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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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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bordercolor=#000,#000><colbgcolor=#fff,#fff><tablealign=center><-6> 파일:musketsilhouette.png 근대 총기 발전사 ||
장전 방식 전장식 후장식
격발 방식 매치락 휠락 플린트락 퍼커션 캡 탄피
강선 유무 머스킷 소총(라이플)


1. 개요2. 다른 총기와 차이점3. 활과의 비교
3.1. 사수 양성3.2. 사거리3.3. 명중률3.4. 관통력 및 대인저지력3.5. 연사력3.6. 유지보수3.7. 가격3.8. 사기 저하 및 제압 능력3.9. 기병이 사용하는 경우3.10. 물가에 쏘는 경우3.11. 정숙성
4. 역사
4.1. 초창기
4.1.1. 초기 머스킷 전술
4.2. 19세기4.3. 20세기 이후
5. 머스킷을 사용한 실존 인물이나 단체
5.1. 위 항목의 인물이나 단체에서 유래한 미디어 상의 인물이나 단체
6. 머스킷을 사용하는 가상의 인물이나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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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media.liveauctiongroup.net/9513721_1.jpg
일반적인 머스킷의 모습
머스킷(Musket)은 아르케부스에서 개량되어 16세기~ 19세기에 널리 쓰였던 총기이다. 긴 총신을 가진 전장식 화기이며, 총열은 후대의 라이플과 달리 강선이 없었다. 개머리판, 방아쇠, 총신 등 현대 총기의 기본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는 흑색 화약 무기였으며, 머스킷이 구분되는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총기 개발 초기인 15~16세기에는 개머리판을 갖췄으며 아르케부스와 비교했을 때 구경이 보다 크고, 총열도 4피트(대략 122cm) 이상인 총기를 머스킷으로 불렀다.

매치락이나 플린트락으로 대표되는 격발 방식과 머스킷의 정의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위의 조건에 부합한다면 매치락도 얼마든지 머스킷으로 분류된다. 다만 아르케부스는 플린트락 방식이 개발되기 이전에 쓰였다가 도태된 총기이기 때문에 아르케부스는 매치락의 하위 분류이라고 보면 대체로 정확하다.

머스킷의 어원은 로망스어권에서 파리를 뜻하는 musca에 지소사 et이 붙은 것이다.

이 시기 화포들의 작명 자체가 이런 식이다. falcone(매)+et 팔코넷, robin(울새)+et 로비넷 하는 식으로 화포의 크기에 따라 큰 화포는 파충류에 빗대고 작은 화포는 조류에 빗대었는데 화포를 소형화시킨 머스킷은 파리에 빗댓 것이다.
다만 이름이 붙을 당시에 곤충 파리를 의미한 것은 아니고 프랑스에 서식하는 파리매라는 새매 종류를 의미한 것이니 이것도 조류에 빗댄것이다.

2. 다른 총기와 차이점

파일:external/bemil.chosun.com/2011072101594_1.jpg
파일:external/weaponsofchoice.com/matchlock-003.jpg
위는 아르케부스(조총), 아래는 매치락 머스킷
아르케부스와 머스킷을 구분하는 특징 중 하나는 긴 총신이지만, 아르케부스 또한 시간이 지나 대구경화되며 총열도 길어지는 양상을 보이게 되기 때문에 이 특징 하나만으로는 양자간 명확한 구분은 힘들어진다. 예컨대 조선 또한 천보총과 같은 대구경 아르케부스를 썼기 때문에 이렇게 되면 아르케부스와 머스킷의 차이는 개머리판의 유무 정도만 남게 되는 셈이다.[1]

머스킷은 현대의 소총에 비해 구경이 크고 길이도 길며, 매우 무겁다. 3kg 정도의 각국 현대 제식 소총도 충분히 무겁게 느껴지는 것과 비교해 그나마 경량화가 되었다는 프랑스 제1제국 시대 브라운 베스 머스킷이 5kg가 조금 덜 되는 정도였다. 이는 전장식 활강 화기의 특성상 총열도 길게 만들고 탄환도 커야하며 화약도 많은 양을 넣어야 위협적인 화력이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3. 활과의 비교

머스킷은 기존 원거리 병기의 대표주자였던 활과 비교하는 시선도 있다. 대중매체 등에서는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무기들이 한꺼번에 등장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머스킷이 쓰이게 된 시대엔 머스킷이 대대적으로 활을 밀어내고 주력 무기의 자리를 차지했다. 머스킷과 활 사이에는 극명한 장/단점이 있었지만, 적어도 군대의 주력 무기로서는 머스킷이 압도적으로 편리했다. 이는 매치락(아르케부스 포함) 역시 마찬가지였다.

#

일부는 머스킷이 대체한 것은 활이 아니라 창이며, 활의 대체재는 총이 아니라 화포라고 보기도 한다. 이는 기병의 후예를 기갑 헬리콥터로 나누어서 따지는 서양 전통과도 유사하다. 총은 창, 칼처럼 전열에서 직사하는 무기를 계승했다면, 원거리에서 곡사로 화력을 퍼붓는 활의 역할을 보병 지원용 야전포, 보병 박격포 등이 계승했다는 것이다. 화포를 공성포와 야포로 나눠, 전자는 묵직한 포병 군단, 후자는 보병 지원용 화포로 이어졌다 보면 자연스럽다.

대한민국 육군 포병 또한 이런 상징성을 받아들여, 병과 휘장에 화살이 들어간다. 포병 및 미사일 운용군이 화살을 상징으로 삼는 경우가 흔하다. 각종 역사 시뮬레이션 전략 게임에서도 궁병, 석궁병을 업그레이드하면 (공성포보다 작은) 야전포, 박격포, 기관총 등으로 업그레이드되기도 하는데, 유사한 관점이다.

궁병 부대가 야전포로 대체되었다 생각하면 머스킷 도입 이후 활이 줄어든 맥락도 더 쉽게 이해가 되는데, 화약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 머스킷만 따로 외국에서 사들이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포보다 정교한 머스킷, 화승총은 대개 화포 도입 이후에야 도입되기 때문이다. 조선, 청나라처럼 활을 유지할 이유가 있는 국가가 아닌 이상 머스킷을 도입할 시점에서 활이 총통 등의 핸드캐넌류나 불랑기포 등의 소형 화포에 밀려났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에서는 조총 도입 이전에도 각종 총통류를 만들어 왔으며, 조총 도입 이후에는 활은 기병용, 의장용 무기 내지는 민간 무예 수련 용구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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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사수 양성

군대 무기에서 조총(鳥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어린아이도 항우(項羽)를 대적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참으로 천하에 편리한 무기다.
숙종 조에 영의정을 지낸 남인(탁남)의 영수 허적.[2]
머스킷 사수 양성은 궁사 양성보다 압도적으로 빨랐다. 총은 총성과 반동에 대한 두려움만 극복하면 금방 배우며, 다루기도 꽤 편리한 병기이다. 물론 머스킷이 현대의 소총보다 더 번거로운 총기인 것은 맞지만, 기본적으로 활보다 훨씬 배우기 쉽고 다루기 쉽다는 면에서는 마찬가지였다. 머스킷의 장전 및 사격술은 일주일 정도면 충분히 익힐 수 있다.

하지만 활의 경우, 익히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당장 국궁만 하더라도, 시위를 당길 수 있게끔 근력을 기르는 데 최소 한 달은 트레이닝을 해야 한다. 빈 시위를 당기는 방법으로 한 달 동안의 지루한 수련을 보내면, 이제 원하는 방향으로 살을 쏴 보내는 정도로 숙달하는 데 최소 몇 달은 훈련을 받아야 한다. 표적을 맞히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방향으로 화살을 쏘는 데에만 몇 개월이 걸린다는 얘기다. 이 과정에서, 활 시위에 팔이 쓸리는 등의 부상을 입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그나마 습사용 국궁의 경우, 장력이 수십 파운드라서 그나마 배우기 쉬운 편이다. 장력이 백 파운드가 넘는 전투용 활들, 예컨대 장궁 등은 이것보다 더 오래 걸렸다. 일반적으로 장궁수는 몇 년 정도의 수련시간을 필요로 했으며, 베테랑이 되기 위해서는 10년 이상의 수련을 필요로 했다. 활 시위를 당기는 것은 상당한 근력을 필요로 했으며, 안정적으로 조준하게끔 시위를 당기고 겨누는 것도 오랫동안 궁술을 연마해야지 할 수 있었다. 괜히 에드워드 1세 일요일마다 백성들에게 장궁을 연습하라고 닦달한 것이 아니다. 그만큼 생활과 밀착시켜서 진득하게 오랜 시간 동안 연습해야 전쟁에서 쓸 만한 수준이 되는 것이 활이었다.

튜더 왕조 시대 영국의 군인이자 작가인 Barnabe Rich(1540~1617)는 천 명의 궁수를 소집할 경우 200보 이상 화살을 날릴 수 있는 궁수는 백 명이고, 이백 명은 180보 미만으로 화살을 날릴 수 있고, 그 외 나머지 궁수들은 그보다도 미달이라고 추산했다.[3][4] 즉 전쟁에서 쓸 만한 궁수가 천 명 중 삼백 명도 안 된다는 말이다. 정부가 직접 나서서 궁수를 집중적으로 양성한 영국이 이 정도 수준이다. 그 정도로 궁수의 양성은 힘들었다.

영국 외의 다른 중세 유럽 국가들이 석궁을 채용한 것은 활이 숙련되는 데 상당한 시간을 요하고, 숙련자는 희소성이 높다는 이유가 있었다. 중국이나 한국도, 기원전부터 활과 쇠뇌를 병용하여 징집병에게는 쇠뇌를, 전문적인 궁수에게는 활을 쥐어주는 식으로 운용하였다.

16세기에 이르러서 머스킷 등의 총기가 발전하면서, 활의 약점은 더 도드라졌다. 1595년 영국 추밀원은 장궁을 영국군의 공식 무기 목록에서 제외시킨다. 영국인들은 그들이 잘 쓰던 장궁을 버리고 화승총으로 갈아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조선 또한 숙련된 궁수가 부족하다는 문제점으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조선군도 임진왜란 이후 조총을 주력으로 채택하였다.

다만 간과하면 안되는 점이 있는데, 조총과 머스킷의 양성이 빠르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격 훈련에 국한된 것' 이다. 물론, 사격 훈련 과정을 혁신적으로 단축 시킨 것이 전체 훈련 양성 기간 단축에도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총과 머스킷은 재장전이 오래 걸리고[5], 사거리와 명중률에서도 활 보다 마땅히 우위에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고 효력사를 가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제식훈련[6]과 사격통제 등을 통해 다양한 전술을 정확하고 유효하게 구사해야 했다. 3열의 조총병이 각 1열씩 교대사격 하며 전진(혹은 후퇴), 유효사거리에 적이 들어올때까지 평정을 유지, 일제사격(낮은 명중률 보완)을 위한 정확한 사격 타이밍과 빠른 재장전 속도 함양, 이 모든 것이 실현되기 위해 반드시 유지 되어야 하는 대열 등등... 숙달해야 할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물론 냉병기를 쓰는 살수들(특히 창병)도 엄격한 대열유지를 위한 엄정한 군기와 훈련을 해야 하는건 마찬가지이지만, 조총과 머스킷은 그들에 비해 더욱 복잡한 사격 전술과 절차 등을 함양해야 하는 특수한 병과였다. 또한 백병전에서 매우 취약하다는 치명적인 한계[7] 또한 존재하기 때문에 사격 전술을 얼마나 숙달했느냐의 여부에 따라 생사가 결정 되기도 했다.

