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19:25:20

국민혁명

장개석의 북벌에서 넘어옴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15%"
{{{#!folding [ 정치 · 군사 ]
{{{#!wiki style="margin: -6px -1px"
상징 국기 · 국장 · 국가 · 국기가
정치·행정 정치 전반 · 오권분립 · 입법원 · 행정원( 조직) · 사법원 · 헌법( 중화민국 임시약법 ·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 · 정당( 범람연맹 · 범록연맹) · 총통( 총통부 · 대총통선거법 · 수정대총통선거법 · 총통 전용기) · 행정구역( · 미수복지구) · 행정조직 · 정부총통선거 · 총선 · 지방선거 · 국민대회
국가원수 쑨원 · 위안스카이 · 쉬스창 · 차오쿤 · 돤치루이 · 왕징웨이 · 탄옌카이 · 장제스 · 린썬 · 옌자간 · 장징궈 · 리덩후이 · 천수이볜 · 마잉주 · 차이잉원 · 라이칭더
국가원수( 명단) · 총통( 명단)
기타 정치인 옌시산 · 성스차이 · 우페이푸 · 리위안훙 · 장쭤린 · 후웨이더 · 옌후이칭 · 두시구이 · 구웨이쥔 · 펑위샹 · 마부팡 · 마훙빈 · 위유런 · 탕성즈 · 마훙쿠이 · 리쭝런 · 바이충시 · 룽윈 · 장쉐량 · 황싱 · 한궈위 · 장치천 · 주리룬 · 허우유이 · 쑹추위 · 커원저 · 쑤전창 · 셰창팅 · 천젠런 · 샤오메이친
부총통 · 행정원장 · 입법원장 · 감찰원장 ·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외교 외교 전반 · 여권 · 양안관계( 하나의 중국 · 대만 해협 위기 · 92공식 · 양안통일 · 화독 · 대독) · 중화권 · 한국-대만 관계 · 대만-일본 관계 · 미국-대만 관계( 타이완 관계법 · 타이완 동맹 보호법 · 대만 보증법 · 2022년 낸시 펠로시 대만 방문 및 중국 군사훈련 사태) · 한국-대만-일본 관계( 자코타 삼각지대) · 재외공관
감정 친화 · 친대 · 반대 · 중화민국빠 · 대만빠
사법 · 치안 사법제도 · 경찰 · 국가안전국 · 소방 · 사형제도
군사 전반 국방부( 역정서) · 대만군( 육군 · 해군 · 공군 · 국민혁명군) · 계급 · 군복 · 보병장비 · 기갑차량 · 군함 · 항공병기 · 병역법 · 체대역 · 성공령 · 핵개발 · 군벌
}}}}}}}}}
[ 역사 ]
||<table width=100%><table bgcolor=#fff,#1f2023><table color=#373a3c,#ddd><bgcolor=#fe0000><width=15%> 역사 || 역사 전반( 민국사 · 대만사) · 대만의 민주화 운동 · 등용제도 · 세금 제도 · 연호 · 역대 국명 · 군벌 · 대외 전쟁 및 분쟁 ||
시대 역사 전반 · 삼황오제 · · · ( 동주 · 서주 · 춘추시대 · 전국시대) · ( 초한쟁패기) · ( 전한 · · 후한) · 삼국시대 · 서진 · 오호십육국시대 · 남북조시대 · · ( 무주 · 호연) · 오대십국시대 · ( 북송 · 남송) · · · 서하 · · ( 남명 · · · 동녕국) · ( 태평천국) · 일치시기 · 만주국 · 중화민국( 임시정부 · 북양정부 · 국민정부 · 호법정부 · 우한정부 · 임시정부(괴뢰) · 유신정부 · 왕징웨이 정권 · 국부천대 · 대만)
관직 한나라의 공경 · 삼국지 관직 · 외명부 · 환관조직 · 후궁제도 · 연성공
사서 흠정이십사사( 사기 · 한서 · 후한서 · 삼국지 · 진서(晉書) · 송서 · 남제서 · 양서 · 진서(陳書) · 위서 · 북제서 · 주서 · 수서 · 남사 · 북사 · 구당서 · 신당서 · 구오대사 · 신오대사 · 송사 · 요사 · 금사 · 원사 · 명사) · 오월춘추 · 여씨춘추 · 월절서 · 국어 · 전국책 · 열녀전 · 위서 · 위략 · 화양국지 · 후한기 · 양기 · 자치통감 · 동관한기 · 건강실록 · 정관정요 · 역대명화기 · 신원사 · 원조비사 · 만주실록 · 청사고 · 십국춘추 · 십육국춘추 · 사고전서
사건 신해혁명( 계축전쟁 · 호국전쟁) · 선후대차관 사건 · 중화민국 국회 해산 · 홍헌제제 · 부원지쟁 · 장훈복벽 · 제1차 호법운동 · 호법전쟁 · 5.4 운동 · 하남독군 교체 파동 · 안직전쟁 · 제2차 호법운동 · 영풍함 사건 · 외몽골 출병 · 직봉전쟁( 1차 · 2차) · 국민혁명( 1차 · 2차) · 탕산회의 · 동북역치 · 편견회의 · 호남 사건 · 반장전쟁( 제1차 장계전쟁 · 제1차 장풍전쟁 · 중동로 사건 · 봉소전쟁 · 제2차 장계전쟁 · 제2차 장풍전쟁 · 장당전쟁 · 중원대전) · 초공작전 · 중국-티베트 전쟁 · 신강 침공 · 중일전쟁( 만주사변 · 열하사변 · 시안 사건 · 국공합작) · 국공내전 · 국부천대 · 제1차 대만 해협 위기 · 제2차 대만 해협 위기 · 국광 작전 · 대만 계엄령 · 2.28 사건 · 중화문명부흥운동 · 중리 사건 · 메이리다오 사건 · 제3차 대만 해협 위기 · 대만 여권운동가 피살 사건 · 천수이볜 암살 미수 사건 · 해바라기 운동 · TWICE 쯔위 청천백일만지홍기 논란 · 8.15 대만 블랙 아웃
[ 사회 · 경제 ]
||<table width=100%><table bgcolor=#fff,#1f2023><table color=#373a3c,#ddd><bgcolor=#fe0000><width=15%> 경제 || 경제 전반 · 재정부 · 경제부 · 중화민국중앙은행 · 신대만 달러 · 대만증권거래소 · 타이베이거래소 · 기업( 메인보드 제조사) · 이동통신사 · 아시아의 네 마리 용 · ECFA ||
교육 교육부 · 대학 목록 · 재대복교
교통 교통 전반 · 대만의 철도 환경 · 교통부 · 중화민국국도( 중산고속공로 · 포모사고속공로) · 타이완 성도 · 공항 목록 · 항공사( 중화항공 · 에바항공 · 스타럭스항공) · 타이완철로유한회사( THSR · 쯔창하오 · 구간차) · 대만의 시외버스 · 첩운( 타이베이 첩운 · 타오위안 첩운 · 신베이 첩운 · 타이중 첩운 · 가오슝 첩운) · 이지카드 · 아이패스 · 아이캐시
