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인물을 모티브로 한 디즈니 로빈 훗의 등장 캐릭터에 대한 내용은 존 왕(디즈니 캐릭터)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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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국 플랜태저넷 왕조 제3대 국왕
존 Joh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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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
존 (Joh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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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166년 12월 24일 | ||
잉글랜드 왕국 옥스퍼드 보몬트궁 | |||
사망 | 1216년 10월 19일 (향년 49세) | ||
잉글랜드 왕국 노팅엄셔 뉴어크성 | |||
재위기간 | 아키텐·가스코뉴 공작 | ||
1199년 4월 6일 ~ 1216년 | |||
푸아티에 백작 | |||
1199년 4월 6일 ~ 1204년 | |||
노르망디 공작, 앙주·멘 백작 | |||
1199년 4월 6일 ~ 1204년 | |||
잉글랜드의 왕 | |||
1199년 5월 27일 ~ 1216년 10월 1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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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별칭 |
결지왕 (John Lackland/Jean sans Terre) |
|
배우자 | 글로스터 여백작 이사벨라 (1189년 결혼 / 1199년 이혼) | ||
앙굴렘 여백작 이자벨 (1200년 결혼) | |||
자녀 | 헨리 3세, 리처드, 조앤, 이사벨라, 엘리노어 | ||
부왕 | 헨리 2세 | ||
모친 | 엘레오노르 다키텐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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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lbgcolor=#810000><colcolor=#fadb43> |
근대 상상화 |
<colbgcolor=#810000> 영어 | John (존) |
중세 프랑스어 | Johan (조앙) |
프랑스어 | Jean (장) |
라틴어 | Iohannes (요한네스) |
잉글랜드 왕국의 왕으로 헨리 2세의 막내 아들이자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동생. 별명인 래클랜드(Lackland)는 원래 어렸을 때 봉토를 받지 못하여 붙은 것으로 결지왕(缺地王)[1]이라 해야겠지만, 프랑스 쪽의 영토를 대폭 잃은 일이 사람들의 기억에 강렬히 새겨졌기에 실지왕(失地王)이라는 표현으로 많이 쓰인다. 결지왕이라는 별명이 직관적이지 않아서 무영토왕(無領土王)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나마 그가 남긴 유산이라면 귀족들의 협박에 마그나 카르타를 받아들였다는 것이 있다.
존(John)이란 이름은 기독교계에서 워낙 유명한 요한에게서 비롯된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존 왕의 사후 영국의 수많은 군주들 중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존 왕도 존 1세로 불리지 않는다. 스티븐 왕, 앤 여왕 그리고 빅토리아 여왕도 비슷하게 같은 이름을 가진 국왕이 없기 때문에 1세라고 불리지 않는다.[2] 하지만 존 왕은 영국 정부 행사에서조차 무능한 왕으로 소개되고 있는지라, 앞으로도 존이라는 이름의 왕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사실 스티븐 왕도 사촌에게 돌아갈 왕위를 빼앗으려다 내전으로 번진 과오 때문에 기피되는 이름이 되었다.[3]
2. 생애
2.1. 초년기
1166년 12월 24일 옥스퍼드 보몬트궁에서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 다키텐 왕비의 다섯 번째이자 막내아들로 출생했다. 헨리 2세는 잉글랜드 외에도 노르망디 공국, 앙주 백국, 투렌 등 프랑스 서부의 막대한 영토를 가졌으며, 브르타뉴 공국을 복속했다. 어머니 엘레오노르는 아키텐 공국과 푸아투 백작령의 주군이었으며, 랑그도크와 오베르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으며,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전 왕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광대한 영지는 헨리 2세를 주권자로 받들었지만 각각 고유한 전통, 역사 및 정부 형태를 갖췄기에 통제가 잘되지 않았다. 잉글랜드 국왕의 권위는 아키텐에서 매우 제한적이었고, 노르망디와 잉글랜드 사이의 전통적인 유대 관계는 서서히 해체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헨리 2세는 잉글랜드 왕국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프랑스 왕국의 봉신 자격으로 소유했기에, 프랑스의 주권을 빼앗기는 걸 방지하고 직할령을 넓혀서 입지를 다지려는 카페 왕조와 첨예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존은 출생 직후 중세 귀족 가문의 전통적인 관행에 따라 유모에게 맡겨졌다. 엘레오노르는 아키텐 공국의 수도인 푸아티에로 갔고, 존과 누이 조안은 퐁트브로 수도원에 보내졌다. 이후 엘레오노르가 세 아들 청년왕 헨리, 조프루아 2세, 리처드 1세와 함께 남편을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가 체포되어 가택 연금에 처했을 때, 존은 헨리 2세의 궁전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이때 군사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대 사람들에 따르면, 존은 키 168cm의 상대적으로 땅딸막하지만 탄탄한 몸매와 짙은 붉은색 머리를 가졌다. 독서를 좋아해 자기만의 이동식 도서관을 지었으며, 장난기가 많았고 주사위 놀이를 즐겼으며, 사냥에 열정적이었다. 그는 보석 감정을 잘했고, 값비싼 의복을 다량 샀으며, 와인을 즐겼다. 그는 따뜻하고 재치 있고, 관대하고, 친절했지만, 질투심이 많고 예민했으며,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손가락을 물어뜯으며 분노하는 등 복잡한 성품을 가졌다고 한다.
형들이 이미 아버지 헨리 2세로부터 관할 구역을 부여받은 데 비해 그에게는 주어질 영지가 없었기에, 아버지는 그에게 농담으로 '래클랜드(Lackland)'라는 별명을 붙였다. 헨리 2세는 아키텐 공국의 동부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해 존을 사보이아 백국의 백작 움베르토 3세의 딸이자 상속녀인 알릭스와 약혼하기로 했다. 이때 존은 사보이아, 피에몽트, 모리엔 등 예비 장인의 영지를 상속받을 예정이었다. 1173년, 헨리 2세는 시농, 루덩, 푸아투의 미르보 성의 소유권을 존에게 양도하기로 했다. 그러자 청년왕 헨리가 반발했다. 그는 아버지가 자기와 의논도 하지 않고 자기 성들을 막냇동생에게 넘긴 것에 강한 반감을 품고 항의하다가, 아버지의 명령으로 일시 구금되자 탈출한 뒤 파리로 망명했고, 형제 리처드와 조프루아도 뒤따랐다.
이후 세 아들은 루이 7세의 후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고, 스코틀랜드 국왕 일리엄 1세, 불로뉴, 플란데런, 블루아 백작들이 여기에 가세했으며, 포허 자작 에우돈 2세와 푸제르 남작 라울 2세도 반군에 가담했다. 잉글랜드, 브르타뉴, 멘, 푸아투, 앙굴렘에서는 주요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노르망디에서는 일부 변경 영주들이 봉기했다. 하지만 헨리 2세는 이 대반란을 노련하게 진압했고, 반란 이전의 현상 상태로 되돌리고 아들들을 사면하기로 했다. 그 대신, 아들들을 부추긴 엘레오노르는 자기가 죽을 때까지 가택 연금했다.
대반란 당시 헨리 2세와 동행했던 존은 헨리 2세가 가장 좋아하는 아들이 되었다. 헨리 2세는 주로 귀족들의 영지를 반강제로 떼서 존에게 수여했다. 1175년, 그는 초대 콘월 백작 레지널드 드 던스턴빌의 영지를 받고 콘월 백작을 칭했으며, 1174년 존의 약혼자였던 알릭스가 사망하면서 사보이아 공국과의 결혼 계약이 깨지자, 헨리 2세는 존을 글로스터 백작 윌리엄 피츠로버트의 외동딸인 이사벨라와 약혼시켰다. 1177년 5월, 헨리 2세는 옥스퍼드에서 회의를 연 뒤 당시 10살이었던 존을 아일랜드의 영주로 세우겠다고 선언하고, 그가 성인이 되면 아일랜드 전역의 왕이 되도록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리하여 앵글로-노르만족이 차지한 영토는 아일랜드 영주령으로 알려졌고, 앙주 제국으로 일컬어진 헨리 1세의 영지 일부를 형성했다.
1183년, 청년왕 헨리는 아키텐 공작의 주권자가 자신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 리처드와 갈등을 벌였다. 헨리 2세는 리처드를 지원했고, 청년왕 헨리는 아버지를 상대로 반기를 들려 했다가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청년왕 헨리가 사망한 뒤, 헨리 2세는 승계 계획을 바꿨다. 리처드는 잉글랜드 공동 왕으로 삼고, 조프루아 2세는 브르타뉴 공작 직위를 유지하며, 존은 리처드 대신에 아키텐 공작으로 부임하기로 했다. 리처드는 허울뿐인 공동 왕이 되고 싶지 않으며, 아키텐 공국의 승계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가 결정할 사안이라며 거부하자, 헨리 2세는 분노해 조프루아 2세와 존에게 아키텐을 탈환하기 위해 남쪽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두 형제는 지시에 따라 푸아티에를 포위했고, 리처드는 브르타뉴를 공격했다. 1184년 말, 양자는 전쟁 이전의 상태로 복귀하고 화해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1185년, 존은 아일랜드 원정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여러 문제를 야기했다. 아일랜드 현지 통치자들이 기르는 긴 수염을 비웃어서 그들을 불쾌하게 했고, 앵글로-노르만 정착민들과 동맹을 맺지 못했으며, 아일랜드에 대한 군사적 영향력이 약화하는 걸 수습하지 못했다. 결국 존은 그해 하반기에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자기가 실패한 건 현지 총독 휴 드 레이시가 제대로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1186년, 헨리 2세는 존에게 좀 더 많은 군대를 맡겨서 아일랜드로 보내려 했다. 그러던 중 조프루아 2세가 파리에서 열린 마상창시합에 참여했다가 어린 자녀 2명을 남기고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후 브르타뉴 공국은 조프루아 2세의 아들 아르튀르 1세에게 넘어갔다. 이후 잉글랜드 왕위를 놓고 리처드와 존이 경합하게 되었는데, 리처드는 십자군에 뛰어들길 갈망했지만 자기가 부재할 때 헨리 2세가 존을 잉글랜드 왕으로 세워버릴 것을 우려했다.
