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삼정승 | |||||
좌의정 | 영의정 | 우의정 | |||
육판서 | |||||
이조판서 | 호조판서 | 예조판서 | 병조판서 | 형조판서 | 공조판서 |
1. 개요
영의정( 領 議 政) 또는 영상(領相)은 조선 시대 의정부의 으뜸 벼슬인 영사(領事)로 품계는 정1품이고 관원의 자급(資級)은 대광보국숭록대부이며 정원은 1인이다. 조선의 관제에서 오늘날의 수상, 총리에 해당한다. 영상(領相)이라고도 하며 좌의정 및 우의정과 아울러 삼정승이라고도 한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말이 있듯이 신하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직이다.[1]학술기관[2]인 경연, 홍문관, 예문관(藝文館), 춘추관, 관상감(觀象監)의 영사를 겸한다. 재신(宰臣)의 등급을 겸하고 있는 학사(學士)로 나타낸 송나라와 고려의 전통에 따라 조선에서도 재상이 학사를 겸하였는데, 재신들이 등급에 따라 각각 학사 한 두 개 정도를 겸한 고려와 달리 조선에서는 영의정이 경연을 제외한 나머지 학술기관의 영사를 혼자 겸하는 것이 규례인 것에서 그 상징성을 알 수 있다.
2. 연혁
고려 초기에는 내사령, 중서령이었다가 고려 후기에는 영도첨의(領都僉議), 영문하(領門下), 판문하(判門下) 따위로 불렸고 조선 초기에는 영문하라고 불리다가 다시 판문하라고 불렸는데, 명예직이었던 고려의 중서령처럼 명목상 으뜸 벼슬에 불과하였다.영의정이라는 명칭은 문하부 재신이 의정부에 통합된 1401년(태종 1) 당시 우정승(右政丞)이었던 이서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임명되면서 처음 나타난다.[3]
태종 연간(1401~1418)까지는 1414년(태종 14) 좌의정(左議政)으로 바뀌는 좌정승(左政丞)이 여전히 수상이었고 영의정에게는 명목상의 결재권조차 없었다.
그러다 세종 연간(1418~1450)인 1436년(세종 18) 왕이 이조와 병조의 인사[銓選], 병조의 군사(軍事), 형조의 사형수 판결을 제외한 나머지 업무에 대하여 먼저 의정부의 서명을 거치게 하였을 때, 고대 삼공의 모범을 따라 영의정도 좌우 의정과 함께 의결에 참여할 수 있게 하면서 처음으로 실질적인 재상이 되었다.[4]
1466년(세조 12) 관제를 개편하면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를 영의정(領議政)으로 고쳤다. #
명종 시기의 을묘왜변(1555)과 선조 시기의 임진왜란(1592~1598)을 거치며 의정부가 유명무실해지고 대신 비변사가 점차 국정 전반을 담당하게 되자 영의정은 좌우 의정과 함께 정1품 자문관 도제조(都提調) 자격과 관료들의 우두머리라는 명목을 가지고 집권 붕당 또는 국왕의 명분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자리가 되었다.
이후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총리대신(總理大臣)이 되었고, 1895년(고종 32) 의정부가 내각으로 개편되면서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1896년(건양 1) 아관파천으로 내각의 명칭이 의정부로 환원되면서 의정이 되었다. 1905년(광무 9) 의정대신(議政大臣)이 되었고, 1907년(광무 11) 다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가 1910년(융희 4) 경술국치를 거치며 사라졌다.
3. 위상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하여 임금 바로 아래의 최고위직으로 위상은 높지만 실권이 큰 자리는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영의정은 원로이자 조정 영수라는 명목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치 운영에 필수적인 담당 실무가 적었기 때문이다. 영의정의 입지는 국왕과 관료, 관료 내부 사이의 정치적 역학 관계에 따라 잦은 부침을 보인다.[5]이러한 현상의 원인 중 하나는 조선 초기에 좌정승이 판이조사(判吏曹事), 우정승이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한 것이었다. 판사는 담당 부서의 업무를 감독하는 것이 주 업무로 문관(東班)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와 무관(西班) 인사, 군사를 담당하는 병조의 실무에 개입하는 좌우 정승의 권한이 담당 실무가 적은 영의정의 권한보다 실질적일 수 밖에 없었다.
KBS 1TV 징비록에서도 이조판서로 영전한 류성룡에게 좌의정 정철이 자신에게 업무를 보고할 필요없이 소신대로 하라는 대사를 통해 좌의정의 권력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세종의 장인 심온이 불평한 것과 구성군이 구훈(舊勳)에게 쉽게 밀린 것은 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판상서사(判尙書事)는 고려 시대부터 이어진 것으로 중서문하성의 재신들이 상서의 판사를 겸하며 중서문하성 중심의 정치를 시행하는 데 이용되었다.(당 초기에는 상서령/중서령/문하시중이 신료들의 수장으로 위치하였지만, 현종 말년이 되면 3품의 상서들이 동중서문하직을 겸직하면서 재상으로 업무를 주관하였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재상직이 2품에 위치하면서 실질적 업무부처인 상서6부와 괴리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장관인 3품의 상서 위에 재상이 관리하는 판사직을 설치하였다.) 고려에서는 수상이 판이부사(判吏部事)를 겸한 것과 달리 조선 중기 이후에는 현직 삼정승이 이조와 병조를 겸판(兼判)하지 않았다. 실제로 육부(六部)의 위상이 떨어지던 고려에 비해 조선은 비변사 대두 이전까지 육조 위주의 정치가 이루어졌다. 조선의 판서는 정2품관이고, 고려의 상서는 정3품관이니 당연한 결과다.
겸판사(兼判事)는 세종 연간을 거치며 의정부 좌우 찬성(贊成) 및 참찬(參贊)에게로 넘어갔다가 1458년(세조 4)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지만, 대체로 성종 연간(1469~1494)까지 재상급 대신들이 부서와 업무에 따라 상설 혹은 특설된 겸판서(兼判書)로서 실판서(實判書)를 직접 지휘하는 형태로 남아있었고 이후에도 간간이 나타난다.
