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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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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되어 산악지대로 이주하는 요뤽 유목민들의 모습
1. 개요2. 원인3. 종류4. 유목 대상5. 힘들고 고된 삶의 유목생활6. 현재7. 전통8. 유목민의 특징
8.1. 전투력8.2. 민족적 개념8.3. 혈통에 대한 집착8.4. 음식8.5. 의복과 상업 중시8.6. 문자8.7. 취수혼 등 성문화
9. 세계의 유목민족10. 가상의 유목 민족 혹은 그를 모티브로 한 것들11. 관련 문서

1. 개요

유목(, nomadism)은 가축을 거느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먹이가 될 풀밭을 찾으며 가축을 기르는 생활 활동을 말한다.

2. 원인

정착생활에 비해 고된 유목을 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주변 토지가 너무 척박하거나 강수량이 극미하여 정착하여 농경 사회를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목민들이 발생하는 지역은 대개 농업생산성이 사하라 수준인 아주 척박한 땅들이다. 예를 들어 몽골 울란바토르는 연중 강수량이 53mm 수준이라 는 커녕 도 재배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순록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영구동토층은 애초에 땅을 일구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이러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정주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목축업을 할 수 밖에 없다.

둘째로 한 장소에서 가축떼에게 풀을 뜯게 하다 보면 풀이 남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첫째 이유와 관련이 있는데, 애초에 비옥한 땅이었다면 가축떼에게 먹일 풀이 빨리 자랄 수 있기에 정주생활을 하면서 (중세시대의 개방경지제 체제의 그것과 유사한 양태로) 휴경지를 목초 공급원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너무 척박하기 때문에 농사도 짓지 못하고 풀도 빨리 자라지 못한다.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계절에 따라 풀을 찾아 먼 길을 움직이는 것만이 가축들에게 풀을 정기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같은 이유로 무리를 짓는 야생 초식동물들도 강우지를 따라 계속 이동하는데 우기와 건기를 따라 아프리카를 종단하는 떼가 좋은 예다.

풀이 빠르게 생장하는 열대지역은 다르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세계지도를 아무리 뜯어봐도 풀들이 우거진 열대우림지역에는 유목민족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현대 문물로 정글을 밀어낼 수 없던 과거에는 인구부양력이 형편없어서 아라비아 사막과 열대우림이 인구밀도가 별반 차이도 없었다. 게다가 열대우림지역은 전세계에서 세균과 미생물, 기생충과 모기 같은 해충, 이외에도 독사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지역이라 유목민의 가장 큰 재앙인 가축전염병에 몹시 취약하기까지 하다.

열대지역은 동물과 곤충들도 엄청나게 많아서 해당 지역의 식물들은 독으로 저항성을 갖추지 못하면 바로 멸종한다. 때문에 이런 독초들을 먹는 정글지역의 초식동물과 곤충들은 이 독을 해독하기 위한 특이기제를 가진 대가로 해독에 칼로리를 쓰느라 젖을 만들지도 대량의 고기를 만들지도 못한다. 이런 곳에 일반적인 가축을 데려가 봐야 독사, 해충, 세균, 독초에 의해 순식간에 가축들이 전멸한다. 이런 곳에서는 식용작물도 가공할 전투력을 지닌 토착생물들의 공격력 때문에 농경도 못 한다. 독초들 투성이인 곳에 생장 그 자체가 목적인 잡초들이 끊임없이 식용작물들의 뿌리를 얽어 질식시키려고 하고 독으로 땅을 오염시켜 독살하려고 하고 키를 키워 빛을 막아 아사시키려고 한다. 식물이야 그래도 속도의 한계가 있으니 매일매일 키만큼 자라나는 풀들을 일일이 제거하는 중노동으로 막는다 치더라도 독도 없이 영양분만 많은 풀을 노린 독성 초식동물과 초식 해충들이 우글우글 몰려들 것이라 막을 도리가 없다. 토양 자체도 넘쳐나는 풀들이 무기질을 다 뜯어간 후 형성된 철분만 가득한 라테라이트토라 작물이 잘 자랄 수 없기도 하다. 그나마 정글지역이라도 우기와 건기가 구분되는 열대 몬순지역에서는 약간의 경작이 이루어지는데 원주민들이 농경하는 방법은 주로 화전으로 식물을 태워 재로 만들고 그 주변 곤충과 식생을 전멸시켜서 곤충들이 건너올 수 없는 안전지대를 확보한 후 그 가운데 작은 땅에 빠른 생장속도를 지닌 작물을 잠깐 키우는 식으로 치고 빠지는 농경을 하며 그처럼 물이 많은 지역에서 안정적으로 농경이 가능하다면 유목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대량의 식료를 조달할 수 있으므로 굳이 유목을 할 이유가 없기도 하다.

그래서 황량한 황무지와 스텝지역에서만 유목민이 나타났다. 애초에 열대 지역에는 가축으로 쓸 만한 유용한 초식동물이 야생에서 자생하지도 못한다. 정글에 사는 가축 삼을 만한 초식동물이 뭐가 있는지 떠올려 보자.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 게 당연하다. 분명 풀들이 많으니 초식 1차 소비자도 많은데 그 많은 초식동물 중 인간에게 유용한 게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정글에 사는 초식동물이라면 겨우 나무늘보 같은 게 떠오를 텐데 나무늘보 같은 동물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축으로 쓸모가 있을지 생각해 보자. 있었다면 정글 원주민들이 가축으로 기르든 유목을 하든지 했을 텐데 워낙 그 많은 초식종들이 죄다 빈약한 몸을 가진 정글 특유의 무쓸모한 동물들 뿐이라 정글 유목민이 등장하지 않았다.

반면 평균기온이 매우 높은 열대지역이라고 할 지라도 사바나와 같이 건조하여 풀들이 우기 직후에만 자라는 식생이 척박한 지역에서는 오히려 기생충이나 해충, 세균의 번식이 활발하지 않아 유목이 가능하기 때문에 아프리카 아메리카에도 유목민이 존재하는데 아프리카에는 사바나 사헬 지대가 있고 아메리카에는 팜파스 야노스 평원과 대평원 지대가 있다.

3. 종류

학문적으로 볼 때 유목은 크게 Nomadism과 Pastoralism으로 나뉜다. 한국어로는 구분하기 힘들지만 전자는 일정한 장소 없이 물과 목초가 있는 곳을 찾아 유랑하는 형태의 유목을 의미하고 후자는 정해진 거주지가 있으면서 여름과 겨울 혹은 일정 시기마다 정해진 목축지를 오가며 이동하는 형태로 유목과 정착식 목축의 중간적인 성격이다.

교과서에서는 전자를 유목(遊牧), 후자를 이목(移牧)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요뤽(Yörük)이라고 불리는 튀르키예의 유목민들은 여름에는 산악지대에 올라가서 양과 염소를 치고 겨울에는 하산해서 헛간 같은 곳에 양과 염소를 키우면서 여름내 만들어 두었던 건초를 주는 식으로 유목을 한다.

전자의 전형적인 유목민으로 알려져 있는 아라비아 사막의 베두인들은 자신의 부족들이 공유하는 여름 목축지와 겨울 목축지, 봄 목축지를 순회하면서 목축을 하며 몽골의 유목민도 봄 목축지/여름 목축지/가을 목축지/겨울 목축지가 나뉘어져 있다.

4. 유목 대상

초원지대에서는 의 조합을 선호하며 사막 지대에서는 낙타를 선호하기도 한다. 사헬 지대에서는 를 선호하며 툰드라에서는 순록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이런 유목민들은 전투민족으로 유명한 기마 유목민이 아니기 때문에 존재감이 떨어지는 편이다.

유목민들은 식량의 확보가 어려운 지역에서 살았던 까닭에 대부분은 식용과 수송용을 겸할 수 있는 가축을 선호했는데 그래서 수레를 끌 수 있는 순록이나 소 이외에는 아예 직접 타고 다닐 수도 있는 말이나 낙타가 선호된 편이다. 거기에 양이나 염소 등의 가축을 추가로 길러서 이들만으로는 부족한 식량을 벌충했다. 가령 가장 잘 알려진 유목민인 몽골인들만 해도 이외에 양과 염소, 쌍봉낙타를 함께 키우며 같은 유목민인 베르베르족이나 베두인들도 낙타와 염소를 같이 키운다.

물론 영어로 pastoralism이라고 불리는 유목 방식인 이목을 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런 경우라면 정주민들처럼 말이나 낙타는 오직 운송 수단으로만 쓰이게 되고 주된 식량원은 야크로 대체된다. 이목은 일정한 영역 내에서만 유목 생활을 하는 방식이라서 좀 더 오래 키웠다가 한꺼번에 다량의 식량을 얻을 수 있는 가축이 더 선호되는 편이었다.

코만치족 같은 아메리카의 유목민들은 가축을 섬세하게 돌보는 노하우가 부족해서 반 야생상태로 키우는 편이었는데 유럽인 정복자들이 데려온 동물 중 반야생 상태로 사육 가능한 동물은 이나 빼고는 없었다. 이들은 말이나 소만 유목 대상으로 삼고 필요한 식량은 수렵채집민들처럼 주변의 야생동물들을 사냥하거나 극소수 지역에서 농경 생활을 병행하는 식으로 충당했다. 아메리카 유목민들의 대부분이 반농반목 생활을 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며 그래서 20세기 이후 대다수가 농경민으로 전환될 때 큰 무리없이 정주 생활에 적응했다.[1]

라틴아메리카 가우초 야네로는 땅이 워낙 많이 남아돌아서 를 반야생상태로 방목한 후 사냥하듯 잡았는데 반야생상태로 사육하기에는 연악한 보다는 소가 더 적합했다. 라틴아메리카에는 퓨마 재규어같은 맹수가 많아서 이런 육식동물들이 기습공격을 해 오면 맥없이 한 끼 식사로 전락하는 양보다는 주인이 구하러 올 때까지 반격이라도 하거나 빠른 속도로 도망칠 수 있는 소나 이 유목 생활에는 더 유용했다.[2] 북아메리카의 원주민이나 카우보이 코요테때문에 똑같이 마소를 선호했다.

