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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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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한국어 연호
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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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ruby(元号, ruby=げんごう)][발음1]
베트남어 niên hiệu[발음2]
영어 era name

1. 개요2. 역사
2.1. 중국 외의 지역에서2.2. 오늘날
3. 방식
3.1. 일세일원제3.2. 즉위년칭원법과 유년칭원법
3.2.1. 중국3.2.2. 한국3.2.3. 베트남3.2.4. 일본
4. 국가별 연호
4.1. 한국
4.1.1. 고구려4.1.2. 백제4.1.3. 신라4.1.4. 발해4.1.5. 후삼국시대4.1.6. 고려4.1.7. 조선4.1.8. 구한말4.1.9. 일제강점기4.1.10. 대한민국4.1.11. 북한
4.2. 중국4.3. 일본4.4. 베트남4.5. 몽골
5. 여담6. 같이 보기

1. 개요

연호()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국, 일본, 베트남, 몽골 등지의 한자 문화권 국가에서 쓰이는 기년법으로서, 군주제 국가에서 통상 임금의 즉위나 나라에 어떠한 사건이 있는 해에 연호를 제정하며, 연호를 제정한 해를 원년, 즉 1년으로 삼아 '(연호명) n년' 하는 식으로 연도를 매긴다. 다른 말로는 원호(/元号), 혹은 다년호()[6]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대체로 연호보다는 원호라고 한다.
연호에 관한 법률
대한민국의 공용(公用) 연호(年號)는 서력기원(西曆紀元)으로 한다. <개정 2014.1.7.>
전통적인 의미의 연호를 쓰는 나라는 현재로서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일본이 유일하지만, 연호라는 단어 자체는 '나라에서 법으로 정하여 통용하는 기년법'으로 의미가 확장되어 현대 공화정 국가에서도 사용한다. 대한민국 1948년 9월 25일에 ' 연호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공용연호를 단군기원으로 한다."고 명시하였고, 1961년 12월 1일에 법을 개정하여 연호를 단군기원에서 서력기원으로 바꾸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연호에 대한 내용은 기년법 문서 참고. 또한 사실상 전제군주제로 굴러가는 북한은 김일성의 생년 1912년을 원년으로 하는 주체년호를 쓰고 있다.

2. 역사

본래 동아시아에서는 태세기년법[7]에서 유래한 육십갑자를 사용하였는데, 기원전 2세기 무렵에 중국 한무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제정하면서 연호기년법이 시작되었다.

연호를 처음 제정하는 것은 건원(建元), 기존 연호를 고쳐 새로운 연호를 제정하는 것은 개원(改元)이라 한다. 연호는 황제만이 제정할 수 있었으므로, 연호를 처음 제정한다는 것은 곧 칭제(稱帝), 즉 스스로 황제가 된다고 선포하는 뜻이다. 기존의 왕조를 몰아내고 새 왕조를 창업한 황제나, 제후의 지위에 있다가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동등한 황제의 지위에 오르는 경우에는 건원이라는 말 앞에 칭제를 덧붙여서 칭제건원(稱帝建元), 혹은 건원칭제(建元稱帝)라 하였다.

이처럼 연호를 제정할 권한이 황제에게만 있음은 오로지 황제의 권위만이 물리적 공간과 백성들을 넘어 시간에까지 미침을 상징한다. 연호를 제정하는 행위 자체가 곧 황제의 권위를 드러내는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작용한 것이다. 또한 연호는 중국을 넘어 중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한국, 일본, 베트남 등 조공국들에게까지도 사용이 강제되었다. 중국에 보내는 외교 문서에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으면 자칫 중국 황제에게 대적하는 뜻으로 해석되어 심각한 외교 마찰이 빚어질 정도로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어떤 연호를 사용하는지는 중요한 요소였다.

2.1. 중국 외의 지역에서

다만 동아시아에서 중국만이 연호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중국의 조공국을 자처했던 한국이나 일본, 베트남도 내부적으로는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외왕내제적 정치 체제에서 기인한 것이다.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에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되 국내에서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식이다. 과거 왕조에서 독자적인 연호 사용은 자주국이냐 속국이냐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따라서 고구려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음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중국 측 주장에 맞서는 강력한 반박 근거가 될 수 있다.

한편 중국에서도 알면서 눈감아 주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의 경우는 연호를 세웠다가 폐하기를 반복했지만, 일본은 646년 다이카 개신 이래로 쭉 연호를 사용해 왔다. 화이론을 따르는 유학자들은 중국 이외의 나라가 칭제건원하는 행위를 불경하게 여겼다.

