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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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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 제국
Mali Empire
파일:540px-Flag_of_the_Mali_Empire.svg.png
왕실기[1]
1230년 ~ 1670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가나 제국 송가이 제국
위치 <colbgcolor=#fff> 서아프리카
수도 니아니 -> 캉가바[3]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만사[4]
주요 황제 순자타 케이타 (초대)
만사 무사 (제9대)
언어 마닌카어, 만딩고어, 풀라어, 보조어 등
종교 이슬람교 (국교)
아프리카 토착신앙
면적 1,100,000km2 (1380년)
주요사건 1230년 건국
1610년 마흐무드 케이타 4세 사후 분열
1670년 멸망
통화 [5]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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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키나파소|]][[틀:국기|]][[틀:국기|]]

1. 개요2. 역사
2.1. 건국 이전2.2. 제국 전기
2.2.1. 건국2.2.2. 영토 확장
2.3. 황금기
2.3.1. 만사 무사2.3.2. 슐레이만 케이타
2.4. 제국 중기
2.4.1. 쇠퇴의 시작2.4.2. 쇠락의 연속
2.5. 제국 후기
2.5.1. 멸망과 분열
3. 정치4. 경제5. 사회6. 아프리카에 존재하는 국가 말리와의 관계7. 역대 군주8. 기타

[clearfix]

1. 개요

13세기에서 17세기까지 존재했던 서아프리카의 제국.

2. 역사

말리 제국은 1230년 순디아타 케이타가 세웠다. 이후 유능한 황제들을 배출하며 빠른 속도로 영토를 확장했고, 지중해권, 아랍권 국가들과 끊임없이 교역한 덕분에 전성기 시절에는 서아프리카 대부분의 부족들을 거느리는 대제국을 이루었다. 특히 만사 무사와 슐레이만 케이타 시절에 황금기를 구가했으며 당시에는 황금의 제국이라는 이명답게 엄청난 황금 생산량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슐레이만 케이타 황제 사후 서서히 국력이 쪼그라들기 시작했으며, 이후 300여 년 동안 꾸준히 그리고 서서히 쇠락했다. 마지막 황제인 마흐무드 케이타 4세 사후에는 나라가 3개로 쪼개졌고, 결국 밤바라인이 세운 바마나 제국에게 멸망당했다.

대중적으로 말리 제국은 만사 무사의 황금 순례 일화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14세기 초 말리 제국은 홀로 전세계 황금 생산량의 절반을 책임질 정도로 무지막지한 양의 황금을 채굴했다. 그야말로 막장화된 말리의 현 상황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말리 역사의 최전성기였다.

말리 제국은 글로 된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에 당대 말리 제국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는 크게 3명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첫 번째가 14세기경 말리 제국을 방문했던 북아프리카의 여행가 이븐 칼둔이고, 두 번째가 역시 14세기의 모로코 여행가 이븐 바투타이며, 그리고 마지막이 16세기 모로코 여행가인 레오 아프리카누스이다. 그 외 서아프리카 전통 구술 역사가인 그리오(griot)들에게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 또한 말리 제국의 역사를 담은 중요한 사료이고, 또한 고고학적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2.1. 건국 이전

현재의 말리 지방에는 대략 기원전 1만년 이전부터 인류가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당시 사하라 지역은 지금과 같은 척박한 사막이 아니라 나름대로 풍요롭고 비옥한 지역이었던지라 식량 생산량이 풍부했고, 사람들은 나이저 강 등 강가 주변에 도시를 짓고 살아갔다. 특히 기원후 6세기경부터는 풍부한 금과 노예 등을 사하라 사막 건너편에 있는 아랍 지중해 국가들과 교역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덕분에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대제국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카라반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서아프리카 일대에 지중해권과 아랍권의 발달한 문화가 흘러들어오자 본격적인 왕국들이 생겨났다. 가장 먼저 서아프리카의 패권을 잡은 국가는 소닝케족이 세운 가나 제국[6]이었다. 대략 기원후 300년 경에 생겨나 1200년대까지 존속한 가나 제국은 모리타니 일대를 중심으로 번영했으며, 제국의 수도인 쿰비살레에는 30,000명이 넘는 인구가 거주할 정도였다. 그러나 소닝케족이 이슬람교를 믿지 않고 토착 신앙을 고수한다는 이유로 인근의 알 모라비드 왕조가 가나 제국을 침공했고, 여기에 급속한 사막화와 내분이 겹치면서 가나 제국은 빠르게 쇠퇴했다. 넘치는 황금으로 메웠던 경제는 급속도로 쪼그라들었고, 지중해권과 통하는 교역로는 다른 부족들과 왕국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결국 가나 제국은 11세기 경 거의 망한 상태로 전락했다.

2.2. 제국 전기

2.2.1. 건국

파일:Tombouctou.jpg
파일:67f0111a13ad73bafa383fbe9a681302.jpg
팀북투의 전경. 말리 제국 시기 대도시의 모습이다. 순디아타 케이타의 궁정
말리 제국을 세운 만딩카족은 말리의 만딩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살던 민족이었다. 본디 만딩 지역은 가나 제국의 사냥꾼들이 이주해와 개척한 지역으로, '캉가바'라는 이름으로 가나 제국 통치하에 있는 평범한 지방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가나 제국이 쇠락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캉가바 지역은 가나 제국에게 반기를 들어 독립을 선언하고 따로 떼어져 나갔으며, 이 지역은 총 12개의 소왕국들로 쪼개졌다. 이 소왕국들은 크게 2개로 분류되었는데, 북동쪽에 있는 왕국이 다스리는 영토들을 묶어 '도도구' 지방이라고 불렀으며, 남서쪽에 있는 영토들을 '크리' 지방이라고 불렀다. 이 중 크리 지방에 있는 소왕국들 중 하나였던 니아니 왕국에서 훗날 말리 제국의 개국군주가 될 순디아타 케이타가 태어나게 된다.

