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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과거 급제자 출신의 정치 10단 군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3권 후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3권 후기
태종은 조선의 역대 군주 중에서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로서 행정실무를 경험하였다.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 영의정을 역임한 적이 있긴 하지만 이건 이미 계유정난이 벌어진 이후인지라 사정이 다르다. 특히나 태종은 이자춘 때 원에서 고려로 귀순하여 비교적 신진이었던 전주 이씨 가문에서 최초로 나온 과거 급제자였기 때문에, 아버지 이성계가 그런 태종을 크게 아꼈다.[1]
태종은 종종 양위 쇼를 벌였는데 이것은 조선 시대에 국왕이 손쉽게 일으킬 수 있는 왕권 강화 소동이었다. 이 경우 세자가 양위에 찬성하면 아버지를 제끼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욕심이 원래부터 충만했던 불효자가 되고 신하가 양위에 찬성하거나 순순히 받아들이면 주상 전하의 신하가 아니라 양위에 찬성한 불손한 세자 라인에 탑승한 세자의 신하가 되는 것이다. 둘 중에 한쪽이라도 통촉하여 달라고 외치지 않으면 세자랑 신하가 결탁한 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생전 퇴위 및 양위 문제만 나오면 세자고 신하고 납작 엎드려 "차라리 소신을 죽여주시옵소서 전하" "전하께서 아직 이리 강건하신데 어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를 외치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어필하지 않으면 주상에게 찍혀서 황천가는 선물로 사약을 받을 지도 모르기 때문.
문제는 이를 남발할 경우 반대로 세자의 지지 기반이 약해진다는 것으로, 이런 점에서 최악의 본보기가 양위 소동을 자주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선조(당시 세자 광해군)[2], 영조(당시 세자 사도세자)[3]이다. 이런 정치적 이벤트는 왕권 강화의 일환이자 신하들의 충성도 테스트이기도 했겠지만 허구한 날 대전 밖에서 "양위는 아니 되옵니다!"나 "역적 누구 누구를 벌하소서!"를 외치는 신하들을 보는 것을 즐겼던 듯 하다. 이에 맞춰줘야 하는 신하들은 대단히 피곤했을 것이다. 다만 충녕대군(훗날 세종)이 후계자로 확정된 후엔 진짜로 양위를 했다.[4]
후계자인 세종대왕이 방대한 지식과 논파를 통해 신하들을 승복시키고 업무(공무)량을 늘려서 괴롭혔다면, 태종은 순수 정치 테크닉을 구사하는 편이었다. 물론 태종도 신하들을 지식으로 능가하는 분야가 있었고[5] 세종도 훈민정음 반포 당시 권위적인 어법으로 신하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하옥해 버렸지만 평상시의 스타일은 정 반대였던 것.
태종은 세종을 세자에 책봉하고 선위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단 두 달이었다고 한다.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책봉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선위를 통한 왕위계승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세자 책봉 후 한 달 만에 육대언들에게 선위 의사를 표시하였는데 이에 육대언들이 반대하자 "그 뜻을 드러내지 말라" 라고 말했고, 세자 책봉 후 두 달 만에 세종에게 국보를 전달하며 " 호랑이를 18년동안 탔으니 그걸로 족하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두달 동안의 준비기간에 태종이 한 여러가지 일 중 눈길을 끄는 몇가지가 있다.
-
백성을 괴롭게 한다고 몇번 미뤄뒀던 토목 공사를 시작하였다.
태종은 토목 공사는 백성을 괴롭게 하는 일이지만 중하고 필요한 일이라며 제때에 끝내어 세자는 민심을 얻게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
신분이 미천한 인재가 세자를 만나게 하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였다.
양녕대군과 달리 세종은 게으르지도 않고 학문을 사랑하여 양녕대군과 같이 보호하고 단속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고 세자에게 깊이 인심을 얻게 할 것이라고 하며 전규에 얽메여 사람의 출입을 금지하지 말라고 하였다. 또한 세자를 만나보고 싶어하는 인재가 있다면 초야의 미천한 신분이라도 만날 수 있게 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태종이 세종에게 넘겨준 인재들은 황희, 박자청, 김인, 윤득홍, 전흥, 하영 등이 있는데 이들 모두 세종시대까지 오랜 기간 활약하였다. -
세종의 장점을 뽑낼 자리를 마련하고 아직 경험이 없는 분야는 자신을 보조하게 하였다.
서연에서 세종의 학문에 대한 사랑을 널리 늘어놓은 후 10일 뒤 바로 세자의 첫 서연 자리를 마련했지만 군사지휘에 있어선 세자의 경호를 강화하고 의용위를 새로 설치하여 감무하게 하였다.
태종이 상왕이 된 후 의식대로 병조의 조회를 받은 것은 단 한번이었으며 상왕으로 있었던 기간은 총 4년이었다.
그외 태종이 세종을 향해서 하는 어록들이 있다.
- 주상이 비대하니 내가 끌고 다니며 사냥을 하러 가겠다.
- 주상은 어진 임금이 될 것이다. 그러니 성심껏 보좌하거라.
- 주나라의 문왕같은 임금이 될 것이다.[6]
- 흉년이 왔으니 방물과 전은 주상에게만 올려라.
- 주상이 번거로운 것은 아나 항상 보고싶어 부른 것이니 비난하는 자들이 있어도 어쩔 수 없다.
- (정종의 승하로 세종이 육식을 끊자) 수척해지는 것 역시 불효이니 고기를 먹어라.
- 자식이 왕이 되어 그 아비가 되어 누리게 되니 너무 행복하다. 이리 효심이 넘치니 근심이 없다.
- (원경왕후를 간병하는 세종에게) 대비의 병이 걱정되나 끼니를 잘 챙겨먹어 늙은 나에게 효도하라.[7]
- (유언으로) 내가 죽더라도 주상은 고기를 마음껏 먹도록 하라.
2. 심술쟁이 군주
태종 이방원은 성리학이 흥하던 여말 과거 급제자 출신인지라 성리학에 대한 태종의 수양은 적어도 조선 초 자신이 거느린 신료들과 대등한 선상에 있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태종은 학문적 기반과 말꼬리 잡아 물고 늘어지는 치사한 수법, 여말 시절 관직 생활을 하면서 얻은 경험을 통해 신하들을 갖고 노는 일화가 많다.- 별궁을 짓는 것을 신하들이 반대하자 '아니 그러면 지금 집도 절도 없는데 나더러 길바닥에서 이슬을 맞으면서 잠을 청하란 것이냐?'라고 버럭 화를 냈다. 그런데 신하들이 무서워서 우리 전하께서 성군이 되긴 글렀다며 통곡을 하자 '그냥 화 좀 내 봤다.'라며 넘어간 적도 있다. 참고로 별궁은 결국 자신이 짓고 싶었던 대로 지었다(...).
-
창덕궁에 새로운 정자를 지어 놓고 당시 도승지였던
황희를 통해 신하들에게 새로 지은 정자의 이름에 대해
권근하고 의논했는데, 권근은 '청녕'이란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태종은 "난 이거보다는 '해온'이라는 이름이 더 마음에 든다.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다른 신하들에게 묻자 그들은 "아이고 최고의 이름입니다
전하"로 일관했다. 그러자 태종 가라사대, "임금이 뭔 말만 하면 신하들은 아부하기만 바쁘구나. 하여간 비위 맞춰주는데는 도들이 텄어. 쯧쯧. 권근이랑 다시 의논해서 결정하라."라고 받아쳤다. 결국 권근도 여기에 동의해서 정자 이름은 자기 뜻대로 해온이라고 지었다.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태종실록 1406년 4월 9일자 기사
- 박자청이라는 신하는 대형 공사의 책임을 자주 맡아 태종의 신임을 받았는데, 어느 날 일꾼들과 현장에 앉아 있다가 자기보다 직급이 낮은 이중위가 자기 앞을 말을 타고 지나가자 건방지다며 그를 붙잡아 폭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중위는 형조에 고발하여 형조에서는 박자청을 벌할 것을 청했다. 박자청은 태종에게 폭행 사실을 부인했고 태종도 박자청을 신임했기에 벌을 주고 싶지 않았는지 "박자청은 과인에게 폭행한 사실이 없다고 맹세까지 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신하들이 "이중위도 맞은 게 분명하다고 맹세했습니다?"라고 말하자 태종 왈, "이래서 맹세는 믿을 수 없어. 이런 사소한 일에 일일이 죄를 주면 백성들이 안심하겠는가? 사직과 관련된 게 아니면 용서해야 하노라!" 참고로 사헌부에서도 박자청을 죄줄 걸 청했지만 박자청에게 벌을 내렸다는 기록은 없다. 결국 어물쩡 넘어간 모양. 근데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일이 좀 커지면 이 박자청이란 사람은 임금에게, 그것도 태종 이방원에게 거짓말을 한 기군망상죄 혐의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왕권에 위협이 가지 않는 인물이다 싶으면 어지간한 것은 그냥 넘겼던 태종다운 일화.
-
상왕이 된 후
형이랑
강원도 평강에 놀러갈 계획을 세우고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 등을 불러 "내가 평강에 놀러갔다 오고 싶은데 수행원을 조금만 데려갈 건데 괜찮겠지?"라고 묻자 유정현은 "지금 한창 농사철인데 수행원이 적어도 임금이 두 분이나 가시면 곤란할 듯 합니다."이라며 반대의 뜻을 밝혔고 박은은 가도 좋다고 말했다. 태종은 바로 다음과 같이 말해서 박은을 무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영의정의 말은 내가 새겨 듣겠다. 그런데 좌의정의 말인들 어찌 망령된 신하라고 하겠는가''[8]
박은은 태종의 의중을 잘 읽어서 태종의 비위 맞추기 선수였다. 태종도 박은에게 힘을 실어 줘서 박은의 라이벌 격인 세종의 장인 심온 집안을 박살냈지만, 그의 아부 또한 돌려서 꼬집은 것. 세종 역시 박은을 두고 "아부밖에 모르는 신하"라고 힐난했다. 다만 그 덕분에 박살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는데 너무 유능했어도 숙청의 칼날을 피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말이다.
- 역시 상왕이 된 후에 태종이 거처할 궁궐의 이름을 신하들이 수강궁( 壽 康 宮)이라고 지어 올렸다. 목숨 수(壽)에 편안할 강(康)[9]을 쓴 좋은 의미의 궁궐 이름이었는데 이 궁 이름을 듣고 박은 등을 불러서 "수강궁이라면 옛날 남송 광종이 광증에 걸려 폐위당한 후 감금된 궁의 이름이다. 그런 이름을 왜 이 궁에 붙이는 건가? 이것은 <송감>[10]이라는 역사책에 나오는 얘기다"라고 면박을 주었다. 신하들이 당황하며 궁 이름을 다시 지어 올리겠다고 용서를 빌자 태종은 쿨하게 넘어 갔다. 세종실록 5권, 1년 9월 28일 기사. 아버지에게도 공부 안 한다고 면박받고 그 아들에게도 공부 안 한다고 면박받은 조선 초기 신료들이 이쯤 되면 불쌍할 지경.