1187년, 리처드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1188년 11월, 필리프 2세는 평화 회담을 열고 헨리 2세에게 평화 협정을 공개적으로 제안했다. 그는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의 누이이자 리처드의 약혼자 아델의 결혼을 거행하고, 리처드를 후계자로 공식 지명한다면, 자기가 내건 영토 요구를 철회하겠다고 제안했다. 헨리 2세가 이 제안을 거부하자, 리처드 본인이 아버지에게 자신을 후계자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헨리 2세는 침묵했고, 리처드 1세는 공개적으로 편을 바꿔서 모인 귀족들 앞에서 필리프 2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때 교황청이 개입해 기독교인끼리 싸울 때가 아니라고 호소했고, 1189년 라 페르테 베르나르에서 새로운 회의가 열렸다. 이번 회담에서, 헨리 2세는 리처드가 아닌 존이 아델과 결혼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거부당했다.
아버지가 자기가 아닌 존을 후계자로 세우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사랑하는 어머니 엘레오노르를 여전히 감금해 두는 것에 강한 반감을 품은 리처드 1세는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르망에 있던 아버지를 기습 공격했다. 헨리 2세는 가까스로 탈출한 뒤 알랑송으로 피신했다. 이후 리처드 1세가 프랑스군과 힘을 합쳐 노르망디를 압박하자, 헨리 2세는 적의 추격에 이리저리 쫓기다가 관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남쪽의 앙주로 방향을 돌렸다. 당시 출혈성 궤양을 앓던 헨리 2세는 극도로 더운 날씨로 인해 병세가 악화했다. 그러다가 적군과 마주칠 위기에 몰리자 쉬농 성으로 피신했다.
이후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협상을 제안하자, 헨리 2세는 동의했다. 이제 병세가 완연하여 죽음을 눈앞에 둔 헨리 2세는 말에 간신히 앉은 채 발랑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그는 필리프 2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아델을 보호자에게 넘기고, 그녀가 십자군이 끝난 뒤 리처드와 결혼하는 것에 동의했으며, 리처드를 자신의 상속인으로 인정했다. 또한 필리프 2세에게 보상을 지불하고 주요 요새를 보증으로 주기로 했다. 헨리는 들것에 실려 쉬농으로 돌아갔는데, 그곳에서 존이 내전 도중에 상황이 리처드 쪽으로 유리하게 돌아가자 기사들과 함께 리처드 편을 들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아꼈던 막내아들 존마저 휘하의 부하 기사들과 함께 리처드의 편에 섰다는 사실에 크게 상심한 헨리 2세는 1189년 7월 6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2. 리처드 1세의 치세
1189년 9월 3일, 존은 어머니 엘레오노르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열린 리처드 1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하면서 제3차 십자군 원정을 단행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때 리처드는 혹여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존을 회유하기 위해 모르탱 백작에 세웠고, 존과 이사벨라의 결혼을 거행해 글로스터 백작령을 가지도록 했으며, 랭커셔, 콘월, 데본, 도싯 및 서머싯의 영지도 가지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존이 너무 많은 권력을 확보하는 걸 막기 위해 이들 카운티의 주요한 성들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으며, 당시 4살이었던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1세를 왕위 계승자로 지정했다. 또한 존은 3년간 잉글랜드로 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 존이 런던을 장악한 뒤 잉글랜드 국왕 직위를 찬탈할 우려가 없을 테니, 리처드 1세는 안심하고 예루살렘 탈환에 전념할 수 있었다.리처드 1세는 어머니 엘레오노르를 섭정을 삼고, 그녀를 보좌할 최고 재판관에 더럼 주교 휴 뒤 퓌세와 제3대 에식스 백작 윌리엄 드 맨더빌에게 맡겼고, 엘리 주교 윌리엄 롱챔프를 총리로 선임했다. 윌리엄 드 맨더빌이 얼마 후 사망하자, 윌리엄 롱챔프는 휴 뒤 퓌세와 함께 최고 재판관의 역할을 공유했다. 이때 엘레오노르는 리처드에게 자기가 잉글랜드를 떠나 있을 때 존이 잉글랜드로 가서 그곳을 임시로 관리하는 걸 허용해달라고 요청했고, 리처드는 받아들였다. 이후 롱챔프가 퓌세와 협력하길 거부하고 귀족과 성직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면서, 잉글랜드의 정치적 상황은 악화했다. 존은 이걸 기회 삼아 자신이 그를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190년, 롱챔프는 링컨 성주로 자기가 임명한 이를 세우는 걸 거부한 링컨 성을 포위했다. 그곳의 성주 제라드 드 캄빌은 존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더 이상 총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에 존은 틱힐과 노샘프턴 성을 점거하고 롱챔프를 압박했다. 원정 중이던 리처드는 이 소식을 접하자 루앙 대주교 월터 드 쿠탕스를 잉글랜드로 급파해 존과 롱챔프 간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도록 했다. 월터는 두 사람 사이의 타협을 중재한 끝에 제라드가 성주로 확정하고 존은 링컨 성의 주권을 포기하는 합의안을 맺기로 했다. 여기에 롱챔프는 리처드가 죽을 경우 존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1191년 9월, 헨리 2세의 사생아이자 요크 대주교 제프리가 롱챔프의 처남이자 도버 성주의 지시에 따른 부하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들은 당초에 제프리가 도버에 상륙하자마자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제프리가 사전에 경고받고 세인트 마틴 수도원으로 피신하자 수도원을 포위한 뒤 4일 후에 제프리를 강제로 끌어냈다. 민중은 지난날 헨리 2세의 기사 4명이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을 수도원에서 살해한 일을 상기해 롱챔프를 규탄했다. 롱챔프는 제프리가 리처드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기 때문에 체포했다고 주장했지만,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존은 이때를 틈타 코번트리 주교인 휴 노낭을 부추겨서 롱챔프를 규탄하게 했다.
1191년 10월 5일, 런던 인근 로든 브리지에서 열린 공의회는 롱챔프를 엘리 주교에서 폐위하고 파문하기로 했다. 롱챔프는 런던 탑에서 농성했지만, 며칠 후 식량이 떨어지자 항복했다. 의회는 그의 직위와 영지를 몰수했고, 롱챔프는 1191년 말에 잉글랜드를 떠났다. 이렇게 롱챔프가 몰락하면서, 존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하지만 존은 리처드가 돌아오고 나면 아르튀르 1세나 리처드가 최근에 결혼한 나바라의 베렝겔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날 수도 있는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을 거라고 여기고, 십자군에서 막 돌아온 필리프 2세와 손잡고 리처드를 대적하기로 했다. 리처드가 십자군에서 좀처럼 돌아오지 않자, 그는 형이 죽었거나 실종되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던 1192년 10월, 리처드 1세가 귀국 도중에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에 의해 생포된 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넘겨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존은 기회를 포착하고 파리로 달려가서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었다. 그는 이사벨라와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한 뒤 필리프 2세의 누이 아델과 결혼하기로 했다. 그 후 존은 용병 부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하여 섭정 위원회에 복종을 요구하였고, 형에 대한 흉흉한 소문을 일일이 열거하며 설득했다. 그러나 호응을 받지 못하자, 왕이 되기 위해 내전을 단행했다. 여기에 필리프 2세도 직접 출진하여 노르망디를 침공했다.
그러나 존은 리처드 1세를 꿋꿋이 지지하는 영주들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고, 어머니 엘레오노르가 간절히 설득하자 결국 휴전 협정을 맺기로 했다. 엘레오노르는 1193년 12월 리처드의 몸값을 가지고 독일로 출발했고, 1194년 1월 17일 슈파이어에 도착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필리프 2세와 존 왕자가 리처드를 구금하는 대가로 그녀보다 더 높은 가격을 제시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에 그녀는 연례 공물을 포함한 추가 제안을 했고, 하인리히 6세는 2월 4일에 리처드 1세를 석방하기로 했다.
1194년 3월 23일, 리처드 1세가 런던에 개선해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존은 급히 파리로 도주했다. 리처드 1세는 존을 따르던 군대의 항복을 받고 추종자들을 숙청한 후 두 번째 대관식을 치렀다. 그 후 세금을 다시 거둬서 군자금을 모은 뒤 필리프 2세를 응징하고자 노르망디로 진군했다. 얼마 후 파리로 도주했던 존이 찾아와서 용서를 빌자, 엘레오노르는 리처드에게 존을 용서해달라고 청원했다. 이에 리처드가 존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사악한 동료들의 꼬임에 넘어간 어린아이일 뿐이다. 너의 조언자는 응당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러면서도 리처드 1세는 아일랜드를 제외한 존의 모든 영지를 몰수했다. 이후 존은 형의 부하로서 필리프 2세와의 전쟁에 참여했다. 1195년, 존은 에브뢰 성을 함락했고 필리프 2세의 공격으로부터 노르망디를 방어했다. 이듬해 가마슈를 점령했으며, 파리를 압박하면서 보베 주교를 생포했다. 리처드 1세는 그의 기여에 대한 보상으로 글로스터와 모르탱 백작위를 다시 칭할 수 있게 해줬고, 몰수했던 영지도 돌려줬다.
2.3. 잉글랜드 국왕
2.3.1. 왕위 분쟁
1199년 4월 6일, 리처드 1세가 41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리처드 1세는 죽기 직전에 존을 왕으로 세우라고 유언했다는 설이 있지만 분명하지 않다. 엘레오노르는 당시 브르타뉴에 있던 존에게 조속히 그곳을 떠나라는 서신을 보냈다. 만약 존이 브르타뉴에서 죽어버리면,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1세가 잉글랜드 국왕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필리프 2세는 앙주 가문 간의 내전을 유도하기 위해 12세의 아르튀르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지지한다고 선언했고, 아르튀르는 1199년 5월 필리프 2세와 접견한 뒤 프랑스 내 영지의 주권자로서 경의를 표했다. 브르타뉴군은 앙제를 점령했고, 앙주, 멘, 투렌이 뒤따라 아르튀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자 엘레오노르는 영지 전역을 돌면서 귀족들에게 존을 주권자로 받들라고 호소했고, 노르망디와 푸아투, 아키텐 귀족들은 엘레오노르의 뜻을 받아들였다.존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른 뒤 프랑스로 돌아갔고, 앙주, 메인, 투렌의 세네샬 기욤 드 로슈의 중재로 아르튀르 1세 간의 화해가 이뤄졌지만, 1199년 9월 말 아르튀르가 파리로 이동한 뒤 잉글랜드 왕위를 노렸다. 이에 존은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 남부로 이동하는 한편, 영주들에게 노르망디 동부와 남부 국경을 따라 방어 태세를 취하도록 했다.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9세와 불로뉴 백작 르노는 리처드 1세와 맺었던 반(反) 프랑스 동맹을 갱신하겠다고 밝혔고, 앙주의 대귀족 기욤 드 로슈는 본래 아르튀르 편을 들었다가 대세가 기울었다는 걸 확인하고 존으로 편을 바꾸었다.