사미족이나 네네츠인, 축치인 같은 북극이나 시베리아 등지에 사는 유목민들은 너무 추워서 을 키울 수조차 없는 환경에서 살았기 때문에 주로 순록을 길들여서 유목의 대상으로 삼았다. 당연히 이동할 때도 순록이 끄는 썰매를 이용했고 순록의 젖을 짜서 마시거나 그 고기를 먹으면서 생활하기도 했다.

유럽의 산악지대에 살던 유목민들인 아로마니아인[3], 사라카차니인[4], 요뤽[5] 등은 정주 농경민들의 영역에 둘러싸여 살았던 까닭에 일정 영역에서만 유목을 하는 이목을 주로 했는데 유라시아의 다른 유목민들과는 달리 은 특별한 날에나 먹는 특식으로 여겨 주로 정주민의 마을에 양모를 수출해서 먹고 살았고 정주민들에게서 사오거나 자체적으로 농사를 지어서 조달한 곡식을 주식으로 했지만 척박한 지역에서 살았던 탓에 농사로 식량을 조달하는 건 한계가 있었고 대신 이들의 영역이 나름 방대한 편이라서 계절마다 가축들을 이동시켜서 기르는 식으로 생활했다.

5. 힘들고 고된 삶의 유목생활

"용사는 화살 한 발에, 부자는 한파 한 번에 끝장난다."
몽골 속담
로망을 가진 사람이 많지만 절대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유목 생활은 농사짓는 것보다 훨씬 고되다는 것이다. # 애초부터 유목을 하는 지역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척박한 땅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겨울이 되면 그 소중한 가축들이 얼어죽거나 굶어죽는 일이 빈발하다. 몽골에서는 이런 한파를 조드(Zud)라고 부른다. 기온만 떨어지는 블랙 조드는 그래도 피해가 크지 않지만 눈이 목초지를 덮어버리는 화이트 조드 때는 유목민 재산 1호인 가축들이 고스란히 굶어죽거나 얼어죽고 병들어 죽어 유목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대기근을 겪는다.

물론 농경도 한파 앞에 무력한 건 똑같지만 농사는 최악의 경우라도 1년 수입이[6] 날아가는 반면 유목민은 '평생 축적한 재산'(=가축 떼)이 한 방에 날아간다.

유목 생활이 얼마나 고된 것인지는 과거의 영화를 자랑한 몽골이 현대에도 나름 거대한 영토에 비해 인구가 300만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방증한다. 사실 영토만 클 뿐이고 농경민족이 이미 한족들이 금싸라기 땅을 차지한 상황에서 변방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몽골족이 살아가기 힘든 땅에서 활보한 것일 뿐이었고 인구 수와 문화 면에서는 한족과 상대도 안 되었다. 결국 몽골인들이 중국으로 쳐들어가서 한족들을 내쫒아 버리고 중원과 하북을 점령했던 역사는 유목 생활이 너무 힘드니까 따뜻한 곳에서 농사를 짓고 정착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땅이 필요해서였다.

실제로 몽골의 땅은 겨울만 되면 영하 20도는 넘게 내려가는 곳이며, 시베리아 뺨칠 정도로 한파를 넘어가는 혹한기가 되는 곳이라 농사가 매우 어렵다. 반대로 중국은 농사가 잘 되고 기후가 따뜻한데다 장강이 흐르는 비옥한 땅도 있고 오랫동안 넓은 대륙에 정착하여 살았기 때문에 인구가 10억이 넘어가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수많은 유목 민족들은 주변의 국가들을 상대로 호전적으로 전쟁을 하면서 약탈을 시도했던 것은 어쩔 수 없이 살아남기 위한 궁여지책의 삶이었을 뿐이었다.

애초부터 '정착' 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을 때, '일정한 곳에 자리를 잡아 떠도는 생활을 하지 않고 자신들의 땅에 발을 붙여서 머무른다' 라는 뜻이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이는 유목 생활이 너무 힘들고 고된 삶이었기 때문에 만들어졌던 단어다. 일례로 몽골은 아시아의 대륙과 유럽 대륙을 정복할 때 적대하는 국가들의 많은 문화를 거부감 없이 모두 수용했는데, 이는 어쩔 수 없이 고육지책으로 받아들였던 정책이기도 했다. 당시 몽골을 비롯한 유목 민족의 문화 수준은 꽤 뒤떨어졌는데, 척박하고 추운 땅에서는 정착해서 오랫동안 살아가지를 못했기 때문에 고유적인 문화가 발달하기 어려웠던 환경이었다.

물론 이는 약간 편견도 있는데, 초원길은 주요 무역 루트였고 유목 민족들의 주변에 이란이나 중국처럼 부유한 농경 제국들이 존재하여 이를 기반삼아 대상들을 털고 도적질하면서 살아가던 유목민들도 있어서 생각보다 부유한 유목민들도 존재했다. 유목민들의 생산력은 낮아도 이게 자산을 털어버리는 짓거리라서[7] 유목민족들의 역사를 소재로 하는 영화에서 유목민들의 무장이 생각보다 중무장인 것도 고증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중기병은 주 생업 중 하나인 약탈을 위해서 필수적이였다. 결국, 척박하고 추운 땅에서는 약한 자가 살아남기 힘든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가령 리틀 빅혼 전투 당시 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던 수족은 대부분이 미군에서조차도 예산 문제로 별로 보급되지 못했던 헨리 소총 같은 레버액션 소총으로 대거 무장하고 있었는데[8] 미군과의 무력 충돌에 대비하기 위해 부족 단위로 인근의 미국인 총포상들로부터 대거 사들여서 쟁여놓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무장을 튼튼하게 한 것과는 별개로 가끔씩은 주변 농경민들을 털어먹기가 곤란해져서 경제난에 시달리게 되면 궁여지책으로 같은 유목민들끼리 강도질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소말리아 해적들이 세계 각국의 해군들의 토벌을 받아서 세가 약해지자 자기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조직을 털어 버리기도 하는 것과도 같다. 주로 많은 수의 가축을 키우는 대규모 목장주나 타 부족, 타 국가를 상대로 무역하러 가던 상단들이 표적이 되곤 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도둑이나 강도를 발견하면 사로잡지 않고 그냥 죽여 버리는 게 암묵의 룰로 여겨졌다.[9] 이슬람의 율법서인 샤리아에서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그 손목을 자른다'는 다소 과격한 조항이 들어가있는 것도 유목민인 베두인의 풍습이 반영된 결과다.

카우보이 가우초, 코만치족 등의 아메리카 유목민들은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는 권총을 선호했는데 인근의 미국인이나 메스티소, 아메리카 원주민계 정주민들의 마을이나 도시에서 물건을 거래하거나 임시로 숙박할 때를 위해 평상시에는 허리에 차서 숨겨놓다가 인근 원주민 부족이나 갱단이 습격해오면 바로 반격하기 좋도록 일종의 데린저 개념으로 사용했다.[10] 물론 이는 반대로 본인들이 이웃 마을이나 부족들을 습격할 때도 유용하게 쓰였다. 미국의 중서부나 아르헨티나 내륙 지방은 거의 다 척박한 사막이나 초원 지대라서 사람이 살기에는 무척 열악한 자연환경이었기 때문에 걸핏하면 가축을 먹일 목초지를 확보하거나 옆 마을이나 도시를 약탈해서라도 부족한 식량과 자금을 조달하고자 여러 부족이나 갱스터들이 총질을 벌이고 강도짓을 하는 무법지대가 되곤 했다.[11]

이러한 지속적인 약탈 행위는 동북아시아의 유목민족들이 중국을 차지하고도 오히려 중국의 문화에 휩쓸렸거나 아메리카 유목민들이 수시로 각국 정부에 의해 지속적으로 토벌당하고 약체화되어 버린 가장 큰 이유로 작용했다. 농경민족은 외적의 침입을 미연에 방지하고 산이나 강을 경계로 한 방어선을 확립할 목적이나 군주의 정복욕때문에 대외정벌을 한 경우가 큰 데 비해 유목민족은 정말 살기 위해 농경민족을 약탈하려는 목적으로 침략한 것이기 때문에 전투력이 그렇게 높았다.

물론, 상술한 연유로 인해 농경민족에 비해서도 외세와의 군사적 충돌이 잦았던 것도 사실이라서 적지 않은 유목민들이 상대적으로 충돌이 적어 안정된 편인 정주민이 되곤 했다. 북아메리카의 유목민인 코만치족은 부족한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자 수시로 인근의 백인 마을이나 다른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을 습격해서 약탈을 일삼았다. 때문에 서부극에서 이들이 백인 여자들을 납치하는 묘사가 제법 나온 것이고 이들의 부족명도 친척뻘 민족인 우트족의 언어로 '적(enemy)'이라는 뜻의 단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이후에는 미국 정부와의 마찰을 피하고자 대부분의 북아메리카 유목민들과 마찬가지로 정주민으로 전환했다. 몽골인들도 둥샹족 같은 일부 분파는 몽골 제국이 세워지면서 평화를 누리게 되자 한 곳에 정착해서 정주농경민이 되기도 했으며 본래 유목민이었던 헝가리인들도 9세기 이후에는 유목 생활을 청산하고 정주 농경민이 되었다.

6. 현재

유목민의 직접적인 후손을 자처하며 현대에 와서도 유목생활을 일부 유지하는 민족으로는 몽골족 튀르크족 계열의 여러 민족 및 베두인족, 베르베르족, 쿠르드족 아프가니스탄 일대의 여러 민족[12] 등이 있고 유목민 중심으로 현대적 국가를 형성한 나라로는 인구의 대부분이 여전히 유목 생활에 종사하는 몽골과 국토 대부분이 중앙아시아에 속해 있는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이 있다. 그렇다고 ~ 스탄이 모두 유목문화권은 아니다. 사실 현대에는 전통적으로 유목 문화권이라 해도 도시화와 이촌향도 현상이 일어나서 도시에 인구 다수가 몰려사는 것은 농경국가와 비슷하다. 우즈베키스탄은 먼 옛날에나 유목 문화권이었지[13] 지금은 정주 농경 문화권이다.

소련 시절에 유목생활은 탄압을 받았지만 지금도 떠돌아다니며 유목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들에는 적지 않다. 당장 몽골만 봐도 유목이 엄연히 1차 산업의 주류이며[14] 몽골에서의 시골은 농촌이 아닌 곧 유목 지대를 의미한다.