이러한 점을 간과한 일부 군대나 국가들이 뛰어난 성능의 조총/머스킷을 가지고도 통상적인 기마병이나 살수[8]에게 도륙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병자호란. 제한적인 군역을 지내던 농민들에게는 조총을 쥐어주고, 조총 만능에 심취해 전문 살수 양성을 등한시 한 조선군은 조총의 효력사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살수의 규모 자체도 작았기에, 당시 조선군은 조총부대 도, 살수부대 도 아닌 오합지졸로 전락했다. 광교산 전투 정도를 제외하면 조선이 내세울 만한 마땅한 전과도 찾기가 힘들다. 반면에 비슷한 시기( 임진왜란)에 조총을 잘 활용했던 일본군은, 전국시대 내내 단련된 조총 전문병들의 전술적 위력을 십분 활용 했고, 대량의 물량을 앞세운 농민병(아시가루 창병)과 백병전에 전문인 무사들을 동원했다. 조총병들이 상황에 따라 활용하던 방패벽은 궁병과 기병에 대응하기에 안성 맞춤인 조합 이었다. 숲이 울창한 산악과 작은 산성에서 주로 전투가 일어났기 때문에 원거리 무기를 다루는 병사들 간의 교전거리도 조총의 유효사거리 안쪽인 경우도 많았다. 때문에 조선군과 명나라군이 일본군의 조총에게 큰 고역을 치뤘고, 조선왕조실록과 징비록에서도 트라우마 처럼 자주 언급이 된 것이다. 즉, 이 시대는 총만 쥐어 준다고 능사 였던게 아니라, 사용자에 의해서 역량이 좌우되는 것이었다.

3.2. 사거리

일반적으로 화살은 곡사로 날아가고, 총탄은 직사로 날아간다. 물론 총탄도 장거리 사격에서는 곡사로 조준해야 표적을 맞힐 수 있지만, 이 경우는 활과의 비교이니 논외로 하기로 한다.

최대 사거리만 놓고 보면 머스킷이 화살보다 우월해보인다. 일반적으로 머스킷의 총탄은 1km 정도 나간다. 또한 100m에서의 탄속은 음속과 비슷한 수준이다. 참고 자료 화살의 최대 비거리가 터키 복합궁을 기준으로 500m 초반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더 길다.

하지만, 머스킷이 100m 밖의 목표에서는 상당히 큰 공산오차를 보이기에 이는 실질적으로 큰 의미는 없다. 당장 롱 랜드 패턴 브라운 베스의 공산오차가 30 MOA이고, m1777 샤를르빌 머스킷의 공산오차는 36 MOA이다. 즉, 100야드에서 브라운 베스는 지름 76.2cm 의 탄착군을, 샤를르빌은 지름 91.44cm의 탄착군을 형성한다는 말이다. 이 정도 되면 100미터에서 사람 상체를 맞힐 가능성은 사실상 두 발에 한 발이라고 봐야한다. 실제 실험에서도, 100m에서 머스킷은 사람 크기의 표적에 대해 50% 내외의 명중률을 보여 주었다. 참고 자료

화살의 곡사 탄도는 활강식 머스킷의 탄도에 비해서 안정적이다. 화살에 달린 화살 깃이 날개 역할을 하고, 화살의 형태는 공기 저항을 덜 받기 때문이다. 즉 총보다는 더 긴 거리에서 안정적인 탄도를 보여준다. 여기에 착안하여 많은 사람들이 활이 총보다 사거리가 더 길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활의 실질적인 유효 사거리가 총보다 더 우월하냐고 물어보면 그것도 확답은 어렵다. 화살이 총알보다 탄도가 안정적이라고 해서 활이 총보다 유효사거리가 길고, 명중률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후술하겠지만 활의 사람에 대한 명중은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소수의 숙련된 궁수를 제외하면 총보다 더 어렵다. 그렇기에 옛날의 궁수들은 적군 개인에 대한 조준사격을 하는 것이 아닌, 일제사격으로 적의 밀집대형을 타격하는 전술을 썼다. 이는 18세기 당시의 머스킷도 마찬가지이다.

일제 사격시 활의 유효사거리는 활마다, 자료마다 다르기에 일반화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영국 장궁을 예로 들자면, 역사학자들은 일제 사격시 장궁의 유효사거리를 200야드(약 180m)로 추산하고 있다. 머스킷의 일제사격이 일반적으로 100m 내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언뜻 보면 머스킷보다 사정거리가 길어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사거리를 이론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 장궁에게 유효사거리 200야드는 일제사격 시 타격을 줄 수 있는 최대치의 사거리이다. 반면, 머스킷의 유효사거리 100m는 개별 사격 시 사람을 맞힐 수 있는 최대치의 거리이다. 200야드는 머스킷 일제사격으로 충분히 피해를 줄 수 있는 거리다.[9] 다만 그 정도 거리에서는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없고, 사상자 수 대비 탄약 소모만 늘어나는 비효율적인 사격이기에 지양했을 뿐이다.

밑의 명중률에서 서술하겠지만, 장궁이 사람을 맞힐 수 있는 거리는 80야드로 추산된다.(사실 이 정도 거리도 맞히려면 몇 년 이상 수련을 해야 한다) 즉, 장궁의 유효사거리 개념이 상대적으로 머스킷에 비해 매우 관대한 것이다. 활이 머스킷보다 유효사거리가 길다는 오해는 처음부터 서로 다른 사거리 개념을 가지고 비교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람, 적군이 입은 갑옷 및 착용한 방패 등 여러 변수를 고려하면 실질적인 활의 유효 사거리는 200야드보다도 짧을 수 있다. 특히 장궁의 관통력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장궁의 관통력은 판금갑옷에 매우 취약하다.

장궁이 쓰였던 시대보다 후대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정조시대 조선 수군의 규범인 수조규식에서 조총은 100보(120m)에서 쏘도록 하고, 활은 90보(108m)에서 쏘라고 한 내용이 이를 뒷받침한다. 조선인들도 활의 사거리를 머스킷보다 길다고 보지 않은 것이다. 즉, 유효사거리 면에서 봤을 때 활이 머스킷보다 사거리가 길다고 단언하기가 어렵다.

다음 명중률 편에서 후술하겠지만, 유효 사거리 내의 명중률 또한 활의 우월함을 장담하기가 어렵다.

3.3. 명중률

머스킷의 약 우세. 병사가 제대로 숙련되었을 경우엔 활이 더 우수한 명중률을 보였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머스킷이 활보다 맞히기 쉬웠다.

총기류가 등장하기 전까지 인류의 가장 보편적이었던 원거리 무기인 활과 비교하자면 에 비해 명중률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명중률 문제는 활 또한 고도로 숙련된 명궁이 아닌 한 심각하게 떨어지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활은 화살의 탄도가 곡선이기에 탄도를 감으로 예측해서 조준을 해야 하는 점이 매우 어렵고, 활시위를 당기면서 조준하는 것 또한 엄청난 근력을 요하기에 매우 힘들다. 또한 화살의 탄속 자체가 느려서(50~60m/s 정도) 바람이 불거나 표적이 이동하면 명중률은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숙련자가 아닌 이상, 활의 명중률은 낮은 편이었다. 이해가 안 간다면 앞에서 서술한 사수 양성 부분을 다시 보도록 하자. 오랜 기간 동안 수련해서 일반적인 머스킷 이상으로 쏘는 궁수는 어디까지나 소수인데, 이것을 과연 활이 머스킷보다 잘 맞는다고 할 수 있을까?

실제 히스토리 채널이 방송한 실험영상에서, 60야드(약 54미터) 떨어진 갑옷을 입은 마네킹 표적을 장궁수는 계속 빗맞히고, 석궁은 맞췄지만 튕겨 나가고, 머스킷만이 유일하게 표적을 맞히고 갑옷을 관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히려 반동만 익숙해지고 견착과 조준만 잘하면 초보자도 일정 사거리 정도의 명중률을 장담할 수 있는 머스킷이 활보다 평균 명중률 면에서는 더 나을 수도 있었다. #

머스킷은 활보다 조준하고 맞히기가 편하다. 총알의 탄도가 수평이기에 곡선으로 날아가는 화살보다 조준이 쉽고, 화약이 폭발하는 힘으로 탄을 날리기에 시위를 당기면서 조준까지 해야하는 활보다 더 안정적인 상태에서 조준을 유지할 수 있다. 또한 가늠쇠와 가늠자가 있는 머스킷은 말할 것도 없고, 없는 머스킷(18세기 유럽에서 제조된 대부분의 머스킷은 가늠자가 없었다)조차도 총열의 양끝을 일치시키는 조준선 정렬을 통해 표적에 대해 어느 정도 정확한 조준이 가능하다. 하지만 활은 탄도를 가늠할 수 있는 조준기나 기준점으로 삼을 수 있는 요소 자체가 없어, 겨누는 것 자체가 사수가 감으로 각도를 설정하는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활은 '정확한 조준'이 힘들었다. 게다가 화살의 탄속이 50~60m/s 수준에 불과하고 비거리가 길 수록 속도가 느려지는 점을 감안하면, 움직이는 사람은 맞히기 힘들었고 심지어 날라오는 것을 보고서 방패로 막거나 피하는 경우도 많았다.

활은 상기한 문제로 인해 저격용 무기로 부적합한 무기이다. 백년 전쟁 당시 영국군은 장궁수를 밀집시킨 다음 45도 곡사로 일제사격하여 특정 지점의 기사와 보병들을 광역 제압하는 방식으로 운용했다. 물론 잭 처칠이나 이성계 같은 예외 또한 있다. 유튜브를 찾아보면 100m 내외에서 표적을 활로 맞히는 유튜버들 또한 있다.[10] 하지만 이런 명궁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로 소수이며, 활을 접한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에게는 수십 미터 거리의 표적도 맞히기 어려운 표적이다. 실제로 조선은 임진왜란 전부터 숙련된 궁수의 부족으로 인한 육군 전투력의 공백으로 고민하고 있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각궁에서 조총으로 주력무기를 변경한 이유도 숙련된 궁수는 얼마 없고, 미성숙한 궁수는 명중률이 조악해서 일인분도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한 반면에 조총수는 어느 정도만 숙달이 되어도 꽤 괜찮은 명중률을 보여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머스킷 또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탄의 형상이 공기역학적이지 못해서 일정 사거리를 넘어가게 되면 탄도가 제멋대로였고, 강선 등의 탄도 안정기술도 없었고, 화약도 질이 일정하지 않은 흑색 화약이며, 연소 잔여물이 남아 약살이 더러워져 차탄의 연소가 불규칙해지는 등 여러가지 악영향을 끼칠 요소가 많다. 이 때문에 명중률이 현대 기준에서 보면 지독하게 나쁜 것은 사실이다. 사람 크기의 표적을 기준으로 하면, 머스킷이 확실한 명중을 기대할 수 있는 거리는 50m의 거리였다. 사람 크기의 표적을 맞힐 수 있는 거리는 100야드(91미터) 정도였지만, 탄착 오차가 커서 100% 맞힐 수 있다고 장담하긴 어려웠다. 롱랜드 패턴 브라운 베스를 기준으로, 명중률은 30 MOA정도였다. M4 카빈이 4MOA라는 점을 고려하면 '현대 기준'으로 봤을 때 총으로 쳐줄 수도 없는 수준으로 나쁘다. 하지만 당대 징집병의 훈련 수준을 기준으로 할 때는 활보다는 여전히 정확했다. 오스트리아에서 한 실험에 의하면, 16세기~18세기의 머스킷들은 100m 떨어진 사람크기 표적에 대해 평균 50퍼센트 내외의 명중률을 보여줬다. 즉, 머스킷을 어느 정도 쏠 줄 아는 병사들은 짧게는 50m에서 길게는 100m 정도의 거리에서 명중률을 기대할 수 있었다. 활로 이 정도 수준의 명중률을 기대하려면 적어도 몇 년 이상 수련해야 한다.