상황이 이처럼 존 쪽으로 유리하게 돌아가자, 필리프 2세는 교황청의 화해 촉구에 따라 1200년 1월 존과 만나 평화를 위한 가능한 조건을 협상했다. 그해 5월, 양자는 르굴레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필리프 2세는 20,000 마크 상당의 자금을 받는 대가로 존 왕이 노르망디 공국, 앙주 및 아키텐 공국 등 유럽 대륙 영주권을 가지는 걸 인정하며, 존 왕은 아버지 헨리 2세의 손녀인 카스티야의 블랑슈의 지참금을 위해 부르주, 이소둔, 그라카이 등 베리 영지를 필리프 2세의 아들인 루이 왕자에게 양도하고, 그 대가로 필리프 2세는 브르타뉴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아르튀르 1세는 존 왕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다. 이리하여 존은 잉글랜드 국왕으로 입지를 굳힐 수 있었지만, 이후 일련의 실책을 저지르면서 위기에 직면했다.
2.3.2. 이사벨라와의 결혼 무효와 2번째 결혼
1200년, 존 왕은 앙굴렘 백작 에메르 테일페르의 외동딸인 앙굴렘의 이자벨과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존 왕은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현재 왕비로 삼았던 글로스터 여백작 이사벨라와 헤어지기로 했다. 그는 이사벨라가 자신과 사촌지간이며, 결혼할 때 받아야 할 교황의 결혼 허가를 받지 못했다고 주장해,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존 왕이 앙굴렘의 이자벨과 결혼하기로 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당대의 연대기 작가들은 존이 당대 최고의 미녀인 이자벨에게 깊이 빠져서 그녀와 결혼하기로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대의 여러 학자는 이자벨이 푸아투와 가스코뉴 사이의 비옥한 땅인 앙굴렘을 물려받게 될 상속녀이므로, 그녀와 결혼해서 그 땅을 얻으면 아키텐 공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기에 결혼을 밀어붙였다고 추정한다.그런데 앙굴렘의 이자벨은 이미 푸아투의 대귀족 위그 9세 드 뤼지냥과 약혼했으며, 위그 9세의 형제인 외 백작 라울 1세는 동부 노르망디 국경지대에 걸쳐 대규모 영지를 소유했다. 뤼지냥 가문의 입장에서는, 이대로 이자벨과의 약혼이 끊어지면 아키텐을 가로지르는 왕의 상품과 군대의 주요 경로를 제공하는 뤼지냥 가문의 이익을 위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존 왕은 이를 신경 쓰지 않았고, 앙굴렘 백작은 딸이 왕비가 되는 걸 흔쾌히 받아들이고 이자벨을 뤼지냥 가문에서 빼돌렸다. 1200년 8월 24일, 존 왕과 앙굴렘의 이자벨은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후 존 왕이 뤼지냥 가문에 적절한 보상을 해주긴커녕 위그 9세를 경멸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자, 뤼지냥 가문은 격분해 반란을 일으켰다. 존 왕이 즉시 군대를 투입해 위그 9세를 축출하고, 위그 9세를 돕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라울 1세를 압박하자, 위그 9세는 1201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게 이 문제에 개입해달라고 간청했다. 필리프 2세는 존을 프랑스의 법정에 소환했다. 잉글랜드 왕이 가지고 있는 프랑스령은 프랑스 국왕에게서 봉토를 받은 형태로, 프랑스령에 한정해서는 필리프 2세가 주군이고 존은 가신이었기 때문에 이런 요청이 가능했다. 존은 자신은 노르망디 공작이라는 특별한 지위에 올랐으므로 필리프의 법정에 출석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필리프는 존을 노르망디 공작이 아니라 그런 특별한 지위가 아닌 푸아투 백작으로서 소환한다고 답했다. 존이 여전히 가기를 거부하자, 필리프는 1202년 존이 봉건적 책임을 위반했다고 선언하고, 프랑스 왕국에 속한 존의 모든 영지를(노르망디 공국 제외) 아르튀르에게 넘기겠으며 노르망디는 프랑스 왕실에 귀속된다고 선언했다. 이리하여 양자 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2.3.3. 미르보 전투의 승리와 존 왕의 치명적인 실책
존 왕은 프랑스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회피하고 주요 성채를 신중하게 방어했다. 그러던 1202년 8월, 이제 15살이 된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1세가 존 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그의 할머니 엘레오노르 다키텐이 피난처로 삼은 루덩 인근의 미르보 성을 포위했다. 엘레오노르는 항복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존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존 왕이 급파한 브람버 제4대 영주 기욤 3세 드 브리우즈가 앙주의 세네샬 기욤 드 로슈와 함께 역습을 가해 적군을 물리치고 아르튀르를 생포했다. 이 소식을 접한 필리프 2세는 아르튀르가 무너지면서 남쪽 측면이 약화하는 걸 막기 위해 남쪽으로 군대를 돌려야 했다.미르보 전투 승리로 존 왕의 입지는 상당히 강화되었지만, 그다음의 처세는 실로 부적절했다. 존은 자신을 도와줬던 기욤 드 로슈가 본래 아르튀르 파였다가 자기편으로 돌아섰던 전례를 고깝게 여기고 있었기에, 그가 이번에 자기를 도와준 공로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했다. 기욤은 이에 강한 반감을 품고 존에 대한 충성심을 거둬들였다. 게다가 존은 생포한 귀족 22명을 태양빛 한 점 안 들고 침수돼서 썩은 물이 바닥에 흥건한 지하 감옥에 가둬두어 굶기고 학대하여 옥사하게 했다. 이들은 친족 관계를 통해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기에, 이들과 연관된 노르망디 귀족들은 존의 행동에 극심한 분노를 터뜨렸다.
한편, 아르튀르 1세는 기욤 3세 드 브라우즈에게 넘겨진 뒤 팔레즈에 갇혔다가 다시 루앙 탑으로 이송되었다가 1203년 무렵에 돌연 실종했다. 아르튀르의 최후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 웨일스의 마감 마을에 위치한 마감 수도원의 기록에 따르면, 존 왕은 아르튀르를 붙잡아 한동안 감옥에 가두었다가, 부활절 전 목요일인 1203년 4월 3일에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술에 취해 악마에 사로잡혀 자기 손으로 아르튀르를 죽이고 무거운 돌에 묶인 시체를 센 강에 던졌다. 한 어부가 그물에서 그를 발견하고 해안으로 다시 데려온 뒤 생트마리 뒤 프레 수도원에 비밀리에 묻었다고 한다.
- 잉글랜드 수도자이자 연대기 작가 코번트리의 월터에 따르면, 아르튀르는 갑자기 사라졌고 매장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 코그스홀의 수도사 라울( Raoul de Coggeshall, ? ~ 1227)에 따르면, 팔레즈 요새 수비대장 휴버트 드 버그는 존 왕으로부터 의회의 동의를 받았으니 아르튀르를 거세해 왕위에 오를 수 없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휴버트는 명령에 따랐고, 아르튀르가 거세된 직후 사망하자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생앙드레 드 구페른의 시토회 수도원에 안장했다고 한다.
- 프랑스와 브르타뉴 연대기 작가들은 이 사건이 발생한 지 15일 후 브르타뉴인들이 반에 집결해 렌 주교를 필리프 2세에게 보내 존 왕을 아르튀르 살해 혐의로 고발했고, 필리프 2세는 프랑스에 있는 존 왕의 소유물을 박탈했다고 기술했다.
- 캐나다 출신의 언론인이자 역사 소설가 토머스 버트람 코스테인의 <정복한 가족: 플랜태저넷 왕조의 역사>(The conquering family : a history of the Plantagenets)에 따르면, 존 왕은 1208년 아르튀르가 살해되었다는 이야기가 세상에 퍼지자 아르튀르를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던 기욤 드 로슈(Guillaume des Roches)의 모든 영토를 압수하고 장남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기욤 드 로슈는 아들을 인질로 보내려 했지만, 아내 모드 드 브리우즈가 자기 조카를 사악하게 살해한 자에게 자녀를 맡기지 않을 거라며 단호히 거부했고, 존 왕은 격분해 모드와 그녀의 아들들을 코프 성에 가뒀다. 기욤은 파리로 피신한 뒤 아르튀르 실종 사건에 대해 한 번도 알려진 적이 없었던 사실을 밝혔고, 얼마 후 파리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아르튀르가 사망한 뒤 브르타뉴 공작위는 본래 그의 누나 엘레오노르가 물려받아야 했지만, 그녀는 1202년 존 왕에게 생포된 뒤 1241년 8월 10일 브리스톨에서 사망할 때까지 억류되었다. 이에 분노한 브르타뉴 귀족들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기욤 드 로슈 및 존의 다른 지역 동맹들은 필리프 2세 지지로 돌아섰다. 이렇게 동맹이 이탈하면서, 존의 입지는 급격히 약화했다.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사절을 보내 분쟁에 개입하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파란색은 필리프 2세가 직접 지배한 직할지, 녹색은 필리프 2세의 봉신의 영토, 노란색은 교회령, 빨간색이 잉글랜드 왕의 프랑스령이다.
이것은 1200년의 지도로 1199년 리처드 1세가 죽은 다음 존에게 물려준 영토를 보여준다. 리처드가 십자군 원정에 가 있던 동안 필리프가 잉글랜드령을 일부 빼앗았지만, 리처드가 돌아오고 나서 필리프를 몰아내어 프랑스 남동부를 제외하면 1180년의 영토와 거의 변함이 없다.
1203년 후반, 존 왕은 노르망디 동부 국경 요새인 가이야르 성을 필리프 2세의 포위로부터 구원하려 했다. 그는 부대를 둘로 나눈 뒤, 한 부대는 본인이 직접 이끌고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배다리를 파괴해 프랑스군을 양분하고, 윌리엄 마셜이 이끄는 육군이 배다리가 파괴되면서 후퇴할 수 없게 된 프랑스군 분견대를 섬멸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후의 전개는 그의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배에는 군대와 선원 외에도 수비대를 위한 보급품이 많이 실려 있었고, 조류와 조수에 맞서 상류로 노를 저어 가는 데 계획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에 마셜이 적군을 급습하면서 일시적으로 우세를 점했지만, 해군이 좀처럼 오지 않는 가운데 적군이 배다리를 건너 본대와 합류해 재정비해 버렸다. 이후 프랑스군은 반격을 가해 마셜의 육군을 몰아냈다. 이윽고 잉글랜드 해군이 배다리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군은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결국 잉글랜드군은 상당한 손실을 보고 퇴각했다. 가이야르 성은 이후에도 꿋꿋이 버텼지만, 프랑스군의 압도적인 공세에 시달린 끝에 1204년 3월 6일에 항복했다.
