿王)이라고 부르곤 한다. 대한제국 시절 왕부에서 사용하던 도장에서도 '영친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파일:external/www.dapsa.kr/2014_05_01-P5019598.jpg
파일:attachment/영친왕/영친왕필적.jpg
<colbgcolor=#bf1400> 가운데 인장은 예서체로 '영친왕부', 오른쪽 인장은 전서체로
'영친왕부지인'(英親王府之印)이라고 새겼다. 왼쪽은 의친왕부의 인장.
<colbgcolor=#bf1400> 영친왕이 9세 때 쓴 글.
왼쪽에 '英親王 九歲 作(영친왕 9세 작)이란 글씨가 보인다.
또한 영친왕도 스스로 '영친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9살 때(1905년) 쓴 글에도 스스로 '영친왕'이라고 서명했을 뿐만 아니라 영친왕인(英親王印)이라고 새긴 도장을 찍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 근본적인 이유는 수백년 넘게 정식 황제국 체제를 경험하지 못한 한국에서 '친왕'이라는 호칭 자체가 낯선 데다가[8], 중국이나 한국과 달리 황태자도 친왕으로 부르는 일본의 풍습, 그리고 '황태자 영친왕'이라 부르는 관습이 맞물려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영친왕' 호칭은 다른 이유로 문제가 된다. 이 칭호는 황태자가 되기 전에 쓴 것이기 때문이다.

친왕은 일반 황자에게 수여되는 작위일 뿐이고, 황태자는 '친왕'보다 격이 훨씬 더 높은 황제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황태자 작위와 친왕 작위를 동시에 가지는 것은 중국과 조선(대한제국)의 예법에서는 있을 수 없다. 황태자 작위와 친왕 작위를 동시에 가지며 '황태자 ~친왕'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은 일본 황실의 예법이다. 그래서 영친왕이 황태자가 되자 영친왕 작호는 폐기되었고 이후에는 쓰이지 않았다. 그가 살면서 지녔던 작위는 '영친왕(英親王)', '황태자(皇太子)', '이왕세자(李王世子)', '이왕(李王)'이다.

해당 지위에 있을 때는 그에 맞게 불렀지만, 문제는 광복 이후였다. '이왕세자', '이왕'은 일제강점기 이왕가의 잔재라서 더 이상 공식적으로 쓸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황태자라고 하기도 그랬다. 민주공화국 시기에 대놓고 황태자라고 하기엔 묘한 감도 있었으며 대한제국 황태자였던 시기도 몇 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가장 무난한 호칭은 몇십 년 전에 폐기했던 '영친왕'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지녔던 지위인 '황태자'와 '이왕세자', '이왕'은 보통명사이지 어떤 한 개인을 콕 찝어서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동시대에 그 지위에 있는 사람이 한 명일 뿐, 시대에 따라서 지위를 가진 사람이 답습(세습)하면서 계속 변한다. 그런데 '영친왕'은 1인 고유명사로 그만을 따로 지칭해 부를 수 있다.

따라서 광복 이후 사람들은 그를 영친왕으로 불렀고, 그의 생전 당시 《 대한뉴스》에서도 '영친왕' 호칭을 사용했다. 제370호 - 〈영친왕비 입국〉, 제445호 - 〈영친왕 환국〉, 제776호 - 〈영친왕 서거〉
사실, 일제강점기에도 비공식적으로 그를 '이왕', '이왕세자'보다는 '영친왕'으로 부른 경우가 꽤 있었다. 그런데 그건 일제의 호칭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태자'라고 부를 수도 있었겠으나 이미 나라는 망했기에 그러기에는 위에 언급한 것처럼 애매했을 것이다.

그래서 원칙대로라면 시호인 '의민'을 붙인 '의민황태자', '의민태자'로 부르는 것이 맞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이 올린 사시(私諡, 사적인 시호)이기 때문에 또다른 논란이 된다. 원래 시호는 임금이 내리는 것이다. 사시(私諡)란 임금이 아닌, 어떤 사적인 개인이나 단체가 자신들끼리 정하여 올린 시호를 가리키므로 공적인 권위가 없다. 만약 대한민국이 정부 수립 이후 시호 제도를 부활시켰다면, 임금 대신 정부나 대통령의 명의로 시호를 정하여 '공적인 권위'를 부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시호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순종과 영친왕이 죽은 이후로 더 이상 '공적인 시호'가 나올 수 없다. 전주 이씨 집안 모임인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이 정한 사적인 시호를 과연 공적인 것으로 인정해야 할까? 즉, 정리하자면 '영친왕'은 왕조가 있던 시절에 정식으로 받은 고유 호칭이나, 황태자로 승작됨과 동시에 무효화되었다는 문제가 있고, '의민황태자'의 경우, '황태자' 작위는 공식적으로 받은 것이 맞지만 시호 '의민'이 사시라는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종묘 영녕전에 '의민황태자 영왕'으로 올라가 있고 아들인 이구의 영결식에서 대한민국 정부 측 인사인 국무총리도 해당 호칭으로 '의민황태자'와 '영친왕'을 섞어서 언급한 사례가 있다.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영왕 전하'로, 이해찬 국무총리는 '의민황태자 영왕 전하'로 호칭했다. 해당 영결식에서는 전례에 맞추어 의민황태자는 '전하'로 이구는 '황세손 저하', 이구의 죽음을 '훙서'로 표현했다.[9] 〈이구 영결식〉 〈대한제국 황세손 영결식 조사〉(국무총리) 〈故 황세손 이구 영결식 식사〉(문화재청장)[10] 물론 그렇다고 학계에서 사적인 시호를 공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아니다.[11]
위키백과는 이 점을 신경썼는지 표제어를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의 사시인 '의민황태자'로 등재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영친왕' 호칭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백과사전과 학계 등에선 일반적으로 '영친왕'으로 등재하고 부르며 이 문서에서도 통칭인 '영친왕'으로 표기하도록 한다.

3. 생애

3.1. 황태자 책봉과 결혼

늦둥이인 점도 있지만, 당시 친모 순헌황귀비가 궁궐에서의 영향력이 컸던 탓인지 태어나자마자 귀하게 자랐다고 한다. 이 덕분인지 1907년( 융희 원년) 순종 즉위 후 다음 제위 계승 1순위였던 이복형 의친왕을 제치고 대한제국 황태자로 봉해졌다.[12]

사실 연령으로 보면 엄밀히 말해 영친왕보다 20년 연상인 의친왕이 다음으로 황태자가 될 수도 있었으나 당시 여러 가지 환경이 의친왕보다 영친왕에게 유리했다. 의친왕이 문제가 많아서 황태자로 책봉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엄귀비가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하기 위해 막후에서 힘을 써서 황태자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엄귀비는 당시 내명부에서 가장 직책이 높았지만, 의친왕의 생모인 후궁 귀인 장씨는 직첩도 보잘 것 없었는데다 오래 전에 별세한 상태였다.[13] 게다가 엄귀비는 고종이 사선을 넘나든 아관파천 당시 가까이서 고종을 보필한 공이 있는만큼 다른 후궁들보다 총애를 남다르게 받았고, 후궁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정1품 황귀비(皇貴妃)의 직책을 받아 영친왕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었다.

