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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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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8세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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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53b4><colcolor=#fff>
영국 윈저 왕조 제2대 국왕
에드워드 8세
Edward VIII
파일:Prince_Edward,_Duke_of_Windsor_(King_Edward_VIII)_Portrait_Print.webp
출생 1894년 6월 23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서리 리치몬드 화이트 로지
(現 영국 잉글랜드 서리 리치몬드 화이트 로지)
사망 1972년 5월 28일 (향년 77세)[1]
프랑스 일드프랑스 파리
묘소 영국 잉글랜드 버크셔 윈저 프로그모어 왕립묘지
재위기간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국왕
1936년 1월 20일 ~ 1936년 12월 11일
영국 자치령 국왕
1936년 1월 20일 ~ 1936년 12월 11일
인도 황제
1936년 1월 20일 ~ 1936년 12월 11일
서명
파일:에드워드 8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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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53b4><colcolor=#fff> 가문 윈저 가문
이름 에드워드 앨버트 크리스티안 조지 앤드루 패트릭 데이비드[2]
(Edward Albert Christian George Andrew Patrick David)
아버지 조지 5세
어머니 테크의 메리
형제자매 남동생 조지 6세, 여동생 메리, 남동생 헨리, 남동생 조지, 남동생
배우자 월리스 심프슨 (1937년 결혼)
종교 성공회 ( 잉글랜드 국교회)
장로회 ( 스코틀랜드 국민교회)[3]
신장 168cm[4]
군사 경력
복무 영국 육군
1913년 ~ 1916년
최종 계급 대위
명예 계급 원수 ( 영국 육군)
원수 ( 영국 해군)
원수 ( 영국 해병대)
원수 ( 영국 공군)
참전 제1차 세계대전 }}}}}}}}}
파일:255658-1330621396.jpg
공식 초상화[5]
1. 개요2. 칭호 및 작위3. 재위 국가4. 생애
4.1. 어린 시절4.2. 사랑받는 아폴로4.3. 왕세자의 로맨스4.4. 짧았던 재위 기간4.5. 왕위를 포기하다4.6. 퇴위 이후
5. 친(親) 나치 성향6. 인종차별7. 진짜 반역자?8. 가족관계9. 기타
9.1. 창작물에서9.2. 시대를 앞선 패션 감각9.3. 외모9.4. 숨겨진 자식이 있었다?

[clearfix]

1. 개요

파일:1650997938026.jpg
파일:external/kingpinchic.files.wordpress.com/princeofwaleedward.jpg
유년기 청년기

조지 5세 테크의 메리의 장남이자 선왕 조지 6세의 형. 선대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백부이자 현 국왕인 찰스 3세에겐 외백조부이다.[6] 본명은 에드워드 앨버트 크리스티안 조지 앤드루 패트릭 데이비드. 가족들에겐 퍼스트 네임인 에드워드가 아닌 미들 네임 ‘데이비드’로 불렸다.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기 위해 동생 요크 공작 앨버트 왕자[7]에게 왕위를 넘기고 윈저 공작이 되었다.

자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전혀 없는데, 적어도 심프슨 부인 사이에서 낳은 자녀는 없다.

2. 칭호 및 작위


즉위했을 때의 공식적인 칭호는 다음과 같았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와 해외 영국 자치령의 왕, 신앙의 수호자, 인도의 황제이신 에드워드 8세 폐하 (His Majesty, Edward the Eighth, by the Grace of God, of Great Britain, Ireland, and of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King, Defender of the Faith, Emperor of India)

다른 국왕들과는 달리 '~ 훈장의 주군'이라는 칭호는 덧붙여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워낙에 재위 기간이 짧았던지라 훈장을 수여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관식도 하지 않았다.[8]

3. 재위 국가

파일:British_Empire_in_December_1936.png
1936년 즉위 당시 에드워드 8세의 통치 영역
영국   대영제국 자치령   대영제국 보호령[9]
국가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기간 비고
<colbgcolor=#c2e68b,#4f7419> 영국 1936.1.20. 1936.12.11. 326일
캐나다 1936.1.20. 1936.12.11. 326일
호주 1936.1.20. 1936.12.11. 326일
뉴질랜드 1936.1.20. 1936.12.11. 326일
남아프리카 연방 1936.1.20. 1936.12.11. 326일
아일랜드 1936.1.20. 1936.12.11. 326일
인도 제국 1936.1.20. 1936.12.11. 326일 황제위
뉴펀들랜드 1936.1.20. 1936.12.11. 326일 [10]

4. 생애

4.1. 어린 시절

증조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시기인 1894년 6월 23일 리치몬트 파크의 화이트 로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인 에드워드 왕세자였고, 아버지는 조지 왕세손이었기 때문에 출생 당시 왕위 계승 서열 3위로 장차 영국의 왕이 될 인물이었다.
파일:235555-1323787975.jpg
빅토리아 여왕, 에드워드 7세, 조지 5세, 에드워드 8세
1894년 7월 16일 화이트 로지에서 성공회 유아세례를 받았다. 에드워드라는 이름은 세상을 떠난 큰아버지, 앨버트 빅터의 애칭이었던 "에디(Eddy)"로부터 따왔다. 가족들 사이에서는 마지막 이름인 '데이비드'로 주로 불렸다.[11]
파일:George V_family photo.jpg
<rowcolor=#FFF> 가족 사진[12]
당시 상류층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에드워드는 동생들과 함께 유모의 손에 자랐다. 보모 중 한명이 에드워드를 꼬집고 학대했는데, 에드워드의 울음 소리를 들은 조지 5세 메리 왕비는 곧바로 보모를 해고했다. 이후 보모는 샬럿 빌로 교체되었다.

조지 5세는 엄격한 원칙주의자였지만 자식들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부모였다. 어머니 메리 왕비 역시 아이들과 장난치는 것을 즐겼는데, 어느날 아이들이 프랑스인 가정 교사의 토스트에 올챙이를 올려놓는 장난을 치자 이를 꾸짖기는 커녕 아이들의 장난을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에드워드는 가정 교사인 헬렌 브리카에게 개인 지도를 받았다.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한 후 조지 5세와 메리 왕비는 9개월 동안 대영제국 순방을 떠났다. 이때 어린 에드워드와 형제들은 조부모인 에드워드 7세 알렉산드라 왕비와 함께 지냈고, 에드워드 7세 부부는 손주들을 예뻐하며 정성스럽게 돌봤다고 한다. 조지 5세 부부가 귀국하자 에드워드는 프레데릭 핀치와 헨리 한셀이라는 두 남성 교사에게 개인 교습을 받기 시작했다.

에드워드는 13세가 될 때까지 한셀에게 엄격한 지도를 받았으며, 한셀은 그에게 독일어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1907년, 에드워드는 오스본에 있는 왕립 해군 학교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2년을 보낸 후 에드워드는 다트머스에 있는 브리타니아 왕립 해군 대학으로 진학했으며, 2년 동안 다닌 후 영국 해군에 복무할 예정이었다.

1910년 5월 6일 할아버지 에드워드 7세가 사망하자, 아버지 조지 5세가 왕위에 올랐다. 에드워드 8세는 자동적으로 콘월 공작과 로스시 공작 작위를 받았으며, 한달 후인 1910년 6월 23일, 16세 생일을 기념해 웨일스 공에 정식으로 서임되었다. 공식적인 왕세자가 된 에드워드는 해군 과정을 그만두고 3개월 동안 HMS 힌두스탄 호에서 군 복무를 한 후 옥스퍼드 대학교의 모들린 컬리지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시절에는 교내 폴로 클럽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8학기만 다닌 후 졸업을 하지 않고 학교를 그만둬 학위는 받지 못했다.