민족 한족 · 본성인( 객가) · 외성인 · 대만 원주민( 아미족 · 아타얄족 · 따오족) · 인도네시아계 대만인 · 일본계 대만인 · 한국계 대만인
화교 화교( 쿨리) · 차이나타운( 인천 차이나타운) · 중국계 한국인( 재한 화교 · 화교협회) · 중국계 미국인 · 중국계 러시아인( 둥간족) · 중국계 브라질인 · 중국계 필리핀인( 상글레이) ·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 중국계 베트남인 · 중국계 싱가포르인 · 중국계 태국인 · 중국계 호주인 · 중국계 일본인 · 중국계 캐나다인 · 대만계 한국인 · 대만계 미국인 · 대만계 일본인 · 대만계 캐나다인
[ 문화 ]
||<table width=100%><table bgcolor=#fff,#1f2023><table color=#373a3c,#ddd><colbgcolor=#fe0000><width=15%> 문화 전반 || 문화 전반 · 영화( 금마장) · 드라마 · TV방송( CTV · CTS · TTV) · 라디오 방송 · 스포츠 · 중국시보 · 빈과일보 · 미술 · 파룬궁 · 등려군 · 거류증 · 중화 타이베이 ||
요리 요리 전반( 대만 요리) · 지역별 요리 · 산둥 요리 · 쓰촨 요리 · 장쑤 요리 · 저장 요리 · 후난 요리 · 광둥 요리 · 안후이 요리 · 푸젠 요리 · 베이징 요리 · 상하이 요리 · 후베이 요리 · 윈난 요리 · 만주 요리 · 청진 요리 · 한국식( 종류) · 미국식( 종류) · 일본식( 종류) · 러시아식 · 중국술 · 대만 술( 백주 · 황주 · 맥주 · 금문고량주) · · 팔진 · 만한전석
전통문화 전통악기 · 경극( 변검) · 잡극( 포대희) · 모란정환혼기 · 샹치 · 바둑 · 마작( 국표마작 · 광동마작 · 사천마작 · 홍콩대만마작 · 홍콩마작) · 만만디 · 시누아즈리 · 한푸( 여성 한푸) · 치파오 · 변발 · 인민복 · 전족 · 회회력 · 시헌력 · 한시 · 무협물( 중국사대기서) · 토루 · 사합원 · 패방 · 얼후 · 고쟁 · 비파 · 싼시엔 · 쓰후 · 싼후
현대문화 만화( 팬시 프론티어) · 민국기년 · 정가(傷感情歌)
종교 · 신화 삼교 · 대승 불교( 선종 · 정토교 · 시왕) · 도교( 종파 · 상제 · 서왕모 · 구천현녀 · 일관도 · 육갑비축 · 도술 · 태극패 · 연단술) · 유교( 변천사) · 백련교 · 중국 신화 · 하백 · 관우( 관왕묘) · 마조 · 산해경 · 삼황오제( 복희 · 신농 · 황제 · 소호 · 전욱 · 제곡 · 제지 · 제요 · 제순) · 헌원검 · 누조 · 창힐 · 치우 · 환상종( 사신 · 사령 · 오룡 · 사흉) · 동방번개
언어 중국티베트어족 · 중국어( 중화민국 국어) · 관화 · 민어( 대만어) · 객가어 · 오어 · 월어 · 상어 · 민어 · 객가어 · 둥간어 · 기타 방언 · 한문 · 대만 제어 · 백화문 · 한자( 정체자 · 방언자 · 중문대사전) · 주음부호 · 병음( 우정식 병음 · 웨이드-자일스 표기법 · 국어라마자 · 통용병음 · 국어 주음부호 제2식 · 대라병음 · 한어병음 · 팔라디 표기법 · 객가어병음방안 · 월병 · 예일식 광동어표기법) · 중어중문학과 · 제2외국어(교과)/중국어 · TOCFL · 거란 문자 · 여진 문자 · 서하 문자
관광 관광 전반 · 국립고궁박물원 · 국부기념관 · 대만의 성 · 중정기념당 · 충렬사 · 원산대반점 · 예류 · 진과스 · 핑시선 · 우라이 · 타이베이 101 · 가오슝 85 타워 · 지우펀 · 샹산 · 펑후 · 진먼
전시장 타이베이 세계무역센터 · 난강전람관 · 가오슝전람관
}}} ||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장.svg 중화민국의 대내외 전쟁 · 분쟁 파일:백일문.svg
{{{#!wiki style="color: #FFF;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전쟁·분쟁 교전국
<colbgcolor=#000096> 신해혁명
,1911 ~ 1912,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계축전쟁
,1913,
파일:중국 국민당기.svg 국민당
호국전쟁
,1915 ~ 1916,
파일:중화제국 국기.svg 중화제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북양군벌
호법전쟁
,1917 ~ 1918,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북양군벌 파일:봉천군벌 기.svg 봉천군벌
제1차 세계 대전
,1917 ~ 1918,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 제국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 파일:불가리아 국기.svg 불가리아 왕국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러시아 내전
,1918 ~ 1920,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소비에트 러시아
외몽골 출병
,1919,
파일:복드 칸국 국기.svg 복드 칸국
국민혁명
,1926 ~ 1928,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북양군벌 파일:봉천군벌 기.svg 봉천군벌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직예군벌
제1차 국공내전
,1927 ~ 1936,
<colbgcolor=#000096> 초공작전
,1930 ~ 1934,
파일:중국 공산당 당기.svg 중국공산당
반장전쟁
,1929 ~ 1930,
