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사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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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 날짜 | 벌어진 일 |
탕산 사건 | 1931년 2월 28일 | 후한민 감금 | |
제1차 양광사변 | 1931년 5월 27일~1932년 1월 1일 | 광저우 국민정부 수립 | |
나카무라 사건 | 1931년 6월 27일 | 나카무라 중위 피살 | |
만보산 사건 | 1931년 7월 1일 | 한중 농민 충돌 | |
제3차 초공작전 | 1931년 7월 1일~1931년 9월 20일 | 공산당에 대한 3차 토벌작전 | |
류탸오후 사건 | 1931년 9월 18일 | 만주사변 발발 | |
눈강 전투 | 1931년 11월 4일 | 관동군의 치치하얼 침공 | |
천진사변 | 1931년 11월 8일~12월 1일 | 관동군의 푸이 옹립 | |
영월합작 | 1932년 1월 1일 | 1차 양광사변 종식 | |
진저우 침공 | 1932년 1월 3일 | 관동군의 진저우 점령 | |
사쿠라다몬 의거 | 1932년 1월 8일 | 이봉창의 폭탄 투척 | |
마옥산 사건 | 1932년 1월 18일 | 일본인 승려 구타 사건 | |
제1차 상하이 사변 | 1932년 1월 28일~5월 5일 | 일본군의 상하이 침공 | |
훙커우 공원 의거 | 1932년 4월 29일 | 윤봉길의 폭탄 투척 | |
송호정전협정 | 1932년 5월 5일 | 1차 상하이 사변 종결 | |
이시모토 사건 | 1932년 7월 17일 | 관동군 촉탁 피살 사건 | |
열하사변 | 1933년 2월 23일~5월 31일 | 일본군의 열하 침공 | |
당고정전협정 | 1933년 5월 31일 | 열하사변 종결 | }}}}}}}}} |
1. 개요
1932년 1월 3일, 관동군이 봉천군벌의 만주 최후의 근거지인 진저우를 함락시킴으로 전세계적 공분을 산 사건. 이로서 만주에서 국민정부의 주권은 사실상 소멸되고 일본군은 제1차 상하이 사변, 열하사변으로 나아가게 된다.2. 배경
1931년 9월 18일, 이시와라 간지, 이타가키 세이시로, 도이하라 겐지 등은 류탸오후 사건을 조작하여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화북에 주력부대를 주둔시켜서 화북의 지배권을 공고화하려 했던 장쉐량은 일본의 의도를 오판하여 저항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고 그 결과 심양을 비롯하여 남만주의 핵심지역 대다수가 일본군의 손에 들어갔고 이에 국민정부는 9월 27일, 동북변방 총사령장관 공서와 요녕성 정부를 진저우로 이전하였다. 이에 사령장관 대리 장쭤샹, 동북변방군 참모장 영진 등 일본에 투항하지 않은 봉천군벌의 잔여 세력이 금주에 집결하기 시작하여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관동군은 진저우를 공격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10월 8일 오후, 조선군 소속 평양 비행 제6연대 소속 88식 정찰기 2대, 동북군에 노획한 비행기 5대 등 일본군 전투기 12대가 동북 교통대학, 진저우역 등 진저우의 주요 시설에 25킬로그램짜리 폭탄 75발을 투하하여 수십명의 시민이 사망하였다. 일본의 진저우 폭격은 국제적인 논란이 되었고 미국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은 10월 12일, 일본군에 대한 비난성명을 발표했고 10월 24일, 국제연맹 이사회는 일본군에 대한 비난 결의안을 13대 1로 통과시켰다. 진저우 폭격은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에게조차 보고가 올라가지 않은 것이었으며 육군 중앙은 관동군의 폭주에 놀라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이시와라 간지를 비롯한 관동군 일선 장교들은 눈이 뒤집혀서 중앙의 저지에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쨌거나 일본 외무성은 진저우 폭격에 대해서 중국 측이 자신들의 정찰기에 사격하여 부득이하게 반격한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자신들도 일본의 입장이 대단히 불리해졌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스자오지 국제연맹 중국 대표 등은 외교적 총공격을 준비하였다.