심지어 저격병이나 명사수의 경우 활강 머스킷으로 150m까지도 커버하는 경우도 있었다.[11] 머스킷은 장전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 일부러 헐렁한 탄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느긋하게 쏠 수 있는 민간인 사냥꾼들은 가죽이나 천으로 된 와드로 꽉 들어맞는 탄을 장전했고 100야드 너머의 사냥감도 곧잘 노렸다.16세기 사격 클럽의 기록에 따르면, 133명의 사수가 약 180m 거리에 있는 1m 크기의 표적에 24발을 쐈는데 40명 이상의 사수가 20발 이상[12]83.3%]을 표적에 맞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활강 총신 머스킷으로 세운 기록으로, 총의 성능을 고려하면 이는 정말 대단한 업적이다. 더 놀라운 것은, 당시 강선총은 너무 잘 맞는다는 이유로 사격 대회 사용이 금지되었다고 한다.[13] 활강식 머스킷이 최대 퍼포먼스를 보여준 사례는 잉글랜드 내전 당시에 왕당파 소속의 병사 존 도잇이 의회파 군 지휘관 브룩 경을 300야드(270미터)에서 저격한 사례이다.[14]

전근대시대 궁수가 사람 크기의 표적을 맞힐 수 있는 사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보여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활은 사람의 실력을 많이 타기 때문에, 결과값이 너무 들쭉날쭉해서 신뢰성 있는 자료를 만들기가 어렵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군 역사전문가 Kennedy Hickman에 따르면 백년전쟁 당시 영국 장궁의 경우 75~80야드(67~72m) 이상의 표적에는 명중률을 장담하기 힘들다고 한다.[15] 추측하건대 조준기가 없는 전근대 활의 특성상 일반적으로 활 잘 쏘는 명궁이 사람에 대해 실질적인 명중률을 보이는 사거리는 일반적으로 100m 내외였고, 200m 밖의 사람을 맞히는 것은 매우 힘들었을 것이라 추정된다.[16][17] 애초에 그 당시에 사격 통제 컴퓨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감으로 각도와 장력을 어림잡고 쏘는 이상 100m 너머의 사람에 대해 정확하게 쏘기는 매우 힘들다고 생각되는 바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활이 머스킷에 비해 잘 맞는 무기라고 하기는 힘들다. 몇몇 엄청난 명궁의 희귀한 케이스를 일반화시키기 어렵다. 머스킷이 가지고 있는 상대적으로 저조한 명중률이 과장된 형태로 널리 퍼져있고 반대로 활의 다루기 힘든 점이 잘 안 알려져 있기에 머스킷이 활보다 명중률이 떨어진다는 오해가 인터넷을 중심으로 많이 퍼져 있다. 사실 활의 명중률 또한 고도의 난이도 및 곡사 탄도 때문에 실질적, 그리고 평균적인 퍼포먼스는 총보다 대단하지 않다. 다만 화살의 곡사 탄도가 머스킷 총탄의 직사탄도보다 안정적이기에 그러한 장점을 극대화한 소수의 명궁들이 존재했을 뿐이다. 그러한 소수의 명궁들은 10년 이상 연습한 베테랑들이었고,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10년 이상 총을 다룬 사냥꾼들도 명중률 면에서는 부족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론이 아니라 현실적인 면에서 보면, 머스킷이 활보다 명중률은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사수 능력치의 표준 편차를 고려하면 머스킷이 활보다 우수한 명중률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많은 군대들은 활이던 머스킷이던 정확한 개인 사격보다는 일제사격으로 최대한 많은 양의 투사체를 퍼부어 제압력을 갖도록 하는 것이 보편적 방법이였다.

사실 머스킷 혹은 아르케부스 같은 초기 화기들이 전장에서 보여준 낮은 명중률은 구형탄환을 쏘는 활강총신 총기의 한계나 종종 가늠자조차 없는 엉성한 조준장치 등 총기 자체의 기술적 한계의 탓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가장 중요했던 원인은 총기 자체보다 그 총기를 운용하던 병사들, 그리고 그 병사들을 모집하고 훈련하는 시스템의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이 글에서 잘 나타나듯[18] 많은 전투에서 병사들은 애초 조준이라는 것 자체를 하지 않고 사격을 했다. 이는 개별 병사들의 낮은 숙련도 뿐 아니라, 애초 병사들의 훈련에서 사격술이 크게 중시되지도 않았던 결과였다.[19] 이런 경향은 기본적으로 전열보병의 시대까지 이어지다가 미니에 탄의 등장을 비롯 강선총기의 사용이 일반화된 남북 전쟁 이후에야 바뀌기 시작한다.[20]

3.4. 관통력 및 대인저지력

머스킷이 압도적으로 우월하다. 활은 적이 무구를 갖추거나 하다 못해 두꺼운 천/가죽으로 덧댄 옷, 나무 방패 하나만 사용해도 살상력이 크게 떨어지고, 잘 만든 판금 중갑에는 이상적인 환경에서 강력한 장궁으로 직격시켜도 유효한 피해를 주기 어려웠던 반면에, 머스킷은 기존의 활과 화살은 물론 갑옷을 뚫기 위해 당시 한계까지 개량되었음에도 결국 플레이트 아머의 벽에 가로막힌 도르래식 쇠뇌조차도 훨씬 넘어서는 무시무시한 관통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머스킷 탄환의 운동 에너지는 1,500J이 넘었고, 대구경 머스킷은 2,000J이 넘어가기도 했다. 현대 M16 자동소총의 5.56mm 탄환의 운동에너지가 약 1,600J 수준임을 생각하면, 다른 고려사항을 제한 운동에너지만큼은 현대 소총탄에도 뒤지지 않았다. 장궁에서 쏜 화살의 운동에너지가 100J~150J 정도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이다. 또한 탄환의 질량은 일반적인 18세기 69구경 머스킷 기준 평균 400 그레인(26그램)으로, 풀사이즈 소총탄인 7.62×51mm NATO의 약 2.5배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크기이며 그만큼 무시무시한 운동량을 자랑한다.

15세기 들어서, 일반 활은 말할 것도 없고, 쇠뇌나 장궁 등의 강력한 궁시류들조차 발달하는 갑옷에 대해 매우 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장궁마저도 판금갑옷에게는 무력한 모습을 보였으며[21] 비슷한 시기의 조선 갑옷 두정갑은 각궁을 막았다.

애초에 궁시류 자체가 갑옷을 입은 군대를 저지하기 힘든 병기였다. 리넨 갑옷이나 가죽 갑옷 같은 소프트 아머조차도 화살의 관통을 상당 부분 저지했기에, 만약 뚫리더라도 착용자는 부상만 입을 뿐 바로 행동 불능의 중상을 입히거나 즉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렇기에 많은 군대들은 정확한 개인 사격보다는 일제사격으로 최대한 많은 양의 화살을 퍼부어 화살에 제압력을 갖도록 하는 것이 보편적 방법이었다. 이런 일제사격 방식은 머스킷이 도입된 이후에도 전열보병 전술로 널리 쓰였다.

총기의 발달을 주도하던 서양은 그 갑옷의 발달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기에, 확실하게 뚫어서 죽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도 하였으며, 동양 또한 그 압도적인 살상능력에 매료되어 화승총을 대량으로 운용하고자 하였다.

갑옷과 방패를 뚫고 진형을 붕괴시킨다는 것은 총이 압도적인 대인저지력, 즉 덤비는 사람을 제지하는 힘이 뛰어나다는 걸 보여준다. 헐벗은 사람이나 동물은 15~30cm 정도만 관통하면 살상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으며, 그런 역할은 활도 훌륭히 수행했다. 겨우 150J 남짓의 화살도 멧돼지를 충분히 관통할 정도다.

하지만 총탄은 화살의 열 배가 넘는 운동에너지를 부드러운 납 덩어리로 박아넣기 때문에, 목표물에 닿고 나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지고 상처를 헤집어놓는다. 총상의 구조를 보면 총탄에 갈려나가 사라진 영구공동과, 총탄의 충격파로 인해 풍선처럼 늘어난 임시공동이 함께 생기는 걸 볼 수 있다. 화살이 자기가 지나가는 동선만을 뚫고 벤다면, 총탄은 뚫고 지나가며 사방팔방으로 충격파와 파편을 퍼뜨려 사람 및 동물을 쓰러뜨리는 것이다. 갑옷이나 방어구 등을 뚫는 건 기본에, 뚫고 나서도 내상을 입힌다.

그렇기 때문에 화살에는 저지되지 않고 움직이는 중무장 보병, 기병, 맹수 등도 머스킷 일제사격 앞에서는 웬만하면 저지되었다. 전열보병 전술이 오랫동안 현역이었던 이유도 이 저지력 문제 때문이다. 한두 발의 총탄을 씹고 움직이는 독종도 한꺼번에 수십, 수백발의 총탄이 날아들면 웬만해서는 몇 발을 맞고 벌집이 된다.

3.5. 연사력

브라운 베스46초만에 3발을 속사하는 영상[22][23]
장전 속도의 경우에도 보통 1분에 2발씩 쏘던 일반 병사 대부분이 화약 대신 모래로 장전하고 부싯돌 대신 나무조각이나 끼우며 연습할 때 실탄으로 훈련을 하던 영국의 레드 코트처럼[24] 숙련된 사수는 분당 3발 정도를 쏠 수 있었다.[25] 그런데 조선 후기 평안도와 함경도 포수들 중에서는 조준이 아닌 방포의 경우에 한해서 분당 4발에서 최대 5발까지 방포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3보1킬이 빈말이 아니었던 것이지만 그래도 활보다는 연사력이 느리다.[26]

하지만 전투용 활의 장력이 100파운드를 넘는 것을 생각해보자. 아무리 머슬맨이어도 그 정도 장력의 시위를 10번 이상 당기다보면 지치고 팔이 아파서 느려지거나, 심지어 더는 당기지 못하는 수도 있다. 하지만 전장식 총을 장전하는 것은 큰 근력이 요구되는 일이 아니기에 꾸준히 장전하고 쏘는 것을 반복할 수 있다.

게다가 보통 궁수의 화살 보유량은 20~40발이다. 프리드리히 2세의 보병들이 머스킷 탄약을 60발 정도 휴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속적으로 투사할 수 있는 발수는 머스킷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소구경 고속탄인 5.56mm가 구식 대구경 탄인 7.62mm에 비해 독보적으로 우위에 있는 점이 바로 작은 크기에서 나오는 많은 휴행탄수임을 고려해보자. 고작 몇 밀리미터 치수가 다른 탄환도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 거의 사람 다리만한 길이의 화살과 한 손에 대여섯 개는 쥘 수 있는 쇠구슬 중 어느 쪽을 더 쉽게, 더 많이 지니고 다닐 수 있는 지는 계산이 없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드물지만, 꼬질대를 사용하지 않고 사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영상은 리인액터들의 공연. 정확히는 안전 문제 때문에 총알을 넣는 단계가 생략되었다. 샤프 시리즈에서도 꼬질대 대신 총을 땅에 대고 쳐서 총알이 굴러들어가도록 하는 방식을 훈련 장면에서 시연한다. #

3.6. 유지보수

머스킷의 약 우세. 물에 젖은 머스킷은 마르면 다시 쓸 수 있지만 물에 젖은 활은 완전히 망가져버려 쓸 수 없다.

활은 단순하게 생겨먹은 것과 달리 관리하기가 정말 까다로운 무기였다. 습기에 노출되면 탄성을 잃어 심각하게 성능이 저하되었다. 아교를 사용한 합성궁은 말할 것도 없고, 단순궁이라도 비에 젖으면 시위의 탄력이 떨어졌다. 그렇기에 습기가 많은 기후인 일본의 경우 장궁 형태의 단순궁을 썼으며, 아예 인도는 탄성이 높은 철로 활을 만들었다. 시위를 거는 것이 전보다 수월해졌다면 그 활은 망가진 것이니 버려야 한다는 이야기 또한 있다.

총 또한 화승이나 점화약이 비에 젖으면 쏘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 하지만 물에 젖으면 못쏘는 총의 약점이 물에 젖으면 아예 망가지는 활의 약점보다는 더 나은 것이 사실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보완이 이루어졌다. 조선같은 경우는 우의나 작은 가리개 같은 것으로 어느 정도 방수력을 확보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인좌의 난 때 반란군의 조총은 비에 젖어서 사격을 못했지만, 관군은 어느 정도 방수대책을 했기에 비에 구애받지 않고 사격했다는 기사가 있다. 이 문제는 플린트락이 개발된 이후에도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았고, 19세기 들어서서 퍼커션 캡이 개발되어야 개선, 후에 금속 탄피로 넘어가면서 완벽하게 극복해 아예 물 속에서도 잘만 격발할 수 있게 된다.[27]

총 같은 경우에는 사격 후 총기손질을 제때 안 해주면 총신이 부식된다는 문제가 있지만, 관리 안해서 좋을 병기가 없으니 이거야 뭐 제때 잘 해주면 되는 문제이다. 또한 이 부식 등의 문제는 무연화약을 쓰는 총기들도 모두 해당되는, 현대 기술로 해결이 사실상 불가능한 문제다. 오히려 활강식 머스킷 같은 경우에는 강선이 없기에 관리가 간편하고 총신 훼손이 덜 된다는 장점이 있었다.