4.2. 사랑받는 아폴로

에드워드는 1911년 7월 13일 카나번 성에서 열린 서임식을 통해 공식적으로 웨일스 공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서임식은 웨일스 정치인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정부의 권유로 이뤄진 것이었는데, 로이드 조지는 웨일스의 특징을 반영한 독특한 의식을 기획했고 에드워드가 웨일스어로 연설하도록 했다.[13]
파일:에드워드8세_왕세자.jpg
1914년, 아버지 조지 5세와 함께 버킹엄 궁전에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에드워드는 영국 근위대에 척탄병으로 입대했고 전쟁에 참전하기를 원했으나, 국왕의 후계자가 전쟁에서 사망할 경우 큰 혼란이 있을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참전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는 참호전을 직접 목격했고, 가능한 한 최전선을 자주 방문했다. 이 공로를 인정 받아 밀리터리 크로스를 수훈받기도 했다. 전쟁에서 에드워드의 역할은 제한적이었지만 당시 참전 용사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으며, 전쟁 도중 조종사 면허를 취득하기도 했다.

1919년 1월 18일, 막내동생 존 왕자가 사망했다. 존 보다 11살이나 많았고 존과 함께 지냈던 적이 거의 없었던 에드워드는 동생의 죽음을 유감스럽고 성가신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1924년 미국 순방 당시.
1920년대에 에드워드는 왕세자로서 아버지 조지 5세를 대신해 공무를 수행하는 일이 많았다. 왕세자라는 높은 지위와 수려한 외모, 미혼이라는 점으로 인해 많은 대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인기가 절정이었을 때는 당대에 가장 사진이 많이 찍힌 유명 인사였다. 또한, 앞서나가는 패션 감각 역시 큰 주목을 받았다. 1924년 미국 방문 당시 Men's Wear 잡지는 "미국의 대부분 젊은이는 지구상의 다른 어떤 이보다 웨일스 공의 옷에 더 관심이 많다."라고 적을 정도였다.

에드워드는 영국의 빈곤 지역을 방문했으며, 왕세자 시절 대영제국의 여러 지역을 총 16차례나 순방했다. 에드워드는 당시 백인이 본질적으로 우월하다고 믿었는데, 호주 방문 당시 만난 호주 원주민에 대해 '원숭이'라는 비하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4.3. 왕세자의 로맨스

[navertv(37113777)]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14부 - 운명의 연인들中[14][15]
1917년까지 에드워드는 서부 전선에 있는 자신의 연대에서 휴가 기간 동안 파리에서 파티를 즐겼다. 이때 마거리트 알리버트라는 매춘부를 소개받고, 그녀에게 첫 눈에 반했다고 한다. 에드워드는 알리버트에게 편지를 썼고, 마거리트는 이것을 계속 보관했다고 한다. 하지만, 약 1년 후 에드워드는 알리버트와 결별했다. 1923년에 알리버트가 사보이 호텔에서 남편을 총으로 살해한 후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 왕실에서 알리버트의 입에서 에드워드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했다고 한다.

1917년 에드워드는 4대 서덜랜드 공작의 막내 딸인 로즈마리 워드에게 청혼했다. 하지만 로즈마리의 어머니인 서덜랜드 공작부인의 자매가 에드워드 왕세자의 할아버지 에드워드 7세의 정부였고 공작부인의 남동생은 도박꾼이었다. 때문에 조지 5세 메리 왕비가 결혼을 허락해주지 않아 두 사람은 결국 헤어졌다고 한다.[16]

당시 에드워드의 복잡한 로맨스와 스캔들은 스탠리 볼드윈 총리와 아버지인 조지 5세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조지 5세는 에드워드가 다른 형제들처럼 결혼해 정착하지 못하고 유부녀와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울화가 터졌는지 "네 놈이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차라리 버티 릴리벳[17] 왕위를 물려받기를 바란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말로는 한심한 장남의 꼬라지를 보고 " 저 애는 12개월도 못 넘기고 왕좌에서 내려올 거야."라고 한탄했다 한다.[18] 1929년에 타임지는 에드워드가 동생 요크 공작 앨버트 왕자의 아내인 요크 공작부인 엘리자베스"엘리자베스 왕비"라고 부르며 놀렸다고 보도했다. 왕비와 여왕은 모두 영어로 'Queen'인데 엘리자베스 공작부인과 이름이 같은 엘리자베스 1세(Queen Elizabeth)에 빗대어 별명을 만든 것이다. 당시 타임지는 "엘리자베스 공작부인은 가끔 에드워드가 조지 5세가 죽은 후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것이라고 말한 이야기에 얼마나 많은 진실이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만약 에드워드가 자신의 권리를 모두 포기한다면 그녀의 별명이 실현될 것이다"라고 적었는데, 놀랍게도 정확히 7년 후 모두 현실이 되었다.

1930년, 조지 5세는 에드워드에게 윈저 그레이트 파크에 있는 포크 벨베데레를 임대해줬다. 이곳에서 에드워드는 프레다 더들린 워드, 델마 퍼니스 등 유부녀들과의 밀회를 즐겼다. 한편, 월리스 심프슨 부인은 1927년 미 해군 장교였던 얼 윈필드 스펜서 주니어와 이혼했고, 두 번째 남편이었던 영국계 미국인 사업가 어니스트 심프슨을 따라 영국에 왔다. 월리스 심프슨은 당시 델마 퍼니스의 소개로 에드워드를 만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당시 유부녀와의 부적절한 관계는 조지 5세와 에드워드의 관계를 더욱 악화하게 만들었다. 1935년 에드워드는 월리스를 버킹엄 궁전에 데려와 조지 5세와 메리 왕비에게 소개했지만, 두 사람은 월리스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에드워드와 미국인 이혼녀의 관계를 비밀리에 조사한 경시청의 보고서에 따르면, 두 사람이 골동품 가게에 방문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 가게의 주인이 "그 부인이 웨일스 공을 완전히 포로로 손아귀에 넣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의심스러운 과거를 가진 미국인 이혼녀가 왕세자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전망에 내각에서는 우려섞인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4.4. 짧았던 재위 기간

1936년 1월 20일 아버지 조지 5세가 사망하자 영국의 국왕과 인도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다음날 에드워드 8세는 그동안의 관례를 깨고 세인트 제임스 궁전 안에서 자신의 즉위 선포식을 지켜봤다. 이때 옆에 서 있었던 사람이 바로 당시 연인이었던 월리슨 심프슨이었다.

에드워드 8세는 즉위하자마자 민감한 정치 문제에 대한 간섭으로 해석되는 행동으로 인해 논란을 일으켰다. 사우스 웨일스의 한 마을을 방문하던 도중 실직한 광부들을 보고,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정부 정책의 변화를 일으킬만한 발언은 아니었지만, 내각에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는 발언이었다. 또한 중요한 보고 사항이 담겨있는 정부 문서를 왕비도 아닌 연인이었던 월리스 심프슨과 공람하는 바람에 내각으로부터 기밀 유출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외에도 각종 관례를 깨는 기행을 벌였는데, 본인의 대관식을 위해 열린 대관식 위원회의 첫 회의 날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대관식을 생략해도 되지 않느냐고 묻는다거나[19], 즉위를 기념해 발행된 주화의 초상화를 아버지 조지 5세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했고[20], 버킹엄 궁전에서 국왕 관저 구역이 아닌 국빈들에게 제공되는 벨기에 스위트룸 구역을 자신을 관저로 사용하는 등의 행동을 해 많은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한편 왕비도 아니었던 심프슨 부인과 공식 행사에 동행하기도 했는데[21] 1936년 8월부터 9월까지 진행된 지중해 순방애도 동행하면서 국왕이 곧 심프슨 부인과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특히 순방이 끝난 10월부터 심프슨이 배우자와 이혼 절차에 들어가면서 두 사람의 결혼은 거의 기정 사실화가 되었다. 하지만 이를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아 일반 대중들은 에드워드 8세가 퇴위를 선언하기 전까지 이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4.5. 왕위를 포기하다

파일:에디와 심프슨 2.png
<rowcolor=#FFF> 부인 월리스 심프슨과 함께
1936년 11월 16일 에드워드는 스탠리 볼드윈 총리를 버킹엄 궁전에 불러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볼드윈은 재혼이 성공회의 교리와 어긋나고, 국민들이 심프슨 부인이 왕비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라며 반대 의사를 전했다. 에드워드는 영국의 국왕으로서 국교회인 성공회의 명목상 수장이었고, 따라서 성공회의 교리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심각한 헌정 위기를 초래하는 것이었다. 이러다보니 캔터베리 대주교까지 나서서 결혼을 결사 반대했다.