태종 연간의 이숙번은 종1품 의정부 찬성(贊成)이 최종 경력이었지만 정승급인 남재, 성석린 등을 호령했으며, 하륜 역시 영의정을 꽤 했지만 좌의정 시절 힘이 더 강했다. 문종 때 영의정은 하연, 단종 때의 영의정은 황보인이었으나 세종, 문종의 고명대신이자 남재의 장손자인 남지가 문종때 우의정으로 그 후 승차하여 좌의정으로서 정권을 이끌었다. 남지가 사망한 후에는 단종의 조정을 이끄는 영수로 후임인 좌의정 김종서가 실권을 장악했다. 세조의 사돈이자 인수대비의 아버지인 한확도 좌의정이었으며, 세조의 책사 권람도 좌의정이었다. 세조의 계유정난에서 큰 공을 세운 홍달손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세조의 공신이자 훈구파 원로대신이던 김국광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정희왕후의 측근이자 왕실의 인척이던 홍응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중종반정 이후 공신들과 친하게 지낸 신용개, 김응기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중종 연간(1506~1544) 후기 최강의 권신 김안로는 좌의정이었고 김안로가 이조판서와 좌의정을 지내며 실권을 쥘 때에 영의정이던 장순손, 한효원, 김근사는 김안로의 오른팔들이었지만 김안로에 비해서는 권력이 약했으며, 중종 때 다른 권신인 심정, 이행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중종 때 조광조를 추천한 안당도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까지 지냈다. 윤원형은 우의정이나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일 때 최고 권력을 누렸지만 영의정일 때는 또다른 권신 이량과 좌의정 심통원의 급부상으로 힘이 약해졌고, 숙종 연간(1674~1720) 초기에 공작 정치로 권신이 된 김석주도 우의정으로 병권의 핵심이어서 역시 송시열의 제자이며 사형인 영의정 김수항마저 그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두둔할 정도였다. 정광필의 손자인 정유길도 동인집권기에 야당인 서인임에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김수항 또한 남인인 허적이 영의정에 있을 때 좌의정에 있었던 적이 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재집권한 남인의 핵심 권력자였던 민암도 우의정이었고, 홍봉한도 권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좌의정이었다. 홍봉한의 동생인 홍인한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노론 4대신 중 가장 낮은 연배인 조태채도 우의정이었다. 그리고 영조 때 노론 핵심 권력자이자 인현왕후의 작은 오빠이자 숙종의 작은 처남인 민진원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그리고 숙종의 외척이자 인현왕후의 백부 민정중도 좌의정까지 지냈고, 그 아들인 민진장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그 외에 자의대비의 친척이자 인조의 외척이고, 현종과 숙종의 외척으로, 희빈 장씨를 추천했던 조사석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서인의 영수이자 노론의 영수이자 유림의 대표였던 송시열 역시 좌의정까지 지냈다. 그 뿐 아니라 세조의 외척이자 정희왕후의 형제인 윤사분과 윤사흔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또 소현세자빈인 민회빈 강씨의 아버지인 강석기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인조반정 공신이자 왕실의 외척이던 원두표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오명항도 병조판서 시절에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뒤에 우의정까지 올랐다. 소론 산림의 영수였던 윤증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무인 출신이자 적개공신이자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강순도 최종 관직이 우의정이었다.
을사사화의 주역인 이기와 정순붕도 각각 좌의정과 우의정 시절에 을사사화를 주도했으며 영의정 윤인경은 힘이 약했다. 이기 역시 영의정이 된 이후로는 예전보다 실권이 약간 약해졌고, 영의정에서 물러나기 직전에는 윤원형에게 실권을 다 빼앗긴다. 그리고 대윤의 핵심인 유관과 성세창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또한 노론 4대신 중에 좌장이던 이이명, 이건명도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영조 때 노론4대신의 일원인 이관명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태종의 명을 받들어서 영의정 심온의 사사를 주도하고 군권을 쥐고 있던 박습과 강상인, 심온의 동생 심정의 사형을 주도한 박은도 좌의정이었다. 정순왕후의 오빠이자 외척이던 김관주도 우의정을 지냈고, 안동김씨 일족이지만 벽파의 영수였던 김달순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같은 소론이었지만 희빈 장씨와 장희재에 대해 중벌을 주장한 박세채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희빈 장씨와 장희재에게 사약을 추천한 이세백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화완옹주의 인척이던 정희량, 정우량도 각각 좌의정, 우의정까지 지냈다. 한효순도 광해군 시절에 우의정, 좌의정을 지내면서 폐모론을 주장했다. 송시열의 수제자인 이단하도 좌의정을 지내면서 강력하게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다. 김종수도 좌의정 시절에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과 대립했으며 채제공 역시 좌의정을 지내면서 독상체제로 정국을 주도하였다. 예종의 장인이던 한백륜도 우의정까지 지냈고 정희왕후의 인척이던 성봉조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일원인 김이교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헌종의 총애가 각별했고 천주교를 탄압할 것을 주장한 이지연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따라서 단지 영의정까지 올라서 권신이 된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6] 하위직인 판서와 도승지도 왕의 신임이 두터우면 정승을 호령할 정도였다. 명종 연간의 외척 이량은 이조판서로서, 또 다른 외척 심통원은 좌의정으로서, 영의정 윤원형보다 권력이 강했고, 광해군 연간(1608~1623)의 권신들인 삼창(三昌) 중 이이첨과 류희분도 각각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로서 권력을 행사했으며, 박승종은 영의정을 하기 전에 병조판서와 판의금부사를 겸하면서 각종 옥사를 처리했고 정조 연간(1776~1800) 초기의 홍국영은 도승지, 숙위대장(宿衛大將), 훈련대장(訓鍊大將), 금위대장(禁衛大將), 선혜청 제조(宣惠廳提調) 따위의 직책을 맡으면서 모든 소(疏)와 의견이 그를 거쳐 왕에게 전달되었다.[7]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서막을 연 순원왕후의 장인인 김조순도 이조판서, 병조판서, 대제학, 금위대장, 훈련도감대장 등을 지냈다. 신정왕후의 장인인 조만영도 이조판서, 호조판서, 예조판서,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판의금부사, 금위대장 등을 역임했다. 광해군의 총애를 받아서 잡채상서로 불렸던 이충도 호조판서, 우찬성까지 지냈다.
소헌왕후의 아버지이자 세종의 장인인 심온도 세종 즉위년 영의정에 올랐을 때보다 태종 시기에 이조판서 등을 지낼 때 권력이 더 강했다. 이직도 영의정 시절보다 좌의정 시절에 힘이 더 강했다. 심온의 아들 심회도 세조 말년 영의정을 지낼 때보다 성종 시기에 원상을 지내고 좌의정일 때 권력이 더 강했다. 인조 시기의 권신이자 인조반정 1등 공신 심기원도 좌의정까지 지냈고, 심희수도 선조 시기에는 좌의정, 광해군 시기에는 우의정을 지냈다. 좌의정 심정의 손자 심수경도 선조 시기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효종의 사위 심익현의 아버지 심지원도 효종 시기에 영의정을 지내고 현종 시기에 원상과 좌의정을 지냈다. 이항복 역시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광해군 때 다시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고 이덕형 역시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광해군 때 다시 영의정을 하기 전에 좌의정을 지냈다. 선조 말기에 영의정을 지낸 류영경도 좌의정을 지내던 시절에 영의정 윤승훈을 탄핵한 일이 있었다. 권대운도 남인 2차집권기에 영의정을 지낼 때보다 남인 1차집권기에 우의정, 좌의정을 지낼 때가 권력이 더 막강했다. 홍치중도 영의정을 지낸 뒤에 좌의정을 다시 한 번 더 지냈다. 탕평책을 입안한 조현명도 영의정을 지낸 뒤에 다시 한 번 좌의정을 지냈고 동생 조문명도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같이 탕평책을 입안한 송인명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성종 초에도 성종의 장인이자 외척인 한명회가 좌의정으로 있고 정희왕후의 처남이자 역시 외척인 윤사흔이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권력을 행사한 적이 있고 영의정 정창손은 한명회와 윤사흔의 의견을 따랐다. 오윤겸도 영의정을 한 뒤에 다시 한 번 좌의정을 더 지냈다. 홍서봉도 영의정을 한 뒤에 좌의정을 지낸 적이 있고 심열도 영의정을 한 뒤에 우의정, 좌의정을 또다시 지낸 적이 있다. 인조반정의 공신이자 효종의 장인인 장유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순조 때 김재찬도 영의정을 한 뒤 다시 영의정을 지내기 전에 좌의정을 또 한 적이 있고 이시수도 영의정을 한 뒤에 좌의정을 다시 지낸 적이 있다.
