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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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제10대 국왕 미겔 1세 Miguel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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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02년 10월 26일 | ||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켈루스 궁전 | |||
사망 | 1866년 11월 14일 (향년 64세) | ||
독일 연방 뷔르템베르크 왕국 베르테임 | |||
재위기간 | 포르투갈 국왕 | ||
1828년 2월 28일 ~ 1834년 5월 6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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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e3061><colcolor=#fff> 가문 | 브라간사 가문 | |
이름 |
미겔 마리아 두 파트로시니우 주앙 카를루스 프란시스쿠 드 아시스 샤비에르 드 파울라 페드루 드 알칸타라 안토니우 하파엘 가브리엘 조아킹 조제 곤자가 이바리스투 드 브라간사 이 보르봉 (Miguel Maria do Patrocínio João Carlos Francisco de Assis Xavier de Paula Pedro de Alcântara António Rafael Gabriel Joaquim José Gonzaga Evaristo de Bragança e Bourb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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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주앙 6세 | ||
어머니 | 스페인의 카를로타 호아키나 | ||
형제자매 | 마리아 테레사, 프랑시스쿠 안토니우, 페드루 1세 & 4세, 마리아 프란시스카, 이자벨 마리아, 마리아 다 아순신, 아나 데 제주스 마리아 | ||
배우자 | 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로젠베르크의 아델하이트 공녀 (1851년 결혼) | ||
자녀 | 마리아 다스 네베스, 미겔, 테레사, 마리아 주제, 아델군데스, 마리아 아나, 마리아 안토니아 | ||
종교 | 로마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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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65년에 촬영된 미겔 1세와 그의 아내 아델하이트의 사진 |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제10대 국왕. 별명은 "절대주의자(o Absolutista)" 또는 "전통주의자(o Tradicionalista)"이며, 별명답게 포르투갈 역사상 마지막 전제군주로서 자유주의 사상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2. 생애
1802년 10월 26일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리스본의 켈루스 궁전에서 포르투갈 왕자 주앙과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딸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3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마리아 테레사, 프란시스쿠 안토니우, 페드루, 마리아 프란시스카, 이자벨 마리아, 마리아 다 아순신, 아나 드 제주스 마리아가 있었다.일부 역사서와 증언에 따르면, 그는 어머니 카를로타 호아키나가 마리알바 후작이자 칸탄헤데 백작인 페드루 주제 주아킴 비토 드 메네세스 쿠티뉴와 간통해서 태어났다고 한다. 주앙이 미겔이 태어나기 2년 전부터 아내와 심한 불화를 벌여 공식 행사에서만 드물게 만날 뿐 완전히 별거하고 있었으니 미겔이 주앙의 자식일 리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학계에서는 주앙이 미겔의 출생에 의문을 표한 바 없고 왕자로 대우했으며 이후에도 두 사람 사이에서 자식이 잇따라 태어났다는 점을 들어 절대군주정을 꿈꾸며 자유주의자들을 박해한 카를로타 왕비와 미겔을 미워한 이들이 꾸며낸 이야기로 간주한다.
카를로타는 맏아들 프란시스쿠 안토니우가 1801년에 사망한 뒤 자식들 중 미겔을 가장 사랑하고 그에게 많은 관심을 두었다. 미겔은 어머니의 편애를 받으며 자랐고, 자그마한 장군 의복을 챙겨입고 말을 타고 질주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자를 떨어뜨리는 장난을 즐겼다. 5살 때 나폴레옹 1세가 파견한 장앙도슈 쥐노의 프랑스군의 공세를 피해 가족들과 함께 브라질로 피신했다. 이때는 아버지 주앙, 형 페드루와 한 배에 탔다. 1821년 브라질에서 포르투갈로 돌아갈 때까지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서 파악하기 어렵지만, 주앙 6세를 퇴위시킬 음모를 꾸미다 발각당하여 산타크루스 농장에 연금된 카를로타 왕비와 함께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1821년 형 페드루가 브라질 섭정에 선임되었고, 미겔은 주앙 6세를 비롯한 포르투갈 왕실과 함께 포르투갈로 귀환했다. 1823년 6월 27일, 자유주의자들이 제정한 헌법을 따르는 것을 거부했다가 왕비 칭호를 박탈당한 뒤 켈루스 궁전에 연금되었던 카를로타 왕비는 미겔에게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종용했다. 미겔은 이에 따라 쿠데타를 단행했고, 자유주의자들 때문에 권력이 제한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주앙 6세는 즉시 호응해 제복을 입고 공개석상에서 아들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병사들은 왕과 왕자를 향해 손뼉을 쳤다. 이후 코르테스를 무력으로 압박한 끝에 해산시키고 헌법을 대폭 수정해 절대군주 체제를 복원시켰다. 이후 카를로타의 권리가 회복되었고, 1823년 6월 5일 자유 헌법 수호를 위해 들고 일어난 시위대를 진압하고 일부 자유주의자들을 추방했다.