연구자들은 1902년( 광무 6년)에 있었던 '일심회 사건( 一心會)' 또한 황태자 책봉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이 사건은 일본에 국비로 유학한 재일 유학생 일부가 고종을 양위시키고 의친왕을 추대하려는 정변을 획책한 사건으로 이 당시 의친왕은 한창 미국 로어노크 대학교에 유학중이었기 때문에 의친왕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진행된 일이었다. 이후 사건이 밝혀져서 가담자들 일부는 일본으로 다시 망명하고[14] 주동자 3인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고종은 의친왕을 경계하기 시작했으며, 5년 이후에 황태자를 책봉할 때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준 듯 하다.

순종황제의 동생이었으니 황태자(皇太子)가 아니라 황태제(皇太弟)가 되어야 더 정확했지만, 굳이 황태자(皇太子)로 책봉된 것은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황제의 의지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15] 또한 제위에선 물러났어도 사실상의 황제는 고종 자신이라는 의지의 표시이기도 했다.[16]

사실 이 황태자 책봉은 고종 황제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1907년 일본군의 협박으로 강제로 퇴위당하고 함녕전으로 물러나면서 일본 뜻대로만은 되지 않겠다고 세운 수였다. 하지만 국력이 이미 기울대로 기울었으니 무위에 그쳤다. 그 해 일본인들(대표적으로 이토 히로부미)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식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고[17] 일본 방계 황족 가문의 딸인 마사코 여왕과 강제로 정략결혼했다.[18] 영친왕에겐 민갑완(閔甲完)이라는 약혼녀가 이미 있었지만 강제로 파혼당하고 이 정략결혼을 했다. 정략결혼임에도 이방자 여사와 영친왕의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19]

일본에 인질로 붙들려 있었을 때, 의외로 메이지 덴노와는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아들(미래의 다이쇼)이 여러 가지로 모자란 면이 많은 데 반해 꽤 총명한 아이였던 영친왕을 자기 친아들처럼 여기고 잘 대했다는 주장이 역사가들 사이에서 종종 나올 정도.[20] 일단 왕공족, 그것도 조선 이왕가의 수장으로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기에 생활 자체는 유복했다고 한다. 다른 일본 황족들은 매월 궁내성에서 주는 일정한 생활비 외에는 돈줄이 없었지만 영친왕은 일제강점기에 조선 왕족들의 관리 기관이던 이왕직(李王職)에서 돈을 원하는 만큼 가져갈 수 있었다. 이 덕분에 영친왕을 부러워하는 일본 황족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5년 광복 이후엔 신적강하로 이왕가든 다른 일본 황족이든 더 이상 아무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3.2. 고통 어린 망국의 황태자

파일:external/pds.exblog.jp/e0171614_1111167.jpg
<colbgcolor=#bf1400> [[이토 히로부미|{{{#gold 이토 히로부미}}}]]와 영친왕[21]

그가 황태자로 책봉된 건 전혀 행운이 아니었다. 그저 이름(허울)뿐인 황태자이고 어린 나이에 일본에 인질격으로 끌려가 몸이 만신창이가 된 뒤에야 겨우 고국에 돌아오는 고통뿐인 인생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영친왕의 일본 생활은 앞서 말했듯이 경제적으로 문제는 없었다. 이왕직을 승계한데다[22], 현역 일본제국 육군 중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어쨌거나 이용가치가 있었고, 공식적인 특권 계층인 왕공족이었기 때문에 전시에도 안전한 후방 보직에 있었다. 그가 실제로 가장 고통스러워한 것은 육체적 고통이 아닌 고향에 대한 동경, 그리고 향수와 지독한 고독이었다고 한다.

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 날 이방자 여사가 공기에나 쓸 새하얀 조약돌을 발견했다고 한다. 다 큰 어른 방에 있을 듯한 물건이 아니라서 물어보니 그가 머뭇거리다 답하길 "어릴 적 고향이 너무 그리워 한국으로 창덕궁 낙선재에 있는 조약돌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보냈고, 마침 황실에서 일본으로 가는 사람이 있어 조약돌을 전해줬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조약돌을 계속 바라보고 만졌다고 했다고 한다.

자신의 아버지 고종은 물론 어머니 순헌황귀비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으며[23] 그나마 순종 사후에 이왕직을 승계하고 나서야 종묘에 들르는 것이 가능했다. 그나마도 짧은 기간 내에 다시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제사는 지낼 수가 없었고 그는 그 때문에 자신의 집에 위패를 세워 간이 종묘(개인 사당)를 만들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제약이 심한 생활 속에서 몇십 년을 일본에서 살았으나 고국으로 돌아가겠단 희망과 의지는 놓지 않았는지 유창하게 한국어를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억양, 문법 모두 틀리지 않고 말이다. 1950년에는 "A First Book of Korean"이라는 제목의 한국어 교본을 레지널드 호러스 블라이스(Reginald Horace Blyth)와 함께 영어로 직접 집필하기도 했다.[24]

이형근 장군의 회고에 의하면, 일본육군사관학교 재학 시절 조선인 동기생 생도들과 함께 영친왕을 찾아갔다고 한다. 앞선 주석에서 설명했듯 영친왕은 허울 뿐이긴 하지만 명목상으론 조선 총독보다 높은, 조선의 대표자격인 상징 그 자체였다. 식민지 출신으로서 심정적으로 기댈 만한 어르신(당시, 고종과 순종은 세상을 뜨고 없었기에 실질적으로나 명목상으로 '조선' 자체의 상징)이었던 셈. 영친왕은 조선인 생도들을 반갑게 맞아주었으나, 실내에 조선인밖에 없는데도 일본어로 격려를 해주어 조금은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천황의 항복 선언 다음 날, 다시금 영친왕을 찾아갔을 때 굉장히 유창한 한국어를 쓰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고 한다. 주변에 한국어를 유창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화자가 없었단 걸 생각하면, 한국어를 전혀 잊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일본에서 살았던 시간이 더 길었기 때문인지, 조선인이라기보다는 일본인에 더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는 일부 평도 있다. 물론 워낙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에서 성장한 탓에 아무리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손 치더라도 그 한계가 뚜렷했기 때문일 것이다.

3.3. 조선 이왕(李王)직 승계와 일제시대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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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영친왕에게 경례하는 2대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gold 하세가와 요시미치}}}]] <colbgcolor=#bf1400> [[1928년|{{{#gold 1928년}}}]] [[프랑스|{{{#gold 프랑스}}}]] 여행[25]에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1926년 4월 26일 순종황제 붕어(崩御) 후 하루 뒤, 순종이 일제강점기 때 가졌던 '창덕궁 이왕(昌德宮 李王)' 지위를 계승한다. 이왕직 내부에서는 '사왕 전하(嗣王殿下/しおうでんか)'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가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것은 1년 중에 종묘의 제사가 있던 며칠 간 뿐이었고 거의 대부분을 도쿄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 동경(東京) 이왕'으로 부르기도 했다.