인현왕후의 아버지이자 숙종의 장인인 민유중도 숙종 시기에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엄청난 권력을 행사했다. 또한 역시 숙종 때 인현왕후의 큰오빠이자 숙종의 큰 처남인 민진후도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를 맡으면서 실권을 행사했다. 한성판윤이나 공조판서가 정치적 영향력은 없는 자리인걸 감안하면 그냥 본인이 권신이라 강한거지 관직 때문에 강한게 아니었다. 그리고 숙종의 작은 처남이자 인현왕후의 작은 오빠인 민진원도 좌의정을 지내면서 실권을 행사했다. 영조 시기에 영의정을 지낸 심수현도 영조 초기에 병조판서 겸 금위대장을 지내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그 외에 김만중, 김만기 형제도 병조판서, 예조판서, 대제학을 지내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특히 김만기는 군권까지 쥐고 있었다. 이세백도 좌의정을 지내면서 희빈 장씨의 사사를 주청했다. 박원형도 좌의정을 할 때 영의정이던 귀성군 이준을 끌어내리는 데 앞장섰다.
최항과 조석문도 역시 세조 말에 영의정을 지내다가 성종 초에 다시 좌의정을 지내면서 실권을 가졌다. 윤자운 역시 성종 초에 영의정을 하다가 다시 우의정을 지내면서 실권을 가졌다. 김질 역시 예종 때 좌의정을 하고 성종 때 다시 우의정을 했다. 한치형 역시 죽기 직전 영의정을 할 때보다는 우의정과 좌의정 시절에 무오사화 때 사화를 주관하면서 힘이 강했으며 어세겸도 좌의정 시절에 실록청총재관을 했다. 그리고 윤필상도 오랜 기간에 영의정을 했지만 우의정 시절에 폐비 윤씨의 폐출을 강력하게 주청하고 좌의정 시절에는 폐비 윤씨 사사를 주청하면서 실권을 가졌다. 정인홍도 우의정 시절에 봉산옥사를 처리했고 좌의정 시절에 대북정권의 정국을 주도했다. 광해군 때 실세였던 한효순, 민몽룡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인순왕후의 6촌인 심희수도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광해군 때 다시 우의정을 지냈다. 성종의 측근인 현석규는 도승지, 대사헌, 형조판서를 지내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정창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영의정을 했지만 좌의정 시절에 단종 사사를 주청했다.
인조반정의 공신이던 심기원도 좌의정을 지냈고, 김자점도 좌의정 시절에 민회빈 강씨의 사사를 주청했다. 병자호란 당시에 척화파였던 김상헌도 최종 관직이 좌의정이었고, 병자호란 당시 대청 강경파로써 자결을 한 김상용도 최종 관직이 우의정이었다. 노론 선봉이던 이관명도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소론 선봉이던 이태좌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기자헌도 영의정을 했지만 우의정과 좌의정 시절에 광해군을 강력히 지지했고 영의정 시절에는 약간 힘이 약해졌다. 윤두수 역시 좌의정 시절에 힘이 강했으며 영의정 시절에는 힘이 약해졌다. 이원익도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번 영의정을 했지만 영의정 시절보다는 판서와 우의정, 좌의정을 하던 시기에 힘이 강했다. 대윤의 영수였던 윤임도 형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 공조판서, 우찬성을 여러차례 하면서 권력을 가졌고 유인숙 역시 이조판서와 우찬성을 하면서 권력을 가졌다. 송시열과 더불어 양송으로 불렸던 송준길도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하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광해군 때 북인의 거물이던 박홍구와 조정도 각각 좌의정, 우의정까지 지냈다. 그리고 윤원형, 이기, 정순붕과 더불어 을사사화를 일으키는 데 앞장선 임백령도 이조판서, 우찬성까지 지냈고 역시 을사사화를 일으키는데 앞장선 허자도 예조판서, 공조판서, 형조판서, 대사헌,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우찬성, 좌찬성을 하면서 힘을 가졌다.
태종이 기초를 놓고 세종이 짓고 문종이 마무리한 군신간의 정치적 균형관계를 일거에 무너뜨린 계유정난의 부작용으로 인해 조선 조정 내에서 실세 권신과 그를 따르는 파벌집단들의 개념이 생기면서, 권신들이 세력 유지를 위해서 명망은 높으나 세력기반은 없는 말년 원로들에게 모양새 좋게 넘기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 특히 영의정 자리를 누가 먹냐를 놓고 상대 파벌과 죽자사자 사생결단을 내다가 피보느니 차라리 중립인 인사를 기용하는 걸로 합의하는 경우가 잦았다. 중종 연간의 정광필은 권신 이항(李沆), 심정, 이행, 나중에는 김안로 등이 모두 명목상의 영의정으로 내세운 경우이고,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 이후에도 반정 4대장 이귀, 김류, 이서, 신경진 등의 합의로 이원익이 영의정이 되었다. 인종과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홍언필과 윤인경의 경우에도 대윤의 윤임, 유관, 유인숙, 소윤의 윤원형, 이기, 정순붕, 임백령, 허자 등의 합의로 영의정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연원과 상진도 심통원, 이량, 윤원형, 이기 등의 합의로 영의정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말하자면 1) 영의정은 조정의 행정을 총괄하는 수장, 2) 좌의정은 조정의 다수파 대표, 그리고 3) 우의정은 조정 내 병권과 사법권, 삼사의 대간과 옥당을 총괄하는 역할에 해당했다. 그리고 영의정이 온건파이면, 좌의정과 우의정은 강경파인 경우가 많기도 했다. 또한 영의정은 집권붕당의 주류 출신들이 많이 맡았지만, 좌의정과 우의정은 집권붕당의 주류 출신들도 맡았으나 집권붕당 비주류와 야당들도 꽤 많이 맡은 경우도 있었다. 영의정이 조정 대신들 중 신망이 높거나 명망이 높은 대신, 즉 명신들이 맡는다면, 좌의정은 권력이 막강하거나 정파의 지도자로 추앙받는 대신, 즉 권신들이 맡는다고 할 수 있고 우의정은 무신 출신의 대신이나 무관들이나 대간들에게 신망이 높은 대신, 즉 무인, 대간을 총괄할 수 있는 지도자가 맡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의정은 대신들 중에 나이가 상당히 많고 연배가 높은 노대신들이 맡는 경우가 많고 좌의정은 그 중간 쯤인 대신들이 맡는 경우가 많고 우의정은 나이가 약간 낮거나 연배가 낮은 대신들이 맡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영의정이 과연 실권은 없고 명예만 있는 관직이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영의정쯤 되면 이미 주요 관직을 다 거쳐 올라온 사람들이라 그 관록이 결코 만만치 않다. 실제 정책 토론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좌의정이고, 정책이나 현안에서의 법률이 관여토록 하는 것은 우의정이며, 주 현안을 집행하는것은 육조이기 때문에 그냥 보면 영의정은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지만, 그 과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조율하기가 바로 영의정의 역할이다. 여러 대신들이 이런저런 목소리를 낼 때 토론 과정이 과열되지 않도록 조절하고, 가장 건설적인 방향으로 결정을 이끌어내도록 만드는게 영의정의 주 업무인 것이다. 또한 권신이나 그 당여 중에 어전에서 지켜야할 선을 넘으려는 자가 있으면 자제시켜서 국왕이 최소한의 체면은 지키게 하는 데는 역할도 수행했기에 영의정 제도가 주효하기는 했다.
