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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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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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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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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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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 아일랜드인)
<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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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잉글랜드 왕국 요크 왕조 제4대 국왕
리처드 3세
Richard III
파일:1280px-King_Richard_III.jpg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리처드 3세
(Richard III)
출생 1452년 10월 2일
노샘프턴셔 파서링게이 성
사망 1485년 8월 22일 (향년 32세)
레스터셔 보즈워스 필드
재위기간 잉글랜드의 왕
1483년 6월 26일 ~ 1485년 8월 22일
서명 파일:리처드 3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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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신장 172cm[1]
배우자 앤 네빌 (1472년 결혼 / 1485년 사망)
자녀 에드워드, 존(사생아), 캐서린(사생아)
아버지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 플랜태저넷
어머니 세실리 네빌
형제 앤, 에드워드 4세, 에드먼드, 엘리자베스, 마거릿, 조지
장례식 2015년 3월 26일
레스터셔 성당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즉위 이전3. 찬탈
3.1. 왕위에 오르는 과정3.2. 에드워드 5세와 그 동생을 죽였다는 정황
4. 즉위 후
4.1. 외아들의 죽음
5. 사망6. 튜더 왕조의 시작7. 유골 발견
7.1. 무덤의 유실7.2. 리카디언(Ricardian)과 필리파7.3. 유골 발굴7.4. 척추측만증 환자의 전투력 고증7.5. DNA 유전자 검사
7.5.1. 부계 Y 염색체 비교 분석/ 영국 여왕 정통성 문제7.5.2. 모계 미토콘드리아 비교 검사
7.6. 재장례
8. 매체

[clearfix]

1. 개요

장미 전쟁 당시 잉글랜드 왕국 국왕. 에드워드 4세의 동생으로 조카들이었던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 리처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섭정(Lord Protector)[2]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후 돌변해서 조카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재위기간은 겨우 2년에 불과하지만 이 짧은 기간 동안 상당히 많은 사건이 일어났으며 그의 죽음과 함께 장미 전쟁이 종식되었기 때문에 영국 중세사를 논할 때 상당히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다.

2. 즉위 이전

1452년 10월 2일 현 영국 잉글랜드 이스트 미들랜즈 노샘프턴셔에 있는 포더링헤이(Fotheringhay) 성에서 요크의 리처드와 세실리 네빌의 13남매 중 12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웬즐리데일에 있는 미들햄(Middleham) 성에서 보냈는데, 그 성은 사촌형이기도 한 워릭 백작 '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의 소유였다. 그곳에서 리처드는 워릭의 딸들 이사벨과 앤, 그리고 워릭의 피후견인 프랜시스 러블과 친하게 지냈고 이후 그 친구 관계는 평생 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1460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아버지와 둘째 형 에드먼드가 죽자 어머니가 바로 윗형 조지와 함께 저지대 국가들로 보내어 1년간 피난 생활을 했다. 그 뒤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에드워드 4세로 즉위한 큰형으로부터 글로스터 공작위를 받았다. 다만 아직 나이가 어려 어린 시절 살던 미들햄 성으로 보내져 12살까지 기사 훈련을 받았다.

사춘기를 겪는 동안 리처드는 선천성 척추측만증으로 고통받았다는 것이 유골 검사 결과 밝혀졌다. 그리고 이 시기에 사생아 2명(내지 3명)을 낳았는데 그들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에드워드 4세와 그의 옹립공신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Richard Neville)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결혼을 계기로 반목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에드워드 4세가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왕비가 되기엔 신분이 낮았는데도 그녀의 미모와 재산에 혹해 즉흥적으로 비밀 결혼을 했기 때문이였다. 정확히는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아버지 리처드 우드빌이 베드퍼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의 시종무관이었고 기사계급 출신이었다. 특히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어머니인 룩셈부르크의 자퀘타(Jacquetta of Luxembourg)는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 가문이던 룩셈부르크 방계 출신의 고위 귀족으로, 헨리 6세의 숙부인 베드퍼드 공작 존과 결혼하기도 했다. 하지만 불과 2년만에 베드퍼드 공작이 사망하면서 자퀘타는 과부가 되었고 시조카 헨리 6세의 명으로 잉글랜드로 돌아오던 중 전남편의 시종 무관이었던 리처드 우드빌과 사랑에 빠져 국왕의 허락도 없이 귀천상혼으로 결혼했다. 하지만 자퀘타가 헨리 6세와 그의 왕비인 앙주의 마르그리트 모두와 인척 관계였던 점 덕분에 그들의 결혼은 정식으로 인정받았고, 리처드 우드빌은 세습 귀족인 리버스 남작(이후 백작으로 승격된다) 작위까지 받게 되었다. 즉, 완전히 농부나 하층민 집안 출신은 아니었지만 에드워드 3세의 혈통을 물려받은 다른 잉글랜드의 귀족들에 비해 신분이 낮은 건 확실했다. 당연히 대부분의 귀족들은 물론 추밀원까지도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결혼에 반대했고 여론도 그닥 좋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 공주와 에드워드 4세의 결혼을 추진했다가 에드워드의 갑작스런 결혼으로 부랴부랴 혼인동맹을 수습하느라 대외적으로 명예가 크게 실추당한 워릭 백작의 불만이 가장 컸다. 게다가 엘리자베스의 첫째 남동생 앤서니는 별다른 능력 없이 오로지 누나의 후광만으로 짧은 기간에 그와 맞먹는 을 지녔기 때문에 워릭 백작은 개인적인 자존심까지 상처입었다.

리처드는 둘째 형인 클래런스 공작 조지와 달리 에드워드 4세에게 충성했다. 클래런스 공작은 에드워드 4세가 자신이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맏딸 이사벨 네빌과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가졌고, 1469년에 이르러서는 워릭 백작과 손을 잡고 각지에서 반란을 사주하는 등 대놓고 에드워드 4세를 적대했다. 1470년 9월 워릭과 클래런스는 미리 잉글랜드 북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에드워드 4세의 관심을 돌린 뒤 잉글랜드 남부로 침공했다. 워릭의 동생 몬태규 후작 존 네빌이 결정적인 때에 에드워드를 배신하여 에드워드 4세는 동생 리처드, 윌리엄 헤이스팅스 등과 함께 국외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서둘러 잉글랜드를 빠져나오느라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에드워드 4세가 자신의 모피 외투로 뱃삯을 지불하려고 하자, 리처드가 상륙지의 토지 관리인에게 서둘러 달려가서 3파운드를 빌려와 뱃삯을 내 주었다고 한다. 에드워드와 리처드 형제는 자신들의 누이인 요크의 마거릿이 시집갔던 부르고뉴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요크의 마거릿의 남편인 부르고뉴 공 샤를(용담공 샤를)은 처남들의 망명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노발대발했지만, 나중에는 군사 1200명과 배 36척을 지급해서 에드워드 4세의 귀환을 도와주었다.

1471년 3월 11일 부르고뉴를 출발한 에드워드와 리처드는 요크 파에 동정적인 동앵글리아에 상륙하려 했으나 폭풍 때문에 3월 14일, 홀더네스 지역에 상륙했다. 그 지역은 처음에는 그들의 진입을 거부했지만 에드워드가 '왕위가 아닌 그저 요크 공작령만 돌려받으러 왔다.'고 주장하여 겨우 문을 열어주었다. 헨리 4세가 예전에 썼던 그 레퍼토리다. 형제는 조지의 지지를 되찾았고, 1471년 4월 14일 바넷 전투에서 리처드는 17살의 나이에 군대의 선봉에 섰다.

전투 승리에 그가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논란이 있지만, 같은 해 5월 4일 튜크스베리 전투에서는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 확실하다. 리처드는 두 전투 모두에서 선봉에 섰지만, 튜크스베리 전투가 끝난 뒤에는 (이후 노퍽 공작이 되는) 존 하워드와 함께 포로로 잡힌 랭커스터 파 주요 인물들을 재판했기 때문이다. 형인 클라렌스 공작은 에드워드 4세에 반역죄로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다가 처형되었는데 훗날 리처드가 포도주 통에 넣어서 살해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에드워드 4세는 1472년 북부 지역에 대한 정부의 통치력을 높이고 경제적, 행정적으로 낙후한 북부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북부자문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리처드에게 잉글랜드 북부의 통치권을 주어 자신의 대리로서 그곳을 다스리게 했다. 리처드는 그때부터 1483년까지 북부를 다스렸는데, 요크 시를 중심으로 북부 전역에서 인기가 높았는데, 북부자문위원회의 최고 민사법원장으로 일하면서 공정한 법 집행을 했기 때문이다. 북부자문위원회는 요크셔와 북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주로 토지 분쟁을 해결하고 왕의 평화를 지켰으며 범법자를 처벌했다. 그 결과 북부의 치안은 이전에 비해 크게 좋아졌고 경제적으로도 점차 나아졌다.

하지만 1470년대 중반부터 스코틀랜드의 잦은 침입이 문제되었고, 1480년에는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프랑스 동맹을 맺고 있었기에 전쟁을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에게 위아래에서 협공당하는 막장 상황이 도래할 것이었다. 이에 리처드는 그해 5월 12일 북부 군대 사령관이 되어 노섬벌랜드 백작과 함께 맹렬한 반격을 했고 11월 왕과 자문위원회가 공식 선전포고를 하자 본격적 공격에 돌입하... 려고 했지만 왕이 제때 군대를 이끌고 도착하지 못했고 스코틀랜드 역시 지도부의 분열로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여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1482년 8월 초까지 간헐적인 접전만 계속해야 했다.

8월 초, 리처드는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에 들어가 스코틀랜드 왕의 남동생 올버니 공작이 화해 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공격을 늦추지 않아서 수백 년 동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에서 주인이 바뀌어 왔던 버윅-어펀-트위드(Berwick-upon-Tweed)를 8월 25일 비로소 손에 넣었다. 리처드의 점령 이후 다시는 버윅의 주인이 바뀌는 일이 없었고, 바로 그날 에드워드 4세 로마 가톨릭 교황 식스토 4세에게 리처드가 에든버러와 버윅의 시민들을 모두 살려주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다.

3. 찬탈

1483년 4월 9일, 에드워드 4세 낚시 여행을 떠났다가 뇌졸중으로 40살에 급사하고 말았다. 에드워드 4세는 원래 즉위 전부터 여색을 극도로 밝혔는데 나이가 들고서도 거듭된 폭식과 폭음으로 건강이 망가졌는데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에드워드 4세는 유언장에서 동생들 중 생존해있는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를 섭정으로 지명해놨기에, 리처드가 조카 에드워드 5세의 섭정이 되어 새 왕이 성인이 될 때까지 정권을 잡아야했다.

하지만 왕비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유언은 물론 국왕의 죽음조차(!) 리처드에게 알리지 않고 동생 리버스 백작 앤서니에게 무장한 군사 2천명을 주어 장남 에드워드 5세의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교육을 위해 웨일스 변경에 있던 아들을 런던으로 데려오도록 했다. 에드워드 5세가 어려도 일단 대관식을 치르면 굳이 섭정이 필요하지 않으니 리처드를 이후의 정국에서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의도였겠지만, 알려지지 않은 경로로 이 소식을 접한 리처드는 버킹엄 공작을 비롯한 신사 6백 명과 함께 약간의 호위병력만 대동하고 내려가 런던 근교에서 무장한 앤서니의 군대와 마주쳤다. 에드워드 4세의 측근 윌리엄 헤이스팅스가 관여했다는 설이 있다.

리버스 백작 앤서니와 만난 리처드는 앤서니는 물론 그 동료 토머스 본,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사망한 첫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리처드 그레이를 체포한 뒤 어린 왕의 신변을 확보한다. 당시 잉글랜드에 머물고 있던 이탈리아인 연대기 작가 도미니크 만치니는 리처드의 리버스 체포가 당시 강력한 대귀족 중 하나이며 왕국 자문회의 수장인 윌리엄 헤이스팅스 경의 조언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적었다. 이후 리처드는 에드워드 5세에게 리버스 백작을 반역죄로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새 왕은 그의 주장을 믿지 않고 처형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쨌든 에드워드 5세와 함께 런던에 입성한 리처드는 섭정( 호국경)이 되었고 새 왕의 대관식을 7주 뒤로 미룬 뒤 그를 런던탑에 모셨는데 말이 좋아 모신 것이지 실질적으로는 연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리처드 입장에서는 조카가 자신보다 외가인 우드빌 가문과 그 수장인 리버스 백작을 더 의지하는 상황에서 대관식을 치르며 권력을 내려놓는 건 불가능했고 자신이 권력을 잡은 상황에서 자신의 적인 우드빌 가문을 제거해야만 했다.