다이쇼 덴노와는 어린 시절에 만난 이후부터[26] 나름의 친분이 있었는지 그가 지방에서 요양하다 죽기 직전에 그를 찾아와서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요시히토는 영친왕과 한국어로 대화하고 싶어서 황태자 시절부터 꾸준히 한국어를 배웠지만 당시 그는 뇌일혈로 말이 어눌해서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마사코(方子)와 혼인시킬 당시 요시히토도 마사코 여왕의 아버지인 나시모토노미야 노리마사 왕을 불러서 명령하는 등 관여한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일본에서 지내던 이복 여동생인 덕혜옹주 조현병으로 의사표현을 못하자 이복오빠로서 후견인이 되어 소 다케유키와의 이혼을 허락했지만 자신의 생계가 어렵던 시절에도 정신병원에 돈을 대주는 등 그래도 오빠로서 나름대로 동생을 열심히 보살폈다고 한다.

그는 일제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두루 친분을 맺었다. 관동 대학살 당시 영친왕도 조선인이기 때문에 혹시 모를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집을 버리고 궁내성 제 2대기실 앞에 쳐진 텐트 속에서 1주일 동안 피신해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방자 여사의 말에 의하면 조선인 학살 소식을 들은 영친왕은 슬픔과 분노로 목소리를 떨고 있었으며 1주일 내내 눈물을 글썽이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이왕가의 대표적 인물로서 일본 육군의 엘리트 코스를 제대로 밟은 사람이기도 하다. 1917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29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군생활을 시작, 1923년엔 일본 육군대학을 35기로 졸업하고[27] 일본군의 육군참모본부에 배속된다. 1935년에는 대좌로 무난히 진급했으며, 이후 1938년 육군 소장, 1940년에는 육군 중장에까지 올랐다.

1928년 근위보병 제2연대 휘하의 대대장, 1935년 우쓰노미야 보병 제59연대 연대장[28] 1941년 제 51사단 사단장을 역임한 뒤[29],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육군 중장으로서 육군 제1항공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일본 육군 제1항공군은 1942년 4월 13일 창설된 부대로서 주로 본토방공(미국의 일본 본토 폭격에 대응하기 위한 임무)을 책임지는 아주 중요한 부대였다. 사령관은 일본육군 중장, 사령관을 보좌하는 참모장은 일본육군 소장이 보임되었다. 부대 창설 이후 1945년 종전시까지 총 4명의 사령관이 있었는데, 다른 3명은 재임 기간이 길어봤자 1년도 안될 정도로 짧았지만 제3대 사령관인 영친왕은 거의 2년 가까이 사령관 자리에 있으면서 재임기간이 가장 길었다.

일각에서는 영친왕은 제1항공군에서의 실권이 없었고 내선일체의 상징 정도의 역할에 머물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영친왕이 제1항공군 사령관으로 재임했던 시기는 B-29를 앞세운 미국의 일본 본토폭격이 본격화되는 시기였으며, 이 중차대한 시기에 일본 본토방공의 최일선을 담당하는 핵심 부대의 사령관이 허수아비에 그쳤다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무리이다. 그보다는 대전 중후반기 일본의 전쟁 수행에 중차대한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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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일본군 예복을 입은 영친왕

3.4. 광복 이후

1945년에 일본이 무조건적인 항복을 하자 일본에서 살던 조선인은 공식적으로 국적이 없는 무국적의 재일 한국인이 되었다. 이후 1947년 GHQ(연합군사령부)의 조치로 이왕직이 사라지고 무일푼 평민으로 강제 격하당했다.

《한성일보》[30] - 1946년 8월 6일 자에 따르면, 그 무렵 영친왕은 《UP통신》 기자에게 당시 조선의 정세 및 장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꽤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조선의 외교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조선은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무력에 의한 독립 존속은 매우 어려우며, 아시아 대륙과 붙어있어 일본보다도 공산주의가 침투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공산당을 용납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또한 " 삼팔선은 독립에 장애가 되므로 빨리 제거해야 한다." 면서, 과도기에 대해서는 "일종의 국제관리기관을 설치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밖에도 "조선의 민주화를 위한 기본 조건은 학교에서 조선어를 쓰는 것이나 일본어, 영어, 중국어 교육도 인정해야 한다.", "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되 유교 국교로 존치시켜야 한다." 등 앞으로 들어설 국가의 비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의견을 밝혔다.

또한 미군에게 배포된 한국에 대한 정보를 담은 팜플렛에 영어로 번역된 〈 아리랑(Arirang)〉이 수록되었는데 추적 결과 이 〈아리랑〉 영어 번역자가 바로 영친왕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고국을 계속 그리워했던 영친왕이었지만, 그 고국은 그를 철저히 냉대했다. 한국에서는 친일 황족이라며 증오하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그 중에서 의열단 출신으로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을 역임한 박건웅은 " 동경의 이왕은 민족 반역자인데 왜 광복 후 자살하지 않았느냐."는 발언을 하기까지 했다. 이방자의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 따르면, 영친왕도 이 발언을 들었으며 직후 큰 충격을 받고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끝내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

영친왕은 1945년 광복 직후와 1948년에 두 차례나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요청을 했다. 하지만 전자 땐 미군정이, 후자 땐 이승만이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이승만 정부는 영친왕이나 순정효황후 윤씨에 대해선 부정적으로, 이우에 대해 조금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이승만은 강경한 공화주의자로서 기본적으로 이미 망한 왕조의 부활의 가능성을 차단할 의도가 있었고, 대한제국 고종이 전제왕정을 선포해 황제 독재를 지향하기도 한만큼 대한제국의 복귀는 민주공화정을 위협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되었으므로 모든 공화주의자들이 영친왕의 복귀를 경계했다. 또 이승만 자신이 철저한 독립운동가였으니 독립을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고 1947년까지 일본의 최고위 왕족으로서 풍족히 살던 직계 황족들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런 거라는 의견이 있다. 거기다 이승만은 1899년 고종의 퇴위를 꾀하고 공화정을 세우려고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고 심한 고문을 받은 바 있어 구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 후 한일 양국에 미군정이 들어서고 이승만이 재일 미군정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했다가 영친왕을 우연히 만났는데 영친왕이 넌지시 자신의 영구 귀국을 논의해보려 했으나, 이승만은 영친왕을 외면하며 "오든 가든 마음대로 하시구려."라며 약간 무시하는 것처럼 홀대했다고 한다. 영친왕은 나중에 이 일화를 기록하며, "대단히 실망스러운 날이었다"고 표현했다.

이승만 정부에서 귀국을 거부한 표면적인 이유는, 영친왕이 일본 황족으로 살아간 것이 일본 국적을 취득한 것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즉, '영친왕은 일본인이 되었다'고 법률을 해석하여 그의 귀국을 거부한 것. 물론 일본 정부에서는 호적을 기준으로 영친왕 부부를 재일 한국인으로 보았으므로 부부가 모두 무국적 신분이 되었다.

