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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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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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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유이목전(劉二牧傳)」 2권 「선주전(先主傳)」 3권 「후주전(後主傳)」
유언 · 유장 유비 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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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 , 조통 조광,
7권 「방통법정전(龐統法正傳)」 8권 「허미손간이진전(許糜孫簡伊秦傳)」 9권 「동류마진동여전(董劉馬陳董呂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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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
호위장군(虎威將軍)
조운 | 趙雲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ZhaoYun.jpg
시호 <colbgcolor=#FFFFFF,#1f2023> 순평후(順平侯)
작위 영창정후(永昌亭侯)
최종 직위 중호군(中護軍) 겸 진군장군(鎭軍將軍)
성씨 (趙)
이름 (雲)
자룡(子龍)
신장 190cm[1]
생몰 기간 170년 이전 ~ 229년
고향 기주(冀州) 상산군(常山郡) 진정현(眞定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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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유비) 아문장군(牙門將軍)
편장군(偏將軍) 겸 계양태수(桂陽太守)
편장군(偏將軍) 겸 유영사마(留營司馬)
익군장군(翊軍將軍)
중호군(中護軍) 겸 정남장군(征南將軍)
중호군(中護軍) 겸 진동장군(鎭東將軍)
중호군(中護軍) 겸 진군장군(鎭軍將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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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초반 행적2.2. 공손찬 휘하에서2.3. 유비에게 임관2.4. 장판파2.5. 형주에서2.6. 유비의 입촉2.7. 한중 공방전2.8. 이릉대전2.9. 남만 정벌2.10. 제갈량의 1차 북벌
2.10.1. 전투 과정과 퇴각, 전후 처리
2.11. 죽음
2.11.1. 생몰년과 나이
3. 삼국지연의4. 평가
4.1. 지휘 능력
5. 가족 관계6. 호위무사설과 실상7. 촉한에서의 위치8. 이야깃거리9. 미디어 믹스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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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勇績當陽著(용적당양저): 용기와 공적 당양에서 드러났으니
常山累建功(상산루건공): 상산이 여러 차례 공을 세웠네.
彼軍都似鼠(피군도사서): 저 군사는 모두들 쥐떼와 같고
此將竟如龍(차장경여룡): 이 장수는 분명히 용과 같구나.
膽量魁西蜀(담량괴서촉): 담력은 서촉에서 으뜸이 되고
威名紀漢中(위명기한중): 위명은 한중에서 손에 꼽히네.
兩番全幼主(양번전유주): 두 번을 어린 주인 보전시키니
千載更誰同(천재갱수동): 천년 동안 또 다시 누가 있으리.
후한 말의 인물이자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

기주 상산군 진정현 사람으로[2] 는 자룡(子龍)[3]이다. 시호는 순평후(順平侯).

강직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공과 사의 구분이 뚜렷하여 일처리가 공정하고 허물이 없었으며, 높은 직위와 공적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에도 과욕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함과 청렴함까지 갖춘 완벽한 인간상으로 기록되지만 관우처럼 신격화까지는 되지 않아 예로부터 친숙한 인물로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후세에는 삼국시대 인물을 통틀어 관우, 제갈량과 함께 역대제왕묘에 공신으로 배향되었을 정도로 후대의 평가까지 훌륭한 인물.

굳세고 용맹하여 맹장으로서 공훈을 세우고 위명을 떨쳤으며, 조운의 행적을 기록한 《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조운을 평할 때 유비의 조아(爪牙)[4]라는 높은 평가를 내렸다. 위험을 무릅쓰고 주군에게 충언을 하거나 목숨을 걸고 주군의 가족을 보호하는 등 충성심도 대단한 장수였다. 여담으로 조운의 별칭 중 하나인 호위장군(虎威將軍)은 누군가를 지키는 호위(護衛)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호랑이 같은 위세를 떨치는 장군이란 뜻이다. 또한, <조운별전>에 따르면 신장이 8척에 용모가 남자다웠다고 한다.

현대에 이르러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짐에 따라 관우 장비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비판, 재구성되는 와중에도 상술한 대로 책 잡을만한 흠이 아예 없는 수준이기 때문에 대접이 나빠지긴커녕 가면 갈수록 완벽한 인물로 평가가 더 좋아지고 있다.[5]

한국에서는 제갈공명과 더불어 삼국지의 인물들 중 본명보다 자로 많이 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보통 상산 조자룡이라 알려져 있기도 하여 '조자룡 헌 창 쓰듯 한다’는 속담도 있을 정도.[6]

2. 정사 삼국지

기존에 진수가 쓴 촉서 조운전은 황충전에 버금갈 정도로 허전했으나, 이후 배송지가 《조운별전》의 내용들을 인용해 주석으로 보충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훗날 송의 역사가 사마광이 저술한 《 자치통감》에서도 조운별전의 내용들을 차용하여 조운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조운(趙雲)은 자(字)가 자룡(子龍)이고 기주 상산(常山) 진정(眞定) 사람이다. 본래 공손찬의 세력에 속했는데 공손찬 유비에게 전해를 도와 원소를 막게 하니 조운이 함께 따라나서며 유비를 위해 기병을 지휘했다.

조운은 신장이 8척에 용모가 웅장하며 위엄이 있었다. 본래 속한 군에서 천거되었는데 의종을 거느리고 공손찬에게 임관했다. 당시 원소가 기주목(冀州牧)을 칭하였고 공손찬은 기주 사람들이 원소를 따르는 것을 크게 우려하였다. 조운이 귀부해 오자 기뻐하면서도 조운을 우습게 여겼다, "듣기로 그대가 속한 주의 사람들은 모두 원씨(袁氏)를 원한다던데 그대는 어찌 홀로 마음을 돌리고 미혹되어 반대로 행하는 것이오?" 조운이 대답했다, "천하가 흉흉하여 누가 옳고 그른지 알 수 없으며, 백성들이 마치 거꾸로 매달아 놓은 것처럼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여 비주(鄙州)에서 논의하기를 어진 정치가 있는 곳을 따르기로 하였을 뿐 원공(袁公-원소)을 소홀히 하며 명장군(明將軍-공손찬)을 사사로이 따르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하여 공손찬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정벌했다.

유비도 이때 공손찬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늘 조운을 맞아들여 그를 대우하니 조운이 심히 동하여 유비와 결탁하게 되었다. 조운의 형이 죽자 공손찬에게 말해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유비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믿고 손을 맞잡으며 작별했다. 조운이 말했다, "끝내 덕(德)을 저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비가 원소(袁紹)의 빈객이 되자 조운이 업(鄴)에서 그를 만났다. 유비는 조운과 같은 침상에서 함께 잠을 잤으며, 은밀히 조운을 보내 무리를 모으게 해 수백 명을 얻었는데 이들이 모두 좌장군 유비의 부곡(部曲)이라 칭했으나 원소는 이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는 선주를 따라 형주(荊州)에 이르렀다.

유비가 당양(當陽) 장판(長阪)에서 조조에게 추격당해 처자를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나자 조운이 유선 감부인을 보호하여 모두 위난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아문장군(牙門將軍)으로 올랐다. 유비가 촉(蜀)으로 들어갈 때 조운은 형주에 남았다.

당초 유비가 패했을 때 조운이 이미 북쪽으로 떠났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선주가 수극(手戟)을 내던지며 말했다, "자룡이 나를 버리고 달아났을 리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운이 도착했다.

강남(江南)을 평정하는데 종군하여 편장군(偏將軍)이 되고 계양태수(桂陽太守)를 겸하여 기존의 계양태수였던 조범(趙範)을 대신하였다. 조범의 형수 번씨(樊氏)가 홀몸이었고 뛰어난 미모를 지녔기에, 조범이 그녀를 조운과 맺어주려 하였다. 허나 조운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우리가 서로 성씨가 같으니 경의 형이 곧 내 형과 같소." 이처럼 굳게 사양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그녀를 맞아들이도록 권하는 사람이 있자 조운이 말했다, "조범이 급박하게 항복했으니 그 심중을 헤아릴 수 없소. 또한 천하에 여자가 적지 않소." 그리고는 그녀를 취하지 않았다. 실로 조범이 도주하였으나 조운은 조금도 엮이지 않았다.

그 이전에 하후돈(夏侯惇)과 박망(博望)에서 싸워 하후란(夏侯蘭)을 사로잡았었는데, 하후란은 조운의 고향 사람으로 서로 아는 사이였다. 조운은 유비에게 그를 살려주도록 청하고 하후란이 법률에 밝다고 천거하여 군정(軍正)으로 삼게 했으나 조운이 사적으로 그를 가까이하지는 않았으니 그의 신중하고 사려 깊음이 이와 같았다.

유비가 익주(益州)로 들어가며 조운에게 유영사마(留營司馬)를 겸하게 했다. 손부인(孫夫人)은 손권의 여동생으로 교만하고 난폭하여 오(吳)의 관리와 병사들을 여럿 거느리고 거침없이 법을 어겼다. 유비는 조운이 엄격하고 정중하니 필시 이를 제어할 수 있으리라 여겨 특별히 내부의 일을 맡겨 관장하게 했다. 손권은 유비가 서쪽을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 배들을 보내 여동생을 영접하게 했는데, 손부인이 몰래 후주를 데리고 오로 돌아가려 했으나 조운이 장비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강을 끊어 후주를 구해 돌아왔다.

유비가 가맹(葭萌)에서 군사를 되돌려 유장을 공격하고 제갈량을 불렀다. 제갈량이 조운과 장비 등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면서 여러 군현을 평정했다. 강주(江州)에 도착하자 조운을 나누어 보내 외수(外水)를 따라 강양(江陽)으로 올라가게 하니 성도에서 제갈량과 합류했다. 성도가 평정된 뒤 조운을 익군장군(翊軍將軍)으로 삼았다.

익주가 평정된 다음 사람들이 의논하여 성도의 옥사(屋舍)와 성 바깥의 과수원, 뽕밭을 제장들에게 나누어주고자 했다. 허나 조운이 이를 반대하며 말했다. "(한무제가 집을 하사하자) 곽거병은 흉노를 아직 멸하지 못했으니 집이 쓸모없다고 하였으며 또한 나라의 적이 비단 흉노만이 아니니 아직 안락을 구해서는 안됩니다. 천하가 모두 평정될 때를 기다리고 각자 고향로 되돌아가 본래 땅에서 농사짓는 것이 마땅합니다. 익주(益州)의 인민(人民)들은 처음 전란을 겪었으니 논밭과 집들을 모두 되돌려주고 이제 이에 안거(安居)하며 생업에 복귀하게 한 뒤에 부역하게 하고 조(調)를 거둔다면 그들의 환심(歡心)을 얻을 것입니다." 이에 선주(유비)가 이를 따랐다.

하후연이 패하자 조공(曹公-조조)이 와서 한중 땅을 다투었고 북산(北山) 아래에 군량(米)을 운반하여 수천만 포대에 달했다. 황충(黃忠)이 가히 이를 탈취할 수 있다 하였고 조운의 군대가 황충을 수행해 군량을 탈취하려 했다. 황충이 기한을 넘겨도 돌아오지 않자 조운이 수십 기를 거느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군중을 나와 황충 등을 마중하며 상황을 살펴보려 했다. 때마침 조공(曹公)이 양병(揚兵-거병;군세를 떨침)하여 대거 출전하니 조운이 조공의 전봉(前鋒)에 의해 공격받아 바야흐로 싸우는데 적의 대군이 도착하여 형세가 핍박되자 적진에 돌진하고 한편으론 싸우며 한편으론 물러섰다. 조공의 군(조조군)이 패했다가 다시 합치니 조운이 적을 무너뜨리고는 군중으로 달려 되돌아왔다. 장수 장저(張著)가 상처를 입자 조운이 다시 말을 달려 적의 영(營)으로 되돌아가 장저를 맞이했다. 조공의 군이 추격해 위(圍)에 이르렀다.이때 면양장(沔陽長) 장익(張翼)이 조운의 위(圍) 안에 있었는데 장익이 문을 닫고 막아 지키려 하였으나 조운이 영(營)으로 들어와서 다시 문을 활짝 열고는 깃발을 내리고 북치는 것을 멈추었다. 조공의 군은 조운이 복병을 두었을까 의심하여 군을 이끌고 물러났다. 이윽고 조운이 하늘을 뒤흔들 기세로 북을 울리며 오로지 뒤에서 조공의 군사들에게 융노(戎弩)를 쏘아대니 조공의 군대가 모두 놀라고 어지러워져 자기들끼리 서로 짓밟았고 한수(漢水)에 떨어져 죽은 자가 몹시 많았다.

유비가 다음날 아침 조운의 영위(營圍)로 친히 와서 전날 싸운 곳을 둘러보고 말했다, "자룡(子龍)은 일신이 모두 담덩어리로구나." 음악과 술자리를 베풀어 저녁까지 이어졌고, 군중(軍中)에서는 조운을 일컬어 호위장군(虎威將軍-범 같은 위용을 갖춘 장군)이라 불렀다.

손권이 형주(荊州)를 습격하자 유비가 크게 노하여 손권을 치려 했다. 이에 조운이 간언하며 말했다, "국가의 적은 조조이지 손권이 아닐 뿐더러 먼저 위(魏)를 멸하면 오(吳)는 자연스레 복종해올 것입니다. 비록 조조가 죽었으나 그의 아들인 조비가 한 왕조를 찬탈했으니 응당 백성들의 마음에 의거해 조속하게 관중(關中)을 도모해야 합니다. 하수와 위수 상류를 점거해 흉역(凶逆-임금에게 불충하고 불효한 흉악한 짓)한 자들을 토벌하면 필시 관동(關東)의 의사(義士)들이 양식을 싸매고 말을 채찍질해 달려와 천자의 군대를 영접할 것입니다. 위(魏)를 내버려두고 먼저 오(吳)와 싸워서는 안됩니다. 병세(兵勢)가 한번 엇갈려 교전하게 되면 쉽게 해결할 수 없습니다." 유비가 이를 들어주지 않고 마침내 동쪽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하며 조운을 남겨 강주를 감독하게 했다.(督江州) 선주가 자귀(秭歸)에서 크게 패하자 조운의 군대가 영안(永安)에 도착했는데 오의 군사들은 이미 물러난 뒤였다.

건흥 원년(223년)에 후주는 조운을 중호군(中護軍),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임명했고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했다가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올렸다.

건흥 5년(227년), 조운은 제갈량을 수행해 한중에 주둔했다.

