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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22:09:56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율리아네 공녀

<colbgcolor=#D7AA9C><colcolor=#000000> 러시아 제국의 대공비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율리아네 공녀
Prinzessin Juliane von Sachsen-Coburg-Saalfeld
파일:Anna_Fedorovna.jpg
이름 독일어 율리아네 헨리에테 울리케
(Juliane Henriette Ulrike)
러시아어 안나 표도로브나
(Анна Фёдоровна)
출생 1781년 9월 23일
신성 로마 제국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국 코부르크
사망 1860년 8월 12일 (향년 79세)
스위스 엘페나우
배우자 러시아의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
(1796년 결혼 / 1820년 무효화)
자녀 에두아르트(사생아), 루이즈(사생아)
아버지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어머니 로이스에베르스도르프의 아우구스테 여백작
형제 조피, 안토이네테, 에른스트 1세, 페르디난트[1], 빅토리아, 레오폴드 1세
종교 러시아 정교회
1. 개요2. 생애3.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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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공녀이자 러시아 제국의 대공비.

2. 생애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와 로이스에베르스도르프의 아우구스테 여백작의 3남 4녀 중 3녀로 태어났다. 동생으로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인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부인 빅토리아, 벨기에의 초대 국왕 레오폴드 1세 등이 있다.

율리아네가 14살이 될 무렵 러시아 제국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는 큰손자 알렉산드르의 결혼 이후 둘째 손자인 콘스탄틴 대공의 혼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여제는 신하인 안드레이 야코블레비치 장군을 보내 가장 아끼는 손자에게 걸맞은 신붓감을 찾아오게 했다.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국에 들른 장군은 공작의 딸들이 훌륭한 것을 보고 더 볼 것도 없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 여제에게 보고했다. 여제는 즉시 공작부인에게 딸들을 러시아로 데려오라는 전갈을 전했다. 작은 공국에서 러시아의 대공비를 뽑는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었다.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의 딸들 중 어린 막내를 제외한 세 딸들이 러시아로 향했다.

율리아네와 두 언니는 콘스탄틴 대공에게 선보여졌다. 아직 결혼 생각이 없었던 대공은 한참 망설이다가 가장 어린 율리아네를 골랐다. 1796년 2월 율리아네는 이름을 러시아식으로 안나 표도로브나라고 바꾸고 정교회로 개종했다. 1796년 2월 26일에 안나와 콘스탄틴 대공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생활은 매우 불행했다. 콘스탄틴 대공은 군대에만 관심있는 폭력적인 남자였다. 대공은 한번은 궁전에 있는 거대한 꽃병들을 모아다 그중 하나에 안나를 넣고 꽃병들을 하나씩 총으로 쏘는 위험한 장난을 치기도 했다. 어린 안나는 나이가 들면서 매우 아름다워졌다. 그러자 대공은 의처증이 생겨 안나를 방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더욱 폭력을 휘둘렀다. 안나에게 의지할 곳은 동서지간인 옐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 대공비 뿐이었다.

1799년, 몸이 안 좋아져 치료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안나는 그대로 고향에 머무르고 싶었지만 시댁이 무서웠던 친정과 러시아 황실의 압박을 받아야했다. 결국 시누이인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여대공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러시아로 돌아가야 했다. 2년 후, 시아버지인 파벨 1세가 암살당하고 안나는 다시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고향으로 돌아가 치료받으라는 허락을 받은 안나는 어머니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는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았다.

안나는 서신을 통해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콘스탄틴 대공은 이혼을 거부하고 화해를 요청했다. 몇번의 설왕설래가 오갔지만 이혼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 과정에 있는 동안 안나는 아버지가 다른 아이 두명을 낳았다. 1808년 10월 28일 프랑스의 하급 귀족 쥘 가브리엘 에밀 드 세뉴와의 사이에서 아들 에두아르트 에트가 슈미트-뢰베를 낳았다. 에두아르트는 안나의 동생 에른스트 1세에 의해 귀족 작위와 성씨를 수여받았다. 4년 후에는 자신의 시종인 스위스 출신 외과의사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다. 이 딸은 스캔들을 피하기 위해 프랑스 망명 귀족에게 입양보냈다.

1820년 공식적으로 콘스탄틴 대공과 이혼했다. 이후 스위스 엘페나우에서 여생을 보내다 1860년에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었다.

3.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쥘 가브리엘 에밀 드 세뉴 (사생아)
(Jules Gabriel Émile de Seigneux)
1남 에두아르트 에트가 슈미트뢰베 폰 뢰벤펠스
(Eduard Edgar Schmidt-Löwe von Löwenfels)
1808년 10월 28일 1892년 10월 3일 베르타 폰 샤우엔슈타인[2]
슬하 3남 2녀
로돌프 아브라함 드 쉬펠리 (사생아)
(Rudolf Abraham de Schifferly)
1녀 루이즈 힐다 아글레 도베르
(Louise Hilda Aglaë d'Aubert)
1812년 1837년 에두아르트 다플레스


[1] 포르투갈 국왕 페르난두 2세의 아버지이자, 불가리아 왕국 차르 페르디난트 1세의 할아버지이다. [2]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의 사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