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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18:43:27

시몬 볼리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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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087><colcolor=#fff> 볼리비아 초대 대통령
그란 콜롬비아 초대 대통령
시몬 볼리바르
Simón Bolívar
파일:1409-3871-lankesteriana-21-03-363-gf1.jpg
이름 Simón José Antonio de la Santísima Trinidad Bolívar y Palacios Ponte-Andrade y Blanco
시몬 호세 안토니오 데라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볼리바르 이 팔라시오스 폰테안드라데 이 블랑코[1]
출생 1783년 7월 24일
누에바 그라나다 부왕령 카라카스[2]
사망 1830년 12월 17일 (향년 47세)
콜롬비아 공화국 마그달레나 주 산타마르타
재임기간 베네수엘라 제2공화국 대통령
1813년 8월 7일 ~ 1814년 7월 16일
베네수엘라 제3공화국 대통령
1817년 1월 8일 ~ 1819년 2월 15일
그란 콜롬비아 초대 대통령
1819년 2월 16일 ~ 1830년 4월 27일
과야킬 자유주 제2대 최고수장[3]
1822년 7월 13일 ~ 1822년 7월 31일
페루 최고 군사령관
1824년 2월 10일 ~ 1827년 1월 27일
볼리비아 초대 대통령
1825년 8월 6일 ~ 1825년 12월 29일
서명 파일:시몬 볼리바르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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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087><colcolor=#fff> 사인 결핵, 장티푸스
묘소 산타마르타 대성당
부모 아버지 후안 비센테 볼리바르
어머니 마리아 콘셉시온 데팔라시오스
형제자매 2남 3녀 중 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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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누나 마리아 안토니아 볼리바르 팔라시오스
작은누나 후아나 볼리바르 팔라시오스
후안 비센테 볼리바르 팔라시오스
여동생 마리아 델 카르멘 볼리바르 팔라시오스
배우자 마리아 테레사 델 토로 알라이자 (1802년 결혼, 1803년 1월 22일 사별)
연인 마누엘라 사엔스 (1822년~)
자녀 2명
신장 168cm
별명 El Libertador(해방자)
군사경력
최종 보직 및 계급 베네수엘라 육군 대장
북군 총사령관
카르타헤나 육군 총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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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탄생과 성장2.2. 라틴아메리카 독립운동2.3. 몰락과 최후
3. 평가
3.1. 부정적 평가3.2. 긍정적 평가
4. 어록5. 기타6. 대중매체7. 관련 문서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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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네수엘라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자 대지주, 그란 콜롬비아의 초대 대통령, 급진주의자( 공화주의자)이며[4] 남아메리카 6개국[5]을 독립시킨 해방자(El Libertador / 엘 리베르타도르)이자 독재자가 된 영웅이기도 하다.[6]

2. 생애

2.1. 탄생과 성장

1783년 카라카스[7]에서 후안 비센테 볼리바르와 마리아 콘셉시온 데팔라시오스 사이의 2남 3녀[8]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잃고 병약한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서 흑인 노예 이폴리타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랐지만 그게 흑인 노예를 해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흑인 노예 해방을 이야기하게 된 건 아이티에서 지원받게 된 다음 이야기다. 정작 그러고도 여전히 pardocracia[9]를 두려워했다.

9살이 되던 1792년, 어머니마저 병으로 사망하자 누나인 마리아 안토니아와 후아나는 결혼을 하고, 형인 후안 비센테도 다른 가정의 양자가 되면서 남매들이 뿔뿔히 흩어졌다. 부모를 모두 여의고 난 이후 볼리바르는 처음엔 외할아버지 - 외할머니 내외의 집에서 맡겨졌으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모두 나이가 많아 시몬을 부양할 능력이 떨어졌고, 곧 외삼촌인 카를로스 팔라시오스에게 맡겨졌다.[10] 그러나 성격이 엄격한 외삼촌과 허영심이 많은 외숙모와 계속 갈등을 빚었고[11], 결국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외삼촌의 집을 나가 첫째 누나 마리아 안토니아와 큰 매형 내외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한편 시몬의 가출에 반발한 외삼촌 카를로스는 시몬의 거주 양육권을 놓고 시몬과 마리아 - 큰 매형 부부와 법적 싸움까지 벌였으나, 당시 식민지 법원에서 시몬의 양육권이 누나 - 매형 부부에게 있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서 결국 패소하였다. 한편 이후에 시몬은 스승인 시몬 로드리게스(1769 ~ 1854)를 만나 계몽사상에 눈뜬다. 당시 스페인에서 독립하겠다는 크리오요[12]가 많았고 시몬 로드리게스도 그 중 하나였기에 볼리바르가 자유주의 사상을 신봉하게 되었다. 다만, 볼리바르의 집안은 상당히 부유한 크리오요 집이라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로드리게스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적발되어 망명하면서 안드레스 베요(1781 ~ 1865)에게 새로이 지도받는다. 이때 사관학교 입학하였다.

