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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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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3대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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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마카탈 무카리마.jpg
'마스지드 알하람'의 모습. 뒤의 시계탑은 알베이트 타워이다.
파일:attachment/메카/4f4ba039761cd.png
'마스지드 알하람'과, 정중앙에 있는 큐브모양의 카바 모습.
아랍어 مكة المكرمة
영어 Mecca Makkah al-Mukarramah
1. 개요2. 이슬람에서의 위상3. 위치4. 명칭5. 역사
5.1. 초기5.2. 무함마드 시대5.3. 중세
5.3.1. 8세기 이바디- 쉬아파 반란5.3.2. 9세기의 혼란5.3.3. 카르마트의 습격
5.4. 메카 토후국 (샤리프)
5.4.1. 이집트, 예멘의 대리전5.4.2. 맘루크 왕조5.4.3. 오스만 제국
5.4.3.1. 예멘 카심 왕조의 침공5.4.3.2. 18세기의 혼란
5.4.4. 사우디 & 이집트의 지배
5.5. 근현대
6. 비무슬림에게 금지된 도시7. 관광
7.1. 알 하람 사원7.2. 하람 권역 밖
8. 치안과 사건사고
8.1. 무력 충돌8.2. 안전 사고
9. 이 지명에서 유래된 명사
[clearfix]

1. 개요

메카는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주의 주도이며, 이슬람 제1의 성지이다. 두 번째 성지는 메디나, 세 번째는 예루살렘[1]이다. 무슬림이라면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가야 하는 곳이며, 자신이 전세계 어디에 있든 이곳을 향하여 예배를 드려야 한다. 반대로 비무슬림은 이곳에 갈 수 없다.

사실 '메카'는 이 성지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도시의 이름이다. 이 도시 안에 성지가 있는 것이다. 흔히 일반인이 아는 성지는 ' 마스지드 알하람'(المسجد الحرام)이라는 모스크 안에 있는 큐브 모양의 ' 카바'이다. 메카시의 인구는 2020년 기준 약 2백만 명으로, 리야드 제다에 이어 사우디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이다.

메카(Mecca)라는 이름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아랍어 명칭은 마카(Makkah)이다. 메카는 '마카'의 라틴어 표기가 전해진 것이다. 쿠란에서는 바카(Bakkah)라고 부르고 그 외에 베카 등 여러 이표기가 있었으나, 현대에 들어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마카'로 정식 명칭을 통일했다.

2. 이슬람에서의 위상

파일:메카 순례.png

무슬림들의 메카 순례(핫즈 / 우므라) 경로

무슬림의 다섯 기둥이라 불리는 5가지 의무, 즉 신앙고백, 메카 방향으로 하루 5회 예배, 자선 기부, 라마단 기간 금식, 성지순례 중 2가지가 이곳 메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매일 전세계의 무슬림들이 메카 방향을 일일이 찾아서 큰 절을 올린다는 점에서 '메카의 위치'가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제5의 기둥이 여력이 있는 사람은 일생 동한 한 번은 메카의 카바 신전을 성지순례하는 것인데, 하지(Hajj)라 불리는 이 순례는 이슬람력으로 12월에 해당하는 둘-힛자(Dhu'l-Hijjah)월의 8일에서 12일까지 이루어지며, 매년 300만 명 정도가 참가한다. 연중의 다른 해에 이루어지는 순례는 우므라(Umrah)라고 불린다. 이 성지순례는 아무렇게나 하는 게 아니며 정해진 복장을 착용하고 엄격하게 해야 한다. 남자는 흰 옷, 여자는 검은 옷과 검은 히잡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지순례가 진행되면 사람이 점으로 보일 정도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조차 성별만은 확실히 구별되는데 흰색은 남자, 검은색은 여자다.

이슬람에서 사용하는 태음력은 모두 자기네 위치 경도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국가 별로 서로 다르다. 그래서 라마단 등도 시작 날짜가 다 같지 않다. 그래서 이 곳 메카의 경도를 기준으로 전세계 무슬림들이 같이 사용할 통일 이슬람 종교력을 만들려는 계획도 있었으나 결국 무산되고 전통대로 자기네 국가 경도를 기준으로 이슬람력을 사용하는 중이다.

표준시가 마땅치 않은 극지방이나 그 근처에 있는 무슬림들은 백야 라마단이 걸리면 그냥 메카의 시간에 맞춰서 해결한다. #

3. 위치

메카는 북위 21도 25분 21초, 동경 39도 49분 34초의 아브라함 계곡에 위치해 있으며, 해발 277m이다. 외항인 제다에서는 내륙으로 약 70㎞ 떨어져 있다. 제다가 메카주에 속해있는 곳이지만 메카와 제다의 거리는 서울특별시에서 강원 춘천시 정도 거리가 나온다.

이곳의 위치는 무슬림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이슬람의 오주(五柱), 즉 5가지 의무 중 하루에 5번 예배하라는 것이 있는데, 이때 반드시 메카 쪽을 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메카가 어느 쪽인지 쉽게 분간할 수 없다면 기도하는 방향을 두고 같은 무리 안에서도 의견이 갈라져 다투기도 한다. 나침반 등 마땅한 도구가 없거나, 그 도구의 신뢰성이 낮거나, 그런 걸 활용할 지식이 없거나, 허허벌판이나 낯선 곳에서 여행하는 중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 때문에 무슬림들이 한 자리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기도하는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와서 비무슬림이 "니네 메카는 대체 어디 있냐?"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나오기도 한다. 이 점에 착안해 LG전자 피처폰 시절에 중동에서 자동적으로 메카 위치를 알려주는 핸드폰을 팔아서 대박을 터트렸다.

파일:zcO4Jx7.jpg
스마트폰 시대에는 그 외에 여러 곳에서 메카 위치를 가르쳐주는 앱을 개발하였다. 사진은 Muslim Pro 앱으로 메카 방향뿐 아니라 쿠란 경전까지 나온다. [2][3]

만약 자신이 사는 곳에서 메카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면 이 사이트를 참고하자.

따라서 한국인 무슬림들은 메카를 바라보기 위해 서북서 쪽을 향해 기도하지만, 방향을 정확히 모르겠으면 대충 서쪽을 보고 기도한다. 참고로 메카가 북위 21도 25분, 서울이 북위 37도 34분에 있어서 서울이 위도상 훨씬 더 북쪽인데도 서북서 쪽을 향함이 희한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지구가 구형이기 때문에, 메카가 서울보다 위도가 낮은데도 북쪽으로 가는 편이 더 짧기 때문이다.[4] 한국이슬람교중앙회에서는 국토지리원에 공식적으로 '서울과 메카 간 최단거리의 방향'을 계산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국토지리원은 서북서 285도라는 결과를 회신했다(물론 이 각도는 지역마다 약간씩 차이가 난다. 부산광역시, 경상남도 창원시, 전라북도 부안군을 기준으로 하면 서북서 287도 정도 나온다).

이슬람 관련 스마트폰 앱인 Muslim Pro에 이 궤적이 자세히 나오는데,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을 기준으로 한다면 부산광역시 사하구에 위치한 하단역부터 시작하여 산청군 부안군 중국 산둥반도를 거쳐 닝샤후이족자치구의 수도인 인촨[5]까지 서북서 방향으로 가며, 이후 서남서 방향으로 진행하여 아프가니스탄 카불 이란 케르만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근교를 거쳐 메카로 들어간다. 같은 이유로 북미에 있는 무슬림들은 북동쪽 혹은 북서쪽을 보고 기도하는 것이 맞다고 한다. 이는 지구가 구형이기 때문에 정반대 방향에 있는 미국/캐나다 태평양 지역에서는 북극점을 통하는 것이 최단거리이기 때문. 예를 들어 미국 앵커리지에서라면 북서쪽(북북서 351도)을 보고 기도해야 맞다. 동위도에 있는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는 메카가 정동 방향에 있지만, 오히려 북동쪽을 보고 기도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 일반인들에게 친숙한 메르카토르 도법 등 평면 지도를 기준으로 생각하여 한국에서는 남서쪽을 보고 기도한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꽤 많으니, 지구본이나 구글어스 등 구형좌표계 기반의 3D 지도가 있다면 그쪽을 이용하는 게 더 정확하다.

이슬람 국가 항공기( 카타르 항공 등)에 탑승하면 목적지 방향과 함께 메카 방향이 함께 나온다.

이슬람 국가의 호텔에 가면 호텔 방이나 거실 천장에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 표시가 있는 곳이 많다.

이론상으론 메카의 대척점[6]에서는 아무 방향이나 보고 기도해도 되지만 어차피 바다 한 가운데이다.(...) 따라서 이는 해당 해역을 지나는 원양 선박에 적용되는 것이다.

우주 시대가 도래하여 타 행성으로의 진출이 활발해지면 타 행성과 우주상에서의 기도에 대한 새로운 율법 해석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더 이상 메카와 자신의 위치를 하나의 좌표평면상에 놓을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지구쪽으로 하면 되지 않나

4. 명칭

1980년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공식 영어 표기를 메카(Mecca)에서 마카(Makkah)로 변경했는데, 이는 메카라는 말이 특정한 일에 대해 가장 뛰어난 자들이 모여 있거나 또는 특정한 일이 가장 번창하고 있는 곳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둘을 구분해서 쓰기 위해서이다.

쿠란에 쓰이기도 했던 고전 아랍어에서는 모음이 a, i, u 셋밖에 없기 때문에, 실제 발음도 한글로 음역하면 '메카'보다 마카에 더 가깝다. 같은 이유로 المدينة는 '마디나'로 발음한다. 정확히 말하면 아랍어에서는 '아'와 '에'의 구분이 없다.

5. 역사

5.1. 초기

메카는 '잠잠(Zamzam) 우물'이라는 수자원을 가지고 있는 오아시스 도시로 물이 부족한 아라비아에서 일찍부터 도시가 형성됐다. 고대부터 인도양 바다를 따라 전해져오는 남아라비아, 인도, 동아프리카의 물산이 홍해 연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거쳐가는 교역 루트에 속해 있었다. 6세기 이슬람교가 퍼지기 직전의 상황을 보면 실크로드 등 유라시아 내륙의 교역로가 동로마 제국 사산 왕조의 오랜 다툼으로 위협받자 비교적 안전한 메카 방향이 각광받는 중이었다. 도시 중심부에 있는 카바 신전은 그렇게 여기저기서 모여든 사람들이 믿었던 다신교의 여러 신들을 모시는 장소였다.

메카에 얽힌 얘기로는 아브라함 [7]과 그 아들 이스마일이 유명하다.

아브라함의 장남이던 이스마일은 뒤늦게 아들을 얻은 아브라함의 첫 부인 사라의 질투로 어머니 하갈과 함께 파란의 광야에 버려졌다. 수 일간 물을 마시지 못해 죽어가는 이스마일을 살리기 위해 하갈은 샘을 찾아 사파와 마르와 언덕 사이를 7바퀴나 돌았고 노력을 가상히 여긴 하나님은 이스마일의 발 밑에서 잠잠 샘물을 솟게 하였다. 이후 모자는 그 부근에서 살았고, 후에 그들이 잘 지내고 있음을 확인한 아브라함은 사막에서 운석을 구해와 이스마일과 함께 제단을 쌓고 감사 예배를 올렸다. 이것이 오늘날 카바의 시작이라고 전해진다.

그 후로 이스마일은 아브라함과 같이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 이스마일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했고, 이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을 본 하나님은 이스마일을 구한다. 이때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바치러 간 곳이 바로 메카라는 것이다.[8]

이슬람 이전에도 메카의 카바는 아랍인들의 순례지였고, 그곳에서는 싸움이 금지되었다. 이스마일 시대 이후 메카는 그를 도왔던 예멘계 자르함 부족이 다스렸다. 하지만 자르함 부족이 순례로 인한 수익을 독점하면서도 카바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자 서기 2세기 중반 무렵 북부 아랍계인 쿠자아 부족이 그들을 축출하고 집권하였다. 자르함 부족은 예멘으로 떠나며 잠잠 샘물을 메우고 장신구 등을 묻었다고 한다. 한편 쿠자아 부족 역시 곧 시리아에서 들여온 후발 우상을 카바에 안치하고 아브라함과 이브라힘의 우상 및 초상화를 걸어놓았다. 이들은 630년 무함마드에 의해 예외 없이 파괴되었다. 5세기 중반 이스마일의 후손인 쿠라이쉬 부족의 쿠사이 이븐 킬랍이 쿠자아 부족의 지도자 할릴 이븐 하바쉬야의 딸과 결혼하였고, 장인의 사후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였다. 다만 바크르 부족의 타협으로 쿠자아 부족은 쿠라이쉬 부족에 복속하는 대가로 메카 행정에 관여할 수 있었다.