존 왕은 필리프 2세는 동부 노르망디에서 끌어내기 위해 브르타뉴로 진군하여 브르타뉴 대부분을 성공적으로 황폐화했지만, 동부 노르망디를 빠르게 상실하는 걸 막지 못했다. 그 후 필리프 2세는 압도적인 군세와 지역 귀족들의 열띤 호응에 힘입어 1204년 6월 24일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 루앙을 접수하고 노르망디 공국의 모든 귀족으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뒤이어 남쪽으로 진군해 앙주와 푸아투에 무혈 입성했으며, 브르타뉴 여공작으로 알릭스 드 투아르를 세우고 알릭스의 아버지 기 드 투아르를 브르타뉴 보안관으로 세웠다. 존은 전세가 기울자, 잉글랜드 왕국으로 피신했고, 유럽 대륙에서 존이 유일하게 소유한 영토는 아키텐 공국만 남았다.
2.3.4. 과세 정책
잉글랜드로 돌아온 존은 노르망디를 탈환하기 위해 막대한 군자금을 조속히 마련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플랜태저넷 왕조의 국왕들은 개인 토지 또는 영지에서 발생하는 수입, 봉건 영주의 권리를 통해 모은 돈, 그리고 과세에서 발생하는 수입이라는 세 가지 주요 수입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왕실 영지에서 발생하는 수입은 융통성이 없었고 노르만 정복 이후로 천천히 줄어들었다. 1189년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을 떠나기 위한 군자금 마련을 위해 많은 왕실 재산을 매각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하였고, 과세는 이후 몇 세기보다 왕실 수입에서 훨씬 작은 역할을 했다.한편, 잉글랜드 군주들은 왕들은 봉건적 군사 복무를 왕에게 현금으로 지불함으로써 회피할 수 있는 스카티지 제도를 포함하여 수입을 창출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광범위한 봉건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벌금, 법원 수수료, 헌장 및 기타 특권의 판매를 통해 수입을 챙길 수도 있었다. 존은 가능한 모든 수입원을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했다. 그 결과 신적이지만 인기 없는 재정 조치가 잇따라 시행되었고, 그는 연대기에서 "탐욕스럽고, 인색하고, 강탈적이며, 돈만 생각하는" 사람으로 간주했다.
존 왕은 왕으로 재위한 17년 동안 세금 징수금은 11번 부과했다. 많은 경우 실제 군사 작전이 없는 상황에서 세금 징수금을 부과했는데, 이는 세금 징수금이 실제 군 복무의 대안이라는 원래의 생각과 상치되었다. 존은 영지와 성을 상속받았을 때 구제금 지급을 요구할 권리를 최대한 활용했으며, 때로는 남작의 지급 능력을 넘어서는 엄청난 금액을 부과하기도 했다. 그는 산림 관리인을 연이어 신설했는데, 이 직책을 상당한 자금을 주고 구매한 이들은 산림을 이용하는 자들로부터 벌금과 처벌을 늘려 투자를 회수했다. 과부에게 부과하는 요금을 인상한 리처드 1세의 조치는 존 치하에서 확대되었다. 존은 리버풀 마을을 포함한 새로운 마을에 대한 특허장을 계속 판매했으며, 특허장은 왕국 전역과 가스코뉴의 시장에 판매되었다.
또한 왕에게만 보호를 받는 취약한 위치에 있던 유대인은 엄청난 세금을 내야 했는데, 1210년에는 44,000파운드에 달하는 막대한 액수가 부과되었다. 이에 유대인 대부업자들은 이 자금을 기독교 채무자에게 전가했다. 존 왕은 1207년 소득 및 동산에 대한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다. 이는 현대 소득세와 유사한 형태로, 이를 통해 60,000파운드를 마련했다. 또한 그는 왕실에 직접 지불해야 하는 새로운 수입 및 수출 관세를 만들었다.
당시 군주는 은으로 세금을 징수한 다음 이를 다시 주조하여 새로운 동전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동전은 통에 담겨 전국의 왕궁으로 보내져 용병을 고용하거나 다른 비용을 충당하는 데 사용되었다. 존이 노르망디 원정을 준비하던 당시에는 엄청난 양의 은을 경제에서 인출하여 몇 달 동안 저장해야 했는데, 이에 따라 의도치 않게 은화를 구하기 어려운 기간이 발생했고, 상업적 신용을 얻기 어려웠으며 경제에 디플레이션 압력이 가해졌다. 존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1204년과 1205년에 주화를 개편하고 품질과 일관성을 개선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2.3.5. 사법과 행정 정책
존 왕은 프랑스 왕국군의 공세에 밀리는 와중에도 잉글랜드의 사법과 행정에 매우 적극적이었고, 정부의 모든 측면에 관여했다. 법원은 기록과 통신을 보관했고, 재무부와 재무부는 각각 수입과 지출을 다루었으며, 다양한 순회 판사들이 왕국 전역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파견되어 각지를 돌며 재판을 주관했다. 존은 그의 전임자들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영국에 머물렀는데, 특히 이전에는 여러 전임자에게 무시당했던 잉글랜드 북부 지역의 관리에 힘썼다. 또한 존은 지방 관원과 집행관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1194년 휴버트 월터가 처음 도입한 검시관 제도를 확대하여 새로운 계층의 자치구 검시관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임명한 판사를 통해, 법률 전문가와 전문 지식을 육성하고, 직접 사건에 개입하여 이 제도가 잘 운용되도록 노력했으며, 전쟁이 안 풀리는 와중에도 비교적 사소한 사건을 직접 판결했다.중세 영국 역사가 윌프레드 루이스 워런(Wilfred Lewis Warren, 1929 ~ 1994)는 존 왕이 열정과 쉼 없이 정의를 제공하는 왕의 의무를 수행했으며, 잉글랜드 일반법은 존의 활약 덕분에 발전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반면, 비판론자들은 존 왕이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보다는 수수료를 인상할 수 있는 왕의 법적 절차의 잠재력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었을 거라고 주장한다. 존의 이러한 정책은 남작들에게는 자의적이고 보복적인 왕의 정의에 복종해야 했기에 불만을 품었지만, 자유 소작인들은 남작을 우회해서 왕에게 직소할 수 있는 이러한 체계를 환영했다.
존 왕은 직속 부하들을 키우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의 추종자들은 2개 그룹으로 구성되었다. 한 그룹은 파밀리아레스 레지스(familiares regis)로, 존 왕의 친구이자 기사였다. 그들은 군사 작전을 조직하고 지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다른 그룹은 쿠리아 레지스(curia regis)로, 왕의 일상 통치에 필수적인 고위 관리이자 대리인이었다. 많은 하급 귀족이 유럽 대륙에서 찾아와서 궁정에서 직위를 맡았는데, 다수가 푸아투에서 온 용병 지도자들이었다. 대표적인 인사로 팔케스 드 브레오테, 제라르 드 아테, 엥겔라르 드 시고네, 필립 마크를 들 수 있다.
반면에, 존은 자신에게 도전할 만큼 충분한 권력과 부를 가진 귀족들을 깊이 의심했다. 초대 펨브로크 백작이며 충성심의 모범으로 추앙받는 유명한 기사 윌리엄 마셜은 존의 견제와 의심에 시달려야 했으며, 아일랜드에 영지를 소유했던 제4대 브램버 영주 윌리엄 드 브라오스는 40,000마크에 달하는 거액을 지불하라는 왕명을 거부했다가 왕의 군대에 쫓겨 해외로 망명했다가 1211년 사망했고, 아내 모드와 자식 한 명은 투옥되었다가 감옥에서 옥사했으며, 그의 손자들은 1218년까지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다. 왕에게 충성하는 영주들 역시 존의 의심과 질투에 시달려야 했다. 상황이 이러니 귀족들이 존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리 만무했고, 이는 존의 재위 말기에 대규모 내전이 벌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2.3.6. 국외 정책
1205년, 존 왕은 필리프 2세가 잉글랜드까지 쳐들어오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각 주가 지역 징집병을 동원하는 체계를 수립했다. 이후 필리프 2세가 침략하지 않는다는 게 분명해지자, 그는 푸아투를 향한 잉글래드 대규모 원정대를 편성했고, 본인은 새로운 함대를 창설해 노르망디로 항해하려 했다. 그는 이를 달성하기 위해 잉글랜드 기사 10명 중 1명꼴로 전쟁에 동원하고 나머지 9명은 재정적으로 지원하도록 했으며, 기사들은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왕의 휘하에서 복무하도록 했다.존은 공성전을 준비하고자 강력한 공병대 및 상당한 수의 전문 석궁병 부대를 창설했으며, 제3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롱게스피, 윌리엄 마셜, 로저 드 레이시, 웨일스 변경백 윌리엄 드 브라오스를 포함한 군사 전문 지식을 가진 유력한 남작들의 지원을 받았다. 존 왕은 전통적으로 사용되는 항구인 도버 항 등 잉글랜드 남동부의 다섯 개 항구 외에도 포츠머스를 추가로 확장했으며, 1204년부터 1212년까지 104척을 건조했다. 잉글랜드 행정관 로섬의 윌리엄이 "갤리선의 수호자"로 임명된 뒤 잉글랜드 남쪽 해안에 흩어진 함대와 상선을 하나의 작전 함대로 통합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렇듯 준비를 철저히 했지만, 상황은 잘 풀리지 않았다. 1205년에 감행하려던 원정 계획은 잉글랜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는 걸 수습해야 했기에 중단되었고, 윌리엄 롱게스피가 이끄는 소규모 병력 만이 푸아투로 투입되었다. 1206년, 존은 직접 푸아투로 진군했지만,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알폰소 8세가 가스코뉴를 위협하자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야 했다. 알폰소 8세의 군대를 국경지대에서 저지하는 데 성공한 뒤, 존은 다시 북쪽으로 이동해 앙주 백국의 중심지인 앙제를 점령했다. 필리프 2세는 존과 대결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했지만, 양자 모두 섣불리 전면전을 벌이지 않으면서 교착 상태가 이어지다가 2년간 휴전 협약을 맺었다.
존 왕은 휴전 기간 동안 노르망디를 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준비했다. 그는 막대한 돈을 모집한 뒤, 새로운 동맹을 맺는 데 활용했다. 우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놓고 프리드리히 2세와 경쟁하던 조카 오토 4세를 회유했으며, 뒤이어 불로뉴의 르노 백작, 플란데런의 페랑 백작을 포섭했다. 1209년, 스코틀랜드 국왕 일리엄 1세가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고 잉글래드 북부를 침공하려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존 왕은 스코틀랜드로 진군해 스코틀랜드 남부를 파괴한 뒤 일리엄 1세와 노럼 조약을 체결했다. 그는 이 조약으로 일리엄 1세의 딸들을 볼모로 삼을 수 있었으며, 10,000 파운드의 배상금을 받아냈다.