이후 리처드는 왕국의 자문회를 움직여 우드빌 가문을 제거하고자 했으나 자문회 일원들은 그의 의도를 의심하고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비록 부정부패 등으로 별로 인기있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리버스 백작은 엄연히 왕국의 귀족이었고, 명확한 증거도 없이 그를 반역자로 몰아 체포하고 죽이려는 리처드의 시도는 다른 귀족들에게 불법적으로 보이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초조해진 리처드는 헤이스팅스 경이 은밀히 자신의 반대파와 손을 잡고 있다고 의심했고, 버킹엄 공작과 짜고 기습적으로 헤이스팅스를 체포한 뒤 반역죄를 주장하며 재판도 없이 처형하는 초강수를 두고 만다. 이 때부터 리처드가 찬탈을 생각하고 있었고 이에 반대할 가능성이 높은 헤이스팅스에게 누명을 씌워 숙청한 것이라는 주장도 많다.

리처드의 이러한 행위는 순식간에 자문회를 공포 분위기로 몰고갔다. 헤이스팅스의 갑작스러운 처형과 더불어 리처드의 영지였던 북부 잉글랜드에서 2만이나 되는 군대가 그를 지지하기 위해 내려온다는 소식에 자문회 귀족들은 겁에 질려 그의 거수기로 전락했다. 공포를 통해 자문회를 휘어잡은 리처드는 또다시 대관식을 미루고 대관식에 참석해야 한다는 이유로 왕의 동생인 요크 공작 리처드를 왕과 함께 런던탑으로 옮겼다. 리처드가 호국경으로 취임하면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이미 런던탑에 연금된 장남을 제외한 자식들을 데리고,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으로 피난했는데 당시 수도원은 성스러운 피난처로 여겨져 안에 있는 사람을 마음대로 체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리처드는 왕비를 설득(겸 협박)하기 위해 켄터베리 대주교를 보내서 결국 요크 공작을 런던탑에 함께 연금하고 만다. 동시에 그의 숙적이던 리버스 백작과 그 추종자들을 마침내 처형하는 데 성공한다.

우드빌 일가의 세력을 꺾은 뒤 리처드는 에드워드 4세가 엘리너 버틀러라는 숙녀와 먼저 결혼한 상태에서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선왕과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은 중혼이니 무효이고 그들의 자식들도 사생아라고 선포한 리처드는 자신이 에드워드 4세의 적법한 계승자라고 선언하면서 리처드 3세로 왕위에 올랐다. 에드워드 4세의 중혼 여부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음에도) 생전에 놀아제낀 행각이며 처음 만난 과부와 바로 결혼해버렸던 전적 등으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위인이라고(...) 여겨졌지만 리처드가 이를 이용해 사기친 것인지 실제로 형이 중혼했다고 믿은 건지는 알 수 없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에드워드 4세가 자신을 옹립한 네빌 일가를 견제하기 위해 처가인 우드빌 가문의 형제들을 중용하면서 평민 출신이었던 우드빌 가문은 하루아침에 외척으로 크게 출세한다. 하지만 우드빌 가문은 왕비부터가 솔선수범하는 부정부패 등으로 워낙에 악평이 거셌기에 에드워드 4세 사후 그들을 내쫓는 건 큰 무리가 없었다. 에드워드 4세는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재산과 미모에 반해(?) 덜컥 결혼하고는 수많은 애첩들을 후렸고, 이런 호색한 에드워드 4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의 아내나 딸들을 상납(?)하는 경우도 잦았다. 특히나 우드빌 가문은 왕비 엘리자베스의 빽을 믿고 수많은 부정부패를 저질렀고, 에드워드 4세도 런던시티의 상인들에게 독점권과 이권을 퍼주는 대가로 미녀들을 상납받아 후리는 등, 부부와 처가가 합심한 진상 짓으로 악명 높았다.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 때 추밀원과 잉글랜드 주교단은 모두 예비 왕비의 낮은 혈통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지만 국왕의 바람이었기 때문에 적법한 결혼이라 승인했고, 두 사람의 장남 에드워드 5세가 12살이 될 때까지 아무 말이 없다가 에드워드 4세가 죽고 나서 사생아 타령을 하는 걸 보면 어찌됐거나 정치적 이유라는 게 설득력이 있다.

에드워드 5세의 섭정이 된 리처드는 에드워드 4세의 음탕한 사생활에 대해 이야기꾼을 고용하여 6명의 사생아를 둔 것을 런던 도처에 선전했고, 윤리와 도덕을 드높이고자(?) 에드워드 4세의 애첩과 애첩을 상납한 남편을 처형했고(애첩을 벌하긴 했으나 목숨은 붙여줬다는 버전도 있다) 에드워드 5세가 사생아일지도 모른다는 썰을 열심히 퍼뜨렸다. 실제로 에드워드 4세는 호색한에다 죽기 직전까지 평민 유부녀와 놀아났고, 6명의 사생아를 두기도 했기에 사생아설은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3.1. 왕위에 오르는 과정


이 조치의 근거는 바스와 웰즈의 주교 로버트 스틸링턴(Robert Stillington)의 증언 때문인데, 스틸링턴은 리처드에게 나아가 '에드워드 4세는 전에 엘리너 버틀러(Lady Eleanor Talbot) 부인과 결혼했고 나는 그 결혼의 주례를 섰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엘리자베스의 미모에 반해 엘리너를 버리고 그녀와 결혼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엘리너는 에드워드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결혼하고 나서 얼마 후 수녀원에 들어갔고 얼마 안 되어 거기서 죽었기에 스틸링턴이 한 증언의 사실 여부는 검증되지 못했다.

3.2. 에드워드 5세와 그 동생을 죽였다는 정황

리처드 3세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폐위된 에드워드 5세와 요크공작 리처드 형제를 런던 탑에 두었다. 물론 나중에 찰스 2세때 런던 탑 계단을 보수하다가 상자를 발견했는데 안에는 유골들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유골들의 사망 연대가 언제인지도 불분명하거니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어,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 유골들을 꺼내 정밀 검사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다만 2017년 1월 현재까지도 잉글랜드 국교회 영국 왕실의 수장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망자의 안식을 방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유골의 발굴과 정밀 검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는 1900년 영국에 유학온 일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가 자신의 런던 탑 관광기를 단편소설화한 런던 탑에서 두 왕자 형제가 갇혀있는 모습을 상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일부 역사가들의 주장이나 문제제기와 달리 리처드 3세가 에드워드 4세의 두 아들 에드워드 5세와 요크공을 죽인 건 거의 확실하다. 에드워드 5세 항목 영어 위키백과의 주석근거< Horrox, Rosemary. "Edward V of England". Oxford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Oxford University Press. Retrieved 25 August 2013>는 물론이고 한국에 발간된 서적 중에서도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앙드레 모르네의 영국사, 서울대 라종일 교수의 <영국의 역사>, 역시 서울대 박지향 교수의 <영국사>에서도 일부 학자들의 다른 주장도 있지만 리처드 3세가 두 조카를 죽였음이 확실하거나 그렇게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한다.

어쨌든 이 사건은 한국에서는 계유정난과 비슷하기 때문에 그가 영국판 세조(수양대군)라는 이 있다. 기사, 기사 2, 기사 3. 공교롭게도 리처드 3세는 조선에서 계유정난이 일어난 해의 바로 이전 해에 태어났기 때문에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세조보다 10여년 늦게 죽었긴 하지만 세조와 동시기에 살긴 했다. 다만 속과정은 꽤 많은 차이가 난다. 먼저 권력욕이 미치도록 강한 건 양쪽 다 똑같지만 세조는 왕 유고시 가장 윗서열이자 수렴청정할 왕대비가 없는 것을 노린것이지만 리처드 3세는 형수이자 왕대비가 살아있는데도 섭정으로 지명되었다가 찬탈한 것이다. 에드워드 5세의 어머니이자 왕대비인 엘리자베스가 동서양 막론하고 드문 평민 출신 왕비라서 권력 기반이 정실 왕비치고 매우 약했다는 것과 서양은 외척인 왕비가 내국인이 아니라 외국 왕실의 왕족인 경우가 많아서 이른시기부터 외척을 배제하기 시작했기에 왕대비가 살아있는데도 찬탈을 한 것이다. 다만 결국 가장 왕족의 윗서열인 대비가 살아있는 가운데 에드워드 5세까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상황에서 아예 대비까지 제거하려는 무리수까지 둔탓에 결국 탈출한 대비와 반대세력들에 의해 제거 당했다는 점에서 최종적으로 승리자가 된 세조와는 결과와 그 최후가 아예 다르다.

4. 즉위 후

1483년 10월, 한때 리처드의 지지자였던 버킹엄 공작이 에드워드 5세 형제 살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진압되고 버킹엄은 참수되었으나 민심 안정이 필요해졌다.

1484년 1월 23일, 리처드는 재위 기간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의회를 열어 27일 동안 사법 18개조, 공법 15개조를 통과시켰다. 18가지 사법들은 전년 10월 반란을 일으킨 버킹엄 공작 일당을 단죄하고, 존 하워드에게 노퍽 공작을 수여하고, 북부 지역의 유력 귀족인 스탠리 가문에 토지와 벼슬을 퍼주면서 왕권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특히 마지막 목적에서 만들어진 <Titulus Regius(왕의 권리)> 라는 문서는 상술한 에드워드 4세의 혼인 문제를 근거로 리처드 3세의 계승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정리했다. 이후 헨리 7세는 이 문서의 원본을 포함한 모든 사본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크로일랜드 수도원에 한 부가 살아남아 현존한다. 헨리 7세는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장녀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했으므로, 만약 엘리자베스가 사생아라면 헨리 7세의 왕위 계승권도 큰 타격을 입기 때문에 사본을 파괴하라고 명했다.

15가지 공법들은 덕세를 폐지하는 등 사법 체계를 개혁하고 잉글랜드 상인과 소비자를 보호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는 전반적으로 힘없는 평민들에게 유리한 개혁이었기에 프랜시스 베이컨 경을 포함한 후대 학자들에게 호평받는다. 아래는 15가지 공법의 구체적인 내용.
1조 - "이제부터 모든 토지 양도, 토지 선물과 그와 같은 행동들은 판매자와 그 자손이 아니라 구매자에게 유리한 조건이어야 한다."
2조 - "이 왕국의 백성들은 어떠한 덕세도 부담하지 않는다."
3조 - "모든 치안 판사는 죄수에게 조건부 석방 영장을 발부할 수 있다. 죄수가 사권을 박탈당할 때까지 어떤 공무원도 그의 재산을 빼앗을 수 없다."
4조 - "신용과 토지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주 장관의 순회 때에 배심원을 선정해야 한다."
5조 - "1조는 오랫동안 내려오던 규정을 바꾼 것이 아니며, 왕은 영지 수령권을 유용할 수 없다."
6조 - "모든 파이파우더 법정[3]에서 원고 혹은 그의 변호사는 반드시 선서해야만 한다."
7조 - "개인은 민사법원의 재판관들 앞에서 부과된 재산 양도 민사소송(fine)과 그 선언서를 이행할 의무가 있다."
8조 - "브로드[4]는 팔리기 전에 반드시 완전히 세탁되어야 하고 길이는 24 야드, 너비는 2야드여야 한다. 직물 거래에 어떤 부정직한 일도 있어서는 안 되고, 하얀 직물에는 분필로 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
9조 - " 이탈리아 상인들이 상품을 파는 방식에 어느 정도의 외국인 규제가 필요하다."
10조 - "비단 레이스, 리본, 가위, 방울, 못 따위의 수입을 금지한다."
11조 - "이탈리아 상인들은 포도주 1통당 10개의 좋은 활을 만들 막대를 가져와야 한다."
12조 - "이 왕국에 특정한 상품들을 들여오는 걸 금지한 이유는 그것들이 초래할 결과 때문이다."
13조 - "포도주와 기름은 양을 재기 전에는 용기에 담아 판매할 수 없다."
14조 - "성직자의 십일조(dismes)를 걷는 회계사 재무부에서 진행되는 다른 사람의 소송에 증인으로 불려나오지 않는다."
15조 - "전임 잉글랜드 왕비 엘리자베스 그레이에게[5] 국가에서 내려준 모든 것과 영지를 다시 거두어들인다."

그러나 이전 랭커스터 왕들이 부족한 정통성을 의회의 도움으로 통치하려던것과 달리 요크 가문 왕들은 의회를 무시하고 상속권으로만 통치하려 했던게 실책으로 보인다. 뒤늦은 조치와 달리 요크 가문의 통치는 의회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리처드 3세가 급속하게 민심을 잃고 몰락한 것도 이것과 영향이 있다. 물론 이 시절 의회는 지금과 달리 상하원을 막론하고 귀족과 젠트리들이 좌우했다.