이러한 연호란 개념 동아시아에서는 매우 일반적이었지만 일찍이 서력기원과 같은 단일 연도 기년법이 보편화된 유럽 문화권에서는 이런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영국과 같은 일부 군주국에서는 즉위력(British Regnal year)이라 해서 연호와 비슷한 기년법이 있다.[8] 이러한 즉위력은 후술할 유년칭원법(이듬해 1월 1일 개원)이 아니라 즉위년칭원법에 가까워서 국왕 즉위일에 연도가 바뀌었다.

2.2. 오늘날

현대에는 서양에서 들어온 서력기원을 도입하면서 한국, 중국, 베트남에서는 완전 폐지, 북한 대만, 태국[9]에서는 자체 기년법을 사용하고 있다. 현재 전통적 의미의 연호를 사용하는 나라는 일본뿐이다.

제사 때 읽는 축문에서는 연호로 연도를 적어왔다. 하지만 명나라가 멸망하고 소중화 사상이 대두되며 조선에서 청나라의 연호를 인정하지 않는 풍조가 정착하자 축문에서 아예 연호를 생략하는 게 굳어버렸다. 일제강점기는 말할 것도 없고. 한문으로 쓰인 축문에서 '유세차'(維歲次)가 이것의 흔적으로, 원래는 '유 (연호 x년) 세차 ㅇㅇ' 라고 했다. 이 때문에 현대에는 고유의 연호인 단군기원이나 현재 대한민국의 공식 연호인 서력기원을 써야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있다.

3. 방식

특정한 해에 연호를 붙이고, 그 해를 원년, 즉 1년으로 삼아 이후 '(연호명) n년'으로 표기하는 방식이다.

흔히 황제 한 명이 즉위하면서 연호를 바꾸고(개원) 다음 황제 전까지 쓰는 일세일원제가 잘 알려져 있지만 한무제가 연호 제도를 시작한 이래 초기에는 즉위년에 반드시 개원을 한 것도 아니고, 평범한 연도에 개원을 할 때도 많았다. 사실 즉위년에 연호를 바꾸는 것도 왕권의 표현이었고[10] 재위 중에도 국정 쇄신을 이유로 종종 연호를 바꾸곤 했다. 더욱이 당고종이나 송이종처럼 주술적인 이유나 심심풀이로 연호를 바꾸기도 했다. 따라서 황제가 변덕스러운 성향이거나 나라가 어지러울수록 자주 바뀌었다.[11] 혼란기에는 한 해도 사용하지 못하고 휙휙 바뀌거나, 심지어는 몇 시간 만에 갈아치워버린 경우도 존재한다.

이외에도 나라에 재해나 이변이 발생했을 때, 또는 오행에 따른 60간지의 순환에 따라 연호를 바꿀 수 있었다. 특히 "역위(易緯)"에서 이르길 갑자년 신유년에 대변혁( 혁명)이 일어난다는 '갑자혁명설', '신유혁명설' 등이 있어서 갑자년, 신유년에 개원하곤 했는데 이를 '혁령개원'革令改元(갑자년), '혁명개원'革令改元(신유년)이라고 한다. # 일본에서 일세일원제가 정착한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이 상례를 따른 일이 종종 있었다. 가까운 19세기에는 메이지 천황의 전임 찬황인 고메이 천황 치세, 분큐(文久) → 겐지(元治)로의 개원이[12] 동아시아를 통틀어 마지막 혁령개원( 1864년)이다.[13]

반대로 여러 군주가 하나의 연호를 안 고치고 계속 쓰는 경우도 있기도 했다.

3.1. 일세일원제

그러나 별 이유 없이 연호를 바꾸면 일상에서 연월일을 기록할 때 매우 번거로우며 연호를 봐도 누가 재위 중인지를 알기 어려운 문제가 있기에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가 정착하였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시기에 일세일원제가 확립되고 곧 주변국도 이러한 관습을 따랐다. 청나라도 이를 받아들였다.[14]

일세일원제가 확립된 뒤로는 군주를 해당 군주가 반포한 연호를 사용해서 부르기가 정착되었다.[15] 그래서 명대 이후부터는 묘호 시호보다 '연호+황제'나 '연호+제(帝)'라고 하기가 일반화되었다. 예를 들어 주원장이 홍무(洪武)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홍무제(洪武帝)'라고 부르는 식이다. 연호로 황제를 칭하는 방식의 장점은 해당 황제의 생전이나 사후나 동일하게 지칭할 수 있다는 것. 묘호와 시호는 사후에 붙이는 것이고, 시호는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헷갈리니[16] '연호+제'가 훨씬 실용적이다.[17]