파일:대만 국기.svg 서산회의파 파일:대만 국기.svg 개조파 파일:대만 국기.svg 계계군벌 파일:대만 국기.svg 서북군벌 파일:대만 국기.svg 염계군벌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북양군벌
중국-티베트 전쟁
,1930 ~ 1932,
파일:티베트 국기.svg 티베트
만주사변
,1931 ~ 1932,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영릉가 전투
,1932,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제1차 상하이 사변
,1932,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쌍성보 전투
,1932,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
열하사변
,1933,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
경박호 전투
,1933,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
사도하자 전투
,1933,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
흥경성 전투
,1933,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
동경성 전투
,1933,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
대전자령 전투
,1933,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
복건사변
,1934,
파일:중화공화국 국기.png 중화공화국
쿠물반란
,1931~1934,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파일:신강군벌 기.svg 신강군벌
신강 침공
,1934,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1937년 신강 전쟁
,1937,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제2차 세계 대전
,1937 ~ 1945,
중일전쟁
,1937 ~ 1945,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 파일:왕징웨이 정권 국기.svg 왕징웨이 정권
태평양 전쟁
,1941 ~ 1945,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이저사변
,1944 ~ 1946,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파일: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 국기.svg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
제2차 국공내전
,1946 ~ 1950,
파일:중국 공산당 당기.svg 중국공산당 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제1차 대만 해협 위기
,1954 ~ 1955,
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진먼 포격전
,1958,
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중국-버마 국경작전
,1960 ~ 1961,
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버마 연방 국기.svg 버마 연방
베트남 전쟁
,1965 ~ 1973,
파일:베트남 국기.svg 북베트남 파일: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기.svg 베트콩
태국 공산반란
,1965 ~ 1967,
태국 공산당
캄보디아 내전
,1967 ~ 1975,
파일:민주 캄푸치아 국기.svg 크메르 루주
대막계획
,1979 ~ 1990,
파일:남예멘 국기.svg 남예멘 파일:쿠바 국기.svg 쿠바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제3차 대만 해협 위기
,1995 ~ 1996,
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
국민혁명
國民革命
파일:872px-Northern_Expedition_1926–28.svg.png
시기
1926년 7월 9일 ~ 1928년 12월 29일
장소
중국 전역
원인
쑨원 사후 전개된 국민당의 중국 통일전쟁.
교전 세력
파일:대만 국기.svg 국민정부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북양정부
지휘관
파일:대만 국기.svg 장제스
파일:대만 국기.svg 리쭝런
파일:대만 국기.svg 탕성즈
파일:대만 국기.svg 바이충시
파일:대만 국기.svg 옌시산
파일:대만 국기.svg 펑위샹
파일:대만 국기.svg 허잉친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장쭤린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장쉐량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장쭝창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우페이푸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쑨촨팡
병력
약 250,000 명 약 800,000 명
결과
국민정부의 승리, 중국 통일.
영향
외형상 통일의 한계와 모순으로 인한 반장전쟁 발발.
파일:external/www.ccfd.org.tw/12.jpg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1]