몽골계와 튀르크계로 대표되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현재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유목민인 베두인족과 베르베르족, 투아레그족이 아직 남아 있는데 이들은 애초에 자기들이 마음대로 다녔던 곳이 국경으로 지정되어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일단 통행증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지만 이것은 유목민족의 삶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할힌골 전투의 발단도 이런 갈등이었던 셈이다.

유목민들이 마음대로 다니던 북방 영토가 소련이며 만주국이며 몽강국의 국경으로 나뉜것은 유목민의 사회에 많은 혼란과 분열을 가져왔다. 마사이족도 일부 유목생활을 하고 몽골이나 튀르키예나 유라시아나 중국,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일부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지만 당연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들 유목민의 수는 갈수록 줄어든다. 왜냐면 유목민들이 살고 있는 해당 국가들의 정부가 정착하여 살기를 권장하고 직업도 도시에서 구하는 데다 고된 생활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기 싫어서 결국 유목을 포기하는 경우가 늘기 때문이며 낙농업자와 목축업자들이 땅을 사서 농사와 목장을 짓는 곳에 유목민을 직원으로 고용하기도 한다.

유목의 역사가 늦어서 빨라도 16세기경부터 유목 생활을 시작한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15] 유목 생활이 자리를 잡아가던 시절이 하필이면 산업 혁명기와 겹치게 되면서 자신들의 땅에 철도를 놓으려던 미국인들과 격렬한 충돌을 빚었다.[16]

그래서 북아메리카 유목민들은 철도의 설치로 인해 유목의 대상이던 들소가 열차와의 충돌로 인해 폐사하거나 철도 공사를 명목으로 원래의 영토에서 추방당하는 등의 피해를 당하면서 이에 저항하는 운동도 많이 일으켰는데 19세기 후반의 리틀 빅혼 전투 아파치족들의 봉기가 대표적이다. 현재는 수우족을 포함한 몇몇 부족들에 의해서 유목생활의 흔적은 보존되었으나 20세기를 전후해서 유목생활 자체는 전부 중단되었다.[17]

남아메리카이 처음 유입된 16세기 이후부터 이른바 가우초라고 불리는 유목민이 등장했는데 본래 남아메리카 원주민이나 백인 무법자, 탈주한 흑인 노예 등 남아메리카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이 뭉쳐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18][19] 이쪽도 유목 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워서 20세기경에는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처럼 유목을 거의 포기했다. 애초에 농사짓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면서 유목 생활의 메리트가 비교적 줄어드는 요인을 무시할 수 없다.

다만 농경문화가 기본적으로 소작농이나 피고용인 같은 불평등을 초래하는 요소가 다소 있기 때문에 유목을 포기해야 하는 심리적 거부감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아르헨티나 가우초들은 20세기를 전후해서 대부분이 유목 생활을 포기하고 정주민이 되었는데 대부분이 빈민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유목 생활 때는 주거비가 나가지 않았는데 정주함으로써 주거비가 발생한다.

미국 카우보이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들은 본래 멕시코 등지의 히스패닉계 부랑자들이나 미국의 가난한 농부들이나 실직한 도시 노동자, 부족에서 제명당한 아메리카 원주민, 탈주하거나 주인이 해방시켜 줘서 자유를 얻은 흑인 노예들이 모여서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서 가축을 사거나 다른 목장주들에게 고용되면서 유목 생활을 하게 된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고용주에게 해고 통보를 받았거나 인근의 원주민 부족들에게 침략자로 찍혀서 토벌되거나 다른 강도들에게 가축을 도둑맞았거나 하는 이유로 강제로 농경 생활로 되돌아가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빈민이 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들의 침략에 수시로 시달리던 원주민계 유목민들도 미국 정부에 의해 자신들에게 보호구역으로 할당된 황무지로 쫓겨나서 농경민으로 전환한 뒤로는 대부분의 부족들이 21세기에도 미국 사회의 하층민으로 전락해서 연방 정부의 허가 하에 카지노 사업이나 관광업 등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수준이다.[20]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도 현재는 적잖은 수가 유목을 포기하고 정주 생활을 하고 있지만 가우초와는 달리 많은 수가 아직도 유목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 이유인즉슨 가우초들이 사는 아르헨티나가 남아메리카 최대의 농업국인데 반해, 중앙아시아 지역은 대다수가 사막화가 극심한 곳이라서 농경 생활을 오래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직 많을 뿐이다. 사실 이곳의 유목민들의 상당수가 정주민화된 이유는 소련 시절에 당국에서 유목 생활을 금지하거나 유목민들을 대거 도시로 이주시키는 등의 행위를 마구 저질렀기 때문이다.

중국 내몽골 지역에 거주하는 몽골인들도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있는데 유목을 하는 것보다 직장생활을 하는것이 더 봉급이 많기 때문이다. 도심 근교는 임대료가 오르다 보니 유목이 별로 돈이 안 되기도 하다.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에서는 아직도 유목민들이 유목을 하고 있는데 이들이 주로 거주하는 툰드라 지역은 워낙 춥고 척박해서 농사는 커녕 포경, 수렵, 유목, 어업으로 먹고사는 곳인 데다 경제권에서 거리가 멀어서 개발을 할래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곳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젊은 사람들이 전통적인 어업, 유목, 수렵에 종사하기보다 도시로 나가서 직장생활하는 것을 선호하면서 유목에 종사하는 유목민의 숫자가 감소하고 있다.

몽골의 최북단에는 유목민 일부가 남아 있다고 한다.
EBS 다큐, 인류 원형 탐험 - 봄, 샤먼의 초원 몽골 다르하드족(Darkhad)

7. 전통

유목민들의 대부분이 손님을 환대하는 전통이 있다. 유목민족이 사는 땅들은 대체로 인구밀도가 낮고 척박한 땅이 많기 때문에 식당이나 호텔 같은 숙박업소 따위가 적재적소에 있을 리도 없고 내가 도와줘야 다음에 내가 어딘가를 여행할 때도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상부상조 격의 행동으로, 광활한 땅을 안전하게 여행하기 위한 상호간의 생존수단으로서의 전통이다.

역사적으로 유목민들의 삶은 대체로 각박한 데다 거칠었고 이 때문에 각 부족 간의 대립과 분쟁, 약탈도 늘상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손님을 환대하거나 설령 환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손님을 공격하는 것을 매우 불명예스러운 일로 여기는 유목민들의 전통은 이런 상시적 대립 속에 있는 사회가 원활히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칭기스 칸이 자기 아버지인 예수게이를 독살한 타타르족에게 원한을 품은 이유가 이것인데 이런 유목민들과의 암묵의 룰이었던 접대의 관습을 깨고 엄연히 손님 자격으로 온 이를 살해하는 무개념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나중에 칭기즈 칸이 타타르족을 정복한 뒤 여자와 아이들만 빼고 모든 타타르족의 수레바퀴보다 큰 성인 남성들은 모두 죽이고 나머지는 살려주는 것으로 보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만약 손님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공격하기 시작한다면 다수의 전력과 함께하지 않고서는 부족의 영역 밖으로 단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게 될 테고 타 부족 간의 교류도 불가능하거나 극히 어려워질 것이며 이 때문에 결국은 부족사회 자체가 붕괴되고 고사할 수밖에 없다. 이에 더하여 보통 폐쇄적이고 고립된 부족 중심의 사회에서 손님은 외부의 정보와 문물을 전달하는 중요한 창구였다는 점도 손님을 환영하는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더 자세한 분석은 접대의 관습 항목을 참조해 보자.[21]

물론 각박한 현대사회에는 아무리 유목민족의 후예들이라고 해도 이런 개념이 다소 약해진 것도 있지만 그래도 도시를 벗어나면 현재도 꽤 통하는 편이다. 몽골,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중동 베두인이나 투아레그족 등의 유목민 천막에 아무 연고도 없는 한국인 여행자가 대뜸 찾아가도 따뜻한 차와 최대한의 성의를 담은 식사, 천막 상석의 잠자리를 공짜로 해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히려 먼저 들어와서 차나 한 잔 하고 쉬다 가라고 잡아끄는 경우도 많다.[22]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런 호의를 악용하지는 말자.

물론 히치하이킹 등이 그렇듯 강도 인신매매의 위험 때문에 대놓고 강추하지는 못하지만 이런 풍습이 있는 것을 알고 몽골 서부의 버스 타고 며칠을 가야 하는 시골에 가서 한 달 동안 이렇게 공짜로 먹고 자면서 여행한 한국인 블로거도 찾아보면 있다. 몽골어 한마디 못 해도 가능하다.

이렇게 선뜻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는 대가로 돈을 지불하는 것은 유목민족에 따라 호의를 금전적 관계로 해석하는 실례이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현지인 쪽에서 당당히 1박만큼의 대가를 원하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서도 달라서 가령 몽골 같은 경우만 해도 도시화나 현대화가 많이 된 곳일수록 돈을 받거나 관광객을 상대하지 않는 평범한 유목민 천막에서는 돈을 줘도 안 받으려고 하기도 한다.

여담으로 한국에서는 어쩐지 목축(牧畜)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차이점은 링크를 참조하자.

