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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건성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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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건성세
康乾盛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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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Qing_China_Map_1820.jpg
건륭제, 옹정제, 강희제의 초상화와[1] 청나라의 최대 강역
1661년 ~ 1799년
고사성어
편안 강 하늘 건 성할 성 대 세

1. 개요2. 상세3. 역사4. 영토5. 정치
5.1. 황권 강화5.2. 부정부패 척결

[clearfix]

1. 개요

청나라 강희제 - ( 옹정제) - 건륭제 시기의 치세를 일컫는 말이다. 문경지치 등과 더불어 중국사에서 이름난 치세기 중 하나다.[2] 실제로는 이 두 황제 사이에 옹정제가 끼어있지만 60여 년에 달하는 둘의 재위기간에 비해 10여 년으로 재위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았고, 민간에서는 한동안 폭군이라는 인상도 강한 편이었기 때문인지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3] 다만 일각에선 강옹건성세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강건을 두 연호의 두문자어가 아닌, 일반적으로 쓰이는 한자어 '강건'(剛健)[4]으로 혼동하기도 하는데 아니다.

2. 상세

능력을 검증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순치제를 제외하더라도 누르하치, 홍타이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등 5명의 군주는 모두 역사에서 보기 드문 유능한 통치자였다. 또한 건륭제 이후에도, 적어도 1850년경까지의 청나라 황제들은 군주로서 평균 수준은 되었다.[5]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민음사, 2012, [ebook]
후금에서 시작한 청나라 천명제 누르하치 시절부터 파죽지세의 성장을 계속하다 4대 황제 강희제 시대부터 국력의 절정기를 맞는다. 이후 강희제의 아들과 손자인 옹정제, 건륭제를 거치며 총 135년에 걸쳐서 청은 문화, 민생, 경제, 무역 등의 여러 방면에서 많은 번영을 누리게 된다. 농업, 상공업 등의 생산 및 기술력 등 상업 분야가 대폭 발달되고 다양한 종류의 상품, 문물들이 대상인과 상점을 통해 유통되어 경제가 발달하였다.

또 그간의 중국 왕조들이 차지한 영역인 중원(혹은 만주 포함) 외에 신장 위구르 자치구, 칭하이, 티베트, 몽골, 연해주에 이르는,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을 능가하는 광활한 영토를 확보하기도 하면서, 이시기 청나라는 유럽 러시아 등지에서 관련 학파가 생겨날 정도로 관심을 받는 유라시아의 대제국으로 군림하게 된다. 사실상 오늘날 다민족국가 중국의 기원이 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비록 건륭제의 경우 말기부터 잦은 대외원정으로 군비 증가, 황실과 귀족의 사치 등으로 오늘날 학자들에겐 청나라 쇠퇴의 빌미를 줬다는[6]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말기를 제외하면 준수한 통치자였고, 그것조차도 수십 년 후에야 폐해가 드러난 것이지, 건륭제가 살아있을 때까지는 전성기가 이어졌다.

3. 역사

3.1. 강희제

파일:Portrait_of_the_Kangxi_Emperor_in_Court_Dress.jpg
파일:Kangxi_Emperor's_Southern_Tour_(detail).jpg
강희제 강희제의 남순 기록화
청나라 베이징에 입성해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천하의 패권을 거머쥔 이래로, 삼번의 난 소빙기 같은 불상사가 있긴 했지만 중국은 청나라 아래에서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특히 1661년 즉위한 강희제가 등장하면서 청나라는 본격적인 황금기에 접어든다.