2.2. 라틴아메리카 독립운동

시몬 볼리바르는 1799년에서 1802년까지 멕시코 프랑스 혁명의 열기에 끓어오르던 유럽을 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특히 스페인의 지식인인 후작 우스타리스와 만나면서 풍부한 학식을 갖추었다.

또한 볼리바르는 마드리드에서 외삼촌인 페드로 델토로[13]의 딸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하여 귀향하는데 아내가 황열병으로 9개월만에 쓸쓸히 죽는다. 그 사건이 있은 이후 시몬 볼리바르는 재혼하지 않았다.[14]

유럽으로 돌아가 이곳저곳을 떠돌던 볼리바르는 스승 로드리게스를 만나 로마 아벤티노 언덕에서 그 유명한 산상 선언[15]을 외쳤다.

귀향한 시몬 볼리바르는 독립운동으로 잔뼈가 굵은 노장군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1750 ~ 1816)와 안드레스 베요와 함께 1811년 베네수엘라 제1공화국을 세웠다. 이 공화국은 스페인 섭정 행정부에서 유색인종에게 인정했던 투표권과 참정권을 부정하고 일정 이상 재산을 갖춘 이만 참정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했고 스페인 왕이 명했던 여러 유색인을 배려한 법을 없애려고 하자 당시 베네수엘라 인구 80% 이상을 차지하던 비(非) 백인들이 반발했고 이것은 1812년 지진을 기점으로 폭발하였다. 발렌시아에서 행정부의 조치에 반발하여 유색인종이 저항을 선언하자 제1 공화국은 전원 백인으로 구성한 군대를 보내 저항을 억눌렀으나, 스페인 왕정과는 달리 인정사정없는 백인우월주의를 표방하는 공화국에 반발한 절대 다수 베네수엘라 사람들의 지원으로 왕당파가 세를 얻었고 그러한 왕당파의 카라카스 점령으로 볼리바르는 퀴라소 섬으로 망명해야 했다.[16]

그 후 콜롬비아 카르타헤나로 옮겼다가 여기서 카르타헤나 선언으로 베네수엘라와 누에바그라나다[17]의 독립을 선언하고 1814년 8월 4일 3년 만에 카라카스에 재입성하여 해방자라는 칭호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부대는 경험 부족과 물자 부족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려 연전연패해서 아이티로 결국 망명했다. 당시 남부 아이티의 대통령이던 알렉상드르 페시옹은 흑인 노예의 독립을 조건으로 1,200명으로 구성된 부대를 지원했으나 볼리바르는 계속 패배한다.

이 난관을 타개하고자 볼리바르는 야노스[18] 군벌인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와 손을 잡고 게릴라전을 벌여 스페인군을 이기고 이어서 1819년 피스바 산을 넘어 콜롬비아로 쳐들어간다. 여기서 볼리바르는 영국군 아일랜드군의 지원을 받아 콜롬비아를 정복하고 그란 콜롬비아(Grand Colombia) 공화국[19]을 선포한다.

잠시 휴전으로 병력을 추스른 볼리바르는 1821년 6월 24일 카라보보 전투에서 승리하고 키토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하고 키토를 함락시킨다.[20]

그 후 아르헨티나 칠레에서 스페인 세력을 물리친 호세 데산 마르틴과 과야킬 회담[21]을 하고서 산 마르틴이 유럽으로 망명하자 부장인 안토니오 호세 데수크레를 보내 아야쿠초와 후닌 전투에서 부왕(副王, Viceroy)[22]을 사로잡는 성과를 올리면서 페루마저 함락시킨다. 이로써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스페인 세력들이 지배력을 영구히 상실하였다.[23]

2.3. 몰락과 최후

그 후 지금의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베네수엘라에 해당하는 그란 콜롬비아의 종신 대통령을 지내던 시몬 볼리바르는 연이은 반란과 권력투쟁 등으로 오명을 뒤집어쓰고, 결국 1830년엔 대통령직마저 사임한 채 콜롬비아로 떠나간다.

