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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기원
파란색 부분은 켄툼 제어(Centum) 사용지역, 빨간색 부분은 사템 제어(Satem) 사용지역.
토하라인의 기원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인도유럽어족 계열 민족들 중에서는 인도유럽조어를 쓰던 공통 조상에서 직접 갈라져 나온 부류로 추정되며, 이탈로켈트( Itali- Celtic)와 가깝다고 추측되고 있었다. 이런 추측은 인도유럽어족이 아르메니아에서 기원했다는 아르메니아 가설 및 러시아의 쿠르간 지역에서 기원했다는 쿠르간 가설과도 연결되어 주류 학계의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2021년 네이처의 발표에 의하면 토하라인과 관련이 있는 타림 분지 미라들의 유전자 분석 결과 마지막 빙하기 말엽 널리 퍼졌던 플라이스토세인[2][3]의 직계 후손이라는 것이 확인됐으며, 다른 지역 주민들과는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한다. 즉, 유전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민족이라는 것이다. 고대 유라시아인 형질을 가진 대표적인 고인골인 말타뷰렛 소년(일명 MA-1)[4]과 이들의 관계가 어느 정도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예니세이 강 상류의 아폰토바 고라[5] 유적의 3호 고인골 샘플과 가장 가깝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따라서 그동안 토하라인의 유라시아 이주에 대한 몇가지 가설들, 즉, 할슈타트 문화에서 기원한 켈트족 후손 가설, 얌나야 문화에서 기원한 원시인구족의 후손이라는 쿠르간 가설, 고대 페르시아인, 스키타이인 또는 소그드인과 연관이 있다는 트란스옥시아나 가설은 모두 잘못된 학설임이 입증되었다.
상기된 가설들이 과거에 힘을 얻었던 것은 미라와 함께 발견된 부장품이 외국 문화와 관련성이 있을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전자 분석 결과, 문화 교류의 증표이지 이주의 흔적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 셈.
그러나 이는 타림 분지에서 발견된 유해들[6] 한정이며 신장 위구르 자치구 북부의 중가리아에서 발견된 미라들[7]은 남시베리아 내지 알타이 산맥과 서몽골 일대에 존재했던 아파니시에보 문화[8]권 인구와 게놈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링크. 즉, 이들 신장 지역의 선주민들이 아파나시에보 문화[9]에 동화되면서 훗날의 토하라인으로 이어진 것이다[10].
2.2. 초기 역사
토하라인은 중앙아시아의 인도유럽어족 계통 유목민이 기원전 2000년 무렵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간쑤성 서부 일대에 정착하고 이곳의 선주민을 동화시키면서 형성되었다. 당시 동쪽에 있는 황하 일대에서는 상나라가 건국되었고, 토하라인들은 강족을 통해 상나라와 상당한 수준으로 교류했다.그 증거로 당시 갑골 문자에 기록된 글자인 蜜(꿀 밀),[11] 城(잣[성] 성), 里(마을 리) 따위 몇몇 한자와 당시의 마차 유물, 누란의 미녀 미라의 존재[12] 등이 그 예다. 토하라인들은 상나라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여러 도시국가와 부족들과 교류했다고 추정한다. 그 근거로 대한민국 정선군에 있는 청동기 시대의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골이 현대 영국인과 매우 가깝다는 결과가 나왔다.[13] 영국인은 아일랜드인과 형질인류학적으로 가깝고 아일랜드인이 속한 켈트족은 토하라인과 공통조상에서 갈려졌기 때문에 머나먼 한반도에 나타난 영국계 유골의 정체는 토하라인이라고 추정된다. 동북아시아에 처음으로 말을 들여온 민족이라서 그만큼 활동 범위가 넓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 땅에도 토하라인이 존재했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다. 정선군 아우라지에서 발견된 고인골에서 유전자 분석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이를 현대인과 대조해 본 정밀 감식 결과가 없으므로 성급한 결론에 불과하다. 