강희제는 명청교체기 동안 피폐해진 국토를 재건하기 위해 황무지를 개간하는 농부들에게 세금 면제 기간을 늘려주었으며, 명나라의 경찰(京察) 제도와 과거제를 받아들여 시행하여 붕괴했던 관료제 시스템을 재건했다. 강희제는 아예 인두세를 고정했고[7] 덕분에 중국의 인구는 폭증했다.[8] 강희제의 업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진보와 우성룡을 등용해 황하의 치수를 맡기고 대운하를 건설했으며 6번에 걸친 남방순행을 통해 민심을 두루 살피는 한편 남북을 관통하는 운하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직접 공사를 총괄했다. 명나라 말기 이래로 막혀있던 대운하가 다시 뚫렸고, 덕분에 중국 내의 물동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수공예, 농업 등 경제가 빠르게 성장했다.

강희제는 내실을 다지고 부정부패를 막는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6개의 칙령을 반포해 풍속을 다잡는 한편 조인과 이희 등 개인 측근들을 전국 각지로 감찰관으로 파견해 지방관을 조사하고 지역 향리, 토후들을 감찰했다. 이렇게 내려보내진 감찰관들은 황제에게 바로 밀지를 올려 지방의 상태를 정확히 보고했고, 덕분에 황제는 베이징에 앉아있으면서도 저 지방의 시시콜콜한 사정까지도 훤히 알아낼 수 있었다. 특히 옹정제가 이 제도를 유용하게 써먹었다.

문화적으로도 크나큰 업적을 남겼는데, 여러 차례 친히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를 열어 인재를 등용하려 들었으며 남서방(南書房)을 만들어 한족 학자들과 시, 문학, 경전을 강론하는 등 이민족 황제로서 모범을 보여 한족의 유교 문화를 포용하려 애썼다. 강희자전과 고금도서집성 편찬도 엄청나게 큰 업적. 중국 전통 학문 뿐만 아니라 저멀리 서양 학문에까지 관심을 보여 유럽 예수회 선교사들과도 친분을 나누었고 특히 천문 역학 분야에 이들의 지식을 써먹었다. 재능도 뛰어났던 황제였던데다가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조아킴 부베,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 같은 서구 선교사들이 그를 이교도임에도 극찬했을 정도였다.[9] 유럽에서 중국에 대한 환상, 이상적인 군주가 황금의 땅을 다스리고 있다는 시누아즈리가 퍼진 것도 이시기다.

이 외에도 강희제는 헤이룽장성을 침범한 루스 차르국을 쫒아내기 위해 야크샤 전투를 치르고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북쪽 국경을 확실히 하였으며, 준가르 티베트를 복속하는 등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단순히 청나라를 넘어 동아시아 역사상 손꼽히는 성군인지라, 중국에서는 강희제를 천고일제(千古一帝), 즉 천 년에 한 번 나올 황제라고 칭송할 정도다. 다만 그의 치세도 말기에는 빛이 약간 바랬다. 워낙 낮은 녹봉과 느슨한 처벌 탓에 관료들의 부정부패는 날로 심해졌고 황자들끼리 제위 다툼을 하느라 집안이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결국 4황자 윤진이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옹정제로 즉위한다.

3.2. 옹정제

파일:군기처.jpg
파일:Portrait_of_the_Yongzheng_Emperor_in_Court_Dress.jpg
판리군기사무처 옹정제
옹정제는 무자비한 철혈군주였다. 그는 융과다(隆科多)와 연갱요(年羹堯)의 도움을 받아 황위에 올랐다. 그러나 황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자신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서북 방면을 평정한 공까지 세운 연갱요는 감옥에 처넣었고 융과다는 죽을 때까지 유폐시킬 정도로 정이 없었다. 제위에 위협이 될 황자들을 모조리 숙청해버린 그는[10] 강희제 말기 방만해졌던 재정과 인사를 철저하게 다잡았고 강희제 시대의 번영을 이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옹정제는 판리군기사무처(辦理軍機事務處)를 세우고 밀접제도[11]를 실시해 황제의 권한을 확대하는 한편, 인두세를 지세에 통합하는 '지정은제'를 시행해 빈곤층의 부담을 경감했다. 특히 이 지정은제의 경우 향리와 부자들이 격하게 반대했지만, '지정은제 시행에 반대할 시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하겠다'는 초강경책까지 써가면서 확립에 성공했다.