3.7. 가격

사실 머스킷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가격이었다. 총기 자체도 지금 기준으로는 저열하기 짝이 없는 쇠파이프에 장식용 나무쪼가리 붙인 것에 불과하지만 아직 공작기계도 없었던 15세기 당시에는 고난이도의 기술이 듬뿍 들어간 정밀한 병기였다. 그 때문에 내로라하는 총기 장인들을 닦달하며 만들어봐야 머스킷의 생산성은 영 좋지 않았고, 당연히 머스킷의 가격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도 어떻게든 수준급의 머스킷을 확보하려고 죽어라고 개고생 했을 정도.

비싸기는 머스킷 본체만 비싼 게 아니라서 머스킷을 쏘려면 꼭 필요한 화약 같은 소모재도 엄청나게 비쌌다. 19세기만 하더라도 화약은 엄청난 고가품이었고, 재료 수급의 문제로 생산량 자체가 제한되어 경우에 따라선 돈 주고도 못 구하는 물품이었다.[28] 화약을 만드는 공정은 까다롭고 복잡한 과정이었으며 안정성 문제로 사고의 위험도 높았다. 또한 그 재료 중 하나인 초석은 구하기도 상당히 힘든 물건으로 신대륙의 구아노와 초석 광산을 개발하기 전까진 동양이나 서양이나 크게 다를 건 없었다.[29] 덤으로 플린트락 같은 수발식 총의 부싯돌 또한 30회 정도 사용하면 갈아줘야하는 소모품이었다. 이러다보니 화약이나 수석같은 물품들은 실전을 위해 비축해두는 게 당연했고 그 당시 사격 훈련이란게 달랑 장전연습과 화승총의 지향연습이 전부인 상황까지 나타나게 된다.[30] 즉, 이제 막 입대한 신병은 총을 '쏘는 법'은 알아도 '효율적으로 쏘는 법'을 몰랐기에 명중률이 낮게 보이는 것이다. 때문에 빈 총으로 대충 훈련해놓고 부사관들이 "실제로는 다르니까 실전에선 다르게 하라~"라는 말을 덧붙이는 일은 당연한 것이었다.[31] 때문에 전쟁이 격해지자 대충대충 훈련받고 투입된 전열보병 신병은 천둥같은 총성과 몸을 때리는 반동에 자기가 쏴놓고 자기가 겁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활 또한 저렴한 무기는 아니었다. 아무나 만들 수 없어 장인이 필요했던 건 마찬가지였고, 활의 재료 역시 대충 나뭇가지 주워다 꺾어다 만드는 게 아니라 잘 관리된 고급 재료여야 했다. 우리나라의 각궁의 경우 주 원자재인 물소뿔을 중국에서 수입하였기에 그 생산단가는 매우 비싼 편이었다. 당시의 여유있는 나라가 하나둘씩 활에서 총으로 주력무기를 변경한 데에는 이런 생산 문제도 있었다. 장궁과 그걸 다루는 기술이 나라의 자랑이었던 영국이 머스킷으로 주력무기를 변경한 이유 중 하나는 장궁의 원자재인 주목이 영국 내에서 씨가 말라 이를 아메리카나 북유럽에서 수입해야 했고, 이런 운송비 때문에 생산단가가 하늘을 모르고 올라가서였다.

또한 생산에 있어 딱히 오래 기다리는 과정이 없이 재료 모이면 가공 조립해서 내놓으면 되는 머스킷과 달리 활은 좋은 재료가 구비됐다고 뚝딱 만들어지는 무기가 아니라, 합성궁의 경우 아교같은 접착제가 잘 붙게 두어야 하기에 3년 동안 기다려야 했고, 심지어 장궁같은 단순궁들도 어느 정도 탄성과 내구성을 확보하려면 1~3년 정도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했다. 그렇기에 공산품 찍어내듯이 생산라인을 확장한다고 해서 바로바로 생산해낼 수 없었고, 이러한 시간 등을 고려하면 전쟁터에서 소비되는 양 대비 생산량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3.8. 사기 저하 및 제압 능력

사기 충격 능력은 머스킷의 압승이다.

하늘을 빼곡히 메울 정도로 많은 화살이 쏟아지거나 총알과 포탄이 일제히 쏟아지는 상황에서 제정신을 유지한 채로 밀집 대형을 묵묵히 지키는 건 매우 어렵다. 게다가 머스킷은 한 발 한 발 쏠 때마다 천지가 울리는 듯 뻥 뻥 터지는 소음을 내는 화약 무기이기 때문에 동수의 활보다 전의 상실 유발에 유리했다.

예를 들어 데이브 그로스먼의 “전투의 심리학”에서는 현대 소총의 제압 효과를 이야기하며, 전근대로 치면 화살과 머스킷총 사이의 제압 효과 격차가 현대 총기 중 권총과 소총 사이의 제압 효과 격차와 비슷할 거라고 비유했다.

물론 17세기, 18세기를 거치며 화약무기를 주력으로 사용하는 전장 환경에 맞는 훈련 및 심리적 적응 방식이 도입되기는 했지만, 일제사격과 함께 귀가 멀 듯한 천둥 같은 총성이 나고, 흑색화약이 시커먼 연막을 이뤄 적의 위치도 잘 모르겠는 와중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납구슬이 우수수 날아와 옆에 아군이 뭐에 맞은지도 모르게 픽 쓰러져가는 아비규환에 적응하기 위해선 학대 수준의 훈련이 필요했고, 그렇게 준비를 하는 것도 좋게 말해야 훈련이지 “전열에서 이탈해서 적에게 개별마킹당해 확실히 죽느니 운 좋게 빗나갈 수 있는 총알 비 앞에 선다.”는 선택을 강요하는 수준이었다.

총이 전 인류의 표준 무장이 되어 군인이라면 총이 어떤 소음을 내고 뭘 할 수 있는 지 다 아는 지금도, 실전을 겪으면 귀를 때리는 소리에 머리가 멍해지고 빗발치는 총알에 정신을 못 차리는 경우가 나오는데, (미숙련된) 사용자조차 제 총에 겁을 먹은 그 시절에야 오죽했겠는가. 사실 숙련자도 총기를 다룰때마다 긴장할 수밖에 없다. 총 터져서 손가락이 날아갈지 눈알이 날아갈지 아무도 모른다!

화살 비도 맞으면 죽는다는 공포를 줄 수 있고, 맞으면 죽거나 다칠 수 있는 건 같지만, 폭음과 냄새와 매연 같은 부가 효과는 머스킷만의 특징이었다. 활이나 쇠뇌에서도 활줄 튕기거나 기관부가 움직이는 소리는 나지만, 이런 건 공포스럽고 우렁차게 울리는 날카로운 총성에 비하면 아주 부드럽고 귀여운 수준이다. 여기에 어지간한 갑옷은 뚫어버리니 공포는 더더욱 증가. 신대륙 침략 당시 원주민들이 서양의 화약 무기에 왜 지레 겁을 집어먹었는지 생각해보자. 심지어 르네상스 시기 프랑스에서 화약무기를 저평가하던 시절 '화약은 농부들을 겁주는 데에나 쓸모있다' 고 했는데, 저평가하던 시절조차 사기제압 효과는 확실했다는 뜻. 이런 요인 때문에 동양에서는 머스킷이나 조총보다 원시적인 구식 화약 무기를 퇴역시키지 않고 신호용이나 지원용으로 써먹기도 했고, 머스킷이 발달하기 이전에도 각종 화약 무기를 응용하려고 노력한 시도가 있었다.

특히 서유럽의 전열보병이나 그 이전의 머스킷 일제사격 전술은 이 제압효과 때문에 널리 쓰이기도 했다. 수십, 수백명이 일제히 사격하면 그 폭음만으로도 적을 위협할 수 있었고, 화망에 걸린 적은 기병이든 보병이든 확실하게 벌집이 되었다. 그래서 사기가 낮거나 오합지졸이거나 전근대 궁병처럼 화승총을 운용한 군대는 전열보병을 이기기 힘들었다.

머스킷의 위력을 보여주는 사례가 하나 있는데, 1589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에서 마라부라고 불리는 이슬람교 수도사가 이끄는 반란군 오스만 제국 군대가 주둔한 요새화된 도시들을 공격했으나, 반란군은 기껏해야 화승총 몇 자루 말고는 제대로 된 무기가 없었던 것에 반해 오스만 군대는 요새화된 도시와 포병대의 지원까지 받는 화승총 부대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수적으로 훨씬 우세했던 반란군은 끝내 오스만 군대가 주둔한 도시들을 함락시키긴 커녕 일방적으로 학살당했고 결국 반란군 지도자인 마라부는 배신자에 의해 오스만 군대에게 넘겨져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으며, 반란 또한 1590년에 이르러 흐지부지 사라져 버렸다. #

3.9. 기병이 사용하는 경우

궁기병 전통이 있는 나라의 경우, 활이 군대에서 퇴출되기 전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던 영역은 대부분 궁기병이었다. 전장식 머스킷 소총은 기마 상태에서 장전하기 까다로웠으며 특히 달리는 도중에는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보병 궁병은 총병에 의해 대체되더라도 궁기병은 총기병에 의해 대체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유럽 국가 기병들은 머스킷 시절에도 총기병을 많이 사용했으나, 보통은 미리 장전해둔 피스톨이나 카빈을 몇 정씩 들고 다니든지, 아니면 검이나 랜스 등 다른 무기로 갈아들든지 하고 굳이 재장전이 필요하면 잠시 뒤로 빠져서 안전한 위치에서 재장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전열보병화되면서 화력이 급증한 근대 보병을 상대로는 옛날처럼 궁기병 스웜 전술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주무장으로서는 활이나 총이나 크게 메리트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부무장으로서는 전장식 피스톨이 활보다 나은 점도 있으니, 기병의 무기로 활이 전장식 총기보다 반드시 낫다고 보기는 어렵다.

3.10. 물가에 쏘는 경우

화살은 어느 정도 물 속으로 파고드나, 총탄은 금방 운동에너지를 잃는다. 이는 머스킷은 커녕, 현대 소총조차도 마찬가지다.

화살은 물속에서 유효사거리가 약 3m ~ 7m나 되는데 이를 이용한 ' 보우 피싱'이라는 낚시법이 존재한다. 보우 피싱은 낚시 포인트 잘 잡고 어느 정도의 활 실력이 뒷받침 된다면 거의 학살에 가깝게 낚아올릴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낚시꾼 근처에서 쓴다면 배터리로 지지는 것 만큼이나 민폐다. 그리고 이 낚시법은 화살을 작살의 일종으로 보아서 불법행위로 걸릴 수 있으니 되도록이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3.11. 정숙성

활의 압승. 총은 화약의 힘을 사용하는 태생적인 한계로 소음이 매우 클 수밖에 없지만 활은 시위를 튕기는 소리는 무언가를 세게 때리는 수준으로 확연히 작다. 단지 수렵 상황이 아닌 이상 머스킷과 활이 일대일로 경쟁한 적이 잘 없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전쟁에서 야습이 간간히 쓰였지만, 양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통신수단, 피아식별수단의 한계로 야간전이 대대적으로 일어나진 못했다. 머스킷이 쓰이던 시대에 대부분의 군대는 그냥 자기들이 쓰던 머스킷이나 화승총 등을 썼다. 어차피 적이 보일 정도의 지근거리에서는 총으로 쏘나 총검으로 찌르나 불을 지르나 그게 그거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접근할 때까지는 기도비닉을 지키기 위해 함부로 격발하지 못했으리라 추론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문제로 인해 대한민국 육군 특전사 해군 UDT처럼 20세기에도 초병 제거용으로 냉병기, 쇠뇌, 투검 등을 무성무기로 고려한 곳도 있다.