실제로 고인골의 유전자 추출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며 DNA가 오염으로 인해 시간에 따른 파괴로 인해 일부만 해독되거나 해독 불가판정이 나오거나 고고학자나 발굴에 참여한 발굴자와 검사자 등 관련 연구진들의 DNA가 검출되어 고대인의 것으로 오해를 사는 일이 적지 않게 벌어지기 때문에 매우 신중하게 연구가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실험실 오염이 적지 않게 벌어져서 재검사를 하는 일이 흔하다. 실제로 부산 가덕도 장항 고분군에서 발굴된 7천 년 전 고인골에서 유럽인에게 많이 나오는 미토콘드리아 하플로그룹인 H가 검출되었다고 해서 한국인 고인골에 유럽인 유전자가 있었다고 신문기사까지 뜨는 일도 있었는데, 이는 막스플랑크 재단 소속 실험실 연구진 일원의 유전자로 밝혀졌다. 결국 실험실 오염으로 결론을 내리고 재검사를 거쳐야 했다. 재검사 결과는 현대 한국인에게도 존재하는 D4, D4b1, M*으로 DNA가 손상될 가능성이 큰 한국의 토양 환경상 이만큼 밝혀진 것도 기적 수준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온전하게 DNA 하플로그룹이 확인된 고대인의 유해는 대다수가 파평 윤씨 소년 미라 같은 조선시대 회격묘 유해들이다. 현재에도 이에 대해 정정보도가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고 블로그 등 개인의 독자연구 형식으로 무분별하게 인용되어 잘못된 정보가 퍼지고 있기에 이 점을 유의해야 한다.
중국인들이 역사상 최초로 조우한 기마 민족이지만, 본격적으로 최초로 조우한 기마 유목민은 아니다. 이 시기의 토하라인은 말과 양을 사육하고 고대 전차를 도입시킨 민족이었을 뿐, 말을 타며 이동하는 유목 생활을 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토하라인보다 먼저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살았던 선주민들은 오늘날의 시베리아 타이가 지대의 고대 북유라시아인 계통의 수렵채집민으로[14], 신장 일대로 넘어와서 정주농경민이 된 이들이었다.
토하라인들은 이들 선주민들로부터 농업 기술을 얻고 정주민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이 처음 한족들과 조우했을때는 이미 유목 생활을 중단한 지 오래였던 것이다. 물론 말을 가축으로 주로 기르거나, 마차를 이동용이나 전투용으로 이용하는 등, 유목민으로서의 흔적은 남아서, 초기 한족들은 이들에게서 기마 문화를 받아들였다. 주나라는 이렇게 토하라인들과 접촉해서 기마 문화를 받아들인 한족계 부족들 중의 하나로, 이들의 시조인 고공단보 시기에 적인(狄人)[15]이 침공하여 영토를 빼앗기고 유랑민이 되면서 유목민으로 변모했다고 추정한다[16].
주나라를 제외하면 중국사에 최초로 등장한 외래 유목민은 호(胡)라고 불리는 이들로[17] 이들의 정체에 대해 논란이 많지만, 대체로 이후에 등장하는 동호[18]의 전신격의 민족이라고 추정된다. 중국 측의 기록에서 토하라인은 차사국, 구자국, 누란[19] 등의 국가를 이루었던 것으로 언급된다. 사료가 부족하여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전한 대의 기록에 나오는 서역의 유목민들인 오손과 월지가 이들과 동계라는 설도 있다. 다만, 주류 학계는 월지는 몰라도 오손은 토하라계가 아닌 인도이란어파 계열이라고 본다.[20]
당시 한무제는 흉노 제국을 정복하기 위해 부유한 서역과의 무역로 건설을 목표로 군사령관인 장건의 원정대를 출병시켜 토하라계 제국(諸國)과 기타 국가들을 정복 및 탐험하게 했고, 그 이후인 후한 시대에는 반초 장군을 통해 한나라가 정복한 이들 50개의 국가에 식민지배를 시도하였다.[21] 비록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중앙아시아 문명과 동북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공식적인 외교 및 무역 관계가 성립되며 실크로드를 타고 유럽 및 중앙아시아와 문물 교류 및 외교, 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때 한무제의 주도 하에 건설된 실크로드를 타고 동북아시아에 불교가 전래되어 당시 제국의 수도였던 낙양 서쪽 외곽에 백마사라는 중국 최초의 불교 사원이 건설되었다.[22]
2.3. 박트리아 이주
자세한 내용은 쿠샨 왕조 문서 참고하십시오.한편, 토하라인의 일파인 월지는 흉노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본거지인 하서 지역에서 서쪽으로 이주하였다. 하서 지역에서 서쪽으로 이주한 월지인들을 "대월지"라고 부르며, 이들은 그곳에 거주하던 사카족을 몰아내었으며, 트란스옥시아나로 진출하여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자신들의 영토로 삼았다. 그리고 기원전 1세기경에는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 북서부에 쿠샨 왕조를 세웠다. 한편 감숙, 하서 지역에 남아있던 월지인들은 "소월지"라고 불렀다.