8. 유목민의 특징

8.1. 전투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유목민족 전투력의 비결과 원리 그리고 한계 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스웜 전술 문서
3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나는 다른 점에서는 스키타이족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 가지 가장 중대한 인간사에 있어, 그들은 우리가 아는 모든 부족들을 능가한다. 그들이 해결한 중대사란 그들이 추격하는 자는 아무도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이 따라잡히고 싶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을 타고 을 쏘기에 능하고, 농경이 아니라 목축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그들이 어찌 다루기 어려운 불패의 부족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헤로도토스 역사 6권 46p
이들은 사냥과 말에 익숙한 만큼 농경민족보다 전투병력의 비중이 극도로 높다. 유목민들은 척박한 땅에서 맹수들을 상대하고 다른 유목민 부족들의 침공을 방어해야 했기 때문에 가족과 가축을 지키기 위한 승마술과 사냥술(궁술)이 생존을 위한 기본 수단이 되는 관계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구성원 대부분이 기마 병력이나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인 말타기나 사냥을 넘어 완전히 군사적 훈련 자체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더구나 이 기병이라는 병과는 탄생 시점부터 기관총 전차가 등장하는 1900년대 이전까지 인류 최강의 전투 병과였다. 가령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유명한 폴란드 율란 창기병대는 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부대가 궤멸되어 해체될 때까지 폴란드군의 최정예 부대로 손꼽혔다. 비록 20세기 이후에는 무늬만 창기병대인 첨단 무기로 무장한 기계화부대가 되었지만 그래도 기관총 등의 무기나 장비를 이 가진 뛰어난 기동력을 이용해 적지적소에 전개할 수 있었고 때로는 전근대시대 기병들마냥 정말로 적의 보병들에게 기습적으로 돌진해서 짓밟아버리는 전술도 가능했다. 나치 독일군도 폴란드 침공 초기에 보병으로 구성된 선발대가 율란 창기병대의 차징에 궤멸되기도 했을 정도다. 문제는 이런 정예 부대를 양성하는데 들이는 시간과 비용이다. 예시로 든 폴란드 중세 시기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시기부터 립카 타타르라고 불리우는 타타르족의 분파[23]를 자국에 이주시켜서 기병 양성에 필요한 노하우를 얻거나 이들을 직접 징집하는 식으로 기병을 확충했지만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정주 농경 민족은 이런 수준의 전사를 농사짓던 사람들을 무장시킨다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직업 군인을 양성해야 했다. 거기에 오늘날 소총수 훈련은 2주에서 4주면 끝인 데 반해 고대에는 기마병을 훈련하는 데 최소 수년이 걸렸다고 하며 마찬가지로 중세 시대에도 궁병을 기르기 위해 걸리는 훈련 기간이 수년이 걸렸다.[24] 그래서 러시아 중국, 그리고 선술한 폴란드처럼 유목민을 용병으로 고용하는 것으로 기병을 충당해야 했다.[25] 북송 시기의 정치가인 왕안석이 집집마다 을 기르게해서 평시에는 농사용으로 부려먹다가 전시에 사람과 말을 함께 징발해서 기병을 대규모로 확충하자는 주장을 했는데 이것이 조정에서 개소리 취급받고 씹혔던 이유가 이런 기병 양성의 어려움에 있었다.

반면 유목 민족에게 승마술과 사냥술은 일상생활이기 때문에 전원이 궁기병이었다. 그로 인해 근대 시대까지만 해도 유목민들의 군사적 역량은 위협적이었다. 규합하기 어려웠을 뿐이지, 규합만 했다 하면 정말 소수의 유목민에게 압도적으로 다수인 농경 제국이 매번 탈탈 털리기를 반복했다. 더구나 강력한 무력을 생산하기 쉬움+생산력이 떨어짐 이 두 가지 요소가 겹쳐서 대부분은 약탈민족[26] 성격도 커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제국들이라서 더 불리한 점들도 있었는데 우선 영토가 너무 넓으면 농경민들은 유목민들의 기동성을 따라가기가 매우 어려워서 농락당하기 일쑤였다. 특히 교통·통신이 발달하기 전에는 싸우기도 전에 행군하다 보급이 끊기거나 토질병 등으로 죽을 수도 있었으며 유목민들은 역청야전술로 지나가는 곳마다 초토화를 시켜서 완전히 맥이 빠지는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이탈리아 반도처럼 바다를 끼고 옆에 광활한 지형이 적은 곳은 드물었고 다른 지역의 세력이 침공할 목적으로 지도를 살피면 유럽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복잡한 편이기 때문에 유럽은 상대적으로 나았지만 평야가 많은 다른 지역들은 개털렸다. 가령 훈족만 해도 뻥 뚫린 평야 지대인 프랑스 독일, 동유럽은 사정없이 털렸지만 이베리아 반도로는 가지도 못하고 그 인근에서 벌어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탈리아 반도로 진입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교황 레오 1세와의 회담을 통해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물러나야 했다.

대부분은 그 막대한 전투력을 자기들끼리 싸우는 데 쓰지만[27] 이러한 유목민들을 통합할 권위 있는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면 무시무시할 만큼 극도로 성장하며 이것은 게르만족조차도 밀어버려서 서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나비효과를 일으킨 훈족의 성장이나 거란, 몽골 제국 등 유목민족의 중원 한반도 침략으로 이어졌다. 특히 몽골 제국 칸국들까지 합치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나라를 이루었으며 동유럽까지 그 영향력이 미쳤다는 걸 생각하면 고대에 그들의 잠재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반대로 강력한 지도자에 너무 의존하는 체제다 보니 그 지도자가 사라지면 급격히 쇠퇴했다. 몽골 제국만 해도 전신인 카마그 몽골은 갓 세워졌을 때 금나라를 침공해 그들로부터 영토 할양과 매년 일정한 가축과 곡물을 받아내고 독립국가 지위까지 인정받을 정도로 성장했지만 카불 칸 사후 쇠퇴하기 시작해[28] 쿠툴라 칸 시기에 결국 타타르-금나라 연합군에게 몽골 자체가 타이치우드와 키야트로 분열하게 되며 이 모든 일은 카불 칸 사후 겨우 대략 12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만큼 유목민족은 강해지는 것도 한 순간[29]이고 쇠망하는 것도 한 순간이었다.

더구나 개활지에서는 기병에게 더더욱 답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일반적으로 경제적 이유 때문에 험한 지역에 주요 도시를 건설하는 민족은 드물었기 때문에 농경 제국들은 유목민의 공격을 근본적으로 방어하기 힘들었으며 경제력과 기술력 덕분에 건설한 크고 아름다운 성벽만을 본다면 우주방어가 가능할 것 같아 보이지만 막상 근대 이전까지는 병력 밀도가 그리 높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군사훈련 및 장비에 드는 비용, 보급 문제까지 감안한다면 동원력이 압도적인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현대와 꽤 가까운 시대이며 인구가 많았던[30] 명의 수도나 주요 도시마저 50만~100만 정도의 인구를 넘는 곳들이 거의 없었고 총력전 이전까지 동원 가능한 병사가 인구비 1/100임을 감안하면 정주민의 군대가 유목민족보다 압도적인 물량을 과시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는 뜻이다.

일본군도 임진왜란이 일본사로 봐도 많은 병력을 동원한 전쟁이었는데 그게 최대 20만 명이었다. 기술의 한계로 유목민이든 농경민이든 제대로 된 병력이면 그게 고작 만 단위라고 해도 적지 않은 숫자였을 수 있다.[31] 인도사에서도 그리스인 등 외부 세력이 개입한 전쟁을 보면 진짜 싸움 한번 안 해본 농민들까지 끌고 오지 않는 이상 병력이 생각보다 적었다.

위의 이유로 인해 유목민족은 정주민의 군대를 대등하게 상대하거나 각개격파할 수 있었다. 기병 자체가 무장을 불문하고 일반 보병보다 우위를 점하기 쉬운 병종인지라 무장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당시 병법에 따라 단순 전력으로 계산하면 오히려 압도적인 전력을 투하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제국을 세운 민족들도 정복이니 개척이니 하고 다녔던 상대들이라 생각보다 쉬운 상대는 아니었으며 유목민족이 제아무리 기병 중심, 인구비례 병사 비율이 높았다고 해도 워낙 무장이 빈약했기 때문에 정주민의 영토를 정복하지 못할 경우 결국 패배를 맛보게 된 경우도 많았다. 특히 대통합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중장기병 같은 근접전에 특화된 병과 운용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32] 의외로 작정하고 나서는 정주민 군대에게 패배한 기록이 꽤 많다. 흉노, 오환, 돌궐 같은 유목 제국을 건국한 유목 민족들도 결국 중국의 통일왕조에게 패배하여 무너진 것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기본적으로 유목민들은 숫자가 많지 않았고 전쟁에서 대패할 경우 그대로 부족 전체가 몰락하기 일쑤였다. 파르티안 샷이나 스웜 전술은 정주민 군대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정주민 군대가 만만치 않은 기병전력을 갖추거나 공성전 같이 기동력 발휘가 어려운 전장에서 싸울 경우 유목민들의 기마부대도 생각보다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목민족들은 대제국[33]을 건설했다. 동아시아에서는 흉노가 그 시작이었는데 이후에도 5호 16국 시대, , , 몽골, 과 같은 유목 제국들이 나타났다. 이들의 공통점은 중국의 혼란기와 자신들의 팽창기가 겹쳤으며 이 시기 정주민의 땅을 비교적 빠르게 점령하여 풍부한 물자를 확보하면서 경기병뿐만 아니라 중장기병들까지 갖추게 되었다는 점이다. 페르시아나 중동지역에서 유목민이 정주민을 정복한 것도 유사한 상황이다. 따라서 대개 어떤 지역의 제국을 깨뜨린 유목민들은 거의 세계 최강으로 봐도 될 정도였고 실제로 주변의 다른 지역들도 박살내고 다닌 경우가 태반이었다.

다만 농경민족을 정복한 후 오히려 그들의 문화에 역으로 점령돼 버리는 일이 흔한데 원래부터 인구도 적은 데다 편하고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은 어쩔 수 없어서 농경민족의 풍족하고 편안한 생활을 접하고 급속도로 동화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민족성을 유지하겠다고 온갖 정책으로 막으려 들어봤자 수백만에 달하는 인구 전체를 통제할 수도 없고 군주제의 한계 때문에 군주가 바뀌면 정책도 바뀌거나 하여 결과적으로 패권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도리어 먹혀버리기 일쑤였다.

유목민족은 빠른 성장만큼이나 쇠퇴도 빨라서 거란 북송 금나라에 의해 멸망했고 원나라도 그 엄청난 영토가 무색하게 너무 쉽게 무너져 버렸고 심지어 대제국을 이룬 청나라 만주족들이 불과 100년 만에 자기들의 언어와 정체성을 거의 잃어버리고 지금은 중국에서 소수민족 대우를 받고 있다.

튀르크족(돌궐)도 한때 북중국과 이슬람의 주도권을 쥐었으나 결국 문화적 헤게모니는 한족,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에게 내어줬을 뿐더러 유목민들 중 거의 유이하게 기독교 문화권에 편입된 마자르족 불가리아인도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유목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은 거의 상실하게 되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다른 민족들과 별 차이가 없어지게 되었다. 북아메리카의 유목민족인 수우족 리틀 빅혼 전투 이후에는 상당수가 미국 사회에 동화되어 살았다.