1. 개요2. 배경
2.1. 호법전쟁의 실패2.2. 천중밍과의 합작과 결렬
3. 전개4. 평가5. 참고문헌6. 관련문서
6.1. 인물
6.1.1. 국민당6.1.2. 공산당6.1.3. 북양정부6.1.4. 열강
6.2. 사건
6.2.1. 북벌 이전6.2.2. 국민당의 1차 북벌(1926.7.1~1927)6.2.3. 국민당의 2차 북벌(1928.4.7~1928.12.29)
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국민혁명의 진행 과정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중국국민당이 벌인 중국 통일 전쟁. 간단히 북벌(Northern Expedition, 중국어: 北伐, 병음: běi fá)로도 불린다.

이로 인해 위안스카이 사후 군벌들의 군웅할거로 사분오열되어 있던 중국 대륙에 형식적으로나마 전국을 통치할 수 있는 국가가 수립되었다.

2. 배경

2.1. 호법전쟁의 실패

1916년 중화제국의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가 실패로 돌아간 위안스카이가 죽은 이후 중국 전역은 군벌들의 지방정권이 난립하여 난세에 돌입했다. 이 시기 쑨원(손문)은 자신의 고향인 광저우에서 돤치루이(단기서)에게 축출된 국회의원들의 지지를 받고 광둥정부의 수반으로 선출되어 대원수 칭호를 받고 호법전쟁에 참여했다. 하지만 루룽팅, 탕지야오 등의 군벌들은 쑨원을 이용할 생각밖에 없었고 북양정부와 협상하여 원하는 바를 얻은 이후에는 쑨원의 북벌 호소에 광둥의 군벌들은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1918년 쑨원은 중앙정부도 북벌도 대원수도 필요하지 않다는 군벌들의 공격에 궁지에 몰렸고 실망하여 이들과 결별하여 상하이로 돌아갔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2.2. 천중밍과의 합작과 결렬

1920년 ' 객가 장군' 천중밍(진형명)이 광저우의 지배자가 되면서 쑨원을 초청하게 된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중앙집권주의적 중국을 위한 북벌을 주장하는 쑨원과 연방제에 기초한 '중화합중국'을 만들고자 한[2] 천중밍이 격렬한 의견충돌을 빚으면서 크게 악화된다. 천중밍은 아편을 근절하고 광둥을 개발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북벌을 촉구하는 의회의 지지를 등에 업은 쑨원과 장제스(장개석)는 천중밍에게 북벌을 위한 거액의 예산을 거듭 요구, 천중밍은 이를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다. 천중밍과 그의 참모들은 쑨원을 허풍선이라는 뜻의 대포라고 조롱했고 이에 장제스는 천중밍을 광둥정부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고 있었지만 천중밍의 지지가 필수불가결이었던 쑨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천중밍은 천중밍대로 자신을 내쫓으라고 날뛰는 장제스를 고깝게 여겨 측근들에게 그를 '땅콩'이라고 하면서 비꼬았고 쑨원에게 '무뢰배 장씨'를 내쫓을 것을 요구하는 등 쑨원이 장제스를 곁에 두는 것을 불만스러워했다.

그러던 중 1922년 쑨원은 첫번째 북벌을 결정하고 상계군벌들과 연합하여 광둥성 북부를 장악하려 했는데 상계군벌들의 배신과 천중밍, 예쥐를 비롯한 광둥 군벌들의 반발로 실패로 돌아간다. 결국 쑨원과 완전히 틀어진 광둥 군벌들은 1922년 6월 16일 쑨원의 대원수부를 공격한다. 이때 위기에 처한 쑨원을 군함을 이끌고 달려가 구조한 것이 바로 장제스[3]로 이때부터 장제스가 쑨원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 사태에는 영국이 개입하여 쑨원의 안전한 퇴로를 보장받게 해주었고 이후 천중밍은 대군벌 우페이푸(오패부)에게 광둥과 장시의 총독으로 인정받게 된다.

3. 전개

3.1. 기반확보(1924~1926)

3.1.1. 제1차 국공합작

1923년 쑨원은 윈난과 장시의 반 천중민 군벌들과 동맹을 맺고 양시민, 류전환을 비롯한 여러 군벌들에게 40만 위안의 군비를 지원하여 광저우를 쳤다. 이 싸움에서 패배한 천중밍은 광둥 동부로 밀려났고 쑨원은 1923년 2월 다시 광저우에 입성하여 3차 광둥 정부를 수립했다. 쑨원은 상하이에서 국민당을 재건하기 위해 소련 및 공산당과 접촉했다. 코민테른에서 네덜란드 공산당원 헨드리퀴스 스니블릿이 중국공산당원들에게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하는 것을 허락하자고 제안했고 채택되면서 국공합작의 근거가 마련되었다. 소련은 국민당이 공산주의를 실행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으나 국민당을 혁명정당으로 인정하고 국민당과 협력하기로 결정, 중국공산당에게도 국민당과 협력할 것을 지시했다. 그해 9월 장제스가 직접 모스크바를 방문해 레프 트로츠키와 만났고 소련의 군사고문단 지원 및 군사적, 경제적, 기술적 원조를 승인받았다. 하지만 소련은 장제스가 역설한 북벌의 필요성에 광둥 정부는 구 청나라의 토대를 계승한 범국민적인 조직이 아니라면서 북벌이 시기상조라고 지적했다. 이에 장제스는 매우 불쾌해하며 소련인들은 믿을 수 없는 자라고 쑨원의 비서인 랴오중카이(료중개)에게 주장했다. 장제스는 쑨원에게 소련인들은 구 러시아 제국 시절의 제국주의를 포기하지 않았으니 협력하면 안된다고 주장했으나 소련은 국민당을 지원하는 유일한 열강이었고 쑨원은 소련과의 협력을 포기할 수 없었다. 쑨원은 소련에서 특별고문인 미하일 보로딘을 초빙하였는데 보로딘은 쑨원을 개명한 지방총독 정도로 매우 저평가했지만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성심성의껏 국민당에 협조하였다.