- 고려시대 풍습 중에 첫 눈이 오는 날에 서로를 속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눈을 뭉쳐서 서로 보내어 모르고 받는 사람은 반드시 한 턱 내야하고, 그것을 간파당하여 심부름 온 사람을 잡으면 보낸 사람이 한 턱을 내는 것이었다. 첫 눈이 오자 상왕 태종은 내신 최유를 시켜 형에게 약이라 속이고 장난삼아 눈을 보냈는데, 눈치 챈 노상왕 정종이 최유를 잡으라 명령하였으나 미처 잡지 못했다고 한다. 세종 즉위년 10월 27일 기사
- 목인해라는 인물이 공신의 자손이자 왕실 인척이었던 조대림이 역모를 꾀하려 한다고 무고한 사건이 있었다. 조대림은 개국 공신 조준의 아들이자 태종의 사위. 그는 당시 종친 중에서 유일하게 군부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는 태종이 군대를 장악하기 위해 일부러 조대림을 군부에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목인해의 고변 이전에 정보망으로 이미 무고 사건이라는 걸 알았는데, 그걸 뻔히 알면서 내버려 두었다가 역모 고변이 일어나는 시점에 조대림을 본인이 역모로 몰아 구금시킨 다음 맹사성 등에게 암묵적으로 지시를 내려서 조대림에게 곤장을 때리게 했다. 그 다음에 조대림이 무고하다는 걸 본인이 직접 밝힌 다음에 맹사성을 종친을 모함해 왕실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재빨리 가두고 사형선고까지 내렸다. 결국 두고 볼 수 없었던 조정 중신들의 사정 끝에 맹사성을 살려주는 결정을 내리는데 태종은 맹사성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사형장에 끌려갈 때 사면 결정을 내려서 망나니 칼이 목에 닿기 직전에 맹사성을 살려줬다고 한다. 조대림 사건 문서로.
- 즉흥적인 면모도 있었다. 물론 실은 이 역시도 다 사전에 충분히 준비하고 한 정치쇼였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 출중해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세 장의 과거 시험 답안지 중 하나를 장원으로 뽑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사전에 검사한 시험관들은 '셋 모두 수준이 거의 비슷하나 하나는 아주 약간 모자라고, 나머지 둘의 수준이 비등하다'고 평가했다. 이에 태종은 답안지를 읽어보지도 않고 "내가 집는 게 장원이야!"라며 한 장을 집어 장원 급제를 시켰다. 이 행운의 당첨자(?)가 바로 세종 시대의 유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인 정인지. 다만 이 일화의 경우 실은 이미 답안지를 다 읽어놓고 합격자까지 정인지로 내정하고서는 쇼맨십으로 저랬다는 분석도 있다.
-
개성에서 한양으로 다시 돌아올 당시 도성을 다시 바꿀지에 대해서 논의가 오갔는데, 기존의 한양과
하륜이 주장한 무악(현대의
신촌)이 후보로 올랐다. 이에 대해 태종은 동전으로 점을 쳐보겠다고 했고, 종묘에서 점을 친 결과 한양을 도성으로 유지하는 것으로 결론이[11] 났다.(그러나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을 새로 지어 천도했다) 물론 태종의 마음은 어차피 한양에 가 있었으므로, 점을 쳐서 무악이 걸렸어도
이 항목의 예시들처럼어거지를 써서 한양으로 밀고 나갔을 게 뻔하다는 것이 후대의 해석이다. 당시는 조사의의 난 직후로 태종은 태조 이성계와의 관계 개선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이때 태조가 "송도(개성)는 왕씨(王氏)의 구도(舊都)이니, 내가 정한 도읍인 한양으로 돌아가자"라고 강력히 요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태종 4년 9월 1일) 아버지와의 관계를 위해서라면 돌아가야겠으나, 그러자니 애초에 개성으로 옮긴 자신의 권위에 문제가 생긴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 종묘에서 치는 점이라는 권위를 빌린 것.[12] 동전으로 친 점의 결과야 이미 다 손을 써놨을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왔든간에 종묘로 데리고간 신하들의 입만 단속하면 될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때 점치러 들어간 신하들은 이천우, 조준, 박석명 등 태종이 신임하던 측근들이 대부분이다.
3. 사냥 애호가
정쟁(政爭)에서 참아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몇 년이고 참아내는 등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했지만 취미에 관해서는 자제심이 아예 없었다. " 전하께선 사냥을 너무 다니시니 걱정입니다."라고 간언을 올린 기사가 자주 나온다. 상왕이 되고 나서도 사냥을 가려고 은근슬쩍 아들인 세종대왕이 살이 너무 쪘으니 함께 사냥을 나가야겠다며 아들까지 끌어들여서 핑계를 댈 정도.
왕자 시절엔 삼촌 이화를 따라 사냥을 나갔다 표범에 물려 죽을 뻔할 적도 있었다. 당시 이방원과 사이가 껄끄러웠던 태조도 이 때는 아들 살려준 신하에게 고맙다고 보답으로 선물을 내려줬다.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가 정안군(靖安君)을 청하여 서교(西郊)에 가서 사냥하다가, 정안군이 성낸 표범에게 부닥친 바 되어 거의 면하기 어려울 즈음에, 낭장 송거신(宋居信)이 말을 달려 따라가니, 표범이 정안군은 놓아두고 반대로 거신(居信)을 따라 와서 앞으로 달려들어 말 위에 올라 안장을 깨물었다. 거신은 말 위에 누워서 이를 피하니, 표범이 겨우 말과 떨어졌다. 낭장 김덕생(金德生)이 뒤를 달려가서 활을 쏘아 한 발에 표범을 죽였다. 정안군이 2인에게 각각 말 한 필씩을 주니, 태조도 거신에게 말 1필을 하사하고, 화(和)와 민제(閔霽)에게도 또한 각각 말 1필씩을 하사하였다.
< 태조실록> 태조 4년(1395년) 10월 13일 정안군이 사냥 갔다가 표범에 물릴 뻔하다
< 태조실록> 태조 4년(1395년) 10월 13일 정안군이 사냥 갔다가 표범에 물릴 뻔하다
또한 사냥과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 하나가 전해지는데, 종묘에 나라의 일을 고하기 위해 신도(新都)로 가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사냥이 너무 하고 싶었는지 갑자기 발을 돌려 종묘에 고묘[13]하기 위한 복장을 다 벗어던지고 신하들 몰래 혼자서 사냥을 하러 간 적도 있었다. 당연히 신하들이 깜짝 놀라 태종에게 쫓아와서 태상왕도 편치 않으시고 종묘에도 일이 있는데 이렇게 사냥하시면 참으로 곤란하다고 잔소리를 해대니 태종도 화가 났는지 아니 임금이 사냥하는 법이 없냐? 왜 이렇게 잔소리야라며 버럭 화를 낸 적도 있었다. 태종실록 6권, 태종 3년 9월 28일 계묘 1번째 기사
그런데, 그도 그럴 것이 왕조 시대 왕의 사냥은 많은 이들을 피곤하게 했다. 왕을 수행할 수행원들은 물론이고, 사냥 가는 지역 수령은 임금이 자기 관내에 들어오니 당연히 초긴장 상태가 된다. 더욱이 그 지역 주민들은 왕의 사냥 준비를 도맡아 해야 했으니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게다가 2~3개 도에서 많은 농민들이 차출되어 몰이꾼 역할을 했으므로 여기에도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자기 먹을 것은 스스로 준비해야 했다.) 사냥터를 확보하기 위해 농지를 싹 갈아엎느라 한해 농사를 망치는 것은 기본.[14] 원래 조선의 왕이 친히 참여하는 사냥 행사는 강무라고 해서 정기적인 군사 기동훈련에 가까웠다. 꼭 해야 하고 하지 않을 수 없는 행사였다. 실제로 세종은 강무를 귀찮아해서 빠지려고 한 적도 있었고 한양 대화재도 강무로 세종과 문종이 한양을 비웠을 때 일어났다. 이렇듯 정기 군사훈련이나 종묘에 제물을 준비하는 등 명분 있는 사냥만 했다면 간관들도 감히 비판하지 못했을 것이나, 도가 지나쳐 좋은 매를 구했다던가 어디에 짐승이 많다던가 등등 핑계만 생기면 사냥을 나가려고 했다는 게 문제였다.
이런 간언에 태종은 정기적인 군사훈련, 혹은 종묘에 제물을 바치려는 이유라며 반박하거나, "내가 과거에는 붙었어도 원래 무인 집안 사람이라 가끔 몸을 움직여줘야 기가 잘 돈다", "내가 원래 대궐에서 자란 사람이 아닌데, 매 사냥은 잠저에서 살 때부터 즐겨하던 것"이라고 핑계를 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사간 대부 윤사영이 "3일 전에 우박도 내리고 분위기도 안 좋아서 반성부터 하셔야 되는데 전하는 왜 사냥으로 즐거움만 추구하시느냐"고 하자, 태종은 "그래도 한 번 해볼 건데 그대들이 날 강제로 못 하게 할 것이냐"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 《태종실록》 권12 6년 9월 25일 신사 1번째 기사
그런가 하면 <대학연의>를 펴들고 "이 책에서도 사냥을 권장하고 있는데 왜들 지랄임?"이라고 온갖 핑계를 다 대서 결국 실컷 즐기고 돌아왔다. 《태종실록》 권6 3년 10월 1일 을사 1번째 기사 그런가 하면 일반 행정에서 자기 의견을 관철하려 하거나, 자기가 좀 배운 사람이라는 티를 낼 때에는 앞서 보인 모습과 반대로 "내가 무인 집안이긴 해도 과거 급제자 출신이라서…."라는 식이다. 이쯤 되면 말로는 이길 수가 없다.
다만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들을 두려워하여 사냥을 가도 "지금 나 사냥 온 거 사관들이 아는가 모르는가?"고 끊임없이 물어봤다고. 한 번은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부끄러운 것이 더 신경쓰였는지 "사관한테 내가 낙마했단 얘기하지 마라."라고 지시를 내렸다.
...라고 실록에 적혀 있다. 낙마한 사실과 그 얘기 하지 말랬단 사실까지 고스란히 사관이 듣고 사초에 적어 실록으로까지 편찬된 것이다. 이 기록은 결국 태종실록 태종 4년(1404년) 2월 8일자 기사 #에 남아 있다. 조선 왕조 실록과 사관의 위대함을 언급할 때 제일 많이 인용되는 기록 중 하나.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이 기사가 인기검색어에서 빠지지 않고 올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15]
4. 여성 편력
이미 즉위 다음 달부터 조선왕조실록에 태종의 여성 편력에 분노한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없어 경연청으로 열흘 동안이나 도망가 있었다.《정종실록》 권6 2년 12월 19일 기유 3번째 기사. #[16]한 번은 김우와 황상이라는 무관이 한 기생을 두고 싸우는 폭력사태가 벌어지자 황상과 김우의 수하 양춘무 등 4명을 벌주고[17] 그 기생은 자기가 데려갔다.[18] 이것과 비슷한 일화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 신>에도 나온다. 다만 거기서는 그게 화가 되어 신하들이 역모를 꾸며 결국 나라가 망한다.[19]
조선 군주 중 다자녀 1위. 슬하에 무려 12남 17녀(29명)을 두었다. 요절하여 공식 기록에 포함되지 않은 9명(7남 2녀)까지 합하면 무려 38명이다. 참고로 2위가 성종의 16남 12녀(28명), 3위는 선조의 14남 11녀(25명), 4위로 정종의 15남 8녀(23명)이다.
