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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03:03:24

이븐 바투타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븐 바투타
ابن بطوطة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ar%C3%AEr%C3%AE_Schefer_-_BNF_Ar5847_f.51.jpg
본명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빈 압둘라 알-라와티 앗탄지 빈 바투타
أبو عبد الله محمد بن عبد الله اللواتي الطنجي بن بطوطة
출생 1304년 2월 24일
마린 왕조 탕헤르
사망 1369년 (향년 64-65세)
마린 왕조 마라케시
직업 탐험가, 지리학자, 학자

1. 개요2. 생애3. 유럽에서의 수용4. 한국어 완역5. 문화상대주의와 문화 충격6. 일화7. 여담8.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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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ابن بطوطة, Ibn Battuta
1304년 2월 25일 ~ 1368년 / 1369년 경[1]

중세 모로코의 위대한 탐험가이자 모험가, 순례자, 상인, 여행가, 법관이다. 마르코 폴로와 같은 시대에 세계 일주를 한 사람으로 모로코 탕헤르 출신. 본명은 샴스 알 딘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븐 압달라 븐 이브라힘 알 루와티 알 탄지. 귀환 후 모로코의 술탄 아부 이난 파리스의 명을 받고 이븐 주자이를 편집자로 삼아 유명한 "여행기(리흘라)"를 써내었다. 본래 제목은 "여러 도시의 경이로움과 여행의 신비로움을 열망하는 자들에게 주는 선물"

이븐 바투타가 여행을 시작한 나이는 불과 21세로 이후 30년간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3대륙 10만 킬로미터를 종횡무진 누비며 14세기 도시와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다.[2] 또한 본인이 무슬림인만큼 여행 동기도 종교적 신의를 기반으로 시작됐기에 당시 여러곳에 토착화된 현지 무슬림들을 기록에 남겨 현대 종교학계에서도 사료로 인용된다.

원서는 전해지지 않으나 필사본이 남아있기에 그 기록이 전해지게 되었다.

2. 생애

파일:이븐 바투타 여행.png
1304년 모로코의 탕헤르의 법학자 집안으로 태어났다. 1325년 메카를 향해 순례를 떠났는데 순례를 마치고 바로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왕들의 사신과 대상을 겸하여 중동, 중앙아시아, 콘스탄티노플, 동아프리카, 남인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중국을 거치는 장대한 여행을 했다. 24년만에 집으로 돌아와서 서아프리카 말리 지역을 여행하고 다시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 모든 여정을 여행기에 자세히 남겼으며 말년엔 모로코에 돌아와 법관으로 일하다 1368년 사망하였다. 대략적인 일대기 #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해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븐 바투타는 1332년에 콘스탄티노플을 방문, 황제를 알현하였다. 당시 이븐 바투타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아나톨리아의 여러 도시를 거쳐 흑해를 건너 크림반도에 상륙, 이후 킵차크 칸국에 당도해 있었다. 이때 킵차크의 우즈베크 칸(Öz Beg khan)의 기독교인 아내였던 안드로니코스 3세의 딸 바얄룬 팔레올로기나( Bayalun Palaiologina)가 출산을 위해 고향을 방문하게 되자 우즈베크 칸의 명령으로 그녀를 수행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게 된다.[3]

마르코 폴로가 정말 중국을 오갔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경우도 있으나[4] 이븐 바투타는 워낙 그의 여행기라는 정확한 기록이 있어 그의 장대한 여행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 중세 시대 아프리카부터 중국의 대원제국까지 직접 경험한 시대상과 문화, 정치, 종교, 사회에 대해 폭넓게 기록하고 있어 매우 소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데이비드 웨인즈(David Waines)의 "이븐 바투타의 오딧세이(The Odyssey of Ibn Battuta: Uncommon Tales of a Medieval Adventurer)"에 의하면 이 양반도 워낙 장기간 여행한터라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적는 이븐 주자이에게 기억이 헷갈려 엉뚱한 이야기를 말하기도 하고 아무리 중세가 남의 글을 베껴쓰고 덧붙이고 2차 창작하는데 이골이 났다지만 자신 이전의 여행기를 참조하면서 베끼고 확장했다는 것을 알아낸 학자들과 정말 그가 중국에 갔는지 의심하는 학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읽어보면 정확한 내용도 많지만 중국의 닭이 타조만하다느니 같은 엉뚱한 이야기도 조금씩 나온다.