심지어 근대 이후에도 기병들은 강했다. 대표적으로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는 베두인 기병으로 오스만 제국의 근대적 요새들을 점령하기도 했다. 물론 이 양반은 영화 등에서 과장된 면이 있긴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도 아랍 부족들이 말 타고 설치며 영국군이 오기도 전에 오스만군을 다마스쿠스에서 몰아내는 활약을 했다. 이븐 사우드가 고작 40명의 병력으로 독립 운동을 하다 광대한 영토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도 기병빨이 좀 있다.[34] 사실 의외로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창기병 같은 고전적 기병들도 활약했다. 기병 문서 참고.

보어인 같은 농경민 출신도 환경에 따라 유목민화될 때도 있었는데 이들도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했다. 고대 인도유럽어족 이주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농사를 짓다가 다른 정착지를 개척하기 위해 이동할 때는 마차에 부녀자들을 태우고 성인 남성들은 말을 탄 상태로 가축과 함께 이동하곤 했다. 이들은 현지 흑인들과 전투를 벌일 때 일방적인 학살 수준으로 승리할 때가 많았으며 거친 야생 환경에서 적응한 사람들 답게 사격술이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후일 보어 전쟁 당시에도 초창기 영국군 전열보병들이 아무 은엄폐 없이 밀집대형으로 사격하는 동안 은엄폐한 상태로 영국군들을 저격하면서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이후 영국은 대군을 투입하고 보어인 민간인들을 수용소에 감금하는 초토화 작전을 펼치고나서야 보어인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8.2. 민족적 개념

인구 밀도가 지독하게 낮기 때문에 혼인 상대를 찾는 것이 어렵다. 따라서 부족 단위로 인종적 특징과 결속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당연히 각 유목민의 활동 영역에 한정된다. 그런 이유로 유목 국가가 출현하더라도 이들은 서로 결속이 매우 약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족으로 몽골의 역사와 국가 체제를 살펴보면 이런 흔적이 나온다. 몽골은 중앙집권화에 실패해서, 쿠빌라이의 즉위를 계기로 나라 전체가 일 칸국, 원나라, 킵차크 칸국 등으로 쪼개졌다가 다시 이들이 내부 분열로 인해 크림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오이라트 등으로 공중분해됐다.

이런 유목 국가의 흥망이나 부족 간의 항쟁, 기후변화 등에 따라 유목민의 공동체는 해체와 재결성이 반복된 탓에 고대 시절 갑툭튀해서 세계사를 뒤집어 놓은 유목민족들의 후예가 누구이고 뿌리가 누구인가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더욱이 아래에서도 언급하듯이 유목민들은 살기위해 인근의 농경민들은 물론, 심지어 같은 유목민 부족들도 수시로 약탈해대는 편이라서 더더욱 타 민족의 피가 자주 섞이곤 했다. 원래 약탈이란 게 단순히 각종 재화나 식량만 뺏어가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서 약탈을 당하는 나라나 부족들의 국민들이 대거 노예로 끌려가거나 아예 정주민들의 거주지 전체가 통째로 정복당하여 지배자인 유목민들에게 두고두고 착취당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35] 그래서 유목민들은 종종 타 민족과의 잦은 혼혈로 인해 모습이 달라지거나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지기도 했고 심지어 아예 피지배민족에게 역으로 동화되어 소멸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고대 유라시아의 유목민인 에프탈[36] 튀르크계 유목민이 토하라인이나 사카족같은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민족들을 정복한 뒤에 이들에게 동화되어 생겨난 민족이고 현대 불가리아 중세 초기에 튀르크계 유목민인 불가르족[37]이 현지의 슬라브계 민족들을 정복한 뒤에 이들에게 동화되면서 세워진 나라다. 게다가 이런 식이다 보니 같은 민족인데도 부족별로 인종까지 제각기 다른 경우도 허다하다. 일례로 튀르크계 민족들만 봐도, 위구르족 유라시안이고 튀르키예인 아제르바이잔인, 크림 타타르인 백인이며 야쿠트인 투바인 동아시아인에 속한다. 유목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몽골인도 그 분파 중에 모골인이라고 하여 백인인 이들이 있을 정도다. 그래서 유목민들이 세운 대제국인 유목제국들은 다민족국가가 매우 많았다.

사실 구대륙의 구석에서 살며 서로 피가 좀 많이 섞일 조건이 되었던 민족들이 아니면 농경 민족들도 이런 문제들이 좀 있지만 농경민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웬만하면 떠나지 않기 때문에[38]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인구 이동이 매우 드물었던 터라 이런 문제가 유목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할 뿐이다. 단적으로 전형적인 농경민인 독일인만 해도 외국계 귀화자가 아닌 이상 대부분이 백인들 천지인 데다 언어적으로도 모두 독일어를 쓰는 식으로 통일성이 짙다.

그에 반해 본래 유목민이던 튀르크계 민족들은 똑같이 튀르크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쓴다는 점만 제외하면 사하인[39]이나 키르기스인들은 거의 몽골인에 가까운 외모인 반면 튀르키예인이나 아제르바이잔인은 이란인에 가까운 캅카스 계통 외형을 보여주는 식의 차이가 있다. 하플로그룹 상으로도 전자가 원시 튀르크인이나 몽골족에 가까운 반면 후자는 그냥 튀르크계 언어를 쓰는 그리스인이나 이란인이나 다를 바 없다. 이는 상술했듯이 유목민들이 부족한 인구를 채우기 위해 타 민족으로부터 인력을 강제로 끌어오던 역사와 관계가 깊다. 그래서 같은 계통이라도 형질의 차이가 존재힌다.

8.3. 혈통에 대한 집착

위의 민족적 개념과 다소 모순되어 보이지만 오히려 혈통 자체에 대한 집착은 농경민보다 더욱 강하다. 부족 단위로 결속을 나타내고 법률이나 규칙을 따로 글을 통해 남기는 경우가 적다 보니 그 부족 내에서 정통성과 권위를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방법은 혈통 자체였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농경민들은 한 지역에 대대로 사는 경우가 많고 유목민에 비해서 물자가 풍부한 만큼 학문에도 투자하여 혈연 외에 지연, 학연도 자연스레 발생하지만 유목민은 떠돌아 다니는 만큼 애초 지연은 형성될 여지도 없고 문화적, 학문적 수준이 사는 환경상 발전이 쉽지 않으니 학연도 형성되기 어렵다.[40] 결국 남은 건 혈연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주치 칭기즈 칸 장남이었음에도 다음 대칸의 서열경쟁에 끼지도 못했는데 칭기즈 칸 생존 당시부터 주치는 칭기즈 칸의 생물학적인 친아들이 아니라는 의혹을 받았기 때문이다.[41] 물론 칭기즈 칸은 공식적으로 주치를 자신의 첫째 아들로 인정했고 봉토도 수여했다. 어쨌거나 이러한 혈통주의로 인해 몽골 제국의 후계국들은 칭기스 칸의 직계자손들인 황금씨족이 아니면 을 칭할 수도 없어서 무굴 제국의 건국자인 바부르는 한동안 칸이 아니라 몽골어 부마를 뜻하는 귀르겐을 칭해야 했고 에센 타이시는 이런 불문율을 무시하고 칸을 칭했다가 사방팔방에서 일어나는 반란에 시달리다가 부하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

이슬람 수니파 시아파로 갈라진 이유도 실은 여기에 있다. 이슬람 공동체를 이끌던 무함마드가 죽자 아부 바크르를 포함한 공동체의 원로들은 무함마드의 혈족이 아니면 어떠냐, 지도자 노릇만 잘하면 그만이지라는 생각으로 아무나 적합한 인물을 선출했으나 적지 않은 수의 신자들이 무함마드의 혈족이 지도자인 칼리파의 지위를 세습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충돌을 빚은 것이 교세가 두 개로 쪼개지는 내분으로 번진 것이다. 유목민인 베두인이 대부분인 당대 무슬림들의 관점에서는 무함마드의 핏줄이 아닌 사람이 칼리파를 칭하는 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악명 높은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 보어인이 반농반목의 유목민이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대부분의 보어인들은 이미 이 시기에는 정주민이 다 됐기는 했지만 같은 보어인끼리도 초기 정착민의 후예인지 아닌지로 명문가 여부를 따져 댔는데[42] 이것을 통해 보어인 사이에서도 암묵적인 차별을 벌이는 사실상의 신분제 사회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런 혈통주의적 경향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철폐 후 소수의 부유층을 제외한 보어인들의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몰락해서 빈민층이 되거나 타국으로 이민하면서 사라졌다.[43]

8.4. 음식

혹독한 환경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보르챠 육포(肉包) 같은 보존 식품이 발전하였다.[44] 고기를 말등과 안장 사이에 끼워두면 압축효과와 마찰열로 만들기 쉬웠다는 설이 있다. 안에서 불을 피우는 천막이라는 주거형태와 최대한 알뜰하게 동물을 활용해야 했던 관계로 내장, 선지나 스튜 형태의 음식 문화가 발달했다. 물론 이는 기후에 따라 달라서 추운 곳에 사는 유목민이면 비타민 보충을 위해 재료를 생식하기도 했고[45] 반대로 사막 같은 뜨거운 지역이나 온대 기후 같은 어정쩡한 기후에서 살면 재료를 오래 익혀서 먹어서 식중독을 방지하기도 했으며[46] 재료를 물이나 동물의 젖에 끓여서 수프를 만들어먹기도 했다. 이런 음식 문화는 동유럽부터 한반도까지 남아 있는데 한반도에서 유독 요리가 발달한 것이 유목민과 접점이 많았던 탓일지, 원래 한반도의 문화였는지, 몽골 지배 시절 유행하게 된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확실한 것은 농경 문화에서 나타나는 흔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도 북부는 누룽지탕이나 마라탕[47] 등의 탕 요리가 발달한 것 역시 몽골인 등의 유목민들의 영향이 적지 않다.

천막에서 항상 불을 피우는 주거 형태는 증류주 제조에도 유리했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소주도 원형은 몽골 지배 시절에 들어온 것이다.

