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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53b4><colcolor=#fff> 영국 하노버 왕조 초대 국왕
조지 1세 George I |
|||
|
|||
출생 | 1660년 5월 28일 | ||
신성 로마 제국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하노버 (現 독일 니더작센주 하노버) |
|||
사망 | 1727년 6월 11일 (향년 67세) | ||
신성 로마 제국
오스나브뤼크 오스나브뤼크 성 (現 독일 니더작센 주 오스나브뤼크 오스나브뤼크 성)[1] |
|||
묘소 | 헤렌하우젠 궁전 벨프 가문 영묘 | ||
재위기간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및 아일랜드 국왕 | ||
1714년 8월 1일 ~ 1727년 6월 11일 | |||
하노버 선제후 | |||
1698년 1월 23일 ~ 1727년 6월 11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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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53b4><colcolor=#fff> 이름 |
영어: 조지 루이 George Louis |
|
독일어: 게오르크 루트비히 Georg Ludwig |
|||
아버지 | 하노버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 | ||
어머니 | 팔츠의 조피 | ||
형제자매 | 첫째 동생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둘째 동생 막시밀리안 빌헬름, 유일한 여동생 조피 샤를로테, 셋째 동생 카를 필립, 넷째 여동생 크리스티안 하인리히, 막내 동생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 ||
배우자 |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 (1682년 결혼 / 1694년 이혼) | ||
자녀 | 조지 2세, 조피 도로테아 등 | ||
종교 | 성공회 ( 잉글랜드 국교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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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노버 선제후국의 선제후 게오르크 1세이자 영국 국왕 조지 1세. 영국 하노버 왕조의 시조이다. 그의 외할머니가 바로 제임스 1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공주이며, 이를 통해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1세의 혈통과 이어졌다. 이에 따라 왕위 계승법이 만들어진 이후 영국의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원래는 앤 여왕 사후에 후사가 없으면 그의 어머니인 제임스 1세의 외손녀 팔츠의 조피가 왕위 계승 예정이었으나, 83살의 고령이었던 조피가 앤 여왕이 죽기 불과 2개월 전에 죽는 바람에 그녀의 아들인 조지 1세가 영국 왕위를 계승했다.그러나 조지 1세는 독일 태생의 독일인으로 영국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조지 1세의 시대부터 영국은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 국가로 들어선다.
2. 생애
2.1.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1세
1660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팔츠의 조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게오로크 1세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형제 중 막내였기 때문에 공국에 대한 상속권이 없었으나 팔츠의 조피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둘째 형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게오르크 빌헬름으로부터 뤼네부르크 공국의 상속권을 받아서 뤼네부르크 공국을 상속받을 예정이었다. 실제로 1665년 뤼네부르크 공작이었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첫째 형인 크리스티안 루트비히가 자식 없이 죽자 뤼네부르크 공국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받았고,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은 셋째 형 요한 프리드리히가 받았다. 그리고 1679년 요한 프리드리히마저 자식 없이 사망하자 이 두 공국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단독으로 받았다. 물론 이 과정에서 게오르크(조지 1세)는 자신이 원치 않았던 백부 게오르크 빌헬름의 딸이자 사촌이 되는 조피 도로테아와 1682년에 결혼했다.그리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상속법을 바꾸어 두 공국의 분할 상속을 끝내면서 정식으로 하노버 공작이 되었다. 