쿠사이는 카바 북쪽에 다르 나드와(의사당)를 세우고 자신이 그 의장이 되었다. 그는 그 외에 군사령관, 대상 지휘, 카바 관리, 순례객 보급 등 전권을 장악하였다. 쿠사이의 사후 그의 차남 마나프가 계승하였다. 마나프의 사후 장남 하심, 동생 아브드 샴스, 다시 하심의 아들 압둘 무탈립이 집권하였다. 이 시기에 아랍인들은 의복이 부족할 시 남자는 알몸으로, 여자는 하체만 가린 채로 카바를 참배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쿠란에도 언급되었듯 523년 남부 아라비아의 나즈란에서는 유대인 군주 유수프 두누와스가 개종을 거부한 기독교도 2만 명을 학살하는 참극이 있었다. 그에 대응한 에티오피아의 악숨 왕국은 525년 예멘을 정복하였고 사나에 카바를 모방한 신전을 세워 순례객들을 끌어오려 시도하였다. 이에 일단의 메카인들이 '새로운 카바'에 잠입하여 용변을 봄으로써 그곳을 더럽혔다. 분노한 예멘 총독 아브라하는 570년 기존 카바를 파괴하기 위해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메카로 진군하였으나, 쿠란에서 기적으로 묘사된 폭풍과 역병으로 철수하였다. 같은 해 메카에서는 압둘 무탈립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가 탄생하였다.

5.2. 무함마드 시대

파일:메카 무함마드.jpg

605년 홍수로 피해를 입은 카바 신전의 보수 도중 검은 돌 (흑석)을 옮기는 청년 무함마드.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 수록된 삽화

메카는 무함마드 이전에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해 있던 데다가 당시 원시 아라비아 신앙을 신봉하고 있었던 베두인 종족들이 섬기던 우상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도시로 여겨져 있었다. 무함마드가 최초로 이슬람을 선언한 곳이며, 이슬람은 무함마드를 예언자로 보기 때문에 메카를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도시'라 부르면 실례가 된다. 마찬가지로 무함마드를 "이슬람교의 창시자"라고 부르는 것 역시 무슬림들에겐 큰 실례가 된다. 서기 610년경 메카 동북쪽 자발 앗 누르 (빛의 산)의 히라 동굴에서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는 613년부터 9년간 메카에서 포교하며 무함마드는 다르 알 아크람 등 사하바들의 집들을 떠돌며 모임을 이어갔다. 초기 이슬람 움마(공동체)는 다신교적 성향이 짙던 메카의 쿠라이쉬 기득권층에 의해 박해를 당하였는데, 기존 다신교 신앙에 반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상을 없애면 성지순례로 먹고 살던 기존 상인들이 먹고 살 길이 없어진다는 이유였다.

이에 무함마드는 자신을 분쟁의 조정자로 받아들인 메디나(야스리브)로 피신했는데(622년 헤지라), 이때 그를 따른 메카의 초기 무슬림들을 '무하지룬'이라 부른다.

그 후 메디나를 기반으로 6년간 메카의 쿠라이쉬 세력과 전쟁을 치른 끝에 628년 무함마드는 무슬림들과 메카 순례를 시도하였고, 양측 간에 후다이비야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629년 메카에서 이슬람이 공인되었고, 첫 우므라가 행해졌다. 그 해 말엽 메카는 별 저항 없이 이슬람 군대에 정복되었고, 무함마드는 카바 신전의 우상을 파괴하며 다신교의 중심이던 그곳을 이슬람의 새로운 중심인 '마스지드 알하람'으로 바꾸었다. 632년 무함마드는 메카에 대한 2번째이자 마지막 순례인 힛자툴 와다 (حِجَّة ٱلْوَدَاع)와 인간 평등을 강조한 고별 설교인 쿠트바툴 위다(خطبة الوداع)를 행한 후 메디나로 돌아가 숨을 거두었다. 그가 이룩한 이슬람 공동체는 아라비아 반도를 기반으로 교세를 확장하여 세계 4대 종교 중 하나로 부상하였다.

5.3. 중세

무함마드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제국기에도 메카는 종교적인 역할만 수행하였고, 히자즈의 정치적 중심인 메디나에 있었다. 따라서 656년 이후 칼리파의 거점이 아라비아 반도 외의 시리아 이라크, 이집트 일대로 이동한 후에 메카를 포함한 히자즈 지방은 메디나에 파견된 총독들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던 2차 피트나 때에 압둘라 이븐 주바이르 야지드 1세의 칼리파 세습을 반대하며 히자즈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무슬림 이븐 우크바 휘하의 진압군이 파견되었다. 683년 여름 알 하라 전투에서 이븐 한잘라 휘하의 안사르 부대를 격파한 무슬림은 메카로 남하하던 중 병사하였다. 지휘권을 이어받은 후세인 이븐 누마이르 앗 사쿠니는 9월 24일 메카를 포위, 최후 통첩에도 압둘라가 항복을 거부하자 도시를 포위하였다. 공성전이 이어졌고, 우마이야 군대의 투석기에 의해 카바는 큰 피해를 입었다. 무함마드 사후 불과 51년 만에 이슬람 최고의 성지가 무슬림들에 의해 파괴된 것이다.

그 해 말엽 야지드의 사망 소식에 후세인 휘하의 원정군은 철수하였고, 칼리파를 칭한 압둘라는 카바를 보수하였다. '칼리파' 압둘라 이븐 주바이르는 683~682년까지 9년간 메카를 수도로 한때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과 이집트, 이라크, 이란 남부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684년 이후 우마이야 조는 서서히 반란 세력들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였고, 692년 초엽 우마이야 대장군 알 핫자즈 이븐 유수프 휘하 2천 병력이 남하하였다. 이전의 포위와 달리 파괴와 학살을 원치 않았던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의 지시에 따라 알 핫자즈는 압둘라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결렬되자 칼리파의 승인 하에 메디나의 증원 병력과 함께 메카를 포위하였다. 도시는 봉쇄되었고, 아부 쿠바이스 산에 설치된 투석기에 의해 포격 당하였다.[9] 포위가 장기화되며 핫즈 순례 기간이 다가오자 알 핫자즈는 개인 자격의 순례자로서 입성을 요구했으나 거절 당하자 분노하여 카바에 대한 포격을 지시하였다.

다만 그 직후 폭풍이 몰아치자 이를 천벌이라 여긴 병사들은 포격을 중단하였다. 이에 핫자즈는 단순 자연 현상이고 오히려 승리의 증표라며 포격을 지속하게 하였다. 6개월간의 포위 끝에 알 핫자즈가 사면을 약속하자 1만에 달하는 수비 병력이 항복하였고, 그 중엔 압둘라의 아들들도 있었다. 이에 최후를 직감한 압둘라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나가 적진에 돌격하다 전사하였다(692년 가을). 이로써 2차 피트나는 종결되었고, 알 핫자즈는 히자즈의 총독이 되었다. 칼리파의 지시에 알 핫자즈는 전후 메카에 대한 전후 복구에 착수하였다. 본래 무함마드가 건설하고 우마르, 우스만이 증축한 카바는 683년 1차 포위 당시 크게 파손되었고, 이를 재건한 압둘라는 기존의 정육면체 형태 대신 옛 이브라힘 시절 카바의 벽인 하팀을 포함한 직육면체 형태로 변형하였다.[10] 알 핫자즈는 이를 철거, 683년 이전으로 되돌렸고 현재까지 그 형태로 이어져 내려온다.[11]

5.3.1. 8세기 이바디- 쉬아파 반란

그 후 반 세기간 평화를 유지하던 히자즈는 740년대 우마이야 조의 쇠퇴와 함께 다시 혼란에 접어들었다. 바스라에서 우마이야 조의 타도를 모색하던 카와리지 세력의 이바디파는 메카에 아부 함자 알 무크타르 이븐 아우프를 파견해 반우마이야 선전에 나서게 하였다. 아라비아 남부 하드라마우트의 카디 압둘라 이븐 야흐야와 함께 거병한 알 무크타르는 747년 예멘의 사나를 점령하였다. 그 해 핫즈 기간인 8월 알 무크타르가 순례객으로써 메카에 당도하자 히자즈 총독 압둘 와히드는 메디나로 철수하였다. 이로써 압둘라와 알 무크타르는 메카를 무혈 접수하였다. 압둘 와히드는 메디나의 병력으로 반격하려 했으나 패배하였고, 10월 메디나 역시 이바디 군에게 넘어갔다. 히자즈를 평정한 이바디 세력은 이제 우마이야 조의 본거지 시리아를 노렸다. 그러자 748년 칼리파 마르완 2세는 압둘 말리크 이븐 무함마드의 토벌군을 파견하였고, 이바디 군은 와디 알 쿠라에서 대패하였다. 이에 메디나 주민들이 봉기하자 알 무크타르는 메카로 철수했는데, 우마이야 군의 추격을 받아 패하고 전사하였다. 그 후 압둘라 역시 패하고 전사하며 반란은 진압되었다.[12]

히자즈뿐만 아니라 각지에서 반란을 겪던 우마이야 조는 750년 압바스 왕조로 대체되었다. 한편 우마이야 조에 대해 가장 강렬히 저항하고도 알리 가문이 아닌 압바스 조에 칼리파위가 돌아간 것에 대해 쉬아 세력은 박탈감을 느꼈다. 거기에 2대 칼리파 알 만수르가 알리 가문에 대한 박해에 나서자 분노한 쉬아 세력은 반란을 일으켰다. 762년 하산 이븐 알리의 증손자 무함마드 앗 나프스 앗 자키야가 메디나에서 봉기하자 메카의 안사르들도 그에 합류하였다. 하지만 무함마드 시절 승리의 요인이던 참호를 재활용하는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란은 그 해 12월 메디나가 함락되고 무함마드가 전사하면서 종식되었다. 그의 외조카이자 하산 이븐 알리의 고손자인 후세인 이븐 알리 알 아비드는 785년 알리 가문에 온정적이던 칼리파 알 마하디가 사망한 후 메디나에서 칼리파를 칭하며 봉기하였다. 하지만 초전의 승리에도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하며 이내 압바스 군에 의해 예언자 모스크에 포위된 후세인은 3백여 동지들과 탈출하여 메카로 향하였고, 도시의 지지자들과 합류하였다.

신임 칼리파 알 하디는 마침 메카 순례에서 돌아오던 압바스 왕공 무함마드 이븐 술레이만에게 진압을 맡겼다. 무함마드는 순례 카라반에 대한 베두인들의 습격에 대비해 수백의 호위 병력을 대동하고 있었고, 여기에 메카의 압바스 가문원들이 합세해 약 3백의 기병과 다수의 보병으로 구성된 군대가 편성될 수 있었다. 그들은 쉬아 세력에 대한 무력 시위로써 메카 시내를 행진한 후 도시 북쪽 외곽의 두 투와에 주둔하였다. 양측은 786년 6월 11일 투와에서 북쪽으로 2㎞ 떨어진 와디 파크에서 격돌하였다. 전투는 동틀 무렵 시작되었고, 후세인은 압바스 군의 취약한 좌익에 공세를 집중하였다. 그러나 우익을 지휘한 무함마드가 반격에 나서자 전투 경험이 부족한 쉬아 군대는 붕괴하였다. 승기를 잡은 무함마드는 안전을 보장하며 항복을 제안했지만 후세인은 이를 거절하고 계속 싸우다 전사하였다.[13] 3백의 쉬아 전사들 중 백명은 전사하고 나머지는 제안대로 항복하였다.[14] 다만 무함마드 앗 나프스 앗 자키야의 동생 술레이만과 아들 하산은 메카에서 처형되었다. 한편 많은 알리 가문원들은 순례객들 사이에 숨어 살아남아 후일을 기약하였다.[15]

5.3.2. 9세기의 혼란

680년의 카르발라 전투 이래로 가장 많은 알리의 후손들이 살해된 786년 파크[16] 전투 이후 쉬아 준동은 한동안 메카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793년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가 순례하고 810년에는 식수 공급을 위한 수도교가 지어지는 등 압바스 조는 안정적으로 메카를 다스렸다. 그러나 9세기 중반 압바스 조의 쇠퇴와 함께 히자즈에 대한 그의 지배력도 약화되었다. 878년 아미르 알 핫즈로 임명된 하룬 이븐 무함마드 알 하쉬미는 도시와 순례자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881/2년 메카는 아부 알 무기라 알 마크주미 휘하의 베두인 도적단의 공격에 직면하였다. 반격에 나선 하룬은 그를 격퇴하여 메카를 방어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제다와 아인 무샤스 등이 파괴되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다. 그로써 메카는 식수가 부족하게 되었고, 외부와 고립되어 빵값이 치솟게 되었다. 그와 함께 메카는 이집트의 툴룬 왕조와 이란의 사파르 왕조 간의 주도권 다툼의 장이 되었다.