순디아타 케이타는 니아니 왕국의 '파마(Faama)'[7]인 마간 콘 파타[8]와 그의 두 번째 아내 소골론 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9] 그의 부모는 어머니의 이름인 '소골론'(Sogolon), 아버지의 앞이름인 '자타'(Djata)를 합쳐서 자식의 이름을 지었다. 당시 만딩카식으로 이름을 합쳐서 지었더니 '손드자타'(Sondjata)가 되었는데, 이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고 또 전해지다보니 결국 그의 이름은 '순디아타'로 전해지게 되었다. 순디아타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위대한 정복자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예언을 받았으며, 때문에 왕국의 모든 사람들은 그가 커서 아버지의 왕위를 물려받기를 바랐다.[10] 그러나 아버지인 마간 콘 파타가 일찍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첫째 아내의 아들인 단카란 투만이 순디아타를 제치고 새로운 왕이 되었다. 단카란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던 순디아타가 자신의 왕위를 빼앗을 것을 염려하여 순디아타와 그의 어머니를 내쫒았고, 순디아타는 여기저기를 방랑하며 고달픈 삶을 살았다.

당시 망해가는 가나 제국을 꺾고 서아프리카의 새로운 패자로 떠오른 자는 소쏘 왕국의 수마오로 국왕이었다.[11] 수마오로 왕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옛 가나 제국의 이곳 저곳을 모두 정복해나갔으며, 분열되어 있었던 소왕국들은 맥을 추지 못하고 쓸려나갔다. 이들 중에는 순디아타를 쫒아낸 단카란 투만이 다스리던 니아니 왕국도 있었다. 단카란 투만은 수마오로에게 자신의 여동생을 첩으로 바칠 것을 제안하기까지 하면서 생을 연명하려 시도했으나, 수마오로는 무자비했고 니아니 왕국과 수도 니아니는 폐허가 되었다. 한편 어머니인 소골론과 함께 아프리카 곳곳을 전전하던 순디아타는 먼저 가나 제국의 옛 수도인 와가두를 찾아갔다. 그 이후에는 쇠약한 어머니를 위해 공기가 좋다고 소문한 도시 메마로 향했으며, 그 곳에서 용맹을 발휘하며 메마의 왕으로부터 메마의 후계 자리를 약속받았다. 순디아타는 이를 기반으로 점차 힘을 키워나가며 결국 키리나 전투에서 수마오로와 소쏘 왕국을 꺾는 데 성공했고, 이후 활발한 정복 활동을 통해 말리 제국의 초대 황제로 등극하며 고향인 니아니를 재건했다.[12]

순디아타는 자신이 속한 케이타 가문의 이름을 따 자신의 왕조를 '케이타 왕조'라고 불렀다. 후대의 말리 황제들은 대부분이 케이타 가문에서 배출한 황제들이었다. 어쨌든 순디아타는 즉위 직후부터 활발한 정복 활동을 통해 빠른 속도로 서진했고, 오늘날의 감비아, 세네갈, 기니비사우 지역까지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그가 거느린 장수들 중 제일이라 불렸던 티라마칸 트라오레 장군은 마지막까지 소쏘 왕국의 편에 서서 순디아타에게 대항했던 졸로프와 바이누크인들을 꺾고 옛 가나 제국의 전성기보다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는 공로를 세우면서 이름을 날렸다. 순디아타 황제와 트라오레 장군의 엄청난 정복 활동 덕분에 순디아타 케이타 황제 재위기의 말리 제국은 이미 만딩카족들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수많은 부족들을 아우르는 거대한 대제국으로 발돋움했다.

2.2.2. 영토 확장

순디아타 황제가 사망한 직후의 말리 제국은 한동안 제위 계승 다툼으로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귀족들과 군대, 궁정 노예들 사이에서 권력 다툼이 일어났고, 순디아타의 아들 왈리 케이타가 '울리 1세'로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 14세기 말리 제국을 방문했던 북아프리카의 여행가 이븐 칼둔은 울리 1세를 훌륭한 통치자였다고 평가했지만 그가 술탄 바이바르스 시기에 메카 성지순례를 떠났다는 것을 제외하면 정작 울리 1세에 대한 구체적인 사료는 남아있지 않다. 울리 1세를 이어 그의 형제 만사 와티가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1270년부터 1274년까지 약 5년 간 재위한 만사 와티에 대한 기록은 아예 남아있지 않아 밝혀진 것이 없다. 만사 와티 사후 즉위한 황제는 만사 칼리파였다. 그러나 그는 신하들에게 재미로 활을 쏘는 등 어이없는 짓거리를 하며 폭정을 행하여 민심을 잃었고, 결국 신하들의 반란으로 내쫒겨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만사 칼리파가 쫒겨난 이후 황제로 등극한 사람은 순디아타의 딸 쪽 피를 물려받은 아부 바크르였다.[13] 아부 바크르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아부 바크르 다음으로 황좌를 거머쥔 사람은 궁정 노예 출신인 사쿠라였다. 뛰어난 능력으로 혼란스러운 말리 제국 내부를 진정시킨 사쿠라는 해방 노예 출신이라는 극악한 패널티에도 불구하고 제위를 공고히 하는 데 성공했으며, 오히려 제국의 영토를 늘리고 지중해권 및 아랍권과의 무역을 대대적으로 진흥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14] 그러나 사쿠라는 메카로 성지순례를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불만을 품은 귀족에게 살해당했으며, 사쿠라 황제가 암살당한 이후 황위는 다시 시조 순디아타의 피를 이은 케이타 일족에게 되돌아갔다.

사쿠라 황제 암살 직후 황위를 이은 가오 케이타는 제2대 만사 울리 1세의 아들이었다. 가오 케이타가 죽자 그의 아들 무함마드 이븐 가오 케이타가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무함마드는 대서양으로 2차례나 대대적인 탐험대를 파견한 것으로 유명하다. 첫 번째 원정이 처참한 실패로 끝나자 흥분한 무함마드는 2번째 원정에는 아예 자신이 친히 원정대에 참여하여 길을 떠나 대서양으로 향했고, 자신이 돌아올 동안 국정은 순디아타의 형제의 손자인 칸쿠 무사에게 맡겼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원정에서 끝끝내 돌아오지 않자 궁정의 신하들은 자연스레 무함마드가 죽은 것으로 간주했고, 결국 황좌는 그동안 국정을 돌보던 칸쿠 무사에게 돌아가니 이 자가 바로 그 유명한 만사 무사였다.