그 이듬해(228년), 제갈량이 출군하면서 야곡도(斜谷道)로 행군하겠다고 거짓 정보를 퍼뜨리자 조진이 대군을 보냈다. 제갈량은 조운과 등지에게 명해 이것을 막게 하고 자신은 기산을 공격했다. 조운과 등지의 군사들은 약하고 적의 군세는 강해 기곡(箕谷)에서 실리(失利)했으나 군사들을 거두어 굳게 지켰으므로 대패에 이르지는 않았다. 군이 퇴각한 뒤 진군장군(鎭軍將軍)으로 강등됐다.

이때 제갈량이 말하기를, "가정(街亭)에서 군대가 퇴각할 때는 병졸과 장수들을 다시 서로 수습하지 못했는데 기곡(箕谷)의 군대가 퇴각할 때는 병졸과 장수들이 처음처럼 잃은 바가 없으니 어찌된 건가?" 등지(鄧芝)가 대답했다, "조운이 몸소 뒤를 끊고 군자(軍資)와 집물(什物)조차 함부로 버린 일이 거의 없으니 병장(兵將)들을 잃을 까닭이 없었습니다."

조운의 군수물자에 여유분의 비단(絹)이 있어 제갈량이 장사(將士)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니 조운이 말했다, "군사에 이로움이 없었는데 어찌 하사품이 있을 수 있습니까? 청컨대 그 물건들은 모두 적안(赤岸)의 부고(府庫)에 넣어두었다가 10월이 되길 기다려 겨울 하사품으로 삼으십시오." 이에 제갈량이 따랐다.

건흥 7년(229년)에 죽었으며, 시호를 추증해 순평후(順平侯)라 했다.[7]

(관우, 장비, 마초의 평 이후) 황충과 조운은 굳세고 용맹해 아울러 조아(爪牙=매우 쓸모 있는 사람이나 물건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가 됐으니 (灌), (滕)의 무리로다.

2.1. 초반 행적

사록에 확실히 기록된 바는 없으나, 의종[8]이 있었다는 것을 보아, 고향의 유협 내지는 자경단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 원소가 한복에게서 기주를 뺏자 공손찬 휘하로 들어간 행보로 판단해 볼때, 한복의 세력으로 분류되는 입장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한복이 동탁토벌전 와중에 진행한 기주 황건적 토벌전에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2.2. 공손찬 휘하에서

원소가 책략을 사용하여 한복에게서 기주를 뺏자, 따르는 자들[9]을 거느리고 공손찬 휘하로 들어갔다.

공손찬은 기주인들이 원소를 따르는 것을 걱정하던 도중에 조운이 귀부해 온 것에 기뻐하여 조운을 놀리며 말했다.
듣기로 기주 사람들은 모두 원씨(袁氏)를 원한다던데 그대는 어찌 홀로 마음을 돌리고 미혹되어 이에 반(反)하는 것이오?
조운이 답했다.
천하가 흉흉(=술렁거리어 매우 어수선하다.)하여 누가 옳은지 알 수 없으나 백성들이 거꾸로 매달리는 것과 같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여 비주(鄙州=자신의 주를 겸칭)에서 논의하기를 어진 정치가 있는 곳을 따르기로 하였으니, 그런 뜻에서 귀부한 것일 뿐 원공(袁公)을 소홀히 하거나 명장군(明將軍)을 사사로이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10]
그리하여 공손찬과 함께 전투에 나선다.

당시 유비 또한 공손찬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평원에서 전해와 함께 원소를 막으니 조운은 유비를 위해 기병을 지휘했다. 조운이 기병 지휘관으로서 커리어를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는 공손찬 시절 조운이 잠깐 유비를 따라 전장에 나갈 때로 당시 조운은 공손찬의 정식부하가 아니라 의병이었다. 이렇게 유비가 늘 조운을 접납(接納)하니 조운이 심히 유비와 결탁하게 되었다.

이후 형이 죽자 공손찬에게 이를 고하고 낙향했는데, 그가 장례를 핑계로 공손찬으로부터 떠나려는 것임을 직감한 유비와 손을 맞잡으며 애틋하게 작별했다. 조운은 "끝내 덕(德)을 저버리지는 않겠습니다."라고 말하고 훗날을 기약했다.[11][12]

2.3. 유비에게 임관

약속대로 유비 원소에게 몸을 의탁할 때 업성에서 유비 휘하로 합류한다. 유비는 조운과 한 침상을 쓰며 그를 두텁게 대하였으며,[13] 그를 시켜 원소 몰래 수백 명의 사병들을 모으게 했다.

별전에 따르면 유비가 서주에서 패배해 원소에 의탁했을 때부터 유비와 함께 했으니 역시 관우와 장비, 진도 다음가는 구장이었다. 인재를 보는 눈이 탁월하였던 유비가 조운과 한 침상에 함께 누워 동고동락했을 정도로 조운은 유비의 신뢰를 받는 장수였다.

아래에도 나오지만 하작은 유비가 공손찬과 함께 할 때 이미 조운을 휘하로 거느렸는데,(즉, 이 시점에서 조운은 공손찬에서 유비로 주군을 바꿨다는 것) 별전에서는 조운이 업에서 유비 휘하로 들어갔다고 하니 이를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정사 조운전을 따르면 조운은 처음부터 공손찬 휘하에 있다가 이후 유비가 공손찬에 의탁할 때 유비 휘하가 되지만 조운별전을 따르면 처음에 조운은 한복이 다스리던 기주에서 말단 관리로 일하다가 공손찬 휘하에 예속되었다가 유비를 도와 기병을 지휘하다가 낙향한 뒤에 이후 5~7년간 행방이 불명해 진 뒤 유비가 원소에게 의탁할 때 유비에게 합류하는 것이 된다.

별전을 긍정하는 쪽에서는 하작의 해석에 오류가 있다고 보는데, 본전에서는 딱히 조운이 유비 휘하로 들어갔다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며, 단지 공손찬은 부장 조운을 유비에게 파견하여 유비를 도와 기병을 지휘하게 한 것이다. 이후 조운이 업에서 정식으로 유비군에 합류한 부분은 본전에서는 생략되었지만 별전이 보충했다고 보는것이다.

별전에 따르면, 유비 하후돈을 박망(博望)에서 물리쳤을때 하후란이란 자를 사로잡았는데, 하후란은 조운의 고향 사람으로 서로 아는 사이였다. 조운은 유비에게 그를 살려주도록 청하고 하후란이 법률에 밝다고 천거하여 군정(軍正)으로 삼도록 천거하였으나 사적으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같은 고향을 둔 사이이기에 교분이 있었을 법이지만 조운은 공정성을 지키기 위하여 그와 교류하지 않았다. 그의 처세관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4. 장판파

선주가 조공에게 쫓겨 당양(當陽)의 장판(長阪)에까지 이르게 되자 처자(妻子)를 버리고 남쪽으로 퇴각했는데, 조운이 유비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무사히 감부인을 보호하여 모두 화를 면하게 했다. - 조운전
당초 선주(先主)가 패했을 때 조운이 이미 북쪽으로 떠났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선주가 수극(手戟)을 내던지며 말했다. “자룡이 나를 버리고 달아났을 리 없다.” 얼마 뒤 조운이 도착했다.

실질적으로 조운이 생전에 세운 가장 큰 공적으로 볼 수 있다. 왕정시대에서 적장자의 의미는 굉장히 중요했으며, 더군다나 형주에 터전을 잡기전에 전국을 유랑하며 계속 가족을 구성하고 잃고를 반복했던 유비를 생각한다면 태자를 구하고 주군의 가족을 적들의 인질로 잡히지 않게끔 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오호대장군의 공로와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있다.[14]
장판에서 조운은 총지휘관인 유비가 단 몇기만을 데리고 도주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유선과 감부인을 구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유비의 후계자를 구하면서 유비의 품에 안긴 충신인 것이다. 별전에서 조운은 연의에서처럼 무공이 높여지기 보다는 군주의 신임을 부각시켰다.

어떤 이[16]가 조운이 북쪽으로 떠났다 (즉, 조조군에게 항복하러 갔다)고 유비에게 고하자 유비가 수극을 던질 정도로 격한 반응을 보이며 "조운은 자신을 버릴 리가 없다."고 말했는데, 얼마 뒤 유비의 은신처에 조운이 이르렀다고 한다. 이를 볼 때 난전 중에 적진으로 역행했고 태자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전투가 치뤄졌음은 사실로 보인다. 단, 연의나 각종 매체에서 보통 그려지는 조운의 용맹무쌍한 모습들처럼 홀로 조조군 최고의 기병 부대를 휘젖고 다녔다고 보기에는 약간 힘들다. 감부인 유선 모두를 구하였고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돌아왔으니 오히려 격전을 벌였다면 조운은 몰라도 감부인과 유선은 위태로워졌을 것이다.

연의에서는 조운이 조조군 백만대군을 상대로 혈투를 펼치면서 사실은 훗날을 예견한 조조의 큰그림 덕분에 아두를 구한 것으로 나오지만 정사에서는 5천기의 호표기가 유비를 추격한 것으로 나오므로 연의에서의 용맹무쌍한 묘사는 사실 뻥이 심한 편이다. 실제로는 태자를 구해서 피신하는 것이 주 목표였으니 무력충돌은 최대한 회피하는 길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침착하고 냉정한 성격의 조운이라면, 호표기가 추적할 루트는 최대한 회피하면서 아두를 구하는데 초점을 두었을 확률이 높다. 최중요인물을 보호하고 있으면 당연히 위험한 전장에 가까이 접근하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모습이다.

물론 소설에서 다소 과장이 있었던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조운의 용맹함을 평가절하할 이유는 없다. 유비군이 퇴각할 당시의 상황이 워낙 아비규환에 개판이라서 물리적 충돌이 없었을 가능성은 적다. 장판에서 유비의 처자식을 구한 공로로 조운은 아문장군, 즉 유비 직속 부대를 지휘하는 잡호장군 직에 임명되었는데 조운의 공적이 작은 것이라면 결코 이러한 처우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병이 오지 않을 경로는 곧 유비가 몸을 피할 경로가 될 수 있기에 호표기가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으며, 적장과 그 적장이 모시는 인물이 다른 사람도 아닌 적의 우두머리에게 딸린 가족이라면 마주치고 고이 보내줄 리도 없다.[17] 거기에 감부인 유선을 찾기 위해서 조운이 북쪽으로 홀로 돌파할 때도 남쪽으로 유비를 찾던 호표기와 마주치지 않았을 리가 없고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유비가 피신한 쪽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 기병이라면 호표기가 적으로 판단하여 가만히 놔둘리도 만무하다. 이런 상황에서 감부인 모자를 찾기 전후로 중간 중간에 호표기와 산발적인 교전이 아예 없었을 가능성은 없다.

이를 고려한다면 산개해서 유비를 수색중인 호표기의 분견대 정도와 산발적인 교전이 있었을 것이고, 위의 분석에 의거하자면 그 교전의 규모가 크지는 않았을 것이며 감부인과 아두를 무사히 데려온 결과로 보아 조운은 산발적인 교전 모두에서 승리하거나 호표기 본대에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 성공적으로 퇴각했을 것이다. 호표기 같은 정예부대와 교전 속에서도 감부인과 아두를 무사히 구출에 성공했다는 것은 조운의 대담한 무용과 판단력이 뛰어났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또 유비가 장비에게 후미를 막아달라며 붙여준 병력이 겨우 20기였다. 독자적인 판단으로 유비의 가족을 구하러 간 조운이[18] 휘하에 제대로 병력을 갖추고 갔을 리 없으니 말 그대로 연의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혈혈단신, 혹은 한 자리수도 채 안 될 병력만 데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있음을 각오하고 난장판이 된 장소로 되돌아가 유선과 감부인을 구출한 것이다. 이정도만 해도 조운의 무력이랑 용맹함은 그 어떠한 장수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2.5. 형주에서

위기에서 벗어난 후 조운은 아문장군이 되었는데, 아문장군은 아기(牙旗) 즉 대장기를 꽂아놓은 부대, 즉 사령관이 머물고 있는 부대의 책임자이다. 쉽게 얘기해서 사령관의 직할부대를 지휘하는 역할이다. 그런고로 조운은 유비 곁에서 최측근으로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적벽대전 남군 공방전 때는 행보가 나와있지 않지만 군주인 유비가 직접 전선에 나서서 싸울만큼 중요한 전투들이었던만큼 조운 혼자 한가롭게 있을 턱이 없으니 위에 적힌 것처럼 최측근 장수로서 유비와 동행하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남군 공방전 때는 관우 장비가 따로 움직였으니[19] 조운이 유비 곁에 있는 건 확실하다 봐도 무방하다.

이밖에 조운은 유비의 형남 평정 때도 종군하여 편장군이 되었고, 기존의 계양태수 조범을 대신하여 계양 태수를 겸했는데, 계양의 위치상 조운은 후방을 안정시키는 업무와 전방에 보급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생각된다.

번씨와의 일화가 별전에 그려진다. 조범은 유비에게 항복한 뒤 과부가 된 자신의 미인 형수 번씨를 조운에게 재가시키려고 한다. 자신의 입지를 위한 연을 만들어 두려는 것이었는데, 조운은 "우리가 서로 동성(同姓)이니 경의 형이 곧 내 형과 같소."라며 굳이 사양한다. 그녀를 맞아들이도록 권하는 또 다른 사람이 있자 조범은 궁핍해지자 항복한 것으로, 그 속까진 아직 헤아릴 수 없고 더욱이 천하에 여자가 그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며 거듭 사양한다. 훗날 정말로 조범은 유비를 배신하고 달아났지만 조운은 조범이 제안한 혼담을 거절했기 때문에 이 일에 관련되지 않았다.
선주가 익주(益州)로 들어갈 때 조운을 남겨 유영사마(留營司馬)의 일을 보게 했다. 이때 선주에게 손권의 누이 손부인(孫夫人)이 있었는데, 그녀는 교만하고 굳세어 방자하고 오(吳)나라의 관리와 병사들을 많이 거느려 법을 따르지 않았다. 선주는 조운에게 특별히 내부의 일을 장악하도록 하여 이를 엄중히 바로 잡도록 하였다. 손권은 유비가 서정길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많은 배를 보내 누이인 손부인을 데려가려고 했다. 손부인은 후주(유선)를 오나라로 데리고 가려고 하였지만 조운은 장비와 함께 강을 끊고 후주를 데리고 돌아왔다. - 조운별전

이후 유비가 입촉하자 형주에 남아 사마의 일을 맡았는데, 이 사마를 원문에서 유영사마(留營司馬)라고 한다. 유는 남아있는 사람에게 주는 관직이다. 영(營)은 군영이다. 그러므로 유영이란 원래 군영(軍營)이 있는데, 그 군영의 책임을 진 사람이 어떤 일로 떠나게 되어 본래 설치된 장소에 남아있게 되는 군영이다. 그러므로 유영사마란, 남아있는 군영에서 군사 업무를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경우에 유비가 촉으로 들어간 뒤 손부인이 강하게 행동하며 기강을 흐릴 것을 우려하여 특별히 조운에게 내부의 일을 장악하고 엄중히 바로 잡도록 한 것이다. 유비가 입촉하기 전에 자신이 떠난 뒤 손부인을 억제하기가 쉽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별도로 조운에게 유비 집안의 일을 맡도록 한 것인데, 이를 통해 조운에 대한 유비의 특별한 신뢰를 엿볼 수 있다. 참고로 유비가 입촉할 때 형주에 남았던 사람은 조운 말고도 관우와 장비 그리고 제갈량 등이 있었다. 물론 성격이 조금 다른 것이 문제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유비가 그런 면에서 조운을 가장 신뢰했다는 것이다. 군주가 없을 때 군주의 집안일을 맡길만한 능력을 지녔던 인물이 바로 조운이었던 것이다.
유비가 익주(益州)로 들어가고, 오나라는 사자를 보내 손부인을 맞으려고 했다. 손부인은 태자를 데리고 오나라로 돌아가려고 했다. 제갈량은 조운(趙雲)에게 병사를 지휘하도록 하여 장강을 끊어 태자를 남도록 하였다. - 한진춘추

그러나 별전의 기록만을 보면 조운이 단독으로 병력을 지휘한 것 같이 생각되지만 목황후전에 주석으로 달린 한진춘추의 기록을 보면 명령을 내린 사람은 제갈량이었으며, 따라서 조운은 제갈량의 재가를 받아 행동한 것이다.