이미 878년 압바스 조로부터 시리아를 장악한 이집트의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이슬람 세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고자 하였다. 동시에 그는 압바스 조로부터 이슬람 성지들을 관할하고 순례단을 보호하는 역할을 빼앗아 그와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하였다. 881년 아흐마드는 메카에 이집트 기병대를 주둔시켜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게 하였는데, 그들은 도착함과 동시에 사파르 왕조의 아미르 아므르에 충성하는 병력과 반목하였다. 양측은 하람 사원에 있는 선지자의 민바르 오른편에 각자 주군의 깃발을 두고자 경쟁하였고, 성지에서 칼까지 뽑아들었다. 전투가 벌어질 만한 일촉즉발의 상황에 총독 하룬이 자신의 잔즈 (흑인) 부대를 사파르 편에 배치하며 그들의 깃발이 민바르 옆에 계속 놓이게 되었다. 그 이듬해 칼리파 알 무타미드가 실권자인 동생 알 무와파크를 피해 툴룬 왕조령 이집트로 도피하려는 사건이 있었고, 그 후 아흐마드와 알 무와파크는 각자의 영토에서 서로를 공개 저주하는 신경전을 벌였다. 아흐마드는 더 나아가 알 무와파크에 대한 ' 지하드'를 선포하였고, 그와 함께 883년 재차 메카로 군대를 파병하였다.

무함마드 이븐 앗 사라즈와 알 가나위 휘하의 기병 5백과 보병 2천으로 구성된 툴룬 군대는 그 해 6월, 둘 힛자(순례의 달)가 시작되기 이틀 전에 메카에 당도하였다. 당시 총독 하룬은 부재하였고, 툴룬 군대는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 주민들에게 각각 2디나르(라이스들에겐 7디나르)씩 분배하였다. 5일 후, 압바스 장군 자파르 이븐 알 바가마르디가 2백의 기병과 메카에 입성하였다. 그는 비보를 접하고 돌아온 하룬과 합류하였다. 하룬은 120명의 기병과 2백의 잔즈 병력, 30명의 사파르 기병 및 친위대인 2백의 이라크 병력을 대동하였다. 이러한 750명의 압바스 군대는 호라산 출신 순례객들의 도움과 함께 전체적으로는 2배가 넘지만 기병 전력은 대동소이한 툴룬 군대를 향해 출격하였다. 메카 분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툴룬 군대는 2백여 전사자를 내고 인근 언덕들로 도주하였다. 압바스 사령관 자파르는 적들이 남긴 20만 디나르 상당의 자금과 가축을 얻었고, 이후 이집트인들과 그에 동조한 메카 인들을 사면하였다. 전투 후 메카의 사원들에서는 아흐마드 이븐 툴룬에 대한 저주가 낭독되었고, 이 때문인지 아흐마드는 이듬해 병사하였다.

884/5년 메카에서는 하람 사원에 인접한 주바이다 빈트 자파르[17] 저택이 붕괴하며 카바를 덮쳤고, 순례객 10명이 사망하였다. 하룬과 카디 유수프 이븐 야쿠브는 바그다드에 이를 보고하였고, 섭정 알 무와파크는 보수를 명령하며 자금을 보내었다. 사원은 이듬해 복구되었고 하룬의 이름은 알 무와파크의 명패에 함께 기록되었다. 그러던 885년 3월 메디나 총독으로 부임한 아흐마드 이븐 무함마드 앗 타이는 굴람(맘루크) 바드르를 메카로 보내 순례를 감독하게 했는데, 도시에 도착한 바드르는 사파르 조의 대리인 유수프 이븐 아비 앗 사즈에게 감금되었다. 이에 순례객들과 현지 수비대가 바드르를 구출하고 유수프를 사로잡아 바그다드로 압송하였다. 이렇듯 불안정한 상황이 이어지던 중 891/2년 메카에서 벌어진 내분으로 총독 하룬은 기존에 자신이 싸우던 이집트로 도주하였고, 그 후 메카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5.3.3. 카르마트의 습격

파일:메카 흑석.jpg
파일:메카 검은돌.png
카바의 흑석 (ٱلْحَجَرُ ٱلْأَسْوَد, 알 하자르 알 아스와드). 카르마트의 탈취 후 부서졌다. 1956년의 묘사
9세기 말엽 이미 아라비아 반도는 제국의 변방으로 여겨졌고, 소외된 베두인들은 저항적인 쉬아 사상에 경도되었다. 그 중에서도 일곱이맘파 극단주의에 속하는 카르마트가 9세기 말엽 동부 아라비아를 장악하였다. 그 지도자인 아부 타히르 술레이만 알 잔나비는 이라크 습격에 이어 929년 '카바의 흑석에 대한 쉬르크로 물든' 메카 원정에 나섰다.[18] 진입 시도가 거부되자 그는 모든 무슬림이 메카를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을 내세워 평화적인 순례차 왔음을 서약한 후 입성하였다. 930년 1월, 메카에 들어선 카르마트 군대는 순례자들을 학살하였고 사람들이 도주하자 카바 내부까지 말을 타고 들어가 그들을 추격하였다. 알 잔나비는 순례객들을 죽이며 쿠란 구절이나 시구를 인용하며 그들을 조롱하는 기행을 선보였다. 카르마트 군대는 무슬림들에게 성수로 여겨지던 잠잠 샘물을 순례자들의 시체로 틀어막았고, 카바의 문을 부수었으며 그 덮개를 찢었다.

이렇게 17일간 메카에 대한 학살, 약탈, 방화 및 파괴를 자행하여 '도시들의 어머니'를 핏빛으로 물들인 카르마트 인들은 카바의 흑석과 함께 본거지인 알 하자르(현재의 알 하사)로 돌아갔다. 이슬람 이전 자힐리야 시대에조차 살인이 금기시되었던 카바에서 일어난 학살극과 성유물인 흑석의 탈취는 수니, 시아를 불문한 전 무슬림 공동체의 공분을 샀다. 파티마 조의 칼리파 압둘라 알 마흐디마저 알 잔나비에게 꾸짖는 서신을 보냈을 정도였다.[19] 이슬람 최고 성지가 훼손된 것에 대해 칼리파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압바스 조의 무능함에 대한 성토와 함께 종말론적 사상이 유행하게 되었다. 칼리파 알 라디는 935년 이집트 이흐시드 왕조의 무함마드 이븐 투그즈에게 메카와 메디나의 지배권을 넘겨 자신 대신 순례의 안전을 보장하도록 하였다. 다만 카르마트에 대적할 만한 세력은 없던 이흐시드 조는 순례단을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들에게 보호세를 바쳤다.

한편 알 잔나비는 핫즈 순례객들을 메카에서 알 하자르로 끌어오려는 의도로 자신이 세운 알 디라르 사원에 흑석을 안치하였는데, 대다수의 순례객들은 여전히 카바로 모여들었기에 실패하였다. 바그다드 조정은 흑석 반환의 대가로 5만 디나르의 보상을 약속했으나 거절되었다. 944년 알 잔나비가 사망한 후, 카르마트의 지도자가 된 아흐마드 빈 만수르가 952년 압바스 조의 막대한 배상금을 수용한 후에야 검은 돌의 반환이 추진되었다. 카르마트 인들은 포대에 싸인 흑석을 쿠파의 금요 사원에 말 그대로 던져두고 떠났다. 동봉된 쪽지에는 '명령에 따라 가져갔고, 명령에 따라 돌려놓는다'고 적혀 있었다. 32년 만에 메카로 돌아온 흑석은 일곱 조각으로 부서져 있었고, 도시의 금 세공인에게 맡겨져 은으로 된 실로 봉합된 후 다시 카바에 안치되었다.[20] 그 후에도 966년 메카 순례에 나선 카라반을 습격하는 등 카르마트는 11세기까지 주류 이슬람권에 대한 테러를 지속하였다.

5.4. 메카 토후국 (샤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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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중반 이흐시드 왕조가 쇠퇴하자 968년경 자파르 이븐 무함마드가 메카를 점령한 것을 시작으로, 무함마드의 후손들이 도시의 아미르(토후)로 군림하기 시작하였다. 자세히 말하자면 그들은 무함마드의 외손자 하산 이븐 알리의 후손들로, 하산 씨족(بنو حسن)으로도 불린다. 이들은 후에 하심 왕가로 이어진다. 한편 976년 메디나에서는 후세인 이븐 알리의 후손 타히르 이븐 무슬림이 아미르로 등극하며 경쟁 토후국이 세워졌다. 양측은 서로 정복을 꾀하기도 했지만 알리 가문의 후예로써 통혼하는 등 상호 존중하였다. 한편 정통 칼리파 시대부터 이집트의 곡물에 의존하던 메카 & 메디나 토후국은 10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집트를 지배한 왕조들에 복속하였다. 파티마 왕조 아이유브 왕조, 맘루크 왕조, 오스만 제국의 순서이다.

비록 종교적으로는 중요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이집트에서 멀고 외진 곳이었기에 메카, 메디나 토후국들은 높은 자치를 누렸다. 샤리프로도 불린 메카의 아미르들은 종종 직위를 놓고 내분을 벌였고, 편의에 따라 셀주크 제국 라술 왕조, 일 칸국 등 이집트 외부의 군주들에게 복속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 혈통을 앞세워 종교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3대 샤리프 아불 푸투흐 알 하산 이븐 자파르는 1012년 파티마 조에 대항한 팔레스타인의 바누 자라흐에 의해 일시적이긴 하지만 칼리파 알 라시드 빌라로 옹립되기도 하였다. 다만 그가 가져온 재물이 동나고 파티마 조의 반격이 시작되자, 이듬해 알 하산은 칼리파 주장을 포기하고 메카로 돌아가 다시 파티마 칼리파에 복속하였다. 11세기 초엽 파티마 칼리파 알 하킴의 부하가 메카에 당도하여 카바의 검은 돌을 부수려고 했으나 현장에서 살해되어 조금 금이 가는 정도의 피해만 가해지는 일도 있었다.

5.4.1. 이집트, 예멘의 대리전

샤리프 간의 내분에 있어 이집트뿐만 아니라 남쪽의 예멘도 종종 그에 개입하였다. 쉬아 술라이히 왕조의 창건자 알리 앗 술라이히는 1064년 메카를 점령하고 아부 하심 무함마드 이븐 자파르를 옹립하였다. 그 후 1201년까지 그 후손들이 샤리프직을 세습하였다. 한편 일전의 카르마트에 이어 메카는 재차 외세인 십자군의 위협을 받았다. 과격한 십자군 제후인 르노 드 샤티용은 이슬람의 성지 메카를 습격해 무슬림들의 사기를 꺾으려 하였다. 1180년과 1181년 그는 메카로 향하는 순례단을 약탈하였고, 1183년에는 홍해에 함대를 파견해 히자즈 해안을 공격하였다. 그 후 일부가 상륙해 메디나로 진군했으나 아이유브 군에 격퇴되었고, 사로잡힌 장교 2명은 핫즈 기간에 메카의 희생제 장소인 미나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그 해 술탄 살라흐 앗 딘은 르노의 거점 케라크를 포위하였고, 1186년 르노가 재차 순례단을 습격하자 전쟁에 나서 1187년 하틴 전투에서 그를 사로잡아 처단하였다.

12세기 말엽의 내전 후 1201년 경 하산 이븐 알리의 17대손 카타다 이븐 이드리스가 아이유브 술탄 알 아딜의 승인 하에 메카를 장악하였다. 그의 후손들은 '바누 카타다'는 1925년까지 메카를 다스렸고, 하심 왕가의 직계 조상이 된다. 하지만 1221년 카타다는 아들 하산에게 살해되었고, 그 후 하산이 집권했으나 이듬해 예멘의 아이유브 왕공 알 마수드 유수프가 메카를 점령한 후 폐위되었다. 알 마수드는 핫지를 행한 후 1223년 초엽 예멘으로 귀환하며 자신의 맘루크 누르 앗 딘 우마르를 도시의 총독으로 봉하였다. 1228년 알 마수드는 우마르를 소환하며 후삼 앗 딘 야쿠트를 새 총독으로 봉하였다. 그 후 알 마수드는 시리아로 향하며 우마르를 예멘의 섭정으로 두었는데, 후자는 자립하여 라술 왕조를 세웠다. 1232년 초엽 우마르는 메카를 공격해 점령하고 카타다의 아들 라지흐를 아미르로 옹립하며 메카 토후국을 복원시켰다. 그러자 아이유브 술탄 알 카밀은 장군 파크르 앗 딘 이븐 앗 샤이크와 메디나의 아미르 쉬하흐 이븐 하심을 파견하였고, 그 해 여름 그들은 메카를 점령하였다.

가을 무렵 라지흐는 재차 라술 왕조의 도움으로 메카를 점령했지만 다시 축출되었고, 아이유브 아미르 이븐 알 무잘리가 총독이 되었다. 1233-34년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3번째로 메카를 수복했지만 이번엔 알 카밀이 직접 핫즈 순례에 나서자 잠깐 도시를 비우기도 하였다. 그 후 1235-36년간 아이유브 군의 점령과 라지흐의 회복, 아이유브 군의 재점령을 겪은 후 1238년 2월 라지흐는 1천의 기병과 친정한 우마르와 함께 메카에 6번째로 입성하였다. 그 다음달 알 카밀이 사망하며 평화가 오나 싶었지만 1240년 메디나의 쉬하흐가 아이유브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제공한 1천의 기병으로 메카를 점령하였다. 이듬해 라지흐는 라술 군대와 함께 도시를 수복했지만 곧 쉬하흐가 재차 점령하였다. 결국 1242년 3월, 우마르가 재차 친정하여 메카를 점령한 후 라지흐와 함께 라술 왕조의 총독을 임명하여 그를 돕게 하였다. 그러던 1250년 라지흐의 조카 아부 사드 알 하산이 라술 조의 총독 이븐 알 무사이브를 축출하고 메카를 장악하였다. 라지흐는 과거의 적이자 외가인 메디나의 후세인 가문과 도시를 수복하려 했지만 패배하였다.