그리고 정력적으로 공국을 이끄는 과정 속에서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를 도왔고 상 헝가리에서 발생한 퇴쾨이 임레의 봉기로 인해 일어난 제2차 빈 공방전과 이어진 대튀르크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했다. 이러한 공로에 힘입어 하노버 공국은 1692년 선제후로 임명되었다.[2] 그래서 이후 나폴레옹 전쟁 직전까지 영국 국왕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황제선거에 참여할 권리를 얻었고, 영국이 유럽 대륙 내의 전쟁에 꽤나 깊숙하게 참가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698년 게오르크 1세는 아버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죽자 38살의 나이로 하노버 선제후로 즉위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군을 이끌고 잉글랜드-네덜란드와 동맹하여 참전했다. 이때 오스트리아의 장군 사부아 공자 외젠, 잉글랜드의 말버러 공작 존 처칠과 인연을 맺었다. 전쟁 중반부터 존 처칠이 잉글랜드 내부의 정치적 분쟁에서 져서 위태롭게 되자 여러차례 신뢰의 편지를 보내 존 처칠의 지위를 지키려 했으며, 결국 존 처칠이 실각해 군사령관의 직책에서 해임되고 영국의 향후 방침이 전쟁에 적극 참전하지 않고 현상유지로 행동하자 심히 분개하였다.[3]
2.2. 영국 국왕
1714년 6월 8일 앤 여왕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법에 따라 영국 국왕으로 추대되어 54살이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영국 국왕으로 즉위했다.[4] 사실 조지 1세는 왕위 계승 서열이 50위가 넘어가는 먼 친척이었으나, 그보다 계승 서열이 앞서는 이들은 모두 가톨릭 신자로 영국 왕위 계승에 부적합했다.[5] 반면 개신교의 경우는 칼뱅주의자이든 루터주의자이든 왕위 계승이 가능하기에[6] 루터교 신자였던 조지 1세나 칼뱅파였던 윌리엄 3세도 조건에 딱 맞아서 정식 잉글랜드 국교회 신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영국의 국왕임에도 조지 1세는 태생부터가 독일인이었기에 영어는 서툴렀지만 대신 모국어 독일어 이외에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다. 당시 프랑스어는 유럽 상류층의 공용어와 같은 위치에 있었기에 조지 1세는 주로 프랑스어를 이용해서 영국인 장관들과 소통했다. 그러나 조지 1세는 영국의 국내 정치에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토리당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휘그당과 로버트 월폴 등의 정치가들에게 영국의 정치를 맡겼다. 애초에 영국에 머물렀던 시기가 별로 길지도 않았고 영어도 전혀 못 했는데다 영국보다 고향 하노버에 머무는 것을 더 좋아했다.
조지 1세는 유럽 대륙에서의 하노버의 이권에 더 관심이 많았으며, 대북방전쟁에서 반 스웨덴 측에 참가하여 스웨덴으로부터 브레멘 등을 할양받아 하노버 선제후국은 북해로의 출구를 확보하였다.
3. 평가
결론적으로 조지 1세는 영국 국왕이긴 했으나 실질적으론 계승 순위에 걸려 말년에 영국 왕관만 썼을 뿐, 그의 정체성과 업적은 영국 국왕이라기보단 하노버 선제후였다. 조지 1세의 혈통을 보자면 외할머니쪽이 앤 여왕의 증조할아버지 제임스 1세의 딸이긴 했으나 나머지(4분의 3)는 죄다 독일인의 피가 흐르는 4분의 1만 영국(잉글랜드+스코틀랜드+헨리 7세에게 받은 웨일스) 혈통에 해당하는 쿼터였다. 일반인이어도 쿼터쯤 되면 그 나라에 대한 정체성이 거의 옅어지는데 심지어 조지 1세는 하노버를 다스리는 군주였으니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얼마나 옅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게다가 영국 왕이 된 것도 54살의 나이의 일이니 말이다.다만 하노버는 훗날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 과정에서 흡수되었고, 영국은 훗날 ' 대영 제국'이라고 불리며 세계를 호령하는 패권국으로 성장한 데다가 지금까지 왕정이 남아있다보니 하노버 선제후가 아닌 영국 국왕으로서의 조지 1세가 기억될 일이 훨씬 많은 것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철저히 영국사 관점에서 평가하여 조지 1세를 순 허당으로 묘사하는 역사 만화도 있으며, 국내 역덕후들에게도 '영어도 못하는 영국 국왕' 정도로 취급돼서 어딘가 모자른 취급을 받는 편이다.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영어 자체를 못하고 라틴어로 해야 겨우 말이 통하는 걸 알게 되자 "말도 모르는 나라에서 이렇게 어려운 시간을 보내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고향에 조용히 지낼 것을..."라며 한탄하다 아예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난 영어도 모르고 영국 사정도 잘 모르니 니들끼리 의회에서 수상 뽑고 국정 알아서 해라. 난 대충 스포츠중계 보며 안에서 가만히 있을란다." 하고 떠넘기는 모습으로 나온다.