4.1. 외아들의 죽음

그런데 리처드에게 큰 타격을 준 사건은, 1484년 후계자인 외아들의 죽음이었다. 리처드는 두 조카를 죽이고 나서도 뻔뻔했다. 리처드 3세의 유일한 적자 에드워드가 죽고나자 후계자가 없었고 일단 자신의 누이의 아들인 외조카 존 드 라 폴을 추정상속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왕비 앤 네빌이 아이를 못 낳자 '왕비가 2월까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며 소원을 빌고 다녔는데 왕비는 4월에 기적적(?)으로 사망했다. 에드워드 5세를 폐위할 때까진 그나마 괜찮았지만, 유일한 적자가 죽은 데다가 두 조카를 죽인 뒤에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리처드는 30살 넘고 후계자도 없는 데다가 장애인이었고, 조카들까지 살해했기 때문에 후계자도 없어졌으므로 왕권의 지지기반이 흔들렸다. 요크 가문 지지자들은 두 조카를 죽인 것에 반발했고, 리처드도 민심을 수습하고자 자신이 사생아라고 격하시킨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장녀 요크의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했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문제는 리처드와 에드워드 4세는 이복형제도 아닌 친형제고 엘리자베스는 친조카라는 점이다. 당연히 신하들과 성직자들은 "사촌이면 몰라도 친삼촌-조카는 개족보."라며 극렬반대했다. 리처드는 치욕스럽게도 스스로 이런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며 공개 해명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이 당시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두 동생을 죽인 익명(?)의 범인은 극렬 저주하면서, 리처드를 열렬히 사랑한다고 공개 응수했다.

두 사람이 결혼설이 퍼지자 비밀리에 우드빌 왕비와 동맹을 맺었던 헨리 튜더가 급히 프랑스의 지원과 랭커스터 지지자와 요크 지지자들 중 리처드에 등돌린 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군이 상륙하자 놀란 리처드는 전투에 나섰다.

5. 사망

1485년 헨리 튜더는 프랑스에서 잉글랜드로 2천 병력을 끌고 웨일스 서쪽 끝의 '밀포드 헤이븐(Milford Haven)'에 상륙했다. 튜더 가문은 웨일스 출신이었기 때문에 웨일스는 헨리 튜더를 전폭 지지하여 헨리의 군대에 합류했고, 리처드 3세도 잉글랜드 전역의 귀족들을 소집하여 진압에 나섰다. 3주 후 잉글랜드 중부 레스터 지방 보스워스에서 양군이 맞붙었다. 양측의 병력을 살펴보면 튜더 가문의 병력은 많아야 5천을 넘지 않았고, 리처드의 병력도 많아야 1만 2천, 보통 1만 선으로 보는데 1461년 타우턴 전투에서 요크군과 랭커스터군 양측이 합친 병력이 5만이며 에드워드 4세가 요크군 2만으로 랭커스터군 3만을 격파하며 왕위를 얻었다는 점과 비교해 보자. 한마디로 리처드가 소집한 귀족들의 5명 중 4명이 소집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리처드의 권력 기반이 심각하게 흔들렸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잉글랜드 북부의 귀족 가문인 스탠리가 변수였다. 리처드 3세도 스탠리 가문의 지지를 얻으려고 그에게 토지와 직위를 퍼주다시피 하사했지만 문제는 스탠리가 헨리 튜더의 모친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하여 헨리의 의붓아버지 격이 되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리처드 3세의 뒷통수를 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리처드 3세는 이를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법률상만 결혼이고 실제 부부 생활은 하지 않았다. 당시 마거릿 보퍼트에겐 스탠리가 벌써 4번째 결혼이었다.

당시 전황은 리처드에게 유리했는데 리처드는 군대를 이끈 지휘경험이 있고, 무예도 할 줄 아는 전사였지만, 4살 연하의 헨리는 도망다니던 신세였기에 군대 지휘 경력이 전혀 없어서 후방에서 대기했고 그의 삼촌 옥스퍼드 백작이 실제로 군대를 지휘했다. 게다가 전투가 시작될 당시만 해도 리처드 3세의 국왕군은 언덕 위를 점하고 있었던데다 머릿수도 헨리 반군의 2배였다.

리처드는 노련한 장군 노퍽 공작이 맡고 있던 그의 오른쪽 날개를 먼저 출격시켜 언덕 아래 있던 헨리의 반군을 치도록 했다. 하지만 상대편 지휘를 맡고 있던 역시 노련한 장군 옥스퍼드 백작의 책략에 빠져, 노퍽 공작 존 하워드는 전사했고 먼저 출격한 오른쪽 날개는 진창에서 백병전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에 리처드는 왼쪽 날개를 맡고 있던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에게 노퍽 공작을 도우라고 명령했다. 이때 헨리 퍼시는 4천명의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헨리 퍼시는 명령에 불복종함으로서 사실상 배신했고, 어떤 사료에서는 심지어 헨리 7세에게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고까지 한다. 다만 현대에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대놓고 헨리 7세를 돕진 않았다고 말하지만 명령에 불복종한 건 사실이라며 명령 불복종설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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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소집병력들까지 전세가 불리해지자 전투에 매우 소극적으로 나섰고 대놓고 이기는편 우리편이라며 관망분위기를 보이자 리처드는 위기에 처한다. 결국 리처드 3세는 측근들의 후퇴 요구를 거부하고 왕인 자신이 직접 전투에 앞장 섰다. 특히 후방에 있던 헨리 튜더는 전황을 지켜보기 위해 전선에 가까이 오기 시작했고 그의 깃발이 가까운 곳에 휘날리는 것을 보고 리처드 3세는 기사들만 최소 1백 명을 불러모아 함께 언덕 아래로 승부를 건 기병 돌격을 시도했다. 이 기병 돌격에서 리처드 3세는 랜스로 헨리 튜더의 기수 윌리엄 브랜든[6]을 찔러 죽이고 헨리 튜더의 호위 기사들과 싸웠다. 위의 그림이 그 상황을 나타낸다. 오른쪽에서 왕관 쓰고 랜스차징하는 인물이 리처드 3세, 이 공격을 받은 기수가 윌리엄 브랜든이다. 들고 있는 깃발이 헨리 튜더의 깃발. 이 돌격은 예상 못한터라 헨리 튜더는 당황하여 호위 기사들이 교전을 벌이는 틈을 타 피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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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헨리 튜더의 친위 병력에 더해 상황을 관망하던 스탠리 가문[7]이 개입했고, 결국 리처드는 몸소 앞에서 지휘하며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에게 적대적인 튜더 왕조의 사가들조차 "리처드 3세가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다."라는 데에는 견해를 같이한다. 언덕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국왕군 병사들은 왕이 전사하자 겁에 질려 도망쳤고, 헨리의 군대는 그들을 추격하여 닥치는 대로 죽였다.

6. 튜더 왕조의 시작

전투가 끝난 뒤 헨리 튜더의 의붓아버지 스탠리가 리처드 3세의 왕관을 발견하고, 이걸 헨리 튜더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튜더 왕조가 시작되었다. 헨리 7세는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했지만 헨리는 혈통 문제, 엘리자베스는 부모의 결혼 문제 때문에 둘 다 정통성이 약했던 튜더 왕조에서는 리처드 3세를 찬탈자, 조카 살해자같은 음흉한 이미지로 퇴색시켰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에 이르러서는 세익스피어등을 포함해 이후에 다시 그려진 초상화까지 리처드 3세를 준 악마급으로 폄하했다. 현존하는 리처드 3세의 사후 초상화를 평가한 미술전문가들은 전쟁터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진 전투군인의 모습보다는 의도적으로 음흉하고 음모가 가득차 있게 그렸고, 특히 리처드 3세의 척추측만증을 일부러 더 과장해서 그렸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연구과정에서 발굴해낸 튜더 시대에 다시 그린 초상화의 원본이 되는 리처드 3세가 살아 있을 때 그린 초상화 또한 일부러 어깨를 과장해서 그리지 않은 그냥 일반적인 초상화였다. 예를 들자면 군인의 모습인 남성성보다는 여성성을 강조하려 손가락을 보면 상당히 갸날프게 그렸고,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척추측만증을 과장해 곱추로 그렸다. 위에 초상화를 다시 확인하면 알겠지만 왼쪽 어깨가 오른쪽 어깨보다 두드러지게 높게 그려져 있다. 세익스피어나 튜더 왕조의 프로파간다와는 별개로 리처드 3세 당시 그를 실제로 만나보고 남긴 기록이 몇 개 남았다. 그중에 하나만 한쪽 어깨가 다른 쪽보다 좀 높았다는 기록 말고는 리처드 3세의 체구를 모사한 다른 기록은 현재로서는 없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유능한 행정가고 전투에선 용감한 전사, 즉위 전에도 잉글랜드 북부를 그럭저럭 잘 통치했다고 재평가된다. 왕으로서의 치세는 고작 2년이기 때문에 즉위 이후의 실책을 평가하기엔 좀 짧은 시간이다.

그런데 척추측만증 환자가 평상복을 입으면 어지간히 눈썰미가 좋지 않고선 일반인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리차드 3세는 왕족으로서 일반인보다 더 화려한 옷을 입었을 터이니 더 눈치채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리처드 3세의 척추측만증은 아마도 직계 왕족이나 옆에서 시중을 드는 몸종이 아니면 모르는 비밀이었으나, 장미 전쟁에서 사망한 뒤 고인능욕을 당하면서 꼽추라고 세상에 알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에 리처드 3세의 척추측만증을 조롱하기 위해 셰익스피어의 극 리처드 3세에는 심각한 곱추이면서[8] 함께 왼팔 전체가 오른팔보다 짧고 마른것으로 묘사하기도 했고 이후 세간의 인식도 그렇게 전해저 내려 왔다. 유골 측정 결과 척추측만증 외에 별다른 장애는 없었다. 다만 유골이 상당히 여성성을 띠어 초반에 연구진들이 긴장했었다. 세익스피어 극 리처드 3세의 모습이 심히 과장은 되었지만 리처드 3세의 체구가 매우 말랐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한 묘사였다. 임금님이 곱추라고 소문이 세간에 돌았다 해도, 겉으로 보기엔 잘 차려 입고 거기에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고 전투에 임해 전공을 세우는 임금의 모습을 보고 백성들이 '임금님은 곱추'라는 말을 부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고인능욕 이후로는 그런 이미지가 쫙 퍼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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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익스피어의 극 리처드 3세의 일반적인 연출 모습

6.1. 헨리 7세 요크의 엘리자베스 결혼

국왕이 된 헨리 7세는 이미 규합한 요크 지지자들을 회유하고자 에드워드 4세의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해서 정통성을 강화했다. 그러나 1499년 헨리 7세가 요크 왕가의 유일한 남계 후손 워릭 백작 에드워드(에드워드 4세의 동생 조지 플랜태저넷의 아들)를 처형하면서 요크 왕가는 단절되었다. 이미 리처드 3세의 외아들 미들헴의 에드워드는 1484년 11세로 요절했기 때문.

헨리 7세의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는 에드워드 3세의 4남인 초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증손녀로, 헨리 7세는 혈통상으로는 왕가에서 멀고 멀었다. 요크 가문의 시조는 에드워드 3세의 5남 랭글리의 에드먼드가 시조이고, 랭커스터 가문의 시조는 에드워드 3세의 4남 곤트의 존이 시조이다. 가문 구별을 위해 랭커스터니 요크니 할 뿐이지, 정작 두 세력은 자신들이 진정한 플랜태저넷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요크 가문의 에드워드 4세의 찬탈과 헨리 6세와 그의 외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살해당하면서 랭커스터 가문은 완전히 멸족했기 때문에, 남아있는 랭커스터 가문의 지지자들은 헨리 6세의 이부동생 에드먼드 튜더의 아들이자 모계로 랭커스터 시조인 곤트의 존의 혈통을 물려받은 헨리 튜더를 랭커스터 가문의 후계자로 밀었다.

6.2. 헨리 7세 숙청

헨리 7세는 리처드 3세를 교훈 삼아 리처드가 적장자 에드워드가 사망하고 당분간 추정상속자로 남겨 놓은 존 드 라 폴과 리처드 3세의 조카 워릭 백작을 살려두었다. 11세의 워릭 백작은 런던탑에서 갇히게 되어 성년까지 살아남았으나 성년이 되어 간수들을 매수하고 탈옥하려다 적발되어 처형되었으며 존 드 라 폴은 1487년에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군을 이끌며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헨리 7세가 반란으로 찬탈했다 한들 어설프게나마 절멸한 랭커스터 혈족이고, 요크가의 에드워드 4세의 맏딸과 결혼했기 때문에 정통성 시비는 있어도 에드워드 4세 시절 왕권의 위협이 된 헨리 6세와 그의 적장자 웨스터민스터의 에드워드와 같은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왕족은 거의 남지 않았다.