하지만 알 하산 역시 1253년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 술탄 앗 나시르 유수프에게 그의 이름으로 쿠트바 진행을 약속해 군사를 얻어낸 사촌 자마즈 이븐 하산에게 살해되었다. 다만 아미르 등극 후 자마즈는 약속을 어기고 라술 왕조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를 쿠트바에서 언급하였다. 이듬해 자마즈 역시 폐위된 후 혼란을 거쳐 알 하산의 아들인 아부 누마이 무함마드와 그의 숙부 이드리스 이븐 카타다가 공동 집권하였다. 하지만 1255년 1월 라술 왕조가 메카를 점령하였고 알 무자파르 유수프의 총독 무바리즈 앗 딘 후세인이 도시를 통치하였다. 다만 2달 후 무함마드와 이드리스가 예멘인들을 축출하고 다시 공동 집권하였다. 1258년 몽골군에게 압바스 왕조가 멸망하고 알 무스타심이 살해되자, 그들은 북아프리카 하프스 왕조의 술탄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를 칼리파로 인정하였다. 이에 후자는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를 칭하였다.

5.4.2. 맘루크 왕조

그러던 1269년 아부 누마이 무함마드는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에 복속하였다. 1270년 그는 조카 이드리스를 처형하고 단독 집권했지만 이듬해 메디나의 아미르 이즈 앗 딘 자마즈에게 축출되었다. 2달 후 메카를 수복한 무함마드는 1288년 이번엔 술탄 칼라운의 지원을 받은 자마즈에게 재차 축출되었다. 이듬해 독살 기도를 당한 자마즈가 회군하자 메카로 돌아온 무함마드는 1301년까지 통치하였다. 하지만 그의 사후 아들들인 후마이다, 루마이타, 아불 가이스, 우타이파가 각자 2번 이상씩 집권하는 내전을 벌이며 혼란기가 재림하였다. 1330년에는 카바에서도 전투가 벌어져 순례객들이 희생되는 일도 있었다. 보다못한 술탄 앗 나시르 무함마드가 보낸 군대가 이듬해 1월 메카를 무혈 장악하였고, 그 후 루마이타와 우타이파가 공동 아미르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둘이 다시 내전을 벌이자 술탄은 형제를 카이로로 소환한 후, 우타이파를 감금하고 루마이타를 단독 아미르로 봉하였다. 루마이타는 1345년 퇴위하였고, 그의 아들들인 아즐란과 싸바카는 종종 싸우기도 하며 공동 집권하였다. 그 와중인 1349년 메카에는 흑사병이 덮쳤다.

14세기 중반 메카 토후국은 이집트에서 파견된 아미르 알 핫즈에 의해 죄지우지 되며 수십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1359년 아즐란과 싸바카는 맘루크 술탄 앗 나시르 하산의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가 폐위되었고, 사촌 무함마드 이븐 우타이파가 아미르로 옹립되었다. 그러나 그는 핫즈 카라반과 함께 도시를 떠났고, 이집트에 감금되어 있던 아즐란은 1361년 신임 술탄 알 만수르 무함마드에 의해 복위할 수 있었다. 아즐란은 아들 아흐마드를 공동 아미르로 임명하여 후계 구도를 확실히 하였고, 주변 지역을 점령한 후 1372년 퇴위하였다. 아흐마드 역시 아들 무함마드를 공동 아미르로 봉하였고, 1386년 사망하였다. 안정적으로 통치한 아즐란과 아흐마드는 알 하람 북쪽의 알 무알라 묘지에 안장되었고, 그 위에는 각각 돔형 영묘가 세워졌다. 하지만 친족들에 대한 숙청으로 술탄 바르쿠크와 갈등을 빚던 무함마드는 집권 3달 만에 핫즈 카라반의 마흐말(성지에 대한 선물을 지닌 낙타)을 맞이하던 중 아사신에게 암살되었다. 1387년부터 아즐란의 다른 아들들인 하산과 알리가 공동 집권하였는데, 하산은 1390년과 1395년 단독 집권을 시도한다.[21]

두 차례 모두 알리에게 패배한 하산은 카이로로 향하여 바르쿠크에 원조를 청했으나 술탄은 그를 시타델에 감금하였다. 다만 그 직후 알리가 살해된 후 석방된 하산은 1396년 샤리프로 복위하였고, 아들 바라카트를 공동 아미르로 봉하였다. 1408년 하산은 술탄 앗 나시르 파라즈로부터 히자즈 부왕(나이브 앗 술타나 빌아크타르 알 히자지야)로 봉해져 메카뿐만 아니라 메디나도 관장하게 되었다. 하산은 메디나의 아미르를 봉하였고, 예언자 사원의 쿠트바에서 술탄 다음으로 (현지 아미르가 아닌) 메카의 샤리프가 2번째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1410년 하산을 경계하게 된 술탄 앗 나시르는 아미르 알 핫즈 바이사크를 파견하여 샤리프를 교체하고자 하였다. 이에 하산은 기병 6백과 보병 6천을 모아 맞섰는데, 양측의 전투가 있기 직전 앗 나시르는 마음을 바꿔 하산을 재신임하였다. 이는 메카 샤리프 권력의 비약적인 신장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비슷한 시기 벵골 술탄국의 기야스 웃 딘 아잠 샤가 메카와 메디나의 기야시야 마드라사 건립을 위해 토지 구입비와 성지 보수를 위한 후원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1415년 하산은 신임 술탄 샤이크에 의해 폐위되었지만 아들 바라카트를 보내 협상한 끝에 이듬해 복위하였다. 1422년엔 술탄 바르스바이가 재차 하산을 폐위하려 했지만 그는 자신을 폐위하기 위해 파견된 아미르 알 핫즈 파이루즈를 환대하고 많은 선물과 함께 돌려보냈다. 하산에 대한 파이루즈의 호평에 술탄은 샤리프 교체를 철회하였다. 그러나 1424년 바르스바이는 루마이타의 증손자 알리를 샤리프로 봉하곤 군대와 함께 파견하였다. 하산은 이에 대적하지 않았고, 알리에게 메카를 양도한 후 예멘으로 은퇴하였다. 다만 몇 달 후 다시 마음을 바꾼 바르스바이에 의해 하산은 술탄을 알현한다는 조건 하에 복위하였고, 메카에 파견된 아미르 알 핫즈 타그리는 바라카트가 보는 앞에서 카바의 검은 돌에 대고 자신과 술탄 모두 하산에 대한 악의가 없음을 맹세하였다. 1425년 약속대로 타그리를 따라 카이로에 당도한 하산은 환대를 받았고, 술탄을 만나 3만 디나르 납부를 대가로 아미르 직을 확인받았다. 다만 5천 디나르의 선금이 올 때까지 카이로에 귀빈으로 남아있다가 1426년 봄에야 메카 귀환이 허가되었으나 병으로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하산의 사후 카이로로 소환된 바라카트는 바르스바이에게 남은 돈의 납부와 매년 1만 디나르의 연공 납부 및 제다의 관세(무카스) 공유를 대가로 샤리프로 승인되었다[22](바라카트 1세). 그의 치세에 벵골의 술탄 잘랄 웃 딘 무함마드 샤가 선물 및 예복을 보내었고, 바라카트의 허가하에 메카와 메디나에 바니알리야 마드라사를 건설하였다(1428~31년). 바라카트는 30여 년간 안정적으로 통치한 후 1455년 사망하였고, 뒤를 이은 아들 무함마드도 술탄 카이트베이의 치세와 거의 유사하게 1497년까지 장기 집권하였다. 그의 사후 1474년부터 공동 아미르이던 아들 바라카트 2세가 계승하였다. 본래 대부분 시아파 계열의 다섯 이맘파(자이디야)에 속했던 메카 아미르들은 15~16세기 무렵 수니파로 개종하였다. 다만 그 전부터 맘루크 왕조는 꾸준히 카바(하람 사원)의 이맘을 자이디 대신 수니 무슬림 중에서 임명하게 하는 등 압력을 행사한 바 있다. 14세기 중반 하람 사원의 이맘은 자이디인 아불 카심 앗 슈가이프였지만 메카의 대법관은 수니파의 샤피이 법학파인 시하브 앗 딘 알 타바리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5.4.3. 오스만 제국

15세기 말엽 예멘으로부터 메카에 커피가 전래되었고, 16세기 들어 보편화되었다. 다만 사람들이 모스크 부근에 모여 커피를 마시는 것을 반체제 인사들의 모임이라 여긴 메카의 시장 감찰관 카이르 베이 알 미마르는 커피 금지령을 내리기도 하였다(메카 사건, 1511년). 다만 이는 몇 주만에 직접 커피를 마셔본 술탄 깐수 알 구리가 금지령을 해제하며 해프닝으로 끝났다. 한편 1505년 술탄 깐수는 인도양 포르투갈 세력에 대적하기 위해 아미르 후세인 알 쿠르디의 함대를 파견하였고, 바라카트 2세는 맘루크 함대가 제다에 머무는 동안 그들을 도와 도시에 성벽을 건설하였다. 이는 1517년 12월 포르투갈 함대의 공격에도 제다의 오스만-맘루크 수비대가 견딜 수 있었던 이유였다. 다만 같은 해 맘루크 조를 멸망시킨 오스만 조는 제다의 수비를 도운 후 도시를 직할령으로 병합하였다. 바라카트 2세는 아들 무함마드를 성지들의 열쇠 등 선물과 함께 이집트로 보내 술탄 셀림 1세에게 복속하였고 답례로 책봉되었다. 1525년 바라카트 2세의 사후 샤리프로 등극한 무함마드(아부 누마이 2세)는 1554년 아들 하산을 공동 아미르로 봉하였다.

40여 년간의 안정적인 통치 후 1567년 무함마드는 하산에게 양위하였고, 그 후 종교 생활에 치중하다가 1584년 사망하였다. 하산 역시 34년간 장기 집권하였다. 그러나 1601년 하산이 사망한 후 그의 네 아들들인 압둘 무탈립, 아부 탈리브, 이드리스, 푸하이드가 내전을 벌였다. 17세기 들어 이미 오스만 제국은 히자즈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고, 현지 유력자들인 아슈라프와 예멘의 총독들이 샤리프 선출에 관여하였다. 형제들을 모두 물리친 이드리스는 1610년부터 사촌 무흐신 이븐 후세인과 공동 집권하였는데, 1624년 가을 양측의 충돌과 타협이 있은 후 이드리스가 병사하며 무흐신이 단독 샤리프가 되었다. 그러나 4년 후 그는 오스만령 예멘 총독 쿠르지 아흐마드 파샤와 마찰을 겪었고, 이에 후자는 아흐마드 이븐 압둘 무탈립을 제다에서 아미르로 옹립하였다. 1628년 5월 무흐신은 별 저항 없이 메카를 아흐마드에게 넘겨준 후 예멘으로 향하여 이듬해 사망한 후 사나에 안장되었다. 다만 그 해 9월 아흐마드 역시 신임 예멘 총독 깐수 파샤에 의해 처형(혹은 암살) 당하였다.
5.4.3.1. 예멘 카심 왕조의 침공
이후 마수드 이븐 이드리스가 옹립되었으나 1630년 9월 병사하였고, 그는 알 무알라 묘지의 카디자 영묘 한 켠에 안장되었다. 3달 후 아슈라프 회의는 아부 누마이 2세의 후손들 중 원로였던 압둘라 이븐 하산이 샤리프로 선출하였다. 하지만 고령이었던 압둘라는 1631년 아들 무함마드와 종손 자이드 이븐 무흐신을 공동 후계자로 임명하고 사임하였다. 이듬해 사망한 그는 부친 하산의 돔형 영묘에 합장되었다. 한편 예멘에서 오스만 제국을 축출하며 자신감을 얻은 자이디 이맘 알 무아야드 무함마드는 1632년 초엽 북쪽 방면 팽창을 위해 코르 마흐무드와 알리 베이 휘하의 1천 병력을 히자즈로 파견하였다.[23] 메카에서 남동으로 2백여 ㎞ 떨어진 알 쿤푸다에서 샤리프위를 주장하던 나미 이븐 압둘 무탈립과 연합한 자이디 군대는 이집트로 향하는 길이라며 메카에 입성하려 하였고, 거부 당하자 공격해 점령하였다. 공동 샤리프 무함마드와 자이드는 오스만령 제다 총독 무스타파 베이와 반격에 나섰으나 3월 17일 와디 알 비야르에서 패배하였다.