상왕으로 물러난 말년에도 후궁들을 들였다. 그 중 신순궁주는 본인이 직접 유배 보낸 이직의 차녀였다. 이에 이직은 딸을 태종에게 후궁으로 들여서 정가에 복귀하려 하는 거 아니냐며 대간들에게 비판을 들어야 했다. 이직의 장녀는 원경왕후의 남동생인 민무휼의 부인이었으니, 자기 처남댁의 동복 자매를 첩으로 들인 것이다. 신순궁주는 당시 한 번 결혼을 했던 과부였고, 같은 시기에 후궁으로 들인 혜순궁주 또한 과부였으니, 이를 통해 여성의 재가를 금기시 하지 않았던 고려시대의 문화가 아직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20]
간택후궁들도 여럿 들였지만 궁녀 출신 승은 후궁도 많았다. 특히 원경왕후의 나인 출신인 효빈 김씨와 신빈 신씨가 있다. 특히 신빈 신씨는 태종의 간택 후궁인 의빈 권씨와 함께 태종의 여인들 중 가장 총애를 받았다. 신빈 신씨는 태종의 후궁들 중 가장 다산한 후궁이었다.[21] 또한 신빈 신씨의 존재로 인해서 태종이 후궁을 여럿 들인건 외척 세력을 경계하는 뜻만은 꼭 아니라는 추측도 존재 한다. 신빈 신씨는 태종이 상왕으로 있을 때 태종을 극진히 간병하여 신녕옹주에서 궁주로 높아졌으며 원경왕후 사후에는 그녀가 내명부를 총괄하였다. 의빈 권씨 경우는 태종이 그녀를 위해 궁궐 북쪽에 누각을 짓고 누각 앞에 못을 파도록 명하기도 했고 태종이 병석에 눕자 신빈 신씨와 함께 자신을 간병하라고 명하여 의빈 권씨는 태종의 간병에 힘쓴 공으로 정1품 의빈으로 봉작되었다. 이렇듯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태종이 총애한 후궁들은 원경왕후의 궁녀였다.
이처럼 여성 편력이 심했으니 자연히 부부관계가 매우 나빴다. 즉위 초기부터 원경왕후 민씨와 피터지는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남편이란 작자가 하루가 멀다하고 젊은 여자들을 침실로 끌어들였으니. 보통의 내명부 여인이라면 참고 견뎠겠지만, 원경왕후는 조선 역사상 가장 활동력 강하고 다혈질 성향인 왕비였다.[22] 민씨는 태종에게 바가지를 긁고, 태종 역시 그에 못지않는 성격이라서 똑같이 화내다 보니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때때로 원경왕후는 태종이 총애한 궁녀들을 벌주거나 꾸짖었기도 했고 대노한 태종이 교태전 소속 궁녀들과 내관들을 모두 궐 밖으로 내친 일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궁녀들과 내관들을 내친 것이지만 원경왕후의 수족을 잘라버린 것이다.
태종은 그 이후에도 여자문제로 원경왕후와 박터지게 싸웠다. 원경왕후는 남편의 외도에 식음을 전폐하며 눈물을 쏟았지만 태종은 보란듯이 신하들에게 후궁의 법제화를 논의케 하였다. 그리고 제후는 9명의 부인을 둔다는 고사를 들며 가례색까지 설치해 9명의 후궁을 들였다. 당연히 원경왕후는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고 이후에도 마찰은 계속되었다. 그나마 마지막 배려인지 당시 태종의 첫 간택후궁이었던 의빈 권씨와의 성대한 혼인식만은 취소하고 단순히 궁궐로 들이는 것만 행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계속 후궁과 궁녀를 들였다.
유명한 예가 야사에도 자주 등장하는 효빈 김씨와 관련된 이야기다. 효빈 김씨는 본래 원경왕후의 친정에서 거느리던 노비였는데, 미모가 상당해서 태종이 그녀와 동침해 태종의 아이를 임신했다.[23] 그러자 원경왕후는 친정에 일러 김씨를 학대하게 했다. 실록의 표현에 따르면, 한겨울인 음력 12월에 만삭인 김씨를 문바깥에 방치하고,[24] 아기를 낳은 뒤에도 난방이 되지 않는 방에 방치했다. 몇몇 노비가 동정심에 이불 등을 가져다 줘서 김씨는 간신히 아기를 낳아 살릴 수 있었다.[25] 이 아기가 태종의 서장자인 경녕군 이비이다. 태종은 차마 왕비가 투기 때문에 이런 짓을 직접 저질렀다고 공표하기는 곤란해서[26], 민무휼과 민무회가 이런 학대를 멋대로 행했다고 죄를 뒤집어 씌웠다. 물론 이에 대해 원경왕후가 항의한 것은 뻔하다.
계속되는 아내와의 싸움에 태종은 침소를 경연하는 곳으로 옮겨버리고 원경왕후 대신 궐 안의 살림을 대신할 규수를 찾아보라고 명을 내린다. 내명부를 다스리는 권한을 원경왕후에게서 빼앗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다. 당연히 원경왕후는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웠고, 태종의 결정엔 절대로 간섭하지 않던 형인 상왕 정종마저 나서서 "보시게, 주상. 나는 아들이 없어도[27] 젊은 날의 정으로 사네. 그런데 주상은 아들도 많으면서 왜 또 장가를 들려 하시는가?" 하며 만류했다. 이 일은 태종이 뭘 하든 일절 간섭하지 않던 정종이 국정에 관해 발언한 유일한 사건으로서, 아무리 조용히 지낸다지만 이것만은 동생이 하는 행동이 막장으로 보였나 보다. 사실 내명부의 권한을 뺏는 건 폐비에 준하는 거라 부담이 큰 일이었을뿐더러 좋지 못한 선례가 되었을 것이다.[28] 위에도 언급하였듯이 결국 가례색까지 설치했던 후궁간택은 정종의 만류로 없던 일이 되기는 하였으나[29]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간택후궁과 승은후궁도 여럿 들이는 등 여자문제로 정처인 원경왕후의 속을 무척이나 썩였으며 나중에는 원경왕후를 폐위시킬려고 작정까지 해 이에 원경왕후는 자신을 폐위시키려 한 것에 대한 배신감에 식음전폐하며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투닥거렸음에도 불구하고
5. 자식 사랑
"
내가 젊은 시절에
아들 셋을 연이어 여의고
갑술년에
양녕을 낳았는데 그도 죽을까 두려워서 본방댁(本房宅)에 두게 했고,
병자년에
효령을 낳았는데 열흘이 채 못되어 병을 얻었으므로 홍영리(洪永理)의 집에 두게 했고,
정축년에
주상을 낳았다. 그때 내가
정도전 일파의 시기로 말미암아 형세가 용납되지 못하게 되니, 실로 남은 날이 얼마 없지 않나 생각되어 항상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런 낙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비와 더불어 서로 안아 주고 업어 주고 하여[36][37] 일찍이 무릎 위를 떠난 적이 없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자애하는 마음이 가장 두터워 다른 자식과 달랐다."
< 세종실록> 세종 1년(1419년) 2월 3일
< 세종실록> 세종 1년(1419년) 2월 3일
왕권에 위협이 되는 이들에게는 한 치의 자비도 없이 철저하게 짓밟은 반면, 태종의 자식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철혈군주로서 친인척들조차 냉혹하게 대했으나 자식에게는 관대했다. 장남은 한국사 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온갖 비행을 저지르고 다닌 희대의 양아치였음에도 끝까지 보호했고, 차남이 불교에 심취하자 본인이 불교 혐오자였음에도 취미에 간섭하지 말라며 냅두었다. 삼남은 수많은 신하 앞에서 “이 아이가 하도 총명하고 효심이 깊으니 내가 무슨 걱정이 있겠냐. 우리 아들이야말로 최고의 성군이다”라고 말하며 기특해할 정도고, 막내아들이 요절하자 대성통곡을 하며 도성 안에 그토록 싫어했던 절을 지으려고 했다.
형제들을 죽이거나 귀양보내며 권력을 쥔 사람이었기에 적어도 자기 아들 세대가 같은 일을 겪기를 바라지 않았을 수도 있고, 사적으로도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자식을 3명이나 유아기때 병마로 잃었던 아픔 때문에 살아 있는 자식에게 자상하게 대했을 수도 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훌륭한 임금이 있으면 사직(社稷)의 복(福)이 된다.’고 하였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자질(姿質)이 미약하고, 또 성질이 심히 곧아서 개좌(開坐)하는 것이 없다.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中宮)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38]. 충녕대군(忠寧大君)은 천성(天性)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봐 두려워하여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39]. 그러나, 나의 큰 책(冊)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또 치체(治體)를 알아서 매양 큰 일에 헌의(獻議)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고, 또 생각 밖에서 나왔다. 만약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적이면 신채(身彩, 몸을 꾸밈)와 언어 동작(言語動作)이 두루 예(禮)에 부합하였고,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無益)하나, 그러나, 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40]. 또 그 아들 가운데
장대(壯大)한 놈이 있다.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不可)하다[41]. 충녕대군이 대위(大位, 임금으로서의 큰 자리)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유정현 등이, “신 등이 이른바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것(택현, 擇賢)도 또한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여, 의논이 이미 정하여지자 임금이 통곡하여 흐느끼다가 목이 메었다.
<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년) 6월 3일
유정현 등이, “신 등이 이른바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것(택현, 擇賢)도 또한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여, 의논이 이미 정하여지자 임금이 통곡하여 흐느끼다가 목이 메었다.
<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년) 6월 3일
이렇듯 자신의 아들 앞에서는 매우 약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기록이 꽤 많다. 정작 애엄마인 원경왕후와는 상기했듯 외척 처분 문제와 여성 편력 문제로 박터지게 싸웠지만 아들들에게만큼은 물렀다. 특히 현대 세대의 증조할아버지 세대만 해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엄한 게 당연했던 걸 감안하면, 오늘날의 시각이 아닌 당대의 기준으로 본다면 답없는 아들바보가 맞다. 양녕대군의 수없는 망나니 짓도 끝까지 참으려고 했으며 결국 그를 폐세자시킨 후에도, 당시 사이가 매우 안 좋았던 원경왕후의 핑계를 대며 자신의 곁에 두고 가능한 보호하려고 했었다.
위의 기사는 양녕의 폐세자 이후 충녕을 새로 세자로 삼을 당시 태종의 발언인데, 양녕을 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운 나머지 목이 메도록 울 정도였다. 이후에 선조- 광해군, 인조- 소현세자, 숙종- 경종, 영조- 사도세자 관계를 감안하면 굉장히 이례적인 것.[42]
그럼에도 태종이 양녕대군을 폐세자시킨 것에서 국가의 장래를 위해 자식의 목숨을 포기하는 군주로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만 이미 자신의 결심에 따라 이미 의정부, 육부, 사간원 등 모든 부서의 관료들이 연합하여 세자를 쫒아내라고 상소한 상황이라 이를 돌이킬 수 없었을 것이다.[43] 위의 기사 전문을 보면 점을 쳐보겠다고 하거나 이내 왕비에게 의견을 구하려고까지 하는데, 태종이 양녕대군의 폐세자만큼은 굉장히 갈팡질팡하고 주저하고 있었음이 담담한 실록의 서술에서도 느껴진다.