3. 전개
3.1. 국제연맹에서의 외교전
1931년 10월 13일, 국제연맹 2차 이사회가 소집되었으며 사태의 심각성에 영국과 프랑스의 외상이 참석하였다. 스자오지는 발언대에 서서 일본군의 철군을 요구하는 한편 진저우 폭격을 격렬히 비난하였다."중국은 이미 이 문제를 국제연맹의 조정에 맡기고, 극력 자제하며 무저항을 계속하고 있다. 일본은 왜 중국의 영토를 이유 없이 점령하고 죄없는 국민을 살상하는가? 국제연맹의 규약과 부전조약을 지키지 못한다면, 세계의 화평, 군비축소, 국제안전 및 세계 경제 위기의 구제도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일본대표 요시자와 켄키치는 진저우 폭격이 자위조치였다고 주장하는 한편 만몽에서 일본의 특수지위를 논하고 중국 정부가 조직적으로 반일감정을 조장하고 있으니 일본 거류민에 대한 중국 측의 안전보장이 있어야 철군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에 스자오지는 반일감정은 일본의 침공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정부가 조장한 것은 없으며 일본의 배상과 철군이 있지 않은 한 일본과의 직접 교섭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10월 15일, 국제연맹 이사회 의장 브리앙은 미국을 옵저버로 가입시키는 안을 제시했다. 일본은 이 제안에 반대했으나 나머지 회원국이 모두 동의하여 제네바 주재 미국총영사 프렌치 길버드가 옵저보로 국제연맹 이사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10월 18일, 본안 심의에 들어간 국제연맹 이사회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5개국으로 하여금 5개국 위원회를 구성하게 하고 22일에 일본의 기한부 철군을 다룬 2차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 중국과 일본 양 정부는 사태를 확대시키는 여하한 행동도 취하지 말 것이며, 적대행위를 중단할 수 있는 적당한 방법을 취하라는 점을 다시 표명함.
- 일본이 성명 속에서 동북지역에 대해 영토적 야심은 없다고 표명한 것은 국제여맹 규약 및 9개국 조약의 규정과 부합됨을 이해함.
- 쌍방의 통상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첫째, 일본군은 다음 국제연맹 개회일인 11월 16일까지 만철 부속지 안으로 철군을 완료한다. 둘째, 중국정부는 동북지방에서의 일본 거류민에 대한 안전을 보장한다. 특히 일본군의 철수가 행해지는 지구에서는 안전보장을 위해 구체적 조치를 강구한다. 이를 위해 각국 대표를 현지로 보내어 접수가 안전하게 이루어지는지의 여부를 확인한다.
- 중일 양국은 일본군의 철수와 그에 따르는 접수가 순조롭게 지체없이 행해질 수 있도록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구체적인 내용에 따라 협의한다.
- 철군 완료 후 중일 양정부는 직접 교섭에 들어가며, 양국간의 현안문제를 협의한다. 그를 위해 쌍방이 조정위원회, 혹은 그와 유사한 영구기관을 설치하도록 이사회는 제의한다.
하지만 요시자와는 당연히 철군 후 교섭을 정의한 이 결의안에 거부했고 10월 23일, 교섭한 후 철군한다는 대체안을 내놓았다. 허나 어떤 나라도 일본의 제안에 동조하지 않았으며 이탈리아는 "과거 12년 동안의 경험을 돌아보건대, 이사회의 전부가 어느 한 나라에 대해 이토록 반감을 가진 예는 일찍이 없었다."라고 논평했다. 국민정부는 결의안을 환영하며 일본의 철군을 촉구하였다. 10월 27일, 주일 중국공사 장작빈이 중국이 접수위원을 준비 중이라고 하였으니 일본 측에 책임있는 접수위원 임명을 부탁한다고 타진하자 일본 외무성은 10월 31일, 국제연맹 규약 5조를 들어 만장일치가 아니란 이유로 국제연맹의 철군 결의안이 무효임을 선언했다. 허나 중국 측은 이를 무시하고 11월 2일, 구웨이쥔을 위원장으로 하는 동북 접수위원회를 발족시켜 장쭤샹, 장췬 등 6명을 위원으로 임명했다.