후술하겠지만 언어도 어느 정도 문제는 되었겠으나 그것이 조지 1세가 영국 정치에 무관심했던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조지 1세만 특별한 게 아니라 유럽에는 다스리는 지역 언어를 모르는 군주가 많았으며 그럼에도 명군이 된 경우도 많이 나왔다. 초창기 노르만 왕조 및 플랜태저넷 왕조 초기 잉글랜드 국왕들도 프랑스어만 썼으니[7] 외국 출신 군주가 자국어 못하는 건 유럽에서는 그다지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당시 유럽 왕족과 귀족 및 상류층들 사이에서는 프랑스어가 기본이었고 프랑스어로 소통하면 문제될 것은 없었다.
조지 1세가 영국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유는 언어보다는 그냥 본인이 나이도 있고 스스로를 영국 국왕보다는 하노버 선제후로 여겼고, 영국이라는 '이역만리 타국'의 정치 문화와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어로 소통이 된다곤 해도 이는 신하들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지 국내외 정치 현안과 중대사안들을 이해하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정치는 필연적으로 복잡하게 여러 문제가 각계각층 사이에서 얽히게 마련이며 제대로 된 정치를 하려면 그 나라의 법률, 문화, 제도, 인사 등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또한 조지 1세가 맡은 역할은 어느 정도 눈치를 보면서 흐름에 맡겨도 될만한 말단직이나 자리에 앉아만 있어도 되는 명예직도 아니고 엄연한 한 나라의 '국왕'이었다. 도저히 주도적으로 뭘 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으로 비유하자면, 법사위나 헌법재판소가 무슨 기관인지 대법원장은 어떤 권한을 지녔고 국회의 예산 심사는 어떤 절차를 거치는지, 현재 국회의원 중에서 누가 가장 핵심 인사이며 정당 별로 계파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역사를 가졌는지도 잘 모르는 외국인이 지도자가 된 격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을 단순히 알아보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이를 잘 활용해서 고단수의 '정치'를 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게다가 조지 1세가 영국 국왕으로 즉위할 당시는 패기있게 뭘 새롭게 배워서 시도해 볼만한 젊은 나이도 아니었고 무려 54살의 나이였다.
여기에 더해 다른 유럽의 절대 왕정들과 영국은 여러모로 정치 환경이 크게 달랐기 때문에 언어도 어느 정도 문제가 되었다. 조지 1세는 궁정에 신하들이 출근해서 왕과 소통하는 독일권 왕정식 통치 방법에 익숙해 있었으며, 임금이 직접 의회로 행차해서 신하들을 만나러 가는 의회 정치를 겪어본 적이 없었다. 또한 하노버에서는 절대군주로서 국가 중대사를 모두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영국에서는 의회가 중대사를 결정했고 왕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이 또한 위에서 언급한 '외국인' 군주들과 조지 1세의 환경이 달랐던 이유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영국이 왕의 권한이 많고 왕이 주도하는 국정회의에서 현안이 결정되는 나라였다면 신하들이 왕을 알현하여 프랑스어로 대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의회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라였기 때문에 막상 조지 1세가 의회에 출석했어도 의회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이나 표결 등 대부분의 절차는 영어로 이루어졌다. 중요한 내용은 프랑스어로 통역해줬다 할지라도 흐름을 읽고 거기에 주도적으로 끼어들기엔 여러모로 불편함이 많았다. 따라서 조지 1세가 이런 이상한 제도(?)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영국 통치에 흥미를 잃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지사다.
