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형법 제82조(약탈) ① 전투지역 또는 점령지역에서 군의 위력 또는 전투의 공포를 이용하여 주민의 재물을 약취(掠取)한 사람은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② 전투지역에서 전사자 또는 전상병자의 의류나 그 밖의 재물을 약취한 사람은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제83조(약탈로 인한 치사상) ① 제82조의 죄를 범하여 사람을 살해하거나 사망에 이르게 한 사람은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 ② 제82조의 죄를 범하여 사람을 상해하거나 상해에 이르게 한 사람은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
1. 개요
약탈( 掠 奪)은 폭력을 써서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는 행위를 말한다. 주로 전쟁이나 자연재해, 폭동 등의 상황에서 발생한다. 영어로는 looting, sacking, ransacking, plundering, despoiling, despoliation, pillaging 등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자연재해, 폭동 등의 상황에서 일어나는 약탈은 보통 절도로 표현한다.
적군이 쓰던 군용품(총기, 군기(깃발), 훈장) 등을 그대로 쓰거나 가져가려는 것은 노획으로 별칭하며, 군용품이 아닌 소지품을 챙겨 가는건 전리품으로 별칭한다. 옛날이나 현대이나 분쟁 지역에서 많이 한다. 참고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약탈과 구분된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약탈은 군대만 한 것은 아니다. 수습되지 않은 전사자들의 물품은 민간인들이 약탈해갔다. 군인이 살아 있으면 죽이는 건 기본이다(...).
국제형사재판소에서는 재산 및 권리에 대한 전쟁범죄로 규정한다.
2. 역사
2.1. 고대
고대 전쟁에서 공격군의 병사들에게 약탈 허가는 포상과 같았다. 패자에게서 식량과 금품, 여자 등을 빼앗는 것은 정복자가 자신의 군대의 사기를 올리고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강화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허가하는 행동이었다. 아니면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강하게 저항했거나 배신했던 상대국가를 약탈하여 본보기를 보여주고 다른 국가들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하지만 그런 군사적이거나 정치적 이유를 제쳐놓더라도 약탈이 성행한 이유는 생각보다 다른 곳에서 찾아봐야 한다. 어느 시대건 가장 흔한 형태인 징집병들은 자신의 장비와 보급품은 모든걸 자신의 사비로 충당해서 구해야 했으며, 상비군에게는 전장 상황에 따라 월급이 아예 지급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설령 군인들에게 봉급을 제대로 지급하더라도 고대부터 전쟁시 사용되는 보급과 장비들을 병사들이 사비로 재보충하거나 공동구매를 하면서 비용을 지불하다보니 공제 되는게 많아서 최종적으로 군인 급여 실수령액이 결과적으로 0원인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 고대에 가장 체계적으로 봉급을 받았던 로마군도 실질적으로 병사들이 받는 봉급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구나 로마군 병사들은 모든 무기와 장비를 일일이 자기 돈을 주고 사서 써야 했기 때문에 더욱 돈에 쪼들렸다. 그래서 전쟁이 없는 평상시에 로마군 병사들은 고향의 가족들한테 돈을 보내 달라는 편지를 자주 보냈고, 동료들한테도 돈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자주 하였다.[1]
국가는 점령지 영향력과 적대국, 중립국들의 압박과 전쟁 비용 충당을 위해, 병사들은 급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생각이 일치하면서 고대 전쟁에서부터 약탈은 일상에 가까웠다.
고대 로마군의 예를 봐도 도시를 점령할 경우 상대가 알아서 항복하지 않는다면[2] 점령 후 약탈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야전에서도 로마군은 아예 체계적인 약탈물 수집과 분배 시스템까지 운영을 했고, 군단병 개개인에게도 약탈은 중요한 부수입이었다.[3] 서양뿐이 아니라 한국 삼국시대의 전쟁 기록만 봐도 약탈과 포로 획득 기사가 수도 없이 나온다. 서로마 제국의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장군은 병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로마를 지키기 위해 노예까지 해방시켜가며 병사를 모았는데 이 해방노예들에게 스틸리코가 제의한 조건은 군대에 지원하면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고 전투에서 공을 세우면 크게 보상하겠다고 했다. 그 말을 지켜 라다가스트와 싸우는 데 공을 세운 해방노예 중 자신의 노예를 산 자도 나왔는데, 당시는 라다가스트의 부족을 포로로 많이 잡아 노예 시세가 폭락한 상황이었다.