존 왕은 웨일스에도 신경 썼다. 그는 웨일스를 1204년에서 1211년 사이에 매년 방문했고, 사생아 조안을 귀네드 왕국의 국왕 허웰린 압 요르웨르스와 결혼시켰다. 또한 변경백과 토착 웨일스인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토와 권력을 확대했고, 왕실의 군대를 활용해 웨일스 통치자들을 상대로 유리한 조건의 거래를 연이어 맺었다. 1211년 허웰린이 윌리엄 드 브라오스가 존 왕에 의해 제거된 뒤 웨일스에 혼란이 벌어진 틈을 타 봉기를 일으키자, 존은 웨일즈 중심부를 공격해 허웰린을 복종시킨 뒤, 웨일스 대부분에 걸쳐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는 걸 허용하도록 강요했다.
2.3.7. 교황청과의 분쟁
1205년 7월 13일, 캔터베리 대주교 휴버트 월터가 사망했다. 존은 노리치 주교이자 자신의 주종자인 존 드 그레이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세우고 싶었지만, 캔터베리 대성당 회의는 자기들이 대주교를 선출할 독점적 권리가 있다면서, 부수도원장인 레지널드를 세우기로 했다. 회의는 왕의 허락 없이 레지널드를 세웠고, 그는 확인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갔다. 그러자 캔터베리 지방 주교들이 회의에 참석한 자들이 자기들의 동의 없이 멋대로 세웠다며 반발했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레지널드를 인정하지 말아 달라고 청원했다.존 왕은 캔터베리 대성당 회의를 압박해 레지널드 대신 존 드 그레이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세우도록 했고, 교황청에 새로운 결정을 알리기 위해 사절을 로마로 보냈다. 그러나 인노첸시오 3세는 레지널드와 존 드 그레이를 모두 부인하고, 스티븐 랭턴을 새 대주교로 세우기로 했다. 그러자 존 왕은 잉글랜드 군주로서 캔터베리 대주교 선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관습적 권리가 침해되었다며 분노했다. 여기에 랭턴이 카페 왕조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았다고 여겼다. 그는 랭턴이 잉글래드에 입국하는 걸 금지했고, 캔터베리 대주교구의 영지와 교황의 다른 소유지를 압류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사절을 보내 존 왕에게 마음을 바꾸라고 설득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인노첸시오 3세는 1208년 3월 잉글랜드 전역에 성무 금지령을 내려 성직자들이 종교 예배를 거행하는 것을 금지했다. 단, 청소년의 세례와 임종자의 고백과 사면을 해주는 것만은 허용했다. 존 왕은 이에 대응해 예배를 드리려 하지 않는 성직자들의 땅과 인노첸시오 3세 본인과 관련된 재산을 몰수했다. 이때 많은 성직자가 두었던 첩들을 체포한 뒤 벌금을 낸 후에야 풀어줬으며, 잉글랜드를 떠난 교회 관계자들의 땅을 몰수했고, 자신에게 충성을 다할 의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호를 약속했다. 개별 기관들은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고 영지의 생산물을 보관하기 위한 조건을 협상할 수 있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존 왕이 모든 조치를 철회하고 랭턴의 임명에 동의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했지만 존 왕이 따르지 않자, 1209년 11월에 존 왕을 파문했다. 존 왕은 이에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가까운 동맹인 오토 4세와 툴루즈 백작 레몽 6세도 같은 처벌을 받았지만, 추종자들이 별로 이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기존의 조치를 강화하고 공석인 교구와 수도원의 수입에서 상당한 금액을 모았다. 공식 수치에 따르면, 잉글랜드 교회의 연간 수입의 약 14%가 존에게 넘어갔다고 한다.
인노첸시오 3세는 존에 대한 파문이 먹히지 않자, 그와의 화해를 모색했다. 수도원 공동체는 1209년부터 교황의 지시에 따라 비공개로 미사를 거행할 수 있었고, 1212년 후반에는 임종자를 위한 성찬 예배가 허가되었다. 장례와 평신도의 교회 출입은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었지만, 실제로는 암암리에 행해졌다. 하지만 존 왕이 꿈쩍도 하지 않자, 결국 인노첸시오 3세는 1213년 1월 필리프 2세에게 잉글랜드를 침공해 존 왕을 폐위하라고 권고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존 왕은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화해를 청했고, 1213년 5월 도버의 템플기사단 교회에서 교황 특사 판둘프 베라치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수락되었다. 존 왕은 스티븐 랭턴이 캔터베리 대주교로 취임하는 걸 받아들였고, 잉글랜드 왕국을 교황청에 매년 1,000 마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양도하겠다고 제안했으며, 위기 동안 손실된 수입을 교회에 보상하기로 했다.
이렇게 합의가 맺어진 뒤, 인노첸시오 3세는 즉시 필리프 2세의 잉글랜드 침공 계획을 반대했고, 평화를 위해 협상할 것을 촉구했다. 존은 교회에 약속한 보상금 중 일부를 지급했지만 1214년 후반에 지급을 중단하여 금액의 3분의 2를 지급하지 않았다. 일부 연대기 작가들은 존이 교황청에게 파문당했다가 교황에게 빌어서 겨우 용서받은 사건으로 인해 굴욕을 당했다고 주장했지만, 민중들은 존이 파문당한 것에 대해 딱히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2.3.8. 1214년 프랑스 원정
1213년 1월, 필리프 2세는 잉글랜드를 침공해 존 왕을 폐위하라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지시에 순종하겠다는 수아송에서 프랑스 귀족들을 소집한 뒤 교황 특사 판둘프 베라치오의 격려하에 잉글랜드를 침공하기 위한 대규모 함대를 소집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1213년 5월 존 왕과 교황청 간의 합의가 비준되자, 필리프 2세는 판둘프 베라치오의 권유에 따라 잉글랜드에 대한 원정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 대신, 존 왕이 아직 파문 중이었을 때 수아송에서 소집한 회의에 불참하고 잉글랜드 원정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불충한 봉신인 플란데런 백작 페랑을 응징하기로 하고, 당초 잉글랜드를 치려던 대규모 함대를 플란데런 침공으로 돌렸다.이 소식을 접한 존 왕은 윌리엄 롱게스피에게 플란데런 백작을 도우라고 명령했다. 윌리엄은 잉글랜드 및 플란데런 무장병 700명과 수행원 수백 명, 많은 용병을 수백 척 함대에 태운 뒤 5월 28일 출항해 5월 30일 즈윈강 어귀에 이르렀다. 이때 프랑스 함대는 잉글랜드 함대가 플란데런에 온다는 걸 사전에 인지하지 못한 채 대부분의 함선을 담 해변에 정박하고 겐트를 포위했으며, 많은 선원들은 주변 마을들을 약탈했다.
윌리엄 롱게스피는 프랑스 함대와 이렇게 빨리 마주칠 줄 몰랐기에, 처음에는 플란데런 함대일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정찰선을 보내 살펴본 결과 프랑스 함대임을 인지했고, 함선들이 거의 텅 빈 상태인 걸 알게 되자 즉시 공격해 정박해 있던 함선 300척을 나포하고 100척을 불태웠으며, 배에 남아있던 선원들을 약탈했다.( 담 해전) 다음 날 육지에 상륙한 뒤 담 시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자 남은 프랑스 함선들을 사냥하려 들었다.
나중에 이 소식을 접한 필리프 2세는 매우 격노해 6월 2일 담에 도착한 뒤 그곳에 주둔한 프랑스 수비대를 구제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잉글랜드 선박 무리가 프랑스의 남은 선박을 거의 마음대로 약탈하고 포획하거나 불태운 뒤 유유히 본국으로 돌아가는 걸 보고 이를 갈았다. 이후 다수의 선원이 최근까지 잉글랜드의 영토였던 푸아티에나 노르망디 출신인 점을 의심해 살아남은 선박을 불태우고 담 마을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존 왕은 담 해전의 대승에 고무되어 프랑스 원정을 서두르기로 마음먹었다.
1214년 2월, 존은 필리프 2세로부터 노르망디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감행했다. 많은 영주들이 군 복무를 거부했기 때문에, 용병 기사들을 대거 고용해야 했다. 존은 푸아투에 상륙한 뒤 북동쪽으로 파리를 향해 진군하고, 동맹 세력인 오토 4세, 불로뉴 백작 르노, 플란데런 백작 페랑이 윌리엄 롱케스피가 이끄는 잉글랜드 분견대와 합세한 뒤 플란데런에서 프랑스 북동부를 침공하기로 했다. 작전이 잘 먹히면 필리프 2세는 군대를 양분할 수밖에 없으니, 연합군은 적을 성공적으로 협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원정은 초기엔 잘 진행되었다. 존 왕은 필리프 2세의 중앙 집권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위그 9세 드 뤼지냥과 화해하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느베르 백작 에르베도 그의 편애 섰다. 그 후 존은 3월에 푸아투를 장악한 뒤 루아르강을 건너 앙주를 침공했다. 필리프 2세는 이를 막기 위해 아들 루이 왕자과 함께 정예병을 이끌고 남하했다. 그는 소뮈르와 쉬농을 거쳐 아키텐으로 향하는 존의 퇴각로를 차단하려고 노력했다. 존 왕은 이를 알게 되자 앙주를 버리고 남쪽으로 재빨리 이동해 4월 3일 리모주에 도착했다. 존 왕은 필리프 2세를 가능한 남쪽으로 유인해, 연합군이 플란데런에서 프랑스 북동부를 실컷 유린하도록 유도하려 했다.
그러나 필리프 2세는 존 왕을 더 이상 쫓기를 거부하고, 푸아투의 반란 세력이 지닌 영지를 약탈한 후, 샤토루에서 수천 병력을 아들에게 넘긴 뒤 파리로 귀환했다. 존 왕은 필리프 2세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방향을 바꿔서 5월에 푸아투로 이동했다. 이후 루아르강을 빠르게 건너 앙주를 재차 침공했고, 루이 왕자의 추격을 교묘하게 따돌려 많은 마을을 접수한 뒤 6월 19일 로슈오무앵 성을 포위했다. 이후 15일간 공방전을 이어가고 있을 때, 루이 왕자가 기욤 드 로슈와 아이머리 1세 드 크라옹이 이끄는 앙주 징집병들의 지원을 받아 인근으로 진군했다.