2.6. 유비의 입촉

유비가 가맹(葭萌)에서 환군해 유장을 공격하고 제갈량을 불렀다. 제갈량이 조운과 장비 등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며 군현들을 평정했다. 강주(江州)에 도착하자 조운을 나누어 보내 외수(外水)를 따라 강양(江陽)으로 올라가게 하니 성도에서 제갈량과 합류했다. 성도가 평정된 뒤 조운을 익군장군(翊軍將軍)으로 삼았다. - 조운전

흔히 조운이 일군을 이끌고 군을 운용한것이 1차북벌 때로 보는 시각이 많지만 공식적으로 조운이 따로 부대를 이끌고 군사를 운용한 것이 확인되는 기록은 익주정벌전이다.[20] 제갈량의 본대는 장비와 함께 했고(장비전), 조운은 물길(물이 있는 곳엔 언제나 점령지가 있듯이 점령전엔 물길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을 따라 제갈량의 본대와 따로이 다른 부대를 운용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정사의 기록에서는 성도 평정 이후 어느 시점에 익군장군이 된 것으로 나오는데, 화양국지에서는 이를 219년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자치통감에 따르면 하후연 전사 후 조조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한중에 왔을 때 조운을 익군장군이라고 명시한다. 조조가 완전히 물러간 후 한중왕에 올랐으므로 시기상으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익군장군의 시기에 대한 시점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정사 조운전 : 익주 평정 이후 어느 시점인 214년부터 219년 봄까지. 혹은 정남장군이 된 223년 이전까지도 가능하다.
2) 자치통감 : 조조의 한중 참전 전후로 최소 219년 봄 이전. 이 경우도 망라 기간이 길다.
3) 화양국지 : 유비 한중왕 등극에 맞춘 219년.
다만 유비가 219년 한중왕에 즉위하면서 대대적인 개편과 승진이 일어났으니 아마 화양국지의 명시가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여기서 익군장군은 기존에 없는 장군직이며, 후대에도 쓰이는 경우가 많지 않아서 그 정체가 아직까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다. 익군장군과 관련하여 주목해 볼만한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하자면, 먼저 익군장군은 유비가 생전에 직접 만든 두 가지 장군직(제갈량의 군사장군과 조운의 익군장군)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또한 이 시기는 장합, 하후연, 조조로 이어지는 위군과의 전투가 일어난 시기이다. 익군장군의 대략적인 역할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잡호장군이었다는 것이다. 잡호장군의 특성상 익군(翊軍), 즉 군을 돕는, 군을 보조하는 역할이었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익(翊)의 특성상 본대 중앙군 기준으로 좌우익에 해당하는 위치였을 수도 있다. 혹은 익주를 장악하고 국정에 집중해야 했던 유비가 수족이자 그림자로서 움직여줄 조운을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 주었을 수도 있다.

한편, 익군장군의 모델이 전한의 익군교위라는 설이 있다. 익군교위는 남군 소속으로 황궁 수비를 전담하는 관직이었으며, 황궁 문들을 숙위하는 병사들의 지휘관이었고 전한대에는 사성교위와 동급, 장수교위의 상급, 사예교위 아래였다고 한다. 이 익군교위를 업그레이드 해서 익군장군이 되었고, 이 역할이 대충 군주 유비의 직속부대의 지휘관이라는 설이다. 별전에 의하면 그 유명한 일신시담 사건 당시, 유비가 조운의 진영을 시찰했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시찰이라는 표현이 꽤나 의미심장하다. 익군교위를 업그레이드 시켰을 거라는 점은 추측이며, 기록에서 아무런 연관 관계를 찾을 수 없고, 또 익군교위 자체가 전한 시대에 사용되고 후한 시대에는 보이지 않는데, 유비가 굳이 전한대의 익군교위를 끌어다가 쓸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도 의문이며, 이미 전한대에서 사라진 익군교위를 알고 있었을 지도 의문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후일 서진에서는 팔왕의 난 당시 제왕 사마경이 익군교위를 지냈고, 성한에서는 태자 이세가 익군장군을 지냈다고 하니 익군교위직을 후대에 몰랐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조운 이후로 촉에서는 곽익 정도만 임명되었을 정도로 익군장군은 임시직의 성향이 보이는데, 심지어 곽익의 익군장군 때도 대체 그 정체가 무엇인지 모호하다. 참고로 조운이 익군장군이던 시기에 관우는 전장군, 마초는 좌장군, 장비는 우장군, 황충은 후장군에 임명되었다.[21] 이에 따라 관장마황은 모두 어깨에 힘좀 줄 수 있는 요직으로 임명되었는데 조운은 임시직 성향이 짙은 익군장군에 임명된 것이 그의 능력이 생각보다 특출나지 않았다거나, 전공이 다른 이들에 비해 부족하기 때문에 중용되지 않은 것이 아니냐라는, 조운 평가 절하의 한 가지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저평가의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렇게 따지면 제갈량의 군사장군도 유비가 만든 임시직이기 때문이다.[22] 유비가 장군직을 만들어 줄 때는 그만한 이유와 중요도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반대로 임시직 성향이 짙기 때문에 시국에 비추어 봤을 때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보는게 맞다. 비상대책위원회는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임시적인 성향이 짙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이다. 임시직이 괜히 임시직인가? 평시보다 위기에 필요하기 때문에 임시직인 것이다. 조운의 쓰임새가 애매했다면 그냥 애매한 장군직을 주지, 굳이 없는 장군직을 새로 만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시기적으로 봤을 때에도 익주가 평정된 지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으며, 한중왕 즉위 이후였기 때문에 세력 내 융합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또 이 시기는 위의 대대적인 침공과 겹치는 기간이다. 따라서, 그런 시기에 유비가 최측근인 조운에게 맡긴 것이 익군장군이기 때문에 그것이 일반적인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했을 가능성이 있다.

조운의 익군장군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운의 위치와 영향력, 행적 등을 고려해보았을 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하찮게 여길만한 것이 결코 아니다. 조운은 무장이면서도 중요한 정치적인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유비의 최측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익군장군은 유비가 조운에게 맡기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서 준 것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익군장군이라는 장군직 자체의 품계나 역할보다도 오히려 조운이 임명되었기 때문에 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중국 쪽에서는 설문해자의 뜻에 부응해서 翊은 翼과 통한다고 하여, 유비가 조운을 자신의 날개, 즉 左膀右臂 심복으로 본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데 문제는 이 시점에서 조운의 위치다. 조운은 이미 유비의 형주 시절에 편장군 계양태수로 유비군의 엄연한 중진이었다. 관우, 장비만은 못해도 고참장군인데다, 밑에서 나오지만 익주 점령 후 유비의 전후 정책에 간언을 해서 그 방향을 바꿀 정도로 유비와의 관계도 가까운 편이다. 마초는 이 시점에서 유비의 객장인만큼 별개의 존재, 그리고 유비는 이 시점에서 좌장군이었기 때문에 좌장군부의 장사/사마/종사가 그 뒤를 따르고, 군사장군 제갈량을 대표로 하는 좌장군 휘하 부곡장(잡호장군)들이 그 뒤를 잇는다. 제갈량의 경우 유비가 특별히 좌장군부의 사무를 보도록 창설한 장군직에 있으니 부곡장이라고는 해도 좌장군부의 사무는 장사/사마/종사를 넘어서는 권한을 행사하지만.
평서장군 도정후 신 마초, 좌장군 장사 영 진군장군 신 허정, 영사마 신 방희, 의조종사중랑 군의중랑장 신 사원, 군사장군 신 제갈량, 탕구장군 한수정후 신 관우, 정로장군 신정후 신 장비, 정서장군 신 황충, 진원장군 신 뇌공, 양무장군 신 법정, 흥업장군 신 이엄 등이 120인이 상언합니다. - 선주전
그런데 여기서, 조운 외에도 꼭 들어가야 할 사람이 빠져 있다. 장군중랑장 동화다. 동화는 유비의 익주 평정 후 장군중랑장으로 임명되어 제갈량과 함께 좌장군 대사마부의 사무를 맡아보게 된다. 유비는 익주에 들어가면서 유장의 표문으로 대사마를 겸임하고 있었는데, 제갈량은 유비의 공식 관직인 좌장군부의 사무를 맡고, 동화는 유비의 최고위 관직인 대사마부의 사무를 맡은 것이다(화양국지 유선주지). 이런 인물이 빠져 있다. 생몰이 분명치 않은 만큼 유비의 한중왕 선언 이전 죽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동화의 후임이 누군지도 분명하지 않고, 제갈량의 소회에 따르면 동화는 관직에 몸담은 것이 20년, 제갈량과 함께 일한 것이 7년이라고 하고, 제갈량은 동화의 비중을 무척 크게 보고 있다. 이 시점에서도 살아있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도 유비의 제위 등극 전에 사망했다고 봐야겠지만.

만약 동화가 살아있었음에도 이 표에서 그 서열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이것도 문제가 있을 터다. 유비는 분명히 좌장군과 대사마의 사무를 제갈량과 동화에게 각각 맡겼는데, 이 한중왕 표문에서는 대사마 직할 관원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으니까.

때문에 이것과 연관지어서, 조운의 관직을 설명할 수도 있다. 유비는 한중왕이 될 당시 대사마 한중왕을 칭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좌장군으로서 이에 오르는 형식을 취했다. '좌장군 영사례교위 예형익삼주목'이 이 표문에서의 유비의 직함이다. 유비는 그러니까 자신이 칭했던 직함들 중, 조정으로부터 하사받은 공식 직책인 좌장군 이하의 지위에 있는 직함들만 붙인 셈. 마초의 평서장군이나 황충의 정서장군 같은 것도 실질적으로는 잡호장군이고, 사평/사정으로 봐도 좌장군 이하니까 모양에 손색은 없다.

요컨대, 유비는 한중왕이 되기 위한 절차를 밟으면서, 좌장군의 재량으로 임명할 수 있는 관직 내지는 좌장군 이하의 군직들만 전면에 내세우고 대사마부의 관리나, 금군 관련 직책들은 잘라낸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조정(황제)의 권위를 거스르지 않는다는 퍼포먼스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조운의 익군장군이 익군교위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조금 생긴다. 조운이나 동화는 유비의 입장에서 볼때, 월권으로 임명한 직책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런 논의와는 별개로, 익군장군이라는 장군직이 설치된 뒤, 그 의미가 근위군의 장군 내지는 상당한 권위를 지닌 장군으로 변해갔을 공산은 충분하다. 익군교위라는 유사 직책이 있고(한자도 똑같으니), 나중 일이지만 촉한 말년에 곽익이 익군장군으로 임명되는데, 호군 내강둔부이도독(내강도독?)과 영창태수로 임명된 뒤에 감군/익군장군으로 '승진'하고 다시 건녕태수를 겸임하는 것으로 나온다. 촉 당대에 이미 익군장군 자체가 결코 한직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익주가 평정된 뒤 당시 사람들이 의논하여 성도의 옥사(屋舍)와 성 바깥의 과수원, 뽕밭을 제장들에게 나누어주고자 했다. 조운이 이를 반대하며 말했다. "( 한무제가 집을 하사하자) 곽거병 흉노를 아직 멸하지 못했으니 집이 쓸모없다고 하였는데 또한 나라의 적이 비단 흉노만이 아니니 아직 안락을 구해서는 안됩니다. 천하가 모두 평정될 때를 기다려(須天下都定), 각자 고향로 되돌아가(各反桑梓)[23] 본래 땅에서 농사짓는 것이 마땅합니다. 익주(益州)의 인민(人民)들은 처음 전란을 겪었으니 논밭과 집들을 모두 되돌려주고 이제 이에 안거(安居)하며 생업에 복귀하게 한 뒤에 부역하게 하고 조(調)를 거둔다면 그들의 환심(歡心)을 얻을 것입니다." 이에 선주가 이를 따랐다. - 조운별전

익주가 평정된 이후에 조운이 중요한 회의에 참석해 발언권을 강력하게 어필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여기서 조운은 주목할 만하게도 성도의 토지를 하사하는 문제와 관련해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여 그 뜻을 관철시킬 정도로 영향력이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발언권은 중요한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 대다수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뒤집을 수 있을 만큼의 발언권이다. 익주 평정 후 성도 내의 주택, 과수원, 뽕밭을 제장들에게 나누어주려는 회의에서 조운은 반대하며, 유비가 이를 따르면서 마무리 된다. 이 일화는 보통 조운의 강직함과 공정함, 대국적인 안목[24], 사리사욕과 거리가 먼 성격 등과 관련되어 인용되곤 하지만, 사실 조운이 가진 엄청난 입지와 실질적인 영향력을 보여준다. 회의 자체가 제장들에게 상으로 나누어주려는 회의였고, 자치통감에 의하면 논의에 참여한 사람들 중 대다수가 그것을 상으로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조운의 발언은 반대라는 표현이 사용될 정도로 대부분의 제장들의 의견과는 정면으로 배치되었을 것이며, 이는 실제로 그 혜택을 볼 다른 회의 참가자들에게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유비는 조운의 주장을 받아들이는데, 이는 분명 조운의 발언권에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25]

조금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보면, 익주의 중심지인 성도의 주택, 그리고 과수원, 뽕밭을 나누어주는 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사안인 것이다. 이것 자체가 주거지, 토지, 경제인데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특히 뽕나무는 당시에 익주를 부자 동네로 만들어주는, 부의 근원이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일단 뽕나무의 열매는 오디라고 하여 식용으로 쓰이며, 약재로도 쓰인다. 또 나무는 가구 재료로 활용된다. 가장 중요한 쓰임새로 잎이 누에의 사료로 사용되는데, 비단이 핵심 수출품이었던 익주 입장에서 봤을 때 뽕나무가 부의 근원이라는 말은 결코 과언이 아니다. 뽕나무는 그야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버릴 게 없이 모두 활용되는 촉 경제의 근간이었다.[26] 이것을 익주의 백성들에게서 빼앗아 공을 세운 제장들에게 나누어 줄 경우 유비의 중신들이 촉의 지주이면서 동시에 재벌이 되는 것인데, 이는 익주의 경제 체제를 흔들어버릴 수 있는 문제였다. 유비의 신하들에게 있어서 사리를 채우는게 나쁠 것이 없으니 대부분 동조했다는 건 이상할 것이 없는 문제다.[27] 다시 말하지만 조운은 이런 상황에서 홀로 정면으로 배치되는 의견을 내고 군주의 최종 동의를 얻어냈을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과 발언권,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2.7. 한중 공방전

하후연이 패하자 조공이 와서 한중 땅을 다투었고 북산(北山) 아래에 군량(米)을 운반하여 수천만 포대에 달했다. 황충이 가히 이를 탈취할 수 있다 하였고 조운의 병력이 황충을 수행하여[28] 쌀을 탈취하려 했다.