1923년 말 광둥 동부로 밀려났던 천중밍의 반격이 시작되자 보로딘은 토지 분배, 최저임금제, 휴일 보장을 통한 국민당의 볼셰비키화를 통해 농민, 노동자 대중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것을 권유했지만 쑨원은 상인과 향신 지지자들을 잃을까봐 두려워하여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쑨원은 보로딘의 주장에 따른 레닌주의 노선을 국민당 노선에 상당수 포함시켰고 천중밍 군대를 격퇴한 1924년 1월 20일부터 10일 간 국민당 1차 전국대표회의를 열고 정식으로 국공합작을 이루었다. 종신 대총통에 선출된 쑨원은 공산당원들의 국민당 가입을 정식으로 허락했고 삼민주의를 대표이념으로 채택했다.[4] 중국국민당의 중앙집행위원회에는 예비위원을 포함하여 41석의 위원직이 있었는데 그 중 10석이 중국공산당에 할당되었다.

3.1.2. 국민당의 1차 동정

1925년 2월 천중밍이 다시 광저우를 공격하자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 생도들을 중심으로 소련인 고문들을 대동하여 반격에 나섰다. 이 전투에서 국민당이 크게 승리하였다. 자세한 것은 국민당의 1차 동정 문서 참조.

장제스는 약탈을 엄격히 금지하는 한편 국민당을 선전하는 집회를 열어서 민심을 얻었다. 국민당의 이러한 행보에 중국의 대중과 지식인들은 크게 고무되었고 중국 공산주의의 거두인 천두슈(진독수)는 장제스를 반대하는 자는 곧 반혁명분자라고 공언하기도 하였다. 국민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농민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정치위원들을 시켜 토지 개혁 정책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당연히 농민들의 지지로 이어졌다. 군벌군대들이 강제 징병, 강제 징용, 약탈을 일상적으로 한 반면 국민당은 어느 것도 빼앗지 않았고 이에 곳곳에서 노동자와 농민들이 국민당에 자발적으로 협조하여 길과 지역정보와 물자를 제공했다. 또한 군사들에 대한 엄격한 상벌제도, 부상병에 대한 후한 복지, 전사자들에 대한 예우로 인하여 국민당과 교군의 사기도 크게 올랐다. 소련도 국민당의 군사력과 장제스의 지휘력에 대해 높이 평가하였고 국민당과 장제스의 명망은 중국 전역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3.1.3. 쑨원의 죽음과 왕징웨이의 집권

1924년 2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자 쑨원은 봉천군벌 장쭤린(장작림)과 동맹을 맺어 북방을 도모하려 하였다. 1924년 11월, 쑨원은 북상선언을 발표하고 상하이를 거쳐 일본에 도착했다. 이 시점에서 장쭤린은 돤치루이, 펑위샹 등과 연합하여 우페이푸를 패퇴하고 패권을 거머쥐게 되었다. 쑨원은 1924년 12월 31일 베이징에 도착했으나 장쭤린 역시 쑨원의 주의주장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쑨원은 장쭤린의 냉대를 받다가 급격한 병세 악화로 인해 쓰러졌다. 쑨원은 1925년 1월 26일 베이징협화의원에서 개복 수술을 받고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2월 중순에 퇴원한 쑨원은 베이징의 국민당원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서 생애 마지막 정치활동을 전개했고 이때 그의 비서로 활약하여 후계자를 자처하게 된 것이 왕징웨이였다. 3월 12일 쑨원이 사망했고 베이징 서산 벽운사에 안장되었다.

쑨원을 잃은 국민당은 주도권을 놓고 분열하기 시작했다. 린썬, 쩌우루, 셰츠, 쥐정 등 우익성향의 원로들이 중심이 된 노(老)동지파, 왕징웨이(왕정위)와 후한민(호한민)의 당권파, 쑨원의 아들인 쑨커(손과)가 이끄는 태자파가 쑨원의 빈 자리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는데 그 중에서 당연히 당권파가 제일 유력했다. 당권파의 거두인 41세의 왕징웨이는 과거 순친왕 암살사건에 연루된 사람으로 대단한 미남으로 유명했다. 그는 보로딘과 소련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청나라 관료를 지내 고전학문에 능통한 45세의 후한민은 왕징웨이와는 반대로 우익적인 성향으로 반공주의자였다. 왕징웨이는 쑨원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있었으나 다이지타오를 비롯한 이론가들도 무시할 수 없었고 후한민은 대리 대원수를 지내며 행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 보로딘이 왕징웨이를 지지하여 1925년 7월 1일 국민정부가 수립될 때 왕징웨이가 만장일치로 국민정부 주석에 선출되었다. 랴오중카이가 재정부장, 황푸군관학교, 군대의 당대표를 겸했고 장제스는 8인 군사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우파 성향의 후한민은 실질적으로 업무가 없는 외교부장으로 좌천되었다.[5] 이에 후한민을 비롯한 국민당 우파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그러던 중 1925년 8월 20일 국민당 재정부장 랴오중카이가 암살되면서, 이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한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외교부장 후한민, 군정부장 쉬충즈 등을 모두 숙청하였다. 이어 린썬, 쩌우루 등의 원로들에게도 국민혁명을 화북에 전파하라는 구실로 사실상 추방함으로 국민정부는 왕징웨이의 좌파가 확고하게 장악하게 되었으며 장제스도 국민정부의 실질적인 2인자로 등극했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문서 참조. 한편 화북으로 추방된 원로들은 분노하여 서산회의를 소집, 국공합작의 파기를 선언하고 상하이 당부를 접수하여 상하이 당중앙을 설립하여 국민당은 둘로 분열되었다.