옹정제가 가장 신경 쓴 정책은 강희 말기 점점 심해지던 관리들의 부정부패 단속이었다. 그는 모선귀공(耗羨歸公)과 양렴은(養廉銀) 제도를 실시해 관리들이 관례적으로 받아챙기던 부가비용을 양지로 합법화했고, 대신에 그를 초과하는 세금을 걷으면 가혹한 형벌로 다스렸다. 관리가 백성의 돈을 빼앗으면 당사자 본인은 물론 가족, 친척까지 연좌로 그 죄를 물었다. 너무 부패가 심한 사람은 아예 사형을 시켜버릴 정도로 가혹했고, 그 덕에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하남성이 10년 만에 70만 냥 흑자로 돌아서는 등 청나라의 청렴도는 크게 개선됐다.

각종 사회 개혁에 앞장선 황제기도 했다. 재위 1년차에 천민 제도가 사회 발전을 막고 덕을 행하는 데에 부담이 된다는 상소를 받고서는 부분적으로 천민 제도 폐지에 나서기도 했다. 관기인 낙호(樂戶), 역적이나 흉악범의 후손인 타민, 재산이 없어 배 위에 거주하는 단호 등의 지위를 폐지하고 일반 평민으로 편입시켰던 것이다. 또한 이민족 문제에 있어서도 개토귀류(改土歸流) 정책을 시행, 운남성 일대의 소수민족들을 중국 내로 편입시키고 통일된 토지 제도, 행정 제도를 도입하는 등 사회 안정에 막대한 힘을 쏟았다.

옹정제는 잔혹한 황제로서 당시에는 평가가 썩 좋지 않았다. 재위 기간도 10년 남짓으로 60년에 달하는 강희제 건륭제에 비해 짧은 편이고, 워낙 가혹한 몰수 정책과 문자의 옥을 시행해 사회를 억누르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 들어서는 강희 말년에 허물어지던 기강을 바로잡고 재정을 다시 채워넣어 불안하던 청나라가 성세를 되찾도록 한 군주로 재평가받는다. 워커홀릭답게 아침부터 밤까지 정무에만 집중했고 유능한 관료들을 대거 기용해 적재적소에 배치한 나름대로의 성군이었다. 이런 옹정은 1735년 정사를 보다가 몸이 나빠져서 쓰러져 죽었고, 이후 그의 아들인 건륭제가 즉위했다.

3.3. 건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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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 원명원의 복원도[12]
1735년 즉위한 건륭제는 청나라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군주다. 60년이 넘는 건륭제의 치세 동안 중국 강역은 준가르를 정복해 역사상 최대 규모에 이르렀다. 이때 중국 인구는 3억이 넘어갔는데, 당시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달했다. 강남과 광둥의 비단, 목화 산업은 그 절정에 달했고 징더전에는 세계 최고 품질의 도자기를 쏟아냈으며 산시성에서는 초기적인 은행이 등장하여 근대 자본주의의 기틀을 잡았다.

하지만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다. 건륭 말기로 갈수록 니오후루 허션 같은 희대의 간신배가 등장하며 나라를 좀먹었고 관료들의 부패가 날로 심해졌다. 재위 초반부터 할아버지 강희제를 본받고 싶어하던 건륭제는 할아버지처럼 여섯 번씩이나 강남으로 순행을 떠났다. 허나 여행 경비를 최소화하던 강희제와 달리 사치스런 성격이던 건륭제의 남순은 국가 재정에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13] 외적으로는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제국이었으나 속으로는 썩어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건륭제 치세 동안에도 문화 발전은 계속되어 수많은 책들이 출간되었는데, 대표적으로 홍루몽, 요재지이, 유림외사 같은 소설들은 물론 대청회통 같은 법전, 청삼통 같은 역사책들까지 두루 등장했다. 특히 1773년 건륭제가 직접 지시한 사고전서가 이 분야의 끝판왕으로 유명하다. 중국 역사를 모두 통틀어 서적들을 모은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총서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의 발전은 엄격한 검열과 함께했다. 문자의 옥은 건륭의 시기에도 계속되어 청나라에 반하는 서적들은 죄다 불태워졌고 대명세(戴名世) 같은 학자들은 아예 살해당하기까지 했다.