의미 있는 권력을 누린 영의정으로는 태종조 하륜을 시작으로 세종조의 황희가 가장 대표적이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으로 집권하여 겸판이병조사(兼判吏兵曹事)가 된 수양대군 이유, 세조 연간(1455~1468) 말년부터 성종 연간 초기까지 원상이었던 한명회와 신숙주, 모두 일찍 죽기는 했지만 1506년(연산군 12)에 중종반정을 주도한 3대장인 박원종과 유순정과 성희안 등이 있었다. 선조 연간(1567~1608) 초기의 이준경이나 선조 중기의 류성룡이나 선조 말기의 류영경이나 광해군 연간 후기의 박승종이나 숙종 연간 초기의 허적도 상당한 힘이 있었다.[8] 또한 숙종 말기의 노론4대신 중의 우두머리인 김창집도 영의정으로 힘을 행사했다.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는 정조 말기에는 우의정과 좌의정으로서, 순조 초기에는 원상과 영의정으로서 권력의 정점을 누렸다. 철종 연간(1849~1863)에 신 안동 김씨의 수장이었던 김좌근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세도정치 권력의 정점을 누렸다.
조정 서열 1위의 관직답게 배향공신을 가장 많이 배출한 관직이다.
4. 영의정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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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주요 영의정 역임 인물
5.1. 태종 ~ 명종
- 이서: 1401년(태종 1) 최초로 영의정부사에 임명되었다.
- 이거이: 1399년(정종 1) 파면된 의안공 이화를 대신하여 판문하부사가 되었다가, 의정부와 문하부가 아직 분리되어 있던 1400년(정종 2) 판문하부의정부사가 되었으며, 1402년(태종 2) 영의정부사가 되었다.
- 성석린: 1403년(태종 3) 성석린이 영의정부사로서 영락제 즉위 축하 사절로 정해지자 명목상 우두머리일 뿐 집정이 아니라는 이유로 중국 측이 트집을 잡을 것을 우려한 사헌부는 이를 비판하고 집정인 좌정승 하륜을 보낼 것을 주장하였다.
- 조준: 1392년(태조 1) 배극렴이 죽자 문하좌시중이 되었다. 1399년(정종 1) 판문하부사가 되었다가 태종 연간에는 이서, 이거이, 성석린 다음으로 영의정부사에도 올랐다. 이 때는 영의정부사가 명예직이어서 우두머리 재상인 좌정승으로 직무를 보다가 나이가 들어 은퇴 개념으로 받은 것으로, 그는 영의정부사가 된 지 5개월 뒤에 죽었다.
- 의안대군 이화: 태조의 이복동생으로 1398년(태조 7) 판문하부사가 되었다가 태종 연간 초기에 영의정부사를 지냈다.
- 하륜: 이 사람이 영의정을 하던 시절부터 영의정의 위상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 남재: 태조의 배향공신이자 남은의 형. 태조, 태종, 세종 3대를 직간접적으로 옹립해 유명하다.
- 류정현
- 심온: 세종의 장인이지만 외척을 경계한 태종에 의해 본인과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고증을 증명하듯 국문을 받을 때 영의정부사는 실권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모든 업무를 사실상 좌의정 박은이 처리한다고 하여 그의 양심을 찔렀다. 결국 드라마에서는 박은이 태종에게 사정하여 국문이 멈춘다.
- 이직
- 황희: 조선 역사상 최장기 영의정 재임자로 그 기간은 무려 18년으로 1431년(세종 13) 69세에 영의정부사로 임명되어 1449년(세종 31) 87세에 노령을 이유로 물러날 때까지 영의정부사를 지냈다. 영의정이 의정부의 의사 결정에 참여하고 우두머리 재상이 된 것도 황희가 영의정부사로 있던 시기였다. 1449년 중국 사신 왕무(王武)가 태평관(太平館)에 오자 당시 영의정부사 황희와 좌의정 하연이 각각 문안하였는데, 사신은 황희에게는 깍듯이 예를 갖추었지만 역관이 사신에게 좌의정도 수상이라고 소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연에게는 보통 사람처럼 대했다고 한다.
- 하연
- 황보인: 계유정난으로 인해 사망.
- 수양대군 이유: 계유정난 직후 즉위할 때까지 영의정부사였다. 결국 나중에는 왕족은 몇대가 지나기 전까지 벼슬을 못한다는 원칙이 생기게 되었다.
- 정인지
- 한명회
- 신숙주: 여담으로 신숙주는 최단임 영의정 기록을 세운 바 있는데 자그마치 4일이다. 세조의 변덕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자세한 정황은 세조 항목 참조.
- 구치관: 세조의 공신이며, 성종 초반기 원상으로 훈구파였으며, 청렴결백한 영의정으로 이름이 높았다.
- 황수신: 영의정 황희의 아들이고, 세조의 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냈다. 최장수 영의정을 했음에도 옥의 티가 많았던 아버지처럼 치부를 많이 하여 욕을 먹기도 했지만, 나름대로의 능력은 있었다.
- 심회: 영의정 심온의 아들이고 세조의 외숙부로, 세조의 공신으로 세조 말년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성종 시기 원상에 좌의정에 원로대신이었다.
- 최항: 세조의 공신 중 한 명으로, 뛰어난 학자이자 명신이었다. 또 좌의정 역시 2번이나 한 적이 있다.