2.4. 불교 전래 이후
기원전 6세기에 인도에서 불교가 발생하는데, 기원전 1세기 토하라인들의 쿠샨 왕조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유행하면서 신장 지역에 남은 토하라인들은 점차 불교를 받아들였다. 이는 토하라인들의 역사는 물론, 동북아시아 전체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토하라인들에게 전파된 불교가 서기 1세기부터 중국에 전파되었는데, 당시 중국 후한 왕조의 수도인 낙양에 동북아시아 최초의 절인 백마사가 창건되기도 했다. 동북아시아 불교 교리 확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쿠마라지바[23]는 토하라계 도시 국가인 쿠처의 유력자 출신 어머니와 카슈미르 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서기 2세기에는 본격적으로 인도인 승려와 파르티아인, 토하라인 승려들이 대거 중국으로 건너가서 불교 전파와 불경 번역에 힘썼다. 이미 위진남북조 시기에 이르면 난세를 맞아 한족 지식인의 염세주의와 유목민 정복 왕조의 진흥 정책[24]으로 불교가 확고하게 주류 종교로 자리잡았다.[25] 이로써 토하라인들과 소그드인, 중국인들간에는 불교라는 공통점이 생기면서 더욱 활발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유목 왕조들이 본격적으로 중앙아시아 통제에 나서면서 토하라계 국가들의 전성기가 하나둘씩 끝나 버렸다.
오호십육국시대에 이르러서 후량이 타림 분지 일대를 침략하면서 상술한 쿠마라지바 역시 후량의 건국자인 여광에게 모국인 쿠차가 멸망하면서 온갖 굴욕을 당해야 했다. 여광은 이미 출가해서 승려가 된 쿠마라지바에게 모욕을 주고자 인질로 붙잡은 쿠마라지바의 친척인 쿠차 공주와의 결혼을 강요하는 등 엄청나게 괴롭혔다. 사족으로 이렇게나 악랄한 성격이었던 여광은 그 후손들이 자신의 죗값을 대신 치르기라도 했는지, 본인이 세운 후량이 자기가 죽은 후에 곧장 국가 막장 테크를 타면서 후량의 황족들은 쿠마라지바 이상으로 불우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토하라인들은 위기의 상황에서도 교역에 힘쓰고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데 성공했다. 전한에서 기록을 남길 당시 본래 26~36개에 불과하던 신장 지역의 도시 국가들이 인도로부터 관개 농업 기술의 도입과 동서 무역 증진으로 인구 부양책이 증가한 덕분에 2배 가까이 되는 55개국으로 증가하였다.
신장 지역 도시 국가들이 중화권에 편입된 데는 같은 토하라계 국가이던 사차국과 북쪽의 흉노 때문인 것도 있었다. 이 두 강대국들이 요구하는 조공품의 양이 엄청나서 짓눌릴 지경이던 서역의 도시 국가들이 원교근공 논리에 따라 한나라에게로 붙은 것이 서역에서의 중국의 영향력을 늘리는 계기가 되었다.[26] 이렇게 중국의 정세에 따라 토하라계 국가들과 중국간 관계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면서 서역의 도시 국가들은 크게 번영하였다.