머스킷이든 현대 총기든 비교해보면 소음기를 쓴 총기는 여전히 활의 소음보다 큰 편으로, 반대로 활은 소음기를 장착한 총보다 소리가 더 작은 편이다. 평균적으로 총이 107db인 반면 활은 62db 수준. 다만 활과 달리 총은 아음속탄을 사용하고 탄약 구경을 낮추는 등 여러 방법을 추가로 동원하면 100db 이하로도 얼마든지 낮출 수 있고, 이러고도 위력은 활과 비슷한 데다 표적을 맞추기도 훨씬 편하기 때문에 정숙성 때문에 제대로 된 군사작전에서 활을 사용하는 경우는 21세기 이래로 사라진 상황이다.

기습이나 사냥 등의 상황이 아닌 이상, 현대 이전에는 일부러 조용한 무기를 고르지를 않았다. 동물 사냥할 때에야 조용한 것이 도움이 되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냥꾼들이 활, 창을 쓰느냐 총을 쓰느냐 하는 문제는 다양한 요인으로 결정되었다. 전쟁에서는 오히려 소리가 큰 무기를 좋아하는 경우가 많았다. 적군 방진을 와해시키려면 무서운 소리로 사기를 떨어뜨리는 게 더 좋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활로도 화살 중에서도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명적을 일부러 쏘기도 했고, 화약 무기는 핸드캐논 시절부터 사기 저하용으로 일부러 사용했다.

사냥꾼들은 사정이 달라서, 머스킷의 도입 이후에도 활사냥은 일부 이루어졌다. 컴파운드 보우가 19세기에 사냥을 위해 고안되었다. 재미있게도 머스킷의 격발방식에 혁신을 일으킨 뇌홍 뇌관 역시 19세기에 더 쉬운 사냥을 위해서 발명되었다. 활 쪽이나 총 쪽이나 인간보다 훨씬 민첩한 동물 앞에서는 정숙성, 발사와 착탄 딜레이 문제로 고민한 것이다.

총 사냥과 활 사냥은 작은 동물이 아닌 이상 원리가 상당히 달라서, 활보다 훨씬 시끄럽고 화약 냄새까지 풍기는 총으로도 현대의 저격과도 같은 총사냥이 이루어졌다. 격발 이후 정숙성이 떨어지는 대신 화살과는 비교도 안 되는 펀치력으로 사냥감을 눕힐 수 있었고, 숙련된 사냥꾼이라면 어차피 사냥감이 눈치 못 채게 접근하거나 추적하는 건 무얼 들어도 할 수 있었다. 활은 총보단 훨씬 조용한 대신, 한 방에 동물을 저지시키는 효과는 적었기 때문에 맞힌 이후의 추적이 중요했다.

이는 현대의 엽사들한테도 마찬가지다. 소음총을 수렵에 쓰는 건 인근 주민들과 주변 생태계를 배려하고 사수의 눈, 귀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지, 사냥감한테 안 들키려는 게 아니다. 동물은 어차피 소음총보다 훨씬 작은 소리도 포착하기 때문이다. 활 사냥꾼들은 특별한 취향이 있는 게 아닌 이상 격발하듯이 발사할 수 있는 컴파운드 보우를 써서 최대한 소음-착탄 딜레이를 줄이려 한다.

4. 역사

4.1. 초창기

가장 초창기의 머스킷은 불이 붙은 밧줄로 점화약을 점화하는 화승식( 매치락) 머스킷이었다. 흔히 말하는 화승총이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이후 차륜식( 휠락)방식에 이어 부싯돌의 마찰을 통해 점화약에 불을 붙이는 수발식 혹은 수석식( 플린트락) 머스킷이 등장하였다. 화승식 머스킷과 차륜식 머스킷이 사용되던 시기의 군대는 머스킷 사수뿐 아니라 장창병 등 냉병기로 무장한 병사들도 상당수 있었다. 본격적인 백병전 상황이 되면 냉병기 쪽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발식 머스킷이 등장할 때쯤에는 이제 보병=머스킷 사수가 되었다. 이는 17세기부터 보병 화력이 강화되고 총격전 비중이 심화되면서 생기는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17세기로 오면서 총병과 창병의 비중은 1:1이 되었으며, 30년 전쟁을 지나면서 총병 비중 증대는 더 심화되었다. 공격할 수 있는 거리가 몇미터에 불과한 창병과 100m 내외의 적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총병과 비교해보면 실제 야전에서 어떤 병과가 많을수록 전투에서 유리한지 자명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일화로써, 루이 14세가 전장에서 창병들이 머스킷 사수가 죽거나 다치면 머스킷을 이어받아 사용한다는 보고를 받고, 전쟁부 장관에게 수발식 머스킷 및 총검의 전군 보급화를 지시했다는 일화가 있다.

유럽인들이 세계 각국에 식민지를 건설할 때 그 첨병이 되었고, 그를 통해 아메리카 등 유럽 바깥의 문명권에도 전래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때문에 아메리카의 어떤 영국 식민지에서는 머스킷으로 무장한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백인이 로 대항하거나 서아프리카에서도 머스킷으로 무장한 흑인 부족들이 석궁을 든 스코틀랜드의 노예상인에게 맞섰다는 식의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사실 머스킷은 온갖 동네에서 워낙 많이 만들고 팔아 치워서, 유럽인들이 상대해야 할 토착군대도 보유한 총기류의 숫자가 만만치 않은 경우가 흔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경우 아예 대장장이들이 총기를 자체 생산/수리했는데, 북아메리카에 있던 고품위 노천 철광덕분에 의외로 성능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때문에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과 전투를 벌일때 대장간을 우선 순위로 공격하는 일도 생겨났다. 흔히 7년전쟁에 참전한 원주민 전사들이 도끼나 휘둘러대던 원시부족이었다고 오해하곤 하지만, 실제론 절대다수가 머스킷으로 무장한 전사들이었고, 본거지의 이점을 살려 매복 전술까지 적극 활용하였기에 영국군과 프랑스군 모두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아랍권의 유격전용 전장식 소총인 제자일[32]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유럽의 우위가 확고해진것은 대체로 산업혁명 후이다. 세상사가 무기만으로는 안 된다는 중요한 교훈이다. 그러나 몇몇 부족이나 부대가 복제해 쓰는 것과 수십만 대군에게 일괄보급하는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인지라 이미 머스킷 시절부터 유럽은 지구 곳곳에 식민지를 만들고 다녔고 나폴레옹이 오스만 제국의 최강전력인 맘루크 기병대를 이집트에서 박살냈으며(다만 총기 말고도, 프랑스 기병과 맘루크 기병이 1:1로 붙으면 맘루크가 이기지만, 100:100으로 붙으면 프랑스가 이긴다 등 조직력 측면도 컸다) 심지어 수십년후 청나라를 박살낸 1차 아편전쟁때도 영국군의 제식무기는 머스킷이었다.[33] 즉 후장총이니 기관포니 할 것 없이 이미 수발식 머스킷 시절부터 유럽은 우월한 무력을 갖추고 있었고 후장총과 기관총 이후로는 더더욱 압도적으로 벌어진 것 뿐이다.[34] 유럽에겐 금은보화와 초석(화약의 중요한 재료)이 떼로 굴러 들어온 아메리카가 있었던 덕도 크다. 다만 유럽의 우위는 해상에서 몇 세기 빠르게 확립되었는데,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이 오스만에게 포위당하던 시점에서 유럽 선원들은 인도양은 물론 남중국해, 동해 등 태평양까지 와서 통행세를 삥뜯고 거슬리면 박살내고 다녔다. 그 악명 높다는 왜구도 카라벨에게 털리기 일쑤. 이렇게 바다-항구에 한정되었던 유럽 식민지는 후장총 등이 나온 후 내륙으로 확산된다.[35]

수발식 머스킷이 등장한 이래 거의 100여 년간 구조상의 큰 변화가 없이 사용되다가, 19세기 초중반에 발명된 뇌관 미니에 탄으로 인해서 성능이 크게 개선되었다. 이것이 머스킷 라이플의 최종 진화형으로 당시의 금속 가공 기술과 경제성, 생산성 등의 한계로 잠시 종이 탄피, 금속 탄피 소총 들과 공존하다가 기술의 발전, 무연화약의 등장 이후 새로운 총기 기술의 발달로 점차 도태되다가 사라진다.

4.1.1. 초기 머스킷 전술

보통 머스킷 사수끼리의 교전은 현대의 총격전에 비하면 짧은 거리에서 이루어졌는데, 머스킷의 정확도와 사거리가 몹시 떨어졌기 때문이다. 머스킷의 명중률은 상기했듯이 몹시 조악해서, 100야드(약 91m)를 초과한 목표물에 대해서의 사격은 명중률이 많이 떨어졌다. 머스킷 소총의 통상 교전거리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약 60~80m 정도였고, 좀 더 나은 명중률을 얻기 위해 적군의 코앞, 약 40m까지 접근해서 일제사격을 퍼붓는 경우도 있었다. 그 거리에서는 바보 같은 신병이 하늘을 향해 발포하지 않는 이상 맞힐 수 있었다.[36]

게다가 머스킷의 구조상 오히려 높게 쏘지 않아 명중률이 더 나빠졌다는 부정적인 견해도 있다. 애초에 납 구슬인 당시 총알 특성상 거리가 멀어질수록 탄속이 크게 감소하고 현대의 총보다 심한 곡선 탄도를 그릴 수밖에 없는데 명중률이 나쁜 가장 큰 이유는 비회전으로 인한 탄도 불안정 다음으로는 거리에 따라 조준선을 조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숙련된 사냥꾼이나 저격수들은 탄도에 대한 감각이 좋았으니 거리가 멀어지면 조준선을 위로 향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먼 거리에서는 머리를 조준해서 가슴을 맞추는 식이다. 이렇게 세밀한 운용은 조선시대 사냥꾼이나 나폴레옹 시대 볼티저 경보병처럼 머스킷으로 상대를 저격하는 데 숙련된 인원만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머스킷이 반동이 강했다는 점도 근거로 들 수 있는데, 현대에도 권총 입문자에게는 반동이 작은 권총을 먼저 추천한다. 처음부터 강한 탄을 쓰면 보통 무의식적으로 반동을 겁내 방아쇠를 당길 때 조준선을 아래로 향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이건 본인이 의식하기도 힘든 일이라 단시간내에 교정하기도 힘들다. 이와 마찬가지로 머스킷도 반동이 강한 편이었으니 무심결에 조준선을 내리는 병사가 많았을 거라 추측할 수 있다.(물론 몇 발 쏘면서 교정하면 된다만, 당시 화약값은 총 1발 쏘는데 10만원 수준의 물가였다. 연습하는 게 쉬운 가격이 아니다.) 전장식 머스킷은 둥근 납탄을 썼기 때문에 현대의 총기에 비해 구경이 무식하게 큰데다 현대 총기처럼 반동을 흡수하기 위한 악세사리가 달린 것도 아니니 체감 반동이 클 수 밖에 없다. 실제로도 총열을 직선으로 놓고 쏘면, 즉 boresight가 상대 가슴을 향할 때 40m 거리에선 대충 복부에 80m 정도면 대개 허리 아래에 맞게 된다. 당시 소총병의 전투 양상과 조준장치를 고려하면 대략 80m 부근에서 교전을 하고 확실히 맞추려면 40m이내가 되는 것은 당연한 셈. 그정도 거리라면 앞서 말했듯이 대충 조준한 곳보다 10~20cm 아래쪽으로 떨어질 뿐이니 어지간히 아래 방향으로 쏘지 않은 다음에야 표적에 맞는다. '낮게 쏴라'는 명령은 근접 사격 시 해당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한 발 쏘자 상대 진영이 무너져 착검돌격을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상대의 진영이 견고하다면 같은 자리를 지키면서 연속적으로 사격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보통의 병사들은 횡대 등 조밀한 진형을 짜서 사격하였다.[37] 이는 활을 사용한 시대부터 이어져온 일제사격[38] 방식이였지만 활은 냉병기 시대에도 보조적인 위치였기 때문에 전열보병 처럼 전면에서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화기 시대의 머스킷은 활보다 우월한 살상력을 가진 대신 순간 화력(연사)이 부족하면서도 주력이 되었기에 전면(총검의 등장)에서 화망을 구성하는 것으로 총기의 낮은 명중률을 보강하고, 높은 제압력을 가지며, 백병전 상황에서의 우위를 점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탄막사격의 경우 흑색화약의 연기 때문이기도 했다. 서너명이라면 모를까 수십 수백명이 일제사격을 가하면 그 연기가 시야를 가리는데, 2발 3발째를 쏘다보면 진짜 앞이 안보일 정도가 된다. 머스킷 숫자가 많아질수록 개별 명중률이 낮아지는 것.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머스킷으로도 나름대로 정밀한 개인별 조준 사격이 실시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볼티져 부대를 비롯하여 각국의 경보병(Light Infantry)들은 전열을 짜지 않고 자연적 엄폐물을 이용하여 2인 1개조로 사격전을 펼치면서 싸우는 전술(스커미시)을 즐겨 활용하였다. 이러한 경보병들은 추가적으로 사격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머스킷의 정확도나 사거리가 현대 총기에 비해 몹시 떨어졌다는 점 때문에, 당시 전쟁이 사격보다는 총검 돌격을 위시한 백병전만으로 결정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대표적인 오해 중 하나다. 비록 머스킷이 현대 화기에 비해서 정확도와 사정거리가 떨어진다고 하지만 얘도 일단은 총포다. 유효 사거리 내에서, 숙련된 머스킷 사수들이 퍼붓는 일제사격을 받으면 그 누구도 목숨을 보장하기 어려웠다. 단적인 예로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을 향해 돌격하던 프랑스군의 제국 근위대[39]는 능선 뒤에 엄폐하고 있던 영국군의 머스킷 일제사격을 얻어맞고 제1파가 박살났다. 총검 돌격이 당시 보병의 결전 기술로 쓰인 진짜 이유는 앞서 언급한 장전 속도 때문이다. 방금 언급한 워털루의 영국군도,(당시 세계 최고의 장전 속도를 가졌음에도.) 이어진 제4 근위 샤쇠르 연대의 돌격에 그대로 사기가 바닥났다.[40] 참고로 나폴레옹 전쟁 후반기로 가면 유달리 프랑스군이 총검 돌격과 근접전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러시아와 스페인 등지에서 숙련병과 장교들이 다수 희생되었고 물자 문제로 사격전으로 좋은 결과를 보기 힘들었기 때문이지 총이 문제는 아니었다.[41]