- 구성군: 조선 역사상 최연소 영의정 역임자. 27세에 영의정이 되었다. 이는 종친 측근 세력을 기용해서 왕권을 보호하려는 세조의 의도였다.
- 박원형: 세조의 공신이며, 귀성군이 물러난 후 영의정이 된다.
- 홍윤성: 무고한 백성과 자신의 숙부를 때려 죽인 사이코패스이나 세조의 총애로 인해 홍윤성을 벌하자는 상소들이 묵살되었다.
- 윤자운: 신숙주의 처남으로, 세조의 공신으로 성종 때 원상이기도 했다.
- 조석문: 세조의 공신이며, 성종 때의 원상으로 영의정 1번에 좌의정 2번을 했고 훈구파 노신 중 한 명이다.
- 정창손: 세조의 공신으로, 세조 때 2번 했고 성종 때 10년이나 하며 훈구파 원로로 군림했다.
- 윤필상: 세조의 공신이고, 문무를 겸한 외척 출신 원로대신이지만, 갑자사화 때 연산군에 의해 최후를 맞는다.
- 이극배: 세조의 공신이고, 성종 때 원상이며, 원로대신으로 연산군 때까지 원로로 대접받은 영의정이다. 그리고 이세좌 등과도 일족 관계를 형성했다.
- 노사신: 세조의 공신이고, 성종 때 원상이었으며 또 성종과 연산군 때의 원로대신으로 뛰어난 학문과 능력을 가졌지만 대간들에게 자주 탄핵을 받았다. 그래도 대승적 차원에서 사화를 줄이려고 노력한 재상이다.
- 신승선: 공신 출신이며, 왕실과도 일족 관계를 형성, 또한 연산군의 장인으로 원만하고 중후한 인품으로 조정의 봉합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대간들에 의해 죽반승이라고 조롱을 받기도 하였다.
- 한치형: 인수대비의 사촌오라버니로, 왕실과도 인척을 형성해 높은 영의정의 자리에 올라서 연산군에게 시폐10조를 올리는 등 충언을 했다.
- 성준: 세조와 성종, 연산군 때의 신하로 연산군 때 원로대신이었지만, 시폐10조를 올리는 등 연산군에게 충언을 하였지만 갑자사화 때 유배되었다가 교살당했다.
- 류순: 연산군 때 영의정으로,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지만 연산군에게 아부하였고, 또 반정 이후에는 공신들과 친하게 지내서 사림과 대간의 지탄을 받았지만 탐학하지는 않았다.
-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중종반정의
삼대장. 반정 이후 슬슬 벼슬이 올라가다 셋이서 차례로 사이좋게 영의정을 진짜 조금씩 지냈다. '왜 조금씩 지냈냐?'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텐데, 이들이 영의정을 지낸 지 몇 달 만에 병으로 죽었기 때문(...) 정사나 야사를 가지리 않고 기록에는 이들이 연산이 거느린 미녀들을 취하고 전국에서 뇌물을 받아 창고가 모자랄 정도였다는데 이에 선비들은 하도 저딴 식으로 굴다가
천벌을 받았다며 비웃었다고 한다.
삼대장이 아니라 개노답 삼형제 - 김수동: 중종 때 영의정으로,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사림들의 비판을 받았지만 굽은 소나무 충신으로써 연산군 때 많은 사람들을 살렸다.
- 송질: 중종 초반기 영의정으로, 연산군의 총신 전력과 탐욕하다는 비판으로 사직하지만 사위 홍언필과 외손자 홍섬이 영의정을 지냈고, 왕실과도 인척 관계를 형성, 또 남곤과도 인척 관계가 되어 영화를 누린 재상이다.
- 남곤
- 정광필: 11년 이상 영의정으로 재임한 중종조의 명재상. 조광조의 독주 시절에는 그를 제일 강력히 저지했고 조광조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누구보다도 열렬히 그를 변호했다. 김안로의 미움을 사서 유배되자 도성의 백성들이 통곡했고 그가 귀환하자 환영 행렬이 길거리를 메웠다한다.
- 장순손: 김안로의 측근으로, 김안로에 의해 영의정까지 되었다. 그러나 편히 죽는다.
- 한효원: 김안로와 이웃한 영의정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능력과 실력은 뛰어났다.
- 김근사: 김안로의 일파로, 영의정까지 올랐지만 김안로의 실각 후 유배되었지만 죄가 김안로보다 덜해 편히 죽는다.
- 윤은보: 중종 때 영의정 역임.
- 홍언필: 좌의정과 영의정을 각각 2번 했으며, 청렴하여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다. 참고로 장인 송질도 영의정이고, 아들 홍섬도 영의정이다. 부인 여산 송씨는 아버지, 남편, 아들이 모두 영의정이라는 유일무이한 기록을 갖고 있다.
- 윤인경: 명종 때 영의정으로 을사사화에 가담해서 실록에서 그의 졸기에 안 좋은 예기가 쓰이지만 그가 을사사화 때 처음에는 유배나 좌천으로 끝내려 했지만, 결국 사약으로 상소를 돌린 이유는 좌의정 이기의 권세에 짓눌렸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로 보아서 처음에는 어떻게든 최악의 상황만은 막아보려고 어떻게든 힘을 썼지만, 결국은 힘이 미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이기: 을사사화를 주도했던 정승이며, 소윤 중에서도 강경파에 속해 영의정 시절에도 대윤세력과 소윤 온건 세력을 모두 제거했다. 다만 말년에는 윤원형과 대립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 윤원형
- 심연원: 세조 시기의 영의정 심회의 증손자로, 명종 시기에 7년동안 영의정을 지냈다. 증손자 심열도 인조 시기에 영의정을 지냈다. 명종비 인순왕후의 할아버지로서 명종의 외척이며 동서분당을 일으킨 심의겸의 할아버지이다. 명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명종 시기의 권신 좌의정 심통원의 형이다.
- 상진: 명종 때 영의정이며, 윤원형과 친해 그에게 이용당했지만, 청렴한 명재상이다.
5.2. 선조 ~ 효종
- 이준경
- 권철: 아래에 기술된 이항복의 장인인 권율의 아버지, 즉 이항복의 처조부로 1571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좌의정 당시 많이들 알고 있는 문지방에 손을 넣고 "이 손이 누구꺼요?"하고 물은 사건에서 이항복의 기개를 보고 손녀사위 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9]
- 홍섬: 아버지 홍언필과 외조부 송질도 영의정으로 유명하다.
- 박순: 선조 초반기 서인의 영수 중 한 명이며, 명재상이기도 하다.
- 노수신: 선조 때 동인 중립 세력으로, 탕평정치를 펴고자 했지만 실패한다.
- 류전: 기축옥사 때 정철 등을 도와 옥사를 확대시키기도 했지만, 청렴한 정승이었다. 한음 이덕형의 외삼촌이다. 여담으로 활을 쏘던 어떤 무장에게 화살통이 마음에 든다고 그 화살통을 달라고 했다가 "이런 화살통 하나로 대감과 소인의 이름을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라며 거절당한 일화를 남겼는데, 그 무장이 바로 이 사람이다.