이 조치가 재밌는 것이, 1948년 5월 11일 제정된 남조선과도정부 법률 제11호 '국적에 관한 임시조례'에서 조선인을 부친으로 둔 사람에게 조선 국적을 부여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조선 국적이 대한민국 국적으로 일괄 변경되었다. 이 법에 의해 영친왕 또한 대한민국 국적을 얻을 수 있으나 이승만은 영친왕이 조선인의 호적인 조선적을 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31] 영친왕의 대한민국 국민 자격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 정부 입장에서는 '외국인'인 영친왕을 쫓아낸 격이지만 실제로는 영구적인 국적 박탈이었다.

그리고 이승만 정부는 구 대한제국 황실(이왕가)의 재산 상당부분을 국고로 귀속시켰다. 그래서 6.25 전쟁 이후 구 황실의 사유 재산이라곤 사동궁, 창덕궁 낙선재 등이 전부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친왕은 "나는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니다"라며 아내 이방자에게 고통을 계속 호소했다고 한다.

또한 신적강하 이후 귀국도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지면서 점점 고독해졌는데, 일제 때 사귄 이들도 진심으로 사귄 자들은 없었는지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그나마 오는 사람들도 어떻게든 그를 사기쳐서 뜯어먹으려던 목적을 가진 이들이었다. 결국 큰 사기를 당해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재산도 잃고 물질적으로 궁핍해졌다.[32]

이 때 한 기록을 보면, 이방자 여사를 만나러 온 한 여인이 집에서 누군가가 뒤돌아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가 영친왕이라는 걸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영친왕은 누가 왔는지 뒤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앉아 있었으며 그녀가 나갈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영친왕에게서 지독한 쓸쓸함을 느꼈다고 한다.

6.25 전쟁 시기에 노획한 조선인민군 문서를 바탕으로 한 정병준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북에서는 일본 육군대학 출신의 영친왕이 남한으로 귀국하여 육군참모총장으로서 직접 대한민국 국군을 지휘할 가능성에 대해 심각한 고려를 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대통령 이승만이 그를 적대했기 때문에 복귀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일본군에서는 대개 어지간한 황족이면 모두 장성 계급에 있었으며, 이것은 실제 야전군 사령관이 된 두어 명을 제외하면 실제 지휘 능력과는 큰 관련이 없었다. 당시 '왕'이나 '공'이란 칭호를 받은 구 대한제국 황족들은 일본의 황족과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그가 만주군이건 일본군이건 실전 경험이 있는 다수의 한국군 장교들보다 나았을 거라는 근거는 전혀 없다.

3.4.1. 제정복고 시도 연루

파일:1952.07.16 왕정복고당 검거.jpg
<colbgcolor=#bf1400> 1952년 7월 16일 자 《경향신문》 기사.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2071600329202002&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52-07-16&officeId=00032&pageNo=2&printNo=1851&publishType=00020|{{{#gold 왕정복구를 몽상, 일당 8명을 검거 문초 중.}}}]]
그런데 6.25 전쟁실제로 제정복고를 꿈꾸며 그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주동자는 이유립. 《 환단고기》의 그 사람 맞다.(...) 1952년 7월 12일 자 《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유립은 청주대학 상과 대학 학생 이용하와 함께 1951년 8월 경 조총련의 전신인 '재일조련선전부(在日朝聯宣傳部)'의 지령을 받아 이승만 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음모를 꾸몄다. 그래서 같은 해 9월 초에 '정치혁명민족협의회(政治革命民族協議會)'라는 비밀 결사조직을 만들어 은밀하게 회원들을 모집했고, '불구레문화사'란 간판을 내걸어 위장한 다음, 일본에 있던 영친왕을 국가 수령(원수)으로 모시기로 했다.

국명은 대달(大達), 국가는 신가(神歌), 연호는 개벽(開闢), 국화(國花)는 진달래로 정했다. 그리고 국기 태극기에서 사괘를 뺀 뒤 중앙에 연한 검은색 원을 둔 황색 바탕의 디자인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 다음에 영친왕에게 보낼 문서를 이용하를 시켜 당시 경상남도 부산시 구포(龜浦)에 피난와있던 순정효황후에게 전달하는 등의 행동을 했다.

그러다 부산중부경찰서 사찰계원(정보팀 형사)이 이를 적발하여 주모자들을 체포했다. 이유립, 이용하를 포함하여 노동당원 노봉우, 통관업자 홍성도, 사주업자인 이석영, 한국독립당 대전시책인 박헌철 등 일당 8명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서울지방검찰청으로 넘겨져 수사를 받았다. 이 사건은 5년 뒤 무혐의로 결론이 났다. 비록 영친왕이 직접 관련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런 사건까지 벌어지자 이승만 정부는 그 사건 이후 영친왕을 더욱 경계했다. 당시에는 대한제국을 경험한 중년 이상 노인층들이 많았기에, 더 예민하게 반응한 것도 있었다.

3.4.2. 환국과 사망

파일:의민태자, 이구, 이방자.png
파일:Yeongchin.png
<colbgcolor=#bf1400>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 가족 사진.
가운데의 인물이 영친왕의 아들 이구. 앞 왼쪽부터 영친왕, 이방자 여사.[33]
<colbgcolor=#bf1400> 옆 사진과 같은 시기의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그러다 1957년, 유학 가 있는 아들 이구를 보러 미국으로 가려고 했을 때 발생한 여권 문제 때문에 일본 국적을 취득한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 국민들 사이에선 그에 대한 반감이 더 강해졌다. 영친왕은 나중에 김을한 기자를 통해 밝히기를, "국적 같은 것은 나중에 다시 쉽게 회복할 수 있을 줄로 알았다"고 술회하며 일본 국적 취득이 온전한 자신의 실수였음을 인정했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왕공족으로 있으면서 근대적인 법제 등에 대해 무지한 면이 약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55년에는 여동생인 덕혜옹주 소 다케유키와 후견인 자격으로 이혼에 합의해주었다. 조현병 환자인 덕혜옹주의 의사 결정 능력이 전무했기에 자신과 아내 이방자가 후견인으로서 소 다케유키와의 이혼 합의를 대신 진행했다고 한다.

1947년 신적강하 이후 완전한 평민이 된 영친왕과 그의 큰조카 이건 모두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을 했다. 결국 경제적 이유로 이왕가저 세이부 철도에 매각했다. 그 전에 대한민국 정부가 주일 한국 영사관 부지로 이왕가저를 사려고 했기 때문에 이 사실이 한국에 알려지자 그의 한국에서의 평판은 더 나빠졌다. 이 시기에 따로 직장을 구하지 못한 그는 이방자 여사의 친정 구 나시모토 가문과 몇몇 재일 조선인들의 도움을 받아 간간히 생활했다고 한다.