머스킷도 맞추기만 하면 무지막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걸 입증하는 사례가 하나 있는데, 해부학, 의학사를 공부하다 보면 나오는 일화 중에는 머스킷 오발 사고로 스스로의 배때지를 쏜 사람이(장교) 구멍난 위장을 몸 밖으로 노출한 채로 병상에 누워 의사 양반이 위장 속 내용물과 위장의 역할을 연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해괴한 이야기가 있다.(위의 음식물소화)

4.2.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이후 머스킷은 두 가지 발명품 덕에 더욱 발전하게 된다. 첫 번째는 뇌관( Percussion cap)이고, 두 번째는 미니에 탄(Minie ball)이었다. 이러한 발전의 바탕에는 특허제도가 있었고, 여전히 전장식 활강총을 주력으로 사용한 타대륙과 유럽의 무력 격차가 크게 벌어지기 시작한다.[42]

첫 영국의 포사이스에 의해 발명된 뇌관은 작은 금속관 안에 뇌산염을 넣은 물건으로, 충격을 가하면 불꽃을 일으킨다. 그 이전까지의 머스킷은 화약 접시에 부은 점화약에 부싯돌로 불꽃을 일으켜 총신 안의 장약을 터뜨리는 수발식이었는데 수발식 머스킷은 비가 오거나 해서 점화약이 젖으면 발사 자체를 할 수 없다는 치명적 문제점이 있었다. 그러나 점화약이 흑색화약이 아닌 뇌관으로 대체되면서 병사들은 날씨에 상관없이 머스킷을 사격할 수 있게 되었다. 덤으로 장전 절차도 약간 편리해졌다.(화약 접시에 화약을 부을 필요 없이 뇌관만 끼우면 되니까) 게다가 장전시 불발률도 떨어졌다. 수석식 총의 불발률은 25%[43] 그래서 불발시 행동 군율까지 다 정해졌고, 그 절차를 다 거치면 교전 중 도주도 허용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 사이 동료가 죽고 그 총을 받아서 쏜다.[44]

두 번째인 미니에탄은 프랑스의 미니에가 발명한 머스킷용 탄환이다. 미니에탄에 대해 설명하려면 우선 당시의 라이플(선조총)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강선이 없는 머스킷이 전장을 지배하던 18세기 이전부터도, 이미 총열에 강선이 새겨진 총(라이플)은 존재했으나 군용으로 광범위하게 쓰이지는 못했다. 우선 당시 기술로는 총열에 강선을 새기는 것이 비싸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더 큰 이유는 당시 라이플의 경우 장전에 걸리는 시간이 머스킷보다도 더 길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라이플의 강선이 효과를 보려면 탄환이 강선에 꽉 낄 정도로 맞물려야 하는데, 그를 위해서 탄환 한발 한발을 가죽이나 헝겊으로 감싸서 총열에 밀어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 자체도 번거로울 뿐더러 헝겊에 감싸여 지름이 커진 탄환은 장전봉으로 밀어넣는 것도 힘들었다. 그래서 당시 라이플 사수는 심지어 장전봉과는 별도로 탄환을 총열 안에 밀어넣는 'bullet starter'라는 별도의 도구를 가지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 그런 전용도구를 가지고서도 3분에 한발 꼴로 쏴댔으니 숙련되면 1분에 세발 쏘는 머스킷과 정면 화력전을 하면 당연히 이길 수가 없어서 일반 보병의 무기는 여전히 머스킷이 될 수밖엔 없었다,

그러나 미니에탄은 당시 라이플의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해주었다. 1849년 프랑스 육군 장교 클로드-에티엔 미니에가 개발한 미니에탄은 이전까지의 머스킷 탄환처럼 공 모양이 아니라 원추형으로, 뒷부분이 움푹 패여 있었다. 이 탄환을 머스킷에 넣고 발사하면, 발사시의 화약 연소 가스가 미니에탄의 크기를 확장시켜서 탄환이 강선에 딱 맞물리게 된다. 즉 미니에 탄환을 사용하면 비교적 빠른(즉 일반적인 머스킷 수준의) 장전 속도로 강선총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장전 속도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미니에탄은 유선형이므로 공 모양인 구식 머스킷 탄환보다 정확도나 사거리라는 측면에서 우월하다. 즉 미니에탄 덕택에 머스킷은 장전 속도와 정확도&사거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9세기 중반 이후의 머스킷은 이전 나폴레옹 전쟁 시기의 머스킷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정거리와 발사 속도, 그리고 신뢰성을 가진 무기로 진화하였다. 당장 뇌관을 사용하는 머스킷의 경우 총열 내부의 화약 자체가 젖지 않는 한 어지간해서는 불발될 일이 없다는 것만 생각해도 장족의 발전이다. 그래서 이 시기의 머스킷을 이전 시기의 활강(강선이 없는) 머스킷과 구분하여 보통 강선 머스킷(Rifled-musket)[45]이라 부른다. 강선 머스킷은 19세기 중후반까지 쓰였으나 후장식 총기와 금속 탄피 탄환이 발명되고 개량되어 점차 널리 보급되면서 사라져갔다.

하지만 막 종이 탄피를 이용한 후장식 소총인 드라이제 소총이 등장했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나 금속 탄피를 이용한 연발 소총 헨리 소총이 등장한 미국 남북 전쟁 시기에도 전장식 소총은 여기저기서 잘만 쓰였다. 여기에는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당시 초창기 후장식 소총들의 성능이 생각만큼 그렇게 강력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니들건이라 불리던 프로이센의 드라이제 소총은 비효율적인 종이 탄피의 구조로 인해 만들어진 바늘 모양 공이가 툭하면 부러지기 일쑤였으며, 부족한 기술력으로 약실이 제대로 폐쇄되지 않아 틈으로 화약 연소 가스가 뿜어져 사수의 얼굴을 구워버리는 사태가 종종 발생했다.[46] 후에 나오는 금속 탄피제 헨리 소총은 작동은 좀 더 매끄러웠으나 총기의 구조가 약해 강한 탄피를 사용할 수 없었다.[47]

둘째는 단연 가격이다. 말할 것도 없이 당시의 종이 탄피 후장식 소총은 머스킷 라이플에 비해 3배 이상 비쌌으며, 헨리 라이플은 그보다도 훨씬 더 비쌌다. 더군다나 금속제 탄피 역시 등장 초기에는 제조 비용이 만만찮았다.[48] 당연히 군대의 제식무기는 대량 생산하여 대량 지급하여야 하는데 가성비 면에서 대부분의 국가는 기존에 산업 설비까지 다 갖춰진 전장식 소총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남북전쟁에서 남군은 울며 겨자먹기로 머스킷 소총을 사용할 때 상대적으로 경제력과 기술이 뛰어났던 북군은 장탄수 16의 헨리 소총을 마구 쏴재꼈으며 결국 '더러운 양키 새퀴들이 월요일에 장전해서 일주일 내내 쏴대는 총'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초창기 리볼버들도 사실상 작동방식 자체는 머스킷과 같았다. 실린더에 흑색화약과 탄환을 넣고 총에 달린 램로드로 꽉 눌러준 후 실린더 뒷부분에 뇌관 캡을 달아 점화시키는 방식. 비단 콜트뿐 아니라 레밍턴, STARR, Beaumont-Adams등 당대 리볼버가 전부 다 그랬다.

4.3. 20세기 이후

현재는 미국 등지에서 민수용으로만 사용되는데, 그런데도 소지 허가가 필요 없다나 뭐라나. 사실 전장식 총기는 미국 연방 총기 법률로는 "총"이 아니다. 앤티크(골동품), 레포츠 도구(활과 마찬가지)로 구분된다. 그래서 딱히 등록할 필요도 없고, 대형 마트에서 활이나 나이프와 같이 즉석으로 판매한다. 제아무리 미국이라 해도 실총 구매 시에는 반드시 신분 확인(범죄 경력 확인)[49] 절차가 들어가는데, 머스킷은 총 취급을 하지 않다 보니 돈만 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판다. 물론 법률상 총이 아닐 뿐 위험한 도구이긴 마찬가지이기에, 지역에 따라서는 총기법이 아닌 별개 법률로도 규제할 수 있다. 미국 연방 법률상 도검은 규제되지 않지만, 위험한 물건이니 거리에 차고 다니거나 남한테 휘두르면 경찰에 잡혀가듯이 말이다. 사실 머스킷으로는 큰 위협을 주기 어렵다는 것도 현실이다.

매치락, 플린트락과 퍼커션 캡 방식 모두 리프로덕션 되고 있다. 활이 그렇듯 이런 재래식 총기는 나름대로 팬 층이 있기에, 되도록 재래식을 재현한 물건을 원하는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플린트락과 퍼커션 캡은 총포사에 가면 대부분 비치하고 있을 정도로 찾아보기 쉽다. 화승식은 상당히 드물지만 리인액터 시장이 있기 때문에 인터넷 주문으로 조달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

하지만 스톡이 목재가 아닌 카본 파이버로 되어 있고 피카티니 레일이 장착된 신소재 머스킷도 생산되고 있다. 생김새는 딱 보면 볼트액션이나 중절식 엽총 같지만, 사실은 전장식이며 볼트액션이나 중절 부위처럼 생긴 그쪽으로는 209 프라이머를 장전한다. 플래툰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현대 총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화염과 연기의 양에 매료된 마니아들이 주로 찾는다고 한다. 그 외에도 미국은 사냥 시즌에 흑색화약 총기만 쓸 수 있게 하는 특례 기간이 따로 있어서 이 시기에 사냥하고 싶어서 사냥용 머스킷을 사는 사람도 있고, 아직 실총을 구매할 수 없는 나이의 청소년들이 머스킷과 구식 C&B 흑색화약 리볼버로 총기 관련 취미에 입문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좀 더 나가면 최신식인 전기 격발식이 있다. 흑색화약이 전기에 민감하다고는 하지만 사실 요새 나오는 흑색화약은 전부 흑연 코팅을 해서 80만 볼트 스턴 건으로 지져도 기폭 하지 않는다. 그래서 캐퍼시터로 승압한 전기를 챔버 쪽에 흘려서 전기 아크를 일으켜 그 불꽃으로 화약을 점화한다고 한다. 방아쇠가 그냥 스위치일 뿐이다 보니, 일반 뇌관을 사용하는 머스킷보다 훨씬 방아쇠 반응이 빠르다는 게 장점. 뇌관 교체조차 필요 없기에 궁극의 머스킷으로 불리지만 시장의 반응은 영 아니라서 시범적으로 팔리고 만 모양.