3.2. 관동군의 계속되는 폭주
하지만 관동군의 거침없는 행보는 그칠 줄을 몰랐다. 11월 4일, 관동군은 치치하얼을 수비하던 마잔산 군대와 충돌하여 눈강 전투를 벌여 패했다. 일본군이 전선확대를 기도하자 다시 국제정세는 요동쳤고 11월 6일, 국제연맹 이사회는 중일 양국 정부에 유혈사태를 중지하라고 훈령했으나 11월 8일, 일본 정부는 중국이 잘못해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이날 톈진에서 관동군 특무 도이하라 겐지가 선통제를 만주로 탈출시키기 위해 1차 천진사변을 일으켰다. 이어 11월 19일, 관동군은 눈강의 철도교량을 수리한다는 구실로 북상해 11월 19일, 치치하얼을 점령하였다. 육군 참모본부는 치치하얼 점령까진 인정하였으나 치치하얼을 근거로 북만주를 지배하는 것에는 반대하였다. 가나야 참모총장은 11월 24일, 치치하얼에는 보병 1개 연대 내외의 병력만 남기고 나머지 주력부대는 철수하라고 지시하였으며 11월 25일, "국가국군의 신의 및 국제대국에 비추어 귀군은 제치하지 말고 지시를 이행하라"고 재촉했다. 하지만 관동군은 국제여론을 생각하라는 참모총장의 명령도 무시하면서 마구 발악했는데 추가적인 확장을 구실로 일으킨 사건이 다름아닌 2차 천진사변이었다. 선통제를 성공적으로 만주로 빼낸 도이하라 겐지가 폭도들을 풀어 다시 톈진에서의 군사적 긴장을 초래했다.11월 26일 오후 11시, 치치하얼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은 후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관동군사령관 혼조 시게루는 이 기회를 틈타 진저우를 공격하기로 결의했다. 27일 오후 오전 1시, 혼조는 "군은 지나주둔군의 위급을 구원한다는 목적으로 진저우 부근의 적을 격파하고 가능한 한 신속히 산해관 부근으로 진출하도록 한다."고 명령하고 봉천의 독립보병 2대대에 구방자(溝幇子)로의 출동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따라 2대대는 오전 5시 30분, 장갑열차를 타고 봉천을 출발했으며 20일에 봉천에 배치되었던 혼성 제4여단도 8시 10분 이후 북녕선 열차를 타고 대릉하(大凌河)로 진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또한 길림, 장춘에 주둔했던 혼성 제39여단은 봉천으로 전진을 명령받았으며 치치하얼을 점령하고 있던 제2사단에게는 보병 2대대를 포함하는 치안유지병력만을 치치하얼에 잔류시키고 봉천으로 내려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는 국제연맹 이사회가 아직 개최 중인 시점을 노려서 장쉐량의 최후의 거점인 진저우를 확실하게 끝장내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일본군 육군 참모총장 가나야 한조는 27일 오전 11시, 전보를 보내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에게 "귀군은 새로운 임무를 받지 않는 한 천진군 구원을 위해 정통선 이남 및 정가둔 부근 이남의 요하 이서에서 단독작전 행동을 실행하지 말라."고 관동군의 요하 도강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12시 30분, 가나야 참모총장은 "1. 천진방면에 대해서는 이쪽에서 처치를 강구하고 있고, 2. 귀군의 진저우 방면에 대한 공세는 별도의 명령이 있기까지 이를 금지한다. 3. 군의 선두부대는 요하 이동에 배치할 것을 엄중히 요한다."고 다시금 명령하였다. 이에 관동군은 4여단에게 구방자나 타호산(打虎山) 인근을 점령하고 적의 공격에 대비하는 한편 다음 지시를 기다리라고 하였다. 구방자와 타도산 모두 요하 서쪽의 요충지로 이는 참모총장의 명령을 씹은 것이었다. 이에 참모본부는 오후 5시 30분 임참위명(臨參委命) 제8호를 보내 "당면한 상황여하에 관계없이 이미 요하 이서로 진출시킨 부대를 모두 요하 이동으로 배치하도록 지체없이 실행하라."고 강하게 명령하였다. 이에 관동군은 오후 8시, 혼성 4여단에게 거류하 수비대를 제외한 모든 병력을 봉천으로 철수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오후 11시, 혼성 3여단은 요하를 건너 모두 봉천으로 철수하였다. 철수에 3시간이나 걸린 이유는 도중에 열차의 탈선 사고가 일어나서 시간이 지체되었기 때문이었다.
가나야 참모총장은 11월 28일, 봉천에 있는 참모차장 니노미야에게 전보를 보내 관동군 사령관 혼조, 관동군 참모장 미야케 미쓰하루가 중앙에 통제에 복종할 성의가 없음을 질책하고 "그 맹성을 촉구하고 칙명을 받드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위임명령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위반하였다는 비방을 바는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라."고 문책하였다. 이어 11월 29일, 톈진에 파견되어 있던 도이하라 겐지가 봉천으로 소환되었다.