여행기 와중에 여자 이야기도 꽤 많이 쓰는 편이었다. 이를테면 어느 유럽 지방 여자가 예쁘더라 등등은 양반이었고, 자신이 몰디브에서 머무르는 동안 현지처가 4명에다가 여러 명의 여성 시종을 두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몰디브에서 먹는 생선이 정력에 좋아서, 매일같이 한번씩 현지처들을 찾아 밤을 보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여기서 그는 몰디브 문화에 대한 부연설명을 하는데, 외지에서 몰디브로 선박이 들어오면 선상 사람들이 이곳 여성들과 결혼하는데, 떠나게 되면 곧 이혼한다는 이야기와 함께 자신 역시 몰디브에서 여러명의 여성과 결혼하였다라는 이야기도 남겼다.

3. 유럽에서의 수용

이븐 바투타 사후 중동 특히 그의 모국인 모로코에서 큰 인기를 누린 것으로 추정되며 아랍 여행자이자 탐험가인 울리히 야스퍼 시첸과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중동 여행중에 "여행기"의 축약본을 구입했고, 이후 많은 유럽 학자들이 축약 출판물에서 "여행기"의 일부를 발췌해 번역했다. 영국에서는 사무엘 리가 1829년 "아랍어 축약판으로 번역한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발간했고, 프랑스에서는 1830년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완벽한 형태의 "여행기"가 발견되어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옮겨져 번역되었다. 그리고 1853년 - 1858년까지 번역, 4권으로 출간되었다.

4. 한국어 완역

명성에 비해 한국엔 그다지 많이 알려져있지 않았는데 이는 국내에 아랍어 전공자가 드물어 그의 여행기를 번역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역판이나 영역판을 한국어로 중역해서 소개하는 정도였는데, 정수일이 2001년 원문을 한국어로 완역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로는 이곳저곳에 많이 소개되는 편이다.

정수일 교수에 의하면 초역본은 그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간된 바 있으나 아랍어 원본 완역은 프랑스어, 영어에 이어서 자신의 한국어 번역이 세계에서 세 번째라고 한다.[5]

5. 문화상대주의와 문화 충격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문화상대주의 따위는 없었던지라, 여행한 지역의 토착민들의 문화가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야만인 취급을 곧잘 하곤 했다.

예를 들어 말리 제국에서는 '금과 자원이 넘쳐나는 자원이 풍부한 제국이자 신실한 이슬람 국가'라는 이미지를 기대했지만, 도착하고보니 말리의 종교 문화는 이슬람교와 아프리카 토착 종교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융합되어 있는, 좋게 보자면 종교의 다양성이 있는 사회지만 그의 눈에는 이교도가 판치는 사회였다. 말리의 여자들은 히잡 등 머리카락을 가리는 의상을 입지 않았고, 유부녀가 외간 남자와 거리낌없이 대화할 수 있었으며, 여성이 자신의 이름으로 사유지를 소유할 수 있는 등 자주성을 가졌다. 역시나 이 또한 현대의 시각으로는 성평등적인 사회지만 그의 눈에 말리는 '야만적이고 문명화가 덜 된' 모습이었고, 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말리 제국의 환상을 철저히 박살냈다고 그의 여행기는 말하고 있다.

