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막부 정이대장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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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제8대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요시무네 徳川吉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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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00> 출생 | 1684년 11월 27일 |
기이국 와카야마성 | |
사망 | 1751년 7월 12일 (향년 66세) |
무사시국 에도 | |
신장 | 155.5cm[1] |
원호 | 유토쿠인(有徳院) |
재임기간 | 가츠라노 번주 |
1697년 ~ 1705년 | |
기슈 번주 | |
1705년 ~ 1716년 | |
제8대 정이대장군 | |
1716년 ~ 1745년 | |
오고쇼 | |
1745년 ~ 1751년 | |
자녀 | 장남 도쿠가와 이에시게외 |
[clearfix]
1. 개요
자자손손에게 검약(검소와 절약)하도록 가르쳐라. 그러나 상인과 농민에게 검약을 강요하지 마라.
에도 막부의 제8대 쇼군이며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증손자이다.
기슈 번의 번주였으나 1716년에 제7대 쇼군
이에츠구가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직계가 끊기자 요시무네가 쇼군직을 이어받았다. 흔히 도쿠가와 막부
중흥의 선조(徳川幕府中興の祖)로 평가받는다.[2]2. 생애
2.1. 초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실의 자식들이 분가하여 도쿠가와 방계의 세 가문, 즉 고산케를 이루었다. 요시무네는 1684년에 고산케 중 기이 번(紀州藩)의 제2대 번주 도쿠가와 미츠사다(徳川光貞, 1627 ~ 1705)의 4남으로 태어났다. 그런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10남 도쿠가와 요리노부의 손자가 된다. 하지만 요시무네의 어머니는 정실도 측실도 아닌 목욕을 돕는 일개 하녀인 조엔인(浄円院, 1655 ~ 1726)이었다. 조엔인의 아버지는 하급 무사인 고세 토시키요라 알려져 있으나, 양녀라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볼 때, 실제로는 평민 혹은 하층민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요시무네는 아버지 미츠사다가 60세 때 목욕을 돕는 하녀와 정분이 나는 바람에 늦둥이로 태어난 것이었다.[3] 그래서 '카쿠시코'(숨겨논 자식)로 취급받아 미츠사다의 측근 가신인 카노 마사나오[加納政直]가 맡아서 키웠다. 유명(아명)은 '겐로쿠'(源六). 통칭은 '신노스케'(新之助)였다.1697년 4월(만14세), '개 쇼군'으로 유명한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가 기슈 번의 에도 저택을 방문했을 때 서로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에치젠 카즈라노 번(越前葛野藩, 현재의 후쿠이현의 에치젠마치)의 번주로 임명되고, 정치를 배웠다. 번주가 되었지만 본인은 집에서 아버지와 형들과 생활했고, 실제 행정은 아버지의 가신이 파견되어 맡았다.
도쿠가와 이에츠구를 끝으로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직계 혈통은 단절되었으므로 이에 방계에서 쇼군을 임명해야 했는데 그 와중에 요시무네에게 쇼군 순번이 오게 된 것이다.
쇼군은 커녕 지방 번주가 될 가능성도 아예 없는 처지였는데, 우연인지 음모인지 모를 우여곡절 끝에 쇼군이 되었기 때문에 그 과정을 두고 후세에 여러 음모설이 생겨났다.
아버지 미츠사다의 바람끼 때문에 하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탓에, 쇼군가 혈통으로 고산케의 일원이자 카즈라노 번의 번주라고는 해도 30,000 석(실제로는 5,000석) 규모의 다이묘로 체면치레만 할 정도일 뿐 그리 대단한 위치는 아니었다.[5]
1705년, 요시무네의 큰 형이자 기이 번의 제3대 번주였으며, 쇼군 츠나요시의 사위로서 제6대 쇼군 후보자이기도 했던 츠나노리가 만 39세에 후사도 없이 죽었다. 둘째 형은 어릴 때 요절했으므로 셋째 형 도쿠가와 요리모토(徳川頼職, 1680 ~ 1705)가 번주직을 이었다. 그런데 같은 해에 아버지 미츠사다와 셋째 형 요리모토(26세)가 연이어 사망하여 요시무네가 22세 나이로 기이 번의 제5대 번주가 되었다. 이후 쇼군 츠나요시로부터 편휘[偏諱]를 하사받아 '요시무네'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7]
아버지와 형들의 잇따른 죽음이 석연치 않았기에[8] 요시무네와 그 측근들이 독살하지 않았는가 여기는 시각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시무네는 다이묘 시절부터 밀정들을 잘 활용했으며, 쇼군 즉위 과정에서도 여러 음모의 흑막으로 간주되었다.
