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로색슨족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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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 5세기 브리튼 섬에 이주한 게르만족의 일파. 현재 잉글랜드인의 직접적인 기원이다.이들이 도래하기 전 브리튼인이 살던 브리튼 섬은 고대 로마가 점령했다가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앵글로색슨족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 후에는 노르드인 바이킹의 이교도 대군세의 침공에 맞서 처절하게 싸웠고, 그 후유증 탓에 일시적으로 크누트 대왕을 모시기로 하여 한때 앵글로-노르드 왕조가 지배하기도 했으며, 크누트의 가계가 단절되면서 다시 앵글로색슨계 왕조가 들어섰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윌리엄 1세에게 정복당하면서 최종적으로 노르만족이 지도층을 차지했다. 그런데 노르드인들은 과거 앵글로색슨처럼 기존의 문화와 혈통을 자신들의 것으로 완전히 대체하는 것에는 실패했는데, 잉글랜드 내 인구는 앵글로색슨이 다수였기에[1] 결국에는 노르만족 언어·문화를 상류층의 문화로 받아들이되 유전적으로나 언어·문화적으로나 앵글로색슨의 것을 근간으로 하여 잉글랜드인의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다만 정복자의 특성상 부계 혈통, 상류층의 혈통과 언어에는 노르만의 것이 진하게 남아있게 된다.
2. 어원 및 어형
'앵글로색슨'(anglo-saxons)이라는 말은 앵글족(angles)+색슨족(saxons)의 혼혈이라는 의미인데, 더욱 엄밀하게는 뒷 부분이 주체가 되어 '앵글화된 색슨'이라는 뜻이므로 색슨족에 중심을 두고 있는 표현이다.하술할 연구들에서 보듯 전통적으로 영국인(특히 잉글랜드인) 사이에서는 켈트보다는 앵글로색슨 혈통이 더 우세한데, 그 안에서도 앵글족과 색슨족 중 어느 쪽이 우세한지는 분야에 따라 다르다. 앵글로색슨인들의 통일국가였던 잉글랜드 왕국의 직접적인 전신은 웨식스 왕국으로, 웨식스의 어원을 밝혀 현대 영어로 옮기면 'west saxon', 즉 '서부 색슨족'이 된다. 이는 웨식스가 앵글족이 아닌 색슨족이 세운 왕국으로서 정치적 주류는 색슨족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색소앵글(Saxo-angle)이 아니고 앵글로색슨(Anglo-saxon)인 것이다. 그리고 이 '색슨'은 본래 " 독일 니더작센 주를 포함한 구 작센 지역"을 뜻한다. 이 점에서 색슨족의 기원은 게르만족 중에서도 작센인들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언어학적으로 들어가면 영어는 계통상 저지 독일어에 속하는 색슨어보다는 앵글어가 주류로서 프리지아어와 가장 가깝다. 즉, 언어적으로 앵글어가 기층언어로 흡수당하기는커녕 역으로 색슨어가 묻혀버렸고,[2] 이로 미루어 보아 통일의 주체가 색슨계 왕국이었을 뿐 오히려 쪽수로만 따져보면 앵글족이 더 많았을 확률이 높다.[3]
앵글로가 색슨보다 앞에 와서인지, 본국 격인 잉글랜드의 이름은 '앵글족의 땅'이란 뜻이고, ' 영미권'도 영어로 색소스피어가 아니라 앵글로스피어(Anglosphere)이며, 캐나다+ 미국을 색소아메리카가 아니라 앵글로아메리카라고 부른다. 한편으로는 사실 색슨이라는 단어가 섹스와 발음이 비슷하기에 문란하다는 이유로 앵글이라는 말을 앞에 두는 이유도 있다. 이를 두고서 말장난도 할 정도.
이 어두 '앵글로'는 이후 잉글랜드에 들어오는 여러 민족 이름하고도 결합하는 식으로 활용되었다. '앵글로-노르드'(Anglo-Norse)는 9세기 이교도 대군세부터 11세기 크누트 대왕과 그 후계자의 통치 등 노르드인 바이킹이 지배층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대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앵글로-노르만'(Anglo-Normans)은 11세기 노르만 정복으로 노르만족이 잉글랜드의 지배계층이 되면서 노르만과 앵글로색슨 양자가 결합했다는 뜻으로 쓰이는데, 이러한 표현은 아예 단일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잉글랜드인(English)과는 달리, 양자가 아직 완전히 융합하지 않고, 사회 내에 공존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4][5]
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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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족과 색슨족, 주트족 등 게르만계 이주종족은 본래 유럽대륙에서 발원했다. 색슨족은 현재의 윌란 반도 일부 해안 & 독일 북서부 해안( 니더작센)에서 발원했으며, 앵글족은 윌란 반도의 남슐레스비히에서 발원했다.[6] 이들 외의 이주종족인 주트족은 덴마크의 윌란 반도에서 유래했는데,[7] 앵글족과 색슨족에 비해서 규모가 극히 작아 단일 포섭민족으로 보기는 힘들다. 잉글랜드 내 분포를 보면, 색슨족은 지금의 잉글랜드 남부,[8] 앵글족은 지금의 잉글랜드 북동부,[9] 주트족은 지금의 켄트주에 주로 정착했다.