3.1.4. 국민당의 2차 동정

국민당 우파 숙청 이후 기존의 교군이 당군으로 재편되었다. 국민정부는 국민당의 1차 동정 이후 양시민, 유전환 등이 우페이푸와 내통하고 있었다는 증거 문건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장제스로 하여금 1925년 5월 이들을 숙청하게 했다. 양시민과 유전환를 숙청한 후 국민정부 산하의 부대들은 국민혁명군으로 재편되었다. 그 직후 양시민, 유전환 숙청,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등으로 국민정부가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1차 동정으로 복속되었던 광동 동부의 천중밍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제스는 동정 총지휘에 취임하여 천중밍 군대를 완전히 정벌했으며 1925년 12월에서 1926년 2월에 걸친 남정을 통해 하이난 섬까지 장악했다. 자세한 것은 국민당의 2차 동정 문서 참조.

동정의 결과로 국민당은 넓은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는데 새로운 재정부장 쑹쯔원이 실시한 재정개혁으로 1924년에서 1926년 사이에 정부 수입이 2배로 늘었다. 국채 수입도 크게 증가했고 은행 저축액은 6배로 늘었다. 유가증권도 성공적으로 유통되었다. 수입이 늘자 당연히 국민당의 군사력도 크게 증강되었고 국민당의 성공을 목도한 우차오수(오조추), 천궁보를 비롯한 중국 각지의 젊은 지식인과 엘리트들이 잇달아 국민당에 합류했다. 국민당은 중국 각지의 민족주의자, 진보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3.1.5. 중산함 사건

하지만 급격히 국민당의 실력자로 성장한 장제스는 주페이더, 탄옌카이 등 다른 군사실력자들의 질시를 받게 되었으며 북벌 시작을 놓고 키산카를 비롯한 소련 고문들과도 마찰을 빚었다. 이 와중에 왕징웨이마저 자신의 권위 확보를 위해 다른 군사실력자들을 지원하게 되면서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관계도 크게 악화되었고 장제스를 음해하는 각종 불온 선전과 유언비어가 난무하였다. 장제스의 정치적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중산함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회항하는 일이 벌어지자 장제스는 이를 자신을 납치하려는 소련과 공산당의 음모로 간주하고 정변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주석 왕징웨이는 충격을 받아 프랑스로 외유를 떠났고 공산당도 강경한 자세를 수정하여 장제스에게 협조하게 되면서 장제스는 국민정부의 지배자가 되었고 본격적인 북벌이 시작되었다. 자세한 것은 중산함 사건 문서 참조.

3.2. 북벌(1926~1928)

3.2.1. 국민당의 1차 북벌 4.12 상하이 쿠데타

1926년 7월 6일, 국민혁명군북벌선언이 발표되었다. 뒤이은 7월 9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가 총사령관 취임식과 북벌 서사전례를 거행, 북벌을 거행할 것을 선언함으로 국민당의 북벌이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은 가장 큰 세력으로 등극한 장쭤린 우페이푸, 옌시산과 함께 펑위샹을 공격한 직봉풍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은 국민정부에게 있어 북벌을 시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군벌들은 국민정부보다 훨씬 넓은 영토와 많은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8개군, 10만명의 국민혁명군은 우페이푸 쑨촨팡을 비롯한 압도적인 숫자의 군벌군과 싸워 이들을 분쇄했고 국민당은 우한, 난창, 난징, 상하이 등 주요 도시들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북쪽의 군벌 장쭤린과 중국의 패권을 양분하는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국공 갈등이 격화되었고 1927년 4월 12일 국민당 우파의 수장인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의 뒤통수를 가격하게 된다.

3.2.2. 영한분열

장제스가 쿠데타까지는 일으킬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다가 상하이 쿠데타를 허용했던 우한 국민정부는 4월 17일 장제스에게 인민 학살의 책임을 물어 출당 조치를 취했고 반혁명의 수괴라고 비난하고 25만 위안의 현상금을 걸었다. 그간 협력 관계였던 소련도 장제스가 반역자라고 비난했고 소련의 기관지인 이즈베스티야에는 소련 유학 중이던 장징궈가 장제스에게 당신은 아버지도 아니라고 비난하는 편지가 게재되었다.[6] 장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독자적인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우한에서는 탕성즈 등이 우한 정부가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의 우세함을 들어 난징을 재빨리 토벌할 것을 주장했으나 우한과 난징-상하이 일대의 경제력 자체가 비교가 되지 않았을 뿐더러 우한 정부는 공산당의 토지개혁과 지주, 토호이던 향신, 자본가 공격으로 인해 내부 소요와 인플레이션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중산층 출신 당원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반면 부유한 난징과 상하이의 경제력 및 혁명의 근거지인 광동을 차지한 장제스는 여러 면에서 우한 정부보다 훨씬 유리한 상태였고 장제스 개인을 지지하는 아편판매 등으로 자금을 풍부하게 마련한 흑사회 집단인 청방과 자본가들의 협력으로 인해 재정 상태는 비교할 수도 없이 풍족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전체 병력은 우한보다 많았을지언정 북양군벌과의 대치 상태로 인해 즉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적었고 따라서 어느 한쪽이 상대를 손쉽게 압도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우한, 난징 각 국민정부는 즉각적인 대치를 회피하고 북벌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3.2.3. 국공결렬