은퇴 후 볼리바르는 지지자인 호아킨 미에르의 별장에서 요양하다가, 폐결핵으로 콜롬비아 북부의 산타마르타 근처인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 농장에서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은퇴한 지 불과 8개월 만의 일이었다.

3. 평가

3.1. 부정적 평가

가장 비겁하고, 횡포하며, 비참한 악당
카를 마르크스, 1858년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식민지 독립 영웅이라는 측면에서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나 칠레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아르헨티나 호세 데 산 마르틴 등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지만, 볼리바르가 독립시킨 식민지는 미국이나 칠레, 아르헨티나처럼 통합된 단일국가로 성장하지는 못하고 국력을 키우지 못해 큰 혼란을 겪었다.[24] 지리적인 요인도 한 몫했는데, 오이긴스가 독립시킨 칠레와 산 마르틴이 독립시킨 아르헨티나의 경우 지정학적으로 안데스 산맥을 사이에 두고 태평양, 대서양 연안의 해안 저지대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 스페인의 식민 통치에서 독립 후 단일국가를 건설하기 수월했던데 비해[25] 볼리바르가 독립시킨 남미 식민지들인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 페루, 에콰도르는 안데스 산맥과 아마존 밀림, 소택지 등 고립되고 험준한 지리 지형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들 국가들을 통합시켜 칠레, 아르헨티나처럼 통일 국가를 남미 대륙에 수립하기에는 지정학적으로도 악조건이 적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워싱턴이나 산 마르틴, 오이긴스보다 더 훨씬 고생했지만 결과는 영 좋지 못했다. 조지 워싱턴이 독립시킨 13개 식민지 거대한 연방으로서 세계 패권을 쥐락펴락하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했고 오이긴스가 독립시킨 식민지 칠레, 산 마르틴이 독립시킨 식민지 아르헨티나는 통합에도 성공했으며 독립 이후 라틴아메리카 역내에서 어느정도 위세를 보였음을 감안하면 그러하다.

이들 국가들이 볼리바르의 이상을 이루지 못한 것은 볼리바르의 문제도 있는데, 일단 볼리바르부터 독재자가 되어 종신 대통령을 하려다가 결국은 자신이 새로 세운 공화국을 망쳤다. 특히 독재가 가능했음에도 나쁜 선례를 남기지 않겠다면서 두 번 재임 후 은퇴한 조지 워싱턴과 이후 미국의 행보를 보면 더더욱 비교될 수 밖에 없다.

또한 볼리바르는 자유주의에 영향받기는 했어도 인종주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아메리카 원주민은 잠재된 으로 여기고 유색인종을 멸시했다. 시몬 볼리바르가 원주민 공동체 토지 제도를 공식 폐기하고, 그의 기여로 남미가 독립한 이후 원주민들의 처우가 급격히 나빠졌음을 생각하면 이들에게 시몬 볼리바르는 새로운 식민지 독재자와 다를 게 없었다.

그에 따라 현재 페루와 볼리비아에서는 다수 민족인 원주민들의 지위가 점점 높아지면서 시몬 볼리바르를 국부로 인정, 존경하지 않는 국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물론 페루와 볼리비아가 지금처럼 독립국가로 존재하며 잉카 제국의 후신을 칭할 수 있게 된 것도 결과론적으로만 보면 시몬 볼리바르가 주도한 독립운동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으므로 애증의 대상이 될 듯 싶다.[26]

비단 원주민뿐만이 아니라 인종 및 노예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아이티 흑인 혁명에 대해서 여타 크리오요들과 같이 너무 급진적이라고 생각했으며 이후 1812년 제 1공화정 실패 이후 전면적인 노예 해방을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본인의 군대에 가담하는 노예에 한해서였다. 그 후 1816년 1월 아이티의 흑인 대통령 페티옹에게 도움을 받기 위해 베네수엘라의 노예제를 폐지하기로 약속했고, 아이티의 도움이 그가 식민지 독립을 성취하는 기반이 되었지만 이후 독립 투쟁에 가담한 노예 농장주들에게 그들의 지위를 보장할 것이라는 약속을 했고, 1821년 그란 콜롬비아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도 전면적인 노예 해방을 차일피일 미루며 노예 소유주들의 편을 드는 모습을 보였다.