그래도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였던 애신각라 부걸[34] 사가 히로가 종전 이후 중국에서 각종 고생을 다 했던 것과 달리, 종전 당시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전범으로 취급받지 않고 일본에 머물 수 있었음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 것이다. 사실 만주국에서 실권은 없었지만 각종 일에 관여했던 부걸과 달리, 영친왕은 이미 문을 닫은 대한제국 황족이라 아무것도 관여할 수 없었기에 일본 밖에 있었다고 해도 문제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1961년에 아들 내외 이구 부부가 있는 하와이를 들렀다가 일본으로 귀환하던 중 뇌일혈이 다시 재발, 이후 의사소통에 문제(실어증)가 생겼다고 한다. 이방자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처음으로 쓰러진 것은 1958년이라고 한다.

이승만 정부 4.19혁명으로 하야해 물러나고 5.16 군사정변이 발발한 이후 영친왕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수장이 된 장도영에게 편지를 보내 5.16을 국가재건의 큰 대업으로 지지하기도 했고, 1961년 9월 5일에 앞서 왕정복고 논란을 일으킨 이유립 등 유생 14인 등은 영친왕의 환국을 바라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관련자료 이후 장도영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 박정희 이승만과 달리 영친왕에 대해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 영친왕은 한국 국적을 다시 회복하고 1963년 11월 22일에 혼수 상태인 채로 일본에 유학이란 명분으로 인질로 끌려간지 언 56년만에 돌아왔다. 박정희는 하와이의 이승만의 귀국을 불허한 대신[35]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상당한 호의를 베풀었는데 덕혜옹주와 함께 그런 사례 중 하나다.
파일:영친왕 이방자 이구.jpg
<colbgcolor=#bf1400> 귀국 후 명동성모병원에서 영친왕, 이방자 여사, 아들 이구
1년간 서울 명동성모병원 병상에서 생활한 끝에 퇴원한 후 이방자 여사와 함께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일반주택과 창덕궁 낙선재에서 국가에서 지급하는 국고 보조금을 받아 생활했다. 하지만 자신과 덕혜옹주의 병원비가 300만 원 가까이 밀리는 등 가난한 생활[36]을 하다가 7년 후인 1970년 5월 1일 사망했다.[37] 향년 72세. 만약 순종의 뒤를 이어 제위를 그대로 계승했다면 재위 44년이었을 것이다.[38]
<colbgcolor=#bf1400> [[대한뉴스|{{{#gold 〈대한뉴스〉}}}]] 제 776호에서 다룬 영친왕 장례식

3.4.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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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영친왕 부부의 합장묘 영원(英園)
장례는 9일장이었다. 5월 9일 창덕궁 희정당 앞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후 영친왕의 시신을 모신 재궁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아버지이 안장된 홍유릉 능역으로 운구하여 '영원(英園)'이란 이름이 붙은 조선/대한제국 왕릉 최후의 능원에 안장했다. 신위는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으로서 종묘에 모셨다.

그는 대한제국 황태자로 있다가 나라가 망한 이후 이왕에 올랐다. 생전에 황제였던 적은 없으므로 그의 무덤을 홍유릉과 달리 황제릉으로 조성하지는 않았다. 대한제국 시대 황태자의 무덤을 만든 전례가 없었으므로 영친왕의 무덤을 조영(造營, 무덤의 양식을 구성하는 일)할 때 어떤 무덤을 전례로 따를 것인지 논의한 결과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문조 수릉을 전거로 삼았다. 조선시대 왕세자의 원(園) 중 가장 나중에 조영되어 시기상 가장 가까웠으며, 뒷날 왕(익종)황제(문조)로 각각 추존받았기 때문이다.

황제릉과 왕릉은 석물의 배치방법, 참도(포장된 길) 배치, 정자각 건물의 양식 등이 서로 다르다. 실제로 홍유릉과 다른 조선왕릉을 비교해보면 고종과 순종의 능은 황제릉으로 조선왕릉 중에서도 따로 돋보이는 구조를 하고 있다. 반면 영친왕의 무덤은 시기적으로는 더 나중에 만든 곳임에도 고종 이전 다른 조선 왕릉들과 기본적으로 같은 제후왕릉 양식임을 찾아볼 수 있다.

이후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그를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이라는 사시(私諡)로 추존했다.[39] 영친왕과 이후 사망한 이방자 여사의 신위를 마지막으로 종묘의 정전 및 영녕전의 제실(祭室)이 정확하게 채워져서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고 딱 맞았다.[40]

영친왕의 장례식 때 일본 황족들이 비공식적으로 한국을 방문해 조문을 왔다.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부인이자 이방자 여사의 이종 사촌 여동생인 세쓰코(勢津子) 비,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부부 등이 빈소에 왔다.

4.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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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사진은 영친왕과 가족들.
왼쪽부터 [[순종(대한제국)|{{{#gold
순종황제}}}]]와 [[순정효황후|{{{#gold 순정효황후 윤씨}}}]]. 중앙에는 영친왕과 [[이방자|{{{#gold 이방자}}}]] 여사, 아들 [[이구(1931)|{{{#gold 이구}}}]].
오른쪽은 [[고종(대한제국)|{{{#gold
고종황제}}}]]와 [[순헌황귀비|{{{#gold 순헌황귀비}}}]] 순이다.
이방자 여사와의 사이에서 아들 2명을 두었지만, 장남[41]은 일찍 죽었다. 차남인 이구는 결혼은 했지만 슬하에 자식은 두지 못했다. 그 때문에 실제로는 대가 끊겼으나, 전주 이씨 대동 종약원에 의해 이구의 양자로 지명된 의친왕의 손자 이원[42]이 명목상으로나마 대한제국의 황실수장으로서 대를 이었다. 다만, 1990년 민법 개정으로 사후 양자 입적은 인정되지 않고 있으므로 명목상 대통을 이었으되, 호적상 실제 양자 입적이 행해진 것은 아니다.

===# 처가 #===
쇼와 22년(1947년) 직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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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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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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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라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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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담

파일:영친왕.jpg }}} ||
<colbgcolor=#bf1400> 권오창 화백이 그린 영친왕 초상화
동강 권오창 화백이 그의 영정을 그렸다. # 권오창 화백은 이외에도 고종, 명성황후, 순종의 초상화도 직접 그린 바 있다.