2.3. 황금기

2.3.1. 만사 무사

파일:768DABBD-B619-4CE2-A961-C1360FD5490A.jpg
만사 무사의 순례길
말리 제국의 제9대 만사인 만사 무사, 혹은 무사 케이타 1세[15]는 말리 제국의 황금기를 이끈 위대한 황제였다. 1312년경[16]에 황제에 즉위한 만사 무사는 상당히 신실한 무슬림이었기에 이슬람교를 말리 제국에 제대로 이식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는 귀족들이 자연스레 이슬람교를 '고급스러운 종교'로 인식하게 만들어 귀족층과 지배층들이 이슬람교를 믿도록 했지만, 토속 신앙을 유지하고자 하는 바람이 강했던 평민층이나 하류층에게는 이슬람을 강요하지 않으며 평화로운 공존 정책을 폈다. 만사 무사의 이슬람에 대한 열정은 꽤나 굉장했다. 라마단의 끝을 알리는 '이드 알피트르'를 국가적인 대축제로 만들었고, 전국에 수많은 모스크들과 대학을 세워 그곳에서 이슬람 신학을 논하도록 했다. 만사 무사는 개인적으로도 아랍어를 자유자재로 읽고 쓸 수 있었으며 팀북투 등 대학들이 밀집한 도시에 학문을 장려하면서 중세 말리의 문화를 꽃피우는 업적을 남겼다.

만사 무사가 여러 말리 황제들 중 가장 유명한 이유는 엄청난 황금과 부 때문이다. 만사 무사는 1324년부터 1326년까지 메카를 향해 성지순례를 떠났다. 이 순례길에서 만사 무사는 최소 500여 명의 경호원에 몇 만명에 달하는 시종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는데, 이들 모두에게 1인당 1.5kg에 달하는 황금을 주어 치장하게 하고 들르는 도시마다 여러 물건들을 사도록 했다.[17] 또한 짐을 옮길 100여 마리의 코끼리, 수 백마리의 낙타를 함께 끌고 다녔으며, 이들 역시 등마다 황금을 그득그득 이고 있었다는 소문이 전해져 내려온다. 그는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를 통과하면서 튀르키예 에티오피아의 노예 소녀들을 사들이는 등 말그대로 금을 물쓰듯이 써댔는데, 만사 무사가 하도 많이 금을 뿌려댄 탓에 금값이 대폭락해서 이집트는 12년 가까이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당시 만사 무사가 얼마나 많은 금을 썼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만사 무사가 메카로 성지 순례를 떠나면서 지나칠 정도로 많은 돈을 쓰고 행렬을 화려하게 치장한 것은 당시 낙후된 지역으로 알려져 있던 말리 제국을 지중해권과 아랍권에 제대로 된 문명국이자 강대국으로 각인시킬 목적도 있었다. 그의 계획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고, 만사 무사가 금을 물쓰듯 순례를 했던 덕에 아랍인들과 유럽인들은 '저 아프리카 어딘가에 황금이 넘치는 대제국이 있다더라'라는 식으로 말리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되었다. 만사 무사의 순례길이 얼마나 이집트인들에게 큰 충격으로 남았던지 이 이야기는 저 지중해를 넘어 베네치아의 상인들에게까지 전해지면서 약 몇 백여년 동안 오래오래 남아 말리에 대한 환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만사 무사는 순례 이후 말리로 돌아온 이후에도 학문 진흥과 국력 강화에 힘쓰며 10여 년 간을 더 재위했다. 그는 메카로 순례를 떠났을 때 아랍에서 데려온 건축가들에게 명령해 제국의 중심도시였던 팀북투 가오에 새로운 대학과 도서관, 궁전들을 대거 지었다. 특히 만사 무사의 재위 말년에 이르자 말리의 상코레 대학은 그야말로 완벽한 대학의 면모를 갖추면서 아프리카 최대의 대학들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상코레 대학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타 소실된 이래 아프리카에서 가장 거대한 도서관이었으며, 약 25,0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었고, 100만 권에 달하는 장서들을 소장하면서 이슬람 신학과 과학, 문학 등에 있어서 말리 제국의 황금기를 찍었다.

다만, 14세기 중동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의 기록과 말리의 구술 역사가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토대로 만사 무사가 지나친 과소비를 자행하여 말리 제국의 쇠락을 초래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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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슐레이만 케이타

만사 무사가 1337년에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마간 케이타 1세가 새로운 황제에 올랐다. 마간 케이타 1세는 호부견자의 전형으로, 폭군 만사 칼리파 이래 최악으로 무능한 황제로 꼽힐 정도로 정치력이 형편없었다. 그러나 만사 무사를 포함한 전대 황제들이 이룩해놓은 황권이 워낙에 강력했던 덕에 마간 케이타 1세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당시 말리 제국에는 별 일이 없었으며 황위는 평화롭게 1341년에 슐레이만 케이타에게 넘어갔다.[19] 슐레이만 케이타는 즉위 직후부터 마간 케이타 1세가 망쳐놓은 재정을 다시 복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슐레이만 케이타는 황금 채굴량을 늘리고 지중해권 및 아랍권과의 교역로를 확충하였으며, 국내 경제 안정을 위해 내수 시장을 활성화기도 했다.

슐레이만 케이타의 업적은 경제적인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군사적인 면에서도 굉장히 능했다. 국외에서는 풀라족이 타쿠르 지방을 침공해들어오고 내부에서는 전처 카사 여왕이 장군들과 결탁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기도 했으나, 슐레이만 케이타는 이 모든 것을 빠르게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황권이 안정되었음을 과시하기 위하여 만사 무사의 뒤를 이어 성공적으로 메카로의 성지순례를 완수했고, 이 과정에서 순례길 곳곳에 궁전을 세우거나 헤자즈에서 가지고 온 신성한 율법 두루마리들을 보관할 도서관들을 건립했다. 만사 무사의 뒤를 이어 말리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슐레이만 케이타가 저지른 유일한 실책은 세네갈 지역의 딜로프 지방의 반란을 막지 못한 것이었다. 당시 딜로프 지방에 거주하던 토착민들인 올로프족들은 말리 제국에 반란을 일으켜 1350년대에 졸로프 제국을 세워 떨어져 나갔고, 슐레이만 케이타는 이를 막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리 제국은 당대 서아프리카 최고의 패권국이자 번영을 구가하는 대제국이었으며, 그의 재위기인 1352년에 말리를 방문한 이슬람 탐험가 이븐 바투타는 말리 제국을 아름답고 강성한 국가로 묘사했다.