그러나 카를로타와 미겔은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1824년 4월 29일, 미겔은 리스본에서 수비대를 이끌고 주앙 6세를 체포한 뒤 왕을 살해 위협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구실로 파코 다 뱀포스타에 감금했다. 이후 여러 정적을 체포해 반역 혐의를 적용해 처형할 준비를 하는 한편, 주앙 6세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그러다 외국 대사들이 궁궐에 들어서서 왕을 뵙기를 청하자, 반란군은 외국과 갈등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주앙 6세에게 다소의 자유를 줬다.
주앙 6세는 영국 대사의 권유를 따라 5월 9일 카시야스로 여행가는 척 했다가 리스본 항구에 정박한 영국 군함 윈저 호에 탑승했다. 이후 영국군의 도움에 힘입어 미겔을 체포한 뒤 추방했고, 뱀포스타에 돌아온 뒤 반란군 전원을 사면하는 대가로 다시 한 번 충성 서약을 받았다. 카를로타는 이에 포기하지 않고 다시 반란을 준비했지만 얼마 안가 발각되어 켈루스 궁전에 재차 감금되었다. 이후 주앙 6세는 지난날 추방되었던 자유주의자들을 사면했다.
미겔은 빈에 망명한 뒤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집에 거주하며 친분을 다졌다. 그러던 1826년 3월 10일, 주앙 6세가 며칠 동안 독살이 의심되는 징후를 보이다가 사망했다. 세간에서는 카를로타 왕비가 복수심을 품고 주앙 6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진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후 브라질 초대 황제를 맡고 있던 페드루 1세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브라질과 포르투갈 모두 같은 군주를 섬기길 거부하자 그해 5월 2일에 딸 마리아 2세에게 포르투갈 왕위를 물려줬다. 마리아 2세는 아직 성년이 아니었기 때문에 누이인 페드루와 미겔의 누이인 이자벨 마리아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이자벨 마리아의 섭정은 극도로 불안정했다. 자유주의자들과 절대군주제 옹호자들 간의 불화가 정부를 지배했고, 시의회 내에서도 심각한 분열이 일었으며, 리스본에서 군사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상황이 이처럼 좋지 않자, 페드루는 미겔에게 포르투갈의 섭정을 제안하는 동시에 마리아 2세가 성년이 되면 결혼하라고 권유했다. 미겔은 형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포르투갈 헌법을 지키겠다고 맹세한 뒤 포르투갈에 복귀했다.
미겔은 초기에는 자유주의자들과 협의하며 국정을 그럭저럭 이끌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1828년 3월 13일 헌법에 명시된 대로 새로운 선거를 실시하지 않고 코르테스를 해산했다. 많은 귀족과 성직자, 몇몇 사회 인사들은 미겔에게 이참에 헌법을 페지하고 국왕으로 통치하라고 권유했다. 여기에 4월 25일 코임브라 대학 총회는 미겔에게 왕위를 차지할 것을 요청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미겔은 형과 완전히 갈라서기를 주저했지만, 어머니 카를로타가 적극적으로 권하자 마침내 마음을 굳게 먹고 1828년 7월 7일 정식으로 국왕에 취임하고 마리아 2세를 브라질로 추방했다. 페드루는 마리아 2세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여러 국가에 지원을 호소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828년 8월, 오포르토의 수비대가 반란을 일으켜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자유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코임브라로 진군했다. 그러자 미겔은 군대를 소집한 뒤 오포레토를 즉시 봉쇄해 조기 진압에 성공했다. 라고스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지만 라고스 군영 내 자유주의파 장군이 미겔파 장군에게 총살당하면서 진압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마데이라 섬과 아조레스 제도의 테르세이라 섬으로 피신하여 항전을 이어갔다. 마데이라 섬은 곧 포르투갈 해군에게 장악되었지만, 테르세이라 섬은 쉽게 굴복하지 않고 자유주의를 계속 따랐다.