하지만, 7세기에 당태종의 서역 정복으로 적지 않은 수의 토하라인들이 학살당해 도시 국가들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2.5. 마니교의 전파와 멸망
당시에 토번[27]이 중앙아시아를 침공하면서 당나라의 지배를 받던 토하라인들은 그대로 토번의 지배를 받았다. 그런데 탈라스 전투 이후로 토번 역시 우마이야 왕조의 뒤를 이어 성립된 압바스 왕조의 침공을 받아 큰 타격을 입으면서 토하라인들의 영역은 마니교를 믿던 위구르족이 세운 위구르 제국이 정복하였다.
이후 위구르 제국 역시 키르기스족[28]에게 멸망하였고, 키르기즈인들에게서 도망친 위구르족은 신장 지역을 정복한 뒤에 그대로 정착하였다.( 고창회골 참조)[29] 이 당시 위구르의 국교는 마니교였기에 신장 지역에 마니교가 뿌리내리고 불교에서 마니교로 개종하는 토하라인들이 늘어났다.
이로 인해 토하라인들은 점차 튀르크화되었고 위구르어가 널리 퍼지고 중요해지면서 토하라인의 도시국가들은 토하리어가 어닌 위구르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카라한 왕조가 서 타림 분지를 영토로 삼으면서 타림분지는 투르크화가 완료되었다. 호탄을 위시한 타림 분지 서부의 샤카족은 카를루크인에게 급속히 동화되었다. 9세기부터는 토하라어로 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데, 토하라어 화자가 전부 위구르족에게 동화되어 소멸한 듯하다.
즉, 현재 위구르인은 토하라인의 후손으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외 중국 서북부 간쑤성 진창시(金昌市) 리젠촌(骊靬村)의 주민들의 경우 자신들을 로마군의 후예로 여기고 있지만 유전자 검사를 통해 오히려 라틴계 유전자는 없고, 토하라인의 유전자가 발견됨으로써 현재의 위구르인들처럼 토하라인의 후손으로 밝혀졌다.
3. 언어
자세한 내용은 토하라어 문서 참고하십시오.4. 문화
비록 위에서 언급했듯 동북아시아 역사상 최초의 기마 유목민족은 아니었으나 동북아시아사 최초의 기마민족이었다. 토하라인은 중국에 말과 마차, 각종 청동기 문물을 비롯하여 양과 밀을 처음 소개한 이들이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이들과 접촉한 이후부터 비로소 전쟁에 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30][31] 청동기와 고대 전차를 도입한 중국인들은 오스트로아시아어족, 크라다이어족, 몽몐어족에 속하는 이웃한 여러 부족들을 정복, 흡수하며 동화시켰는데 이는 오늘날의 한족의 기원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렇게 중국티베트어족에게 밀려난 크라다이어족 민족과 오스트로아시아어족 민족들은 오늘날 태국인과 베트남인의 조상이 되었다.그래서 토하라인들은 이미 상나라 시대부터 중국을 비롯 여러 중국티베트어족 민족들과 꾸준히 교류했다. 북쪽으로는 흉노, 서쪽으로는 오손, 월지 등과 교류하면서 막대한 경제력을 확보하는 한편, 동서양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면서 동서양 간의 문물 교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동서교류로 실크로드가 개척되기에 이르렀다.[32]
토하라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인 토하라어를 표기하기 위한 누란에 정착한 인도인 이주민들로부터 카로슈티 문자를 받아들여 사용하기도 했다. 이 문자는 기원전 4세기에 처음 만들어져서 근 800년을 사용하다가 서기 3세기에 사용이 중단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인도에서 들어온 브라흐미 문자도 사용되었지만, 역시 3세기 무렵에 사용이 중단되었다. 이후에는 소그드 문자에 기반한 마니교 문자로 대체되었다.