2.4. 제국 중기

2.4.1. 쇠퇴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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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지도 '카탈란 아틀라스'에 황금의 나라로 묘사된 말리 제국
슐레이만 케이타는 1360년에 사망했다. 슐레이만 케이타 사후 말리 제국은 오랜 전성기를 끝내고 조금씩, 그리고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당시 말리 제국은 수많은 부족들로 이루어진 다민족 제국이었고, 제국의 경제는 지중해권, 아랍권과의 무역로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슐레이만 케이타 이후 대대로 무능한 황제들이 즉위하면서 제국의 통치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무역로들을 타 왕국과 부족들에게 빼앗기면서 말리 제국은 빠른 속도로 곳곳에 금이 갔다.

슐레이만 케이타가 죽은 직후 황위에 오른 자는 만사 캄바 케이타였다. 그러나 캄바 케이타는 즉위 후 9개월 만에 초스피드로 쫒겨났다. 캄바 케이타를 쫒아낸 이는 마간 케이타 1세의 아들들 중 하나였던 마리 자타 케이타 2세였다. 그러나 마리 자타 케이타 2세의 통치는 재앙에 가까울 정도로 처참했다. 그는 폭압적으로 황권을 휘두르며 민심을 잃어버렸고, 극도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면서 말리 황실의 재정을 파탄냈다. 다만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만은 잃지 않았던지 저 멀리 모로코의 아부 하산 왕에게 기린을 선물로 보내는 등 말리 제국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고 전해진다. 마리 자타 케이타 2세는 1372년 중병에 걸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졌고, 1374년에 죽을 때까지 그 대신 신하들이 대신 국정을 돌보았다.

마리 자타 케이타 2세는 결딴난 국가 재정이라는 큰 똥을 남기고 사망했다. 다만 영토 면에서만 보면 심각할 정도의 침략은 없었던지라 그의 뒤를 이은 만사 무사 2세, 혹은 무사 케이타 2세는 생각보다 몰락하지 않은 제국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무사 케이타 2세는 나름대로 마리 자타 케이타 2세의 폭정으로 무너져내린 제국의 국고를 채우고 교역로를 재활성화하는 등 제국 재건을 위해 노력했지만, 강력한 측근들의 존재 때문에 이전의 황제들만큼 막강한 왕권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그의 재위기에 말리의 핵심적인 대도시들 중 하나였던 가오 베르베르인들과의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어버렸고, 가오는 훗날 들어설 송가이 제국 시기까지 옛 영광을 되찾지 못하고 황량한 돌더미로 변해버렸다. 1375년 이래 송가이족들이 말리 내부로 유입되자 말리 제국은 이들을 통제하는 데 큰 애를 먹었다. 다만 1380년대까지 말리 제국은 여전히 만사 무사 이래의 강역 대부분을 40여 년 가까이 유지할 수 있었으며, 영토는 무려 1,100,000km2에 달했고 경제 역시 이전보다야 못했지만 어느 정도 안정된 상황이었다.

2.4.2. 쇠락의 연속

마간 케이타 1세의 마지막 아들이었던 마간 케이타 2세가 1387년에 즉위하여 2년도 채 가지 못해 암살당한 이후, 말리 제국은 기나긴 쇠락기에 빠져들고야 말았다. 이 시기의 말리 제국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가장 적은 편이고, 당대 말리를 다스린 황제들의 계보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을 정도로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확실한 것은 그 전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만사 무사 시기의 막대한 부와 광대한 영토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말리 제국이 이 시기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망해갔다는 것이다. 말리 제국은 지중해권과 아랍권으로 통하는 북부와 동부의 영토들을 대거 빼앗기면서 이들로 통하는 교역로를 잃어버렸다. 막대한 부를 창출해내던 지중해로의 교역로가 사라지자 말리 제국은 어쩔 수 없이 그나마 보전하고 있었던 남서부 지역의 해안 항구들을 통한 해상 교역에 더 힘을 쏟게 되었다.

마간 케이타 2세를 쫒아내고 황위를 차지한 산다키 케이타는 노예 출신 만사 사쿠라 이래 처음으로 케이타 왕가 출신이 아닌 황제였다. 그러나 1년도 못가서 만사 가오 케이타의 후손인 마흐무드 케이타가 그를 쫒아내고 1390년 '마간 케이타 3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했다. 그의 재위기 동안 모시족이 세운 모시 왕국의 봉가 왕이 말리 제국을 침공해 들어와 말리 북부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봉가 왕은 점령이 아닌 약탈의 목적으로 말리를 침략한 것이었기에 그다지 오랫동안 말리에 머물지는 않았지만, 짧게 머무른 것도 아니었기에 심지어 마간 케이타 3세가 사망할 때까지도 여전히 말리 내부에서 날뛰며 쇠퇴해가는 말리 제국 전역을 짓밟고 다녔다.

비록 말리 제국이 끊임없이 쇠퇴해가고는 있었으나, 15세기 초까지만 해도 아직 외곽 지역들을 정복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인근 소왕국들을 병합할 정도의 힘은 남아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말리 제국이 새롭게 개척한 영토들 중 하나 중 디오마 지방이 있었다. 디오마 지방은 전통적인 말리 제국의 중심부였던 니아니 남부에 있는 지방으로, 원래 풀라족이 터를 잡고 살아가던 지방이었다. 그러나 니아니의 귀족 가문 출신 형제가 군대를 이끌고 풀라족을 쫒아내고 새로운 세력을 일구어냈다. 형제는 디오마 지방을 기반으로 점점 세력을 키워나갔고, 결국 이 형제들 중 형이 무사 케이타 3세로 즉위했다. 무사 케이타 3세 시기 이래 말리 제국의 영토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무사 케이타 3세 재위기의 말리 제국은 팀북투를 포함한 광대한 영토에 대한 통치권을 투아레그족에게 잃어버렸고, 얼마가지 않은 3년 후 핵심 대도시였던 우아라타마저 투아레그에게 빼앗겼다.