황충이 기한을 넘겨도 돌아오지 않자 조운은 수십기를 거느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위(圍)를 나서 상황을 살펴보러 갔다. 곧 조조가 거병하여, 조운은 조조의 전열에 공격받았다. 이에 싸우는데, 적의 대군이 도착해 핍박받는 형세가 되자, 적에게 돌진하여 한편으론 싸우고 한편으론 물러섰다. 조조군이 패했다가 다시 합치자, 조운이 이를 파하고 위로 급히 되돌아왔다.

장수 장저가 부상당하자 조운이 다시 말을 달려 영(營)으로 가 장저를 맞이했다. 조조의 군사가 이를 추격하여 위에 이르자 위 안에 있던 면양장 장익이 문을 닫고 막으려 했다. 그러나 조운이 영 안으로 들어와 문을 활짝 열고 싸우지 않는 것처럼 군기를 눕히고 북을 멈추었다. 조조의 군사는 조운이 복병을 뒀을까 의심하여 물러났다. 조운이 하늘을 뒤흔들 듯 북을 올리며 뒤에서 조조의 군사들에게 융노를 쏘아대니 조조의 군사가 놀라고 어지러워 자기들끼리 서로 짓밟고 한수에 떨어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선주가 다음날 아침 조운의 영위(營圍)로 친히 와서 전날 싸운 곳을 둘러보고 말했다. "자룡(子龍)은 일신이 모두 담덩어리(膽)로다." 음악과 술자리를 베풀어 저녁까지 이어졌고, 군중(軍中)에서는 조운을 일컬어 호위장군(虎威將軍)이라 했다. - 조운별전

이후 한중 공방전에서는 황충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기록에서 처럼 황충이 적의 군량을 탈취하기 위해 나갔으나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자 상황을 보러 경무장한 수십 기의 기병만 이끌고 나간다. 그런데 이 때 갑작스럽게 조조의 대군과 맞닥뜨리게 된다. 근데 이 상황에서 조운은 적진으로 돌진하여 싸운다. 경무장한 수십 기의 기병이 입힐 수 있는 피해가 한정적일테니, 경기병 특유의 게릴라 형식으로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며 적의 진형을 헤집어 놓는 정도였을 것이다. 실제 묘사도 '한편으론 싸우고 한편으론 물러섰다.'라고 적어 조운이 능수능란하게 기병을 치고 빠지는 식으로 운용해 조조군에 돌격하여 대형을 흐트리고 정신차릴만하면 다시 공격하면서 여기저기서 기동전을 펼쳐 조조군을 당황하게 하고 뜻밖에 돌진에 당황한 조조군을 상대로 아군까지 구출하면서 진영으로 돌아가기까지 하며 선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본디 조운이 유비를 수종하던 기병대장 출신인걸 감안하면 납득이 가는 묘사이다.[29]

이후 조운의 기병대를 잡으려고 조조군이 다시 추격했는데 조운은 오히려 공성계를 펼쳐 후퇴하려는 조조군을 상대로 화살비를 쏟아부어 조조군을 대파하며 물리쳤다. 조운은 이 일로 진영 내에서 호위장군(호랑이의 위세를 가진 장군)으로 불렸으며, 유비는 몸소 그곳을 시찰하며 조운이 일신시담(一身是膽)너는 온몸이 당(糖)떵어리다!!하다고 했다. 이는 조운의 대담함과 지략, 용맹함을 보여주는 기록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단 이 일화는 별전류의 기록이 그렇듯 장익전과 황충전에 모두 실려있지 않아 교차 기록이 전혀 되질 않기에 신빙성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별전류의 특성 상 조조의 일반적인 군세를 조조의 대군이라 과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진을 지키고 있던게 장익이라면 이 공은 매우 큰 공일텐데[30] 장익전에서는 찾아볼 수 도 없으며 애초에 한중전 참여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한중 공방전 자체가 조조가 참여한 이후 유비가 요충지서 버티고 있는 양상이었으며, 조조의 군량미를 옮기는 과정에서 언급된 조조의 대군은 조조의 본대가 아닐 확률도 있다. 사실 대군이라는 것도 당시 조운이 이끌고 나갔던 수십 기의 병력에 비해 대군이라는 표현인데, 그 규모가 수백 내지는 수천에 불과한 규모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사실 설령 수천이라고 해도 그걸 일거에 쓸어버린건 분명 대공이고 유비가 대공으로 보고 주연을 베풀었다든가 어둠속에서 급작스러운 기습으로 대군이 무너지는 경우는 종종 발생하기에 꼭 그렇게만은 볼 수 없다.

또한 이 일화는 사마광의 《 자치통감》에서도 분명 기재하고 있으며 자치통감에 주석을 단 호삼성도 유비의 말에 주석을 달아 조운의 담력이 커서 고립된 군사로 조조의 대군을 대적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적었다. 별전의 내용을 신뢰했다는 의미이다. 물론 군량 수천만 포대라든가 장익이나 장저, 면양장에 대해서는 내용을 삭제했지만[31], 황충을 구하러 갔다는 내용은 분명 기재되어 있다. 황충전에도 실려있지 않지만, 별전이나 자치통감에서도 조운이 황충을 구하러 나갔다고만 되어 있지, 황충을 실제로 구했다거나 중간에 황충과 만나 합쳤다거나 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즉 황충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이 경우 황충전에 굳이 기록될 필요는 없다. 별전의 내용이 사실이라 쳐도 황충의 행동은 수많은 군사 작전의 일부에 불과할테고,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고 보여지니 굳이 기록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연의에선 이 부분을 조운이 적진 깊숙히 들어가 용맹을 과시한 황충이 위험하다고 여겨 구원했다고 각색해 두 장군의 용맹을 더욱 돋보이는 에피소드로 만들었다.

2.8. 이릉대전

손권이 형주를 침범하자 선주는 대노하여 정벌하려 했다. 조운이 간하여 말했다. "국적은 손권이 아니고 조조입니다. 먼저 위를 멸하고 오는 스스로 항복하게 해야 합니다. 조조가 죽었지만 아들 조비가 한나라를 찬탈했습니다. 마땅히 민심을 따라 속히 관중을 도모하여 황하와 위수를 점거한다면 흉악한 역적을 토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관동의 뜻있는 선비들은 반드시 군량을 가지고 말을 달려와서 대왕을 맞이할 것입니다. 위를 놔두고 먼저 오나라와 싸우시면 아니되옵니다. 오와 싸우기 위해 병력을 일으켜 교전한다면 싸움은 간단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선주는 듣지 않고 동쪽(오)을 정벌하러 진격했는데 조운은 강주를 감독하게 했다. 선주가 자귀에서 패하자 조운은 병사들을 이끌고 영안에 이르렀지만 오의 군대는 이미 물러난 뒤였다. - 조운별전

손권에 의해 관우가 죽고 형주를 빼앗기자 분노한 유비는 오나라를 치러 간다. 조운은 유비 옆에서 직접 동오 정벌을 만류할 수 있을 정도로 측근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조운은 여러 이유를 대며 유비를 만류한다. 한실복권이라는 대의를 내세우는 유비는 위를 멸하는 것이 우선해야 할 과제고, 조비의 찬탈 이후 아직 조위가 민심을 진정시키지 못한 틈에 위를 치면 유비의 위명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서북 지방의 호족, 백성들의 큰 호응을 얻을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32] 이 역시 조운이 가진 대국적인 안목과 정세에 대한 냉철한 판단력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거기에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진, 매우 분노한 군주에게 직언하는 배짱도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평생을 모셔 일한 군주의 불호령과 같은 결정에도, 이치에서 벗어날 경우 단호하게 안됩니다!를 외칠 수 있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인 것이다.

그러나 유비는 원정을 감행하고, 조운으로 하여금 강주를 감독하며 후방을 맡게 한다.[33] 이 강주는 성도와 형주를 잇는 길이었기 때문에, 보급과 후방 안정화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제갈량이 북벌에서 패배하지 않았음에도 여러 차례 군을 물려야 했던 것이 주로 군량과 보급 문제였음을 감안하면 조운이 후방인 강주에 머무르며 진수했다고 하여 결코 중요도가 낮은 것이 아니다.[34] 게다가 단순한 보급 차원의 후방이 아니라, 유사시 합류하여 참전이 가능할 정도로 규모와 전투력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실제로 합류하기도 했다.

다만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익주 평정 후 비관이 강주도독이었으며 223년 이후에는 이복이 강주독을 맡았기에 실제로 조운이 강주도독으로 있으며 실권을 가졌다고 보기는 매우 힘들다.[35] 조운별전에서 독강주를 맡았다는 내용이 계한보신찬과 충돌하지만 이는 이릉전을 지원하기 위한 일시적인 임시 군사감독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2.9. 남만 정벌

건흥 원년(223년), 중호군(中護軍),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임명하고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했다가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옮겼다. - 조운전

유선 즉위 후에는 중호군, 정남장군에 임명되었고 영창정후에 봉해진다. 유비가 죽었을때 탁고대신 이엄은 중도호가 되었고 통내외군사로서 영안에 남아 주둔했다. 유비는 자신의 병사들을 조운에게 맡긴 상황에서, 죽으면서 이엄에게 전체 군권을 맡겼다. 당시 이엄이 중호군/통내외군사로 조운보다 위에 있으나, 영안은 유비의 패잔병과 조운의 남은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는 오정벌에 나선 군대, 유비가 거느린 촉의 총 병권 중 온전한 후방 병력은 온전히 조운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갈량은 남중 정벌을 위해, 조운을 중호군으로 임명하여 역할 분배를 시키고 정남장군으로 임명했다.

여기서 중호군은 호군의 일종으로 고급 군대 요직이다. 중령군, 중도호 등과 함께 금군을 지휘하고, 무관을 선발하며, 무장들을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중호군은 중앙군의 성향이 매우 강하며, 무관을 선발하고 무장들을 감독했기 때문에 막강한 군권을 행사하는 핵심적인 요직이었다. 촉의 호군 제도는 동한의 대장군 제도를 답습했는데, 대장군 출정시 중호군 1인을 두었다고 한다. 이 당시 대장군 역할은 당연하게도 남만 정벌과 북벌의 총책임자였던 제갈량이었으므로 조운은 제갈량을 수행하며, 원정군 내에서 중앙군 역할을 하며 군권과 인사권을 행사한 것이다. 짬밥과 경력을 생각해보면 표현 그대로 당시 군중에서는 최고참일테니 무리는 아닐 것이다. 조운이 이릉 이후 잔병과 온전한 후방 병력을 감독하고 있을 때, 제갈량은 조운을 남중 정벌로 데리고 가면서 중호군, 정남장군으로 삼아 군부의 핵심 요원이 되게 한 것이다.

정남장군은 국가의 남쪽 방면의 정벌 사업이 필요할 때 설치되는 장군직이다. 촉의 남쪽이라 하면 남만인데, 남만에서 일어난 반란을 제갈량 주도 하에 진압했으므로 정남장군(남쪽 방면의 정벌사업을 주관하는 장군직)인 조운이 제갈량을 수행하여 참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기록에서는 확실하게 남만 정벌에 참여한 사람이 제갈량과 마속 뿐이라서, 실제로 조운이 전방에서 종군했는지, 아니면 살짝 후방에서 백업했을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물론 정남장군이기 때문에 실제 통수권자는 제갈량이겠지만 명목상으로는 정남장군인 조운 역시 주장(主將)이고, 당시 촉이 조운 같은 노련한 구장을 놀게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걸 감안하면 희박하지만 종군했을 가능성이 있다.[36]

이후 정남장군에서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옮기는데, 이것이 226년이므로 시기상으로 남만 정벌이 끝난 뒤 보직을 옮긴 것이다. 정과 진의 차이는 정벌 사업이 필요할 때 정O장군을 임명하며, 진수(鎭守)하는 것이 우선시 될 때에는 진O장군을 임명한다. 사진장군보다 사정장군이 높은 것처럼 서열상의 고하는 있지만 애시당초 필요에 따라 설치하기 때문에 고하는 큰 의미 없다. 남만 정벌이 필요했기에 정남장군이었고, 동쪽 방면을 진수하는 것이 목표이기에 진동장군으로 옮긴 것이다. 촉의 동쪽은 오나라였고, 이 당시 촉은 오와 동맹을 맺었기에 정벌 사업을 주관하는 정동장군을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2.10. 제갈량의 1차 북벌

한편 유비 사후 군권은 중도호 통내외군사인 이엄이 가지고 있었고 총군권을 가진자는 이엄이나, 중호군 조운으로 역할분배가 되었었다. 제갈량은 북벌에 나서면서 조운은 데려가고 이엄은 강주로 옮긴다. 이엄이 있던 영안에는 호군 진도를 남겨서 이엄에게 통솔하도록 했다. 2인자인 이엄에게는 중요한 요충지인 강주를 맡겼다고 할 수 있다.