존 드 라 폴은 에드워드 4세와 리처드 3세의 누이의 아들일 뿐 왕족은 아니었고, 리처드 3세의 형인 클라랜스 공작은 맏형 에드워드 4세에게 반역 혐의로 죽었기에 클라랜스 공작의 아들인 워릭 백작은 왕위 계승권 자체가 없었다. 설령 계승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1485년 런던탑에 투옥될 당시 겨우 11살로 너무 어린 나이였고, 이후 죽을 때까지 감옥 밖으로 나가지 못하여 정신병까지 있어 왕위를 계승할 상태가 아니었다. 헨리 7세시절 반란은 가짜 워릭 백작이나 가짜 요크공들을 사칭한 야심가들이 판을 쳤지만 아주 큰 위협이 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존 드 라 폴은 헨리 7세가 석방해줬음에도 보스워스 전투가 끝나고 2년 뒤인 1487년, 퍼킨 워벡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스토크 평원 전투에서 전사했다.

1499년에는 가짜 워릭 백작을 주장한 반란들도 거의 분쇄되고 왕권이 안정되었다. 가짜 워릭 백작을 사로잡은 헨리 7세는 그가 가짜임을 입증하려고 런던탑에 갇힌 진짜 워릭 백작을 꺼내서 인증도 시켜줬으며, 가짜는 죽이지 않고 궁정에서 부엌데기로 삼아 부렸다. 진짜 워릭 백작은 헨리 7세의 왕권이 안정권에 들자 꼬투리를 잡아서 22세였던 그를 런던탑에서 꺼내 참수형에 처했다.

이 일은 역시 리처드 3세처럼 당대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대표적으로 헨리 7세의 며느리 아라곤의 캐서린은 자신이 그토록 많은 유산과 사산을 거듭한 이유가 시아버지가 죄 없는 워릭 백작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워릭 백작의 죽음으로 요크 가문 남계혈통은 완전히 끊겼고 에드워드 4세의 외손인 아서와 헨리 8세가 태어남으로써 헨리 7세 이후 튜더가의 왕권은 강력해졌다.

7. 유골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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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색은 상단 이미지처럼 좀 더 밝은 갈색일 가능성이 꽤 높다.[9]

리처드 3세의 유골을 바탕으로 한 복원된 얼굴이 공개되자 커뮤니티에 슈렉 시리즈의 파콰드 영주를 닮았다는 반응이 많았다. 파콰드 영주의 모티브는 당시 디즈니 사장이었던 마이클 아이스너라는 설이 유력하고, 리처드 3세와 파콰드 영주가 서로 닮은 것은 우연이라고 봐야 한다.

선술한 이 기사에서 약간 닮은 등장인물 중 해리 포터 시리즈의 세베루스 스네이프가 있는데 공교롭게도 스네이프의 모티브가 된 화학교사 존 네틀십(John Nettleship, 존 네틀쉽, 1939. 08. 01.~2011. 03. 12.)이 성격, 정치, 관심사의 일부 측면, 사물을 만지작거리는 습관, 손글씨의 약간의 사소한 특징, 리처드 3세의 제복의 색인 멀베리색(진한 분홍색)과 하늘색 옷을 좋아해 리처드 3세와 닮은 점이 많았는데 포모나 스프라우트의 모티브가 된 필리스 루이스(Phyllis Lewis, 1935~2010)가 이를 처음으로 지적했다. 또한 존 네틀십은 영국 잉글랜드 이스트 미들랜즈 노팅엄셔 주의 노팅엄에서 태어났는데, 우연히도 노팅엄은 리처드 3세가 자신의 합법적인 유일한 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된 곳이고, 1485년 8월 리처드 3세의 시신이 수도회 교회의 성가대단에 묻히고 나서 9년 후인 1494년에 헨리 7세의 명에 의해 왕가의 묘지석상을 쓰는 것이 허락되었을 때 그 묘지석상이 거기서 난 석고석으로 만들어졌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후술할 리처드 3세의 방계 후손 중 하나인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심슨 가족에서 스네이프 역을 맡은 적이 있었다.

리처드 3세 유골 발견에 대해 다룬 슈카의 영상

7.1. 무덤의 유실

앙주 왕조 존왕 이후 모든 영국 국왕, 여왕의 무덤은 모두 영국 내에 존재했는데 그중 레스터 지역의 리처드 3세의 무덤만 유실되어 없어졌다.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의 시신은 삼촌이었던 리처드 3세가 살해 명령을 내렸다고 알려진뒤 탑 내에 암매장 후에 사라졌다고 전하였다. 1674년 런던탑 수리 중에 두 명의 유골이 담긴 상자를 발견했고, 이후 안에 있는 이 유골을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 '요크 공작 리처드'로 보고 왕과 왕자의 예를 갖추어 다시 장사 지냈다. 현대의 DNA 검사로 재확인하면 되긴 하지만 두 형제에 얽힌 사연 때문인지 아니면 후술된 정통성 문제 때문인지 혈연관계에 있는 영국 왕실의 공식 입장은 없다.

리처드 3세의 무덤만 유실되어 없어진 이유는 16세기에 헨리 8세 잉글랜드 종교 개혁을 하면서 수도원 철폐령을 내렸을 때, 리처드 3세가 안장되었던 ' 그레이 수도원(Greyfriars)'이 일반인에게 판매되었기 때문이다. 수도원 자리가 1530년 철거되어 과수원으로 개발되었고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기에 재건축되면서 리처드 3세의 무덤은 영영 유실된 줄 알았다. 그래서 리처드 3세의 잃어버린 유골과 관련한 전설 레스터 지역에 내려왔다. 후대의 역사 학자들이 레스터 지방에서 리처드 3세의 무덤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내전의 패배자였던 리처드 3세의 무덤을 후대 왕조에서 특별히 신경 쓴 것도 아니고 무덤이 있었다던 수도원 자리도 세월이 지나 흔적도 찾기 힘들게 되자 몇 가지 추측을 하였다.

세간에서는 세 가지 설들 중 전설 내용대로 '강물에 버렸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여겼다. 그래서 레스터 지방 정부는 리처드 3세의 유골을 버렸다고 알려진 다리 주변에 표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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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터 대학교에서 화가에게 의뢰한 수도원 성가대 구역 복원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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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리처드 3세의 유골을 버렸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에 설치한 표석. 오른쪽은 리처드 3세 리카디언 협회에서 후에 세운 표석[11]

7.2. 리카디언(Ricardian)과 필리파

장미 전쟁에서 튜더 왕조 헨리 7세가 즉위한 이후 리처드 3세를 지지했던 세력은 목숨 부지를 위해 당연히 숨죽이고 살았다. 그러다 튜더 왕조가 끝나고 스튜어트 왕조를 잠시 거쳐 장미 전쟁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하노버 왕조가 들어서면서 서서히 튜더 왕조의 리처드 3세에 관한 서사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미 1700년대부터 리처드 3세를 공개적으로 변호하고 나온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을 통칭해서 리카디언(Ricardian)이라고 부른다. 1700년대 리카디언의 시작은 장미 전쟁 이후로 보이게 안 보이게 차별받아 왔던 리처드 3세를 지지했던 지방에서 새로운 왕조에게 좀 잘 보이고자 시작한 경향이 크다.

리카디언들은 현대에 들어서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자기들끼리 협회를 조직하여 리처드 3세를 변호한다. 리처드 3세의 유골 재발견에 지대한 공을 세운 단체가 1924년에 시작한 '리처드 3세 협회(Richard III Society)'이다. 서문이 거창해서 이 협회가 무슨 저명한 고고학 학회 같이 들리지만 사실 현재의 리카디언들은 일반 동호회와 다를 바 없다. 리사모 물론 고고학을 전공한 향토사학자들도 리카디언 협회의 회원들이지만 막상 토론의 내용을 까놓고 보면 끼리끼리 모여서 리처드 3세의 입장에 몰입해서 튜더 왕조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까고 리처드 3세를 신처럼 떠받들 뿐이다. 본문에 있는 리처드 3세의 악행들은 튜더 왕조의 날조라고 주장한다. 조카들을 죽인 친족살해 혐의조차도 리처드의 부하가 왕명도 없이 조카들을 살해했다고 본다. 1700년대 리카디언들이 리처드 3세를 지지했던 자신들의 처우 개선을 위했다면, 현대의 리카디언들은 취미인 실제 역사전공을 공부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리처드 3세의 입장에 과몰입한 열정적인 사람들이라는 것.

이런 이들 중 백미가 2012년 리처드 3세의 유해를 발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리카디언 중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스코틀랜드 출신 대영제국 기사단 5등급[12] '필리파 제인 랭리(Philippa Jayne Langley MBE, 1962년 6월 12일생~)'이다. 그는 1990년대 이전부터 리처드 3세의 유해를 찾기위해 동분서주했고, 레스터 지방에선 리처드 3세 유골 발굴 이전부터 이미 유명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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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3세의 유골을 바탕으로 복원한 두상과 함께 포즈한 필리파

그는 레스터 대학교 고고학부에서는 골치 아프고 상대하기 싫은 사람으로 손꼽혔다. 이제는 리처드 3세의 유골이 발굴돼서 당연히 레스터 대학교 고고학부의 자랑이자 대표적인 프로젝트지만, 유골 발굴 이전만 하더라도 대학에서 이미 진행 중인 여러 가지 중요한 학술 프로젝트들이 있었고, 그렇기에 필리파의 리처드 3세 유골 발굴 의뢰는 웬 듣보잡 아마추어가 스님 앞에서 염불을 외는 꼴이었다. 아마추어라서 꼭 필리파의 의뢰를 계속해서 거절했던 건 아니다. 레스터 대학교 측도 리카디언 중에 향토사학자들도 있음을 알았고, 필리파가 대학 측에 제공했던 자료도 구글 따위에서 검색해서 모은 것이 아닌, 향토사학자들이 연구하고 정리한 학술적 정보였다.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발굴 의뢰를 했던 것이였다.

필리파도 어느 정도 인식했지만 리처드 3세 유골 발굴, 아니 어느 발굴에서든 가장 큰 문제는 언제나 이다. 장비 동원부터 시작해서 정부 허가,[13] 현존하는 건물의 유무 등[14] 말 그대로 삽을 꽂은 순간부터 돈이 들어가는데, 자금조달의 문제로 차일피일 밀려서 결국 2012년까지 왔다.

7.3. 유골 발굴

결국 2012년 필리파는 영국 민영 방송사인 Channel 4로부터 리처드 3세 유골 발굴을 위한 자금을 지원받았다. 케이블 채널 교양국의 단발성 역사 발굴 프로그램으로 편성하려고 했던 듯하다. 물론 리처드 3세 협회도 열심히 모금해주었고 발굴 현장에서 먼저 Channel 4가 전과정을 독점 촬영하는 것을 조건으로 약 4만 파운드를 기본 자금으로 필리파와 레스터 대학 고고학부에 지원했다. 다만 4만 파운드로 리처드 3세가 매장되었다고 추정하는 옛 수도원 터 전체를 발굴할 수는 없으므로, 리처드 3세의 유해가 매장되었을 법한 유력한 후보지 두 곳에 구덩이를 파서 발굴하고, 결과물이 시원치 않으면 3번째 구덩이를 고르기로 했다.

현재의 지도와 중세시대 수도원을 포함한 지역 측량지도를 근거로 후보지를 골랐다. 첫 번째 구덩이는 리처드 3세가 왕족이나 귀족들이 종교시설 부지에 묻힐 때 누리는 특권을 바탕으로, 특히 리처드 3세의 유해는 합창대 근처에 안장되었다는 기록에 주목하여 경당 내 합창대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곳에 팠다. 두 번째 구덩이는 역시 유력한 매장 후보지인 경당 더 안쪽 제대 근처로 추정되는 곳에, 세 번째 백업 구덩이는 수도원의 건물 안쪽으로 파기로 하였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수도원 터가 있는 레스터시 소유 건물이 재건축 대상이 되어 내부를 모두 비웠다. 우습게도 레스터시에는 이 건물을 아동복지국 건물로 사용하였다. 조카들을 죽였다고 알려진 삼촌 장지 위에 아동복지국이라니. 게다가 구덩이를 파기로 결정한 세 군데 모두 큰 건물이 없는 주차장이라 발굴팀은 거리낌없이 발굴을 진행할 수 있었다. 시청 부속 건물들을 모두 비우긴 했지만, 옛 수도원 경내의 약 83%를 차지하여 실질적으로 발굴할 수 있는 곳은 약 17%에 불과했다. 게다가 발굴팀은 그중 약 1% 정도만 발굴할 수 있는 자금을 확보했기 때문에 리처드 3세의 잃어버린 유해를 찾음은 로또 1등 당첨이나 마찬가지였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2012년 9월 레스터 대학교의 고고학장 리처드 버클리(Richard Buckley)를 수장으로 레스터시 주차장에 첫 삽을 떴다. 리카디언들은 600년 묵은 숙원을 풀 기회라며 흥분했지만, 레스터 대학교를 대표로 한 고고학팀은 처음부터 이 발굴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저 장미 전쟁 당시의 수도원을 발굴하는 데 의의를 두었을 따름이다. 유적을 발굴할 때 역사의 한 인물을 특정해 목표로 발굴하지 않음은 고고학계의 일반적인 상식이다. 처음부터 특정인물이나 물품을 목표로 발굴이나 연구를 진행하면 후지무라 신이치처럼 주작에 능한 학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학자 개인의 엄청난 명예도 명예지만 단지 그뿐만이 아니다. 역사적 중요인물의 유골만 찾을 수만 있다면 (설령 다른 부장품이 없더라도) 연구자료를 쏟아낼 수 있고, 기존의 학설들도 순식간에 뒤집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눈이 돌아갈 일이다. 그러다 보니 고고학장이던 리처드 버클리는 이 발굴이 성공하면 내 모자를 먹겠다며 이 발굴이 너무 허황된 꿈을 품고 진행하는 게 아닌가 우려하기도 하였다.