특히, 전략적으로 따져봤을 때 군대에게 희생을 무시하고 '닥치고 돌격'을 명령해야 한다는 판단이 섰을 경우 약탈은 사기를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무리 전근대인들이 현대인들에 비해 잦은 전란에 노출되어 살아왔다고는 해도 단 한 방에 자신을 죽여 버릴 수도 있는 투창, 화살에 총포탄까지 날아오는 적진을 향해 어택땅으로 달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공포스럽고 매우 어려운 일이었던 만큼 지휘관들 입장에서는 "너희는 이 돌격만 성공하면 매우 빠른 속도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식의 심리를 일으킬 필요가 있었다.
고대 전쟁에서 약탈은 그저 단순히 물건을 뺏는 정도가 아니었다. 전장에서 받은 스트레스 해소 및 평소의 욕구불만을 한번에 해소하기 위해 일단 도시를 함락시킨 병사들이 도시 안으로 쳐들어가면 눈에 보이는 대로 남자들은 모조리 죽이고 여자[4]들은 죄다 겁탈하고 납치한다는 식의 잔인한 대량학살과 강간 같은 폭력이 마구잡이로 벌어졌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같은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들을 보면, 오디세우스 같은 그리스 영웅들의 입을 통해 그런 약탈의 끔찍한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아가멤논이여, 무엇이 부족해서 이러는 겁니까? 그대의 막사에는 노획물인 청동기가 가득 차고, 도시를 점령할 때마다 누구보다 더 먼저 아름다운 여인만 골라 가졌으면서 아직도 황금에 탐이 납니까? 우리가 사로잡은 자식을 찾으려고 트로이인 부모들이 가지고 온 보석에 욕심이 납니까? 아니면 젊은 처녀를 또 독차지하고픈 생각이 납니까? (…)
트로이에서 떠난 이후, 우리 배는 순풍에 이끌려 처음으로 이스마로스에 닿았다. 우리는 이 도시를 점령하여 남자들을 모두 죽여 없애고, 여자들은 다른 많은 전리품들과 함께 배에다가 실었다.[5]
하지만 고대라고 항상 약탈 일변도는 아니었다.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게, 약탈이 벌어진다는 소문을 들은 현지인들이 약탈을 겁내서 다 도망가 버리면 말 그대로 황무지에 주저앉은 꼴이 돼서 매우 힘들어진다. 약탈로 얻을 수 있는 물자도 생각보다 많지 않아[6] 제대로 한 몫 챙기려면 부대를 넓게 퍼뜨려야 하는데 재수없게(?) 적군에게 걸리면 각개격파 크리.당연하게도 약탈당한 지역과 그 동맹은 극렬한 반감을 품게 되어 힘이 닿는 대로 보복하게 된다. 자기들을 약탈했던 군대의 보급로를 끊거나 게릴라가 되어 통수를 치는 건 약과요, 심하면 적군이 다가올 때 자동문 스킬을 시전해 전쟁의 양상을 뒤집어놓기도 한다! 재수도 없이 약탈을 시전하고 지나간 군대가 패배해서 그 지역을 거쳐 도주해야 한다면 이제 그 지역에서는 민간인이 군인을 약탈한다.
별 저항도 하지 않은 상대에게 약탈로 되갚으면 문제가 더 커진다. 약탈 사실을 들은 다른 지역들이 '항복해봐야 죽을 거,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가겠다!' 모드로 나오기 때문에 자원의 소모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난다. 안 그래도 전쟁은 시작하는 순간부터 엄청난 비용이 소모되니까 속전속결이 중요한데 저렇게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시간, 비용, 물자, 병력, 사기의 손해를 가져오면 전쟁에서 패배하기 딱 좋으므로 어지간하면 약탈을 자제했다.
한편 점령한 지역을 자기 영역으로 굳힌다는 정치적 필요가 있을 때 약탈은 금물이었다. 국가의 체급을 키우고 국민의 숫자를 증가시키며 국부를 증대하여 군대를 늘리려면 이게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었다.
실제로 약탈 때문에 난리 난 사례로 오나라 왕 합려가 오자서와 손무를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할 때 수도 영을 함락시킨 뒤 대규모의 약탈· 방화· 강간이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복수귀화 된 상태였던 오자서의 의중도 작용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초나라 사람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켜 결국 오나라는 초나라에서 물러나게 되는 한 계기가 된다.