그러자 에드워드는 귀천상혼의 형식으로 결혼해 자신은 계속 국왕으로 재위하고, 심프슨 부인은 왕비가 되지 않으며 둘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녀에게도 왕위계승권을 주지않는 안을 계획했다. 당시 윈스턴 처칠은 해당 안을 지지했으며,[22] 일부 역사가들은 처칠이 해당 계획을 수립했다고 주장하고 있다.[23] 하지만, 이 역시 내각과 자치령 정부들의 반대로 실현시키지 못했다. 당시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연방의 총리들은 국왕이 이혼녀와 결혼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전달했고, 심프슨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던 뉴질랜드 총리는 국왕이 이혼녀와 결혼하려 한다는 사실을 믿으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급기야 볼드윈 총리는 "이혼을 2번이나 한 이혼녀와 결혼하면서 왕위를 지킬 수는 없다. 왕위를 포기하거나 결혼을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를 골라라. 둘 다 포기하지 않겠다면 내각이 총사퇴를 하는 수밖에 없다"고 최후 통첩을 날린다.

내각이 국왕과의 의견 차이로 사임하는 것은 입헌군주제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고, 에드워드는 결국 볼드윈 총리에게 심프슨과 결혼할 수 없다면 퇴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파일:에드워드8세_퇴위문서.png
에드워드 8세의 공식 퇴위 문서[24]
에드워드는 1936년 12월 10일 퇴위 문서에 공식적으로 서명했다. 당시 문서에는 "나와 내 후손을 위해 왕위를 포기하겠다는 나의 돌이킬 수 없는 결의와 이 퇴위 문서에 즉시 효력이 부여되어야 한다는 나의 소망을 선언합니다"라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

에드워드 8세는 아버지 말대로 고작 10개월 22일 동안 재위한 다음, 결국 "나는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이 없이는 왕의 책무를 다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로 시작하는 세기의 연설을 끝으로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윈저 공작이 되었다. 영국 언론은 처음에는 왕실의 품위를 위해 에드워드와 심프슨의 연애에 침묵했지만 미국을 포함한 해외 언론들의 보도를 막을 수 없었다.

에드워드 8세가 퇴위하자 원래는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가 갑자기 왕위를 떠맏게 된 조지 6세는 부담감 때문에 어머니를 찾아가 1시간 동안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퇴위 때문에 엘리자베스 왕비(조지 6세의 아내)는 에드워드 8세 부부를 매우 싫어했다. 하필 조지 6세의 재위 기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냉전이 시작되는 등 나폴레옹 전쟁 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역사상 가장 급박한 시기였고, 이 때문에 조지 6세는 스트레스와 줄 담배로 건강을 해쳐서 일찍 죽었다. 엘리자베스로선 에드워드 8세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남편이 고생하다가 일찍 죽었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는 왕족 출신이 아니라서 신분이 낮다고 했을 뿐, 엄연히 친아버지가 백작으로 귀족 집안 출신이었고 과거 행적도 무난했다. 조지 5세와 메리 왕비도 엘리자베스를 직접 만나본 뒤 '이런 처자라면 버티와 결혼할 만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심프슨 부인은 미국 출신인 데다 에드워드와 만나기 전까지의 결혼 생활도 상당히 지저분했다. 아니, 에드워드 본인이 그 지저분의 한 요소였다. 개개인의 실제 성품을 떠나서 이런 대외적인 이미지와 행적만으로도 왕실과 대중들은 엘리자베스보다 심프슨 부인을 더욱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왕세자 시절 육촌 러시아 제국 제1황녀였던 올가 여대공과 혼담이 있었다. 만일 이 결혼이 성사되었다면 에드워드 8세가 훗날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25] 즉, 현재의 찰스 3세 왕정이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말. 거기다 올가와 에드워드의 혼인이 무사히 진행되었다면 에드워드의 아버지 조지 5세 러시아 혁명 때 차르 일가의 구조를 망설이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4.6. 퇴위 이후

퇴위 직후인 1936년 12월 12일, 영국 추밀원의 즉위 위원회 회의에서 조지 6세는 에드워드 8세에게 '윈저 공작'이라는 작위를 주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며, 이듬해 3월 8일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에드워드를 왕실 공작(Royal Dukes)으로 만들어 영국 하원 선거에 출마하거나 상원에 출석해 정치적인 발언을 할 수 없도록 하기위한 조치였다. 즉, 에드워드를 고위 왕족으로 만들어 정치 참여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시킨 것이다.[26]

1937년 6월 프랑스에서 심프슨 부인과 결혼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보우스 라이언 왕비의 강력한 반대로 심프슨은 Her Royal Highness(전하)의 칭호와 왕족으로서의 혜택은 받지 못했다. 그저 남편의 작위에 따라 윈저 공작부인(Duchess of Windsor)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시대에는 왕족이 배우자감으로 이혼 경력이 있는 사람을 들일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37년 10월 나치 독일을 순회하는데, 이러한 배경에 있어서 에드워드 8세는 책임과 의무가 크게 따르는 국왕의 자리보다는 왕세자 시절처럼 즐기며 살고 싶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중 앞에서의 인기를 누리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심프슨 부인에게도 왕비처럼 환대받게 해주고자 독일을 방문했다고.

심프슨 부인이 나치의 스파이였으며, 에드워드 8세도 여기에 영향을 받아 히틀러와 내통했다는 설이 있다. 심프슨 부인의 정체는 2002년 공개된 FBI 보고서를 통해 밝혀졌다고 하는데 이는 불확실한 의혹이다. 심프슨 부인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보고서가 있기는 하나 확실하지 않다. 다만 여러 남자를 만나 이로 인해 낙태를 하여 아이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문란한 생활을 즐겼고, 만났던 남자들 중 파시스트 성향이 있는 친나치 인물들도 있었다. 특히 에드워드 8세가 프랑스에 연락관으로 복무할 때도 이런 나치 인물들과 연락을 주고 받았기에 나치의 스파이 의혹과 에드워드의 친나치 성향과 반역죄로 처형당해도 할 말 없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에 어느정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하는 의혹이 당시에도 사그러들지 않았다. 이러한 의혹은 미국 FBI 뿐 아니라 영국정부도 인지하고 있었는데 영국 공영방송국인 BBC[27]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인 '에드워드 8세 영국의 나치 왕'에서도 언급이 된다.

1940년 7월 7일에 작성된 영국 정보기관의 첩보에 따르면, “독일은 윈저 공작 부부의 협조를 기대하며, 공작부인은 어떻게 해서든 왕비가 되고자 한다”며 “독일은 그녀와 협상 중이다”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어 “독일은 윈저 공작이 이끄는 반대정부를 제안하고, 독일은 런던 공격 중 조지 왕이 퇴위하리라 본다”라고 보고했다. 이러한 가상 계획은 실제로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왕실은 크게 부담을 느꼈다고 한다. 이러한 첩보에 대해 에드워드 8세는 계속해서 부인했다.