한편 일본의 천황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일세일원제를 채택했지만, 연호를 사후에 그대로 중국의 시법과 무관하게[18] 시호로 올리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는 연호+천황 식으로 부르지 않고, 사후에 연호+천황 식으로 부른다. 예를 들어 현임 천황인 나루히토의 연호는 레이와이고, 사후에 레이와 천황이라고 불릴 '예정'이지만 살아 있는 지금은 레이와 천황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냥 천황이라고 하든지 금상천황(今上天皇)이나 금상폐하(今上陛下), 줄여서 금상이라고 부른다. 아키히토 역시 현재는 상황으로 양위했으나 생존해 있기 때문에 헤이세이 천황이라 부르지 않고 상황(上皇)이나 상황폐하(上皇陛下)라 불린다.

한편 연호를 써서 군주를 지칭하는 것을 영어로 번역 때는 '연호+칭호' 순으로 적음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면 홍무제는 Hongwu Emperor[19]로 적는 식이다. 군주의 휘를 그대로 쓰거나, 묘호ㆍ시호 또는 존호(尊號)를 쓸 경우 '칭호+이름/묘호/시호/존호' 순으로 써서 칭호가 앞에 오지만(예를 들면 Emperor Gojong 식으로) 연호를 쓸 때는 칭호 앞에 쓴다는 것. 아마 '연호+칭호'의 경우 '그 연호가 사용되던 시기의 군주'라는 의미라서인 듯하다. 그리고 연호로 군주를 지칭할 경우, 문장에서 해당 군주의 칭호를 쓸 때 the도 앞에 붙여서 the Hongwu Emperor 식으로 써야 한다.[20] 그러나 연호를 그대로 시호로 올리는 관습이 있는 일본의 천황들은 Emperor Shōwa 식으로 칭호를 앞세운다. 시호라는 의미가 더 강해서인 듯하다.

3.2. 즉위년칭원법과 유년칭원법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전 임금이 죽은 해에 새 임금이 즉위한다. 그렇다면 이 해는 전 임금의 통치기간일까, 새 임금의 통치기간일까? 새 임금이 즉위한 해를 새 연호의 원년으로 정하는 것이 즉위년칭원법, 새 임금이 즉위한 다음 해를 원년으로 정하는 것이 유년(踰年)칭원법이다. 유(踰) 자는 '지나간다, 넘어간다'는 뜻이고 유년(踰年)은 '한 해를 넘긴다' 또는 2년째라는 뜻이다. 전통적인 유교 예법에서는 유년칭원법이 정통으로, 중국과 한국, 베트남에서는 기본적으로 유년칭원법을 따랐다. 즉, 새 군주가 즉위하면 바로 개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해 1월 1일을 기하여 예고한 연호로 개원한다.

이는 선대 군주의 통치 시대를 존중한다는 사상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실용적이기도 했다. 일단 즉위년칭원법으로 하면 필연적으로 즉위년은 한 해의 연호가 둘 이상 공존하게 되어 혼란스러워진다. 여기에 더해 이듬해에 바꿀 연호를 미리 공지할 수 있으므로 개원에 따른 충격도 적다.

3.2.1. 중국

중국 춘추에서 처음으로 유년칭원법을 사용한 이래 계속 유년칭원법을 사용하여, 명나라 때 일세일원제(=한 황제 한 연호)를 채택한 이후부터는 새 황제가 즉위한 다음 해 1월 1일에 연호가 바뀌었다. 심지어 토목의 변으로 잡혀간 정통제 대신 명 조정이 급히 경태제를 내세웠을 때에도 이듬해(1450년) 음 1월 1일부로 연호를 변경했다.

하지만 한 해에 세 황제가 재위한 경우[21]라든가, 직전 황제의 정통성을 부인할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즉위년칭원법을 썼다. 대표적인 예로 정통제가 복위한 후에 사용한 연호인 천순 연호가 있는데 유년칭원법을 따른다면 정통제가 복위한 이듬해인 1458년에 천순으로 개원해야 했지만, 탈문의 변으로 경태제를 폐위하고 복위한 사정상 복위 후 곧바로 천순 연호로 개원하였다. 건륭제 가경제에게 양위할 때에는 1796년 음력 1월 1일부로 양위하겠다고 미리 공표하여 새해에 바로 새 연호가 사용될 수 있게 했다.