가축의 젖을 이용한 각종 유제품이 발달하였다. 물도 부족했던 탓에 을 불에 구웠다가 재료가 담긴 통에 넣어서 음식을 찌는 요리법도 있었고 물 대신 동물의 젖을 이용해서 재료를 삶거나 를 끓이기도 했다. 영국 밀크티도 본래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홍차를 끓여마시던 방식이 변형된 것인데 이들 유목민들이 인도 아대륙에 들어와서 무굴 제국을 세우면서 인도 우유로 홍차를 끓이는 방식이 도입됐다가 이것이 다시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배하면서 영국에 전래되면서 우리가 아는 밀크티가 된 것이다. 티베트 몽골 수유차는 이것이 현지화된 것이다.

물을 구하는 문제 때문에 이슬람 같이 교리 상 을 금기시하는 종교를 믿고 있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어느 정도 음주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장 그 이슬람이 발흥한 아라비아반도에서조차 이 문제때문에 대추야자로 담근 술만은 뭐라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 창시자인 무함마드 본인부터가 메카에 살던 베두인 유목 부족 출신이라서 이런 애로사항을 잘 알아서 이것만큼은 금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48] 그 금주 교리도 어디까지나 군대의 기강을 바르게 할 목적에서 내린 임시 명령이 그대로 교리로 굳어진 것이라서 세속주의 성향이 강한 지역에서는 적당한 수준의 음주 가지고는 뭐라고 하지도 않을 정도다. 그리고 이 때문에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동유럽 튀르크계나 이란계 유목민들은 대놓고 음주를 즐기는 편이다. 몽골족들도 이 때문에 의 젖으로 담근 술인 아르히 러시아에서 수입한 보드카를 즐겨마신다.

8.5. 의복과 상업 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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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쉬라즈에서 유목을 하는 튀르크계 민족 카슈카이족

보통 유목을 하는 사람들은 옷차림도 남루하고 화려한 것과 거리가 멀다는 편견도 많지만 실제 유목민들은 화려한 장신구와 의상을 좋아한다. 특히 베두인과 같이 정해진 영역이 있는 유목민들은 대상(隊商, caravan)에 종사하거나 잉여생산물을 인근의 정착민 마을에 내다팔아 사치품을 교환하는 식으로 상업도 겸했기 때문에 의외로 부유하다.

당연히 유목민들도 사람인지라 부유한 생활을 싫어할 리 없고 단순 유목만으로는 국력 신장에 한계가 있으니 많은 유목민족들은 상업을 중시했다. 칭기즈 칸 몽골을 통일한 후에 눈을 돌린 부분도 타국과의 무역이었다. 이미 몽골 통일에 많은 국력을 소비했다고 생각한 데다 언제까지고 주변국의 어그로를 거하게 끌면서까지 약탈로만 일관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호라즘 제국으로 대규모 상단을 보내어 무역길을 트려고 했다. 다만 일이 꼬여서 상단이 약탈당하는 굴욕을 겪자 순식간에 교역로가 침략로로 바뀌었을 뿐이다(...). 미국 카우보이 코만치, 수족은 유목 생활을 하면서 키우던 등의 가축을 자주 미국 각지의 대도시나 자신들의 거주지 인근에 있는 마을에 팔아서 꽤 두둑한 돈을 만지기도 했다. 당시 의복 등에 활용하는 가죽이나 식량으로 쓸 소고기에 대한 수요가 높은 데 반해 그때만 해도 기차와 같은 운송수단이 없거나 부실했고 몇몇 지역은 아예 철도가 깔려 있지 않은 곳도 있는 관계로 많은 수의 가축을 이동시키거나 도축하고 해체하는 노하우가 있는 미국의 유목민들이 많이 각광을 받았다. 중동 베두인들도 전시 상황이 아닐 때는 이른바 캐러밴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상단을 꾸려서 유라시아 각지로 장사를 하러 다녔다.[49] 이들 베두인 상단들이 비단을 구하러 중국까지 가는 길을 개척하기도 했는데 그게 그 유명한 실크로드다.

게다가 유목민들은 정주민에 비해 집이나 가구에 대한 중요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의복에 대한 사치가 더 비중이 크다. 선비족 왕조였던 당나라 시기의 한푸, 청나라 만주 귀족 여성들의 복장이 매우 화려했던 것도 그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인 한족 왕조들은 유교의 영향으로 옷을 입는 데 있어 검소함을 추구하기도 했지만 일단 전형적인 정주민족 왕조이다 보니 집이나 가구 등에 대한 중요도가 매우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의복에 대한 사치의 비중이 적었던 면도 있다. 코만치족이나 가우초 같은 아메리카의 유목민들도 으로 된 귀걸이같은 값비싼 장신구를 주렁주렁 걸치거나 입고 다니는 판초의 무늬가 화려하다거나 하는 경향이 있었고[50] 민족은 아니지만 엄연히 유목 생활로 먹고살았던 카우보이들도 어쩌다가 한몫 단단히 챙기게 되면 삐까뻔쩍한 가죽옷에 각종 금붙이로 치장하기 바빴다.[51] 유목 생활을 하면 귀중품을 보관할 만한 안전한 영구 거처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므로 차라리 평소에 전재산을 몸에 두르고 다니는 게 나았기 때문이다. 거친 유목 사회에서 도둑맞을 가능성은 어쩌냐 싶지만 애초에 금삐까 두를 만큼 재력이 있는 유목민은 호위 가신, 식솔 몇 명 거느릴 정도 능력은 된다는 뜻이고 어디 관료제가 있는 나라에서 공인한 관직이나 작위 같은 것도 없어서 사회적으로 서열 나누기가 애매한 유목사회에선 딱봐도 '이 분은 중요하신 분이오'라고 공표할수 있는 효과도 있다.

허영만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를 연재할 때 작품에 나오던 몽골족과 기타 유목민들 소속의 귀부인 여성들의 옷차림이 화려한 것이나 갑옷을 입고 싸우는 게 오류라고 주장하는 글이 여럿 있었다. 때문에 이 책의 단행본에서 허영만이 몽골에 취재차 가서 직접 찍은 울란바타르의 역사 박물관에 전시 중인 당시 여성 귀부인 사진을 실으면서 유목민이 화려한 옷차림이나 갑옷을 입지 않았다는 건 편견이라고 일침을 가했다.[52] 일단 칼침 맞기 싫으면 전화번호부라도 찾는게 사람의 본능이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벅스킨이라고 불리는 가죽옷을 입고 다닌 이유도 이것인데 당시의 머스킷의 위력으로는 가죽을 뚫지 못했으므로 일종의 방탄복 개념으로 입고 다닌 것이다. 아라비안 나이트 알라딘 이야기에서 나오는 화려하고 노출이 많은 복장도 실제로 당시의 베두인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복장이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그런 복장들이 자취를 감춘 오늘날에도 아랍인 여성들이 두르는 히잡 부르카의 원단이 고급이거나 그 디자인이 세련된 경우는 매우 흔하다.[53]

신부 이야기에 나온 트란스옥시아나 유목민의 여성 옷차림 그림도 실제 옷차림을 보고 그린 것이다.

8.6. 문자

부족 규모의 공동체 특성 때문에 유목민들의 대다수는 문자를 발명하거나 기록의 역사를 남기지 못한 편이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유목민들이 사료를 남기지 않은 관계로 세계사를 다룰 때 그들이 유라시아 대륙에 끼친 영향에 비해 비중있게 다뤄지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오늘날 다뤄지는 유목민의 기록들은 대부분 중국과 이슬람 같은 피정복자에 의한 사료뿐이다.

그렇지만 이도 유목민 나름이라서 원조비사 같은 기록을 남긴 몽골인[54]이나 거란, 서하, 여진족, 돌궐, 만주족, 티베트처럼 국가체제가 갖춰진 후에 문자를 만든 유목민들은 많았고[55] 헝가리인이나 베두인처럼 진작 문자를 가지고 있었던 유목민도 있었다.

물론 이것들도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문자를 받아들인 거고 유목민들이 스스로 문자를 만들어 쓰는 경우는 있어 봤자 베르베르족이나 돌궐족 정도밖에 없었다. 이외에 가우초 보어인, 카자크처럼 정주 농경민이 모종의 이유로 유목민이 되었다면 농경 생활을 하던 시절에 쓰던 문자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8.7. 취수혼 등 성문화

지역에 따라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의 유목민은 혼인 시 여자가 남자의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신랑 측 집안에서 대가로 많은 선물을 하는 것이 관례다. 신부는 이렇게 몸값이 나가는 관계로 한 번 취한 신부는 남편이 죽게 되면 그 형제들이 형수를 취하는 취수혼(娶嫂婚)의 전통이 많다.

취수혼은 결혼으로 맺어진 부족 간의 동맹 관계를 깨지 않기 위한 목적[56], 과부가 된 여성의 생존과 인권, 유목인 공동체의 와해를 막는 등의 다양한 장점이 있었다. 한정된 목초지를 두고 경쟁하기 때문에[57] 이웃한 부족 간 관계는 대체로 험악했고 이를 혼인으로 푸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취수혼의 전통은 유목민뿐 아니라 알래스카인들에게도 발견된다. 농경 문명에선 보통 여자는 노동생산력이 없으면서 식량소모를 늘리기 때문에 여자 쪽에서 혼수를 하는 풍습이 많지만 유목민에겐 여성도 식량생산을 담당하는 데다 인구생산이 더 절박한 문제인 관계로 반대의 풍습이 나타난다.

때문에 장남이 신부를 데려오면 이후 형제들은 집안 형편에 따라 결혼을 못 하거나 좀 하자가 있는 여성을 싸게 데려오든가 형이 죽기를 바라야 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만다. 다만 이러한 풍습이 이누이트에게도 있다고 왜곡되는 경우가 있는데 유목민이라고 죄다 이런 게 아님을 알아두자. 이누이트 인들은 보수적이라 취수혼 같은 건 없었다는 건 아니라 극히 일부 지역, 남자가 적어서 자칫하면 그 부족이 아예 절멸할 상황 같이 어쩔 수 없이 이런 경우가 있긴 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이고 이런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 찾아보면 많다. 포르투갈이라든지 파라과이 같은 나라도 전쟁이나 여러 이유로 남자 인구가 너무 줄어서 이런 상황이 되면 노예같이 사람 취급도 안 하던[58] 이들을 자유롭게 풀어줘 백인 자유민 여자들과 맺어지게 했다.[59] 허나 몽골 제국 수립 이후 칭기스 칸 본인의 어머니가 취수혼을 당해 혈통 논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몽골에서는 이 풍습은 사라졌다고 한다.