이들이 믿던 종교는 불교와 마니교이다. 두 외래종교가 전래되기 이전 고대 토하라인의 신화는 현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 흔적이 완전히 없지는 않다. 중국 신화에 나오는 몇몇 여신들은 원시 인도유럽인들이 섬기던 태양신 및 새벽의 여신인 h₂éwsōs[33]와 유사한데, 실크로드를 통해 영향받은 듯하다. 이 외에도 토하라어 B에는 원시 인도유럽인들이 섬기던 태양의 여신 swāñco에서 파생된 명사가 있었고 토하라어 A에는 고대 튀르크 신화에 나오는 태양신 Gun Ana[34][35]와 언어적으로 연결된 외래어 koṃ[36]이란 단어가 있었다.
기원전 6세기에 불교가 인도에서 발흥한 뒤, 중앙아시아의 각 지역으로 전래되면서 토하라인들은 불교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8세기에 위구르족의 침공 이후로는 마니교 역시 받아들인 바 있다. 현재 적지 않은 수의 토하라인들의 프레스코화가 남아 있기는 하나 신장 지역에 이슬람교가 전파되면서 무슬림들이 이 프레스코화에 반달리즘을 벌여서 상당수가 제대로 판독하기가 어렵다.
5. 같이보기
[1]
흉노 연맹의 스키타이계
유목민 구성원 제외. 백인종 중에서 가장 동쪽에 살았던 민족은
오호십육국시대에 처음
중국사에 나타나서
위진남북조 시기의 왕조들 중 하나인
후조를 건설했던
갈족(羯)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갈족에 대해서는
예니세이어족 계통이라는 설과
코카소이드계는 맞는데
중국 진출 당시에 이미
튀르크계에 동화된 이들이라는 설이 있다. 현재 유라시아 대륙에서 제일 동쪽에 살고 있는 인도유럽계 민족은
연해주, 하바롭스크, 사할린, 캄차카, 추코트카 등과 같은 극동 러시아 지역에 정착한
러시아인이다.
[2]
이들은 현재 시베리아의 침엽수림 지역인
타이가 지대에서 살던
고대 북유라시아인(ANE)으로 매머드 초원이라 불린 이곳에서 대형동물을 사냥했던 사람들이다. 당시 타이가 지역은 오늘날엔 건조하고 추운 지역이지만 그 당시에는
세렝게티같은 초원지대로
매머드나
털코뿔소 등이 돌아다니던 곳이었다.
[3]
시베리아 원주민 및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약 40%에게서 해당 유전자가 발견된다고 한다. 유럽인에게도 이 유전자가 있는데, 지중해권 등의 남유럽인에게는 매우 낮게 나오지만 스칸디나비아 등지의 북유럽인에게는 15%~25%까지 나온다고 한다.
[4]
바이칼 호 부근의 작은 마을 말타와 뷰렛 마을 근처의 후기 구석기 유적에서 발굴된 24000년 전 소년의 유골로
아메리카 원주민 연구에 큰 도움을 준 샘플이다.
[5]
지금으로부터 15000년전 사람의 유골 두 구가 발굴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3호 고인골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발벽안 상염색체 형질을 보유한 고인골 샘플이라고 한다.
[6]
소하공주가 대표적이다.
[7]
누란의 미녀가 그 예다.
[8]
안드로노보 문화와 함께 얌나야 문화의 후속 문화라 할 수 있다.
[9]
얌나야 문화를 주도한
원시 인도유럽인의 후손들에 의해 발생한 문화
[10]
원시 토하라인 중에서
중앙아시아로 동진하지않고
중동으로 내려온 이들은
구티 왕조를 세운 구티인이 되었다고 추정되는데, 현재는 거의 부정되고 있다.
[11]
당시의
상고한어로는 mjit이라고 발음했는데, 이는 고대 토하라어 ḿətə의 차용어다. 그래서
벌꿀술을 뜻하는 영단어 미드(mead)와 꿀 밀은 어원이 같다.