6. 대중매체에서

파일:서인석 영친왕.png }}} ||
<colbgcolor=#bf1400> 〈왕조의 세월〉의 영친왕
1990년 KBS 8.15 광복절 45주년 특집극 〈왕조의 세월〉[48]에서는 배우 서인석(아역: 변성현)이 연기했다. 이 작품에서 이방자 역은 배우 이휘향이 맡았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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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덕혜: 조선의 마지막 황녀〉의 영친왕
1996년 MBC 8.15 광복절 51주년 특집극 〈덕혜: 조선의 마지막 황녀〉에서는 배우 김홍석이 연기했다.[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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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무지개를 건넌 왕비〉 포스터
2006년 일본 후지 테레비에서 영친왕과 이방자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를 방영했다. 제목은 〈무지개를 건넌 왕비(虹を架ける王妃)〉로 장혁주(1905~1998) 작가의 소설 《비원의 꽃》을 원작으로 했다. 극본은 마키노 노조미, 연출은 카와케 슌사쿠 PD가 각각 맡았으며 제작 협력은 일본 영상교토와 한국 MBC가 각각 맡았는데 의외로 고증에 충실하다고 한다. # 제목부터가 이방자 여사의 수기에 나오는 문장의 인용. 배우 오카다 준이치가 영친왕 역, 배우 칸노 미호가 이방자 여사 역을 맡았다. 주연 배우들이 실존 인물들의 외모와 먼 것을 문제삼는 의견도 있으나 이는 일본 사극이나 한국 사극이나 주연은 어느 정도 외모가 업그레이드되는(...) 캐스팅 관행이고 V6 오카다 준이치는 외모는 비슷하지 않지만 영친왕이 '체구는 작지만 군인답게 다부졌다'는 말을 들었던 것을 고려할 때 체격 면에서 닮은 점이 있다. 작품 자체는 동북아시아 로미오와 줄리엣 비슷한 비극의 연인으로 해석했지만 어디까지나 등장 인물만을 미화했을 뿐 오히려 한국에 우호적인 시각에서 본 드라마이다. 일례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가 잠시나마 언급되는가 하면 관동 대지진 당시 한국인 학살에 대해 영친왕이 격노해서 뛰쳐나가려 하고 이방자는 학살에 대해 "너무 심하다"고 한탄하는 장면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직접 촬영했는데[51] 창덕궁 후원, 화성행궁, 홍유릉 등에서 회상신 및 결혼식을 촬영했으며 전익령[52] 등 한국 배우도 조연 및 단역으로 출연했다. 현지 촬영과 현지 배우 캐스팅에도 공을 들였다는 사실 역시 드라마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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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덕혜옹주〉의 영친왕
2016년 개봉한 영화 〈 덕혜옹주〉에서는 배우 박수영[53]이 연기했다. 영친왕과 매우 닮은 모습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영화 속 영친왕 망명 작전의 경우 근거 자료가 부족해서 의친왕 망명 작전에 대한 기록을 대신 참고했다고 한다. 대체적으로 온화하고 사람 좋은 모습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망명하기로 결심해놓고 아내와 여동생 덕혜옹주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망명을 포기하는 부정적인 모습도 보여준다. 물론 여기서 나오는 망명 사건은 완전한 허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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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현효대왕 도정궁 사손
진종 소황제 장조 의황제
정조 선황제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
순조 숙황제 상계군 전계대원군 남연군 풍계군 진안군
문조 익황제 철종 장황제 익평군 회평군 <colbgcolor=#8a4d04> 영평군 흥녕군 흥완군 흥인군 <colbgcolor=#4a2d5b> ‡흥선헌의대원왕 <colbgcolor=#3e7080> 완평군 완성군
헌종 성황제 고종 태황제 †덕안군 경은군 청안군 †완림군 완순군 †완영군 흥친왕 †완은군 †인양군 의양군 예양정 완창군
†완효헌친왕 순종 효황제 의친왕 의민황태자 †풍선군 영선군 경원군
청풍군 창산군
※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왕족 / 황족으로서 정식 봉호가 있는 사람만 기재
※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후사를 이었으나 당시에는 장조 의황제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후손들에게 황족 작호를 수여함
† 대한제국 수립 전에 사망했으나 사후 황족 작위를 추증받은 사람
‡ 대한제국 수립 이후에 사망했으나 사후 황족 작위를 추증받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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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기자신 영친왕(은, 垠)을 비롯하여 이복 형들인 순종(척, 坧) 의친왕(강, 堈)도 항렬자 휘에 흙 '토(土)'변을 공유한다. [2] 완효헌친왕, 순종 효황제, 의친왕, 영친왕 [3]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내린 사시(私諡)인데 논란이 많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 호칭 관련 항목 참조. [4] 이전에 류큐 국왕을 류큐 번왕이라는 비주권군주제로 편입하긴 했지만 이후 왕위가 완전히 폐지되고 일본의 귀족으로 격하되었다. [5] 나이가 순종과는 23세, 의친왕과는 20세 난다. 덕혜옹주는 영친왕에겐 15살 어린 동생. [6] 1984년 《 경향신문》에 연재된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를 재출간한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지식 공작소, 2014년)의 '일러두기'에는 "이방자 여사의 유지(遺指)에 따라 '영친왕'을 '영왕'으로 호칭한다"는 말이 있다. [7] '의화군 이강(李堈)은 의왕(義王)으로 삼고 이은(李垠)은 영왕(英王)으로 삼았다.' 고종실록 고종 37년(1900년 / 대한 광무光武 4년) 8월 17일( 양력) 1번째 기사 중화전에 나아가 황자를 책봉하다 [8] 대한제국 선포 이전의 조선 왕조에서 친왕에 해당하던 명칭은 대군(大君)과 (君)이다. [9] 영결식에서 읽었을 때는 '의민황태자 영왕 전하'라고 했는데 정부 기록에는 '의민황태자 영친왕 전하'라고 적혀 있다. [10] 순종황제의 황후 순정효황후 윤씨의 호칭도 마찬가지 경우이나 영친왕의 경우처럼 대중이 공히 부를 칭호가 없다는 이유로 크게 문제 삼진 않는 분위기이다. [11] 영친왕의 아내 이방자와 아들 이구 역시 '자행황태자비(慈行皇太子妃)'와 '회은황세손(懷隱皇世孫)'이라는 사시가 있지만, 이들의 경우는 대한제국 시기(1897년-1910년)에 공식적으로 황태자비, 황태손 작위를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시는 둘째치고 황태자비, 황태손으로 부르는 것 자체에 논란이 있다. 