첫 번째 구덩이를 파기로 한 주차장의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조심스레 을 파 내려가하자 가장 먼저 빅토리아 여왕 시대 즈음에 재개발된 흔적으로 보이는 지반이 나타났고, 그 밑을 더 파내려 가자 이곳이 옛 수도원 터였음이 금방 드러났다. 중세시대의 벽돌부터 바닥에 깔린 타일과 유리 파편 등등 첫 번째 구덩이가 정확히 수도원 부지를 파고들었음을 레스터 대학 연구진들은 금방 알아차렸다. 수도원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구덩이를 더 팠는데, 예상치 못한 유골이 나타나는 바람에 유골의 양 정강이 뼈가 파손되었다. 당시 촬영을 하고 있어서 파손을 지적하자 발굴팀원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게다가 갑자기 맑았던 하늘이 어두워지고 소낙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 리처드 3세의 잃어버린 유골을 찾을 확률은 너무 낮았다. 이 탓에 레스터 대학교 고고학부에서 정부에 발굴 허가증을 받을 때 유골 수습 허가는 따로 받지 않았으므로 1번 구덩이의 발굴을 멈추고 다시 허가증을 받아야 했다. 날씨와 허가증 문제로 어쩔 수 없이 혹시 있을지 모를 유전자 오염[15]을 막기 위해서 유골을 다시 흙으로 덮고 그 위로 비닐을 감싸는 등 응급보존처리를 한 뒤 유골 발굴 허가증을 급하게 신청했다. 유골 발굴 허가를 받기까지 약 열흘 남짓 걸리는 관계로 발굴팀은 그동안 2번 구덩이를 파서 수도원의 정확한 모형을 파악하기로 결정했다.

2번 구덩이를 파보자 해당 위치는 수도원의 부속시설 자리였다. 중세 시절의 지도와 비교해 수도원 부지의 대강을 파악할 수 있었다. 1번 구덩이의 위쪽, 예비 후보였던 3번 구덩이 구역을 발굴해 수도원 내 경당의 위치를 더 명확하게 잡기로 하였다. 3번 구덩이가 경당 내 제대 한가운데를 가로질렀으므로 예상했던 대로 1번 구덩이, 특히 정강이뼈가 발견된 부분이 수도원 경당 내 성가대 단상 근처임이 확실해졌다. 정강이 뼈 주변을 더 파서 정리를 하자 주변의 성가대 단상 위치가 드러났다. 이 가 리처드 3세의 시신이라면 성가대 단상 근처에 묻혔다는 기록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정부로부터 유골 발굴 허가를 받자 전문가를 초빙해 정강이뼈 근처를 더 파서 나머지 유골을 발굴했다. 골반뼈를 발굴하자 양쪽 손팔뼈가 X로 겹쳐서 골반뼈 왼쪽에 뉘여 있었다. 레스터 지방과 영국 중세 시대 유골을 발굴했던 발굴팀은 이런 방식이 귀족이든 평민이든 당시의 일반적인 장례법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골반뼈에서 꼬리뼈를 발굴해내고 척추 뼈를 발굴하자 점차 가 이상한 방향으로 휘었음이 드러났다. 매장지 흙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망자가 생전에 앓던 질병 때문임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했다. 레스터 대학교 고고학팀은 조심히 나머지 부위도 수습했지만 양쪽 발 유골은 결국 수습하지 못했다. 발굴팀은 매장층 윗쪽에 보이는 빅토리아 시대 건축물의 지반 공사 흔적을 근거로 해당 부위의 뼈가 소실되었고, 당대에 조금만 더 기초공사를 했다면 유골이 모두 소실되었을 확률이 높았다고 추정했다.

발견된 유골의 전체 모습은 생각보다 처참하였다. 처음에 발견된 해골은 몸의 유골에 비해 위쪽에 위치했는데, 정식으로 준비한 장지가 아니라 급하게 마련한 곳이라서 시신을 구겨넣은 탓이라고 추측했다. 이외에도 유골 외에 다른 매장품이 발견되지 않았고, 수의를 착용했다면 발견되었을 섬유 조직도 나오지 않았음을 근거로, 시신의 옷을 모두 벗겨 나체로 수도원 경당 한가운데에 안장했다고 추측했다. 이는 중세 유럽의 전장에서 흔한 일인데, 당시 국왕이나 귀족의 갑주, 옷, 장비는 당시에는 고가였기에 그들이 전사할 경우 적군이 그들의 장비를 탐내서 모두 벗겨갔다. 체사레 보르자와 부르고뉴국의 군주 용담공 샤를도 전사했을때 적군이 그의 장비와 갑주, 옷을 모두 벗겨나서 시신이 나체 상태였다. 유골을 조심스럽게 수습하자 유골 전체에서 무기로 공격받은 자상이 있었고, 등에는 화살촉으로 보이는 쇳조각도 발견됐다. 이 쇳조각은 X선 검사해보니 고대 로마 때의 못이라 시체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못이 우연히 흙 속에 섞여 들어간 듯하다. 이 전과정을 지켜보던 필리파는 발굴내내 감정의 기복을 감추지 못하고 끝내 눈물을 보였다. 유골이 박스에 담겨 구덩이를 나오자 필리파와 같이 발굴에 참가했던 향토사학자는 리처드 버클리 학장에게 이 유골이 "리처드 3세의 유골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라고 하면서 리처드 3세의 국왕기를 둘러 레스터 대학교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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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터 대학에서 화가에게 의뢰한, 수도원 성가대 구역에 매장되는 리처드 3세 상상도

수도원 경당 내 제대 자리였던 3번 구덩이에서도 관과 함께 얇은 납으로 감싸 매장한 지체 높은 사람의 유해를 수습하였다. 이후 검사에서 40대 후반 여자라고 확인하였고 레스터시에 남은 장례기록을 근거로 귀족 부인이었을 매장자의 신분도 추측했지만 유전자 검사로 비교해 볼 후손이 없어 추측으로 남았다. 묘비나 명문은 발견되지 않았다. 만약 3번 구덩이의 유골이 먼저 수습되었다면, 높은 신분을 암시하는 매장법 때문에 리처드 3세의 유골로 착각하고 나머지 구덩이는 그냥 내버려뒀을 가능성이 높다고 리처드 버클리 고고학장이 덧붙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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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발견된 납관에 있던 유골

수습된 유해가 리처드 3세일 가능성이 높다는 뉴스가 전세계로 대서특필되었지만 레스터 고고학부는 검증에 들어갔다. 먼저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 덕에 한꺼번에 여러 가지 정보가 드러났다. 탄소연대측정으로는 리처드 3세의 시대보다 약 100년 정도 더 빠른 14세기 유골이란 결과가 나왔지만, 육식과 특히 해산물을 많이 섭취하는 귀족이나 왕족 등 고위층의 유골은 평민들이 주식으로 먹었던 곡물과는 다른 탄소가 뼈에 축적되므로 오류치를 감안하면 해당 유골은 리처드 3세가 활동한 15세기 무렵 유골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안정 동위원소 분별법으로 망자가 거주한 지역과 식생활도 추측할 수 있었는데, 문헌에 남은 리처드 3세가 살았던 지역과 거의 일치했기에 이 유골이 리처드 3세의 유골이라는 한 가지 증거가 되었다.

유골의 상태는 리처드 3세가 맞은 참혹한 죽음을 잘 보여주었다. 런던의 저명한 법의학자들을 초빙하여 조사해보니 리처드 3세가 머리 쪽을 송곳 단검(런들 대거)[16]으로 강하게 찔리고 할버드(미늘창)에 머리 뒷부분이 잘려나가 죽었다고 설명하는 사료와 거의 일치하였다.
(전략) 그의 뼈에서는 많은 상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상처는 후두부에 있는데, 도끼(할버드, 빌, 폴암 등. 전승에 의하면 왕을 처치한 것은 웨일스인이라고 하므로 웰시훅일 가능성도 있습니다)로 보이는 흉기가 후두골을 강타하여 즉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또한 후두부에는 상처가 하나 더 있습니다. 검이나 창 같은 흉기에 찔린 것으로, 뇌를 관통하여 반대편 뼈까지 도달한 깊은 상처(깊이 10.5 cm)입니다. 당연하지만 이것도 즉사할 정도의 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밖에 몸 전체에 보이는 여러 무기에 찔린 듯한 흔적들은 전투 당시 입은 상처가 아니라 사망 후에 반군이 망자를 모욕하고자 고의로 시신을 훼손한 흔적인 듯하였다.

리처드 3세의 유골을 레스터 성당에 다시 매장하기로 결정한 뒤 2013년 유골 연구를 대비해 3D 프린터로 유골 형태를 복제했다.

7.4. 척추측만증 환자의 전투력 고증

고고학팀은 눈으로 보기에도 심한 척추측만증을 앓은 환자가 격렬한 전투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어 했는데, 도미닉 스미(Dominic Smee)라는 남자가 해당 유골과 거의 유사한 척추측만증 환자이고 보스워크 전장의 재연 배우로 일할 수 있음을 입증하여, 심한 척추즉만증 환자라도 전투 능력에 큰 장애는 없었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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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실제 리처드 3세의 척추뼈 정면의 모습, 오른쪽은 도미닉 스미가 척추측만증을 의사로부터 확인받는 방송 캡쳐

고고학팀과 법의학자들은 스미 덕에 훌륭한 고증 샘플을 얻자 리처드 3세의 운동신경을 연구하였다. 먼저 유연성과 근력 테스트를 했는데 또래 남자들보다 오히려 이 유연해 몸의 움직임이 더 재빠르고 날렵했다. 근력 또한 자신의 근육량에 알맞는 정도였고 일반인에 비해서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지구력 테스트를 하자 일반인들과 차이가 확연하였다. 척추가 크게 휘었기 때문에 갈비뼈의 모양도 기형이라 숨이 차서 숨을 크게 내쉴 때 폐가 정상인만큼 부풀지 않고, 이 때문에 산소를 충분히 들이마시지 못하는 탓이라고 판단했다.

스미로부터 육체적인 한계를 확인한 다음 연구진들은 리처드 3세의 기마창술 능력을 알아보고자 스미를 데리고 스웨덴으로 가서 플레이트 갑옷을 제작했다. 먼저 스미의 몸에 맞게 미리 제작한 플레이트 갑옷을 입혔는데, 스웨덴의 갑옷 대장간과 레스터 대학의 연구진은 척추측만증 장애인이 일반 갑옷을 착용해서 발생하는 문제를 발견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제작한 플레이트 갑옷은 꼬리뼈 근처 허리로 갑옷의 하중을 착용자가 떠받치는 구조인데, 스미나 리처드 3세 같은 척추측만증 환자는 굽은 척추뼈 방향에 따라 몸의 중심이 기울어지고 한쪽 어깨가 조금 높아서, 허리로 갑옷의 하중을 떠받치는 게 아니라 골반 한쪽으로 갑옷의 하중을 버티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미가 갑옷을 입은 채로 간단히 무기를 휘들러보게 하니, 갑옷을 입지 않았을 때보다 확연히 움직임이 불편하였다.

스웨덴 갑옷 대장간과 레스터 대학 연구진은 몸이 갑옷의 무게를 지탱하는 위치를 중심부 꼬리뼈 쪽 허리가 아닌 어깨 쪽으로 올리고, 굽은 척추뼈의 곡선대로 갑옷을 재단하듯 새로 제작하였다. 플레이트 갑옷은 착용자 개개인의 몸에 맞춰서 제작하므로 값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왕자였고 왕으로 즉위까지 했던 리처드 3세라면 당연히 이런 맞춤 재단 갑옷을 만들어 입었을 테니 고증에 알맞는 처사.