정변이나 반정 등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군주가 폐위되었다면 선대 임금의 통치를 부정하는 뜻으로 예외적으로 즉위년칭원법을 택하기도 한다.

3.2.2. 한국

한국에서는 고대에는 대체로 즉위년칭원법을 사용했지만, 일부 금석문을 보면 유년칭원법도 부분적으로 사용한 듯하다.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면 영락 원년이 391년으로 삼국사기에서 기록되는 고국양왕의 치세기와 맞물리는데, 최근에는 고국양왕이 생전에 광개토왕에게 양위했기 때문에 유교식 예법으로 391년까지 고국양왕의 치세기로 인정했다는 해석도 있다. 고려 시기까지도 주로 즉위년칭원법을 쓰다가 원 간섭기 이후부터 중국의 영향을 받아 유년칭원법이 원칙으로 바뀌었다.

다만 유년칭원법을 사용할 때에도 선대 군주의 정통성을 부인할 필요가 있거나 비정상적 방법으로 군주가 바뀌었다면 중국에서처럼 즉위년칭원법을 사용했다.

한국은 독자 연호를 쓰지 못한 기간이 길기 때문에 연호 대신 '세종 ○년' 하는 식으로 국왕이 즉위한 후 햇수를 세는 국왕 재위 기년(紀年) 방식으로 연도를 적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도 같은 원칙을 적용하여 국왕이 즉위한 다음 해를 원년(1년)으로 본다. 현대의 학자들은 즉위년칭원법의 기록 때문에 원년(1년)과 즉위한 해(0년)가 혼동되지 않도록, 즉위한 바로 그 해는 '즉위년'이라고 칭한다.

예를 들어 조선 정조의 즉위년은 1776년이지만, 정조실록의 즉위 기사에는 '영종(영조)대왕 52년에 즉위하셨다.'고 기록했다. 그러니까 조선시대의 기준으로 1776년은 영조 52년이고 1777년부터 정조 원년이다. 조선시대의 '정조 즉위년' 같은 표현은 대개 유학자들이 연보(年譜) 같은 것을 만들 때 편의상 사용한 것으로, 현대의 학자들이 이를 활용하여 1776년 중에서도 임금 즉위 이후 시점에 대해 '정조 즉위년'이라고 논문 등에서 쓰곤 한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하면서 기존 연호인 광무 융희로 개원할 때에는 순종 즉위년(1907)을 그대로 융희 원년으로 삼았다. 고종이 칭제건원한 이후로는 즉위기년이 아니라 연호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순종 당시나 일제시대에 작성된 기록들은 연도를 융희로 기록하였다. 현대에 들어서 융희 연호와 별개로 조선시대의 원칙을 적용하여 융희 원년(1907)을 순종 즉위년, 융희 2년(1908)을 순종 1년이라 칭하는 용법도 나왔고,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도 이러한 방법을 따랐다. 그러나 이는 순종 당시, 혹은 일제시대에 통용된 방법은 아니었다. 순종실록에서도 단지 광무와 융희 연호만 사용하였고, 따로 즉위기년을 병기하거나 하진 않았다.

3.2.3. 베트남

베트남도 막 왕조 이후부터는 유년칭원법을 사용해 왔지만, 응우옌 왕조가 프랑스 식민지가 된 뒤에는 프랑스에 의해 황제가 여러 번 폐립되다보니 황제가 갈아치워진 날 바로 연호도 바뀐 경우가 많았다.

3.2.4. 일본

현재까지 군주 즉위에 따라 연호를 사용하는 유일한 나라인 일본은 특이하게도 연호를 처음 사용한 7세기부터 현재까지 즉위년칭원법을 계속 유지한다. 그 바람에 연호가 바뀌면 달력을 사용하는 분야에서는 난감하게 여긴다.[22]

4. 국가별 연호

4.1.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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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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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백제