무사 케이타 3세 사후 그의 동생인 울리 케이타 2세가 왕위에 올랐다. 울리 케이타 2세 시기 말리 제국은 인근 아프리카 토착 부족들 뿐만 아니라 또다른 외세의 위협에 직면했다. 1450년대부터 포르투갈의 노예상들이 말리 제국의 해안가를 휘젓고 다니며 흑인 노예들을 잡아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시 포르투갈인들은 감비아의 해안가에서 주로 흑인 노예들을 잡아갔는데, 감비아 지역은 아직까지 말리 제국이 확고히 주름잡고 있던 지역이었던 탓에 포르투갈인들과 말리 제국은 이 일로 엄청나게 충돌했다. 그러다 1450년대에 포르투갈과 말리 제국 간에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수립되면서 양국 간의 노예 갈등은 일시적으로 잦아들게 된다. 말리 제국은 포르투갈 노예상들에게 자국 국민들 대신 타 부족들에게서 잡아온 포로들을 노예로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포르투갈인들은 말리 제국을 당시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강대국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랬다. 그러나 말리 제국의 국력은 이전에 비해서는 초라할 정도로 크게 줄어든 실정이었다. 새롭게 발흥한 송가이 제국이 제국의 북부와 북동부 영역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으며, 1468년에는 송가이 제국의 창업군주인 알리 베르가 투아레그족들로부터 팀북투를 빼앗으면서 날로 힘을 키웠다. 1477년에는 마간 케이타 3세 시절 말리 제국을 침공했던 모시 왕국이 또다시 말리를 침공했다. 단순한 약탈이 목적이었던 저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본격적인 정복과 개척이 주목적이었고, 모시 왕국은 옛 가나 제국의 수도였던 와가두 등을 말리 제국으로부터 빼앗아 아예 자기 땅으로 삼았다.

1481년, 무너져가던 말리 제국에 마흐무드 케이타 2세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 그의 재위기에 말리 제국은 더욱 급속도로 추락하며 더 많은 영토들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인근 포르투갈 노예상들과의 접촉은 더욱 잦아졌는데, 지중해권과 통하는 교역로는 진작에 모두 잃어버렸기에 말리 제국의 경제는 이들을 통한 노예무역에 점점 종속되어갔다. 포르투갈과 말리 제국은 서로 간에 사절과 대사들을 교환하면서 본격적인 외교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날로 뻗어가던 포르투갈과는 달리 말리 제국은 갈수록 땅덩어리가 줄어들고 국력은 약해져만 갔다. 1493년에는 송가이 제국이 인근의 소금 광산을 빼앗으면서 소금을 주요 경제 공급원으로 삼던 말리 제국에 치명타를 입혔다. 마흐무드 케이타 2세는 포르투갈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자칫하면 먼 대륙의 소모적인 갈등에 휘말릴 것을 우려했던 포르투갈 왕실은 그저 관망하기로 결정하면서 말리 제국의 쇠퇴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말리 제국의 전통적인 정치적 중심지는 개국군주 순디아타 케이타의 고향인 니아니였다. 그러나 말리 제국이 쇠퇴하면서 결국 니아니마저도 적들의 손에 넘어갔다. 마지막으로 니아니의 통제권을 쥐고 있던 황제는 마흐무드 케이타 3세였다. 1496년 경 즉위한 마흐무드 케이타 3세 시기의 말리 제국은 이미 송가이 제국보다도 약해진 상황이었다. 송가이 제국의 아스키아 무함마드 1세가 이끄는 송가이 군대가 1502년 말리 제국군을 격파했고, 풀로족들이 세운 풀로 왕국은 그나마 남아있던 말리 제국의 영토들을 끝없이 갉아먹었다. 송가이 제국은 타케다의 암염 광산을 빼앗았고, 마흐무드 케이타 3세는 필사적으로 포르투갈에 군사적 원병과 도움을 요청했으나 포르투갈은 경제적 이권만 받아먹고 생색만 낸 채로 정작 구원병은 전혀 보내주지 않았다. 마흐무드 케이타 3세는 60여 년에 가까운 오랜 세월 동안 재위했지만, 그 기나긴 기간 동안 자신의 제국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꼴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거의 조선 고종과도 비슷한 포지션의 황제였던 셈. 1545년에는 수도였던 니아니가 송가이 제국에게 털렸고 궁궐은 약탈당했다. 마흐무드 케이타 3세는 일시적으로 산맥으로 후퇴했다가 니아니를 수복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미 철저하게 파괴된 니아니를 버리고 캉가바로 천도했다.

2.5. 제국 후기

2.5.1. 멸망과 분열

실질적인 수도였던 니아니마저 송가이 제국에게 털린 말리 제국은 이미 옛 만딩 지역만을 다스리는 소왕국 수준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초대 황제인 순디아타 케이타의 재위 초기 시절의 영토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60여 년 넘게 재위한 마흐무드 케이타 3세가 1559년 사망한 이후, 그 직후 즉위한 황제들에 대해서는 마지막 황제를 제외하고는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시기의 황제들은 아마도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을 정도로 황권이 약했거나, 아니면 아예 황제가 부재한 상태로 섭정과 신하들이 대신 국정을 처리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다만 확실한 것은 황제가 있었든 없었든 이미 말리 제국은 착실하게 국가 막장 테크를 타고 있었다는 것. 1560년대의 말리 제국은 옛 만딩 지역이 유일한 영토였고, 포르투갈과의 외교 관계는 실낱같이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포르투갈이 더이상 말리 제국을 쓸모없다고 판단하고 외교 관계를 크게 축소하면서 별다른 사건은 없었다.

말리 제국 최후의 황제는 마흐무드 케이타 4세였다. 그는 망해가는 제국을 되살리기 위해 1599년 풀라니족과 연합해 대도시 젠네를 공격해 송가이 제국을 약화시키려 시도하는 등 필사적으로 발버둥쳤다. 그러나 젠네를 공격하는 도중 팀북투에서 넘어온 송가이의 모로코 출신 원군들이 도착하면서 마흐무드 케이타 4세의 노력은 헛수고로 되돌아갔다. 모로코인들은 강력한 화기를 바탕으로 말리 군대를 압살했고, 마흐무드 케이타 4세는 이들을 상대로 하루 가까이 분전했으나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지 못하고 결국 수도 캉가바로 돌아가야만 했다. 최후의 일격을 짜냈으나 실패로 돌아간 말리 제국은 더이상 버텨낼 힘이 없었다. 마흐무드 케이타 4세는 1610년에 사망했다. 마흐무드 케이타 4세 사후 말리 제국은 후계 분쟁으로 인해 갈기갈기 찢어진다.