이들은 이미 로마 제국 후기에 영국 해협(english channel)과[10] 접한 브리튼이나 갈리아 벨기카 속주를 공격했고, 로마는 이에 대응하여 그 일대를 '색슨 해안'(saxon shore)이라 부르면서 전담 방어사령관을 두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색슨족과 앵글족은 동족 간에 세력 다툼이 일어나 여러 집단으로 쪼개졌고, 그중 밀려난 무리가 브리튼 섬으로 이주했다. 당시 브리튼 섬은 내부에서는 로마군이 철수하여 각지에서 군벌이 할거하고, 북쪽과 서쪽에서는 픽트족과 아일랜드인 약탈자들이 침략해오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는데, 브리튼인 군벌들이 약탈자를 막고자 이들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그렇게 앵글족과 색슨족은 헹기스트와 호르사 형제의 지도 아래 브리튼에 정착했고, 이들이 나중에 이스트 앵글리아와 머시아 왕국을 세웠다. 이후 엘레 왕이 이끄는 또 다른 색슨족 집단이 남부에 상륙하여 서식스 왕국을 건국했다.[11]
가장 대표적인 두 세력 외에도 주트족을 비롯한 여러 잡다한 소규모 부족이 브리튼으로 이주했고, 그 결과 이곳에서는 켈트계 브리튼인이나 게일인, 게르만계 여러 부족 간에 대혼전이 벌어졌다. 그중 앵글족의 독자 세력은 일찌감치 패망했고, 곧 색슨족이 앵글족 잔당과 주트족 등 여러 종족을 흡수하면서 브리튼 남부의 패자가 되었다. 이들 사이에 존재했던 수많은 왕국도 이합집산을 반복한 끝에 7개로 정립되었고, 이를 가리켜 ' 앵글로색슨 7왕국'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앵글로색슨족에 동화되지 않은 남부 켈트계 브리튼인들은 잉글랜드를 벗어나 서부의 웨일스나 콘월의 주민이 되었다.
대륙에서 브리튼 섬으로 흘러든 앵글로색슨족은 10~11세기 즈음 순조로이 잉글랜드의 통합을 완료하고 독자적인 왕조를 개창했다.[12] 그러나 이 무렵부터 스칸디나비아의 노르드인 바이킹이 남하해오면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고, 한때는 사실상 덴마크의 간섭을 받는 속령이 되기도 했다. 이후 바이킹 간의 내분과 앨프레드 대왕 이래 웨식스 국왕들의 약진에 힘입어 상당한 세력을 회복했으나, 다시 바이킹을 통합한 북해제국에 정복되어 앵글로색슨족 스스로 노르드인의 군주 크누트 대왕을 잉글랜드 왕으로 선출하는 등 어느 종족이 확고히 패권을 잡지 못하거나 잡더라도 오래가지 못하는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크누트 대왕의 가계가 단절되면서, 다시 앵글로색슨 혈통의 왕조가 돌아왔으나, 참회왕 에드워드가 후계자없이 사망하여 다시 한번 대혼란기에 빠졌다. 공위가 된 잉글랜드 왕위를 놓고서 앵글로색슨인 백작(earl) 해럴드 고드윈슨과 노르드인 노르웨이 국왕 하랄 3세 하르드라다, 노르만인 노르망디 공작 기욤이 경쟁한 끝에 앵글로색슨족의 마지막 왕 해럴드 2세를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끔살시킨 기욤 공작이 윌리엄 1세로서 새 왕조를 개창했다.[13] 앵글로색슨계 지배계급은 상당수가 죽거나 추방되었고, 노르만족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그러나 영국 내 노르만족은 소수였기 때문에 결국 긴 세월 끝에 앵글로색슨족에 역으로 동화되었고, 노르만 정체성은 혈통과 언어에서 큰 영향을 남기긴 했지만 영국의 국가적 정체성이 되지는 못한채 계보학적 차원에서 언급되고는 하는 수준이 되었다. 앵글로색슨족은 중세 이후 대륙 세력이 근대까지 종교와 영토 싸움 등으로 치고받는 사이 섬 안에서 독자세력이 되어 민족주의를 태동시켰으며, 이에 따라 이들도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첫 민족'으로 규정되었다.
이들 중 일부가 섬 밖으로 나가 미국과 캐나다 건국의 핵심세력이 되었음은 두 말 하면 입이 아플 정도이고, 이 두 국가는 ' 앵글로아메리카'라는 이름으로 동질적 그룹으로 묶이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 밖으로 나간 다른 무리의 앵글로색슨족 그룹들은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을 몰아내거나 혹은 마오리족들과 상생하며 개척함으로써, 그들의 본거지인 브리튼 섬에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거대한 대륙과 섬들을 앵글로색슨족의 새로운 본거지로 삼았다.
4. 영국인 내 유전적 비중
앵글로색슨족이 영국의 동쪽에서부터 원주민 켈트족 대부분을 죽이거나 쫓아내 잉글랜드를 차지하고, 쫓겨난 켈트계 주민들이 웨일스나 콘월 등에 정착했다는 식의 역사관이 오랫동안 지배적으로 받아들여져 왔지만, 20세기 후반부터 2010년대까지 이런 역사관에 의문을 품은 역사학자 및 고고학자들은 막스 플랑크 협회 소속 슈테판 시펠스(Stephan Schiffels) 박사의 2016년도 유전자 연구 결과를 인용하면서 영국인은 대부분 켈트족이고, 앵글로색슨족은 소수 지배층이었을 뿐이었다고 주장했다.2016년도 연구결과에 따르면 잉글랜드 주민의 혈통 중 앵글로색슨계가 차지하는 비율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전체적으로는 1/3 정도(10~40%)에 불과하다고 했고, 동부 지역은 전반적으로 약 38% 정도가 앵글로색슨이라고 했다. 그러나 시펠스 박사가 표본의 수를 8배로 늘려 80개 인골의 DNA를 재조사한 2020년도 연구 결과에 따르면 침략 기간 동안 잉글랜드 남동부 토착민의 80%가 대체되었다고 한다.[14]
참고로 2016년의 연구결과에서 "최근 인구 혼합으로 인해 역사적 지리적 인구 구조를 완전히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라고 언급하는데 산업혁명 이후 켈트족 비중이 높은 국가의 농민들 및 아일랜드 대기근을 피해서 온 아일랜드인들이 영국 노스이스트 잉글랜드, 노스웨스트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의 산업화된 도시들에 대규모로 유입된 것을 고려하면 현대 영국인이 아일랜드인과 유전적으로 유사한 게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다.[15]
그러나 2022년도의 최신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기존 통설이 맞는 결과로 보인다. 특히 앵글로색슨 모계 혈통이 부계 혈통보다 더 자주 발견된다는 점에서 기존 통설을 지지하는 증거로 여겨진다.[16]
즉, 앵글로색슨족 남성이 브리튼인 여성과 결혼하는 일 없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대부분을 죽이거나 쫓아내 잉글랜드 지방을 차지하고, 쫓겨난 브리튼인 선주민들이 서쪽의 웨일스나 콘월 등에 정착했다는 기존 가설이 현재로서는 정설에 가장 가까워 보인다.