흑인에 대해서는 보다 직접적인 반발을 보였는데, 시종일관 아이티 식의 혁명을 경계했으며 "흑인 반란은 에스파냐의 침입보다 천 배는 더 나쁘다."[27]와 같은 평을 내렸다.[28] 동시에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던 물라토 지지자들을 처형하면서 흑인 혁명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보였다. 이는 그가 혼혈이었지만 백인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크리오요라는 특권계층의 위치에 있었음에서 기인한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논란이 되었고 비판받았으며 지금에도 종종 회자되는 것은 구아이라 항구에서의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 배신 사건인데,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는 시몬 볼리바르와 다른 라틴아메리카 통합론자들의 사상적 스승[29]이었고 선구자(precurser)로 불리는 독립운동계의 거물이었다.

또한 미란다는 볼리바르에게는 세계적 베네수엘라인, 나폴레옹에겐 미치지 않은 돈키호테라고 불렸고, 6개 국어를 구사하는 지식인이기도 했으며[30] 조지 워싱턴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미국 대통령, 윌리엄 피트 영국 총리, 나폴레옹 프랑스 황제, 예카테리나 2세 러시아 황제,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 국왕과 같은 세계 지도자들과 교류하던 명사였다.

그러나 미란다와 볼리바르가 세운 베네수엘라 제1공화국이 잇다른 악재에 시달리고 에스파냐 왕당파의 군세에 의해 수세에 몰리는 등 상황은 악화되고 시몬 볼리바르 자신이 지키던 독립파의 중요 거점이었던 푸에르토 카베요의 산 펠리페 성이 함락되자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는 이대로라면 독립이 좌절될 것이라 생각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1816년 7월, 왕당파와 휴전 협정을 맺고 영국으로 가서 외교적 지원을 요청하려고 했다. 그러나 볼리바르는 자신을 따르는 장교들을 이끌고 구아이라 항구로 간 미란다를 체포해서 왕당파에 넘기고 그 대가로 자기 자신은 왕당파에게서 풀려나 미란다와 자신이 헌신했던 베네수엘라 제 1공화국을 떠나 자메이카로 도망쳤다. 이때 시몬 볼리바르가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에게 내린 죄목은 반역죄였다.[31][32][33]

3.2. 긍정적 평가

해방자(El Libertador)
1813년 10월,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카라카스 시에 입성한 볼리바르에게 수여된 칭호.

시몬 볼리바르도 인종차별주의 의혹에 대해 항변할 여지는 있었다. 아예 유럽계 백인과 백인의 형질이 강한 메스티소인들의 인구가 더 많았고 개국 이후에 지배층들이 차루아, 테우엘체, 카웨스카르, 오나, 마푸체, 아파치 같은 원주민 부족들을 토벌 / 학살하고 무력으로 원주민 땅을 합병했던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칠레, 멕시코[34] 등과는 달리, 지금의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페루 등이 속해있던 구 그란 콜롬비아 지역은 백인, 메스티소, 흑인, 원주민 등등 여러 인종들이 섞여 있다 못해,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독립국가 수립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고, 심지어 골수 왕당파 성향이 대부분이었던지라, 당시 그란 콜롬비아의 위정자들은 애써 건설한 자유주의 정부가 원주민들의 반란으로 인해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는 상황이었다. 후술하겠지만, 볼리바르가 흑인들에게는 전혀 차별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지라, 그의 원주민 배제 정책이 꼭 인종차별의 의도로만 이루어진 건 아니라는 주장도 나오는 실정이다.

백인 우월주의자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어릴 적에 자신의 유모이기도 했던 흑인 노예인 이폴리타에 대한 일화나[35] 자기 또래의 노예 아이들과 거리낌없이 친하게 지냈던 것, 그리고 아이티 망명 중에 백인과 흑인이 뒤섞인 혼성군인 아이티군의 모습을 보고 크게 감명받았다는 일화[36]로 미루어보면, 적어도 흑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차별의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37]