플레이트 갑옷을 스웨덴에서 주문하고 영국에 돌아와서 바로 기마술을 시험해 보았다. 스미가 현대의 말 안장에 올라타자 레스터 대학 고고학팀은 문제를 발견했다. 척추측만증 때문에 몸의 중심이 중앙이 아니라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말의 기수를 돌리다 보면 스미는 한쪽으로 자연스럽게 쏠렸다. 즉 낙마할 위험성이 컸다. 리처드 3세가 기사들을 이끌고 기병돌격하여 직접 적을 몇 명 베어 넘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내용에 의구심이 생겼다. 찜찜한 가운데 중세시대 말 안장으로 시험해 보기로 하였다. 현대의 말 안장을 타고도 아슬아슬했는데, 통나무를 말 위에 얹고 타는 듯하다는, 리처드 3세가 사용했을 중세시대 말 안장을 스미가 사용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연구진들, 특히 중세 기마술 전문가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스미는 현대의 말안장을 사용했을 때보다 오히려 말을 정확하게 제어하였다. 일반인들에겐 불편할 뿐인 딱딱한 중세시대 말 안장이 스미 같은 척추측만증 환자들에겐 하체를 안장에 고정시켜 오히려 몸을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안정적인 도구였던 것이다. 의도치 않았던 결과에 놀라 중세 기마술 전문가는 바로 기마창술도 연습시켰는데 여기서도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왔다. 하루 훈련만 받고 마상창기병의 자우스팅(Jousting) 창으로 정확하게 목표물을 타격하였다. 거기에 척추측만증을 감안하여 새로 제작한 갑옷이 몸의 균형을 잡아주자 무기의 숙련도까지 올라서, 약 한 달간 훈련받은 뒤 다른 중세 기마술 전문가와 함께 전통적인 마상창기병 돌진을 할 수 있었다. 리처드 3세가 1485년 보즈워즈 전투에서 기마전투를 했다는 기록은 이렇게 손쉽게 고증되었다. 심한 척추측만증 환자라도 충분히 기마전투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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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연한 중세시대 플레이트 갑옷을 입은 도미닉 스미[17]

그러나 하마해서 백병전을 치르면 척추측만증 때문에 지구력이 떨어져 금방 지친다. 이 때문에 리처드 3세가 금방 적들에게 둘러싸여 전사했으리란 것이다. 또한 리처드 3세는 보즈워스 전투에서 투구 위에 왕관을 썼는데, 리처드 3세뿐만 아니라 중세 유럽의 군주들은 무장했을때 진중에서 군주임을 알리기 위하여 흔히 투구 위에 왕관을 쓰고 다녔기 때문에 기사들이 말을 타고 왕관을 쓴 왕을 자신들의 시야 안에 넣고 보호하기 더욱 쉬웠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당시 영국 기사들이 착용한 고딕 양식 플레이트 아머는 시야가 매우 크게 제한된다. 즉 그가 어떠한 이유에서든 낙마한 순간 죽음은 예정되었다는 것.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셰익스피어의 연극 리처드 3세에 나오는 리처드의 명대사 "말을 다오, 말을 다오. 말을 가져오면 내 왕국을 주리라."(A horse, A horse, My Kingdom for a horse.)를 보면 처절함이 이해가 된다. 말 위에서만 무예를 보일 수 있던 리처드 3세 입장에서 다시 제대로 싸울 수 있게 말을 가져오라고 악을 쓰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해당 연구 영상

7.5. DNA 유전자 검사

모든 연구 결과가 주차장에서 수습한 유골이 리처드 3세라는 방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한 방짜리 증거가 없었다. 그래서 현재 생존한 리처드 3세와 친척관계인 후손들의 DNA 유전자 검사로 유골을 정확히 확인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부계 쪽 후손들과 모계 쪽 후손들의 유전자 검사를 시행했는데 결과는 아래와 같다.

7.5.1. 부계 Y 염색체 비교 분석/ 영국 여왕 정통성 문제

리처드 3세가 후사 없이 죽고 그의 형제들도 후사를 남기지 못한 관계로, 가장 가까운 부계 후손을 찾아야 했다. 리처드 3세의 고조 할아버지 에드워드 3세(Edward III)의 아들 곤트의 존(John of Gaunt)의 후손들의 유전자 정보가 필요했다. 연구에 제공된 유전자 정보는 존의 13대손 5대 보퍼트 공작 헨리 서머싯(Henry Somerset, 5th Duke of Beaufort 1744-1803)에게서 파생된 7대 후손 형제 2명, 5대 후손 남성 1명 그리고 4대 후손 형제 2명, 총 5명에게서 왔다. 검사 결과 형제 관계에 있는 유전자 정보 중 한 쌍은 아버지가 일치하지 않았고 거기에 나머지 4명의 후손도 리처드 3세의 부계 Y 유전자 정보와는 일치하지 않았다. 대중에 개인정보는 공개하지 않고 유전자 정보가 리처드 3세와 일치하는지 안 하는지만 공개했다. 즉 현재 살아있는 서머싯 가문의 남성들은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 아니라고 판명난 것이다. 거기에 에드워드 3세의 6대조 할아버지 앙주 백작 조프루아 플랜태저넷(Geoffrey Plantagenet, Count of Anjou 1129-1151. 풀크 5세의 장남이자 헨리 2세의 아버지) 쪽에서 내려간 부계 후손도 유전자 검사를 받았지만 마찬가지로 리처드 3세의 유전자와 일치하지 않았다.

영국 왕가의 복잡한 결혼 관계와 부계 후손의 유전자 불일치는 여러 가지 논쟁을 일으켰다. 먼저 플랜태저넷 왕조 남자 혈통 문제가 제기되었고, 나아가 당시 영국 군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정통성 문제까지 야기되었다.

동양권에서 조선 왕조는 방계가 조선 후기에 왕으로 즉위했지만 입양하는 방식으로 왕통을 이어 왕조의 이름이 바뀌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조선에서는 선왕이 후사 없이 죽어 방계 왕족이 즉위하는 경우에는 기존 왕, 또는 새 국왕보다 한 항렬 높은 이전 왕의 양자로 입적시킴이 보편적이었다. 명종의 조카였던 선조는 즉위하면서 명종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철종은 한 항렬 높은 순조의 양자로, 고종은 역시 한 항렬 높은 효명세자(추존왕 익종, 뒷날의 추존황제 문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단, 인조는 광해군을 쫓아내고 즉위한 탓에 이전 국왕의 양자로 입적되지 않고 왕위를 계승했다.

현재 영국의 왕사는 노르만 왕조 윌리엄 1세(William I)를 시작으로 보지만, 왕조가 어느 정도 안정권에 들어가면 적통을 이어받을 왕자가 없었던 관계로 1-2백년 꼴로 왕조가 바뀌었다. 서양에서는 같은 가문의 시조를 중심으로 적통 혈통이 아닌 형제나 방계가 이어 받으면 왕조의 이름이 바뀌기도 했다. 살리카법을 국법으로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 딸이나 외가 후손이 왕위를 계승함을 인정했기 때문에, 남편의 성을 따라가는 서양권 문화상 한 갈래에서 시작은 되었으나 여왕의 남편의 성에 따라 왕조 이름이 바뀌는 경우도 많았다. 하노버 왕조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원래 근대의 독일 통일 이전의 여러 소국의 한 왕가였고, 영국 의회가 하노버 왕조의 조지 1세를 영국왕으로 옹립하면서 한동안 영국 왕위와 하노버 왕위의 동군연합이 있었다. 다만 하노버 쪽은 그놈의 살리카법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면서 동군연합이 깨져서 작은 삼촌에게 하노버 왕위가 넘어갔다. 지금 영국 왕실이 좋은 예. 다만 이것도 여왕에게서 왕위를 이어야 하는 찰스 왕세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합쳐진 성이 아닌 '윈저'로 고정. 자세한 사연은 엘리자베스 2세를 참고. 예를 들어 조선 왕조도 이성계를 조상으로 두고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방계 왕가들이 왕위를 계승하여 왕조의 성씨인 이씨(李氏)는 안 바뀌었지만, 영국의 왕조들은 왕자의 씨가 말라(?) 버려 흡사 이성계 형제의 후손이나 혹은 딸의 후손을 찾아와 조선의 국왕으로 옹립하는 꼴이 되었는데, 영국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노르만 왕조 4대 스티븐 왕이 선왕의 조카로 왕가가 한 번 바뀌고 일명 '앙주 왕조'라 불리는 플랜태저넷 왕조가 들어서고 안정이 되나 싶었는데, 리처드 3세 때 플랜태저넷 왕조의 방계 튜더 왕조로 왕위가 넘어갔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튜더 왕조는 끝이 났다. 영국 의회는 계속해서 리처드 3세의 누이의 후손들을 초청해 국왕으로 옹립했는데, 그래서 리처드 3세와 그의 형제 그리고 후손들을 플랜태저넷 왕조에서 따로 분리해 요크 왕조라고 부른다.

한동안 이 요크 왕조 계열 모계 후손[18]을 초빙해 영국왕으로 섬겼는데, 가장 마지막에 옹립한 왕조가 현 영국 왕실의 본류가 되는 하노버 왕조이다. 하노버 왕조는 독일로 시집간 요크 왕조 공주의 후손이다 보니 원래 영국 왕위계승에선 거리가 있었다. 물론 영국에서도 아무 방계나 모셔오진 않았다. 모계 쪽으로 왕위와 가장 가까운 왕족을 찾다보니 하노버 집안을 선택했다. 혹 데려온 하노버 왕조 후손들이 영국에서 후사를 낳지 못한다면, 영국은 다시 다른 나라에서 국왕으로 빌려와야 하는 상황이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 혹 하노버 왕조가 끝나서 영국 내 여러 다른 방계 왕족들이 서로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는 심각한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제정한 법률이 영국 왕위계승서열 법이다. 리처드 3세의 누이 '앤 공주'의 후손들에게 먼저 영국 국왕 승계권을 주게 되는 법. 혹 '앤 공주'의 후손이 끊어지면 앤의 혈통을 중심으로 가장 가까운 왕족이 영국 국왕의 자리를 승계한다. 다행히 하노버 왕조가 안정화된 덕에 우려했던 왕위계승 내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남성후사가 없어 빅토리아 여왕 승계, 그리고 엘리자베스 2세가 각각 왕위를 계승해서 왕가의 이름이 좀 바뀌긴 했지만 하노버 왕조로부터 내려오는 정통성은 유지되었다. 현 영국 왕실은 요크 왕조의 후손이긴 하고 왕조의 직접적인 혈통은 하노버 왕조에서 왔지만, 법적인 정통성은 앞서 말한 왕위계승서열법에서 찾는다.

검사로 유전자가 일치하지 않은 것은 검사를 받은 보퍼트 공작의 후손 서머싯 가문의 후손들이었고, 이걸 이유로 검사도 받지 않은 나머지 보퍼트 공작 후손들이 요크 왕조의 후손이 아니라고 주장하기엔 무리가 있다. 거기에 추가 검사로 밝혀낸 건 '5대 보퍼트 공작 헨리 서머싯'의 4대 후손즈음에 일어난 일이란 것까지다. 덧붙여 리처드 3세의 하플로그룹 G-P287, 서머셋 남계 5명 중 4명은 모두 R1b-U152로 나왔는데 그나마도 1명은 다른 형태인 R계열이 아닌 I-M170으로 나와서 한 집안의 후손들 5명 안에서 자기들끼리도 불일치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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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3세와 현대 서머싯 가문의 관계를 보여주는 족보

위의 결과를 토대로 '서머싯' 가문의 조상이며 튜더 왕조의 시조가 되는 '곤트의 존'과 그의 아버지 형제가 모두 플랜태저넷 왕조의 혈통이 아니라는 해괴한 논리가 도출되었다. 이에 따라 튜더 왕조의 정통성은 무너졌고 튜더 쪽과 혼인관계가 있었던 하노버 왕조의 정통성도 무너져서 당시 영국 군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왕위에 계속 있을 이유가 없다는 논리도 나왔다.

예를 들어 경주 김씨의 문파 중에 유명한 사람의 유골이 하나 발굴되었다고 치자. 유골의 주인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알려진 남성 후손의 유전자 검사를 했는데 일치하지 않았다. 검사로 밝혀진 사실은 후손이라고 알려진 남성이 경주 김씨 문파의 혈통적 후손이 아니라는 것뿐이다. 생각해보자. 웃대 조상의 누군가가 바람을 피웠거나 족보를 샀다거나 하면, 자기가 생각하는 소속 가문과 실제 혈통이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남자의 집안, 경주 김씨 문파 전체의 혈통성을 부정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신라왕들의 정통성까지 부인할 수 있을까? 달 보라고 손가락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보고 달이 없다고 부정하는 꼴이다.