수백에 달하는 전사자 중에는 무함마드와 무스타파 베이도 있었고, 자이드는 잔여 아슈라프와 함께 와디 마르 앗 자흐란으로 철수하였고 나미는 자이디 군대와 함께 메카에 입성하였다. 그 후 자이디 군대는 메카와 제다를 약탈하였다. 한편 메디나로 피신한 자이드로부터 비보를 전해들은 오스만령 이집트 총독 할릴 파샤는 수륙 양면으로 3500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자이드는 메디나의 외항인 얀부에서 이들과 합류하고 함께 남하하였다. 이에 6월 말엽 나미와 자이디 군대는 메카를 탈출해 동쪽 120㎞의 투르바 성채에 틀어박혔다. 자이드와 오스만 군대는 핫즈를 행한 후 투르바를 포위, 우물 근처에 복병을 설치하였고 물을 기르러 온 적군을 격파해 2백여 명을 전사시켰다. 투르바는 7월 29일 함락되었다. 일반 병사들은 예멘으로 돌려보내졌으나 나미, 코르 마흐무드 등의 주요 포로들은 메카로 압송되어 논의 끝에 알 무다아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한편 17세기 메카는 몇 차례 홍수에 시달렸다. 1630년의 홍수 때에는 카바가 붕괴되었고, 이는 6년 후에야 복구되었다. 1680년의 홍수 때에는 100명이 익사하는 피해를 내었다.
5.4.3.2. 18세기의 혼란
복위한 자이드는 1666년 7월 사망할 때까지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그의 사후 아슈라프 위원회는 후계자를 놓고 분열하였다. 다수는 원로이자 자이드를 후계자로 택한 압둘라의 아들 하무드를, 소수는 사드 이븐 자이드를 지지하였다. 결론을 내지 못한 아슈라프는 오스만령 제다 총독이자 하람의 셰이크 이마드 아가에게 결정을 맡겼고, 그는 사드에게 킬라흐(예복)를 보내었다. 사드는 1672-82년간 샤리프직을 유지한 바라카트 3세 등 몇몇 친척들에게 축출되었으나 1694년부터는 대체로 계속 집권하였다. 하지만 1705년 사드가 사망한 후 사드, 사이드, 압둘라의 세 아들들과 다른 왕공들 간의 내전이 이어졌다. 혼란기는 1732년 마수드 이븐 사이드가 집권한 후 20년간 통치하며 수그러들었고, 1752년 그가 사망하자 동생 무사이드가 계승하였다. 그는 집권 직후 타이프를 근거지로 메카를 두 차례 공격하던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와 그해 휴전에 합의하였다.

그러던 1756년 8월 26일, 무사이드의 기존 동맹이던 사이드 압둘라가 순례차 와있던 오스만령 다마스쿠스 총독 체트지 압둘라 파샤와 연합해 하람 사원을 장악하고 아미르를 칭하였다. 그 다음날 메카 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무사이드는 승리를 거두며 반란을 진압하였다. 하지만 시리아의 임지로 돌아간 체트지 압둘라는 1758년 8월 술탄의 칙령을 받아 무사이드를 폐위하고 동생 자파르를 샤리프로 옹립하였다. 그러나 핫즈 카라반이 떠난 9월 자파르는 형에게 양위하였다. 복위한 무사이드는 네 무프티들의 증언과 함께 술탄 무스타파 3세에게 체트지 압둘라를 고발하였다. 샤리프의 손을 들어준 술탄은 체트지 압둘라를 직위해제하고[24] 무사이드를 재차 책봉하였다(1760년 2월). 한편 1760년대 말엽 바라카트 가문의 압둘라 이븐 후세인은 이집트의 알리 베이 알 카비르와 연합, 후자의 아미르 알 핫즈인 무함마드 베이 압둘 다하브와 무사이드를 폐위하려 하였다(1770년). 이에 무사이드는 시리아 측의 아미르 알 핫즈인 우스만 파샤 앗 사디크와 연합해 그에 맞서 샤리프위를 지켜내었고, 그 직후 동생 압둘라에 충성을 서약하곤 사망하였다.

다만 압둘라는 즉위 직후 동생 아흐마드에게 폐위되었고, 후자는 다시 이집트의 알리 베이에게 폐위되었다. 그후 이집트 군의 지지를 얻어낸 압둘라 이븐 후세인이 위조된 칙령과 함께 메카에 입성하였다(1770년 7월). 다만 3달 후 아흐마드는 베두인들의 도움으로 메카를 수복하고 복위하였다. 1773년 2월 조카 수루르 이븐 무사이드에게 폐위되었다. 그 후 샤리프위를 놓고 양측 간에는 15번의 충돌이 벌어졌고, 그 마지막인 1779년 여름의 전투에서 아흐마드는 포로가 되었다. 수루르는 그를 제다에 감금한 후 9년간 통치하며 안정을 회복하곤 1788년 1월에 사망, 카디자 영묘에 묻혔다. 사후 동생 압둘 무민이 샤리프가 되었으나 그는 며칠만에 다른 동생 갈립에게 양위하곤 그의 휘하에서 수 차례 신흥 세력인 디리야의 와하비 세력에 대한 원정에 나서는 등 활약하였다. 1778년 갈립은 9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후다일 부족과 함께 반기를 든 동생들을 메카 부근에서 격파하였다. 그럼에도 반군은 이듬해 싸키프 부족과 함께 타이프를 점령하였다. 이에 갈립이 베두인을 모아 토벌군을 편성하자 동생들은 울라마의 중재 하에 그와 휴전을 맺었다.

5.4.4. 사우디 & 이집트의 지배


1803년 4월 와하비 군대가 메카로 진군해오자 갈립은 압둘 무민을 아미르로 남기고 전 제다로 철수하였다. 갈립이 수비대마저 데려가버리는 바람에 압둘 무민은 별 수 없이 사우드 이븐 압둘 아지즈에게 항복하였고, 그로부터 아미르로 봉해졌다. 다만 4달 후 갈립이 반격에 나서자 압둘 무민은 그에게 성문을 열어주고 함께 와하비 수비대를 축출하였다. 그러나 복위한 갈립은 1805년 재차 사우디에 복속하였고, 메카에는 와하비 수비대가 배치되었다. 우상 숭배를 엄격히 금하는 와하비즘의 특성상 그들은 메카 각지에 산재한 성인들의 무덤 등 이슬람 유적들을 파괴하고 카바를 개조하였다. 와하비 세력의 준동으로 '두 성지의 수호자' 칭호가 무색하게 되고 대상들이 습격을 당하게 되자 술탄 무스타파 4세는 1807년 이집트 총독 메흐메드 알리 파샤에게 개입을 명하였다. 다만 당시 영국의 이집트 침공에 맞서던 그는 4년 후에야 장남 투순 파샤 휘하의 1만 병력으로 히자즈 원정에 나서게 된다.

1812년 말엽 투순 파샤는 메디나를 점령하였고 1813년 1월 부친 메흐메드 알리의 대군과 합류해 제다를 수복하였다. 그 후 2만이 넘는 이집트 군대가 메카로 진군해오자 1천에 불과한 와하비 수비대는 항복하였다. 그 해 11월 메흐메드 알리는 갈립을 폐위, 이집트로 유배보내고 야흐야 이븐 수루르를 샤리프로 옹립하였다. 히자즈를 수복한 이집트 군대는 이브라힘 파샤의 지휘 하에 1818년 디리야를 함락하며 1차 사우디 국가를 멸망시켰다. 한편 1827년 메흐메드 알리는 재차 야흐야를 폐위하고 압둘 무탈립 이븐 갈립을 옹립했다가 한 달 만에 그 역시 폐위한 후 17세기의 샤리프 압둘라 이븐 하산의 6대손인 무함마드 이븐 압둘 무민을 샤리프위에 올렸다. 1851-56년 압둘 무탈립이 복위된 것을 제외하면 무함마드 이븐 압둘 무민은 1858년 사망 시까지 약 30여 년간 통치하였다. 그의 아운 가문은 이후 샤리프 직을 유지하며 하심 왕가로 이어지게 된다. 사후 장남 압둘라가 계승하였다.

5.5. 근현대

파일:메카 전경.png

1787년의 메카 삽화

5.5.1. 오스만령 히자즈

메흐메드 알리는 1840년 유럽 열강의 개입으로 오스만 제국에 패배한 후 히자즈에서 물러났다. 그 후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 오스만 제국은 1872년 일대에 대한 장악력 확대를 위해 히자즈 빌라예트를 세웠다. 메카는 파샤가 머무르는 주도가 되었고[25], 기존의 총독부이던 제다와 메디나는 그에 부속된 산작 베이의 치소가 되었다. 오스만 조정은 새로운 샤리프가 즉위함과 동시에 그 후계자를 선정, 후자를 이스탄불로 데려와 와지르 직위를 내려 국무회의에 참석시키는 등 제국에 대한 귀속감을 육성시켰다. 그에 따라 1877년 샤리프 압둘라 이븐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동생 후세인이 계승하자 다른 동생 아운 알 라피크는 이스탄불로 향하여 후계자 과정을 밟았다. 그러던 1880년 6월 후세인 이븐 무함마드가 암살 당하였는데, 그가 영국과 공모해 '칼리파국에 대항하는 아랍 정권'을 세우려 했다고 의심한 술탄 압둘 하미드 2세는 예정된 후계자 아운 알 라피크 대신 폐위된 후 20여 년간 이스탄불에 연금되어 있던 연로한 압둘 무탈립 이븐 갈립을 재차 복위시켰다.

24년만에 아운 가문이 아닌 샤리프를 임명함으로써 압둘 하미드는 그들을 경계하고 히자즈에 대한 제국의 장악력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운 가문과 친분을 쌓아가던 영국은 이에 반발하였고, 그 외교관들은 압둘 무탈립의 임명을 막고자 하였다. 일례로 제다의 영국 영사 제임스 조흐랍은 상부에 '와하비 분파이고 기독교도와 외국인을 혐오하는' 압둘 무탈립 대신 '계몽된' 아운 알 라피크를 지지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영국의 이스탄불 대사 오스틴 헨리 레야드가 항의하자 압둘 하미드는 그와 아운에게 압둘 무탈립이 죽으면 아운이 후임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러던 1882년 9월 총독 오스만 누리 파샤는 그를 폐위하고 압달일라 이븐 무함마드를 샤리프로 옹립하였다. 술탄 압둘 하미드는 총독의 일방적인 결정을 거부하고 아운 알 라피크를 샤리프로 봉하였고, 그는 이듬달 메카에 당도하였다. 여담으로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메카 아미르의 임명이 전보를 통해 공표된 경우였다. 23년의 집권 후 아운 알 라피크는 1905년 7월에 사망하였고, 형 압둘라의 돔형 영묘 근처에 안장되었다.

아운 알 라피크의 사후 히자즈 총독 아흐메드 라팁 파샤는 알리 이븐 압둘라를 샤리프로 우선 추대하고 이스탄불의 결정을 기다렸다. 그 외에 1877년부터 이스탄불에서 후계자 단계를 밟던 샤리프 후세인과 1883년에 합류한 숙부 압달일라, 그리고 자이드 가문의 알리 하이다르 등 3명의 후보가 더 있었다. 3달 후 압둘 하미드는 총독의 결정을 승인하였다. 그러던 1908년 7월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 시에 샤리프 알리와 아흐메드 라팁 파샤는 그들의 개혁에 반대하였다. 이듬달 파샤는 체포되었고, 샤리프 알리는 9월 말엽 새 총독 카짐 파샤가 당도할 때까지 임시 총독을 맡았다. 그동안 그는 장교들에 의해 타이프 병영으로 끌려가 신헌법 지지 선언을 하였다. 장교들은 샤리프가 법적으로 노예, 군인, 베두인과 같다며 공식적으로 선포하며 망신을 주었다. 그후 샤리프 알리는 총독의 메카 귀환 요청을 거부하고 타이프에 머물렀다. 샤리프의 완고함에 지친 카짐 파샤는 1908년 10월 그를 해임하였다. 그 후 이스탄불에 머물머 임명을 고대하던 압달일라가 후임으로 선포되었으나 4일도 안 되어 출발하기도 전에 사망하였다.[26]

5.5.2. 헤자즈 왕국

이스탄불에 있던 후세인과 알리 하이다르 중 후자가 청년 튀르크당과 친분이 있었음에도 명망이 높던 후세인이 아미르로 임명되었다(1908년 11월). 같은 해 오스만 제국은 다마스쿠스 메디나 간의 헤자즈 철도를 완공하여 순례의 편의성 및 일대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다만 철도를 메카까지 연장하려는 계획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연기되었다. 중앙 정부의 방침대로 사우디 세력을 견제하는 등 그에 협조하던 샤리프 후세인은 점차 그들의 튀르크 민족주의 열풍에 경계심을 느꼈다. 오스만 의회의 일원이던 아들 압둘라의 조언대로 후세인은 튀르크 국가가 되어가는 오스만 조에서 탈피해 아랍인들의 국가를 세우고자 하였고, 제국의 관심이 유럽 전선에 쏠린 틈에 영국과 비밀리에 접촉하였다. 이집트 이란 사이에 아랍인 국가 설립을 약속 받은 샤리프 후세인은 스스로 히자즈의 왕이자 말리크 빌라드 알 아랍(아랍 지역의 왕)임을 선포하며 공식적으로 오스만 조에 반기를 들었다.