당 태종이 고구려-당 전쟁 당시 백암성을 공격할 때, 백암성이 태도를 번복하다가 마침내 항복하니, 당 태종이 약탈을 허락했다가 금지하였고, 이에 이세적이 당 태종에게 항의하자 당 태종이 이렇게 대답했다.
"병력을 풀어놓아 사람을 죽이고 그 처자를 사로잡는 것은 짐이 차마할 수 없는 바이다. 장군 휘하의 공이 있는 자는 짐이 창고에 있는 물건으로 상을 줄 것이니, 장군은 이 한 성을 속죄해주기 바란다." 고 하였다. 세적이 이에 물러났다.
삼국사기 권 제21 고구려본기 제9 보장왕 4년(645년)
그래서 고대에도 현지조달이 보급의 주력이었지만 수송도 병행하고 현지조달시에도 약탈보다는 일단
물물교환을 하거나
화폐를 지불해서 식량을 비롯한 물자를 사는 방법, 즉 주민들이 웬만해서는 순순히 넘기도록 하는 방법을 자주 사용하였다. 물론 거래에 응하지 않으면 약탈을 시행했으며, 전세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처럼 후환이 별로 없을 것 같은 경우에는 약탈이 자주 자행되었다.삼국사기 권 제21 고구려본기 제9 보장왕 4년(645년)
2.2. 중세
중세에도 약탈이 주력 전략에 가까웠다. 양상이 비슷한 일본의 전국시대에도 비슷하게 영지간 약탈이 이루어졌다.몽골 제국의 약탈도 꽤 유명한데 몽골군이 휩쓸고 간 곳은 약탈과 파괴, 방화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중세 전쟁의 대표격인 백년전쟁이 그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 전장이었던 프랑스에서는 의외로 대규모 회전이 벌어진 적이 몇 번 없었으며 공성전이 더 많을 지경이었는데, 수비측에서는 굳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성벽을 포기하고 야전을 벌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공격자 측에서는 피보기 싫으니 수비측을 야전으로 끌어는 내고 싶고, 수비측은 그럴 맘이 없으니 성벽 밖의 촌락을 약탈, 파괴하는 것이다. 크레시 전투 같은 회전이 유명하긴 하지만 사실 크레시 전투도 특수한 이유로 벌어진 전투인데 하도 전쟁이 오래갔고 원래 목표인 프랑스 점령이 제대로 되지 않자 영국 의회에서 전쟁자금을 마련해 주면서 에드워드 3세에게 "돈 아까우니까 빨리 결전해서 끝내라."는 주문을 해서 벌어진 전투였다. 그나마도 프랑스측이 결전을 안하려 들어서 애가 탄 영국군은 주변 마을을 죄다 약탈하며 어그로를 끌어야만 했다.
더군다나 당시의 열악한 보급체계로는 대규모 병력의 식량이나 건초같은 전략자원의 대규모 수송이 불가능했으므로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마을을 약탈하여 충당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여기에 더해서 촌락을 아예 파괴해버리면 해당 지역의 생산력이 대폭 저하되며 차후에 후퇴하더라도 수비측이 재건하는데 시간이 한참 걸릴 뿐더러 재건도 못 한 채로 다시 공격자측이 와버리면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리며 해당 지역의 거주민들은 자신들을 죽이고 강간하는 적들도 증오스러웠지만 어차피 공격자측은 떠나 버리면 그 뿐이었고 전투가 끝나고도 남아 있어야 하는 수비측은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않고 내다버린 자신들의 귀족들이 더 원망스럽기 마련이었기 때문에 툭하면 반란이 일어났다.
고대에 비해서 서유럽의 중세 시절은 병력의 숫자는 줄어든 반면 기사를 비롯한 중무장 기동부대가 많아서 말 그대로 약탈하고 신속하게 후퇴하는 습격전이 가능했다. 그래서 공격자 측에서는 그야말로 손해보는 게 없는 전략이었다.