혹 부계 정통성이 깨지는 확실한 결과물이 나와도 바뀌는 건 없다. 영국 의회가 새 임금으로 옹립할 인물을 모셔올 때 아무나 데려오지 않았다. 하노버 왕조의 경우 이미 독일 소국의 왕으로 요크 왕조의 모계 혈통이 흐른다고 봐서 모셔 왔다. 즉 요크 왕조 쪽 혈통이 부정되어도 이미 하노버 왕조의 왕가 혈통이다. 결정적으로 영국 국왕의 정통성은 앞에서 지적한 '영국 국왕 승계법(Act of Settlement 1701)'에서 나오고 그 다음이 혈통의 정통성으로 요크 왕조 모계에서 나온 하노버 왕조인 것이다.

장황하게 의미 부여할 일도 아닌 것이 계보만 훑어도 답이 나온다. 엘리자베스 2세의 정통성은 리처드 3세가 아니라 에드워드 3세 - 곤트의 존 - 증손녀 마거릿 보퍼트 - 헨리 7세 - 딸 마거릿- 제임스 5세 - 메리 스튜어트 - 제임스 1세 - 딸 엘리자베스 - 딸 소피아 - 조지 1세 - 조지 2세 - 프레데릭 - 조지 3세 - 켄트 공작 - 빅토리아 여왕 - 에드워드 7세 - 조지 5세 - 조지 6세 - 엘리자베스 2세 순으로 이어졌다. 마거릿 보퍼트를 빼면 형들이 많거나 딸이라 계승 순위만 멀 뿐 모두 왕의 자식이나 손자이고, 법적인 문제니 왕위계승법까지 갈 것도 없이 리처드 3세나 서머셋 후손, 조프루아 백작의 서자손 중 누구 혈통이 바뀌었든 엘리자베스 2세의 정통성 문제와는 무관하다. 다만 저 계보 중, 혹은 에드워드 3세 조상 중에 다른 혈통이 끼어들었다고 밝혀지면 좀 문제가 되겠지만.

이러나저러나 결론은, "이걸 마구 따지자면 논란 없을 왕가는 전혀 없을 것이고, 영국은 입헌군주정으로 왕가에 정치적 실권이 있는 것도 아니니 굳이 따져서 이익 볼 것이 없다"에 가까울 것이다. 군주정이 엎어지고 공화정으로 전환된 국가의 왕위 요구자 계승 순서를 진지하게 파고들어 따지는 사람은 해당 가문과 역사 매니아를 제외하면 없듯이.

튜더 협회의 유전자 분석정보 해설. 튜더 협회는 위의 리카디언들과 비슷한 협회로 이쪽은 튜더 왕조와 앤 볼린에 꽂힌 사람들.

7.5.2. 모계 미토콘드리아 비교 검사

부계 쪽 유전자 검사로 리처드 3세의 유골임을 증명할 수 없게 되자 모계 미토콘드리아 검사 쪽으로 시선이 몰렸다. 사실 연구진들은 초반부터 부계 쪽 유전자 검사 결과는 기대도 안 했다. 이유는 그야 당연히 사생아가 많이 날 수밖에 없는 유럽 귀족의 특징 때문. 부계 쪽 유전자 검사는 이른바 '가짜 부모 현상(False Paternity Event)'[19]이 자주 일어나 원래부터 미토콘드리아 검사에 비해서는 신뢰성이 떨어졌다. 특히 리처드 3세가 후사 없이 전사해서 리처드 3세와 똑같은 미토콘드리아를 유전받은 리처드 3세의 누이들의 후손들을 검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서 딸, 외손녀, 외증손녀 등 여자 후손들에게 이어지는 미토콘드리아 특성상 아들인 리처드는 자기 자식들에게 미토콘드리아를 물려줄 수 없지만 누이들과 똑같은 미토콘드리아가 있다. 그러니 이 누이들의 딸의 후손들을 찾아 그의 것과 비교할 수 있다는 말. 리처드 3세 누이들의 여성 후손들이 자연스레 주목을 받았고 생존해 있는 후손들을 찾아 검사를 하면 됐는데..

이미 2004년에 리카디언계 향토사학자들은 요크 왕조의 방계, 특히 리처드 3세의 누이 '앤 공녀(Anne of York)'의 후손들을 주목하여 의외로 쉽게 족보를 구성할 수 있었다. 문서가 부족한 중세시대였지만, 앤 공녀와 그 일가가 왕가/공작가의 귀족 신분이라 분할해야 하는 유산이 많았기 때문에 유산 관련 문서를 많이 남겼고, 따라서 현존하는 중세시대 유서를 바탕으로 족보를 구성할 수 있었다. 또한 교회에서 세례증명서나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영국에 거주하면서 목수로 일하는 캐나다인 남성이자 16대 후손 마이클 입센(Michael Ibsen)을 찾았다. 무려 엘리자베스 2세의 40촌(!) 동생 정도 된다.

모계 미토콘드리아 검사를 하는데 왜 남성인 마이클 입센을 검사했는지 이상하게 여길 이유는 없다. 마이클 입센의 어머니 '조이 입센'이 바로 리처드 3세의 누이 '앤 공녀'로부터 내려오는 여성 직계 후손이라 마이클 입센의 미토콘드리아 역시 리처드 3세의 미토콘드리아와 유전자가 같았다. 당연히 리처드 3세로 추정되는 유해가 발견되자마자 레스터대학 고고학부는 마이클 입센을 초대해 신문사와 방송사 앞에서 유전자 채취를 하였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몰라도 마이클 입센은 평생 독신으로 살아서 더 이상 후손은 기대할 수 없고 그의 형제자매 역시 독신이거나 결혼했어도 아이가 없었다. 만일 마이클 입센 사망 후 리처드 3세의 유해가 발견됐으면 유전자 검사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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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3세의 유골을 바탕으로 재현한 두상과 리처드 3세 누이의 모계 후손 마이클 입센

그런데 결과가 발표되기 전에 여러 방송사가 입센을 찾아가 그를 귀찮게 하였다. 이를 먼 거리에서 지켜 보던 제3자도 있었다. 웬디 덜디그(Wendy Duldig)라는 사람은 앤 공녀의 또 다른 모계 직계 후손으로 입센과는 18촌 숙부 조카쯤 사이이다. 즉 같은 조상을 둔 남남이라고 봐도 무관하다. 리카디언계 향토사학자들도 이 사람의 존재를 인지했지만, 입센이 황색언론의 먹잇감 정도로 다루어지는 꼴을 보고 덜디그는 무명의 제보자로 남기를 원했다. 덜디그는 어느 정도 대중과 언론의 관심이 시든 뒤에야 제3의 후손으로 대중 앞에 나왔다. 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덜디그 역시 독신에 미혼이라 리처드 3세의 유해가 2-30년만 늦게 나왔어도 생존 후손의 유전자 검사가 무척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레스터대학 고고학부에선 최적의 유전자 검사 시료를 얻은 셈이었다. 일단 같은 조상을 두었다고 추정만 할 뿐 거의 남이라고 봐도 되는 이 셋의 유전자 정보가 일치할 확률은 무척 낮았다. 리처드 3세 추정 유골과 입센의 유전자 비교만으로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을 터인데, 여기에 입센과는 조상만 같을 뿐 전혀 관계 없는 제3의 추정 친척의 유전자 정보까지 같이 비교할 수 있다면 레스터 대학 고고학부 입장에서는 부정할수 없는 스모킹 건을 얻는 셈이었다. 그리고 99.99% 확률로 이 3명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정보가 일치함을 확인했다. .01%를 넣지 않는 이유는 학자들의 특성상 뭐든 100% 될 수 없다는 기조 아래 0.01%의 오류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회피하고자 하는 일종의 학술적 표현. 더해서 유전자 분석 결과 드러난 특이점은 리처드 3세의 미토콘드리아가 하플로타입 J1C2C라는 굉장히 희귀한 미토콘드리아 유전자였다는 것.(거기다 리처드의 부계 유전 타입도 자국 내에선 드물고, 웨일즈에 몰려있는 특이한 유형이라고) 이는 유럽 인구 전체에서 겨우 1~2%밖에 보유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검사로 드러난 위 3명의 미토콘드리아 일치는 발굴된 유골이 리처드 3세라는 증거에 무게를 더했다.

여담이지만 리처드 3세 부계 유전자 문제가 더 시끄러웠던 건 당대에 떠돌던 소문의 영향이 있었다. 그의 형 에드워드 4세는 요크 공작의 아들이 아니라 공작부인이 바람을 피운 결과물이라는 의혹이 지금껏 따라붙는데, 정작 리처드 3세의 부계 유전자가 현존하는 사람들과 불일치로 나오자 그 소문의 주인공은 혹시 에드워드가 아닌 리처드였을지 모른다고 보는 것. 일부의 의혹이지만 에드워드 5세 형제라는 유골과 대조하거나 다른 부계 후손이 갑툭튀해서 그들과 일치해야 완전히 해명될 듯 하다. 에드워드 3세의 왕비인 에노의 필리파도 한 때 바람으로 사생아를 낳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잉태 시기 때 남편과 엇갈리는 행적 등으로 말이 있었다고 하는데 문제는 그 사생아 소문의 주인공이 곤트의 존이라는 것. 이렇게 되면 뭐... 그러나 필리파 왕비와 에드워드 3세는 굉장히 금슬 좋은 부부였고, 필리파 왕비 자체도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왕비였기 때문에[20] 이 소문은 곤트의 존의 반대파들이 악의적으로 퍼뜨렸을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리처드 3세의 할아버지인 코니스버러의 리처드가 사생아라는 주장도 있다. 정확히는 코니스버러의 리처드의 어머니인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이사벨 공주[21]가 바람을 피워 리처드를 낳았다는 내용. 실제로 이사벨은 남편인 랭글리의 에드먼드와 사이가 안 좋았으며 남자와의 추문도 많아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 게다가 리처드는 바로 위의 누나와 11살이나 차이가 났고, 형을 제외하면 남자 형제가 없었는데도 아버지와 형의 재산을 상속받지 못했기에 꽤 신빙성이 높은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요크 가문의 대는 코니스버러의 리처드의 형인 노리치의 에드워드의 죽음으로 끊겼으며, 코니스버러의 리처드부터는 에드먼드의 피가 섞이지 않은 사생아이다. 이 주장을 따르면 코니스버러의 리처드는 자기 자식들에게라도 정통성을 주기 위해 에드워드 3세의 차남인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후손 앤 모티머와 결혼했을 것이다. 여담으로 이사벨과 바람을 피운 남자는 켄트의 조앤이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인 존 홀랜드다.

결론은 에드워드 3세의 당대 자손인 리처드 3세와 현대 후손들은 같은 조상의 유전자가 불일치하여 둘 중 하나는 핏줄상 후손이 아니다.

에드워드 3세 이전 조상인 조프루아 백작의(헨리 2세의 부친) 서자의 후손까지 끌어다 검사했지만 이 사람 유전자 타입은 R-DF27로 드러나 리처드 3세, 서머셋 후손들과도 전부 불일치하며 카오스 상태가 된다. 조프루아 백작의 아들 헨리 2세랑 이 서자는 이복 형제이고, 조프루아에게서 내려오는 부계 유전자가 셋 다 맞아야 하는데 셋 다 불일치.

모계 쪽 미토콘드리아 검사 결과는 리처드 3세는 분명 요크 공작의 부인 세실리 네빌이 낳은 친자가 맞지만 현재로선 요크 공작의 아들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는 정도. 하지만 이것이 리처드의 형제 자매 모두가 요크 공작의 자식이 아니라는 증거도 아니고, 리처드만 사생아일 수 있거나 요크 공작의 친자가 맞거나 중 1.

결국 다른 부계 유전자나 역대 왕의 무덤을 발굴해 시료를 채취하지 않는 이상 누가 진짜 플랜태저넷 가의 자손인지는 모를 것이라는 점. 셋 중 하나이거나, 셋 다 아닐 수도 있고.

7.6. 재장례

원래 레스터 대학교 고고학팀은 발굴을 시작하면서 어떤 유골이라도 발굴했다면 영국 고고학 발굴 법령에 의거하여 교회 유적지에서 발굴한 유골인 만큼 현재 운영하는 인근 그리스도교계 묘지로 재매장하려고 했다. 하지만 연구 결과 이 유골이 리처드 3세의 유골이 확실해지자 재매장이 아닌 재장례를 두고 활발한 논의가 나왔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생겼다.