또한 시몬 볼리바르가 다른 독재자들과 궤를 달리하고 또 인정받는 점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독재자의 길을 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통 자신의 사리사욕이나 권력에 대한 탐욕 때문에 독재자가 된 다른 이들과 달리, 볼리바르는 이제 갓 독립한 남미가 외부의 영향에 흔들리지 않고 대통합에 이르기 위해서는 소수의 엘리트에 의한 지배가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해 종신 대통령에 취임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자신의 권력으로 부정축재를 벌이거나 반대파를 청소하는 전횡을 휘두르지 않았다.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반란을 일으켰다 항복한 이의 직위를 그대로 유지시켰으며, 심지어 자신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인물들도 주동자만 국외추방하고 나머지는 석방하는 관대한 처벌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평생 물욕도 없었는데 그란 콜롬비아 연방이 해체된 뒤 대통령직과 후계자 지명권을 포함한 모든 정치적 권한을 포기하고 물러날 때, 의회에서 거액의 연금을 평생 지급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그것을 거부했다. 특히 원래 그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독립운동을 하면서 가산을 다 탕진했고, 대통령직에 있으면서도 집은 커녕 모아놓은 재산이 한푼도 없었기에 퇴임 뒤에 그에게 호의적인 후원자 호아킨 미에르가 제공한 농장에서 칩거하며 살아야 했다.[38] 오죽하면 그가 47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을때, 의사가 장례를 준비하면서 그의 낡다 못해 아주 해진 셔츠를 보고 놀랐을 정도로 청빈한 삶을 살았다.

즉, 통일 남아메리카 건설이란 숭고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힌 안타까운 실패자라고 할 수 있다.

4. 어록

Los tres grandes majaderos de la historia hemos sido Jesucristo, Don Quijote... y yo.
세상에는 가장 멍청한 바보가 셋 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 둘째는 돈 키호테, 그리고 나 볼리바르다.

아메리카 독립을 위해 싸운 우리들은 바다 위에서 쟁기질을 했을 뿐이다.

¡Colombianos! Mis últimos votos son por la felicidad de la patria. Si mi muerte contribuye para que cesen los partidos y se consolide la Unión, yo bajaré tranquilo al sepulcro.
콜롬비아인이여! 나의 마지막 소원은 국가의 행복이오. 나의 죽음이 동맹을 가져올 수만 있다면 평온한 마음으로 임종을 맞이할텐데.

Siempre las almas generosas se interesan en la suerte de un pueblo que se esmera por recobrar los derechos con que el Creador y la naturaleza lo han dotado.
관대한 영혼들은 항상 조물주와 자연이 부여한 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는 자들의 운명에 관심을 기울인다.

우리는 과거의 유산을 거의 지니고 있지 못하며, 그렇다고 원주민이나 유럽인도 아니다. 이 땅의 합법적인 소유자와 스페인 침략자 사이 중간 쯤에 위치한 메스티소다. 태생으로는 아메리카인이며, 법적으로는 유럽인이다. 우리는 원주민과 소유권을 놓고 다퉈야 하는 반면, 침략자에 맞서 이 땅에서 우리의 지위를 유지해야 하는 이중의 갈등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니까 자기는 침략자가 아니고 원주민은 적이란 소리다. 중앙,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경우 순수 백인이나 순수 원주민보다 두 혈통을 모두 이어받은 혼혈이 더 많다. 원주민과 백인 사이의 혼혈이 드문 케이스라 비교적 쉽게 침략자 백인 vs 피해자 원주민의 구도를 만들 수 있는 북미의 경우와는 다르다. 이런 혼혈적 정체성은 중남미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39]

그런데 스페인의 침략 행위를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원주민과는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태도가 반드시 혼혈적 정체성에서 비롯된 횡설수설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기실 스페인 부왕령의 일부였던 구역들도 스페인 출신 행정가가 직접 부임하지 않고 현지 원주민 수장을 카시케(Cacique)로 임명해서 장원 비슷하게 운영하도록 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볼리바르 입장에서는 실제로 원주민들이 돌발행위를 벌이면 신생 독립국들이 허망하게 무너질 것으로 경계할 수도 있었다. 아무리 나라가 개판이 되어도 최소한 국가 선거 정도는 치를 수 있는 21세기와 같은 상황이 아니다.

5. 기타

6. 대중매체

6.1. 게임

6.1.1. 도미네이션즈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협의회/시몬 볼리바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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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 문명 6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문명 6/등장 문명/그란 콜롬비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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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문명 6에서 그란 콜롬비아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게임에서의 정복 성능이 너무 강력해서 해방자가 아니라 정복자로 만들어버렸다. 확장팩을 끼지 않을 경우 위대한 장군으로 등장한다.