3.3. 미국의 반발
한편 국민정부에서는 전임 외교부장 스자오지가 주미 중국공사로 전임함에 따라 11월 23일, 구웨이쥔이 외교부장 대리로 취임했다. 다음날인 24일, 구웨이쥔은 난징에서 프랑스, 미국, 영국의 공사를 소환하여 일본군의 진저우 공격이 임박한 것 같다면서 진저우의 중국군을 산해관 이내로 철수시킬테니 일본이 경찰을 포함한 중국의 행정권을 보장하고 또한 군대를 진입시키지 않겠다고 미영불에게 보증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11월 24일, 시데하라는 미국 대사 포브스에게 와카쓰키 레이지로 수상, 미나미 지로 육상, 가나야 한조 육참총장 등이 모두 진저우 진격을 반대하고 있으며 치치하얼에 잔류한 일본군도 사상자를 살피기 위한 것이지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해명한 바가 있었다. 이에 미국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은 긍정적으로 반응하였다. 스팀슨은 주중 미국공사 넬슨 존슨에게 일본이 진저우로 병력을 진입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중국군을 진저우에서 철수시킬 것을 권고하라고 지시하였다. 11월 26일, 넬슨 존슨은 구웨이쥔 외교부장 대리에게 스팀슨의 메시지를 전달했으나 구웨이쥔은 장제스가 중앙군을 거느리고 북상하고 있고, 학생들의 실지 회복 여론이 강하게 어렵다는 대답을 하였다.한편 파리에 나가있던 스자오지도 11월 26일, 일본군이 진저우로 병력을 이동시키고 있음을 이사회에게 알리고 진저우에 중립지대를 설치하고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파견군이 진저우를 점령하는 방안을 국제연맹 사무총장 드루먼드에게 제시했다. 이에 11월 26일, 주일 프랑스 대사 다미앵 드 마르텔이 시데하라 기주로 외상을 방문하여 구웨이쥔의 진저우 중립화 제안을 전달하였다. 이에 시데하라는 11월 27일, 중국이 모든 군대를 진저우와 그 부근에서 산해관 서쪽으로 철수하고 산해관에 행정조직만을 존치한다면 중국에서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이 위협당하는 돌발상황만 없다면 진저우에 일본군이 진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허나 이에 대한 일본 측의 보장은 전무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천진사변을 빌미로 관동군이 진저우로 출병하자 헨리 스팀슨은 경악하여 일본을 크게 비판하였다. 11월 27일 아침에 일본에 항의하는 전보를 작성한 스팀슨은 오후에 기자회견을 열고 시데하라 외상, 미나미 육상, 가나야 참모총장이 모두 진저우로 진입하지 않겠다고 보증했는데 일본군의 행동을 믿을 수 없다고 밝혔다. 저녁에 허버트 후버 대통령을 만난 스팀슨은 일본군이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며 대일 제재조치에 대해 논의했다. 스팀슨은 일본에 대한 제재는 단기간에 일본을 굴복시킬 수 있는 강한 것이어야 하며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여론의 제재에는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보고하였다. 이날 밤, 관동군이 도로 철수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스팀슨은 조금 안심하였다.
11월 28일, 주일 미국대사 포브스가 시데하라 외상을 방문하였다. 시데하라는 진저우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는 변화하지 않았으며 관동군의 출병은 비적 토벌을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스팀슨의 담화 내용 때문에 자신이 군부의 공격을 받아 굉장히 곤경에 처해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일본의 외무성 정보부장 겸 대변인 시라토리 토시오(白鳥敏夫)는 11월 28일 반박 성명을 발표하여 스팀슨이 근거없는 사실로 일본 정부의 조치를 왜곡했다고 비판했다.시라토리는 "책임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 이러한 상궤를 벗어난 행동으로 나간 것은 외교상 쉽지 않은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언성을 높이는 한편 만주사변은 정의를 위한 것이며 이에 대한 유감은 표명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스팀슨이 일본 군부를 비판한 것에 대해서도 사실에 맞지 않다고 반박했다. 또한 일본 군부의 미나미 지로 육상, 스기야마 하지메 전 육군차관 등은 일제히 반발하여 스팀슨이 육군의 통수권을 간섭하려 든다고 아우성을 쳐댔다. 역시 28일에 시데하라는 스팀슨 담화를 믿을 수 없다고 표명하는 한편 29일에 포브스 대사를 만나 시라토리의 담화는 자신의 견해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3.4. 진저우 중립화 교섭