덤으로 약탈을 통해 얻는 수많은 재물과 강간을 통한 성욕 해소 등 사기상승 효과도 지대하였기 때문에 약탈은 중세 전쟁의 메인 컨텐츠에 가까웠다. 굳이 모여서 결전을 벌여서 아군이 입을수도 있는 대규모의 피해를 감당하느니 그냥 결전을 피하면서 약해빠진 농민들이나 시민들을 죽이고 겁탈하며 약탈만 계속해도 이득이 쏠쏠했고 수비측에겐 막대한 피해를 안겨주니 안할래야 안할수가 없었던것. 특히 기사도 같은 건 원래부터 자기편에게나 해당하는 것이었고, 정복 전쟁이 성행하던 시대에 주군의 명령으로 전쟁터에 자주 나가 내달려야 하는 혹독한 인생을 살던 기사들에게 전리품은 막심한 스트레스의 거의 유일한 해소 수단이었다. 물론 어디서나 예외는 있었기에 일부 신사적인 기사들이 노약자나 여성들을 참화로부터 지켜준 적이 없지는 않았으나 이는 극소수였고, 대부분은 수녀고 처녀고 유부녀고 가리지 않고 강간한 사실을 무용담마냥 동료나 부하에게 자랑한다든지, 남편 등 가장 되는 사람 결박해 놓고 그 앞에서 가족을 강간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게 하는 만행도 있었다.
다만 중세시대에도 시도때도 없이 약탈만 하고 다닐 순 없었다. 징집병은 기본적으로 사기가 낮으므로 약탈을 위해 풀어놓으면 오히려 적당히 해처먹다 탈영해 버리기 일쑤고, 돈이 목적인 용병 역시 약탈해서 얻은 노다지와 전투 승리 보상금을 저울질해보고 전자가 더 낫다면 굳이 목숨걸고 싸우러 갈 이유가 없어서 제대로 싸우지 않았다. 특히 상대방이 고용주가 될수있어 평판 유지와 상대방에 계약하기 위해 일부러 싸우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약탈을 통한 보급을 하고 싶은 상황에서도 군대의 통제가 풀리면 약탈에 눈이 멀어 무슨 짓을 벌일 지 모르기 때문에 약탈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통제를 벗어난 최악의 경우는 사코 디 로마 사건이 보여주고 있다. 용병에 대한 부족한 대우와 중간에 이를 달래줄 타이밍의 부재 이들을 제어할 지휘부의 증발과 종교 문제까지 최악의 케이스가 터져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카를 5세에 의해 중지됐을 때는 이미 로마는 지독한 약탈에 살육, 성범죄로 초토화되었으며 교황마저 아비규환이 된 로마를 빠져나가는 추태마저 보였을 정도였다.
2.3. 근대
나폴레옹 시대에 와서 약탈 행위는 절정에 이르렀는데 징집된 국민병이라고 해도 민족주의로 무장되어 약탈을 보내도 탈영할 위험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육군은 이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보급 관리가 소홀히 이루어지며,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큰 고생을 겪고, 이내 러시아 원정에서 종국을 맞고 말았다.이때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프랑스군은 명목상으로 전시채권을 발행하여 나중에 파리에 오면 돈으로 바꿔주겠다 하고 징발을 시행했는데 사실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서 합법적인 약탈이나 다름 없었다. 물론 프랑스군이 돈을 내고 물자를 현지 주민들로부터 사들이는 경우도 있기는 했는데, 문제는 그 돈의 대부분이 위조지폐였다는 사실이아. 그런데 이후 스위스의 부르 생 피에르란 마을에서 장장 180년 넘는 동안 나폴레옹의 채권과 친서를 가지고 있다가 1984년에 프랑스 대통령이 방문하자 그걸 보여줘서 보상금을 받은 사례가 있다. 프랑스-스위스 우호를 위한 상징적인 일화라고 할 수 있다. 기사, 관련 글 다만 프랑스는 이자는 싹 무시하고 딱 그 값만 지불했다
이 시기 서구열강은 전 세계에서 문화재를 약탈해 긁어모았다. 영국의 대영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독일의 페르가몬 박물관,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박물관 등은 대표적인 약탈 문화재 전시관으로 현대에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이들만큼 거대한 스케일은 아니지만 일본 역시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오구라 컬렉션이나 가루베 지온 등 한국 문화재 약탈로 비판을 받고 있다. 한편 일본인이 약탈한 중앙아시아의 문화재가 한국에 소장되어 있기도 한데, 자세한 것은 오타니 고즈이, 국립중앙박물관 문서 참조.