이방자는 일본에서 ' 여왕(女王)'이란 칭호로 불리다가 1920년 이은과 결혼한 뒤 '이왕세자비(李王世子妃)'를 거쳐 최종적으로 '이왕비(李王妃)'가 되었다. 이구 역시 이왕가 시절, 그 것도 순종 사후인 1931년에 태어났기에 처음부터 '이왕세자(李王世子)'였다가 평민이 되었다. 사실 이구는 '황태손'이 아닌 어정쩡한 호칭 '황세손(皇世孫)'으로 주로 불리는데 이런 이유 때문이다. [12] 《조선왕조실록》 순종 1권, 즉위년(1907년 정미 / 대한 융희(隆熙) 1년) 8월 7일(양력) 1번째 기사 영왕 은(垠)을 황태자로 책봉하다 조선왕조실록 순종 1권, 즉위년(1907년 정미 / 대한 융희(隆熙) 1년) 9월 7일(양력) 1번째 기사 황태자를 책봉하고 축하를 받고 대사령을 반포하다 [13] 천민 출신이라는 설도 있고, 가계가 알려져 있지 않다 [14] 유길준, 장인근 등. [15] 순종 행장에는 이와 관련하여 "(순종) 황제는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정종(定宗)에게 왕위(王位)를 전하고 정종(定宗)이 아우인 태종(太宗)을 왕세자로 책봉(冊封)한 것이 우리의 왕가(王家)의 옛 법이라고 여겨서 드디어 아우 영친왕(英親王)을 황태자로 책봉하여 백성의 여망(輿望)에 부응하고 국가(國家)의 근본(根本)을 두텁게 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이는 행장 특유의 고인을 존중하는 서술인 것으로 보인다. 순종과 영친왕의 나이차는 23살로 순종은 김홍륙 독다 사건으로 불임 신세였기에 공식 양자로 들여도 어색할것은 없었다. [16] 조선 태종 이방원의 예도 비슷한 경우. 그는 왕세제가 아닌 왕세자였는데 역시 자신에게 왕위를 주는 존재는 형인 정종이 아니라 아버지 태조 이성계라는 의미였다. 그래서인지 정종은 한동안 '공정왕'(恭靖王)으로서 묘호를 받지 못하다가 200여년이 지나서 숙종 대에 정식으로 묘호를 받았다. [17] 영친왕은 처음엔 일본 황태자에 준하는 예우(일본 황족보다는 낮으면서 화족보다 높은 예우)로 교육을 받았으나, 경술국치 이후엔 이왕 전하(殿下)로 불리며 일본 귀족(화족)에 준하는 예우로 교육을 받게 된다. 이에 따라 1911년에 육군 유년 학교 예과에 편입되었고, 1917년엔 일본육군사관학교 제29기로 졸업했다. [18] 당시 결혼은 당사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략적인 중매 결혼으로 이뤄졌지만, 이 시기 조선 왕족들이 일본인과 결혼함은 조선 왕실의 뜻이라기보다 일본의 강제였다. 그 시대에 어느 나라의 왕족들에게 자유 결혼이 있겠나만은. [19] 이게 좀 논란이 있다. 현재 영친왕의 생애에 대해선 전적으로 이방자 여사의 자서전과 외부인들이 쓴 기록에 의존한다. 이방자 여사가 쓴 자서전엔 영친왕의 고통스러운 생이 잘 담겨 있어 그녀가 매우 헌신적인 아내였다는 이미지가 있으나, 실제론 그렇게 헌신적인 아내는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다른 외부인이 영친왕의 집에 찾아가 적은 기록에 따르면, "식사가 일반 가정보다 맛있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였고, 이방자 여사는 외부 활동에 열중하느라 후에는 병에 걸린 영친왕을 잘 돌보지 않는다."라고도 기술했다. 최근 조선일보의 취재에 의하면, 영친왕은 신 헌법(평화헌법)의 시행 이후 왕공족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강한 반대로 고국으로 귀국도 금지당한 후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아카사카의 구 자택 근처에 있는 고급 요정에서 게이샤의 누드화를 그리는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 부인인 이방자 여사는 남편이 게이샤의 누드를 그리는 것을 두고 왕족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일로 여겼는데, 그 시기 부부 사이에 다소 냉전(?)이 있었던 듯하다. [20] 메이지 덴노는 어린 영친왕에게 최첨단 장난감, 은으로 된 문구류, 영사기 등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영친왕은 이 중에서 영사기를 매우 아꼈다고 전해진다. [21] 옛 영상에는 이토 히로부미 앞에서 박수를 치며 뛰어 놀거나 그네를 타는 영친왕이 나온다. 이를 가지고 망해가는 대한제국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암군의 모습이라고 평하는 이들도 있지만 당시 그는 초등학교 고학년 나이(9~11세) 밖에 안 되었고 그런 현실을 알았더라도 어떻게 할 힘도 없던 어린 소년이었을 뿐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실 해당 사진 자체만으로도 조선왕조 전체의 입장에선 치욕적인 사진이다. 그러나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영친왕 앞에서는 친절을 베풀었다고 한다. 또래 아이들을 초대하여 같이 뛰어놀게 하면서, 영친왕이 일제에 대한 반항심 또는 적개심조차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 여담으로 역사의 아이러니인지 1945년에는 맥아더가 히로히토를 찾아가서 의도적으로 비슷한 구도로 사진을 찍어서 일본 민중을 정신적으로 굴복시켰다. [22] 이 때문에 명목상이나마 일제 치하 조선의 교과서 등에 천황 바로 뒤, 총독보다 앞 자리를 차지해서 나와있다. 그리고 이왕가는 대다수의 일본 화족들이 부러워할만큼 막대한 유산을 갖고 있었다. [23] 다만 엄귀비의 경우 장티푸스라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애당초 임종을 직접 지켜보기 힘들었으며, 어렵게 환국하긴 했으나 역시 전염의 우려(당시 전염병은 한명이 걸리면 열에 일곱이 걸려 손써보지 않고 죽게 되는 불치병일 정도로 당시 수준으로는 전염병을 치료는 커녕 방치만 한다.)로 생모의 시신을 보여주진 않았다. 아니, 보여줄 수 없었다. [24] 이 책에서 나온 대부분의 예문은 하오체로 써 있으며, 모두 영친왕이 직접 손글씨로 쓴 것이다. 삽화도 영친왕이 손수 그렸다. 책의 첫 예문은 인상적이게도 나는 고기를 머그오(I eat meat)였다고 하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그의 유복했던 유년기가 엿보이는 대목으로 볼 수도 있겠다. [25] 사진은 모나코 공국의 궁전. [26] 1907년 대한제국 황태자였던 당시에 요시히토 친왕 황태자 신분으로 방한해서 대면한 적이 있다. [27] 이 당시 육군대학 제35기 동기가 홍사익이다. 영친왕과 홍사익을 포함하여 일제시대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총 4명에 불과하며, 홍사익을 제외한 영친왕, 이건, 이우 등 3명은 왕공족이다. [28] 1935년 연대장을 맡았던 우쓰노미야 보병 제 59연대는 1936년 2.26 사건 당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예하 연대 병력을 이끌고 도쿄에 진주했다. 그러나 도착한 당일 이미 사건이 정리되어 이후 교전은 없었다. 이후 해당 연대는 만주를 거쳐 태평양 전쟁에서 팔라우에 배속된다. 제59연대 휘하의 1대대는 1944년 앙가우르 전투에서 옥쇄한다. 자세한 내용은 앙가우르 전투 참조. [29] 1941년 7월 1일부터 같은 해 11월 16일까지 역임. 4개월도 채 안됐다. 앞선 59연대와 마찬가지로 우쓰노미야를 소재로 하던 부대로, 영친왕이 사단장으로 배속된 7월에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특종연습에 동원되고 9월엔 제23군에 편입돼서 중국 화남 방면으로 간다. 