역사의 뒷이야기를 아는 우리들은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는데, 태종이 양녕대군을 폐위한 것은 당시 기준으로 사실상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었다.[44] 왕조국가에서 한 번 후계자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것은 차기 왕에게 있어서 위험 요소 1순위이며, 만약 세종의 치세가 좋지 못하다면 거기에 반발하여 난이 일어났을 때 반란 세력이 양녕대군을 추대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명분도 혈통도 멀쩡하니 양녕대군을 구심점으로 사람이 뭉치기도 쉬울 테고 설령 다른 사람의 뜻이 없더라도 폐세자가 된 양녕대군 스스로가 앙심을 품고 반란세력의 수괴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태종과 주변 사람들이 살아왔던 여말선초 시기에 우왕, 창왕, 공양왕 그리고 1차 왕자의 난에서 희생된 이방석까지 왕의 자리에 있었거나 후계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실권을 잃거나 폐해지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봐왔을 것이다. 따라서 태종이 죽은 후 세종이 전 폐세자를 숙청하는 것이 당시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매우 당연하고 바람직한(?) 시나리오였기 때문에 태종 입장에서는 죽이겠다는 선고나 다름없었던 것. 실제로 태종은 양녕대군이 종묘사직에 해가 된다면 죽여도 좋다는 말을 아래 기록과 같이 신하들에게 남겼고, 태종 사후에는 이를 근거로 양녕대군의 비행을 처벌하라는 상소가 수 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세종은 양녕대군을 죽이지 않고 끝까지 곁에 두어 모두의 예상을 빗나가게 했다.[45][46]
(중략) 태종께서 신(臣) 숙과 병조 판서 조말생과 참판 이명덕·참의 윤회·지신사 김익정에게 명하여 같이 내정(內庭)으로 들어오게 하시고 제를 불러 간절히 꾸짖으시니,
사신들도 다 들었습니다. 그 때 말씀이 ‘양녕은 행실이 짐승과 같아서 가르쳐도 고치지 않고 드디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다만 모반한 죄는 절대로 없으므로, 가까운 곳에 두어 그 목숨을 보전하게 하고자 하였더니, 이제 또다시 오늘날의 일이 있으니 심히 부끄럽도다. 당초에 세자로 세우던 날에는 다만 적장이란 이유로써 제를 명한 것이니, 어찌 터럭만한 사의가 그 사이에 있었겠느냐. 양녕이 이미 동궁에 처하매, 행하는 바가 착하지 않으며, 불효한 것은 부모로서 차마 말할 수 없는 바이다. 이제부터는 양녕을 정부와 육조에 맡기고 나는 참예하지 않을 것이니, 만약 법을 범하는 일이 있거든 정부에서 곧 잡아 오게 하라. 나는 관계하지 않고 일체를 국가의 처치에 좇을 것이다. 나는 양녕에게 부자(父子)의 정리가 있는 때문에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나, 군신에 이르러서는 이와 다르다.
신하가
임금에게 명의를 범하면, 곧
사사(賜死)한다는 조문(條文)이 있으니, 양녕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더라도 어찌 이를 알지 못하겠느냐. 만약 그가 죄가 있다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하시고 양녕을 돌아보고 이르시기를, ‘네가 도망하여 나간 후로 나는 너의 생사를 알지 못하여 상시 눈물을 흘렸으며, 주상도 곁에 모시고 있으며 또한 눈물을 흘렸으니, 가령 네 몸이 평안하고, 여러 아우가 사고가 있다면, 네가 능히 주상의 애정과 같이 하겠느냐. ’고 간절히 꾸짖는 말씀이 대략 이와 같으셨고, 차마 그에게 죄를 더하지는 않으셨습니다.(후략)
< 세종실록> 세종 4년(1422년) 11월 14일, 대사헌 원숙이 양녕 대군을 탄핵하다
< 세종실록> 세종 4년(1422년) 11월 14일, 대사헌 원숙이 양녕 대군을 탄핵하다
폐세자된 양녕대군이 사라졌다가 돌아왔을 때 그를 꾸짖는 모습은 냉혹한 철혈군주였던 그 역시 자식에겐 다정한 아버지였음을 보여준다.
양녕이 어둘 녘에 성안에 들어와 스스로 부끄러워서 옷소매로 낯을 가리고 수강궁에 나아가니, 상왕은 보고 슬픔과 기쁨에 잠겨 순순히 훈계하며, 또 이르기를, "네가 도망했을 적에,
주상이 듣고 음식을 전폐하며 서러운 눈물이 그치지 아니했다. 너는 어찌 이 모양이냐. 너의 소행이 너무도 패악하나 나는 특히 부자의 정으로써 가련하게 여기는 것이다."고 하였다.
< 세종실록> 세종 1년(1419년) 2월 1일
< 세종실록> 세종 1년(1419년) 2월 1일
요즘 식으로 말하면 방탕한 아들 보고 '이 놈아. 네 놈이 가출했을 때, 네 동생은 밥도 안 먹고 울기만 했다.(=동생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냐.)[47] 너는 왜 이 모양이냐? 네 놈이 이렇게 막 나가도 넌 내 아들이기 때문에 항상 걱정스럽기만 하다.(=남 같았으면 백 번이고 죽였겠지만 내 아들이니까 참는다.)'라고 탄식하는 여느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모습. 그래 놓고 이 말을 한 이틀 뒤에 양녕에게 "내가 눈물을 흘린 것은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에 부끄러웠기 때문이다"라고 훈계하기도 했다.
양녕대군이 세자 시절, 기생 봉지련과 정을 통하는 게 들통나서 봉지련이 쫓겨나자 식음을 전폐한 일이 있다.[48] 만약 이 아버지가 오랑캐들의 저승사자였던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면[49] 잘못을 하고도 오히려 단식투쟁까지 해 가며 떼를 쓰는 큰아들놈을 당장 도끼자루로 복날 개 잡듯이 두들겨 팼겠지만, 아들에게 한없이 약한 태종은 봉지련도 풀어주고 비단에다 굶은 아들 밥 먹이라고 고기까지 내려가며 달래기도 했다.
태종은 1회 면피용이나 다름없던 양녕대군의 반성을 알면서도 매번 믿으려 애썼고, 세자궁을 대궐 가까이 짓고 조석으로 문안 올리게 할 정도로 양녕대군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그런 태종이었으나, 태생이 학문과는 인연이 없던 세자의 공부량이 미진하자 경연에도 참여케 하라는 신하들의 주청은 오히려 물리쳤다. 물리치면서 태종은 그러면 오히려 부자 간의 사이만 나빠진다며 끝까지 아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
실록에는 "만약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비록 한 궁궐 안에 같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어찌 하겠느냐? 또 장년(壯年)의 나이이다. 만약에 늘 사람으로 하여금 정찰하게 한다면 어찌 서로가 해침이 없겠느냐?" 라며 신하들의 청을 뿌리친다. 현대 말로 풀자면 "애가 공부가 싫다는데 내가 뭘 어쩌겠어? 그리고 다 큰 아들내미를 옆에 앉혀놓고 계속 감시하면 사이가 어떻게 되겠냐?" 정도로 볼 수 있다. 태종이 애정은 충만했으나 비뚤어지지는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 실제로 350년 뒤 비슷한 테크를 탔던 사도세자가 영조의 훈육이란 이름의 학대 속에 살인까지 저지르는 정신병 환자로 커버렸고 임오화변이라는 참사가 벌어진 것을 보면 '공부에 재능, 흥미가 없는 아들'을 다루는 아버지로서는 태종이 영조보다 한 수 위, 아니 비교 자체가 태종에게 모욕일 정도로 압도적인 우위였다고 볼 수 있다.[50]
그렇다고 양녕대군만 편애한 건 아니다. 효령대군이 불교에 심취하자 신료와 유학자들이 이를 두고 "왕자가 불교에 심취하는 건 좋지 않다."라고 하면서 토를 달자, 태종은 오히려 "그건 효령의 취미 생활인데 취미 생활도 못하게 하라는 거냐?"라고 신료들의 말을 씹고 효령대군이 원하는대로 불교에 심취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방해하지도 않았다. 숭유억불의 서막을 열었던 태종이 말이다.[51]
거기다 워낙 편식이 심했던 세종대왕이 큰아버지인 상왕 정종의 상중에 잠시 철선(왕이 수라상에서 고기를 빼는 것)[52]을 하자 "우리 주상이 철선을 하다니!"라고 기뻐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를 하기 직전 실록을 보면 세종을 세자라고 부르지 않고 "얘야(兒乎), 이제 옥새를 줄 터이니 이를 받아라"라고 부르는데, 사소해 보이지만 글자 그대로 여느 집 아버지가 아들을 살갑게 부르는 호칭을 양위라는 중차대하고 공적인 사건에서 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죽기 직전엔 '나 죽고 상 치를 땐 주상이 고기 꼭 드시게 해라'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한창 신덕왕후의 압박으로 입지가 위태로울 때 위의 세 아들은 잃고 넷째 양녕은 외가에 보내고 다섯째 효령은 다른 집에 맡기고 슬하에 남은 아들은 갓 태어난 충녕대군뿐이라 애지중지하며 길렀다고 한다. 또한 세종이 충녕대군 시절에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충녕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줘서 세종이 하고 싶은 건 다 하게 해주었다.[53]
형제들과 꽤 터울을 두고 태어난, 적자 중 막내인 성녕대군의 경우는 몸이 약한 것도 있어서 그랬는지 세자 이외의 왕자는 모두 혼인하면 궁궐을 나가서 살아야 한다는 법도를 깨고 결혼시킨 후에도 옆에서 끼고 살았다. 병약했던 이 아들이 병을 앓다가 결국 14살에 요절했을 때는 그야말로 낙심천만이었던 듯.[54] 참고로 양녕대군은 막내동생이 죽어서 부모형제가 모두 슬퍼할 때 사냥하고 놀러다니고 술을 마셔댔다.
세자(양녕대군)가 성녕(誠寧)이 죽었을 때에 궁중(宮中)에서 활쏘는 놀이를 하였다니, 동모제(同母弟)의 죽음을 당하여 부모가 애통하는 때에 하는 짓이 이와 같다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내가 변중량(卞仲良)의 심행(心行)이 부정(不正)하다고 하였으나, 아우 변계량(卞季良)의 마음가짐은 바르다고 하여, 세자 빈사(世子賓師)의 자리에 거(居)하게 하였다. 아비가 능히 자식을 가르칠 수 없으니, 스승이 어찌 능히 가르치겠는가마는, 그러나 세자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책임이 없을 수 없다.
< 태종실록> 태종 18년 5월 10일
< 태종실록> 태종 18년 5월 10일
태종도 이 일로 인내심이 바닥나서 노발대발해 양녕에게 "사람의 마음이 없다."[55]라고 했고 앙녕의 스승까지 "부모도 못 가르치는 걸 스승이 가르칠 수는 없겠지만 벌하지 않을 수도 없다."라고 책임을 물어 벌했다.
조선의 국시인 숭유억불 정책을 매우 철저하게 시행했고 심지어는 1차 왕자의 난 때 죽은 자식들과 사위를 애도하기 위해 태조가 드리는 불공에 대해서도 핀잔을 줬는데[56] 정작 성녕대군이 죽고 나서는 대자사(大慈寺)라는 절을 세웠다. 그것도 처음에는 도성 안에 절을 지으려 했다!!![57] 태종은 이 대자사를 대군의 무덤을 살피는 원찰로 삼았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여 부지와 절에 딸린 전답이 수만평이었고 그 규모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까지는 조선 최대규모였다고 할 정도. 아직도 그 사적지에는 당시 토기 파편이 어마어마하게 나온다. 죽은 성녕대군의 부인에게도 국대부인 작호를 주고 후하게 대접했다. 다른 대군부인이 부부인 작호를 받은 것과 차이가 있다.