2.10.1. 전투 과정과 퇴각, 전후 처리

이후 제갈량이 기산에 출전하였을 때도 동행하였다. 제갈량은 출군하여 야곡도(斜谷道)를 거쳐 우부풍 미현을 점령할 것이라고 널리 헛소문을 내고 본인은 그 반대면인 기산으로 움직인 동시에 조운에게 등지와 함께 의병(疑兵), 즉 적을 속이기 위한 허위(기만) 부대로서 기곡으로 출진하여 가서막게 했다. 조운이 장안 등 옹주의 동쪽을 노리는 움직임을 취하자 조진이 군을 일으켜(제갈량전, 화양국지) 막게 했고 대군을 보내 조운과 등지를 상대했다.(조운전) 즉 조운이 기곡에서 조진의 대군 상대로 시간을 끄는 동안 제갈량의 본대가 군사 배치를 마치고 기산을 제압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조운과 등지에게 촉한의 북벌군 상당수가 주어졌을것인데, 조운과 등지의 병력이 위나라 대장군 조진이 보낸 대군보다 약해서 패할수 밖에 없었다는 조운전의 기록을 보아 북벌군 중에서도 2진, 3진급 많은 수의 약한 병력이 주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위나라 대장군 조진이 촉군이 공격하려는 곳은 미현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주력 대군을 여기다 투입할 정도로 낚일려면 조운의 이름값과 더불어[37] 그를 뒷받침할만 많은 수의 병력이 일단은 요구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진은 분명 대군을 파견했지만, 기곡에서 병력이 적보다 많았다는 제갈량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 기곡의 병력은 유사시 한중과 기타 지역을 방어하는 병력으로도 사용되어야 했을테니 상당한 병력이 조운에게 맡겨졌을 것이고 제갈량 본대가 이끌던 병력은 대비가 안 되어 있는 농서를 공격하여 압도할 수 있는 정예병력들을 주로 데리고 갔을 공산이 크다.

이후 기산에 간 제갈량에게 3군이 넘어가자 위 황제 조예는 관우(關右, 함곡관 서쪽)의 제군들을 대장군 조진으로 하여금 총감독하게 하여(도독관우제군사) 일제히 진군시켰고(명제기) 조진을 직접 파견해 미현에 진을 치게 했다(조진전), 이는 이 시점까지 조운과 등지의 기곡군을 상대로 위나라가 증원을 해야 했을 정도로 아직 조운이 버티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前趙子龍退軍,燒壞赤崖以北閣道,緣谷百餘里,其閣梁一頭入山腹,其一頭立柱于水中。今水大而急,不得安柱,此其窮極,不可强也,(조운이 퇴군하며 적애 이북의 잔도를 불태운것이 백여리나 되며 지금 물이 많아 기둥을 세울 방법이 없다는 내용) - 수경주
조운과 등지의 병사는 약하고 적은 강하여 기곡에서 패했으나, 군사들을 거두어 굳게 지켰으므로 대패에 이르지는 않았다. 군을 물린 후 진군장군으로 강등되었다. - 조운전
제갈량이 말했다. "가정의 군이 퇴각할 때는 병장들을 서로 수습하지 못했는데 기곡군이 퇴각할 때는 병장이 처음처럼 잃은 바가 없으니 어찌된 까닭이요?" 등지가 말했다. "조운이 몸소 뒤를 끊고 군자와 집물조차 함부로 버린 일이 없으니 병장들을 잃을 까닭이 없었습니다."

조운의 군자(軍資)에 여유분의 비단이 있어 제갈량이 장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니 조운이 말했다. "군사에 이로움이 없었는데(이기지 못했는데) 어찌 하사품이 있을 수 있습니까? 청컨대 그 물건들은 모두 적안(赤岸)의 부고(府庫)에 넣어두었다 10월이 되길 기다려 겨울 하사품으로 삼으십시오." 제갈량이 이를 매우 옳게 여겼다. - 조운별전
"대군이 기산과 기곡에 이르러 모두 적보다 수가 많았는데, 이를 능히 파하지 못하고 격파되었으니 이 과실은 군사가 적은 것에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한 사람(제갈량 본인)에게 있다" - 한진춘추
"신이 재주가 없는데도 외람되게 과분한 자리를 차지하여 직접 모월을 잡고 삼군을 독려했으나, 능히 규율을 가르치지 못하고 법을 밝히지 못하고 일에 임해 두려워하여, 가정에서는 명을 어기는 허물을 범하고 기곡에서는 경계하지 못한 실책을 범했으니, 그 허물은 모두 신이 임무를 준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 제갈량전
"제갈량은 참군인 양양출신의 마속, 비장군인 파서출신의 왕평 및 장목, 이성, 황습등을 선봉으로 하였으나, 제갈량의 지시를 거슬렀으므로 장합에게 격파당하였다. 왕평은 무리를 모아 퇴각의 후미에 섰다. 조운, 등지 또한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亦不利)" - 화양국지 유후주지

그리고 이 싸움에서 조운은 패한다. 중국어로 실리(失利)라는 말은 단순히 '불리하다'라는 뜻보다는 '시합이나 싸움에서 패하다'[38]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다만 화양국지에서는 조운이 맡은 기곡전선에 대해 역불리(亦不利)라는 말을 써서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역시 불리했다, 성공하지 못했다'라는 의미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조운은 조운군에 묶여 있다가 후퇴하던 조운군을 추격하는 조진군을 상대로 손수 뒤를 막아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채로 적애 북쪽 백리 잔도를 불태우고 후퇴한다. 통로인 잔도를 불태워버렸으니 조운군은 피해도 적었으나 다시 잔도를 공사해야했다. 그리고 조운에 묶여있던 조진군은 자유로워졌고 조진은 직접 북쪽에 있는 월지성까지 올라가서 촉에 호응한 반란군을 진압했다.

조운전의 "조운과 등지의 병사는 약하고 적은 강하여(雲,芝兵弱敵彊)"라는 문구 때문에 후대의 창작물에서는 병력에서도 열세인 전력으로 분투했다는 식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한진춘추에서는 오히려 기곡에서 촉군의 병사가 더 많았다는 서술이 있다. 모순은 아니고 말그대로 조운의 군사가 수만 많은 미끼부대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둔전까지 하면서 허위 선전을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애초에 기록에서는 조운의 부대를 의병(疑兵), 즉 적을 속이기 위한 허위(기만) 부대로 표현한다. 게다가 조운과 등지의 병사가 약했고, 상대는 강했다라는 기록을 보자면 군사의 수이든 질이든 확실히 무게감이 차이가 있었고, 제갈량이 조운의 전후 수습에 대해서 고평가 한 것을 보면 불리한 상황에서 분투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큰 피해는 없이 후퇴했지만 잔도를 태웠다는 점이 작용한건지 이후 논공행상에서 강등을 당했다.[39]

2.11. 죽음

제갈량의 1차 북벌이 끝나고 그 이듬해인 229년에 사망한다. 아무래도 늙은 나이에 너무 무리해서 골병 들어 죽은 듯.[40] 그래도 중국역사에 나오는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전장에서 싸우다 피 흘려 죽거나 적에게 붙잡혀 참수되거나 부하에게 암살 당하는 등의 흉살은 아니고 자연사하여 비교적 잘 죽은 듯하다.[41]그리고 조운의 사망을 언급해서 후출사표 위작설이 제기되는데 228년작 후출사표에 229년의 조운의 사망이 언급되어 있다.

죽고 수년이 지나고 나서야 시호를 받았다.[42] 별전을 보면, 유선이 조운은 유비를 따르면서 공적이 컸고 자신이 아기였을 적에 구해 줬으니 조운의 합당한 시호에 관해 의논하도록 했다.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조운의 시호를 지어다가 붙인 사람이 바로 강유로 강유는 조운의 시호를 제정할 때 당양에서의 일을 조운의 대표 일화로 소개한다. 강유는 시법을 살펴 "유현자혜(柔賢慈惠)를 순(順)이라 하고 집사유반(執事有班)을 평(平)이라 하며 극정화란(克定禍亂)을 평(平)이라 하니 조운의 시호로는 순평후(順平侯)가 마땅합니다."라고 했다.[43]

시호법에 따르면 순(順)은 성품에 대한 찬양이다.
慈仁和民(자인화민) : 자비롭고 어질며 백성들에게 온화함.
慈和遍服(자화편복) : 자비롭고 온화하며 두루 복종시킴.
和比於理(화비어리) : 온화한 것이 이치에 비길만 함.
평(平)은 일처리에 있어 공정함을 뜻한다.
法度皆理(법도개리) : 법도가 다 이치에 맞음.
有剛治記(유강치기) : 정치를 행함에 강직하고 기강이 있음.
執事有制(집사유제) : 일을 맡아서 행함에 짜임새가 있음.
治而無省(치이무생) : 다스림에 허물이 없음.
조운의 시호는 순평후(順平侯)로 맹장으로 널리 알려진 무관임에도 조운은 인격과 성품과 공정한 태도로 높게 평가받았다.

2.11.1. 생몰년과 나이

사서에선 사망 년도는 기록되어 있지만 생년이 밝혀지지 않으므로, 연의와 대부분의 삼국지 관련 문학 작품에서 조운은 유비와 관우보다 나이가 어리게 묘사되고, 제갈량 마초보다 많게 그려졌었다.

현재 사천성 성도시 대읍현에 가면 조운의 묘가 있다. 그 묘비에는 조운(趙雲)이 한 환제 영흥 원년(153년) 출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이 묘비에 따르면 유비보다 8살이나 더 많단 얘기. 하지만 당대에 가까운 연대를 살아갔던 인물이자 조운의 아들 조광과 같은 시기 같은 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했던 진수가 생년조차 표기 못할 정도로 이미 조운의 생년은 오래 전에 망각되었으며, 묘비는 청나라 강희제 연간에 세워지고 문화대혁명 때 파괴된 것을 1996년에 다시 건립하여 세운 것이다. 따라서 비문의 기록은 삼국지연의나 민간전승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사학계에서는 그를 170 ~ 171년 생으로 추정하고 있다.[44]

조운의 행적을 세세하게 기록한 조운별전에 생년에 대한 기록이 없었거나 혹은 기록했지만 배송지가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생각해 기록하지 않은 건지는 불명이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6편까지 조운이 150년대생이라고 설정하다가[45] 7편부터는 연의상 장비의 출생년인 167년보다 1년 뒤인 168년생으로 설정하여 유지하고 있다.

3. 삼국지연의

연의에서는 처음에 원소군에 임관하였으나, 원소의 그릇이 작아 공손찬 아래로 들어간다고 나온다. 이후 행적의 큰 줄기는 따르나 유비군을 주인공 집단으로 묘사하다보니 정사에 없는 부분들이 대거 창작되었다. 특히나 관우, 장비 이상으로 결투 묘사가 많아 수많은 가공인물의 인생을 끝장냈다. 주군이 위기에 빠졌을 때 구해주는 멋진 역할을 자주 맡는다. 공손찬 휘하로 들어갈때는 위기에 빠진 공손찬을 구하면서 문추와 일대일 싸움을 벌여 쫓아낸다.

연의에서는 조운이 잘생겼다는 설정인데[46], <조운별전>에서는 조운의 외모를 '신장이 8척에 용모가 웅위하고'로 기록되어 있다.

연의에서는 7회에서 다룬 계교 전투 때 처음 등장하나, 유비군 합류가 더 늦춰져서 유비군에 합류하는 시기가 유비가 유표에게 의탁할 시기인 31회 시점으로 변경되었고, 첫 만남과 재회의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었다. 장판파에서는 아이까지 데리고 있으면서 홀로 무쌍난무를 찍는 조운을 위한 에피소드다. 거기다 더해 41회에선 기껏 구해내온 아두를 유비가 던지며 조운에게 말하길 "아이는 또 낳을 수 있지만 그대 같은 장수는 또 구할 수 없다."라면서 조운과 유비의 의리를 부각시킨다.

정사에서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이 사방장군에 임명되는데 여기서 조운은 빠져있다. 연의에서는 사방장군에 조운까지 포함되어 오호대장군이 된다.

고람은 원소군 장수였으나 관도대전 중 장합과 함께 조조에게 투항했다. 정사에서 이 사람은 이것으로 등장 끝. 연의에서는 31회 때 여남에서 조운에게 죽는다.

84회에선 이릉에서 대패한 유비를 구하기도 했는데 주연을 죽인 것이 바로 이때의 일이다. 조운이 오의 명장 중 하나인 주연을 죽이는데 이게 문제다. 이릉대전 이후의 오나라 분량 일부까지 죽여버렸다. 오나라팬들과 주연팬들의 천하의 둘도 없는 원수. 특히 국의, 고람은 일기토 묘사를 넣어서 확실히 버프캐라는 느낌을 주는데 주연은 그런 묘사도 없는 걸 보면 나관중이 주연까인 듯하다.

92회에서는 등지와 함께 출전한 뒤 한덕과 그의 다섯 아들을 베고, 정무의 복병에 걸려 고전했지만 관흥 장포가 지원군으로 도착해서 무사했다. 이후 93회에선 강유에게 패배했고 95회에선 후퇴하는 촉군을 엄호했으며, 97회 때 제갈량이 그의 부고를 전해듣고 슬퍼한다.

물론 이런 사건들은 전부 허구다. 이밖에도 상산초옹 에피소드, 북벌에서의 제갈량과의 환상 듀오, 세심하고 꼼꼼한 이미지, 문앙의 조운재림 등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조운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다.

관우와 비교하면서 조운과 엮이면 손해라는 인식이 있는데 딱히 그런 것도 없다. 특히 안량, 문추가 버프받는 건 관우만의 문제가 아니라 조조군 장수들 때문인데, 연의 상으로 안량, 문추가 조조군 장수들만으로 처리가능한 쩌리라면 굳이 관우를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서 버프를 받는 거다. 그리고 정사에서도 안량은 정말로 관우 아니면 잡기 드럽게 힘든 괴수였을 가능성이 크다.[47]

유비 사후 촉의 최고참 장수가 되고 나서 남만 정벌때 위연과 같이 멋대로 몰래 나가 금환삼결을 벤다든가(87회) 북벌때 남으라 하니 뒷방 늙은이 취급하냐며 제갈량에게 항명을 해 어거지로 선봉을 따내는 등(97회)[48] 의외로 호기를 부리는 장면도 나온다.