서양인들이 중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미묘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시기다. 원래 16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시누아즈리 열풍은 17세기까지도 계속되어 강희제 옹정제의 시기 동안에는 '동쪽에 유토피아가 있다'라고 여길 정도였다. 허나 건륭제의 통치 동안 악화되는 중국의 실상이 점점 더 알려지고 유럽의 식민제국화가 가속화되며 점점 중국을 바라보는 관점이 부정적으로 변했던 것. 통상을 요구하러 왔다가 쫒겨난[14] 영국의 조지 매카트니 경은 건륭제를 충동적이고 지나치게 의심이 많다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반면 관대하고 나라의 번영을 이끈 명군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외치에 깊게 관여한 군주였던 건륭제는 준가르 복속을 통해 서북 지방을 안정시키는 한편, 티베트를 2번이나 침공한 네팔을 격퇴하고 형식적인 주종관계를 맺어 평화를 유지했다. 다만 항상 정복 정책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4번씩이나 미얀마 꼰바웅 왕조를 침략했지만 모조리 실패했고, 베트남에서도 기존 후 레 왕조가 신생 떠이선 왕조의 반란에 직면하자 군대를 보내 청월전쟁을 일으켰으나 떠이선 왕조에게 격퇴당했다. 이후 떠이선 왕조에게 형식적인 복속은 얻어냈으나 어디까지나 체면치레일 뿐이었고 이같은 원정 실패는 나라 재정에 상당한 부담이었다.

건륭제의 치세는 외적으로 봤을 때는 완연한 청나라의 최고점이었다. 그 영토는 무려 1,470만 km2에 달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들 중 하나였고, 조선 류큐 왕국, 베트남 등 주변에 여러 속국들을 거느렸다. 일본 에도 막부는 복속되지는 않았으나 역시 청나라를 상국(上國)이라 불렀고 도쿠가와 이에츠나 쇼군들은 중국 문화에 관심이 지대했다. 세계적으로 봤을 때도 중국은 의 블랙홀이라 불릴 정도로 전세계의 부를 미친 듯이 빨아들이는 최종 종착지였고 경제적으로나 규모로나 명실상부한 1위 대국이었다.

하지만 내부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그 빛이 크게 바랬다. 황제는 자신이 '원정 열 번을 모두 승리한 노인'이라는 뜻으로 십전노인(十全老人)를 별호를 사용하며 군사 업적을 칭송했지만, 준가르, 회족, 쓰촨성, 구이저우성 등 제국 전역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확립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이는 조정의 재정에 막심한 타격이었다. 치세 중후반부에는 니오후루 허션이라는 간신배를 국정에 끌여들여 나라가 기울어갔고, 지주들에게 토지가 집중되며 부익부빈익빈은 갈수록 악화됐다. 소규모 자작농들의 삶은 비참했고 곳곳에서 백련교도의 난 등 민란이 발호했다. 그는 1796년 아들 가경제에게 양위하고 3년 간 태상황으로 머무르다 1799년 사망했는데,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청나라는 결국 가경제 연간부터 본격적인 쇠락의 길을 타고 만다.