분열 이후 말리 제국의 만딩 지역은 3개로 나뉘었다. 마흐무드 케이타 4세 시절 사실상 수도로 기능했던 캉가바가 속한 북부 지역, 옛 수도 니아니를 포함한 중부 지역, 쿠루사를 중심으로 한 남부 지역이었다. 각 지역들을 하나씩 차지한 마흐무드 케이타 4세의 아들들은 서로 만사, 즉 말리 제국의 정당한 황제를 자처했지만 실상은 안그래도 좁은 만딩 지역의 3분의 1 정도씩만을 다스리는 족장 수준이었을 뿐이었다. 다만 말리 제국이 3개로 쪼개졌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후계자들은 무려 17세기 후반까지 만딩 지역을 다스렸다. 평소에는 죽을 힘을 다해서 서로끼리 싸워댔지만, 자신들보다 더 강력한 외부의 적이 나타나면 또 끼리끼리 뭉쳐서 함께 싸웠기에 간신히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분열 상황도 17세기 후반에 이르자 끝이 났다. 젠네를 중심으로 한 바마나 제국 지하드를 선포하고 팀북투의 파샤들과 함께 만딩 지역을 침략해 들어왔다. 바마나 제국은 만딩을 다스리는 3개의 세력들이 서로 합치지 못하도록 일부러 계곡을 따라 군사를 쪼개면서 들어왔고, 이로 인해 중부와 남부의 세력들이 끝장나고야 말았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지방은 옛 수도 캉가바를 중심으로 한 북부의 세력뿐이었다. 1667년 캉가바를 다스리던 말리 제국 최후의 후계자인 마마 마간은 바마나 제국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제국의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시도했다. 그러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바마나 군대는 오히려 1670년 옛 수도인 니아니를 불태우고 캉가바까지 진격했다. 결국 마마 마간은 바마나에게 항복을 인정, 평화협정을 맺고 바마나 제국을 다시는 침략하지 않기로 협의한다. 이로써 몇 백여 년 동안 지속된 말리 제국은 마침내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3.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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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를 보고 있는 만사 무사 말리 황제의 모습
말리 제국은 절대적인 전제군주정 국가였다. 물론 황금기를 구가하던 전기와 중기까지만 해도 황제의 권한이 강력해서 말그대로 황제의 말이 법이었지만, 후기에 이르면서 황제의 힘이 현저히 약화되며 신하들과 궁정 섭정들의 힘이 더 강해졌다. 말리 제국의 귀족회의는 '그바라'라고 불렀다. 그바라는 귀족들의 대회의를 일컫는 단어로 만딩카족 전통의 귀족 협의체였는데 만딩카족이 부족 중심의 소왕국에서 탈피하고 대제국으로 성장한 이후에도 쭉 제국의 최고의결기구로 작동했다.

그바라는 1645년까지 쭉 존속했는데, 1645년 이후의 말리 제국은 거의 국가 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부족과 더 비슷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거의 말리 제국 역사상 대부분의 시기 동안 존속했던 셈이다. 말리 제국이 가장 강대했던 시절 그바라에는 총 29명의 대부족 대표들이 참여했으며, 의장은 당연히 황제였다. 마지막으로 열렸던 그바라에는 28명의 부족 대표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서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 그리고 아프리카에 세워진 토착 원주민 계열 국가 대부분이 그렇듯이 말리 제국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제대로 된 중앙집권적 국가는 아니었다. 조선이나 명나라처럼 문서와 관료제 중심의 국가가 아닌, 여러 부족들의 집합에 훨씬 더 가까운 국가였다는 뜻이다. 수도인 니아니에 머무르는 만사[20]는 수도 인근의 상대적으로 협소한 규모의 땅만을 직접적으로 다스렸고, 수도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황제의 영향력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당시 말리 제국은 모든 국토를 황제가 직접 통치하게 할 역량도, 의지도 없었으며 만일 시도했다면 전역에서 유력자들의 반란이 일어날 것이 뻔했으므로 시도하지조차 않았다. 각 도시에서는 도시의 전통적인 유력가문들이 대대로 도시를 세습했고, 이들은 자율적으로 세율을 정하고 자신의 영토 안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했다.[21]

말리 황제는 자기 바로 옆의 측근들을 제외하면 지방관이나 하위 관료들에 대한 임명권이 거의 없었다. 해당 지방의 유력 가문이나 토후들이 따로 자기들끼리 직을 세습하면 황제는 이를 그대로 승인해주는 방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이들을 강제할 수단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서 만일 황제가 보기에 수상해보인다 싶으면 '파르바'라고 불리는 감독관 겸 총독을 내려보내서 이들을 감찰하게 했다. 감찰관의 조사 결과 정말 반란을 일으킬 기미가 있다면 황제가 중앙군에 인근 지방 유력자들이 보낸 군대를 몰고 해당 지방에 쳐들어가서 진압하는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직접 군대를 끌고 지방으로 쳐들어가는, 이 가장 극단적인 경우에도 유력 가문 자체는 없애지 않고 역심을 품은 해당 유력자만을 교체했다. 이는 유력 가문이 워낙 오랫동안 지방을 지배해왔기에 지방민들이 그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만일 가문 자체를 뿌리뽑아버린다면 아무리 황제라 할지라도 그 후환을 장담할 수 없었던 것.

말리 제국은 대대적인 정복과 합병 활동을 통해서 뻗어나간 정복국가였다. 정복 직후 황제는 '파린'이라는 임시 총독을 파견해서 새로운 정복 지역을 다스리도록 만들었다. 파린은 보통 황제가 그 지역을 다스릴 적당한 통치자를 찾을 때까지 그 지역을 다스렸다. 보통 '적당한 통치자'는 원래 그 지역을 다스리던 전통적인 가문의 후계자들 중 하나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그렇게 해야만 해당 지역이 오랫동안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황제에게 충성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앞글에서 언급했듯이 보통 지역의 유력자들이 수상한 모습을 보이면 황제는 파르바를 보내서 이들을 단속했다. 파르바들의 주 업무는 세금을 걷거나 지역 토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으로,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몇 안되는 관직들 중 하나로 거의 총독과 비슷한 권한을 가졌기 때문에 말리 제국 내에서는 굉장히 명예로운 관직이었다.

4.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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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의 보편적인 통화였던 금가루 황금으로 치장한 만사 무사의 행렬
만사 무사의 전설적인 일화들을 보면 알겠지만 말리 제국은 엄청나게 부유한 국가였다. 주로 아랍권, 지중해권을 상대로 한 교역을 통해서 특산품인 황금을 수출하고 막대한 양의 물화들을 들여왔고, 덕분에 말리 제국은 상대적으로 척박한 아프리카 일대의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저 먼 나라들에서 나는 향료나 몰약, 비단 등 수많은 사치품들을 향유할 수 있었다. 특히 만사 무사 시절 교역, 문화의 중심지인 팀북투가 말리 제국의 손에 들어오면서 말리 제국의 경제는 그야말로 수직상승했다.