쇼군직의 라이벌이었던 오와리 번의 번주와 그 아들도 한두 달 간격을 두고 식중독으로 죽었는데, 요시무네 측이 꾸민 음모라는 오와리 번의 기록에 의하면 오와리 번주가 죽었을 때 오와리 번의 에도 저택 인근에 기슈 번의 밀정이 얼쩡거렸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요시무네의 친모가 약제사 가문 출신이라 약을 잘 알았으므로 친모가 식중독을 주도했다는 음모설이 있다.
가문을 승계하여 요시무네가 기슈 번의 제5대 번주가 되었으나, 아버지와 형의 연달은 장례식과 재해 때문에 가문의 재정 상태는 빈곤하기 그지없었다. 취임 시점에서의 기슈 번의 빚은 약 10만 냥, 현재 시가로 약 80억 엔에 달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요시무네는 스스로 검소한 생활을 하고 황무지를 개간해서 새로운 논을 만드는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번주가 되고 12년만에 기슈 번의 빚을 다 갚고, 금 12만 냥과 쌀 11만 석을 비축했다. 또한 백성들을 굽어살피기 위해 직소를 허용했다.[9]
이대로라면, 지방 영주로서 나름 훌륭한 행정가로 일생을 마칠 것 같아 보였는데 1716년 3월, 에도 막부의 제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구(8세)가 감기가 악화되어 위독해졌다. 이에츠구는 나이가 어려 후사가 없었고[10], 제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동생 고즈케국 다테바야시 번주(上野国館林藩主) 마츠다이라 키요타케(松平清武, 1663 ~ 1724)는 고령이었으며, 남자 후손이 없었고, 쇼군 자리를 바라지 않았으므로 차기 쇼군 후보자가 되지 않았다.[11] 그리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죽기 전에 남긴 후계자 선정 방식에 따라 방계 가문인 고산케에서 처음으로 차기 쇼군을 뽑기로 하고 후보 세 명을 골랐는데, 요시무네도 그 안에 들었다.
쇼군직을 두고 고산케의 후계자 서열 1위인 오와리번의 번주 도쿠가와 츠구토모(徳川継友, 1692 ~ 1731년 당시 나이 25세)와 요시무네가 경쟁했다. 제6대 쇼군 이에노부의 측실이자 이에츠구의 생모인 겟코인(月光院, 1685 ~ 1752) 오키요(32세)와 이에노부의 측근으로 권력을 누리던 마나베 아키후사(間部詮房, 1666 ~ 1720)는 츠구토모를 지지했고, 가신들 다수과 이에노부의 정실 텐에이인(天英院, 1666 ~ 1741) 고노에 히로코(57세)는 요시무네를 지지했다. 아직 어린 츠구토모보다는 행정 실적이 있고, 유능한 요시무네가 막부를 잘 이끌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1714년 에지마-이쿠시마 사건(江島生島事件)이 터지자 겟코인파는 권력을 잃게 되었고, 텐에이인이 권력을 장악했다. 그 결과, 1716년 6월에 8세의 나이로 요절한 도쿠가와 이에츠구의 뒤를 이어, 요시무네(당시 33세)가 에도 막부의 제8대 쇼군이 되었다. 일본이 조선처럼 입승대통 제도가 있었으면 요시무네는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양자로 들어가는 절차를 밟았을 것이다.
2.2. 치세
쇼군이 된 이후로는 그때까지의 경험을 살려서 정치 형태를 친정으로 전환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는데 본인이 검약함[12]은 물론, 가신들의 녹봉을 줄이는 등, 겐로쿠 시대의 버블경제가 꺼진 이후 심각한 재정 악화로 빚더미에 오른 에도 막부의 재정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돈 먹는 하마 오오쿠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펼쳐서 3,000명이 기거하는 오오쿠에서 350명을 내치기까지 했다.
요시무네는 오오쿠에서 젊고 예쁜 미녀 50명을 뽑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누구나 다음 측실 후보를 뽑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선발된 미녀들 앞에서 요시무네가 말하길,
"너희들은 아직 젊고 예쁘니, 좋은 혼례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집으로 돌아가거라."