1916년 당시 대부분의 터키군은 히자즈 총독 갈립의 지휘 하에 고지대의 타이프에 있었고, 메카에는 오직 1천여 병력만이 남아있었다. 그마저도 6월 10일 봉기가 개시될 당시 대부분 수면 중이었다. 샤리프 후세인이 하심 궁전 창문에서 공중으로 총을 발사하는 것을 신호로 5천여 하심 당원들은 메카를 굽어보는 3개의 요새들과 제다 방면 교통로에 위치한 지르왈 병영의 터키군을 공격하였다. 오스만 측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봉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몰랐던 그 지휘관은 샤리프 후세인에게 전화하여 상황을 물어보기도 하였다.[27] 후세인은 그에게 이유를 말해주고 항복을 종용했으나 거절 당하였다. 6월 11일 하심 군대는 하람 사원 부근 사파 구역의 바쉬-카라콜을 장악하였다. 12일에는 총독 관저인 하미디아가 점령되었다. 사로잡힌 총독 대리는 잔여 터키 병력에게 항복을 지시했으나 거부되었고, 그 후 교착 상태가 이어졌다.

봉기가 시작된지 며칠 후 오스만 조정은 후세인의 경쟁자 알리 하이다르를 메카의 아미르로 선포하였다. 이에 후세인은 제다에 있는 알리 하이다르의 심복 아흐메드 엘 헤자지를 체포, 그의 집을 약탈하게 하였다. 알리 하이다르는 3백여 병력과 함께 다마스쿠스를 거쳐 히자즈 철도를 따라 파크리 파샤가 지키던 메디나에 당도하였지만 1917년 봄 조정의 명으로 철수하였다.[28] 한편 메카의 교착 상태는 수단의 영국 장군 레지날드 윈게이트 경이 제다를 통해 두 문의 대포를 이집트인 포병들과 함께 보내주며 전환점을 맞았다. 포격에 힘입어 요새의 성벽이 뚫렸고, 하심 군대가 총공격에 나섰다. 결국 7월 4일, 마지막 터키군 점유지인 지르왈 병영이 3주간의 강한 저항 끝에 항복함으로써 5세기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메카 지배는 종식되었다. 이로써 메카를 수도로 하는 헤자즈 왕국이 공식 수립되었고, 8월에는 타이프가 점령되었다. 1916년의 핫즈는 기존 터키인들의 수탈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1917년 아카바, 1918년 시리아, 마지막으로 강력히 저항하던 메디나가 종전 후인 1919년 1월 항복하며 국왕 후세인은 알레포에서 메카에 이르는 영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 팔레스타인 유대인 국가 문제를 놓고 후세인은 동맹 영국과 충돌하였고, '아랍 지역의 왕' 칭호를 두고도 네지드 토후국의 압둘 아지즈 이븐 사우드와 대립하고 있었다. 1918-19년 히자즈와 네지드 사이의 알 쿠르마 오아시스를 두고 벌어진 전쟁에서 하심 군대는 대패하였고, 와하비 군대의 히자즈 진격은 영국의 엄포로 겨우 중단되었다. 그 후 1920-21년 하일의 자발 샴마르를 정복하고 1922년 메카 남쪽 아시르 지방을 정복한 압둘 아지즈는 1923년 초엽 히지즈 정복을 결심하였다. 그러던 1924년 3월 3일, 터키에서 칼리파제가 폐지되자 이틀 후 후세인은 요르단에서 칼리파를 칭하였다. 후세인과 대립하던 영국의 불간섭을 확인한 압둘 아지즈는 그 해 9월 타이프 점령을 시작으로 히자즈 정복에 나섰다.

5.5.3. 사우디아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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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바에서 바라본 알베이트 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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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하람 사원 주변의 호텔들

1924년 9월 24일의 타이프 함락 이후 10월 6일 후세인은 유지들의 충고에 따라 메카를 떠나 제다로 피신, 아들 알리를 히자즈 국왕이자 샤리프로 선포하였다. 메카 진격을 망설이던 압둘 아지즈는 후세인의 양위 및 이후 마음을 굳혔다. 성지를 '해방'시키겠다는 종교적 열의로 무장된 이크완 부대를 앞세운 5천의 사우디 군대는 12월 5일 별 저항 없이 메카에 입성하였다. 당시 메카에는 1천의 병력과 5대의 무장 차량, 심지어 한 대뿐이긴 했지만 비행기까지 있었음에도 지도자가 없이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수비대는 그대로 붕괴되었다. 사우디 군대는 키슐라 무기고를 접수하고 제다를 포위하였다. 1925년 12월, 10개월의 포위 끝에 영국의 중재로 제다마저 항복하였고, 샤리프 알리는 이라크로 떠나며 헤자즈 왕국(하심 칼리파국)은 9년 만에 멸망하였다. 그 후 압둘 아지즈는 히자즈의 왕을 칭하였고, 네지드 술탄국은 1926년 1월 히자즈-네지드 왕국으로 개편되었다.

당시 메카의 인구는 약 6만으로, 전쟁 전의 8만에 비해 크게 감소한 상태였다. 히자즈-네지드 왕국은 1932년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으로 개편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와하비 세력은 메카의 많은 이슬람 유적들을 파괴하였고, 동시에 시가지를 확장해 주변 마을들을 도시에 포함시켰다. 사우디 지배기 동안 카디자와 아부 바크르의 집, 무함마드의 탄생지, 오스만 시대의 아즈야드 성채 등 많은 유적들이 순례를 위한 시설 건설이란 미명 하에 파괴되었다. 1962년 메카에서는 공식적으로 노예제가 금지되었고, 1964년에는 하람 사원이 확장되었다. 같은 해 미국의 무슬림 흑인 민권운동가 말콤 엑스가 순례차 방문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러던 1973년 메카 도시 계획이 되며 비약적인 발전이 개시되었고, 이듬해 이구는 37만에 이르렀다. 한편 1979년 이란 혁명의 여파로 자칭 마흐디와 그 추종자들이 순례객들을 인질로 잡고 TV 방송 중단, 비무슬림 추방 등을 요구하며 하람 사원을 점거하는 사건이 있었다. 특수부대의 진압 끝에 수백 명이 사망하고 그때까지 생존한 마흐디 일당은 공개 처형 당했다. 1987년에도 시아 순례객들의 시위로 수백 명이 사상하였다.

6. 비무슬림에게 금지된 도시

믿는 자들이여, 실로 불신자들은 불결하나니 그들로 하여금 그 해 이후 하람 사원[29]에 접근하지 않도록 하라 (후략)
쿠란 9:28
쿠란에 따라서 무슬림이 아닌 사람은 메카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2019년 9월 28일부터 사우디아라비아 관광비자를 외국인에게 발급해주기 시작했지만 정작 사우디에서 가장 역사적, 상징적으로 의미가 있고 관련 문화재도 많은 성지 메카와 메디나는 방문이 불가능한 반쪽짜리 관광비자다.[30]

메카에 방문하기 위해선 하지/움라(Hajj/Umrah) 비자가 필요하며, 최근 해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eVisa에서는 신청이 불가능하며 이곳에서 따로 신청해야 한다.

주류 수니파에게서 이단 취급 당하는 아흐마디야 무슬림도 비무슬림으로 취급된다. 따라서 무슬림이 아닌 사람이 메카 내의 의식을 보기는 엄청나게 힘들다. SBS 다큐멘터리 팀이 '신의 길 인간의 길' 촬영 당시 메카에 들어가 순례 의식을 다 찍어왔는데, 이런 경우도 메카에 직접 들어가지 않고 촬영을 현지 에이전시의 무슬림 스탭이 하는 것이다.

옛날 서유럽에서는 모험의 끝판왕 수준으로 메카 순례를 취급했는데, 16세기에 최초의 메카 방문 기록을 남긴 이탈리아인 루도비코 디 바르테마, 17세기에 바르바리 해적에 납치된 후 이슬람으로 개종한 영국인 조지프 피츠, 19세기 초에 스위스인 요한 루드비히 부르크하르트(1784-1817), 그리고 1853년에 아라비안 나이트의 번역자로 잘 알려진 리처드 프랜시스 버튼(1821-1890)을 포함해 1931년 이전 25명의 서유럽인들이 무슬림으로 위장하거나, 무슬림으로서 메카를 방문했다. # 부르크하르트도 이슬람교 개종자였다. 사실 국가, 민족을 막론하고 개종했으면 메카 순례를 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현재는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매년 수만명씩 메카로 향하니…

다만 메카 현지에서 5년 동안 건설업을 했던 튀르키예인 크레인기사에 따르면, 검문 자체가 사람의 양심에 맡기는 수준이라 그냥 순례자 차림을 하고 무슬림인 척 코스프레를 해도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이 사람은 5년 동안 카바를 5번이나 순례했지만 정작 무신론자(!)[31]이다(…) 카바 순례도 카바 주위 도로를 차를 타고 빙빙 도는 식으로 했다고. 튀르키예인이니 당연히 무슬림이라 생각해[32] 막지 않은 듯.

무슬림 여부는 국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서 한국인이라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선언만 하면 당당히 비자를 받고 갈 수 있다. 무슬림들이 다들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라 매년 국가별 쿼터가 있지만, 한국은 한국인 무슬림 비율이 극히 적어 저 쿼터를 다 채울 일은 절대로 없기 때문에(...)[33] 한국인이 이슬람교로 개종했고 돈만 있다면 사실상 매년 갔다 올 수 있다.

성지순례를 위한 하지/움라 비자 신청 시 신청자가 무슬림인지 확인하는 과정은 없으며 오직 신청자의 양심에 맡기기 때문에 본인이 무슬림이라고 하면 그냥 발급해주며, 입국시나 메카에 들어갈때에도 무슬림인지 확인하는 과정은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무슬림이 맞냐는 질문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진짜 질문 한마디만 하고 여기에 Yes라고 하면 더 이상 물어보지도 않는다.[34] 쿠란에 의하면 거짓말은 중대한 죄악이라 명시되었기 때문. 단, 이렇게 메카에 진입을 하더라도 무슬림의 눈총을 받을 수 있는 복장은 하지 않고 검소한 복장을 하는것이 좋으며, 특히 여성은 최소 히잡처럼 머리를 가리고 들어가는걸 권장하며 눈에 띄는 행동도 그다지 추천하지 않는다.[35] 이런 편법을 써서 메카 진입에 성공한 비무슬림 관광객이 한국인을 포함하여 실제로 여럿 존재하지만 사우디 정부에서 권장하는 진입 방법이 아닌 편법인지라 리스크가 있기 때문에 죽어도 가보고싶지 않은 이상 권장하지 않는다. 사우디 당국도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지만 메카에서 사고만 치지 않으면 그냥 눈감아주는 모양이다.

이런 편법을 쓰지 않더라도 사우디 왕족의 허가를 받으면 들어갈 수 있는 것 같다. 그 예가 알 힐랄 소속일 때의 이영표[36] 등 외국인 선수단들이다. 물론 이슬람 입장에서 불경스러운 행동을 하면 얄짤없이 추방이다. # 또한 이슬람에 우호적인 영화 촬영 시에도 허가해주는 듯 하다. 예를 들어 덴젤 워싱턴은 기독교인이었지만 무슬림인 말콤 엑스의 전기영화를 찍을 때는 워싱턴을 비롯한 비무슬림 영화 스탭들에게 메카 방문을 허가해 주었다.

또한 무슬림이라 해도 사우디 국민이 아니라면 입국도 쉽지 않은 일이다. 숙박시설과 편의시설이 전체 무슬림의 수요를 채우기 부족하기 때문에 사우디 측에서 각 나라의 인구수에 따라서(보통은 이슬람 신도 1000명당 1명꼴로) 쿼터를 정했고, 이 때문에 무슬림이라 해도 하지 기간에 순례를 하는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서 하지기간에 순례를 하는것은 많은 무슬림들에게 로망이기도 하다. 심지어 사우디 국민이라 해도 메카 거주자가 아니라면 순례철에는 따로 비자를 받아야 카바에 갈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오지만, 사우디 정부는 워낙 사람이 넘쳐서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 기간에 순례를 못해 아쉬운 사람은 우므라라는 소순례를 한다. 우므라는 필수는 아니지만 하지 기간에 순례를 하는것보다 입국비자를 받기 훨씬 쉽기 때문이다. 우므라는 미리 신청을 하지 않아도 사우디아라비아 관광 비자만을 통해 그냥 방문할 수 있어 어렵지 않다. 우므라 비자가 따로 있긴 하지만, 최근 빈 살만 왕세자의 개혁개방 정책에 따라 방문이 자유화 된 것이다. 제다역이나 공항, 메카역, 하람 사원 및 카바 입구 등지에서도 (하지 기간 외에는) 비자나 여권 등을 따로 검사하지 않는다. 물론, 사실상 규제가 없어진 점을 악용하여 비무슬림이 하람 일대에 들어갔다가 재수없게 걸리기라도 한다면 본인에게 큰 피해가 감은 물론이고 외교적 마찰까지 발생할 수 있으니 유의할 것.[37]

메르스와 코로나 19 사태때 때처럼 사우디 내나 세계 어느 국가에서 치명적인 감염성 질병이 발생할 경우에는 안전을 고려하여 방문 인원을 축소할 때도 있다.[38] 2024년 현재에는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돌어갔고, 우므라의 경우 사실상 모든 규제가 풀린 상태이다.