1927년 7월, 우한 국민정부도 분공을 결정하고 공산당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해당 문서 참조.

3.2.4. 영한합작

결국 둘 다 반공으로 돌아서게 된 우한과 난징 정부의 통합에 더욱 힘이 실리게 되고 장제스의 하야를 거쳐 양 정부가 통합되기에 이른다. 이때 장제스는 쑹메이링과 결혼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으며 군사적 경쟁자인 우한의 탕성즈가 전횡을 일삼다 광서파에게 토벌되고 광서파가 재정난 등으로 궁지에 몰리자 이를 통해 지도자로 복귀하게 된다. 자세한 것은 영한합작 문서 참조.

3.2.5. 국민당의 2차 북벌

1928년,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과 함께 2차 북벌에 나선 장제스는 베이징을 점령하였다. 봉천으로 퇴각하던 장쭤린 황고둔 사건으로 일본 관동군에게 암살당했고 장쭤린을 승계한 장쉐량 동북역치를 결정, 국민정부에 합류함으로 북벌은 완수되었다. 6월 11일에는 신강성 군벌 양쩡신까지 국민정부에 복종함으로 전 중국이 국민정부의 통치 하에 들어오게 된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4. 평가

북벌은 중국 역사에서 남부에서 북쪽으로 진군하여 중국을 통일한 두 번째 사건이다. [7]

외형상으로 중국을 통일시킨 중국국민당 정부는 내면적으로는 '혁명적 장령'또는 '국민정부위원 겸 각 성의 주석'이라는 직함을 가진 군벌들의 불안정한 연합이었다. 재정부장 쑹쯔원은 1929년 1월 "중앙의 재정권은 겨우 강서, 절강, 안휘, 강소에만 미칠 뿐이고 그 가운데 안휘, 강서의 조세수입은 중앙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라고 보고했다. 나머지 각 성의 조세수입은 장쉐량, 옌시산, 펑위샹, 리쭝런, 바이충시, 리지천 등 지방 군벌들의 직접 사병양성 등에 사용하고 있었다. 국민당 내부에도 왕징웨이 등 개조파, 셰츠, 쩌우루, 쥐정 등의 서산회의파를 비롯해 장제스에 대립하는 파벌이 다수 있었다.

장제스는 각 지방의 정치분회를 폐지하고 1928년 편견회의를 개최하여 군을 감축하려 했으나 이로 인하여 군벌들 간의 갈등이 폭발하여 반장전쟁이 발생하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hinese_civil_war_map_02.jpg
북벌 직후의 중화민국의 정세. 지도에서 남색 부분은 장제스가 이끄는 난징국민정부의 지배가 강한 영역. 핑크색 부분은 지방 군벌의 지배가 강한 영역이다.[8]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6.1. 인물

6.1.1. 국민당

6.1.2. 공산당

6.1.3. 북양정부

6.1.4. 열강

6.2. 사건

6.2.1. 북벌 이전

6.2.2. 국민당의 1차 북벌(1926.7.1~1927)

6.2.3. 국민당의 2차 북벌(1928.4.7~1928.12.29)

7.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66666, #000000)"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bgcolor=#222><colcolor=#fff> 주요 사건
제1차 세계 대전의 끝
(1918~1920)
<colcolor=#000,#ddd> 부쿠레슈티 조약 ·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 세브르 조약 · 로잔 조약 · 뇌이 조약 · 트리아농 조약 · 생제르맹 조약 · 베르사유 조약
전간기 초기
(1918~1931)
러시아 내전 · 외몽골 출병 · 카프 폭동 · 로마 진군 · 루르 점령 · 메멜 점령 · 리프 전쟁 ·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 ·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 로카르노 조약 · 국민혁명( 제1차 국공합작) · 황고둔 사건 · 켈로그-브리앙 조약 · 대공황
만주사변
(1931~1933)
만주사변 · 제1차 양광사변 · 나카무라 사건 · 만보산 사건 · 제3차 초공작전 · 류탸오후 사건 · 천진사변 · 영월합작 · 진저우 침공 · 사쿠라다몬 의거 · 마옥산 사건 · 제1차 상하이 사변 · 훙커우 공원 의거 · 송호정전협정 · 이시모토 사건 · 열하사변 · 당고정전협정
나치당 집권 후
(1933~1939)
복건사변 · 라이히스탁 방화 사건 · 수권법 통과 · 장검의 밤 · 신강 침공 ·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 스페인 내전 · 라인란트 재무장 · 수정의 밤 · 오스트리아 병합 · 하산 호 전투 · 뮌헨 협정
중일전쟁
(1937~1939)
루거우차오 사건 · 상하이 전투 · 난징 전투 · 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 트라우트만 공작
국제 기구
}}}}}}}}}}}}