이 일로 텐에이인이 분노하여, 요시무네와 텐에이인은 텐에이인이 오오쿠에서 퇴거할 때까지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였다.[13] 관료제도를 재구축하고[14] 유능한 인재를 발굴하여 등용했으며[15] 무료진료소를 건설하여 서민들의 공중 위생을 돌보았고, 쇼군가의 권력 약화의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철저하게 지켜지던 쇄국을 완화시켜 서양 서적에 대한 <
금서령>을 부분적으로 철폐함으로써 서양 의학 등 서구의 과학 서적을 받아들이는 것을 허락했다. 또한 국력의 약화를 우려하여 무예를 장려했고, 기근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연공미를 증대시킨 것을 보충시키고자
고구마나
감자를 심게 했다. 그밖에도
1728년
조선
인삼을 이식하는 데 성공하여 유출되는 금•은을 줄였다. 민생에서도 당시 유행하던
동반자살을 줄이기 위해서 동반자살을 하다가 실패하거나 붙잡힌 자들을 끌어내어 수치심을 주도록 했다. 그 밖에도
오니와반슈을 설치하여 역심을 품거나 부패한 관리들을 색출했고, 민초들의 삶을 살폈다.
네덜란드에서 들어온 과학 기술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실용적인 성격이었다. 쇼군 취임 이전에 빚 48만 냥(384억 엔)에 허덕이던 막부의 재정을 취임 이후 15년 만에 100만 냥(800억 엔)의 흑자 재정으로 만들었다.
그 업적은 '도쿠가와 막부 중흥의 선조'라는 평가에 걸맞지만 일련의 개혁은 막대한 비용을 요구했고, 이를 충당하기 위하여 다이묘들에게서 쌀을 걷는 대신 참근교대를 단축하게 하여 막부의 재정이 결국에는 다이묘와 각 번에 의존한다는 것을 다이묘들에게 깨닫게 했고, 세금을 4공 6민에서 5공 5민[16]으로 하여 백성들을 가난하게 만들었으며 사치를 금지하여 문화와 예술이 정체되도록 했다.
요시무네가 '쌀 쇼군'이라고 불리는 것은 쌀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고심했기 때문이었다. 기슈 번에서 대대적인 개간 사업으로 쌀 수확량을 늘렸던 경험을 바탕으로 쇼군 취임 이후 전국적인 개간 사업을 시행했는데, 일본 전체에서 쌀 수확량이 폭증하자 쌀의 가치가 떨어져 월급을 쌀 기준으로 받고 있었던 사무라이 공무원들은 심각한 타격을 받고 불경기가 찾아왔다. 요시무네는 막부 차원에서 쌀을 엄청나게 사들였지만 어찌나 개간 사업이 잘 되었는지 이것으로는 역부족이었고, 새로운 화폐를 유통시킨 뒤에야 쌀값이 안정되었다. 결과적으로는 물가도 안정되었다.
손자 도쿠가와 이에하루를 후계자로 점찍었기 때문에 후계자 자리를 (병약하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에하루의 아버지 이에시게에게 징검다리 격으로 물려주었으며[17] 쇼군직을 승계한 뒤로도 자신이 오고쇼(大御所), 즉 은퇴한 쇼군으로서 권력을 휘둘렀다.
그의 재임기는 조선의 숙종 재위기 후반, 경종 재위 전체, 영조 재위기 중반과 일치하며 청나라의 옹정제 재위기하고 일치하다.[18]
3. 가족관계
문서 참조.4. 일화
무예를 좋아하고, 가노 츠네노부로부터 사사를 해서 그림을 좋아했다.코끼리를 좋아해서 코끼리를 수입해 나가사키에서 에도까지 육로로 옮기게 했다. 그 때문에 에도에 코끼리 붐이 일어났다.
아라비아 종의 말을 수입해 품종 개량을 시도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에도 말 편자는 보급되지 않았다.[19]
5. 서브컬쳐
시대극 망나니 장군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이 시대극은 30년 가까이 계속되었으며 방송이 종료된 후로도 가끔씩 다시 기획되는 인기 시리즈이다. 또한 망나니 장군말고도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 중에도 1995년작 " 8대 쇼군 요시무네[八代将軍吉宗]"처럼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대하 사극이 여럿 있을 정도로 인기있는 인물로 일본인들은 이 사람에서 망나니 장군의 주역배우인 마츠다이라 켄을 떠올린다.이 망나니 장군의 인기는 대단해서 다른 매체에서 패러디 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가면라이더 시리즈중 하나인 극장판 가면라이더 오즈 WONDERFUL 장군과 21개의 코어 메달에서 마츠다이라 켄이 연기하는 진짜 망나니 장군이 가면라이더 오즈와 함께 싸우는 초현실적인 장면을 볼 수 있다. 같은 토에이 작품이라 가능했던 콜라보.