- 이산해
- 류성룡: 임진왜란 당시 전란 수습의 총 책임자.
- 윤두수
- 류영경: 소북파의 실세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다 광해군 즉위로 부패 혐의에 걸려 죽는다.
- 이항복: 오성부원군. 한음 이덕형과 오성과 한음 콤비. 정승은 이덕형이 먼저 되었으나, 영의정은 이항복이 먼저 되었다.
- 이덕형: 위의 이준, 수양대군을 제외하고 '정상적으로' 임명된 영의정 중에선 최연소이다. 임명 당시 43세.
- 이원익: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서 5번이나 영의정을 지냈다.
- 기자헌: 계축옥사 이후 대북파가 조정의 다수를 차지하면서 영의정에 올랐다. 강력한 대북세력의 일원이자 대북의 영수로 광해군의 즉위를 지지했고, 유영경과도 악연이 있었을 정도다. 하지만 같은 대북이면서도 이이첨의 악행에 항거를 했고 인목대비의 폐위에 반대했다.
- 정인홍: 기자헌이 영의정에서 물러난 후 영의정이 되었는데, 역시 대북의 영수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도 맹활약을 했다. 심지어 최고령 나이에 영의정에 올랐다.
- 박승종: 소북의 영수이며, 류희분과 함께 동맹을 맺고 이이첨과 대립을 했다.
- 윤방: 아버지 윤두수와 함께 부자 영의정으로 유명하다.
- 김류
- 신흠
- 오윤겸
- 이홍주: 청렴하며, 문무를 겸했던 영의정이었다.
- 신경진: 인조반정 1등 공신으로, 무관 출신으로 영의정에 오른 것은 박원종과 신경진 2명뿐이다. 참고로 아버지가 한때 조선 제일의 명장으로 불렸고,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이다.
- 이성구: 천주실의를 조선에 처음 소개한 책으로 유명한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의 아들로, 1641년에 영의정까지 올랐다.[10]
- 심열: 명종 시기의 영의정 심연원의 증손으로, 명종비 인순왕후의 남동생 병조판서 심충겸과 증영의정 심예겸의 아들이다. 경종비 단의왕후의 5대조이다. 청국과의 물물교환을 건의했던 인조 시기의 영의정이었다.
- 홍서봉
- 김자점
- 이경석
- 최명길: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로서 호란 이후 영의정을 지냈지만, 청으로 끌려간 적이 있었다. 자세한 건 문서 참조.
- 김육: 대동법의 확장과 화폐 사용을 강력히 역설한 효종 조의 명재상.
- 이시백: 인조반정 공신 이귀의 아들이며, 대동법에 찬성했다.
- 정태화: 영의정 정광필의 후손으로, 영의정을 5번이나 한 것으로 유명하며, 또 37번이나 사직상소를 올렸다.
- 심지원: 효종의 사위 심익현의 아버지로, 효종 시기에 영의정을 지내고 현종 시기에 원상과 좌의정을 지냈다.
5.3. 현종 ~ 정조
- 홍명하
- 김수흥: 형인 김수항과 함께 형제 영의정으로 유명하다.
- 허적: 탁남의 영수이자 영의정 중에서 그나마 세도를 좀 부려본 양반, 이 때는 의정부가 따로 없이 비변사에서 업무를 주관하였는데, 허적은 영의정이라는 직책말고도 군사를 통솔할 수 있는 직위인 도체찰사를 겸하였다. 다만, 숙종의 외숙인 김석주가 중앙군을 직접 통솔하고 있었기에 도체찰사라는 직책은 사실은 허울만 좋은 직위였다. 그래도 절제된 처신으로 효종, 현종의 신임을 받았고 숙종도 그를 중용했으나 서자인 허견의 역모로 죽고 만다. 야사에서는 그가 유악(기름먹인 천막)을 멋대로 가져다 써서 숙종의 미움을 샀다는 얘기가 있으나 실록 어디에도 관련 기록이 없다.
- 김수항: 송시열의 수제자 중 한 사람이자 청음 김상헌의 손자. 효종, 현종, 숙종 초의 중신이며 위의 김수흥이 동생이다. 호포제를 주장한 바가 있으며 기사환국 때 사사된다.
- 권대운: 숙종 시기 기사환국 이후 영의정이 되어 송시열의 사사를 주장하는 등, 과격하게 활동했다.
- 남구만: 숙종 시기 소론의 영수.
- 서문중: 숙종 시기 소론의 거두로 희빈 장씨에 대해 온건하게 대처할 것을 주장했다가 노론 대신들과 대립했지만, 노론과는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 류상운: 숙종 시기 남구만과 함께 소론의 거두로써, 아들인 유봉휘도 소론 거두였다.
- 최석정: 최명길의 손자이면서 남구만의 문인이며 소론의 거두로 영의정을 9번이나 했다.
- 신완: 신경진의 증손으로, 당파는 노론에 속했지만 장희빈을 살리려고 했다가 실패했다.
- 이유: 북한산성을 증축하는 데 공을 세운 영의정이었다.
- 이여: 강력한 노론 계열의 영의정으로, 숙종의 신임을 받았고, 송시열의 수제자로써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다.
- 서종태: 노론 계열의 영의정이지만, 대체로 노론 당색이 강하면서도 옅었던 영의정이었다. 아들인 서명균도 좌의정, 손자 서지수는 영의정이었다.
- 김창집: 숙종 말, 경종 초의 권신이자 김상헌의 직계 후손이며 김수항의 아들. 노론의 영수인 4대신의 필두였으나 삼수의 옥 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다. 이후 영조 대에 신원되었다.
- 조태구: 소론 완론의 수장. 경종 때 대리소동 당시에 우의정으로 재임하며 대리청정의 명을 거두는 데 앞장섰고 노론의 자폭으로 환국이 있자 영의정이 되었다. 소론이지만 온건파인 완론이라서 형식적으로나마 영조를 옹호했고 경종이 죽기 직전에 죽었다. 죽은 후에는 노론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관작이 추탈되지만 정미환국으로 복권되었고 뒷날 영조 31년의 소론 준론 집단 자살의 와중에 역률로 추죄된다.
- 정호: 노론 강경파의 수장으로, 노론 준론 세력이며 소론과 격렬히 대립했지만 본인은 청렴한 재상이었다.
- 홍치중: 노론 온건파 수장이며, 탕평책에 앞장섰던 영의정이었다.
- 심수현: 소론 계열의 영의정이지만, 노론 대신들과 굉장히 많이 타협했고 탕평책을 주선한 영의정이다.