팀북투를 거쳐가는 수많은 교역로들을 한 손에 움켜쥔 말리 제국은 이 과정에서 상당한 고세율의 교역세와 통행세를 걷었고, 제국의 국고는 날로 풍족해졌다. 물론 이도 오래가지는 못했는데 아프리카 국가들이 대개 그랬듯이 말리 제국 역시 내분과 외세 침략으로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쇠퇴했고 이로 인해 교역로들을 빼앗기자 예전만큼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없게 되었다.

말리 제국은 국경지대에 총 3개의 핵심적인 대규모 황금 광산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말리 제국의 세수는 거의 대부분 이 광산들에서 나왔기에 역대 황제들은 다른 건 몰라도 이 황금 광산에만큼은 엄청나게 신경을 쏟으며 관리했다. 황제들은 이 곳에 거대한 요새와 초소들을 설치하고 국경 검문소로 활용하였으며, 이 곳에서 파낸 황금 1 온스마다 철저하게 세금을 매겼다. 또한 국경 검문소라는 용도 답게 이 곳을 통과하는 소금, 구리 등 다양한 물품들에도 통행세를 매기면서 밀수를 최소한으로 차단하고자 했다. 14세기 초 말리 제국은 전세계 황금의 절반을 생산했다. 워낙 말리 제국이 보유하고 있던 금 매장량이 압도적이었던 탓에 현대 기니에 있던 말리 제국 시절 광산들 중 하나는 그렇게 파냈음에도 불구하고 12세기까지 여전히 금을 생산했다고 한다.

금괴는 모두 황제들의 소유였고 금괴나 금덩어리로 거래하는 것은 철저히 불법이었다. 시민들이 파낸 황금으로 만든 주괴와 금괴들은 모두 일단 황실 보물고로 보내어 저장했고, 제국 관리들은 황실 보물고에 있는 금괴들을 쪼개 금가루로 만든 다음 이를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때문에 시민들은 어떻게 보면 금덩어리에 해당하는 금화를 쓸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으며 모두 금가루를 이용해서 상행위를 했다.

금을 보편적인 통화로 활용한다는 것은 보통의 국가들이었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워낙 말리 제국에 말그래도 금이 넘쳐났기에 이게 가능한 것이었다. 보통 금가루의 단위는 '미스칼'이라고 해서 약 4.5g 정도였으며 외국에서는 같은 양의 디나르와도 교환했다. 금 외의 광물들도 인기가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구리였는데, 보통 타케다 광산에서 채굴했으며 60개의 구리 주괴를 금 100디나르 정도와 교환했다.

금 외에도 소금도 꽤나 중요한 화폐 단위였다. 해안가를 제외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내륙 지대에서 소금은 암염 광산이나 극소수의 염호를 제외하면 함부로 찾아볼 수 없는 굉장히 중요한 물품이었다. 가끔씩은 심지어 황금보다도 더한 가치를 가지기도 했을 정도. 보통 아프리카 내륙 남부 지방에서는 금보다도 더 높게 쳐줬는데, 이는 이 지역에서는 눈을 씻고 봐도 워낙 소금을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북부 지방에서는 아랍이나 북아프리카에서 생산한 소금이 가끔씩 카라반 등을 통해서 유통되었기에 남부만큼 소금 부족에 시달리지는 않아 소금이 남부에서만큼의 가치를 가지지는 않았다.

말리 제국에는 소금 광산도 있었다. 이븐 바투타는 당시 소금광산들 중 하나였던 타크하자 광산에 대한 기록을 남긴 적도 있는데, 그 광산에는 소금과 돌 빼고는 아무 것도 없어 너무 황량했다고 적었다. 이 광산에서는 오히려 소금이 너무 흔해서 인부들이 사는 집조차도 소금으로 지었고, 땅의 염도가 너무 높아 건강에도 좋지 않고 식물도 자라지 못하니 광산 인부들을 제외하면 그 아무도 거주하지 않았다.

5.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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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 건축의 상징 젠네 모스크 말리 제국 병사의 모습
말리 제국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한 번쯤 젠네 모스크의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젠네 모스크는 말리 제국 시기 건축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진흙으로 쌓아올린 벽들과 벽에 꽂혀있는 통나무 막대기들 등 굉장히 독특한 외관 때문에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말리 제국 시기 지어진 대부분의 모스크들과 공공건물, 궁전들이 비슷비슷하게 지어졌다. 당시 말리 건축물들은 대부분 진흙과 풀을 섞어 만든 반죽을 햇빛에 말려 만든 벽돌로 쌓았으며,[22] 모스크나 궁전 등 거대한 건물들의 경우에는 보수를 위해서 벽 곳곳에 통나무를 꽂아 넣었다. 진흙의 특성상 시간이 흐르면 바스러지고 점차 쇠락하기 마련인데, 이를 보수할 때 이 통나무를 지지대 삼아서 벽 위에 진흙을 덧칠하거나 하는 것이다.

당시 말리 제국은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운용할 수 있는 국력을 가진 국가였다. 의외로 상비군을 갖추고 있는 국가였는데, 대략 1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대부분 국경 지대에 배치하고 국경을 지키도록 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창과 칼, 머스켓 등으로 무장한 보병들이었으나 전성기 시절에는 약 1만 명 규모의 기병들도 따로 운용했다.

다만 말이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동물이 아니다 보니 아랍이나 지중해권에서 말을 따로 수입해와야했고, 보통 말을 들여오기 위해서는 험난한 사하라 사막을 가로질러 데리고 와야 했는데, 이게 만만찮은 일이다보니 기병의 위력이 아프리카 부족들을 상대로 굉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병들을 1만 명보다 더 많이 운용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말리 군대의 주 무기는 독화살, 창, 불화살, 칼 등 다양했으며, 워낙 많은 부족들에서 조금조금씩 병사들을 차출해서 만든 대군이다보니 군장이 통일되지는 않았다.

6. 아프리카에 존재하는 국가 말리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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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말리의 수도 바마코[23]
현재 아프리카 대륙에 존재하는 국가 말리는 당연히 말리 제국을 자기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강조하며 민족의 뿌리로 본다. 특히 혼란스러운 현대 말리의 상황과 대비되는 '영광스러운 과거'라는 프로파간다 선전용으로 유용하게 써먹는 중. 가나 제국과는 아무 연관이 없지만 그냥 그 이름을 따서 국명을 지은 가나와는 달리, 말리는 실제로 옛 말리 제국의 영토에 세워져있다. 게다가 말리 제국을 세운 만딩카족은 아직까지도 말리에 여전히 거주하고 있다. 민족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충분히 말리 제국의 후계라고 주장할 근거가 있는 셈.