1940년에 윈저 공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연락을 담당하는 연락장교로 복무중이었는데 독일 외교관과 통화중 실수로 독일측에 영국의 전략을 누설해서 처칠을 불안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나치 독일이 프랑스 파리를 침공하자 영국군과 같이 후퇴하지 않고 심프슨 부인과 여행간다는 이유로 모든 짐을 싸서 프랑스 남부 비아리츠를 경유해서 나치에 협력적인 스페인으로 도망가버렸다. 결국 분노에 찬 처칠의 명령으로 영국정보기관의 추적을 받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붙잡혔고 처칠과 영국 왕실의 압력으로 바하마 총독을 맡게 된다. 이 때문에 리스본에서 바로 바하마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이후 윈저 공 부부는 영국 정부, 영국 왕실의 눈 밖에 나버려 감시를 받게 되었으나 정신을 못 차리고 바하마에 미국 기자들을 불러 친나치적인 발언을 하고 나치를 지지한다고 하여 왕실과 정부로부터 완전히 외면받게 된다.[28] 이런 업보가 크게 작용해 윈저공은 전쟁이 끝나도 영국에 돌아가지 못했고 남은 여생을 프랑스에서 보내게 된다.[29]

왕실의 행사 때문에 어쩌다 한번 영국 버킹엄 궁전에 들렸을 때도 왕족들이 윈저 공을 피했고 왕실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왕대비는 말할 것도 없고 필립공도 생전 그를 기피했다. 젊은 시절 그의 친구였던 마운트배튼 백작도 기피했었고 왕실 시종장들은 더더욱 심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역시 전 국왕에 대한 사소한 예는 갖추었지만 기왕이면 피하려 했다. 조지 6세는 에드워드에게 "자신의 초대 없이 영국을 방문한다면 연금을 끊어버리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당시에도 왕실에서 전직 국왕은 현직 국왕의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관례를 들어 참석을 거부해 프랑스에서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대관식을 지켜봐야 했다고 한다.

에드워드는 퇴위 후 수 년이 지나면 다시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1972년 후두암으로 사망하고 나서야 윈저성 근처 묘지에 안치되어 영국으로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5. 친(親) 나치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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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와 만나는 에드워드 8세 부부 1937년, 나치 독일을 방문해 환대받는 에드워드 8세
'왕은 군림하되 통치는 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원칙을 어기고 "왜 자꾸 독일과 안 좋게 지내려고 하냐. 독일과 사이좋게 지내자."며 자꾸 외교정책에 간섭하는 바람에 앤서니 이든 외무부 장관을 몇 번이나 난처하게 했다.

그런 탓에 퇴위 후에도 여러모로 영국 왕실에 부담을 주었으며 독일군의 영국 침공을 이용하여 왕위 복귀를 노렸다거나, 독일이 그를 영국으로 보내서 다시 왕위에 올리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긴 하다. 실제로 영국 해군에서 프랑스 함락 전에 급하게 루이 마운트배튼 경을 모시고 올 정도로 심각하게 여겼다. 만약 그가 왕위를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영국은 당장 독일과 강화하자는 의견이 우세했을 것이고 2차대전의 향방이 달라지거나 상당한 국론분열을 야기시켰을 것이다. 그 때문에 왕이 본분을 잊고 몰지각하게 행동한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또한 영국 정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일 함선을 타고 1937년 나치 독일을 방문해 나치 고위간부들과 식사, 파티를 즐겼으며 히틀러의 산장에 가서 호화로운 만찬을 즐기는 등 사사건건 영국 정부와 충돌하였다. 특히 나치 독일의 야욕이 드러난 1939년에 나치 독일과 영국은 친밀해야 된다는 라디오 방송을 녹음 했지만 영국 공영방송국인 BBC에서 방송을 거부했다. 이후 1945년 바하마 총독을 사임할 때도 친나치 발언을 서슴치 않았고 기자들을 불러모아 나치가 미국을 무찌르는 날에 다시 복귀하겠다라고 하였으나 전시검열로 인해 보도되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에드워드 8세의 라디오 방송을 거부한 BBC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에드워드 8세 영국의 나치 왕'에 따르면 에드워드 8세는 자신의 아버지가 윈저 왕조로 이름을 바꾸기 이전에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의 독일 혈통에 대해 큰 자부심이 있었으며 어렸을 때부터 독일에 관심이 많았고 이로 인해 친독일 성향이 있었다고 한다. 나치 독일과 전쟁을 치르고 자신의 나라가 폭격당해 불바다가 되어도 친나치 성향을 버리지 못한 이유도 바로 성장기 시절의 친독일 성향때문이라고 한다. 아버지 조지 5세가 1차 대전으로 영국국민들의 반독일 감정으로 인해 왕실이 피해볼까 우려해 왕조 이름을 통째로 바꿔버렸는데 그 아들은 나치 독일에 푹 빠져 영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남은 여생을 프랑스에서 보내게 되었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함께 나치식 경례를 같이 하는 사진이 2015년에 발견되어 뒤늦게 논란이 된 적도 있다. 다만 1935년에 찍힌 것으로, 2차대전 이전 히틀러가 인기를 얻던 시기였고 엘리자베스 2세는 이 때 고작 열 살이었다.

여담으로 에드워드 8세를 끝까지 지지한 것은 다름아닌 윈스턴 처칠. 그렇다고 해서 처칠이 에드워드 8세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했다는 것은 아니다. 처칠도 에드워드 8세와 나치 독일의 연관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런 에드워드 8세가 민감한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에드워드 8세가 바하마 총독으로 사실상 추방을 당하게 된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처칠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에드워드 8세는 처칠에게 불만이 담긴 편지를 자주 보냈는데, 에드워드 8세의 편지에 답장 쓰는 것이 나치 때문에 안 그래도 바쁜 처칠에게는 큰 스트레스였다고 한다.[30]

오스트리아 출신 나치의 SS 중령인 오토 스코르체니의 회고록 Meine Kommandounternehmen에 의하면 에드워드 8세는 1936년에 코버그 경[31]을 통해 아돌프 히틀러에게 영국- 프랑스- 독일 간의 3자 동맹을 맺자는 의견을 제의하였다고 한다. 또한 에드워드 8세는 버킹엄 궁과 퓌러 집무실 간의 직통 연락선을 구축하자는 제안까지 했다고 한다.

6. 인종차별

인종차별을 저지르기도 했다. 쇼와 덴노가 황태자이던 시절에 영국을 방문하였을 때, 왕세자였던 에드워드와 같이 가서 정장을 맞춘 일이 있었다. 그런데 히로히토가 일본으로 돌아가자 에드워드는 자신의 친구와 함께 일본인 노동자의 복장을 입고 파티에 참석했다. 요컨대 일본의 황자가 유럽인을 흉내내서 양복을 입는 것이나 영국 왕자가 일본의 하층민을 흉내내는 것이나 똑같이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에드워드는 애인에게 쓰는 편지에서 히로히토를 고급 원숭이라고 지칭했고, 일본인들이 토끼처럼 빠르게 번식한다고 적었다.

영연방 국가들이 자신의 결혼에 반대한다고 하자 호주를 사람도 없는 나라인데 무슨 상관이냐고 무시했다. 호주 원주민들에 대해서는 1920년 호주 방문 당시 편지에 "가장 혐오스러운 생명체"로 부르며 원숭이에 비유했다.

정작 동생 조지 6세는 형과는 달리 자메이카에서 흑인과 함께 테니스를 치면서, 인종차별이 유효하던 당시 시대에 인종 간의 평등한 모습을 보여줬다. 심지어 조지 6세는 즉위한 후인 1947년 남아프리카 연방을 방문했을 때도 흑인과 악수하지 못하게 하는 현지 경호원들에게 게슈타포라 일갈한 적도 있다. 이외에도 인종차별주의자들을 죽여버리고 싶다고 할 정도로 불쾌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32]

7. 진짜 반역자?