[12]
누란의 미녀 미라의
하플로그룹을
중국 연구진들이 분석한 결과,
코카소이드계임이 밝혀졌다.
소하공주는
한국,
독일, 중국 합동 연구진에 의해
시베리아 원주민과 친연관계인
고대 북유라시아인계인
타림 분지 선주민으로 밝혀졌다.
[13]
단 이는 후술할 실험실 오염의 가능성이 높다.
[14]
오늘날의
동튀르키스탄 영토에서 발견된 유명한
미라들 중 하나인
소하공주가 신장 선주민에 속했던 인물이다.
[15]
중국 북부에 살았던 민족인데, 현대
몽골인이나
튀르크계 민족 내지는
인도이란계 민족들과 동계로 추정된다.
[16]
물론,
주나라의 신민들은 본래 정주농경민인
한족의 일파인 관계로, 유목민이 된 후에도 간간이 농경 생활은 유지했다. 이들이 섬긴 신 중에 농업의 신인 직(稙)이 있었다는 것이 그 예다.
[17]
진시황이 이들이
진나라를 멸망케 할 족속이라고 여겨
만리장성을 쌓게 했으나, 정작 진나라를 멸망시킨 호(胡)의 정체는 자기 아들
호해(胡亥)였다는 얘기는 매우 유명하다.
[18]
이들의 후신이 바로
선비족과
오환족이다.
[19]
이탈리아의 작곡가인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로 유명한 나라다.
[20]
물론 토하라계나
인도이란어파 계열이나 둘 다
인도유럽어족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것 외에는 촌수가 먼 편이다.
[21]
참고로
반초의 군인이던
감영이라는 군인이
중국인으로서는 물론
동아시아인으로서도 최초로
유럽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세계 최강국이던
후한과
고대 로마 간의 무역이 성사됨을 방해하고자
파르티아기 훼방을 놓아 로마 영토까지 진출하는 것은 좌절됐으나, 감영은 당시 로마 제국에서 일반화된 양자세습제도와 공동황제제도를 정확하게 기술하고
유럽과
중앙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22]
현재의
뤄양시와는 동떨어진 위치에 있는데, 이는 한나라 시대의 제국 수도였던 낙양과 현재의 뤄양이 같은 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23]
한국에는 구마라습이라고 알려졌다. 이 사람이 번역한
불경들이 오늘날
한자문화권에 속한 나라들이 사용하는 불경의 표준이 되었다.
[24]
유교를 비롯한 중국 전통 사상은 화이관, 중화주의가 강했기 때문에 유목민 정복 세력들은 유교 대신 이민족과 한족 모두가 평등한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불교를 통해 민족 화합을 추구했던 것이다.
[25]
다만 초창기에 삽질이 좀 있었다.
삼국지에도 등장하는
후한 말의
불교 신자였던
착융이 서주자사였던
도겸의 비호 아래 불교를 앞세워서 온갖 비리를 저질렀다.
조조가 자기 아버지
조숭이 도겸의 부하에게 살해당한 것에 빡쳐서
서주대학살을 일으키는 등으로 도겸의 세력을 쳐부숴 버리자 그대로 양주자사인
유요에게 달아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막
원술의 산하에서 독립한
손책이 유요의 세력을 공격하였고, 이를 두려워한 그는 유요를 배신하려 했다. 하지만, 이를 눈치채고
유요의 군대가 금방
착융의 본거지로 쳐들어오자, 이에 호응하여 봉기한 백성들의 손에 그대로 끔살당하고 말았다(...). 하도 착융이 부정축재 등으로
불교의 이미지를 망쳐 놓은지라
손책의 동생인
손권이 훗날에
오나라 황제로 등극하고 불교 진흥 정책을 실시하기까지
중국에서의 불교 전파는 한동안 지지부진했다. 중국에서 불교가 광범위하게 전파된 것은 한참 뒤인
양무제 통치 시기의 이야기.