결정적인 것은 당시 말리의 황제였던 만사 술레이만의 행보였는데, 어마어마한 부를 거머쥔 황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먼지로 뒤덮인 꼬질꼬질한 일개 병사 두명과 눈을 맞추며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모습은 바투타에게 큰 충격이었다. 또한 황제를 직접 알현한 자리에서 이븐 바투타는 빵덩어리 세 조각과 구운 소고기, 그리고 발효된 크림을 대접받았는데, 이는 말리에서 전통적으로 여행객에게 대접하던 음식이었다. 그러나 돈과 황금 등의 선물을 기대했던 바투타는 이를 보곤 실망한 나머지 비웃음을 크게 터뜨렸다고 한다. 사실 금을 주지 않은 말리 제국도 그 이유가 있었는데, 당시 말리는 고립 정치를 하고 있었기에 외부 영향을 피하고 금을 외교 관계에서 더욱 유용하게 쓰기 위해서 외국인에게 금광의 위치를 알리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현대인들의 관점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법학 지식이 풍부했던 이븐 바투타는 여행간 지역에서도 법관으로 일하면서 풍족하게 먹고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한 연유로 자신에게 풍족하게 잘 해주었던 지역 관련해서는 술탄이 영웅호걸이다 지역 주민들이 신앙심이 깊다 정직하다 등등의 갖가지 칭찬을 써놓았지만,[6] 상술한 말리 같은 경우에는 어마어마하게 부유한 국가라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건만 자신이 기대하던 만큼 대접해주지 않았는지[7] 감정을 담아 부정적인 기록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여행지에 대한 개인 감정에 따라 어조를 바꿔서 서술하는 편이었다. 그가 방문하고 장기체류했던 몰디브 역시 이슬람을 믿었지만 아무도 히잡을 쓰지 않고 현지인 여성 대부분이 배꼽부터 무릎까지만 가리고 상반신을 노출하고 다녔는데도 불구 몰디브인들이 매우 신앙심이 깊고 정직하다는 등등 칭찬 위주의 서술을 남기기도 했다.

즉, 이븐 바투타의 이러한 편향적인 서술 또한 그가 여행한 지역의 신변잡기나 정치경제적·문화사회적 현황, 그리고 당대 현지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몇 안되는 귀중한 1차 사료라 할 수 있다.