아내를 이방인에게 빌려주는 풍습이 있다고 하지만 이는 특정한 부족의 독특한 풍습으로 일반화하는 것이 무리하다.[60] 이런 풍습이 있었다고 해도 폐쇄된 곳에서 동족혼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는 유전자를 늘리기 위한 것으로 인류학적 해석되고 있으며 단순히 성문화가 문란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마르코 폴로에 동방견문록에 의하면 몽골에는 아내를 빌려주는 풍습이 있다고 하는데 유목민들은 남녀의 주거 지역까지 나눌 정도로 성문화에 엄격했다고 한다. 애초부터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은 여러 학자에 의해 신빙성이 의심받기 때문에 이걸 일반화하기는 어렵다.[61]

사람이 부족하다 보니 걸핏하면 처녀나 남의 부인을 납치해 와서 자기 부인이나 첩으로 삼는 일도 잦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칭기스 칸의 어머니 호엘룬[62]과 부인인 보르테[63]의 경우다. 이런 납치혼 악습은 칭기스 칸이 엄금하면서 몽골에서는 근절되었지만 중앙아시아에서는 알라 카추라고 하여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9. 세계의 유목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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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가상의 유목 민족 혹은 그를 모티브로 한 것들

11. 관련 문서


[1] 어차피 이들은 아메리카이 유입되기 전까지는 유목 생활을 하지도 않았으므로 유라시아 지역 유목민들과는 달리 농경 생활을 낯설어하지도 않았다. [2] 야네로는 본래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에서 목축업에 종사하던 정주민이 오늘날의 베네수엘라 콜롬비아의 국경지대로 이주하여 형성된 민족이었다. 유럽에서는 늑대 같은 위험한 맹수들이 많이 멸절된 탓에 과 같은 상대적으로 온순한 동물을 키우기에 적합했으나 남아메리카는 선술한 이유로 인해 그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야네로들은 재빨리 을 유목의 대상으로 정했고 양모를 주로 수출했던 유럽에서와는 다르게 염장고기를 수출해서 생계를 유지했다. [3] 루마니아인의 사촌뻘 되는 라틴계 유목민이다. [4] 그리스 북부의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그리스계 유목민이다. [5] 대다수가 정주민인 튀르키예인들 중에서 유목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부류로, 아나톨리아 반도 내륙의 산악지대에 주로 거주한다. [6] 물론 과수원을 한다던가 하는 예외도 있지만 가장 통상적인 벼농사/밀농사의 경우로 한정해서. [7] 마피아나 마약상 등을 조사하면 그들 자신의 생산력은 낮아도 남의 자산을 강탈하여 부유한 경우가 분명 존재한다. 스페인 등의 식민제국도 남의 자산을 털어 본래 가진 생산력보다 훨씬 부유한 국가를 만들었던 역사가 있다. [8] 당시로선 최첨단 무기였다. 현대로 치면, 일개 부족이 서방권 국가들이 제식소총으로 채용하니 마니 하는 단계인 최첨단 차기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던 셈이다. 리틀 빅혼 전투가 일어난 시점은 남북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1876년이고 헨리 소총은 1862년에 초기 양산에 들어가 남북전쟁 내내 연방 정부 지급으론 2천정도 못 뽑았고 여유 있는 북군 장교, 병사들이 사비로 구입한것 다 합쳐도 1만정도 못 찍었을 만큼 고가의 최신 무기였던 만큼 원래부터 경제적이고 대량으로 풀렸던 M16과의 비교도 적절하지 못하다. [9] 칭기스 칸이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의형제였던 자무카와 사이가 틀어진 이유도 이것이다. 자무카의 남동생인 자이차르가 형 몰래 칭기스 칸의 부족이 키우던 가축을 도둑질하려다가 현장에서 사살되었는데 이에 분노한 자무카가 친구와의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이 일화는 절친한 친구의 동생이라도 가차없이 죽여 버릴 정도로 유목민들 사이에서 절도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0] 서부극에서 나오는 총잡이들이 순식간에 주머니에 있던 권총을 뽑아서 발사했다가 잽싸게 도로 넣는 동작이 결코 폼잡느라고 그런 게 아니다. 그 정도의 순발력이 없으면 인근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이나 갱단, (본인이 범죄자일 경우) 현상금 사냥꾼들에게 맥없이 사살당하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다들 습득했던 기술이었다. [11] 서부극에서 허구헌 날 서로에게 배신을 일삼거나 자주 결투를 벌이는 장면이 나오는 건 이 시기의 사회상을 고증한 것이다. [12] 아이마크인, 파슈툰인, 발루치인, 브라후이족 [13] 사실 전근대 시대에도 우즈베키스탄의 남부는 농경민들이 살던 곳이고 유목은 북부의 사막 지대에서 했다. 우즈베키스탄은 만주와 더불어 아시아 농경 문화의 최북단이다. [14] 정확히는 독립국가인 외몽골 한정. 중국의 내몽골 자치구와 러시아의 부랴티야 공화국은 현재 유목이 아닌 방목을 한다. [15] 아메리카이 없었던 까닭이 크다. 북아메리카에서의 유목의 역사는 이들의 영토를 침공했던 유럽인들이 데려온 말을 훔치거나 축사에서 탈출해서 야생화된 말을 다시 길들이면서 시작됐다. [16] 서부극 자체가 원래 이 시기를 소재로 하는 장르다. [17] 참고로 수우족은 본래 말을 들여오기 전까지는 농경생활을 주로 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원래의 삶으로 돌아온 셈이다. [18] 동유럽 슬라브계 유목민인 코사크족도 가우쵸와 비슷하게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의 가난한 소작농들이나 범죄자들이 모여서 공동으로 말 등의 가축을 키우고 마을을 이루며 살아갔던 데서 비롯된 민족이었다. [19]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장편 애니인 라틴 아메리카의 밤 3인의 기사에서 가우초의 생활상이 간략하게 소개되었다. [20] 클라마스족이나 체로키족, 나바호족 같이 보호구역으로 추방당한 뒤에 오히려 번성하여 부유하게 사는 부족도 있지만 이런 사례는 극히 드물다. 클라마스족의 거주지는 미국 전역에서 관광객이 몰리는 유명한 관광지인 모뉴먼트 밸리가 있는 곳이고 체로키족은 미국이 건국되기 전부터 이미 백인들의 선진적인 기술과 정치 체제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경제적인 기반이 어느 정도 있던 이들이며 나바호족들은 태평양 전쟁 당시 부족민들이 암호병으로 복무하여 막대한 공로를 세워서 그 댓가로 비옥하고 지하자원이 풍부한 곳을 보호구역으로 재할당받았기 때문에 부유하게 사는 것뿐이다. [21] 사실 이 때문에 축제나 식사를 하는 중에 무기를 드는 것도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절대적인 금기사항이었다. 칭기스 칸이 어느 정도 세력을 갖춘 뒤에 동맹 부족 사람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벌였다가 그 부족과 입씨름이 나자 양쪽이 서로 나무주걱과 빨래판(...)을 들고 패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22] 심지어 일부 유라시아 유목민들은 자기 부인과의 잠자리(!)까지 제공해 주기도 했다. 다만 이 경우에는 그 부부가 요구하는 물건을 주어야 하므로 사실상 매춘과 비슷했다. 물론 진짜 매춘처럼 다크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에서도 언급되는 풍습이다. [23] 티무르 제국의 건국으로 인해 리투아니아로 망명한 토크타미쉬 칸을 따라온 타타르족 난민들의 후손이다. [24] 하지만 시대가 발전하면서 일반적인 농민도 배우기 쉬운 총기 대포 같은 고성능의 화약 무기가 등장 함에 따라 부유한 농경 민족과 유목 민족의 차이는 더욱 더 벌어졌다. 결국 유목 민족은 기술의 발전에 따라 역사 속으로 점점 사라지게 된다. [25] 남아메리카 독립의 영웅이자 그란 콜롬비아의 건국자인 시몬 볼리바르도 독립운동 당시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근교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물라토계 유목민인 야네로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이들 중 야네로계 군벌의 수장이던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는 독립운동에서 보여준 뛰어난 성과로 인해 훗날 베네수엘라 부통령을 거쳐서 대통령으로 영전하기도 했다. [26] 그들은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만큼 상당히 권위적이었다. 몽골의 노예들을 해방시킨 사람으로 헛소문이 퍼진 칭기즈 칸도 노예를 사용했으며 # 만주인들은 오히려 만주인들이 그들의 귀족에게 노예를 자칭했다. # 청나라를 정탐한 서호수의 일기에도 만주인들이 스스로 노예라고 칭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귀족주의 국가들은 일반적으로 죄다 권위적이었다고 보면 된다. 유목민만 특이한 것은 아니다. [27] 기본적으로 유목민이 생존권을 걸고 충돌할 대상은 초지를 공유하는 옆 유목부족민이지, 정주민족이 아니다. [28] 사실 카불 칸 생전부터 타타르족과의 오랜 전쟁으로 쇠퇴의 감이 없잖아 있었다. [29] 금나라가 건국 후 요나라와 송나라를 박살내는데 겨우 12년이 걸렸다. [30] 호적에 등록된 인구는 6천만이었지만 실제 인구는 2배, 3배가 넘는 1억 5천만~2억이었다. [31] 실제로 삼국지도 정사는 제대로 된 병력 숫자가 적고 중국사에서도 제대로 된 병력이 15~20만 명 있으면 그걸 가진 사람은 중국 전체에서도 가장 강력한 편이며 결국 중국 전체의 지배자가 되기도 한다. [32] 왜냐면 중장기병은 돈이 많이 드는데 대부분의 유목 부족들은 중장기병을 대규모로 운용할 수 있는 경제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경기병을 주력으로 삼았다. [33] 문명의 요람에서 세계 4대 문명으로 알려진 곳들은 물론 아랍, 이란이나 그리스( 오스만 1세 오스만 제국 참조)까지 유목민들에 의해 넘어갔다. 