존 왕은 이들을 요격하려 했지만, 앙주에서 모집한 귀족과 장병들이 그를 위해 프랑스 왕자와 싸우길 거부했다. 결국 존 왕은 7월 3일에 루아르강을 다시 건너 라 로셀로 후퇴했는데, 그 과정에서 후위대가 루이 왕자의 군대에 요격되어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얼마 후, 존 왕은 1214년 7월 27일 부빈 전투에서 오토 4세, 르노 1세, 페랑이 이끄는 연합군이 필리프 2세의 프랑스군에게 완패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이 소식에 몹시 비통해하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나는 불운하다! 이토록 운이 없는 것은 내가 주님과 화해하고 왕국을 로마 교황청에 갖다 바쳤기 때문이다!"
그 후 존 왕은 필리프 2세와 협상한 끝에 앙주를 필리프 2세에게 반환하고 보상금을 지불하며, 6년간 휴전을 맺는 평화 협약을 맺고 1214년 10월에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2.3.9. 마그나 카르타
존 왕이 잉글랜드로 돌아온 직후, 잉글랜드 북부와 동부에서 귀족들이 왕의 무자비한 통치와 무능을 성토하며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연합군을 형성한 뒤 런던으로 진군했다. 존 왕은 1215년 1월 런던에서 회의를 열어 잠재적 개혁을 논의했고 봄 동안 옥스퍼드에서 그의 대리인과 반군 간의 논의를 후원했다. 그러면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십자군을 이끌 테니 자신에게 지지를 표명하는 편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교황의 서신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노력했다.
인노첸시오 3세의 서한은 1215년 4월에 도착했지만, 그때는 이미 반군 귀족들이 강력한 위세를 구축한 뒤였다. 그들은 5월에 노샘프턴에 집결해 존과의 봉건적 관계를 포기하고 에식스주 리틀던모의 봉건 귀족이자 베이너드 성의 치안관인 로버트 피츠월터를 지도자로 선출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 하느님의 군대"라고 자칭하면서 런던으로 진군해 런던시와 링컨, 엑서터를 접수했다. 이에 존을 따르던 왕당파 귀족들이 대거 이탈했고, 존은 별수 없이 캔터베리 대주교 랭턴에게 반군 귀족들과 평화 회담을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1215년 6월 15일, 존은 윈저성 근처의 러니미드에서 반군 지도자들과 접견했다. 랭턴의 중재 노력으로 제안된 평화 협정을 담은 헌장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마그나 카르타이다. 이 헌장은 단순히 귀족들의 특정 불만 사항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농노나 비자유 노동이 아닌 자유인의 권리에 초점을 맞춘 광범위한 정치 개혁안을 제시했다. 헌장은 교회 권리 보호, 불법 투옥으로부터의 보호, 신속한 사법 접근, 귀족의 동의가 있어야만 하는 새로운 과세, 봉건적 봉건 지급에 대한 제한을 약속했다. 또한 25명의 귀족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존이 앞으로 헌장을 준수하는지 감시할 것이었다. 또한 런던은 존 왕에게 돌아가고, 반란군은 해산하기로 했다.
그러나 양측은 상대방의 진의를 의심했다. 반군 귀족들은 귀족 위원회를 강경파로 채우고, 합의한 대로 군대를 해산하거나 런던을 넘겨주기를 거부했다. 존 왕은 이에 대응해 인노첸시오 3세에게 도움을 호소하면서, 헌장이 교황청이 존의 주군이 된 1213년 협정에 따른 교황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지적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존의 주장이 옳다고 여기고, 헌장을 "부끄럽고 모욕적일 뿐만 아니라 불법적이고 부당하다"고 선언하고 반군 귀족들을 파문했다.
2.3.10. 제1차 남작 전쟁
반란군 지도부는 인노첸시오 3세의 파문을 유도한 존 왕에 반발하여 본격적으로 군사 활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캔터베리 대주교가 소유했지만, 병력을 거의 두지 않은 로체스터 성을 접수했다. 존은 이에 맞서 윌리엄 마셜과 제6대 체스터 백작 라눌프 드 블론드빌과 같은 강력한 변경백들의 지원을 확보했다. 존은 런던에 있는 반군 영주들을 고립시키고 플란데런에 있는 용병의 주요 공급원과 이어지는 보급로를 보호하며, 프랑스군이 남동부에 상륙하는 것을 막은 다음 반란군을 천천히 소모하는 전략을 세웠다.1215년 11월, 존은 강력한 공병대를 동원해 우수한 공성 무기를 대량으로 만든 후 반군 남작 윌리엄 도비니가 지배하던 로체스터 성을 집중적으로 타격한 끝에 탈환했다.( 로체스터 공방전) 그 후 군대를 분할하여 윌리엄 롱게스피에게 1개 분견대를 보내 런던 북쪽과 동부 앵글리아를 탈환하도록 했고, 본인은 노팅엄을 거쳐 북쪽으로 향해 북부 남작들의 영지를 공격했다. 두 작전 모두 성공적이었고, 반군 대부분은 런던에서 꼼짝 못 했다. 1216년 1월, 존은 반군과 동맹을 맺은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2세의 잉글랜드 북부 침공에 신속하게 대응했다. 그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알락산더르 2세의 영지를 공략하고, 10일 만에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든버러를 포위했다.
존 왕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공세로 궁지에 몰린 반란 귀족들은 프랑스 왕국에 사절을 보내 루이 왕자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세우고 싶으니, 군대를 이끌고 와달라고 요청했다. 루이 왕자는 헨리 2세의 손녀인 카스티야의 블랑카와 결혼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할 권리가 있었다. 루이 왕자는 즉시 이에 응해 함대를 조성하여 잉글랜드로 건너갈 준비에 착수했다. 이 소식을 접한 존 왕은 루이가 이대로 건너가서 반란군에게 필요한 군함과 공성 무기를 가져오면 일이 틀어져 버린다고 여기고, 알락산더르 2세와 휴전 협약을 맺은 뒤 남쪽으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1216년 5월, 루이 왕자는 영국해협으로 출항했다. 존 왕은 그를 막기 위해 해군을 항구에 집결했지만, 불행히도 심한 폭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흩어졌다. 그 사이, 루이 왕자는 켄트주에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했다. 존 왕은 루이 왕자를 즉시 공격할지 고심하다가, 우수한 전투력을 갖춘 프랑스군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위험할뿐더러 자기 부하들의 충성심이 의심되기도 했기에 루이를 즉시 공격하지 않기로 했다. 존은 잉글랜드 서부로 후퇴한 뒤 방어를 재편했다. 그러나 그사이에 그동안 그를 따랐던 윌리엄 롱게스피를 포함한 추종자 여럿이 반군에 투항해 버렸다. 여름이 끝날 무렵, 반군은 잉글랜드 남동부와 북부 일부를 장악했다.
2.4. 최후
1216년 9월, 존 왕은 코츠월드에서 새로운 병력을 집결한 뒤 반란군에게 포위된 윈저성을 돕는 척하다가, 방향을 틀어서 런던을 우회한 뒤 동쪽으로 케임브리지까지 공격하여 링컨셔와 동앵글리아의 반군 지역을 분리했다. 이후 북쪽으로 진군하여 링컨 성을 포위한 반란군을 격파했고, 뒤이어 린으로 이동해 더 많은 보급품을 대륙으로부터 공급받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린에서 이질에 걸려 중태에 빠졌다. 한편, 알락산더르 2세는 다시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해 8월에 칼라일을 점령한 뒤 남쪽으로 파고들면서, 잉글랜드 왕국 내 토지의 영주로서 루이 왕자에게 경의를 표했다.존은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동했다가 상당한 보급물자를 잃었다. 웬도버의 로저에 따르면, 존 왕이 워시 강을 건너다가 잉글랜드 왕실 보석을 포함한 왕의 소지품이 거센 물살에 휘말려 사라졌다고 한다. 노팅엄셔의 뉴어크 성에 도착했을 때, 존의 증세가 악화하여 더 이상 이동할 수 없었다. 그는 1216년 10월 18일 밤에 사망했다. 그 직후 그가 독이 든 맥주, 독이 든 자두 또는 복숭아 과다 섭취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퍼졌지만, 학자들은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간주한다. 또한 야사에서는 존이 죽은 뒤 그가 늑대인간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사람들이 무덤을 파헤치고 배를 갈라 보는 등의 시체 훼손을 벌였다고 하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그의 유해는 용병대에 의해 남쪽으로 호송되었고, 우스터 대성당의 세인트 울프스탄 제단 앞에 안장되었다. 그를 위해 형상이 있는 새로운 석관이 만들어졌다.
존이 사망한 뒤, 9세의 아들 헨리 3세가 추종자들에 의해 왕위에 올랐고, 윌리엄 마셜이 헨리 3세의 보호자로 선언되었다. 내전은 1217년 링컨 전투와 도버 공방전, 샌드위치 해전에서 왕당파가 승리하고 루이 왕자가 잉글랜드 국왕을 포기하고 돌아갈 때까지 이어졌다. 헨리 3세는 노르망디와 앙주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계속했지만, 결국 프랑스 왕실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남은 영지라도 보전하기 위해 1259년 노르망디, 앙주, 멘, 푸아투의 지배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아키텐 공작은 인정받는다는 내용의 파리 조약을 체결했다.
3. 평가
영국에서의 평가는 두말할 필요 없는 영국사 최악의 암군이지만, 전투 능력은 '무딘 칼 존'이라는 조롱 어린 후세의 평가와는 달리 아주 무능하지는 않았던 걸로 보인다. 존은 직위 초기 내치나 행정 부분에서는 꽤 능력을 발휘했다고 전해진다.[5] 또한 해군의 육성, 리버풀의 건설, 스코틀랜드, 웨일스에서의 지배 확립 등에는 일정 부분 업적이 있다고도 여겨진다.
일선에서의 지휘 능력은 상당히 뛰어난 수준이었다는 말도 존재한다. 왕자 시절 어머니가 미라주성[6]에서 프랑스군에 의하여 포위되었을 때 수백 기사들만을 이끌고 이틀 만에 130km를 주파, 기습하여 역으로 포위군의 지휘부를 제압한 일이나,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몽토방[7] 성채를 공성하여 함락시킨 전과가 있다. 따라서 야전 지휘 능력은 아버지와 형을 닮아 최소 평균 이상은 되었으며, 의회에 의해 마그나 카르타가 성립되자 잉글랜드 남부로 피난하여 교황의 지지와 용병의 고용이 완료된 후 런던으로 진격하자 의기양양하던 귀족들 중 아무도 그의 군사를 막기 위해 선뜻 나서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일선 군사 지휘관으로서는 그럭저럭 평균 이상일지도 모르나 노르망디에서의 공격 실패나 1214년의 실패 등으로 미루어 보면 최고 군사 지휘자로서의 전략적 판단에는 분명 적지 않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뭔가 작전을 세울 때는 양면 공격 등 화려하고 멋져 보이는데, 작전이란 건 단순할수록 실행하기 쉽다는 점을 간과한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 단순하지만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작전을 세우며, 전쟁의 화신이던 형 리처드 1세나 전투보다는 모략에 능했던 군주였지만, 군사적 능력도 우수했던[8] 필리프 2세와 다른 점이다.