주보돈을 비롯한 학자들은 백제가 전통적으로 외왕내제 구조를 취했다고 여겼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되는 '붕어' 했다는 기록, 미륵사지에서 나온 명문에서 무왕을 "대왕폐하"로 경칭하는 부분, 예군묘지명에서 전하는 의자왕이 참제(僭帝) 했다는 기록 등을 보면 자체적인 연호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즉 고구려와 신라가 자체 연호를 사용했는데, 고구려보다 더 일찍 전성기를 구가한 백제에도 연호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정도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삼국사기의 근초고왕조에는 황색 깃발로 군대를 사열시키고 황금색 깃발을 사용 했다는 기록이 있다. 冬十一月, 大閱於漢水南, 旗幟皆用黄. 황금색은 전통적으로 중원의 황제를 표현하는 색깔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칠지도 문면에 있는 '泰□' 또한 백제의 고유 연호일 가능성이 크고, 이러한 근거를 들어 이병도 같은 학자들은 백제의 고유연호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중국 서적 한원에는 백제가 육십갑자를 사용했다고 기록되었고,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묘지석에서도 연호가 아닌 육십갑자로 연도를 적었으며, 백제 무령왕이 왜왕에게 선물했다고 추정되는 인물화상경에서도 연호가 없이 육십갑자로 표현하였다. 그래서 백제의 전성기 시절에는 자체 연호를 사용하다가 수도를 웅진으로 천도한 뒤로는 육십갑자를 썼을 것이라는 절충론이 나왔다.

4.1.3. 신라

신라는 역대 왕조 중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발해와 함께 그나마 많이 남은 나라이다. 신라는 6세기 법흥왕이 처음 사용해서 진덕여왕 시기까지 자체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그 순서는 건원(建元)→개국(開國)→대창(大昌, 혹은 태창太昌)→홍제(鴻濟)→건복(建福)→인평(仁平)→태화(太和)[23]. 그러다 진덕여왕 재위 중에 당나라와 외교를 하고자 당의 연호를 받아들이며 당시 사용하던 태화(太和) 연호를 포기했다. 이후 신라가 연호를 독자적으로 사용했는지는 남은 자료가 없어서 불확실하다. 당나라가 쓰는걸 불편해 하기까지 했던 묘호를 계속 쓰는 등 신라가 외왕내제를 계속한 정황이 있기 때문에, 내부적으로는 연호를 알음알음 계속 사용했을 가능성도 꽤 있다. 하대에는 신라 왕족 김헌창을 일으켰을 때 장안국을 세운다 하며 경운(慶雲)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4.1.4. 발해

발해는 초기부터 중기까지 자체적으로 사용된 연호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다만 초대 국왕 대조영이 천통(天統)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는 속설이 널리 퍼져있고 이런 내용이 국사교과서나 참고서 등에 버젓이 실리기까지 하였지만 이는 불확실하다.[24][25] 고왕 문서 참조.

4.1.5. 후삼국시대

후삼국시대 궁예 태봉과 거기서 나온 왕건 고려, 그리고 견훤 후백제 모두 자체 연호를 선포하고 사용했다.

4.1.6. 고려

918년 고려 태조가 고려를 건국한 이후 '천수'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으나 이후 후당, 후진과의 관계를 위해 933년 자체 연호를 폐지하였다. 또한 왕권 강화에 열을 올리던 광종 초에 황제국을 자칭하면서 '광덕', '준풍'[26]의 연호를 쓰게 되지만 북송과의 통교를 위해 그들의 연호를 쓰게 되면서 자연스레 폐지되었다. 주로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자체적인 연호가 사용되었지만, 10세기 중반 이후 송나라가 등장하고 요나라가 성장하는 등 동아시아의 국제적 역학관계에 따라 국가의 실리를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표면적 사대 외교 노선이 고착화됐기 때문에 중국 왕조의 연호를 들여와 사용하는 용법이 정착되었다.[27] 그래도 원 간섭기 이전의 고려에서는 연호는 안 썼을지 몰라도 외왕내제를 고수하여 임금이 황제와 맞먹는 여러 가지 권위들을 누렸다.

4.1.7. 조선

조선 왕조에 들어서면서 명나라 사대의 예를 맺고 명나라 황제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1644년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원의 지배세력이 된 뒤로도 조선은 정부의 공식 문서나 대청 외교관계에서야 어쩔 수 없이 청 황제의 연호를 사용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연호 ' 숭정(崇禎)'을 알음알음 계속 사용하는 유학자들이 있었다.[28] 대놓고 '숭정'이라고 하지는 못하고 숭정 원년(1628: 무진년)을 원년으로 삼아 황명기원(皇明紀元), 또는 황명기원후무진후(皇明紀元後戊辰後)라고 하며 연도를 헤아린 사례도 있다.

4.1.8. 구한말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공식적으로 중국과의 사대 관계를 청산하면서[29],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조를 세운 1392년을 원년으로 삼아 ' 개국기원(開國紀元)' 연호를 도입, 1894년을 개국 503년이라 칭했다. 1896년부터는 태양력을 도입하여 '건양(建陽)'[30]이라는 연호를 선포하였고, 이듬해(1897) 대한제국을 개창한 해에 ' 광무(光武)'로 개원(改元)하였다. 이후 순종이 즉위하면서 융희(隆熙)로 다시 개원하였다. 가끔 고종이나 순종을 연호를 따 '광무 황제'나 '융희 황제'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드물다.