이러한 이유로 펼쳐진 조지 1세의 '전격 위임 통치'가 오늘날에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는데, 바로 왕이 의회에 통치를 전격으로 위임하면서 영국식 ' 의원내각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법학, 정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조지 1세의 이름을 잊을 수 없게 만든 업적이다. 또한 인류 역사상 최초로 헌법상으로 규정된 상징적 국가원수이기도 하다.[8]
요약하자면 조지 1세는 늘그막에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된 영국의 국내 정치에 비교적 무관심 했던 것뿐이며, 하노버의 군주로서의 게오르크 1세는 명민함과 군사적 용맹함을 아울러 갖춘 뛰어난 군주였다. 게오르크 1세로서는 여러 전쟁에 참여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특히 브레멘 일대를 병합하고 나아가 숙원이었던 북해로 진출하는데 성공하면서 하노버의 뿌리이자 중세 시절 유럽을 호령했던 하인리히 사자공 시절의 작센[9]의 영광을 재현했다.
영국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외침의 우려가 거의 없었던 반면에 내륙국인 하노버 공국은 유럽 대륙 복판에서 여러 나라에 둘러싸여 있어서 수시로 영토 전쟁에 휩싸여 있었다. 특히 당시 군사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호전적인 프로이센 왕국과 동쪽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하노버는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상황이었다. 프로이센은 경제적으로 발달했으면서도 대양으로의 직접적인 출구인 서북 독일로 진출을 노리고 있었으며 때문에 이에 하노버 공국을 끊임없이 노리고 있었다. 실제로 프랑스 혁명 전쟁 중인 1795년에 프로이센은 하노버를 잠시 합병한 전적이 있으며 끝내 1866년 프로이센은 하노버를 완전합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게오르크 1세의 군사적 진출은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지속된 하노버 왕국 영토의 근간을 확립했다.
하노버 선제후국의 역사보다야 영국의 역사가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잘 알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상 말년에 자리나 맡아준 국왕직이 인물 평가를 낮추는데 매우 크게 작용하는 셈이다. 허나 말년에 영국 국왕이 되어 잘 모르는 낯선 정치 환경에 익숙하지 않았을 뿐이지 하노버 군주로서의 업적은 오히려 고평가받는다.
4. 가족 관계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colbgcolor=#FFE4E1,#330500> 조지 1세 (George I) |
<colbgcolor=#FFF3E4,#331c00>
하노버의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 (Ernest Augustus, Elector of Hanover) |
<colbgcolor=#FFFFE4,#323300>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게오르크 (George, Duke of Brunswick-Lüneburg) |
|
<colbgcolor=#E4FFEC,#00330f>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빌헬름 (William, Duke of Brunswick-Lüneburg) |
|||
덴마크의 도로테아 (Dorothea of Denmark)[10] |
|||
헤센-다름슈타트의 안나 엘레오노레 (Anne Eleonore of Hesse-Darmstadt) |
|||
헤센-다름슈타트 방백 루트비히 5세 (Louis V, Landgrave of Hesse-Darmstadt) |
|||
브란덴부르크의 마그달레네 (Magdalene of Brandenburg) |
|||
팔츠의 조피 (Sophie of the Palatine) |
|||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11] (Frederick V, Elector Palatine) |
|||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 (Frederick IV, Elector Palatine) |
|||
오라녜-나사우의 루이제 율리아나 (Louise Juliana of Orange-Nassau) |
|||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Elizabeth Stuart) |
|||
제임스 6세 & 1세 (James VI & I) |
|||
덴마크의 아나 (Anne of Denmark) |
4.2. 자녀
아내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 ( 1666년 9월 15일 ~ 1726년 11월 13일)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조지 2세 (George II) |
1683년 10월 30일 | 1760년 10월 25일 |
안스바흐의 카롤리네 슬하 3남 5녀[12] |
1녀 |
프로이센의 왕비 조피 도로테아 (Sophia Dorothea, Queen in Prussia) |
1687년 3월 16일 | 1757년 6월 28일 |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슬하 7남 7녀[13] |
아내 조피 도로테아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가족관계가 엉망이었다. 아내 조피 도로테아의 신분이 자신보다 처지는 터라 계속 미워하다가 결국엔 강제로 이혼하고 하노버의 성에 유폐시켰다. 그녀는 같은 벨프 가문의 사촌이었는데 귀천상혼으로 태어나서 신분이 한 단계 낮게 취급되었다. 결혼을 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데 그녀의 아버지 게오르크 빌헬름이 원래는 독신이어서 영지가 조지 1세에게 상속될 예정이었으나[14] 프랑스 귀족과 늦바람이 나서 결혼하는 바람에 가문 재산 상속에서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었다. 조지 1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태어난 자식이 여자인 조피 도로테아였기 때문에 살리카법에 의거하여 삼촌의 영지를 물려받지 못할 염려는 없었으나, 늦둥이 외동딸에게 좋은 혼사를 마련해주고 싶었던 삼촌과 재산 상속 과정에서 분란을 막으려던 아버지의 강요로 강제로 결혼했던 것이다.