4. 평가

황충, 조운은 굳세고 사납고 씩씩하고 용맹하여 아울러 조아(爪牙-발톱과 어금니. 용맹하고 충직한 무장을 비유)가 되었으니 (灌), (滕)의 무리로다.
진수《정사 삼국지》
정남장군(조운)은 성정이 후덕하고, 정서장군( 진도)은 충성스럽고 강직하다. 당시 선발된 병사를 지휘하여 맹장으로서 공훈을 날렸다.
양희《계한보신찬》
후대에 와서 가장 인정받는 부분은 용맹과 충성심. 멀리 갈 것도 없이 정사를 편찬한 진수의 평가가 충직하고 용맹했다는 것이다. 별전까지 보면 일신의 무력뿐만 아니라 공성계를 써서 조조군을 격퇴시키는 등 전술적 임기응변도 갖춘 용장이었다. 일신시담(一身是膽), 언기식고(偃旗息鼓) 등의 고사성어가 이 조운별전의 공성계 일화에서 유래했다.

단순히 무력만 뛰어난 맹장이 아니라 정치적 식견과 판단력도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관우의 죽음에 분노해 오나라를 치려던 유비를 말리거나 피폐해진 백성들의 땅을 장수들에게 나눠주자는 의견을 반대하고 나섰던 것을 보면 대국적인 안목도 출중한 장수였다. 이러한 강직한 성품 덕분에 유비는 그를 항상 측근으로 두고 신뢰했으며, 진수는 조운을 평할 때 '유비의 조아(爪牙)'라고 칭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당대와 후대를 가리지 않고 능력과 인격의 평가가 모두 높은 덕장으로서 후대에는 제갈량, 관우와 함께 역대제왕묘에 공신 자격으로 배향되었고 당대에는 상술한 진수의 평가와 계한보신찬의 평가만 보아도 진수는 용맹함에 중점을, 계한보신찬에서는 조운의 성정과 후덕함에 중점을 두며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유비는 조운의 용맹함을 고평가해 '일신시담'이라며 감탄했고, 촉 진영에서도 조운에 대해 호랑이 같은 위세를 가졌다고 평가했다.

관우, 장비, 위연 같은 촉나라의 손꼽히는 명장들도 인물됨과 성격의 흠을 두고 크게 비판했던 진수가 조운과 황충만은 한고조 유방의 최측근이자 개국공신이었던 관영과 하후영에 빗대어 일말의 비난도 없이 매우 후하게 평가했던 걸 보면 인품이 무척이나 훌륭했다고 볼 수 있다. 촉의 신하인 양희의 계한보신찬에서도 조운은 성정이 후덕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무장임에도 인격과 성품이 빛나는 케이스. 즉, 조운은 장수의 기본 덕목인 용맹과 냉철함을 겸비한 용장임과 동시에 그 외의 분야에서도 흠잡을 곳 없는 인품과 능력을 가진 인물이란 소리다. 이는 자기관리가 매우 철저하단 뜻이기도 하며 곧은 인간성까지 겸비하여 당대의 뛰어난 인재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관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유비나 제갈량 같은 실세 곁에서 최측근으로 있었던 만큼 어깨에 힘이 좀 들어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음에도 당대의 평가, 후대 사람인 진수의 견해, 사서에 보이는 행적 모두 조운의 인간성에 대한 지적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인격과 성품, 공정함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높다. 그만큼 조운은 삼가고 겸손하며 공정하고 올곧은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것이다.[49]

4.1. 지휘 능력

현재까지 나온 사료에 따르면 조운이 지휘관으로서 한 전선을 맡은 것은 익주정벌전과 1차 북벌의 기곡전 당시이다. 익주정벌전에서는, 제갈량의 형주 지원군 중 조운 휘하 군대가 강주에서부터 북상하며 단독으로 강양군 일대를 평정하였다. 제갈량의 형주 지원군 활약을 과소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만약 제갈량, 장비와 조운이 이끄는 두 개 군대가 양쪽에서 변방을 평정하지 않았다면 유비는 후방으로부터 적들에게 고립될 수도 있었다.

기곡전에서는, 정예병을 차출한 후 남은 병사로 편성한 의군을 이끌고 제갈량의 본대가 작전에 성공할 때까지 적의 시선을 끌어 발목을 잡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가정에서 어떤 등산가가 대형 병크를 터뜨린 후 제갈량의 본대가 퇴각하는 동안 위나라 조진의 주력군을 기곡에 붙잡아두는 임무도 완수했으나, 패전의 피해가 너무 커 의군을 이끈 장수임에도 불구하고 책임추궁을 당했야 했다. 정사에서 조운은 퇴각하는 와중에도 마지막까지 후미에 서서 적과 맞섬으로써 병력을 최대한 온존했다고 하는데, 책임추궁을 당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조운의 직책과 위상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조운은 패전 상황에 상을 받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었으니 억울하다고 느끼지도 않았겠지만.

주로 지휘관으로서의 조운을 평가할 때 익주정벌보단 기곡전투를 참고한다. 이유야 어쨌든 조운은 패장이기 때문에 이와 관련해 더 자세한 사료가 나오지 않는 이상 무분별하게 고평가받기는 힘들지만, 상술했듯 조운 입장에선 변호받을 여지가 꽤 있다.

첫째, 북벌 당시 촉군 최고참급 인물이었던 조운이 주력부대에서 제외되고 미끼부대를 맡은 정황을 살필 필요가 있다. 일단 위나라에 비해 인재가 부족한 촉나라 입장에서는 의군을 맡아 적을 기만할 인재가 조운밖에 없었다. 게다가 미현 지역에서 정예도 아닌 군으로 제갈량의 본대로부터 위군의 시선을 돌리려면 네임드 장수가 필요했는데, 이런 효과를 얻으려면 명성도 자자하고 오호대장군 중 유일하게 남은 조운이 거의 유일한 선택이었다.

둘째, 조운은 패전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도 군대의 와해없이 본국으로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애초에 가정이 뜷린 순간부터 1차 북벌계획은 사실상 실패였고, 만에 하나 조운이 어떻게 이기더라도 전략적으로 얻을 게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운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책은 지더라도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는 것이었고 조운은 사령관임에도 후미 방어에 몸소 나서면서 실제로 이 목적을 달성했다.

셋째, 조운은 제갈량의 본대가 후퇴할 때까지 조진군을 끝까지 붙잡아놓는 임무도 성공했다. 위나라 대장군이었던 조진은 조운이 버티고 있는 미현으로 직접 관중의 병력을 증원군으로 이끌고 가야 했고, 조운을 상대하는 것 이외에 다른 작전을 펼치기는 어려웠다. 정사 조진전에서 마속의 패배 이후에야 조진이 안정군으로 이동했다고 나오며, 자치통감에서 조운의 후퇴 이후에야 조진이 다른 곳으로 지원을 가는 내용이 나온다. 이렇게 조운이 의군만으로 적국의 대장군이자 도독관우제군사인 조진의 병력들을 감당해낸 걸 보면 지휘관으로서 능력도 상당히 높았다고 할 수 있다.

넷째, 조운의 특기 분야는 애초에 야전군 사령관이 아니었다. 조운은 야전군 지휘보단 황궁과 국경을 수비하고 유비나 제갈량의 곁에서 일종의 친위대장 역할로 활약했다. 유비와 제갈량이 조운에게 맡긴 일들을 보면, 조운의 주요 역할은 야전에서의 작전 지휘가 아니라 근위대를 이끌고 유비를 직접 수행하거나, 정예병들을 선발해 군대를 관리감독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전투에 투입되더라도 일군의 지휘관보다는 총사령관인 유비, 제갈량의 직속 돌격대장이나, 별동대, 후방 군정 등을 주로 맡았다. 그런데도 목숨걸고 오합지졸의 군대를 이끌어 위나라 대군의 눈앞에서 미끼 역할로 버텼던 걸 보면 지휘관 주제에 무능했다고 욕먹을 게 아니라 자신의 특기 분야가 아님에도 임무를 꽤 잘 수행했다고 호평받아야 할 일이다.

5. 가족 관계

조운의 아내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번씨와는 혼인은 거절했고 마초의 여동생 마운록이란 아내는 근대에 지어진 소설 《 반삼국지》에서 나오는 오리지널 캐릭터라서 실존인물이 아니다. 손연아(孫軟児)도 민간 설화에서만 나오는 조운의 아내라서 마찬가지로 실존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아들이 두 명 있었다. 장남 조통이 후사를 이었고 관직이 호분중랑(虎賁中郎), 독행령군(督行領軍)에 이르렀다. 차남 조광은 확실히 무장으로서 살았는데 아문장(牙門將)으로 강유를 수행해 답중(沓中)에서 싸움에 임하다 전사했다.[50]

차남인 조광이 아문장으로 활동한 연도가 260년대 임을 생각해보면 이들의 출생년도가 입촉 이후 상당히 뒤였을 가능성도 있는데 왜냐면 다른 유비의 숙장들인 관장이나 미축 같은 공신들은 손자 대까지 기록이 있는 반면, 조운의 자손들은 아들 대에서 이후 얘기가 없는것을 보면 손자가 없거나 촉한 멸망 전에 벼슬을 할 만큼 자라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황충의 아들 황서의 예로 황충이 생각보다 젊었을 가능성이 언급되는데 조운의 자손들도 비슷하게 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51]

한편 청대의 지리지인 강릉현지에 나오는 전설에 따르면 관평의 아내는 조운의 딸 조씨라고 한다.[52] 여기에 따르면 조씨와 관월은 형주가 함락되자 익주로 피신하지 못했고 오나라에 억류된 채로 관(關)씨에서 문(門)씨로 성을 바꾸고 평민이 되어 공안에 숨어 살았다. 이 때 여몽이 배려해준 덕분에 이들이 몰래 숨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서진 사마염이 오를 멸하고 삼국을 통일하자 칙서로 관씨로 복권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고 한다. 일단 관평의 후손들이 있다는 사실이나 관월의 존재 자체는 조작이 없다고 인정받고 있다. #

이 일설에 따르면 관평의 아들 관월(關樾)[53]은 조운의 외손자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삼국지연의라든가 평화, 진수의 기록, 자치통감, 배송지 주 등에는 이런 기록이 없어서 둘의 사돈 관계가 묘사되거나 언급되지 않는다. 실제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도 조운의 후손은 조통, 조광 형제만 언급하고 있으므로 확언은 어려울 듯하다.

6. 호위무사설과 실상

일단 조운의 별칭인 일신도시담 호위장군(一身都是膽 虎威將軍)이라는 별명의 '호위' 때문에 한자를 모르면서 소리만 듣고 호위무사가 아니냐 착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한자를 보면 알듯이 저 호위는 보호와 방위호위(護衛)가 아니라 호랑이의 위세란 뜻의 호위다. 애초에 별칭이라 한데서 알듯이 저것도 정식 관직명이 아니라 그냥 별호 즉 별명일 뿐이다.

실제로 조운은 정사에서부터 기병부대의 지휘관으로 처음 등장했고, 상술했듯이 전업 호위였던 허저나 전위와 비교해보면 이들이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사시사철 조조 근처에서 떨어진 적이 거의 없던 것과 달리 조운은 지령을 받고 유비의 곁에서 떨어져 여러 군사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진수의 기록이나 하후영에 비교된다는 기록을 보면 친위부대의 대장직도 겸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근위대는 어디까지나 유비의 직할 부대이자 정예병들을 뜻하는 것이지, 호위에만 전념하는 부대가 아니다. 비유하자면 개인 경호병들과 수도방위군의 차이다.

이른 시기에 황제를 옹립하며 큰 세력이 된 조조와 달리, 유비는 형주를 차지하기 전에는 그다지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으므로, 군주의 호위부대와 친위부대가 혼용되었을 것이다. 유비 사후에 조운과 유사한 역할을 맡았던 진도의 부대가 성도로 돌아가지 않고 영안에 남은 것을 보면 최소한 유비의 황제 즉위 이후에는 분리된 듯 하나, 결국 영안에 남았다는 의미는 유비의 고참병들을 수도방위군으로 해석하기에도 무리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애초에 직접 군대를 지휘하던 군주들의 경우, 이 둘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들이 지휘한 부대의 성격이 서로 달랐다기보다는, 믿을만한 친족도, 거느린 군대도 많았던 조조는 호위임무와 전투지휘를 각각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 수 있었던 반면, 둘 다 부족했던 유비는 소수의 믿을만한 고참부하, 즉 관우, 장비, 조운이 필요시마다 이리저리 가리지 않고 움직이며 지휘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거나 아무리 해석한다고 해도 조운은 친위부대의 지휘관이지, 개인 경호원인 호위무사는 아니었다.

사실 유비가 조운과 같은 침실에 누웠다는 별전의 기록에 비추어봤을 때 이는 신선한 일은 아니다. 조운은 애초부터 유비의 지근거리에서 함께 했다. 물론 지근거리에 있다보면 경호도 겸할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겸하는거지 본업으로 보긴 힘들다. 정사나 별전의 기록을 보면 조운은 허저 전위처럼 경호에만 전념한게 아니라 폭넓게 활동했다. 게다가 당시 고대 중국에서 신하나 부하 장수가 군주와 한 침실을 같이 썼다는 건 그만큼 군주와 부하의 관계가 돈독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관계를 가졌다는 뜻만 있는 게 아니다.[54][55]

7. 촉한에서의 위치

익주가 평정된 다음 사람들이 의논하여 성도의 옥사(屋舍)와 성 바깥의 과수원, 뽕밭을 제장들에게 나누어주고자 했다. 허나 조운이 이를 반대하며 말했다.

"익주(益州)의 인민(人民)들은 처음 전란을 겪었으니 논밭과 집들을 모두 되돌려주고 이제 이에 안거(安居)하며 생업에 복귀하게 한 뒤에 부역하게 하고 조(調)를 거둔다면 그들의 환심(歡心)을 얻을 것입니다."