6. 일화

항구 쪽에서 파로스 등대 쪽으로 가보았더니 등대의 한쪽 벽은 이미 무너져버렸다. 등대는 하늘 높이 솟은 방형건물로서 문은 지상에 나있다. 문 앞에는 문높이의 건물 한 채가 있는데, 그 사이에는 나무판을 가로질러놓아 문으로 통하게 하였다. 나무판만 치우면 속수무책이다. 문 안에는 등대지기가 앉을 자리가 하나 있고 등대 내부에는 방이 꽤 많다. 등대 내 통로의 너비는 9 쉬브르[8]이고 벽 두께는 10 쉬브르이며 등대 네 변의 너비는 각각 140 쉬브르에 달한다. 등대는 높은 언덕 위에 서 있는데, 시내까지의 거리는 1파르싸호[9]에 달한다. 등대는 삼면이 바다로 에워싸인 길쭉한 육지에 세워져 있고, 바다는 성벽이 잇닿아 있다. 그래서 육지에 있는 이 등대로 가려면 시내 쪽에서 가야만 한다. 등대에 연결된 지대가 바로 알렉산드리아시의 전속 묘역이다. 1349년에 내가 마그리브로 돌아가는 길에 이 등대에 다시 들렀더니, 등대는 이미 폐허가 되어 들어갈 수도, 문까지 오를 수도 없었다.
바위의 돔은 참말로 기이한 구조물로서 견고하면서도 이채로운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기실 좋다는 점은 다 가지고 있으며, 기교란 기교는 다 부린 성싶다. 이 돔은 사원 한가운데의 언덕바지에 있는데, 대리석 계단을 밟고 올라간다. 문이 네 개 있고, 주위는 대리석을 잘 다듬어 깔았다. 내부도 마찬가지다. 겉이건, 안이건 간에 갖춰놓은 갖가지 화려한 장식은 이루 다 형언할 수가 없다. 대부분 도금을 하여 눈부시게 반짝이며, 보는 사람마다 황홀해지니, 이 모든 것을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다.
이스파한 사람들은 용모가 준수하고 살색은 밝고 흰데 불그스레한 빛이 약간 돈다. 사람들은 모두가 용감하고 기개가 있다. 음식에 한해서는 모두가 너그러울 뿐만 아니라, 경쟁심이 대단하다. 그러다보니 여러가지 이상야릇한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다. 가령 한 사람이 친구를 청해서는 '나와 함께 가서 난과 우유를 좀 맛보게'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가보면 갖가지 요란스러운 음식을 내놓고 대접하면서 은근히 자기를 과시한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는 요인들도 그러하거니와 모든 이들이 웃어른을 우대한다. 총각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음식 잔치를 성대히 벌여놓고 자신들의 능력을 뽐내기도 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야기하기를 총각 한 패가 다른 패를 정해서 촛불에 음식을 지어주었더니, 이번에는 후자가 전자를 청해서는 비단불에 음식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우리는 차려놓은 음식을 들었다. 주식은 버터에 볶은 쌀밥인데, 큰 나무쟁반에 담았다. 밥 위에는 쿠샨을 얹었다. 쿠샨이란 닭고기와 기타 육류, 물고기와 채소 등으로 만든 일종의 혼성 반찬이다. 그들은 한 그릇에는 덜 익은 바나나를 갓 짜낸 젖에 섞어놓고, 다른 한 그릇에는 발효된 젖을 담는데, 그 위에 절인 레몬과 절여서 시큼짭짤한 후추송이 그리고 푸른 생강과 망고를 얹는다. 이 곳 망고는 사과 비슷한데, 씨가 있다. 익으면 맛이 대단히 좋아서 과실로 먹으며, 익기 전에는 레몬처럼 시큼하여 식초에 절인다. 그들은 밥을 한입 먹고는 꼭 이러한 신 과실과 시큼하게 절인 채소를 곁들인다. 모가디슈 사람들은 어찌나 많이 먹는지 한 사람이 먹는 양이 보통 우리네 몇몇 사람이 먹는 양에 맞먹는다. 그러다보니 몸집이 크고 비대할 수밖에 없다.

7. 여담

말리에 체류하던 당시 식인을 하는 부족 관련한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중략) ... 대노한 술탄은 외국에서 온 백인 법관을 식인종들이 사는 불신자들의 지방으로 추방해버렸다. 그곳에서 4년간 살게 한 후 법관을 귀환시켰다. 그곳의 불신자들은 백인들을 잡아먹지 않는다. 왜냐하면 백인은 설익어서 먹으면 해롭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흑인들만이 익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잡아먹는 일군의 흑인들이 술탄 만사 술레이만을 찾아왔다. 그들의 추장도 함께 왔다. 통상 그들은 귀에 큰 귀걸이를 달고 다니는데, 귀걸이 직경은 반뼘이나 된다. 그들은 비단이불 같은 것을 쓰고 다닌다. 그들의 고장에는 금광이 있다. 그래서 술탄은 그들을 환대하면서 대접으로 시종 한 명을 하사하였다. 이후 그들은 술탄이 하사한 시종을 잡아먹고서는 얼굴과 손에 피를 바른 체 술탄을 찾아와 사의를 표하였다.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은 통상 그렇게 그들에게 파견되는 사람을 처치한다고 한다.

인도의 정치가 자와할랄 네루는 자신이 딸에게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쓴 세계사 편력에서 이븐 바투타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행가로 꼽았다.

아랍에미레이트(UAE) 두바이에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이븐 바투타 몰'이 존재하며, 각 구역마다 이 사람이 여행했던 국가들을 테마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으며 구조물도 있다. 그러나 본질이 쇼핑몰인 것은 변치 않는다.

모로코의 대도시 탕헤르에는 그의 이름을 딴 탕헤르 이븐 바투타 국제공항과 종합경기장 '스타드 이븐 바투타'가 존재한다. 최대 수용 가능 인원이 65,000명에 달한다.