[26]
물론
한나라도 이들로부터
조공을 받았지만, 한나라를 포함한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말로는 조공이라고 하고서 실제로는 무역을 했다. 그래서 중국이 형식적으로 왕초 노릇하면서 자국을 명목상의 신하국으로 삼았다고 해서 딱히 나쁠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외교정책은 중국의 여러 왕조들의 기본 정책이자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의 표준이 되어서
한국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고구려나 한동안
몽골 초원을 제패한
돌궐은 물론, 심지어
아편전쟁 이전의
대영제국 조차도 무역권을 따내려고 일부러
중국에 칭신했다.
[27]
오늘날의
티베트.
[28]
당시 키르기스인들은 오늘날의
하카스인과 흡사했다.
[29]
신장 지역이 아닌
간쑤성 일대에 정착한 위구르인들은
유고족이 되었다.
[30]
다만, 이 시기의
말은 중무장한 사람이 올라타면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할 만큼 근력이 약했다. 그래서 당시에 전쟁에 말을 동원한 문명은 예외없이
전차를 이용했다. 당장
트로이 전쟁을 묘사한
일리아스에서도
헥토르나,
아킬레우스같은 수많은 영웅들이 허구헌 날 전차 타고 싸우러 나가는 것으로 나오는 걸 보면 쉽다. 하지만 기원전 9세기부터
말이 직접 무장 군인의 몸무게를 버틸 수 있도록 품종 개량이 이루어지면서 전차는 그대로 도태되고 말았다. 물론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은 기원전 3세기에나 처음 유목민과 조우했을 만큼 말이란 동물을 잘 몰랐고 전차가 필요없었을 정도로 품종개량한 말도 도입하지 못했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직전에나 전차가 조금씩 도태되는 추세였다.
사기에도 기원전 7세기 사람인
공자가
전차를 잘 몰았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다.
[31]
이러한 역사적 사실의 증거가 바로 乘(탈 승)이다. 이 글자는
상고한어 때의
갑골 문자들 중에도 있었던 글자인데,
중국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자들은 이 글자가
토하라어로 탈것을 뜻하는 'klenhe'나 '타다, 여행하다'라는 뜻인 'hlänk'를 차용한 어휘라고 본다. 그 이외에도 軌(수레바퀴 궤), 壁(벽 벽), 城(성 성), 里(마을 리) 등의 탈것의 부품이나 건축과 관련된 용어에 대한 한자들 모두 갑골 문자에서도 확인되므로 모두 토하라어에서 차용한 어휘라고 추정한다.
[32]
다만, 토하라인 자신들은 여러 도시 국가로 나뉜 채로 단 한 번도 단일 토하라 국가를 세운 적이 없었으므로 예로부터
중국,
흉노,
위구르 등에 계속 시달리다가 끝내 완전히 소멸해 버리고 말았다. 이는 토하라인들이 정착한
신장 지역이 너무나도 척박한 곳이었던 탓이 컸다. 당장 이곳에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곳'이라는 뜻의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으니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33]
그리스 로마 신화의 새벽의 여신인
에오스의 기원이 되는 신격이라고 추정한다.
[34]
튀르키예어: Gün Ana,
키르기스어: Күн Эне,
카자흐어: Күн Ана,
헝가리어: Nap Anya,
사하어: Күн Ий̃э,
카라차이-발카르어: Кюн Ана,
오스만어: گون آن
[35]
카자흐-
키르기스 신화에서는 여신으로 나오며, 생명과 다산, 따뜻함과 건강의 여신으로 가장 강력한 신들 중 하나이다. 불행한 사람들, 특히
고아들의
후견인이라고 한다.
튀르키예어에서 태양, 날을 의미하는 Gün하고 관계가 있다.
[36]
태양 혹은 날이란 뜻으로 토하라어 B로는 kauṃ.
[37]
원시
토하라어로부터 전차와 그 부속 등에 관한 단어들을 받아들였다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