4. 영토

파일:800px-Qing_Dynasty_1820.png
건륭 24년(1759), 청나라는 마침내 신장 일대를 장악하고 1470만 km2에 달하는 역대 최대 강역을 달성했다. 당시 청나라의 영토는 북쪽으로는 사얀 산맥, 북동쪽으로는 스타노보이 산맥, 동쪽으로는 사할린, 서쪽으로는 발하슈호에 달하여 중국 역사상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하고 통일된 다민족 제국을 이루었다.[15] 심지어 건륭제 시기에는 저멀리 믈라카 제도 일대에서도 조공을 바치러 왔을 정도로 기세가 대단했다. 청나라는 단순히 영토를 점유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명안도 등을 신장 지역으로 보내 일대를 답사하고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를 제작하게 하는 등 영유지에 청의 행정시스템을 정착시키려 노력하기도 했다.

청나라는 의도치 않게도 현대 중국에게 어마어마한 영토를 남겨주었다. 원래 중국의 영토는 명나라 수준에 머물렀고 내몽골, 신장 위구르 자치구, 티베트, 만주 같은 거대한 땅들은 모두 중화 밖의 영토였다. 허나 청나라가 이 거대한 영토들을 모두 정복하며 중국의 영토를 2배 넘게 늘려놓았다. 괜히 청나라를 중국의 산타클로스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물론 청나라가 말기에 쇠퇴하며 러시아 제국에 북동부의 막대한 땅을 뜯겨나갔지만, 선통제가 퇴위하고 들어선 중화민국은 여전히 1120만 km2에 달하는 엄청난 영토를 청나라에게서 승계받았다. 이 정도의 강역을 정복한 것은 원나라를 포함한 그 어떤 중화 왕조들도 달성하지 못했던 업적으로, 만일 청나라가 존재하지 않았고 중국이 기존 명나라의 영토만 승계했다면 국력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약소했을 것이 뻔하다. 쑨원이나 장제스 같은 민족운동가들도 청나라는 싫어했지만 청나라의 영토는 부정하지 않았다.

5. 정치

파일:wp4664133.jpg
자금성의 전경
강희제는 명나라 말기 내각대학사들이 권력을 휘두르던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내각학사들의 권력을 빼놓는 데에 주력했다. 내각대학사 직 자체는 유지했으나 황제권이 크게 강화되어 명나라 시절에 비하면 크게 권한이 약해졌다. 황제 혼자서 위에서 모든 지시를 내리니 상서와 대학사들이 논쟁을 벌이는 일이 사라졌고 환관들이 정무에 개입하는 일이 줄어들며 정치 체제가 안정화됐다.

강희제는 정치적인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한인과 만인을 고루 등용했는데, 내각 인사 대여섯 명 중 한두 명은 강남 출신으로 뽑았다. 강희 20년에 새로 내각에 입각한 사람들만 봐도 만주인 2명, 한인 4명이었는데 한인 4명 중 2명은 강남 출신이었다. 이러한 세심한 인사 덕분에 한인을 일방적으로 탄압하다가 망한 원나라와 달리 훨씬 탄탄한 구조를 갖추기가 가능했다. 또한 남서방에 한족 출신의 한림원 학사를 두어 자문하게 함으로써 한족을 크게 챙겼고, 이들은 사실상 반쯤 내각처럼 활동하곤 했다. 당대 청나라의 행정체계가 워낙 관료제의 끝판왕 수준이라 조지 매카트니가 이를 보고 경탄했을 정도.

원래 중국에서는 새 왕조가 세워질 때마다 기존 신하와 인재들이 충과 의리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새 정권에 입신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명나라가 세워질 때도 몇몇 신하들이 명나라의 녹봉을 받아먹기를 치욕스레 여겨 산으로 도망가거나 손가락을 자르는 일이 있곤 했는데, 주원장은 가차없이 이들을 반역도로 규정하고 아예 쳐죽여버렸다. 이 짓을 해버리니 몇 년 동안 전국에 유능하고 절개 있는 인재의 씨가 말랐고, 남은 건 무능하고 시대영합주의적인 자들뿐이었다. 안 그래도 한족의 반발을 억누르고 포용해야 할 청나라는 이런 짓을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강희제는 일부러 대표적인 반청파 인사인 엄승손(嚴繩孫)을 관직에 등용하는 등 관대한 인사를 펼쳤다. 이러한 정책은 효과가 좋아서, 엄승손은 훗날 반청파에서 돌아섰고 한족은 만주족 황제를 빠르게 받아들였다.