- 이광좌: 이항복의 4대손. 소론 완론의 강경파. 삼수의 옥 사건 때 노론을 공격하는데 앞장섰고 영조 즉위 후에 수세에 몰린 소론 대신들이 죄다 노론과의 타협을 꾀하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노론 놈들이 삼수의 옥 때 반역한 게 아니면 뭡니까?"라고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여 노론들의 공공의 적으로 몰렸다. 영의정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노론의 공격으로 번번이 낙향했다. 그럼에도 4차례 영의정을 지냈다. 영의정 재임 중 탄핵을 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단식 중 죽었다. 사후 15년 뒤인 1755년(영조 31) 나주 괘서 사건으로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1768년(영조 44) 정후겸의 주선으로 복권되었다. 그러나 정조 즉위 직후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고, 1908년(융희 2) 순종 때 최종 복권되었다.
- 이의현: 노론 강경파 정승 중 한 명이며, 좌의정을 지낸 이세백의 아들이다.
- 김흥경: 노론 강경파 중 한 명이며, 아들이 영조의 부마이며 또 정순왕후와도 친척이 되어 영화를 누린 재상이다.
- 김재로: 노론의 영수 중에 한 명이며 권신으로 9년동안 영의정을 지냈고, 이후에도 영의정을 몇 번 하며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했고, 50년 가까운 공직 생활 중 절반 이상을 정승으로 지내면서도 청렴한 평가를 받은 명재상이기도 했다. 그의 아들인 김치인도 정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 조현명: 소론 탕평파의 영수로 영조의 총애를 받아 영의정까지 했으며, 처가는 노론으로 소론 당색이었지만 노론과 소론의 대립을 조정하려 노력했다.
- 이종성: 이항복의 5대손. 당파는 소론. 노론 유척기와 협력하여 사도세자를 보호했던 영의정이었다.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장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아버지는 영조 때 좌의정 이태좌이고, 이태좌의 재종동생[11]이 영의정 이광좌이다. 고모의 아들이 박문수이고, 박문수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 의지하여 자랐기 때문에 같이 수학하였다.
- 이천보: 사도세자를 가르치고 교육을 했던 영의정으로 사도세자의 광증을 막으려고 했지만 평양 원유 사건이 일어나자 음독자결을 한다.
- 유척기: 노론 강경파에 속했지만, 영의정이 되고 나서 약간 온건파로 전환했으며, 사도세자를 보호하려 했던 영의정이었다.
- 홍봉한: 영조의 외척이며, 사도세자의 장인이다. 실제로 홍봉한은 좌의정에 있을 때 실권이 강했다.
- 김상로: 노론 탕평파에 속하지만, 대체로 강경한 자세를 유지했다. 사도세자 죽음에 관해서 의혹이 있지만, 실제로는 형식적으로라도 사도세자를 옹호했다.
- 신만: 노론 탕평파에 속했다. 하지만 강경한 자세를 유지했고, 홍봉한, 김상로와도 가까웠다.
- 윤동도: 영조 후반기의 유일한 소론 영의정이며, 사도세자와도 가까웠다. 영조의 신임을 많이 받았다.
- 서지수
- 김치인: 영조와 정조 때 3번이나 영의정을 지내며, 탕평정치에 앞장섰다. 영의정을 역임했던 김재로의 아들이다.
- 김상복: 영조 때 영의정을 5번 지냈는데 홍봉한과 가까운 사이로, 정조를 보호하기도 했지만 정조가 즉위하자 척신 숙청 작업에 의해 귀양을 가기도 했지만 석방되어 은거를 하다 사망한 재상이다.
- 한익모: 홍봉한 일파와 가까운 영의정으로 좌의정과 영의정을 5번이나 한 최고 원로 재상이다. 하지만 정조 즉위 후 척신 숙청 작업에 의해 귀양을 갔다가 석방되어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난 재상이다.
- 신회: 형인 신만과 함께 형제 영의정으로 유명하며, 노론 계열 정승 중 한 명이다.
- 김상철: 영조와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내며 조정의 노소론 대립을 조정하려 했던 명재상이다. 그러나 아들 의혹으로 관직이 삭탈되지만 뒤에 정조에 의해 회복된다.
- 김앙택: 정조 초반기 영의정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지만 아들의 역모 의혹으로 삭탈관직되지만 본인은 편히 죽는다. 뒤에 다시 관직이 신원된다.
- 서명선: 정조 때 영의정이며, 소론 계열로 정조를 도와 정조 즉위에 공을 세웠지만 즉위 이후 벽파적 입장을 견인하기도 했다.
- 정존겸: 정조 때 영의정으로, 정조의 즉위에 공을 세웠다.
- 이재협: 정조의 개혁정치를 도운 영의정이다.
- 채제공: 정조의 충신, 정조의 탕평책의 핵심에 있었던 남인의 수장. 금난전권의 폐지를 건의하는 등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펴며 개혁군주를 도운 명재상.
- 홍낙성: 외척에 속했으며, 당파로는 노론이었다. 정조를 많이 도와주었다.
- 이병모: 정조를 도와서 개혁정치를 견인했지만, 순조 즉위 후 벽파적 입장을 견인하기도 했던 영의정이다.
- 이순신: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을 통솔했다.종전 후 1등 선무공신이 되었고, 정조 17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5.4. 순조 ~ 고종
- 심환지: 정조와 순조 때 노론 벽파의 수장, 이덕일식 사관과는 달리 실제로는 정조와 가까웠으며[12], 정조 사후에 영의정이 되면서 천주교 탄압에 앞장섰다.
- 이시수: 정조와 순조의 신임을 받은 영의정으로 소론의 마지막 영수이다.
- 서매수: 정조의 신임을 받은 청백리 영의정이다.
- 김재찬: 정조의 신임을 받았고 순조 때 영의정까지 하면서 사회 혼란을 수습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 서용보: 정조의 신임을 받았고, 정조 사후 정치 혼란을 잠재우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 정약용과의 악연으로 제일 유명하다.
- 한용구: 정조와 순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영의정이다.
- 남공철: 정조와 순조, 헌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고, 10년 가까이 영의정을 지냈다.
- 이상황: 김조순과 절친한 영의정이다. 육조의 판서와 대제학, 삼정승 등을 모두 지냈다.
- 심상규: 역시 김조순 계열의 영의정으로 권력을 행사하였다. 육조판서와 대제학, 삼정승 등을 모두 지냈다. 경복궁 근처에 있었던 화려한 그의 장서각은 당시 조선 최고 규모였다고 한다. 경화사족의 대표적 인물이다.
- 조인영: 풍양 조씨 세도정치의 중심 인물이었다.
- 권돈인: 헌종과 철종 때 2번이나 영의정을 지냈으며, (신)안동 김씨와 맞서다가 귀양을 가서 죽은 영의정이며, 추사 김정희와 절친이다.
- 정원용: 헌종과 철종 때 영의정을 지냈는데, 국가의 혼란을 잠재우려고 노력한 영의정이다.
- 김흥근: (신)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핵심 인물이다.
- 김좌근: 철종 시대 (신)안동 김씨의 수장.