중화권 보수주의 관련 문서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관련 이념 국가자본주의 ( 당국 자본주의) · 삼민주의(일부) ( 다이지타오주의 · 장제스의 학설)중국 국민당 · 중화제국주의 · 중화민족주의 ( 극단민족주의(極端民族主義) · 한(漢)민족주의) · 신권위주의 · 신유교주의 · 초보수주의
연관 개념 대한족주의(일부) · 반자유주의 · 법가 · 아주가치(亞洲價值) · 유가/ 유교 · 중화민족 · 중화사상 · 하나의 중국/ 양안통일
지역별 대만 · 홍콩
주요 정당* 1949년 이전 진보당△ · 중국국민당당내 우파 ( 남의사 · 서산회의파)
중화인민공화국 중국공산당◎ · 중국민주당
중화민국/대만 (범람연맹)* 신당 · 중국국민당 · 중화민족치공당 · 친민당
홍콩 (건제파)* 민주건항협진연맹 · 서구룡 새로운 힘 · 신민당 · 신세기논단 · 실정원탁 · 자유당 · 홍콩 경제민생연맹 · 홍콩 공회연합회** · 홍콩 교육 노동자 연맹** · 홍콩 및 구룡 노동조합 연맹** · 홍콩섬각계협합회 · 홍콩신방향
마카오 (건제파) 광둥마카오동맹 · 마카오 고용주이익협회 · 마카오공회연합총회** · 마카오발전신연맹 · 마카오부녀연합회 · 마카오 전문가 이익연회 · 마카오주민회연합총회 · 문화체육연합 · 민중건오연맹 · 사회복무교육촉진회 · 종업원단체연합
싱가포르 인민행동당
주요 인물 1949년 이전 량치차오 · 셰츠 · 쉬충즈 · 쑨커 · 쑹메이링 · 장제스 · 위안스카이 · 캉유웨이 · 후한민
중화인민공화국 덩샤오핑◎ · 량수밍(梁漱溟) · 시진핑◎ · 왕후닝◎ · 양상쿤◎ · 장시공(强世功)◎ · 후시진(胡錫進)
중화민국/대만 (범람연맹)* 마잉주 · 쑹메이링 · 쑹추위 · 장완안 · 장제스 · 장징궈 · 주리룬 · 허우유이
홍콩 (건제파)* 레지나 입 · 렁춘잉 · 성룡 · 스태리 리 · 존 리 · 캐리 람 · 퉁치화
마카오 (건제파) 페르난두 추이 · 호얏셍
싱가포르 고촉통 · 리콴유 · 리셴룽
언론 중국시보 · 중앙일보 · 중국 텔레비전 · 환구시보
단체, 그룹 건제파 · 범람연맹 · 왕왕 그룹
관련 사건, 시기 4.12 상하이 쿠데타 · 개혁개방◎ · 국공내전 · 국광 작전 · 국민혁명 · 국부천대 · 난징 십년(南京十年) · 당국 체제 · 동치중흥(同治中興) · 백색 공포 ( 대만 계엄령) · 신생활운동 · 양무운동*** · 의화단 운동 · 중국몽 · 중화제국(1915~1916) · 홍콩 국가보안법
그 외 N세대 · 소분홍 · 분청 · 시노필리아 · 중국 위협론 · 중체서용 · 친중화민국 · 통일전선 · 한푸 운동 · 홍콩의 민국파
소멸된 정당은 △ 표시 / 중국 본토의 경우 신권위주의 계열 정당과 인물, 조직 등은 ◎ 표시.
파일:파란색 깃발.svg 보수주의/분파
}}}}}}}}}


[1] 1926년 10월 10일( 쌍십절) 우한 입성 기념 열병식의 모습이다. 오늘날까지 장제스를 대표하는 사진들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2] 이를 연성자치론이라고 한다. [3] 음모론에 의하면 상하이 검은 손의 원조를 받았다고 한다. [4] 이때 삼민주의는 크게 개조되면서 오늘날의 삼민주의가 확립되었다. 외국의 통제를 받지않는 자주 국가건설(민족주의), 민족자본에 의한 경제 건설(민생주의), 민생의 권리 향상을 통한 궁극적 민주국가 완성(민권주의)이 그것이다. 그러나 쑨원 사후 중국 공산당은 1차 전당대회 당시의 소련의 지원을 받아 반제국주의 국가 확립(민족주의), 공산주의와의 연대를 통한 민중 해방(민권주의), 노동자와 농민운동 지원(민생주의)가 정통 삼민주의라고 주장하였다. [5] 광저우 정부를 인정하는 국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6] 그러나 장징궈는 소련의 강압 때문에 서술하였다고 변명하였다. [7] 첫 번째는 명나라 원나라 북벌이다. [8] Li는 리쭝런, Feng은 펑위샹, Yan은 옌시산, Zhang은 장쭤린, 장쉐량 부자를 뜻한다. 북벌 이후 벌어진 반장전쟁에서 장제스가 군벌을 계속해서 제압하며 국민정부의 실질적인 지배 영역은 저 지도에 표시된 것보다 넓어진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