2.4. 현대
포파스나에서 약탈을 저지르는 러시아군 전차병 |
현대에 들어와서 약탈로는 해결되지 않는 보급품의 수요가 늘어났고 속전속결의 필요성이 늘어나면서 쓸데없는 저항을 불러일으켜서 공격군에게 시간낭비를 초래하는 약탈은 어느 정도 자제하기 시작했지만 필요성만 인정되면 약탈이 성행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초토화 전술인데 시행시 저항이 격렬하지만 현지인 게릴라들의 기반을 파괴한터라 게릴라군 역시 나중에는 괴멸 위기에 놓이므로 국제적인 비난을 감수할 수만 있다면 자주 사용했다.
현대의 약탈은 의미가 좀 변색되었는데, 고대부터 중세까진 전쟁 비용과 보급품을 사비로 충당하다 보니 전체적으로 돈 이 필요해서 약탈을 했다면, 근대부터 현대는 비용과 보급품 등 국가가 모든 비용을 책임지고 월급도 지급해 주기 때문에(원칙적으로는), 군인들은 자신의 군인 월급으로는 구매하기 어려운 물건이거나, 어쩌면 구경도 못 할 물건이라서 약탈하는 경향이 크다. 현대는 컴퓨터, 노트북, 휴대폰 등의 물건 하나가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전세계 군인들도 휴대폰이든 손목시계든 돈 되는 건 약탈하고, 전리품으로 가져가는 경향이 높다.
생필품도 품질이 괜찮은 수준으로 발전한 덕분에 대충 가져다 놓으면 바로 쓸 수 있는 침대 매트릭스 같은 침구류부터, 재설치에 시간이 엄청나게 필요하지만 일단 가지고 있으면 언젠간 사용이 가능한 화장실 변기, 세탁기 같은 전자 및 생활 제품들은 전쟁 중 전선에서의 생활 여건 개선을 위해 쓸수 있기에 가져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인류 문명이 현대로 나아가며 민병대의 저항력이 증가하고, 전세계적으로 인권이 중요시되면서 대부분 국가의 정규군에서
특히 무절제한 민간인 약탈로 전쟁을 시원하게 말아먹은 유명한 예를 들어보자면 2차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이 저질렀던 신멸작전이 있다. 현지인들을 괴롭히니 사방에서 현지인 게릴라가 쏟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태평양 전선에서는 현지 사정에 어두운 미군들을 도와서 일본군을 더 쉽게 죽일 수 있도록(...) 현지 지리를 잘 알려주고 정찰까지 자원해서 일본군의 배치나 약점 등 각종 중요한 정보를 미군에게 술술 알려주니 일본군의 피해가 더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지구 반대편의 동맹인 나치 독일군도 마찬가지라서 특히 독소전쟁 당시의 약탈극은 일본군의 그것과 별 차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 때문에 처음에 나치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던 주민들, 특히 전쟁 직전에 무력으로 강제 병합된 발트 3국,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겪은 우크라이나는 독일군의 약탈과 강간, 살육을 당하자 분노하여 게릴라로 돌아서서 독일군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한편 소련군이 독일 국내로 진입했을 당시 소련군 병사들에 의한 독일 민간인에 대한 약탈 행위가 상당했다. 소련군은 주로 당시의 고가품이었던 손목시계를 약탈했고 민간인 부녀자를 성폭행했다.[7] 시간이 지나 소련군 내부에서도 병사들의 약탈과 강간이 심각한 수준임을 알고 지나친 약탈과 강간은 군법에 따라 처벌하고 금지했다. 물론 왠지 독일의 자업자득 이미지에 편향된 요소만 있긴 한데, 실제 소련군의 약탈은 딱히 독일에 국한된 게 아니다. 독일로 가는 길에 있는 모든것에 대한 약탈을 시도했다. 발트 3국에서부터 폴란드, 심지어는 홀로코스트에서 방금 전에 해방시킨 외국인들과 유대인들도 약탈 대상이었다(...). 유럽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불가침으로 전쟁 후반까지 접촉할 일 없던 일본 제국으로의 공세가 시작되면서 만주와 한반도에서도 같은 약탈 행위가 일어났다. 소련군이 약탈 대상을 가리지 않았음에도 어째 독일을 들먹이면서 약탈을 계속 정당화 하는 경우가 많은데 소련군은 독일 뿐만 아니라 전혀 싸우지 않은 한반도, 중화민국에도 쳐들어가 약탈을 일삼았다. 특히 한반도에서는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며 다와이(내놔)라는 말을 북한 노년층들이 기억하고 치를 떨 정도로 약탈과 강간이 일상이었다. 약탈과 방화, 강간은 처벌하고 근절시키겠다는 소련군 사령관의 엄포는 립서비스에 불과했고 한반도는 소련의 약탈의 대상이 되어 작은 경공업 공산품에서부터 발전소, 공장 설비까지 모조리 뜯어갔다.