결국 결혼 12년 만인 1694년에 조피 도로테아에게 불륜 혐의를 뒤집어 씌워 이혼했고,[15] 그녀를 남은 평생 동안 죽을 때까지 성에 유폐시켰다. 조지 1세가 영국 국왕으로 즉위한 뒤에도 조피 도로테아는 이미 이혼당한 처지라서, 왕비가 되지도 못했고 영국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어머니를 박대하는 것에 불만을 제기하는 아들 조지 2세와의 사이도 나빴다. 또한 조지 1세가 자신의 애인들에게 보석을 선물하느라 왕실의 보물들을 탕진하는 바람에, 정작 조지 2세와 그의 왕비인 안스바흐의 카롤리네는 대관식에 쓸 보석이 없어서 빌려써야 했다. 조지 1세의 딸 조피 도로테아(어머니와 동명이인)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결혼했고, 조피 도로테아의 삼남이 바로 그 유명한 프리드리히 대왕이다. 딸 조피 도로테아도 어머니처럼 막장 남편 탓에 결혼생활이 좋지 않았다.
5. 여담
- 영국 역사상 최악의 주식사태인 남해거품사건이 조지 1세의 재위기에 일어났다. 로버트 월폴이 어찌어찌 사태를 무마했고, 세계 최초의 공인회계사와 회계감사의 개념이 영국에서 탄생하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 본인처럼 독일에서 영국으로 귀화한 동명이인인 조지 프레드릭 헨델과의 묘한 인연이 있다. 헨델은 본래 하노버 왕실의 악장이었다. 조지 1세의 허락을 받아서 영국에 간 뒤 크게 성공한 뒤 하노버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영국에 귀화해 버렸다. 그런데 조지 1세가 영국 국왕에 즉위하게 된 것.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한 헨델은 궁리 끝에 유명한 '수상음악'을 작곡해서 조지 1세가 뱃놀이를 할 때 수상음악을 연주했다. 헨델에겐 다행히 음악에 만족한 조지 1세는 헨델에게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헨델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 선대부터 하노버 공가를 섬겨 온 라이프니츠에겐 조지 1세의 영국 왕 즉위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재앙이었다. 영국의 우상 뉴턴과 싸운 라이프니츠를 영국 왕이 고용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라이프니츠는 하노버 왕조에서 해고된 후 마침 나이도 많았는지라 불우하게 인생을 마감했다.
-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와 이혼한 후 재혼을 하지 않았기에 왕비가 없다. 대신 하노버에 있었을 때부터 조지 1세의 정부였던 멜루지네 폰 데어 슐렌부르크가 영국 궁정에서 가장 왕비에 가까운 여성으로 권세를 누렸다.
[1]
현재 오스나브뤼크 대학교의 건물로 사용중.
[2]
다만 다른 선제후들의 반대로 바로 임명되지는 못했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도중인 1706년
바이에른 선제후국과
쾰른 선제후국이 제국추방령(Reichsacht)을 당해 선출권이 정지된 여파가 밀려온 1708년이 되어서야 공인되었다.
[3]
존 처칠은 실각 후 2년간 유럽 각지를 여행했고 앤 여왕의 사망 직후 잉글랜드 본토로 귀환했는데 새 왕이 된 조지 1세는 당연히 그를 환영하고 복권시켰다.