이후에도 성녕대군의 처갓집 사람들을 보면 아들 생각이 난다면서 슬퍼했고 거처를 옮기려고 했을 때도 지나가는 길에 성녕대군의 집이 있어서 울까봐 못가겠다고 중지한 적도 있다. 외척을 하도 혐오해서 심심하면 사돈 집안을 작살내는 것을 주특기로 삼던 사람이 성녕대군의 처가인 성억 일가에 대해서만은 지극히 아껴서 죽을 때도 세종에게 성녕대군의 처갓집 사람들을 공신의 예로 대우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는데 그 덕에 세종 시절까지도 그 집안 사람들은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58] 심지어는 14살에 죽은 성녕대군이 제삿밥 못 먹을 것을 걱정해서 양자를 들여서 후사를 이으려고 시도했다. 그 당시만 해도 그런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그만 둘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 이후에 세종대왕이 당신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을 동생 성녕대군의 양자로 입적시켰다.[59]
태종은 양녕 위로 아들이 셋이 더 있었는데 모두 어린 시절에 죽어버린 기억 때문인지 자식들에게 무르게 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태종 자신이 형제들에게 칼끝을 겨누고 피바람을 불러 일으킨 왕자의 난을 일으켰기에 자기 아들들에게는 이러한 형제간의 피바람이 없기를 기원하며 이런 태도를 보여준 것일 수 있다.
특히나 양녕을 폐세자하는 데 심각한 고민을 하였다. 첫째인 양녕을 폐세자시키고 셋째를 국본으로 세우고 왕위를 잇게 한다면 필시 양녕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이니 만큼 필히 이 부분에 걱정을 했을 듯. 이 때문인지 아들 문제에 한해서는 평소 부부싸움을 벌이던 원경왕후와 뜻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원경왕후는 세자를 폐위시키고 바꾸면 자신들같은 일이 또 벌어질 거라면서 끝까지 반대했다.
태종이 세자에게 관대한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실록에는 세자에게 압박을 가하거나 질책하는 내용들도 많으며 학문에 힘쓰지 않아 세자의 주변인들에게 벌을 내린 일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11살의 세자가 공부를 잘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습을 독려하는 한편, 학업에 힘쓰지 않는 세자를 질책하고 아프다는 이유로 수업을 거르지 못하게 명을 내리기도 했다. 세자가 방탕한 행실을 보일 때는 진노하여 이를 꾸짖었고, 세자가 며칠째 단식했다는 말에도 역정을 내며 얼굴조차 보지 않았다. 영조 만큼은 아니지만, 태종은 세자에게 가혹한 처사를 내린 적도 있고 잘못을 저지른 세자를 크게 질책하는 일도 많았다. 따라서 태종이 항상 세자를 무르게 대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자식들에게 극진했던 것 때문이었는지 이후 세종은 국가 정책을 결정할 때도 태종 시기의 예를 들고 아버지께선 이랬을 것인가 하는 대목도 많이 보이고, 실록이 완성되었을 때는 실록을 보고 싶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희한하게도 더 선대인 태조가 아니라 무려 2번이나 태종실록을 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둘 다 주변의 반대로 보는 것을 단념하게 되긴 하지만. 이는 정치적인 선례를 참고하려는 공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화기애애했던 부자관계를 생각해보면 사적으로는 아빠와 함께 했던 일들이 적힌 기록들을 보고 추억할 목적으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오죽하면 두 번째 시도 이후 이틀만에 갑자기 태종이 태조실록을 본 적이 있는지를 주변에 묻고 없다고 하니 그냥 넘어갔는데, 아무래도 선례가 있으면 자신도 태종실록을 볼 수 있는 명분이 생기기 때문으로 여겼거나 그냥 보고싶은 미련이 남아 한 말인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은 연산군의 사례와 함께 실록을 왕이 보는 것은 윤리적으로 어긋난다는 선례로 남게되어, (물론 후자는 반면교사) 조선왕조실록 편찬이 왕권으로부터 보호받게 된다.
딸 바보 면도 있는데, 자신의 후궁 중 가장 총애한 신빈 신씨의 소생 정신옹주를 시집 보내려고 했을 때, 점쟁이한테 '사주 좋은 미혼남'을 알아보라고 했는데 이속이라는 자가 '내 아들을 몸종의 딸에게 장가 보낼 순 없다. 내 아들은 죽었다. 그러나 상대가 정혜옹주(貞惠翁主)라면 살아있을 수도 있다.'라는 망언을 하며 쫓아내자 당연히 태종은 극 대노해[60] 이속에게 곤장 100대 + 전재산 몰수 및 노비로 강등 + 아들에게 금혼령을 때리고 그후 간택제도가 생기게 했다.
6. 부엉이 공포증
의외로 부엉이를 몹시 싫어하고 심지어는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사실 부엉이란 새 자체가 야행성인데다 우는 소리마저 섬뜩한 면이 있는지라[61] 사람에 따라 무서워하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긴 하지만, 형제들에 처갓집에 사돈집까지 비정하다 못해 잔인하게 엎어버린 호랑이 임금님 태종이 고작 작은 동물인 부엉이를 무서워했다는 게 아이러니한지라 후세 사람들에게 소소한 재밋거리가 되는 것이다.태종 6년 8월 5일에 부엉이가 경복궁의 누각과 침전에서 울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며칠 뒤인 8월 13일에는 부엉이가 경복궁 근정전에서 울었고, 그 다음날인 8월 14일에는 경복궁 침전에서 울었으며 그 다음날인 8월 15일에는 침전과 근정전에서 울었다고 실록에 기록되었다. 8월 18일에는 창덕궁 서쪽 액정에서, 8월 19일에는 전농시의 제기고에서 부엉이가 울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연달아 부엉이가 나타나자 태종은 대단히 불안해했는데 9월 1일에 양녕대군에게 양위할 뜻을 내비쳐서 파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양위 소동은 태종의 술수이기도 했으나 어쨌든 부엉이 때문에 신경이 거슬렸던 것 같다. 부엉이 때문에 성밖으로 이어[62]하려고 하자 대간에서 상소를 올려서 이를 반대했는데 태종은 이 상소에 대해서 이런 비답을 내렸다.
“몸을 삼가고 행실을 닦는 것이 비록 고론(高論)은 되지만, 내가 옛글을 보았더니 이어(移御)하였다는 글도 없지 않았다. 오늘날 야조(野鳥)가 집으로 들어오고, 또 지붕 위에서 우니, 술자(術者)가 말하기를, ‘다른 곳으로 피하여야 합니다.’ 하고, 또 근일에 태백성(太白星)[63]이 대낮에 나타나고, 다시 헌원성(軒轅星)을[64] 범(犯)하게 되어, 내 마지못해 이렇게 하는 것이니, 그대들은 많은 말을 하지 말라.”
이어를 논할 정도로 부엉이가 파문을 일으킨 가운데 9월 3일에도 부엉이가 근정전에서 울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부엉이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 된 태종은 여기저기로 이어를 하기도 하고 궁궐 수비대에게 잡귀를 쫓는 방상씨탈을 쓰고 경계 근무를 서게 했는가 하면 부엉이를 쫓으려고 한밤중에 궁 전체에 불을 환하게 밝히도록 명했을 정도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엉이는 불길한 새로 여겨지긴 했지만 태종의 반응은 거의 노이로제 수준인데, 세간에서는 이를 두고 태종이 신덕왕후 강씨의 원혼이 부엉이로 나타났다고 여겨서 부엉이를 질색하고 무서워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고 한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부엉이를 밀본의 수장 정도전의 환생으로 여겨 태종이 질색했다고 묘사되었다. 정도전이 태종의 최대 걸림돌로 나왔기 때문에 이를 부각시키는 극중 장치로 보인다. 동시에 밀본의 조직원이 암살을 행할때 부엉이 울음소리가 나오는 피리를 썼다.
7. 약자에 대한 관대함
외척이나 공신들을 냉정하게 때려잡던 모습과는 달리,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무척이나 관대한 모습을 꽤 많이 보였다. 왕권에 위협이 될 자들만 숙청하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관대했는데, 홍무제보다 훨씬 백성들에게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65]- 왕에서 물러나 상왕이 된 태종이 장미라는 궁녀를 불러 안마를 시켰는데, 시원찮았는지 '제대로 하라'고 타박을 하고는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러다 다리에 느껴지는 통증에 화들짝 놀라 잠이 깼는데, 장미가 태종의 다리를 있는 힘껏 내려치고 있었다. 태종이 왜 그랬냐고 물으니 장미는 백배 사죄하기는커녕 말을 하지 않고, 보다못해 아내인 대비 원경왕후가 나서서 "원... 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그런 거니?"라고 타일러서야 '아까 혼을 들은 게 화가 나 그랬다'고 말해버렸다. 법도대로라면 왕을 구타한 것이니 중벌에 처해야겠지만, 태종은 장미를 쫓아냈을 뿐 따로 처벌하지는 않고 그냥 넘어갔다. 헌데 문제는 이 사건에서 2년 후, 궁의 기강이 무너지는 사고[66]가 연이어 일어나 내명부와 외명부 담당자들이 "보통 사건이 아닌데요? 연속해서 궁 내 기강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라고 보고를 하고 결정타로 며느리 소헌왕후의 시녀 소비가 연이어 말썽을 부리는 일[67]을 보고받고 기가 차서 웃으며 "허허... 이거 참... 워낙에 내가 사람을 여럿 보내긴 했어도 직급이 낮은 애들은 그나마 봐 주었건만.. 그렇다 치더라도 궁내 기강은 바로 잡아야하니, 가장 말썽이 심한 둘인 장미와 소비는 잡아서 물에 넣든, 목을 자르든, 알아서 하고 나머지는 엄히 훈계를 내리도록 해라."라고 살벌하게 입을 연다. 이후 소비는 실록에 나오지 않지만 정황상 사건의 책임을 물어 비밀스레 사형에 처해진 듯. 장미는 해당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었다보니 또 살아남았으나 태종 사후에도 사고를 치는것을 멈추지 않다가 1444년 간통 사건에 연루되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 열 살 먹은 아이들이 혜정교 거리에서 공에다 주상(=태종), 효령대군, 충녕대군 등의 이름을 붙이고 차면서 놀다 잡혀온 일이 있었다. 놀다가 효령대군이라고 적힌 공이 물에 빠지자 '큰일 났다! 효령이 빠졌어!'하고 떠들어댔는데, 이를 효령대군의 유모가 우연히 듣게 된 것. 유모는 기겁해 아이들을 몽땅 잡아다가 효령대군의 장인 정역에게 고했고, 정역은 형조에 아이들을 가두고 이를 고했다. 일반인 이름 가지고 저래도 욕을 한 바가지 먹을 일인데, 저 시절은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기 위해 피휘도 하던 시절이었고, 특히 혜정교는 오늘날 광화문 교보문고가 있는 자리니까 궁궐 코앞에서 이런 놀이를 한 것이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갓 건국된 조선 왕조 입장에서는 어린애들이고 나발이고 풍비박산을 냈어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태종은 웃으며 "애들이 뭘 알고 그랬겠냐? 요사한 말을 처벌하는 법도는 요런 데 적용하는 거 아니다."라고 직접 사태를 무마했다. 태종은 정역이 올린 서류는 불태워버리고, 다시는 이 일을 논하지 말라고 어명을 내려 뒷말이 나올 여지조차 싹 차단해버렸다. 태종 25권, 13년(1413년 계사 / 명 영락(永樂) 11년) 2월 30일(기묘) 1번째 기사
- '조서'[68]라는 관리가 친구를 궐에 데려와 숙직실에서 같이 잔 일이 있는데, 친구가 아침에 나가려다 길을 잃고 헤매던 중에 왕의 침전에 들어가 버렸다. 나라에 망조가 들어서 권신의 패악질이 끝장을 달리는 상황이라도 높은 벼슬아치라고 해도 국왕의 침전으로 무턱대고 들어가는 일은 있을 수 없는데[69] 하필 잡상인이 임금이 거하는 궁을 멋대로 돌아다니는 것도 모자라 침전까지 아무 제지없이 프리패스로 침범한 대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 잡상인이 자객이었다면 태종이 시해됐을 수도 있으니 당연히 궁인들도 식겁했고, 이 사람도 크게 당황하여 '나가려고 했을 뿐입니다'고 변명했는데, 법대로라면 조서 본인은 물론이고 당일 내시부 및 내금위 근무자들까지 모조리 때려죽여야 했겠지만 태종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니 괜찮다'라고 하고, '남들이 알면 법대로 처벌하자고 할테니 이 일은 알리지 말고, 넌 빨리 가라.' 하며 신속히 내보냈다. #
- 시골에서 상경한 '손귀생'이라는 사람이 창덕궁을 봤는데, 난생 처음 보는 건물에 감탄하여 멋도 모르고 들어와 돌아다니며 구경하다 광연루에서 붙잡혔다. 순금사에서는 곤장 80대를 선고했는데, 곤장 최고형인 100대가 일반 백성에게 사실상 사형선고임을 감안하면 80대는 후유증으로 죽거나 불구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중형이었다. 허나 태종은 모르고 한 일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며 그냥 방면했다. 태종 17권, 9년(1409년 기축 / 명 영락(永樂) 7년) 4월 18일(경인) 2번째 기사 여담으로 이 때 태종이 앞서 있었던 조서 친구의 이야기를 직접 하면서 사면의 근거로 제시했다.