리처드 3세를 레스터 지방에 재매장하기로 결정되자 장례식을 누가 주관하는가 문제가 생겼다. 영국 성공회는 당연히 성공회식 국왕 장례식을 주장했고, 영국 가톨릭은 잉글랜드 종교 개혁 튜더 왕조 시절 헨리 8세 때의 일이므로 성공회 시작 이전 가톨릭 신자로 살았던 리처드 3세에게는 당연히 가톨릭식 장례식이 알맞다고 맞섰다. 결국 영국법 문제와 영국 왕실의 관여하지 않겠다는 선언, 그리고 판결에 의해서 재매장과 장례식에 관한 모든 권한은 레스터대학 고고학부에 돌아갔다. 고고학부는 고증에 따라 가톨릭식으로 성공회 레스터 대성당에 재안치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기사 장례식 비용으로 든 40억 원가량의 대부분은 레스터시에서 부담하기로 했는데, 레스터가 리처드 3세로 벌어들일 관광수익이 천문학적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 영국 왕실이 주체가 된 장례식은 아니었지만 국왕의 예우를 갖춘 장례식으로 리처드 3세의 유해는 레스터 대성당에 안장하게 되었다. #

리처드 3세가 새로 안치될 재궁(梓宮)은 다름아닌 후손 마이클 입센이 제작했는데, 위에도 나와있듯 입센이 우연히 목수기에 가능했던 일. 입센은 영국산 오크나무로 재궁을 짜고 요크 가문의 장미 문양을 새겨넣었다. 장례 행사는 발굴과 연구를 주도한 레스터 대학교에서 시작했다. 재궁은 국왕기를 두르고 국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깃발과 현직 군인들의 호위를 받는 가운데, 리처드 3세가 전사한 보스워스 전투지로 옮겼고, 이후 예포 발포 및 그의 넋을 달래는 가톨릭 의례를 진행했다. 그후 장례식을 거행할 레스터 대성당으로 향하였다. 일반 시민들이 경의를 표할 수 있도록 리처드 3세의 관을 사마(駟馬)가 끄는 유궁(柳宮)에 실어 운구하면서 여러 영빈과 호위병들이 따르는 가운데 레스터 시내를 행진했다. 재궁이 지나갈 때마다 시민들은 리처드 3세 국왕기를 흔들고 요크 가문의 상징인 흰 장미를 던지며 리처드 3세를 기렸다. 레스터 지역 학생들은 자신들만의 형형색색 깃발을 흔들며 왕의 귀환을 반겼다.

레스터 시가 행진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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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보스워스 전투지 행사, 시가 행진,
시가 행진 중인 리처드 3세의 관, 장례식 이전 레스터 대성당에 공개된 리처드 3세의 관과 장례 왕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며느리이자 에드워드 왕자의 아내 웨식스 백작부인 소피 리스존스와 여왕의 사촌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 공자가 왕가를 대신해 장례식에 참석했다. 리처드 3세의 또 다른 방계혈족(후손)인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영국 계관시인 캐롤 앤 더피의 시 '리처드'를 낭독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컴버배치는 할로우 크라운이라는 드라마에 리처드 3세 역으로 캐스팅된 상태였다. 유전자 연구에 결정적 역할을 한 후손 마이클 입센, 또 다른 후손 웬디 덜디그도 참가했다. 발굴을 처음부터 주도했던 필리파 제인 랭리, 레스터대학 고고학장 리처드 버클리가 상주 역할을 했고, 가톨릭 웨스트민스터 대교구[23]의 교구장 추기경과 성공회의 캔터베리 대주교[24]의 입회 아래 레스터 대성당 주임사제[25]의 집전으로 재장례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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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전 행사에 요크 가문의 흰 장미를 헌화하는 리처드 3세 누이의 후손 마이클 입센(왼쪽)와 웬디 덜디그

이렇게 1485년 전사하고 2012년 발굴되어 법적 분쟁을 거치기까지 500년을 넘는 한 많은 시간을 보낸 리처드 3세는 2015년 3월 26일, 영면에 들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장례식이 끝나기 무섭게 이 지역의 축구팀인 레스터 시티 FC는 왕의 은총을 받았는지 축구 역사에 남을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보통 레스터 시티 FC의 기적을 이야기 할 때면 역사에 남을 우승을 차지한 2015-16 시즌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리처드 3세의 재장례가 끝난 뒤의 2014-15 시즌 후반부도 말 그대로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리처드 3세가 영면에 든 2015년 3월 26일 당시 승격팀 레스터는 리그에서 고작 4승 7무 18패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리그 최하위에 처져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리처드 3세의 장례식 이후 남은 9경기에서 7승 1무 1패라는 말도안되는 성적을 올리며 14위로 시즌을 마감하고 승격팀 가운데 유일하게 잔류에 성공했다. 심지어 저 1패도 당시 리그 우승팀이었던 첼시 FC를 상대로 했을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우승을 차지한 2015-16 시즌 뿐만이 아니라, 그 발판을 마련한 2014-15 시즌의 기적적인 잔류도 리처드 3세의 은총 이야기를 들을 법 한 것이다. 때마침 레스터 시티의 메인 스폰서가 킹 파워(King Power)인 점도 여러모로 언급되었는데, 사실 엄밀히 따지면 킹 파워 그룹이 태국 기업이므로 여기서의 킹은 당연히 태국 국왕을 의미하나, 이런 점을 떼놓고 보면 그저 '왕의 힘'이라는 단순한 문장으로도 해석되므로 '리처드 3세의 힘'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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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팀이 우승을 거머쥐자 가디언에서는 이렇게 1면을 내보냈다.

이렇듯 리처드 3세의 유골 발견 과정부터 정말 행운에 행운이 겹쳤고, 600년 전에 죽은 왕의 원한이 2000년대를 살고 있는 후손들에 의해 해소되고 그 후손들의 노력으로 무사히 장례식을 치르게 된 것도 충분히 감동적인 스토리인데, 게다가 그 왕의 영혼이 영면한 도시를 축복했다는 판타지 동화 같은 이야기가 리처드 3세 유골 발굴 전후로 실제처럼 나타나면서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다.
파일:KnightingPhilippaLangley.jpg 파일:KnightingJohnAshdownHill.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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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발굴 업적으로 훈장을 받는 필리파, 모계 족보를 구성해 후손을 찾아낸 리카디언 향토사학자 존 애쉬다운힐 박사, 훈장 수훈 후 둘이 찍은 사진

유골발견 및 유전자 분석에 관한 첫 다큐멘터리 영상
유전자 분석 도중 고증한 척추측만증 환자와 전투 신경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상
레스터 대학 고고학부 리처드 3세 발굴 학술대회-과학적 결론
#레스터 대학 고고학부 리처드 3세 발굴 학술대회-유골 발굴지 보고 영상
#레스터 대학 고고학부 리처드 3세 발굴 학술대회-DNA검사와 결론 영상: 이번에 새로 추가된 유골 재발굴에 관한 모든 내용은 양 다큐멘터리와 레스터 대학 고고학부 학술대회를 요약한 내용이다. 이들 모두 영어로 나오니 시청에 유념해야 한다.
#레스터 대학에서 네이처(Nature) 지에 공개한 리처드 3세 유전자에 관한 논문

8. 매체



[1] 출처 유골 조사 결과에서 나온 키이다. [2] 크롬웰이 호국경으로 번역되어서 호국경으로 쓰는 경우가 있는데 원래는 왕비 왕세자 같은 직계 왕족이 아닌 섭정을 로드 프로텍터라고 한다. 직계 왕족의 경우 Regent라고 한다. 1811년에서 1820년 당시 웨일스 공 조지 4세가 정신병이 발작한 조지 3세 섭정을 할 시기는 Regency(섭정시대)라 하기도 한다. [3] 자치도시에서 시장 내 송사를 다루는 법정을 말한다. 영문 위키백과 [4] 폭이 넓은 셔츠 드레스의 옷감 [5]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에드워드 4세와 혼인하기 전에 그로비의 존 그레이와 혼인하여 아들까지 낳고 잘 살던 중, 존 그레이가 장미전쟁에서 랭커스터 왕조에 서며 참전했다가 전사하면서 사별한 바 있다. 저 엘리자베스 그레이는 존 그레이의 부인이라는 뜻, [6] 훗날 1대 서포크 공작이 되는 찰스 브랜던의 아버지다. 윌리엄이 전사할 당시 결혼한지 얼마 안되어 아들 찰스는 1살 정도에 불과했다. [7] 이 중 형인 토머스는 헨리 튜더의 양아버지 [8]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등에 베게를 넣은 듯한 꼽추. [9] DNA 조사 결과 리처드 3세는 어렸을 때 금발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금발을 유지했거나, 혹은 흔히 '더티 블론드'라고 부르는 밝은 갈색으로 변했을 것이라고 한다. 관련웹툰. 또한 눈동자 색은 파란색이기 때문에 금발벽안이다. [10] 이 기록과 레스터 지방의 향토사학자들이 발견해낸 당시 수도원이 포함된 측량지도를 바탕으로 현대에도 계속 주장이 나왔고 이후 2012년 발굴로 사실임이 확인됐다. [11] 리처드 3세 유골을 발굴하고 나서 발굴됐다는 새로운 표석을 세웠다. [12] 1, 2등급만 Sir/Dame의 칭호를 붙일 수 있다. [13] 영국에서 유적을 발굴하려면 유골 발굴 허가증과 유적 발굴 허가증을 따로 받아야 한다. 즉 유골을 예상하지 않고 발굴을 하다 주요한 유골이 나오면 또 허가증을 받아야 하는 등, 시간이 들게 되고 당연히 돈은 돈대로 들어가게 된다. [14] 현존하는 건물이 있으면 보상해야 하니 돈이 또 깨진다. [15] 동식물, 사람이 사망하면 그 순간부터 유전자는 파손된다. 발굴된 유골 역시 발굴 당시의 상태와 수습과정에 따라 얻을 수 있는 유전자의 정도가 달라진다. 그래서 유골의 여러 부위에서 샘플을 수집해 유전자 조각을 증폭하고 비교하여 퍼즐 맞추듯 파손된 유전자를 복원하는데, 이때 유골을 수습한 현대인의 입김이 뼈에 닿으면 현대인의 온전한 유전자가 고대 유전자를 증폭하는 과정에서 결과를 망쳐버릴 수 있다. [16] 여러 용도로도 쓰이지만 리처드 3세의 경우엔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머리 위에서 눌러 넣는 확인사살 용도라고 봤다. [17] 허리가 아니라 어깨로 갑옷의 무게를 지탱해야 하므로 평상복을 입었을 때와는 달리 하마하면 몸이 왼쪽으로 기운 척추측만증 증세가 보인다. [18] 그냥 이 말만 보면 거리감이 좀 있겠지만, 헨리 8세부터가 이에 해당되고, 튜더 왕조 이후에 스튜어트 왕조는 헨리 7세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장녀인 마거릿 튜더 외증손자를 데려와 시작했다. 하노버 왕조 또한 제임스 1세의 후손이긴 하다. 즉, 하노버 왕조와 그 이후의 왕조들도 튜더 왕조의 혈통이 없지는 않다. [19] 남편 귀족이 여기저기 다니며 서자를 낳는 것처럼 부인 귀족도 남편들만큼이나 즐겼다고 보는 게 타당할 듯. [20] 칼레의 시민들을 사면해 달라고 에드워드 3세에게 간청한 사람이 바로 필리파 왕비였다. [21] 페드로 왕의 딸이다. [22] 이는 왕가가 다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 영국 왕실은 장미 전쟁 막바지에 리처드 3세를 쓰러뜨린 헨리 7세의 후손이다. 정확히는 튜더 왕조의 시조 헨리 7세의 딸 마거릿 튜더의 후손이 튜더 왕조 바로 다음 왕조인 스튜어트 왕조의 시조 제임스 1세이며, 제임스 1세의 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후손이 스튜어트 왕조 바로 다음 왕조인 하노버 왕조의 시조 조지 1세가 된다. [23]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이 새로 설립한 교구로, 런던 일대를 관장하며 영국 가톨릭의 으뜸 교구이다. 성공회의 캔터베리 대교구에 준하는 지위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24] 본디 가톨릭이었으나 종교개혁 이후 성공회로 분리되었다. 설립 당시부터 영국 교회의 으뜸 교구 역할을 수행하며, 왕실과 관련된 종교의례의 책임자이기도 하다. [25] Dean은 주교가 아닌 주임사제를 의미한다. 레스터 대성당은 성공회 성당이기에, 주임사제는 성공회 사제이다. [26] 요네자와 호노부의 추리소설 빙과의 부제가 The Niece of Time(시간의 조카딸)인데, 이 소설 제목을 패러디한 것이다. [27] 리처드 2세, 헨리 4세, 헨리 5세를 주인공으로 한 편들이 방영된 상태다. 덧붙여 헨리 4세로 제레미 아이언스가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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