4.1.9.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에는 기존의 연호 대신 일본 연호( 메이지 다이쇼 쇼와)가 사용되었다. 한국 한자음으로 명치ㆍ대정ㆍ소화라고 읽기도 한다.

4.1.10. 대한민국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정 수립 연도인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정하여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했다.[31] 광복 이후에도 임시정부 법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이승만 8.15 광복 이후 1948년(대한민국 30년, 단기 4281년) 제헌 국회 개원사에서부터 대한민국 연호를 신정부에서 계속 사용할 것을 주장했고, 이승만 정부는 1948년 9월 25일까지 대한민국 연호를 계속 사용했다. 그러나 같은 날 국회는 '연호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단군기원을 법정연호로 채택함에 따라 대한민국 연호는 신정부 수립 1개월 만에 사용이 중단되었다.[32][33] 이승만이 대한민국 연호를 고집함은 대한민국이 북한에 맞서 정통성이라는 헤게모니를 확보하려는 수단이기도 했다.

이후 1961년(단기 4294년) 박정희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후 연호에 관한 법률을 개정, 1962년(단기 4295년)부터 단기를 폐지하고 서력기원으로 전환하여 여전히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참고로 이 밑의 내용, 법률 몇 조 몇 항만 따온 게 아니라 이게 전문이다.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짧은 법률로 손꼽힐 듯.[34]
연호에 관한 법률
대한민국의 공용(公用) 연호(年號)는 서력기원(西曆紀元)으로 한다.[35]
부 칙 <법률 제775호, 1961.12.2.>
①본법은 단기 4295년 1월 1일부터 시행한다.
②법률 제4호 연호에관한법률은 이를 폐지한다.
③본법 시행당시의 공문서중 단기로 표시된 연대는 당해 단기연대에서 2333년을 감하여 이를 서력연대로 간주한다.
④연대 정정에 있어서는 공문서정정에 관한 타 법령의 규정에 불구하고 당해 공문서의 서식에 적합하도록 연대 정정인을 사용하여 정정할 수 있다.

4.1.11.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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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1997년부터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원년으로 삼아 주체연호를 제정하였다. 아래의 중화민국 민국기년과 원년이 같으므로 햇수도 같다.

북한에서는 주체연호만 쓰는 일은 없고, 서기를 병기한다. 북한의 4차 핵실험 발표문에서처럼 주체 105(2016)로 병기한다. 주체연호 창시자는 최덕신이고, 김정일이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그런데 김일성의 실제 출생년도가 1908년이란 설도 있어서 100%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

4.2.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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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 전근대

전한의 황제 한무제가 처음으로 실시한 것으로 무제 이전에는 황제의 재위년으로 기년을 표시하였다. 첫 연호는 건원(建元, 기원전 140년~기원전 135년)이지만 이는 소급적용한 것이고, 실제 그때에는 여전히 황제의 재위기간을 기년으로 사용했다. 실제로는 기원전 113년 보정(寶鼎)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연호를 원정(元鼎, 기원전 116년~기원전 111년)으로 한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4.2.2. 중화민국(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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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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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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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경우 대외적으로는 중국에 사대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을 표방하였으므로 10세기에 연호를 도입한 후 1945년까지(프랑스 식민지가 된 뒤에도 권력만 잃고 황제 지위는 계속되었으므로 연호제는 유지) 연호를 사용하였다. 한마디로 외왕내제로 몰래 사용한 경우다. 동남아에서는 내가 그래도 끗발 좀 먹힌다 몰래라고는 해도 중국에서도 어느 정도는 알았지만 '어리석은 오랑캐들의 뻘짓' 정도로 취급하고 묵인한 것에 가까웠을 것이다. 고려와 조선의 왕이 천자와 같은 묘호를 사용하고 일본의 천황의 존재와 독자 연호의 사용 같은 관행이 있다는 것도 알았는데 베트남이 황제를 칭한다는 사실은 몰랐을 리가 없다. 또한 알아도 멀리서 군대 끌고 쓸어버릴 정도의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36]

응우옌 왕조에 이르러 일세일원제가 확립되었으며, 프랑스의 보호국이 된 이후에도 서기와 병행 사용되었다.

1945년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서는 당연히 서기를 채택하였지만, 민간에서는 얼마간 비공식적으로 '월남민주공화(Việt Nam Dân chủ Cộng hòa)' 연호가 사용되기도 했다.