한편 관동군은 중국군의 철수 뿐만 아니라 중국 행정력의 철수도 요구했다. 관동군은 "만약 이 정권을 난징정부 또는 구 동북정권 혹은 신평진정권에게 인정하도록 하는 견해가 될때는 역사적 지리적 관계에서 명확하게 된 봉천성의 일부를 분할하는 형세로 길들여지게 되어 국군이 기도하는 최소한의 만몽정권의 수립에 조차 장래를 위하여 많은 화근을 잉태할 우려가 심하다."라고 표명하였다. 즉 닥치고 만주국에 진저우를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중리비역도 산해관 이서 란하(灤河)에 이르는 모든 지역을 중립화하며 평진에서 화란이 일어나면 일본군의 예외적인 개입을 허용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어야 한다면서 중일 직접교섭을 주문하였다.12월 4일, 참모본부는 진저우를 새롭게 수립될 봉천정권에 귀속시키는 것은 9국조약의 위반으로 국민정부에게 외교적 명분을 줄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그래서 봉천정권이라는 표현 대신에 막연하게 <봉천성의 지방행정기관>의 명칭만을 사용하고 그 귀속에 대해서는 공공연하게 논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12월 5일, 육군과 외무성은 이러한 방침에 기초하여 <교섭조건>에 합의했다. 11월 29일, 시게미츠 마모루 공사가 상하이에서 난징으로 이동하여 12월 2일 외교부장 대리 구웨이쥔과 회담하였다. 시게미츠는 일본이 구웨이쥔의 제안을 신용하기 때문에 진저우로 향하던 관동군 부대를 모두 철수시켰다고 하면서 이것은 대단한 성의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중국 측도 성의를 보여 진저우의 병력을 철수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12월 3일에도 회담이 이어졌는데 시게미츠는 만약 관동군이 물러났는데도 중국군이 물러나지 않는다면 일본 군부는 중국에 속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경고하였다. 허나 구웨이쥔의 초기 제안은 무턱대고 일본군이 물러나면 중국군도 물러난다는 얘기가 아니라 영불미의 보증이 가능한 경우에만 정식 제안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12월 3일, 시데하라는 베이핑의 야노 마코토(矢野眞) 참사관에게 장쉐량과도 별도의 교섭을 하라고 지시했다. 12월 4일, 야노는 장쉐량에게 진저우와 그 서쪽의 모든 군대를 산해관 이서로 철수시키고 해당 지역의 행정을 해당 지역 현정부가 집무하며 중국측이 이를 실행한다면 일본군은 특별한 일이 없을 경우에는 진입하지 않겠다고 제시했다. 허나 장쉐량은 "지금 일방적으로 귀방이 이익만을 얻고 자신은 동삼성 전부를 상실하는 것으로 되면, 귀방으로부터는 적대시되고, 국민으로부터는 국적 취급을 받자 자신의 입장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냐?"라고 반발했다. 또한 학생들도 진저우 중립화 조치에 반대하면서 대일 선전포고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11월 하순에만 상하이, 쑤저우, 항저우, 무릉, 진강 등지에서 1만명의 학생이 난징으로 상경하였으며 톈진, 칭따오, 우한에서도 수백명이, 베이핑에서도 1천명이 상경하고 다시 1천명이 기차를 점거하고 난징으로 몰려들었다.
한편 국제연맹도 중립지대의 서쪽 끝을 산해관으로 하는 것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동쪽 끝을 어디로 둘지를 일본 측에 문의하였다. 12월 3일, 영국 대표 세실이 중국 대표 스자오지에게 철병을 권고하는 한편 일본 대표 마쓰다이라에게 동쪽 경계를 어디에 둘 지를 물었다. 이에 마쓰다이라는 당사국 간의 교섭에 위임하여야 한다며 대답을 회피하려 했으나 세실은 강력하게 구체적인 경계를 요구했다. 12월 6일, 시데하라의 훈령이 내려옴에 따라 마쓰다이라는 동쪽 경계를 소릉하(小凌河)라고 대답했다. 12월 7일, 요시자와 켄키치가 브리앙 의장에게 소릉하 경계를 비밀리에 전달했다. 허나 국제연맹은 진저우의 고작 삼분의 일만을 보장하는 소릉하 경계에 대해 실망하면서 상당히 동쪽으로 이동시킬 것을 요구했다. 드루먼드는 대릉하라는 구체적인 경계선을 제시했다. 그리고 일본군이 만철 연선에만 주둔하고 마적 토벌을 제외한 어떤 경우에도 진저우에 출병하지 말 것을 보장해주면 자신들이 중국의 철병을 독촉하겠다고 제안했다.