- 1403년 5월 5일에 경상도 조운선(물길을 통해 조세를 한양으로 운반하는 배)이 무려 34척이나 침몰해 사람이 많이 죽는 사태가 발생했다( 해당 실록 기사). 실록을 보면 사망자가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고 신하들이 천여 명이라고 말하고 있는 걸 보면 엄청난 대형 참사였다.[70] 이때 생존자 한 명이 도망가다가 붙잡혔는데, 머리를 깎고 이 조운을 운반하는 힘든 일에서 벗어나려고 했다는 말을 했다. 이를 듣고 태종은 책임은 내게 있다(責乃在予). "쌀은 아까울 것이 없지만 사람 죽은 것이 대단히 불쌍하구나. 그 부모와 처자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라고 탄식하면서 조운하는 작업이 힘들어서 도망치는 사람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 신하가 "그렇다고 조세를 육로로 옮기면 어려움이 심합니다."[71] 역사적으로 육로 교통이 라고 발언하자 태종은 "육로로 운반하면 소나 말이 수고를 할 뿐이지, 적어도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이 일은 세월호 참사 이후 이어지는 2016년의 정국을 비판하는 JTBC 뉴스룸의 앵커 브리핑에 인용되기도 했다.
8. 외척 탄압
태종의 재위 중과 후의 행보에서 특기할 점 중 하나는 외척 탄압이다. 앞서 본 관대한 면모들이 무색해보일 정도로 외척에게는 유독 혹독했는데, 공신들도 숙청했다지만 기본적으로 권력에서 실각시키는 선에 그치지 이무를 제외하면 죽인 공신은 없으며 그 이무도 외척과 얽혀서 죽은거다.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 민씨는 아버지 민제와 네 명의 남동생들을 두고 있었는데 민제는 권문세족 출신이었기에 세력이 컸기에 즉위 과정에서 태종은 당연히 민씨가의 힘을 많이 받았다. 원경왕후도 태종을 적극 지원하였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왕이 된 이후인데 왕이 되자마자 태종은 조강지처를 냉대하기 시작했고 민제는 돌아가는 기류를 읽었는지 사직하고 물러났다. 그런데 공부와 이현이라는 자가 민제를 찾아와 명나라 공주와 세자를 결혼시키자는 주장을 했는데, 민제가 신중하게 행동해서 관여하는 걸 거절하긴 했지만[72] 애초에 민제를 찾아온 것부터가 민제가 물러났어도 그 힘이 어느정도인지 알려주는 예시였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후부터 태종은 외척을 탄압해 처음에는 이화의 상소를 빌미삼아 처남 둘을 왕자들을 죽이려 했다며 유배보내더니 결국 죽여버리고 남은 처남 둘마저도 사소한 사건을 빌미로 죽였다. 그런데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세종이 즉위한 다음에는 세종의 외척도 때려잡아 강상인의 주장에 동의했다는 이유로 세종의 장인으로 본인의 바깥사돈이자 국구인 심온을 사사하고 심온의 가족들을 노비로 삼았다. 심온의 가족들은 태종 사후에야 풀려났고 심온은 문종 때 사면된다. 그나마 태종의 외척들 중에서 아무런 화를 입지 않고 무사히 넘어간 집안은 양녕이 폐세자가 되면서 멸문지화를 면한 장인 김한로,[73] 평생을 수도승처럼 살다간 효령, 일찍 요절한 성녕대군의 처가 정도 밖에 없다.9. 조사의의 난 관련
태종 이방원이 권력을 잡기 위해 어린 동생들을 죽이고, 형과 싸웠는데 천하의 이성계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태종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상왕의 신분으로 전국 곳곳을 떠돌아다니던 이성계는 본래 자신의 토착적 기반이었던 함흥 지역에서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킨다. 실록에는 ' 조사의의 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조사의라는 사람은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라고 하며, 봉기의 명분도 신덕왕후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신덕왕후 강씨가 개경의 권문 출신으로 함흥에는 그냥 가볼 일도 거의 없었을 것임을 생각하면 조사의의 난의 실제 주동자는 이성계였을 가능성이 크다. 초기의 조사의의 난은 정치적 명분에 힘을 실어주는 태상왕의 존재 + 강력한 함흥의 군세를 바탕으로 꽤나 맹위를 떨쳤다. 결국 태종은 한양 수비를 신하들에게 맡기고 친아버지를 상대로 친정(親征)에 나서는 조선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막장 행각을 벌인다. 그리고 이 전투는 조선 국왕이 '친정'한 마지막 전투이기도 하다. 이후에는 국왕이 직접 전장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이성계는 조선 왕조의 개창자이기 이전에 평생동안 출전한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었던 불패의 명장이었으나, 이때 아들 이방원과 벌인 부자간의 전투에서만은 이기지 못했다. 이 전투에서의 패배는 아마 이성계의 삶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임과 동시에, 가장 쓰라린 패배였을 것이다. 물론 태조든 태종이든 부자간의 싸움에서 누가 이겼더라도 뒷맛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이성계는 사실상 지지를 잃고 아들에게 투항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동정 여론도 알아서 거둬졌다. 그래도 태종이 아버지를 강제로 끌고오는 건 차마 할 수 없어서 계속 설득을 하고, 이성계는 체면상 안 가겠다고 좀 거부해 보는데, 이때를 배경으로 해서 나온 이야기가 바로 함흥차사다. 형제, 사위, 동지들까지 다 죽여버린 후레자식 같은 아들 놈에게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덤볐다가 그나마도 패배하고, 허수아비 같은 처량한 신세였던 이성계가 함흥차사 이야기에서는 절대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포지션인 것이 흥미롭다.
10. 왕씨 보호
당시 왕씨의 후손 한 명이 체포되었는데 신하들은 당연히 그를 죽여야 한다고 나섰다. 이때 태종이 "역사책을 살펴보니 역성혁명을 하고서도 전조(前朝)의 후손들을 완전히 멸망시킨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것은 임금의 도리가 아니다. 앞으로 나는 왕씨의 후예를 보전하겠다."라고 말했다. 신하들이 반대했으나 이에 태종은 "이씨가 도(道)가 있으면 백 명의 왕씨가 있다 하더라도 무얼 걱정하겠는가? 그렇지 않고 이씨가 도를 잃으면 왕씨가 아니라도 천명(天命)을 받아 일어나는 자가 없겠는가?"라고 하며 그를 살려주었다. 이후 태종은 "예전에 태조가 왕씨를 제거한 것은 실은 태조의 본의가 아니었다"라는 말로 아버지와의 의견 충돌을 무마한다. 태종실록 13년 11월 26일자 기사사실 즉위 전 왕씨 제거를 함께 주장했다가 즉위 후 신하들이 우겨서 죽인 거라고 말을 바꾼 거라 보호라고 하기도 뭐하다. 태조 대에도 유력 왕씨들만 죽이고 나머지는 왕씨에서 성씨를 바꾸면 관용을 베풀었다. 당시에도 죽이지 않았으니 자기 대에서 죽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고 괜한 분란을 만들 필요가 없던 것이다.
이후에도 왕씨의 후손을 주살하라는 대신들의 청이 있었는데 태종은 "혁명(革命)한 뒤에도 오히려 전대의 후예(後裔)가 살아 있을까봐 두려워하여 모조리 죽여서 유종(遺種)을 없애는 것은, 용렬한 군주(君主)가 하는 짓이다. 내가 어찌 차마 하겠는가? 경 등은 나의 아름다운 뜻을 따르려 하지 않고 어찌 이처럼 번거롭게 구는가? 왕씨(王氏)의 유종(遺種)은 죄가 없는데 죽이는 것은 내 마음으로는 불가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미 결정되었으니 다시 진언(進言)하지 말라"라고 명했다. 다만 태종이 즉위한 것은 1400년이고 이러한 조치를 내린 것은 즉위 기간의 절반을 넘긴 1413년이었다. 태종실록 13년 12월 1일자 기사 또한 이후로도 왕씨 탄압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문종 대에 이르러서야 상당히 완화됐다. 비록 멸망시킨 전 왕조이지만 제사를 지내줘야 했는데, 얼마나 싹을 없앴는지 고려 왕실 제사를 지낼 후손을 찾기 어려웠다. 마침내 찾아낸 이가 바로 왕우지이다. 그래서 평소 왕우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이 "쟤 왕씨래요."라고 고발했는데, 나라에선 오히려 왕우지에게 벼슬도 주고, 의전상 예우까지 받게 했다. 다만 왕씨에 대한 탄압이 완화됐다지만 너무 오버하다 죽은 경우도 있었다. 문종 이후에도 박응상(朴應商)이라는 자가 원래 성씨는 왕씨인데 모계 성씨를 따랐다며 왕씨로 환원을 청했다가 사형을 당하였다.
[1]
태종이 과거에 급제했던 여말시기에는 공민왕의 정책으로
조준,
정도전,
정몽주 같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성균관에서 배출되던 시기였다. 고려는 이전
무신정변이 일어날 정도로 문신과 무신에 대한 차별이 심했고, 이성계도 변방의 무인 가문 출신이였으니 하물며 과거시험이 중요시되던 이런 시기 이방원의 과거 급제는 개인뿐만 아니라 가문 전체의 영광이였고(나이가 기록된 사람 중 최연소 급제), 이성계가 이방원의 최연소 과거급제 홍패가 왔을 때 감격하여 사람을 시켜 관교(官敎) 즉 임명장을 두세번 반복해서 읽게 했을 만큼 가문의 격을 높여주는 일이였다. 다만 과거급제로 인하여 재상지종(宰相之宗) 명문가였던
여흥 민씨와 혼인을 했던 것은 아니고, 과거급제 이전에 이미 여흥 민씨와 혼인을 했다.