1829년 3월 6일, 카이스 두 소도레에서 자유주의자들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곧 진압되었고, 모레이라 준장 및 장교들과 추종자들이 총검에 찔러 살해되었다. 그 해 5월 7일 모포르투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가 며칠 만에 진압되었고, 수비대원 전원이 총살되었다. 빌라 프랑카 데 시라에서는 지역 주민들이 자유주의에 동조하는 것으로 간주된 70여 명의 인사를 학살했다. 카를로타 역시 자유주의자들을 적대하는 성명을 여러 차례 발표하며 그들에 대한 탄압을 지원했다. 1830년 1월 7일 카를로타가 세상에서 잊힌 채 사망한 후에도 미겔의 이름으로 자유주의자에 대한 잔혹 행위가 지속적으로 자행되었다.
심지어 포르투갈에서 활동하던 영국인과 프랑스인들까지 공격당하자, 초기에 수수방관하던 두 나라는 미겔 정권에 반감을 품었다. 그들은 외교관을 잇따라 파견해 항의했지만, 미겔 1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에 프랑스 제독 알빈 레네 루생은 루이필리프의 지시에 따라 타구스를 항해하여 8척의 포르투갈 선박을 나포한 뒤 1831년 7월 14일에 선박을 돌려주는 대가로 희생된 프랑스인들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미겔 정부의 숙청은 지속되었다. 리스본에 주둔한 제4보병대는 1831년 8월 22일과 23일에만 29명의 정치범을 처형했으며, 대부분의 사형 선고는 24시간 이내에 집행되었다.
한편, 자유주의자들이 유일하게 버티고 있던 테르세이라 섬에서는 안토니우 주제 세베림 드 노로냐가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했다. 그는 방어 시설을 재건하고 군대를 훈련시킨 뒤 1829년 8월 11일 섬을 침공하려는 미겔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그의 군대는 1831년까지 아소르스 제도의 모든 섬을 장악했다. 이 무렵, 브라질 황제 직위에서 물러나 프랑스로 망명한 페드루는 라파예트 후작의 후원에 힘입어 외국 용병대와 자유주의 성향의 자원 부대를 이끌고 1832년 초 아소르스 제도에 갔다. 이후 몇달 간 재정비를 한 후 포르투갈 본토로 출발해 7월 9일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포르투에 입성했다. 이 소식을 접한 미겔 1세는 군대를 동원해 포르투를 포위하여 1년 이상 포위 공격을 가했지만 함락에 실패했다. 이후 영국이 페드루를 돕기로 결정하고 찰스 네이피어 제독의 해군을 파견하자, 미겔은 샤를 10세 몰락 후 미겔을 돕기 위해 찾아온 프랑스 장군 루이 오귀스트 빅토르를 비롯한 해외의 절대왕정주의자들과 스페인 왕국의 지원을 받으며 대항했다. 그러나 포르투를 향한 무리한 공세가 좌절되면서 기세가 꺾였고, 1833년 7월 5일 상 비센트 곶 해전에서 미겔파 함대가 찰스 네이피어가 이끄는 영국 함대에게 궤멸되고 7월 24일 안토니우가 리스본을 공략하면서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설상가상으로 1833년 9월 29일 이사벨 2세의 즉위에 반발한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스페인 역시 포르투갈처럼 내전( 카를로스파 전쟁)에 휩쓸렸다. 이로 인해 스페인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된 미겔 정권은 페드루 1세 지지자들에게 속절없이 밀려났다.
미겔 1세는 이런 상황에서도 포르투갈 북서부에서 항전했지만 1834년 5월 16일 아세이세이라 전투에서 안토니우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며 더 이상 저항할 힘을 잃어버렸다. 결국 엘바스 쪽으로 퇴각한 미겔 1세는 이 이상의 항전은 불가능하니 평화 협상을 제기하자는 전쟁평의회의 결의를 받아들였다. 이후 십여 일간의 협상 끝에 1834년 5월 26일 미겔 1세가 퇴위하고 지지자들과 함께 포르투갈을 떠나는 대신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 에보라몬테 협약이 체결되었다. 미겔은 제노아로 향하는 영국 전함에 승선한 뒤 로마로 이동했다.
1834년 12월, 포르투갈 코르테스는 미겔과 그의 모든 후손을 포르투갈에서 영원히 추방한다고 선언했다.[1] 또한 1838년에 제정된 헌법 98조는 미겔의 후손들이 포르투갈 왕위를 이을 수 없다고 명시했다. 미겔은 스페인 내전이 카를로스 측의 승리로 종식된다면 재기를 도모할 수 있으리라 여겨 카를로스를 은밀히 지원했지만, 이 마저도 이사벨 2세 측이 승기를 잡으면서 무산되었다. 오히려 1837년 1월 15일 스페인 코르테스로부터 카를로스를 지원한 점을 문제삼아 그를 스페인 왕위 계승에서 영구적으로 배제하기로 결의했다. 여기에 미겔의 큰 누이인 마리아 테레사와 미겔의 조카들[2] 역시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했다.