3.5. 공격의 재개
국제사회에서 좋은 말로 달래고 있었음에도 일본은 중국이 즉시 철군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발악하기 시작했다. 12월 7일, 주미 일본대사 데부치 가쓰지(出淵勝次)는 스팀슨을 방문하여 중국이 약속을 어겼으니 시데하라 외상의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으며 진저우로 진격할 수 있다고 타진하였다. 이에 스팀슨은 만약 일본이 진저우를 공격한다면 미국은 만주사변의 목적이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자위적 조치가 아니라 장쉐량 군대를 궤멸시키는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판단할 것이며 이는 켈로그-브리앙 조약과 9국조약을 위반하는 것임을 강력히 경고하였다. 또한 스팀슨은 시데하라가 입장이 난처해졌다지만 자국의 영토로부터 자국의 군대를 철수시켜야 하는 중국 정부의 고뇌는 시데하라의 고뇌보다 더 큰 것이라고 지적했다. 데부치 대사는 스팀슨에게 미국으로 하여금 중국에게 철병을 권고해달라고 청했으나 스팀슨은 곤란하다고만 대답하였다. 또한 스팀슨은 일본이 제시한 소릉하 경계선은 일본에게 지나치게 광활한 군사작전지역을 보장하는 것이라면서 이는 무리라고 대답했다. 난징의 넬슨 존슨 공사도 미영불 3국이 국제연맹 이사회의 의뢰로 중국군의 철수를 권고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며 중국의 여론이 격앙된 상태에서 영불미가 중국군의 철수만을 요구한다면 국민정부의 여론이 일본이 아니라 영불미를 겨냥하게 될 것임을 경고했다. 이쯤되면 미국 정부 뿐만 아니라 여론도 악화되어 11월 24일, 미국의 40여개 평화단체 대표자들이 후버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하여 만주사변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확실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고 국제연맹에 출석한 주영 미국대사 도즈를 이사회에 출석시킬 것, 일본에 대한 경제제재를 실시할 것을 청하였다.허나 국제여론이 뭐라고 떠들건 간에 자기네 기분 상한 것만 중요한 일본 군부는 입장을 바꾸어 관동군의 진저우 공격을 용인하였다. 12월 5일, 육군 중앙은 장쉐량에게 철군을 청하고 만약 듣지 않는다면 1개 사단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축출한다는 방침을 결정하고 작전 입안에 들어갔다. 12월 7일, 미나미 지로 육상은 외무상과 의논 후, 혼조 시게루 사령관에게 "요서지방은 비적이나 마적과 장쉐량의 사이가 매우 가깝기 때문에 일본군이 비적토벌을 실시할 시에는 장쉐량군과 충돌할 우려가 강하다. 종종 중국 측이 진저우, 산해관의 중립지역안을 제안하였기 때문에, 일본은 이것에 동의하고 이서 비적토벌을중지하였지만 중국 측의 성의는 일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간 요하 동서 일대의 마적활동이 날로 치열하게 되어 제국군은 군자체의 안전과 재만 제국국민의 안전 및 만주의 전반적 치안유지를 위하여 다대한 희생을 각오하고 어절 수 없이 일어나 이렇게 토벌을 실시하기에 이른 즉, 제국군의 이번 행동은 첫째로 지나측의 성의가 없음에 기초하여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소탕의 진전에 따라 만일 비적과 관련이 있는 지나군과의 충돌을 야기하고 혹은 일지 양국이 서로 접하게 될 때 통제되지 않은 지나군의 도발에 의하여 피아의 교전을 야기할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원래 제국이 좋아하지 않는 바이다. 하지만 진실로 어쩔 수 없는 것이다."고 지시했다. 참으로 뻔뻔하기 그지없는 정신승리였지만 이때 일본 군부의 마인드가 이러했다.
한편 학생들의 항일여론은 극에 달해서 일부 학생들은 국민정부 타도, 삼민주의 타도를 선언하면서 중국공산당을 추종하기도 하였고 이에 12월 5일, 국민정부는 학생들이 난징에 와서 청원하는 것을 금지하고 12월 8일 학생들을 상대로 다음과 같은 통고를 냈다.
청년 학생 중에는 적의 중상적인 역선전에 넘어가서 본분을 잊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이 국난의 시기를 맞아, 질서를 파괴하고 교통을 방해하는 청년은 참다운 구국 청년이 아니다. (...) 국가의 법령에 위배되고, 매국반동자와 함께 동맹휴학을 하는 하려는 것은 나라의 죄인이다. (...) 애국 청년들이여, 규율을 엄수하고 동시에 외모(外侮)를 막아서, 구국의 목적을 달성하자! |
하지만 학생 시위는 조금도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12월 11일 오후, 난징에서 베이징사범대학, 중국대학 등 전국각지에서 몰려온 대학생들이 국민정부 타도를 외치면서 데모를 하다가 2명이 체포되었다. 이에 시위는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 요구로도 번졌고 상하이 시장 장췬에게 공안국장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12월 15일, 무려 7만명의 학생들이 몰려와 국민당 중앙당부와 외교부를 둘러싸고 시위를 벌였고 베이핑에서 온 학생 200명이 권총과 몽둥이로 무장하고 외교부로 난입해서 닥치는대로 기물을 때려부수고 저지하는 직원들을 구타했다. 이에 국민당 감찰위원 차이위안페이와 행정원 부원장 천밍수가 학생들을 설득하기 위해 직접 나섰으나 학생들은 차이위안페이와 천밍수를 모두 구타하여 부상을 입혔다. 학생들이 두 사람을 조리돌리기 위해 건물 밖으로 끌고 나가려 하자 군경이 출동하여 폭행범들을 체포함으로 상황은 진정되었다. 사태가 극도로 악화됨에 따라 12월 15일, 장제스가 국민정부 주석 겸 행정원장에서 사퇴하였고 영월합작이 이루어졌다.