서부전선 및 태평양 전선의 미영 연합군 점령지에서는 소소한 대가를 지불한 뒤 물건을 가져가거나 성매매를 하는 수준이었다. 소소한 대가라고 하지만 보통 보급품인 전투식량이나 담배, 초콜릿인데 전시 상황의 민간인들에겐 대단히 귀한 물건이므로 거래가 성립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민간인 약탈 및 성범죄는 당연히 상부에서 헌병들을 통해 단속했다.
그러나 여러 기록에서 보이듯 헌병들의 눈을 피해 몰래몰래 병사들이나 장교들이 약탈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예시 독일에서 미군의 약탈은 꽤 광범위하게 진행됐다. 예시 이렇게 몰래 가져온 유물들이 수십년 후 미국 경매시장에서 나오기도 한다.
일본군 측에서는 사토 고토쿠가 지휘했던 31사단만이 주로 의복과 천막 등을 식량으로 바꾸는 물물교환을 하는 방식으로 상대적으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보급품을 구했으며, 그 결과는 순조로운 퇴각으로 보답받았다. 일본 제국 패망 직후에는 전쟁에 패배하면 미군이 일본인들을 모조리 죽일거라는 프로파간다를 다큐로 믿고 있던 일본인들의 공포심이 극에 달하여 사회가 혼란해 질것을 우려하였고, 미군들은 일본의 가정집들을 돌아다니면서 식량을 갖다 주는 선행으로 일본인들을 진정시켜야 했다. 물론, 미군의 입장에서는 패전국의 일본인들이 저항하면 대놓고 죽였어도 할 말은 없는 입장이었지만 전후처리의 과정에서 빠르게 사회를 안정시키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비용적인 측면에서도 더욱 저렴한 수단이라 이렇게 한 것이었다.
의외로 초반에 털린 프랑스가 연합군 중에서 약탈과 살인을 제일 많이 시행했는데 몬테카시노 전투 당시에 뼈빠지게 고생한 미군은 가만히 있는데 숟가락 얹기를 시전해서 승리한 프랑스가 인근 마을을 약탈했고[8] 수천명의 민간인이 강간 혹은 살해되었다.
이라크 전쟁 때 미군, 기자들, 직원들이 이라크 문화재[9], 현금, 금도금이 된 물건, 이라크 국채 등을 약탈하였다. 이에 미국 일부에서는 “자질구레한 장신구를 집어오는 것과 역사적ㆍ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인류 문화유산을 훔쳐오는 것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고 하면서도 전쟁에서 약탈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예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에도 보급을 제대로 못 받은 러시아 정규군들이 보급을 해결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약탈을 일삼고 있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예시 예시 [이슈톡] 굶주린 러시아 군인들, 우크라서 마트 약탈 비단 생필품만이 아니라 세탁기 등 전기만 있으면 쓸수있는 가전제품을 러시아로 실어 나른 정황이 포착되기도 했으며( 예시) 부모가 입대한 자식에게 약탈을 종용하는 전화가 도청되기도 했다. 예시 러시아 침공군 대부분이 돈 없고 빽 없는 시골 출신 징집병들이다 보니 고향에서는 구하기 힘든 귀한 물건들을 털어간다고 한다.
[1]
이런 현상은 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주로 새로운 장비 및 자잘한 물품 구매, 유흥거리인 도박, 소비품으로는 식량 및 술, 담배 등으로 다양한 이유로 엄청나게 소비된다.
[2]
로마군의 관용구로는 '공성구가 성에 닿기 이전에.'
[3]
2000년에 나온 Goldsworthy라는 책에서 따옴.
[4]
더러는 소년.
[5]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도시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187~188쪽
[6]
민간인들이 비축하고 있는 물자는 대개 가족을 지탱하기 위한 수준일 테니 군대 입장에서는 한 줌도 안 된다.
[7]
총사령관 대리를 맡고 있던
게오르기 주코프부터 손목시계를 강탈한 이력이 있을 정도다.
[8]
그것도 프랑스 측 지휘관이 허용한 거다!
[9]
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유물들이 대다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