5.1. 황권 강화

파일:태화전 옥좌.jpg
자금성 태화전의 옥좌
순치제는 제위를 물려받을 강희제가 너무 어렸기에 일단 보정대신들에게 승계와 인사, 정책 문제를 맡겼다. 그러나 구왈기야 오보이 등 보정대신들의 위세가 지나치게 강해지자 위협을 느낀 강희제는 점차 보정대신들의 힘을 제한하고 친왕들이 팔기군에 미치는 영향을 대폭 줄였다. 기존 만주족의 친왕, 기문들이 국정에 개입하는 한도를 크게 줄이고 황제가 임명한 관료들을 그 자리에 배치함으로써 황제의 1인 독재체제를 구성한 것이다. 구왈기야 오보이가 인사를 휘두르던 시절에서 교훈을 얻은 강희제는 오직 황제만이 인사권을 가지게 하고 당파 싸움을 억눌렀다.

관료들의 임면권, 상벌을 내리는 권한은 오직 황제에게만 허락된 권한이었고 그 어떠한 신하도 이에 관여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또한 신하들의 수정 없이 황제 직통으로 올라오는 상소문인 밀접과 밀지를 대폭 확대해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붕당을 벌이거나 조정 내에 파벌을 만드는 일은 공식적으로 금지됐다.

청나라의 정치 체제는 이전의 중화 왕조들에 비해 약간 독특했다. 한나라 이래로 명나라까지 2천 년간 중국은 유교를 신봉하는 관료들이 틀어쥔 철저한 관료제 국가였다. 허나 원나라 청나라는 약간 결이 달랐다. 이 두 나라는 각각 몽골족과 만주족이 쳐들어와 한족을 피지배층으로 삼고 세운 정복왕조로, 기존의 왕조들에 비해 '부족 정치'의 성격이 훨씬 강했다.

제국의 특권층이었던 만주족은 기존 한족 왕조의 고도로 관례화된 행정절차들을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예를 들어 한족 왕조에서는 상소가 올라오면 제일 먼저 6부에서 이를 검토한 다음에야 황제에게 올려보냈다. 황제가 이를 재가하면 또다시 6부나 예부에서 이를 검토하고 그제서야 명이 하달됐다. 족장 개인의 카리스마 중심 체제에 익숙하던 만주족은 이를 번거롭게 여겼다. 청나라 역시 명나라의 6부를 승계해 설치했지만 6부와 육부상서들의 권한은 이전보다 훨씬 약했다. 6부의 상서들은 독자적으로 중대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었다. 중대 결정사항들은 황제 직속기관인 군기처에서 직통으로 황명을 내려받아 처리했고 황명에 다른 신하들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원래 중국에서는 진나라 이래로 사대부들의 목소리가 슬금슬금 커지더니, 나중에는 황제의 권력마저도 제한하고 황제가 선비들의 뜻을 정책에 반영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풍조마저 생겨났다. 황제 독단으로 정책을 정하면 안 되고 학자와 지주, 유신들과 함께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풍조는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완전히 작살났다. 청나라 조정은 지방의 유신들이 상소를 올려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는 일을 엄금했고 자기들끼리 붕당이나 당파를 조직함도 제한했다. 6부와 군기처의 군기대신들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황제에게 직통으로 간언하기 어려웠다. 역대 왕조들이 중요시하던 한림원 역시 그 목소리가 크게 제한됐다. 지방에서는 오직 총독, 순무, 포정사, 안찰사만이 정부에 간언할 권한이 있었고 일개 재야의 선비 따위가 조정에 간여하기란 상상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지방 유신들의 입을 틀어막는 경향은 순치제가 전국 각지에 흩어진 학부의 명륜당(明倫堂) 앞뜰마다 비석을 세운 데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이 비석을 수평으로 누워 있다 해서 '와비(臥碑)'라고 불렀는데 첫째: 생원들은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 것, 둘째: 함부로 맹이나 결사를 조직하지 말 것, 셋째: 함부로 공공장소에 글을 쓰지 말 것을 명하는 내용이다. 청나라 조정은 기존의 한족 왕조들에 비해 훨씬 사대부들을 강하게 통제했다.