[2]
이 때는 임진왜란을 거치며 선조의 권위가 실추된 상황이었기에 선조가 광해군의 심기를 살피는 경우도 있었다
[3]
이 인간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라 진짜 세자 괴롭힐려고(…) 저지른 짓이었던지라 사도세자의 몸상태가 개판이었는데도 굳이 이런 쇼를 해서 사도세자는 아파 죽겠는데 겨울에 차가운 돌바닥에 엎드려서 아니되옵니다를 외치는가 하면, 시도때도 없는 선위 쇼에 멘탈이 깨져 울다가 기절하는 등 온갖 막장이 벌어졌다(…)
[4]
이때도 신하들이 당연히 반대를 외쳤는데, 그러자 아예 충녕대군에게 군주의 복장인 용포를 입혀 '이번엔 진짜다.' 라는 의미를 전달했다. 태종 의도대로 그걸 본 신하들은 더 이상 반대없이 따랐다. 군주가 바뀐 게 확실해진 이상, 이젠 말리는 게 불충이 되니…
[5]
1383년 17살의 나이로 문과 10등 급제.
[6]
유교에서 가장 칭송받는 왕
[7]
안먹으려는 세종에게 같이 식사하게 하였다고 한다.
[8]
한마디로 "좌의정은 말 하나는 남 비위 맞춰주는 데 선수야". 세종실록의 1422년 5월 9일 박은의 졸기.
[9]
만수무강에 들어가는 글자들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수이강 사건'이라 하여 송시열의 인성질(...) 사건의 글자이기도 하다.(수이강)
[10]
여기서 송감은 중국 송나라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책으로, 중국의 기본 역사서들인 '흠정
이십사사' 에는 들어가 있지 않지만(송나라 때의 역사서로는 <
송사>가 들어간다) 왕이 서연에서 공부해야 하는 역사서 가운데 하나다.
[11]
한양은 2길 1흉, 개성은 1길 2흉, 무악은 1길 2흉의 점괘가 나왔다.
[12]
종묘는 조상들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즉 종묘에서 점을 친다는 것은 조상들의 뜻을 묻겠다는 것이므로 한양이 나왔을 때 반대론이 나오면 왕실의 권위를 내세워 뭉개버릴 수 있다.
[13]
종묘에 참배.
[14]
사냥이 필수이자 생존인 국가라면 모를까 조선처럼 농경 국가라면 군주의 사냥은 국고를 소진하는 것이다.
[15]
참고로 저 당시 실록을 기록하던 사람이 바로 민인생. 근데 이 사람은 거의
스토커 수준이라서 태종이 측근들만 데리러 갔을 때는 몰래 일행인 척 하면서 따라가질 않나, 한 번은 태종이 내려가다가 다리를 헛딛은 적이 있었는데 누가 보지 않았나하고 안심했지만 민인생은 왕궁의 돌다리 아래에서 다 지켜보고 있어 적어놓았고, 태종이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뭔가 인기척이 있어서 놀라 병풍을 치우니 민인생이 숨어있질 않나... 태종 입장에서는 거의 공포 그 자체였다. 참다못해 한 번은 호되게 호통친 적이 있었으나 민인생이 그 대화 자체도 적겠다고 하자 꼬리를 내렸지만, 나중에 보복으로 사관에서 자르고 귀양보낸다. 압권인 것은 민인생은 귀양명을 받은 와중에도 마지막으로 사초를 쓰게 해달라 하여 '7월 11일, 임금께서 사관 민인생을 귀양보내시다.'라고 기어코 기록을 남겼다. 이 이야기는
조선왕조실톡 51화, 책 <조선 백성을 사랑한 바른말쟁이들>(제목을 보면 감이 오겠지만 아동서다) 등에도 실려있다.
[16]
태종이 아니라 정종실록의 기사이기는 한데, 이 해 11월에 태종이 즉위했기 때문에 이 기사에서 가리키는 중궁은
원경왕후가 맞다. 조선 초에는 새 임금이 즉위한 해 12월 기록까지 선왕의 실록에 포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더불어 이 이야기는
용의 눈물에도 묘사되어 있는데, 태종이 경연청에서 이부자리를 펼치면서 친구이자
지신사였던 박석명과 이야기를 나눈다.
[17]
김우는 2차 왕자의 난 때 활약한 공신이라 벌주지 않았다. 황상도 공신의 아들이라 그런지 몰라도 곧 복직했다.
[18]
혜선옹주 홍씨로, 기명 가희아(可喜兒). 드라마
하녀들에서
이채영이 연기한 인물이다.
[19]
다만 이 사건은 좀 복잡한 사건인데 일단 김우와 황상이 다투던 기생은 궁궐 행사에 불려다니는 기생이었으며 황상의 첩이었으며 이전에는 김우와 정을 통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문제는 궁궐 행사에 불려다니는 사람인 만큼 멋대로 첩으로 삼거나 하는 것은 안 되는 행위였다는 것. 폭력사태의 피해자임에도 황상이 처벌당한 이유도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
근데 정작 본인이 남편 잃은 과부의 재가를 금지시키는 재가금지법을 만들었다. 이는 후대에
경국대전에 그대로 실려나온다.
[21]
슬하에 2남 7녀를 두었다
[22]
실제로
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은 안 돌아오고 이방원의 말만 집으로 찾아오자,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생각해서 직접 창을 들고 나가 싸우겠다며 달려나가려 한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한반도 역사상 현재의 대한민국 다음으로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권력이 동등했고 망국 시기까지 외척과 박터지게 싸웠던 고려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라서인지는 몰라도 굉장히 호전적인 성향이었다.
[23]
서모인
신덕왕후가 살아있을 때, 태종이 신덕왕후의 여종과 정을 통했다고도 하니 말 다했다. 다만 이때는
원경왕후도 시계모인 신덕왕후가 싫어서인지, 신덕왕후의 앞에서는 이 여종을 자신이 혼내주겠다고 해놓고, 뒤에서는 몰래 칭찬해주긴 했다.
[24]
말이 12월이지 이게 음력이다. 양력으로는 그야말로 한겨울인 1월이라는 것인데, 이런 행위는 "얼어 죽어라!" 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25]
...라지만 이 일은 태종이 일방적으로 밝힌 거라...
[26]
투기, 즉 질투는 당시 사회에서 해서는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였다.
[27]
정실부인
정안왕후 김씨 소생의 적자가 없다는 의미. 서자는 여럿 있었다.
[28]
더하여 후계구도도 막장이 된다. 원경왕후를 폐하다시피하고 새 마누라를 들이면 원경왕후의 자손과 새 마누라의 자손이 왕위다툼을 하게 된다. 이런 상황은 이미 왕자의 난에서 겪은 바 있으니 정종 입장에서는 형제끼리 피 흘리는 일이 자기 대로 끝나지 않고 후손까지 이어지는 꼴이니 가만 두고볼 수가 없는 일.
[29]
그러나 한번 뜻을 정하면 신하들에게 각종 심술을 부려서라도 제 뜻을 관철시키던 태종인지라 의례만 간소화한 거지 결국 의빈 권씨를 들이긴 들였다(...).
[30]
태종실록 12년 6월 "중궁이 해산했고 약 덕분에 난산을 하지 않았다"며 의원들에게 각각 쌀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이때
원경왕후의 나이는 무려 47세(...), 본인 나이도 45세였다. 두 사람 모두 불혹의 나이와 이미 갈등할대로 갈등한 관계임에도 할거는 다 한 사이라는 것.엄청 싸우고 사이 안좋았어도 그 순간만큼은 본처가 그리웠나보다.
[31]
태종의 적자 4남 중 막내인
성녕대군은 태종이 즉위한 후에 태어났다.
[32]
원래
왕자든
공주든 결혼하면 궐 밖으로 나가야 한다. 특히나 신분에 상관없이 왕세자가 아닌 왕자는 10살 이상이 되면 궐 밖에 나가는 게 법도였다. 물론 궐 밖에 나간다고 맘대로 활동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33]
양녕대군과
충녕대군의 태종과의 일화를 보면 얼마나 태종이 아들바보였는지 알 수 있다.
[34]
원문에는 則吾當尊信之, '(불)법을 마땅히 존중하고 믿을 것이다.' 정도로 되어있다.
[35]
이 때문에 겁먹은 승려들 중에서는 이미와 팔뚝을 지져대며 필사적으로 기도하는 자도 있었다. 이들에게는 천만다행히도 병이 조금 나아 태종이 기뻐하며 회암사에 땅 1백결과 쌀 2백석을 하사하고 기도한 승려들에게도 차등에 따라 시주하였다 한다.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 5월 6일자 기사
[36]
이 부분의 한문 원문을 보면 누구를 '안아주고 업어주고' 했다는 건지
목적어가 없는데, 국역본에는 양녕이라고 의역되어 있다. 그러나 앞뒤 문맥으로 보면 양녕보다는 오히려
충녕대군을 두고 한 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신명호. 왕을 위한 변명. 경기도: 김영사, 2009. 참고) 앞 문장을 읽어보면 양녕과 효령은 낳고 나서 여러 이유로 다른 집에서 키우게 했고, 세종만 자신들이 직접 키웠다는 내용이다. 그러니 당연히 안아주고 업어주고 자애하는 마음이 가장 두텁다고 한 것은 세종을 뜻하는 것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37]
2022년 9월 7일 현재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서는 "주상" 으로 올바르게 변경되었다. 그러나 아직
한국고전종합DB에서는 반영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024년 7월 4일 기준 현재는 한국고전종합DB 에서도 주상 으로 변경되었다.
[38]
자기 의견을 개진하거나 표현하는 능력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성격은 신하들에게 휘둘릴 가능성이 커서, 태종은 왕이 될 자질이 효령에겐 없음을 밝힌 것이다.
[39]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책벌레였다. 심지어 병상에서조차 책을 읽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보다 못해 아버지였던 태종이 처소의 모든 책을 압수해 오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충녕대군은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은 책을 가져다가 그것을 다 떨어질 때까지 읽으며 충족하였다는 일화까지 있으니...
[40]
이를 토대로 볼 때, 세종은 애주가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보면 사교적인 성격을 가진 술자리에는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41]
위에서 언급한대로 하다 못해 외교사절을 접대함에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한 목적으로도 필요한 것이 음주인데 효령은 금주가여서 이에 대한 문제가 있을 것을 언급했던 것.
[42]
보면 알겠지만 아버지가 속 좁고 권력욕 많은 양반이거나, 감정기복 심한 성격이거나, 자기 자신도 강박증이 있어 아들이 샌드백 처지가 된 사례들. 특히
마지막은 학대당하다 못해 정신질환(당대의 기록을 분석한 현대의 연구자들도 '없는 정신질환을 지어낸 기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할 정도다)까지 와 버린 경우다. 그래도 사도세자는 자기 아들이 왕위에 오른 덕분에 사후 추존이라도 됐지, 앞의 세 사례는 강력한 왕위 계승
라
이
벌까지 존재한데다 여기에
권력을
원하는
권신들
까지 가세해 고생했다.