당시 주벨기에 독일 대사가 밝힌 바에 의하면 당시 프랑스에 무관으로 파견되어 있던 에드워드는 연합국의 벨기에 방어 계획을 독일 측에 흘렸다고 한다. 1940년 리스본 주재시에는 "영국에 대한 효과적인 폭격이 가해진다면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폭격이 시작된 후에는 "폭격이 이어진다면 영국도 평화를 원하게 될 것"이라고 오랜 친구인 스페인 외교관에게 말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 말을 하고 1개월 후에 독일의 영국 폭격이 시작되었다. 이 발언은 리스본의 독일 영사관을 통해 전부 독일에 전해졌다. 바하마로 간 후에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미국 저널리스트인 풀턴 아워슬러에게 "히틀러가 실각한다면 비극적인 일이 될 것이다. 히틀러는 논리적으로 봤을 때 합당한 독일의 지도자이며 매우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는 미영연합군이 나치와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던 시기였다. 그 시기에 미국인에게 이런 얘기를 한 것이다. 심지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독일과 평화 용의가 있다면 즉각적으로 지지하겠다고 전해달라. 만약 영국 정부가 반대한다면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켜 결국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사석에서 대독강경파인 앤서니 이든은 총살당해야 할 인간이며, 전쟁은 모두 공산당과 유대주의자들의 음모라는 식으로 떠벌리고 다니기도 했다. 하도 심해서 윈저 공의 미국 방문 시 루즈벨트 대통령이 혹시 딴짓할까 봐 감시팀까지 붙였을 정도. 이런 태도에는 로마노프 왕가를 전멸시킨 소련 공산당에 대한 반감과 평소부터 가지고 있던 반유대주의 음모론 성향이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행적들은 나치 독일 정부와 윈저 공이 주고받은 연락문 및 윈저 공에 대한 독일정부의 보고서 등을 포함하는 마버그 파일(Marburg Files, 영어식 발음이며 윈저 파일(Windsor Files) 또는 윈저 공 파일(Duke of Windsor Files)로 불리기도 한다. 독일식 발음으로는 "마르부르크" 정도가 된다.)이 발견되면서 더욱 자세히 드러났다. 이 문서에 따르면 나치 독일 정부는 윈저 공을 영국 왕으로 복위시키고 공작 부인 월리스를 영국 왕비로 추대하는 대가로 영국이 나치 독일의 유럽 지배를 용인하게 하는 계획, 당시 영국 국왕 조지 6세와 윈스턴 처칠을 암살하여 영국을 항복으로 몰아넣는 계획 등이 담겨 있다. 당연히 이러한 구상에 윈저 공은 중요한 인물로 포함되어 있다. 이 문서는 히틀러의 통역관이었던 파울 슈미트의 조수 카를 폰 뢰슈가 패전을 앞두고 모든 기밀 문서를 소각하라는 리벤트로프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지 않고 종전 당시 독일 헤센 주 마르부르크 성과 인근 산에 숨겨둔 이후 연합군과 사법 거래를 하면서 발견된 문서로, 내용의 중대함과 민감함으로 인해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과 영국 왕실은 이 문서가 공개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으나, 1954년 그 일부가 공개되었고, 1957년 문서의 전체가 공개되었다.[33]

당시 생존해있던 에드워드 8세는 파리에서 성명을 발표하여 문제의 문서는 완전한 왜곡이고 조작이라고 강변했지만 뭐.... 더 크라운 시즌 2 6화는 문제의 마르부르크 문서의 공개와 윈저공의 나치 흑역사에 한 화를 할애하며 드라마 마지막에 윈저공이 실제로 히틀러와 찍은 사진들로 마무리한다.

8. 가족관계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에드워드 8세
(Edward VIII)
<colbgcolor=#fff3e4,#331c00> 조지 5세
(George V)
<colbgcolor=#ffffe4,#323300> 에드워드 7세
(Edward VII)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Princess Alexandra of Denmark)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헤센카셀의 루이제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테크의 공녀 메리
(Princess Mary of Teck)
테크 공작 프란츠
(Francis, Duke of Teck)
뷔르템베르크의 공작 알렉산드르
(Duke Alexander of Württemberg)
키스레데 여백작
레데이 클라우디아
( Countess Claudine Rhédey von Kis-Rhéde)
케임브리지의 메리 애들레이드 공녀
(Princess Mary Adelaide of Cambridge)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왕자
(Prince Adolphus, Duke of Cambridge)[34]
헤센카셀의 아우구스타
(Princess Augusta of Hesse-Kassel)

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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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8세 대관식 기념품
* 워낙 갑작스럽게 퇴위하는 바람에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념품들의 판매가 갑자기 중단되거나 대거 폐기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즉위 기념 주화는 공식 디자인 공개 이후 한창 제작되던 도중 퇴위가 발표되어 아예 발행되지도 못하고 그대로 폐기 처분되었으며, 대관식 기념 우표는 디자인 작업이 도중에 중단되거나, 호주에서는 인쇄 작업 도중 작업이 중지되었다. 캐나다에서는 인쇄를 마치고 발행을 앞둔 우표들을 아예 폐기해버렸다. 영국 내 주요 학교에서는 대관식을 앞두고 학생들에게 에드워드 8세의 얼굴이 새겨진 머그컵과 접시를 증정했는데, 퇴위가 발표되자 회수하고 조지 6세 엘리자베스 왕비가 새겨진 것으로 다시 바꿔줬다고 한다. 또 대관식을 위해 런던 시내의 주요 상점들에 붙어있던 에드워드 8세의 초상 사진과 모노그램도 하루 아침에 모두 제거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기념품들이 모조리 폐기되거나 아예 발행조차 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보니 희귀품이 되어버려서 거액에 거래되는 경우가 많다.

9.1. 창작물에서

영화《 킹스 스피치》에서는 가이 피어스가 연기. 동생인 조지 6세 역을 맡은 콜린 퍼스와 비교해 실제 인물과의 외모 싱크로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내연녀인 심슨 부인한테 휘둘리다 못해서 아버지의 임종을 접하고도 애인 타령이나 하거나[36], 말을 더듬는 동생을 조롱하는가 하면, 명색이 국왕이란 사람이 귀빈들이 와 있는 파티장에서 심슨 부인이 술심부름을 시키자 헬렐레해서 술심부름을 하는 등, 제대로 찌질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체역사소설 당신들의 조국》에서는 독일이 2차대전에서 승리하여 영국 왕위에 복위하고 독일의 충견 노릇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조카 엘리자베스 2세는 캐나다로 망명하여 캐나다 국왕을 칭하고 있다. 그외 대체역사물에서도 대영제국이 망하는 전개가 나오면 거의 대부분 이사람이 왕노릇하고 있다.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처칠 바짓가랑이를 잡고 영국은 히틀러에게 항복해야 한다고 횡설 수설하고 이 과정에서 당시 유명했던 스즈미야 하루히의 대사를 패러디하 하였다. 나중에는 히틀러에게 키스해야돼!라면서 거의 미친 것처럼 군다.