이후로도 반일 학생시위는 진정되지 않아 12월 17일, 다시 1천명의 학생들이 곤봉과 철봉을 들고 중앙당부를 포위하고 공산당을 선전하는 전단을 뿌리면서 중앙당부에 난입을 시도했다. 또한 국민당 기관지 중앙일보의 인쇄공장을 습격하여 불을 질렀다. 12월 18일, 국민정부는 <월궤행동 단속령>을 내림으로 학생들의 과격행동에 대한 강경대응에 나섰고 이로서 항일시위는 진정되었다.
3.6. 진저우 함락
한편 12월 13일, 와카쓰키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그나마 군부를 제어하려 했던 시데하라 외교는 종말을 고했다. 새로 취임한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은 신임육상 아라키 사다오에게 조각과 함께 군부에 적극협력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걸리적거리는 내각도 없어지고 껄끄러운 상대인 장제스도 사라지자 관동군은 본격적인 진저우 공격에 착수하였다. 12월 21일, 새로이 출범한 쑨커 내각은 베이핑 수정공서와 제2군에 방침을 내려 만약 진저우를 지킬 수 없다면 천안, 영평, 난하, 창려를 비롯한 관내의 요충지로 철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아편에 중독되어 있던 장쉐량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12월 22일, 전보를 보내서 장제스에게 대책을 청하였지만 이미 공직에서 물러난 장제스가 뭘 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관동군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대한 보고가 들어왔다. 관동주의 피복공장에서 무려 3만벌의 동계용 위장복을 납품하라는 지시가 내려지는 전장대 인근 토비 200명이 관동군에 매수되었다는 첩보도 들어왔고 영구의 관동군이 쇄빙선 4척을 동원해 요하의 결빙을 방지하는 한편, 각종 중화기를 요하 이서로 운반하였고 100대 이상의 민간차량을 징발하여 탄약을 운송시키고 있었다.12월 22일 아침, 야포 8문으로 무장한 관동군 500명이 전장대 동쪽에서 중국군과 교전을 벌였고 23일 오전 10시, 관동군 60명과 장갑차가 진격하다가 중국군 장갑열차 중산호의 반격으로 격퇴되었다. 역시 23일, 관동군이 신민에서 열차를 정지하고 승객들과 함께 열차를 압류하였다. 24일, 전장대의 장갑열차에 관동군이 폭격과 포격을 퍼부었다. 12월 24일, 관동군은 본격적으로 진저우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다. 12월 25일, 국민정부는 힘이 닿는대로 적극적으로 저항하라고 장쉐량에게 지시했으나 장쉐량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진저우는 힘을 다해 고수하고 싶다. 그러나 일본군은 전국의 힘을 경주하고 있는데 우리에게는 한 지방의 군대밖에 없다. 일본군의 실력은 충실하고 무기는 정량하며 육군과 공군이 일체가 되어 대거 침범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복브이 불충분하여 무기와 탄약이 모자라고 방공과 방한의 준비도 없다. 실력을 비교하면 중과부적이 역력하다. (...) 이런 상황에서 일단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지탱해 내기 힘들다. |
12월 27일, 일본 정부는 장쉐량이 마적을 선동하여 요하 이서의 치안을 어지럽혔으니 자위상 불순분자를 토벌하기 위해서 부득이하게 출병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2월 28일 저녁, 중국군 장갑열차가 전가진에서 일본군의 포격과 기병대의 습격을 받고 반산으로 퇴각했다. 29일, 일본군은 방산을 공습하고 3천명의 병력을 증강시켜 진격을 재개했다. 이날 구방자가 2차례의 공습을 받았다. 12월 30일, 국민정부는 장쉐량에게 다시 저항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각 관리 및 군대는 똑같이 국가를 지키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밖으로는 우방의 경시를 받게 되고, 안으로는 국민의 비난을 초래하여 외교는 점점 곤경에 빠질 것이다. 그리되면 무슨 말로 변명을 하겠는가. |