또한 정치, 외교적으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필리프와 전쟁 초기만 해도 잉글랜드의 프랑스령의 영주들은 존 왕을 따랐지만, 자신을 도와주던 영주를 무시한다든지 포로를 죽게 내버려 둔다든지 해서 얼마든지 제 편으로 삼을 수 있는 봉신들을 모조리 적으로 돌려버렸다. 리처드 1세는 자신을 열받게 하면 사정없이 밟아버리는 인간이었지만[9], 그 못지않게 이성적이라 쓸데없는 적을 만들지 않았다.[10] 그는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는 중 그 상처를 입힌 병사를 용서해 주는 등,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관용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리처드 1세가 벌여놓은 일들의 여파로 잉글랜드의 막장스런 내정 사태를 감당할 수 없었다며 옹호하는 의견도 있는데 애초에 필리프가 지배한 영토는 존왕이 지배한 영토의 반도 안 되었고 세금 수입도 그만큼 적었다.[11] 게다가 존왕이 세금을 적게 거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존이 영지를 잃어버린 건 재정이 궁핍해 군대를 유지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프랑스령의 봉신들이 전부 필리프 2세에게 붙었기 때문인데 이것은 존 개인의 인격적인 결함이 문제이지 잉글랜드의 내정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다.
정식 명칭은 아니지만 1154년부터 존이 프랑스령을 완전히 상실하는 1214년까지 잉글랜드왕이 지배한 지역을 합쳐서 영국에선 앙주 제국(Angevin Empire), 프랑스에선 플랑타주네 제국(Empire Plantagenêt)이라고 부른다. 당시 프랑스령의 생산력이 엄청나서 아키텐에서 나오는 세금만으로 잉글랜드 전체의 세금과 거의 맞먹을 정도였으니, 잉글랜드가 프랑스의 절반을 계속 지배했다면 후대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지 모를 일이다. 때문에 영국인들은 " 리처드 1세가 조금만 더 살았다면..." 하고 아쉬워하며, " 앙주 제국이 계속되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What if the angevin empire survived?) 하고 영미권의 IF 놀이에서 종종 등장하는 소재이다.
4. 가족 관계
4.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헨리 3세 (Henry III) |
1207년 10월 1일 | 1272년 11월 16일 |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 슬하 2남 2녀[12] |
2남 |
로마 왕 리하르트 (Richard, King of the Romans) |
1209년 1월 5일 | 1272년 4월 2일 |
이사벨 마샬 슬하 1남 |
프로방스의 산치아 슬하 2남 |
||||
팔켄부르크의 베아트릭스 | ||||
1녀 |
스코틀랜드의 왕비 조앤 (Joan, Queen of Scots) |
1210년 7월 22일 | 1238년 3월 4일 | 알렉산다르 2세 |
2녀 |
신성로마 제국의 황후 이자벨라 (Isabella, The Holy Roman Empress) |
1214년 | 1241년 12월 1일 |
프리드리히 2세 슬하 1녀 |
3녀 |
레스터 백작부인 엘레오노르 (Eleanor, Countess of Leicester) |
1215년 | 1275년 4월 13일 | 펨부로크 백작 기욤 마레샬 |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 슬하 4남 1녀 |
4.2. 사생아
- 리처드 피츠로이(? ~ 1246): 초대 칠엄 남작. 제1차 남작 전쟁 시기 아버지를 위해 반란군과 대적했으며, 제1차 남작 전쟁의 종결을 이끈 샌드위치 해전 승리에 공헌했다.
- 조안(1191 ~ 1237): 귀네드 왕국의 국왕 허웰린 압 요르웨르스의 왕비.
- 존: 세무원을 맡았다고 전해진다.
- 제프리(? ~ 1205): 페르슈의 영주.
- 올리버 피츠레지스(1199 ~ 1218/1219): 1216년 윈체스터의 울버지 성에서 반란군의 포위 공격에 맞서 항전했으며, 1217년 4월 캐싱엄의 윌리엄과 함께 루이가 도버 공방전 실패 후 도버 성 주변에 남겨둔 소규모 병력을 습격해 격파했다. 1218년 제5차 십자군에 가담했지만 1218년 말 또는 1219년 초에 이집트의 다미에타 항에서 사망했다.
5. 사적인 면
- 일평생 값비싼 옷과 자질구레한 방물, 보석 수집에 열광했으며 상당한 미적 감각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 신장은 165cm. 당시 남성 평균에 미치지 못했다. 형인 리처드 1세보다 무려 31cm가 작다. 물론 리처드가 큰 것도 있지만....
5.1. 인기 없는 왕
그의 인기는 형 리처드 1세에 반비례하여 형편없이 낮으며 이미지도 상당히 좋지 않다. 대표적으로 아이반호나 로빈 후드 이야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멜 브룩스의 못말리는 로빈 훗이라는 코미디 영화에는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리처드 1세가 "이제부터는 잉글랜드의 화장실을 존(john)이라고 불러라"는 포고령을 내린다. 실제로 소문자로 시작하는 존(john)은 화장실이라는 속어다.13세기 중엽의 성직자 파리의 마티외에 의하면 교황에게 파문 및 성무 금지령을 당하고,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프랑스군이 침공하는 등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자 존은 이슬람권의 무와히드 왕조에게 도움을 구했다고도 한다. 그는 군사 원조의 대가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잉글랜드를 이슬람 국가로 바꾸어 무와히드 칼리파 휘하에 두겠다고 제안했다고 기록하였다. 다만 칼리파 무함마드 앗 나시르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신앙을 내팽개치는 존의 모습에 역겨워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사실이라면 16세기 말엽 튜더 왕조와 사드 왕조 간에 체결된 대스페인 동맹의 시초 격이 되는 것이다. 또한 하마터면 잉글랜드가 자발적으로 이슬람 국가로 바뀔 뻔한 일이기도 했다. 물론 기독교 신앙이 생활의 핵심이던 당대 유럽 사회의 성격 상 실제로 그런 시도를 했을 리는 없고[13], 그냥 그런 소문까지 날 정도로 악평이 자자했다는 얘기로 받아들이는게 옳다.
이미지가 매우 좋지 않아 이후 잉글랜드의 왕은 존(John)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게 되었다. 거기다 스코틀랜드도 존 발리올(John Balliol)이라는 왕이 잠시나마 잉글랜드의 괴뢰로 옹립된 일이 있어서 왕의 이름으로 존이라는 이름을 싫어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스튜어트 왕조의 로버트 3세는 왕자 시절에는 이름이 존이었지만 이걸 꺼려서 로버트로 이름을 바꿨다. 다만 이후의 플랜태저넷 왕조에 존이라는 이름의 왕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리처드 1세는 십자군 활동을 위해 잉글랜드에 막대한 세금을 부과했는데 그로 인한 민중의 궁핍까지 전부 존의 책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다만 리처드 1세가 예루살렘으로 가다가 회군해야 했던 이유가 존의 반란 때문이라서 고생하고 성과 없이 돌아오게 만든 원흉인지라 책임이 있는 건 맞으니 틀린 말도 아니다. 거기다 이 사람도 막대한 세금을 거둔 건 마찬가지이며, 추가로 보석 장신구 치장 등의 사치를 크게 부렸다. 게다가 전쟁을 하면 할수록 패배를 거듭해 영토는 계속 줄어드니 이미지가 좋아질래야 좋아질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의 성격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화나면 두렵지만 굉장히 쿨했던 친형 리처드 1세와는 다르게, 매우 쿨하지 못 했으며[14] 무엇보다 패자나 약자를 관용하는 정신이 전무했다. 이는 그의 온갖 무능과 패착이 겹쳐져 후세의 오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형제간에 확 갈리는 평가와는 별개로, 잉글랜드-영국의 왕통이 리처드 1세가 아닌 존의 후손으로 대대로 이어지게 된 점은 재미있는 점이다.
2005년 BBC에서 영국인들 대상으로 여론조사한 최악의 영국인 4위로 워스트 10위 안에 들어간 유일한 왕이다.[15]
6. 현대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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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에이의《
원조비사》에선 그저 그런 잡무장 A. 그나마 고증 반영인지 전투, 지휘는 C라 부하로는 쓸 만하지만 군주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 매력이 D 이하라 조금 쓰레기 같은 면이 있다. 시나리오 4 세계 제국으로의 길에선 형인
리처드 1세의 친족 부하로 등장. 친족이라 배신도 잘 안 해서 지방 영주나 전투 지휘관으로 적당히 쓸 만하다.《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1에서 영국 소속 장수. 하지만 능력치는 전투 종족인 형에 비해 낮다. 정치 41, 전투 52, 지모 37에 특기는 어쩐지 외교 특기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외교 특기는 지모가 높아야 효과가 상승하는데 여기서는 존의 지모에서 보다시피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또한 실제 역사대로라면 형 리처드는 시나리오 개시 시점에서 10년 남짓해서 사망해야 하지만 이 게임에서는 실제로는 사고로 죽었다는 점 때문에 리처드의 수명이 비교적 길게 설정되어 있어서 후계자가 될 기회도 없다.
그나마 병과 적성이 수군 제외하고는 전부 C라서 굳이 사용하고 싶다면 친척 장군이라서 병력을 많이 인솔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전쟁에서 형이나 로빈 후드를 서포트하는 역할로 삼는 게 낫다.
징기스칸 4 일러스트
- 프랑스와 영국을 컴퓨터에 맡겨 놓으면 필리프 2세가 존을 충동질하여 영국 왕위를 일시적으로 찬탈하는 이벤트가 발생하며 PK의 경우 신세력을 작성할 때의 튜토리얼 이벤트에서 형 리처드를 뒷담화하다가 리처드에게 욕먹는 이벤트도 있다. 이 게임에서는 이래저래 찌질한 악역으로 설정된 듯.
-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5권에서 북두의 권 세계관이 펼쳐진 잉글랜드 왕가의 일원으로 등장한다. 권왕으로 나오는 리처드의 동생이란 점과 찌질하게 아버지 뒤통수를 쳤다는 점에서 쟈기로 캐릭터가 설정된 게 전혀 위화감이 없다.