드라마《 더 크라운》초반에도 가끔 등장하는데, 외모 싱크로율이 대단히 높다. 작중의 왕실에서는 그를 나치와 협력한 배신자이자 동생 조지 6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무책임한 형, 만악의 근원 취급한다.[37] 물론 에드워드 8세도 만만치 않게 뒤에서 깐죽대면서 왕실 가족들을 씹어대는데 배우가 참으로 얄미울 생각이 들 정도로 연기를 잘한다. 다만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 에피소드에서 겉으로는 대관식 중계를 보면서 내내 비꼬지만 대관식이 끝난 뒤에는 백파이프를 불며 눈물을 흘리는 묘사를 넣어서 어느정도 입체적인 묘사를 했다. 전임 국왕으로서 여왕에게 직접 조언을 하는 장면도 등장하는데 왕가의 이름을 마운트배튼으로 할지, 윈저로 할지를 두고 논란이 일어나자 여왕에게 왕가의 이름은 윈저를 사용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 마거릿 공주와 피터 타운센드의 결혼 문제를 두고 여왕이 국왕과 언니의 역할 사이에서 갈등하자 국왕으로서 결혼을 허락하면 안된다고 조언한다. 시즌 3에서는 연극계의 거물 데릭 제이코비가 후두암에 걸려 쇠약해진 모습을 연기했다.

패러독스 사의 제2차 세계 대전을 다루는 게임《 Hearts of Iron IV》에서는 처음에는 조지 5세가 즉위하고 있으나 곧 얼마 안가 사망하고 에드워드 8세가 즉위한다. 그리고 즉위 이후 모디파이어로 안정도를 매주 0.10씩 까드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안정도 +15 모디파이어를 가진 조지 6세가 즉위한다. 여담으로 영국이 국가 중점이나 괴뢰국이 되어서 파시즘화 되면 영국 파시스트 연합의 오스왈드 모즐리가 국가 수장이 되는데 에드워드가 파시즘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 것을 반영한 것인지 국왕을 조지 6세에서 에드워드 8세로 다시 교체하게 된다. DLC Together for Victory를 구매하면 남아공의 국가 집중이 추가되고 거기서 파시즘 트리를 타면 남아공으로 납치되어 남아프리카 제국의 황제가 된다. 맨 더 건 DLC가 있으면 영국의 정치 체제를 비동맹주의로 교체하고 직접 친정을 선포할수 있는 루트가 추가된다.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 이벤트에서 국민들과 영연방 국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강행하고 왕위도 포기하지 않으면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나라 꼴이 엉망이 되고 정치 체제를 다시 절대왕정으로 돌리게 된다. 이후로는 독립해나간 영연방 국가들을 다시 공격해서 식민지화하고 히틀러와 친선 조약을 맺게 된다. 미국을 공격할 수도 있는데 미국을 합병하거나 괴뢰화하면 부인인 윌리스 심프슨을 미국의 여왕으로 옹립할수 있다. 싱글에선 잘 일어나지 않겠지만 영국이 비동맹으로 가서 에드워드 8세가 즉위한 후 전쟁을 벌이다 영국 남부에 폭격을 맞게 되면 런던 폭격으로 인해 에드워드 8세와 윌리스 왕비가 지하 대피소가 무너지면서 사망했다는 이벤트가 뜬다. 에드워드 8세 사망 후엔 조지 6세인 엘버트 왕자가 즉위하게 된다.

반면에 독일군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배경을 다룬 대체역사 MOD《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캐나다에서 대영제국의 국왕으로 즉위한다. 게임 상에서는 잔존 협상국의 수장으로서 생디칼리스트들에게 빼앗긴 본토 수복의 결의(...)에 불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2020년 2월 v0.11버전에서의 업데이트로 왕실의 인기도를 높이기 위해 협상국 이곳 저곳을 해외 순방할 수 있는 이벤트가 추가되었는데... 문제는 개버릇 남 못준다고 그놈의 여자 버릇을 못버렸는지 다른 나라에 갈때마다 그 나라의 유부녀들과 껄떡대느라 오히려 왕실 인기도가 더 떨어진다. 상황이 심각해지면[38] 실 역사대로 동생 앨버트가 앨버트 1세로 즉위하거나 더 아래의 동생인 헨리나 조지가 즉위한다.

한편, 독일군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배경을 다룬《 더 뉴 오더》에서는 독일에게 항복한 영국의 국왕으로 나온다. 퇴위한 에드워드 8세를 독일군이 다시 군주로 복위시킨 것. 조카인 엘리자베스는 캐나다에 망명해서 저항군을 후원하고 있다. 저항군 측이 승리하면 에드워드 8세는 다시 퇴위되고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하는데, 가장 온건한 루트에서도 영국에서 추방되거나 작위를 회수당하게 되며, 공산주의자나 데이비드 스털링이 이끄는 공화주의자가 정권을 잡게 되면 처형당한다.

모 어린이 경제학 만화에서는 기회비용을 설명할 때 대영제국 국왕의 자리와 사랑을 교환한 세기의 로맨티스트로 소개된다.[39](...) 기회비용적으로 설명하자면 그가 왕위에 머물러 있으면서 영국의 대독전에 손실을 입혔을 경우의 비용과 사랑을 선택했을 경우의 비용을 고려하면 확실한 오류다.[40]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유부녀 창녀에 환장하는 사람이지만 영국 국민들을 위해서는 자신이 매너있고 세련된 이미지를 가진 것처럼 연기할줄 아는 사람으로 나온다. 그러나 결국 타국 친왕비를 희롱하다 걸려서 아버지 조지 5세에게 죽도록 혼난다. 우습게도 에드워드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극우 신문 데일리 메일이 황태자의 무고를 증명한답시고 전 세계에 그 사실을 불어버리는 바람에 전세계에 유부녀 희롱이 들통났다. 한 나라의 황태자란 사람이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으니 비웃음과 조롱이 쏟아질 것은 불보듯 뻔한 일. [41]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심프슨 부인과 결혼 안해서 왕위에 오르지만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의 비폭력 인도 독립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자국내 시위하는 노동자들에게 사격명령을 내린다. 네빌 체임벌린은 식민지의 사람들도 당신의 국민이라고 말하지만 백인종, 그중에서도 앵글로 색슨만이 우리 국민이라고 말하는 암군의 모습을 보인다. 덕분에 인도 비폭력 운동은 끝장나서 찬드라 보스가 득세하고 자국 국민들 역시 대놓고 왕정폐지를 외치는 수준에 달해서 결국 국회에 의해 쫒겨난다.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영국이 독일에게 패배한 후 파시스트 영국의 국왕으로 복위한다.

이 독일은 총통이 필요해요에서는 히틀러가 권력을 잡지 못했음에도 친독파로 나오며 멍청한 소리로 스탠리 볼드윈 경의 혈압을 올리는 역할을 한다. 결국 역사대로 퇴장한다.

조선왕자가 미국갔다 안 돌아옴에서는 살아남은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과 결혼한다.

카이저를 구했다에서는 더욱 더 삐뚤어져 웨일스 공이라는 양반이 모즐리와 파시스트들 그리고 프랑스의 프랑소와 드 라 로크의 지원하에 결국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로인해 조지 5세는 충격에 죽고 말았다. 세간에 불리는 이명은 패륜왕, 광대왕으로 반란 진압이후 에드워드라는 이름과 왕호는 결지왕 존 왕처럼 금기시 될 듯 보인다.

9.2. 시대를 앞선 패션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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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으로서의 능력은 바닥을 쳤지만 이와는 별도로 당시 시대를 앞서간 패션의 선두주자이자 선구자였다.

윈저 공은 남성복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로 연구되고 있다. 현대 정장에서 매우 흔한 스타일들을 만들었는데, 가끔씩 정장 자체를 창조했다고 오해를 받을 정도[42]로 현대 정장에 끼친 그의 영향은 매우 크다.