같은 시기를 다룬 또 다른 작품인 오오오카 에치젠[21]에서는 성깔 더러운 희대의 다혈질 쇼군이지만 호탕하고 만민의 안정된 생활을 바라는 인물로 묘사된다. 통치능력과는 별개로 극도로 신경질적이고 완고한데다 대놓고 혹은 은근히 사람 속을 긁어대는 말을 하는 유아독존형 인물로 에치젠을 방해하거나 괴롭히다가도 결국에는 도와주는 츤데레이자 공대 내부의 적 포지션. 똘기가 장난아닌 냉혈한이지만 한편으로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버린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도 가지고 있다.[22] 그리고 의외로 입맛이 소박한 편인데다 중증 꽁치 덕후로 조카마치에 암행을 나올 적이나 타다스케의 집에 들르면 항상 식사로 꽁치구이 백반을 즐긴다. 여러 사건에 휘말리다보니 타다스케를 골치아프게 한 일도 더러 있으나, 요시무네 덕분에 사건을 해결한 적도 상당히 많다. 초창기에는 워낙 성격이 안 좋았지만, 후기에는 나이를 먹어서인지 유순하고 유머러스한 성격이 더 강조되었다.
코이케 카즈오作 코지마 고세키畵의 만화 냉혈한[원제]은 요시무네의 뭔가 미심쩍은 즉위과정과 오오쿠와의 대립 등이 주요 에피소드 중 하나고 그의 숨겨둔 자식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인피니티에 등장하는 유징 제국의 오니와반은 요시무네가 설치한 실존기구인 오니와반이 모티브가 되었다. 이 오니와반은 암행어사같은 존재였지만 후대에서는 그들의 은밀함만을 부각시켜 닌자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것도 전부 서브컬쳐의 영향.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에 등장하는 어정번중[御庭番衆.]도 오니와반을 약간 틀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것도 사극같은 것의 영향.
모 출판사의 코믹판 일본의 역사 시리즈는 헤이안 시대, 전국시대, 에도 시대, 막부 말기를 넘나들며 수많은 인물들(때로는 역사적 사건들)을 출간해오고 있으며 도쿠가와 쇼군 중에서 이에야스, 이에미츠, 요시노부가 출간되었으나 이 요시무네는 현재까지도 도통 출간을 하지 않고 있다.
6. 참고 자료
[1]
위패로 추정한 키.
[2]
조선의 왕으로 치면
영조 포지션쯤 되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시대 인물이다.
[3]
무수리 출신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조선의
영조와 비슷하다.
[加納政直]
1622 ~ 1716. 요시무네가 쇼군이 되자
하타모토를 거쳐서 야츠타 번(八田藩)주가 되지만 손자인 히사모토(久儔, 1797 ~ 1847)방어를 위해서 이치노미야 번(一宮藩)으로 이동하여 유지하게 된다. 메이지 유신때 후손들은 자작으로 서임받는다.
[5]
참고로 큰 형 도쿠가와 츠나노리(徳川綱教, 1665 ~ 1705)는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장녀와 결혼하여 쇼군가와는 사돈 지간이었다.
[偏諱]
윗사람의 이름자 중 하나를 아랫사람이 하사받아 자신의 이름으로 삼는 것이었다. 보통은 이름의 앞 글자로 하고, 다른 글자를 붙여 이름을 만들었다. 요시무네(吉宗)의 '요시'(吉)가 츠나요시(綱吉)에서 따온 것이었다.
[7]
요시무네의 묘비는 츠나요시의 묘비가 있는 절 안에 있다. 새로 절을 세우지 말고 그 돈을 절약하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8]
셋째 형 요리모토는
향어를 먹고 식중독에 걸려 피를 토하며 죽었다.
[9]
원래 에도 시대에 농민이 다이묘와 쇼군에게 직소하면 행차를 방해한 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10]
8세 때
레이겐 덴노가 코노에 모토히로(近衛基熙, 1648 ~ 1722)를 통해서 혼약은 했지만 약혼자인 요시코 내친왕 당시 나이가 3세였다.
[11]
키요타케는 고후 도쿠가와 가문의 차남이자 쇼군 이에츠나의 조카로 태어났지만, 일개 고후 번 무사인 오치 요시키요(越智喜清)의 양자가 되어 오치 가문을 이어받고 번주인 형 이에노부를 보좌하는 역할에 머물렀다. 44세가 된 1707년에야 2만 4천 석에 불과한 (이후 5만 4천 석으로 가증됨) 다테바야시의 다이묘가 되어 마츠다이라씨를 쓰게 된 등 신분에서나 경력에서나 쇼군이 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원래 키요타케를 후계자로 밀었던 이에노부의 정실 텐에이인은 결국 요시무네 지지로 선회했다.