그러나 머스킷은 무연화약을 쓸 수는 없는데, 옛날 머스킷은 무연화약을 쓰기에는 내구도가 약해서 한번 발사하면 총이 폭발할 확률이 높다. 사실 강력한 현대 강재로 무연화약을 사용하는 현대식 머스킷을 절대 못 만드는 것은 아니며, Savage 10ML 같은 실제 발매 제품도 있었다. 하지만 흑색화약과 달리 무연화약은 화력이 훨씬 높다 보니 미세한 화약 분량 차이나 탄두를 밀어 넣은 정도 차이로도 약실 압력이 크게 변할 수 있어, 팔아놓고 보니 총이 터지는 사고가 빈발했다. 탄피식 총이라면 장약과 격발환경에 일관성이 보장되는데, 화약을 따로 넣는 머스킷은 그게 안 되던 것. 그래서 새비지의 물건도 단종되고, 현재 시장에는 중고나 마이너 한 업체에서 만드는 것만 남았다.

흑색화약에서도 꽤나 발전이 이루어졌는데, 옛날식 그대로 알갱이형(코닝 거친) 진짜 흑색화약도 판매하지만, 유사 흑색화약(Black powder substitute)이라고 하여 흑색화약과 같은 부피로 같은 화력을 내며(요건 제품마다 좀 다르다) 비슷하게 연기가 나지만, 연소물이 덜 남고 깨끗하게 잘 타고, 효율적이고, 더 안정적이라 무연화약처럼 편하게 다룰 수 있는[50] 물건이라 근래의 머스킷 사수들이 많이들 애용한다. 파이로덱스, 블랙 맥, 트리플 세븐 등의 제품이 있다. 다만 유사 흑색화약은 점화 온도가 좀 높은 편이라 플린트락으로는 불발이 잘 나고, 최소한 퍼커션 캡이나 현대 총기용 프라이머를 쓰는 게 좋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가서, 화약을 분말/알갱이로 파는 게 아니라 총열 크기에 쏙 들어가는 원통형 고형 화약으로도 판매한다. 미리 크기가 결정돼 있기에, 몇 개의 원통을 넣으면 되는지만 정하면 되므로 항상 계량컵이 필요한 분말보다 필드에서 다루기 쉽다. 분말보다 연소 효율이나 안정성도 더 우수하다.

뇌관 역시 재래식 구리 캡을 쓰는 것도 있지만, 폴리머 스톡을 사용하는 신형 머스킷은 산탄용 뇌관인 209 프라이머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플린트락 총기는 예나 지금이나 그냥 구식 플린트락 구조를 계속 쓴다.

미국 법상으로 1899년 이전에 만들어진 머스킷류의 총기 또는 그 복제품의 경우는 미국에서 총으로 취급하지 않고 골동품으로 보아 총기 라이선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위험한 물건이기는 하지만, 예컨대 수렵용 화살이나 도검이 위험하다 보는 것과 비슷하다.


Own a musket for home defense
Own a musket for home defense, since that's what the founding fathers intended. Four ruffians break into my house. "What the devil?" As I grab my powdered wig and Kentucky rifle. Blow a golf ball sized hole through the first man, he's dead on the spot. Draw my pistol on the second man, miss him entirely because it's smoothbore and nails the neighbors dog. I have to resort to the cannon mounted at the top of the stairs loaded with grape shot, "Tally ho lads" the grape shot shreds two men in the blast, the sound and extra shrapnel set off car alarms. Fix bayonet and charge the last terrified rapscallion. He Bleeds out waiting on the police to arrive since triangular bayonet wounds are impossible to stitch up. Just as the founding fathers intended.

머스킷과 관련해서 미국의 총기 애호가 내지 수정헌법 2조 지지자들 사이에 유명한 농담(혹은 )이 있는데 제목은 “Own a Musket for Home Defense.”,“머스킷으로 집을 지키세요.” 내용은 건국의 아버지들이 원하신 대로 머스킷으로 집을 지키자고 주장하면서 시작되는데, 강도 몇 놈이 왔길래 켄터키 소총과 파우더 뿌린 가발[51]을 챙기고, 소총으로 한 놈에게 골프공만 한 구멍을 뚫어서 즉사시키고, 권총을 쏘았지만 강선이 없어서 빗나가 이웃집 개를 맞혔고, 그 바람에 대포에 장전한 포도탄으로 두 놈을 박살 낸 다음 마지막 하나는 삼각형 단면의 총검으로 뚫어버렸는데 상처도 삼각형 구멍으로 뚫려서 경찰이 오기 전 까진 출혈을 멈추지 못한다면서 소동이 끝이 난다.

총기 규제가 갈수록 빡세지면서 나중에는 미국 건국 시기처럼 머스킷밖에 쓰지 못하겠다 불평하는 풍자 혹은 조롱성 유머인데, 그와 별개로 "Tally ho lads(사냥꾼들이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 외치는 '심봤다!' 같은 표현)"가 뜬금없이 우습다는 평가가 많다. AI를 써서 에미넴 목소리로 랩을 시킨 동영상 등도 흥했다.

5. 머스킷을 사용한 실존 인물이나 단체

5.1. 위 항목의 인물이나 단체에서 유래한 미디어 상의 인물이나 단체

6. 머스킷을 사용하는 가상의 인물이나 단체

워낙에 고풍스러운 매력이 느껴지기 때문에 각종 창작물의 캐릭터들이 사용한다. 작 중 연도가 온전한 현대나 미래여도 사용하는 연출도 흔하다. 판타지나 공상과학 기술이 적용되어 외형만 머스킷같은 가상의 총기를 쓴다고 때우거나, 여타 근접무기들도 워낙 강하거나 마법 등이 있어서 공존하게 만들어놓았다. 현대식 무연화약총이 많은 세계에서도 그냥 골동품을 쓴다는 설정을 붙이기도 한다. 총잡이 중 중, 근세, 르네상스 비주얼 작품의 총잡이들은 대부분 머스킷티어다.

삼총사 풍의 패션이나 해적 스테레오타입에도 잘 들어맞으며, 총과 도검을 함께 휘두르기도 한다. 즉 ‘근세’ 풍이 강하다. 이 경우엔 칼잡이와 이미지가 겹치기도 한다. 판타지나 SF 세계관이라도 이미지는 비슷하다. 또한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머스킷 고증이 주요 소재가 아닌 이상 무지막지한 장전절차는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비교적 디테일해도 손만 몇 번 휘적여 5초 정도만에 장전하기도 하고, 무한탄창 연출마냥 여러 자루를 돌려가며 쏘기도 하고, RPG게임의 경우 사격을 쿨타임이 걸린 스킬로 취급하기도 한다. 아예 화약 대신 마법이나 가상의 폭약으로 작동하는 머스킷을 만들기도 한다. 이 경우 ’격발 매개가 되는 물질+락‘ 같은 식으로 플린트락을 뒤틀어 부른다. 아케인락, 레이저락, 워프락 등등 아무 락이나 다 붙이고 머스킷이라 부를 수 있다.

그냥 외형이나 흑색화약 연기만 머스킷처럼 만들어놓고 사실상 종이탄피 후미장전총을 만들어놓기도 하는데, 실제로 신형 총기 도입이 들쭉날쭉했던 19세기에는 세계 각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구식 머스킷을 약간만 개조해서 뇌관식으로 만들거나 뇌관 머스킷을 개조해서 탄피식으로 만드는 식이었다. 구한말에 굴러다니던 조총 중에도 서양에서 사들인 퍼커션 캡 격발장치만 달아놓은 유물이 꽤 있고, 전쟁기념관 등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연출이 가벼운 게임은 비주얼만 머스킷이고 그냥 기관총처럼 쏴대기도 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물에서는 자원, 기술력 부족으로 뇌관 머스킷 수준의 수제총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플린트락, 매치락 등은 만들기가 난감하고, 제대로 된 약실 폐쇄 총기나 탄창 역시 만들기가 난감하지만 뇌관식 머스킷은 아무튼 강선 잘 파고 뇌관 꽂을 자리만 마련하면 된다는 발상으로 싸게 만든다는 식이다. 지금도 급조 총기는 무기공장 굴리는 군벌급이 만들지 않는 이상 단발 머스킷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며, 오히려 전기격발 장치로 격발구조상 단점을 극복한 아베 신조 암살 급조총기 같은 것도 등장했다.