영친왕도 이때 화남에 있는 광동으로 갔다가 교육총감부로 인사 이동되면서 일본으로 귀환. 영친왕이 떠난 후 제51사단은 17군을 거쳐 18군으로 배속된 뒤 라바울에서 파푸아뉴기니의 라에-살라모아 지역의 방어를 위해 이동하던 중 미군의 공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게된다. 이것이 바로 비스마르크해 해전에서 언급되는 댐피어 해협의 비극. 이후 보급 부족에 시달리다가 전체 인원의 8분의 1밖에 안남은 상태에서 종전을 맞이한다. [30] 1946년 2월에 미군정 하 민정장관이었던 안재홍이 창간한 신문. 보수적인 논조를 띄었으며 6.25 전쟁 때 안재홍이 납북당하면서 폐간되었다. [31] 이왕가는 다른 조선인들과 달리 별개의 황실 호적을 가졌다. [32] 1947년 새로운 일본국 헌법(평화헌법)을 시행하면서 다이쇼 덴노의 직계를 제외한 나머지 황족, 귀족(화족)의 신분은 모두 일반인이 되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구황족과 귀족들은 '제 코가 석자'인 시점에 영친왕을 도울 여력이 없었다. [33] 관련 자료(김을한의 《인간 이은》, 이방자 여사의 《세월이여 왕조여》 등)를 보면 1958년 ~ 1961년 사이에 미국( 하와이 등)에서 간간이 머문 적이 있는데, 그 때 사진이라고 한다. [34] 애신각라 부걸은 청나라 선통제의 동생으로, 일본 화족 가문의 딸인 사가 히로와 결혼했다. 부걸은 만주국을 탈출해 일본으로 향하려다가 소련군에게 붙잡혀 형인 부의( 푸이)와 함께 전범 취급을 받았고, 소련에서 중국으로 넘겨져 무순 전범 관리소2에 오랫동안 갇혔다. [35] 이건 제2공화국도 마찬가지. [36] 병원비가 저렇게까지 밀린 건 이 두 사람의 병원비로 국가가 지원해준 돈을 이구가 횡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이구의 비리 행각을 일본 측에서도 알았는지 영친왕의 장례식 때 일본 황실 측이 마련한 조의금을 상주인 이구가 아닌 한국 정부 관계자에게 바로 전달했다고 한다. [37] 경부고속도로 전구간 개통되기까지 불과 두달 전이다. 아내와 여동생은 1988 서울 올림픽까지 봤다. [38] 이렇게 되면 영조 52년, 숙종 46년 다음이 된다. 부황 고종(왕 33년+황제 10년)보다는 1년 더 재위했었을 것이다. [39] 대한제국 황족들을 다룬 책인 《제국의 후예들》에 의하면 '의민(懿愍)'의 뜻은 '평생 동안 고난의 길을 걷다'라고 한다. 시호가 원래 고인의 생전 행적을 평가하는 것이긴 하지만, 영친왕의 경우에는 그의 인생 자체가 그대로 투영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당시 그의 황태자 책봉은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황제의 의지로 진행되었기에 전주 이씨 대동 종약원에서는 '의민황태자 영왕'이란 이름으로 조선 왕실/대한제국 황실의 구성원 중 생전에 왕이나 황제는 아니었지만 정말로 딱 한 자리 남은 종묘 영녕전에 마지막으로 배향했다. '민(愍)'은 그 시법상, 불행한 삶을 살거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인물에게 위로의 의미를 담아 올리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고려의 공민왕이나, 유비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 유협에게 올린 시호인 효민황제(孝愍皇帝)등을 예로 들 수 있다. [40] 여담으로 구한말에 조선 왕실 종묘의 정문인 창엽문(蒼葉門)이 조선 왕조의 운수를 알린다는 도참설(圖讖說)이 돌았다. 창(蒼)을 파자하면 十十, 八, 君(28임금)을 말하고 엽(葉)은 二,十, 世, 木(20세)가 된다. 당시 26대 임금인 고종은 이 도참설을 듣고, 자신의 2대 후에 조선이 망하는 것인지에 대해 불안하게 여겨 역술가를 불러 자문을 구할 정도였다. 그런데 조선왕조 왕계도를 보면 대수(代數)가 20대이고, 영친왕을 포함하면 28왕이 되니, 도참설이 예언에 딱 맞아 떨어진 셈이다. [41] 이진(李晉). 대통을 이을 종손이었으므로 영친왕과 이방자 내외가 한국으로 함께 데려가 얼굴을 비췄는데, 한국 땅에서 먹은 것이 잘못되었는지 초콜릿 색깔의 검고 갈색 구토를 계속 하다 생후 8개월이라는 어린 나이에 일찍 죽었다. 훗날 이방자 여사는 "궁에 (영친왕) 전하와 나의 사이를 시기하는 자가 있어 사주를 받고 했을 일."이라며 독살설을 주장했지만 확실하게 밝혀지진 않았다. 굳이 현실적으로 생각해본다면 너무 어린 나이에 당시 열악한 환경에서 먼 거리를 왔다갔다하느라 몸에 무리가 가해진 상태에서 맞지 않는 음식을 먹은 것이 탈이 난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의학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은 때라 아직 몸이 약한 어린 아기가 작은 병에도 사망하는 일이 적지 않았고, 이는 왕실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42] 의친왕의 9남 황손 이갑(이충길)의 장남이자 의친왕의 손자로서, 본명은 이상협. [43] 일제는 왕공족 출신만이 아니라 일본 황족 출신 군인들도 전선에 배치시켰는데 이는 전투에 참전시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일본은 이들을 위험한 전투가 일어나는 최전선 지역이 아니라 주로 일제가 점령한 거의 후방지역에 배치했다.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서 점령 지역에 가서 주로 높으신 분으로서 그 쪽 지역을 순찰, 순시하고 거기에 주둔하는 일본군 부대를 방문해 격려하는 전쟁 수행에 있어서 이들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역할 정도만 했다. [44] 사실 왕족이 군사교육을 받고 장교가 되는 일 자체는 당대 기준으로도 매우 흔한 일이었고, 일본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유럽에서도 계승 서열에서 밀린 차남 이하의 왕족/귀족 장정들은 군인이나 성직자로 빠지는 게 일상이었고, 차기 왕위 계승자들조차 20대에 위관급 장교인 시절에는 현장에서 뛰어야 했다. [45] 후술하겠지만 조선뿐만 아니라 고려와 남북국시대를 거쳐 삼국시대까지 이르는 역사와 문화까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46] 이서구(1899 ~ 1981) 작가의 시나리오를 원작으로 하여 정진우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47] 극본은 김영곤, 연출은 나영세 PD이다. [48] 신봉승 작가의 시나리오를 원작으로 하여 극본은 김지수, 연출은 사극계의 거장 김재형 PD가 각각 맡았다. [49] 이 둘은 KBS 2TV 주말연속극 〈 달빛가족〉에서도 부부였다. [50] 조선왕조 500년 - 대원군〉에서는 영친왕의 아버지 고종을 연기했다. [51] 후지 테레비의 제휴사인 MBC에서 적극 지원을 해주었다고 한다. [52] 작중 이름은 '이천희'로 영친왕이 어렸을 때 잘 따르던 궁녀 역으로 등장한다. 나중에 엄귀비가 설립한 숙명여학교의 학생들이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와서 영친왕 부부를 만나는데 그 여학생들 중에 이천희의 딸이 있었다(이천희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꼭 조선으로 돌아오십시오"라는 여학생들의 말에 영친왕은 슬퍼한다. [53] 1970년생 남자 배우로 〈 말죽거리 잔혹사〉의 선생님, 〈 타짜〉의 고니( 조승우) 삼촌, 〈 건축학개론〉의 건축소 소장, 〈 완득이〉의 완득이 아버지 등을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