어찌되었든 브리타니아 제도 자체가 워낙 여러 민족이 번갈아가며 거쳐간 곳인지라 현대 잉글랜드인에게 앵글로색슨 혈통의 비중은 아주 압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낮은 것은 절대로 아니며 앵글로색슨이냐 켈트이냐의 차이는 그 비율이 지역, 지위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이 있다고 보면 된다.
지역적으로 보면 남동부 지역은 47% 앵글로색슨,[17] 43% 프랑스인,[18] 10% 켈트족이고, 요크셔에 가까워질 수록 프랑스 혈통이 줄어드는 대신 바이킹 및 켈트족 혈통이 늘어나고, 서부 및 북부 지역은 켈트족이 대부분에 나머지는 25%~30% 앵글로색슨, 14%~25% 프랑스인이다.
계급적으로 보면 앵글로색슨족이라 분류되는 사람들 대다수는 중산층인 앵글로색슨(+데인)계를[19] 제외하면 실제 혈통적으로는 귀족층을 이루는 앵글로색슨 + 노르만족 혼혈과 노동계급 및 하류층을 형성하는 켈트계로[20] 분류할 수 있다.[21]
5. 종교
5.1. 앵글로색슨 신화
본래 게르만족의 일파이니만큼, 앵글로색슨족은 오딘과 토르, 티르 같은 게르만 신들을 섬기는 게르만 다신교를 믿어왔다. 다만, 신들의 이름이 스칸디나비아에 비해 약간 다를 뿐인데, 앵글로색슨족은 오딘과 토르, 티르를 각각 워든(Woden)과 투노르(Thunor), 티우(Tiw)라고 불렀다.[22]그밖에도 영국으로 이주한 앵글로색슨족은 세악스네아트(Seaxneat) 혹은 사흐스노트(Saxnot)라 불리는 신을 숭배했다. 이 신은 북유럽 신화를 기록한 원전인 《 에다》에서는 그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앵글로색슨족만의 고유한 신으로 여겨진다. 세악스네아트는 색슨족의 수호신이자 색슨족 왕가의 조상신으로 추정되는데, 그중에서 에식스 왕조는 자신들이 세악스네아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에식스 왕조는 오파(Offa) 왕의 6대 조상이 세악스네아트이며, 그 위의 7대 조상은 워든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일설에 의하면 세악스네아트는 원래 색슨족의 최고신이었다가, 훗날 워든의 아들로 그 위치가 낮아졌다고 한다.
색슨족은 봄과 생명과 출산을 다스리는 흐레타(Hretha)와 에오스트레(Eostre)라는 여신도 믿었는데, 오늘날 부활절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 '이스터'(Easter)도 색슨족의 여신 ‘에오스트레’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그렇다고 무슨 에오스트레 축일이 부활절로 둔갑했다든가(...) 그런 뜻은 아니고,[23] 구 색슨족 달력에서 에오스트레 축일이 포함된 '에오스트레의 달'(Eosturmonaþ), 즉 양력 4월이 마침 그리스도교의 부활주간과 겹치기에 서기 7세기 이후 색슨족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나서도 '에오스트레'라는 이름만은 부활절을 일컫는 '이스터'(Easter)라는 단어로 남았다.
이 밖에도 색슨족은 이르민(Irmin)이라는 전쟁신을 숭배했다. '이르민'은 색슨족이 사용한 고대 영어에서 '강력함', '위대함'이란 뜻이었다. 브리튼 섬으로 이주한 색슨족은 삭스노트를 수호신으로 숭배한 반면, 독일 본토에 남아 있었던 색슨족(작센족)들은 이르민을 최고신으로 여겼다. 8세기 무렵 성직자나 학자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이들의 이르민 신앙에서는 '이르민술'(Irminsul)이라는 큼지막한 나무 기둥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를 '세상을 떠받치는 위대한(이른) 기둥'이라고 여겼다.[24] '이르민'이라는 단어는 티르의 별명에도 들어간다고 한다.
다른 고대 사회처럼 앵글로-색슨족의 왕들도 신들의 자손이자 반신(半神)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 왕들 대부분은 워든이나 프레이(풍요의 신) 같은 게르만족 신들로부터 핏줄을 이어받았다고 주장을 했으며, 훗날 9세기에 활동한 웨식스 왕국의 명군 앨프레드 대왕의 왕비도 자신의 조상이 워든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5.2. 기독교로의 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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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캔터베리 대주교 캔터베리의 어거스틴 |
흔한 인식과는 달리, 앵글로색슨족은 따로 떨어진 섬나라라서 그런지 고속으로 개종한 대륙 국가들과 달리[25] 그리스도교로 쉽게 개종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전통 신앙인 게르만 다신교에 꽤나 오랫동안 집착했다. 그들이 서기 5세기 초반부터 브리타니아로 이주하여 토착민인 켈트족을[26] 정복한 이후로 약 150년 동안 브리타니아의 초기 교회는 거의 죽은 상태였다. 그러다가 597년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이 보낸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장과 다른 선교사들이 켄트의 타넷 섬에 상륙하면서 기독교가 다시 전파되었다.