8. 대중매체



[1] 구글에서 검색하면 1377년 사망이라고 나오기도 한다. [2] 그래서 2001년 국내 정식 번역 이전에는 3대륙 주유기라는 이름으로 인용되기도 했다. [3] 다만 아야 소피아 내부는 황제에게 성당에 들어가보고 싶다고 요청했으나, 본인이 무슬림인 만큼 십자가에 예를 표할 수 없었기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4] 하지만 주류 역사학계는 마르코 폴로 역시 중국에 다녀온 것이 맞다고 보고 있다. 당시의 중국 제국인 원나라 측에서 마르코 폴로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야 수많은 외국인들을 정복해서 포로로 데리고 있던 세계제국이던 원제국에서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에서 딱히 이름을 날릴 전공을 세웠거나 재주가 있던 인물은 아닌지라 그냥 일개 듣보잡 색목인 정도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일부 과장된 내용을 제외하면, 원나라 당시에 행해졌던 여러가지 군사 문화 등, 직접 가보지 않으면 모르는 내용들이 동방견문록에 많이 실려있기 때문이다. [5] 처음에는 두 번째라고 소개했으나, 영어 완역판의 존재가 확인된 이후 정정했다. [6] 이븐 바투타가 일행들과 함께 델리 술탄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현지인 관리들이 요리사 20명을 붙여주었는데,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븐 바투타는 델리 술탄국의 관리들이 유능하고 청렴강직한 사람들이라는 서술을 덧붙였다. [7] 이 외에도 말리에 입성한 초창기에 자신을 포함해서 함께 여행하던 사람들 여섯 명이 배탈이 났는데 이 중 한 명은 결국 죽었고 이븐 바투타도 2달 동안 사경을 해멨었다고 한다. [8] 1쉬브르는 약 22.5cm다. [9] 약 6.24km. [10] 이는 선지자 무함마드가 식량이 떨어졌을 때 추종자들에게 모래를 쥐어주었더니 밀가루죽이 되었다는 일화에서 유래했다. [11] 이걸 '칫솔나무'라고 하는데 가지를 잘라서 이를 닦는 칫솔 용으로 쓴다. 지금도 아라비아 반도의 일부 유목민들은 이 나뭇가지를 상비용으로 구비해놓고 식후나 수시로 사용한다. [12] 사실 엄청난 양의 빗물과 유량을 생각해보면 독초의 독보다는 각종 세균에 오염된 물 때문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13] 말이 이렇지 이븐 바투타 역시 굳이 알리나 아부 바크르의 이름 따위 부르지 않아도 탑이 흔들린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장난으로 탑을 흔들고 있는 걸 보자 그만두라고 말했다는 말도 있다. [14] 물론 저렇게 대놓고 말하진 않았고 손으로 술탄이 잡고 있는 금과 은으로 된 술병을 가리키며 '당신은 금욕과 청렴으로 유명한 술탄 아흐마드의 후예입니다. 당신의 권위에 대해서는 비난의 여지가 없지만 저것들만큼은 비난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5] 아침에 나무에 올라가 꽃을 살짝 잘라낸 다음 거기에 작은 통을 매달아두면 야자꿀이 흘러나온다. 저녁에 다시 올라가 물로 깨끗이 씻어준다음 통을 갈아주고 다시 상처를 내어 이를 여러 차례 반복하면 상당한 양의 꿀이 만들어진다. [16] 야자에 쇠붙이를 찔러넣어 휘저어주면 하얀 액즙이 나오는데, 이를 물에 타면 맛이 꼭 우유맛으로 영양가가 높다. 일부 사람들은 부식으로 삼아 먹기도 한다. [17] 떨어진 야자열매를 껍질을 벗겨 잘게 썰어 햇빛에 말린다. 말린 야자를 솥에 넣고 찌면 기름이 나오는데 등유로도 쓰고 머리에 바르기도 한다. [18] 이때 이슬람식으로 새알을 삶지 않았다고 다른 사람들을 책망했는데 그러자 재수없었는지 더이상 그 사람들이 이븐 바투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는 말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