6.1.3.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캠페인 등장인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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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대전사 아시아 왕조
액트1. 피 액트2. 얼음 액트3. 강철 액트1. 불 액트2. 그림자 액트1. 일본 액트2. 중국 액트3. 인도
<colbgcolor=#8fbc8f,#427042> 주인공 모건 블랙 존 블랙 아멜리아 블랙 <colbgcolor=#fae7a6,#594604> 나다니엘 블랙 <colbgcolor=#fae7a6,#594604> 체이튼 블랙 <colbgcolor=#ffcc97> 사쿠마 키치로 <colbgcolor=#ffcc97> 지안 후앙 <colbgcolor=#ffcc97> 나니브 사히르
서브
영웅
엘리자벳 램지 카넨케 조지 워싱턴 성난 말/프랭크 삼촌 토리이 모토타다 라오 첸 프라바르 파텔
사힌 노나키 쿠퍼 소령 카넨케 도쿠가와 이에야스
알레인 매그넌 워릭 피에르 보몽 스벤 쿠첼러 윌리암 홈 이시다 미츠나리 왕 진하이 조지 에드워드슨
델가도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NPC 칠체 스튜어트 블랙 #s-6 노나키 아멜리아 블랙 - - 바하두르 샤 2세
조지 워싱턴 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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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screen21.jpg

왼쪽의 남자. 오른쪽은 아멜리아 블랙.

영어식 발음을 참조해서 그런지 이름이 볼리바로 나온다. 한국판 성우는 정승욱. 스페인군에 맞서 독립 운동을 전개하던 중, 잉카의 후예들을 만나러 온 아멜리아 블랙 카넨케와 만난다. 볼리바르는 아멜리아에게 자신들을 도와주면 파카마요 계곡을 통과할 안내자를 붙여주기로 약속한다.

시몬 볼리바르와 그의 군대는 아군이 조작 불가능한 동맹군으로 나오며, 일정 시간이 지나면 각 마을을 해방하기 위하여 이동한다. 해방된 마을의 시설은 아군이 이용할 수 있게 된다. 본 전투에서 스페인군의 사령부를 무너뜨리면 승리하게 된다.

전투 후 볼리바르는 약속대로 안내자를 붙여주고 아멜리아는 그를 격려하며 헤어진다. 근데 안내자로 붙여준 병사 중 하나가 쓰레기 잉여 유닛 중 하나인 스트렐치다.

결정판에서는 혁명으로 선택할 수 있는 국가들 중에서 페루를 선택한 경우, 시몬 볼리바르가 유닛으로서 직접 등장한다. 혁명이 완료되는 즉시, 홈 시티 집결 지점으로 볼리바르가 소환되는 식이다.