앵글로색슨 7왕국 중 노섬브리아의 에드윈 왕(Edwin: 586~633년)은 폴리누스 주교가 기도를 한 덕분에 자신을 죽이려던 암살자의 칼을 막아내고, 왕비가 무사히 딸을 낳았다고 생각해서 전통신앙을 버리고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게르만 다신교를 믿었던 머시아의 펜다 왕(Penda: ?~655년)에게 패배하여 633년 살해당했고, 이후 노섬브리아 왕국은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게르만 다신교로 돌아간 왕들이 다스렸기에 한동안 기독교의 전파에 큰 지장이 있었다. 그래도 657년 노섬브리아 왕실은 힐다의 수도원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결국 가톨릭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나쁜 행동으로 기독교 신앙을 더럽히고, 우상을 숭배하며 주문이나 부적으로 위기를 벗어나려 하였다."
성 커스버트(Cuthbert)
성 커스버트(Cuthbert)
그러나 앵글로색슨족의 기독교 신앙은 그리 굳건하진 못했다. 그들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자주 신앙을 버리고 전통적인 게르만 다신교로 돌아갔다. 7세기 린디스판(Lindisfarne) 수도원의 주교 아빠스 성 커스버트(Cuthbert)는[27] 신이 내린 대재앙이 돌자, 자기 교구민 중 많은 수가 이교적 행위를 하는 것을 한탄했다. 여기서 언급된 대재앙은 전염병을 가리키는 듯한데, 전염병이 돌자 앵글로색슨 주민들이 기독교를 버리고 '우상'이라고 표현된 옛 신들을 섬기면서 주문과 부적을 썼다고 이야기를 한 것이다. 또한, 캔터베리의 테오도르 대주교는 669년 색슨족이 게르만 신들을 섬기는 사원을 다시 세우는 장면을 보았고, 리폰의 월프리드 주교를 제외하면 자신의 교구에서 주교가 전혀 없었다고 기록했다. 그런가 하면 동앵글리아의 레드월드 왕은 켄트 왕국에서《성경》을 공부하고 기독교 교리를 배웠으나, 고향에 돌아오자 게르만 다신교를 믿던 왕비와 사제들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기묘한 절충안을 고안해 냈는데, 예수와 게르만 신들을 함께 숭배했던 것이다. 물론 독실한 성직자들은 당연히 사악한 우상숭배라고 비난했다.
이렇게 전통 신앙과 새로운 신앙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던 앵글로색슨족은 747년 클로베쇼 종교회의에서 잉글랜드의 모든 백성들은 옛 게르만 신들을 숭배하거나 제물을 바치지 못하도록 하는 선언이 나온 후에야 비로소 모두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색슨족이 브리튼 섬에 최초로 상륙한 지 300년이 지나서야 그들은 전통신앙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던 것이다.[28]
하지만 오랜 세월 조상 대대로 섬기던 신들에 대한 기억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다.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웨식스의 앨프레드(Alfred) 대왕은 침략해온 바이킹들과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천둥의 신 토르(수노르)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다. 그런가 하면 잉글랜드의 변방인 맨 섬에서는 무려 11세기에 가서도 《에다》에서 말한 라그나로크의 내용을 묘사한 비석을 세우기도 했다.
아울러 현재 1주일 중 화, 수, 목, 금요일의 영어 단어들은 모두 앵글로색슨족을 포함한 고대 게르만족이 믿던 신들의 이름에서 따왔다.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각 요일을 상징하던 신들의 이름을 비슷한 속성을 가진 게르만 토착신들로 바꾼 것인데, 화요일-티우(티르=마르스=아레스)의 날(Tiwesdaeġ), 수요일-워덴(오딘=메르쿠리우스=헤르메스)의 날(Wodnesdaeġ), 목요일-쑤노르(토르=유피테르=제우스)의 날(Þunresdaeġ),[29] 금요일-프리이(프리그 또는 프레이야=베누스=아프로디테)의 날(Friġesdaeġ)에 해당한다.
참고로 독일 본토에 살던 색슨족은 잉글랜드로 이주한 동족들보다 전통신앙에 더 집착했고, 그와 반비례하여 기독교를 거부하는 정도도 심했다. 8세기 초 잉글랜드의 수도사 겸 학자인 가경자 베다가 쓴 책인 《앵글족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 제5권 10단에 따르면 검은 헤우왈드(Niger Heuuald), 하얀 헤우왈드(Albus Heuuald)라고 불리는[30] 잉글랜드 출신 선교사 두 명이 작센[31] 지역으로 가서 선교하자, 색슨족은 선교자들 탓에 자기들이 전통 신들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할까 우려하여 두 사람을 칼로 찌르거나 온갖 고문을 가한 뒤 강물에 던져 죽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대륙의 색슨족은 브리튼 섬의 색슨족보다 약 100년 동안이나 전통신앙을 더욱 오래 보존하다가 샤를마뉴의 정복과 철두철미한 개종 정책으로 비로소 기독교로 전환된다.[32]
6. 문화
특히 근대에 이르러 막강한 영향력을 누리고 있다. 근대 제국주의의 주요 열강이자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대영제국과 현대 초강대국 지위를 차지한 미국의 영향으로, 언어적으로는 영어가 세계 공용어 중에서도 폭넓게 쓰이고 있으며 화학계의 사례처럼 많은 학술용어들이 영어로 대체되었고, 문화적으로나 사상적으로도 큰 침투력을 지녀서 정체성 정치나 정치적 올바름과 같은 영미권발 운동들이 다른 문화권으로도 번져나가는 경우가 상당하다.영국과 미국, 캐나다 및 호주 등을 통틀어 언급할 때 앵글로색슨으로 통용한다. 영미권 사회에서는 중세 역사나 WASP와 같은 특정 경우에 언급하는 것이 아니면 앵글로색슨이란 단어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서나 주로 쓸법한 고루한 단어이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유독 앵글로색슨(Les Anglo-Saxons)이라는 표현을 즐겨쓰는데, 매우 광범위한 용법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특히 언론 및 학계에서 자주 쓴다. 이를테면 영미식의 무언가를 칭할 때 앵글로색슨식 경제모델, 앵글로색슨식 아이디어, 앵글로색슨식 자유주의, 앵글로색슨식 접근법[33] 등등으로 사용된다. 이는 지리적으로는 가까우나 문화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으며 사실상 외교적, 문화적으로 패권적 위치를 차지한 영미권을 타자화 하고 프랑스의 문화를 중심화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주로 사용된다는 주장이 있다. #'앵글로색슨'은 미국이나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의 또 다른 자아다.