- 흥인군
- 서당보
- 이유원: 이항복의 9대손.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6형제 중 한 명으로 유명한 이석영의 양부. 영의정 시절, 호조참판 최익현과 함께 흥선대원군의 하야를 추진하였다. 1882년(고종 19) 7월 전권대신(全權大臣)으로서 제물포조약에 조인하였다. 당시 전권부관은 김홍집이었다.
- 심순택: 고종 시대 1884년부터 1894년 일본의 내정간섭으로 영의정에서 물러날 때까지 10여년간을 영의정으로 재임하였다. 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영의정이었다. 대한제국 건국에도 의정대신으로서 참여하여 가장 큰 공로가 있었으며 특1등공신이었다. 대한제국 시기에 여러 번 의정대신을 역임하였다. 황희 다음으로 정광필, 정창손과 함께 영의정을 가장 오랫동안 역임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양반 사대부 중 유일하게 공작에 봉작되었다.
- 김홍집: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내각총리대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장인이다.
6. 영의정 추서 인물
- 정몽주
- 조광조
- 김식:선조에 의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신잡
- 오희문:인조에 의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송준길:현종에 의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김여물
- 이황: 사망 당시 우찬성이었으나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 민유중: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의 부친이며 숙종 때 병조판서를 지냈다. 사망 당시에는 영돈녕부사였으나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 장형: 숙종의 희빈인 장희빈의 부친이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목서흠: 숙종에 의해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 박문수: 영조에 의해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이하는 사후 바로 추증되지 않고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추증된 경우이다.
- 남은: 세종 즉위 이후에 죄( 1차 왕자의 난)가 있어도 개국의 공을 잊을 수 없다 하여 좌의정으로 추증되었다가 다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구사맹: 인조의 모후(母后)인
인헌왕후의 부친으로 인조 즉위 후에 추증되었다.
솔직히 여기있는 목록 중에 제일 억지다 - 이시발: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하였고, 병조좌랑·전랑을 지내며 병조판서 이항복, 도체찰사 류성룡을 보좌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해 명나라 군대 안내 및 사신 접대 등을 맡기도 하였다. 전후 경상도·평안도 관찰사를 지내며 왜적과 여진족의 침입을 방비하였고,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사후 80여 년 뒤인 1708년( 숙종 34)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 이순신: 전사 직후에 우의정으로 추증되었다가 선무공신에 봉하면서 좌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추후에 정조에 의해 영의정으로 최종 추증되었다.
- 민치록: 고종이 즉위한 후인 1866년(고종 3년)에 딸 민자영이 왕비가 되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여성부원군'으로 추증받았다.
7. 영의정 배출 가문 순위
순위 | 성씨 | 영의정 |
1위 | 전주 이씨 | 11인 |
2위 | 청송 심씨 | 9인 |
3위 | 신 안동 김씨 | 8인 |
4위 | 대구 서씨 | 7인 |
5위 | 청주 한씨 | 6인 |
8. 관련 문서
[1]
오늘날의 국무총리와 비슷한 격이다. 역사적으로도 조선 영의정은 차후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현 대한민국 국무총리의 전신으로 여겨진다.
[2]
당대 명칭 館閣(관각)
[3]
조선 초기에는 관부의 종류와 등급에 따라 영사(領事), 판사(判事), 동판사(同判事), 지사(知事), 참지사(參知事), 동지사(同知事), 동참지사(同參知事), 첨지사(僉知事) 따위의 벼슬 이름이 있었다. 이러한 경우 ○+관부+사의 형식으로 벼슬 이름이 정해졌다. 이를테면 영의정부사는 영+의정부+사로 조합된 것이다.
세조 연간(1455 ~ 1468) 이후 이러한 형태의 벼슬 이름은
중추부, 돈녕부(敦寧府)와 같은 명예직 관원이나 타관이 다른 부서를 겸관하는 경우에만 남았다.
[4]
세종이 의정부서사제를 시행하면서 기존 좌우 의정에 더해 영의정에게도 의결권을 준 데에는 육조직계제의 과도한 업무 부담에 더불어
당뇨병과 같은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던 건강 문제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5]
이는 조선 초기의 판문하가 명목상 문하부의 우두머리이지만 도평의사사에는 참여하지 않는 명예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이 영의정부사로 바뀌고 나서도 처음 몇년간은 영삼사사(領三司事)의 후신인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와 앞뒤 순서를 오갔고, 일반적으로 집정(執政)으로 인식되었던 관직은 좌우
정승이었다. 그래서 현대로 보면 위상이
부통령겸
상원의장과
국무총리와 비슷하다.
[6]
후술한 것처럼 수양대군, 김좌근처럼 실세 영의정도 있었지만 영의정으로 권신이 되었다기보다는 권신이 영의정도 한 것에 가깝다.
[7]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장, 경호실장, 합참의장or참모총장<훈련도감은 조선후기 중앙군의 중심으로 급료를 지급하는 특수병들이였고, 함께 한성을 방위하는 어영청과 금위영보다 앞선 위치>, 참모총장, 국세청장+조달청장, 한국은행장 권한보유<각 군영은 화폐주조권한이 있음>를 가진 것
[8]
이준경은 선조의 원상으로,
문정왕후를 반면교사로 삼은
인순왕후는
수렴청정이라는 명목하에 모든 결정권을 이준경에게 넘겼다. 높은 지위에 명종 사후 후계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책임지고 인순왕후의 결정을 도왔으며 조정의 신망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숙종 연간 초기 남인은
서인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강경파 청남(淸南)과 온건파 탁남(濁南)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갈등하였고 온건파 남인의 대신인 허적의 중재를 통해 청남, 탁남, 서인이 혼합된 국정이 유지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결정은 모두 허적을 통해 이루어졌다. 조정의 인사가 허적의 사랑채에서 행해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는 그나마 왕권에 우호적이었던 남인들을 기용하려 했던 숙종의 의사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남인의 권력이 너무 강해졌다고 판단한 숙종은
1680년(숙종 6) 허적을 제거하는 것을 시작으로
경신환국을 일으켰다.
[9]
이항복네 마당에 있던 배나무가 옆집 권철네 집으로 가지가 담을 넘어갔는데 그걸 권철이 멋대로 따먹은 게 계기가 되었다. 즉, 남의 나무에 달린 과일을 멋대로 먹고는 가지가 우리 집으로 넘어왔으니 우리집 거라고 권철이 먼저 우겼고 이를 갚아주기 위해 문지방에 손을 넣고 이 손이 대체 누구 것이냐고 물은 것. 참고로 현재 민법으로 보면 (과실은 나무 소유자에 귀속되므로)당연히 과실은 이항복네 것이고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10]
이수광 본인도 영의정으로 가는 청요직
이조판서 재직중 병사했으며,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된 것을 보면 그가 좀 더 오래살았을 경우 생전에 영의정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11]
이태좌가 이광좌의 8촌 형이다.
[12]
2009년에 그의 집안이 보관했던
비밀 편지들이 공개되면서 '정조 독살설'에서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