하지만 말리를 말리 제국의 직계 후신으로 보는 건 맞지 않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말리 제국은 말리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에 넓게 걸쳐있던 제국이었다. 특히 말리 제국의 심장부였던 만딩 지방은 말리 남서부에만 약간 걸쳐있고, 부르키나파소 기니에도 역시 상당 부분이 걸쳐있다. 게다가 만딩카족은 말리에만 사는 것도 아니라서 부르키나파소나 기니 등에도 상당수가 거주한다. 애초에 서구 열강들이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경선을 그을 때 민족 단위로 그은 게 아니라 자기 편의 위주로 그어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말리가 말리 제국의 후예라고 주장한다면 부르키나파소와 기니도 충분히 말리 제국의 후예라고 주장할 수 있는 셈이다.

알아두어야할 점은 말리 제국과 현대 말리와는 법통적인 계승 관계가 전혀 없다는 것. 말리 제국은 프랑스가 들어오기 훨씬 이전인 1600년대에 이미 망했고, 프랑스가 식민지배하러 들어오기 전까지 그 기간 사이에도 송가이 제국 등 수많은 국가들이 나고들어섰다. 현대 말리의 직접적인 법통적 전신은 프랑스가 식민지배했던 프랑스령 수단이다. 현재의 말리 정부는 300년도 더 이전에 망했던 말리 제국 정부와는 별 상관이 없다.

다만 말리 제국의 혈통을 이은 사람들이 말리에 많이 존재한다는 건 확실하다. 말리의 초대 대통령은 말리 제국의 황가였던 케이타 가문 출신이었고, 기니의 초대 대통령 역시 만딩카 제국의 군주였던 세쿠 투레의 후손이었다. 말리 정계의 유력인사들은 말리 제국에서 한가락하던 만딩 가문과 하이다라 가문 출신 경우가 허다하다. 부족 단위인 서아프리카 특성상 나라는 망해도 가문은 여전히 지방 유력자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프랑스도 쉬운 식민통치를 위해 지방 유력가문들을 뿌리뽑기보다는 오히려 그들과 협력하는 쪽을 택했고, 그래서 말리 제국 시기의 대가문들이 아직까지도 남아서 위세를 떨칠 수 있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현대 말리와 중세 말리 제국은 법통적 연관성은 없으나 그 민족적, 문화적 유산은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7.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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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마리 자타 케이타 1세 울리 케이타 1세 와티 케이타 칼리파 케이타 아부 바크르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사쿠라 가오 케이타 무함마드 이븐 가오 케이타 무사 케이타 1세 마간 케이타 1세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슐레이만 케이타
카사 여왕
캄바 케이타 마리 자타 케이타 2세 무사 케이타 2세 마간 케이타 2세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산다키 마간 케이타 3세 무사 케이타 3세 울리 케이타 2세 마흐무드 케이타 2세
제21대 계보 미상 제?대 계보 미상 말대
마흐무드 케이타 3세 마흐무드 케이타 4세 마마 마간 }}}}}}}}}

8. 기타



[1] 만사 무사 메카로 순례를 떠날 때 사용한 왕실기의 모습. [2] 1350년 경의 최대 강역 [3] 말리 제국의 수도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말리 제국은 고정된 수도가 없었으며 황제가 있는 곳이 곧 수도로 기능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4] '만사'는 말리의 고유한 군주 칭호였다. 제국의 군주라는 의미에서 황제로 번역해도 무방하나, 서아프리카 제국들은 딱히 왕과 황제 칭호의 구별이 없어서 왕으로 번역해도 무방하다. [5] 소금, 조개껍데기, 구리 등을 따로 화폐로 쓰기도 했다. [6] 와가두 제국이라고도 한다. [7] 당시 만딩 지역을 다스리는 권력자들의 칭호. 보통 대공이나 정도로 번역하면 된다. [8] 상당한 미남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9] 이 둘의 만남 사이에도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순디아타 케이타 참조. [10] 순디아타는 7세가 될때까지 제대로 걸어다니지도 못했으나 그가 한 번 걷기 시작하자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는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11] '마법사 왕'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12] 키리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순디아타는 그 직후 '파마들 중의 파마', 즉 만사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가 만딩카 지역의 12개 왕국들을 모두 통합하고 황제에 즉위했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18세였다. [13] 아부 바크르는 말리 제국의 황제들 중 유일하게 외가쪽의 핏줄로 황위를 계승한 인물이다. 나머지는 모두 부계 혈통을 물려받은 이들이 즉위했다. [14] 사쿠라 황제는 만사 칼리파의 폭정으로 인해 떨어져 나간 도시 가오(Gao)를 다시 말리 제국의 영향권으로 편입시켰다. [15] 만사는 말리 제국의 황제를 의미하는 칭호다. 따라서 만사 무사 황제라고 쓰는 것은 옳지 않으며, 때에 따라서는 앞의 '만사'를 빼고 그냥 '무사 1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16] 그보다 더 이른 시기일 수도 있다. [17] 만사 무사는 자신을 따르는 노예들에게 노예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큼직한 황금 주괴를 하나씩 손에 들리고 비단옷을 입혀 화려하게 치장했다. 또한 병사들에게는 큰 순금 지팡이를 주어 걸어가게 했다고. [18] 출처 - 히스토리 채널. 역사의 진실을 깨워라. 아프리카의 엘도라도 팀북투 [19] 슐레이만 케이타는 만사 무사의 형제였다. 마간 케이타 1세가 4년 정도 밖에 통치하지 못한 덕에 그나마 손상되지 않은 채로 말리 제국을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었다. [20] 말리 제국 황제의 칭호 [21] 참고로 말리 제국은 지방마다 지도자를 뽑는 방식도 다양했다. 선거, 상속 등 다양한 방식으로 뽑았다. [22] 이는 당시 말리가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지역이었기에 가능했다.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라면 당연히 흘러내릴 게 뻔한 진흙으로 집을 지을 수가 없다. 물론 가마에 굽는 형식의 벽돌들은 제외. [23] 말리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 인구는 약 423만 명으로 말리 제국 시대에도 학문과 경제의 중심지였다. [24] 문명 5에서는 송가이 제국으로 대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