게다가 메카에는 3차 순환도로와 4차 순환도로라는 고속화도로가 있고, 이들은 제다 리야드 등 사우디아리비아의 다른 곳을 연결하는 역할도 한다. 단, 4차 순환도로는 아주 외곽에 위치하고 있어 비무슬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고속화도로이다.

7. 관광

전 세계의 무슬림이라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이라 사우디아라비아에겐 석유가 발견되기 전까지 순례객들에게 걷는 세금이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초만 해도 교통편이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메카 순례는 목숨과 재산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39] 그래서 메카 순례를 한 사람을 높이 평가한 것도 이러한 어려움 때문이었다. 또한 상당수 이슬람 국가들이 식민지화를 비롯한 각종 정치적 사정으로 메카 순례에 제약이 걸렸던 적도 있었기 때문에 순례객이 1년에 몇만 명 남짓 정도 되는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에 항공 교통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면서 순례객들이 매 해 수백만 명으로 증가했다. 현재도 순례객들이 더욱 많아져서 숙박 시설과 여러 편의 시설 부족이 고질적인 문제라 대규모 호텔과 여러 시설을 짓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래 봬도 매 해 관광 수익이 200억 달러가 넘는데, 이것도 메카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부유한 순례객은 비교적 편하게 순례하는 데 반해 수십 년에 걸쳐 돈을 모으고 순서를 기다린 가난한 순례객들은 여전히 상당한 고생을 해야 하는지라 상업성에 찌들었다고 말이 많이 나온다. 실제로 하람 사원 주변의 5성급 호텔들과 도시 외곽의 허름한 아파트들은 똑같은 이흐람 옷을 입더라도 순례객 간의 빈부격차가 크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메카를 방문하면 이슬람교 신도가 아니더라도 자원봉사자들이 제공하는 간단한 식사나 물을 공짜로 얻어먹을 수가 있다고 한다. 이는 멀리서 메카를 방문하는 이슬람교 신도에 대한 오래된 관습이라고 한다. 역시 성지인 메디나에서도 무료로 대추야자 등의 과일이나 빵, 물 등을 나눠주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오히려 비둘기 먹이를 돈 주고 판다

7.1. 알 하람 사원


파일:메카 건설 중.jpg

파일:메카 카바.jpg

사진은 하람 사원을 확장 중인 모습이다. 2025년까지 10여 년에 걸쳐 철저하게 튼튼하게 짓는다. 이렇게 확장하면 이 신전에 무려 300만 명 이상이 들어올 수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지구에서 가장 큰 종교 성전이 될 텐데, 계획대로라면 사우디아라비아로 오는 순례객은 매 해 150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또한 확장 공사가 모두 끝나게 되면 총 1000억 달러라는 비용이 소요될 것이라고 한다. 이로써 메카 하람 사원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구조물로 기록되어 있다. 출처.

오른쪽 시계탑 모양 빌딩이 2012년 완공된 알베이트 타워로, 세계에서 가장 큰 시계탑 건물이다. 높이는 601m. # 그러나 2015년 저 크레인들 중 하나가 붕괴되어 사망자 107명이 나왔다. 사진 출처.

7.2. 하람 권역 밖

극보수 이슬람인 와하비파의 이크완 부대에 의해, 그리고 현대 들어 도시화 과정에서 많은 유적들이 파괴되었지만 여전히 메카에는 여러 명소들과 유적들이 남아있다. 해당 문단에는 제1 순환도로 밖의 기존 메카 구도심 외곽의 볼거리들을 소개한다.
메카 동부에 위치한 누르 산의 정상부에 위치한 암굴로, 4명 정도가 앉아 있을 만한 작은 공간이 있다. 이곳에서 무함마드가 명상하다가 대천사 지브릴 (가브리엘)이 전한 '이끄라! (읽으라)'로 시작하는 계시를 받으며 이슬람이 태동하였다. 따라서 등산 문화가 전무하다시피 한 사우디지만 많은 순례자들이 왕복 2시간이 넘는 등반에 나서는 것을 볼 수 있다. 최근 들어서는 사우디 당국이 관광지로 개발에 나서고 있어 주차장 옆에 문화 단지와 함께 알 와흐유 박물관, 커피 박물관, 예배당 등이 들어섰고 등산로 역시 거의다 완만한 계단으로 정리되었다. 등반이 귀찮은 사람은 30 리얄을 내고 와흐유 박물관에서 히라 동굴 모형을 체험할 수 있다.
무함마드가 야스리브 (메디나)의 사절단을 2차례에 걸쳐 접견하여 중재자 요청을 받아들인 곳으로, 이슬람 공동체의 본격적인 시작인 히즈라의 배경이 조성된 장소이다. 그저 평지였다가 760년대 압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만수르가 현재와 같은 작은 사원을 세웠다. 충성 서약 (바이아)를 받았다 하여 바이아 모스크 (مسجد البيعة)라 부르기도 한다. 이후 쇠락하다가 1227년 압바스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 1세가 중건했다. 최근에는 도로 건설 및 일부 순례자들의 훼손 등을 이유로 철망을 두르고 복원이 진행 중이다. 카바 외에 메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손꼽힌다.
메카 동남쪽 외곽에 위치한 높이 70m의 바위산.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천국에서 쫓겨난 아담 하와가 재회한 곳이라 하여 은총의 산이란 뜻인 라흐마 산 (جبل الرحمة)로도 불린다. 무함마드가 생전 마지막 메카 순례 당시 쿠트바 (금요 설교)를 행한 곳으로, 흔히 고별 설교 (خطبة الوداع)라 불리는 해당 연설은 이슬람 신앙을 총정리하고 완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 (대순례)의 막바지인 아라파 날에 순례자들은 아카바 사원 인근 미나의 야영지에서 이곳까지 무려 12km 거리를 걸어가는 것이 관례이다. 다만 하지 시기에 주로 운행하는 경전철 (메카 메트로)을 통해 이동할 수도 있다. 인근 니므라 모스크 (مسجد نمرة)는 하지 기간에만 운영된다. 산 정상부에는 모세의 시나이산이 생각날 만한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일부 신도들은 금지 문구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드리거나 감정을 참지 못하고 울기도 한다. 정상에서는 멀리 알베이트 타워가 보이고, 주변의 광장 등이 조망되는 등 전망이 좋다. 산 하단부에는 9세기 하룬 알 라시드의 부인 주베이다가 세운 물 저장고 및 타이프에서 물을 끌어오던 수도교 유적이 남아있다.
메카 남부의 돌산. 히즈라 당시, 막 메카를 빠져나온 무함마드가 아부 바크르와 함께 숨어 있던 곳. 쿠라이쉬 추격대가 접근했지만, 거미가 두꺼운 거미줄을 치고 비둘기가 집을 만들어 입구를 봉쇄하여 발각되지 않고 3일간 숨었다고 한다. 해발 750m에 달하여 등반에 2~3시간에 걸리며, 동굴은 정상부에 위치한다.
알 하람 권역 바로 북쪽의 돌산.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지구상 첫번째 산이며, 검은 돌이 카바에 안치되기 전에 있던 곳이라 한다.[40] 또한 무함마드가 스스로 행한 몇 안되는 기적인 달을 쪼갠 곳이라고 한다. 2차 피트나 당시 핫자즈 빈 유수프가 이곳에 투석기를 설치하고 카바 등지를 포격하기도 하였다.
알 하람 권역 동북쪽 외곽의 묘지. 카디자 등 히즈라 전에 사망한 사하바들이 주로 안장된 묘지로, 현대에는 하지 중에 사망한 순례자들의 임시 매장지로 쓰이고 있다. 메디나의 알 바키 묘지처럼 카디자와 카심 모자의 무덤 위에 있던 영묘는 와하비 세력에 위해 파괴되었다.
알 하람 권역 서북쪽 외곽의 우물. 무함마드가 630년 메카를 최종 정복할 때에, 성지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이곳에서 잠시 멈추어 목욕 재계를 하였다고 한다. 이후 오스만 시기에 우물 위에 기념 건물이 세워졌는데, 현재 보수 공사라는 미명 하에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
메카 서북부의 시립박물관. 1944년 사우디 국왕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의 궁전으로 세워졌다가, 최근 들어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메카의 전반적인 역사를 다루고 있다.
메카 남부의 도서관. 로비에 카바에 대한 작은 전시가 있고, 1~4층은 이슬람 신학과 법학 등을 다룬 공립 도서관이다. 멋진 실내 디자인이 볼만 하다.

8. 치안과 사건사고

종파 불문하고 무슬림이라면 이곳 만큼은 어떠한 폭력적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치안은 엄청 좋다고 한다. 폭행뿐만 아니라 절도 소매치기, 강도 등 범죄행위 일체 용납이 안 된다. 한 예로 1990년대 후반 한겨레 신문의 정문태 기자가 탈레반 지도자인 모하마드 오마르를 만나서 "당신들은 메카에도 테러를 저지를 수 있나?" 라는 질문을 하자 세상에 별 미친 질문을 다 한다는 듯이 경멸어린 눈초리로 보면서 거기에 간다면 무기조차 가지고 가지 말아야 한다며 더 말도 하기 싫다고 피했다고 한다.[41] 실제로 사우디 당국에서는 광신적인 이슬람 선교를 법으로 막고 있으며, 길거리에서 이슬람 우월주의 선교를 하면 이슬람 종교경찰인 무트와에게 잡혀간다. 그들도 이슬람 더럽히는 테러범이라고 하여 막 대한다고 한다.

8.1. 무력 충돌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무슬림이 메카에서 폭력을 쓰지 않는 건 아니다. 실제로 메카 내에서 소요사태가 몇 건 발생한 전례가 있다.

1979년 11월 20일에 발생한 메카 점거 사태는 사우디의 역사적 전환점 중 하나일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다. 주하이만 알 우타이비(جهيمان العتيبي)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부패한 사우드 왕가가 이슬람을 더럽히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무장 괴한들을 동원하여 메카의 카바 신전을 점거했다. 이때 수백 명이 인질로 억류되었다. 다음 날인 11월 21일 이슬람력으로 1400년 원단(元旦)이었기에 이슬람권에 가해진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를 두고 "이 습격 사건의 배후에는 이스라엘 미국이 있다."는 괴소문이 떠돌아서 이슬람권 국가에서 격렬하고 파괴적인 반미 운동이 연이어 발생하고 악성 루머가 계속 연이어 발생해 사태가 증폭되었다.

결국 사우디아라비아는 국가 경비대로 하여금 진압을 명령, 이들과 교전을 치렀고 이 과정에서 사우디 군경 127명과 폭도 117명이 사망하는 엄청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워낙 전례가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지만 그당시 사우디아라비아 국방장관을 역임하던 왕자는 해외순방 길에 올랐고, 칼리드 국왕은 병에 걸려 몸져 누워 있어 지휘부에 공백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진압에 나설 대테러 특수부대도 없어서 무려 36시간 동안 대응을 못하고 있다. 결국 성지 중 성지라도 이런 경우에는 무력 진압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무슬림 신학자단인 울레마의 승인을 받고 국왕과 개인적 친분이 있던 프랑스 GIGN을 동원해서 진압했다.

후에 이 점거 사태를 주도한 세력이 서구식 근대화를 부정하고 이란 이슬람 혁명을 추종하는 교조적 광신도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정치적 모델로서 이란의 혁명에게 감명 받은 것일뿐 구성원들은 시아파도 아니었고 오히려 원래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할 때 큰 공을 세운 이크완이라 불리는 네지드 지방의 극단주의적 성향 베두인 부족민들이었다.