대콜롬비아 혁명의 경우는 혁명과 함께 등장하지는 않지만 카드로 불러올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볼리바르는 주변 유닛의 체력을 증가시킨다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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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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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또한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 예외적으로 '이(e, y, i)'는 띄어 쓰도록 하고 있다. [2] (現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3] 초대 최고수장은 호세 데 올메도이다. [4] 반면에 호세 데 산 마르틴 유럽 왕족을 초빙하여 군주가 통치하는 군주제를 주장한 온건 보수성향이였다. [5] 콜롬비아, 파나마,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6] 그가 독재자가 될 것이라는 징조는 그의 남미의 해방자 신화가 완성되기 전부터 있었다. [7] 독립 후 베네수엘라의 수도가 된다. [8] 볼리바르의 여동생은 태어나자마자 사망했다. [9] 거칠게 번역하면, " 깜둥이 정치?" [10] 결국 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시몬이 외삼촌 카를로스와 첫째누나 마리아의 집을 떠도는 와중에 노환으로 사망한다. [11] 부모 양친을 모두 조실부모한 외조카 볼리바르를 사랑스럽게 대하지 않고 부하직원 대하듯이 차별했다. 그래서 볼리바르는 외삼촌과 외숙모를 무척 싫어했다. 실제로 과거 1980 ~ 90년대에 발간했었던 웅진위인전기 전집의 <시몬 볼리바르> 편에서는 어린 시절의 시몬이 외숙모의 유리 접시를 깨트려 외삼촌 - 외숙모 내외와 갈등을 빚는 일화가 나온다. [12] 중남미의 스페인령 식민지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백인들을 일컫는 호칭이다. 하지만 식민지 출신이라는 이유로 스페인 본토 사람들에게 온갖 차별을 당하였고 군인들도 최고로 높게 진급을 해야 대위 정도에만 진급할 수 있었다. [13] 그래도 이 사람은 다른 외삼촌인 카를로스 팔라시오스보다는 온건했다. [14] 단, 일부 애인 등은 있었다. [15]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을 얻을 때까지 내 팔에 자유를 주지 않겠다로 시작되는 유명한 선언이다. [16] 미란다는 스페인으로 끌려가 옥사했고, 베요는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훗날 칠레에 정착해서 법률학자 및 국립대학 총장이 된다. [17] 현재 콜롬비아 파나마 지역이다. [18] 베네수엘라 남부 초원지대. [19] 현재 베네수엘라, 누에바 그라나다(콜롬비아와 파나마), 키토( 에콰도르)를 포괄하는 지역 [20] 키토는 에콰도르의 수도가 된다. [21] 이 회담은 역사상 밝혀진 것이 거의 없는 미스터리한 회담이다. 확실한 건 두 사람이 좋게 끝내지는 못했다는 것뿐이다. [22] 본국 군주를 대신하여 한 지역을 통치하는 직책으로 다른 나라의 총독에 해당한다. 참고로 19세기 독립하기 전 멕시코를 비롯한 중앙아메리카 일대는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領)이었고, 페루에는 페루 부왕령이 설치되어 있었다. [23] 우루과이는 1830년에 브라질로부터 독립했으므로 여기서 제외된다. [24] 심지어 그란 콜롬비아 연방이 해체된 이후에는 인접국끼리 전쟁까지 벌였다. [25] 덕분에 칠레와 아르헨티나 사람들 대부분이 이 태평양 / 대서양 연안의 저지대 지방에서 많이 거주한다. [26] 반면 백인들이 다수인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선 스페인 식민 지배에 맞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호세 데 산 마르틴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국부로 존경받는다. [27] 그가 에스파냐와 맞서 싸운 남미의 해방자였음을 고려하면 굉장한 불안감을 보인 것이다. [28] Lynch, Spanish American Revolutions [29] 통합론에 있어서 특히 볼리바르는 미란다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당장 볼리바르가 세운 그란 콜롬비아 콜롬비아라는 명칭이 미란다가 1790년 에 구상한 라틴 아메리카 통합국가의 이름이었다. [30]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독일어, 아랍어 등을 구사하고 6,000여 권의 책을 소유했으며 미국 독립 전쟁,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 라틴아메리카 독립 전쟁을 겪었다. [31] 이 사건으로 미란다는 에스파냐로 끌려가 죽고 공화국은 붕괴했다. [32] 이후 2016년 베네수엘라는 미란다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최고 제독 직위를 임명하였다. 