[43]
그나마 사간원 측은 세자가 죄를 뉘우치면 복위시키라는 여지를 남기긴 했다. 하지만 폐세자와 동시에 충녕이 세자가 되는 것이 태종과 신하들 사이에서도 당연시되는 것으로 보아 단지 태종을 배려한 표현이었을 듯하다.
[44]
양녕대군 스스로도 예로부터 나 같은 처지에 빠지고 살아남은 경우가 없다고 한탄했다. 이에 양녕의 신하가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전하께서
회안군의 예를 말씀하시며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라고 반론한다. 바꾸어 생각하면
회안군 이외에는 왕족이나 왕이 폐서인됐을 때 목숨을 건진 경우가 없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45]
아이러니하게도 양녕대군은 세종의 배려를 받아 죽지 않고 살았음에도, 세종의 손자이자 자신에게는 조카손자인
단종을 죽이는데 일조하여 모두의 예상을 다시 한번 빗나가게 한다.
[46]
다만 어차피 세조도 세종의 아들인 만큼 세종을 배신했다기보다는 당시 황표정치를 펼치던
황보인과
김종서 등을 왕을 능멸하는 놈들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47]
그러나 양녕이 가출했다 돌아온 바로 그 달에 세종과 사냥을 나가면서 '진작에 노는 데 엉아도 좀 끼워주고 그랬으면, 이 엉아가 가출을 왜 했겠냐?' 라고 농담이나 해댄 것을 보면 딱히 부끄럽지 않았던 듯하다...
세종 1년 2월 28일 기사
[48]
이때 양녕대군은 "아버지도 첩실 여럿 들이고 재미 보시면서 왜 저한테만 뭐라 그러세요?"라는 취지의 편지를 써서 태종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49]
그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화해하기 전
무력 봉기를 일으킬 만큼 한성깔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50]
그리고 사도세자는 지속적인 학대로 정신이 망가지는 바람에 폭력성을 자제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어버려서 그렇지, 어릴 적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만 해도 양녕대군보다는 공부를 열심히 한 편이었다. 영조가 그런 사도를 가혹하게 몰아붙이기 시작하면서 사도는 점점 공부를 싫어하고 두려워하게 돼버린 것인데, 태종이 아버지였다면 차라리 총명하다 칭찬하고 귀애하며 잘 구슬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51]
사실 효령대군이 불교에 심취한건 태종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나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본인이 왕이 되기 위해 살벌한 골육상쟁을 벌여 봤으니, 자식 사랑 극진한 태종으로서는 자기 자식들만큼은 제발 이런 일 없었으면 했을 법하다. 그런 아버지 마음도 모르고 세자인 첫째는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며 제 입지를 사서 좁히고 있는데, 첫째 놈의 가장 유력한 라이벌이 될 수 있는 둘째는 공부나 무예로 야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덕질에만 푹 빠져 있는 것. 효령대군이 세자 다음으로 서열이 높기야 하다지만, 유교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에서 불교에 심취한 왕자를 옹립하려 하는 건 정치적으로 부담이 꽤 클 테니 효령의 이런 행보는 의도했든 아니든 역모나 숙청 등 정치적 파란에서 한 발짝 멀어질 기회가 된다. 그러니 태종 입장에선 개인적으로 또 정치적으로는 불교를 배척한다 하더라도, 효령대군이 불교에 빠져 있는 것에는 내심 안심했을 가능성도 있다.
[52]
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것은 감선이라 한다. 철선과 감선은 국상 기간, 혹은 나라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했다.
[53]
하지만 양녕이 세자였던 시절에는 충녕에게 공부하지 말고 좀 놀라고 책을 다 치우고 당대의 온갖 놀잇거리를 지원해준 적도 있었다. 이것도 생각해보면 태종의 자식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부분으로, 만약 양녕이 왕이 된다면 똑똑하고 유능한 충녕은 견제 대상이 되어 어려움을 겪을 것이 분명했다. 앞에서 나온 효령대군처럼 이미 자기가 파는 분야라도 있으면 원하는 대로 놀게 팍팍 밀어줄 텐데, 충녕은 아예 공부를 놀이로 생각하는 유형이니 제발 딴 것 좀 하고 놀라면서 권유에 권유를 한 것. 물론 충녕이 그 와중에도 기어코 숨겨둔 마지막 남은 책 한 권을 다 끊어져라 읽으면서 놀았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54]
한동안 수라를 들지 않았다 하며 고기반찬을 무려 35일이나 먹지 않았다. 왕이 한끼만 안 먹어도 신하들이 기겁하는 시대이고 고기반찬도 저렇게나 안 먹기 전에 제발 먹으라고 사정사정하는 시대인데 이렇게나 안 먹은건 그만큼 슬픔이 컸다는 반증이다. 단적으로 실록에 연산군이 생모(폐비 윤씨)의 죽음에 대해 알았을 때에 그날 저녁에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헌데 태종의 경우 기록상 최소한 성녕대군이 위독할 때부터 수라를 들지 않았으며 많이 잡으면 성녕대군이 죽고도 닷새 뒤에야 다시 수라를 들었다. 거기다 그러고도 무려 한달이 지나서야 다시 고기반찬을 들었다.
[55]
즉, "니가 그러고도 사람새끼냐?" 라는 뜻
[56]
예외적으로 태조가 중병에 걸렸을 때는 불사를 일으키고 기도를 올리면서 팔뚝을 지지기
모습까지 하긴 했지만 실록에 몸소 향을 피우고 팔뚝을 지졌다고 나온다. 즉 자기가 직접 향도 피우고 팔도 지졌다. 부모의 쾌유를 기원하는 불사는 유교에서 중시하는 효심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져 사대부들도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57]
당시 도성 내에 사찰조성은 국법으로 금지되어있었다. 즉 왕이 아들 죽어서 슬프다고 대놓고 법을 어기려고 한 것. 아버지가 도성 안에 지은 의붓어머니 무덤도 불법조성이라고 파헤쳐서 딴데 처박아버리고 심지어 자기 묫자리에 원찰 짓는 것도 퇴짜놓았으면서 말이다. 정확히는, 한양 내에 있는 성녕대군의 집(훗날 나이가 차면 나가서 살 집)을 절로 개축하자고 한 것이지만 당연히 신하들은 반대했고 대신에 성녕대군 묘 근처에 암자를 하나 지어서 명복을 빌어주자고 제안한 것을 태종이 받아들인 것이다. 참고로 태종은 말년까지도 불교 혐오가라서 원경왕후가 죽은 후
아들이 묘지에 절을 세우려고 하자 그 능은 내가 죽으면 들어갈 곳인데 왜 절을 세우려는 거냐고 노발대발했다. 그런 사람이 자기 아들 무덤에는 절을 짓자고 한 것이다.
[58]
물론 태종이 박살낸 외척은 전부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이들 한정이다. 태종이 박살낸 외척을 보면 그들은 신덕왕후, 원경왕후, 양녕대군, 세종 등 현임이든 다음이든 왕과 명백히 엮여있는 이들이었다. 그러니 적자중에 막내인 성녕대군과 엮인 외척은 경계할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심지어 나이마저도 사망 당시 14세, 자기가 죽을때까지 살아있었다 해도 18세밖에 안되는 꼬꼬마였다. 참고로 당해에 셋째인 충녕대군(당시 세종)은 26세였다.
[59]
이후 안평대군이
계유정난으로 사망하자, 효령대군의 아들 원천군이 작은아버지 성녕대군의 제사를 뒤이어 모시게 된다.
[60]
태종 뿐만 아니라 평소 이속을 못마땅 하던 신하들도 한 뜻으로 강력 처벌을 주장했다. 곤장 100대면 사실상 맞다 죽으라고 선언한 거다.
[61]
동양 배경이든 서양 배경이든 음산한 밤 분위기를 내기 위해 단골로 넣는 음향효과 중 하나가 부엉이 소리이다.
[62]
임금의 이주, 이사
[63]
금성을 가리킴.
[64]
왕이나 여왕을 상징하며 천궁도의
사자자리로 보고 있다.
[65]
한 예로 바로 아래에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 이름을 쓴 공을 찬 아이들을 곱게 살려보낸 태종과는 달리 홍무제는 자기 황후를 왕발이라고 놀린 이들을(이는 중국의
전족 문화 때문이었다.) 다 잡아 싸그리 응징하려다가 황후인 마씨가 만류하고서야 그만두었다.
[66]
내관들이 반우거(왕실 신주를 모시는 수레)에 올라타 잡담을 나누고, 어떤 내관은 태종에게 나무람을 듣고 화가 났다며 들고 있던 자를 물웅덩이에 패대기치고, 한 말단 주방담당은 일하는 궁녀에게 성희롱을 일삼는 등...
[67]
세종의 부탁으로 일을 하던 중, 세종이 다른 심부름을 시키자 화를 내고, 소헌왕후의 의복을 찢어버리는 등의 대사고를 치는데 심문관들이 "아니, 대체 왜 중전마마의 옷을 찢은 건가?"라고 기막혀하자 "흥, 찢을 마음이 들었으니 찢은 것인데요?"라고 당당하게 적반하장을 보인다.
[68]
개국공신이면서 태종의 최측근 무신인
조영무의 장남. 무신인 아버지와는 달리 과거에 급제한 문신인데 세종실록의 졸기를 보면 사관들에게도 꽤 사람 좋고 능력도 좋은 관료라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69]
국왕암살기도일 수 있기 때문에 현장에서 정2품 판내시부사한테 두들겨 맞은 다음 하옥되고 참수 아니면 위리안치다.
[70]
감이 안 잡힌다면 세월호 사건의 사망자가 304명이다. 즉 이 사건은 그 세월호 사건의 피해자 수의 세 배 이상의 대형 참사인 것이다. 게다가 인구수로는 현대 대한민국+북한의 20%도 안 되던 시절이라(현종 시절의 인구가 10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오늘날로 치면 사망자가 7천명 이상 나온 해양사고가 터진 것이다.
[71]
조선이 육로 교통을 등한시했다는 인식과는 달리 영남대로같은 간선도로를 확보하는 등 육로 교통에도 나름대로 신경을 썼다. 문제는 한반도는 산이 많은 지형적인 문제은 둘째치고 강수량이 여름에 집중되고 연교차가 큰 지랄맞은 기후 탓에 현대 기술로 만든 견고한 콘크리트 도로조차 버티지 못하고 몇 해 지나지 않아 갈라지고 깨져서 유지보수를 자주 하는데, 기술이 한참 미비했던 중세나 전근대에는 포장도로같은 건 엄두도 못 냈고, 이게 육로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근본적인 이유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육로 운송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건
경인고속도로(1969년)를 시작으로 고속도로가 뚫리면서부터였고, 이 때부터 한국에서 식량난은 사라지기 시작해 1980년대에는 먹을 게 부족하다는 소리는 안 나오게 되었다.
[72]
첫번째 찾아왔을 때 거절, 두번째 찾아왔을 때도 거절했지만 정 그렇다면 정승들에게 가보라고 했다. 아들들도 역시 신중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이 때 이미 태종은 김한로의 딸을 세자빈으로 낙점해두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이딴 짓을 한 것에 분노해 공부와 이현 등을 잡아다 벌하다가 곧 풀어주었다. 참고로 김한로의 딸로 낙점한 것도 외척 경계 때문이었다.
[73]
다만 김한로 자신은 양녕의 비행을 도왔다는 이유로 유배가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