이들 강성 베두인 부족들은 사우디 건국 이전부터 서방 제국주의 열강을 경계해왔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근본주의적 와하비 신학자들과 전투민족으로 이름이 드높았던 사우디 가문을 연결점으로 정치적 동맹을 구성했고, 이것이 건국의 기틀이 된다. 그러나 건국 이후 국왕에 오른 이븐 사우드는 지극히 현실적인 근대 국가의 요구에 의해 부분적으로나마 근대화, 세속화를 추구했다. 이런 행보는 보수 성향 울레마 뿐만 아니라 토사구팽 당한 베두인 이크완 세력에게도 눈엣가시였던 것이다.[42]

사실 이 사건까지만 하더라도 사우디도 어느정도 변화의 흐름에 발맞추던 나라였다. 그러나 이러한 초유의 사태를 겪고 보수 신학계가 얼마나 호전적인지 체감한 칼리드와 후임자들은 성지에서의 유혈사태라는 엄청난 신성모독 사태의 원인이 이슬람 원리주의에 있음에도 근대적 교육 과정을 폐지하고, 문화 예술을 탄압하고, 여성의 참정권과 사회적 참여권을 박탈하는 등 원리주의라는 퇴보의 길을 걷게 되었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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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시아 무슬림 순례객들의 시위

1987년 7월 31일에는 이란에서 온 시아파 순례자들이 수니파인 사우디아라비아 종교경찰과 충돌하면서 폭력 사태로 번져 402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 2017년 6월 24일에도 메카의 대모스크에 대한 테러 미수가 있었다. #

2014년 이라크 내전을 일으키며 세력을 확장하는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 일부에서 메카에 있는 카바 신전이 우상화되었다고 부술 것이라 엄포를 놓자 메카의 보호자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격분했다. 물론 카바 신전에 있는 무함마드의 돌은 소중히 간직한다는 말을 덧붙히거나 일부 이단을 거론하는 등 수습하려고 했지만 이슬람세계에서 상종못할 자들이라는 인상을 남겼다.[44]

8.2. 안전 사고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순례를 하다 보니 대형 사고가 여러 차례 발생한 바 있다. 1990년 7월에는 순례자용 터널 한 곳에서 환기 시설이 고장 나면서 빠져나가려던 순례자들이 서로 얽히고 넘어져 2천 명 가까이 압사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고, 1997년 4월 27일에는 순례자들이 묵던 텐트촌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 6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2015년에는 신전 확장 공사 중이던 크레인이 붕괴되어 107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 연이어 인근 호텔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 9월 24일에는 마귀의 돌기둥에 돌을 던지는 의식 중 사고가 발생하여 # 700명 이상이 사망하는 사고마저 일어났다. 이 사고에서 발생한 사상자, 실종자 중 이란인이 적지 않아서 이전부터 앙숙 관계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관계가 더욱 나빠졌다. 이때 이란의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사우디 정부가 책임을 지고 공식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메카에서는 거의 매년마다 압사 사고가 일어난다. 하지만 그런데도 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는다. 도쿄대학 첨단과학기술연구센터의 니시나리 카츠히로(西成活裕)[45] 교수는 성지순례에 참여하는 이슬람교인들은 종교적 신념이 지나치게 강해서 남의 지시를 전혀 따르지 않기 때문에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2024년 하지(haji)기간에는 최소 550명 이상이 사망했는데, 압사당한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온열질환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6월 24일 기준 1,300명 이상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더 자세한 내용은 2024년 메카 폭염 문서 참조.

9. 이 지명에서 유래된 명사

워낙 유명하다 보니 이슬람 외에서도 특정한 일에 대해 가장 뛰어난 자들이 모여 있거나, 또는 특정한 일이 가장 번창하고 있는 곳을 지칭하는 대명사로도 쓴다. 보통 어떤 집단, 장르, 컨텐츠 등을 대표하는 성지를 뜻하는 말이라고 보면 된다. 마치 디시인사이드 등지에서 성지순례라고 표현하듯이 메카를 어떤 기술이나 무언가가 집약된 중심지 같은 셈이다. 이 때문에 개관 항목에서 서술하였다시피 사우디 정부는 이 명사가 유래된 곳의 표기를 메카(Mecca)에서 마카(Makkah)로 바꿨다.

https://haleema.co.uk/
[1] 알 아크사 모스크, 바위의 돔 [2] 프로그램 자체는 아랍어, 영어, 스페인어 등을 지원하고 한국어는 지원하지 않지만 쿠란은 한국어 번역을 지원하므로 무슬림이거나 이슬람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적극 활용하자. 단, 무료 버전은 아잔(신도에게 예배 시간을 알리며 외치는 기도문 소리)이 없고 쿠란 낭송은 5분밖에 안 나온다. [3] 2020년 11월에 미군 특수전사령부에 앱 사용자들의 위치 정보를 판매한 것이 밝혀져 신도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보도. [4] 이런 지구의 특성을 잘 느낄 수 있는 다른 예시가 비행기를 타고 먼 대륙으로 날아갈 때이다. 중동 항공사인 에미레이트 항공을 타면 서쪽으로 쭉 날아가게 되고 북쪽 핀란드가 거점인 핀에어를 타면 서북으로 날아가게 되는데, 같은 런던, 파리로 날아간다 쳐도 환승 대기시간을 제외한 비행시간만 따지면 후자가 확실히 시간이 덜 걸린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서방 항공사의 러시아 영공 통과를 막으면서 한국에서 유럽으로 날아가는 비행시간이 각각 몇 시간씩 길어진 것도 러시아가 북쪽에 있는데 북쪽으로 날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은 미국 물건을 해외직구했는데 배송옵션을 가장 빠른 걸 썼을 때 추적에 알래스카 경유가 잡힌다던가. [5] 북위 38도 27분이며 이는 휴전선 동부 끝인 고성군, 양구군 지역과 비슷한 위도이다. [6] 지도. 남태평양 한가운데로, 프랑스 폴리네시아의 Tematangi 섬에서 북동쪽으로 50㎞ 가량 떨어져 있다. 중심지인 파페에테에서는 서쪽으로 보고 기도한다고 한다. [7] 아랍어로는 이브라힘이다. [8] 기독교에서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바치러 팔레스타인의 모리아 땅, 혹은 예루살렘 성전터로 향했다고 여긴다. [9] 9세기 역사사 알 발라두리에 의하면 우마르의 아들 압둘라의 요청으로 최소한 핫즈 순례 기간에는 포격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10] 이는 아이샤의 하디스에 의거하여 무함마드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 한다. [11] 한편 후일 아브드 알 말리크는 압둘라가 세운 카바의 철거를 후회하였다고 한다. 다만 우마이야 조의 지지자들은 압둘라의 잘못을 교정했다며 찬양하였다. [12] 압둘 말리크는 하드라마우트의 잔당을 공격하던 중 자신이 아미르 알 핫즈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에 그들과 휴전을 맺고 메카로 회군하였다. 그 후 750년 우마이야-압바스 교체기를 틈타 이바디 세력은 오만에 이맘국을 건설하였다. [13] 이후 그의 수급은 알 하디에게 보내졌고, 칼리파는 이를 호라산으로 보내 현지 쉬아 세력에 대한 경고로 삼았다. 그 후 바그다드에서 3명 이상의 알리 가문원이 처형되었다. [14] 다만 항복한 이들 중 압바스 가문원이던 아불 지프트는 논쟁 끝에 알 압바스 이븐 무함마드의 주장대로 처형되었다. [15] 그 중 무함마드 앗 나프스 앗 자키야의 동생 이드리스는 마그레브로 도피하여 3년 후 이드리시 왕조를 세우고, 다른 동생 야흐야는 792년 이란 북부 다일람에서 반란을 일으켜 알라비 왕조의 초석을 놓는다. [16] 그후 와디 파크는 앗 슈하다, 즉 순교자들이라 불리며 쉬아 무슬림들에게 성스럽게 여겨졌다. [17] 알 만수르의 손녀이자 카이주란의 조카인 압바스 공주로, 바그다드-메디나-메카의 순례로에 인공 샘을 설치하여 존경 받았다. [18] 19세기 사우드 왕국의 와하비 군대가 메카를 점령하고 무함마드의 옛 집 등 많은 성소들을 파괴한 것과 비슷한 이유이다. [19] 같은 이스마일파였지만 이맘 계승을 놓고 대립하던 카르마트는 다수의 무슬림들에게 파티마 조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히자즈를 점령하는 동안 기존의 바그다드 칼리파 대신 파티마 칼리파 알 마흐디의 이름으로 쿠트바를 진행하였다. 이로써 대중들이 메카에 대한 자신들의 만행이 파티마 조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고 여기게 하려는 속셈이었다(고 이스마일파 측에서는 주장한다). [20] 이후의 수난으로 흑석은 현재 8조각이고, 일부 파편이 이스탄불의 술탄 아흐멧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21] 한편 아즐란의 다른 아들인 샤리프 알리는 1394년 퇴위한 후 동남아시아로 향하여 1425년 브루나이의 술탄이 되는 모험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22] 그 외에 홍해로 오는 인도 선박들은 제다 대신 수에즈로 향하도록 할 것을 지시하였다. [23] 혹은 예멘에서 내분을 겪고 축출된 병력이 정말로 이집트 망명을 위해 북상한 것이라고도 한다. [24] 다마스쿠스 총독 + 아미르 알 핫즈. [25] 여름에는 고지대인 타이프에 거처. [26] 한편 고집스럽게 히자즈에 남아있던 전 샤리프 알리는 1909년 4월에야 샤리프 후세인의 압력으로 카이로로 향하여 1941년 사망 시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27] 심지어 오스만 깃발과 하심 깃발은 같은 색깔이었다. [28] 그 후 알리 하이다르는 1919년 공식적으로 직위가 폐지될 때까지 메카의 아미르 칭호를 유지하였다. [29] 마스지드 알하람, 그 유명한 메카의 대모스크 즉 카바 신전이다. [30] 메디나에 방문을 할 수는 있으나, 예언자의 모스크는 방문이 원칙적으로는 금지이다. 단, 사우디 정부 측에서 초청을 하면 비무슬림도 방문이 가능하다. [31]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무신론은 주장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중죄이며 최대 사형까지도 가능하다! [32] 물론 튀르키예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세속주의 국가이지만 인구의 98%가 무슬림이니 그렇게 생각하는게 당연하긴 하다. [33] 국적 별로 인구 500명당 1명이 쿼터인데, 한국 국적일 경우 10만명이 된다. 그런데 한국에 거주하는 무슬림 자체는 30만명 정도로 의외로 그 수가 제법 되지만, 이들 중 절대다수는 외국인이며, 순수 한국 국적 무슬림은 아무리 많이 잡아도 최대 6만명을 넘지 않으므로 저 쿼터를 다 채우는건 불가능하다.(...) 심지어 저 6만명이라는 것도 무슬림과 결혼한 사람, 중동 계열 기업 간부, 중동권 대학 유학생 등 잠재적 무슬림까지 죄다 긁어모은 수치이며 실질적으로는 1/10 미만이다.(...) 그리고 그나마도 귀화한 외국인 출신이 대부분이며, 토종 한국인은 거기서 또 1/10 미만이다.(...) [34] 매년 메카에 가는 무슬림이 너무 많아서 한명한명 확인하기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35] 실제 사례는 없지만 이렇게 될 경우 수상한 자로 오해를 받아 사우디 경찰에게 불심검문을 받고 무슬림이 아니라는 사실이 들통날 수 있기 때문이다. [36] 개신교의 교파 중 하나인 장로회 신자이다. [37] 물론, 이슬람에 상당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잠입(...)해서 다른 무슬림들과 같이 행동하고 말한다면 (예를 들어 기도문이나 샤하다 등을 외운다든가..) 하지 기간이라도 사우디 당국에서도 딱히 걸러낼 방법은 없다. 사실 애초에 신앙이라는 것 자체가 개인 양심에 따른 것인데 이걸 잡아낸다는 것 자체가 가능할 리가 없다. 자기가 스스로 무슬림이라는데 이걸 뭐 어떻게 검증하겠다는건가(...) [38] 2020년에는 코로나 19 때문에 순례 인원을 1천명으로 제한했고, 2021년에도 백신 접종자에 한하여 총 순례자 수를 6만 명으로 제한했다. # [39] 메카와 가까운 지역이 아니라면 메카 순례는 죽기를 각오하거나 재산을 날릴 것을 각오하고 간다고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중동권이 무역이 활발해서 한반도에까지 중동에서 생산된 물품들이 수입될 정도였다고는 하지만, 치안이 열악해서 도중에 도적떼에게 노잣돈이나 물품을 털리거나 목숨을 잃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또한 자동차와 비행기가 없어 일정을 연 단위로 잡아야 하는 경우가 허다해서 시간과 노력이 엄청나게 들었기 때문이다. [40] 정확히는 대홍수 후 누흐가 이곳에 두었다고. [41] 정문태 기자는 그나마 세상 물정을 어느 정도 아는 지도자라서 신변이 안전할 수 있었다며, 주위에 있던 사람들 모두 깜짝 놀라더니 표정이 험악해졌다고 회고했다. [42] 점거사태에 앞서 근본주의적 와하비 울레마들도 이크완 테러범들을 부추기기도 했다. [43]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비단 사우디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슬람권 전체를 보면 60-70년대만 해도 아랍 민족주의, 아랍 사회주의, 페르시아 민족주의 같은 세속적 근대주의적 이념들이 주도적이었지만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메카 점거 사태, 소련의 아프간 침공 등의 사건이 연달아 이어지면서 점차 이슬람 극단주의에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44] 결국 2년 뒤 메카와 비슷한 성지인 메디나에 테러를 저지르면서 이슬람권에서도 버림받은 공공의 적이 되었다. [45] 2021년 '핸드폰 보면서 걷는 사람들은 왜 부딪힐까'라는 주제의 연구로 이그노벨상을 수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