[4]
앤은 남편
덴마크의 외르겐 왕자와의 사이에서 자녀는 여럿 있었으나 거의 모두 사산되거나 유산되었다. 살아남은 아들 윌리엄도 1700년, 11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유산아나 사산아까지 합치면 무려 17명. 앤과 조지 1세는 6촌 지간이며 조지 1세의
외할머니
엘리자베스 스튜어트가
제임스 1세의 딸이었다.
[5]
명예혁명의 명분 자체가 가톨릭 국왕 축출이었던 만큼 지금까지도 영국에서 가톨릭 신자의 왕위 계승권은 원천 봉쇄되어 있고 총리가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 사실 총리 부분은 명백하게 종교 차별이지만, 오늘날에는 종교가 영국의 정치 이슈가 아니라서 이 문제는 방치되고 있다.
[6]
이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태생 자체가 당대의 수많은 신학 노선을 국가 권력으로 한 지붕에 동거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성공회 39개 신조의 경우 칼뱅주의 색채가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
교황을 배제하고 국
왕에 의해 서임된 주교들이 이끄는 국교회 체제 그 자체'를 인정하느냐의 여부야말로 국교회 신자의 기준이었고, 그래서 1. 국교회 2. 비국교회 프로테스탄트 3. 가톨릭이라는 잉글랜드의 종교 지형이 나온 것이다.
[7]
다만 노르만 왕조는
노르만족의 정복왕조였고 플랜태저넷 왕조 또한 그 노르만 왕조의 뒤를 이은 프랑스계 왕조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8]
이전에도 중세 일본의
천황이나
피렌체 공화국 등 국가원수가 상징에 불과했던 사례가 여럿 있었지만 구조가 그렇거나 특정한 사정이 있는 등이었지, 법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었고 시기에 따라 실권을 가지는 경우도 있었다.
[9]
오늘날의
니더작센과
홀슈타인 일대. 오늘날 영국의 뿌리가 된 앵글로-색슨족 중 색슨족(작센족)이 이 곳 출신이며 원래 작센을 가리키던 이 곳이었다. 사자공의 영지가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에 의해 공중분해된 후 영지를 재분배하는 과정에서 사자공의 가문이었던
벨프 가문이 작센 대신
브라운슈바이크라는 이름을 쓰고, 오늘날
작센안할트 일대를 통치한 아스카니아 가문이 작센 공작을 칭하면서 작센의 위치가 이동했고, 오늘날의
작센은 15세기 초
독일왕
지기스문트가
후스 전쟁에서 자신을 도운
베틴 가문의
마이센 변경백
프리드리히 4세에게 대가 끊긴 아스카니아 가문 작센-비텐베르크 가계가 가졌던 작센 선제후 직위와 작센-비텐베르크 공국을 하사하면서 과거 마이센 변경백국(Markgrafschaft Meißen)이라 불리던 지역이 최종적으로 작센이 되었다.
[10]
크리스티안 3세의 차녀이다.
[11]
30년 전쟁의 시작인 보헤미아-팔츠 전쟁 당시의 팔츠 선제후로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되었던 인물이다.
[12]
웨일스 공 프레더릭,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왕자,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비 루이세 등
[13]
프리드리히 대왕,
스웨덴의 왕비 로비사 울리카,
하인리히 왕자 등
[14]
원래 조지 1세의 어머니인
팔츠의 조피와 결혼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후에 하노버 선제후국)을 형에게서 상속받아 다스려야 했지만, 결혼도 하기 싫고 통치도 하기 싫어서 작위를 동생들에게 넘겨주고 유유자적하게 즐기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조지 1세는 게오르크 빌헬름 공작의 막내동생의 아들이었다.
[15]
불륜남으로 의심받은 스웨덴 귀족 필리프 크리스토프 폰 쾨니히스마르크은 납치 살해했다. 여담으로 필리프 폰 쾨니히스마르크의 여동생 아우로라가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2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바로
프랑스군의 명장
모리스 드 삭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