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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19:52:42

균역법

均役法

1. 개요2. 내용3. 기타4. 문제점5. 같이보기

1. 개요

조선 영조 때 군역(軍役)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실시한 제도.

2. 내용

이전부터 논의되어오던 제도이나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가 영조 26(1750)에 공포되었다. 인정(人丁) 단위로 2필씩 징수하던 군포(軍布)를 1필로 감해주고, 대신 균역청을 설치하여 줄어든 세원을 보충하는 정책을 실행하도록 했다. 왕족이나 권문세가, 지방 관아에서 세금을 매겨오던 어전(漁箭)[1], 염분(鹽盆)[2], 곽전(藿田)[3], 태전(苔田)[4]과 선박에 대해 국가에서 세금을 거두게 하였다. 그리고 토지마다 1결당 2말의 결작미를 징수하였는데, 이는 군역의 부담이 전세로 바뀌게 된 셈이다. 일부 상층 평민[5]을 대상으로는 선무군관이라는 지위를 주어 선무군관포 1필을 납부하게 하였다.

재정 결손 보완책인 급대와 관련해서는 영조 28년(1752) 균역청에서 편찬한 『균역청사목』에 자세히 규정되어 있다. 『균역청사목』에는 감혁(減革)과 급대 재원(給代財源), 급대처(給代處)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감혁이란 급대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군문과 관청의 체제를 변경하고 영(營) · 진(鎭)을 통폐합하여 군사의 수를 감축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감축된 군사의 수는 2만 919명인데, 이 숫자만큼 급대 비용이 생략되며 동시에 이들을 군포 납부자로 전환시킴으로써 군포 수입이 늘게 되는 셈이다.

감혁에는 그 밖에도 약 10만 명에 이르는 병조 소속의 기보병〔兵曹騎步兵, 보통 이군색(二色軍)이라 하며 선포군(納布軍)〕과 같이 2필에서 1필로 반감하는 것이 아니라 납부 기간을 조정함에 따라 실제로는 1/3만 감해 주는 방식, 즉 양정(良丁) 1인이 16개월에 2필(疋) 내던 것을 12개월에 1필(疋) 내게 하는 방식이 있었다. 또 금위영의 정군자보(正軍資保)나 각 도의 영 · 진 소속 군병의 경우 감필의 재정 손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급대를 하지 않는 방법도 있었다. 감혁에 의해 줄어든 액수는 홍계희가 지은 『균역사실(均役事實)』에 의하면 대략 50만 냥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40~50여만 냥이 남아 있었고, 이것은 급대를 지급해 주어야 하는 최소한의 양이었다.

급대 재원이란 바로 이러한 급대에 소요되는 비용을 확보하는 세원을 말는데 모두 5종류가 있었다. 『균역청사목』에 따르면 아래와 같다.

① 이획(移劃)
선혜청이 관리하면서 지방에 쌓아 놓은 저치미(儲置米)와 감사(監司)의 가족 동반을 금지한 데서 절감된 영수미(營需米) 등을 균역청으로 옮겨와 급대 비용으로 삼게 한 것으로, 영조 46년(1770) 이후에는 없어졌다.

②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군역을 피하고 있는 한정(閑丁)을 선무군관으로 삼아 일부를 시취(試取)하는 대신 1인당 1필씩 징수하는 것.

③ 어염선세(魚鹽船稅)
해세(海稅)라고도 하는데, 왕족이나 궁방에 지급되었던 어전세(漁箭稅) · 염분세(鹽盆稅) · 선세 등을 국고로 돌려 균역청 수입으로 삼게 한 것.

④ 은여결세(隱餘結稅)
이전까지 수령이 사사로이 쓰도록 묵인되었던 은결 · 여결에서 거둔 세금을 수령의 자발적 보고에 의해 균역청으로 돌린 것.

⑤ 결미(結米) 또는 결전(結錢)
평안 · 함경도를 제외한 6도의 토지에 대해 1결 당 쌀 2두 혹은 돈 5전을 거두는 것. 결미는 급재 재원의 반 이상을 차지할 만큼 비중이 컸다. 이렇게 확보한 급대 재원의 총 액수는 69만 냥을 넘었는데, 결미에서 거둔 세금 중 약 8만 냥은 지방에 있던 군병의 급대 재원으로 지방에 남겨두었으므로 균역청의 실제 수입은 이를 뺀 60만 냥 정도였고 이후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이 선은 유지하였다.

급대처는 감필로 재정 손실을 보게 된 군문 · 아문과 지방의 영 · 진에 급대해 주어야 할 액수를 규정한 것으로, 감혁과 미급대(未給代)에 따라 재조정되었다. 『균역사실』에는 급대처에 지급된 액수가 40여만 냥이라고 하나 『균역청사목』을 보면 균역법 시행 초기인 영조 28년(1752)에 이미 52만 냥을 넘었다. 영조 31년(1755)에 단행된 노비 신공(身貢)의 감필에 따른 급대마저 균역청이 담당하였고, 이후로도 각 관청의 소소한 부족 경비까지 지원해주느라 그 액수가 점차 증가하였다. 그래서 『만기요람(萬機要覽)』을 보면, 순조 7년(1807)에는 급대 총액이 쌀 4만 2450석, 목면 487통(同) 26필(2만 4376필), 포(布) 53통 31필(268필), 전(錢) 40만 8410냥으로 총계가 60만 냥을 휠씬 상회하여 균역청 수입의 대부분이 소요되었다.