미겔은 초기엔 포르투갈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았지만 자신을 영원히 추방한 것에 격렬하게 항의했다가 연금을 몰수당했고, 이후로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제공한 저택에서 빈곤하게 살았다. 1846년 그레고리오 16세가 사망하자 런던으로 이주했고, 1851년 독일 남부의 바덴 대공국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로젠베르크의 공세자 콘스탄틴의 딸 아델하이트와 결혼하여 1남 6녀를 낳았다. 1866년 11월 14일 뷔르템베르크 왕국 베르테임에서 사망했다. 사후 독일 밀텐베르크에 안장되었다가 1967년 아내와 함께 포르투갈로 이송되어 상 비센트 드 포라 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관계
3.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산 하이메 공작부인 마리아 다스 네베스 공주 (Infanta Maria das Neves, Duchess of San Jaime) |
1852년 8월 5일 | 1941년 2월 15일 | 산 하이메 공작 알폰소 카를로스 |
1남 |
브라간사 공작 미겔 자누아리우 (Miguel Januário, Duke of Braganza) |
1853년 9월 19일 | 1927년 10월 11일 |
투른운트탁시스의 엘리자베트 공녀[3] 슬하 2남 1녀 |
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로젠베르크의 마리아 테레지아 공녀[4] 슬하 1남 7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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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녀 |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마리아 테레제 (Maria Teresa, Archduchess of Austria) |
1855년 8월 24일 | 1944년 2월 12일 |
오스트리아의 카를 루트비히 대공 슬하 2녀 |
3녀 |
바이에른에서의 공작부인 마리아 요제파 (Maria Josepha, Duchess in Bavaria) |
1857년 3월 19일 | 1943년 3월 11일 |
바이에른에서의 공작 카를 테오도어[5] 슬하 2남 3녀[6] |
4녀 |
기마랑이스 여공작 아델군데스 공주 (Infanta Adelgundes, Duchess of Guimarães) |
1858년 11월 10일 | 1946년 4월 15일 | 바르디 백작 엔리코 공자[7] |
5녀 |
룩셈부르크의 대공비 마리아 아나 (Maria Ana, Grand Duchess of Luxembourg) |
1861년 7월 13일 | 1942년 7월 31일 |
룩셈부르크 대공 기욤 4세 슬하 6녀[8] |
6녀 |
파르마 공작부인 마리아 안토니아 (Maria Antónia, Duchess of Parma) |
1862년 11월 28일 | 1959년 5월 14일 |
파르마 공작 로베르토 1세 슬하 6남 6녀[9] |
4. 여담
1932년에 마리아 2세의 증손인 마누엘 2세가 자녀 없이 사망하면서 그의 친손자인 두아르트 누누가 포르투갈 왕가의 당주가 되어[10] 오늘날의 포르투갈 구 왕가의 수장은 미겔 1세의 후손이다. 현재 브라간사 왕가의 수장은 두아르트 누누의 아들인 두아르트 피우이다. 한편 두아르트 피우의 어머니인 마리아 프란시스카는 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의 장녀 브라질의 이자베우 황태녀의 손녀이기 때문에, 두아르트 피우는 페드루 4세의 여계 후손이기도 하다.
[1]
이 추방법은 왕정 폐지 후에도 유지되다 1950년에야 폐지되었다. 정확히는 왕정 폐지 후
마리아 2세의 후손인 왕족에 대한 입국을 별도의 법령으로 금지하고 기존의 추방법도 그대로 유지하였는데, 왕가의 직계가 단절되면서 왕정 폐지 후 제정된 추방법은 사문화되었기에 1834년의 추방법을 적용해 나머지 왕족의 입국을 금지한 것이다.
[2]
마리아 테레사의 아들 세바스티앙, 마리아 프란시스카의 세 아들 카를루스, 주앙, 페르난두
[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 엘리자베트의 조카(언니 헬레네의 딸).
[4]
외삼촌 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로젠베르크 공 카를의 딸로 외사촌이다.
[5]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외손자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 엘리자베트의 남동생이다.
[6]
벨기에의 왕비 엘리자베트 등
[7]
파르마 공작
카를로 3세의 차남.
[8]
룩셈부르크 여대공 마리아델라이드,
룩셈부르크 여대공 샤를로트 등
[9]
오스트리아의 황후 치타,
룩셈부르크의 부군 펠릭스 등
[10]
마누엘 2세 생전인 1922년에 두아르트 누누를 후계자로 하기로 합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