오스만 제국은 유럽 덕분에 문명화가 빠르기는 했지만 처음 출발은 청과 비슷했다. [34] 청나라도 몽골 고원에서 준가르를 상대할 때 이와 비슷했다. [35] 사실 이런 경우는 정주 농경민들도 결코 자유롭지 못한 문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일제강점기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이 저지른 각종 만행들만 봐도 똑똑히 알 수 있다. 하지만 농경민들은 군주나 위정자들 개인의 정복욕이나 타국과의 무력 충돌에 대비할 목적으로 벌이는 예방전쟁을 목적으로 한 게 아니고서야 구태여 타국을 침공하는 경우가 잘 없으므로 유목민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국인과의 혼혈이 드문 편이다. [36] 페르시아 쪽 사서에서 백훈족이라고 언급되는 이들이다. [37] 러시아 추바시야 공화국에 거주하는 튀르크계 민족인 추바시인들과 동계로 추정된다. [38] 중세 유럽의 농노들이나 전근대 시대 일본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경우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던 시대에 자기 영지의 경제력을 보전하려고 영주가 농민들의 이주를 불허하던 영향도 있지만 새로 땅을 개간하는 게 아닌 이상에야 모든 삶의 터전이 고향에 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39] 러시아 연방의 구성국 중 하나인 사하 공화국의 주요 민족이다. [40] 물론 어느 정도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가령, 북아프리카 유목민인 베르베르족은 자기들의 영토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모로코 이집트, 말리 제국 같은 학문이 융성했던 나라들이 널려 있어서 추장이나 대상인의 자제들이 이들 국가의 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이슬람 신학을 익혔고 이를 통해 대학 시절부터 형성된 신학 학파별로 똘똘 뭉치기도 했다. 보어인은 본래 정주 농경민이었던 네덜란드인 이민자들이 타 대륙으로 이민하여 유목민화된 경우라서 일부 정주민으로 되돌아간 사람들이나 케이프타운 같은 도시 거주자에 한해 네덜란드 본국으로 유학을 가기도 했다. [41] 주치 칭기스 칸의 정실부인인 보르테 메르키트족에게 납치당한 뒤에 낳게 된 아이였다. 이런 가슴아픈 출생의 비밀이 있던지라 칭기즈 칸은 자기 친아들도 아닌 주치를 자기 아들이라고 선언하고 죽을 때까지 사랑으로 대했다. [42] 보어인 출신으로서 아파르트헤이트의 폐지를 위해 투쟁하다가 옥사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인 브람 피스허르가 명문가문인 피스허르 가문 출신이었다. [43] 허나 보어인도 유목민이었던 시절에는 현지의 코이산계, 반투계 혈통은 물론, 나중에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주한 말레이계 혈통과도 상당한 수준으로 혼혈을 이루었다. 그래서 형질인류학적 측면에서는 코이산족에게서 보이는 째진 눈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는 등 조상 민족인 네덜란드계 백인과는 외양이 다소 다른 편이다. [44] 실제로는 유목민이 아니더라도 혹한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들은 다들 보존 식품으로 유명했다. 수렵채집민 이누이트인들이 말린 고기를 갈아서 각종 나무 열매와 섞어만든 페미컨이 대표적이다. [45] 러시아 시베리아 지방중 북극권에 거주하는 유목민인 네네츠인들은 유목 대상인 순록을 주식으로 삼는데 워낙 먹을 게 모자라니 오만 부위를 다 먹는다.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 시베리아편에서는 김병만 일행이 네네츠인 마을을 방문하자 현지인들이 순록 한 마리를 잡아서 대접했는데 그 살코기는 물론이요 식도를 잘라 칼등으로 두들겨서 씹어먹기도 하고 심지어 순록의 피를 한 곳에 모았다가 커피 마시듯이 마시거나 그 뿔까지 정력에 좋은 보양식이라면서 벗겨먹기도 했다. [46] 남아메리카 유목민인 가우초들의 별미인 아사도 소고기를 불에 올려서 천천히 구워먹는 요리인데 웰던 수준으로 바싹 익혀먹는 것이 보통이다. 미국 카우보이들이 두툼한 소고기 스테이크를 만들어서 즐겨먹은 것이나 베두인 유목민들이 결혼식 같은 경조사 때마다 낙타 통구이를 해먹은 것도 식중독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생식을 꺼린 데서 기원한 식문화다. [47] 원래는 쓰촨성에서 기원한 음식이지만 이것이 만주 일대로 전파되면서 우리가 아는 형태로 바뀌었다. [48] 아라비아반도 오아시스가 있으니 괜찮지않느냐 하겠지만 오아시스 자체가 흔하게 발견되는 것도 아닐 뿐더러 보기에는 물이 깨끗해보여도 그 안에 메디나충이라는 기생충이 득실거려서 그냥 마실 수도 없다. 끓여마시면 문제가 해결되긴 하지만 사막이라서 땔감으로 쓸 나무도 부족하니 그럴 여유도 없다. 별 수 없이 대추야자 술이라도 마실 수 밖에 없다. 애초에 나무가 많은데서 유목을 할 리도 없으니 어지간한 유목민들은 다 이랬다. [49] 장사 목적은 아니었으나 그 베두인의 사촌뻘 되는 아랍계 정주도시민 출신인 이븐 바투타는 이런 베두인 상단들이 이용한 무역로를 따라 여행하면서 남쪽으로는 말리 제국까지, 동쪽으로는 중국까지 여행한 적도 있다. [50] 특히 코만치족은 전쟁 때마다 전사들이 여러 개의 깃털로 장식된 두건을 쓰고 나가서 적에게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기도 했다. 서부극에서 뻔질나게 나오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깃털 장식 패션도 원래는 이들의 전통 복장이었다. [51] 톰과 제리의 에피소드 중 Texas Tom에서는 이 사는 텍사스의 한 목장에 예쁘장한 암코양이가 나타나자 이에 톰이 헬렐레해서 각종 가죽옷과 모자로 치장한 패션으로 갈아입은 뒤 말아 피우는 담배를 피워대면서 암코양이를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배경이 미국 텍사스 주의 목장인 만큼 카우보이들이 패션을 중시한 것을 묘사한 장면이다. [52] 중장기사로 유명한 동유럽 헝가리까지 모히 전투에서 이긴 몽골 군대만 해도 갑옷을 잘 갖춰입었으며 당대 몽골군의 갑옷은 만주족 청나라 고려를 계승한 조선의 갑옷들과 서로 굉장히 비슷하다. 두정갑 참조. [53]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동방 가톨릭 교회의 일파인 마론파 신자라서 세속주의 성향이 강한 레바논에조차 패션 상의 이유로 일부러 히잡을 쓰거나 스카프마냥 목에 두르는 사람들이 많다. [54] 다만 현대 몽골에서는 몽골 문자는 실생활에서 별로 쓰이지 않는데 1930년대 초중반에 몽골의 독재자였던 허를러깅 처이발상의 문자개혁으로 인해 키릴 문자로 갈아탔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골 문자는 중국령인 내몽골 자치구에서 훨씬 더 많이 쓰인다. 애초에 컴퓨터 스마트폰, 타자기 등으로 문서 타이핑을 하려면 대부분의 문자들이 가로쓰기를 하는 것에 맞춰서 가로쓰기만 지원되는데 이 때문에 세로쓰기를 하는 몽골 문자가 심히 불리했던 탓에 20세기 이후에는 몽골인들도 잘 쓰지 않게 되었다. [55] 엄밀히 말해 여진, 만주족 등 퉁구스계 제족들이 일부 반유목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엄연히 말하자면 유목민은 아니다. [56] 다만 몽골 취수혼말고도 결혼동맹을 유지하거나 새로 동맹을 맺기 위해 부족 내에 마땅한 여자가 없으면 추장의 아들들끼리 의형제를 맺는 의식인 안다의 의식이 있었다. 삼국지에서 묘사되는 일반적인 의형제와는 달리 서로 간에 나이에 따른 상하관계가 있기도 하고 그런 거 없이 대등한 관계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후자는 칭기스 칸 자무카의 관계가, 전자는 이성계 이지란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57] 지금은 법으로 해결하지만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아프리카 등에서는 아직도 부족들 간의 전쟁이 일어난다. 칼과 창 대신 총을 들고. [58] 고대 로마에서는 귀족 여성들이 남성 노예들 앞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갈아입었을 정도였다. 오늘날 사람들이 애완동물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옷 갈아입는 것과 마찬가지다. [59] 파라과이 삼국동맹전쟁에서 패하면서 남자들의 수가 크게 줄어서 일부다처제를 정부에서 용인해 줄 정도였고 포르투갈 대항해시대를 맞아서 남자들이 먼 바다로 나가서 탐험이나 무역에 종사하여 여자들이 결혼할 상대가 부족해진 데다 이들이 더러 항해 도중에 사고나 해적의 습격으로 인해 죽어 버리는 경우도 다반사여서 상류층이라도 백인 아니면 어떠냐, 남자 구실만 하면 그만이지 하는 식으로 타 인종과의 결혼에 적극적이었다. 그 결과로 파라과이는 자기들이 정복했던 과라니족을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언어를 공용어로 채택할 만큼 인종 문제에 있어서 남아메리카의 그 어느 나라보다도 개방적인 나라가 되었으며 포르투갈도 인도계 수상으로 등극했을 만큼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인종차별 문제에서 꽤 자유로운 편이다. [60] 현재 티벳의 어떤 소수민족들은 이런 풍습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61] 물론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르코 폴로가 정말 중국을 방문하고 쓴 것이라고 인정하는 편이지만 전근대 시대 기행문들이 그렇듯이 동방견문록에도 코끼리를 낚아채가는 거대한 새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등의 과장된 부분이 많아서 그 내용을 100% 다 믿기는 어렵다. [62] 메르키트족에게 시집가던 호엘룬 칭기스 칸의 아버지인 예수게이가 납치해서 자기 부인으로 삼았다. [63] 칭기스 칸 메르키트족의 기습을 받았을때 납치당하여 강제로 메르키트 장수인 칠게르의 부인으로 들여보내졌고, 하필이면 그 시기에 아들 주치를 임신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주치는 평생동안 혈통문제에 시달리게 된다. 이후 자신을 구출하고자 남편이 자기 친구인 자무카와 함께 메르키트족 마을을 공격하자 즉각 자신을 강간한 칠게르를 죽여버리고 남편에게로 되돌아갔다. [64] 에이혼 가도 이전에는 유목민족이었다가 몇대 쯤에 정착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