그러나 청나라의 정치 체제가 이전보다 퇴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신청사학파(新清史學派) 등 일부 학자들은 청나라의 정치가 명나라의 정치체제를 받아들여 더욱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고 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판리군기사무처는 본디 준가르 원정을 위한 일시적인 의결기구에 불과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상설화되어 결국 청의 최고결정기구로 성장한다. 황제는 군기처를 통해 훨씬 효과적으로 행정을 틀어쥘 수 있었으며 밀접과 밀지 제도는 신하들에 대한 통제력을 크게 강화했다. 청나라가 새로 설치한 내무부는 명나라의 내정 체제보다 더욱 규율적이었으며, 덕분에 청나라에서는 명 말처럼 환관이나 외척들이 설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5.2. 부정부패 척결

조선이 청나라에 보낸 연행사들이 남긴 기록 ' 연행일기'를 보면 청나라 관료들은 명나라에 비해 그나마 청렴했다고 나온다. 당시는 아직 명나라가 멸망한지 얼마 되지 않아 명나라 조정에 관한 기억이 새록새록할 때였는데, 당대 조선인들이 보기에도 망해버린 명나라 신하들에 비해 청나라 신하들이 더 깨끗했다는 것. 명나라를 방문한 조선 사신들은 명나라 관료가 뇌물을 요구한다거나 부패에 찌들어있다고 불평한 기록을 남겼지만, 청나라에 방문하고 남긴 기록에는 '한족의 부패하고 기만적인 풍습', '청나라는 탐욕스럽지 않으며 사람들의 본성이 선량하다'라고 칭찬을 남겼다. 전반적으로 명나라 관리들에 대한 인상보다 청나라 관리들의 인상이 더 좋았던 것이다.

청나라는 적어도 강건성세 시절에는 역대 중화 왕조들 가운데에서도 탐관오리들을 가혹하게 처벌한 편이었다. 강희제는 청렴한 관리들을 크게 아껴 치하했으며, 옹정제는 양렴은과 모선귀공 등을 이용해 관리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탐관오리들을 삭탈관직했다. 건륭제 역시 거대한 감옥을 지어 범죄자들을 가혹하게 벌했다. 세 황제들은 모두 관료들의 부패를 경계했고 이는 청이 100년 넘게 태평성대를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허나 옹정제를 제외한 강희제와 특히 건륭제는 말기로 갈수록 점차 기강이 해이해졌다. 한 명의 황제가 지나치게 오랜 세월 동안 통치하다보니 자연스레 풀어질 수 밖에 없었고, 특히 건륭제의 경우 본인이 사치향락에 탐닉하며 조정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느슨해졌던 것. 뿐만 아니라 강희와 건륭은 관리들이 부정부패를 저지른 후에 처벌하는 데에만 집중했지 부정부패의 원인 자체를 근절하려는 시도는 부족했다.