[1] 그러나 이 개머리판의 유무가 명중률 면에서는 꽤 큰 차이를 만들었다. 아르케부스는 견착이 되지 않아 뺨에 밀착하는 식이었는데 자세가 불안정할 뿐더러 반동 제어도 어려웠다. 유럽권에서 아르케부스가 일찌감치 도태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2] 숙종 조는 효종 조에 이은 조선 조총 전성기였는데, 반대당인 서인 노론 송시열 여군(!) 창설을 주장한 것도 바로 이 조총의 배우기 쉬운 특성 때문이다. 특히 '어린아이도 항우를 대적할 수 있게 한다'는 발언은 단지 조총만이 아니라 이라는 무기 자체가 전쟁사에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잘 보여주는 발언이기도 하다. 이슬람권에서도 어린아이나 여자도 전사를 죽일 수 있게 만드는 흉악한 무기로 보았다. 같은 이유로 중세 유럽의 기사들도 석궁을 굉장히 싫어했다. 조작이 간편한 석궁의 화살이 오랫동안 말타기와 무술을 연마해야 하는 기사들을 단 한 번에 죽일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사들은 사로잡은 석궁병들의 손가락을 잘라서 석궁을 쏘지 못하게 할 만큼, 석궁을 혐오했다. [3] 출처: A right exelent and pleasaunt dialogue, betwene Mercury and an English souldier contayning his supplication to Mars: with sundry worthy histories, rare inuentions, and politike deuises. wrytten by B. Rich: gen. 1574. Published 1574 by J. Day. [4] 조선의 경우 무과시험에서 명중을 못해도 화살을 과녁에서 넘겼을경우 합격으로 취급해 주었다. 즉 궁사가 화살을 정확히 멀리 날리는건 그만큼 어려워서 일정정도 감안을 해준것이다. [5] 물론 발전된 형태의 머스킷은 조총 보다 더 빠르긴 했지만 기본적인 장전 원리와 절차는 비슷해서 드라마틱한 차이가 나진 않았다. [6] 현대 군인들이 제식훈련을 받는 것도 이러한 전통에서 기인한 것이며, 현대에도 마냥 쓸데없는 전통이라고 볼 수는 없다. 현대 육군 소총수 나 기관총 사수의 사격 통제는 효율적인 탄약 관리와 효력사 측면에서 필수적이며, 포병의 경우에도 포 한발 한발을 빠르게 쏘기 위해 정확한 절차 수행과 협동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7] 머스킷의 경우 기술의 발전으로 무게 경량화, 총신 길이 연장, 대검 장착(+길이 연장)을 통해 이를 임시적으로 보완하면서 기병과 살수가 도태되는 계기가 되었다. [8] 창, 검, 방패 등으로 무장한 병력 [9] 1790년에 영국에서는 각 거리별로 일제사격시 명중률을 산출하는 실험이 이루어졌다. 100여명의 보병들은 100, 200, 300야드의 사거리에서 길이 50 야드, 높이 6피트의 큰 천(보병 밀집대형 정도의 크기다)에 일제사격을 할 시 100야드: 75.0%, 200야드: 37.5%, 300야드: 33.3% 정도의 탄을 명중시켰다. [10] 대부분이 컴파운드 보우 사용자들이며, 고전적인 활만으로 장거리 사격을 보여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장궁으로 150야드(136m) 표적을 맞히는 동영상 동영상 상의 활은 플랫 보우(flat bow)로 추정된다. 다만 길쭉한 활(long bow)이기에 게시자가 'longbow'이라는 이름으로 게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쏜 화살이 합판에 맞고 튕겨나가는 것으로 보아 위력은 40~50파운드 정도로 추측이 되는데, 실제 중세의 군용 활들은 100파운드를 넘었다. 그런 활들은 강한 힘으로 당겨야 했기에 조준이 훨씬 더 힘들었다. [11]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 군 유격병들은 영국군이나 프로이센 군 경보병들이 라이플을 쓰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머스킷을 주로 이용했다.​(장전속도가 머스킷이 더 빠르기도 했지만, 그 당시 프랑스 군수산업의 어려운 사정상 별도로 라이플을 생산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1811년 알부에라 전투에서의 영국군 참전자들은 프랑스 저격수들이 바닥에 누워 더 정확한 사격을 가하기 위해 그들의 머스켓을 균형을 잡고자 샤코를 지지대로 쓰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Dempsey - "Albuera 1811" p 158) [12] 명중률 [13] 출처: 보이지 않는 공포 스나이퍼, 마틴 페글러 저 [14] 출처: 전과 동일 [15] 출처: https://www.thoughtco.com/hundred-years-war-english-longbow-2361241 [16] 물론 시위를 당기는 힘이 덜 들고 조준기가 달린 현대의 컴파운드 보우는 가능하다. https://youtu.be/Et23I9zneqk [17] 이성계 문서를 보면 이성계가 150보(약 180m) 떨어진 투구를 맞혔다는 등의 기록이 태조실록에 남은 것을 보면 완전 불가능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태조실록에 있는 이성계의 초인적 능력을 서술한 내용이 조선건국의 정당성 확립 등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쓰여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과장 및 왜곡의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18] 제목부터 “They shot at the skies”이다. [19] 물론 여기에도 낮은 발사속도나 들쑥 날쑥한 총기와 화약의 품질 및 사격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부싯돌의 마모나 화약접시와 약실 사이의 점화통로가 탄매로 막히는 등의 문제로 불발률이 급속히 높아지는 때문에 가장 좋은 상태에서 장전된 '최초의 1발'의 화력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 전술의 중요한 관심사의 하나일 수밖에 없었던 등등으로, 총기의 기술적 한계 탓도 없지는 않다. [20] 남북전쟁에선 강선화기와 전열보병시대의 전술교리가 만난 결과 사상초유의 막대한 인명피해를 낳게 되었다. [21] 장궁이 쇄자갑을 입은 기사의 허벅지를 관통하고 말을 죽였다느니, 갑옷을 뚫었다느니 등의 구전된 이야기는 과장에 불과하다. 사실 백년전쟁 동안의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에서의 영국군의 승리의 비결은 장궁보다는 바리케이드, 고지대 점령 등 프랑스 기사에 대한 적절한 대비책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22] 최소 장전 시간 15초 [23] 마지막 사격에선 방아쇠가 당겨졌는데도 잠깐동안 격발되지 않고 0.5초쯤 후에야 격발되는 바람에 사수가 화들짝 놀란다. 이를 지발(늦게 격발됨)이라고 하는데 플린트록 방식에서 도드라지는 단점이다. 이런 문제는 오히려 보다 구식인 화승총에서 더 적게 발생했다. [24] 오해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있는데 영국의 레드코트는 특수부대같은 게 아니라 영국 육군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 당시 영국은 육군이 전부 실탄으로 훈련했다는 것. [25] 보통 영국만 실탄사격 훈련을 한 것에 대해 단순히 영국이 돈이 많아서 그랬다고 뭉뚱그리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과 다소 다르다. 당시 초석의 주요 산지는 남아메리카와 인도였다. 남아메리카산은 스페인이 가져다 썼고 인도산은 영국이 가져다 썼는데 당시 해상패권을 쥔 나라가 영국이어서 남아메리카로부터의 초석 유입은 상당히 많이 차단되었다. 그러다보니 스페인의 화약 값이 오르고 스페인으로부터 화약을 수입하던 다른 나라들까지 덩달아서 타격을 받은 것이다. 영국은 인도로부터 넉넉히 초석이 들어오는 한편 스페인으로부터 털어온 것 까지 있어서 화약을 비교적 싼 값에 조달할 수 있었다. 그시절 탄환이야 그냥 동그란 쇳덩이일 뿐이니 구하기 어렵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영국은 해양세력이었기에 육군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다. [26] 유럽에서도 사냥꾼들의 총 숙련도를 높게 쳐서 엽병 부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27] 단 물 속에서 격발이 가능할 뿐이지, 강력한 소총탄마저 몇 미터도 못 가고 말 정도로 수중은 총이 가장 제위력을 못 내는 최악의 환경이다. [28] 20세기 이후론 공중질소고정법이 개발되며 마음만 먹으면 화약을 잔뜩 만들어낼 수 있지만, 이전에는 화약의 주 재료인 초석과 유황을 캐다가 써야 했고 당연히 그건 아무데서나 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29] 당장 15세기 후반에 세계적으로도 유례 없을 만큼 화력덕후적 군사 체계를 갖춰놓은 조선 마저도 화약의 원료인 유황과 초석은 어쩔 수가 없어서 온갖 눈물의 똥꼬쇼를 펼쳐 조달해야 했다. [30] 군필자, 특히 행정병이였던 사람들은 잘 알텐데, 부대 내 사격 훈련을 할 때 얼마나 많은 양의 물자들이 보급되는지 알 것이다. 지금이야 공장을 돌려 대량으로 찍어내는 총알과 거기 들어가는 화약은 많다 못해 썩어넘치고, 화약 국산화로 국내의 화약값이 싸기도 하지만, 그딴 게 있을 리가 없는 그 당시 군대는 훈련에 고가의, 진귀한 화약을 대량으로 쓰는 일은 엄두도 못 냈다. [31] 그리고 이런 짓은 북한군에서도 하고 있다. [32] 스타워즈의 터스켄 약탈자들이 실탄 총기를 쏴대는 게 이 제자일을 사용하는 유목민들을 모티브로 삼은 컨셉이다. [33] 2차 아편전쟁때부터 뇌관식을 썼다. [34] 상술되었듯 타 문명권에도 전파되어 복제품들이 나왔으나 수십만 대군에게 일정품질의 제품을 일괄지급할 공업기술력, 그리고 그를 운용하는 전투 교리는 유럽의 전유물이었다. [35] 내륙으로 식민지 확장이 힘들었던것 무기보단 풍토병의 영향이 더컸다. 유럽식민지가 내륙까지 확장된것은 교통과 의학의 발달로 보급과 풍토병에 대처하기 쉬워졌기 때문이다. [36] 그런데 데이브 그로스먼의 저서 '살인의 심리학'에서는 실제로는 일부러 오조준을 하는 병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75야드상의 1개 보병대대의 명중률은 약 60퍼센트에 달하는 실험을 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는 살해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다른 방식으로 표출한것이다. 자세한 것은 PTSD 항목도 참조. 당장 얼굴이 보일 정도로 지근거리에 서 있는 사람에게 총을 쏘는 행위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18세기 프로이센 육군에서 명중률 실험이 있었는데 머스킷 총으로 길이 30m, 높이 2m의 표적을 만들고 66m(75yd) 137m(150yd)에서 사격했을 때 전자는 약60%, 후자는 40% 정도가 표적에 탄환이 명중했다. '총백과사전' - 크리스 맥나브, 휴먼앤북스 p216. [37] 전열보병 항목 참조. [38] 밀집된 보병에게도 효과적이였지만 밀집된 화망을 통해 제압력을 발휘하지 않고 개인적 사격으로는 기병의 돌격을 막아낼 수 없다. [39] 나폴레옹 전쟁 당시 모든 국가를 통틀어 최정예 보병부대였다. [40] 이와 유사한 사례로 사르후 전투에서 조선군 총포병 역시 청군 기병대의 돌격전술로 인해 박살난 일이 있다. [41] 돌격은 총기의 발전에도 간간이 이어져오다 1차 세계대전 때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정식 전술에서는 지양된다. 물론 2차 세계대전까지 기관총 탄막 앞으로 멀쩡한 보병들을 밀어 넣는 짓을 한 국가 또한 존재했다. [42] 이 둘을 적용한 머스킷을 미니에 라이플로 분류한다. 사실 플린트락 때부터 무력격차는 상당히 벌어져 있었다. 멀리 갈 것 없이 영국이 불과 1만2천명으로 4억 인구의 청제국을 박살낸 1차 아편전쟁에서 영국군은 여전히 나폴레옹 시대의 머스킷을 썼다. 다만 기술력 격차뿐 아니라 전술의 차이와 실전으로 단련된 영국/평화로 썩어가던 청군의 차이 등도 감안해야 한다. [43] 오히려 화승식 총이 불발률이 더 적다. 불 붙은 심지로 직접 점화하니까. 대신 50센티 정도 되는 불 붙인 심지를 손가락에 끼우고 다니다 발포시마다 끼워야 하지만. [44] 당시 보병 부사관들의 주 임무 중 하나가, 전사하거나 다친 병사들의 머스킷을 회수해 고장을 일으킨 머스킷을 휴대한 병사의 것과 바꿔 주는 것이었다. [45] 또는 미니에 라이플(Minié rifle). [46] 약실이 잘 폐쇄되어 사수가 안전하다면야 당연히 총기의 발전은 연발가능한 리볼버권총이 대형화되어 소총형태로 견착할 수 있는 형태로 나아가기 쉬었을 것이다 하지만 손을 쭉 내밀어 쏘는 권총과 달리 견착자세의 소총은 약실이 얼굴 옆에 딱 붙게되는지라 발사후 눈에 심한 부상을 입을수도 있었고, 왼팔이 다치지 않기위해 양손을 약실 뒤로 잡는 불편한 자세가 된다. 연발이 된다는 장점때문에 그래도 몇몇 시도가 나온뒤에는 결국 묻혀버렸다. [47] 이는 레버액션 림파이어 탄약 둘 모두의 문제였다. 해당 항목 참조. [48] 프랑스가 금속탄피를 쓰는 타바티에르 소총을 개발하고도(기존 전장총을 후장식으로 개조했다) 타바티에르는 2선급으로 돌리고 종이탄피를 쓰는 샤스포 소총을 주력으로 사용한 것도 바로 이 문제 때문이었다. 물론 금속탄피가 급속히 대세로 자리잡음에 따라 곧 본격적인 금속탄피를 쓰는 그라 소총으로 이들을 대체했다. [49] 단, 일부 주에서는 돈만 내면 확인 절차 없이 권총 하나는 살 수 있다. [50] 흑색화약은 꽤 위험물이다. 통으로 쌓아놨다 잘못 불붙으면 밀폐공간에서는 고폭약에 준하게 폭발한다. [51] 독립전쟁 시대 패션 필수요소 [52] 동아시아권 군대에는 뇌관식 머스킷이 개발되어 수출되기 이전까지 공식적으로 머스킷이 채용된 기록은 서방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동남아시아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보통 화승총를 썼고 수석식 머스킷은 까다로워서 쓰는 군대가 거의 없었다. 상기했듯 둘은 다른 총이기 때문에 삼수병, 아시가루, 녹영병은 머스킷이 아닌 아르케부스를 썼다. [53] 원문 Neo-Armalite. 사실 작품 배경이 근미래이고, 작중 냉전시기 저리가라할 정도로 군비 경쟁이 한창인 상황이라 현재의 아말라이트보다 더 진보된 총기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소설 내 묘사를 볼 때 무탄피탄은 적용되지 않은 듯. [54] 단발식 머스킷 총을 보조 무기로 가지고 있다. [55] 반역의 이야기에서는 현대 총기로 무장한 아케미 호무라와 싸운다. [56] 슬레지해머 게임즈가 제작한 일부 작품 한정 [57] 참고로 나팔총은 현대 산탄총의 조상쯤 된다. [58] 은 색상의 장발식의 머스킷 총이 주 무기로 나온다. [59] 누군가와 동일한 은 색상의 장발식 머스킷 총이 주 무기로 나온다 심장의 주인이 누군가이면 의미심장한 복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