4.5. 몽골

한자문화권이 아니었던 몽골도 청나라로부터 독립한 직후, 복드 칸국 시기 "공대(共戴, ᠣᠯᠠᠨ᠎ᠠ ᠡᠷᠭᠦᠭᠳᠡᠭᠰᠡᠨ / Олноо өргөгдсөн)"라는 연호를 사용했었다. 1911~15년 사이 사용되다가, 몽골이 다시 중화민국의 영향력에 들어가면서 사용이 중지되었다. 소련의 개입으로 1921년 다시 공대 연호가 사용되다가, 복드 칸이 사망하고 군주제가 폐지되어 1924년 11월에 서력기원으로 바뀌었다.

20세기 초 몽골에서는 칭기즈 칸이 건국한 해인 1206년을 원년으로 하는 칭기즈 칸 기원이 비공식적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이후 상황이 상황인지라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5. 여담

6. 같이 보기



[정체] [간체] [발음] 녠하오 [발음1] 겐고 [발음2] 니엔히에우 [6] 원래 大의 음은 '대'지만 여기서는 '다'로 읽는다. [7] 태세(太歲)는 고대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행성으로서, 세성(歲星, 목성)과 반대 방향으로 돌고 있다고 한다. 태세기년법이란, 세성의 공전 주기인 12년과 가상의 행성 태세의 공전 주기인 10년에 맞추어 만든 역법이다. [8] 서력기원 문서에서 보듯 서력기원은 영국에서 8세기부터 쓰인 것이 시초이고 전 유럽에 퍼지기까지 수백 년이 걸렸다. 그 전에는 유럽에서도 국왕 즉위 등 각종 역사적 사건에 기반한 기년법을 썼다. [9] 태국 불멸기원(불기)를 사용하는데 세계 불기와는 다른 독자적인 불기이다. [10] 사실 이런 부분은 "새 술은 새 부대에" 식의 관념으로, 한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새 정권이 들어서면 부서명을 바꾸는 등의 행위로 비슷하게 나타난다. [11] 사실 대부분 두 요인이 일치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지도자 1인의 권력이 막대한 전제군주제 국가에서 지도자가 변덕스러우면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12] 고메이 천황은 당대 연호가 가에이, 안세이, 만엔, 분큐, 겐지, 선대/후대 천황의 연호가 각각 1개씩으로 유독 연호가 많은 편이다. 그나마 제일 오래 쓴 것이 가에이(嘉永)로 7년 썼다. [13] 이후의 신유년인 1921년 다이쇼 시대로 일세일원제가 시행되어 혁명개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4] 단, 명청시대에도 예외 사례가 딱 2가지 있었다. 명영종 정통 연호를 쓰다가 토목의 변을 겪은 뒤 복위하면서 천순으로 개원한 바가 있었고, 청태종은 국호를 에서 청으로 변경하는 것을 제2건국으로 간주하여 후금 시절의 연호 천총(天總)을 1636년 4월 11일부로 숭덕(崇德)으로 교체하였다. 정통 연호를 그대로 쓴다면 본인이 잡혀가 있던 8년간이나 황제로 재위중이었던 경태제의 연호를 부정해야 하는 등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을 것이기도 하거니와 불미스러운 일을 겪어서 쇄신 차원에서 새 연호를 제정한 것이며, 청나라의 사례는 새 시대를 연다는 기념비적인 의미로 개원한 것이다. 한편 조선에서도 고종황제 건양 연호를 대한제국 선포를 두 달 앞두고 제2건국이라는 의미로 1897년 8월 16일부로 광무로 개원하였다. [15] 명나라 이전에도 사례가 있긴 하다. 경시제가 그 예이다. 다만 경시제의 경우 정통 황제로 인정 받지 못해 황제로서의 묘호, 시호, 능호를 받지 못한 탓에 후대에 뒤늦게 황제로 취급해 줘서 편법 비슷하게 연호+제(帝)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침 그의 치세가 워낙 짧아서 연호가 '경시(更始)'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연호를 이용해 그를 지칭하게 되었다. 아니면 그냥 성명 '유현'을 그대로 쓰거나. [16] 정식 시호는 너무 길어서 제사 등 특별한 상황에서나 쓸 뿐이고, 약칭 시호는 너무 비슷해서 얼른 구분되지 않는다. [17]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통칭(通稱)으로 사용한 것이지 공문서에서는 묘호 시호로 지칭하였다. 일례로 의 4대 황제인 아이신기오로 히오완예이(愛新覺羅玄燁)의 실록은 그를 대청 성조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大淸聖祖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줄여서 성조 인황제(聖祖 仁皇帝)라고 지칭하지, 연호에서 유래한 통칭인 '강희제'라고 하지 않는다. [18] 일본 역대 천황들의 시호는 중국의 시법에 맞는 경우도, 안 맞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한국의 삼국(하대 신라는 제외)과도 비슷한 현상이다. [19] 洪武의 중국음의 한어병음 표기이다. [20] 단순히 목록형으로 군주들을 나열할 때는 the를 생략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The Hongwu Emperor was the founder of the Ming dynasty."