군포 1필이 감해진 상태에서 비총법의 시행으로 징수량을 사전에 정해 읍별로 묶어 통보하면서 각 지역민들은 신분 구별 없이 군포계, 동포제를 꾸려 양반들도 군포 납부에 참여하는 현상이 점진적으로 늘었다. 이 같은 변화를 바탕으로 흥선대원군은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였다.

3. 기타

2017년 수능 한국사에서 이 조세 제도의 이름을 묻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문제 속 힌트는 군포를 1필로 낮춰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다는 것이었고, 배점은 3점이었다.

4. 문제점

균역법은 근본적으로 감세정책이다. 그러나 감세정책에 당연히 따라야 할 대안, 곧 재정손실분을 어떻게 만회할지 대안이 빠진 모순적인 정책이었다.

그렇다면 이 반토막 난 군포는 실제로 어떻게 메웠을까> 현장의 관리들이 '알아서' 눈치껏 백성에게서 거둬야 했다.[6] 이는 유난히 18세기부터 소위 탐관오리가 늘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 물론 영조가 이를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우둔한 임금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균역법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욕 먹는 자는 군포를 줄여준 '자비로운' 임금님이 아니니까. 나쁜 건 '뭔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세금을 더 거둬가는' 탐관오리들이니까.

물론 '알아서' 관리들이 재원을 마련하는 것도 재정을 완벽히 메꿀 순 없었다. 오군영 중 통제영은 균역법 실시 이후 역가와 어염세의 수입을 상실여 재정이 줄어든 탓에 급료 조달에 큰 문제를 겪었다. 병조는 균역법 때문에 병조 수입의 35%를 균역청에 의지하느라 재정자립도가 악화되었다. 다만 훈련도감에서는 다른 군영에 비하여 비교적 충실하게 급대 재원을 지원받았다. 요미주와 군수 마련에 어려움을 겪던 훈련도감은 균역법 시행으로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균역법의 성과는 조선 후기 사회의 현안 문제였던 양역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척결하는 개혁이 되지 못하였고, 감필을 통해 농민 부담을 약간 줄여준 데 불과했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당시의 군포 징수가 실제로는 매정 단위(每丁單位)가 아니고 촌읍 단위(村邑單位)였으므로 실제 혜택이 얼마만큼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이른바 지역에서 관행으로 실시되는 공동 납부 형태의 동포제가 실시되면서 균역법 시행의 의의가 사라진 것이다. 여기에 결작으로 세 부담이 늘어난 지주와 양반들이 세 부담을 소작농들에게 전가하고, 조정에서도 세수 확충을 위해 등록된 장정 수를 무리하게 늘리면서 농민의 부담은 한층 더 가중되었다. 균역법 실시 직후 바로 이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고, 삼정(三政) 중의 하나로서 군정의 문란이 19세기 후반까지 그 폐단으로 지적되었음은 균역법의 성과가 별로였음을 말해 준다.

5. 같이보기



[1] 물속에 설치하는 대나무로 된 어망 [2] 소금을 굽는 가마 [3] 미역을 따는 곳 [4] 김을 양식하는 곳 [5] 양반도 대상으로 한것으로 교과서에 서술된 적이 있는데, 연구 진행 결과 양반은 대상이 아니었던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전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2017년에 실시된 9급 지방직 공무원 시험에서 양반을 대상으로 선무군관포 제도를 시행했다는 지문이 답안으로 나왔으나 결국 답없음 처리되었다. [6] 이러한 각자도생식 재원 마련은 균역법을 넘어 (언제나 예산 부족에 시달리는) 조선 관청의 기본 자세였다. 어디서 뜯어오든, 장사를 하든, 타 부서 예산을 빼돌리든 눈치껏 돈을 마련해야 했다. 심지어 나랏돈을 최우선으로 배정 받는 훈련도감마저도 장사로 돈을 벌어야 했고, 웃프게도 '훈련도감표 배추'는 조선 청과류 업계를 휘어잡는 명품 브랜드가 되었다. 여기서 '아, 훈련도감 군기가 빠졌구나' 내지는 '역시 조선은 문약하구나'라고 결론 내려선 안 된다. 19세기 위정척사론자들마저도 서양무기 도입엔 진심이었을 정도로 국방은 조선의 최우선 국책이었고, 훈련도감은 국방 예산과 관심이 집중되는 최중요 부대였다. 그런 최정예 부대가 배추 농사라도 지어서 주머니를 채우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었단 소리다. 그리고 균역법이 이를 더욱 악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