[1] 집권기간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순으로 반대다. [2] 다만 태평성대 비슷한 격인 문경지치와 달리, 강건성세는 영토확장에도 골몰했으며, 만한병용같은 융화 정책도 이뤄졌지만 동시에 문자의 옥같은 한족 탄압 정책도 이뤄졌기 때문에 마냥 태평성대란 느낌하곤 좀 다르다. 물론 이는 건국부터 내려오는 '만한갈등'[16]이라는 구조적 모순 때문이라 이미 중원땅에 들어온 이상 단순히 명군 뽑기운으로 다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긴 했다. [3] 조선 숙종 영조 사이의 경종을 생략해서 '숙영조'라는 말을 쓰는 것과 비슷한 경우이다. [4] '강건했던 전성기라는 뜻이겠지?' 라는 식으로.. [5] 사실 이는 청나라가 소수민족이 지배계층인 영향도 있었다. 즉, 조금만 황제가 어긋나면 민족 자체가 몰살될 수 있다는 일종의 절박함이 최소한 청나라 황제들이 이전 한족 황제들보다 부정부패는 덜한 결과를 낳은 것. 다만 19세기 중반, 아편전쟁 패배 이후로 두려움 때문인지 폐쇄적인 기류를 고집하다 결국 훅 갔다. [6] 물론 이는 서세동점이라는 문명사 수준의 큰 외부적 요인 탓도 있긴 했다. [7] 이를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이라고 부른다. 강희 50년의 인구를 조사한 다음 정세를 영원히 동결시켜 버렸다. 말 그대로 국가 전체적으로 거둬들이는 정세가 더 이상 안 늘어났다는 뜻이다. [8] 강희 연간의 중국 사람들이 한꺼번에 아이를 많이 낳아서가 아니라 호구 수에 따른 세제 부담으로 호적 체계에서 벗어나 있던 농민이 그만큼 많았다가 그러한 부담이 사라지면서 이 체제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9] 예수회 선교사들에 따르면 황제는 가장 비천한 신분인 농부, 장인들의 접근마저도 막지 않았으며 이들의 말을 유의깊게 들었다. 사람들에게 관할 관리에 대한 만족도와 평가를 물어보고선 해당 관리의 인사고과에 반영하기도 했다고. [10] 옹정제는 다시는 강희 말기의 제위다툼이 반복되지 않도록 비밀건저제(秘密建儲制)를 실시했다. 황제가 살아있을 때 자금성 건청궁의 현판 뒤에 작은 함에다가 차기 황제의 이름을 미리 써놓은 종이를 넣어두는 것. 황제가 죽으면 환관이 이 종이를 꺼내 읽는 식이었다. 나름 효과가 있어서, 청나라는 말기까지도 제위다툼이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11] 당시 청나라에는 제본(題本)과 주접(奏摺)이라 하여 이중적인 보고 시스템이 있었다. 제본은 지방 공무에 관해 내각 등을 경유하여 황제에게 전해지는 공식적 보고인 반면, 주접은 관리가 직접 황제에게 올리는 기밀문서의 성격을 띠었다. 옹정제는 공적인 제본 대신 황제에게 다이렉트로 들어오는 주접을 강화해 황제가 신하들에 의해 가공되지 않은 정보를 바로 받을 수 있게 만들었다. [12] 원명원은 1710년 강희제 연간에 처음 지어졌고 건륭제가 크게 개축했다. 특히 1747년 서양의 건축 양식과 중국 전통 건축 양식을 혼합해서 지은 궁전 '서양루'가 유명하다. 건륭제는 생전 이 곳에 머무르기를 즐겼다고 한다. 다만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도중 영국-프랑스 연합군에게 불타버려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13] 청나라 재정이 버티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또한 백성들에게서 경비를 뜯어내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남순으로 인한 원망을 피하기 위해 남순을 할때마다 해당 지역의 세를 감해주기도 했다. [14] 서구 학계에서는 건륭제가 조지 매카트니 경을 받아들이지 않고 쇄국정책을 펼친 것이 훗날 쇠퇴의 원인이라 주장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러기에는 조지 매카트니의 요구가 영토 할양이나 자유무역 등 애초에 청나라 입장에서 지나치게 불평등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이었다. [15] 그나마 당나라 원나라 정도가 이에 비빌 수 있겠으나 지역 장악력, 면적 면에서 모두 청나라에 미치지 못한다.


[16] 물론 청은 이 외에도 여러 민족이 있는 다민족 국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