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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15:17:10

승총명록


1. 개요2. 내용3. 특징4. 외부 링크

1. 개요

勝聰明錄. 조선 영조 원년, 1725년에서 영조 37년, 1761년까지 37년간 월봉 구상덕(具尙德)이 쓴 일기. 소유권자는 후손 구석찬이며, 현재 고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경상남도 고성 지방의 농촌 지식인인 구상덕이 20세가 되던 1725년 7월부터 56세로 별세한 1761년 8월까지 만 37년간 하루도 빠짐 없이 농가의 생활을 기록한 생활 일기이다. 일기 기록 당시 월봉이 살던 마을 행정 구역은 고성현(固城縣) 광내(光內) 일운면(一運面) 도산리(道山里)였으며, 현재 경상남도 고성군 거류면 송산리 일대이다.

저자는 과거 응시를 위해 몇차례 인근 지역을 왕래하거나 서울을 방문했을 뿐, 그 외에는 주로 향촌에서 농사와 서재 경영을 주업으로 했던 재지사족이었다. 일기에는 각 해당 날짜의 간지와 날씨를 기록한 후 그날 자신이 행한 행위와 향촌 사회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본문의 내용은 선비로서 접하게 되는 제반 활동과 경험 즉, 과거 응시, 향교 출입, 교유, 각종 제사의 집례, 농사와 농가 생활에 대한 내용, 이앙, 수확 시기, 곡물가, 부세 문제, 환곡 등을 다루고 있다.

3. 특징

고성 지방은 당시 낙동강의 수운과 경상도 남해안과 전라도 남서해안을 연결하는 포구시장권의 중심이었다. 실제로 조선 시대 당시 경상도 전라도 해안의 해운과 각 포구의 선박, 정박 능력, 주요 지점 간의 거리 등을 자세히 그린 채색 지도인 영호남연해형편도(嶺湖南沿海形便圖)와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보면 고성현을 중심으로 북쪽, 서쪽, 동쪽에 수많은 포구가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성 지방에서도 월봉이 거주한 광내 일운면은 바다로 향하는 산맥인 거류산과 통영과 경계를 이루는 벽방산 가운데 위치한 곳으로 고성읍과 통영과의 동쪽 중간 지점이었다. 또한 고성 지방은 해안 지역에 위치하면서도 고성 평야(이른바 바다들이라 불리는 곳)가 펼쳐진 지역으로 해산 자원과 농산 자원이 모두 풍부한 부촌 지역이었다. 이러한 풍부한 물산을 기반으로 하여 고성 지방 출신의 문신 이암이 우리나라 최초의 농서인 농상집요를 수입해오기도 했다.

이렇게 풍부한 물산과 수륙을 연결하는 교통망의 발달은 장시장의 발달과 함께 고성 지방의 문화적 분위기를 폐쇄된 사회가 아닌 개방적인 분위기로 이끌었고 이는 승총명록을 통해 곳곳에 드러난다. 서울에서 유명한 광대 놀이패들이 고성의 관아에 와서 공연한 내용이 들어있기도 하고(승총명록 권4 1750년 12월 29일 기사), 전국을 도는 외지 놀이패들이 원숭이를 데려와 재주를 부리는 모습을 구경한 내용 등이 있다.(승총명록 권2 1737년 1월 26일 기사)

그 외 1728년, 1732년 12월 ~ 1733년 12월, 1750년, 1754년 ~ 1756년에 고성 지방에 발생했었던 기근에 대한 내용, 1726년 2월 21일 관금산 화재와 1756년 10월 6일 서북 지역 화재 등 재앙 관련 내용, 1754년 마을 서재 건립, 각종 마을 관련 제사나 동제 또는 향약 관련 내용, 친족들간의 경제적 연대에 대한 내용, 1725년 12월 7일 관아에서 부민들에게 고기와 술을 나누어주거나, 1726년 5월 2일 관아에서 기민들에게 일승 오합씩을 무상 지급하고 조정에서 고성 지역의 대동 삭선미 46석을 제하고 기민을 구원한 내용, 1732년 1월 13일 고을 사또가 추위에 떠는 사람들을 위해 물건들을 무상 구원한 내용, 1750년 1월 10일 관에서 절간의 대오승들을 초청하여 희예를 공연하고 가난한 마을 사람들에게 풍족한 양식을 열어준 내용 등 당대 빈민 구제에 대한 내용 등등이 있다.

4.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