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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01 16:02:25

연산군/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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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관련 분야별 여담
2.1. 즉위 이전2.2. 성격2.3. 예술 활동2.4. 외모2.5. 기타

1. 개요

조선의 10대 국왕 연산군에 대한 여담.

2. 관련 분야별 여담

2.1. 즉위 이전

특진관 예조 판성 유지가 아뢰기를,
"성안에 요귀가 많습니다." 영의정 정창손의 집에는 귀신이 있어 능히 집안의 그릇을 옮기고", "호조 좌랑 이두의 집에도 여귀[3]가 있어 매우 요사스럽습니다. 대낮에 모양을 나타내고 말을 하며 음식까지 먹는다고 하니, 청컨대 복은 오고 재앙은 물러가라고 비소서."
하자, 임금이 좌우에 물었다. 홍응이 대답하기를,

"예전에 유문충의 집에 가 나와 절을 하고 서서 있었는데, 집 사람이 괴이하게 여겨 유문충에게 고하니, 유문충이 말하기를 '이는 굶주려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다. 을 퍼뜨려 주라' 라고 하였고, 부엉이가 집에 들어왔을 때도 역시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는데, 마침내 집에 재앙이 없었습니다. 귀신을 보아도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저절로 재앙이 없을 것입니다. "정창손의 집에 괴이함이 있으므로 집 사람이 옮겨 피하기를 청하였으나, 정창손이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비록 죽을지라도 어찌 요귀로 인하여 피하겠느냐?' 라고 하였는데, "집에 마침내 재앙이 없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유지가 아뢰기를,

"청컨대 화포를 쏘아서 이를 물리치소서"
하니, 임금이 응하지 아니하였다.
- 성종실록, 성종 17년(1486) 11월 10일

2.2. 성격

2.3. 예술 활동

2.4. 외모

2.5. 기타


[1] 이융은 연산군의 본명이다. [2] 자신의 어머니를 죽일 정도로 집 안에서는 안방 호랑이였던 아버지가, 정작 군림해야 할 신하들과 젊은 대간들 앞에서는 도학군자로서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이중적인 모습이 굉장히 혐오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3] 여자 귀신 [4] 참고로 정창손은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가 중종 때 신원되었으며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5] 그러나 정창손 본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 그냥 냅두라고 하였다. [6] 일각에서는 영의정 정창손과 사이가 안 좋아서 귀신도 내쫓을 겸 화포로 정창손도 같이 내쫓자는 본심이 있기에 제안을 했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7] 내훈은 부녀자의 덕목과 훈육에 대해 저술한 책. [8] 만 21세 [9] 옷의 겉감과 안찝 [10] 광증 [11] 연산군은 이런 자신의 모습을 혹시나 궁 밖 바깥 사람들이 알게 될까봐 걱정하였으며 자신의 사생활을 궁 밖 사람들이 보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12] 궁 밖 사람들이 몰래 엿보는 광경을 들켰을 때는 곤장을 때리고 그 일대의 집을 허물었다고 한다. [13] 흔히 대비에게 박치기해서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얘기는 야사이다. [14] 참고로 처용무는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5] 포구악에 맞추어 격구하는 동작의 한가지 [16] 연산군의 외모는 선대 왕들에 비해 유난히 곱상했기에, 이러한 자신의 외모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는 분석도 있다. [17] 목련으로 만든 향 [18] 칡 섬유로 짠 베 [19] 삼실로 짠 천 [20] 생원·진사에 합격된 때에 입던 예복 [21] 본문에서 뜻하는 양기는 심신의 기력을 뜻한다. [22] 부스럼 [23] 재위 중반~후반에 넘어가면서부터는 면창의 관한 증상이 도졌다거나 악화되었다는 기록이 언급되지 않았다. [24] 한음 이덕형이 아닌 동명이인이다. [25] 다른 외모 기록에도 연산군 얼굴에 곰보나 종기 흉터자국이 있었다는 얘기는 언급되지 않았다. [26] 실제 연산군 얼굴에는 반점이 있었다는 기록이 일체 없다. [27] 당시 기준으로는 못생겨서 연산군이 잘생겼다라고 기록에 쓰라는 명을 내렸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 무근이다. [28] 즉, 당시 기준으로 못생겨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던 게 아니다. 반대로 지나치게 잘생겨서 오히려 평가가 좋지 않았던 케이스. 반면 아버지 성종은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이 겹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별개로 얼굴은 별로라는 반응을 얻었다. [29] 연산군과 더불어 중종이 키가 작았다거나 중키였다는 얘기도 있는데 실제로는 둘 다 키가 컸다는 기록이 있다. 둘의 키가 작거나 중키였다는 묘사는 야사나 실록에 전혀 언급이 없고 온라인상에서 잘못 알려진 정보이다. [30] 참고로 계유정난 주역 중 한 명인 한명회는 한확과 9촌 관계다. [31] 내사복시에서 기르던 말 임금이 거둥할 때에 쓰임 [32]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긴 나라에서 왕위에 오름을 승인해 달라는 요청에 중국 황제가 즉위를 승인하고 왕으로 책봉한다는 문서와 이를 증명한 금인을 내려주는 것을 뜻한다. [33] 사신 가운데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 [34] 중국인 여씨가 같은 성의 이름을 가진 조선의 여씨와 동성 연애를 제안했으나 조선인 여씨가 들어주지 않자 중국인 여씨가 원한을 품고 조선인 여씨가 영락제가 가장 총애했던 같은 공녀 출신인 현인비 권씨를 독살했다고 무고하여 영락제가 조선인 여씨를 포함한 수천명을 죽인 사건. [35] 단 연산군 명의로 류큐왕에게 보낸 서한은 맞으나 아전들의 필체일 확률이 높다. 보통 임금의 어찰같은 경우는 임금 본인의 필체이나 외교문서는 거의 대필이었다. [36] 이거의 둘째 아들인 이백록이 이순신의 할아버지이다. [37] 다만 연산면의 오계 품종이 천연기념물 제265호로 지정되어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38] 당시에는 음력을 사용하였는데 고종 때부터 김홍집의 의견을 받아들여 음력 1895년 11월 15일에 공식적으로 개력을 반포하며 이로써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하여 양력을 사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