이날 오전 8시, 북녕철로의 백기보 서쪽에서 일본 비행기 4대와 장갑차, 2천명의 기병대가 출현하여 백기보의 공안대와 격전을 벌였고 요중현성도 공격을 받았다. 오후 1시, 북녕철로 연선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은 모두 북진으로 철수하였고 일본군은 대호산까지 함락하였다. 오전 10시, 호가와보에 주둔한 중국군 19여단도 전차와 장갑차 10여대를 앞세운 일본군 보병과 포병 3개 연대의 공격을 받았다. 19여단은 맹렬하게 저항했으나 화력상 열세를 어찌하지 못하고 오후 7시에 구방자로 철수했다. 12월 31일, 국민정부는 진저우 사수를 다시 한번 지령했으나 전황은 돌이킬 길이 없어 구방자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1932년 1월 1일, 요녕성 정부는 진저우 포기를 선언하고 하북성 란저우로 이전했고 진저우에 주둔한 중국군도 관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중국군을 바짝 추격한 일본군은 1월 2일 오전 2시, 진저우 입성을 시작하였다. 한편 난징에서는 1월 1일, 국민정부 주석 린썬, 행정원장 쑨커 등이 정식으로 취임식을 가졌고 1월 2일 중앙정치회의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했다. 진저우의 급박한 상황에 당황한 쑨커는 고향인 절강성 봉화현에 은거하고 있는 장제스에게 난징으로 돌아와줄 것을 청하는 전보를 보냈다.
신정부는 탄생되었으나 선생과 전당, 계신 등 두 형은 난징에 있지 않고, 당과 국가는 중심을 잃고 있습니다. 꼭 난징으로 와주십시오. 중추에 주가 있으면 인심은 스스로 안정되게 마련입니다. |
하지만 이미 대세는 완전히 기울어진 상태라 관동군은 1월 3일 진저우를 완전히 함락시켰다.
4. 결과
진저우가 함락됨에 따라 봉천군벌의 만주세력권은 완전히 소멸하고 하북성으로 쪼그라들게 된다. 이미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던 장쉐량은 계속 무능한 모습을 보이다가 열하사변을 맞이하여 하북성의 기반마저 상실하고 전국에서 빗발치는 비난을 이기지못하고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여 유럽 외유를 떠나게된다. 그리고 돌아와서 서안 사건을...미국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은 일본의 더 이상의 전진을 지지하지 않다는 뜻을 분명히 하는 스팀슨 선언을 발표하였다.
5. 참고문헌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일외교사연구, 구정승미, 선인.
- 중일문제의 진상, 중화민국 국민정부 외교부편, 동북아역사재단.
- 만주사변기의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리턴 보고서, 리턴 조사단, 탐구당.
- 세계외교사, 김용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6. 관련문서
- 제1차 초공작전(1930.12.19~1931.1.3)
- 탕산 사건(1931.2.28)
- 제2차 초공작전(1931.4.1~1931.5.31)
- 1차 양광사변(1931.5.27~1932.1.1)
- 나카무라 사건(1931.6.27)
- 만보산 사건(1931.7.1)
- 제3차 초공작전(1931.7.1~1931.9.20)
- 류탸오후 사건(1931.9.18)
- 만주사변(1931.9.18~1932.3.1)
- 눈강 전투(1931.11.4)
- 천진사변(1931.11.6, 11.26)
- 영월합작(1932.1.1)
- 3차 장왕합작(1932.1)
- 마옥산 사건(1932.1.18)
- 제1차 상하이 사변(1932.1.28~1932.5.5)
- 송호정전협정(1932.5.5)
- 이시모토 사건(1932.7.17)
- 제4차 초공작전(1932~1933)
- 열하사변(1933)
- 당고정전협정(1933.5.31)
- 폐량개원(1933.4.5)
- 제5차 초공작전(1933.10.16~1934.11.10)
- 복건사변(1933.11.20)
- 대장정(1934~1935)
- 하북 사건(1935.5.2~1935.5.24)
- 장북 사건(1935.6.5)
- 하매 협정(1935.6.10)
- 돈목방교령(1935.6.10)
- 진토 협정(1935.6.27)
- 타다 성명(1935.9.24)
- 히로타 3원칙(1935.10.4)
- 왕징웨이 저격 사건(1935.11.1)
- 법폐개혁(1935.11.4)
- 중미은협정(1935.11.13)
- 기동사변(1935.11.25)
- 12.9 운동(1935.12.9)
- 동정항일(1936)
- 2차 양광사변(1936.6.1)
- 수동사변(1936.11.14)
- 7군자 체포 사건(1936.11.23)
- 서안 사건(1936.12.12)
- 루거우차오 사건(1937.7.7)