이에 선주(유비)가 조운의 말을 따랐다.
조운전 주석 조운별전, 촉한 내에서 조운의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

관우, 마초, 장비, 황충 같은 최측근 사령관급 장수들에 버금가는 서열의 위치로 오랫동안 주군인 유비를 따라 종군한 덕분에 관우, 장비를 제외하면 유비 휘하의 장수들 중 최고참 장수로서 군부 내에서의 위상도 남달랐다. 연의에선 흔히 오호대장군이라 불리는 5인의 위상이 무관으로 촉에서 드높았으며, 정사에서도 촉의 무관 중에서는 최상위권의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운의 최종 직위는 중호군 겸 진군장군인데 여기서 중호군은 군부(軍部)의 실세에 버금가는 고위직으로 황실과 임금을 지키는 친위대이자 정예병인 금군을 지휘하고, 무관을 선발하며, 무장들을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중호군은 황제의 최측근임과 동시에 무관을 선발하고 무장들을 감독하는 중앙군의 총괄직이었기 때문에 막강한 군권을 행사하는 핵심적인 요직이었다. 장군으로서 군공이 뛰어났던 장비나 황충처럼 가절을 받거나 사방장군에 임명되진 못했지만 오히려 그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는 관직인 중호군을 겸했다는 기록은 조운이 촉한 내에서 지닌 영향력과 관위가 결코 부족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조운의 사망 이후 이 중호군의 직책을 이어받는 것은 제갈량 사후 촉한의 군사와 내정을 총괄하여 실질적 일인자로 활약한 비의다. 비의는 뜻이 깊고 총명하여 제갈량이 아꼈으며 장완과 함께 제갈량의 탁고를 받은 명재상이었다. 이처럼 뛰어난 인물이었던 비의가 바로 조운의 후임으로 임명된 것만으로도 조운의 위상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조운은 무관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대목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익주를 점령하고 백성들의 땅으로 장수들의 논공행상을 하려던 것을 막아 인의를 관철시킨 것과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주적을 정확히 꿰뚫고 유비에게 직언을 올려 오나라와의 분쟁을 막으려던 것이 있으며, 둘 다 후세에 이르러선 조운의 판단이 옳았다고 평가되고 있다. 한마디로 조운이란 인물은 그릇된 것이라면 다수의 의견을 반대하고 나설 수 있는 강직함과 반대 의견을 당당히 표출할 수 있는 발언권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것. 만약 촉한 내에서 입지가 부족했다면 결코 이러한 행적이 기록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의에서 묘사된 모습에 대한 반발과 조운의 최종 관직이 관우, 장비, 마초보다 아래였다는 문제 등으로 조운의 관위를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유비의 한중왕 즉위와 더불어 황제에게 올리는 표를 보면 관장마황조로 묶이는 다섯 명 중에 유일하게 조운의 이름만은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주된 근거.
평서장군 도정후 신 마초, 좌장군 장사 영 진군장군 신 허정, 영사마 신 방희, 의조종사중랑 군의중랑장 신 사원, 군사장군 신 제갈량, 탕구장군 한수정후 신 관우, 정로장군 신정후 신 장비, 정서장군 신 황충, 진원장군 신 뇌공, 양무장군 신 법정, 흥업장군 신 이엄 등이 120인이 상언합니다. - 선주전

허나 저기서 나열된 인물들은 군벌로 명성이 높았던 마초와 개국공신으로 활약한 제갈량, 관우, 장비, 황충, 그밖에 공로가 크거나 명사(名士)로서 이름이 잘알려진 허정, 법정, 이엄 등이 대표로 호명된 것뿐이기에 충분히 반박이 가능하다. 당장 유비의 한중왕 즉위 직후 장비를 제치고 한중 태수라는 최중요 직책에 임명된 위연의 이름도 저기선 찾을 수가 없다. 즉, 한중왕 표에 대표로 언급되지 못 했다는 점만으로 조운을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는 뜻.

또한 저 표는 명목상 '(황제의) 신하들이 유비를 한중왕으로 추대한다는 것을 황제께 바치는 표'이므로, 유비 세력 내의 입지나 발언권이 아닌 기본적으로 이들의 공식 벼슬 순으로(즉 황제 시점에서 가장 높은 사람 순으로) 이름이 올라있다. 당시 조운은 편장군 직이었고, 편장군이 기본적으로 잡호장군과 동렬이긴 하나 한중왕표에 이름을 올린 이들은 최소한 5품 이상의 벼슬이었으므로 조운과 위연은 단순히 저들보다 당시 명목상 벼슬이 낮아 이름이 빠졌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저 리스트를 보면 (입지가 높은 마초는 그렇다고 쳐도) 3품 잡호장군인 허정이 두 번째에 올라 관우보다 위에 있는 등 대체적으로 벼슬 순으로 이름이 올라와있다.[56]

흔히 생각하는 촉한의 최고위 무관 5인 중 한 명으로서 다른 넷에 비해 권위나 실질적인 이름값 등은 약간 부족했으나 올곧고 강직한 인품 덕분에 유비의 큰 신임을 받아 제갈량의 군사장군과 대비되는 익군장군에 임명되었고 외정을 나가 적들을 정벌하는 역할보단 황궁과 국토를 수비하고 임금이 위험에 닥치면 가장 먼저 근위대를 이끌고 달려나가 구원하는 역할을 맡았기에 유비 사후 유선 대에 이르러서도 요직으로 기용되었다.

가장 많이 비교되는 관우, 장비 등과 비교를 해보면 먼저 가장 높았을 때를 보면 관우, 장비 다음[57]이었고, 가장 낮았을 때도 위연, 진도보다 서열이 한 단계 낮았지만 (당시 위연의 직책은 독전부 행 승상사마 2품 진북장군, 조운의 강등된 직책은 3품 진군장군) 이것도 기곡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강등되기 이전에는 조운의 직책이 2품 진동장군으로 위연, 진도보다 높았다. 실질적으로 위연의 직책이 조운을 뛰어넘게 되는 것은 조운이 죽은 이후인 230년 양계 전투에서 곽회를 격파하고 전군사 정서대장군 가절에 임명되었을 때부터다.[58]

1차 북벌 당시 조운의 직책이었던 진동장군은 본래 후한의 관직 체계에 의하면 사진장군 중에 하나이자 거기장군 바로 아래의 직책으로 결코 낮은 서열의 직책이 아니었다. 당연히 유비군(촉한)의 군부 내 투톱은 관우와 장비였다. 이후 마초가 합류하면서 둘과 동렬로 평가받았다.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뒤에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을 각각 전우좌후(前右左後)의 사방장군으로 임명하면서 황충도 같은 열에 서게 된다. 관우가 황충과는 동렬에 설 수 없다고 반발하기는 했지만 비시의 말을 듣고 곧 받아들인다. 이 부분만 보면 열전이 묶인 다른 4명과는 생전에 동렬에 서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입촉 전에는 관우, 장비 다음 가는 장수(편장군)였고 화양국지에서는 조운의 익군장군 직책을 사방장군(전장군, 후장군, 좌장군, 우장군)과 나란히 언급한다.

정리하면 처음은 관, 장, 조의 위치였지만 입촉 때 독립 군벌로 위상이 높았던 마초가 합류하고, 한중쟁탈전 중 하후연을 죽이는 공을 세운 황충의 대두로 자연스럽게 위치가 뒤로 밀린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중전 이후의 관직을 보면 '관우 (사방장군, 가절월[59]) > 마초, 장비 (사방장군, 가절) > 황충 (사방장군) > 조운(사진장군 겸 중호군)' 순이 된다. 이후 진군장군으로 강등되기 전까지 위연, 왕평 등 보다 위계상 윗줄로서 어디까지나 촉한 개국공신 관장마황 4인에 미치지 못했을 뿐 권위가 그들에 비교해 부족하지는 않았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는 조운을 유비의 조아라고 칭하거나 한고제의 충복이자 개국공신이었던 하후영에 견주는 등 후한 평가를 내렸으며, 조운을 관장마황과 같은 전에 두어 조운이 이들 4인과 나란히 둘만한 인물이라 판단했다. 과거에는 정사 조운전은 별전을 빼면 황충전에 버금가도록 매우 부실하여 현대에는 정사에 기록된 유선을 구한 공 정도로는 4인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었지만, 이후에 배송지가 조운별전에서 여러 내용을 찾아내 주석으로 조운전 본전 내용을 보충하고 자치통감에서도 조운별전의 내용을 긍정하는 식으로 조운의 공적이 확연히 추가되었다. 현대의 사학자들도 조운별전의 내용을 온전히 부정하는 학자는 드물며, 무엇보다 정사 조운전을 집필한 진수 본인이 조운을 관장마황과 같이 묶을만하다 여겼으니 조운을 필요 이상으로 과소평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외에 조운은 촉한에서 시호를 받았다고 밝혀진 12명 중 한명이다. 조운 이외에 시호를 받은 인물들은 관우, 장비, 황충, 제갈량, 방통, 법정처럼 촉한 건국에 커다란 공로가 있는 인물이거나 장완, 비의처럼 내정과 군사를 총괄하여 서열 1위의 권력자로서 촉한을 이끈 자들이 대부분으로 이는 조운이 촉한 내부에서도 그들과 나란히 설만한 위인이었음을 방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60]

8.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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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의 고향인 하북성 스자좡(石家庄) 시에 있는 조운의 사당

9.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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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관련 문서