사후에야 복권된 셈. [33] 이에 대해 시몬 볼리바르에 대한 비판이 컸으며, 위 마르크스의 발언도 미란다 사건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34] 자국 국민 대다수가 아메리카 원주민과 스페인계 백인의 혼혈인 메스티소거나 그냥 원주민이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후에는 스페인의 식민지 합병 이전의 아즈텍이나 마야, 톨텍 등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에서 국가적 정통성을 찾았던 연유 때문인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공적인 대우는 스페인의 지배에서 독립하자마자 원주민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고, 과거 원주민이 살던 지역에 백인 이주민들을 닥치는데로 부어대어 자국 내 남미 원주민 그룹들을 인종청소하였던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칠레보다 사정이 그나마 나은 편이었지만( 백인 출신 대통령들 밖에 나오지 않았던 이들 3개국과 달리, 멕시코는 베니토 후아레스 등 원주민 출신 대통령도 존재했다.) 실질적으로는 원주민들에 대한 차별대우와 억압, 홀대가 존재했으며 북부 지역의 아파치나 치치멕 같은 원주민 부족들의 경우 칠레나 아르헨티나의 마푸체나 테우엘체 족과 같이 멕시코 정부에서 무력으로 토벌한 바 있었다. [35] 어린 시절의 볼리바르는 형인 시몬 비센테와 사이가 매우 나빠서 자주 싸우곤 했는데, 이에 그의 유모인 이폴리타가 형제의 싸움을 뜯어말리려하자 시몬 비센테가 " 노예 주제에 어디서 끼어드냐?"며 막말을 했다. 그러자 이 말을 듣고 더욱 분노한 볼리바르가 온 가족들에게 "이폴리타는 노예가 아니라, 내 엄마다."라고 외쳐서, 유모가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있다. [36] 이 일화는 백인 우월주의 정책으로 인해 베네수엘라에서 추방된 뒤의 일이다. [37]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의외로 이런 경우는 매우 흔하다. 남북 전쟁 때도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면서 배를 불렸던 남부의 노예주들만 해도 정작 자신들과는 인종이 다른 아메리카 원주민들과는 거리낌없이 동맹을 맺었으며, 동 시기의 북부에서도 노예 제도 폐지와 흑인에 대한 시민권 부여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인물이 그 이후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원주민들에 대한 학살과 박해를 자행했고, 미얀마 역시 영국의 종족 분열 정책의 영향으로 미얀마가 영국에서 독립 이후에 미얀마의 다수 종족인 버마족과 대립하던 카렌족과 카친족, 샨족 같은 다른 미얀마내 소수민족들이 서로 동맹을 맺어 버마족 중심의 미얀마 정부와 맞서 싸우면서도 정작 이들보다 더 극심한 탄압을 당해오던 로힝야족은 동맹을 맺지 않고 배척하거나 미얀마 정부의 탄압을 나몰라라하는 다소 이중적인 행동을 보였다. 이런 식으로 다른 인종 중 특정 인종이나, 민족에게만 차별의식을 갖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지 않다. [38] 다만 말이 농장이지 실제론 큰 별장이었고 호아킨이 볼리바르한테 좋은 대우를 해주었기에 거주는 괜찮았다. 특히 볼리바르의 생활비와 의료비도 호아킨이 대주었다. [39] 백인이 다수인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우루과이는 제외. 물론 백인-원주민 혼혈은 적지 않지만 오랜 원주민 탄압 등으로 인해 정체성도 혼혈인 경우는 적다. [40] 이후 베네수엘라에서 2023년에 지은 최신식 야구장에도 그의 이름을 붙였다. [41] 볼리비아의 수도 중 하나인 수크레는 볼리바르의 부하 장군이자 페루와 볼리비아의 대통령을 지냈던 안토니오 수크레에서 따온 것이다. [42] 이 중에서는 '볼리버'(Oliver 앞에 B 발음 넣은 것)처럼 발음되는 경우가 많다. [43] 물론 큰 누나와 작은 누나, 형, 외삼촌 등 형제들과 외가 친지들이 있긴 했다. [44] 사실 남아메리카 독립 전쟁의 와중에 마누엘라 사엔즈라는 여성과 사귄 적은 있었다. 허나 마누엘라는 볼리바르와 결혼하기를 원했으나, 정작 볼리바르가 거부하여서 결혼이 실패한다. 그녀와의 결혼을 거부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란 콜롬비아 대통령 시절에 암살당할 뻔하는 등으로 생활이 무척 불안했던 것과 더불어, 그란 콜롬비아 해체로 인해 실각하면서 비참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일부러 차버렸다는 설은 있다. 공교롭게도 시몬 볼리바르와 많은 부분에서 비슷하다고 평가받는 튀르키예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도 애인과의 결혼을 거부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이쪽은 자신이 결혼해서 자녀를 낳으면 바로 자신에 대한 우상화의 명분이 될 것을 우려해서 그랬다. [45] 게다가 이 둘은 후일 부모가 늙어 죽자 돌아가신 부모가 남긴 대농장 등 재산들까지 물려받았다. [46] 당시 미국처럼 안정적인 공화정은 매우 드물었고, 혁명으로 왕정을 폐지한 프랑스 공화정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당연히 계몽주의의 전통을 이은 미국의 정치제도에 깊은 인상을 받을 수 밖에 없다. [47] 본격적으로 서부개발이 시작된 시기는 1860년 이후 남북 전쟁 이후이다. [48] 어떤 작가가 스페인 문학사를 쓰려고 했더니 스페인어 사전이 하나도 없어서 유럽에 요청해야 했을 정도. 먼로 독트린도 남미 독립이 완전히 끝난 1830년에 발표된 것이다. [49] 출처: 스페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