대표적인 예시 3가지로, 윈저 노트라는 넥타이 매듭법[43]을 만들었다. 풀노트와 하프노트라는 두 응용 방법으로 현대 남성들이 애용하고 있고, 적절한 딤플을 넣을 수 있는 매듭으로 격식있는 자리에서 남성들의 스타일 연출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정장 셔츠 스타일 중에서도 칼라가 넓게 벌어져있는 스타일의 셔츠를 '윈저 칼라 셔츠'라고 부른다. 소프트 칼라 셔츠 또한 윈저 공이 제안했는데, 당시에는 셔츠 깃이 셔츠와 떨어져 있던걸 최초로 셔츠에 박음질해서 붙였다. 윈저공이 창안했던 스타일을 포함해 윈저 공이 입었던 격식있는 정장 스타일은 '윈저 공 스타일'이라고 부른다.

인터넷 등지에서 윈저 공 혹은 에드워드 8세를 쳐보면, 에드워드 8세의 스타일 특징은 무지같이 차분하지만 포인트가 있는 댄디한 복식과 패턴이 과하지 않은 다양한 복식을 정갈하게 조합해서 각 복식의 포인트가 조화되어서 드러날수 있는 스타일을 구사한것을 엿볼수 있다.

이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실제로 윈저 공의 키는 약 170cm로 장신이 아니었다.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옷을 입는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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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주얼 1[44] 캐주얼 2 캐주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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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프레 1[45] 코스프레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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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트1 수트2[47]

9.3. 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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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촌 동생이자 영국 해군 원수이던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오른쪽)과 함께 찍은 사진. 동생 조지 6세와 함께 수려한 외모로 영국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에드워드 8세의 친구인 루이 마운트배튼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주로 인도에서 지상전 위주의 전선을 지휘했기 때문에, 육군 장성으로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 그는 해군 장성으로 제독이다. 참고로 루이는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 필립 마운트배튼[48]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루이 마운트배튼은 1979년 IRA의 폭탄 공격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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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왕세자 시절에 동생들과 함께.[49] 바로 아랫동생인 앨버트 왕자와는 상당히 닮았다. 다른 동생들인 헨리, 조지, 과도 닮긴 했지만 평범한 수준이다.

9.4. 숨겨진 자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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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부터 에드워드 8세의 연인이였던 프랑스인 Marie-Leonie Graftieaux의 손자가 자신의 할아버지가 에드워드 8세라고 주장하고 있다.[50]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할아버지가 '할머니와 결혼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유명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고, 자신의 아버지의 출생 증명서에는 할아버지의 이름은 표기되지 않았지만 에드워드 8세의 이름을 딴 에두아르(Edouard)[51]로 적혀있었다고 한다. 그는 원래 베일에 싸인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는데 1994년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나서 그의 여자친구가 에드워드 8세와 닮았다는 소리를 하자 조사를 시작했다고 한다.[52] 또한 자신의 할아버지를 찾기 위해 버킹엄 궁전에 있는 엘리자베스 2세에게 DNA 검사를 하게 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던 적도 있다. 이를 알게된 버킹엄 궁전의 신하들은 격분하며 결코 사실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부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에드워드 8세의 손자라고 주장하는 이 사람은 어차피 에드워드 8세가 진짜 자신의 할아버지가 맞다고 해도, 그는 왕위를 포기했기 때문에 본인에게도 왕위계승권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포기하지 않고 몇 번 더 편지를 보냈지만 버킹엄 궁전은 묵묵부답이라고 한다.

사실 에드워드 8세의 손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문제는 에드워드 8세에게 사생아가 태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여자관계가 복잡했다는 건 사실이다. 게다가 만약에 에드워드 8세의 손자라고 주장하는 이 사람이 유전자 검사를 해서 친할아버지가 에드워드 8세가 맞다는 결과가 나오면, 그의 아버지는 영국의 선왕 조지 6세의 친조카이자 선대 국왕 엘리자베스 2세의 사촌오빠, 현 영국 국왕인 찰스 3세의 오촌 당숙으로 판명이 되는 거고 자신은 조지 6세의 조카 손자이자 선대 국왕 엘리자베스 2세의 당조카 그리고 찰스 3세의 육촌 형이 되는 것이다. 본인 입으로 직접 자신은 사생아의 아들이여서 왕위 계승권이 없고 왕위를 요구할 마음도 없다고 주장하지만,[53] 선대국왕이었던 에드워드 8세에게 사생아 손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국 외 영연방 국가들은 발칵 뒤집힐 게 뻔하다.