[1] 키가 8척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척단위인 23.7cm로 계산하면 189.6cm가 나온다. [2] 그의 고향인 하북 기주의 상산은 원래는 항산(恒山)으로 불렸지만, 한문제의 이름을 피휘하여 상산으로 개명되었다. 현재는 허베이성 스자좡시. [3] 조운의 자와 이름은 역경( 주역) 문언전(文言傳) 건괘(乾卦)에 나오는 '동성상응 동기상구 수류습 화취조 운종룡 풍종호(同聲相應 同氣相求 水流濕 火就燥 雲從龍 風從虎, 같은 소리끼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끼리는 서로 구한다. 물은 습한 곳으로 흐르고, 불은 마른 곳으로 번진다. 구름은 용을 쫒으며, 바람은 호랑이를 쫒는다)'라는 문장에서 '운종룡(雲從龍, 구름은 용을 쫒는다)'이란 구절을 따온 것이다. 이 문장은 '기질이 같은 사람은 서로 찾게 되므로 덕이 있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호응하게 된다'는 의미로 공자의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 덕은 홀로 있지 않으며 필시 이웃이 있다)와 통한다. 즉 구름과 용을 서로 호응하고 있는 존재로 해석하여 이름과 자를 지은 것이다. 같은 논리로 육항의 아들 육운(陸雲) 역시 이런 논리에 따라 자를 사룡(士龍)으로 했다. [4] 발톱과 어금니라는 뜻으로 매우 쓸모있는 사람이나 용맹한 장수, 임금의 심복 등을 의미한다. [5] 사실 이게 여러 인물들에게 나쁘게만 작용하지는 않고 있다. 관우는 지휘관으로서 아쉬운 판단이 많았지만, 그에 대비해 개인의 능력과 유비에 대한 올곧은 충성심은 오히려 더 격상되었고 장비는 성격적인 모난 부분은 드러났을지언정 일자무식의 무인에서 지휘관으로서의 능력도 갖춘 완전체급 장수로 재평가받고 있다. 전체적으로 기록이 많았던 위에 대해서는 큰 틀에서 변화가 없지만, 기록이 적어 단편적인 부분만 흘러오던 촉, 오의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가 많고 그 중에서 촉의 경우 시간이 가면 갈수록 불리했던 상황 대비 인물들에 대해 평가가 좋아지는 중. [6] 위인들 중에서는 본명보다 자(字)나 호(號), 필명 등으로 더 잘 알려진 경우가 더러 있는데 한국 위인들 중에서는 한석봉, 김소월, 박목월, 이육사, 이상 등이 있다. [7] 조운별전에 따르면 조운에게 시호를 지어 바친 이는 강유라고 한다. [8] 자원병인 경우가 많다. [9] 본문에는 의종(義從)이라 적고 있다. [10] 자치통감은 '원공을 소홀히 한 것이 아니라 밝으신 장군께 사사롭게 따르는것 입니다.'라고 하고 있다. 현대의 자치통감은 '不爲忽袁公,私明將軍也' 라고 반점을 붙이고 현대의 정사 삼국지는 '不爲忽袁公私明將軍也' 라고 반점을 붙이지 않아 생기는 현상이다. 이 당시 공손찬이 굉장히 잘난 인물이기는 했어도 어진 정치로 소문난 것은 아니었으니, 기본적으로는 한복을 내쫓고 기주를 날로 먹은 원소에 대한 반발심이 꽤 작용했을 것이다. [11] 193년 6월경 원소, 여포 연합군이 조운의 고향인 기주 상산에 주둔한 장연을 쳐서 대규모 싸움이 일어난다. 공손찬의 막장화와 더불어 조운이 고향으로 돌아갈 이유는 충분했던 셈이다. 유비도 서주 구원을 핑계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는 공손찬과 갈라서게 된다. [12] 공손찬의 막장화에 쐐기를 박은 게 바로 황족 유우 살해다. 황족에 인망이 높고 공손찬의 직속 상관이기도 한 유우를 살해한 것은 이후 공손찬이 군벌이 될 수 있도록 했지만 이 때문에 주위 인재들이 죄다 공손찬을 떠났다. [13] 물론 동성애적인 의미가 아니고, 눈 깜빡하면 통수치고 조조 여백사 목 따듯이 목을 베어가는 난세에, 그것도 거병동지도 아닌 다른 군웅 밑에 있다가 들어온 조운을 관우와 장비만큼이나 신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조운은 유비를 따르게 된 이후 일생을 그에게 충성했으며, 유비 사후에도 죽을 때까지 촉한을 섬겼을 뿐더러 아들인 조광 촉한 멸망하는 그 전쟁에서 전사해 국가와 운명을 같이 한다. 이 "침상을 같이 썼다"는 표현은 고대 중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광무제 유수도 황제가 된 이후 고향 친구와 한 침대에서 잔 적이 있고, 당나라 시기 이백 두보도 침상을 함께 썼다. 거병동지인 관우 장비를 제외하고 외부 영입 인재 중 공사에서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는 언급이 있는 인물은 조운과 제갈량이다. 제갈량에 경우 수어지교 일화가 나올만큼 관우 장비가 불만을 드러낸적도 있지만 조운은 딱히 두 사람이 불만을 드러냈다는 언급이 없다. 이미 관우와 장비에게도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4] 유비의 선조인 고제 유방의 개국공신인 하후영도 전장에서 여러 공을 세웠지만 팽성대전에서 개박살나고 도망가는 유방이 자기 살겠다고 자식들까지 버리려고 드는 걸 목숨 걸고 일갈까지 해내며 구해낸 것이 가장 큰 공이다. [15] 재상중심의 정치가 이뤄진 촉한과 달리 조위는 항상 (고평릉 사변 이후 사마씨 천하가 되기 전까진) 조씨, 하후씨들에게 최고위직을 맡겼다. 그런데 조비가 위왕의 즉위하면서 젊은 나이에도 두각을 나타내던 조창과 조식의 커리어가 사실상 멈춘다. 만약 조앙이 살아 뒤를 이었다면 (위왕 직위를 계승 당시 40대 초반 나이가 된다) 정통성 측면에서 자신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이복동생들을 적절히 쓸 수 있을 뿐더러 그 자손들도 중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조에게 친척동생 조인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 생각하면, 조앙이 살아서 젊은 나이부터 군재가 뛰어났고 군공이 많았던 이복동생 조창을 일선 사령관으로 중히 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이득이다. 물론 이 경우는 촉한에 딱히 적용되지 않는 부분이긴 하지만. [16] 연의에서는 미방이 했다고 되어 있다. 아마 미방이 나중에 촉을 배신하니 모함 이미지를 나관중이 씌운 듯. [17] 실제로 유비의 두 딸은 조순에게 사로잡혔고, 이때까지는 제갈량과 함께 유비를 모시던 서서도 모친이 사로잡히자 작별을 고하고 투항하였다. [18] 상기했지만 누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유비도 조운이 북쪽으로 갔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19] 관우는 북쪽으로 가 원군의 진입로를 막는 임무를 수행했고, 장비는 자기가 받은 1천명에 주유가 빌려준 2천명을 더한 3천명으로 주유와 연계한 것으로 나온다. [20] 형남 4군 정벌때는 제갈량의 명을 받아 움직였는지 본인이 이처럼 일군을 이끌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21] 사방장군의 서열은 마초가 받은 좌장군이 가장 위이나 관우는 마초와 장비가 받은 가절보다 한 단계 위인 가절월을 받아서 그 위치를 차별하고 있다. [22] 유비는 스스로 한중왕에 오르기 전 조정에서 정식으로 받은 관직이 좌장군이다. 좌장군 밑의 군사장군은 좌장군부의 사무를 총괄하는 직책으로 단순 서열론 안한장군 미축, 소덕장군 간옹과 낮거나 비슷하지만 실권에선 비교도 안되는 실세중의 실세였다. [23] 호삼성은 자치통감 주석에 이렇게 적었다. '도정(都定)은, 모두 평정함을 말하는 것과 같다. 상재(桑梓, 뽕나무 가래나무)는, 고향에 조부가 심은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에서 이르길 오직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하는 게 예의다.(維桑與梓, 必恭敬止.)'라고 했다. 즉 호삼성은 조운이 시경을 인용해 이 주장을 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24] 전란 이전 농촌경제와 호구를 살리고 주군의 농업경제 육성과 발전을 꾀하여 그들의 생업을 보장케하는것이 국가의 재정을 늘리고 호구파악을 편하게 하며 민심획득에 이익이라는 뜻. [25] 이러한 발언을 혼자서 했음에도 직접적으로 불만을 내비친 신하가 없었다는 건 조운의 유비 세력 내부에서 입지와 발언권이 일정 이상이라는 증거이자 조운이 사리사욕이 아닌 공명정대함을 내세우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26] 조선만 봐도 왕비가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누에를 치는 친잠례가 연례 행사였고, 1970년대까지도 잠업은 농업부문의 핵심 국책사업이었다. [27] 유비는 익주를 얻기까지 꽤나 고생을 했으며 방통을 비롯한 여러 부하들도 잃었으니 고생해서 살아남은 부하들에게 보상하고 싶었겠고, 신하들도 대부분 그런 보상을 받고픈 마음이 있었으리라. 다만 유비가 조운의 말을 들은 것은 조운의 조언이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맞는 발언이라고 생각했고 그만큼 조운과 의견의 일치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역으로 익주민들의 민심을 달래야 하는 유비 입장에서 주요 장수들, 심지어 정사피셜 친형제와도 같다는 관장조차 차마 불만을 내비칠 수 없는 확실한 행동대장으로 조운을 지목해 시나리오를 짰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그만큼 유비 진영에서 조운의 입지와 유비의 신뢰가 드높다는 사실을 이 사건 하나로 확인할 수 있다. [28] 태평어람에선 견(遣)자가 붙어서 글귀가 늘어나 '조운이 병사를 파견했다'고 썼다. [29] 애당초 조운의 군 커리어 시작이 북방의 기마술에 능한 이민족이 포함된 군세를 다루는 기병대장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조운의 기병운용도 이해가 간다. [30] 이론의 여지는 있을수 있다, 본문을 보면 장익은 조운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그냥 진의 문을 닫으려고 했다는 설명이기 때문이다. [31] 이 경우 자치통감의 성격상 굵직한 부분만 기재하기 위해 삭제했을 확률도 있다. 당장 이 사건 이후 자치통감은 유비와 조조가 서로 수개월을 대치하니 위군의 도망자수가 매우 많았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한중전 전체만 놓고 봤을 때 한중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투 중 하나로 보이니, 진위성이 의심됐다면 굳이 기재할 필요조차 없는 일반적인 규모 정도의 전투일 뿐이다. [32] 실제 유비 사후 제갈량이 북벌에 나서자 양주의 천수, 안정, 남안 3군이 촉에게 호응하기도 했다. [33] 강주는 탁고대신인 이엄이 독강주로서 연고지로 삼아 4년여간 감독하면서 반란을 진압하는 등 공적을 쌓고 자신의 기반을 다진 곳이다. [34] 제갈량은 북벌 때 같은 탁고대신인 이엄에게 후방 군량 보급을 맡겼다. [35] 조운이 이 이후에도 지방을 관리하는 직책으로 빠진 것이 없는 것을 보면 명백하다. [36] 실제 직무를 수행하기보다는 직함과 관직으로서만 기능했을 수 있다. 일본의 경우 정이대장군이 오랑캐를 토벌하는 직함이었는지 상기 해 볼 필요가 있다. [37] 조진은 대장군이라는 직함도 있었지만 그 조조의 조카뻘 후손이었고, 조비의 유언을 들은 고명대신이었다. 당시 촉한의 무관 중 이런 조진을 불러들일 수 있는 이름값을 가진 인물은 조운밖에 없었다. [38] 실리는 '손해를 보고 이익을 잃다'는 말인즉 '승리하지 못하다' 즉, 전투에서 이기지 못하고 패배함의 완곡한 표현이다. [39] 왕평이 패전 와중에도 군을 수습해 추가 피해를 막았다는 이유로 승진을 한 점을 감안하면, 딱히 북벌 참여자에 대해 대패를 이유로 전방위적인 강등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즉, 조운이 패주하는 와중에도 물자와 병력을 챙겨 분투한 것은 좋게 평가할 수 있으나 잔도를 태운 것은 확실하게 실패한 것이라고 촉 군부는 판단한 것이다. [40] 제갈량 본인이 제갈근에게 보낸 편지에는 조운은 등지와 함께 적애의 수비를 담당해 군사를 둘로 나누어 황무지를 개간하고 둔전을 행했고 당시 갑자기 홍수가 나서 적애 남쪽에 있던 잔도가 유실되니 조운이 사람을 파견하여 벼랑을 따라 돌아 올라가게 한 뒤에야 등지와 서로 소식을 알 수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적애에서 상당히 고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생몰년도가 정확하진 않지만, 추측 상 조운은 이 시기에는 확실히 노익장에 분류될 정도의 나이가 들었을 것이다. [41] 당장 같이 묶이는 관장마황 중 조운만큼 편하게 죽은 인물은 기록이 모자란 황충 정도를 제외하고는 없다. 관우는 패전하여 참수당했고, 장비는 배신자들에 의해 목이 베였으며, 마초는 침대에서 죽긴 했지만 유언을 보면 편하게 갔다는 말은 해주기 힘들다. [42] 법정, 제갈량, 장완, 비의, 진지, 하후패는 죽은 뒤 바로,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은 260년, 조운은 261년에 시호를 받았다. [43] 이 일화는 진삼국무쌍 6의 크로니클 모드에서 조운으로 플레이하는 도중 강유를 적으로 만나면, 강유가 "당양 장판의 영웅과 겨룰 수 있게 되어서 일생일대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장면으로 오마주된다. [44] 그러나 연의에서 제갈공명이 1차 북벌을 할 때 70이 넘었다고 묘사된다. 1차 북벌이 228년이기 때문에 이 기록대로라면 158년 이전에 태어난 것이 되어 유비보다도 나이가 많아진다. 애초에 1차 북벌에서 조운이 70대라는 설정은 그가 오호대장군 중 마지막 남은 노장임을 강조하려는 갑톡튀한 설정이다. 국내 대다수 삼국지 관련 만화들도 이 오류를 그대로 답습해서 이릉대전까지 수염 하나도 없는 영원한 청년무장 조운이 10년도 안돼서 백발 수염이 성성한 노장으로 그려져 독자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한다. [45] 특히 삼국지 3에서는 무려 손견, 마등과 조운이 동갑으로 나온다. 셋 다 156년 생. [46] 52회에서 번씨의 재혼 조건에 출중한 외모가 포함되어있다. [47] 안량은 항목에도 설명됐지만 정사에서 버프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도 명장이란 평이 있다. 즉 당시 안량은 누가봐도, 후대인물인 진수가 최대한 드라이한 평을 한게 명장이란 거니, 군재가 매우 뛰어난 인물인 게 확실하다. [48] 이 때 조운이 신경쓰였던 제갈량은 등지를 참모로 붙여주는 한편, 관흥과 장포를 따로 보내서 정무의 복병에 고전하던 조운을 도와준다. [49] 재미있게도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용장으로 불리웠던 정기룡은 당대에 이미 조자룡과 같은 인물이라고 칭송을 받았는데, 용맹함은 말할 것도 없고, 목민관으로서 사려깊고 어진 인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50] 강유를 수도로 가 천자를 알현케 하며 중호보병을 맡아야 한다고 제갈량이 추천한 것을 살펴볼때 강유가 자신이 시호를 선정한 옛 상관의 아들인 조광의 무재를 눈여겨보아 데리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51] 다만 아래에 소개되는 조운의 외손자인 관월이 213년생임을 감안할때 그 외삼촌인 조광이 그 동년배일 가능성이 커 보이지는 않다. 뭐 조씨랑 조광이랑 연배 차이가 많이 나는 남매였을수도 있지만 말이다. 60~70대에 전사했을수도 있고. 당장 강유도 전사할때 60대였고, 촉한의 군부는 이런 강유가 젊은 축이였을 정도로 고령화되었으니 조광이 노장이였다고 해도 어색하지는 않다. [52] 이게 사실이라면 관우와 조운은 사돈지간이 되는 것이다. 출처는 중국어 위키백과. [53] 건안 18년(서기 213년) 생이라고 한다. [54] 고대 중국에서도 동성애나 양성애 성향을 가진 인물들은 당연히 있었지만 유비는 이성애자라는 증거가 확연한 반면 동성애나 양성애자라는 이야기가 전혀 없고, 관우와 장비는 물론 조운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삼국지 인물들 중 동성애자 논란으로 가장 잘 알려진 건 대표적으로 종회다. [55] 한 침실을 썼다는 묘사는 조운 외에도 장비, 관우, 제갈량 등이 있는데, 당연히 성애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군주의 침실에 편히 출입 가능할 정도로 믿는 부하였단 얘기다. 비슷한 예시가 동탁이 위세가 강할때 칼을 차고 황제의 어전에서 신을 신고 걸어다녔다는 묘사인데, 단순히 복장 묘사가 아니라 그만큼 황제 앞에서 예를 갖추지 않았다는 표현이다. 이걸 보고 유비가 애첩을 마구 갈아타는 호색한 동성애자인 것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56] 5품 탕구장군인 관우가 3품,4품 장군들보다 앞에 있는 것은 저들과 달리 관우는 작위(한수정후)를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57] 유비가 입촉하기 전에는 관우, 장비 다음 서열(편장군)로 황충(비장군), 위연(6품관 이하)보다 직위가 높았다. [58] 그런 점에서 제갈량 사후 아쉬워지는 인물이 조운이라고 할 수 있다. 조운에 대한 평은 크게 두 종류로, 하나는 용맹하다는 것이고(진수, 계한보신찬) 하나는 덕이 있다는 것이었다(계한보신찬). 한편 별전에 따르면 여러 차례 정치적 식견을 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제갈량이 초년이던 시절부터 가까이서 같이 다녔고 행보가 계속 겹치는 상황이니, 직접 간여하진 않아도 굵직한 정치적, 행정적 일들이 돌아가는 분위기는 모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쪽에서 통하는 사고방식과 언어에 대해서도. 게다가 성격이 좋아 위연처럼 마찰을 일으키고 다니지 않았다. 조운이 마지막으로 가졌던 직함 중에는 중호군이 있다. 조운의 사망 후 1년 가량의 공백을 지나 이 자리를 이어받는 사람이 비의다. 군부의 인사, 무관 간 관계 조정 등이 중호군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던 점, 이후 양의 위연의 갈등을 비의가 중재했다는 점을 보면 당연히 이들보다 연공서열이 높은 조운이 이들의 갈등을 중재하는것이 이들보다 연공서열이 낮은 비의보다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59] 가절보다 한 단계 높다. 삼국 시대 초기를 통틀어 이만한 권위를 가진 신하는 없었으며, 이는 관우가 유일하다. [60] 조운의 행적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시호를 가장 늦게 받은 것에 주목하거나 유선을 구했으니 당사자가 우대한 것 아니냐고 주장한다. 실제로 조운별전에 실린 유선의 조서에 따르면 유비 휘하에서 공을 세웠다는 것과 함께 자신을 구한 일이 명시되어있다. 그리고 별전이 아니더라도 유선이 생명의 은인인 조운에게 시호를 내린것은 정황상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정말 총애 받은 진지는 사후 바로 받은데다 진수가 직설적으로 총애해서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그 관장마황(그리고 방통)도 사후 수십 년이 지난 260년에야 시호를 받을 수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조운이 늦게 시호를 받은 것이 폄하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61] 상술하였듯 조운의 고향 상산이 현재 스자좡시 관할이다. [62] 관우는 애초에 신격화되기도 했고, 현대에선 그놈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화를 자초했다며 비판받기도 하는데, 조운은 신격화된 적이 없고 성격도 좋아 오히려 관우보다 상대적으로 친숙한 인상인 점도 컸다. [63] 제갈량과 함께 일본에서 인기 투톱을 달리고 있다. [64] 대부분의 상대가 정사엔 등장하지 않는 연의의 가공인물들이 상당수인데, 그래서인지 일각에선 조운을 가공인물 전문 킬러라고 부를 정도다. [65] 다만, 확실한 내용은 아닌 것이 나관중 본인이 삼국시대 북부 지역의 이름을 틀린다거나 조운을 두고 충신의 사당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기록한 적도 있기 때문. [66] 발음은 짜오 신. [67] "한편으로는 한 행셋거리로, 또 한편으로는 구직꾼 격퇴의 수단으로 자룡이 헌 창 쓰듯 썼을 뿐이지." 레디메이드 인생 : 채만식 저서. 여기서 '헌 창' 이라는 것은, 낡은 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매우 익숙한 물건을 지칭할 때 쓰는 '헌 것'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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