6.1. 아서 왕과의 관계
현대 영국의 국민적 영웅인 아서 왕은 원래 켈트족, 그 중에서도 브리튼인[34]의 영웅으로서 게르만족에 속하는 앵글로색슨족[35]과는 적대적인 관계였으나 1066년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정복 이후, 앵글로색슨 패권이 몰락하여 켈트 문화가 다시 꽃 피우게 되면서 1100년대부터[36] 아서 왕의 신화가 다시 영국에 퍼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앵글로색슨족은 선조들의 적이었던 아서 왕을 영웅으로 여기게 된다.사실 영국은 로마 제국의 압제자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 이케니족의 부디카도 영웅으로 여기는 등 딱히 어느 한쪽으로 일관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예컨대 영국은 데인족과 노르만 지배 덕분에 바이킹의 후손이라는 이미지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판본에서는 켈트 영웅인 아서 왕과 그의 기사들이 사악한 앵글로색슨을 비롯한 게르만 침략자들을 무찌르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세계사를 살피면 이런 게 영국만의 일은 아니다.
프랑스인은 로마(라틴), 켈트 그리고 게르만이 융합되어 탄생한 민족이다. 더불어 아서 왕은 프랑스의 영웅이기도 한데, 이 덕에 프랑스 구전 설화의 오너캐인 아서 왕의 원탁의 기사 랜슬롯까지 등장하기에 이른다. 과거에는 스코틀랜드와 프랑스가 동맹이기도 했거니와 프랑스인이 자진의 민족 정체성을 라틴족과 켈트족으로 여기는 면이 없지 않다.[37]
한때 아서 왕은 추앙의 대상이기도 했고, 역사적 인물처럼 생각하던 시기도 있었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전설 속의 인물로 인식되어지고 있다. 사실상 우리나라에서의 역사적인 배경이 허구적인 신화로 표현되는 단군이나 환웅에 대한 생각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다만, 아서 왕은 세계적으로 유명한지라 영국의 왕 중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친근한 왕으로 문학과 다양한 매체의 소재로 이용되어지고 있다. 신화라는 게 당대 권력 구조와 떼어놓기 힘들다보니 영국의 왕가와 왕들은 아서 왕을 많이 의식해왔다. 아서 왕의 고향은 콘월의 틴타겔로 알려져있는데, 이는 영국 왕가에도 영향을 미쳐 국왕의 장남은 ' 콘월 공작'으로 불리며 그 부인의 공식칭호는 '콘월 공작부인'이다.
실존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영국인들이 존경하는 인물 51위에 들기도 했다. 실존하지도 않은 허구의 인물이 실제 인물들과 섞여 순위권 안에 들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문서에서는 허구의 인물이라고 강한 어조로 쓰긴 했지만, 역사적인 배경과 문헌을 근거로 실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역사 속의 실제인물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
다만, 오히려 그 이름의 상징성이 부담스러운 탓인지 실제 아서를 왕명으로 정한 왕은 한 명도 없다. 튜더 왕조[38]의 헨리 7세의 적장자인 아서 튜더가 아서 왕의 등극에 가장 가까웠던 인물인데 15세에 사망하여 동생 헨리 8세가 왕위를 이었다.