[1] 78번째 생일을 한 달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했다. [2] 이름들은 각각 에드워드는 큰아버지 앨버트 빅터, 앨버트는 친증조부 앨버트 공, 크리스티안은 진외증조부 크리스티안 9세, 조지는 잉글랜드 수호성인 성 조지, 앤드루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 성 앤드류,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수호성인 성 패트릭, 데이비드는 웨일스의 수호성인 성 데이비드에서 따왔다. [3] 영국 국왕은 잉글랜드에서는 성공회 신자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회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며, 빅토리아 여왕 시대부터 왕족이 밸모럴 성에 거주할 때는 크래디 커크에서 예배하는 전통이 시작되었다. # [4] 원래 키가 170cm였지만 나이가 들고 나서 키가 168cm 정도로 줄었다고 한다. [5] 40대 이전 왕세자 시절의 공식 초상화이다. 재위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국왕 시절의 공식 초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6] 찰스 3세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에드워드 8세가 조지 6세 일가족과 메리 왕대비에 의해 해외로 추방을 당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외할아버지 외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들의 장례식에 참여할 때까지 에드워드를 마주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 프랑스 파리에 있는 에드워드 8세의 저택에 방문하면서 안면을 트게 되었고, 에드워드 8세가 전임 국왕이자 웨일스 공으로서 많은 조언을 해줬고 편지도 자주 주고 받을만큼 가까워졌다고 한다. 드라마 더 크라운 시즌 3에서도 이러한 찰스와 에드워드의 관계가 묘사된다. [7] 훗날 조지 6세가 된다. [8] 정확히는 대관식을 하지 못했다. 대관식이 준비되는 과정에서 퇴위하는 바람에 에드워드 8세의 대관식은 조지 6세 부부가 그대로 이어받아서 치렀다. [9] 분홍색과 적갈색의 빗금은 당시 자치령 국가들의 보호령이며, 각각 남서아프리카 ( 남아프리카 연방의 보호령), 파푸아뉴기니 ( 호주의 보호령)의 두 국가이다. [10] 뉴펀들랜드는 1949년까지 형식상으로나마 자치령으로 남아 있었지만,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가 붕괴하여 1934년부터 영국에 직할 통치를 요청하여 실질적으로는 영국에서 파견된 뉴펀들랜드 정부위원회(Newfoundland Commission of Government)가 통치하는 속령에 가까웠다. [11] 할아버지의 이름도 에드워드였기 때문이다. [12] 오른쪽에서 두번째 남자아이가 에드워드다. [13] 훗날 찰스 3세가 같은 방식으로 웨일스 공 서임식을 치렀다. [14] 2019년 11월 30일 방송 [15] 20세기 영상 매체 발명 후 기록된 영상들을 수집하여 역사의 뒷편에서 펼쳐진 대표적인 러브 스토리를 다룬 다큐멘터리 [16] 그러나 훗날 에드워드 8세가 결혼 문제로 소동을 일으켜 결국 왕위를 포기해 심각한 헌정 위기를 초래한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로즈마리와 결혼하는 것이 나을 뻔 했다. [17] 버티와 릴리벳은 동생 조지 6세와 조카 엘리자베스 2세의 애칭이다. [18] 다만 조지 5세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엘리자베스 2세의 개인 보좌관을 지냈었던 토미 레슬스는 조지 5세가 생전에 장남의 왕위 즉위 가능성을 의심했었다는 소문을 부정했다고 한다. [19] 하지만, 천년넘게 이어져온 대관식 전통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대관식을 예정대로 치루면서 규모는 대폭 축소하는 것으로 계획했다고 한다. 그러나 에드워드 8세가 퇴위하면서 결국 대관식은 아예 취소되었고, 조지 6세는 에드워드 8세의 대관식 계획을 전면 백지화하고 조지 5세와 동일하게 전통적인 방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했다. [20] 원래 즉위를 기념해 발행되는 주화는 전임 국왕과 반대 방향을 바라보도록 초상화가 새겨진다. 그래서 찰스 3세의 즉위 기념 주화가 엘리자베스 2세 시대에 발행된 주화와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21] 심지어 아직 배우자와 서류상으로 결혼 상태였다. 즉, 왕실과 아무 관계도 없는 유부녀와 동반해 공무를 수행한 것이다. [22] 여담이지만 처칠 외에도 영국 파시스트 연합, 영국 공산당, 1차대전 참전용사들과 노동자들이 에드워드 8세와 심프슨 부인의 결혼을 지지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전 총리는 심프슨 부인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나 에드워드 8세를 지지했다. [23] 처칠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국왕이 교체되는 불상사는 막아보려고한 것으로 보인다. [24] 문서 하단에는 에드워드 8세와 그의 동생들인, 차기 왕위를 계승하게 된 조지 6세를 비롯해 글로스터 공작 헨리 왕자, 켄트 공작 조지 왕자의 서명이 있다. 조지 6세가 앨버트라는 이름으로 마지막으로 서명한 공식 문서이기도 하다. [25] 러시아의 공주랑 결혼한 상태에서 미국인 평민을 왕비 자리에 앉히겠다고 난리치는 군주는 없을 테지만, 여자 때문에 왕위까지 내던진 에드워드 8세의 행각상 정말 올가와 결혼한 상태에서 이혼을 감행했다면 제2의 헨리 8세 사태가 됐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랬으면 자진 퇴위가 아니라 쫓겨났겠지만... [26] 후술할 친나치 성향이나 인종차별 경향, 그 둘과는 별개로도 개인적으로 매우 안 좋은 인품 덕에 조지 6세의 이러한 조치는 결정적으로 신의 한 수였다. [27] 참고로 BBC는 에드워드 8세의 아버지 조지 5세로부터 칙허장을 받아 만들어진 영국공영방송사다. [28] 이런 형조차도 영국으로의 귀국을 허용하고 감싸주었다면 전후 영국은 같은 연합국인 미국과 프랑스, 소련에 찍혀 영국이 왕실때문에 목소리를 내지못하고 결과적으로 왕실이 폐지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29] 이 때 바하마에서 시드니 존슨을 만나 평생의 비서로 삼는다. [30] 당연하지만 한 때 국왕이었던 사람의 편지를 무시하거나 답장을 대충 쓸 수는 없다. [31] Koburg. 독일어로 읽으면 코부르크. 에드워드 8세의 핏줄이 본디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이므로 먼 친척뻘인 인물을 믿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독일에 사절로 보낸 듯하다. [32] 조지 6세는 말더듬이 증세로 즉위 이전까지 많은 놀림과 차별을 받았다. 인종적 차별은 아니더라도 장애로 인해 자신도 차별을 받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인종차별이든 무엇이든 차별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게 됐을 가능성이 크다. [33] 해당 문서는 윈저 공의 반역 행위 뿐만 아니라 독일과 소련이 동유럽을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다는 내용이 담긴 독소불가침조약 비밀 조항도 담겨 있었다. [34] 조지 3세의 7남이다. [35] 이때는 엘리자베스 2세가 26세였기 때문에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으며, 결혼 후 가정까지 꾸려 이미 두 아이의 어머니였다. 남편 필립 공과의 결혼 문제 역시 필립 공이 영국에 귀화하면서 그리스 왕족 신분을 포기하고, 영국 해군 군인 신분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왕실 관계자들의 우려와는 달리 큰 반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36] 조지 5세가 승하한 뒤 왕으로 추대되자 에드워드는 머리를 쥐어싸며 괴로워하는데 이건 왕으로서의 책임감에 압박을 느껴서가 아니라 '이제 좋은 날은 다 갔구나...'라는 한심한 이유에서였다. 부왕이 치매끼를 보이며 오늘내일하는 와중에도 동생 앞에서 "그 꼰대 앞으로 더 살 수 있는데도 나한테 양위하려고 지금 쇼하는거임"이라 막말을 할 정도. [37] 작중에서 모친인 메리 대왕대비는 에드워드 8세를 내놓은 자식 취급하고(엘리자베스 왕대비가 에드워드 8세의 장례식장 축객을 제안하자 메리 대왕대비는 맞장구 치듯이 나의 다른 아들을 죽게했다고 말하고, 작중에서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와 엘리자베스 2세를 대하는 태도와 에드워드 8세를 대하는 태도를 비교해보면 전자들을 대할때는 나름 살갑지만 후자는 사실상 냉담과 무시로 일관한다.), 엘리자베스 왕대비는 아예 남편 조지 6세를 죽게만든 원수로 대한다. 그나마 조카 엘리자베스 2세와 그녀의 남편 필립 공이 큰아버지이자 처백부로서 예의를 갖추며 대했지만, 이들도 에드워드 8세가 2차 세계대전에서 저지른 반역에 준하는 행적을 알게된 뒤로 혐오를 감추지 못한다. 마버그 파일이 탄로난 이후 엘리자베스가 에드워드 8세에게 축객령을 내리자, 필립 공은 장모인 왕대비와 함께 축배를 들었다고 한다. [38] 특히 결혼 문제. 이거 한 방에 영연방에서 퇴위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게 된다. [39] 여기서는 아예 자기 할아버지처럼 훌륭한 성군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오며 심프슨 부인도 엄청 미화되어서 나온다. [40] 여담으로 사례를 하나를 더드는데 바로 한국의 진대제로 장관이 되기위해 삼성의 고위직을 포기한걸 예시로 든다. [41] 그래서 황태자는 데일리메일이 쓸데 없는 짓을 했다면서 언론을 원망한다. [42] 현대 정장은 빅토리아 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군의 튜닉에서 비롯한 가벼운 격식의 재킷에 여러가지 유행이 지나가며 남긴 흔적들이 조합되어 만들어 진것이다. [43] 에드워드 8세 스타일이라곤 하지 않는다. [44] 비록 2020년대에서 추구하는 힙한 캐주얼 느낌과 거리가 있긴 하지만, 20세기 중초반의 중년 사람치고 저런 스타일을 구사하는 사람은 매우 흔치 않다. [45] 미국 방문 당시 사진 [46] 일본 방문 당시 일본 사진 [47] 1970년 리처드 닉슨을 만난 자리였다. [48] 루이도 에드워드의 6촌 동생인데 루이 조카인 필립도 에드워드의 6촌 동생이다.루이는 친가쪽 동생이고 필립은 외가쪽 동생이다. [49] 두번째 줄 왼쪽 부터 앨버트 왕자(1895-1952), 본인, 헨리 왕자(1900-1974). 첫번째 줄 왼쪽부터 존 왕자(1905-1919), 메리 공주(1897-1965), 조지 왕자(1902-1942) [50] 자신의 아버지는 1916년에 당시 웨일스 공이였던 에드워드와 자신의 할머니가 사고 쳐서 태어난 자식이라고 한다. [51] 불어 이름 에두아르는 영어의 에드워드와 같은 이름이다. [52] 사진을 보면 노년의 에드워드 8세와 묘하게 닮았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는 에드워드 8세와 조지 6세를 섞어놓은 느낌으로 닮았다. [53] 실제로 에드워드 8세가 퇴위할 당시 퇴위 선언문에 작성 된 내용이 '나에게 어떠한 자녀가 태어나더라도 왕위계승권이 주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명시했기 때문에 에드워드 8세의 친자식이여도 왕위계승권이 주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