[12]
쇼군 스스로 하루 두 끼만 먹고, 반찬은 세 가지로 단촐하게 했다. 검약했던 점도 영조와 흡사한데, 영조도 왕의 하루 다섯 끼 식사를 세 끼로 줄였고, 채소 반찬 서너 가지로만 끼니를 떼웠다.
[13]
일설에는 후계자인 도쿠가와 이에시게가 실은 여자였고, 오와리 도쿠가와 번주가 먼저 아들을 낳아버린 탓에 차기 후계자 자리에서 밀리지 않을까 염려한 요시무네가 이에시게를 남자로 키웠다고 한다. 이를 숨기기 위해서 오오쿠에 이에시게를 맡겨 키웠는데 텐에이인이 이를 알아낼까 염려해 자신이 기슈 번에서 거느리던 오오쿠를 중심으로 에도 오오쿠를 재편하기 위해 350명을 내쳤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즉 자신이 신뢰하는 자들로 오오쿠를 장악하기 위해 벌인 행보라는 것이다.
[14]
로쥬(老中) 제도를 해체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로쥬 중 한 명에게 재정 분야의 전권을 위임하는 등, 분야별로 로쥬의 업무를 할당했다. 이전까지 막부 내의 상급 의사결정 구조가 전문화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게 얼마나 뒤떨어졌냐면 이웃나라인 중국과 조선은 진작에 체계적인 관료제를 갖춰놨고 비슷한 시기의 프랑스는 엉성하긴 했지만(엉성해서 문제가 되었는게 업무를 나누긴 했는데 영역이 명확하지 않아 각 대신들은 서로 충돌하기 일쑤였다.) 어느정도 각자 맡은 분야를 담당하는 대신들이 있었다.
[15]
가장 유명한 것이 오오오카 에치젠노카미 타다스케(大岡越前守忠相, 1677 ~ 1752). 최하급 고케닌에서 에도 나미마치부교(江戸南町奉行)와 지샤부교(寺社奉行: 절이나 신사의 영지, 인사, 소송 등을 담당하던 직위이며 막부에서는 실무직 중 하나)를 거쳐서 1만 석 다이묘로 출세했다. 에도 부교 근무 기간이 20년으로 이 기간 동안 오오오카가 판결한 사건들을 소재로 한 이야기책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에도 부교였지만, 정작 오오오카 자신은 재판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당 재판 이야기책은 순전히 소설이다.
[16]
4공 6민은 수확의 40%는 세금(공), 60%는 생산자가 차지하는 것이었고, 5공 5민은 50%가 세금, 50%는 생산자가 차지하는 것이었다.
[17]
중국에서 똑똑한 손자
홍력을 보고
후계자를 선정한
강희제의 사례가 있다.
[18]
여담으로
경종 1년(1721년) 당시 요시무네가 왜관을 통해 조선에 인력을 파견 조선인들을 포섭하고 그들의 협조 덕분에 조선인삼을 얻었고 그걸 국산화 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9]
일본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말 편자 기술을
메이지 유신 때에야 도입하게 되어서 그 이전까지는 말
짚신만을 사용했었다.
[八代将軍吉宗]
이 작품에서는 당시 일본 사정과 맞물려 요시무네의 정치 개혁에 촛점을 맞췄다. 덧붙여 이 사극에서 요시무네를 맡은 배우 니시다 토시유키는
도쿠가와 히데타다(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역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공명의 갈림길, 카게무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맡는 등 도쿠가와 막부 쇼군 전문배우로 유명하다. 그 외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도 연기한 적 있어서 현재 일본 배우 중
전국 3영걸을 두 명 이상 연기한 유일한 배우라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전문 배우
타케나카 나오토와 비슷한 케이스.
[21]
상기한 요시무네 시대의 미나미마치 부교 오오오카 에치젠노카미 타다스케를 주인공으로 제작한 작품. 카토 고(1938~2018) 주연으로 70~99년까지 일본의
판관 포청천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사극이었다. 2005-06년은 키타오오지 킨야가, 2013년에는
소년대의
히가시야마 노리유키가 연기하면서 리메이크 되었는데 히가시야마 판에는 초대 타다스케를 맡은 카토 고의 차남 카토 라이가 레귤러 인물로 출연한다. 카토 고는 2017년에 히가시야마 판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1년 후에 사망했다.
[22]
대표적인 것이 바로 텐이치보 사건(天一坊事件)이다.
[원제]
乾いて候
[御庭番衆.]
오니와반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