- 디즈니의《 로빈 훗》에서는 악역으로 등장하는데 갈기가 멋지게 나있고 매우 간지 나게 표현되어 그야말로 사자심왕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게 등장하는 형과는 달리, 어린 사자같이 갈기도 없고 빈약하게 생겼으며 불쌍해 보일 정도로 심히 못나고 찌질하게 나온다. 왕이 될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의미인지 왕관이 머리에 맞지 않아서 귀를 눕혀서 머리 위에 공간을 확보한 후 왕관을 머리 위에 어거지로 올려 놓는 형편이며, 뭔 난리만 나면 이 왕관이 머리에서 떨어지기 일쑤고 심지어 목에 대롱대롱 걸리기도 한다. 늘 형에게 열폭하며 특히 걸핏하면 "엄마~(= mommy~)"를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쪽쪽 빠는 모습이 압권이다. 후반부로 가면 로빈 후드에게 탈탈 털리는 바람에 백성들로부터 광대왕(Phony King of England)이라는 조롱까지 획득했다. 결국 결말에서 형이 돌아오면서 죄수 신세가 된다. 한국판 성우는 설영범. 자세한 내용은 존 왕(디즈니 캐릭터) 문서 참조.
- 랜달 개릿의 대체역사소설《 다아시 경 시리즈》에서는 과거 리처드 1세가 샬뤼 포위전에서 전사하지 않고 살아남아 조카 아르튀르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바람에 존 왕이 등극하지 못하고 계보까지 끊겼는데, 작중 서술자가 존의 핏줄은 불량한 핏줄이라서 후손이 끊겨서 다행이라고 대놓고 까고 있다. 게다가 존이 즉위를 하지 않아서인지 왕 이름으로 존을 사용하고 있다. 참고로 작중에서 등장하는 왕의 이름은 존 4세이다.
- 《 대항해시대 3》에서는 존의 술잔이 발견물로 등장한다. 낚시 게임으로 얻는 발견물로, 시장에서 모조품 금 도금 술잔을 얻을 수 있긴 하지만 위치도 유럽이고 낚시 게임이 작중 미니게임 중 가장 쉬운 게임으로 손꼽히므로 그냥 발견하는 게 낫다.
- 직접적인 등장은 아니나,《 늑대와 향신료》에서 로렌스와 호로가 윈필 왕국을 방문했을 때, 브론델 수도원과 윈필 국왕의 대립이 이어지며 윈필 국왕이 교회와 척을 지고 브론델 대(大)수도원이 관리하던 양모 무역권을 박탈해 가려는 움직임이 보인다는 배경 설정이 나오는데 존 시절 있었던 교회와의 대립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 《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 역사대로 헨리 2세의 5남이자 Meath의 공작으로 나온다. 영국령 아일랜드와 기타 영지를 고증대로 상속받은 모습인데 음모력만 13이고 나머지 능력치는 없는 수준이다. 만약 리처드 1세를 플레이한다면 제거 대상 1순위. 왕으로 시작한다면 후세를 기약해야 할 정도로 무능력하지만 게임의 한계로 체급 차이 때문에 플레이어가 잡으면 프랑스를 역으로 이길 수도 있다.
- 《 Fate/strange Fake》에서 그의 형이 언급하는데, 자신을 배신했음에도 그다지 증오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 이유는 자기가 잘못한 것도 있고 리처드가 죽었다고 언론플레이하는 중에도 백성들은 물론이고 귀족들에게 무시당하는 모습이 처량했다고 한다. 형제의 정은 가지고 있었는지 시간을 보낼 때 <존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에서 존이 형은 영웅이니까 자신의 어릿광대 짓을 보고 웃으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존은 자신에게 내정을 떠맡기고 툭하면 전쟁하러 가지만 존경하는 영웅이었던 형에게 애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2011년 영화 《 아이언클래드》에서 존왕의 치세 막바지 부분을 다루었고, 폴 지아마티가 존 역으로 분했다. 영화에서 존은 대헌장 사건 당시 자신을 협박한 귀족들에게 반격을 가하여 하나하나 제거하려 하고, 이에 귀족들은 존의 세력 진출을 막기 위해 로체스터성에서 프랑스군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농성을 한다는 내용이다. 존은 집요한 공격 끝에 로체스터성 사람들을 대부분 몰살하고 성을 함락시키기 일보 직전까지 가지만, 바로 그 순간 프랑스군이 몰려와서 후퇴하게 된다. 이후 내레이션으로 존이 피난 도중 비참하게 병사한다고 나온다.
- 대체역사물《콩가루집 막내왕자》의 주인공이다.
[1]
단순히 봉토를 못 받을 뿐만 아니라, 받을 봉토조차 남아 있지 않았기에 붙여진 별명이다. 보통 왕자로 태어나면 그래도 왕으로부터 왕의 영지 가운데 일부를 받는데, 그렇게 주어질 수 있는 영지조차 없었기에 붙여진 별명이다. 막내아들 존이 선왕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음을 볼 때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선왕 헨리 2세 말기에 아들들이 2회에 걸쳐 반란을 일으키는데, 그 가운데 첫 반란은 헨리 2세가 셋째 아들 제프리의 영지를 빼앗아 존에게 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존에게 줄 영토가 남아 있지를 않았다.
[2]
사실 앤과 빅토리아는 여자 이름인 만큼 왕호로서는 겹칠 가능성이 더 적다. 여왕은 모녀계승이 일반적인 군주국이 아닌 이상 그 자체가 원래부터 드물기 때문이다. 영국은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와
빅토리아 여왕이 전성기를 이끈 데다가 재위 기간도 46년과 64년으로 매우 길고
엘리자베스 2세는 아예 70년이라는 최장 기간 동안 재위한지라, 여왕의 나라라는 인식이 있는데 다른 나라랑 비교했을 때 많이 나온 편일 뿐(특히
살리카법의 적용을 받아 여왕이 없는 프랑스와 독일) 영국도 역사적으로 보면 여성 군주보다 남성 군주가 압도적으로 많다. 현재 아들/딸 상관없이 절대적 맏이계승제로 바뀌었으나 현 찰스 3세는 아들만 둘이고 찰스의 장남 윌리엄도 첫째인 조지가 아들이라 현재로서는 여왕이 다시 나올 가능성이 대단히 멀다. 거기다 사족으로 찰스 3세 역시 맏이이고 찰스 3세의 차남 해리 왕자 역시 맏이인 아치가 아들이다.
[3]
왕위에 오르지 않은 영국의 왕자나 공주의 경우에는 존과 빅토리아라는 이름을 쓴 사람들이 여럿 있다. 영국에서 빅토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공주는 2명 있는데 한 명은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인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로
프로이센 왕국의 왕비이자
독일 제국의 황후가 됐다. 다른 한 명은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이자
에드워드 7세의 2녀인 빅토리아 공주로 이미 왕위 계승자인 오빠가 2명이나 있어서 평생 독신으로 살다
1935년에 사망했다. 존이란 이름을 가진 왕자는
에드워드 7세의 막내아들인 알렉산더 존,
조지 5세의 막내아들인
존 찰스 프랜시스가 있는데 두 명 다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이후론 존이라는 이름은 장남 같은 왕위계승자는 물론이고 다른 왕자들에게도 쓰이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
[4]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한 발언은 당시 재위하고 있던 군주인 만큼 어느 정도 립서비스 발언이라고 치더라도 고위 공직자가 공식 석상에서 저렇게 말할 정도니
영국인들이 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5]
하지만 이것도 약간 애매한 게 학설에 따라서는 단지 존의 치세 때 작성된 행정 관련 문서가 어쩌다 보니 이전 시대에 비해 잘 보존되었을 뿐 과연 존이 이전 왕들에 비해 더 내정을 잘 가꾼 것이 많은지는 불확실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냥 '기본은 했다' 정도. 최근에 존의 재위 기간 잉글랜드의 GDP 연구가 있는데 숫자 놀음 취급 당할 뿐이다.옆 동네 필리프 2세랑 비교당해서
[6]
프랑스 아키텐 소재
[7]
프랑스 미디피레네 소재
[8]
다만 리처드에게는 털린 걸 볼 때 리처드에 미치지는 못했다. 사실 당대에 리처드 1세보다 뛰어난 지휘관을 찾아보긴 어렵기 때문에 이걸 가지고 필리프 2세가 군사적 능력이 떨어지니 마니 하는 건 의미가 없다.
[9]
괜히 악마라 불린 건 아니다.
[10]
살라딘에게 먼저 협상을 제의해 혼담을 제의한 것이 리처드다. 서로 조약을 맺자 무조건으로 포로를 돌려주었으며, 살라딘의 조카에게 기사 작위를 선물하기도 했다.
[11]
현대 사학자들은 존의 수입이나 부가 필리프에게 밀리지 않거나, 심지어 필리프보다 경제적으로는 우위에 있었다고 본다. 즉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패한 건 아니다.
[12]
에드워드 1세,
스코틀랜드의 왕비 마거릿, 브로타뉴 공작부인 베아트리스, 랭커스터 백작 에드먼드
[13]
아무리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해서라고 한들, 국가의 정체성을 버리겠다고 공언하면서까지 외국의 도움을 받으려했다가는, 백성들로부터
매국노로 낙인이 찍혀서 당장의 권력 유지도 어렵게 된다. 먼 훗날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군주였던
요가일라는
북방 십자군의 침공을 받아서 나라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자, 국교인
발트 신화를 포기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라는 조건을 받아들이면서까지 이웃한 강대국인
폴란드 왕국과 결혼동맹을 체결하고자 한 바는 있다. 하지만, 이건 당시
리투아니아인들이 숱한 외적의 침략에 지친 나머지, 알음알음으로 발트 신화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는 상황이니 가능했던 얘기다. 그리고 그나마도 결국은
발트 신화를 포기한 것에 분노한
귀족들의 반란에 숱하게 시달린 통에, 요가일라 본인이 직접 이들을 어르고 달래거나 몸소 토벌하는 피곤한 상황을 겪어야했다. 발트 신화는
유럽 사회에서
소수종교에 불과했는데도 이랬는데, 당시 절대다수가 믿었던
가톨릭 신앙을 군주가 제발로 버린다고 하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4]
인간의 용력이 전쟁의 주요 요인이었던 소위
냉병기 시대에, 초인적인 용력과 역사적인 군략을 겸비했던 리처드 1세는 그 강함만으로도 존경 내지 최소한 반란 억제책은 되었다.
[15]
출처는 이 문서 상단의 틀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