6.2. 앵글로색슨 문화권에 속한 비앵글로색슨 국가
-
아일랜드
설명이 필요없는 앵글로색슨족의 대 브리튼섬 밖의 첫 번째 식민지라고 할 수 있다. 아일랜드는 800년이 넘게 앵글로색슨족의 영향을 받았다. 영국계 개신교도가 인구의 절반 넘게 차지하는 북아일랜드 6개 주를 제외한 현대 아일랜드는 혈연적으로 아일랜드계 켈트족이 주류다. 하지만 1167년 이후 1930년대까지 잉글랜드 그리고 연합 왕국의 침공과 지배를 받으며 토착 문화 중 상당수가 소실됐다. 대표적으로 현대 아일랜드의 아일랜드 켈트족 토착어인 아일랜드어 사용률은 5% 내외이며, 절대다수의 아일랜드 국민들은 영어를 제1언어로 사용한다. 그래도 현대까지 보존된 아일랜드 문화와 기록도 상당하고, 아일랜드인들과 앵글로색슨권 각국으로 넘어간 아일랜드계 이주자들의 문화적 영향력도 상당하다. 아일랜드가 독립한 현대에도 영국, 미국, 영연방 국가들과의 활발한 교류로 앵글로색슨 문화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다. -
자메이카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 스페인 식민지 시절에 이미 원주민들의 씨가 거의 말라버려, 오늘날에는 원주민 문화는 흔적이 미미하다. 그 대신 영국인들이 데려온 아프리카계와, 영국인과 아프리카계 이주민들의 혼혈인 크리올들이 주류를 잡았다. 이들의 경우 세대가 갈수록 영어 구사, 개신교 신앙, 영국식 생활 방식 등으로 영국 문화에 동화되었다. 자메이카 독립 이후 앵글로색슨계 문화를 기반으로 주민들 사이에 남아있던 아프리카계 문화와 주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의 교류의 영향으로 독특한 문화적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레게, 스킨헤드 등 영국 문화를 바탕으로 흑인 문화, 라틴아메리카 문화를 섞은 현대 자메이카 문화가 영국과 미국, 영연방 각국의 현대 문화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캐나다, 미국, 영국령 카리브 속령들과 함께 앵글로 아메리카의 일원으로 꼽힌다. -
남아프리카 공화국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전까지 남아공의 주도 세력은 네덜란드계인 보어인들과 영국계 앵글로색슨족이었고,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로도 앵글로색슨계 백인들이 경제적, 사회적 영향력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 다만 인구나 정치면에서 주도권은 흑인인 남아공 원주민들과 인도계, 백인의 피가 섞인 컬러드들에게 있기 때문에 인종적으로 앵글로색슨족이 주류인 국가라고 보기는 힘들다. 영어가 남아공의 공용어 중 하나이기는 하나, 남아공 내에서 영어를 제1모국어로 하는 이는 전체의 9% 밖에 되지 않는다. 다만 영어 구사 가능자는 31%로 상대적으로 비율이 높고, 과거로부터 이어진 영국-영연방과의 인종적, 문화적, 역사적 연결 고리 때문에 Anglosphere로 묶이기도 한다.
7. 여담
여담으로 다른 게르만족들과 마찬가지로 켈트족과 라이벌 기믹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하다.[39] 특히 아일랜드인에게는 과거 자신들을 식민지배하고 학살한 원수들이다. 지금도 영국과 아일랜드의 경기는 각종 스포츠에서 제일 가는 앙숙이다.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역시 켈트계 정체성이 강한지라 영국에 대해 강한 반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앵글로색슨족과 켈트족이 서로 섞인 경우도 상당히 많은데, 특히 이들이 이민으로 건너간 미국이 대표적이다.이민 초기엔 먼저 자리잡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계 미국인들이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을 차별하고 생활공간도 나눠놓는 등 선을 그어놓으려 애를 썼고, 지금도 미국 상류층의 조건으로 WASP를 따지기도 하는 등 알게 모르게 선을 갈라놓고 있다.[40] 이 두꺼운 차별의 벽을 깨고 대통령이 된 사람이 존 F. 케네디지만 알다시피 그는 암살당했으며, 이후 영국계 미국인에 개신교 신자인 소위 말하는 WASP가 계속 상류층을 형성해오다 이제야 버락 오바마 같은 흑인 대통령도 한 번 나온 그런 시대가 되었다.[41]
1박 2일 시즌1 13회에서 김C가 네팔 여행중에 자기는 앵글로색슨족 빼고는 모든 인종을 커버 가능할 꺼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는데, 버스에 동석해 있던 강호동이 앵글로색슨족을 앵그리섹스족, 애클롬섹스족 등으로 알아듣기도 했다.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지역에 트란실바니아 색슨족(Transylvanian Saxons영어)혹은 지벤뷔어거 작센족(Siebenbürger Sachsen독일어)이라 불리는 게르만족도 있는데 이쪽은 앵글로색슨인들이나 작센인들보다는 다른 게르만계 부족의 후예인 룩셈부르크인이나 독일인, 심지어 프랑스인같은 다른 게르만족 및 그 혼혈 출신들이 절대 다수이다. 이들이 작센인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과거에 작센족의 법을 따랐기 때문이다. 즉, '작센화'한 게르만 혼혈집단인 셈이다.
8. 관련 문서
[1]
반대로
브리튼 섬의 토착민인 로만 브리튼인들이나 켈트계 부족들은 인구에서 앵글로색슨족보다 적었기 때문에 결국 이들은 침략자인 앵글로색슨족에게 동화되고 말았다.
[2]
정확하게는,
알프레드 대왕 이후
고대 영어에서 문어체는 색슨어 계통인 서부 색슨 방언이 표준이지만, 구어체는 다양한 방언들이 살아남았으되 앵글어 계통인
머시아 방언이 주류였다. 문어가 서부 색슨어 중심이 된 것은 바이킹의 대침공으로 웨식스를 제외한 나머지 왕국들이 모두 망해서 웨식스를 중심으로 통합된 것이 원인이다. 이러한 구도는 오늘날의
영국 각지 방언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3]
비교할만한 사례는 바다 건너
노르만족이 있다. 이들 집단은
계보학적으로는 노르드 바이킹이 상류층을 형성하였으나, 그들 지위 자체가 프랑크인 군주들의 권위에 결부되어 있었고, 영내 피지배층이나 주변 일대의 피지배층을 이루던 프랑크-갈로로만인들보다 인구도 적었다. 그 결과, 이들은 곧 노르드계 조상에 대한 기억과 정체성하고는 별개로 언어·문화적으로나 유전적으로는 사실상 노르드인과의 혼혈 흔적이 조금 남은 프랑스인과 다를 게 없는 존재가 되었다.
고작 4대만에 노르드계 유전자는 겨우 12% 남짓만 남는다. 이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노르만족 문서, 그리고 비슷한 사례인
루스인 문서를 참고할 것.