처럼 문장 안에서 사용할 때는 the가 붙어야 한다는 뜻. 반면 칭호를 앞세우는 이름/묘호/시호/존호 등은 the를 절대로 앞에 쓰지 않는다. [21] 가령 명나라는 1620년 만력제의 뒤를 이어 태창제가 즉위했으나 1개월 만에 붕어했는데, 원칙대로 하자면 태창 연호가 붕 떠버리기 때문에 그해 7월까지는 만력, 8월부터 12월까지는 태창 연호를 사용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22] 쇼와 덴노가 1989년이 시작되고 일주일 남짓 만에 사망하면서 쇼와 64년(昭和64年)이라는 연호를 박은 달력들이 폐기처분되고 헤이세이 연호(平成元年)가 찍힌 달력들을 새로 발행하느라 고생이었다고 한다. [23] 현재 울산광역시에 위치한 태화강이라는 명칭의 유래이다. [24] 천통10년명 불상이 발견되어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동국대 미술사학과 정명호 교수 논문 참조. [25] 다만 고왕 재위기는 발해 건국 초기라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으므로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 또한 충분히 존재한다. 때문에 천통은 대이진 이후로 연호가 밝혀지지 않은 발해 국왕의 연호일 가능성 또한 있다. 예를 들어 대건황이나 대현석, 대위해, 대인선 등의 연호가 천통이었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셈이다. [26] 다만 이는 논란이 있는 부분이다. 자세한 사항은 광종 항목 참조. [27] 고려가 강동6주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 또한 거란의 연호를 쓰기로 계약한 덕분이었으며, 고려는 그 계약으로 귀주대첩의 영광을 거둘 수 있었다. [28] 조선의 모든 선비들이 언제나 숭정 연호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의 문서나 금석문을 보면, 반청사상으로 숭정 연호를 쓴 것도 있지만 청나라 연호를 쓴 것도 많다. [29] 정확히는 청일전쟁으로 조선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없어지면서. [30] 글자 그대로 양력을 세웠다는 의미. [31]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가 결의문과 수류탄을 들고 찍은 사진들에서, 결의문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결의 날짜에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고, 임시정부 관련 문서나 기록은 전부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하여 작성되었다. [32] 당시 제헌 국회의원을 포함한 다수의 법제사법위원회 위원들은 단군기원을 지지했지만 이승만을 포함한 이승만 정부의 인사들은 대한민국 연호의 사용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 갈등은 어느세력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그냥 의견의 차이로 보는것이 타당하다. [33] 그래서 노인들조차도 (단기는 당연히 알아도) 대한민국 연호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찾아가서 독립운동을 한 소수의 투사들 외에는, 일제 치하에서 일본의 연호를 쓰다가 광복 후 미군정 하에서 잠시 서기를 쓰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단기를 사용하였기 때문. 따라서 민중 대부분은 대한민국 연호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젊은 세대는 한때 단기만 사용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34] 조문이 달랑 하나뿐인 법률은 이것 말고도 비영리법인의 임원 처벌에 관한 법률,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 표준시에 관한 법률 등이 있다. 그런데 법인임원처벌법은 조문 길이가 좀 되는데, 연호법은 (한자·괄호 빼고) 23자밖에 안 돼서 조문만 따지면 연호법이 압승이다. 단 연호법은 부칙이 상당히 많은데 법인임원처벌법은 부칙이 "공포한 날 시행한다" 류의 것뿐이라서, 부칙까지 따지면 법인임원처벌법이 더 짧다.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은 개정된 적도 없기 때문에 더 짧은 편이다. [35] 구 연호에관한법률(법률 제4호. 1961. 12. 2. 법률 제775호로 폐지) :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단군기원으로 한다." [36] 조선이었다면 쓸어버릴 수 있겠지만 북경이 수도인 명-청 입장에서 남쪽 멀리 있는 베트남은 쓸어버리자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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