[4]
English라는 말 자체가 원래는 앵글인 및 앵글로색슨인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원래 앵글족을 가리키는 단어는 언어나 방언에 따라서 Angle 외에도 Engle, Ængle 등이 쓰였고, English 또한 Ænglisc, Englisc(h) 등으로 썼었다. 이러한 여러 표기법이 언어 변천 과정에서 지금의 형태로 정착한 것이며, 단지 현대의 잉글랜드인과 원래의 앵글로색슨인들을 구분하려고 앵글로색슨이라는 개념어를 사용하는 것 뿐이다. French라는 용어도 원래는 프랑크족(Frank)을 의미했지만 현대에는 프랑스인을 의미하는 것과 비슷하다.
[5]
실제로 당시 왕실과 귀족층의 정체성은 '정복자의 후손 노르만족'이 굉장히 강하게 남아있었다. 참고로 과거 앵글로색슨에게 잉글랜드를 빼앗기고 쫒겨난 브리튼인의 후손인 웨일즈와 스코틀랜드에서는 이 시대 잉글랜드인들을 보며 "저주스런 놈들이 또 다른 외부 정복자인 노르만족의 노예가 되었구나 하늘 아래 가장 무가치 한 족속들이로다"라고 표현하며 통쾌해했다. 그러나 이후로는 영국의 왕실과 귀족들은 차츰차츰 세대가 아래로 내려가고 뿌리인 노르망디의 상실,백년전쟁 등을 거치며 잉글랜드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6]
독일어로
유틀란트 반도이고,
덴마크어로는 윌란 반도이다. '앵글'이라는 이름도 윌란 반도에 소재한
앙겔른(Angeln)에서 기원했다.
[7]
유틀란트(jutland)는 '주트족(jute)의 땅(land)'이라는 뜻이다.
[8]
에식스,
서식스,
웨식스,
미들섹스 등의 지명으로 남아 있다.
[9]
이스트 앵글리아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10]
흔히 알려진
도버 해협은 이 해협의 일부이다.
[11]
한편, 본토에 남은 색슨족은
독일어로 작센족(Sachsens)이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카롤루스 대제의 통치하에 있었던
프랑크 왕국에게 정복당하고도 장기간 세력을 유지하면서
강력한
제후로 군림하여 여러 지명에 그 흔적을 남겼다. 그들은 현재의
니더작센에서
작센까지 확장하여
저지 독일어권을 형성했다.
[12]
브리튼인 왕국들은 귀네드, 디버드, 궨트 등 웨일즈 지역의 브리튼 왕국과 둠노니아(
콘월), 스트래스클라이드(지금의 스코틀랜드 서부에 있었던 브리튼인 왕국) 정도를 제외하면 7세기까지 대부분 앵글로색슨족에게 정복당했다. 콘월도 9세기에 완전히 정복되었고, 웨일즈와 스트래스클라이드는 각각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왕국에 정복당했다.
[13]
엄밀하게 따지면
해럴드 2세는 앵글로색슨계 최후의 왕이 아니었다. 앵글로색슨 귀족들은 해럴드 2세가 죽자 급히
에드먼드 2세의 손자
에드거 애설링을 왕으로 추대하고 ,항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고, 색슨족 영주와 귀족들은 하나둘
윌리엄 1세에게 항복했다. 결국 에드거도 12월 초에 런던에 입성한 윌리엄 1세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윌리엄 1세는 1066년 크리스마스에 잉글랜드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14]
EAA 2020 Abstract Book 19 August로 들어가서 172쪽의 8번 참조
[15]
근데 아일랜드조차도 유전적으로는 켈트족을 기반으로 두고 있지만 잉글랜드인 + 웨일스인 + 스코틀랜드인, 노르웨이인, 아이슬란드인과 유사하니 딱히 유전적으로 켈트족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16]
보통 외국의 침략자들은 원주민 문화에 동화되거나 아니면 원주민 남성들을 학살하고 원주민 여성들과 결혼하여 낳은 자식을 원주민 여성이 돌봄으로써 침략자의 언어가 기층언어의 영향을 받는 게 일반적이다. 예를 들면 켈트어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어나, 콥트어의 영향을 받은
이집트 아랍어, 그리스어의 영향을 받은
오스만 튀르크어 같이. 그러나 영어에 켈트어의 흔적이 거의 없다는 것 때문에 언어학자들은 앵글로색슨족이 단순히 켈트족을 동화시킨 게 맞냐고 의문을 가지기도 했었는데, 앵글로색슨 모계 혈통이 부계 혈통보다도 더 자주 발견된다는 이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러한 의문이 해결된다. 즉, 앵글로색슨족 남성이 브리튼인 여성과 자식을 가지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현대
영어에
브리튼어군 언어들의 흔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7]
북부 네덜란드, 북부 독일, 덴마크, 남부 북유럽과 비교함. 다른 게르만 지역들은 슬라브족, 대륙 켈트족, 사미족 등의 타민족 혈통의 영향이 커서 연구결과에서 아예 배제된다.
[18]
아마 앵글로색슨족들과 같이 온 프랑크족, 라틴족이나 노르만족들이 데려온 프랑스 농민 또는 박해를 피해서 온 프랑스
위그노들의 영향인 것으로 추측된다. 현대의 평균적인 프랑스인보단 북동부 프랑스 벨기에, 서부 독일, 즉 프랑크족이 주로 정착한 지역에 유전적으로 가까운데, 이쪽 지역이 영국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기 때문에 그런 듯하다. 여기서 프랑크족도 게르만족 아닌가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애초에 프랑크족 자체가 순수 게르만족이 아니라 벨기에 인근에 살던 켈트족들과 동쪽에서 서진해온 게르만족이 혼혈되어 탄생한 집단이다. 또한 윌리엄의 정복을 계기로 바이킹계 프랑스인, 즉 노르만 기사들이 앵글로색슨을 지배하는 지배계급이 된 영향도 있을 것이다.
[19]
대부분 산업혁명 이전부터 잉글랜드에 살고 있던 잉글랜드 토박이들의 후손이다.
[20]
정확하게는 영국 원주민 혈통을 기반으로 대륙에서 유입된 여러 사람들이 이리저리 뒤섞였다. 특히 산업혁명 때 유입된 아일랜드인의 혈통 비중이 굉장히 높다.
[21]
이러한 이질적인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끼리 영향을 주고받은 결과가
영어에도 영향을 크게 미쳐서 아주 많았던 영어 관사들은 a, an, the를 제외하고 다 제거되었으며 명사를 복수형으로 만들 때 원래는 명사마다 변하던 것을 s나 es 붙이는 걸로 통일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미래형 역시 본래는 복잡한 동사 변화가 있었으나 will이나 shall을 앞에다 붙이는 걸로 쉽게 만들었다. 심지어 과거형도 복잡하게 변화했던 것을 ed를 붙이는 것으로 통일했다. 영어의 모태가 되는 독일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양한 관사가 존재하며, 영어도 고대 영어까지는 이러한 모습이 남아있다가 소멸하게 된다.
[22]
게르만족은 근대적 민족과는 달리 매우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개념이기에, 이 정도 차이는 유럽 대륙 내에서도 으레 나타나는 편이다. 이러한 현상은 당장 이들 신에 관한 각각의 문서에서도 언급된다.
[23]
부활절 자체는 기존의 유대교 절기인 유월절-히브리어로 '페사흐'([ruby(פסח, ruby=Fsch)]), 아람어로 '파스하'([ruby(פסחא, ruby=Paskha)])에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를 부여한 축일로,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는 이를 음차한 '파스카'(Pascha)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24]
참고로 이 기둥은
카롤루스 대제가 종교적인 명분으로 작센족을 정복하고 개종을 강제하면서 파괴되었다.
[25]
다만 이들도 초기에는 카톨릭이 아니라 이단인 아리우스파가 대세였다.
[26]
정확히는 켈트와 라틴족의 혼혈인 로만 브리튼인
[27]
캔터베리의 쿠트베르투스와는 동명이인으로, 린디스판의 커스버트가 그보다 한 세기 이전 사람이다.
[28]
사실 로마 제국 내에서의 기독교 전파도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이루어졌고, 특히 서유럽 일대는 프랑스조차 중세 초에도 아직 기독교가 전파되고 성장 중이었으므로, 이러한 현상은 그렇게까지 특이한 것은 아니다. 더 나중에 북유럽의 노르드인들이 개종할 때에도 그러했다. 혹은 기독교 세계 내에서도
보헤미아(
체코)나
폴란드,
헝가리처럼 주변 정치환경에 따라서
정교회 계열 교회로 개종했다가 다시
가톨릭 계열 교회로 개종하는 사례도 있었다.
[29]
유피테르(제우스)는 오히려 티우(티르)와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으나, 하늘신(Jupiter Caelus)과 우레신(Jupiter Tonans)의 측면을 한 신격이 모두 가진 전자와 달리, 게르만 신화에선 두 속성이 티우(티르)와 쑤노르(토르)라는 별개의 신격으로 분리되었으므로, 로마인들은 천신이자 전쟁신 티우(티르)는 마르스(아레스)에 대응시켰고, 뇌신 속성이 두드러진 쑤노르(토르) 쪽을 유피테르(제우스)와 동일시했다. 참고로 로마인들은 마르스를 매우 중요한 신으로 여겼다.
[30]
베다의 설명에 따르면 두 사람의 머리카락 색에 따라 각각 '검은' '하얀'이란 말을 붙였다고 한다. 형제는 아니고 우연히 동명이인이었던 듯하다.
[31]
현재의
작센 지역이 아니라 북서부 독일에 있다.
[32]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종교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129~143쪽; 베다가 쓴 《앵글족 교회사》의 내용은 2013년 출간된 《Bede: The Ecclesiastical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 in Latin + English》 참조.
[33]
프랑스어로는 Le modèle économique anglo-saxon, le libéralisme anglo-saxon 식이다.
[34]
현대
웨일스인과
콘월인의 직접적인 기원.
[35]
현대
잉글랜드인의 직접적인 기원.
[36]
몬머스의 제프리의 <
브리타니아 열왕사>가 1100년대에 쓰여졌다.
[37]
그러나 현대 프랑스인을 라틴족이나 켈트인의 후손으로만은 볼 수 없고, 정확히는 라틴 + 켈트 + 게르만의
프랑크족이 뒤섞인 혼혈민족이다. 나라 이름인 '프랑스'도 게르만족인 '프랑크'에서 유래했다. 중세 이후 유럽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및 게르마니즘의 결합으로 탄생했다고 분석할 때 이에 가장 전형적인 케이스가 바로 프랑스다. 이를 두고서
샤를 드골이
클로비스 1세의 세례 1,500주년 기념식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바 있다. "나는 프랑스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는 프랑크 민족에 의해 프랑스의 왕으로 선택된 클로비스야말로 프랑스 역사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38]
역대 영국 왕조 중에서 유일하게 부계가 브리튼계(정확히는 웨일스계)인 가문이었다. 따라서 튜더 왕조 시기에 특히 왕가와 아서 왕을 엮는 시도가 많았다.
[39]
켈트족은 게르만족과 오랜 역사적 악연을 지니고 있다.
[40]
이런 차별을 받은 아일랜드계 미국인들도
흑인과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을 멸시하고 차별했다.
[41]
근데 사실 오바마조차 영국계 백인의 피가 섞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